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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살가야견, 사번뇌 문서도 참고하십시오.
유신견(有身見, 산스크리트어: satkāya-dṛṣṭi, 팔리어: sakkāya-diṭṭhi, 영어: view of individuality, self view, identity view) 또는 살가야견(薩迦耶見)은 다음의 분류, 그룹 또는 체계의 한 요소이다.[1]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의 교학에서 탐(貪) · 진(瞋) · 치(癡) · 만(慢) · 견(見) · 의(疑)의 6가지 근본번뇌(根本煩惱) 즉 6수면(六隨眠) 가운데 견에 속한다.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와 법상종의 교학에서 탐(貪) · 진(瞋) · 치(癡) · 만(慢) · 의(疑) · 악견(惡見)의 6가지 근본번뇌(根本煩惱) 가운데 악견에 속한다. 악견은 부정견(不正見)이라고도 하며 간단히 견(見)이라고도 한다.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와 법상종의 5위 100법의 법체계에서 심소법(心所法: 51가지)의 번뇌심소(煩惱心所: 6가지) 가운데 하나인 부정견 또는 악견의 세부 분류인 유신견 · 변집견 · 사견 · 견취 · 계금취의 5견(五見) 즉 5가지 염오견(染汚見) 가운데 하나이다.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의 5위 75법의 법체계에는 부정견 또는 악견이라는 항목이 없는데, 이는 설일체유부에서는 부정견 또는 악견이 심소법(心所法: 46가지) 중 대지법(大地法: 10가지) 가운데 하나인 혜(慧)의 그릇된 상태인 염혜(染慧) 즉 오염된 지혜에 속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의 탐 · 진 · 치 · 만 · 유신견 · 변집견 · 사견 · 견취 · 계금취 · 의의 10수면(十隨眠) 가운데 하나이다.[2]
유신견(有身見)은 소의신(所依身), 즉 5온(五蘊)의 화합체 또는 5취온(五取蘊)을 실유(實有)라고 집착하는 견해이다. 즉, 5온의 화합체 또는 5취온을 실재하는 '나[我]' 또는 '나의 것[我所]'이라고 집착하는 견해이다.[3][4][5]
유신견(有身見)은 산스크리트어 원어 사트카야-드르슈티(satkāya-dṛṣṭi)를 의역한 것으로 줄여서 신견(身見)이라고도 한다. 음역하여 살가야견(薩迦耶見: 살가야는 satkāya의 음역이고 견은 dṛṣṭi의 의역임), 살가야달리슬치(薩迦耶達利瑟致: 살가야는 satkāya의 음역이고 달리슬치는 dṛṣṭi의 음역임), 삽가야견(颯迦耶見) 또는 삽가사견(薩迦邪見)이라고도 한다.
또한 의역하여 허위신견(虛偽身見), 위신견(偽身見), 괴신견(壞身見) 또는 이전신견(移轉身見)이라고도 한다.[6][7] 신사결(身邪結) 또는 신견결(身見結)이라고도 한다.[8]
목차
1 용어
2 본질적 성질
3 본질적 작용
4 구생기·분별기 분별
5 같이 보기
6 참고 문헌
7 각주
용어:
유신견(有身見) 또는 살가야견(薩迦耶見)의 산스크리트어 원어 사트카야-드르슈티(satkāya-dṛṣṭi)에서 카야(kāya, 迦耶, 가야)에 대해서는 모든 불교 부파 또는 종파가 이것이 구성요소들의 화합(和合) · 적취(積聚) · 적집(積集: 쌓인 것)의 뜻이라는데 동의하고 있으며, 5온의 화합체인 신(身, 즉 '나' 또는 자아)을 뜻한다는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6][7]
하지만, 사트(sat, 薩, 살)에 대해서는 부파 또는 종파마다 의견이 다른데 크게 다음의 세 가지 해석이 있다.[6][7] 유(有) 즉 '있음' 또는 '존재'의 의미로 해석하는 경우로,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의 견해이다. 이에 따라 사트카야-드르슈티(satkāya-dṛṣṭi)는 '신(身, 즉 '나' 또는 자아)이 있다는 견해', '적집체가 존재한다는 견해' 또는 '5온의 가화합체가 실재한다는 견해'의 뜻으로 해석되어 유신견(有身見) 또는 줄여서 신견(身見)이라 명명된다.[9][10]
허위(虛偽) 또는 패괴(敗壞) 즉 '거짓', '가설적인 것' 또는 '깨어지고 부서진다'의 의미로 해석하는 경우로, 부파불교의 경량부의 견해이다. 또한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의 일부에서도 이러한 견해를 가지는데, 예들 들어 안혜의 《대승광오온론》에서는 패괴의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11][12]
이에 따라 사트카야-드르슈티(satkāya-dṛṣṭi)는 '허위의 신(身, 즉 '나' 또는 자아)에 대한 견해', '깨어지고 부서지는 신(身, 즉 '나' 또는 자아)에 대한 견해', '허위의 적집에 대한 견해' 또는 '무상의 적집에 대한 견해'의 뜻으로 해석되어 허위신견(虛偽身見) · 괴신견(壞身見) 또는 위신견(偽身見)이라 명명된다.[9][10]
이전(移轉) 즉 '상속하면서 전변한다'의 의미로 해석하는 경우로,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와 법상종의 견해이다. 이에 따라 사트카야-드르슈티(satkāya-dṛṣṭi)는 '의타기성(依他起性)에 의한 인연화합의 산물로서 상속하고 전변하는 신(身, 즉 '나' 또는 자아)에 대한 견해' 또는 '상속 · 전변하는 5온의 가화합체에 대한 견해'의 뜻으로 해석되어 이전신견(移轉身見)이라 명명된다.
