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t op tr]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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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잡담 ♥
현재 조각글이 밀려 있다.
마음현상과 관련하여 일정한 내용을 시설하고 이를 통해 문제되는 내용을 잘 제거해내고 이후 그런 시설도 잘 제거해야 한다.
이는 결국 『불모반니원경』에서 제시하는 반니원(반열반)의 문제와도 관련된다.
다만 여러 주제를 다 함께 살피는데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수행이란 어떤 상태를 얻어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 것인가의 문제가 다 함께 서로 관련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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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조각글에서
생사고통을 겪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정한 시설을 한 다음 어떤 것을 제거해야 하는가에 대해 살폈다.
간단히 말하면 다음과 같다. 본래 생멸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각 주체가 전도망상분별을 일으켜 현실에서 그런 생멸이나 생사고통이 실답게 있다고 잘못 여긴다. 그런 바탕에서 생사고통을 겪는다. 그리고 이것이 문제다.
따라서 그런 생사고통을 겪게 하는 근본원인이 되는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그에 바탕해 행하는 업을 중단해야 한다. 그래서 이것이 1차적인 수행 목표다.
이런 취지에서 이런 문제현상을 제거하는 작업을 하기 위해 먼저 일정한 시설을 하는 것이 요구된다.
여기서는 어떤 사정에서 그런 시설을 어떻게 하게 되는가를 살피고자 한다. 이를 위해 어떤 상태에서 각 주체가 생사고통을 겪는가부터 다시 살펴야 한다.
현실 상황이란 예를 들어 다음과 같다. 눈을 감은 상태에서는 무언가를 보지 못한다. 그런 상태에서 눈을 뜨면 그 순간 무언가를 보게 된다. 이는 눈을 통해 얻는 감각현실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어떤 주체가 얻는 감각현실의 성격은 이와 같다.
그리고 매 순간 그렇게 반복해 임한다. 따라서 이런 현상이 익숙하게 된 상황에서는 이런 일이 당연한 일이라고 여기게 된다. 그러나 이 내용을 곰곰히 생각해보면 대단히 불가사의하고 이상한 일이다.
눈을 뜨면 그 전까지는 얻지 못하던 그런 내용을 그렇게 얻게 되는 사정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 내용은 왜 하필이면 자신이 대하는 그런 형태의 모습인가. 그리고 그 본 정체는 무엇인가.
이를 생각하면 대단히 불가사의하고 묘하다.
앞에서 눈을 떠서 얻는 내용을 제시했다. 그러나 다른 감관으로 얻는 내용도 그 성격은 마찬가지다. 또 이에 대해 그 각 부분이 무엇이라고 생각을 일으킬 때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여하튼 각 주체가 대하는 현실은 이와 같다.
그런데 이 현실 안에 극심한 고통이 있는 것이 문제다. 그리고 그 고통의 정체나 그 과정과 원인을 넓고 길고 깊게 관찰하면 현실에서 얻는 그 일체가 다 이와 관련이 되어 있다. 그리고 이 문제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현실의 본 정체를 살핀다.
결론을 먼저 다음처럼 제시하기로 한다.
일반적으로 그렇게 대하는 현실 내용을 놓고 그 내용이 곧 자신이 대하는 외부세계의 내용이고 자신의 감관이 대하는 외부대상이고 자신의 정신과는 떨어져 있고 정신과는 별개의 외부물질이고 자신 뿐만 아니라 모든 주체가 그렇게 얻는 외부의 객관적 실재이고 그래서 그런 내용은 그렇게 실다운 내용이고 이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자신이라고 여기는 그런 부분도 그 사정이 그와 같다고 여기면서 집착을 일으키고 대한다.
그리고 이런 망상분별과 집착으로 인해 생사고통을 겪는다. 이 관계를 혹-업-고의 관계로 제시한다.
이 문제현상을 해결하려면 생사고통을 겪게 하는 근본원인인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해야 한다.
