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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도세품경_K0103_T0292_005 본문
『도세품경』
K0103
T0292
제5권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 해제[있는경우]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0103-005♧
『도세품경』
제5권
○ [pt op tr] 도세품경_K0103_T0292 핵심요약
♣0103-005♧
『도세품경』
제5권
비영리-동일조건변경허락원문번역문
도세품경
해제보기
도세품경 제5권
서진 축법호 한역
송성수 번역
■ 보지(普智)보살이 다시 보현보살에게 물었다.
“무엇을 관찰한다[觀] 하고 무엇을 뒤돌아본다[顧視] 하며,
무엇을 기운이 뻗는다[嚬申] 하고 무엇을 사자후(師子吼)라 하며,
무엇을 보시가 청정하다[施淨] 하고 무엇을 계율이 청정하다[戒淨] 하며,
무엇을 인욕이 청정하다[忍淨] 하고 무엇을 정진이 청정하다[進淨]하며,
무엇을 선정이 청정하다[禪淨] 하고 무엇을 지혜가 청정하다[智淨] 합니까?
무엇을 인자함이 청정하다[慈淨] 하고 무엇을 가엾이 여김이 청정하다[哀淨] 하며,
무엇을 기쁘게 함이 청정하다[喜淨] 하고 무엇을 보호함이 청정하다[護淨] 하며,
무엇을 이치[義]라 하고 무엇을 법(法)이라 하며,
무엇을 덕을 쌓는다[積德] 하고 무엇을 지혜의 업[慧業]이라 하며,
무엇을 밝게 통달한다[明達] 하고 무엇을 법전(法典)이라 합니까?
무엇을 법을 행한다[行法]하고 무엇을 법을 받든다[奉法] 하며,
무엇을 악마[魔]라 하고 무엇을 악마의 업[魔業]이라 하며,
무엇을 악마의 업을 버린다[棄魔業] 하고 무엇을 부처님을 본다[見佛] 하며,
무엇을 불사(佛事)라 하고 무엇을 스스로 높은 체 한다[自大] 하며,
무엇을 거룩한 업[聖業]이라 하고 무엇을 보살이 악마에 붙들린다[爲魔所固]합니까?
무엇을 부처님께서 건립한다[佛建立] 하고 무엇을 법을 건립한다[建立法] 하며,
무엇을 도솔천에 머무른다 하고 무엇을 도솔천에 있다가 없어진다[現沒] 하며,
무엇을 태에 머무른다[住胎] 하고 무엇을 그 안온하고 자상함을 나타낸다[現其安詳] 하며,
무엇을 생을 닦는다[修生] 하고 무엇을 그로 인하여 빙그레 웃는다[因欣笑] 하며,
무엇을 일곱 걸음 걸었다[行七步] 하고 무엇을 어린아이를 나타낸다[現幼童]합니까?
무엇을 궁중에 있다[在中宮] 하고 무엇을 나라를 버리고 왕을 버린다[棄國損王] 하며,
무엇을 부지런히 고행한다[勤苦行] 하고 무엇을 도량에 나아간다[詣道場] 하며,
무엇을 나무 아래 앉는다[坐樹下] 하고 무엇을 나무 아래 있으면서 미증유의 법에 이른다[致未曾有法] 하며,
무엇을 악마 권속을 항복받는다[降魔官] 하고 무엇을 부처님 도를 이룬다[成佛道] 하며,
무엇을 법륜을 굴린다[轉法輪] 하고 무엇을 깨끗한 법을 굴린다[轉淸白法] 하며,
무엇을 여래ㆍ지진께서 대멸도(大滅度)를 취하신다고 합니까?”
보현보살이 보지보살에게 대답하였다.
“잘 물었습니다.
온갖 중생을 위하여 거듭하여 이런 뜻을 물으니 어찌 이리도 시원합니까?
자세히 듣고 잘 들어서 잘 생각하십시오.”
“모든 대중들과 함께 가르침을 받아 잘 듣겠습니다.”
보현보살이 말하였다.
■ “보살이 관찰하는[觀] 데에 열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그 참된 이치[眞諦]를 관찰하면서 착한 업을 짓고 세우고,
미묘한 색(色)을 보고 그 근원을 모두 통달하여 수명이 끝나는 것 같이 관찰하며,
생(生)을 받는 것을 보고도 탐하거나 의지하거나 시끄러운 대중 모임을 좋아하지 않고,
일체의 근성[根]을 보고서 분별하여 모든 무너진 근성[敗根]을 교화하며,
모든 법을 관찰하여 법계를 파괴하지 않고,
눈앞에서 모든 법을 보면서 불안(佛眼)을 체득하며,
지혜의 성스러움을 체득하여 상응하는 데에 따라 설법하며 무생의 법인[無所從生法忍]으로 마지막에는 모든 부처님 법의 불퇴전의 자리[不退轉地]를 체득하고,
모든 진로와 삼계의 뭇 재난과 성문ㆍ연각의 작은 길[徑路]를 제거하며,
아유안(阿惟顔)을 관찰하여 모든 부처님 법에서 자재함을 얻고,
기쁜 법을 나타내 도의 뜻[道意]을 잘 알면서 시방의 모든 존재를 널리 나타내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보살의 열 가지 관찰입니다.
■ 보살이 뒤돌아보는 데[顧視]에 열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모든 빌고 청하는 것[乞求]을 보면 해치려는 생각을 품지 않고 그의 원하는 것에 따라 기쁘게 해줍니다.
금계를 범한 이를 보면 모두 일체지의 계율을 건립합니다.
모든 중생으로서 성내는 뜻을 품은 이를 보면 인욕의 뜻을 알고 이 부처님의 어짊[仁]으로써 권유하여 나아가게 합니다.
게으른 이를 보면 이미 행을 여의지 않으면서 권하고 도와 대승을 배우게 합니다.
마음이 산란한 이를 보면 교화하면서 심란하지 않은 각지(覺地)와 모든 신통과 민첩한 지혜[敏慧]를 건립합니다.
나쁜 지혜[惡智]를 지닌 이를 살펴 그를 위하여 일찍이 모든 사견(邪見)을 품는 일이 없으면서 남음이 없게 합니다.
착한 벗과 여래의 배울 바를 참되게 살피면서 부처님의 법을 건립합니다.
경에서 들은 대로 그 근원을 관찰하면서 위없는 뜻을 닦습니다.
중생을 돌보면서 모두 다 초췌(憔悴)하다는 생각을 품고 크게 가엾이 여김을 나타냅니다.
모든 부처님 법을 돌아보면서 바른 깨달음과 모든 신통과 민첩한 지혜를 이루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보살이 뒤돌아보는 열 가지입니다.
보살이 기운을 뻗는 데[頻申]에 열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코끼리와 같이 기운을 뻗으니,
모든 하늘ㆍ용ㆍ신ㆍ아수라[阿須倫]ㆍ가루라[迦留羅]ㆍ긴나라[甄陀羅]ㆍ마후라가[摩睺勒]의 온갖 대중들이 모이는데,
올 수 없는 이는 마치 용과 코끼리같이 탈 것을 만들어 마음으로는 중생을 대신하여 무거운 짐을 지겠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교룡(蛟龍)이 구름을 일으켜 비를 퍼붓고 번갯불을 번쩍이면서 천둥소리를 내는 것과 같으니,
근(根)ㆍ역(力)ㆍ각의(覺意)와 선정ㆍ해탈ㆍ삼매의 감로수(甘露水)를 펴고 법의 비를 널리 퍼뜨립니다.
큰 봉황왕(鳳凰王)처럼 기운을 뻗으니,
모든 무명(無明)의 어리석음과 어둠을 뽑아내고 뿌리와 줄기에 깊이 들어가 애욕의 샘물을 녹여 없애며,
그 근원과 거리끼는 문을 구제하여 욕심과 독해(毒害)와 진로와 하자(瑕疵)의 모든 더러움을 면하고 벗어나게 합니다.
사자처럼 기운을 뻗으니,
두려움을 여읜 큰 지혜 등의 검(劍)으로 대중에 있으면서 외학(外學)을 소멸하며 조복시킵니다.
용맹스럽게 기운을 뻗으니,
모든 원적(怨敵)과 애욕과 하자와 더럽고 혼탁한 어둠을 제거하면서 교화하기 어려운 것을 조복하는 것이 마치 큰 장수가 적을 항복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성스런 지혜[聖慧]로 기운을 뻗으니,
5음(陰)ㆍ4대(大)ㆍ모든 입(入)과 12인연 등을 버리고 더욱 자라지 못하게 하면서 지혜로 극히 높은 세력의 법을 나타냅니다.
총지(總持)로 기운을 뻗으니,
뜻은 매우 강건한 데 머물며 들은 것들을 곧 받아 지녀서 빠뜨리거나 잊는 일이 없으며,
이미 받아 지닌 것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연설합니다.
변재(辯才)로 기운을 뻗으니,
근기에 맞추어 대답하고 장구(章句)를 연설함이 헤아릴 수 없어도 분별하고 차례대로 펴면서 막힌 것이 없으며 중생을 즐겁게 하고 침범하거나 속이는 일 없이 본말(本末)을 다합니다.
부처님과 같이 기운을 뻗으니,
사자(師子)의 수승한 자리에 있으면서 악마의 관속을 항복받고 넓은 지혜와 모든 신통과 민첩한 지혜를 완전히 갖추며 한 생각 동안에 때에 응하고 평등하게 지혜를 이루어 최정각이 되고 밝게 통달한 보호[護]로 곧 뜻과 같이 이루면서 위없이 바르고 참된 도에 이르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기운을 뻗는 열 가지의 일입니다.
보살의 사자후(師子吼)에 열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나는 장차 성불하여 성도(聖道)를 품으리라’고 하면서 크게 사자처럼 외칩니다.
아직 제도되지 못한 이를 제도하고 아직 해탈하지 못한 이를 구제하며 편안하지 못한 이를 안락하게 하고 무위(無爲)에 이른 이는 열반[泥洹]을 취하게 하면서 중생을 가엾이 여깁니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법의 가르침과 성인 대중의 교훈을 수순하면서 거역하지 않고 여래께서 계신 곳에서 반복(反復)하게 됩니다.
견고한 원(願)으로 모든 부처님 국토를 청정하게 하고 모든 것을 다 용감하게 통달하며 금계를 삼가고 조심하며 모든 악취(惡趣)를 제거하여 다 함께 녹여 쉬게 하면서 사자처럼 외칩니다.
