013▲ 彡上夕小尸 ■ 삼상석소시 13ㅡ 털 위의 세계에도 밤이 작게 있고 주검도 있다. ( 터럭 삼 / 성씨 섬 )( 윗 상 )( 저녁 석 / 사람 이름 역, 한 움큼 샤 )( 작을 소 )( 주검 시 )
014▲ 卂也广兀幺 ■ 신야엄올요 14ㅡ 빨리 날라가니 집들이 우뚝하지만 작게 보인다. ( 빨리 날 신 )( 잇기 야/ 어조사 야, 대야 이/이것 이 )( 집 엄 / 넓을 광, 암자 암 )( 우뚝할 올 )( 작을 요 )
재춘법한자
임제(臨濟) 뒤 24세(世)에 적손(嫡孫)으로 부휴(浮休)가 있었는데, 부휴는 그의 호이고, 법명(法名)은 선수(善修)이다. 속성(俗性)은 김씨(金氏)로서, 옛 대방(帶方)191) 지역의 오수(獒樹)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 적산(積山)은 선대에 신라(新羅)의 대성(大姓)이었는데, 신라가 망하자 집안이 몰락하여 서민(庶民)이 되었다. 처음에 그의 어머니 이씨(李氏)가 아기를 갖지 못하였기에 답답한 마음에 이렇게 맹세를 하였다. “만일 내가 아들을 낳으면 반드시 출가(出家)시키겠습니다.” 그리고 길가에 있는 오래된 돌멩이에 대고 쉬지 않고 기도하면서 열흘이 차도록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에 어머니가 눈을 감고 있는데 어떤 신승(神僧)이 나타나 둥근 구슬 하나를 건네주었다. 어머니는 그것을 삼킨 뒤에 아기를 가졌고, 계묘년 2월 무자에 선사(禪師)를 낳았다. 대사는 어릴 때에도 그 어머니가 고기를 먹이면 싫다고 먹지 않으려 하였다. 어머니가 억지로 달래서 먹이더라도 겨우 말린 생선의 쪼가리나 먹을까 맛난 고기나 기름진 것은 맛도 보지 않았다. 그렇게 17세가 되었을 때에 그는 부모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뜬구름 같은 이 인생이 못내 고달픕니다. 저는 출가하겠습니다.” 그리고 바로 두류산(頭流山)으로 들어가 신명 장로(信明長老)에게서 머리를 깎고, 다시 부용(芙蓉) 대사를 뵙고는 대사의 경계[笆籬邊]192)를 모두 터득하였다. 부휴 스님의 생김새를 보면, 배는 희고 눈썹은 길며, 키는 크고 볼은 두툼하였는데, 다만 왼손을 잘 쓰지 못했었다. 법을 얻은 뒤에는 상국 노수신(相國盧守愼)의 집에서 그의 장서(藏書)를 빌려 공부하였으니, 7년 동안에 읽지 않은 책이 없었다. 그리고 글씨도 또한 굳세고 아름다워 종왕(鍾王)193)의 법을 본받았으니, 송운 유정(松雲惟政) 스님과 대적할 만큼 뛰어나 당시의 사람들이 이난(二難)이라고 불렀다. 일찍이 그 회하(會下)의 어느 납자(衲子)가 대사의 글씨 몇 자를 받아들고 가는 길에 왕도(王都)를 지나다가 글씨를 잘 쓰는 중국 사람[漢人] 한 사람을 만난 일이 있었다. 그 중국 사람에게 대사의 글씨를 내보였더니, 그는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이렇게 말하였다. “글씨의 기운이 씩씩한 것이 옛사람들도 이렇게 쓰기는 어려웠겠다. 그러나 그 점과 획을 보아하니, 이것은 반드시 손을 다친 도인이 쓴 것이다.” 선조(宣朝) 임진년에 왜구(倭寇)가 우리나라를 침범하여 산야(山野)를 크게 짓밟았다. 그때 대사는 덕유산(德裕山)에 살면서 바위굴에서 피난하여 있었는데, 해가 저물자 도적이 다 지나간 줄 알고 시냇가의 길을 따라 암자로 돌아왔다. 그러자 왜적 수십 명이 숲 속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대사는 합장하고 서 있었다. 왜적은 곧 칼을 휘두를 기세를 취했으나 대사는 태연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왜적들은 기이하게 여겨 모두 늘어서서 절하고 흩어졌다. 난리가 평정된 뒤에 대사는 가야산으로 갔다. 마침 천장(天將)194) 이대인 종성(李大人宗城)이 중국 황제(皇帝)의 명령을 받고 관백(關白)195)을 봉(封)하려고 오던 길에 해인사에 들렀던 일이 있었다. 