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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4-01-10_대반야바라밀다경_382 본문
『대반야바라밀다경』
K0001
T0220
제382권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 해제[있는경우]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 [pt op tr] 대반야바라밀다경_K0001_T0220 핵심요약
♣0001-382♧
『대반야바라밀다경』
제382권
○ [pt op tr]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Marie-Paule Belle - Une Autre Lumiere (Hommage B.lrc
Lab value 불기2564/01/10/금/22:23
경전에서 부처님이 일정한 질문을 하고
또 그에 대한 답이 이어진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대반야바라밀다경』의 문장을 읽고
그 내용을 바로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그 문장의 뜻을 다시 풀어 설명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반복부분 가운데 핵심부분만 ■표시를 하는데
그 부분만 놓고 간단히 살펴보자.
먼저 부처님께서 이렇게 질문을 하신다.
■ “또 선현아,
만일에 어떤 여래ㆍ응공ㆍ정등각께서 변화로 한 부처님을 만드시고,
그 부처님이 다시 한량없는 백천 구지 나유다[俱胝那庾多] 무리를 변화로 만들었다 하자.
그 때에 그 변화된 부처님이 변화된 무리를 가르치시되,
혹은 보시바라밀다를 수행하게 하고,
혹은 정계바라밀다를 수행하게 하고,
혹은 안인바라밀다를 수행하게 하고,
혹은 정진바라밀다를 수행하게 하고,
혹은 정려바라밀다를 수행하게 하고,
혹은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게 하고,
■ 혹은 부처님의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을 증득하게 하면,
선현아,
네 뜻에 어떠한가.
이 때의 변화된 부처님과 변화된 무리가
모든 법에서 분별하는 바와 파괴하는 바가 있겠는가?”
선현이 대답했다.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없습니다,
선서시여.
모든 변화된 것은 분별이 없는 때문입니다.”
■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었다.
“선현아,
이러한 인연으로 말미암아
보살마하살도 이와 같은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하여 모든 유정을 위해 알맞게 법을 말함을 알 것이며,
비록 법상(法相)을 분별하거나 파괴하지 않으면서도
능히 유정들을 여실히 분별하여 그들로 하여금 응당 머무를 곳에 머무르게 하며,
유정과 온갖 법에서 도무지 얻은 바가 없으면서도
유정들로 하여금 망상과 뒤바뀜과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속박됨이 없고 해탈도 없는 것을 방편을 삼으려 하나니,
무슨 뜻이냐 하면,
선현아,
물질의 본성이 속박과 해탈이 없으며,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의 본성도 속박과 해탈이 없나니,
물질의 본성이 속박과 해탈이 없다면 물질이 아니요,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의 본성이 속박과 해탈이 없다면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이 아니니라.
무슨 까닭인가?
물질 내지 의식이 끝끝내 청정하기 때문이니라.
먼저 부처님께서 어떤 취지로 질문을 하신 것인가.
부처님이 로보트로 부처님을 만든다고 한다.
그리고 그 로보트 부처님은 또 로보트로 수많은 생명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나서 그 로보트로 만든 생명을 깨달음을 얻게 한다.
이런 경우를 가정한다.
그런데 그런 일이 과연 있겠는가.
최근에 뉴스를 보면 ces 라는 박람회에 다양한 로보트가 선보이고 있다.
>>> 2020_0110_2234 ~ http://www.bloter.net/archives/367425
...600만불의 사나이’ 델타 웨어러블 로봇,,,
그런데 과거에
수선다 부처님이 이미 그렇게 한 적이 있었다고도 제시한다.
『마하반야바라밀경』 69. 방편품(方便品) (K0003 v5, p.445c01)
그런데 여기서는 현실에서 살아가는 생명이 사실은
그 성격이 이와 같음을 나타내려는 취지다.
현실에서 살아가는 온갖 생명은 변화를 통해 나타난 존재다.
그리고 부처님도 그 사정이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 사정을 일반적으로 잘 이해하지 못한다.
따라서 우선 부처님이 비유로 위 같은 내용을 제시한 다음
그 비유를 통해 현실 사정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부처님은 어떻게 해서 중생을 깨달음에 이르게 하고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게 하는가.