몸은 빠짐없이 부처님의 몸ㆍ입ㆍ마음을 갖추고 상호(相好)를 장엄하여 모든 공훈을 구하되 만족해함이 없고 부처님 지혜를 원만하게 갖추며 성인의 밝고 마땅함[明宜]을 그리워하면서 게으르지 않고 뭇 악마를 항복시켜 해되는 일[害事]이 없게 합니다.
바르고 참된 행을 받들면서 진로의 업[塵勞業]을 버리고 모든 법에는 나[我]도 없고 사람[人]도 없고 오래 삶[壽]도 없고 목숨[命]도 없음을 알고 보면서 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으로 마음은 마치 허공과 같이 청정하여 때[垢]가 없으며,
곧 모든 법전(法典)을 알고 무생의 법인(法忍)을 체득하면서 사자처럼 외칩니다.
맨 마지막의 보살은 청정하여 때[垢]를 여의고 명(明)을 알며 모든 부처님 국토를 밝게 빛내고 감동(感動)시키면서 대중과 제석ㆍ범왕과 사천왕에게 고(告)합니다.
나고[生] 아직 나지 않은 것[未生者]을 보고 탄식하면서 한계나 막힘이 없는 끝없는 지혜로써 각의(覺意)를 자세히 관합니다.
이미 위없이 바르고 참된 도를 이루어 모두 아무것도 감수함이 없으니 크게 기뻐합니다.
또 일곱 걸음 걸으면서 ‘나는 세상에서 존귀하며[世尊] 지극히 뛰어나 견줄 이 없으며 장차 중생의 생로병사를 제거하리라’ 하고 행한 대로 말하면서 사자처럼 외칩니다.
이것이 바로 보살의 열 가지 사자후입니다.
■ 보살의 보시가 청정한[施淨] 데에 열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중생에게 평등하게 보시하되 마음에 치우침이 없고 기뻐하는 바에 따라 보시합니다.
모든 원을 두루 갖추면서 산란하지 않게 보시하고 가엾이 여기는 업을 끊지 않습니다.
때맞추어 보시하니 여러 사람의 모든 근원을 알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일부러 보시하지 않으며 모든 잡다한 생각을 떠납니다.
잘 베풀면서 보시하고 마음의 애착을 모두 버리고 몸 안이나 몸 밖의 것에 대해 애착하지 않습니다.
모든 아끼는 것을 보시함으로써 구경(究竟)에는 준 것에 대해 청정하게 됩니다.
베풀어 준 것으로 부처님 도를 권하여 돕고 유위와 무위로 버리면서 이러한 것을 깨우쳐 교화하는 것입니다.
베풀어 주는 사람은 구경에는 통달하기에 이르러서 도량(道場)을 이루게 됩니다.
보시에는 세 가지 경우[三場]인 보시하는 이와 받는 이와 그 마음의 작용[處]이 청정해야 합니다.
모든 법을 생각[念]하되 마치 허공과 같이 평등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보살의 보시가 청정한 열 가지의 일이니,
만일 여기에 머무르면 여래의 위없는 대보시[大施]를 체득합니다.
■ 보살의 계율이 청정한[戒淨] 데에 열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몸으로 하는 행이 청정하면서 세 가지의 일[事]을 수호하는 것과,
입으로 하는 말이 청정하면서 입의 네 가지 허물[過]을 버리는 것과,
마음으로 짓는 세 가지의 더러움[三穢]을 버리면서 성냄이나 어리석음이 없는 것과,
금계(禁戒)를 기르면서 어떤 것도 범하지 않고 허물이 있는 이를 보면 때에 따라 편안하게 하면서 탐욕의 업을 녹이고 성냄이나 어둠을 버리는 것과,
그 덕이 천상과 세간을 밝게 비추고 도의 마음을 지키면서 대승을 생각하며 좋아하는 것과,
모든 여래를 받들면서 바른 가르침을 배우고 무위의 계[無爲戒]로 잠자코 계율의 금지를 따르는 것과,
모든 중생의 재난과 뭇 죄를 제거하고 뭇 악을 멀리 여의는 것과,
온갖 덕의 근본에 따르면서 사견을 끊는 것과 금계로써 자만하지 않는 것과,
중생을 어루만져 기르면서 크게 가엾이 여기는 힘을 좇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보살의 계율이 청정한 열 가지입니다.
■ 보살의 인욕이 청정한[忍淨] 데에 열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만일 사람이 욕설을 퍼붓고 나쁜 소리로 해치더라도 잠자코 응하지 않으면 인욕이 청정하고 또 중생을 보호하는 것이고,
기와나 돌로 때리고 던지거나 칼이나 몽둥이로 몸을 해치더라도 받아들이며 겨루지 않으니 그와 나를 수호하기 위한 것이며,
설령 그를 향해 성을 내고 원망하더라도 사랑하고 가엾이 여겨 본래부터 성질에 해치려 함이 없는 것이고,
만일 업신여기는 이에게 나쁜 생각을 품지 않고 밝은 빛으로 감당해 내고 만일 와서 생각을 돌리면 능히 돕고 따르게 하는 것이며,
차라리 몸과 목숨을 버릴지언정 참으면서 거역하지 않고 자만하는 생각을 버리고 아직 배우지 못한 이를 가벼이 여기지도 않는 것이고,
스스로 몸을 허공과 같이 보고 탐하지 않고 마치 요술과 같다고 관찰하며 참는 것이며,
어떤 이들이 악으로 향하여도 마음에 해를 품지 않고 그와 나라는 생각[彼我想]이 없는 것이고,
진로를 수순하면서 갖가지 독[衆毒]을 녹여 없애는 것이며,
모든 보살의 지혜로 부드럽고 온화하게 인욕하면서 모두 법을 다하여 없어짐을 일으켜 나타내는 것이고,
모든 통혜(通慧)의 경계로 다른 사람에게 숭상할 바는 없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보살의 열 가지 청정한 인욕입니다.
■ 보살의 정진이 청정한[精進淨] 데에 열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몸으로 행하는 정진이 청정하니 모든 보살들을 공경하고 귀의하면 곧 성현(聖賢)과 적정에 든 중우(衆祐:
세존)를 위합니다.
입으로는 말로 부지런히 힘쓰면서 모든 여래께서 널리 펴신 바를 듣고 모두 알고 기억하면서 지니며,
모든 부처님의 덕을 찬탄하고 들은 법 그대로를 중생을 위하여 연설하되 고달파하지 않습니다.
마음과 생각이 곱고 깨끗하여 자(慈)ㆍ비(悲)ㆍ희(喜)ㆍ호(護)와 선사(禪思)ㆍ해탈문ㆍ정의(定意) 정수(正受)에 있어서 선권(善權)을 버리지 않고 겁내거나 하열하지 않으면서 언제나 정진으로 닦으며 아첨을 품지 않고 맑고 깨끗한 행에 나아가면서 질박하고 정직하여 모든 행에 잡다하거나 번쇄함이 없습니다.
지성(志性)이 온화해지도록 힘쓰고 머물거나 가는 곳마다 언제나 남다르게 뛰어나 그 지혜가 한층 더 늘어나면 맑고 깨끗한 법은 드디어 광명이 치성하면서 널리 퍼집니다.
계(戒)도 없고 허망함도 없으면서 보시로 뜻을 조화하고 인화(仁和)를 밝게 알면서 계(戒)와 다문[聞]과 베풀어 주는[施與] 데에 영원히 방일함이 없으며 여쭙고 받는 일을 버리지 않습니다.
장차 불수(佛樹)에 나아가 악마를 항복받아야 하니,
그것을 위하여 청정하게 정진하면서 음욕ㆍ성냄ㆍ어리석음과 애욕과 진로와 모든 집착과 사견과 음개(陰蓋)의 거리낌을 끊습니다.
지혜의 광명을 이루어 언제나 진실로 사유하면서 착하고 밝은 마음에 이르고 뜨거운 번뇌를 품지 않으면서 업을 짓지 않으며 또한 모든 부처님 법에 상응하고 상응하지 않는 것도 없는 데에 이르게 되고 그를 위하여 언제나 부지런히 닦으면서 마음을 열어서 받습니다.
입과 마음으로 영원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보는 것과 보지 않음을 평등하게 하여 넓은 문[普門]의 경계를 진실로 깨달아 알고 아는 것에 따라 순종하며,
법의 광명을 성취하고 강하고 온화한 세력으로 머무르는 지위[住地]를 모두 초월하여 모든 부처님의 연설을 좋아하고 불신(佛身)에는 어떠한 번뇌도 없다는 것을 압니다.
현생에서 태(胎)에 들어가고 출생하여 세속에 있으면서 나라를 버리고 왕을 버리고 최정각(最正覺)을 이루어 법륜을 굴립니다.
위대한 멸도(滅度)로 보이면서 모두 다 보현의 행을 갖춥니다.
이것이 바로 열 가지 정진의 청정한 것입니다.
■ 보살의 선정이 청정한[禪淨] 데에 열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언제나 출가를 바라면서 뜻을 한마음에 두면 곧 청정하게 되고,
온갖 탐욕을 버리면서 착하고 친한 벗을 만나고 때맞추어 고요한 데에 이르니 평등하게 도(道)를 알기 때문이며,
한적한 데에 거처함을 익히면서 곱고 깨끗한 행을 익히고 나[吾我]라는 것에 계탁하지 않으면서 또한 연모하지도 않고,
모든 수면(睡眠)을 제거하면서 시끄러움을 버리고 고요함을 좋아하면서 마음을 부지런히 닦으며,
모든 감관[根]의 문이 고요하면서 자기의 지혜에 한마음이 되면 온갖 칼과 쇠사슬[枷鎖]의 위험이나 흉악한 사람에게 피해나 장애를 받지 않고,
도의 길[道路]과 깨달음의 마음[覺意]으로 때마다 고요하게 모든 것을 닦으며 지혜로써 관찰하며,
일심(一心)에 대해 사유하여 선권(善權)에 의하기 때문이고,
다시 되돌아서 욕계(欲界)에 들어와 신통의 자취를 밟도록 일으키며,
모든 중생의 모든 근성을 분별하여 고요한 데에 들게 하여 아무것도 없음[無所有]을 좋아하고,
담박(澹泊)한 문으로 부처님의 정의(定意)에 이르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선정이 청정한 열 가지입니다.
