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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1-12-13-금강반야바라밀경(구마라집역)_001 본문

과거조각글/불기2561(2017)

불기2561-12-13-금강반야바라밀경(구마라집역)_001

진리와 가치를 고루고루 2017. 12. 13. 16:46



®

『금강반야바라밀경』
K0013 
T0235

금강반야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 [pt op tr] 금강반야바라밀경_K0013_T0235 핵심요약



♣0013-001♧
『금강반야바라밀경』

금강반야








K0013_T0235 



○ [pt op tr] sfed--금강반야바라밀경(구마라집역)_K0013_T0235 핵심요약




■■

◆vzzt1766

◈Lab value 불기2561/12/13/수/16:47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 [pt op tr] 2017_1003_101131_Wat_Trimitre(The_Pure_Gold_Buddha_Temple)-18_BW25




○ [pt op tr]  mus0fl--Johnny Hallyday - Avant.lrc

♥ 잡담 ♥상을 갖지 않고 상을 대하는 방안 

한 2, 3 일전 유식론을 살필 때부터 상에 관한 
문제를 살피려고 하는데 
요즘 디스크 폴더 정리작업에 몰두하다 보니 
정작 주제 제목만 걸어 놓고 
본격적인 논의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어제는 밀교 경전이 뽑혔는데 
밀교 경전은 주로 다라니와 의식관련 내용이 나오기에 
일반적으로 대할 때 조금 낯설게 느껴지는 경전들이라고 보게 된다. 

처음에 그런 밀교경전이 뽑혀 나와 
판본을 보니 다라니 관련 글자를 교정할 부분이 많아서 
시간이 많이 걸리리라 보고 이는 조금 미루고
또 다시 뽑으니 또 밀교부 경전이 뽑혀서 
그냥 살피기로 하고 살폈는데 
다행이 그 판본은 다라니 부분이 교정이 되어져 
사이트에 올려져 있어서 조금 편하게 살필 수 있었다. 

해당 경전은 소원성취를 하는 방안으로 다라니 념송과 
경전에 제시된 방식에 따라 행하는 것을 제시하는데 

이것은 이런 방편을 제공을 전혀 하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그러나 명확하게 그 방편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것도 아닌 
중간적인 입장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돈을 많이 벌고 싶다고 소원할 때 
돈을 그냥 주거나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방안을 자세히 소개해주던지 해야
이를 대하는 입장에서 시원하게 여길 것인데 
그러나 그런 것은 아니고 
그렇다고 그런 방안을 전혀 제시하지 않는 것은 또 아닌 가운데 
다라니 념송과 의식을 제시한 대로 잘 행하라고
그 방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대하는 입장에서는 
과연 이런 방안이 그런 소원을 성취할 수 있는 
적절한 방안이 될 것인가에 의구심을 갖게 되기 마련이라고 본다. 

그런데 이렇게 방편을 제시하는 그 사정에 대해서는 
이미 많이 반복해 제시한 바 있다. 


그것은 현실에서 각 중생이 집착하는 소원 성취와 관련된 
방편은 하나같이 선악무기의 성격을 갖기에 
그럴 도리 밖에 없고 
또 한편 어떤 한 방편을 성취하는 방안을 
자세히 보면 그 양이 대단히 방대하다는 것도 
또 하나의 사정으로 제시할 수 있다. 

라이터를 만들어 내는 방안 이렇게 주제를 잡고 살피면 
그 방안에 대한 기술적 내용을 다 나열하기로 한다면 
그 분량이 대단히 많게 되는 것인데 
사람이 희망하는 소원이 과연 라이터 하나에 그치겠는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소원의 성취방안을 찾을 때 
경전에서 그런 내용을 제시해주기를 바라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기술적으로도 곤란하지만, 
또 그런 내용을 직접 제시하지 못하는 핵심적인 사정은 
모든 방편이 갖는 선악무기의 성격때문이라고 이해해야 
적절할 것이다. 

이 문제를 
물을 하나 놓고 그 정체가 무엇이고 
그 가치가 어떻고 
그것이 무엇을 원인으로 나타나고 
무엇을 결과로 만들어내는가를 살필 때 
대단히 다양한 내용을 제시할 수 있음을 반복해 제시했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의 방편이 갖는 선악무기성과 
직결되는 내용이기도 하다. 

이 사정을 과거에도 많이 반복했는데 
간단히 압축해 제시하면 
물을 벌이 취하면 꿀을 만들고 
사람이 취하면 땀과 피와 소변을 만들고 
뱀이 취하면 독을 만든다는 내용이 
바로 이와 직접 관련되는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물 하나의 사례에서 보듯
모든 방편은 다 이런 성격을 갖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중생이 소원의 성취를 간절히 원할 때 
그것을 돕는 방안을 전혀 제시해주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직접 얻을 수 있는 방안을 낱낱이 나열하지 않고 
다라니나 삼매의 방안을 제시하는 사정도
바로 그와 같은 사정때문임을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어떻게 보면 밀교부 경전들에서 제시되는 내용은 
마치 헤리포터와 같은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사람을 갑자기 공중에 띄우는 주문을 배우는 일처럼 
조금은 황당하게 여겨질 수 있다고 보지만, 
그러나 그런 방식으로 제시할 도리 밖에는 없다는
사정도 함께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런 내용은 어제 살핀 페이지에 적어야 할 것 같은데 
실시간으로 글을 적는 입장이라 
오늘, 불교신자들이 대단히 친근하게 여기는 경전이라고 할 수 있는 
금강반야바라밀경이 뽑힌 페이지에
적게 된다. 

디스크 폴더 체계를 살피는데 
시간을 대단히 많이 소모해서 
상을 갖고 현실에 임하는 문제의 논의가  
자꾸 늦어지고 있다고 본다. 




mus0fl--Lara Fabian - Urgent Désir.lrc

옥상기지에서 쉬면서 무궁화꽃이라는 말이 들리는 
노래를 들었다.
불어노래를 들을 때 마다 
한국어로 듣게 되어서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도 보지만,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기도 하다. 

요즘 가상화폐 비트코인 거래가 세간에 많이 회자되는데 
당국에서 거래를 규제한다고 발표를 했는데 
성인이 아니면 거래를 못하게 한다고 한다. 

이 말을 doctr 님이 듣고 
그러면 앞으로 아라한과 같은 성인들만 거래를 할 수 있다는 것인가 
이런 엉뚱한 발언을 하는데 
성인을 성인으로 알아듣는 현상이나, 
불어(佛語) 노래가사를 부처님말씀을 전하는 메세지로 듣는 현상이나 
엇비슷해보인다. 


물론 최근 규제가 아라한들만 거래를 하고 
doctr 님은 앞으로 거래를 못하게 한다는 방침을 발표한 내용은 아니겠지만, 
그러나 사실은 투자자 개개인이 그런 아라한과 같은 상태가 되어야
거래 중에 심한 급등락에 충격을 받고 
심장마비에 걸리지 않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할 수 있다. 

doctr 님이 갑자기 카드사에서 헝가리 부다페스트와 관련된 
거래를 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본인이 거래한 것이 맞는가라고 연락이 와서 
카드 정보가 유출되어 누군가
외국에서 카드결제를 한 것인가 보다 하고 
급하게 카드 내역을 살펴보니
정상 결제인 것 같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에 브라질 열대우림지역과 같이
외국에서 직구도 많이 하기에
어디에서 카드번호가 유출될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그런 가능성을 념두에 두고
상당히 당황하면서 내역 확인을 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보게 된다. 

거래액이 크던 작던 이런 문제가 발생하면 
상당히 신경을 기울이게 마련인데 
가상화폐에 투자한 다음 
어느날 가상화폐 거래 전면 중지 세계적 합의 도출 이런 기사가 
나오면 심정지될 경우가 대단히 많으리라고 보게 된다. 

몇백만원만 손해를 보아도 
사람들이 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 것이 현실인데 
doctr 님처럼 연구실 기금 2500 억원을 이런 거래에 
투자하면 
말 그대로 아라한과 같은 성인의 상태가 아니면 
매일매일 심장에 무리가 발생하기 쉽다고
보게 된다. 

자신의 일이 아닌 일로 보는 경우는
어떤 다리나 건물이 갑자기 붕괴되어 
몇천억원의 손해가 한 번에 발생해도 
대범하게 임하게 마련이지만,

자신의 현금이 몇십 몇백만원 정도라도
그렇게 갑자기 없어지게 되면 
심장에 무리가 발생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다. 


그것은 수행자도 사정이 비슷하다. 

이론적으로는 오늘 살핀 금강경에 제시된 내용처럼 
갑자기 별 이유도 없이 가리왕에게 체포되어 
손과 발을 끊기는 고문을 당하게 되어도 

아무런 마음의 동요도 없고 
분노도 일으키지 않고 
평안하게 참는 수행을 해야 한다고 제시하지만, 

현실에서는 자신의 손가락에 종기가 생기거나 사고로  
손가락 하나를 끊어내야 하는 일만 생겨도 
기겁을 하고 안색이 노랗게 변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현실에서 
상을 갖고 임하는가 
그렇지 않고 상을 갖지 않는 가운데 
생사를 벗어나서 수행에 정진하는가의 
문제이고 
그 정도에 따라 수행자의 수준이 달라진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살핀 금강경에서 
수행자가 그런 상을 갖고 현실에 임하면 
그것이 곧 수행자 라이센스를 박탈당하게되는 
중대 사유임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상을 갖는 문제의 초반부분을 
이전 페이지들에서 제시했는데 
그 초반부분이 필요한데 
이것을 복사해 가지고 와야 하는지 
그냥 잘라내기 방식으로 옮겨와야 하는지 
조금 고민이 된다. 

이전 페이지를 쓸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하드디스크 체계 정리작업을 
빨리 마쳐야 하는 사정도 있기에 
마음이 복잡한 것이다. 

일단 조금 쉬면서 방법을 찾아내 
이어나가기로 한다. 




mus0fl--Le Grand Orchestre Du Splendid - Radio Pirate.lrc

하나의 디스크를 기본 35 개 모드를 바탕으로
사용자별로 무량하게 제각각
사용자 각각에 가장 적절한 체계로 그 때 그 때 변형해 사용하는 방안을 마련하느라. 
상당히 복잡하다. 

올 년말까지는 이 작업이 마쳐져야 한다고 보는 가운데 작업을 서두르는데 
현재 85 % 작업이 마쳐진 상태에서
하나하나 사용해보면서
버그를 찾아서 방생시키는 작업이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현재 작업 우선 순위가 뒤바뀐 감이 있는데 
그러나 수행자의 우선 순위는 어디까지나, 
경전 공부가 가장 우선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상에 관한 문제를 3 일전부터 주제만 걸어 놓고 계속 다루지 못하고
넘어가고 있는데 
아무래도 오늘 금강반야바라밀경이 뽑혔으므로 
이 주제에 대해 어느 정도 정리를 마쳐야 한다고 보게 된다. 


사실 어제 ( 불기2561-12-12 ) 살핀 

금강수광명관정경최승입인성무동존대위노왕염송의궤법품

이라는 아주 긴 제목의 경전도 
일반인에게는 대단히 낯선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데 

금강반야바라밀경의 내용도 사정은 비슷하다고 보게 된다. 

비록 불교신자들에게는 이 경전이 대단히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러나 내용 자체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쉬운 경전은 결코 아니라고 보게 된다. 
경전자체에서 수보리 존자가 이런 사정때문에 
부처님께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는 것을 살필 수 있다. 

...


“세존이시여, 

어떤 중생이 이러한 말씀[장구章句]을 듣고서 

진실이라는 믿음을 내겠습니까?”

.... 


이런 내용은 일반적으로 전도망상을 일으킨 상태에서 
본 경전에 제시된 내용을 대해서 
곧바로 이들 내용을 이해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사정을 함께 나타내는 내용이라고 본다. 

경전에서 제시된 내용 가운데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내용은 
곳곳에 산재하여 있지만, 
다음과 같은 내용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
신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는 없습니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여래께서 신상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신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a즉 비a 고명a
=> 
a 는 곧 a 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a 라고 칭한다. 

이런 식으로 표현만 놓고 보면 앞 뒤 문장내용이
자체모순이 되는 듯한 표현이 대단히 많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또 이런 내용은 
무한한 중생을 제도한다. => 그러나 중생을 얻을 수 없다. 
보시하는 이나 보시받는 이나 보시하는 행위나 보시하는 물건을 얻을 수 없다. 
=> 그러나 상에 머물지 않고 무량하게 보시를 한다. 



온갖 상(相)은 

모두가 허망하니 

상이 상 아닌 줄 알면 

바로 여래를 보리라. 

... 

이런 등등의 경전 내용이
하나같이 앞 뒤 문장의 관계가
쉽게 이해하기 힘든 형태로 되어 있기에 

이 경전이 도대체 무슨 내용을 제시하고 있는 것인지
일반적으로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상의 문제를 3 일전부터 제시했는데 
이 상의 문제가 금강경에서 대단히 
많이 반복해서 강조되고 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구절이 그것이다. 


만일 어떤 보살이 

아상(我相)3)ㆍ인상(人相)4)ㆍ중생상(衆生相)5)ㆍ수자상(壽者相)6)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

만일 비법상에 걸리더라도 

아상ㆍ인상ㆍ중생상ㆍ수자상에 집착되기 때문이니라. 



등등으로 아상을 가지면 안 된다는 내용이 
금강경 전반을 통해서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굳이 아상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상 전체에 대해서 사정이 같은데 
다만 모든 번뇌 집착과 생사고통의 근원이 되는 내용이
한 주체가 가장 집착을 갖게 되는 자신과 자신의 생명, 목숨 등이고
이런 내용으로부터 나머지 모든 집착이 파생되기에 
아상이 가장 강조되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상을 제거하는 것이 수행자에게서 
대단히 중요한데 
이 아상을 제거하는 원리를 파악하게 되면 
이 원리를 나머지 모든 상에 대해서 같이 적용하는 것이 
또 요구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결국 이는 수행의 기본이라고 할 
공삼매 무상삼매 무원무작삼매 가운데 
무상삼매의 내용과 직접 관련이 되는 내용이기도 하고
금강경에서 제시되는 것처럼 
현실에서 안인 수행을 원만히 성취하고 
무생법인을 증득하고 
수행자가 이전 단계의 수행자와는 차원이 다른 
대단히 수준높은 불퇴전위에 이르는 수행자가 되는 
고비점도 바로 이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날씨가 대단히 추워졌다. 
오늘 난방장치 애프터 수리기사가 왔는데
필리핀에서 온 외국인이었다. 
그래서 반갑게 맞이했는데 
필리핀처럼 따뜻한 곳이 그리워진다. 
필리핀 대통령에게 우리나라를 3 원에 팔고 
나라 영토를 필리핀까지 쉽게 확대해 넓히는 방안을 제시한 적이 있는데 
아직 성사가 되지 않아서 
그리고 성사가 되었더라도 교통비가 부족해서 
필리핀의 따뜻함을 맛보기는 쉽지 않다. 
일단 앞과 같이 기본적 문제를 지적하고 
조금 쉬었다가 이어나가기로 한다. 



쉬기 전에 상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현실에서 아상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고 
상을 갖는다거나 
상에 머문다거나 
상을 취한다거나 
상을 행한다거나 
이런 등등의 표현이 
도대체 현실을 살아가는 중생들의 어떤 전도망상 분별 증상을 
가리키는가부터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이미 이전 페이지에서 이 문제를 지적했는데 
현실에서 자신이 눈을 떠서 세상을 보고 대할 때 
또는 생활할 때 
자신은 스스로 어떤 내용 어떤 부분을 자신이라고 보는가.

또 자신이 영희나 철수를 안다면
어떤 부분을 놓고 영희나 철수로 보는 것인가. 

이런 문제를 먼저 검토해 보아야 한다. 