온갖 것에 대해서 올바른 내용을 제시하고 이를 통해 깨닫게 해서
망상분별과 집착을 벗어나게 한다.
일체가 무상하다.
일체가 고통이다.
일체가 참된 진짜에 해당하는 실체가 없다. [무아, 무자성]
일체가 본래 청정하고 생사고통을 얻을 수 없는 니르바나다. [열반적정]
일체가 공하다.
이런 내용들을 분별해 제시해서 중생들이 깨달음에 이르게 하고자 한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경전에서 보듯 다양한 내용을 분별해 제시한다.
그런데 이렇게 깨달음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제시하는 내용이 갖는 성격이 문제된다.
그래서 이 경우 다시 부처님이 질문을 한 것이다.
이렇게 부처님이 여러 내용을 분별해 제시하는데
이 모든 경우 분별하는 바와 파괴하는 바가 있겠는가라고 질문한 것이다.
그러자 수보리 존자가 없다고 답한다.
그리고 그 이유는 모든 변화된 것은 분별이 없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어떻게 보면 한글로 쓰여진 문장이기에
글만 따라 읽으면 내용을 쉽게 이해할 것 같다.
그러나 사실 이해가 쉽지 않다.
그래서 하나하나 다시 내용을 음미해봐야 한다.
우선 비유에서 든 것처럼 변화된 것 예를 들어 로보토로 만든 중생이나 부처님은
분별이 없는가. 분별을 못하는가.
그런데 이 내용은 결국 변화로 나타난 현실의 중생이나 내용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그래서 똑같이 물어봐야 한다.
현실의 생명은 분별이 없는가. 분별을 못하는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 모든 경우에 분별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왜냐하면 지금 자신도 분별하고
영희나 철수도 무엇을 놓고 무엇이라고 분별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서로 주장 내용이 다를 경우 시시비비도 다툰다.
예를 들어 저 앞에 있는 것이 화분이라고 주장하는 이는
그것이 바위라고 주장하는 다른 이의 주장을 깨뜨리는 것이 된다.
그래서 현실에서는 이처럼 변화로 나타난 자신이나 철수 영희가 서로 제각각
분별을 하기도 하고 또 어떤 분별은 어떤 주장을 깨뜨리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내용이 현실에 있다고 여긴다.
그런데 수보리 존자는 이런 현실을 놓고
그런 분별은 없다고 답한다.
그리고 부처님도 그렇다고 긍정한다.
그리고 사정이 그렇기 때문에
변화된 부처님과 변화된 무리가
모든 법에서 분별하는 바와 파괴하는 바가
없다고 제시한다.
그래서 이 첫부분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변화로 나타나 생활하는 영희나 철수가
다 현실에서 열심히 분별하는데 왜 분별이 없다고 하는가를 이해해야 한다.
또 부처님도 마찬가지로 경전에서 보듯 수많은 내용을 분별하고
말씀하시는데 왜 분별이 없다고 하는가를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다음 의미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a 를 있다고 여기는 경우
그것은 잘못된 분별이다.
그래서 그런 경우 그런 것이 잘못이고 그런 것은 없다고 제시한다.
예를 들어 영희가 저쪽 거리에 서 있다가 여기로 열심히 뛰어 왔다.
이 상황에서 영희가 있다.
그리고 영희의 뛰어 옴이 있다.
그리고 이렇게 판단함과 분별함도 있다.
이렇게 일반적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본 사정이 그렇지 않다고 여기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현실 상황을 놓고
이 내용을 이해하면 위 부분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일반적으로 영희가 거리에서 뛰어 올 때
대부분 영희가 있고 영희의 뛰어 옴이 있다고 여기는데
그 상황엔 영희나 뛰어 옴을 얻을 수 없다.
그런데 현실에서 사람들이 돌아서 그런 것이 있다고 여긴다.
이렇게 제시한다.
즉 그 상황에서 그런 것을 얻을 수 없다.
그런데 각 생명이 전도망상분별을 일으켜서
본래 얻을 수 없는 그런 것을 마치 있는 것처럼 여기며 그 현장에 임한다.