■ 보살이 지혜가 청정한[智淨] 데에 열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청정한 지혜로써 그 보응(報應)을 알고 과실(果實)을 바라지 않으면서 일체를 제도하며 눈으로 본 것에 대해 언제나 안락과 화합을 도모하면서 다투지 않고 끊을 것을 분명히 알면서 또한 항상 있다[常]고 헤아리지 않습니다.
인연(因緣)에 들어가서 참된 이치의 지혜[眞諦慧]를 따르고 모든 사견을 버리면서 중생을 섭수하되 일찍이 쉬거나 그만두지 않습니다.
모든 중생들이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행하는 일을 보면 그것을 있는 그대로[自然] 보면서 마치 요술이나 허깨비[幻化]와 같다고 여깁니다.
큰 변재(辯才)의 지혜로 성스런 광명에 들어가 청정한 지혜로 삼고 장구(章句)를 분별하면서 널리 펴되 막힘이 없습니다.
온갖 악마와 뭇 외도ㆍ이학과 성문ㆍ연각을 멀리하면서 모든 여래의 선권(善權)의 지혜에 들어갑니다.
모든 부처님의 청정함과 중생의 청정함을 보며 모든 법의 고요함을 보고 모든 세계 국토는 있는 그대로여서 마치 허공과 같다고 관합니다.
넓은 지혜가 청정하고 이 가운데 노닐면서 무위상(無爲相)에 이르러 총지를 체득합니다.
변재(辯才)를 널리 펴면서 선권방편에 머무르고 모든 도무극으로 노닐고 거니는 데마다 대중과는 뛰어나게 다릅니다.
한마음으로 생각하는 동안에 모든 법의 평등함을 알고 지혜는 마치 금강과 같으며 성을 내거나 원한을 품지 않고 두렵다는 생각도 없습니다.
청정한 지혜로 모든 법의 거룩한 정수리[聖頂]의 지혜를 모두 체득합니다.
이것이 바로 지혜가 청정한 열 가지입니다.
■ 보살의 인자함이 청정한[慈淨] 데에 열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평등하게 중생을 사랑하면서도 청정한 마음에는 여러 가지가 없고,
언제나 가엾이 여기는 행으로 뭇 사람을 위하여 짐을 지고서 어루만져 기르며,
몸을 돕고 사랑하면서 중생의 나고 늙고 죽는 재난을 함께 구제하고,
중생을 버리지 않으면서 덕의 근본을 일으키며,
해탈의 어짊[仁]을 행하면서 중생의 진로와 애욕을 모두 끊어 없애고,
도(道)의 뜻을 잊지 않고 중생에게 가르치고 타이르면서 통혜(通慧)의 마음에 들어가며,
사람들에게 해가 없게 하면서 평등한 빛을 널리 펴고,
허공과 같이 두루한 사랑으로 일체를 돕고 수호하며,
법을 좇아 닦고 가엾이 여기면서 마치 참된 이치의 무루(無漏)의 사랑과 같이 교화하고,
그것을 얻음으로 인하여 보살의 적연(寂然)한 데에 드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보살의 인자함이 청정한 열 가지입니다.
■ 보살의 크게 가엾이 여김이 청정한[大哀淨] 데에 열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견줄 데 없이 크게 가엾이 여기니 자기 몸을 위하는 까닭입니다.
크게 가엾이 여김을 싫어하지 않으니 중생을 위하는 까닭입니다.
고뇌를 만나도 근심 걱정하지 않고 악취(惡趣)와 8난(難)에 처한 모든 이를 가엾이 여기며 그곳에 나게 되면 힘써 그들을 구제합니다.
하늘이나 인간 세상에 태어나면 크고 청정한 자비[悲]를 일으키고 덧없음을 널리 강설하면서 온갖 사견에 떨어진 이들을 가엾이 여기며 헤아릴 수 없는 겁 동안 그로 인하여 덕의 갑옷[德鎧]을 입고 아직 제도되지 못한 이를 버리지 않으면서 안락하게 한 뒤에는 물러서지 않습니다.
가엾이 여기면서 중생에게 권하여 큰 안락을 얻게 하고 온갖 업(業)을 짓되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자기 마음의 가엾이 여김이 청정해지면 모든 뒤바뀐 이와 세간의 무지(無智)에 머무르는 이를 가엾이 여기면서 의지함을 멀리하게 하고 때에 맞추어 설법합니다.
모든 법은 본래부터 있는 그대로 청정하며 텅 비어서 견실(堅實)함이 없지만 모든 객진(客塵)에 더럽혀집니다.
보살은 이것을 알기 때문에 중생에 대하여 크게 가엾이 여기는 생각을 일으켜 청정하지 못한 이로 하여금 영원히 청정한 곳을 얻게 합니다.
때[垢]가 없이 밝게 빛나면서 그들을 위하여 설법하고 모든 법을 분별하되 마치 공중에 날아다니는 새의 발자국과 같이 합니다.
중생은 이 온갖 경의 뜻에 대하여 어둡고 분명히 알지 못하므로 보살이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일으켜 그들을 위하여 큰 지혜로 멸도(滅度)를 취하는 것을 나타내고 참된 이치[眞諦]로 자취[跡]를 밟습니다.
이것이 바로 보살의 크게 가엾이 여김이 청정한 열 가지 입니다.
■ 보살의 기쁘게 하는 마음이 청정한[喜淨] 데에 열 가지가 있습니다.
기뻐하면서 큰마음[大心]을 일으키고 기쁨으로 청정함을 삼는 것이고,
가진 모든 물건을 보시하면서 아까워하거나 괴로워하지 않고 겁이 많거나 허약함도 품지 않는 것이며,
계(戒)를 훼손한 이를 가르칠 때에는 그 중생에게 나쁘게 해도 모두 참는 것이고,
모든 서원을 통달하여 경의 이치로 인해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뜨거운 번뇌를 청정함을 기뻐하는 것으로 삼지 않는 것이며,
뜨거운 번뇌를 생각하지 않고 법락(法樂)을 즐김으로써 온갖 탐욕의 즐거움을 버리는 것입니다.
중생에게 경전의 요의(要義)를 나타내 보여 그로 하여금 모든 탐욕과 이익의 은혜를 버리게 하는 것이며,
부처님을 뵙되 싫증냄이 없고 받들어 공경하면서 스스로 귀의하며 법에 파괴됨이 없는 기쁨으로써 청정함을 삼는 것이고,
모두가 선정의 일심(一心)으로써 해탈문과 정의(定意)ㆍ정수(正受)에 이르면서 스스로 재미있게 즐기는 것이며,
다시 이 법으로 다른 사람을 교화하되 고요하고 능히 어질면서 선정으로 성을 내거나 원한이 없는 것이고,
지혜를 으뜸으로 삼아 모든 사견을 버리고 보살행을 갖춤을 기쁘게 하는 마음이 청정함으로 삼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기쁘게 하는 마음이 청정한 열 가지입니다.
■ 보살의 보호함이 청정한[護淨] 데에 열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모든 사람들이 유위(有爲)를 탐내고 좋아할 적에 그 중생을 교화하여 무위(無爲)에 이르게 하면 곧 청정하게 보호함이 됩니다.
본래 성품이 욕심이 없는 법에 있고 도리어 세간에 머물면서 세간[器]에 상응하지 않음을 보니 위험하거나 해롭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법에 상응한 이를 보면 방편을 나타내어 청정한 법에 뜻을 두면서 성문이나 연각의 업과 학(學)ㆍ불학(不學)의 일을 사모하지 않으며 온갖 애욕의 즐거움을 탐내지 않습니다.
업(業)이 진로에 있어도 마음은 항상 전일하게 경전에 두도록 힘쓰며 성문이나 연각의 생사를 싫어합니다.
처소에 머무르지 않고 세속의 말과 다른 이를 위험하게 하는 말을 좋아하지 않으면서 때에 따르지 않는 말을 떠납니다.
성문이나 연각은 언설로써 보살도를 어지럽히고 상실하게 하므로 그와는 어울리지 않으면서 중생을 교화합니다.
이미 이해한 힘으로 4대(大)를 구제하고 모든 입(入)이 고요히 사라지며 법을 알지 못하면 때맞추어 자세히 관합니다.
그 어떤 보살이 본래부터 여래의 지위[如來地]에서 변화를 나투면 보살은 두 가지 일[二事]을 떠나서 갑작스러움도 없고 돌연함도 없으며 뽐내지도 않고 낮추지도 않는다고 관찰합니다.
많은 생각과 허망한 생각으로 생기는 병폐를 떠나 마음이 언제나 고요하게 가라앉으며 진실한 이치의 법에 처하여 법인(法忍)을 체득합니다.
이것이 바로 보호함이 청정한 열 가지입니다.
■ 보살의 이치[義理]에 열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법을 들은 이는 무엇을 요목으로 삼는가?
법의 뜻을 환히 깨달아 알고,
공(空)을 알아 통달한 이면 본래부터 없는[本無] 일인 줄 알며,
모든 법을 분별하여 적정(寂靜)한 이치를 닦고,
고요하고 편안하기[恬泊] 때문에 존재함이 없는 줄 알며,
모든 음성에 집착하지 않으므로 참된 이치 그대로이고,
3세에 평등하여 법계의 평화스런 맛[平和味]에 들어가기 때문이며,
본래부터 없다는 이치로 여래에게 귀착하고,
진제(眞諦)와 본제(本際)를 알면서 그대로 살피며,
큰 멸도(滅度)의 이치로 힘든 고통과 근심을 끊고,
보살의 행을 닦아 감수하는 것을 모두 제거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열 가지의 이치입니다.
■ 보살에게는 열 가지의 법[法]이 있습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지성스런 법을 닦으면서 말과 행이 상응하고,
다툼이 없는 법으로 온갖 탐내고 구한 바를 버리며,
다툼이 없는 일로 진로와 훨훨 타는 욕심을 없애고,
적연(寂然)한 업을 닦아 모든 뜨거운 번뇌를 여의며,
탐욕을 버리고 뭇 은애(恩愛)와 번뇌[垢]로 인해 생기는 우환을 소멸하여 생각함이 없고,
인연으로 모든 짓는 일을 그쳐 어떤 법도 생기지 않아 마치 허공과 같이 평등하며,
무위의 법을 익혀 모든 생기고 일어나고 움직이는 일을 그만두고,
이미 본래부터 청정함을 통달하여 있는 그대로임[自然]을 알며,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온갖 병(病)을 끊고,
멸도의 법에 곧장 이르러 보살의 행을 일으키니 오히려 언제나 간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보살의 열 가지 법입니다.
