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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2564-03-10_법경경_001 본문

과거조각글/불기2564(2020)

불기2564-03-10_법경경_001

진리와 가치를 고루고루 2020. 3. 10. 14:51



®

『법경경』
K0032 
T0322

법경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 해제[있는경우]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 [pt op tr] 법경경_K0032_T0322 핵심요약





♣0032-001♧
『법경경』




법경

비영리-동일조건변경허락원문번역문

법경경



해제보기

 

법경경(法鏡經)

 

후한(後漢) 안식국(安息國) 안현(安玄) 한역

변각성 번역

 

이와 같이 들었다.

 

언젠가 부처님[衆祐]19)께서 문물국(聞物國)20) 승씨(勝氏)21)의 숲, 

급고독취(給孤獨聚) 장자22)의 동산에서 노닐면서 대중인 비구[除饉] 1,250명과 함께하셨고, 

5백 명의 보살[開士]들과 함께하셨는데, 

자씨(慈氏:미륵)․ 경수(敬首)․ 시기(始棄)․ 규음(闚音)이 보살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때에 수백의 대중들이 에워싸 꽉 들어찼는데, 

부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경을 연설하셨다.

 

■ 그때에 문물성(聞物城)에 이름이 심(甚)인 이가(理家)가 있었는데 ★★

5백 대중과 함께 문물성으로부터 나와서 승씨의 숲, 

급고독취 장자의 동산에 이르러 부처님 처소를 방문하여 부처님 발에 예배하고, 

곧 자리에 나아가 앉았다.


또 이가(理家)인 애우(愛遇)․ 내우(迺遇)․ 선수(善授)․ 대위(大威)․ 

급고독취(給孤獨聚)․ 용위(龍威)․ 체사(諦思)와 함께 있었는데, 

이 5백 무리들과 함께 부처님 처소에 와서 부처님 발에 예배하고, 

모두 부처님 앞에 있는 자리로 나와 앉았다.


그 여러 이가(理家)들은 모두 큰 도를 구하려고 하였으며, 

모두 그 무리들과 더불어 함께 덕의 근본을 이루어
위없이 바르고 참된 도(道)를 결정함이 있었지만, 

유독 급고독취만은 그렇지 못하였다.

 

이에 심(甚)인 이가(理家)가 대중들을 살펴보니, 

이가들이 모여 좌정(坐定)하고 있으므로
자리에서 물러나 일어서서 의복을 정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길게 무릎 꿇고 합장하여 아뢰었다.

“벌써부터 묻고 싶은 긴요한 것이 있었지만, 

부처님께서 어찌 한가한 겨를이 있으셔서
제가 묻는 바를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심(甚)인 이가에게 말씀하셨다.

“여래는 항상 이가를 위하여 한가한 겨를이 있어서
묻는 바를 대답해 줄 수 있으니, 

이가여, 그대는 곧 물을지어다. 

그대가 구하여 찾는 여래의 마땅한 의(儀)와
바르고 참된 도(道)를
나는 마땅히 묻는 대로 연설하여 그대의 뜻을 충족시켜 주리라.”

 

심(甚)인 이가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그렇다면 부처님이시여, 

만일 족성(族姓)의 남녀(男女)가 뜻을 일으켜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를 구하고, 

큰 도를 좋아하고 기뻐하며, 

큰 도를 일으켜 행하며, 

큰 도(道)에 이르고자 하며, 

큰 도에 나가려고 하며, 

큰 도를 알고자 하며, 


일체 중생에게 명령하려 하며, 

중생을 안위(安慰)하며, 

중생을 구호(救護)하여 그 맹서를 말하되, 

‘아직 건너지 못한 이를 나는 마땅히 건네줄 것이며, 

벗어나지 못한 이를 나는 마땅히 벗어나게 할 것이며, 

안온(安穩)하지 못한 이를 나는 마땅히 위안(慰安)할 것이며, 

열반[滅度]에 들지 못한 이를 나는 마땅히 열반하게 하리라’라고 하여

일체 중생의 무거운 책임을 감당하고
중생을 구호하기 위한 까닭에
스스로 이 큰 서원(誓願)을 세웠다면, 


나고 죽음이 약간 많이 나쁜 것임을 알아서
뜻은 한결같고 게으르지 아니하여
나고 죽는 무수한 겁(劫)에도
뜻이 게으르지 아니할 것입니다.

 


부처님이시여, 

혹 어떤 보살은 집을 버리고 도를 닦아서 도품(道品)의 법을 이루며, 

혹은 집에 있는 자도 있으니, 

훌륭하신 부처님이시여, 

중생을 불쌍히 여기시며, 

또한 은혜를 베푸소서.


이 큰 도는 3보(寶)를 일으키는 것이며, 

또한 일체의 민첩한 전적(典籍)들을 오래 머무르도록 하는 것인 까닭에

■ 여래께서는 바라건대
보살로서 집에 있는 자가 덕을 배우는 법을 말씀하여 주옵소서.

부처님이시여, 

무엇을 일러 보살이 집에 있으면서
여래의 가르침을 받들어 범하지도 않고
손상하지도 않는 것이라고 합니까? 


■ 그가 본래 원하는 것은
이른바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이며, 

또한 현세에는 죄 없는 행이 있고, 

후세에는 뛰어난 도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저 부처님이시여, 

보살이 집을 버리고 도를 닦는 자는
미워하고 사랑함을 버리고
수염과 털을 깎고 법의(法衣)를 입으며, 


집에 있을 때는 믿음을 갖고
집을 떠나서는 도를 닦으며, 

그의 가르침을 보이며, 

법식(法式)과 정식(正式)․ 

덕식(德式)을 갖추어 나타내나이다. 




■ 부처님이시여, 

보살의 집을 버리고 도를 닦는 자와
아울러 집에 있는 자는
닦는 것이 어떠하옵니까?”

 


이에 부처님께서 심(甚)인 이가을 찬탄하여 말씀하셨다.

“훌륭하도다, 훌륭하도다, 

이가여. 

이제 그대가 비로소 알았으므로
여래에게 집에 있거나 집을 버린 보살이 행할 바를 묻는구나.


그러므로 이가는 우선 내가 말하는 바를 듣고 부지런히 힘써 잘 생각할지니, 

보살로서 집에 있으면서 도를 닦는 자는 덕(德)과 선(善)의 행(行)을 닦고 배우느니라.”

 


심(甚)인 이가이 가르침을 받아서 듣고 있었다.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이가(理家)여, 

보살로서 집에 있으면서 도를 닦는 자는 마땅히
스스로 부처님께 귀의(歸依)하며, 

스스로 법(法)에 귀의하며, 

스스로 스님들께 귀의할 것이니, 

저가 스스로 덕의 근본에 귀의함으로써 변하여 위없는 참되고 바른 도(道)가 되느니라.

 
이가여, 

스스로 부처님과 법과 스님들에게 귀의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 나는 마땅히 부처님의 몸을 성취하여
서른두 가지 대사(大士)의 모습으로써 스스로 장엄하며, 

또한 그 모든 덕의 근본으로써 서른두 가지 대사의 모습을 이룰 것이며, 

저 모든 덕의 근본을 이룸으로써 곧 정진하여 행할 것이니, 

보살이 집에 있으면서 스스로 부처님께 귀의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라.

 

■ 스스로 법에 귀의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말하자면 법을 공경하며, 

법을 구하며, 

법을 원하며, 

법의 즐거움을 좋아하며, 

법을 높이며, 

법에 의지하며, 

법을 두호하며, 

법을 삼가며, 

법답게 머무르며, 

법의 술(術)을 따르는 것이니, 


법전(法典)을 위함이며, 

법력(法力)을 위함이며, 

법재(法財)를 구하기 위함이며, 

법으로 고요히 다스리기 위함이며, 

법의 일을 짓기 위함이니라.

나도 또한 마땅히 천상과 인간에 이 법을 펼 것이니, 

보살이 집에 있으면서 스스로 법에 귀의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라.

 


■ 스님들에게 스스로 귀의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만일 보살이 집에 있으면서
혹은 구항(溝港:須陀洹)을 보거나, 

혹은 빈래(頻來:斯陀含)를 보거나, 

혹은 불환(不還:阿那含)을 보거나, 

혹은 응의(應儀:阿羅漢)를 보거나, 

혹은 범인(凡人)이 제자의 도를 구하는 것을 보거든, 

그를 공경하여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며, 

스승으로 높이고 예로써 대접할 것이니라.


만일 저 바른 법과 바른 술(術)을 받들어 섬김으로써 이 뜻을 이룬다면, 

또한 나도 마땅히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를 얻었으므로 

경(經)을 풀이해 주어 제자의 덕을 성취하게 하겠지만, 

그를 공경하면서도 또한 그를 부러워하지는 않나니, 

보살이 집에 있으면서 스스로 스님에게 귀의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라.

 




또한 이가여, 

■ 보살은 네 가지 법(法)을 닦음으로써 스스로 부처님께 귀의함이 되나니,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도의 뜻[道意]을 끝내 여의지 않음이요, 

둘째는 받은 것을 끝내 범하지 않음이요, 

셋째는 큰 자비를 끝내 끊지 않음이요, 

넷째는 다른 도[異道]를 끝내 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네 가지 법이 되느니라. 

보살이 집에 있으면서 스스로 부처님께 귀의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라.

 

또한 이가여, 


■ 네 가지 법을 닦음이 스스로 법에 귀의함이 되나니,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모든 법문 말하는 이들을 받들어 섬기고 따라다님이요, 

둘째는 들은 바의 법을 공경함이요, 

셋째는 이미 들은 법의 본말(本末)을 생각함이요, 

넷째는 그 들은 바의 법과 같이 그 능력에 따라 사람을 위하여 분별하고 해설함이니, 

이것이 바로 네 가지 법이 되느니라. 

보살이 집에 있으면서 스스로 법에 귀의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라.

 

또한 이가여, 


■ 네 가지 법을 닦는 것이 스스로 스님들에게 귀의함이 되나니,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제자(弟子)의 도가 나지 못한 것을 나게 하려고 뜻으로써 일체의 민첩함을 기쁘게 함이요, 

둘째는 또한 물건을 저축하고 법을 저축하여 교화함이요, 

셋째는 법이 있는 스님들을 의지하여 믿고 제자인 스님들을 의지하여 믿지 않는 것이요, 

넷째는 제자의 덕을 구하매 그 덕으로써 헤아리지 아니함이니, 

이것이 네 가지 법이 되느니라. 

보살이 집에 있으면서 스스로 스님들에게 귀의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라.

 


■ 또한 이가여, 

집에 있으면서 도를 닦는 이는 여래를 봄으로써 부처님을 생각하나니, 

이것이 바로 스스로 부처님께 귀의하는 것이요, 

이미 법을 들으면 곧 법을 생각하나니, 

이것이 바로 스스로 법에 귀의하는 것이요, 

만일 이미 여래와 거룩한 스님들을 보았다면 그 도의 뜻을 생각하나니, 

이것이 바로 스스로 스님들에게 귀의하는 것이니라.

 





■ 또한 이가여, 

집에 있으면서 도를 닦는 이는 부처님을 만나려고 하여 보시(布施)하나니, 

스스로 부처님께 귀의함이 되며, 

만일 정법(正法)을 옹호하려고 보시한다면, 

이것이 바로 스스로 법에 귀의함이 되며, 

만일 그 보시한 것이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를 이루기 위함이라면, 

스스로 스님들에게 귀의함이 되느니라.

 


또한 이가여, 

집에 있으면서 도를 닦는 이가 만일 어진 이의 행을 닦고 범부의 행(行)을 행하지 아니하면, 

그것이 바로 어진 이의 행이니라.

법으로써 재물을 구하고 그릇된 법으로 구하지 아니하며, 

바르게 하고 삿되게 아니하면 또한 바른 생활[正命]이 되느니라.


다른 사람을 방해하지 아니하고, 

법으로써 이루며, 

재물이 많아도 덧없다는 생각을 하여 그 재보(財寶)를 수용하나니, 

그러므로 항상 흥성해지는 한편 보시하고 공양하느니라.

부모와 지식(知識)과 신하와 형제와 친척을 위하고 공경하며, 

하인과 손님과 시자(侍者)를 보살피고 거두어 주며
또한 교화하여 이 뛰어난 법으로써 중대한 책임을 받는다면, 

이를 일러 중생의 중대한 책임이라 하느니라.