그리고 그에 바탕해서 자신도 같이 무언가를 열심히 휘저으며 업을 행한다.
그런 상태에서 극심한 고통을 받고 호소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현실을 문제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 상황을 해결하고
그런 정신질환 증상을 해소하려면
그 상황에 그런 내용을 본래 얻을 수 없음을 올바로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그 상황을 대해야 한다고 제시한다.
그리고 그런 취지로 반야경전에서 이 내용을 반복해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내용을 제시하면
일반적 입장에서는 왜 자신을 전도망상분별을 일으킨 정신질환자라 하는가하면서
반박하게 된다.
이제 현실에서 영희가 뛰어온다고 여기면서 대하는 상황을 놓고
이 문제를 살펴보자.
이 때 그는 눈을 떠서 ●과 같은 모습을 보면서
그것을 영희■라고 여기면서 대한다.
이 상황에서 경전에서 영희는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면
일반적 입장에서 이렇게 반박한다.
아니 저기 ●이 영희■가 아니고 무엇인가라고 반박하게 된다.
그런데 일반적 입장은 다음을 혼동하면서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있다.
그 주체가 분명 그 상황에서 ● 라는 감각현실을 얻고
그리고 그 부분은 ■(영희) 라는 분별을 일으킨 것만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렇게 그 상황에서 한 주체가 얻은 감각현실 ●과
분별내용 ■은 모두 변화해서 얻어낸 내용이다.
그런데 경전에서 제시하는 것은 다음이다.
그가 얻은 그런 감각현실 ●과 분별내용 ■ 은
우선 본 바탕이라고 할 실재영역에서는 모두 얻을 수 없다.
또 한편 그가 영희 ■라고 여기면서 대하는 그 감각현실 ● 부분에서도
역시 그런 분별 내용 ■은 얻을 수 없다.
또 마찬가지로 그가 일으킨 분별 내용 영희 ■ 라는 내용안에서도
역시 그런 감각현실 ● 은 없다.
이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전히 일반적 입장은 이렇게 반박하게 된다.
아니 저기 ●이 영희■이지, 영희 ■가 아니고 무엇인가라고 다시 반박하게 된다.
일반적 입장은 다음을 혼동하고 착각한다.
자신이 눈을 떠 ● 라는 감각현실을 얻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일정부분을 대해 그 부분은 영희 ■ 라고 관념분별을 일으킨다.
사정이 그렇기 때문에 ● 라는 부분은 곧 영희 ■라고 여기며 ● 을 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망상분별 증상이다.
쉽게 이해하면 다음과 같다.
단순히 사과는 맛있어 맛있는 것은 바나나 이렇게 생각을 불러 연속해서 일으킬 수 있다.
즉 사과란 생각을 떠올리면 이후 바나나라는 생각을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사정이 그렇다고 사과를 바나나라고 여기면 일종의 혼동이고 망상분별이다.
사과는 바나나가 아니다.
또 바나나는 사과가 아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위 현실 상황을 잘 살펴 이해해야 한다.
어떤 주체가 ● 라는 감각현실을 대할 때마다 반복해 그 일정부분은 영희 ■라는 분별을 일으킬 수는 있다.
그러나 사정이 그렇다고 ● 이 곧 영희 ■는 아니다.
그런데 일상현실에서 그에게 영희는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그는 ●의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 부분이 영희다라고 답하게 된다.
간단히 말하면 이것이 망상증상이다.
그 상황에서 감각현실 영역에서 ●라는 감각현실내용이 변화해 얻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또 그 상황에서 그 주체가 ■라는 분별내용을 일으킨 것도 사실이다.
결국 그 상황에 ●라는 감각현실과 ■라는 분별내용은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음이다.
● 라는 감각현실 안에 ■ 라는 분별내용은 없다.
또 ● 라는 감각현실은 ■라는 분별내용이 아니다.
그런데 그 상황을 놓고 대부분 ● 라는 감각현실 부분은 곧 영희■ 이다.