■ 보살이 덕을 쌓는[積德] 데에 다시 열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만일 사람에게 권하여 보살의 마음을 내게 할 수 있으면 공덕을 쌓는 것이 되니 삼보(三寶)를 끊지 않게 함에서이고,
열 가지의 일[事]을 권하면서 복의 행[福行]에 수순하니 온갖 착하지 않은 법을 버리면서 바르게 경전을 수행하게 함이며,
지혜의 업을 일으키면서 보살의 복을 닦으니 삼계에 있어서는 미칠 수 있는 이가 없어서이고,
덕을 닦으면서 싫증냄이 없으니 온갖 중생 세계를 구제하려 함에서이며,
안팎의 가진 바를 모두 보시하니 온갖 탐하고 구하는 업을 버리게 됨에서이고,
상호(相好)를 두루 갖추고 대정진(大精進)을 닦으면서 되돌아오지 않으니 마음의 가시나무와 얽히고설킨 우환을 잘라 버리면서 영원히 생각하지 않음에서이며,
모든 상ㆍ중ㆍ하의 덕의 근본으로 부처님 도를 권하며 도우니 권도방편으로 청정한 가르침을 받아서이고,
사견을 버리면서 덕의 근본을 닦고 크게 가엾이 여김[大哀]을 일으키니 정사(正士)의 행을 나타내면서 홀로 놀고 거님에서이며,
모든 여래ㆍ세존을 받들어 공경하면서 귀명하고 모든 보살을 보면 마치 부처님같이 하니 모든 중생을 안온하게 하면서 견고하게 뜻을 보호함에서입니다.
헤아릴 수 없는 겁 동안 공덕을 쌓고 이 덕의 근본을 함축하여 도(道)가 자기 몸에 있는 것이 마치 손바닥을 보는 것 같으니 한 사람에게 베푼 뒤에는 곧 그를 깨우쳐 교화하면서 근심을 품지 않고 또한 후회하지도 않으며 온갖 중생에게도 그와 같이 하면서 먼저 베풀어 주고 그런 뒤에 깨우쳐 교화하며 뭇 덕의 근본을 쌓아 그 마음을 조복하고 도를 보는 것이 마치 손바닥과 같으면서 근심이나 후회를 품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보살의 광대한 뜻이 마치 허공과 같은 것이니,
이 열 가지의 덕을 쌓으면 끝없이 광대한 지혜에 듭니다.
■ 보살에게는 열 가지 지혜의 업[慧業]이 있습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견문이 넓은 이[博聞]를 착하고 친한 벗으로 삼아 그와 함께 하고 그림자처럼 그 뒤를 따르면서 여쭈어보고 받들어 공경하고 분주히 다니면서 시키는 대로 하고 얻어야 할 것을 나누어 주고 그의 가르침과 분부를 받들되 잡다한 뜻이 없습니다.
자만을 버리고 겸손하여 낮추면서 공손하게 따르며 몸을 낮추면서 사양하고 마음을 조복하여 뜻을 낮추며 성품이 억세지 않고 졸렬하지 않으며 성질이 거칠지 않고 금계(禁戒)로 평온하고 올바르며 뜻이 부드럽고 온화하면서 얼굴에 기쁜 빛을 띠고 거짓을 여의면서 먼저 문안드리며 성품과 행실이 질박하고 정직하면서 망령되거나 심란하지 않고 아첨하지 않으면서 지혜로써 업을 삼아 세간에 상응하여 뜻과 성품이 맑고 온화합니다.
나아갈 바를 환히 알아 마음이 어지럽지 않고 부끄러워할 줄 알아 여섯 가지 생각[思念]을 받들며 보시[施]ㆍ지계[戒]ㆍ인욕[忍]ㆍ정진[進]ㆍ선정[寂]ㆍ지혜[智]의 여섯 가지 근본을 나타내 보이고 여섯 가지 견법(堅法)에 따르며 물러나지 않고 열 가지 해혜(解慧)에 들어가서 언제나 법의 뜻을 구합니다.
법을 좋아하고 법을 즐기면서 바른 법[正法]을 사모하여 찾고 듣는 데에 싫어함이 없으면서 세간의 언설[談話]을 버리고 진로와 같이하지 않으면서 세속의[方俗]의 말을 여의고 도(道)를 강설하여 세간을 제도하면서 소승을 멀리하고 뜻을 미묘한 대승의 업에 두며 마음으로는 다른 업[異業]에 대해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섯 가지 도무극(度無極)을 구하면서 그 구하는 이는 일찍이 네 가지의 범행[四梵行] 닦는 일을 멀리 여의지 않고 밝게 빛남과 유순(柔順)한 법을 익히며 성품이 슬기로워서 묻는 일을 분명히 알고 모든 삿된 길을 여의면서 바른 길을 인도하고 이롭게 하며 마음에 생각한 바를 차례대로 널리 펴고 자기의 마음을 조화하면서 다른 이의 마음을 보호합니다.
이른바 지혜의 업[慧業]으로 요의의 행[要行]을 닦아 익히니 언제나 집을 떠나고 비록 삼계에 머문다 하더라도 고요함[寂靜]을 즐기며 스스로 자기 마음을 살펴서 나쁜 생각을 따르지 않고 세 가지의 나쁜 일인 몸ㆍ입ㆍ뜻으로 짓는 일을 녹여 버리며 마음으로는 구경(究竟)의 있는 그대로인 것을 관하여 자기와 남의 마음을 청정하게 합니다.
5음(陰)은 마치 요술이며 허깨비와 같다고 관하고 4대종[四種]은 마치 독사와 같다고 살피며 모든 쇠함[衰]과 입[入]도 역시 빈 무더기이며 요술과 같고 허깨비ㆍ아지랑이ㆍ물속의 달ㆍ꿈ㆍ그림자와 같으며 산 속의 메아리와 같고 거울 속의 형상과 같으며 허공에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고 형상 없는 수레바퀴와 같다고 보니,
그 비유가 이와 같은지라 그 본말(本末)을 말하여도 모든 법은 붙잡을 수 없고 그런 종류조차 없는 것이 마치 햇빛의 그림자와 같으며 항상 있는 것[常]도 없고 아주 없는 것[斷]도 없으며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어서 모든 법은 머무르는 곳이 없으니,
모든 법을 관하면서 이와 같이 미묘한 업에 들어가게 되어야 그런 뒤에 비로소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보살이 이름과 만물은 생기자마자 곧 소멸하는 줄 아는 것이니 일곱 번째 지혜의 업입니다.
모든 법에 들어가되 모든 법에는 내[我]가 없고 다른 사람[人]도 없으며 오래 삶[壽]도 없고 목숨[命]도 없으며 마음으로 헤아릴 수 없고 음욕ㆍ성냄ㆍ어리석음도 없으며 몸도 없고 또한 관찰할 업[觀業]도 없으며 더러움[垢]도 없고 생(生)하는 것도 없으며 색의 익힘[色習]도 없고 옷과 밥[衣食]도 없음을 듣고 무위(無爲)에 이르도록 익히니,
이미 이러함을 들으면 기뻐하고 믿으면서 의심을 품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여덟 번째 지혜의 업입니다.
신해(信解)를 두루 갖추고 정진하면서 때를 따르며 모든 감관이 고요하고 안정되어 깨끗한 일을 보고 고요하고 조용하게 침묵하며 모든 생각에 대하여 짓는 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으며,
계(戒)에는 형상도 없고 나[我]도 없고 남[人]도 없고 또한 행하는 바도 없으며 몸을 탐내거나 마지막에 이르는 문자(文字)도 없고 부스럼과 혹[瘡疣]도 없으며 얻을 바의 인(忍)도 없고 나아감도 없으며 게으름도 없고,
짝할 것[雙]도 없고 홀로인 것[隻]도 없으며 그 몸과 입과 마음으로 수행해야 할 정진의 요목도 없고 온갖 법과 중생에 대하여 모두 평등한 마음으로 어느 것에도 머무르지 않으며,
이쪽 끝[此際]도 아니고 언덕을 건너지도[度岸] 않으며 그것과 이것을 여의고 행하고 행하지 않은 것도 없으며 지혜를 좇아 이런 생각을 짓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홉 번째 지혜의 업입니다.
모든 바라는 것과 생각으로 인해 생기는 우환을 제도하면서 모든 인연(因緣)을 보고 모든 법은 청정한 업이라고 보며 모든 정각(正覺)을 보고 모든 깨끗함을 보고 법계의 모든 법은 청정한 업이라고 보며,
모든 정각을 보고 중생을 관하고 모든 세계의 국토가 매우 청정하다고 살피며 모든 세계의 국토는 허공과 같이 청정하다고 보고 모두 깨끗함을 관하고,
모든 법계는 곧 지혜가 청정하며 모든 성스런 지혜[聖慧]를 보고 법이 매우 청정하다고 봅니다.
이것이 바로 열 가지 지혜의 업입니다.
■ 보살이 통달(通達)을 일으키는 데에 열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부처님 법을 잘 지니면서 통달을 일으키기 위하여 마지막까지 정진하고,
도의 이치로써 모든 사견(邪見)을 여의면 곧 명(明)이 나타나게 되며,
지혜로써 명을 삼으면 모든 근(根)이 밝게 통달하고,
평등한 정진을 닦음으로써 바른 견해[正解]로 삼으며,
성스런 지혜를 권하고 도우면서 수순한 업[順業]에 들어가고,
진혜(盡慧)를 일으켜 죄와 진로를 제거하며,
지혜를 선택하면서 천안(天眼)의 광명을 일으키고,
본숙(本宿)이 청정하면서 지난 세상에 머물고 거처하였던 곳을 알며,
모든 신통을 닦으면서 중생의 근원을 관하고,
온갖 번뇌[漏]를 다하면서 바른 지혜를 일으키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신통을 일으키는 구(句)입니다.