이런 결론에서 보면 현실 내용은 각 주체는 앞과 같은 망상분별을 일으킨 가운데 그런 내용이 그런 현실에 실답게 있는 것이라고 여긴다. 또 그 내용은 자신과 관계하지 않고도 객관적 실재로서 그렇게 있는 내용이라고 이해한다.
그런 현실내용이 자신의 마음 내용이라고 이해해도 그와 같은 내용은 다른 영역에서도 얻을 수 있다고 여긴다. 그리고 본 바탕이 되는 실재 영역에도 그런 내용이 그렇게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현실에서 그런 내용을 얻는다고 여긴다. 그래서 그것은 결국 실다운 내용이라고 이해한다. 그리고 그에 대해 집착을 일으킨다. 그런 바탕에서 매 순간 그런 내용을 대하고 업을 행해 나간다.
그런 상황에서 그런 자세를 제거하고 수행을 행하면 생사고통을 겪지 않고 생사를 벗어난다.
현실에서 그런 내용을 대할 때 그 본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올바로 관하고 그런 상태를 제거해 벗어나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상태에 맞추어 일정한 시설을 임시로 가설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내용을 제시해야 한다. 그래야 그 내용을 통해서 상대가 그 사정을 이해하게 된다.
현실에서 생사고통을 겪는 상황에서 벗어나게 하려면 그 내용이 본래 그렇지는 않다고 보면서도 그처럼 일단 일정한 시설을 가설해야 한다.
삶에서 생사고통을 겪는 것이 문제다. 어떤 경우는 그런 생사고통을 이번에 태어나 살아가는 동안 겪고 자신이 죽음을 맞이하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이고 자신과 관계되는 것은 일체 없게 된다고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사정이 그렇지 않다. 그 이후에도 또 다른 형태로 생사고통을 겪어 나간다. 그리고 그런 생사고통을 무량하게 겪어 나간다.
다만 입장에 따라서는 앞 부분은 인정하지만, 뒷부분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입장 자체가 잘못된 망상분별이다. 그런 망상분별이 해결되지 않으면 지금 대하는 이 순간이나 그런 자신이 예상하는 삶의 기간이 당장 문제된다. 그리고 이에 그치지 않는다. 그런 형태로 매 순간 임하며 어떤 계기를 통해 이를 해결해 내지 못하면 그런 자세로 무량한 겁에 걸쳐서 그런 형태로 생사에 묶이게 된다. 그래서 극심한 고통을 받는 3 악도에 묶여 생사고통을 받아나가게 된다.
그리고 지금 대하는 이 현실 단면 하나가 바로 그 한 사례다.
그처럼 대하는 이 현실에 그러한 내용이 있다고 일단 여긴다. 현실에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현실에서 수행이 요구된다.
수행을 통해서 해결하는 생사고통은 다른 영역에서 있는 것이 아니다. 각 주체가 대하는 그 현실단면에 그렇게 있다.
그래서 그런 생사현실과 고통의 정체를 살피는 가운데 그렇게 각 주체가 대하는 그런 생사고통이나 생멸 생사가 있다고 보는 현실은 '본래'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런 현실내용은 그렇게 생생하게 얻지만, 실재가 아니다. 따라서 실다운 내용이 아니다.
또 그 감각현실에도 그가 분별해 생각하는 내용은 얻을 수 없다. 또 반대로 그가 그렇게 행한 분별에도 그런 감각현실 내용은 없다.
그런데 그런 감각현실을 대하는 가운데 일정한 관념분별을 일으킨다.
이는 비닐마술의 비유와 사정이 같다. 세모가 그려진 비닐과 큰 동그라미가 그려진 비닐을 겹쳐 놓고 그 각 비닐에 있다고 할 수 없는 안이 세모인 도너츠가 있다고 여기고 대하게 된다. 이처럼 그 감각현실을 대하면서 일으킨 관념분별을 통해서 그 각 영역에 그런 내용이 그렇게 실답게 있다고 잘못 여긴다.
한편, 본 바탕인 실재에도 그런 내용이 그렇게 있다고 잘못 여긴다. 그런 가운데 집착을 일으킨다.