이렇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런 영희 ■ 라는 내용이 없는 부분을 붙잡고 그것이 영희■라고 하니
그것이 망상인 것이다.
이는 마치 영희가 없고 영희가 아닌 치솔을 붙잡고
그것을 영희라고 하는 망상환자와 증상이 같다.
경전에서 제시하는 내용은 바로 이것이다.
그리도 또 다음 실재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분명 그 상황에서 ● 라는 감각현실도 얻고 ■라는 분별도 일으켰지만,
정작 본 바탕이 되는 실재 영역에는 이들 내용은 모두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이는 비유하면 침대에 누어서 잠을 자면서
침대에서는 얻을 수 없는 황금이나 바다꿈을 꾸는 것과 같다.
그래서 비록 현실에서 생생하게 각 감각현실을 얻고
또 명료하게 분별을 일으키지만
그 내용은 모두 본 바탕에서는 얻을 수 없는 내용이다.
그래서 이들은 그 성격이 모두 꿈과 같고 환영과 같다.
처음 경전에서 로보트처럼 변화로 만들어낸 부처님과 생명을 비유로 제시한 것은
결국 이런 사정을 이해시키기 위함이다.
그리고 위 관계는 모든 분별 내용에 다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그래서 무엇이 있는가 없는가는 바로 이런 측면으로 내용을 제시하고
살피는 것이다.
이 경우 다시 일반적 입장에서 다음과 같이 반박할 수 있다.
그래도 그 상황에서 어떤 이가 ■ 라는 분별내용을 일으킨 것은 사실 아닌가.
그러니 그런 ■ 분별내용은 있다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반박할 수 있다.
물론 그런 의미에서 무엇이 있다고 표현할 수도 있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다면 이 세상에 무엇이 있고 없음을 따지고 문제삼는 그 일체는
다 그런 측면에서는 있다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무언가 없다고 주장하는 경우마저도
그런 내용을 분별은 일으켜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의미로 무언가 있고 없음을 표현한다면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사정이 그렇기 때문에 일체의 것은 오직 그런 측면에서만 있는 것이다.
경전에서 이 사정을 모든 것은 단지 이름 뿐이라고 표현해 제시한다.
일체 분별해서 있고 없음을 따지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는 있다.
즉 분별 영역에서 그런 분별을 일으키고 얻었다는 측면에서는 그렇다.
그런데 그렇게 있고 없음을 문제삼으면 그것은 오직 관념영역에서 문제삼는 희론의 성격을 갖게 된다.
그리고 한편, 그러한 있음은 그런 의미뿐이다.
그리고 그런 분별 일체는 그 외의 영역에서 그에 해당한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경전에서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 그렇게 문제삼는 그 일체는 '얻을 수 없다'거나
'없다'라고 표현한다.
일반적 입장에서 혼동과 망상분별을 일으키는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다.
그리고 이처럼 관념영역에서 일으키는 망상분별 때문에
그런 바탕에서 생사고통을 겪는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런 현실 사정을 올바로 깨닫게 하기 위해서
경전에서 방편상 언설을 통해 그 사정을 제시하는 것이다.
즉 무엇이 있고 없다는 것을 경전에서 제시할 때는
그 내용이 다른 영역에서도 얻어지고 있는 것인가를 문제삼는 것이다.
마치 꿈에서 바다와 황금꿈을 꾸고
바다나 황금이 있는가 없는가를 문제삼는 경우
이는 그것이 꿈 밖의 현실 영역에도 얻어지는가를 문제삼는 것과 사정이 같다.
그런데 그 사정을 살피면 사정이 그렇지 않다.
그래서 그런 것은 없다고 제시한다.