■ 보살의 법전(法典)에 열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비록 모든 법을 구하되 사무침이 없는 것이고,
모든 아첨을 버리고 정진함으로써 모든 법을 구하는 것이며,
뜻은 세속을 멀리하여 마음에 집착이 없음으로써 모든 법을 즐기면서 몸과 목숨을 탐내지 않는 것이고,
온갖 진로의 재난을 제거하면서 도법(道法)을 좋아하는 것이며,
이익에 따라가려는 생각에 미혹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하면서 뭇 사람을 가엾이 여기고 경전을 앙모하되 혼자만을 위해서 하지 않고,
법을 구하는 까닭도 지혜에 들고자 하기 때문이며 법에 머무름을 탐내지도 않으니 인도하고 이롭게 하는 행 때문이며,
법을 좋아하고 공경하면서 가벼이 여기거나 희롱하지 않는 것이고,
중생을 가엾이 여겨 짐짓 법의 뜻을 구하면서 도의 마음을 버리지 않는 것이며,
중생이 의심하는 번뇌[結]를 끊으려 하여 짐짓 경의 뜻을 구하면서 망설임을 소멸시키고 부처님의 도업(道業)을 구하는 것이고,
빠짐없이 다 알게 하려 하여 짐짓 경전을 구하고 다른 법[異乘]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법을 구하는 열 가지의 일입니다.
■ 보살이 법을 행하는[行法] 데에 열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모든 어리석은 이를 교화하되 지성스런 마음으로 은근하게 하니 덕의 근본에 들어가게 함에서입니다.
믿으면서 생각을 품는 바가 없고 모든 거리낌[罣礙]을 제도하며 법이 있는 그대로[自然]임을 알아 돈독하게 요긴한 뜻[要義]을 행함에서입니다.
경전에 머무르고 도의 지혜를 받들고 나서 뜻을 여의지 않으며 도의 지혜를 좇고 받드니 법으로써 생각을 삼아서입니다.
여덟 가지 삿된 지위[邪地]를 초월하고 여덟 가지 바른 길에 들어가니 여덟 가지 등지[等:
等至]를 순종함에서입니다.
모든 번뇌의 그물[結網]을 끊어서 생사의 흐름을 자르고 참된 이치의 뜻을 나타내면서 물을 거슬러 건너가니 이를테면 수다원(須陀洹)이라고 합니다.
스스로 방일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평등하고 아첨이나 가식을 행하지 않으면서 머무르고 거처하는 데마다 언제나 도덕을 닦으니 두루 노닐면서 왕래합니다.
삼계를 좋아하지 않고 때를 찾아 나서 잡다한 생각을 품지 않습니다.
모든 번뇌가 다함[漏盡]을 받드니,
불환(不還)이라고 합니다.
여섯 가지 신통[六神通]을 짓고 여덟 가지 해탈문[八解門]을 좋아하며 본삼매(本三昧)로 인하여 정수(正受)를 닦으면서 몸의 배[身船]을 삼아 네 가지 변재(辯才)를 펴니 집착하는 바가 없게[無所著] 됩니다.
한 가지[一品]를 즐김으로써 연기(緣起)의 일에 들어가 한 맛의 업[一味業]을 즐기고 고요함[寂]을 좋아함으로써 근본을 삼아 생각함[思想]이 없으면서 자기 자리[己地]에 들어가며 스스로 지혜를 듣고 오직 신통을 닦을 뿐이니,
연각(緣覺)이 됩니다.
마음과 뜻이 미묘하면서 즐거이 밝은 근성[明根]에 들어가 마음으로는 언제나 중생 제도하려는 생각을 하며 공덕의 복업(福業)과 10력(力)과 무외(無畏)를 쌓고 모든 부처님 도의 업을 두루 갖춥니다.
이것이 바로 보살이 광명의 업[光業]을 닦는 열 가지입니다.
■ 보살이 법을 받드는[奉法] 데에 열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착한 벗을 받들고 공경하면 곧 법을 행하는[行法] 것이 되고,
모든 하늘이 권하고 도우면 곧 법을 행하는 것이 되며,
언제나 모든 부처님과 세존의 가르침을 들으면 곧 열 가지 법(法)을 행하는 것이 되고,
중생을 불쌍히 여겨 생사를 끊지 않으면 곧 법을 행하는 것이 되며,
마지막까지 도업(道業)을 부지런히 닦으면서 번뇌와 한[結恨]을 품지 않으면 곧 법을 행하는 것이 되고,
동학(同學)으로서 대승을 닦는 모든 이와 모든 보살의 업을 힘써 정진하면 곧 법을 행하는 것이 되며,
좇아 닦으면서 뜻을 따르고 모든 삿된 업을 버리면 곧 법을 행하는 것이 되고,
모든 악마와 진욕(塵欲)을 항복받으면 곧 법을 행하는 것이 되며,
성인의 깨달음[聖覺]에 머물러 중생의 근기를 보면서 그를 위하여 경전을 설하면 곧 법을 행하는 것이 되고,
광대하고 한량없는 도업(道業)을 닦고 다스리면서 도의 뜻을 버리지 않으면 곧 법을 행하는 것이 되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받들어 행하는 열 가지의 법입니다.
■ 보살에게는 열 가지 악마[魔]가 있습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몸의 악마[身魔]에 의지하여 5음(陰)에 집착하는 것이고,
진욕의 악마[塵欲魔]에게 편의를 얻게 하는 것이며,
또한 죄의 악마[罪魔]에게 덮여 가려지는 것이고,
스스로 뜻을 일으키면 이것이 바로 마음의 악마[心魔]인 것이며,
죽음의 악마[死魔]는 살고 있던 처소를 버리게 하는 것이고,
그 하늘 악마[天魔]는 기억과 모든 생각이 많으면서 방일한 행을 하는 것이며,
덕의 근본을 깨뜨린 악마[廢德本魔]는 사람을 따르면서 어둠에 집착하는 것이고,
정의를 어지럽히는 악마[亂定意魔]는 그리워하고 좋아하는 바가 많은 것이며,
착한 벗과 비슷한 악마[似善友魔]는 바깥의 형상을 진실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고,
도의 지혜를 받들어 닦지 못하게 하는 근본 악마[本魔]는 바른 서원을 여의게 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열 가지의 악마입니다.
■ 보살에게는 악마의 업[魔業]이 열 가지가 또 있습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보살의 마음을 어기면서 많은 덕의 근본을 버리는 것입니다.
치우친 마음으로 보시하고 계율을 범한 이를 보면 성내는 생각을 품고 모든 품은 원한을 버리며 게으름을 버리고 산란한 마음을 피하면서 모든 삿된 지혜[邪智]를 얻는 것입니다.
법사(法師)로서의 행을 버리고 법 그릇[法器]이 되도록 권유하지 않고 만일 경전을 펼 때면 오직 옷과 밥만을 찬탄하면서 그릇[器]이 파괴되기만을 권하는 것입니다.
또 모든 도무극에 대해 고달파하고 싫증을 내며 또다시 계칙(戒敕)과 바른 법을 삼가 받들어 행하지 못하며 해석이 바른 교훈에는 게으르면서 마음에 겁을 내고 도의 가르침을 수순하지 않으면서 마음에는 여러 생각을 품는 것입니다.
모든 나쁜 벗을 익히고 착한 벗을 멀리하며 성문이나 연각을 좋아하고 태어날 곳을 얻으며,
좋아하면서 애욕으로 그 마음이 적멸(寂滅)하기를 여의는 것입니다.
뜻으로는 보살을 싫어하면서 비방하고 사람의 장단점(長短點)을 구하면서 그의 이익을 끊어지게 하려고 하며 나쁜 눈으로 스승을 보는 것입니다.
바른 법을 비방하고 아직 듣지 못했던 경이면 듣고 나서 헐뜯으며 다른 법사의 강설이 있음을 듣고서도 잘 들으려고 하지 않고 가벼이 여기면서 조롱하며 자기만을 찬양하고 다른 이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세간의 말과 잡다한 구절의 말과 장엄하게 수식한 말을 그리워하고 모든 이성끼리 짝 짓는 구절[合偶句]이나 애뢰(哀誄:
죽은 사람을 애도하며,
살았을 때의 공덕을 칭송하여 지은 글)의 업을 즐기는 것입니다.
성문이나 연각의 업을 강설한 말이나 가르침을 듣기 좋아하고 깊으면서 미묘한 이치는 덮어 버리며 잡다한 구절을 천명하고 장식하여 상응한 그릇이 아닌 이[不應器]를 위하는 것입니다.
만일 깊은 법을 연설하면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부처님 도는 구하지 않으면서 도리어 삿된 길에 머무르며 제도하고 해탈하는 일을 어기고 길상(吉祥)하지 않은 것을 익히며,
영원히 안락한 업을 버리면서 이런 것은 공경하고 좋아하며 삿되고 거짓된 데에 귀명하면서 해탈하지 못하고 제도되지도 못하며 길상을 닦지 않고 참된 이치를 따르지 않으며,
공손히 여쭈어 받았으면서도 외고 익히지 않으며 마음으로는 자만하면서 겸손하거나 낮추지 않고,
말하는 것마다 스스로를 높이며 중생을 해칠 것을 생각하면서 도와 지혜를 구하지 않고 뜻을 적연(寂然)함에 두지 않으며,
언제나 잡다한 생각을 품으면 바른 계율을 닦더라도 곧 악마의 업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보살의 열 가지 악마의 업이니,
이 악마의 일을 버려야 부처님의 도업(道業)을 구하게 됩니다.
■ 보살이 악마의 일을 버리는[棄捐魔事] 데에 열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착하고 친한 벗과 함께 하며 서로 따르는 것과,
모든 자만을 버리고 해롭게 하는 것을 버리며 스스로 제 몸을 상할지언정 훼손하는 일이 없는 것과,
부처님의 깊은 법을 믿으면서 일찍이 비방하는 일이 없고 마음에 바른 가르침[正敎]의 뜻을 버리거나 멀리하지 않는 것과,
온갖 넓은 지혜[普智]로 깊은 요의에 힘쓰는 것과,
통달하여 방일함이 없으면서 보살행을 닦는 것과,
법장(法藏)의 업에 머무르면서 모든 경전[典]을 구하는 것과,
얻지 못한 것을 널리 들으려 함이 마치 큰 강물이나 바다가 작은 지류들을 싫어하지 않는 것같이 얻지 못한 것을 많이 들으려고 하는 것과,
모든 여래께서 시방세계에 계신다고 생각한 이가 그로써 자기 자신을 수호하게 되는 것과,
널리 사유하여 통달한 뜻으로 믿고 좋아하면서 착한 뜻을 일으켜 뭇 덕[衆德]에 두는 것과,
보살의 무리[黨]가 되어 두 가지의 행[二行]이 없도록 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악마의 업을 버리는 열 가지 일입니다.