정진하여 게으르지 아니하나, 

만일 중대한 책임을 받지 아니한다면, 

받지 아니함으로 해서 이는 제자로서 제각기 부처님의 지혜인 양 하는 일이라고 하느니라.

 

중생을 성취하는 데에 게으르지 아니하여
몸의 안락만을 생각하지 않고, 중생의 안락을 이루어 주기 위하며, 

이익[利]과 손해[衰]와 헐뜯음[毁]과 기림[譽]과 칭찬함[稱]과
나무람[譏]과 괴로움[苦]과 즐거움[樂]에 치우쳐 움직이지 아니하고, 

세간 법을 초월하여 재물을 넉넉하게 가짐을 기뻐하지 아니하며, 

또 세 가지 길[三道]에서 이로울 것도 없고 칭찬할 것도 없고 기리는 소리도 없느니라.

 

마음에 무엇을 즐기는 것이 없고, 

행할 바를 깊이 생각하여 삼매를 기뻐하며, 

그릇된 느낌으로 보고 아는 것은 반드시 살펴서 바르게 행함이 있고, 

칭찬과 기림의 두 가지에 쏠리지 않고 벗어나서 그 맹서한 일을 얻느니라.

 

다른 사람의 일을 걱정해 주고 자기의 일도 소홀히 여기지 아니하며,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었으나 끝내 그 보답을 바라지 아니하고, 

은혜를 약간 베풀면서 은혜를 알고 갚을 줄을 알며, 

다시 은덕을 행하여 가난한 자에겐 재물을 주고, 

두려워하는 자는 편안하게 하며, 

근심하는 자는 그 근심을 풀어 주며, 

힘이 없는 자를 용서해 주며, 


강한 자는 교만을 덜어내어 지나친 교만과 잘난 체하는 것을 버리게 하고, 

어른을 공경하고 학식이 많은 이를 받들어 섬기며, 

잘 아는 이에게 능히 묻고, 

정직한 것으로 보여 주어 헛되이 꾸미지 아니하며, 

뭇 사람에게 방편의 법이 있거든 덕을 행하여 그것을 구하느니라.

 

많이 듣기 위하여 싫증내지 않고 만족함이 없으며, 

바른 수행과 노력으로 성인과 서로 만나면 성인을 따르고 존경하며, 

많이 들은 이를 섬기고 아는 자에게는 물으며, 

나타난 그대로를 스승으로 삼지 않고, 

비밀스러운 뭇 경전들을 그 들은 바대로 나타내기 위하여 그 뜻을 밝히며, 

일체의 애욕과 오락은 덧없는 것으로 생각하며, 

몸을 아까워하지 아니하여 스스로 그 수명을 보기를 아침의 이슬방울과 같이 여기며, 


갖고 있는 재산도 허깨비나 구름같이 생각하며, 

가족이나 아는 사람이나 손님들을 원수같이 생각하며, 

처자와 남녀는 쓸데없는 지옥같이 생각하며, 

그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일체의 괴로움이라 생각하며, 

토지와 가옥과 만물과 하는 일도 항상 병으로 여기느니라.

 

구하는 바의 덕은 무너지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고, 

집에 있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하며, 

지식(知識)과 신하와 형제와 친속은 지옥의 주인이라 생각하고, 

하루 종일 밤낮으로 다름과 같음을 생각하여 실답지 않은 몸으로써 실다움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며, 

실답지 않은 수명으로 실다운 수명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며, 

실답지 않은 재물로 실다움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느니라.

 

저가 만일 뭇 일들을 예절로써 하여 다른 사람을 공경하고 섬긴다면, 

이는 실답지 않은 몸으로 실다움을 받는 것이요, 

만일 옛적에 많은 덕의 근본을 헐지 아니하고 또한 다시 늘어나게 한다면, 

이는 실답지 않은 수명을 실답게 여기는 것이요, 

만일 간탐을 억제하고 은혜를 베풀고 덕을 베풀면, 

이는 실답지 않은 재물을 실답게 여기는 것이니, 


이는 보살이 집에 있으면서 도를 닦는 어진 이의 행이 되므로
이와 같이하면 죄가 없을 것이요, 

여래의 말씀이요, 

법의 말씀이 되리라. 


또한 그 본래의 서원(誓願)을 훼손하지 아니하니, 

이를 일러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이며, 

현세에 죄 없는 행이요, 

후세에도 또한 뛰어난 도에 떨어진다고 하느니라.

 



■ 또한 이가여, 

보살로서 집에 있으면서 도를 닦는 자는 마땅히 스스로 계율을 받들어 지닐 것이니, 

이를 일러 5계(戒)를 받들어 지닌다고 하느니라. 

그러므로 살생(殺生)하기를 좋아하지 아니하고, 

꿈틀거리는 무리들에게까지 칼과 막대기를 가하지 아니하고, 

사람을 방해하지 않느니라.

그러므로 남의 물건을 도적질하지 않으며, 

자기에게 있는 재물에 만족함을 알고, 

다른 이의 재물은 생각하지 아니하며, 

작은 풀포기나 실낱이라도 주지 않으면 끝내 취하지 않느니라.


그러므로 음욕의 삿된 행을 좋아하지 아니하여 자기의 아내에게 만족할 줄 알고, 

다른 이의 부녀는 눈으로 보기 좋아하지 않으며, 

뜻에 항상 자기를 근심으로 여기고 음욕을 괴로운 것으로 생각하니, 

만일 음욕의 생각이 일어나면 스스로 자기의 아내에 대해 추악하고 고달픈 것으로 관찰하고, 

두려워하는 생각으로 음욕의 일을 수고롭게 여기며, 

두려워서 괴로워하지 않음이 없고, 

그리워하는 것을 덧없다고 여기느니라.


청정하고 즐거운 생각이 뜻에 사무쳐서
이에 이와 같이 나는 마땅히 스스로 닦을 것이며, 

만일 음욕을 생각하는 것이라면 나는 하지 않을 것이니, 

어찌 하물며 자주자주 있겠는가?

 

그러므로 허망한 말을 좋아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으니, 

진실한 말과 정성스러운 말로써 본성을 속이지 않으며, 

마음을 무너뜨리지 않아서 정성이 있는 듯하여 그 보고 듣는 대로 말하며, 

삼가 경법(經法)을 두호하여 몸과 목숨을 돌보지 않는 까닭에 허망한 말을 하지 않느니라.

그러므로 술 마시기를 좋아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으니, 

취하지 않고 미혹되지 않고 서두르지 않아야 하며, 

벌주지 않는 것으로써 온순하게 교화하여 뜻을 강하게 함으로써 바르게 알아야 하느니라.

 

■ 만일 다시 보시의 뜻을 일으킬 수 있다면
가진 것 일체를 나는 마땅히 다른 사람에게 줄 것이니, 

먹을 것을 요구하면 먹을 것을 주고, 

마실 것을 요구하면 마실 것을 주며, 

수레를 요구하면 수레를 주고, 

의복을 요구하면 의복을 줄 것이니라. 
그러므로 사람에게 술[酒]★★을 주겠다는 뜻을 세웠으니,

이와 같이 보시바라밀은 끝이 없느니라. 


이러한 일을 할 때에 만일 어떤 사람이 구하는 것이 있다면 곧 줄 것이니, 

때에 나는 술로써 보시하여 그로 하여금 교화를 받게 하리라.

만일 스스로 아는 것으로 수행을 삼는다면, 

미혹되지 않으리니, 

어째서 그러한가? 


무릇 보살은 중생을 위하여 그가 원하는 바를 만족하게 하여
보시바라밀이 끝이 없기에 오로지함이 이와 같으니, 

보살이 집에 있으면서 술로 사람에게 보시하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느니라.

 

그러므로 이가(理家)여, 

보살은 그 닦고 배운 덕의 근본으로써 변화하여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를 삼으니, 

만일 잘 수행하려면 이 5계를 삼가 두호할 것이니라.

또 마땅히 이와 다른 자도 있나니, 

뭇 사람을 서로 헐뜯는 것이 마땅치 않으므로 다투는 자들을 화합시키며, 

거친 말을 아니하고 부드러운 말을 하며, 

항상 먼저 다른 사람과 말할 적에도 또한 꾸미는 말로써 하지 않고
옳은 말만 하고 법에 맞는 말을 하며 때에 맞는 말을 하며 사실대로 말을 하며, 

또한 어리석은 그물에 들지 않으므로 편안함으로써 중생들에게 베풀며, 

뜻이 어지럽지 아니하여 항상 인욕의 힘으로써 스스로 장엄하며, 

바른 견해를 갖고 삿된 견해를 버리며, 

모든 부처님들께 머리를 조아려 귀의하고 다른 천신(天神)을 위하지 않느니라.

 

또한 이가여, 

집에 있으면서 도를 닦는 자가 혹 마을이나 고을이나 국도(國都)에 있다면
마땅히 그곳에서 경(經)과 법(法)을 옹호할지니라. 


경과 법을 옹호하는 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믿지 않는 자는 믿음으로 교화하며, 

간탐하는 자는 보시로써 교화하며, 

계(戒)를 싫어하는 자는 계로써 교화하며, 

뜻이 어지러운 자는 인욕하는 일로써 교화하며, 

게으른 자는 정진으로써 교화하며, 

뜻을 잃은 자는 사유(思惟)로써 교화하며, 

지견이 삿된 자는 지혜로써 교화하며, 

가난한 자는 부유하게 하며, 

병든 자들은 약으로써 보시하며, 

고독한 자에겐 권속이 되어 주며, 

돌아갈 곳이 없는 자에겐 돌아갈 곳이 되어 주며, 

의지할 곳이 없는 자에겐 의지할 곳이 되어 주니, 

저 일체의 국토와 마을을 위하여 경과 법을 옹호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라.

 


이가여, 

혹 저 보살이 하나로부터 둘에 이르고 셋에 이르며 백에 이르기까지
인민을 교화하여 모두 모든 덕의 법을 닦게 하고, 

저 보살은 곧 자비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중생에게 베풀어 그 일체의 맹세를 굳게 하나니, 

그 맹세하는 말에 이르되, 

‘이 교화하기 어려운 인민에 이르기까지 성취해 주지 못한다면, 

나는 끝내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를 취하지 않으리라. 


왜 그런가 하면, 

지금 나는 이를 위한 까닭에 스스로의 서원을 맹세하였으니, 

나는 정직한 자를 위해서가 아니요, 

아첨하지 않는 자를 위해서가 아니요, 

거짓말하고 속이지 않는 자를 위해서가 아니요, 

계(戒)를 지키는 자를 위해서가 아니요, 

덕이 있음을 경계하는 자를 위해서가 아니요, 

모든 이러한 사람들 때문에 서원으로써 스스로 맹세한 것이며, 

다만 이 사람들에게 경과 법을 알려 주며, 

경으로써 교화하려고 나는 이것을 썼기 때문에
서원으로써 스스로 맹세한 것이다. 


나는 마땅히 그 정진의 행을 항상 굳게 할 것이며, 

그리고 내가 하는 방편은 헛된 수고로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누구든지 본 사람이면 좋아하고 믿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느니라.

 


만일 이가여, 

보살이 살고 있는 집에 와 머무르면서도
일체의 인민들이 다른 나쁜 길에 떨어짐을 슬퍼하지 않는다면, 

그는 보살의 허물이 될 것이니라.

 

■ 이가여, 

비유컨대 동리와 고을과 성읍과 국도(國都)에 용한 의원이 왔는데, 

가령 저 어떤 사람이 그 수명대로 살지 못하고 죽었다면
뭇 사람들이 모두 저 의원의 허물로 여기는 것과 같으니, 

이와 같이 이가여, 

보살의 처소에 와 있으면서도 일체의 사람들이 모두 다른 나쁜 길에 떨어짐을 슬퍼하지 않는다면, 

여래․ 응공․ 정진각(正眞覺)께서는 저 보살의 허물로 여기느니라.

 

이가여, 

그러므로 집에 있는 보살은 스스로 맹세하기를 이와 같이하나니, 

설령 내가 가는 곳의 나라와 마을에 어리석은 자가 있더라도
서로 섬겨서 한 사람이라도 악도(惡道)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과 같으니라.

 






■ 또한 이가여, 

집에 있으면서 도를 닦는 자는 마땅히 집이 나쁜 것을 알아야 하나니, 

집에 있는 것은 일체의 뭇 착한 뿌리들을 해치느니라. 