그래서 경전에서 그러그러한 내용이 없다고 하는 것은 다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선 ■라는 분별 내용이 감각현실을 얻는 영역에서 얻어지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또 본 바탕인 실재 영역에서도 그런 내용은 얻어지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말은 그 상황에서 ● 라는 감각현실을 일체 얻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또 그 주체의 분별영역에서 ■ 라는 분별을 전혀 일으키지 못한다고 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혼동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실재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실재에서 ■ 라는 내용을 얻을 수 없고 공함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는 실재 영역에 아무 내용도 전혀 없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비록 실재영역에 참다운 진짜에 해당하는 것은 없지만, [무아 무자성]
아무 내용도 전혀 없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다만 무언가를 주관과 관계하여 변화해 얻는 주체로서는
그 내용을 끝내 직접 얻어낼 수 없기에 공하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공]
한편, 어떤 a를 분별할 때 그런 a라는 관념이 있는가 여부도 문제지만,
그처럼 무언가 분별함 자체도 그 사정이 역시 마찬가지다.
분별 영역에서 온갖 것을 열심히 분별을 일으켜 행한다.
그러나 그런 관념 일체는 다른 영역에서 그에 해당하는 내용을 얻을 수 없다.
우선 감각현실 영역에서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무상해탈삼매]
그리고 본 바탕인 실재영역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 공해탈삼매]
그런 가운데 그 주체는 분별을 일으키고 있는 것 뿐이다.
사정이 이런 가운데
한 주체는 ● 라는 감각현실을 얻는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그 일정부분을 대해 ■ 라는 분별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런 사정으로 자신이 일으킨 분별 내용이 ● 라는 감각현실에 그처럼 있다고 여긴다.
그리고 사정이 그렇기 때문에 그런 분별 내용은 대단히 실답다고 여기며 집착하게 된다.
일상생활에서 일반인이 일으키는 망상증상은 대부분 위와 같다.
그리고 본 바탕인 실재 영역이 어떤 내용인가는 일반적 입장에서는 거의 문제삼지 않는다.
이는 현실단면의 본 정체를 깊게 살필 때만 비로소 문제삼게 된다.
그런데 앞과 같이 망상을 한번 일으킨 경우는
그런 본 바탕으로서 실재가 무언가가 문제되면
앞의 망상분별을 증폭시켜 나가게 된다.
그래서 자신이 현실에서 ● 라는 감각현실을 얻고 ■ 라는 분별을 일으키면
그런 내용이 본 바탕에도 그처럼 그대로 있기에 자신이 그런 내용을 얻는다고 여긴다.
그래서 현실에서 얻는 그 일체내용을 실답다고 여기면서 집착을 갖고 대한다.
그리고 그에 바탕에서 그 주체는 무언가를 분주히 열심히 행한다.
이 과정에서 망상분별이 바탕이 되어 일으킨 온갖 희망을 놓고 추구한다.
그래서 그는 ●라는 감각현실을 휘젖게 된다.
그리고 이런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면 결국 그런 업으로 인해 얻게 되는
●라는 감각현실에서 그런 바탕에서 극심한 생사고통을 이후 겪어 나가게 된다.
즉 욕계내에서 극심한 고통을 받는 축생 아귀 지옥의 3 악도는
바로 이런 바탕에서 만나게 되는 생사현실이다.
따라서 이 증상을 벗어나야 한다. [ 무원무작해탈 ]
그리고 이런 생사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반야경전 전반에서 이 주제를 다루는 것이다.
>>>
그 다음 구문을 살펴보기로 한다.
다음에 다음 내용이 이어진다.
유정[생명=중생]들로 하여금 망상과 뒤바뀜과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속박됨이 없고 해탈도 없는 것을 방편을 삼으려 하나니,
무슨 뜻이냐 하면,
선현아,
물질의 본성이 속박과 해탈이 없으며,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의 본성도 속박과 해탈이 없나니,
물질의 본성이 속박과 해탈이 없다면 물질이 아니요,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의 본성이 속박과 해탈이 없다면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이 아니니라.
무슨 까닭인가?
물질 내지 의식이 끝끝내 청정하기 때문이니라.
우선 속박됨이 없고 해탈도 없는 것을 방편으로 삼는다는 구절이 나온다.
그리고 현실 일체 즉 색수상행식이 속박과 해탈이 없다.
또 그렇기 때문에 색수상행식은 색수상행식이 아니다.
그것은 색수상행식이 끝내 청정하기 때문이다.
이런 내용이 이어진다.
그래서 이것이 또 무슨 내용인가 이해하기 쉽지 않다.