■ 보살이 모든 부처님의 도[佛道]를 보는 데에 열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부처님께서는 세간에 머무르되 의지하는 바가 없는 것과,
으뜸가는 정각[最正覺]을 이루어 모든 성인을 건립하는 것과,
바른 업을 인도하고 이익되게 하면서 모든 부처님을 믿고 좋아하는 것과,
보응(報應)을 널리 펴서 교화할 바에 귀착하는 것과,
위신(威神)의 덕으로 모든 부처님께 들어가는 것과,
스스로 자만하지 않음을 근본으로 하여 모든 부처님의 법계에 평등하게 나아가는 것과,
마음은 언제나 뭇 성인을 받들어 공경하는 데에 두는 것과,
부처님의 정의(定意)로써 방일함이 없고 또한 집착함도 없는 것과,
부처님께서 해탈하고 통달한 바는 곧 본래부터 청정하다는 것과,
마음이 깨닫는 것 그대로 그 마음을 광대하게 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모든 부처님의 도를 보는 열 가지 일입니다.
■ 보살이 불사(佛事)를 하는 데에 열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때에 맞게 사람들에게 권하여 불사를 지으니 평등한 일을 닦아 그로 말미암아 생기게 됩니다.
꿈속에서도 정각을 뵙게 되니,
전생에 지은 덕의 근본으로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합니다.
아직 듣지 못한 경을 기억하고 사유하니 불사(佛事)를 의심하지 않아서입니다.
간탐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성문이나 연각의 마음을 소멸하고 또한 계를 범하는 것과 진에(瞋恚)와 산란한 뜻[亂意]과 나쁜 지혜[惡智]와 모든 집착하는 마음과 망설임과 잡다한 생각[沈吟]과 장난으로[戱故]하는 마음과 자만하는 마음을 제거하면서 상호를 갖춘 여래의 형상을 장엄하니,
전생의 공덕으로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청정하게 뭇 의심과 모든 장애와 생각하는 법을 제거하고 부처님 도의 업에 대하여 망설임을 품지 않습니다.
몹시 굶주렸을 적에 경전을 듣고 강설한 법을 닦으면서 들은 것을 능히 지니며,
성스런 지혜를 체득하고 신통을 일으키며 권화(勸化)함이 한량없으면서 중생을 이익되게 하니,
이것이 바로 여섯 번째 모든 부처님의 도업이며 매우 청정한 것입니다.
설령 악마의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권방편(權方便)으로써 여러 가지 행을 닦으면서 허공 가운데서 각각 다른 음성[異音]으로 연설하며,
만일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거나 또는 악마의 일을 근심하면 그 음성으로 법을 연설하여 교화하면서 곧 도법(道法)을 알리므로 가령 듣게 된 이라면 정진의 행을 더하게 되니,
이것이 바로 일곱 번째 불사이며 뜻을 광대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거스르는 마음을 보호하고 또 성문이나 연각을 따르지 않으면서 멸하여 다하는[滅盡] 업을 보호하며 또 모든 근성이 아직 순숙(純淑)하지 못한 이의 해탈하지 못한 것을 바로잡아 주고 전생부터 본래 지었던 모든 부처님의 도와 원을 받들어 행하며 생사를 따른 이라면 그들을 위하여 모든 번뇌를 끊고 만일 대중 속에서 행할 때에는 함께 모여 지니게 하여 그들을 위하여 크게 가엾이 여김을 나타내면서 그의 행을 성취하게 하고 무위(無爲)에 계합하게 하니,
이것이 바로 여덟 번째 불사이며 아주 없다는 행[斷行]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불자여,
이 여읨[離]의 멸도(滅度)를 알고자 한다면 이미 중생을 통달하고 사람이 없음[無人]을 알면서 두려워하지 않고 지혜와 덕의 근본을 구하며 처음 발심한 이는 지혜에 싫증냄이 없으면서 일으키는 바가 있고 자기 몸과 만물의 모든 모양은 언제나 이것을 여의지 않으며 부처님의 색상(色相)과 모든 행은 이미 탐착을 여읜 것으로 보고 모든 법에 의지하지 않으면서 무위의 온갖 민혜(愍慧)를 구하며 온갖 법에 대하여는 남을 받들면서 우러르지 않고 그 부처님 국토를 청정하게 하면서 모든 모양은 마치 허공 세계[虛空刹]와 같은 줄 환히 알며 중생을 깨우쳐 교화하면서 수고롭다고 여기지 않고 또한 무아(無我)의 모양도 버리지 않습니다.
변화하는 신통의 지혜로 법계에 있으면서 이동하지 않고 또한 보살이 일으키는 업을 버리지도 않으며 모든 신통의 지혜 광명으로 그것을 환히 비추고 법륜을 굴리면서 중생의 마음을 기쁘게 하며 또한 있는 바가 없는 법[無所有法]을 어기지 않고 여래께서 세우신 변화를 나타내 보이며 보살이 나타내는 대멸도를 여의지 않고 뭇 악(惡)을 버리면서 5취(趣)에 나는 처소를 널리 보이는 것입니다.
이와 같아서 불자여,
이런 종류의 적연(寂然)한 행으로써 모든 법을 받들어 닦으니,
이것이 바로 모든 불사를 일으키는 열 가지의 업입니다.
■ 보살이 자만하는 데에 열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중우(衆祐)와 기년(耆年:長老)과 존장(尊長)과 현성(賢聖)들을 업신여기고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으며 사문(沙門)ㆍ범지(梵志)가 닦는 평등한 행의 바르고 참된 교훈에 공손하지 않고 조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생각한 업으로 법사(法師)를 따르지 않고 법을 받들어 높인 이가 묘한 법 등을 설하고 대승의 가르침을 받들며 지혜와 도의 자취[道跡]를 밟아 겸허한 전범(典範)을 지녔는데도 겸손하고 낮추어 머리 조아리거나 예배 공경하지 않으며 교만하고 방자하면서 스승의 가르침을 받들지도 않고 자세히 들어 받지도 않으며 또한 사유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대중 가운데 있을 적에 모든 법을 강설하는 이가 앉아서 미묘한 법을 나타내는데도 법사에게 ‘훌륭하다’고 찬탄하지는 않고,
‘사람들이 그 사람을 흠모하고 공경하지나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자만하여 스스로의 공을 드러내고 다른 사람의 덕은 덮어버리며 혼자만이 제일이라고 헤아리면서 마음으로는 경멸하는 것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잘났다는 생각을 품고 ‘나 혼자만 알고 있다’고 하면서 덕 있는 이를 비방하고 청정하게 수행하는 이인데도 그의 흠을 말하면서 공훈의 뜻으로 찬탄하는 일이 없으며 만일 그를 찬탄한 것을 보면 마음 아파하고 근심하는 것입니다.
법의 이치가 계율이나 가르침에 그와 같으므로 부처님 말씀이 지성스러워 존경해야 될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기뻐하지도 않고 배우는 이[學士]들을 미워하며 아울러 경전을 헐뜯고 바른 전적[正籍]을 비방하며,
게다가 다른 이치를 받아서 높은 자리[高座]에 있으려 하고 경법의 단점을 구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받들어 공경하여 주기를 원하고 모든 존장(尊長)이나 영웅(英雄)의 무리로 보아 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또 범행(梵行)을 닦는 이를 보고도 일어나 영접하지 않고 머리 조아려 예절을 지키지도 않으며 만일 지혜가 밝은이를 보면 슬퍼하고 조심하는 얼굴로 기뻐하지 않으며 좋은 말을 하지도 않고 언제나 나쁜 마음을 품고 있으며,
그의 장단점을 취하고 소소한 허물까지 살피며 자만하여 지혜가 밝은 이에게 나아가려 하지도 않고 뒤를 따르면서 겸손하거나 공손하려 하지도 않으며 문안하려고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경전의 뜻을 묻고 받아서 ‘무엇이 좋고 무엇이 좋지 않으며 어떤 이치를 닦아야 오랫동안 안락을 얻고 재난을 만나지 않게 될까?’를 모르는지라 어리석은 무리와 함께 하게 되고 나날이 어둔 데를 향하면서 어리석어지고 가려짐이 더욱더 심하여지니,
어리석기 때문에 공순(恭順)하지 못한 일을 나타내고 어리석음으로써 자기 자신을 해치면서 자만하는 생각을 품는 것입니다.
자만하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여의고 전생에 지은 덕의 근본을 다 소모하고 새로운 복을 일으키지도 못하며 나이 어린 이들을 일으켜 억지로 굴복시키려 하고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하면서 거동이 흉폭하고 다투기를 좋아하면서 지혜가 넓은 이를 헐뜯고 정사(精舍)에서 내쫓으며 스스로 멋대로 굴어 아주 험한 골짜기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또 도의 마음에 있어 세력이 첫째라 하여 교만과 호기로 방자하니,
높은 자리[尊位]를 얻는 것만으로는 백천 겁이라도 부처님 세상을 만나지 못하는데 하물며 경법을 만나서 듣는 것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보살이 자만하는 열 가지의 일이니,
보살은 이것을 버려야 곧 열 가지 지혜[慧]를 체득합니다.
■ 보살의 지혜의 업[慧業]에 다시 열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일과 업을 짓고 성스러운 뜻을 지녀 복의 과보[福果]를 알되 끝내 퇴색되지 않습니다.
마음에 도의 생각[道念]을 익히고 언제나 부처님을 생각할 줄 압니다.
잘 아는 벗[善知友]에게 배워 익히되 겸손하고 조심하며 수순하면서 그를 받들어 공경하며 높은 어른에게 묻고 정진하면서 지혜를 닦습니다.
법에 뜻을 두고 법을 좋아하면서 근본적으로 법을 구하며 견문이 넓은 이를 사모하여 만족해함이 없으면서 사유하고 수순하며 생각해야 할 것이라면 부지런히 행하고 생각하지 않아야 할 것이라면 곧 버립니다.
모든 중생에 대해 경만한 생각을 품지 않고 보살을 마치 부처님 대하듯 하며 법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고 여래를 받들어 생각할 때는 제 몸과 목숨을 사랑하듯 하면서 모든 부처님께 힘써 귀의합니다.
그 몸과 입과 뜻으로 삼가고 조심하면서 범하지 않고 혀[舌根]로 말한 바에는 처음부터 입의 허물이 없게 하며 성인의 지혜[聖明]에 귀명하면서 부처님의 도를 멀리하지 않고 지혜의 업을 힘써 닦습니다.