집에는 생사에서 벗어나는 길이 없으며, 

청정한 법을 해치나니, 

그러므로 집이라고 하는 것이니라.

 


집에 있는 것을 일체의 뭇 수고로움에 있는 것이라고 하며, 

뭇 악한 생각에 있는 것이며, 

뭇 악한 행에 있는 것이며, 

교화할 수 없고 스스로 지킬 수 없어서 어리석고 평범한 사람과 함께 있는 곳이요, 

자세히 살피지 못하는 사람과 더불어 모여 있는 곳이니, 

그러므로 집이라고 하는 것이니라.

 

집이란 바로 이름이 되나니, 

이미 그곳에 있다면 법도에 맞지 않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곳에 있음으로써
자기의 부모와
마음을 쉬고 마음을 수양한 높은 이와 뭇 성인들을 공경하지 않으므로
그런 까닭에 집이라 이르느니라.


고을의 관리에게 끌려가 감옥에 갇히고, 

고문 당하여 매를 얻어맞으며, 

꾸짖으며 자주 권면하다가 죽음에 이르는 것도 모두 이를 말미암아서이니, 

그러므로 집이라고 하는 것이니라.

 

집에 있음으로써 나쁜 길에 들어가게도 되며, 

집에 있음으로써 모든 애욕에 떨어지게 되며, 

성냄에 떨어지게 되며, 

모든 두려움이 있게 되며, 

어리석음이 있게 되나니, 

그러므로 집이라고 하는 것이니라.


저 계(戒)를 삼가 두호하지 아니하여 선정을 멀리 떠나며, 

지혜를 닦지 않으며, 

바라밀을 얻지 못하며, 

바라밀의 지견(知見)이 나지 않나니, 

그러므로 집이라고 하는 것이니라.

 

집에 있으면, 

곧 부모의 사랑, 

형제의 사랑, 

자매(姉妹)의 사랑, 

부인의 사랑, 

자식의 사랑, 

집에 대한 애착, 

재산에 대한 애착, 

자손에 대한 애착, 

갖은 것에 대한 애착, 

싫증내지 않고 재물을 구하는 애착이 있나니, 

그러므로 집이라고 하는 것이니라.


집에 있는 자는 만족하기 어렵나니, 

비유컨대 큰 바다로 모든 강물이 돌아가는 것과 같으니라. 

집에 있는 자는 싫증낼 줄 모르니, 

비유컨대 불이 섶을 얻은 것과 같으니라. 

집에 있는 자는 생각이 많아서 쉴 수 없나니, 

비유컨대 바람이 머물러 그치지 않아서 마침내 침몰함과 같으니라.

 

또 맛있는 음식에 독약이 섞인 것과 같아서 있는 것 모두가 괴로움이니, 

비유컨대 원수와 같고 사이비 지식(知識)과 같아서 사람의 행동을 그르치며, 

성인이 베푼 바의 행이 아니어서 변하여 싸움이 되며, 

번갈아 서로 인연이 되어 항상 불화하여 병통이 많으며, 

선과 악의 행을 행하여서 인연이 있는 곳마다 항상 사람들이 싫어하고 의심하는 바가 되며, 

그릇된 사람에게 있으니 가진 것이 뒤바뀐 까닭에 오히려 착하지 않으며, 

비록 착하다 해도 권모(權謀)와 사기(詐欺)가 있어서
오히려 그 성품과 행동을 보건대 흡사 광대의 몸 같으니 빠르게 바뀌고 변하기 때문이다.

 

흡사 요술쟁이 같으니 처음 이르는 사람끼리 모였기에 그 행동이 성실하지 못하며, 

흡사 꿈과 같으니 일체를 이루거나 패하는 것으로 처음과 끝이 되기 때문이며, 

흡사 아침 이슬과 같나니 빨리 여의기 때문이며, 

흡사 꿀방울과 같나니 조금 맛보기 때문이며, 

흡사 가시 그물과 같나니 빛깔․ 소리․ 냄새․ 맛의 부드러움에 해를 입게 되기 때문이며, 


흡사 바늘구멍의 벌레와 같나니 착하지 않은 생각으로 먹을 것을 삼기 때문이며, 

비유하자면 명령을 어기는 것과 같나니 번갈아 서로 속이기 때문이며, 

항상 두려움을 품고 있으니 뜻이 어지럽기 때문이며, 

많은 이들과 함께 있으니 고을의 관리와 도적과 원수와 나쁜 왕에게 해를 당하느니라. 

이렇게 집에 있는 자는 재미와 낙은 적고 죄악과 과실이 많으니라.


이가여, 

보살로서 집에 있는 자는 집의 나쁜 점이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하느니라.

 




또한 이가여, 

■ 집에 있으면서 도를 닦는 자는 보시(布施)로써 보배[寶]★★로 삼으니, 

만일 이미 보시하였다면 나의 소유가 된 것이지만 만일 집에 있다면 나의 소유가 아니며, 

만일 이미 보시하였다면 이는 보배가 된 것이지만 만일 집에 있다면 이는 보배가 아니며, 

만일 이미 보시하였다면 부유한 재물이 된 것이지만 만일 집에 있다면 재물이 없는 것이며, 

만일 이미 보시하였다면 수고로움이 풀린 것이지만 그것이 집에 있다면 수고로움을 더할 것이며, 

만일 이미 보시하였다면 나가 없음이 되지만 만일 집에 있다면 이미 나가 된 것이며, 

만일 이미 보시하였다면 있지 않음이 되지만 만일 집에 있다면 있음이 되며, 

만일 이미 보시하였다면 다함 없음이 되겠지만 만일 집에 있다면 항상 그렇지 않은 것이 되며, 

만일 이미 보시하였다면 덮어 두호하지 않는 것이요 만일 집에 있다면 두호함이 되며, 

만일 이미 보시하였다면 어진 이의 행(行)이 되지만 만일 집에 있다면 범부의 뜻이 되며, 

만일 이미 보시 하였다면 바라밀의 도에 의지함이 되지만 만일 집에 있다면 삿된 부류에 의지한 것이 되며, 

만일 이미 보시하였다면 부처님께서 칭찬하실 바가 될 것이지만 만일 집에 있다면 어리석은 사람에게 칭찬받는 것이 되리라.

 


이가여, 

■ 보살로서 집에 있으면서 도를 닦는 자는 보시(布施)를 보배로 여김이 이와 같으니, 

그러므로 사람이 와서 요구하는 자가 있으면 세 가지 생각을 하느니라. 

무엇이 셋인가 하면, 

첫째는 착한 벗으로 생각함이요, 

둘째는 바라밀의 도에 의지하는 생각이요, 

셋째는 부지런히 풍부한 재물을 생산한다는 생각이니, 

이러한 세 가지 생각을 내느니라.

 

다시 세 가지 생각을 지으니, 

무엇이 셋인가 하면, 

높으신 여래의 가르침과 훈계를 생각하고, 

삿된 것을 항복시킴을 생각하며, 

복덕(福德)을 바라지 않는 생각이다. 


왜 그런가 하면, 

만일 이 보살에게 누군가 와서 요구하는 자가 있으면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곧 희박해질 것이요, 

희박해지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만일 물건을 갖고 있다면 일체를 아까워하지 않고 보시하리니, 

이것이 탐음(貪婬)이 희박해지는 것이니라.

만일 누가 와서 물건을 요구하는 자가 있으면 자애로운 마음으로 보태주리니, 

이것이 성냄이 희박해지는 것이니라.

만일 보시함으로써 변하여 이 일체를 민첩하게 한다면, 

어리석음이 희박해지는 것이니라.

 



또한 이가(異家)여, 

와서 물건을 요구하는 자를 보았다면, 

오래지 않아 6도(度)의 다함없는 행을 이루게 되리니, 

그것을 이룬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만일 사람이 와서 물건을 요구하는 것이 있으매 능히 아까워하지 않는다면 이는 보시바라밀이 다함이 없는 것이요, 

만일 뜻이 도에 있어서 보시한다면 이는 계(戒)바라밀이 다함이 없는 것이요, 

만일 성내지 않는다면 이는 인욕(忍辱)바라밀이 다함이 없는 것이요, 

가령 스스로 생각하되 ‘무엇으로 먹을 것을 삼으리오?’하여
스스로 그 뜻을 굳게 하고 그 행하는 것을 놓아 버리지 아니하면
이는 정진바라밀이 다함이 없는 것이요, 


만일 보시하려고 하거나 만일 이미 보시하였더라도 침울하지 않으며 후회가 없으면
이는 선정바라밀이 다함이 없는 것이요, 

만일 이미 보시하였더라도 복덕을 바라지 않는다면
이는 지혜바라밀이 다함이 없는 것이니라. 

이가여, 보살이 보시로써 6도의 다함이 없는 행을 이루는 것이 이와 같으니라.

 




또한 이가여, 

집에 있는 자는 그러므로 떠나고 여의어서 화냄과 어지러움을 따르니, 

이별하는 법을 관찰하여 만일 재산을 얻거나 재물이나 미곡(米穀)을 얻거나 남녀를 얻더라도
기쁨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며, 

만일 일체가 무너져 없어진다 해도 생각에 두어 근심하거나 슬퍼하지 않을 것이며, 

이미 ‘이와 같이 만물(萬物)은 허깨비와 같다’고 관찰하였으므로
생각을 머물러 두지 않을 것이니라. 


이는 허깨비 같은 행(行)이기에 이렇게 된 것이니, 

그러므로 부모․ 처자․ 노비(奴婢)․ 자손도 나의 소유가 아니니라.

내가 또한 이것을 소유한 것이 아니요 또한 내가 있는 것도 아니며, 

내가 마땅히 소유한 것이 아니므로 내게 있는 것이 아니나, 


이제 내가 그것을 위하여 죄악을 지었으니, 

다만 현세에만 있을 뿐이요 후세에까지 있는 것이 아니며, 

괴로움만 있으므로 내가 마땅히 두호할 것이 아니로다. 

또 나의 소유라면 저것이 나를 마땅히 두호하리니, 

어찌 나의 소유라 하리오?

 

말하자면 보시로 교화하여 고요하고 청정하게 도의 근원을 스스로 지키며, 

또한 덕의 근본을 간직하고 숨겨야 하니 이것이 바로 나의 소유며, 

내가 있는 곳에까지 이르나니, 

이것만이 곧 나를 따라오는 것이 되며, 

그것은 몸과 목숨을 따르지 않으므로
남녀와 처자를 위하여 나쁜 행을 짓지 않느니라.





■ 그러므로 집에 있으면서 자기에게 부인이 있는 자는
마땅히 세 가지 생각을 할 것이니, 

무엇을 세 가지라고 하느냐 하면, 

항상 있지 않다는 생각과
오래가지 않는다는 생각과
이별한다는 생각이니, 

바로 이 세 가지 생각을 마땅히 해야 하느니라.

 

마땅히 다시 세 가지 생각을 해야만 하니, 

무엇을 세 가지라고 하느냐 하면, 

만일 기쁘고 즐거운 곳에 있더라도 후세에 괴로움에 있을 것을 구하는 것인가 함이요, 

만일 음식을 먹고 있더라도 재앙과 죄악이 있을 것을 구하는 것인가 함이요, 

만일 안락함에 있더라도 괴로움에 있을 것을 구하는 것인가 함이니, 

마땅히 이 세 가지 생각을 해야 하느니라.


마땅히 다시 세 가지 생각을 해야만 하니, 

무엇을 세 가지라 하느냐 하면, 

겹으로 얽매여 있다는 생각과
써버린다는 생각과
세속적인 소유라는 생각이니, 

마땅히 이 세 가지 생각을 해야 하느니라.

 

마땅히 다시 세 가지 생각을 해야만 하니, 

무엇을 세 가지라 하느냐 하면, 

지옥에 들어간다는 생각과
축생(畜生)에 들어간다는 생각과
귀신에 들어간다는 생각이니, 

마땅히 이 세 가지 생각을 해야 하느니라.


마땅히 다시 세 가지 생각을 해야만 하니, 

무엇을 세 가지라 하느냐 하면, 

도깨비라는 생각과
구주(臼注)라는 생각과
색상(色像)이라는 생각이니, 

이 세 가지 생각을 해야 하느니라.