참고로 아상 인상..이렇게 나열할 때 
한자어로 인이란 한자가 주로 한자어에서는 남을 의미하므로 
나에 관한 상, 남에 관한 상 이런 식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상에서 인이라는 표현은 
불교용어로 푸드갈라 즉 윤회의 주체를 의미하고 
인간의 경우 자신은 다른 생명과 다른 인간이고 
그래서 대단히 존귀하고 특별한 존재라는 의식을 갖는데 
이런 내용과 관련이 깊다고 보기도 한다. 
현장스님 번역본들을 보면 뒤의 내용으로 인상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보게 되는데 

상은 어떤 것이나 다 제거해야 하므로 
별 문제는 아니다. 

중생상이라고 말할 때 중생도
글자상 오해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은 용어다. 
중이란 글자가 한자어로 무리중이므로 
아마 복수의 여러 생명들을 가리키는 것인가 보다 여기기 쉬운데
그냥 생명을 의미하는 단어라고 할 수 있다. 
번역본에 따라서는 이를 유정이라고 표현하는데 
중생=유정=오늘날 표현으로 생명, 생명체
이런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여하튼 
현실에서 자신이 어떤 내용을 놓고 
그것이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한다거나, 
또는 어떤 부분은 영희나 철수라고 생각하면서 
이에 바탕해 살아가는 것이 바로 아상을 갖는 문제이고 
이와 같은 방식으로 온갖 것에 대해 
상을 갖는 것이 또 문제인 것이다. 

왜 그런가는 
이것이 바로 전도몽상 증상의 핵심이고 
이 전도몽상 증상 때문에 
현실에서 생사고통을 겪게 되기 때문인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현실에서 
이런 상을 일으켜 갖지 않으면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게 되고 

또 같은 원리로 
가리왕과 같은 이가 자신을 붙잡아서 
팔과 다리를 잘라대는 상황에서도 
자신이 평안하게 임할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상식적으로 팔과 다리를 자르면 
대단히 고통을 받는 가운데
자신이 죽게 되지 않는가.
큰일이 아닌가.

이렇게 일반적으로 보는데
부처님은 바로 이것이
생사고통을 받는 사정이고
또 이렇게 임하기에
생사고통을 받고 
3 악도를 향해 열심히 묶여 끌려가는 행을
쉼없이 해나가게 된다고
그 사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상을 제거하면 
그 상을 제거한 주체가 
그로 인해서 그런 고통을 받고 생사고통을 받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이런 생사고통에서 풀려나고 

또 그런 바탕에서 
경전에서 제시된 것처럼 
상에 머물지 않는 가운데 수행을 행해 나가게 되면 
그로 인해서 받는 복덕자량이 무량하게 된다고 
그 사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부분이 바로 
수준높은 수행자와 그렇지 못한 수행자 
더 나아가서 수행자와 
수행을 행하지 않고
태어나면서부터 전도몽상에 바탕해 살아가는 일반 중생과의 
차이를 만들어 내는 중요한 경계점이 되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그런 고통을 가하면 
대부분 죽을만큼 고통을 받고
그리고 결국 죽게 된다고 보는 것인데

부처님은 그렇지 않다고 제시하는 한편 
그런 망상분별 때문에 
매 생 매 순간 그렇게 오히려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받아나가는 것이라고 
제시하는 내용인 것이다. 

일단 쉬기로 하자. 





mus0fl--Francis Cabrel - Sarbacane.lrc


날씨가 춥다. 
쉬는 동안 옥상기지에 올라가서 커피도 마시고 왔는데
옥상기지는 더 춥다. 

상에 관한 문제를 살피는데 
일단 현실에서 상을 갖는다. 취한다, 머문다. 행한다. 
이런 내용이 현실에서 어떤 이가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을 
이렇게 표현하는것이가부터 살펴야 한다고 본다. 

이 상의 문제를 살피려면 대단히 
살펴야할 부분이 많은데 
그 동안 이런 문제를 많이 반복했기에 
오늘은 이를 바탕으로 
상을 제거한다는 것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에 관련해 
갖기 쉬운 오해를 제거하는데 비중을 두고자 한다. 


상이라는 글자가 일으키는 오해는 
상과 상의 구별부터 시작해야 하리라 본다. 

한글로는 다 상이라고 표현하는데 
한자어로는 상이란 표현은 像 相 想 등등으로 여러글자가 있는데 

여기서 구분이 문제되는 상은 주로 相과  想의 구별이 문제된다. 

그런데 한자어는 글자 자체에 그 글자를 만들게 된 내용이 
포함되는 경우가 많아 오히려 의미파악에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다고 본다. 

相이란 글자를 보면 나무 목木과 눈 목目이 결합되어 있고
想은 다시 이 상에 마음 심心자가 덧붙여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글자를 음미하면 각 글자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파악하기 쉽다고 할 수 있다. 

현실에서 눈을 떠서 나무모습을 볼 때 
그렇게 보이는 나무모습을 相이라고 표현하고 
그런 부분을 놓고 그것이 나무라고 생각을 한다면 
그런 생각내용은 想이라고 표현한다면
이해가 쉬운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자신이 눈을 떠서 나무와 같은 모습을 보는 가운데 
그것이 나무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또 어떤 부분은 영희나 철수라고 생각하고 
그 가운데 또 어떤 부분은 자기자신이라고 생각하고 
대하면서 살아가는 일반적인데 
여기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대단히 심각한 문제가 있고 
이 문제를 시정해야 생사고통에서 벗어날 계기가 마련된다
그리고 수행을 하더라도 이런 바탕에서 행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금강경에서 제시하는 핵심 내용이고 
또 불교 전반을 관통하는 핵심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를 먼저 이해해야 하는데
처음에 눈을 떠서 세상 모습과 자기 모습을 본다면  
가장 기본적으로 이런 내용이 
하나같이 마음에 들어 온 내용이고 
자신 외부에 있는 어떤 내용도 아니고 
또 눈으로 이런 모습을 본다면 이런 내용이 자신의 눈이 대하는 외부 대상도 아니고 
또 이들 내용은 정신안의 내용으로서
정신과 구분되는 어떤 물질적인 존재도 아니라는 것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고 이전에 유식론을 살피는
페이지에서 제시한 바 있다. 

그리고 그것을 간단히 확인하는 실험방법으로
눈 뜨고 감기를 반복하기, 색안경 바꿔쓰기,
손가락으로 눌러 달을 2 개로 만들어 보기 (제 2 월)
제 3 자 관찰하기 등과 같은 방법도 소개했는데 

이런 내용을 많이 반복했지만, 
현재 일일히 과거 페이지를 찾아서 링크를 걸기 힘들기에 
넘어가기로 한다. 

과거 페이지가 다양한 사정으로 통편집 처리되어서
일부는 정리되어 독립된 페이지에 올려져 있고
일부는 아직 정리 대상으로 남아 있는데 
이들은 천천히 정리해나가기로 하고
일단은 넘어가는 것이 좋다고 본다. 

여하튼 자신이 눈을 떠서 대하는 내용이 
자신의 마음에 들어온 마음안 내용이라는 것을 
기본적으로 확인하는 가운데 

여기서 일정부분을 붙잡고 
그 부분에 대해 그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부분부터를 전도망상분별이라고 칭하고 
이 현상을 해결해야 
생사고통에서 벗어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고 
반복해 강조하는 것이다. 

이 사정을 그림으로 파악하는 것이 
조금 편하다고 보기에 
다시 종전에 반복한 그림을 덧붙이기로 한다.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img2]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http://buddhism007.tistory.com/228 ☞○ 마음과 색의 의미에 관한 논의
http://thegood007.tistory.com/1172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03fl--ghpt/r1030.htm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현실에서 1 이라는 사람이 눈을 떠서 세상을 보는 가운데 
1 자신의 모습을 그림처럼 대하고 이것을 자신이라고 여기고 
또 2나 3 과 같은 다른 사람 철수나 영희모습을 보고
그런 것이 곧 철수와 영희라고 생각도 하고
4 와 같은 꽃의 모습을 보고 그것을 꽃이라고 여기면서
살아가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이런 내용이 바로 경전에서 제시하는 
전도망상 분별이고 
상을 취하고 상에 머물고 상을 집착하고 
상을 행하는 현상이라고 제시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눈을 떠서 보는 모습은 
위 그림처럼 나타내지만, 
위 그림처럼 각 부분을 위와 같이 묶고 나누는 가운데 
각 부분에서 1 의 부분은 자기 자신이고 
2 나 3 은 또 철수, 영희라는 등으로 생각할 때 
그렇게 생각하는 '생각 내용' 자체는 이 그림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생각내용은 사실 형체나 크기를 갖지 않고
그림으로 표시하기는 적절하지 않다고 보게 되는데 
여하튼 눈을 떠서 보는 상태를 저와 같이 그린다면 
저렇게 각 부분을 나누어
각 부분이 무엇이라고 여기면서 대하게 되는 각 부분을 
한자어로 상 相 이라고 표현하고 


그 각 부분에 대해서
각 부분이 자신이나 영희 철수 꽃 바위 등등이라고 
생각하는 내용은 상 想 이라고 구분해 표현한다는 것을 

앞에서 설명한 것이다. 


그리고 한편 
위 그림에서는 2가 이런 내용을 대하는 과정을 5^ 로 표시하고 있는데 
이 내용을 기초로 
1 과 2 의 입장을 계속 뒤바꿔 가면서
한 서너번 뒤바꿔 헤아리면 

왜 1 이 눈을 떠서 보게 되는 1과 같은 부분을 놓고 
그것을 자신이라고 여기고
또 앞에 제시한 것처럼 1 이 보는 
2,3,4, 와 같은 내용들이 1 자신 외부에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된 분별이고
또 이것들이 1의 감관이 대하는 외부 대상이라고 여기는 것도 잘못된 엉터리 분별이고
또 이것들이 정신과는 구별되는 외부물질이라고 여기는 것도 잘못된 엉터리 분별인가를 
쉽게 파악할 수 있고 
그래서 평소 1이 행하는 전반적인 분별 일체가 
하나같이 전도되어 거꾸로 뒤집혀진 망상분별이라고 하는 것인지도 
쉽게 파악할 수 있다고 본다.
이 설명을 기존에 반복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물론 여기서 정신 안에 들어와 있는 정신안 내용물을 놓고 
그것이 곧 정신이 행하는 기능과 같은 기능을 행하는 정신 자체라고 하기는 곤란한데  
그러나 이들 내용은 정신을 떠나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 지위를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는 사실은 모호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1이 눈을 떠서 대하게 되는 이들 내용이 
일단 정신 밖에 독립해 있고
정신과는 뚜렷하게 구분되는 정신 외부의 물질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라는 의미다. 





[img2-8]
08pfl--image/8식-8.jpg



이 그림은 각 감관으로 얻는 1,2,3,4,5, 의 내용과 함께 
이에 대해 행하는 생각내용까지 포함해서 나타내는 그림이다. 







[img2-10]
08pfl--image/사람.jpg


우선 1,2,3,4,5 와 6 의 관계는 
현실에서 눈으로 대하는 모습이 위 그림과 같을 때 
이런 내용을 놓고 이 부분을 묶어서 
이것을 사람이라고 6 의 영역에서 관념분별을 행하는 과정을
나타낸 것이다. 

그래서 [img2-10] 그림과 같은 것은 
앞에서 상相 이라고 표현한 것이고 


위 그림 [img2-8]에서는 이런 부분을 이처럼 묶고 나누어서 
그 부분이 사람으로서 철수라거나 또는 자신이라고 여길 때 
이처럼 생각하고 분별하는 내용을 상想이라고 구분한다는 
그런 의미다. 


여기서는 현실에서 어떤 부분을 자신이나 철수 영희라고 여기는 
현상 자체가 엉터리라는 사정을 나타내기 위하여 
일부로 여러 동물 그림이 합쳐져서 하나의 사람얼굴 모양을 나타내는 
그림을 선택해 제시한 것인데 

그런데 현실에서 어떤 부분을 놓고 
그것이 무엇이라고 여길 때
사실은 이 그림과 그 상황이 마찬가지라는 것도 
함께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이는 격자이론으로 별도 페이지에서 자세히 살핀 바가 있는데 
이런 부분이 
결국 문수보살님이 제시하는 아라바자나 다라니에서 
나에 해당하는 내용과 관련이 깊은 내용이다. 

이 나라는 다라니는
나라는 한 글자에 
일체는 그 모습과 성품을 얻을 수 없고 
언설명자도 그러하다는 내용을 담아 제시하는 것인데 

현실에서 저와 같은 일정 부분을 놓고 그것이 사람이라고 생각할 때 
그런 부분이 곧 그처럼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생각내용에 해당하는 모습이고
그 성질이나 성품이 또 그렇게 그 부분에 있다고 여기고 대하는데 
바로 이 부분부터가 엉터리이고 망상분별임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내용도 이미 많이 반복했으므로 이 정도로 넘어가기로 한다. 




[img2-9]
08pfl--image/8식-9.jpg



앞 그림과 내용이 같은데 
이 내용은 조금 다른 내용을 나타내기 위하여 그린 그림이다. 

1! 라고 표시하는 내용은 
현실에서 어떤 이가 눈을 떠서 대하는 내용 일체를 의미한다. 
2,3,4,5는 마찬가지로 귀나 코 입 몸의 각 감관이 받아들이는 내용을 의미하는 것이다. 

결국 1!과 같이 눈을 떠서 대하는 내용을 놓고 설명하는 내용은 
나머지 2,3,4,5 에도 같이 적용되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어떤 이가 눈을 떠서 세상 모습을 보게 될 때 
그 가운데 그 일부를 자신이라고 망상을 일으키는 현상을 
위 그림이 일단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a! 와 같은 부분을 놓고 그 부분을 상相이라고 할 때 
그 부분에 대해서 생각하기를 a@ 라고 생각하면서 대하는데 
이런 a@와 같은 생각내용은 상想이라고 구분해 표현한다는 의미다. 

범어까지 덧붙이면 상相은
이것을 놓고 나라고 여기기 쉽지만, 이는 
즐겁게 나를 버려야 할 대상이라는 의미로[?] 
락샤나 Lakṣaṇa라고 표현한다고 이해하고
상想은 이와는 달리 마 파순과 자신이 싸움을 하면 매번 지는가
이런 주제를 놓고 
무원무작 삼매와 깊게 관련이 되는 부분이기에 
범어로 Saṃjña 라고 표현한다고 이해하고
표현을 달리 제시하면
글자 표기가 쉽지 않고 발음도 정확하지 않기에 애로사항이 많지만, 
이로 인해, 좀 더 유식해 보인다고 할 수는 있다. 
 
그런데 현실에서 
상相과 상想으로 일으키는 다양한 문제점을 살필 때 
그러나 이처럼 현실에서 이런 내용을 얻는 것 자체가 문제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실재가 무아인 상태로 공한 것이어서 실답지 않고 
또 이를 바탕으로 얻게 되는 감각현실이나 
이를 바탕으로 일으키는 관념분별 역시 실답지 않다는 사정은 같은데 
그러나 이것만으로 이들 내용이 문제라고 보는 것은 아니다. 
이들 내용이 실답지는 않지만, 
그러나 현실에서 문제삼는 생사고통이 아닌 그 무엇이라는 점에서 
이들 각 내용 자체는 문제가 없고 본래 청정하다고 일단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전도망상의 상태에서 삶을 살아가는 입장에서
이런 내용을 일으켜 얻으면 
바로 그 상태에서 곧바로 거의 예외없이 전도망상 상태로 진입해
생사고통을 겪어나가게 되는 것이므로 
그것이 바로 문제인 것이다. 

즉 현실에서는 a! 와 같은 부분을 놓고 그 부분이 a@라고 생각하게 되면 
이제 그런 생각을 바탕으로 
그 a! 부분을 붙잡고 접착되어 늘어지는 현상이 곧바로 이어져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상相을 취하고 
상相에 머물고 집착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현실에서 무언가를 행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바탕에서 행하는 것이므로 
이런 상태의 행위를 그런 상을 행한다고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현실에서 예를 들어 보자. 

어떤 이가 자신에게 커피를 하나 가져다 주십시오라고 요청해서 
자신이 커피를 가져다 주었다. 
그런데 고맙다고 하지 않아서 화가 난다. 