쉽게 비유를 들어 살펴보자.
어떤 이가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황금을 얻었다.
그런데 갑자기 강도가 나타나서 자신을 묶어서 감금하고 폭행하고 자신의 황금을 훔쳐간다.
이런 경우 고통과 불쾌 억울함을 받게 된다.
그래서 이 해결이 문제된다.
그리고 이것이 잘 해결되어서 그런 상태가 없어지면
그런 번뇌나 고통의 묶임으로부터 풀려나 해탈을 얻었다고 표현한다.
그래서 꿈에서 이런 일을 겪고 있을 때
속박과 해탈을 문제로 삼는다.
그런데 침대 옆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는 입장을 기준으로 본다면
이 상황에 그런 일 자체를 얻을 수 없다.
꿈 밖의 침대가 놓인 현실을 기준으로 할 때는
그런 문제 자체를 얻을 수 없기에 또 그런 문제를 해결하라고 요청하는 일도 없다.
또 반대로 꿈 안에서 그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해서
침대 밖에서 무언가가 달리 얻게 되는 것도 역시 없다.
그리고 이 꿈의 비유를 놓고 현실상황을 잘 살펴야 한다.
현실에서 한 주체가 얻는 일체 내용을 분류해 색수상행식으로 제시한다.
그래서 이 현실을 기준으로 하면 어떤 주체가 극심한 고통을 겪는 문제상황이 있다.
또 그런 문제상황으로 부터 벗어난 상태도 있다고 여긴다.
그리고 현실에서 행하는 수행도 사실은 그런 생사고통을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런데 본 바탕을 기준으로 놓고 살필 때는 이들은 모두 앞의 비유와 마찬가지다.
위 구문에서 색수상행식이 끝끝내 청정하다고 제시하는 것은 이 사정을 나타낸다.
좀더 엄격하게 보면 청정함이라는 것도 본 바탕에서는 본래 얻을 수 없다.
그런데 이렇게 언설로 청정함이라고 표현하는 사정이 있다.
현실에서 생사고통을 겪거나 그로부터 벗어나 해탈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본 바탕에서는 그런 내용 일체를 얻을 수 없다.
따라서 현실의 속박과 해탈과 이런 상태를 상대적으로 살피면
이런 본 바탕의 상태를 상대적으로 청정하다고 표현하게 된다.
그리고 이 내용은 『반야바라밀다경』 안에 자체적으로 그렇게 설명이 되어 있다.
사정이 그렇기 때문에 현실이라고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색수상행식 역시도
그런 사정으로 색수상행식이 아니라고 제시한다.
앞에서 이미 이 내용을 보았다.
일반적인 입장에서는 ● 라는 감각현실을 얻고 각 내용이 무엇이라고 분별하면서
■ 라고 제시하게 된다.
그런데 그런 내용은 얻을 수 없음을 여기서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사정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비록 색수상행식 등을 언설로 제시해 설명은 하지만,
그 내용 역시도 사정이 마찬가지임을 밝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내용의 본 취지는 다음이다.
현실에서 생사고통을 문제삼고 여기에서 풀려나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런데 이 모두는 본래 본 바탕에서는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생사현실에서 문제삼는 내용은 본래는 얻을 수 없는 내용이다.
그러나 생사현실에서는 이처럼 본래 얻을 수 없는 것인데도
각 주체는 그런 내용이 실답게 있다고 여기며 문제삼는다.
따라서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기본적으로 잘 이해하고
그런 바탕에서 생사현실 안에서 문제를 대해야 한다.
앞에서 꿈의 비유를 들었다.
그런데 현실의 사정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이런 비유를 들었지만,
정작 현실은 꿈이 아니다.
그래서 일반적입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반박하게끔 된다.
●라는 감각현실을 얻고 그 부분이 영희 ■라고 분별할 때
이것이 잘못된 망상분별이라고 경전에서 제시한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해도
자신이 현실에서 ● 부분을 영희 ■ 라고 생각하고 대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마찬가지로 현실에서 자동차를 자동차라고 여기고 대하지 않으면
당장 사고를 당하게 되고 살아갈 수 없게 된다.