■ 마땅히 다시 세 가지 생각을 해야만 하니, 

무엇을 세 가지라 하느냐 하면, 

나가 아니라는 생각과
주인이 없다는 생각과
빌려서 비유[假借喩]한다는 생각이니, 

마땅히 이 세 가지 생각을 해야 하느니라.

 


■ 이가여, 

이와 같이 여러 가지 일들인 생각을 할 것이니, 

보살로서 집에 있는 이는
마땅히 자기의 아내를 관찰하기를 이와 같이 해야 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마땅히 그 자식도 애착하지 않아야 할 것이지만, 

설령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생각을 천하의 사람들에게까지 두어서는 아니 되느니라.

 

그러므로 마땅히 세 번씩 자기의 뜻을 간할 것이니, 

무엇이 세 번이 되느냐 하면, 

평등한 뜻으로 도를 삼고 삿된 뜻으로 하지 않는 것이요, 

바른 수행으로 도를 삼고 삿된 수행으로 하지 않는 것이요, 

많이 행하지 않는 것으로 도를 삼으니, 많이 행하는 것은 도가 아니니라.

 

■ 그러므로 세 번씩 간(諫)하고 자주 그 뜻을 간하여
스스로 그 ‘아들은 원수’라는 생각을 하되, 

이는 나의 원수요 나의 벗이 아니라고 해야 하니, 

왜 그런가 하면, 

나는 저로 말미암아 자비하신 부처님의 교훈을 어기며 잃어버리고, 

나로 하여금 지나치게 저를 애착하는 마음을 내게 하며, 

또 스스로 그 뜻을 갈아 끊어지게 하기 때문이니라.



■ 그 아들을 사랑하듯이 중생에게 사랑을 베풀며, 

그 자기 몸을 사랑하듯이 자애(慈哀)로움을 중생에게 베풀지니, 

그러므로 마땅히 그 본말(本末)을 관찰하건대
이것이 온 곳도 다르고 내가 온 곳도 또한 다르나, 

중생은 전생에 또한 일찍이 나의 아들이었고, 

나도 또한 일찍이 중생의 아들이었으므로
이 생사의 허물을 이러쿵저러쿵할 것이 없느니라. 

왜냐하면 왕래하는 길에는 문득 떠나감이 있고, 

돌아와 다시 원수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니라.

 


■ 나는 이제 마땅히 스스로 닦아
나에겐 전혀 벗도 없고 또한 원수도 없게 하리니,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업을 지음으로써 아는 사람[知識]이 있게 되고, 

또한 많이 짓고자 해서 지음으로써 원수가 있게 되나니, 

모두 애욕으로써 악(惡)을 지은 것이니라.


■ 일체의 중생 그것은 나가 아닌데, 

너의 뜻은 불가(不可)한 것을 가(可)하다고 여기니, 

불가(不可)한 뜻을 가(可)하다고 하므로
여러 경전을 모두 다 통달해야 하느니라. 



왜 그런가 하면, 

바르게 수행하는 자는 바른 도를 얻으며, 

삿되게 수행하는 자는 삿된 도를 얻는데, 

지금 나에게 삿된 수행은 있지 않고
중생에게도 바른 뜻과 수행만 있으므로
이에 일체의 민첩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니라.


이가여, 

집에 있는 보살로서 모든 물건에
그리워함이 없으며, 

사모함이 없으며, 

맞음이 없으며, 

사랑함이 없으며, 

불가(不可)함도 없는 것이 이와 같으니라.

 





■ 또한 이가여, 

집에 있는 자는 설령 사람이 와서 요구하는 바가 있더라도
만약 그 물건을 주고 싶지 않다면
오히려 마땅히 스스로 그 뜻을 간하기를 자주하되, 

‘가령 내가 이 물건을 보시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 언젠가는 마땅히 물건과 이별하게 되리라. 

만일 죽을 때에 이르지 아니하여도 이 물건은 또한 나를 버리고 떠날 것이요, 나도 또한 이를 버릴 것이니, 

그 보배를 베풀어 주고 마치려면 나는 이 물건을 보시해야만 죽을 때에 뜻에 여한이 없으리라’라고 하느니라.

 

■ 설령 생각을 이와 같이 하여도 저 물건을 보시할 수 없으면, 

이에 네 가지 말로써 사절하여
와서 물건을 요구하는 자에게 사양하고 사절할 것이니라.

무엇을 네 가지라 하느냐 하면, 

‘나는 힘이 없어 뭇 덕을 아직 성취하지 못했다’라고 하는 것이요, 

‘나는 큰 도에 있어서 처음 시작하였기에 보시하는 뜻이 자유롭지 못하다’라고 하는 것이요, 

‘나는 받으려는 소견이 있고 나라는 행(行)이 있으니, 

우선 어진 이에게 가서 할 일이요 나에게 핍박하지 말라’라고 하는 것이요, 

‘나의 보시하는 바의 행을 잘 받들어 행하여 그 받은 바대로 한다면,
이에 그대가 원하는 바를 만족하게 하리라’라고 하는 것이니, 

그리하여 천하(天下)의 사람 중에도 저가 와서 물건을 요구하면
사양하고 사절하기를 이와 같이 할지니라.

 



또한 이가여, 

집에서 도를 닦는 자로서 가령 스승의 가르침을 만날 수 없고, 

그 당시에는 세상에 부처님께서 계시지 않으며, 

경전을 볼 수 없고, 

성스러운 대중과 서로 만나지 못한다면, 

그러므로 마땅히 시방의 여러 부처님께 머리를 조아려야 하며, 


또한 저 전생에 도를 구하여
행하던 바와 뜻과 원이 커서
그 서원이 일체 불법의 덕을 성취하겠다고 한 것임을 생각하고, 



■ 그 기쁨을 대신하여 이에
낮에 세 번
밤에 세 번
삼품경(三品經)의 일을 논하여서
일체의 전생에서 저질렀던 죄악을 자수하고 뉘우쳐 과거를 고치고 미래를 닦으며, 

일체의 부처님께서 슬퍼해 주심을 구하기 위하여 법과 옛일로써 가엾이 여기고 불쌍히 여기며, 

또한 끝없는 수의 다함없는 법으로써 가엾이 여기고 불쌍히 여겨야 할 것이니라.

 




또한 이가여, 

집에 있으면서 도를 닦는 자는 마땅히 사문[息心]의 의식을 알아야 하니, 

그러므로 만일 비구[除饉]의 특수한 사문의 의식을 보면
마땅히 그 법의(法衣)를 공경할 것이니, 


그는 부처님․ 여래․ 응공․ 정진각(正眞覺)의
계(戒)․ 정(定)․ 혜(慧)를 행하는 법복(法服)이며, 

악(惡)이 없음으로써 일체의 악을 떠나니, 

그는 뭇 성인과 선인(仙人)의 표식(表式)인지라, 


그러므로 또한 마땅히 그를 공경할 것이니라.

또한 마땅히 저 비구에게 가엾이 여기고 불쌍히 여김을 더해야 하니, 

이를 따르지 않음은 어짐이 아니니라. ★★

 

입는 의복에 이르기까지 이에
고요한 것․ 조복한 것․ 신통한 것이라 이름 하니, 

여래는 그것으로 표지하여 논쟁을 조정하였느니라.”






■ 여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배우지 못한 자를 마땅히 업신여기지 아니할 것이니, 

그들을 그렇게 대하면 허물이 생기며, 

이 허물을 따르면 과실이 있게 되리라. 



배우지 못한 이도 또한 부처님의 법과 가르침의 요체를 보리니, 

그것은 이른바 사실 있을 수 있는 일이니라.


이와 같이 이 허물을 버리고
그 본말(本末)을 관찰하는 것이 제1의 덕이 되나니, 

반드시 올바름으로 허물을 곧 끊을 줄 아는 지혜가 되어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보살은 서로 소홀히 여기고 멸시하지 말아야 하니, 

이는 때[時]가 여래에게 있는 것이 아니며, 

이는 나에게 있는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하느니라.

그러므로 성내지 않고 화내지 않음으로 그들을 대할 것이며, 



만일 탑묘(塔廟)에 들어가는 자는
탑묘의 문 밖에 머물러서
온몸으로 머리를 조아리고 이에 탑묘에 들어갈 것이니, 

그것은 빈 탑묘이지만, 

그곳은 바로 자비롭고 슬퍼하고 기뻐하고 보호하는 이의 묘탑이 있는 곳이며, 

그곳은 바로 정법(正法)에 머물러 있는 이가 있을 곳이니, 

그곳은 이러하기에 나로 하여금 탑묘에 있게 하였느니라. 


■ 이와 같기에 관직과 지위와 집을 멀리 떠난 자는 이것을 얻게 될 것이니라.

나는 죄업을 깨끗하게 하려고 이에 이와 같이 금제(禁制)를 제정하였으니, 

집을 떠날 뜻이 있는 이를 위해서이니라. 



■ 보살로서 집에 있으면서 도를 얻은 자는 일찍이 있지 아니하였으며, 

모두 집을 떠나 산으로 들어가서 도를 얻었나니, 

그러므로 집에 있는 자를 나무라는 것이니라.

 

집을 버린 슬기로운 이를 칭찬하고 기리니
그 수가 강의 모래와 같이 많으며, 

일체 것을 보시하여 나에게 하루 동안 공양하는 것보다
집을 버리는 것이 더 뛰어나니, 

왜 그런가 하면 보시는 낮은 것이기 때문이며, 

더군다나 믿음이 없고 갚을 줄도 모르는 도적과
나쁜 사람들과 왕자(王者)와 대신(大臣)에게 보시함에랴.

그것은 보시가 아니라
참으로 얻을 것이 있다고 여겨서이니, 

나에게 계행과 명망이 족하다고 여기는 것뿐이리라.

 


그러므로 탑묘에 들어가는 자는
마땅히 일체 비구들이 베푸는 바의 행을 살펴볼 것이니, 

어떤 것이 비구의 지식이 많은 것이며, 

어떤 것이 경전에 밝은 것이며, 

어떤 것이 계율을 받드는 것이며, 

어떤 것이 사명[使]을 받드는 것이며, 

어떤 것이 보살이 법장을 받드는 것이며, 

어떤 것이 산과 늪이며, 

어떤 것이 공양을 받을 만한 행이며, 

어떤 것이 사유(思惟)하는 것이며, 

어떤 것이 도를 행하는 것이며, 

어떤 것이 보살의 도이며, 

어떤 것이 돕는 것이며, 

어떤 것이 일을 맡은 것이냐를 살필지니라.



이렇게 저 일체 비구 대중들이 베푸는 바의 행을 살펴보고, 

그 베푸는 바의 행처럼 행하여서 따라 본받아 행하려고 할지니, 

번갈아 서로 질투함은 마땅하지 않느니라.


만일 마을에서 말하여도 탑묘에 미치는 수가 있고, 

만일 탑묘에서 말하여도 마을에까지 미치나니, 

그러므로 마땅히 말과 행동을 조심하여
탑묘에서는 마을을 말하지 않아야 하며, 

또한 마을에서는 탑묘를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지식이 많은 이를 받들어 섬겨서 듣는 것을 닦으며, 

경전에 밝은이를 받들어 섬겨서 경전에서 해결한 일을 알아야 하며, 

계율을 지니는 이를 받들어 섬겨서 죄에서 벗어나는 일을 알아야 하며, 

보살이 심오한 법장(法藏)을 받드는 것을 받들어 섬겨서 6도(度)의 끝없음과 방편의 일을 밝혀야 하느니라.

 


만일 어떤 비구에게 발우가 없거나 혹은 법의(法衣)가 없으면
마땅히 공급하여 보시해서 사람들에 대해 질투함을 내게 하지 말지니, 

왜냐하면 사람은 질투로써 원결을 맺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마땅히 힘을 다하여
범인(凡人)이 응공(應供)하지 않는 이들도 보호해야만 하니, 

왜냐하면 범인에게는 과실이 있고 응공인 자는 과실이 없기 때문이니라.

 

만일 어떤 비구가 아직 바른 도에 들지 못하여
혹은 법의(法衣)를 쌓아두거나 혹은 발우를 쌓아두니, 

그러므로 저 비구를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로써 인도할 것이니라. 


왜냐하면 그 일에는 마땅함이 있나니, 

그러므로 물건을 쌓아두어 도를 이루기 위함이라면 쌓아둘 것이니라.