이대인은 대사를 한 번 만나보고는 문득 돌아갈 생각을 않고 절에 머물면서 며칠 동안 대사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태도가 아주 정성스러웠다. 헤어질 때가 되자 이대인은 시 한 편을 지어 주면서 천리의 면목(面目)을 기약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사는 다시 구천동(九千洞)으로 옮겨 숨어 살았다. 어느 날은 눈을 감고 『원각경(圓覺經)』을 외우는데, 독송이 미처 다 끝나기 전에 무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대사가 눈을 떠 보자 큰 구렁이 한 마리가 섬돌 아래 누워 있는 것이었다. 대사는 독송을 그치고 일어나 한 발로 그 구렁이의 꼬리를 밟았다. 구렁이는 머리를 치켜들고 꿈틀거리다가 달아났다. 대사가 쫓아갔으나 이내 보이지 않았다. 그날 밤 꿈에 어떤 노인이 대사에게 절을 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님의 설법을 힘입어 나는 이미 고통을 여의었습니다.” 대사의 신이(神異)함이 대개 이와 같았다. 광해군(光海君) 때에 대사는 두류산에 살고 있었는데, 때마침 어떤 미친 중의 모함을 입어 옥에 갇히고 말았다. 사건을 다스리던 관리는 대사의 기우 (氣宇)가 당당하고 말이 유창한 것을 보고 광해군에게 아뢰었다. 광해군은 대사가 억울하게 무고를 당한 것을 알아차리고, 이튿날 아침에 안으로 불러들였다. 광해군이 대사에게 도의 요점을 물어보고는 매우 기뻐하며 자란방포(紫襴方袍) 하나와 벽릉장삼(碧綾長衫) 하나, 그리고 녹기중유(綠綺重襦) 한 벌과 금강수주(金剛數珠) 한 개, 또 그 밖의 갖가지 보배 등 후한 예물을 하사하였으니, 하사한 물건들을 다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그리고 또 봉인사(奉印寺)에 재(齋)를 베풀고 스승을 증사(證師)로 보낼 때에는 궁중의 천리마(千里馬) 한 필(匹)을 내어 대사를 태우고 마부를 앞에 붙여 인도하게 하였다. 도성 안의 사람들이 다들 그를 바라보고 달려나와 절을 하기 위해서 뒤쳐지지 않으려고 하였다. 재를 마치고 돌아올 때에는 승려와 속인들이 앞을 다투어 번갈아 가마를 메고 돌아왔다. 대사는 평생의 그 높은 덕이 사방에 멀리 퍼져 재물을 바치는 사람의 수레가 뒤를 따랐으나 모두 흩어 버리고 한 물건도 가지지 않았다. 그 도량(度量)은 침착하고 굳세며 깊고 또 넓어 잴 수가 없었다. 인연 있는 많은 무리들이 모두 흠모해 모였으므로 대중이 7백 명이나 되었다. 만력(萬曆) 갑인, 대사의 나이 72세 되던 때에 조계산 송광사에서 방장산[方丈] 칠불암(七佛菴)으로 가서 수족(手足)들을 모두 모았다. 그리고 이듬해 가을 7월에 사소한 병을 앓게 되자, 그 수제자 벽암(碧嵓)을 불러 법을 부탁하였다. “내 뜻은 그대에게 있네. 그대는 부디 힘쓰게.” 그리고 11월 초하루, 막 해가 질 때쯤에 목욕을 마치고는 시자(侍者)를 불러 종이와 붓을 가져오라 하여 게송 한 구절을 썼다.
73년 동안 허깨비 같은 바다[幻海]에서 놀았더니 이제는 껍질을 벗고 근원으로 돌아가려네. 텅 비어서 원래 아무 물건도 없으니 어디에 또 깨달음[菩提]과 생사의 뿌리가 있을까.
게송을 마치고 담담히 세상을 떠나니, 세상 나이는 73세였고, 승랍은 57세였다. 그의 문인(門人)들이 다비하고 영골(靈骨)을 거두어 네 곳에 부도(浮屠)를 세웠으니, 해인사와 송광사와 칠불암과 백장사(百丈寺)이다. 그 후 5년 뒤에 광해군이 홍각등계(弘覺登階)라는 호를 추증하였다.
출전: [승가학회CD, 동국대불교학과 자료집DVD] 장경각 1경전- 대각등계집(大覺登階集) 전 4권 조선 처능(處能) 한국불교전서 08책 ≪H0165≫ (abc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