이런 경우를 하나 놓고 보자. 
여기서 자신이 무엇을 커피라고 보고 
무엇을 또 그 상대라고 보고 
또 자신이라고 보고 그런 행위를 했는가 하면 
바로 앞에서 살핀 것과 같은 상相을 바탕으로 상想을 일으켜서 
그에 바탕해서 그 모든 것을 행한 것임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이 행위를 기술하는 내용 각 요소가 
다 그와 같은 문제를 하나하나 다 갖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그래서 처음 하나의 상相을 대하여
그런 생각을 일으키고
그리고 나서 그런 바탕에서 
이후 그 상相을 취하고 머물고 
그 부분에 달라 붙어서 접착되고 

또 그런 생각을 바탕으로 그렇게 행하는 그 일련의 과정이
바로 자신이 생사고통을 받아 나가는 근본 원인이 되고
또 나중에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도
바로 그런 상태를 전제로 한다는 것이
바로 문제인 것이다. 

이 내용이 하나의 내용만 해도 
크게 잘못된 것인데 
이것이 계속 매 순간 이어져서 
무량하게 이 형태로 진행되어 나가면서 
생사고통을 받아나가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相의 문제는 
수많은 상의 문제가 다 문제이지만,

그 가운데에서 각 주체가 가장 집착하고
모든 집착의 근본이 되는 것은
결국 스스로 자기자신이나 자신의 생명 목숨 등에 갖는
그런 상이 가장 문제가 되므로 
이것을 제거해야 나머지 모든 문제가 같이 해결된다고 보기에 
이것을 가장 대표로 제시하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앞에서 a 로 표시한 부분을 
이제 평소 자신이 자신으로 보는 부분으로 놓고 
위 그림을 음미하면 

a! 라는 부분을 놓고 
a@ 라는 생각을 일으킨 다음 
물론 이것 자체만은 문제가 아니지만, 

이후 이런 전제에서 
그 a!  라는 부분이 바로 그런 a@라고 여기면서 대하게 되는데
이런 일련의 과정부터가 
바로 본격적인 전도망상분별의 진행인 것이다. 

그리고 그 a 란 부분이 현실에서 자신이 
자신으로 여기는 그런 내용일 때 
그 내용을 제거하지 못하면 
이를 바탕으로 온갖 번뇌망상이 증폭되어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정은 간단히 보면 이렇다. 

오늘 남태평양에서 지진과 해일이 일어나
2000 명이 갑자기 죽었다. 

이런 소식을 들을 때 
대부분 약간 놀라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렇게 심하게 슬퍼하거나 통곡하지는 않고 
담담하게 대하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한 3 일전 어디론가 함께 여행을 갔다 온다고 한 
자신의 아내와 딸이 알고보니 바로 그 장소를 방문한 것을
알게 되고 또 그 지진으로 
그들이 사망했다고 외교부나 경찰청에서 연락이 오면 
그 순간부터는 그는 대단히 달라지는 것이다. 


이런 차이가 왜 나타난다고 보는가. 

사정은 간단하다. 

앞은 나나 나의 것과 갖는 관련성이 
뒤의 경우보다는 덜하기 때문이다. 

태백산에서도 한 개미집에 속한 대략 1만여 개미가 
벌목과정에서 다 학살당했는데 
이런 것은 뉴스에 보고가 되지 않고 
남태평양 지진 사태는 보고되는 차이가 있는 것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뒤 경우가 그래도 사람들과 더 관계가 깊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그런 차이가 나타나는데 
이 차이는 어떤 이가 그런 망상과 집착을 갖고
무언가를 대하는가 아닌가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그런 차이를 만드는 핵심요소가 
바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기에 
경전에서 이 부분을 문제삼고 

다른 상을 모두 제거해도 
이 부분이 제거되지 않으면 
결국 그 주체는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기 힘든 것은 
매 마찬가지라고 제시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이미 남태평양에서 2000명이 갑자기 죽었는데도 
담담하게 평온을 유지하던 이가 
갑자기 사색이 되고 노랗게 표정이 바뀐 사정도 
알고보면 그런 사정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영희나 철수로 보는 부분을 놓고 
영희나 철수로 보고 
자신이라고 여기는 부분을 대하면서 
그것을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그에 바탕해서 살아가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것이 무슨 문제인가. 

그래서 그런 사정으로 무언가를 자신이라고 여기려면 
차라리 위 그림에서 나타낸 것과 같이 
갑A@ 라는 관념이 화살표로 가리키는 그런 내용을 차라리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하는 것이 
낫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위 그림을 다시 덧붙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차라리'란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다음 사정 때문이다. 
a 에 대한 집착을 갖고 있는 경우나 
이제 그  a에 대한 집착은 제거하고 대신 
b 에 대한 집착을 갖고 있는 경우나 
집착을 갖고 이후 그로 인해 문제상황에 들어가는 것은 
마찬가지 문제라고 일단 보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 a! 에 대해 집착을 갖는 이가 
그 a!에 대한 집착을 제거하는 대신
이후 그 집착을 갑A@ 로 옮겨 갖게 되면
그 역시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문제는 같은데 
그러나 무엇을 자신으로 보아야 하는가 하는 측면에서는 
그래도 a!를 자신으로 보는 경우보다는 
갑A@가 가리키는 내용을 자신으로 보는 것이 
좀 더 적절하다고 본다는 의미다. 

그것은 수행자가 무량한 기간
생사를 받아가며 수행을 한다거나 
7번 생사를 오간 후에 열반에 든다거나 
무량겁의 수행을 마치고 성불하게 된다는 등의 
내용을 제시할 때는 
바로 이런 내용을 놓고 제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런 내용이 곧 
앞에서 살핀 내용과 달리 실답고 진짜라고 할
어떤 주체의 본 정체<아我> 라고 제시하는 것은 역시 아닌 것이다. 
다만 무량한 기간을 두고 어떤 수행자가 계속 
매 생사현실에서 옷에 해당하는 몸을 바꾸어 가며
수행해 가는 바탕과 그 사정이 이와 같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첫 내용에 집착을 갖지 않고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처럼 
이 부분도 사정은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런 종합적인 내용을 놓고
a! 를 놓고 자신이라고 집착할 바에는
'차라리' 갑A@가 가리키는 내용을 놓고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임하는 것이 낫다고 
제시하는 사정인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일반적으로 
눈을 떠서 보게 되는 a! 와 같은 부분
즉 현실에서 자신이 눈을 떠서 자신의 몸이라고 보는 부분을 대하면서
그것이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대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부터  
그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 거꾸로 이런 내용을 제시하면 
자신의 전도망상분별을 기준으로 놓고 
이런 내용을 제시하는 이가 
궤변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거의 일반적인 것이다. 

그래서 생사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매 순간 그런 번뇌 망상에 묶인 가운데
그런 상태로 무량하게 계속해서 
번뇌의 사역을 당하고 생사고통을 받아나가게 되는 것이 
바로 현실의 삶의 문제인 것이다. 



현실에서 100 년간 살 때는 
자신이 대하는 그 모든 것이 실답고 
자신의 판단이 정당하고 
자신이 좋음을 얻고 살아가는데
그런 판단이 대단히 도움이 된다고 여기면서 살아가지만 

알고보면 바로 이런 삶이 
번뇌에 묶여서
악마 마파순에게 붙잡혀  
자신이 살아가는 그 일체를 통해 얻는 모든 것을
갖다 바치는 그런 삶이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비유하면 축사에서 살아가는 축생을 
그 축생에게 먹이를 주고 키우는 목장 주인이 생각할 때는  

그 축생이 자신을 이렇게 여기거나 저렇게 여기거나 
또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살거나
한번 목장 주인에게 붙잡혀서 축사에서 살아가는 이상 
결국 목장 주인의 재산이고 목장 주인에게 
이바지하다가 죽어가는 것 뿐이라고 여기는 것처럼 

한번 전도망상을 일으켜서 번뇌에 묶여 사역을 당하고 
그에 바탕해서 생각하고 삶에서 무언가를 추구하고 살아가는 상태는 
결국 그 사정이 마찬가지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각 자신은 자신의 판단에 의해 살아간다고 여기고 
자신의 마음에 들어와 있는 자신의 탐욕 분노 어리석음도 

자신을 구성하는 한 부분이고 내용이라고 여기지만, 

사실은 이들은 자신의 마음에 들어온 
손님일 뿐인 것이다. 
그런데 전도망상을 일으킨 상태에서는 
이것이 바로 자신의 본질이고 
자신의 본 내용이라고 여기면서 
손님으로 들어온 이런 번뇌를 자신의 주인으로 여기고 
이에 묶여서 모든 것을 행해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자신이 현실에서 무언가를 
성취하고 차지했다고 여기면서 좋음을 얻는다고 여기지만, 
바로 이 부분에서의 문제가 
곧 상相과 상想의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알고보면 그것이 그것이 아닌 것인 것이다. 
단지 자신이 돈 상태라서
그것을 매순간 그렇게 대하고 있는 것 뿐인 것이다. 

더욱이 생사과정에서는 그 문제는 더 심각해지는 것이다. 

상相에 있어서는  
바로 직전에 얻어낸 상相도 
다음 순간으로 옮겨 가져가지 못할 뿐 아니라, 

눈으로 얻는 내용은 
귀로 얻는 영역으로도 가져가지 못하고 

더욱이 생사를 달리하고 세계를 달리 할 때는 
더더욱 그 사정이 그런 것이다. 

현실에서 눈을 뜨고 사물을 보다가 
눈을 감을 때 그 직전에 생생하게 본 내용을 
그런 상태에서 다시 되살려 얻어낼 수 있는가를 실험해보면 
이 사정을 기본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생사과정에서는 이 상황이 더 심한 것이다. 

예를 들어 
물은 점점 온도를 높이면 점점 따뜻해지다가 
나중에는 수증기가 되어 물의 형태는 보이지 않고 
물과 수증기는 완전히 형태가 다른 상태가 된다. 
물과 얼음도 마찬가지고 
눈, 서리, 등등을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런 내용은 한 주체가 
5 살 때 모습과 60 살 때 모습을 놓고 
비교해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60 살 때 모습을 기준으로 하면 
5 살 때 아이의 모습은 그 상태에서는 
이미 죽어서 없어진 한 아이와 사정이 같은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정은 60 살이 된 어떤 사람이 
현재 자신이라고 보고 집착하는 내용도 
그 사정이 또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점점 변화해가다
어느 시점에 질적으로 완전히 생명형태가 달라지고 
다른 세계로 옮겨 가게 되는 것을 
생사과정이라고 표현하는데 
이 과정은 앞에 제시한 문제들이 더 심각해진다는 의미다. 

물에서 대하던 어떤 내용이  
수증기의 상태가 되면 이제는
도저히 찾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
그 정도가 더 극심한 것과 사정이 같은 것이다. 

그래도 계속 살아있을 동안은 
비록 직전의 모습을 다음 순간으로 옮기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계속 눈을 뜨고 매 순간 대하면 
자신의 생각에서는 그래도 
매 순간 순간 얻어내는 내용들이
서로 엇비슷한 형태로 계속 얻는다고 여기게 되는데 
세계가 달라지고 생명형태가 달라져서 
이제 눈이 사람 눈에서 메뚜기나 파리 눈으로 바뀌어서
세상을 대하는 상황에서는
앞의 문제가 더 극심하게 된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상想은 앞의 상相과는
조금은 그 성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전도망상 상태에서 위처럼 일으킨 
상想은 앞의 망상을 유지시키고 
생사고통을 상속시키고 증폭시켜나가는데 기여할 뿐 

생사고통을 벗어나고 제거하는 데 
기여하지 못하는 내용들이 대부분인 것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이런 내용은 포맷을 해서 삭제처리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고 또 그런 사정으로 
매 생이 서로 끊겨서 이어 나가는 분단생사과정을 겪는 사정도 
바로 이런 사정이라고 제시되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어떤 이가 
평생 무언가를 자신이 노력하여 쌓고 얻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런 전도망상의 한 내용일 뿐이고 
사실상 그것을 차지하는 이는 다른 주체라고 보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축생과 목장주인의 관계에서는
목장 주인의 지위에 있는 이가 축생의 것을 모두 
차지한다고 보는 것처럼 
욕계 중생들이 이처럼 전도망상에 바탕해 행하는 것은 
욕계에서 최상의 지위를 차지하는 파순이라고 보기에 
결국 이런 전도망상에 바탕해서 무언가를 행하면 
비록 아무리 그 자신이 무언가를 성취했다고 여기면서 
좋아할 지라도 
그 실질은 자신이 아닌 타 주체
즉 마 파순이 성취하는 내용이 되는 것이어서 
이런 내용을 타승처라고 표현하는 사정이기도 한 것이다. 

축사에서 어떤 소가 자신이 다른 소들을 다 물리치고 제압해서 
여물을 많이 섭취했다고 좋아할 수 있는데 
이것은 알고보면 그 소가 무엇을 성취한 것이 아니고 
나중에 도살장에 그 소를 끌고가는 목장주인이 성취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과 사정이 같은 것이다. 

이 부분이 이해가 안 되면 
당장 현실에서 눈을 뜨고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을 
잘 살펴보고 
그리고 눈을 감고 
그 직전에 자신이 그렇게 본 내용을 
그 직후 순간에 옮겨가지고 갈 수 있는 내용이 하나라도 있는가 
또 그렇게 눈으로 본 내용 가운데 
소리의 영역으로 갖고가서 얻어낼 내용이 있는가부터 
잘 확인해야 한다. 

한 단면에서부터 안 되는데 
그것을 모두 모아 놓으면 된다고 볼 도리가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전도몽상에 바탕할 때는 
한 순간의 단면을 매순간 매 순간 이어 놓으면 
그것이 된다고 여기면서 
계속 무한하게 그렇게 임하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래도 되는 것은 되는 것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기 쉬운데 
문제는 한 단면 안에서 상相과 상想의 관계부터가 
엉터리이기에 사실은 한 단면 한 찰나에서도 
그런 자세는 문제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 내용이 다음 그림에 제시되는 내용이기도 하다. 

앞과 같이 그림들을 놓고 대할 때는 그림으로는 설령 이해해도 
자신이 직접 현실을 대하고 임할 때는 또 마찬가지가 되고 
그런 가운데 앞의 내용이 제시하는 수행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게 되기에 

비닐판 마술 비유를 들어 이 관계를 설명하고자 하는 그림이
다음 그림인 것이다. 




08pfl--image/8-vinyl-magic.jpg





각 비밀에 각기 다른 도형이 그려져 있는데 
처음에 그려진 도형도 실답지 않고
실재와 관련하면 엉뚱한 것이지만, 

이처럼 각기 다른 도형을 그려 놓은 비닐들을 겹쳐 놓고 대하게 되면 
이로 인해 안이 세모인 도너츠 모양이
또 다시 실답지 않은 내용으로서 나타나 보이게 되고

그런 가운데 이를 대하는 이는
이런 사정을 헤아리지 못하는 가운데
그렇게 보게 된 이런 도너츠가
각 영역에도 그처럼 있다고 여기면서 
이 상황을 대하는 부분부터가 
심각한 문제점인 것이다. 

그리고 이 측면에  
현실에서 생사고통을 겪는 내용들이 
다 들어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도너츠 모형은 
각 영역에 그려져 있는 도형들 즉, 세모와 동그라미로 인해  
그런 내용이 나타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문제는 그 세모나 동그라미 자체는 
도너츠 그림이 갖는 그런 문제가 없고
그것들은 하나같이 그런 도너츠는 아니면서 생생한 그 무엇이라는 점이 중요한 것이다. 

이 비유를 놓고 
현실에서 자신이 있다고 보는 
그 일체의 내용 
특히 자신이 겪는 생사고통이나 생멸과 같은 문제를
잘 음미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즉 현실에서 겪는 생사고통 등의 문제는 
감각현실이나 관념분별이 바탕이 되고
그것을 재료로 삼아 
그런 내용을 겪게된다고 여기는 것이다.