만일 사문이 화합하지 못한 자가 있거든 마땅히 화해할 것이요, 


만일 정법(正法)이 쇠퇴하려 하거든
스스로 그 생명이 위태롭더라도 정법을 보호할 것이며, 

만일 아파서 괴로워하는 비구를 보거든
피와 살을 주어서라도 그 병자로 하여금 치유될 수 있게 할지니라.

 

이가여, 

■ 만약 집에 있는 보살로서 만일 보시하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금하지 말아야 할 것이며, 

만일 보시한다면 끝내 후회하지 않아야 할 것이니, 

만일 뭇 덕의 근본이 있으면 이 뜻으로써 머리를 단정히 할지니라.



이가여, 

이와 같은 모든 일과 모든 종류와 모든 마땅함을, 

보살로서 집에 있으면서 도를 닦는 이는 이와 같이 해야 하느니라.”

 




또 부처님께서 집에 있는 보살로서 행해야 할 법을 말씀하실 때에
1천의 사람들이 모두 뜻을 발하여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를 구하였으며, 

다시 천상과 인간의 2천 사람들이 티끌을 멀리하고 때[垢]를 떠나서 법의 눈이 청정해졌다.

 








■ 이에 심(甚)인 이가(理家)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부처님이시여, 

여래께서 집에 있는 보살에게
집의 좋고 나쁨과
또한 보시함과 계행을 지님과 인욕과 정진(精進)과 사유(思惟)와 지혜를 펼쳐 말씀하셨으니, 

이에 큰 도가 마땅히 행하여질 것이옵니다.

■ 부처님이시여, 

집을 버리고 도를 닦는 보살로서 행하여야 할 바를
원컨대 다시 조금이라도 말씀해 주시면 좋겠나이다.

부처님이시여, 

보살이 집을 버리는 것은 어떠하며, 

그 행하여야 할 바는 또한 무엇입니까?”

 



부처님께서 심(甚)인 이가(理家)에게 말씀하셨다.

“훌륭하구나, 

이가여. 지금 그대는 여래에게 집을 버리고 도를 닦는 보살이 행할 바를 묻는구나. 

훌륭하구나, 이가여. 

내 마땅히 그대를 위하여 보살이 집을 버리는 일과 그 행할 바를 말하리니, 

그대는 힘써 정진하며 잘 생각할지어다.”

심(甚)인 이가(理家)는 가르침을 받아 부처님으로부터 들었다.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가(理家)여, 

보살로서 집을 버리고 도를 닦는 이는
머리에 불이 타오르는 것처럼
마치 투구와 같은 정진으로 지혜를 구할 것이니, 


집을 버리는 자는 그 처음에는 이와 같이 할 것이며, 

다음으로는 성전(聖典)을 닦을 지니라.

또 어떤 것을 집을 버리는 자의 성전이라 말하는가? 


이른바 한 벌 의복을 얻으면
만족하게 여기고 또한 훌륭하게 여기며, 

한 끼의 밥과 하나의 평상과, 

병들고 수척함에 한 번의 의약(醫藥)일지라도
만족하게 여기고 또한 훌륭하게 여기니, 

이것이 바로 성전이니라.

무슨 까닭에 성전이라고 하는가? 


저 일체의 도품(道品)을 닦는 법이기에
그러므로 성전이라고 하느니라.

 





■ 또 보살로서 집을 버리고 도를 닦는 자는
열 가지 만족함을 아는 덕이 있어서 몸에 법의(法衣)를 입나니, 


무엇이 열 가지인가? 

부끄럽게 여기기 때문에 몸에 법의를 입는 것이요, 

바람과 더위를 피하려고 몸에 법의를 입는 것이요, 

모기와 등에를 피하려고 몸에 법의를 입는 것이요, 

사문의 형상을 보이려고 몸에 법의를 입는 것이요, 

또한 이 법의(法衣)의 신(神)은 시방의 신(神)이기 때문에 몸에 법의를 입는 것이요, 


음탕한 즐거움[謠樂]을 싫어하고 떠나기에 그러므로 음탕한 즐거움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요, 

청정함을 좋아하기에 그러므로 뭇 괴로움인 낙(樂)을 끊는 것이요, 

살찌고 기름지지 않은 것으로 도행(道行)을 삼음이요, 

거룩한 도의 중대한 책임을 행하려고 나도 또한 스스로 닦는 것이요, 

어느 한때 법의가 있었다면 법의를 입은 것과 같기 때문이니, 


이 열 가지 덕으로써 스스로 관찰하여 목숨을 마칠 때까지
한가하게 고요한 곳에 있으면서 빌러 다니지 아니하느니라.


 

■ 무엇이 열 가지인가? 

나는 스스로 나의 업(業)으로써 생활하고 다르지 않은 업으로써 하지 않는 것이요, 


만일 어떤 사람이 나에게 와서 보시하거든 먼저 3보(寶)께 바친 후에 그 보시를 받는 것이요, 

내가 만약 다른 사람에게 받고자 하거나 만약 다른 사람에게 보시하고자 하지 않는다면 비애(悲哀)를 저에게 보태는 것이요, 

나는 마땅히 수행한 바의 음식을 먹어 여래의 말씀과 가르침을 어기지 않는 것이요, 

만족함을 알아 중대한 책임의 근본을 이루는 것이요,

교만을 항복 받는 것이요, 

볼 수 없는 정수리[無見頂]의 덕의 근본을 이루는 것이요, 

나도 또한 보시함을 보고 그와 같이 스스로 가르치는 것이요, 

만일 가서 걸식한다면 나는 또한 갈 곳을 정해 두지 않고 남녀를 가리지 않을 것이며, 

나의 평등한 뜻으로 천하 사람들이 일체의 민첩한 지혜를 이루는 중대한 책임을 얻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가(理家)의 열 가지 덕이니라. 



■ 집을 버린 보살은
스스로 관찰하여 목숨을 마칠 때까지 고요한 곳에 한가하게 있으면서 빌러 다니지 않으니, 


만일 어떤 사람이 와서 청하되, 

가려고하는 곳에서 그 사람이 도를 믿고 좋아하거든, 

나는 마땅히 그곳에 가지 아니하며, 


설령 가서 먹는다 하더라도
자기도 이롭고 또 남까지 이롭게 할 수 있다면 그곳에 가서 보시를 받을 것이니라.



나는 보살에게 구할 수 있는 것을 가르치니, 

이것이 바로 열 가지 덕이 되느니라. 


■ 스스로 관찰하여 나무 아래에 있으면서 앉고 자고 쉴 것이니라.

무엇이 열 가지인가? 


그가 자유로이 저곳에 가는 것이요, 

저 평상과 누울 것이 있다고 이름하지 않는 것이요, 

문을 닫지 않는 것이요, 

산과 늪에서 사랑을 버리고 떠나 그곳을 거처로 삼는 것이요, 

욕심이 적고 일이 적은 것으로써 덕을 이룸으로 삼는 것이요, 


몸과 목숨을 버리되 스스로 아까워하지 않는 것이요, 

홀로 고요한 것을 좋아하여 그리움이 모여 쌓임을 멀리 떠나는 것이요, 

수행으로 몸을 닦아 먹지 않는 것이요, 

뜻을 정함으로써 한 가지 뜻을 고요하고 편안하게 하는 것이요, 

한가한 곳에서 사유함도 이익이 없다고 여기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이가의 열 가지 덕이니라. 

이로써 스스로 관찰하여 집을 버린 보살이 나무 아래에 거처하면서 머물 수 있는 것이니라.

 

또한 이가여, 

■ 혹 저 보살이 집을 버리고 도를 닦거나 산과 늪에서 노니는 자가 만일 경전을 닦고자 하며, 

만일 이로운 경전을 외우고자 하거든 탑묘에 들어갈 것이니라. 


만일 탑묘에 있으면 뜻이 산에 있고 싶어지나니, 

이것이 오히려 저 산과 늪에 사는 것이 되느니라.


■ 법을 구하는 수행자는 일체의 물건을 내 것이라 생각하지 않으며, 

일체의 모든 법을 다른 사람의 소유라고 생각할 것이니라.

또 보살로서 집을 버리고 도를 닦는 자가
만약 산과 늪에서 노닐고 있다면,
마땅히 스스로 살피되, 

‘나는 지금 어찌하여 이 산과 늪 가운데서 노닐고 있는가?’라고 할 것이니라.

 

다만 산과 늪에 사는 것만으로는 사문이라 이르지 못할 것이니, 

왜 그런가 하면, 

이 사이에는
교화되지 않은 자와
지키지 않은 자와
제도하지 못한 자와
응하지 않는 자와
수행하지 않은 자들도 많이 있어서
모두 산과 늪에 노닐고 있으며, 

이른바 새․ 짐승․ 뭇 새들과 원숭이와 큰 원숭이와 나쁜 사람과 도적들도
모두 산과 늪에서 노닐고 있으나
또한 그들을 사문이라고 하지 않느니라.


내가 산과 늪에 살고 싶어하는 것은
마땅히 내가 구하는 그것을 이루려는 것이니, 

이 사문을 구하기 위해서이니라.

 



■ 또 무슨 까닭으로 보살 사문이라 하느냐 하면, 

이른바 뜻이 어지럽지 아니하여 이것을 얻어 지니고
두루 만족하여 일에 통달한 까닭에
듣는 것에 만족함이 없어서 변재를 얻고, 

자비한 마음을 가져서 결함이 없으며, 

크게 슬피 여기는 마음을 여의지 아니하고, 

오로지 5통(通)으로 말미암아 6도(度)를 일으키매 다함이 없느니라.


■ 일체를 공경하여 뜻으로 가려서 버리지 아니하고, 

방편의 지혜를 행하여서 법의 보시로써 인민들을 모으며, 

인민들이 사방에서 모여드는 일을 성취하되
가려서 버리지 아니하고 또한 은혜로 여겨 생각하며, 

정진하는 것을 들으면 훼손하지 아니하고, 

법의 본말(本末)과 바르게 제도하는 도의 인연을 가려서
지혜가 또한 바른 도에 들지 못했을지라도
정법(正法)을 보호하는 일로 삼느니라.


■ 죄와 복을 믿는 것으로 바른 견해[正見]를 삼으며, 

힘쓸 바를 생각하는 것을 끊는 것으로써 바른 생각[正思]으로 삼으며, 

기뻐하는 바에 따라 법을 설하는 것으로써 바른 말[正言]을 삼으며, 

행함을 따라 다하여서 두루 만족시켜 주는 것을 바른 업[正業]으로 삼으며, 

흠결이 지속됨을 끓어 없애는 것으로 바른 생활[正命]을 삼으며, 

도로써 나아가는 것을 바른 방편[正方便]으로 삼으며, 

잊거나 소홀히 하지 않는 것으로써 바른 뜻[正志]을 삼으며, 

일체의 민첩한 지혜에 이르는 것을 바른 정[正定]으로 삼느니라.

 

만일 공(空)을 얻으면 생각하지 않는 행의 기쁨으로 삼고, 

만일 원(願)하지 않음을 얻으면 세속을 끓는 것으로 삼으니, 

가진 바를 그 뜻에 의지하고 글에 의하지 않으며, 

그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않으며, 

그 지혜에 의지하고 지식에 의하지 않으며, 

본문(本文)의 연의(演義)에 귀의하고 말단의 서의(叙義)에 의지하지 않으므로, 

이러한 이가(理家)를 일러 집을 버린 보살이 사문을 구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 또 집을 버리고 도를 닦는 자는 많은 일에 많이 종사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니라. 

만약 이렇게 그 본말(本末)을 사유한 까닭에 마땅히 일체 중생과 더불어 종사(從事)하지 않는다면, 

명철(明哲)한 이는 다만 한 사람과 더불어 종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네 가지가 있나니, 

이것이 집을 버린 보살이 종사할 것으로서 여래가 가르치는 바이니라.

 

■ 무엇을 네 가지라고 하느냐 하면, 

첫째는 경을 강하는 이와 함께 종사하는 것이요, 

둘째는 성취한 사람과 함께 종사하는 것이요, 

셋째는 여래께 공양하는 이와 함께 종사하는 것이요, 

넷째는 일체의 민첩한 뜻을 발하여 산란하지 않은 이와 함께 종사하는 것이니, 

그러한 이를 제외하고는 많이 종사함이 마땅하지 않느니라.