다투고 어지러운 일이 없으면서 12연기에 대하여 모든 사견을 버리며 어둠의 나무뿌리를 뽑아 어둠을 소멸시키고 모든 법의 지혜의 광명을 체득합니다.
열 가지 일[事]로 나아가는 업을 권유하고 수순하며 지(智)도무극을 마치 어머니처럼 생각하고 권도방편을 마치 아버지처럼 헤아리면서 부처님의 도업(道業)으로 지성(志性)의 혜해(慧解)에 들어갑니다.
보시와 계율에 대해 널리 듣고 적멸(寂滅)을 사모하고 구하며 뜻으로는 지혜와 덕을 쌓으면서 수고로이 여기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펴신 업으로 모든 악마와 죄와 진로를 제거하고 음개(陰蓋)와 온갖 장애를 소멸하며 중생을 교화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며 부지런히 힘쓰면서 법을 받들고 모든 부처님 국토를 청정하게 하면 신통과 세 가지의 통달[達]이 바로 눈앞에 있게 되니,
이것이 바로 열 가지 지혜입니다.
■ 보살이 악마에 붙들리는[魔所必固] 데에 열 가지가 있습니다.
마음에 겁이 많고 허약해지면 악마가 그의 편의[便]을 얻고,
마음에 생각이 많으면 심란해지고 바쁘게 되며,
성품이 안정되고 온화하지 못하고 구한 것이 많음을 싫어하지 않으면 악마의 혼란을 당하고,
오로지 하나의 법(法)을 지니면서 스스로 옳다고 여기면 악마에게 곤욕을 당하며,
바른 서원[正願]을 은근하게 일으키지 못하면 욕심에 미혹되고,
진로에 속박되면 뜻이 고요[寂靜]해지지 못하며,
두루 다니기를 싫어하면서 생사를 끊으려 하면 악마가 되돌아오게 되고,
정진하며 부지런히 도법(道法)을 닦지 못하면 도리어 물러나게 되며,
온갖 중생 교화하기를 즐기지 않으면 오직 자기만을 보호할 뿐이며 고통 받는 사람을 생각하지 않게 되고,
경전을 의심하고 바른 법을 비방하면서 순종하려 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악마에게 붙들리는 열 가지 일입니다.
■ 보살을 부처님께서 붙들어 주시는[佛所以立] 데에 열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처음 발심해서부터 부처님의 보호를 받으므로 태어나는 세상마다 도의 뜻[道意]을 잊지 않게 되고,
악마의 일을 깨달아 알면서 능히 항복시켜서 물러나게 하며,
가령 모든 도무극에 대해 들으면 밝고 뚜렷하게 마음에 있게 되며 듣자마자 받들어 행하고,
생사의 고통을 알고 비록 고통인 줄 안다 하더라도 수고로이 여기지 않으며,
깊고 묘한 법을 관하면서도 증과[果證]를 얻지 않고,
모든 성문이나 연각[緣一覺]을 위하여 경법을 설할 때에는 그들이 좋아하는 말을 따르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自然]인 것에 대하여 존재하는 것이 없다는 이치를 관하면 무위(無爲)에 머무르지도 않고 유위와 무위는 둘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부처님께서 보호한 것이 멀다 하여 근심을 품지 않으며,
일체지와 모든 신통의 지혜에 들어가고,
보살행에 있으면서 자재함을 나타내고 또한 끊는 바도 없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보살을 부처님께서 붙들어 주시는 열 가지의 일입니다.
■ 보살이 법을 건립하는[建立法] 데에 열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온갖 만물은 항상하지 않는다는 것을 앎으로써 법을 건립하게 되고,
모든 법은 다 고뇌(苦惱)이며,
또 모든 법에는 나[我]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고 헤아리고,
니원(泥洹)은 번뇌가 사라져서 고요하여[寂滅] 영원히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법은 연(緣)으로부터 전전하고 허위(虛僞)로 인(因)하여 물러나게 되고,
수순하지 않음[不順]을 익힘에 따라 무명(無明)의 12연기(緣起)와 화합하여 노ㆍ병ㆍ사에 이르는 것이므로 수순하지 않으려는 생각을 제거하면 무명이 곧 없어지고 무명이 없어지면 생ㆍ노ㆍ병ㆍ사도 영원히 제거되며,
세 가지 해탈문으로 모든 성문이 이루어지고 공허한 데에 의지하면 연각의 법이 생기고,
6도무극(度無極)과 4등(等:
等至)과 4은(恩)으로 대승을 일으키며,
시방의 국토를 알고 모든 법을 분별하며 중생을 분명히 알면서 모든 혜명(慧明)에 노닐되 통하지 않는 바가 없으면 부처님의 경계가 되고,
모든 생각을 제거하고 모든 느낌[受]을 끊어 버리고 있는 그대로[自然]에 들어가면 과거나 미래에 있어서도 멸도(滅度)의 이치에 들어가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법을 건립하는 것입니다.
■ 보살이 도솔천[兜術天]에 머무는 데에 다시 열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욕계에 머무를 때는 모든 천자(天子)들을 위하여 욕계의 미묘함을 설하고 제멋대로 하는 이에게는 항상한 것은 없음을 보여 주어 모두 성취하게 하고 다 함께 모였을 때는 법을 여읨에 대해 설하면서 도의 마음[道心]을 내도록 권유하니,
이것이 바로 도솔천에 있을 때의 첫 번째 가르침입니다.
색계(色界)에 있어서는 모든 천자들을 위하여 해탈과 삼매와 정수(正受)는 일어나는 바가 없음을 강설하되 선정에 대하여 만일 거리낌이 있으면 은애(恩愛)가 생겨 몸을 탐내게 되기 때문에 미혹함이 드러나고 진로를 분별하게 되므로 참된 이치[眞諦] 그대로인 줄 알게 되며,
그런 뒤에 전도(顚倒)되어 있는 모든 색(色)을 다 소멸하며 그것을 알지 못하는 이는 생각이 청정함에 계탁하여 항상 존재한다[常存]고 여겨 모든 것에 대해 탐내는 마음을 내지 말아야 하니 항상함이 없음[無常]과 따로 여의는[別離] 업으로 돌아가게 하여 도의 마음을 내도록 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두 번째 일입니다.
또 족성자(族姓子)여,
보살이 도솔천에 머물러 있을 때는 정광삼매(淨光三昧)를 스스로 정수(正受)하면서 몸에서 빛나는 광명을 놓아 삼천대천세계에 두루하게 하며 중생의 근본을 따라 제도해야 할 이라면 수백 가지의 다른 음성으로 연설하고 사람들이 이 경법(經法)의 음을 들으면 그 마음이 깨끗해져서 깨우치게 되어 모두 다 도솔천으로 올라와서 태어나며,
천상에 나게 되면 보살은 즉시 도의 마음을 내도록 권유하니,
이것이 바로 세 번째의 일입니다.
보살이 도솔천에 머물러 있을 때는 거리낌이 없는 보살의 도의 눈[道眼]으로 시방의 모든 부처님 국토의 모든 보살들이 다 도솔천에 있는 것을 보고는 큰 법회(法會)를 열어 모이게 하고 끝없는 변화를 나타내고는 내려와 태 안으로 들어가서 다시 탄생함을 보여 주고,
나라를 버리고 왕을 버리며 불수(佛樹) 아래 나아가 도량(道場)을 장엄하는 일을 나타내며 전세(前世)에 짓고 세웠던 행을 강설하고 전생의 본행(本行)으로 인하여 그로 하여금 끝없는 큰 지혜에 들어가게 하되 있는 곳을 옮기지 않고도 여러 가지 형상의 변화를 널리 나타내어 중생들을 깨우쳐 교화하니,
이것이 바로 네 번째의 일입니다.
보살이 도솔천에 머물러 있을 때에 시방의 도솔천에 있는 모든 보살들이 다 와서 그를 보고서 겸손하게 몸을 낮추고 공경하고 순종하면 그때 보살은 다함께 기뻐하게 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서원을 갖게 하고 입으로는 큰 법을 연설하여 모든 보살을 따라 세운 행에 머무르되 마땅히 없애야 할 것과 받들어야 할 행을 명백하게 밝혀 그들을 위하여 법을 설하여 그것을 듣고 뛸 듯이 기뻐하며 각자 본래의 국토인 도솔천으로 돌아가게 하니,
이것이 바로 다섯 번째의 일입니다.
보살이 도솔천에 있을 적에 악마 파순(波旬)이 호귀(豪貴)하고 탐욕을 부리며 다스리는 무리들에게 둘러싸인 채 와서 보살을 어지럽히려 하는 것을 보면 곧 가서 모든 악마를 항복하여 제지하고는 금강(金剛)의 발자취[履跡]인 장소에서 지도무극(智度無極:
지혜바라밀)으로 선권방편과 도혜(道慧)의 얼굴과 머리를 지니고 어질고 온화한 생각을 품고 금계(禁戒)로 번뇌를 고요하게 하며 이런 위신력을 건립하여 경우에 따라 법을 설하면서 악마 파순으로 하여금 기회[便]를 얻지 못하게 하므로 보살이 드러나는 감동을 보고는 모두 다 위없이 바르고 참된 도의 뜻을 내니,
이것이 바로 여섯 번째의 일입니다.
보살이 도솔천에 있을 적에 모든 천인(天人)들이 욕계를 싫어하고 법회를 좋아하는 줄 알면 욕계의 모든 궁전으로 하여금 저절로 소리를 내어 말을 하게 하되 ‘오늘 보살이 반드시 궁인(宮人)이 되어 나타날 것이니 만일 보는 이들이 스스로 내고 싶은 것이 있으면 다 함께 청하며 모이도록 하라’고 하니 이런 소리를 듣자마자 헤아릴 수 없는 백천해(百千姟)의 하늘들이 모두 와서 거기에 모입니다.
때가 되어 보살이 궁인이 되어 나타나자 천자들은 예로부터 아직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단정하고 뛰어나게 묘하면서 세간에서는 보기 드문 이인지라 그를 보고는 크게 기뻐하고 아무리 봐도 싫증내지 않았으며 모두들 기악(伎樂)을 울렸는데,
기악을 따라 법의 음성이 울려 나오되 ‘온갖 만물은 모두 무상(無常)으로 돌아가고 눈으로 보는 것은 모두 다 고통의 근본이며 모든 법에는 나[我]가 없고 몸도 없고 수명도 없으니 모두 공(空)으로 돌아가야 하고 무위(無爲)이며 고요하고 안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보살행을 받들면 장차 부처님이 되기에 이르고 모든 통혜(通慧)를 갖춥니다’라고 하니 법회에 모인 천인들은 이 법음(法音)을 듣고는 마음이 숙연해져서 탐욕을 좋아하지 않고 모두가 함께 도의 마음을 일으킵니다.