손이 잘려져서 고통을 받는 이는 
자신이 생각하는 내용은 생각내용대로 있고 
그에 해당하는 내용이 눈을 보면 매 순간 보이는 현실에 
그렇게 있다고 여기면서 
그로 인한 고통을 겪는 것이고 
나머지 내용도 사정이 같은 것이다. 

그런데 정작 이런 감각현실이나 관념분별 자체도 그렇고
더욱이 이들 내용의 본 바탕이 된다고 할 실재 영역도 그렇고 

그 가운데 현실에서 얻는 내용은 그처럼 생생하지만,
정작 현실에서 문제삼게 되는 그런 내용은 얻을 수 없고
그래서 그것들은
적어도 현실에서 문제삼는 '그런 것은 아닌',
그러나 그런 가운데 생생하기도 하고 실답지 않은 무엇이라는 점을 여기서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각 영역의 내용에서 
현실에서 문제삼는 그런 생멸이나 생사고통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는 것은 
각 영역에서 어떤 내용도 없다거나
어떤 내용도 전혀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어차피 이들 내용이 실답지 않다는 사정은 다 마찬가지고
그리고 이들 각 내용은 관계에 따라서
그런 내용을 얻어도 되고 얻지 않아도 무방한 것이다.

마치 꿈이 실답지 않다는 그런 사정을 잘 이해하고
그런 꿈에 집착하지 않고 현실에서 임한다고 해도 
여전히 꿈은 꿀 수도 있고 꾸지 않을 수도 있는 것과 사정이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들 내용이 실답지 않고
현실에서 문제삼는 생사고통을 본래 이들에서 얻을 수 없다고 해도
그렇다고 이들 내용을 얻으면
절대 곤란하다고 제시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현실에서 문제삼는 생사고통을 
이 각 영역에서는 본래 얻을 수 없는데도
이상하게 각 내용을 겹쳐 놓고 망상을 일으키고 대할 때는 
앞의 비닐판 마술의 경우처럼 
그 각 내용에는 얻을 수 없는 생사고통을 그렇게 실답게 있다고 여기면서 
실답게 생사고통을 겪어 나가게 되는데
그 부분이 문제인 것이다. 



실재가 공하다고 표현할 때도 마찬가지다. 
실재가 공하다는 것은
실재영역에는 본래 아무것도 전혀 없다고 제시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진짜라고 할 내용이 없기에 무아 무자성이라고 표현하고 
그 내용을 한 주체가 직접 끝내 얻을 수 없기에
또 공하다고 표현하는 것 뿐이다. 

만일 무아 무자성의 상태가 아니면
실재가 무엇인가가 문제될 때는 참된 진짜에 해당하는 그런 내용을 제시하면 되고
공하다고 표현할 것이 아닌데
사정이 그렇지 않기에 공하다고 표현하는 것이어서 
공하다는 표현에는 무아 무자성의 내용까지 포함되어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들 실재나 각 영역이
무아 무자성이지만, 그렇다고 전혀 아무 내용도 없는 것은 또 아닌데 
다만 현실에서 겪는 생사고통은 얻을 수 없는 것이어서 
그런 생사고통이 아닌 그 무엇이라는 점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측면에서 
공한 실재를 청정한 니르바나라고 표현해 제시하는 것이다. 
즉 실재는 내용을 직접 얻지 못하지만,
여하튼 현실에서 겪는 생사고통이 아닌 그 무엇이기에 
그런 측면에서 이를 청정한 니르바나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본 바탕이 이러함에도
이상하게 현실에서 생사고통을 겪어나가게 되고 

또 그런 경우는 앞과 같은 상태로
그 각 영역에도 그런 내용들이 실답게 있다고 여기면서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겪어나가는 것임을 잘 파악해야 한다고 본다. 






글이 길어졌으므로 일단 쉬기로 한다. 

원래 제시하고 하는 내용은 
기존에 반복한 내용이 아니고 

비록 앞 그림과 같은 도너츠 모양으로 상징하는 
생사나 생멸과 같은 내용은 문제이고 
이것을 제거해야 한다고 보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1! 나 6@ 영역이나
그 영역에서 얻는 내용 자체는
그런 문제가 아니라는 것도
이와 함께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앞 비닐판 마술비유에서 
제거할 것은 도너츠모양인 것이고 
다른 것은 아닌 것이다. 

그 이유는 도너츠 모양만 실답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고 
어차피 각 영역의 내용이 하나같이 실답지 않지만, 
그 가운데 이 두 내용을 합쳐 놓고 
만들어 갖는 도너츠 형태의 내용이 
삶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비유만 놓고 보면 
왜 도너츠는 문제이고 
세모나 동그라미가 문제가 아니라고 하는가 하겠지만, 
이는 비유이고 

비유상황에서는 도너츠가 문제인데 
도너츠는 알고보면 다른 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는 내용임을
그림처럼 비유하고 있는 것뿐이다. 

그리고 도너츠를 없애고 제거한다고 할 때 
도너츠만 제거하면 되지 
도너츠 없애기 위해서 
문제가 없는 세모나 동그라미 까지
굳이 없앨 필요는 없음을 또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같은 사정으로
현실에서 문제로 보게 되는 그런 도너츠는 없애지만 
그렇다고 그런 도너츠를 얻게 되는 그런 측면에서
다시 얻을 수 있는 다른 좋은 내용까지
또 굳이 함께 없앨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오히려 중생을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데 
도움이 되는 내용은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이런 내용을 성취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내용이 결국 
금강경에서 반복헤 제시하고 있는 핵심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겪을 때 
이런 생사고통은 본래 얻을 수 없는 내용인데
앞과 같은 과정으로 겪게 되는 것임을 스스로 잘 관하고 
이를 제거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상태에서 
수행을 잘 닦아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무량한 수명과 무량한 복덕과 지혜까지 없앨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앞과 같이
그 각 내용을 각 영역에서 본래 얻을 수 없다는 사정을 잘 관하고 
그런 사정으로 현실에서 그처럼 
상을 취하고 상에 머물지 않는 가운데
수행을 잘 행해야 하고

또 그렇게 되면
무량한 복덕을 얻을 수 있음을
경전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처음 상을 취하고 머물지 말고 수행하라고 할 때 
어떤 것이 상을 취하고 머무는 것이고 
어떤 것이 상을 취하지 않고 머물지 않는 가운데 
상을 대하고 
그런 바탕에서 수행을 잘 하는 것인가를 
잘 파악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일단 길게 쉬기로 한다. 



○ [pt op tr]  mus0fl--Gerard Blanc - Du Soleil Dans La Nuit.lrc

날짜 경계선을 이미 지났는데 

상과 관련된 문제를 3 일이나 넘기는 가운데 
이 페이지에 좀 더 자세히 논의하는 것이 
낫다고 보고 
이어서 좀 더 살피기로 한다. 


이미 앞에서  상相과 상想을 구분하고 
이 관계를 살폈는데 
이것은 또 이들의 본 바탕이 되는 실재의 내용으로서
실상과의 관계가 또 문제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실재 - 감각현실 - 관념분별의 각 내용과 
그 정체 및 그 상호관계가 
현실에서 일으키는 전도몽상을 제거하는데 
대단히 필요하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이미 앞 그림 등에서 이들 내용의 관계를 제시했는데 
현실에서 이들 각 내용에서 어떤 전도몽상을 일으키기에 
그것이 생사고통을 무량하게 하는 것인가를 
잘 살펴야 한다고 본다. 





[img2-9]
08pfl--image/8식-9.jpg



처음 어떤 감각현실을 얻고 
그 가운데 일정부분을 묶고 나누는 가운데 
그 부분이  a@라고 생각할 때 
이들 관계가 

비닐마술에서 각 비닐에 세모와 동그라미를 그려 놓고 
합쳐 놓으면 각 비닐에 없는 도너츠 모양이 나타나는 것과 
사정이 같다고 설명했는데 
이 도너츠가 현실에서 의미하는 내용이 무언가부터 
기본적으로 잘 이해해야 한다. 



08pfl--image/8-vinyl-magic.jpg




비닐마술 비유에서 도너츠가 나타나 보이게 되면 
그 주체는 그 도너츠 내용이 각 비닐에
실답게 있는 내용이라고 보고 
그것에 집착을 갖고 
이에 바탕해 행하게 되는데 
그런 전제에서는 
그가 생사고통이나 생멸이라고 보게 되는 내용을
실답고 생생하게 겪게 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것이 곧 번뇌[혹]-업[신구의3 업 행위]-생사고통 
의 혹업고의 관계인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 도너츠 모양을 대할 때 
그것이 실답다고 여기면서 집착을 갖는 것이 문제인데 
그 가운데 자신이나 자신의 것을 놓고 
그렇게 대하는 현상이 
이 모든 생사고통의 근본이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설령 그것이 정말 실답게 있는 것이라고 해도 
그 이후 그것을 그처럼 대하게 되면
그런 고통을 겪게 되므로
그런 사정때문에 그것을 실답게 보지 않고
집착을 제거해서 그런 행위는 중지하고
오히려 그와 반대되는 방향을 취해
수행을 해야 된다고 보게 되는데 

문제는 그 내용 자체가 근본적으로 실답지 않은데도 
그것을 그렇게 헤아리지 못하고 
본래 얻어지지도 않는 내용을 그렇게 실답게 있다고 여기면서 
그것을 취해 머물고 그에 바탕해 행해 나가는 자세가 문제인 것이다. 

이 자세가 어느 계기로 시정이 되지 않으면 
그런 바탕으로 무한하게 나아가면서 
무량하게 생사고통을 겪어나갈 도리 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 현실에서 그 내용을 얻는 
감각현실의 한 부분으로서 상相과 
이를 바탕으로 일으키는 상想의 정체와 상호관계를 잘 이해하고 

다시 이런 관계와 마찬가지로 
본 바탕이 되는 실상과 이들간의 관계도 
이에 준해서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처음 감각현실을 얻고 그에 대해 일정한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 
비닐 마술의 도너츠 비유에서 어떤 상태를 나타내는 것인가하면 
다음과 같다. 


자신이 눈을 뜨고 대하면 
a! 와 같은 내용을 생생하게 얻는데 

이 때 다시 이를 바탕으로 그런 부분은
a@라고 생각을 일으키게 되면 

이제 다음과 같은 현상이 이어져 나타나는 것이다. 

즉 어떤 부분을 놓고 그것이 자신이나 영희라고 생각하고 대하면 
이제 그 부분은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내용이 거기에 
들어 있다고 여기면서 대하게 되는 것이다. 

또 한편 그런 부분을 대하지 않고 
그런 생각만 할 때에도 
그런 생각 내용은 그런 감각현실과 같은 내용을 
그 구성 부분으로 갖고 있는 실다운 것이라고 여기면서 
그런 관념분별 내용을 대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처럼 각 영역은 이 둘을 합친 도너츠 같은 내용이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각 영역만 순순하게 대하면 
물론 이 가운데 그 일부가 그 요소로 생생하게 얻어진다고 
할 것이지만, 
정작 이렇게 각 영역의 내용을 결합시킨 그런 내용은 
얻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차이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그렇게 각 내용을 결합시키지 않은 상태의 각 내용은 
비록 자신이 현실에서 생생하게 그런 내용을 얻어도 

그것은 그런 사정으로 실답게 볼 내용이 결여된 
내용들이라는 것을 쉽게 파악하고 
그런 사정으로 그에 대한 집착을 제거하게 되고 

그래서 이후 그에 바탕해 업을 행하지 않게 되고 
그로 인해 생사고통에 묶이지 않게 된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알고 보면 현실에서 어떤 생멸이나 생사를 문제삼을 때 
그것은 단지 관념영역에서는
그 실다운 내용이 없는 공허한 관념일 뿐인 것이다. 

물론 그런 관념을 일으키는 입장에서는 
감각현실로 얻는 일정한 부분이
곧 그런 관념의 모습이고 그 성품이라고 여기지만, 
그 내용들은 관념에서 일으켜 얻는 것일 뿐 
정작 그 감각현실에서는 그런 내용은 얻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 감각현실은 감각현실대로 생생하게 얻어지지만, 
그 안에서는 그런 관념내용은 얻을 수 없는 것이고
그래서 그 감각현실은 일단 현실에서 문제삼는
그런 분별 내용은 일단 아니면서 그러나 생생한 그 무엇인 것이다. 


예를 들어 고통을 주는 범인을 체포해 잡고자 하는데 
범인의 이름과 얼굴이 그려진 몽타쥬는 
단지 그림이고 몽타쥬일 뿐이고 
그에 해당한 내용이 없는 것인 한편, 

그 몽타쥬가 가리킨다고 보는 어떤 내용은 
정작 그 몽타쥬에 해당하는 내용을 
그 안에서 하나도 얻을 수 없는 그런 내용이어서 
그것은 아닌 그러나 생생한 그 무엇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이상하게 현실에서 이 두 내용을 얻고
이를 겹쳐 놓고 대할 때는 

그 몽타쥬는 몽타쥬대로 이를 대할 때 
마치 그 범인이 그 자체에 들어 있는 실다운 내용으로 여기는 가운데
그 몽타쥬만 보아도 피해자들이 공포에 시달리고 고통을 받는 증상을 일으키는 한편, 

또 정작 어떤 부분은 그 부분대로 이를 대할 때 
그 부분에서는 그 몽타쥬 내용이 본래 얻어지지 않는데도 
그 부분이 곧 그런 몽타쥬 내용이 실답게 들어 있는 그 무엇이라고 여기면서
또 앞과 같은 증상을 일으키는 것이다. 





[img2-8]
08pfl--image/8식-8.jpg


그래서 현실에서 그 존재를 문제삼는 각 영역의 관계는 
실재 - 감각현실 
감각현실 - 관념분별의 관계가 
모두 현실과 꿈의 관계와 그 사정이 같다는 사정을 
잘 관하고 
그런 내용이 다른 영역에서도 그처럼 얻어지는 내용이고
그렇게 실다운 내용이라고 여기면서
그에 대해 집착을 갖고 임하는 자세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결국 현실에서 1 과 같은 어떤 상相을 얻을 때 
그 상相은 
비록 그 내용은 그 내용대로 현실에서 생생하게 얻지만, 

그러나 이는 그런 조건에서 그렇게 얻는 내용일 뿐 
일단 본 바탕의 실재의 지위에 있는 실상의 내용도 아닌 것이어서 
그런 측면에서도 실답다고 할 내용이 아닌 것이고 


또 그 내용은 비록 그렇게 생생하게 얻지만, 
이 내용을 놓고 다시 관념분별 영역에서 일으키고 
그래서 생사나 생멸 유무 왕래 등등으로 분별하게 되지만,
정작 그런 내용은 이 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고
그래서 적어도 그런 내용은 아닌 그러나 생생한 그 무엇이라고
잘 관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현실에서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는 것은 
각 영역의 내용이 전혀 없다는 의미가 아니고 

현실에서 자신이 그런 각 영역을 결합시켜 
실답게 그런 내용을 구성부분으로 갖는 그런 관념분별 내용 
즉 각 비닐의 내용을 겹쳐서 나타난 도너츠 같은 모양이 
각 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은 것이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각 영역에 있는 내용만 놓고 따지면 
이들 각 내용은 하나같이 실답지 않은 형태여서 
마치 꿈과 같이 그 내용이 전혀 얻지 못하는 것은 아님에도 
그것을 가지고 집착을 갖고 생사고통을 겪어야할 
내용들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생사고통을 겪게 되는 것은 

기본 원인 단계에서 
각 주체가 대하는 내용을 놓고
그 내용이 그처럼 각 영역에서 얻어지는 실다운 내용이라고 여기면서 
집착을 일으키고 
그 집착에 바탕해서
장차 생사고통의 결과를 받게 되는 행위를 그렇게 하고
반대로 그런 생사고통을 받지 않고 그 묶임에서 풀려나게 할
수행은 수행대로 행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처음 문제다. 