한편 각 주체는 감각현실을 대하면서 일정 부분이 자신이라고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경우 그런 관념과 감각현실을 접착시킨 가운데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내용은 곧 그런 감각현실의 그 부분을 구성요소로 갖는 그런 것으로 잘못 여긴다.
또 한편 그런 감각현실 일정부분에는 자신이 분별한 내용이 그렇게 '있다'고 잘못 여긴다.
그런 가운데 이들 내용을 대한다.
그리고 이런 내용은 그 본 바탕이 되는 실재에도 역시 그런 내용이 있는 실다운 내용으로 여긴다. 그런 가운데 망상분별과 집착을 증폭시켜 나간다.
『금강경』에서 상을 취하는 현상이 바로 이 부분이다. 그처럼 일반적으로 상을 일으켜 상을 취하고 상에 머물고 그에 바탕해 임한다.
현실에서 평소 눈을 떠서 어떤 내용을 얻는다. 그래서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을 대하면 그 부분이 곧 자신이라고 여긴다. 그런 가운데 그 부분을 취한다. 그리고 그에 바탕해서 모든 행위를 해나간다.
처음에 그런 부분을 놓고 자신이라고 생각을 일으킨 내용도 엉뚱한 관념분별이다. 한편 그런 관념분별내용은 그 영역의 내용이다. 그런데 감각현실에 그런 분별 내용이 있다고 여기는 것도 문제다.
그리고 이렇게 이들 내용을 접착시킨 가운데 그 내용이 본 바탕인 실재에도 그렇게 있다고 여기며 나아간다. 그래서 그런 부분을 그런 자세로 임하는 것이 문제다.
그런데 그런 부분 자체를 얻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부분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그런 내용을 각기 일으켜 얻고 그 내용을 그렇게 대한다는 것이 문제다.
즉 그런 망상분별에 바탕헤 그런 상을 취해서 붙잡고 머무는 것이 문제다. 그리고 그에 집착하고 그에 바탕해 임하는 것이 문제다.
그래서 그런 바탕에서 각 주체가 생사고통을 겪게 된다.
그런데 사실은 본 사정이 그렇지 않다. 그런데 그 사정을 그렇게 올바로 관하지 못한다. 그리고 거꾸로 뒤집힌 전도망상분별을 일으켜 이를 대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그에 대해 집착을 일으키고 업을 행해서 그런 바탕에서 생사고통을 겪게 된다.
따라서 다음을 잘 이해해야 한다. 현실에서 얻는 그런 내용은 그 본 바탕이 되는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이 아니다. 또 한편 그런 실재의 영역에서도 그와 같은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다른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런 내용은 얻을 수 없다.
그리고 한편, 현실에서 각 주체가 얻는 내용에 대해서 앞과 같은 전도망상분별을 바탕으로 수많은 견해를 일으킨다. 이들은 하나같이 거꾸로 뒤집혀진 잘못된 망상분별이다.
그래서 그런 사정을 잘 이해하고 관해야 한다. 그런 가운데 잘못된 망상분별을 제거해야 한다. 그래서 생사고통의 묶임으로부터 일단 벗어나와야 한다. 그리고 이것을 수행의 가장 기본적인 목표로 삼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현실의 정체를 살피기 위해 현실 그 자체를 살핀다. 그리고 존재가 문제되는 다른 영역도 함께 살피게 된다.
그런데 본 사정을 올바로 관하지 못하면 그런 생사고통을 겪게 된다.
이런 취지에서 다양한 논의가 전개된다.
그런데 이런 경우 원래 처음 문제가 그런 상태에서 겪게 되는 생사고통의 해결임을 망각하기 쉽다. 그리고 엉뚱한 주제를 붙잡고 한없이 나아가기 쉽다.
그래서 어떤 영역의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런 여러 시설을 시설하였는가를 잊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현실에서 어떻게 수행을 하여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인지에 대해 초점을 잃지 않아야 한다.
