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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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계사 내력
[....이하 줄임...]
절은 양반들의 놀이터가 되어서 유생들이 나타나기만 하면 온갖 수발을 다 들어야 했고
절 근처에서 놀다간 유생들은 바위에 그 이름을 새겨놓기까지 했다. 지금도 사찰 안팎 바위에 새겨진 이름들이 남아있는데
이것이 바로 유생들이 남겨둔 흔적들이기 때문이다.
스님들이 이런 모멸과 수탈을 벗어나는 방법은 태실이나 왕릉의 수호사찰이 되어 왕실이나 종친의 보호를 받는 길 뿐이었다.
숙종 때 파계사의 스님인 용파대사는 어느 날 머리를 기르고 서울로 올라가 조정에 탄원을 올리려 하지만
도성에 들어가지 못해 남대문 밖 밥집에서 3년을 허송하게 된다.
다시 파계사로 내려오려는 전날 밤, 숙종은 남대문 근처에서 청룡이 승천하는 꿈을 꾸고는
내관을 시켜서 남대문 근처에서 길을 떠나려는 용파스님을 데리고 오게 한다.
용파스님이 임금에게 절의 부역과 공출이 심함을 호소하자 청을 들어주는 대신 왕자의 잉태를 부탁한다.
용파대사는 삼각산 금선사의 농상스님과 같이 기도를 하였으나 효험이 없자
농상스님이 스스로 입적하여 태자로 태어나기로 한다.
농상스님은 어느 날 밤 숙빈 최씨에게 현몽한 뒤 태자로 태어나니 이 이가 바로 영조대왕이며 때는 1694년이었다.
다음 해에 용파스님이 파계사로 돌아올 때 숙종은 ‘현응’이라는 호를 내리고 궁중의 돈을 내려 여러 건물을 짓도록 한다.
숙종 22년(1696년)에는 왕이 스스로 지은 축책을 내려주어 왕실의 원당으로 삼았으며 1704년에는 11살이 된 영조가 ‘자응전’ 편액을 써서 하사하였다. 이로부터 파계사는 관에서 스님들을 동원하거나 잡역을 시키지 못하게 되었으며 이는 조선시대 말까지 계속되었다.
이런 사실들은 1979년 보물 제992호로 지정된 목조관세음보살상을 개금할 때 복장에서 영조대왕의 옷이 나왔고
또 숙종이 하사한 병풍 2점과 구슬 2개도 남아 있어 더욱 확실한 정구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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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백과] 대구 파계사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한국불교 목공예의 정수 수미단), 2006., 한국콘텐츠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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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계'(把溪)는 '물줄기를 잡는다'란 의미로, 본래 절 주위에 아홉 갈래나 되는 물이 흘렀는데,
땅의 기운이 흩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절 아래 연못을 파고 물줄기를 한데 모았다는 데서 이름이 유래하였다고 한다.
조선조에 정리된 《파계사사적기》에는 애장왕 5년(804년)에 심지왕사에 의해 처음 창건되었다고 한다.
현존하는 파계사는 17세기 조선 숙종 때에 이르러 크게 중건된 것으로 현존하는 전각 대부분이 이 시기에 중수되었다.
영조와의 인연[편집]
파계사는 조선 왕실과 연이 깊은 절로 전하는데, 그것은 파계사의 중창자였던 현응(玄應)이 숙종의 부탁을 받고 왕자 생산을 기원하는 백일기도를 올려 그것이 효험을 얻었다는 전설에서 기원한다.
이 백일기도로 태어난 것이 숙빈 최씨 소생의 연잉군, 즉 훗날의 영조(英祖)인데,
실은 전생의 농산 화상으로서 전세의 과보를 받아 현세에 왕실의 자손 즉 국왕 숙종의 아들로 태어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숙종은 연잉군 탄생과 관련하여 현응의 공을 높이 사고, 특별히 파계사 둘레 40리 안팎의 토지에서 거두는 세금을 모두 파계사에서 맡으라는 명을 내렸지만, 현응은 이를 거절하고 대신 파계사에 선왕의 위패를 모시게 해달라는 청원을 올렸다.
선조부터 숙종과 덕종, 영조에 이르는 네 명의 국왕의 신위가 파계사에 모셔짐으로서 숭유억불의 기치가 드높던 조선 후기에도 유생들은 함부로 파계사를 건드리지 못했다고 한다. 실제 파계사 앞에는 '대소인개하마(大小人皆下馬, 신분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무조건 말에서 내려라)'라고 새겨진 비석이 남아 있으며,
1979년 6월, 파계사 원통전(금당) 관음보살상 개금불사 당시 불상 안에서
영조가 실제 착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도포가 확인되었다.
이것은 파계사에 전해지는 영조 관련 설화가 신빙성이 있는 것임을 시사하는 한 증거로 여겨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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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파계사 원통전 Flag of South Korea.svg This media shows the cultural heritage monument in South Korea with the number: T-1850 Date 8 February 2016, 16:33:09 Source Own work Author 최옥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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