그리고 그렇게 임하면 
이후 또 그런 바탕에서는 다시 
생생하고 실답게 여기면서 받아나가야 할 생사고통의 결과를 
또 그런 바탕에서 얻게 되고 
그런 전제에서는 그런 내용에서
고통을 또 생생하게 받아나갈 도리 밖에 없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 두 부분 가운데 어느 부분에서라도 이 현상을 
제거해야 하고 
가능하면 두 부분다 제거하는 것이 바람직한데 
그래도 조금 더 쉽고 바람직하다고 보는 것은 
처음 생사고통을 받아나가게 하는 원인단계에서 부터 
이 문제를 잘 시정하고 



본래 얻을 수 없는 도너츠를 
실답게 있다고 여기는 가운데 
이에 대해 집착을 일으키고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에 바탕해 행하는 내용을 중지하고 

그것이 실답지 않지만, 
그래도 도너츠를 보게 되는 영역에서
좋은 내용을 얻게 할 수행방안을
행해 나갈 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것이 잘 안 되면 결국
비록 그 내용이 실답지는 않지만, 
앞의 전제에서는 대단히 생생하고
실답게 있다고 여기게 될 
생사고통을 이로 인해 이후 겪어 나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론상 도너츠가 어는 경우에서도 얻을 수 없다는 사정은 
이렇게 직접 생사고통을 심하게 겪는 지옥이나 아귀 축생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의 사정인 것이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지옥도 극락과 그 사정이 다르지 않다고 제시하여서 
지옥도 극락으로 대할 수 있다고 제시하지만, 

그러나 일반적으로 전도몽상 상태에서는 
그 반대로 
본래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인데도 
이를 지옥과 같이 여기면서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원리는 같지만, 
이것이 곧 
생사고통을 받는 원인단계에서 
수행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고 
생사고통을 벗어나는 것이 훨씬 바람직하다고 보게 되는 사정인 것이다. 


그리고 좀 더 깊이 있게 이를 보면 
생사고통을 벗어나는 해탈의 문은 
실재 - 감각현실 - 관념분별 영역마다 
다 있다고 보게 되는 것이고 

그것이 곧 본바탕이 되는 실재는 그 실재가 공하고 
현실에서 문제삼는 그런 생사고통은 아닌 그러나 그 무엇이라는
사정을 잘 관해서 이 측면에 열려져 있는 공해탈문을 통해서
생사고통을 벗어나고

또 관념영역에서는 앞과 같은 망상분별을 바탕으로 
각 영역에 없는 도너츠와 같은 것을
관념영역에서 몽타쥬나 설계도로 그려 놓고 
그것을 그 내용을 끝내 얻을 수 없는 감각현실영역이나
실재 영역에서 구하는 것이 기본 문제인 가운데 

더 나아가 그처럼 희망하고 소원하는 내용 또한 
좁고 짧고 얕은 관찰을 통해
자신의 입장에서만 당장 이런 저런 측면에서만 좋다고 할 내용을
그렇게 집착하고 매달리는 상태인 것이어서 
이들 사정을 잘 관하고 
그처럼 쓸데없고 부질없고 공허할 뿐 만 아니라, 
그런 욕계 상태에서 최상의 지위에 있는 마파순만 성취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고 자신은 자신대로 생사고통을 묶여 받게 만드는 
그런 희망을 일체 제거해서 
생사고통에서 벗어나는 무원무작삼매 해탈 수행을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부질없는 희망에 집착해서 그것을 추구하지 않으면 
그런 생사고통을 받는 덫에 걸리지도 않고 묶이지도 않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앞에서 살핀 것처럼 
현실에서 얻는 감각현실은 실재의 지위에 있는 실상도 아니고
또 그런 부분은 그에 대해 일으킨 그런 생각내용을 거기에서 얻을 수도 없는 것이라는
사정을 잘 관해서
그런 상을 대해 그처럼
그런 상을 취하거나 상에 머물면서
집착하고 무엇을 행하여 생사고통에 묶여 끌려가는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방안을 기본적인 수행방안으로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생사고통을 벗어나게 되면 
다시 그런 기본 바탕에서 
그런 생사고통은 생사고통대로 제거해 없애지만, 
그 각 영역에서 얻을 수 있는 내용 가운데 
좋은 내용까지 같이 굳이 없앨 필요는 없고 

또 본래 이처럼 전도망상을 일으킨 상태에서
생사고통의 현실로 보게 되는 이들 내용 자체에는
본래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는 것이어서
생사 현실은 곧 청정한 니르바나라는 사정
즉 생사 즉 열반이라는 사정을 잘 관하는 가운데 

이를 거꾸로 대해서 

본래 청정한 니르바나임에도 불구하고
청정한 니르바나 즉 생사고통을 실답고 생생하게 받는 생사현실로
대하면서 생사고통을 증폭해 받아나가는
중생을 제도할 수행을 또 다시 닦아나가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이 두 측면을 모두 버리지 말고 
부처님이 가르쳐 준대로 
잘 행하라고 하는 것이 
바로 금강경의 핵심 내용인 것이다. 

본래 각 내용을 얻을 수 없는 사정을 잘 관하고 
상을 취하지 말고 상에 머물면서 집착을 갖지 말고 => 생사고통을 제거하고 

보시하고 수행을 해서 =>
수행자는 수행자는 수행자대로 무량한 수명과 무량한 복덕과 지혜자량을 쌓고
다시 그런 가운데 중생을
생사고통에서 벗어나오도록 제도하는 수행을
정진하라고 하는 것이

이 두 측면의 내용인 것이다.  


그래서 
처음 공해탈문에 들어가서 생사고통을 벗어나고
그런 상태에서 중생제도를 위해 생사현실에 임할 때는
수행자가 이후 그런 사정을 잘 관하고 
법이 공한 자리에서 수행자가 임하고 


그리고 무상해탈문에 들어가서 생사고통을 벗어난 다음 
그런 상태에서 중생제도를 위해 생사현실에 임할 때는 
다시 같은 원리로 안인을 성취하고 불퇴전위에 올라서 
그런 안인을 수행자가 입는 갑옷으로 생각하고 
현실에 임해야 하고 

그리고 또 무원무작 해탈문에 들어가서 
생사고통을 벗어난 다음 
그런 상태에서 중생제도를 위해 생사현실에 임할 때는 

다시 본래 얻을 수 없는 생사고통을 생생하고 실답게 여기면서 
받아나가는 중생들에 대해 연민과 자비의 마음을 일으켜서 
이를 제도하고 이들의 제도를 위해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하고자하는 서원을 일으켜서 
생사현실에 임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즉 처음의 무원무작삼매가 쓸데없는 희망을 제거하였다면 
이제 그 자리에 광대무변한 서원을 장착하고 
생사현실에 다시 임하는 것이 수행자인 것이고 

결국 이런 내용이 
수행자는 공한 자리에서 인욕을 옷으로 하고 
자비를 방으로 해서 수행자가 생사현실에 임한다는 것으로 
법화경에서 제시하는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결국 이런 수행을 통해 수행자가 얻는다는 무량한 복덕이나
기타 불국토장엄이나 성불과 같은 내용은 
처음 얻을 수 없는 도너츠를 실답게 있다고 여기는 그런 측면 
그런 영역에서 수행자가
그런 자세로 그런 수행을 정진하여 성취하게 된다고 제시하는 내용인 것이다. 

처음 실재나 감각현실이나 관념분별 영역만 놓고 본다면, 
그러한 내용은 본래 얻을 수 없는 것이고,
여전히 관념내용뿐이고 명칭뿐이라고 할 것이지만, 

그러나 이후 수행에 정진해 성취한다는 것은 
그런 가운데 없는 도너츠를 있다고 보는 가운데
생사현실을 겪는 중새들이 대하는 그런 측면에서
그러한 내용을 성취하게 된다는 내용인 것이다.


일단 너무 길게 쓰는 가운데 오타가 많고 
본인부터 과로사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이만 줄이기로 한다. 




mus0fl--Da Silva - La Route.lrc


연일 계속되는 무리한 작업과 함께
글을 많이 작성하다보니
대단히 피로을 느껴서 식사를 하고 쉬었는데
TV 로 영화를 한편 보는 가운데 TV 를 켜고 잠이 들었다.
그렇게 하니 자는 동안
TV 에서 어떤 내용인지 모르지만, 자꾸 대화가 옆에서 들리고
자는 상태가 되어서 
잠을 자도 피로도 풀리지 않는 잠을 잔 것 같아 
결국 일어나서 TV 를 끄니 조금 나은 것 같다. 
그런데 그렇게 자고 일어나니
또 시장기를 다시 느끼게 되어 또 식사를 하고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보통 피곤하면 피곤을 풀기 위해 잠을 자는데 
잠을 지나치게 많이 자다보면 피로가 풀리는 것이 아니라 
너무 길게 잠을 자서 오히려 피곤함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그러니 그렇게 자서 일어나서 피곤하니 또 피곤함을 달래려고 
시들시들 지내다가 또 잠을 통해 피곤을 풀려고 하기 쉽다. 
며칠 이렇게 지내다보면 잠이 잠을 불러 일으키는 상태가 된다고 본다. 

식사하는 과정에 과식이 여기에 다시 겹치면 식사가
다시 피곤함을 주고 다시 피곤함을 회복하기 위해 또
식사를 불러 악순환이 반복되기 쉽다. 

현실에서 술이 술을 부르고 술로 속이 안 좋으면 
그 속을 풀기 위해서 아침에 또 술로 속을 달래는 
그런 현상도 있는데 엇비슷한 측면이 있다고 본다. 

연구하는 책상에 앉았는데 무언가 놓고 온 것이 생각나서 
그것을 구하러 갔는데 중간에 엉뚱한 일만 하고 돌아왔다. 
그래서 돌아와보니 그것을 가지러 갔는데 가지고 오지 않는 것을 생각하고 
또 찾으러 갔는데 또 가는 도중 엉뚱한 것이 보여서 그것을 해결하고 
또 돌아와보니 또 정작 찾아가지고 오려고 한 것은 놓고 온 것을 보고 
또 찾으러 가는 일을 몇 번 반복했다. 

일어나서 보니 담배의 독이 몸에 남아 있음을 느끼고 
담배가 피곤함을 많이 준다는 것을 생각하고 담배를 끊어야 겠다고 
생각하는데 담배를 끊으려면 
끊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 그 끊어야 할 대상의 본 정체를 다시 확인해보고 
또 이런 중대한 결의를 하고 이를 다지려면 
그냥 하면 안 되고 담배를 한 대 피우면서 진지하게 결의를 다져야 한다고 보고 
또 옥상에 가서 담배를 통해 소신공양을 올리고 내려왔는데 
옥상기지에서 위 노래를 들었다. 

여러가지 상황이 정신을 팍 돌게 하는 사유가 많은데 
이제 이 불어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아무래도 한국에서 유명한 탈랜트
김수미양이 혹시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런 심증이 가는 것은 목소리가 왠지 김수미양의 목소리를 연상시키기에 
그런 것인데 여하튼 노래에서는 오늘 너무 길게 내용을 적고
몸도 많이 지쳐서 피곤한 상태이니 
이제는 그만 쓰는 것이 좋겠다라는 메세지를 전한다고 감상하게 된다. 



그런데 여하튼 많은 내용을 적었는데 
오늘은 과거 내용을 단순히 반복하기 보다는 

상을 취하지 말고 수행에 정진하라는 내용이 
도대체 현실에서 어떻게 임하면서 수행을 하라는 것인가에 관련해 
오해가 많이 있다고 보고 
이처럼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 측면을 명확하게 정리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이미 전도몽상을 일으키게 되는 사정을 살피면서 보았지만, 
이들이 서로 뒤 섞여서 이들 내용이 서로 혼동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 
본래 전도몽상을 일으키고 현실을 대하는 사정이기도 한 것이어서 
각 내용간에 혼동을 여전히 불러 일으키는 측면이 많다고 본다.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한다고 
이를 비닐마술 비유를 들어 설명하게 되는데 

세모가 그려진 비닐과 큰 동그라미가 그려진 비닐을 겹쳐 놓고 대하면 
각 비닐에는 없는 안이 세모인 도너츠 모양이 보이게 된다고 할 때 

이 도너츠는 각 비닐에서 얻을 수 없는 것이고 
그래서 이 도너츠를 붙잡고 집착하면서 임하면 곤란하다. 
단순히 곤란한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사정으로 
매 순간 순간 전도망상에 바탕해 업을 행하고 
그래서 무량한 기간 그런 상태로 생사고통을 받아나가게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각 영역에 그런 도너츠가 없다고 제시한 것은 
우선 첫 비닐층에 그런 도너츠가 없다고 제시한 것인데 
도너츠는 없다고 하지만, 
그러나 도너츠 안에서 있다고 보는 그런 세모꼴은 
그 역시 실답다고 할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생생하게 얻는 형태로 세모는 얻는 것임도 제시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두번째 비닐층에 그런 도너츠란 실답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제시한 것은
그 비닐에 그런 도너츠가 없다고 제시한 것이지만,
그러나 도너츠를 통해서 그 안에 있다고  보는 
큰 동그라미는 그렇게 생생하게 얻는 것임도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도너츠가 실답게 그처럼 각 영역에 있다고 여기면서 임하면
곤란하기에 그런 도너츠가 실답게 있다고 여기지 말라고 제시하는 것은 
그런 도너츠를 보게 된 세모나 동그라미가 그런 문제라고 제시한 것은 본래 아니다. 

다만, 그런 상태에서 세모 부분을 대할 때  
앞과 같은 망상을 바탕으로 해서
그 세모 부분이 곧 그런 도너츠라고 여기면서 
그 세모부분을 취하고 그 세모를 붙잡아 집착하여 머물고 
그 세모를 도너츠라고 여기면서 이리저리 변화시키려고 하는 것 등이 
전도몽상에 바탕해서 생사고통을 받아나가게 되는 원인단계의
문제라고 일단 제시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그로 인해 첫 비닐판 내용이 여하튼 변화가 있게 되는데 
그 앞 경우처럼 그 상태에서 도너츠가 있다고 보는 자세를 전제로 하면 
그 이후 앞과 같은 행위를 통해 
다시 찌그러진 도너츠가 나타나게 되고 
그래서 그 상태에서는 그 상태대로 
도너츠를 잘 해보려고 했는데 그로 인해 
뜻과 달리 완전히 도너츠가 찌그러졌고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형태로 훼손되었다
이런 헛 생각과 헛소리를 연발하면서 
비명을 지르고 통곡을 하며 
대단히 심각한 생사고통을 생생하게 겪는 상태로 묶여
옮겨가게 된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이것이 현실에서 본래 생멸과 생사를 얻을 수 없는데도 
그렇게 근본무명 어리석음에 바탕해서 
전도망상을 일으켜 현실을 대할 때는 
그 전제에서 그렇게 생사고통을 겪어 나가게 되는
사정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어떤 감각현실을 얻고 
그 부분을 무엇이라고 생각을 일으키게 될 때 
그런 부분을 그것이 자신이 생각하는 어떤 것이라고 여기면서 
그런 부분을 그렇게 취하고
그 부분을 붙잡고 머물고 늘어지고 
그런 망상에 바탕해서 무언가를 꾀하고 행해 나가는 
그 일련의 자세를 중지하고 
이를 수행의 방향으로 전환시키지 않으면 
대단히 곤란하다는 것을 살핀 것이다. 

그 가운데 이런 망상 집착증을 일으키는 가장 근본이 되는 내용으로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제시하고 
이런 상을 현실에서 일으켜 갖지 말라고 
제시한 것이다. 

그것은 그런 부분이 실재의 지위에 있는 실상도 아닐 뿐더러 
그런 부분을 통해 자신이 일으키게 되는 그런 분별내용도 
그 부분에서는 본래 얻을 수 없는 것이므로 
그렇게 집착을 갖고 임하지 말라고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내용을 제시하면 
간혹 어떤 오해를 하게 되는가하면 

아예 그처럼 눈,귀,코, 입, 몸 등으로 다양한 감각내용을 얻는 
내용을 중지해야 한다고 여기거나, 
또는 그런 내용을 얻기는 해도 
그에 대해 일체 분별을 일으키면 안 되므로 
하루 종일 눈만 뜨고 멍한 상태로 
분별을 일으키지 않고 임해야 하는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각 비닐 내용으로 도너츠 모양을 얻을 때
이 도너츠가 각 영역에는 없고 
각 영역에는 세모와 동그라미가 있는 것이라고 할 때 
세모를 붙잡고 그것이 도너츠라고 여기면서 
그 세모를 취하고 그에 접착되어 늘어지지 말라고 제시하게 되면 

이제 각 비닐에서 얻는 세모나 또는 동그라미까지 
다 지워야 한다고 여기는 현상과 비슷하다고 본다. 