 



또 보살로서 산과 늪에 노니는 자는 마땅히 스스로 살피되, 

‘나는 무슨 까닭으로 여기에 왔느냐?’라 하고, 

그는 이렇게 사유하되, 

‘나는 두려워하므로 여기에 왔노라’라고 하니,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이 무리들이 모인 것을 두려워하며, 

다른 사람과 함께 음탕하고 성내며 어리석고 교만하며 스스로 방종하는 것에 종사함을 두려워하며, 

나쁜 벗을 두려워하며, 

질투와 간탐을 두려워하며, 

색․ 소리․ 냄새․ 맛․ 매끄러움을 두려워하며, 

공로․ 칭찬․ 공경․ 이로움을 두려워하며, 


보지 않은 것을 보았다 말하고
듣지 않은 것을 들었다 말하고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고 말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며, 



사문의 때[垢]를 두려워하며, 

번갈아 서로 질투하는 것을 두려워하며, 

나고 죽어 5도(道)를 오고가며 타락하는 것을 두려워하며,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두려워하며, 


음(陰)이며 죽음이며 수고로움이며 천자(天子)임을 두려워하며, 

악도(惡道)인 지옥․ 축생․ 귀신을 두려워하며, 

갑자기 닥치는 일체의 시비와 악한 생각들을 두려워하므로
나는 여기에 온 것이요 집에 있을 수 없으니, 

만일 군중들이 모인 가운데 있다면 마땅하지 않은 도행(道行)을 행하여서 저 뭇 두려운 일들을 면할 수 없으리라.

 



■ 또한 저 옛날 보살이 이 여러 가지 두려움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모두 산과 늪에 있었던 힘으로
두려움이 없는 데에 이르렀던 것이니, 

이를 일러 자연(自然)이라고 하며, 

그러므로 나는 두려워함을 벗어나기 위하여 산과 늪에 있는 것이로다.




또 일체의 두려움이란
모두 몸이 살아 있음으로 말미암나니, 

몸을 사모하고 그리워하며, 

몸을 가꾸며, 

몸을 옳다고 여기며, 

몸을 사랑하며, 

몸을 치장하며, 

몸을 생각하며, 

몸을 돌보며, 

몸을 두며, 

몸을 생각하며, 

몸을 보호함으로 해서 생긴 것이니라.

 

가령 산과 늪의 거처에서 노닐면서도
몸으로 말미암은 뜻을 두어서
몸을 사모하고 그리워하며, 

몸을 가꾸며, 

몸을 옳다고 여기며, 

몸을 사랑하며, 

몸을 생각하며, 

몸을 돌보며, 

몸을 두며, 

몸을 생각하며, 

몸을 보호하려는 뜻을 둔다면, 

나는 헛되이 산과 늪에 있는 것이리라.


또 산과 늪에 있는 자는 몸에 대한 생각이 없어야 하며, 

산과 늪에 있는 자는 다른 생각이 없어야 하며, 

산과 늪에 있는 자는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않아야 하며, 

자신을 돌보는 데에 떨어지지 않아야 하며, 

뒤바뀜이 없어야 하며, 

일삼음이 없다는 생각도 두지 않아야 하거든, 

어찌 하물며 복잡한 생각을 하리오.

 

■ 산과 늪에 있는 이를 이름하여
‘일체의 모든 법이 고요하다’고 하며, 

‘모든 법에 집착하는 바가 없다’고 하며, 

‘모든 낙(樂)에도 또한 집착하는 바가 없다’고 하며, 

‘모든 생각으로 애착하지 않는다’고 하며, 

‘빛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부드러움에도 뒤섞여 얽히지 않는다’고 하며, 

‘모든 정(定)에도 자부하지 않는다’고 하며, 

‘뜻을 스스로 정돈하여 산란하지 않다’고 하며, 

‘모든 무거운 짐의 두려움을 놓아 버렸다’고 하며, 

‘크고 넘실거리는 늪을 건넜다’고 하며, 

‘위대한 성인의 경전에 나아갔다’고 하며, 

‘간악(姦惡)한 무리들을 모두 만족할 줄 알게 한다’고 하며, 

‘중대한 책임을 위하여 욕심을 줄인다’고 하며, 

‘지혜로써 만족함을 안다’고 하며, 

‘만족함을 알고, 

만족할 줄 알아 중대한 책임을 위해 욕심을 줄이므로 공양을 받을 만하다’라고 하며, 

‘본말(本末)의 행(行)을 이해한다’고 하며, 

‘일체의 감옥을 끊기 위하여 닦을 바의 일을 마쳤다’고 하니, 

영원히 벗어나 버렸기 때문이니라.

 


이가여, 

비유컨대 산과 늪 가운데 나무나 풀 따위의 지저분한 것들만 있어
전혀 두려울 것이 없고 전혀 무서울 것도 없는 것과 같으니라.

이와 같이 이가여, 

보살로서 산과 늪에 노니는 자는 뜻 가지기를
마땅히 풀과 나무와 담장이나 돌과 같이하여 몸소 느끼고 행해야 하나니, 

저가 누구를 두려워하랴.


그는 두려워함으로써 몸의 본말을 생각하니, 

‘나는 도무지 몸이 없다. 

사람도 아니며, 

목숨[命]도 아니요, 

장부(丈夫)도 아니며, 

무리[類]도 아니요, 

여자도 사내도 아니며, 

짓는 자도 없고, 

짓게 하는 자도 없으며, 

함께하는 자도 없고, 

함께 일어나는 자도 없다’고 하느니라.

 

■ 모든 이러한 두려움은 다만 진실하지 않은 생각으로써 이러한 두려움이 있을 뿐이니, 

이제 나는 마땅히 진실하지 않은 생각으로 있게 된 이 두려움을 짓지 않을 뿐이며, 

이제 나는 진실하지 않은 생각을 짓는 것이 옳지 않으므로
마땅히 나무와 풀, 잡초 따위와 같이하리라.

또한 이와 같이하여 울림[響]이 없이 일체를 벗어나서 저 법을 갖추어 행하며, 

울림을 끊고서 산과 늪에 살면서 음행의 티끌을 버리고 떠나니, 

모든 울림이 없이 산과 늪에 있으므로 나도 아니요 물질이 있는 것도 아니니라.

 

또 산과 늪에 노니는 자는 다시 사유(思惟)하되, 

‘이 도품(道品)의 법을 통달한 이는 산과 늪에 있을 것이다’라고 하니, 

산과 늪에 있는 자는 열두 가지 정(精)을 합쳐 모으기 위함이며, 

산과 늪에 있는 자는 모든 진리를 이해하며, 

산과 늪에 있는 자는 모든 음(陰)을 알아서 모든 정욕(情欲)을 제어하며, 

모든 파고듦[進入]을 억제하며, 

도의 뜻을 잊지 않느니라. 

이는 모든 부처님들께서 찬탄하시는 바이며, 

뭇 성인들이 칭찬하고 기리는 바이니, 

세상을 벗어나려고 하는 자가 할 일이니라.

 

산과 늪에 있는 자는 일체의 민첩한 지혜의 방술(方術)을 이해하며, 

또 산과 늪에서 노니는 자는 오래지 않아 6도(度)의 다함없는 행을 두루 만족하게 되리니, 

그것을 얻은 자는 어떠한가?

 

산과 늪에서 노니는 자가 만일 자신의 몸과 목숨을 스스로 아끼지 않는다면 이는 보시(布施)바라밀의 다함없음이요, 

만일 정진(精進)하는 덕에 의지하여 세 가지 삼감[愼]을 이룬다면 이는 계(戒)바라밀의 다함없음이요, 

만일 뜻이 어지럽지 않고 또한 일체에 민첩하여 도와 다르지 않다면 이는 인욕(忍辱)바라밀의 다함없는 행이요, 

아직 법인(法忍)을 얻지 못하여 끝내 일어나지 않으면 이는 정진(精進)바라밀의 다함없음이요, 

만일 한결같은 마음을 얻은 것으로써 민첩함을 따르지 아니하고 다만 덕의 근본을 높인다면 이는 일심(一心)바라밀의 다함없음이요, 

만일 몸이 산과 늪 같고 도(道)도 또한 이와 같아서 뭇 일들을 분별한다면, 이는 지혜바라밀의 다함없음이니, 

보살이 도로써 얻은 것이니라.

 

또한 이가(理家)여, 

네 가지 법을 닦았으면 나는 그 보살에게 산과 늪에 있으라고 가르치니, 

무엇을 네 가지라 하는가? 

혹 어떤 보살이 들은 것이 많아 법을 결정하는 데 밝으며, 

만일 그 학문과 수행으로써 본말(本末)의 법을 살핀다면 산과 늪에 있을 수 있으며, 

또 보살로서 5통(通)을 얻고서 하늘과 용과 귀신을 성취해 주고자 하는 자는 산과 늪에 있을 수 있으며, 

혹 어떤 보살이 번뇌가 치성하더라도 저가 번뇌를 따라가지 않아서 번뇌가 곧 희박해지면 산과 늪에 있을 수 있으며, 

또한 번뇌를 억제하여 스스로 격려하고 힘쓰고자 한다면 이로써 모두 그의 명성을 듣게 되리니, 

그곳에서 노니는 자는 일체의 청정한 법을 두루 만족하게 얻어
후에 마을과 고을과 국도(國都)에 내려와서 뭇 사람들을 위하여 법을 설명해 줄 것이니라. 


닦은 법이 이와 같으니, 이가여, 

나는 그런 보살이면 산과 늪에 있으라고 가르치리라.

 


■ 또 집을 버리고 도를 닦는 자는 산과 늪에 노닐면서 경을 닦을 것이니, 

경을 외우고 익히기 위한 까닭이니라.


대중 속에 들어가는 자는 공경하며 또 겸손해야 하니, 

스승과 벗이 경을 설명해 주면 어른이건 소년이건 모두 존경해야 하며, 

스스로 닦을 바를 게을리 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이 닦는 것도 막지 않아야 하며, 

또한 받들어 섬겨 공경하기를 바라지 않아야 할 것이니라.

이와 같이 관찰할 것이니, 


여래․ 응공․ 정진(正眞) 부처님께서는
모든 범천과 제석(帝釋)과 하늘과 인간의 중생들에게 공양을 받으셔서
천상(天上) 천하(天下)에 거룩한 복전(福田)이 되지만, 


저 부처님께서는 오히려 사람들이 받들어 섬기는 것을 바라지 않으시며, 

스스로 하시는 일로 사람들을 수고롭게 하려 하지 않으시거늘, 

하물며 그 밖의 것이겠는가?

배우지 못한 것을 배우고자 하거든, 

어찌 도리어 다른 사람이 받들어 섬기기를 바라겠는가?

 

또 나는 마땅히 천하 사람들을 위하여 공양할 자가 되리니, 

나는 마땅히 사람들을 공양할 것이로되, 

도무지 내가 다른 사람에게 공양 받음을 구하지 않으리니, 

왜 그런가 하면 공양하는 것이 더 중하기 때문이니라.



이가여, 

비구가 법으로 공양하는 것을 도움을 얻지 못한 까닭에 나만 돕게 되니, 

법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니라. 

대저 법으로 다른 사람을 돕고자 하는 자는 이와 같이 해야 하니, 

이야말로 공양이기 때문이요, 

나만 돕게 됨은 법으로써 하지 않기 때문이니라.

그는 스스로 바른 믿음이 없으면서 공양을 받은 것이니, 

그는 곧 세속 물욕과 섞인 것이요, 

사람을 크게 돕는 자가 아니니라. 


그러므로 만일 스승과 벗에게 나아가고자 하는 자는
몸과 뜻과 행함에 결단성이 있어야만
이에 가서 본받을 수 있을 것이니라.

 

나를 가르치는 스승과 벗은 다른 것을 행하더라도 허물이 없으면 꾸짖지 않나니, 

묻고 외우며 익히는 것이 가르침의 쌓임이 되느니라.


그러므로 경을 외우고자 한다면,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법을 사모하고 좋아하며, 

스승의 뜻을 따름으로써 법의 이로움을 구할 것이요, 

일체의 존경과 칭찬하고 기림의 이로움을 구하려고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니라.

만약 스승으로부터 보잘것없는 4구(句)의 게송을 받았을지라도 외울 것이며, 

만일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에 있다면 그것으로써 스승에게 공양할 것이니, 


그 닦는 바 4구 게송의 글자 수와 같은 수의 겁(劫) 동안
저 스승에게 공양하더라도
오히려 끝내 스승에게 공양함이 되지 못하느니라.