이렇게 임하게 된다.
그래서 비록 꿈의 비유를 들어서
그런 판단이나 분별이 잘못임을 제시하지만,
그래도 현실은 꿈과는 다른 측면이 있음을 다시 살펴야 한다.
경전에서도 꿈안에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행을 해야 한다고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만일 정말 현실이 꿈과 완전히 같다면 수행도 사실은 그다지 필요없다.
그런데 현실은 꿈과 비슷하지만 꿈은 아니다.
즉 현실에서 ●라는 부분을 영희 ■ 라고 분별하는 것은 잘못된 망상분별이다.
그러나 정작 그런 증상을 일으키는 환자는 단순히 자신만 있는 것이 아니고 대단히 많다.
즉 갑이 ● 라는 부분을 영희라고 여긴다면
적어도 대다수 사람은 마찬가지로 그렇게 여긴다.
물론 엄격하게 보면 수많은 생명체 가운데 그렇게 여기는 생명은 상대적으로 소수에 해당한다.
그렇지만 적어도 같은 사람으로 범위를 좁혀서 살피면 그런 망집증상을 일으키는 이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일정한 시간과 공간 조건에서 그런 내용을 반복해 일으키고 경험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현실이란 다수 주체가 일정한 시공간과 일정한 조건에서
대단히 반복해서 함께 꾸는 꿈과 같다고 해야 한다.
그런 부분이 꿈과 다른 점이다.
또 그런 성격 때문에 비록 그 하나하나 내용이 실답지 않음에도
그 당사자는 현실 내용을 대단히 실답게 여기면서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그리고 장구하게 반복해서 받아나가게 된다.
또 사정이 그렇기에 현실에서 겪는 생사고통이 비록 실답지 않더라도
꿈처럼 방치할 도리가 없다.
즉 3계 6 도 현실에서 한 주체가 생사고통을 겪는 문제는
다수 주체가 대단히 생생하고 명료하게 무량겁에 걸쳐 장구하게 반복해 겪는 중요한 문제다.
그래서 생사현실 안에서 일정한 수행을 통해서 이를 벗어나야 한다.
그래서 이 관계를 잘 이해해야 한다.
그것이 지금 경전에서 살피게 되는 수행방안과 관련된 내용들이다.
그런데 이 내용들은 과거에 『회쟁론』을 살피는 과정에서 기본적으로 살폈다.
현재 과거글 내용을 정리하는 중이데
내용이 너무 길어 시간을 나누어 체계적으로 조금씩 정리해가는 중이다.
그래서 이들 내용은 아래 링크 부분에서 정리해 설명하는 내용들로 대신하기로 한다.
회쟁론을 살피기 위한 기본 내용
[p]불기2561-09-22_회쟁론_001
http://buddhism007.tistory.com/3597
■ 가정적 항변 구조
[p]불기2561-12-24_회쟁론_001
http://buddhism007.tistory.com/3825
여하튼 결론적으로 현실의 본 바탕과 정체의 기본적 상태는 위와 같다.
그런 가운데 생사현실에서 생사고통을 겪지 않고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가 문제다.
본 바탕에서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현실의 일체 내용이 꿈처럼 실답지 않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다고 해서
생사현실에서 다수 주체가 반복해서 장구하게 겪어가는 생사고통을 그대로 방치할 수는 없다.
그래서 위와 같은 내용을 이해한 바탕에서
그 생사현실에서 각 주체가 이 생사고통을 벗어나려면
취해야 할 일정한 자세와 수행 내용이 있다.
우선 현실의 본 정체나 성격을 올바로 깨닫고 잘 파악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잘 파악한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곧바로 생사현실의 고통을 벗어나기 힘들다.
그 생사현실에 임해서 생사고통을 겪는 상황은
이미 장구하게 오래전부터 그런 망집을 바탕으로 업을 행하고 쌓아 놓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정을 그렇게 잘 이해한 것만으로 이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현실 일체가 실답지 않음만 잘 관하게 되면
이후 생사고통을 겪는 상태로부터 바로 벗어날 것처럼 여기기 쉽지만
사정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그래서 그 현실 사정과 정체를 잘 이해한 바탕에서
그 생사현실 안에서 일정한 노력을 해야 한다.