그것은 이미 그가 세모를 세모로 대하지 않고 
도너츠로 대하고 
동그라미는 동그라미대로 동그라미로 대하지 않고 
도너츠로 대하는 전도망상이 고착된 상태에서 

도너츠가 문제이므로 도너츠란 상을 갖고 대하지 말라고 하니, 
도너츠를 없앤다고 하면서 
도너츠가 아닌 세모와 동그라미를 다 제거해야 한다고 
여기고 대하는 것과 사정이 같은 것이다. 


그래서 도너츠가 문제이고
세모를 대하면서 그 세모를 붙잡고 도너츠라고 대하는 것과
동그라미를 대하면서 그 동그라미를 도너츠라고 대하는 것은 다 문제이므로 
이런 세모나 동그라미를 놓고
그 각 영역에 본래 없는 도너츠로 이 각각을 대하게 되는 이런 현상을 제거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각 비닐의 세모나 동그라미까지
제거해야된다고 보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물론 세모는 세모대로 그것은 실다운 것이 아니어서
그 비닐에 역시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이지만,
도너츠가 문제라고 해서 극단적으로
그 자체로는 문제가 없는 세모까지 다 없애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동그라미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실다운 것이 아니어서 역시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이라고 보는 것이지만, 
그 동그라미로 인해 발생하는 도너츠가 문제라고 해서 
그 자체로는 문제가 없는 동그라미까지 다 제거해 없애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은 
지나친 극단이고 그것은 또 아닌 것이다. 

그런데 처음 세모와 동그라미를 모두 다 도너츠라고 여기면서 대할 때는 
그 세모고 곧 도너츠에 있는 세모이고 
그 동그라미가 곧 도너츠에 있는 동그라미이고 
그래서 이 각 세모와 동그라미가 다 도너츠라고 여기는 가운데 

도너츠가 문제되어 이를 제거하려면 
결국 각 영역의 세모와 동그라미까지 다 말끔하게 제거해 없애야만 
된다고 여기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세모 - 동그라미 ~ 도너츠 
이 관계를 잘 정리해 이해한다면 

현실에서 상을 일으켜서 상을 취하지 말고 
상에 머물지 말고 그런 가운데 수행을 정진하라는 내용을 

마치 일체 감각활동을 하지도 말고 
또 일체 어떤 생각이나 판단을 다 중지해야 하고 
극단적으로는 각 감관과 판단을 행하는 부분에
독극물을 부어서 감각활동과 
분별 판단 행위를 다 제거해야 된다고 
이 내용을 오해하면 곤란하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현실에서 그렇게 임하는 경우는
거의 있을 수 없다고 보지만, 
그러나 이론상으로는 
상을 갖지 말고 분별을 행하지 말라는 내용이 
그런 상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닌가 
이런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 측면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입장에서는 
보시를 행하거나 중생제도를 행할 때 
그런 보시를 하는 이나 그런 보시를 받는 이나
그렇게 제도되는 중생이 있다고 분별을 행하지 말라고 할 때 

그런 분별을 행하지 않으려면 
아예 보지도 말고 생각도 일체 않는 가운데 
그렇게 수행을 해야 하는 것인가 하고 
오해를 하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무언가 주는 이나 받는 이도 없는데 
보시는 또 해야 한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그렇게 하는가. 

이 문제가 바로 상을 취하거나 머물지 않는 가운데 
현실에서 상을 어떻게 대하고 
그런 수행을 해야 하는가의 문제와 관련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전도몽상에 붙잡힌 상태에서 
곧이 곧대로 문장만 따라서 그렇게 행해보려고 하면 
그냥 아무 생각도 일으키지 않는 가운데 
그러나 자신이 갖고 있고 길에 뿌릴 수 있는 것을
황금이거나 쓰레기거나 관계없이 무조건 들고
무의식적으로 길에 뿌리는 것이
그런 베품을 행하는 수행인가 이렇게 오해하고 
극단적으로 나아가기 쉽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고 해도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여하튼 외관상 서로 모순되 보이는 이런 두 요구를 
다 충족하는 가운데 수행을 하라고 하니 
대단히 어렵다고 여기게 되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무상삼매를 바탕으로
아상 인상 수자상 중생상을 제거한 가운데
안인을 성취해서 
수행에 정진하라는 내용도 마찬가지이고 

또 공삼매나 무원무작삼매도
이런 식으로 내용을 잘못 이해하고 
극단적으로 치우쳐 나아가 임하려는 경우도 
간혹 있는 것이다. 


실재가 공하고 
공한 실재는 본래 거기에서 생사고통을 얻을 수 없는 
청정한 니르바나라고 제시하게 되면 

어떤 수행자가 생각하기를 
이 진여 실상은 그 표현에 진짜라는 '진'도 들어가고 
실답다는 의미의 '실'도 들어가서 
이것만은 참된 진짜로서
생사고통을 얻는 니르바나라고 오해하는 가운데

자신이 어떤 특별한 수행을 오래 정진하면
다른 이들의 상태와는 달리 
자신만 아주 특별하고 참된 진짜의 내용을 얻게 되는가보다라고 여기면서
수행에 임하는 경우도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경우 수행의 목표는 
그 공한 실재를 자신이 증득해 얻어내고
거기에 도달해 머무는 것을 
목표라고 여기는 것이다. 
 
무상해탈문에서도 그 내용을 오해하면 
공연히 감각과 분별 일체를 중지해야 한다고 극단으로 나아가서 
문제가 된다고 보지만, 
공해탈문을 제시하면 다시 실재의 공함에 대해서 
그것만은 생사고통을 떠난 참된 진짜라고 여기면서 

공에 다시 집착을 일으켜 갖고 이를 추구하게 되면
이는 대단히 곤란하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실재가 공하다고 하는 가운데  
이런 실재를 진여나 실상이라고 칭하는 것은
우선, 이런 실재가
현실에서 얻는 내용들과 관련해 
그 모든 존재의 본 바탕이 되는 지위에 있는 것이기에 
그런 표현을 하는 것이고 
그 실재에 어떤 참된 진짜의 내용이 있어서 
그런 표현을 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실답다고 할 진짜가 없다는 사정은 
실재나 다른 감각현실이나 관념분별이나 
매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렇게 진짜가 아니고 실답지 않을 뿐 
또 어떤 내용이 전혀 없다고 하는 것도 아닌 사정도
이 각 영역이 다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래서 그런 오해를 하면 곤란하다고 일단 보는 것이다. 

그리고 실재의 공함이란, 
본바탕이 되는 실재가 본래 그렇다는 것이고,
따라서 그런 사정을 잘 이해하여 깨닫고 확인하라는 의미인 것이고 
또 현실에서도
그처럼 본래 생사고통을 얻을 수 없고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에 준해서 
집착없이 임하라는 내용을 제시한 것이다. 

그래서 이 실재의 공함은 
수행자가 이렇게 하던 저렇게 하던 
또 수행자가 그 상태를 그렇다고 여기던 여기지 않던 
본래 그렇게 공한 것이고 
어떤 경우도 그런 공한 실재를 떠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이는 
어떤 노력을 하면 공하지 않던 실재가 
그 노력으로 새삼 공하게 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또 그렇지 않다고
그런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그 실재가 공하다는 것은 
그 공한 실재를
직접 어떤 주체가 끝내 얻을 수 없다는 사정도 함께 제시한 것으로서 
어떤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거나 
부처님의 상태가 되면 
다른 이와는 달리 그 실재의 공함을 얻어낼 수 있다고
그런 내용을 그렇게 제시한 것도 아닌 것이다. 

그래서 공한 실재는
현실에서 문제삼는 생사고통을 얻을 수 없고 
청정한 니르바나라고 제시하는 것은 

현실에서 겪는 생사고통와 상대적으로 살필 때
그렇게 표현하게 된다는 의미이고 

그 실재에 청정 이런 단어나
생사고통과 현실의 온갖 더러움을 다 떠난
어떤 청정함 그 자체가 거기에 실답게 박혀 있고 

그래서 수행자는 
수행자가 본래 갖추지 못한 이런 내용을
수행을 통해 끝내 얻어내야 한다고 
이런 내용을 제시한 것이 아니다. 

수행자가 수행을 하던 안 하던 
이런 저런 감각과 이런저런 생각을 일으키던 않던 
이런 망상분별을 갖고 대하던 대하지 않던 
원래 본 상태가 그렇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가 수행을 통해 
새삼 공한 실재를 어떻게 달리 변화시키거나 
본래 얻지 못하는 내용을 어떤 특별한 수행으로 
얻어내야 한다고 그런 내용을 제시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본 사정이 그렇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에 준해서 현실을 그런 측면으로 대해 
집착을 제거하고 생사고통을 벗어나는 것과 

본 사정이 본래 그런데도 
그런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이 생각하고 대하는 내용이 
실다운 실재에도 그처럼 실답게 있다고 여기면서 
집착을 일으킨 가운데 생사고통을 겪어 나가는 것은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실상을 올바로 관하는가
관하지 못한가는 
그 차이가 어디에서 있게 되는 것인가하면 
실재의 영역에서 있는 것이 아니고 

본래 각 영역에서 얻을 수 없는 도너츠를 놓고 
그것이 실답게 있는 것이라고 여기면서 임하는
그런 현실 영역에서 
그런 차이가 있게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원래 수행이 필요한 것은
생사고통을 본래 얻을 수 없는 실재의 영역 등에서
그런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본래 각 영역에서도 얻을 수도 없고
집착을 가질만한 실다운 것이 아님에도
그런 내용을 실답게 있는 것이라고 망상을 일으킨 가운데
실답지 않은 생사고통을
대단히 생생하고 실답게 여기면서 고통을 겪는
그 측면이 문제가 되어
그 고통을 그 부분에서 해결하고 벗어나기 위하여 
처음 수행이 문제되고 제시된 것이다. 

그래서 본래 그  내용을 얻을 수 없는 
각 영역은 본래는 그런 수행이 필요없고 
수행을 해서 
본래 공한 실재가 다시 공해지거나 
공하지 않게 되거나 하는 것도 아니고 

그 반대로
본래 공하지 않던 것이
그런 수행으로 새삼 공하게 되고
수행자는 수행자대로
다른 이들이 얻지 못하는 그 공을
직접 획득하게 되는 차이가
실재 영역에서 부터 있다고 보는 것도 아닌 것이다. 


그 차이는 그 실재 영역에서 있는 것이 아니고 
그런 사정을 올바로 관하여 이해하고 깨닫고 
현실을 대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실답지 않은 생사를 생생하게 겪는 현실 영역에서 
그 차이가 있게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무언가 내용이 비슷하지만, 
서로간에 내용을 명확히 잘 구분해서 
서로 간에 혼동을 일으키지 않고 잘 임해야할 내용들이 
분명 있는 것이다. 

그것이 대단히 서로 혼동을 일으키는 사정이 본래 있기에 
현실에서 살아가는 거의 대부분의 생명이
그렇게 전도된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현실에
그러한 상태로 생사고통을 받아나가는 것이므로

그처럼 서로간에 혼동이 잘 발생하게 되는 그 문제가
바로 그런 내용을 대하면서 전도몽상을 일으키고 임하게 되는 
그 사정이기도 한 것이다. 


침대에서 꿈을 너무 실답게 진짜처럼 꾼 다음 
꿈을 깨고 나서 꿈 내용을 가지고 
현실을 대하는 가운데
현실을 그 꿈 내용을 기준으로 하나 하나 따지고 음미하고 해석하면 
이것을 무슨 현상이라고 보게 되겠는가. 

몽유병 증상과 유사한
꿈 망상증이라고 할 만한데 
그러나 꿈의 경우는 그런 혼동을 덜 일으키고 
잘 정리가 되는데 

이와 관계가 유사한 부분에서는
그것이 잘 안 되고
감각현실을 얻는 가운데 
이에 바탕해 관념분별을 일으켜 행하게 되는 상황에서는 
대부분 이 망상증에 붙잡히게 되는 사정이 있음을
위에서 제시한 것이다. 

그리고 실재의 정체에 대한 논의가 이뤄질 때는 
바로 그 처럼 망상분별을 행한 내용을 가지고
곧바로 실재의 문제로 진입해 들어가는 것이 
또 문제를 심화시키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한번 현실에서 얻는 내용을 바탕으로
그 증세를 일으키면 
그렇게 자신이 생각으로 일으킨 온 내용은 
자신이 무언가를 대하고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사정만으로 
그 내용들은 다 그 영역에 그처럼 실답게 있는 것이라고 여기는 가운데
그 내용을 그런 영역에 밀어 넣어 버리고 
그것이 바로 그 영역의 그 내용이라고 
고집하는 증상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실재가 이렇다 저렇다라고 고집하는 주장은 
그가 현실에서 전도망상에 바탕해서
그렇게 일으킨 생각 내용들이 하나같이 
바로 그에 대한 주장 내용이 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현실에서 이런 입장에서 
이런 주장을 내세우는 이는 
또 현실에서 대단히 집착이 강하고 
억지도 세고 완력도 강해서 
대부분 또 그에 휩쓸려 이끌려 같이 
묶여 나가는 상황이 되는 것도 현실인 것이다. 

그런 입장은 쉽게 비유하면 
자신이 귀로 소리를 듣고
그것이 자신을 욕하는 시끄러운 소리라고 들었다면 
그런 소리는 그대로 
눈으로 보는 영역이나 
코로 냄새 맡는 영역에도 
그런 내용이 그처럼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려는 입장과 같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자신이 어떤 노란 컵을 쥐고 손으로 만지고
두드리면서 그런 가운데 차도 마시고 
그 모습을 보고 있다면 
눈으로 자신이 본 그 노란 색은 
컵을 두드려 듣게 되는 소리안에도 그처럼 있는 것이고 
촉감에도 있는 것이라고 고집하려는 것과 
사정이 같은 것이다. 

그래서 갑자기 노란 소리나 노란 딱딱함 이런 것까지 
있다고 여겨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증상이 심화되면 
침대에서 바다에서 황금을 얻는 꿈을 꾸었다면 
바로 그런 사정 때문에 
그 꿈 속의 바다와 황금은 
침대에 그처럼 실답게 있는 것이고 보아야 한다고 
고집하는 상태가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엉터리임을 쉽게 이해한다면 

실재와 감각현실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의 관계도 
그와 사정이 같다고 잘 이해하고 
이후 

이런 내용을 붙잡고 
그것이 자신이 집착을 갖고 대할 만한 
실다운 내용이라고 여기며 집착을 가지면 
바로 그런 사정으로
그런 바탕에서 자신이 좋음을 구하고 임하면 임할수록 
그와는 정반대로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받는 상태로 
묶여 끌려 들어가게 된다는 사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 본 사정은 본 사정대로 잘 관하고 
그 바탕에서 이와는 반대되는 뱡향으로
수행은 수행대로 잘 행해나가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기도 한 것이다. 


한 대만 더 피우고 담배를 끊겠다는 입장이 
무량한 담배를 피우게 되고 
이 순간만 기존의 망상분별에 의존하고 
조금 있다가 망상분별 집착을 끊고 
수행을 해보겠다는 입장이 
무량하게 망상분별을 제거하지 못하고 
생사고통을 받아나가는 경우가 되는 것인데 

몸과 마음이 피로하고 글은 글대로 길기에 그만 써야 한다고 보지만
부족한 부분을 더 조금만 보충해 채워 넣자고 생각하고 쓰다보니
다시 또 대단히 길어졌다고 보게 된다. 

그래도 무언가 중요한 핵심이 빠져 있는 것으로 본다.