각 부분의 내용은 하나하나 자세하게 살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결국 이 내용은 현실에서 문제로 보는 노병사라는 생사고통이 무명이라고 표현하는 어리석음에 바탕함을 보여준다. 즉, 본래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는 바탕에서 그런 내용을 얻는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이는 반대로 그런 전도몽상분별을 제거하고 그런 망집에 바탕한 업을 제거하면 그런 생사에서 벗어나게 됨을 나타낸다. 그런데 이는 그런 사정을 이해시키기 위해 제시하는 것임을 함께 이해해야 한다.
그 사정을 다시 살피면 다음과 같다.
처음 자신이 눈을 떠 일정한 감각현실을 얻게 된다. 그런 경우 일반적인 입장에서는
그것을 외부세계이고 외부대상이고 외부물질로 잘못 이해한다. 그리고 이를 외부에 있는 객관적 실재라고 잘못 여긴다. 그런 바탕에서 다양한 망상분별을 일으키게 된다.
그런데 생사고통을 받는 가장 근본이 되는 망상분별은 곧 그런 감각현실에서 무언가를 붙잡고 그것이 곧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대하는 내용이다. 이 부분이 가장 핵심이다.
한 주체가 현실에서 무언가 집착을 일으키는 그 근원은 모두 자기 자신과 관련된다.
그 가운데에서도 스스로 생각하는 자기자신이나 자신의 생명이나 신체 재산 가족 등등에 대한 내용이 그 근원을 이룬다.
예를 들어 오늘 아주 먼 곳에서 자신과 별로 관계없다고 보는 무수한 사람이 어떤 재난으로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고 고통을 당한다. 그렇지만, 대부분 마음에 큰 동요를 일으키지 않고 평안하게 임한다.
그런데 사정이 이와 달라서 사고가 발생해 자신의 손이 갑자기 잘라져 피가 흐를 수 있다. 또는 자신의 지갑을 누군가 훔쳐서 가져가기도 한다. 이런 일이 발생하면 앞의 경우와는 달리 대단히 심각한 일로 여기며 전전긍긍하며 대한다. 그리고 그로 인해 다양한 고통을 받게 된다.
그런데 자신과 세계에 대한 잘못된 망상분별이 그 근본원인이다.
여하튼 이런 문제현상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현실내용의 본 정체를 잘 파악해야 한다.
현실에서 어떤 주체가 눈을 뜨면 그 직전까지는 보지 못하던 어떤 내용을 보게 된다. 이 때 그 현실단면 하나를 놓고 그 정체를 잘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결국 한 주체가 자신이라고 여기는 내용도 그 안에 들어 있다. 또 자신이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고 집착하며 대하는 외부세계 내용도 그 안에 그렇게 들어 있다. 그리고 다른 감관을 통해 얻는 내용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이 현실 단면 하나를 잘 붙잡고 그 정체를 잘 확인해야 한다.
그런 사정으로 처음에 자신이 눈을 뜰 때 보게 되는 현실 내용을 잘 붙잡고 그 정체를 자세히 살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그 현실에는 얻을 수 없다고 보는 내용을 일단 그렇게 있다고 임시로 시설해야 한다. 그렇게 살피지 않으면 그런 작업이 곤란하게 된다.
그래서 사실은 이 부분부터 잘 살펴야 한다. 그런데 앞처럼 문제상황에 들어 있는 경우 이 문제부터 잘 파악하지 못한다.
그래서 일단 그런 상태를 전제하고 각 주체가 대하는 그 현실 내용의 본 정체나 사정을 제시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내용들을 통해서 현실 내용의 본 정체가 무언가를 살핀다.
이 경우 이를 실상(實相 dharmatā ; dharma-svabhāva) - 상(相 Lakṣaṇa ) - 상(想 Saṃjña)의 관계로 놓고 이 각 내용의 정체나 그 상호관계를 자세히 살핀다.
이런 논의 과정을 통해 결국은 그렇게 처음에 시설해 제시하는 어떤 내용이 다른 각 영역에 그렇게 있다고 할 수 없음을 제시한다.
현실 내용의 본 정체를 이해하기 위해 일단 일정한 시설을 가설한 다음 그 내용을 살피게 된다.