우선 생사현실에서 반복해서 생사고통을 겪게끔 되는 원인 행위를 중단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이미 과거에 행해 놓은 업의 장애가 쌓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업장을 해소키는 노력을 함께 행해야 한다.
이것이 경전에서 기본적으로 제시하는 계의 항목에 해당하는 수행 내용이다.
즉 보시 정계 안인 정진 반야바라밀다가 이헤 해당된다.
그리고 그런 수행을 원만히 성취하면 이제 비로소 생사현실 안에서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게 된다. [해탈]
그리고 이 때 생사현실을 기준으로 하면 그런 고통의 문제에서 벗어나 해탈한 것으로 여기게 된다.
그러나 본 바탕에서는 이 어느 경우나 그런 내용 자체를 얻을 수 없다.
그리고 위 경전에서는 이 부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생사현실을 기준으로 하면
이 속박과 해탈의 차이는 대단히 크다.
한편 수행자에게는 또 다른 과제가 있다.
자신이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 해탈을 얻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자신만 생사의 묶임에서 해탈했다고 거기에서 멈출 수가 없다.
즉, 자신은 비록 생사 묶임에서 벗어나고
본 바탕에서는 그런 문제를 본래 얻을 수 없음을 다 이해하게 되었더라도,
여전히 생사현실에 묶여서 고통을 받아가는 다른 생명들이 남아 있다.
그리고 이 해결이 문제된다.
이를 방치하면 이들이 스스로 그런 사정을 깨닫고
생사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를 기대하기가 극히 곤란하다.
따라서 수행자는 자비심을 바탕으로
이들 생명을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하기 위해
중생들이 처한 생사현실 안에 다시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그 생사현실에서 중생들을 제도할 수 있으려면
일정한 수행을 원만히 성취해야 한다.
그래서 생사현실에서 복덕자량과 무량한 방편 지혜 자량을 갖춰야 한다.
그래서 불국토를 장엄하고 무량한 중생을 제도해야 한다.
그런데 이 수행노력은 처음 수행자 자신이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해야 했던 수행과 사정이 같다.
이를 함께 살피면 다음과 같다.
처음 어떤 이가 계의 덕목을 행하면 우선 그가 과거에 쌓아 놓은 업의 장애가 해소되어
생사의 묶임에서 풀려난다.
그 뒤에 위 수행을 계속하면 이제 그 수행은 수행자의 복덕자량을 성취시켜 준다,.
그리고 이 복덕자량이 성취되어야 생사현실에서 지혜자량을 닦을 바탕이 마련된다.
그리고 복덕자량과 지혜자량이 구족이 되어야 생사현실에서 다른 중생을 벗어나게 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이 여러 수행은 모두 생사현실 안에서의 일이다.
그런데 아무리 이런 노력을 해도 원래 본 바탕에서는 그런 내용 일체를 함께 얻을 수 없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다고 해도 생사현실 안의 생사고통이 여전히 문제되므로
이를 해결하기 위해 위와 같은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그렇게 하지 않아도 본 바탕에서는 역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경우 본 바탕에서는 비록 문제되지 않지만,
생사현실안에서는 본래 얻을 수 없는 그런 내용임에도
수많은 주체가 그런 내용이 있다고 망집을 일으킨 바탕에서
생사고통을 대단히 생생하고 명료하게 생사고통을 장구하게 받아나가게 된다.
그래서 이 해결이 문제되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는 이 두 측면의 사정을 잘 관해야 한다.
그래서 본래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음과 함께
그러나 본 바탕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사현실에서 겪게 되는 생사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방편을 취해 수행자가 수행에 잘 임해야 함을 경전에서 제시하는 것이다.
◈Lab value 불기2564/01/10 |
빨리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
문서정보 ori
http://buddhism007.tistory.com/12355#1917 |
보조
불기2564-01-10_대반야바라밀다경_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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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2563-01-10_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_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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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2562-01-10_경율이상_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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