세모와 동그라미를 놓고 도너츠가 나타나 있다고 보는 가운데
이들이 서로간에 혼동을 일으킬 때
이런 혼동을 바탕으로 일으키는 전도몽상 편집증세를
잘 정리하고 제거해야 하는데 

이들 내용을 놓고 혼동과 망상분별을 일으키게 되는 사정이 
대단히 뿌리 깊어서 

아무리 설명을 반복해도
그 문제가 말끔하게 정리되지 않고
무언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여전히 남아 있게 된다고 본다. 
그래서 마치 화장실을 다녀오면서 무언가를 말끔하게 닦지 않고 
그 상태로 자리에 앉아 있는 그런 느낌을 자꾸 받는 측면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는 
결국 그런 현실의 본 사정을 잘 이해한 가운데 
또 현실에서
감관으로는 감각현실을 얻고
또 이런 저런 생각도 하게 되는 가운데

그런 상을 그렇게 대하기 쉽다고 할 때

수행자는 이 상태에서
그 상을 어떻게 달리 관하고 대하고 
또 수행은 수행대로 잘 행할 수 있는가.
이런 문제를 잘 정리해서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최종적으로 이 부분에서 
경전에서 비유로 드는 내용이 
바로 
눈병에 걸려서 허공에 본래 없는 꽃을 있는 것처럼 자꾸 보게 되는 상태에서 
병원에 들러 그런 꽃은 자신이 눈병이 걸려서 그렇게 보게 되는 것임을 이해하게 되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눈병 자체는 치유되지 않은 상태여서 그런 이해에도 불구하고 
계속 허공꽃을 보게 된다고 하는 비유상황이 잘 제시한다고 보게 된다. 


즉 환자가 자신이 증상을 이해하는 가운데 
허공꽃을 보는 상태와 
그 증상 자체를 이해하지 봇하고 허공꽃을 대하면서 
그 허공꽃이 그대로 허공에 실답게 있다고 여기는 상태의 
차이가 과연 무언가가 여기 핵심인 것이다. 

그런 이해를 해도 여전히 허공꽃을 보게 되는데 
그런 깨달음과 이해를 갖고 대하는 이는 
이후에는 그에 대해 집착을 갖지 않고 대하게 되고 
그래서 그런 허공꽃으로 인해 
예를 들어 그 꽃을 붙잡으려고 나서서 
벼랑에서 굴러 떨어지는 그런 생사고통을 겪지 않게 되는 
차이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한번 자신이 눈병에 걸려서 그런 꽃들을 보게 됨을 이해한 이가 
이후에 그런 꽃이 보인다고 
다시 그것을 실답게 여기고 그 꽃을 잡으려 헤매 다니겠는가.
이런 비유를 다시 제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한 허공꽃이 
현실에서 자신이 감각하는 현실과 관념분별 사이에 
어떤 망상증상과 관련되는가. 

또 세모와 동그라미가 그려진 비닐에서 도너츠 모양을 새로 보게 된다고 할 때 
어떤 내용을 가리키는가를 잘 음미하면서 
이런 혼등 증상과
전도망상 분별 편집증상과
이로 인해 겪게 되는 생사고통의 문제를
잘 해결해나가야 한다고 본다. 

이 대목에서 
this time or never...
이런 구절이 갑자기 생각난다. 

진지하게 이 문제를 생각하기 위해서 
그리고 건강에 해로운 
담배를 끊기 위해서라도 

다시 옥상기지에 올라가 
담배를 통한 소신공양에
다시 진지하게 임해야 한다고 본다. 
 




mus0fl--Dave - EST-CE PAR HASARD.lrc

옥상기지에 올라가 쉬면서 소신공양을 올리면서 
노래를 듣는데
노래에서 폐암과 위암 증상이 문제된다는 메세지를
듣게 된다.

소신공양이란 수행자가 자신에 대해 상을 갖고
집착을 일으키는 상태를 떠나 
자신의 몸을 태워 공양을 해서 
회신멸지의 상태에 이르른 그런 수행인데 
말 그대로 대단히 행하기 힘든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에서 그런 수행을 하면 곧바로 
응급실 내지는 중환자실에 가게 되고 
사망에 이르게 된다고 보고
조금 극단적인 수행으로 보는데
그러나 여하튼 수행은 이런 생사문제를 초극해 벗어나는 것을 
기본 목표로 하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위에 올리는 노래도 또 듣게 되는데 
여기서 무원무작 삼매와 관련된 메세지나 
기세간과 관련되 내용도 언급된다고 보기에 
이 곡을 올리고 

글을 마치면서 조금 부족하다고 보는 세 논점을 
다시 보충하고 마치고자 한다. 


글이 길지만, 페이지를 나눠 올려도 마찬가지고 
어차피 금강경이 뽑힌 페이지에서 
이들 문제를 다 살피는 것이 오히려 낫다고 보게 되기도 한다. 


앞에서 공 해탈 공삼매와 관련해 
실상의 공함은 
그렇게 실상을 보던 보지 않던
또 어떤 수행을 하던 하지 않던
실재는 본래 그렇게 공한 것이라고 제시했는데 

그러면 현실에서 행하는 수행은 
이런 실재의 공함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를 
보충해야 한다고 본다. 

본래 실재의 공한 측면만 놓고 보면 
현실에서 문제삼는 일체의 문제나 생사고통은 
이 측면에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이고 
바로 그런 상대적인 측면에서 
본래 공한 실재는 그런 생사고통을 떠난 청정한 니르바나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수행은 본 바탕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그런 본바탕에서  
실답지 않은 내용을 일으켜 얻은 후
그런 내용이 덮여져서 그런 청정한 니르바나를 가리고 
생사고통을 받는 상황이 문제인 것이고 

따라서 수행은 바로
이처럼 본래의 청정한 바탕 위에 덮여진 내용들을
걷어내 제거하는 것을 기본적 수행 목표로 일단 삼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에서는 많은 감각을 행하고 
그리고 다양한 분별을 행하는 것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보게 되지만, 
수행에서는 이런 내용이 모두 청정한 니르바나라는 본 바탕을 
휘젖고 본 바탕을 놓고 생각하면
손님이나 티끌 먼지와 같다고 할 더러운 객진번뇌와 망상분별을
덮어 씌워 놓여진 상태라고 보는 가운데
현실에서 이런 객진 번뇌 망상을 거두어 내서 
본 바탕의 청정한 니르바나의 본래 상태대로 
드러나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측면은 객진번뇌와 망상번뇌가 뒤덮여져 있던 상태를 기준으로 하면 
그런 수행으로 새삼 없던 상태를 새로 얻어내는 것처럼 
이해하게 되지만, 
그런 수행으로 얻는 상태로서 생사를 떠난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라는 것은
본래 그렇게 그런 상태의 내용으로 있던 것을 그렇게 다시
회복하는 그런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을 통해 얻는 이런 상태를 이계과로 표현할 때

이런 상태는 망상상태에서 보면 수행을 통해 얻는 결과상태라고 보지만,
정작 그 이계과는 그 수행을 원인으로 얻는 결과는 또 아니라고
보는 내용인 것이다.

그러나 여하는 일단 수행의 기본적 목표는
본래의 청정한 니르바나 상태를 뒤덮고 있는
객진번뇌와 망상분별을 제거하고 거두어 내서
본래의 상태를 본래의 상태대로 회복해 내어서
생사고통을 벗어나는 상태에 이르는 것을 
기본 목표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의 망상분별 상태에서는 대단히 집착하고 대하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모두 제거해서
원래의 본 상태만 남기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어서
이를 회신멸지의 무여열반 상태라고 표현해 제시하는 것이다. 

글자 그대로 몸을 태워 제거해서 재로 만들고 
마음을 가득 채우고 더럽히고 있는 객진번뇌 망상분별을 모두 제거하는 
상태를 멸지라고 표현해 제시하는 것이다. 

이것이 망상분별을 기준으로 삼고 대하면 
대단히 집착을 일으킬 만한 내용을 거꾸로 
다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제시하니 
오히려 이로 인해 생사고통을 벗어난다고 해도
오히려 이것이 더 공포스럽다고 여기게 되는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그것이 또 소신공양이란 수행을
일반적으로 대단히 공포스럽게 여기고 대하게 되는 연유이기도 한 것이다. 


두번째 보충할 부분은 
여하튼 생사현실에서 
여러 사정으로 생사고통을 겪고 받아나가는 상황에서 
평소 자신이나 자신의 몸이나 생명이라고 여기고 대하는 것들을 놓고 
이에 상을 일으켜 취하거나 머물지 않고 안인 수행자세로 임하게 되면 
그로 인해서 몸만 상하고 죽음에 이르고 
그래서 그렇게 임한 수행자는 
일반적으로 각종 병과 사고로 죽음에 이르는 경우처럼
단지 그로 인해 사멸되어 없어진 것 뿐이지 
수행을 그렇게 행하여 임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무슨 대단한 차이가 있다고 할 것인가. 

이렇게 일반적으로 대하기 쉽다고 보는 것이다. 

금강경에서 가리왕과 인욕선인의 사례를 들어 
상을 제거하고 안인을 성취하는 내용을 제시하는데 
현실에서 그런 상황을 대하는 입장에서는 
아무리 이론적으로 그런 내용을 이해한다고 해도 
앞과 같이 이것을 대하고 
쉽게 그러한 상태에 이르지 못한다고 일반적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경전에서 제시된 내용은 내용이고 
말은 말이고 이론은 이론이고 
그러나 현실은 현실이고 현실은 현실대로 다르다고
대부분 보게되는 것이다. 

그런데 수행을 경전에서 제시된 것처럼 임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어떤 차이가 있다고 할 것인가. 
물론 경전에서 그 과보를 제시하지만, 
그것이 왜 그런가 이것을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앞 내용처럼 본래 전도망상을 일으킨 가운데 
자신이나 자신의 몸이라고 집착하고 대하는 내용은 
그 자체로도
이미 앞에서 살핀 것처럼 실재의 지위에 있는 실상도 아니고
실다운 내용도 아닌 것이지만, 

또 현실에서 일정한 분별을 통해
무언가를 자신이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그런 내용에 해당하는 것도 또 아닌 것이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런 식으로 내용을 제시하면서 
자신이란 존재를 자신이 생각하는 활동과 결부시켜 
자신을 찾아나섰다면 
본래 그런 입장에서도 
자신이 자신의 몸이나 마음이라고 대하는 그런 내용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도 함께 이해해야 하는데 
앞 내용은 그럴 듯한데 
그런 내용으로 붙잡는 것은 
엉뚱한 것이라는 의미다. 

그래서 이를 비유하면 
몸이 자신의 몸을 찾는데 엉뚱하게 
몸에 걸치고 입는 옷이나 신발이나 
몸에 붙어 있는 껌을 가지고 
자신의 몸이라고 여기면서 그것을 대하고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옷이나 신발이 어디에 빠지거나 걸리면 
그에 함께 그 몸도 함께 묶여 그 상태로 들어가서 
본래 그 옷이나 신발은 그것대로 두고
몸만 벗어나오면 될 것인데도 
잘못된 분별과 집착으로 잘못 행하여 
옷과 신발이 물에 빠지면 몸까지 함께 그것을 
찾으러 들어가서 
본래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을 겪게 된다는 
비유와 상태가 비슷하다고 보는 것이다. 


현재 자신이 자신의 몸이라고 보고 
자신이라고 보는 내용이 정말 자신이라면 
5 살때 그렇게 대한 내용도 자신일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가 60 세가 되어서 
그렇게 5 살 때 자신이라고 본 그 내용을 모두 
나열해 놓고 생각하면 
그것은 그 순간에는 이미 사멸되어 없어진 것이다. 
그런데 왜 이 경우는 그것을 놓고 
통곡하거나 장례나 제사를 지내고 임하지 않는가. 
조금 이상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처럼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자신으로 여기고 대하는 내용들도 
하나같이 그 사정이 그와 같다고 잘 이해해야 하는것이다. 

그래서 각 순간에 자신이라고 집착을 갖고 대하는 그 하나하나는 
다만 그렇게 망상을 일으켜서
그런 내용에 해당하는 것이 아닌데도 그런 것이라고 잘못 분별을 하는 가운데 
그렇게 집착해 대하는 것일 뿐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망상을 기준으로 놓고 보면 
결국 앞과 같은 이해가 이뤄지는 것이다. 
즉 그래서 그런 입장에서는
경전에 제시된 대로 그런 상황을 그대로 상을 제거하고
평안하게 참고 임했더니 
결국 몸이 상하고 죽음에 이르고 사멸될 뿐이고 
일반적으로 병이나 사고로 죽는 경우와 별 차이가 없다고 
보게 된다는 의미다. 


그런데 그것은 망상분별을 기준으로 생사가 그렇게 현실에 있다고 
여기고 대할 때만 그 내용을 기준으로 그렇다고 보게 된다는 의미다. 

그런데 본래는 어떻다는 것인가하면
본 상태는 본래 그렇지 않다고 이미 제시한 것이다. 

그리고 또 앞에서 처음 제시한 것처럼 
그렇게 본 상태를 잘 관하고 수행의 방안으로 임하는 것과 
그렇지 않고 망상분별 상태로 임하는 것은 

본 상태를 바탕으로 한 근본정신이 이후 생사현실에 임하는 과정에서는 
그 차이가 대단히 극명하게 나타나게 되기에 
바로 이 부분이 대단히 큰 문제가 되는 것이다. 

즉 단순히 100 년간의 삶의 기간만 놓고 
이 안에서의 내용을 기준으로 이 차이를 분별하면 
수행을 하는 것이나 안 하는 것이나 
별 차이가 있다고 보기도 힘들고 
또 어떤 측면에서는 
예를 들어 
현실적으로 대단히 집착하고 대하게 되는 
부나 명예 이런 측면에서는 
오히려 수행자가 수행하지 않고 임하는 경우보다 
더 상태가 못하다고 보게 되는 측면도 
분명 있다고 거꾸로 차이를 보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비유하면 
봄철에 곡식이 부족한데 
가을 수확을 위해서 씨를 밭에 뿌리는 농부는 
그 봄 기간만 놓고 보면 
나중을 생각하지 않고 
당장 모든 곡식을 다 배불리 먹고 지내는 다른 이보다 
상태가 더 못하다고 보게 되는 면도 분명 있는 것이다. 

또 왕자나 왕으로 지내는 것과 
출가 수행자가 되어 구걸을 행하며 수행하는 것 가운데 
현실 일반의 입장에서는 왕자로 지내는 것이 훨씬 
나아 보인다고 여기는 착시현상도 그런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좁고 짧고 얕은 협단천 관찰과
넓고 길고 깊은 광장심 관찰에서의 차이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이런 측면에서는 
이후의 생사고통을 분단생사과정을 통해서
무한히 받아 나가는 것과 
무량한 기간 생사현실에 임하더라도 
변역생사과정을 통해 무한한 기간을 이어가면서 
생사를 떠나 수행에 임하고 
무량한 복덕과 지혜자량을 구족하는것과의 
차이가 이로 인해 나타나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수행자가 생사고통을 벗어난다는 
수행목표는 사실은 
100 년안의 겪는 삶의 고통문제도 문제지만, 
그보다는 무량한 기간을 놓고 겪게 되는 
생사고통을 문제로 놓고 이 해결을 위해 
수행에 임하는 차이가 본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입장 차이를 잘 이해하고 
망상상태에서 보는 차이는 
망상인 것이어서 
본래의 사정과는 대단히 동떨어진 
엉터리 판단임도 함께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현실에서 이 자체가 시정이 안 되고
매 경우마다 생사나 생멸이 그처럼 실답게 있다고 여기면서
그 각 내용을 대하는 것이
곧 앞에서 지적한 망상분별 편집증의 증상이기도 한 것이다. 



또 하나 보충해야 한다고 보는 문제는 
글을 쓰다가 잊어 버렸다. 
생각나면 다시 적기로 한다. 



앗 생각났다. 