또한 바탕이 정직하여 헛되이 꾸미지 않고
아첨하지 않는 일체의 행(行)으로써 공양한다 하여도, 

어찌 법을 공경한다고 말하겠는가?

 

또 이가(理家)여, 

만약 이러한 생각을 내어서 덕의 뜻이 있고, 

부처님도 또한 법의 뜻이 있으며, 

스스로 근심하여 음욕을 여읠 뜻이 있으며, 

고요함에 뜻이 있다면, 

만약 4구의 게송을 닦고 준수하여 행하여서
그 겁의 수와 같은 시간 동안
저가 그 스승을 공양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끝내 법을 공경함은 되지 못하느니라.

 


이가(理家)여, 

마땅히 이 일이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하나니, 

법의 복덕은 숫자로 헤아릴 수 없으며, 

지혜를 얻음도 또한 한량없느니라.



■ 그러므로 보살은 최상 법을 선택하려면
오히려 수없이 바른 법을 공경해야 하며, 

그와 같이 사유(思惟)하며, 

이와 같이 청정한 계행을 들어야 하느니라.

 

무엇을 청정한 계행이라 하는가? 

집을 버린 보살에게는 네 가지 청정한 계행이 있나니, 

첫째는 성인의 경전에 조예가 있음이요, 

둘째는 정진의 덕을 사모하고 좋아함이요, 

셋째는 집에 있는 이와 함께 종사하지 않음이요, 

넷째는 아첨하지 않고 산과 늪에 있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집을 버린 보살의 네 가지 청정한 계행이니라.

 

다시 네 가지 청정한 계행이 있나니, 

무엇이 네 가지인가 하면, 

몸을 지키고 조심하여 몸에 걸림이 없음이요, 

말을 지키고 조심하여 말에 걸림이 없음이요, 

마음을 지키고 조심하여 마음에 걸림이 없음이요, 

삿된 의심을 버리고 일체의 민첩한 뜻에 나아감이니, 

이것이 바로 집을 버린 보살의 네 가지 청정한 계행이니라.

 

다시 네 가지 청정한 계행이 있나니, 

무엇이 네 가지인가 하면, 

첫째는 스스로 아는 것이요, 

둘째는 스스로 높은 체하지 않는 것이요, 

셋째는 모양으로 사람을 보지 않는 것이요, 

넷째는 사람을 훼방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집을 버린 보살의 네 가지 청정한 계행이니라.

 

다시 네 가지 청정한 계행이 있나니, 

무엇이 네 가지인가 하면, 

첫째는 모든 음(陰)을 허깨비 같은 법으로 여김이요, 

둘째는 모든 정(情)을 법의 정으로 여김이요, 

셋째는 모든 입(入)을 공(空)의 모임으로 여김이요, 

넷째는 방속(方俗)의 의식을 따르지 아니함이니, 

이것이 바로 이가(理家)로서 집을 버린 보살의 네 가지 청정한 계행이니라.

 

다시 네 가지 청정한 계행이 있나니, 

무엇이 네 가지인가 하면, 

첫째는 스스로 나를 계교하지 아니함이요, 

둘째는 내가 있다는 것을 멀리 떠남이요, 

셋째는 없다는 소견[斷見]과 있다는 소견[常見]을 끊어 없애는 것이요, 

넷째는 인연법을 버림이니, 

이것이 바로 집을 버린 보살의 네 가지 청정한 계행이니라.

 

다시 네 가지 청정한 계행이 있나니, 

무엇이 네 가지인가 하면, 

첫째는 공(空)을 이해함이요, 

둘째는 생각이 없어서 두려워하지 않음이요, 

셋째는 뭇 사람들을 크게 불쌍히 여김이요, 

넷째는 몸이 아니라고 여김이니, 

이것이 바로 집을 버린 보살의 네 가지 청정한 계행이니라.



■ 그는 항상 청정한 선정(禪定)을 듣기에
이와 같이 관찰하나니, 

무엇을 청정한 선정[定]이라 하는가? 


일체의 법을 통달하여
딴 일을 하거나 뜻이 흐르지 아니하며, 


결단한 뜻이 있고, 

전일한 뜻이 있으며, 


착오되지 않은 뜻과
가지 않는 뜻과
달리지 않는 뜻과
자신을 위하여 머물러 있는 뜻과
정욕에 어울려 종사하지 않은 뜻으로

허깨비 같은 법을 관찰하되, 

‘내가 만일 허깨비 같은 법이라면
정(精)도 또한 그러하리라’라고 하여
다시 행함이 없어서 곧바로 존재할 수 없게 되니, 

이미 저 바른 선정[定]으로 옮겨갔기에 이를 바른 선정이라 하느니라.

 

만약 법에 있어서 법과 같이 한다면, 

이와 같음을 또한 선정이라 하리라.





■ 이와 같음을 관찰하기 위하여
그는 항상 청정한 지혜를 듣나니, 

무엇을 청정한 지혜라고 하는가? 


모든 법을 선택하는 지혜이니, 

그것을 일러 지혜라 하느니라. 

느끼지 않는 상(相)은 지어감이 없고, 

짓지 않는 상(相)은 존재함이 없으며, 

함이 없는 상(相)은 내달리지 않느니라. 


그러므로 이가(理家)여, 

법을 이와 같이 관찰한다면
이를 일러 집을 버린 보살이 행하는 바라 하리라.”

 






이 경을 말씀하실 때에 5백의 사람들이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의 뜻을 수기함을 얻었다.

또 심(甚)인 이가(理家)와 그의 무리들은 같은 소리로 말하였다.

“전에 없던 일이옵니다, 

부처님이시여. 

여래의 좋은 말씀이 이러하옵니다. 


또한 집의 악덕(惡德)이 중대한 것과, 

또 집을 버리는 것이 좋은 덕임을 거룩하신 부처님께서 이미 밝히셨나이다. 


저 집에 있는 사람은 악덕이 많고, 

집을 버리는 것은 무수한 덕의 선함이 있나니, 

어찌 부처님으로부터 집을 버리는 계(戒)를 받아
비구의 행에 나아가지 아니하오리까?”

 

■ 부처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집을 버리는 것은 이가(理家)가 감당하기 어려우니, 

순후한 덕의 근본을 연구하고 가르침을 받들어 지닐지니라.”

 

이가가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부처님이시여, 

집을 버리는 것은 비록 감당하기 어려우나, 

여래께서는 오히려 마땅히 저희들에게 집을 버리고 도를 닦게 하셔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곧 자씨(慈氏)보살과 아울러 일체행정(一切行淨)보살로 하여금
저 이가들의 청(請)을 들어 보도록 하셨다.

자씨보살은 2백 명의 이가를 뽑아 집을 버리고 도를 닦게 하였고, 

일체행정보살은 3백 명의 이가를 뽑아 집을 버리고 도를 닦게 하였다.


 

■ 그때에 현자(賢者) 아난이 심(甚)인 이가에게 말하였다.

“그대는 어찌하여 나라와 집에 있는 것이
집을 버리는 거룩한 도보다 좋다고 여겼습니까?”

 

■ 심(甚)인 이가가 아난에게 말하였다.

“저는 몸의 안락함을 탐하거나 사모한 것이 아니라
중생의 낙(樂)을 이루고자 한 까닭에 집에 있었을 뿐입니다. 


또 여래께서 스스로 저에게 밝히시기를, 

‘그는 받은 바가 견고하므로 집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때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너는 이미 심(甚)인 이가를 보았느냐?”

 

“그러하옵니다, 

부처님이시여. 

심(甚)인 이가를 보았습니다.”

 


“아난아, 

이 현겁(賢劫) 가운데 성취한 바의 사람이
집을 버린 보살보다 많으니, 

백 겁(劫) 동안에만 그런 것이 아니니라. 


왜 그런가 하면, 

아난이여, 

또 집을 버리고 도를 닦는 보살은
천 사람 중에도 덕이 능히 이와 같지 못하지만, 

이 이가는 이런 덕이 있느니라.”



 

그때에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부처님이시여, 

이 경(經)을 마땅히 무어라 이름하며, 

또한 마땅히 어떻게 받들어 지니오리까?”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그대 아난이여, 

이 경의 법을 거가거가지변(居家去家之變)이라 이름하니, 이를 받들어지니라. 

또는 내성덕지변(內性德之變)이라 이름하니, 이를 받들어지니라. 

또는 심소문(甚所問)이라 이름하니, 이를 받들어지니라. ★★

이 경의 법을 듣는 자는, 

아난이여, 법이 두루 원만하고 정진(精進)이 자못 강할 것이니, 

일체의 위의(威儀)에서 정진하여 도를 행하는 자일지라도 이와 같지 않을 것이니라.


그러므로 아난이여, 

만일 정진(精進)을 일으키고자 하는 자나, 

만일 부지런히 힘쓰게 하려고 하는 자나, 

하나의 공덕을 세우고자 하는 자나, 

사람에게 뭇 덕을 세우고자 하는 자는, 

마땅히 이 경의 법을 듣고 받아 행할지니라.


내가 그대 아난에게 부촉하노라. 


이 경의 법을 자주 펼쳐서 뭇 사람들에게 보일지니, 

왜 그런가 하면, 

뭇 덕과 법의 올바른 행이기 때문이니라. 

아난이여, 

이 경의 법은 바로 응공[正應]이니라.” ★★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아난이 기뻐하였으며, 

아울러 심(甚)인 이가와 하늘과 사람과, 

또한 아수라 왕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고 나니 모두 사유(思惟)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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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경경(法鏡經) 서문

 

마음은 모든 법의 근원이요 선악의 근본이니, 

같은 곳에서 나왔으되 다른 이름으로 불리며, 

화(禍)와 복(福)으로 나뉘어 흐른다. 

또한 마음은 몸을 수레 삼고, 

집[家]을 나라로 삼아서 온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면서도,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데 게으르거나 쉼이 없다. 

집으로 인해 생겨나는 욕심은 만족시키기 어려워
바다가 모든 지류를 삼키고 불이 장작을 태우는 것과 같으며1), 

여섯 가지 삿된 마음의 잔혹함은 가시나무 그물2)이 물고기를 해치는 것보다 더 심하다. 


여인네들은 아첨하는 등의 세 가지로 사람을 홀리니[鬽], 

거짓말[僞]3)을 잘해서 믿을 수 있는 것이 적다[寡]4). 

이런 이유로 집이 화(禍)를 당하게 된다. 


삿되고 더러운 것을 높이고, 

맑고 참된 것을 천시하며, 

소인배와 가까이하고, 

성현을 비방하며, 

송사를 일으키고, 

구친(九親)을 잃는 것은, 

집으로 인해 생기는 것이다.

 

이 때문에 높은 경지의 사람은 그 더러움을 부끄럽게 여기고
그 사나움[厲]5)을 무서워하니[懼],6)
그것은 이와 같이 두려워할 만한 것이다. 

그리하여 묵묵히 은둔할 것을 생각하니, 

명철(明哲)한 이가 무도(無道)한 세상을 피하는 것과 같다. 

머리칼이 용모를 해치고 법복을 기워 입더라도, 


고요히 사당에 머물면서 마음을 단련하여 더러움을 물리치며
도심을 가슴에 품고 덕(德)을 베풀며 눈과 귀가 먼 자들을 인도하려 한다. 

혹은 자연 속에 은거하여 돌을 베고 잠을 자며
흐르는 물에 양치질을 하더라도 마음을 오로지 하여 때를 씻어내면, 

신(神)과 도(道)가 둘 다 갖춰져서 뜻이 고요해지고 마음이 모두 다스려지니, 

이것이 바로 무명(無名)7)이 밝게 교화되는 작용이다. 

중생들과 현성(賢聖)들이 청정한 상태에서 나란히 서 있게 되니, 

이 도를 가리켜 대명(大明)이라 하며, 

이 때문에 법경(法鏡)이라 한다.

 



기도위(騎都尉) 벼슬을 하는 안현(安玄)8)과
임회(臨淮) 출신 엄불조[嚴浮調]9) 이 두 현자는
어릴 때부터 성스러운 사업에 크게 뜻을 두고 도리를 깊이 궁구하며, 

신묘한 경지를 탐구하여10) 깊이 통달하였다. 