본질적 성질:
《대승오온론》과 《대승광오온론》에 따르면, 살가야견(薩迦耶見, 유신견)의 본질적 성질[性] 즉 본질은 5취온을 보고[觀] '나[我]'라고 생각하거나 '내 것[我所]'이라고 생각하는 염혜(染慧) 즉 염오혜(染污慧) 즉 오염된 지혜이다.[13][14][11][12]
《대승광오온론》에 따르면, 살가야견(薩迦耶見)이라는 낱말에서 살(薩, 산스크리트어: sat)은 패괴(敗壞) 즉 깨어지고 부서진다는 뜻이며, 가야(迦耶, 산스크리트어: kāya)는 화합적취(和合積聚) 즉 화합하여 쌓인다는 뜻이다. 따라서, 살가야(薩迦耶)는 패괴(敗壞)의 적집(積集: 쌓인 것) 즉 무상(無常)의 적집 즉 5취온을 뜻한다. 그리고 견(見)은 염오견을 뜻한다.
따라서 살가야견(薩迦耶見)이란 이러한 패괴의 적집 즉 무상의 적집 즉 5취온에 대해서 하나[一]라는 견해를 가지거나, 영원하다[常]는 견해를 가지거나, 다른 온[異蘊: '나'와는 다른 무더기]이라는 견해를 가지거나, 유아온(有我蘊: '내'가 존재하는 무더기)이라는 견해를 가져서 패괴의 적집 즉 무상의 적집 즉 5취온을 '내 것[我所]' 등으로 여기는 것을 말한다.[11][12]
또한, 《대승광오온론》의 해설에 따르면, 살(薩, 산스크리트어: sat, 패괴, 깨어지고 부서짐)이라는 낱말은 영원하다는 생각[常想]을 깨뜨리고, 가야(迦耶, 산스크리트어: kāya, 화합적취, 적집)라는 낱말은 하나라는 생각[一想]을 깨뜨린다. 즉, 5취온과 그 구성요소들이 영원하다는 생각을 깨뜨리고, 5취온이 구성요소들의 집합이 아니라 구성요소들을 통괄하는 어떤 '하나의 별도의 실체'라는 생각을 깨뜨린다.
그리고 무상의 적집[無常積集] 가운데는 '나[我]'와 '내 것[我所]'이 존재하지 않는다.[11][12]
염혜(染慧) 또는 염오혜(染污慧)는 '번뇌와 함께 하는[煩惱俱]' 지혜[慧]를 뜻한다.[11][12] 즉 번뇌에 물든 상태의 지혜를 가리킨다. 본질적 작용:
《대승광오온론》에 따르면, 살가야견(薩迦耶見, 유신견)의 본질적 작용[業]은 일체(一切)의 견품(見品) 즉 모든 다른 형태 또는 유형의 염오견의 소의(所依) 즉 의지처 또는 발동근거가 되는 것이다.[11][12] 달리 말하면,
5견 중 나머지 4견 즉 변집견(邊執見) · 사견(邪見) · 견취(見取) · 계금취(戒禁取)는 모두 그 밑바탕을 보면 살가야견을 근거로 하여 성립된 오염된 견해들, 즉 염혜(染慧) 또는 염오혜(染污慧)이다.
구생기·분별기 분별:
불교에서는 번뇌를 분류하는 여러 분류법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실천적인 입장에서 번뇌를 분류하여 선천적인 번뇌에 해당하는 구생기 번뇌(俱生起煩惱)와 후천적인 번뇌에 해당하는 분별기 번뇌(分別起煩惱)로 구분하는 것이다.