결국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갖는 일체가 영원하다고 여기거나 어떤 실다운 참된 진짜가 있다거나 실재가 공하지 않고 어떤 내용이 실답게 있다거나 현실에 어떤 생멸이나 생사고통이 본래 있다는 등등의 망상분별을 제거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그런 내용을 언설을 통해 일단 시설한다.
그런 가운데 현실에서 대하는 그 일체는 무상하고 또 현실일체는 고통이고 또 일체는 어떤 참된 진짜라고 할 내용이 없고[무아, 무자성] 또 일체는 본래 생사나 생멸과 같은 문제를 얻을 수 없는 청정한 니르바나이고 또 일체는 그 실재가 공하다는 등의 내용을 제시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내용으로 처음에 가졌던 그런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한다.
그리고 이후 이런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하기 위해 시설한 내용도 잘 제거하게 된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처음 문제된 그런 망상분별은 그렇지만,
그런 망상을 제거하기 위해 언설분별로 부처님이 시설해 제시한 내용들은 부처님이 그렇게 제시한 내용이기에 사정이 그렇지 않고 그래서 그런 내용은 그와는 달리 그처럼 실답게 있다고 또 잘못 여긴다.
그래서 이런 내용을 또 잘 이해하고 그것을 또 잘 제거해야 한다.
이 경우 그런 언설로 시설해 제시한 그런 내용이 그런 시설로 가리킨 그 영역에 그처럼 있다는 집착을 제거해야 한다.
그런데 이 때 그런 언설 분별 시설로 가리킨 그 내용까지 제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또 그 시설로 가리킨 내용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다. 현실에서 거리에 서서 눈을 뜨고 대하면 자동차도 오가고 사람도 여기저기 오갈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눈을 떠서 대하는 그 현실 단면에 그렇게 오고가는 자동차나 사람도 얻을 수 없다 . 또 거기에 있다고 여기는 그런 오고감이나 생멸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그런 감각현실에 그가 생각하는 그런 관념분별 내용이 있다고 잘못 여기면 곤란하다. 또 그런 감각현실이 곧 실재의 내용으로서 실상이라고 잘못 이해하면 곤란하다. 또는 실재의 영역에는 그런 감각현실과 같은 내용이 그대로 있다고 잘못 이해하면 곤란하다. 그래서 이런 망상분별을 제거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그렇게 관념분별로 시설한 그 내용이 거기에 얻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 관념분별로 가리킨 감각현실 내용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즉 눈을 떠서 보게 되는 그런 내용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또 실재 영역도 마찬가지다. 그런 내용이 실상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그런 내용이 실재내용의 지위에 있는 내용이 아님을 의미한다. 그리고 실재 영역에서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그런 내용을 감각현실로 얻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리고 실재영역에 전혀 아무것도 없음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그런 언어시설과 그 시설로 가리키는 내용을 각 영역마다 접착시킨다. 그런 가운데 혼동을 일으킨다.
그래서 그런 내용을 그 영역에서 얻을 수 없다는 내용을
그 영역에 처음 그런 언설 분별이 가리킨 내용도 전혀 없다는 뜻으로 잘못 이해하기 쉽다.
이를 마음현상과 관련해 살피면 다음과 관련된다.
예를 들어 눈을 뜨면 그런 현실 내용을 얻는다. 그 현실에서 그런 현실단면을 얻는 과정을 살핀다.
이 때 그런 내용을 얻게 하는 마음을 직접 보지도 못하고 만지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런 현실내용을 그렇게 얻는 사정으로 그런 마음이 그렇게 있음을 제지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그런 내용을 얻게 된다고 제시하게 된다.
그래서 처음 이렇게 마음을 제시한다. 그러면 직접 보지도 못하고 만지지도 못하는 무언가를 놓고 그것을 마음이라고 표현하며 제시하는 사정을 잘 헤아려야 한다. 그리고 이 부분이 언어 시설이다.
그런 내용을 마음이라고 표현해 제시할 때는 그 표현이 어느 부분에 어떻게 있는 무엇을 가리키는가를 잘 헤아려야 한다.
이 사정을 비사부 여래님의 게송을 놓고 잘 살펴보자.
...