이것이 바로 일곱 번째의 일입니다.
보살이 만일 도솔천에 있을 적에는 그 형상이 없어지지 않으면서 시방의 헤아릴 수 없고 수없는 부처님 국토에 널리 나타나서 모든 여래께 나아가 머리 조아려 예배하고 설하신 법을 들으면서 모든 부처님 세존을 보면 곧 그를 위하여 아유안(阿惟顔)의 일을 차례대로 널리 연설하시므로 그 본제(本際)로 인하여 통혜지(通慧地)의 보살도에 나아가 머무르면서 온갖 도의 이치에 들어가게 되며 끝없이 넓은 지혜를 두루 갖추면서 마음을 일으키는 순간에 모든 것을 환히 알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여덟 번째의 일입니다.
보살이 만일 도솔천에 있을 적에는 그 위신력으로 부처님 법을 받들게 되는데 그 이름은 호수특(好殊特)이며 두루 시방의 모든 부처님 국토의 여래께 공양하면서 한량없이 청정하고 헤아릴 수 없이 널리 펴면서 모든 법계를 나타내어 허공계에 돌아가게 되므로 이런 공양을 본 모든 하늘과 사람들과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모두 위없이 바르고 참된 도의 뜻을 일으키니,
이것이 바로 아홉 번째의 일입니다.
보살이 도솔천에 있을 적에는 한량없는 모든 법과 도의 부드러움[道柔]에 들어가서 지혜의 광명을 놓아 시방의 헤아릴 수 없는 모든 부처님 세계의 여러 가지 색의 형상[色像]을 나타내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위의(威儀)와 예절이 각각 다르고 때에 따라 짓고 그들을 위하여 분별하여 설명하며 여러 가지 법을 분석 판단하여 중생의 마음에 따라 가르쳐 주면서 본래의 행[本行]과 뜻하는 서원[志願]을 저마다 통달하여 알게 하니,
이것이 바로 열 번째의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보살이 도솔천에 있을 때 나타나는 열 가지의 일이니,
그런 뒤에야 비로소 태어나 인간으로 나투는 것입니다.
■ 보살이 도솔천에 있다가 없어지는[現沒] 데에 열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보살이 도솔천에 있을 때에 안온청정(安隱淸淨)이라는 광명이 있는데,
이 빛나는 광명은 발바닥으로부터 나와 삼천대천세계를 비추며 모두 큰 광명이 되어서 악취(惡趣)인 3도(塗)의 재난과 지옥ㆍ아귀ㆍ축생의 재액에 있으면서 두루 돌아다니며 왔다 갔다 하므로 이 광명을 만난 이들은 모두 안온함을 얻으면서 뭇 고통과 우환이 쉬게 되며 안온함을 만나고 나서는 마음속으로 ‘모든 어진 이들 중에서 다시 어떤 분이 이 세계에 나셨구나’하고 생각하고 어두운 곳에서 그 광명 때문에 서로 보고는 기뻐하고 놀라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도솔천을 버릴 때에 나타내는 첫 번째의 일입니다.
또 도솔천에 있을 적에 권조(勸助)라고 하는 광명이 있는데 눈썹 사이에서 나옵니다.
이 광명을 놓은 때에는 삼천대천세계를 두루 비추어 모든 전생에 수행했던 보살들을 비추게 되며 이 광명을 놓아 대천 국토를 비추면서 모든 보살을 청하고 나면 그때 보살들은 덕행을 이미 갖추었으므로 도솔천을 버리게 되는데 모든 하늘ㆍ용ㆍ신들이 다 와서 그 보살들에게 공양하고는 기뻐하면서 도의 뜻을 일으키게 되니,
이것이 바로 두 번째의 일입니다.
보살이 도솔천에 있을 적에 정계(淨界)라고 하는 광명이 있는데 오른쪽 손바닥에서 나오며,
다시 이 광명을 놓아 삼천대천세계를 널리 비추어 곧 장엄하고 청정하게 되는데 연각(緣覺)으로서 모든 번뇌가 없는 이라면 즉시 그 광명으로 다른 나라에 옮겨가거나 옮겨가지 않으면 곧 수명을 버리면서 반열반[般泥洹]하게 되며,
모든 외도 이학과 몸을 드러낸 벌거숭이나 미혹되고 소견이 뒤바뀐 중생의 무리도 역시 또 다른 지방으로 옮겨가게 되며,
이 옮겨지는 이들은 여래의 거룩한 뜻[聖旨]으로 그렇게 되는데 역시 이 중생들도 이 인연으로 인하여 깨우치고 교화를 받으니,
이것이 바로 세 번째의 일입니다.
도솔천에 있을 적에 이구현요(離垢顯耀)라고 하는 광명이 있는데 보살의 몸으로부터 나오며,
이 광명을 놓아서는 아래의 모든 하늘과 위로는 아가니타(阿迦膩吒)의 24천(天)에 이르기까지 비춥니다.
도솔천궁에 있는 모든 하늘들은 각각 생각하기를,
‘오늘 보살께서 도솔천을 버리시는구나’ 하고 근심 걱정을 품고는 각기 꽃과 향과 섞인 향[雜香]ㆍ가루 향[擣香]과 비단의 일산ㆍ번기ㆍ당기를 가지고 모든 거문고와 쟁(箏)을 뜯으며 그의 덕을 노래하고 칭송하면서 기악(伎樂)을 울리며 보살에게로 가서 공양하고 머리 조아려 예배하면서 부처님이 되신 뒤에 큰 멸도[大滅度]에 이르기까지 받들어 섬기며 잠시도 쉬지 않으니,
이것이 바로 네 번째의 일입니다.
또 족성자여,
보살이 도솔천에 있을 적에 막능승당(莫能勝幢)이라는 광명이 있고,
머리에 관책(冠幘)과 몸의 영락(瓔珞)과 그 심장(心藏)에서 이 광명을 놓게 되며 그 광명이 시방의 모든 금강신(金剛神)들을 널리 비추는데,
그 때를 맞추어 백억의 모든 금강신들은 다 모여와서 부처님의 도를 이루고 큰 멸도에 이르기까지 보살의 뒤에서 시봉하니,
이것이 바로 다섯 번째의 일입니다.
또 해중생(解衆生)이라 하는 광명이 있고,
때가 되면 보살은 몸의 모든 털로부터 빛나는 광명을 놓아 삼천대천세계를 전부 비추면서 보살의 몸을 빛나게 하고 모든 천인들과 온갖 궁전을 비추면 그때에 저마다 생각하기를 ‘우리들의 개사(開士:
보살)께서 중생을 교화하면서 여래를 받들어 공경하시는구나’라고 하니,
이것이 바로 여섯 번째의 일입니다.
또 적선주(積善住)라고 하는 광명이 있어 보살의 큰 보주의 광[大寶珠藏]으로부터 끝없는 광명을 놓는데,
이 광명을 내는 구슬에서는 변화로 큰 전각[大殿]을 내어서 보살이 태어날 나라로 가게 되며,
그 광명이 시방의 군국(郡國)ㆍ현읍(縣邑)ㆍ주역(州域) 등 큰 나라에 있는 모든 집에까지 비추면 거기서 교화해야 될 이라면 다 함께 그곳으로 나와 그 국토의 세계에 태어나니,
이것이 바로 일곱 번째의 일입니다.
또 보엄궁(普嚴宮)이라는 광명이 있어 이 빛나는 광명을 놓을 때 보살은 즉시 넓고 장엄한 대보각전(大寶閣殿)과 대보전(大寶殿)이 나오게 하여 어머니의 태(胎)에서 가까운 오른쪽 겨드랑이에 머무르게 하고 광명이 비추게 되면 그 어머니는 널리 안온하여지며 온갖 덕과 공훈에 머무르면서 보살의 어머니의 태를 보호하고 보살은 이 대보궁전에 머무르며 거처하니,
이것이 바로 여덟 번째의 일입니다.
또 정주(停住)라는 광명이 있어 보살의 발바닥 아래서 나오게 되면 그 모든 천자로서 욕계나 모든 범천(梵天)에 머물러 있는 이는 언제나 공손하고 조심하면서 보살을 받들어 공경하다가 그의 수명이 다하여 목숨을 마치려 할 때는 짐짓 말하기를 ‘보살은 계속하여 본래 계시던 곳[故處]에 계셔 주십시오’라고 하며 비록 천상에 있다 하더라도 광명이 와서 비추어 여래를 받들며 광명이 모든 천자들을 두루 비추면 곧 편안히 머무르면서 다시는 수명을 마치지 않고 보살이 성불하시고 큰 멸도를 나타내기까지 공양하게 되니,
이것이 바로 아홉 번째의 일입니다.
또 약간목(若干目)이라는 광명이 있는데 그것은 보살의 모든 상호(相好) 가운데서 나오며,
이 광명을 놓을 때는 보살의 각각 다른 변화와 한량없는 공덕을 나타내게 되는데,
모든 천인들은 멀리서 보살이 도솔천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보기도 하고,
혹은 내려와 어머니의 태 안에 드는 것을 보기도 하며,
혹은 갓 탄생하는 것을 보기도 하고,
혹은 출가하는 것을 보기도 하며,
혹은 성불하시는 것을 보기도 하고,
혹은 법륜 굴리시는 것을 보기도 하며,
혹은 멸도하시는 것을 보기도 하니,
이것이 바로 열 번째의 일입니다.
도솔천에 있다가 없어지면서 내려와 태어날 때는 이 보살의 열 가지[十品] 광명으로서 구족하고 헤아릴 수 없는 억백천의 빛나는 광명을 나타내면서 보살의 몸을 출현시키는 것이며,
헤아릴 수 없는 평상[床座]과 누각(樓閣)과 궁전에서 나오는 빛나는 광명으로 보살이 일으키고 행하는 여러 가지 일을 나타내는 것이니,
높고 뛰어남이 그와 같아서 도법(道法)을 널리 구비합니다.”
○ [pt op 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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