이 분류는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와 법상종에서의 분류이다. 설일체유부의 번뇌론에서의 용어로는 분별기는 견소단(見所斷)에, 구생기는 수소단(修所斷)에 해당한다.
분별기 번뇌는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와 수행론에서는 견도에 도달할 때,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와 법상종의 수행론에서는, 설일체유부의 수행론에서의 견도에 해당하는, 통달위에 도달할 때 모두 끊어진다.
반면, 구생기 번뇌는 견도 이후의 수도의 단계 또는 통달위 이후의 수습위에서 그 일부가 끊어지거나 점차로 약화되다가 최종적으로 성불할 때 완전히 끊어진다.[15][16][17][18]
예를 들어, 유식유가행파의 교학에 따르면, 제7말나식은 항상 아치(我癡) · 아견(我見) · 아만(我慢) · 아애(我愛)의 4번뇌와 상응하는데, 이 4번뇌에는 분별기와 구생기의 2종류가 있으며, 분별기의 4번뇌는 통달위에 도달할 때 모두 끊어지면서 평등성지(平等性智)의 일부가 증득된다. 즉 분별기의 4번뇌에 해당하는 제7말나식의 일부가 평등성지로 질적 변형된다.
구생기의 4번뇌는 수습위에서 점차로 약화되다가 성불할 때 즉 구경위에서 완전히 끊어지며 이 때 평등성지의 전체가 증득된다. 즉 제7말나식이 완전한 평등성지로 질적 변형을 하게 된다.[19][20]
그런데 어떤 번뇌가 분별기만으로 이루어져 있고 어떤 번뇌가 분별기와 구생기의 2종류로 이루어져 있는 지에 대해서는 설일체유부와 유식유가행파의 견해가 서로 다르다.
예를 들어, 설일체유부에서는 유신견 · 변집견 · 사견 · 견취 · 계금취의 5견은 모두 분별기 즉 견소단으로, 따라서 견도에서 모두 끊어진다고 본다.[21]
반면, 유식유가행파의 논서인 《대승오온론》·《성유식론》 등에 따르면, 유신견 · 변집견 · 사견 · 견취 · 계금취의 5견 가운데 유신견 · 변집견의 2견에는 구생기와 분별기의 2종류가 있다. 이에 비해 사견 · 견취 · 계금취의 3견에는 분별기의 1종류만이 있다.[18][22][23]
즉, 유식유가행파에 따르면 유신견에는 분별기 유신견(分別起有身見)과 구생기 유신견(俱生起有身見)의 2종류가 있다.
분별기 유신견은 사사(邪師: 그릇된 스승) · 사교(邪敎: 그릇된 가르침) 또는 사사유(邪思惟: 그릇된 사유)에 근거하여 후천적으로 습득된 번뇌이며 견도 또는 통달위에 도달할 때 완전히 끊어진다.
구생기 유신견은 견도 이후의 수도 또는 통달위 이후의 수습위에서 점차로 약화되다가 성불할 때 즉 구경위에서 완전히 끊어진다.[1][19]
설일체유부와 유식유가행파의 유신견 · 변집견에 대한 견해 차이는 비록 경지가 높아질수록 아치(我癡) · 아견(我見) · 아만(我慢) · 아애(我愛)의 4번뇌의 힘이 약화되기는 하지만 완전히 끊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성불하기 직전까지 제7말나식이 이들 4번뇌와 항상 상응한다는 유식유가행파의 교의에 기인한다.
달리 말하면, 유신견 · 변집견에 대한 견해 차이는 6식 외에 말나식과 아뢰야식의 2가지 식이 더 존재한다는 인식론 또는 심식론에 따른 차이이다.
● From Soothill-Hodous Dictionary of Chinese Buddhist Terms (DDBC version)
薩迦耶見 satkāya-darśana (सत्काय-दर्शन), the view of the reality of personality.
5온으로써 가(假)로 화합한 것을 실(實)의 자아(自我)가 있다고 집착하며, 내 몸에 부속한 모든 물건은 일정한 소유주가 없는 것인데, 아(我)의 소유물이라고 집착하는 견해다.
살(sat)은 유(有), 허위(虛僞), 이전(移轉)의 뜻이라 하고
가야[kāya]는 범어로 신(身) 이라고 한다.
이는 한마디로 자신의 정체에 대해 갖는 망상분별이다. 현실에서 대부분 스스로 자신은 어떤 것이라고 여기면서 임한다.