4대(四大-지,수,화,풍)를 거짓으로 빌려 몸으로 삼았고
마음은 본래 생겨남이 없으나
경(境-대상)을 따라서 있게 되었네.
앞에 경(境-대상)이 없다면 마음 또한 없으니
죄와 복도 환(幻)과 같아 생겼다가 사라지네.
●
毘舍浮佛同前劫偈曰
비사부불동전겁게왈
假借四大以爲身 心本無生因境有
가차사대이위신 심본무생인경유
前境若無心亦無 罪福如幻起亦滅
전경약무심역무 죄복여환기역멸
..
그런데 위 게송에 마음을 시설해 제시하게 되는 배경사정이 제시된다.
마음은 어떤 주체가 직접 보거나 만지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런 마음은 현실에서 어떤 이가 무언가를 얻는 것을 바탕으로 시설하게 된다.
현실내용은 그런 마음을 시설할 때 의존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마음을 시설하여 그 정체를 살피게 된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 이들 내용은 실재의 내용이 아니고 실답지 않음을 제시하게 된다.
그런 경우 그 마음은 어떻다고 해야 할 것인가를 잘 헤아려야 한다. 그리고 그 마음은 실다운 것인가를 살펴야 한다. 즉, 마음이 곧 실재인가. 또 반대로 실재가 그런 마음인가도 잘 살펴야 한다.
이런 내용을 살피기 위해서 부처님은 여러 내용을 시설해 제시한다.
이 때 부처님이 그런 내용을 시설한다고 그것이 실재한다고 제시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들 내용이 참된 진짜라고 이해하면 곤란하다. 그리고 근본정신도 진짜의 나의 핵심으로서 <아>라고 이해하면 곤란하다.
그래서 이런 망집을 다시 제거해야 한다. 따라서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취지에서 처음에 시설한 내용을 다시 잘 제거해야 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그처럼 언설(시설)로 일정한 내용을 가리킨다. 이 경우 그렇게 가리킨 내용에 그런 내용이 있다고 이해하면 안 된다.
그러나 그렇게 '가리킨' 그 내용 그 자체 즉 본래 언설분별을 떠난 내용 자체는 그렇게 있다. 그래서 이들 내용도 함께 전혀 없다고 이해하면 곤란하다. 그래서 이를 주의해야 한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한 주체가 눈을 떠서 어떤 현실단면을 얻는다.
그리고 그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처음에 그처럼 눈을 통해 내용을 얻는 마음을 제시한다. 그리고 다시 그런 마음이 생성분화되는 과정을 설명한다. 이를 위해 1,2,3,4,5,6,7,8 이런 여러 정신을 나누어 시설한다.
이 때 이들 내용은 앞과 같은 사정에 있다.
그래서 그런 표현으로 가리킨 내용에 정작 그런 내용은 얻을 수 없다. 그리고 실재에도 그런 내용은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처음에 그런 언어로 가리킨 내용 자체는 그렇게 있다. 이는 언어로 본래 표현할 수 없는 내용이다. 이는 그런 형태로 있다.
근본정신은 매 생마다 결국 1,2,3,4,5,6,7, 과 같은 여러 정신을 분화 생성시킨다.
그리고 매 생마다 계속 이어져 무량하게 존속한다. 그렇다고 그런 언어시설로 표현해 제시하는 내용이 그 영역에 있다고 이해하면 곤란하다.
그렇다고 처음에 그런 언설로 가리킨 그런 내용이 또 아예 없다고 오해하면 곤란하다.
그래서 일정한 내용이 이해가 마쳐지면 그 이해를 위해 시설한 내용을 함께 잘 제거해야 한다.
그런데 어떤 부분의 무엇을 제거하고 어떤 부분의 무엇은 그렇지 않은 것인가를 먼저 잘 구분해야 한다.
논의를 위해서 언어 분별로 시설해 제시하는 내용이 있다. 그리고 그 시설이 가리키는 내용이 있다. 이는 '언설분별을 본래 떠난 그 무언가'다. 이 두 내용 상호간에 혼동을 일으키기쉽다. 따라서 주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