앞에서 허공 꽃의 비유를 다시 들었는데 
현실에서 그 존재의 정체나 그 유무가 문제되는
실재나 감각현실 관념분별 각 내용 가운데 무엇이 
본래 실답지 않은데 실답게 있다고 여기는 허공꽃과 같은 것인가가 문제될 때 
사실은 이 세 영역의 내용이 다 그와 같다는 사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허공꽃 비유에서 허공꽃이 본래 실답지는 않지만 
그러나 그런 내용이 나타나 보이게 되는 것이어서 
그래서 전혀 아무 것도 없는 것은 아니라고 하게 되듯, 
이 세 영역의 내용도 사정이 그런 것이다. 

그것은 또 꿈과 그 성격이 같은 것이다. 
꿈도 그 내용이 실답지 않다고 지적할 때 
그런 내용은 꿈꿀 때 그 조건 그 상황에서만 그런 내용이 나타날 뿐
현실에서는 그에 해당하는 내용을 얻지 못하고
거기에서 기대하는 다른 내용도 얻을 수 없기에
그것이 실답지 않다고 지적한 것이고  
또 사정이 그렇기에 그런 실답지 않은 꿈내용을 놓고
집착을 갖고 임하지 않아야 함을 제시한 것이지


그러한 사정 때문에 
자면서 꿈을 꾸더라도 그런 꿈내용은 전혀 없는 것이라거나
또는사정이 그렇기에 살아가는 동안 꿈을 꾸면 절대 안 된다거나 
그런 실답지 않은 꿈을 절대 꾸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 두 내용을 서로 혼동해 오해하면 곤란한 것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제시한 내용들에서도 
그런 오해를 하고 대하면 곤란한 것이다. 


그래서 존재의 정체나 그 유무가 문제되는
실재나 감각현실 관념분별의 내용은 

하나같이 그것을 실답게 보아야 할 요소가 
각 영역의 내용에서 결여된 상태인 것이어서 
그런 측면에서 그 각 내용은 
집착을 갖고 대할 만한 실다운 내용이 아님을 
기본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로 이런 측면에서 
생사고통을 제거하고 벗어나는 각 해탈문을 
제시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본바탕이라고 할 실재는
참된 진짜의 내용이 없고 무아 무자성이라는 측면에서
실답게 볼 요소가 결여된 것이고 


감각현실을 감각현실대로  
역시 꿈과 같이 실답지 않다는 측면을 갖지만
다시 이에 덧붙여 
그것은 현실에서 비록 생생하게 매순간 그 내용을 얻어도
그것은 하나같이 여러 조건이 화합해서 그런 상태로 얻는 내용일 뿐
그런 관계를 떠나 실재하고 모든 존재의 본 바탕이라고 할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은 아니라는 측면에서
이런 감각현실은 그것을 실답다고 볼 요소가 결여된 것임을 지적하게 되고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일으키는 관념분별을 관념분별대로 
다시 그 내용에는 그 내용을 통해 가리키고자 하는 내용 
즉 감각현실에서 얻는다고 보는 그런 모습이나 성품이 
사실은 그 안에 없고 결여된 측면을 다시 갖기에 
앞의 내용에 비해 한층 더 실답게 볼 요소가 결여된 상태의 내용임을 지적하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므로 이 각 내용을 대하면서 
그것이 실다운 내용이라고 여기면서 집착을 갖고 대하면 곤란하고 
오히려 이런 사정을 잘 관해서 
이런 측면에서 집착을 제거하고
생사고통을 벗어나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내용이 실답지 않다고 제시할 때 
앞에서 꿈의 비유에서 꿈이 실답지 않다고 하면
이로 인해 꿈 자체가 전혀 없는 것이라고 극단적으로 나아가는 경우처럼 

이런 내용이 실답지 않아서 집착을 가질만한 실다운 내용이 아님을 제시하면
그로 인해 이 내용 자체가 전혀 없다거나
그런 내용을 제거해야 한다고
극단적으로 오해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것이다. 

이들은 비록 그 각 내용이
집착을 갖고 대할만한 실다운 요소를 결여하고 있지만, 
그러나 젼혀 아무 것도 없는 그런 것은 또 아닌 것이다. 

그리고 앞과 같이 그에 대해 집착을 제거하고 생사고통을 벗어난 입장에서는 
이들 내용은 오히려 
현실의 본 정체를 올바로 관하여 살피고
더 나아가 현실에서 생사고통을 겪는 입장을 제도하는 데 있어서
대단히 긍정적인 측면을 갖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이런 사정으로 
실재는 비록 무아 무자성인 상태이기는 하지만, 
이런 실재 진여를 원성실상이라고 제시하고 
또 나머지 내용들은 내용대로 
의타기상 
변계소집상과 같은 표현으로 
제시하게 되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하튼 허공꽃의 비유를 통해 
무언가 실답게 볼 내용이 아닌데 
그러나 실답게 여기면서 대하게 되는 무언가를 허공꽃의 비유로 제시할 때는 
기본적으로 위 세 영역의 내용이 다 그처럼 실답지 않기에
이들 내용도 물론 그런 내용이라고 보지만,
그러나 그 보다는 이런 바탕에서
다시 전도망상을 일으켜 집착을 갖고
그래서 생사고통을 받게 하는 그런 내용에 중점을 두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즉, 현실에서는 위와 같은 바탕에서 
감각현실과 관념을 함께 얻게 되면 그 상태에서 
망상을 일으켜
비닐판 마술 비유에서 도너츠처럼
원래 각 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는 내용을 놓고
그것이 각 영역에서 그렇게 실답게 있는 내용이라고 여기면서
집착을 갖고 업을 행하여 생사고통을 받아나가므로
그 내용을 허공꽃에 비유하여 제시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어차피 실답다고 볼 요소가 결여되었다는 점에서는 
이들 각 내용은 다 마찬가지라고 할 것인데 
그러나 현실에서 생사고통을 받는 문제를 기준으로 살피면 
각 내용은 차이가 다시 있는 것이다. 

즉, 앞의 각 영역의 내용은 비록 실답다고 볼 요소는 결여된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들은 하나같이 현실에서 문제삼는 생사고통을 얻을 수는 없는 것이기에 
그런 점에서 이들은
그런 생사고통을 떠난 청정한 니르바나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비닐마술에서 도너츠 모양이 나타나 보일 때
이 도너츠가 그처럼 각 영역에 실답게 있다고 여기면서 
생사고통을 생생하고 실답게 겪어 나가는 상태와는 다르다고 
일단 구분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무슨 생각을 하거나 
만화에서 어떤 내용을 하나 보게 되면 
그 내용이 하나같이 실답게 다른 영역에서도 그런 내용이 있다고 
여기면서 대하면 

원래의 관념분별에 해당하는 동그라미를 
다른 영역의 세모와 함께 접착시켜 
그 동그라미는 단순한 동그라미가 아니고 
그 안에 세모를 갖고 있는 도너츠 모양이라고 여기는 상태이고 

그와 같은 상태로 실재나 감각현실이나 관념영역을
다 그렇게 대하면서 임하게 되는 것이 문제라고 보는 것이다. 

생사나 죽음이나 왕래나 유무를 따질때 
그 관념이나 단어만 놓고 따지면 그것이 무슨 문제이겠는가. 

이런 관념만 순수하게 살피면,
어떤 이가 뿔이 달려 있고 방망이를 타고 하늘을 날라다니는 도깨비란 것은 
없다고 주장할 때도 
그런 주장을 하는 그 순간
그런 관념은 그 관념영역에 그렇게 있는것이다. 

그런데 또 이렇게 관념 형태로만 있는 관념은
설령 그렇게 있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문제가 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그런 도깨비가 정말 있는가 없는가를 따지는 입장들은 
그렇게 관념영역에서 관념형태로 그런 내용이 있는가 없는가를 놓고 

따지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어떤 관념을 일으킨 다음 이것이 있는가 없는가를 문제삼는 경우는 
그에 해당하는 내용이 다른 영역에서 정말 얻어지는가 얻어지지 않는가를 
초점으로 두고 문제삼는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그 본 사정이 어떻다고 제시한 것인가하면 
그 일체는 그렇게 명칭이나 관념일 뿐이고 
본래 그런 것을 다른 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 것이다. 

사정이 그런데도 
그러나 그렇지 않고 
자신이 화분을 대할 때마다 그런 도깨비를 생각하게 된다고 하여서 
그 화분을 붙들고 그 도깨비가 거기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현실의 병원에서 치료하게 되는 망상증이듯, 

이와 같이 자신이 생각하는 내용이 
감각현실이나 실재에 그처럼 실답게 있다고 여기는 것이 
바로 경전에서 제시하는 중생들이 갖는 전도망상증상인 것이다. 

그래서 관념분별을 이런 영역을 향해 행하는 것은 
본래 그런 실다운 내용을 그렇게 얻을 수 없는 가운데
행하는 희론의 성격을 기본적으로 갖는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분별이 단지 희론일 뿐인 것을 이해하고 깨달음녀 
정작 그 희론은 희론일 뿐 그런 문제는 본래 실답지 않다고 이해하는 것이어서 
문제가 안 된다고 또 보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 사정을 그렇게 이해하지 못하고 
본래 희론의 성격을 가질 뿐이 그런 관념분별을 일으키면 
그에 따라 그에 해당하는 내용이 각 영역에 실답게 있다고 여기면서 
이 망상분별을 바탕으로 업을 해하면서
생사고통을 받아나가기에 그것이 문제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다만 현실에서 그런 사정을 이해시키기 위해서라도 
그처럼 본래 언설 명자를 떠난 그런 영역을 가리키는 과정에서
그런 관념과 명칭으로 일정한 내용을 가정적으로 시설한 가운데 
이런 사정을 이해시키려고 노력하는 사정은 또 있는 것이다. 


그래서 금강경에서 부처님이 열심히 분별도 행하고 
설법을 행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나중에는 거꾸로 부처님이
이런 가운데 어떤 한 마디도 설한 내용이 있다고 보는가라는 
질문을 반대로 하시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이를 통해 본래
그 사정이 그렇다는 것을 잘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다. 




여하튼 허공꽃의 비유에서 허공꽃에 해당하는 내용은 
이처럼 실재나 감각현실 관념분별 내용도 다 그런 성격은 갖지만, 

그러나 실답지 않은 허공꽃 가운데 문제되는 허공꽃은 
본래 내용을 얻을 수 없는 생사고통을 겪게 하는 허공꽃 

즉 비닐판 비유에서 든 도너츠모양과 같은
허공꽃이 그 문제가 되는 것이다. 

물론 그 도너츠는 
그런 모습이 나타나 있다고 보이게 되는 사정을 살피면 
각 비닐에 실답지 않게 그려진 세모나 동그라미가  
그 원인이라고 할 수 있기에 
그런 측면에서는 이들 각 비닐의 내용도 다 문제라고 보게 되고 

또 그런 내용이 문제일 때는 
그 각 비닐의 세모나 동그라미의 본 바탕이라고 할 실재도
또 같은 사정으로 문제라고 볼 것이지만, 

그러나 그 영역에서는 

정작 현실에서 문제라고 보는 도너츠를 얻을 수 없기에
그 각각은 일단 문제가 아니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또 그 도너츠도 바로 그런 사정으로 
그렇게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그것은 다른 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이기에 
집착을 갖고 대할 실다운 내용이 아니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은 
가장 기본적으로는

이런 사정을 잘 관하고
각 영역에서
현실에서 겪는 생사고통을  제거하고 벗어나게 하는 
공 무상 무원무작 해탈문을 잘 찾아서 
그 안에 들어가
일단 생사고통을 벗어나고 
본래의 청정한 니르바나 상태에 머무는 것을 
1 차 목표라고 할 것이지만, 


다시 수행자는 그 상태에서 
다른 생사고통을 겪는 중생들을 제도해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하여 
중생들이 생사고통을 겪는 생사현실에 들어가 
수행을 할 것을 또 요구하는 것이다. 

앞과 같은 사정으로 
각 영역에서 실답지 않은 내용을 일으켜 얻고 
최종적으로 도너츠 모양까지 얻는 가운데 
그것이 하나같이 비록 생생하고 
진짜처럼 여겨지는 것이지만, 
꿈과 같은 것이어서 집착을 가질만한 실다운 것이 
아니라는 사정을 스스로 잘 관하는 한편 

그러나 중생들은 사정이 그렇지 못하고 
그것이 그렇게 생생할 뿐 아니라
또 그 내용이 그처럼 각 영역에 실답게 있는 것이라고 여기면서
집착을 갖고 대하면서 생사고통을 겪어 나간다는 사정을 잘 이해하고 

이제 이 현실에서 이런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중생들이 그처럼 실답게 있다고 여기는 그런 
도너츠를 보게 되는 그 측면에서  

중생을 제도하는데 필요한 
복덕자량 지혜자량을 수행자가 
수행을 통해서 잘 쌓아 구족해 놓고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무량방편을 닦아 나가고 
불국토를 장엄해서 
무량한 중생을 다 제도해서
이 각 중생을 생사고통에 벗아나 무여열반의 상태에 이르게 이끌고
성불하는 것이 
다시 수행자의 목표상태가 된다는 의미다. 

그런 내용이 금강경에서 첫 부분에 아개령입 무여열반 이란 구절에서 
제시되고 있는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문제되는 각 측면을 
잘 구분해서 혼동을 일으키지 않고 
수행은 수행대로 원만히 잘 성취해 내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금강경에서 4구게를 수지 독송하는 공덕의 가치를 
다른 가치와 비교해 제시하는데 
왜 가치저울로 가치를 서로 비교할 때 
이런 차이가 나타나는가는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좋음이 
단순히 당장 좋은 내용에 불과한가 

생사고통을 벗어나 
무량하게 좋음인가의 차이에 있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경전 게송을 외우는 것이 중요한데 
그것은 또 게송 구절이 
긴 내용을 압축해서 핵심을 뽑아 짧게 제시하여 
가치가 다시 농축되어 있다고 보기에 
그렇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게송도 외우고 
또 같은 성격을 갖는 
핵심 키워드도 외우고 
경전 제목이나 각 품의 이름도 외우는 노력이 
필요한데 이것은 모두 그 핵심을 
여기에 담아 두고 
무량한 생사기간 이것을 수행자의 보물로 
보관하고 필요한 중생에게 나누어 주고자 하는 취지에서 
그런 것이다. 

이미 상相과  상想의 구분에서 
이런 문제를 지적했는데 

생사과정을 이어가면서 
계속 지니고 가지고 다닐 수 없는 내용이 있는가하면 
그것이 가능하다고 보는 성격의 내용이 또 있는 것이고 

그런 내용 가운데에서도 
각 상태에서 각 중생을 생사고통에서 
벗어나 무량한 복덕과 지헤를 구족하는 상태로 이끌게 하는 
내용이 따로 있다고 보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돈을 갖게 되면 벼랑에서 나무가지를 붙잡고 매달리는 
심정으로 집착을 갖고 대하라
이런 구절을 평소 외우고 다니는 경우가 있다면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이런 구절을 외우면서 
가치의 핵심인 여래를 매 순간 잘 찾고 확보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앞 구절로 현실에서 30조원을 확보하고 
비트코인에 투자해서 한번 10 % 가격이 오를 때마다 
그로 인해 매번 3 조원씩 수익을 거두어서
끝내 300조원을 축적했다고 가정하고 
그 총액을 가치저울의 한쪽 접시에 올려 놓고 
다른 한쪽에 그 주체의 두 눈이나 심장을 올려 놓으면 
그 가치저울이 어느 쪽으로 기운다고 보는가. 


그런데 그 경우와 뒤의 경우는 
이런 가치저울로 가치를 측정할 경우에도 
대단히 차이가 있다. 

그것은 바로 그런 게송으로 
그 주체나 다른 중생들이 
모두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고 
무량한 기간 수행에 잘 임해서 
무량한 수명과 무량한 복덕 지헤를 구족하고 
끝내 일체 중생이 성불의 상태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이어서 
그 가치가 그런  상태로 차이가 있다고 제시하는 사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 



 











문서정보 ori http://buddhism007.tistory.com/3797#1766
sfed--금강반야바라밀경(구마라집역)_K0013_T0235.txt

sfd8--불교단상_2561_12.txt ☞◆vzzt1766

불기2561-12-13
θ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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