그리고 세상이 눈멀고 미혹되어 크고 좋은 것[大雅]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여서, 

사력을 다해 이 경(經)의 바른 내용을 번역하여 전해주었다. 


기도위 안현이 경의 내용을 말하면
엄불조가 붓으로 받아 적었는데, 

말은 옛 법도에 맞았으며[稽古]11) 뜻도 또한12) 미묘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그치지 않는 시대였기에
뜻있는 사람들도 감히 틈을 내지 못하였다.13)

이에 하늘의 도는 찢겨지고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도 적어졌다. 


이 경전을 보고 듣는다면14) 험난한 도탄에서 구제될 수 있을 것이나,15)
바른 의미가 막혀서16) 통하지 못하기에
한가로운 틈을 타서 온 힘을 다해 뜻을 풀이해 보았다.17)

그러나 스승께서 돌아가시고 세월이 지나서 다시 질의할 수가 없어, 

마음으로는 고민이 되고 입으로는 표현을 못하여 붓을 멈출 수밖에 없었기에 막막하기만 하였으며, 

먼 옛날의 성현을 추모하니 눈물과 콧물이 흐르도록 슬펐다. 

지금 의심이 나는 것[闕疑]18)을 기록해두니, 

후대에 명철한 사람이 나타나 그 내용을 통달하고 완벽한 뜻을 전하여, 

삼보(三寶)를 드러내길 바라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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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문의 ‘由’는 신수장경 교감에 의거하여 ‘猶’로 번역하였다.

2 원문의 ‘田’는 신수장경 교감에 의거하여 ‘網’으로 번역하였다.

3 원문의 ‘爲’는 신수장경 교감에 의거하여 ‘僞’로 번역하였다.

4 원문의 ‘寘’은 신수장경 교감에 의거하여 ‘寡’로 번역하였다.

5 원문의 ‘廣’은 신수장경 교감에 의거하여 ‘厲’로 번역하였다.

6 원문의 ‘濁’은 신수장경 교감에 의거하여 ‘懼’로 번역하였다.

7 무아(無我)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자아가 있다고 집착하는 무지의 상태이다.

8 생몰년은 자세하지 않다. 

안식국(安息國) 사람으로, 

후한의 영제(靈帝) 말년에 낙양으로 와서 기도위(騎都尉)가 되었다. 

광화(光和) 4년(181)에 엄불조(嚴佛調)와 함께 『법경경(法鏡經)』을 번역하였으며, 

『아함구해십이인연경(阿含口解十二因緣經)』을 번역하기도 하였다.

9 생몰년은 자세하지 않다. 

한(漢) 나라 사람으로서 최초로 출가(出家)한 스님이다. 

안현이 천축어에 능통했기 때문에 범문(梵文)을 읽어가며 중국어로 번역하면 엄불조는 받아 적는 방식으로 공동 번역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엄불조는 번역문 의리(義理)에 매우 밝았고 간결한 문자를 사용하여 불경사상의 근본이 되는 중요한 뜻을 명확하게 표현하여 번역하였다. 

엄불조의 저술로는 『사미십혜장구(沙彌十慧章句)』가 있는데 이는 중국 최초의 불교저작(佛敎著作)이다.

10 『주역(周易)』「계사전 하(繫辭傳下)」의, 

“신묘함을 탐구하고 변화를 아는 것은 덕의 최상이다

〔窮神知化 德之盛也〕”라고 한 데서 나온 것이다.

11 옛일을 고증하여 현실에 적절히 대처하는 것으로, 

학문 연구에 매진하여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힘을 갖추는 것을 말한다. 

후한(後漢) 환영(桓榮)이 광무제(光武帝)로부터 태자소부(太子少傅)의 임명을 받자, 

가르치던 유생들을 모아 놓고는 “오늘날 이런 은총을 받게 된 것은 모두가 계고의 힘이니, 

어찌 분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今日所蒙 稽古之力也 可不勉乎]”라고 말한 고사가 있다.

12 원문의 ‘文’은 신수장경 교감에 의거하여 ‘又’로 번역하였다.

13 『시경(詩經)』「소남(召南)」≺은기뢰(殷其雷)≻에 “쿵쿵 울리는 천둥소리는, 

남산의 양지쪽에 있거늘, 

어찌하여 이 사람은 이곳을 떠나, 

감히 겨를을 내지 못한단 말인가. 

미덥고 후한 군자는 돌아올진저, 

돌아올진저[殷其雷, 

在南山之陽. 

何斯違斯, 

莫敢或遑? 

振振君子, 

歸哉歸哉].”라는 말이 있다.

14 원문의 ‘會’는 신수장경 교감에 의거하여 ‘聞’으로 번역하였다.

15 원문의 ‘緣’는 신수장경 교감에 의거하여 ‘拯’으로 번역하였다.

16 원문의 ‘擁’는 신수장경 교감에 의거하여 ‘壅’으로 번역하였다.

17 원문의 ‘法’은 신수장경 교감에 의거하여 본에는 ‘注’로 번역하였다.

18 의문스러운 것을 당분간 보류하여 둔다는 뜻이다.

19 범어 Bhagavat를 번역한 것으로 중덕조성(衆德助成)ㆍ중복조성(衆福助成)의 뜻이다. 

현장(玄奘) 이후의 신역에서는 세존(世尊)이라 번역하였으나, 

이전의 구역에서는 이렇게 번역했다.

20 범어로는 S´ravasti로 성(城)의 이름이었으나 나라 이름이 되었다. 

사위국(舍衛國)이라 음역하며, 

풍덕(豊德)ㆍ호도(好道) 등으로 번역한다.

21 부처님께 숲을 공양한 기타 태자이다.

22 기타 태자의 숲을 사들여 부처님께 공양한 사위성의 장자이다.


○ [pt op tr]




♥아래 부분은 현재 작성 및 정리 중인 미완성 상태의 글입니다♥


Lab value 불기2564/03/10/화/16:47



● 출가수행의 어려움 

아무리 세속에 집착을 버리고 수행을 하는 경우에도 
최소한의 의식주는 필요하다. 

다만 수행을 하는 각 개인의 상황이 다 다르다. 
예를 들어 의식주를 포함해 생계를 해결할 방편이 처음부터 곤란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간신히 생계를 해결할 방편은 마련된 경우도 있다.  
또는 후원을 받거나 상속이나 사업의 방편이 뛰어나거나 복덕이 축적되어 자산을 이미 많이 갖고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런 가운데 『법경경』에서 재가 수행자의 수행방안과 함께
출가 수행의 방안에 대해 내용이 제시된다. 

승단에 출가해 수행하는 비구 수행자의 경우는 구걸로 생계를 해결하고 수행하는 것이 출가수행의 원칙이다. 
그렇지만, 오늘날 출가수행자라도 구걸로 수행하지 않는다.

구걸 수행이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지만, 요즘은 오해를 받기도 한다.
또한 과거에는 주거가 부정한 가운데 노숙만 해도
강제로 복지 시설에 수용되고 인권을 침해받는 사례가 빈번했다. 
그런 사정으로 요즘은 비구수행자도 탁발 수행을 행하는 경우가 드물다. 

『법경경』에서는 보살의 출가 수행 방안을 다음처럼 제시한다. 

■ 무엇이 열 가지인가? 

나는 스스로 나의 업(業)으로써 생활하고 다르지 않은 업으로써 하지 않는 것이요, 

...


■ 집을 버린 보살은 
스스로 관찰하여 목숨을 마칠 때까지 고요한 곳에 한가하게 있으면서 빌러 다니지 않으니, 

...


■ 스스로 관찰하여 나무 아래에 있으면서 앉고 자고 쉴 것이니라.

무엇이 열 가지인가? 

...
또한 이가여, 
■ 혹 저 보살이 집을 버리고 도를 닦거나 산과 늪에서 노니는 자가 만일 경전을 닦고자 하며, 
만일 이로운 경전을 외우고자 하거든 탑묘에 들어갈 것이니라. 
...
■ 또 집을 버리고 도를 닦는 자는 많은 일에 많이 종사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니라. 

...
첫째는 경을 강하는 이와 함께 종사하는 것이요, 
둘째는 성취한 사람과 함께 종사하는 것이요, 
셋째는 여래께 공양하는 이와 함께 종사하는 것이요, 
넷째는 일체의 민첩한 뜻을 발하여 산란하지 않은 이와 함께 종사하는 것이니, 
...
■ 또한 저 옛날 보살이 이 여러 가지 두려움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모두 산과 늪에 있었던 힘으로 
두려움이 없는 데에 이르렀던 것이니, 
이를 일러 자연(自然)이라고 하며, 
그러므로 나는 두려워함을 벗어나기 위하여 산과 늪에 있는 것이로다.
...

따라서 집을 버린 보살 수행자의 수행은 
승단에 출가해 수행하는 비구 비구니 스님의 방안과는 조금 다르다. 

그러나 여하튼 아무런 대책없이 집을 벗어나 

출가 수행을 하는 것은 쉽지 않다. 

집을 벗어나면 당장 의식주 문제 해결도 곤란하다. 
겨울에는 추위도 해결해야 하고 
여름에는 더위문제도 해결해야 한다. 

경전에서는 출가 수행의 장점을 제시한다. 
또 한편 출가해서 수행하더라도 여전히 집착을 제거하지 못한 경우는 
그 의미가 없다는 점도 제시한다. 

반대로 『유마힐소설경』 등에서는 재가자라도 
출가자와 같이 집착을 갖고 임하지 않고 수행에 임하면 
그것이 곧 출가 수행이라는 내용도 제시되고 있다. 

따라서 이런 점을 놓고 수행자는 깊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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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kwr6281

◈Lab value 불기2564/03/10


♥ 잡담 ♥연구와 현실의 배경사정의 이해 

현재까지 매일 매일 단상코너 페이지를 올렸다. 
그런데 요즘은 과거 하루에 글을 다 작성하고 올리기가 곤란하다. 
현재 그 날짜에서 2 달전 날짜를 기준으로 
10 년간 작성한 조각글을 함께 살피면서 정리를 병행한다. 

과거글을 읽다 보면 내용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문장 표현에 문제가 많기에 일단 표현교정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리고 과거 조각글을 정리하다보면 
그 당시 현실에서는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궁금해지는 경우가 있다. 
물론 과거 뉴스 등을 살펴보면 사정을 알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도 시간이 오래 지나면 쉽지 않다. 

그런데 조각글이나 일일단상은 시사문제를 다루는 코너가 아니다. 
그리고 경전 연구만 하다보면 한달간 뉴스를 거의 보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러다보면 조금 현실과 동떨어진 가운데 생활하기 쉽다. 

경전 연구는 매일 매일 구체적 현실과 직접 관련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또 그런 현실을 배경으로 해서 진행하게 된다. 
그래서 완전히 무관심한 것도 문제가 있다. 

그래서 조각글 작성할 때 그날 뉴스 제목만이라도 한번 
함께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한다. 

그래서 페이지 밑 부분에 붙여 놓고 쉴 때 한번 살펴보는
방안을 한번 시도해보게 된다. 

그런데 현실 문제를 살피는 것은 어디까지나 단지 참조용일 뿐이다. 
큰 의미는 없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적으로 촬영한 사진을 찾아 함께 붙여 올려볼까 생각 중이다. 
2016 년 이전 사진을 올렸던 사이트가 없어져서 이들 사진이 다 링크가 깨져 있다. 
사진을 다시처리해 올리려면 약간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글만 다시 살피고 교정하고 정리하는 작업도 시간이 많이 들어간다. 
그런데 그런 가운데 사진도 조금씩 처리해 올리면 좋지 않을까 한다. 






문서정보 ori http://buddhism007.tistory.com/14577#6281 
sfed--법경경_K0032_T0322.txt ☞법경
sfd8--불교단상_2564_03.txt ☞◆vkwr6281
불기2564-03-10
θθ
 



ॐ मणि पद्मे हूँ




■ 선물 퀴즈 


방문자선물 안내페이지 

다음에 해당하는 단어를 본 페이지에 댓글로 적어주시면 됩니다.

 4섭의 하나. 재물을 구하면 재물을 주고, 법을 구하면 법을 보시하여 친애하는 마음을 내게 하고, 그것으로 중생을 섭수(攝受)ㆍ교도(敎導)함.

답 후보
● 보시섭(報施攝)
보현삼매(普賢三昧)
복덕자량(福德資糧)
본각(本覺)

본사(本師)
본원력(本願力)
본적(本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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