망상분별의 종류가 수없이 많다. 그런데 현실에서 한 주체가 가장 집착을 갖는 부분이 자신이다. 그리고 온갖 집착의 근원이 또 자신이다.
예를 들어 지금 섬이 하나 지진이 나서 수천명이 부상당했다고 해도 자신과 관련이 되지 않으면 대부분 대단히 평안하고 태연하게 임한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무거운 물건이 떨어져 자신의 발톱이 깨졌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또는 자신이 지갑을 분실해 10만원을 잃어버렸다면 또 상황이 달라진다.
그래서 현실에서 망집을 제거하려면 바로 현실에서 무언가를 자신이라고 여기며 대하는 그 망집을 기본적으로 제거해야 한다. 이를 제거하지 못하면 바로 이에 바탕해서 업을 행하고 또 그로 인해 생사고통을 겪어 나간다.
그래서 수행과정에서 살가야견 즉 신견을 제거하는 것이 수행의 목표점이다.
기본적으로 왜 이런 살가야견이 문제인가부터 잘 판단해야 한다. 즉, 현실에서 자신이 무언가를 대하여 스스로 그런 내용이라고 자신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그것이 왜 엉터리 망상분별인가.
또 왜 그에 바탕해 행위를 해나가면 생사고통을 겪게 되는가. 반대로 그런 망집을 제거하여 신견을 갖지 않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즉 평소 무언가를 자신이라고 여기고 살아왔다. 그런데 그런 내용이 망상분별임을 깨닫고 그것을 제거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 상태에서 원래 자신이라고 여겼던 그 내용들은 어떻게 되는가.
또 그런 상태에서 자신은 어떻게 현실에서 임해야 하는가. 또 그런 상태라면 수행은 어떤 무엇이 어떻게 행해나갈 수 있는가. 이런 문제를 잘 생각해야 한다.
즉 현실에서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려면 계와 정과 혜를 닦는 수행을 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수행하는 주체는 앞에서 평소 망집을 바탕으로 자신이라고 여긴 그 내용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이런 것을 이와 관련해 잘 생각해야 한다.
사진에 길을 걸어가는 스님의 모습이 찍혀있다. 대부분 이런 현실상황을 대할 때 그처럼 일정부분을 스님이라고 잘못 여기게 된다. 그리고 또 이와 비슷하게 또 일정부분을 자신이라고 잘못 여긴다. 이것이 망상분별이다.
그래서 이것을 제거해야 한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그 망상분별을 제거한다고 해서 눈을 떠서 볼 때 위와 같은 모습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또 자신이 스님이나 자신이라고 여기는 그 관념분별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문제는 일정 부분을 스님이라거나 또는 자신이라고 여기는 그 부분이 문제다. 그래서 살가야견(또는 신견)을 제거해서 임해야 한다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을 제거하고 임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 사정은 우선 그 부분은 자신이 갖는 그런 성격을 갖는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그처럼 망집을 일으킨 바탕에서 업을 행하면 극심한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에 처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상태로 무량겁을 걸쳐 생사고통에 묶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생사고통을 겪게 하는 근본원인이 되는 살가야견을 제거해야 한다.
그런데 현실에서 그렇게 살가야견을 제거하면 이후 수행은 어떻게 행할 수 있는가도 사정이 위와 비슷하다.
이미 생사현실에 처한 상황에서는 그런 망집이 이미 전제되어 출발된 상태다. 이것을 구생기((俱生起) 신견이라고 칭한다.
구생기 신견이란 말은 태어날 때 이미 그렇게 갖추어진 망상분별 번뇌라는 의미다.
예를 들어 막 태어난 아이가 설령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고 사리분별을 못한다해도 이미 일정부분을 자신이라고 잘못 파악한 가운데 생을 시작한다.
이에 반해서 분별기(分別起) 신견이란 이후 성장하면서 사리분별을 행하는 가운데 자신에 대해 잘못 파악하게 되는 망상분별을 의미한다.
이 사정을 이해하려면 생을 출발하는 단계에서 일으키는 망상분별의 사정을 먼저 잘 살펴야 한다. [3능변]
그런데 쉽게 이 사정을 살피려면 다음을 생각하면 쉽다.
오늘, 자신이 어떤 모임에 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 모임에 나가는 과정에서 자신이 손과 발의 부분에 대해 이것이 내 손과 발이라고 분별하거나 의식하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모임에 도착할 때 자신의 손과 발을 떼놓고 도착하게 되었다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예를 들어 오늘 너무 정신이 없어서 깜박하고 평소 자신의 몸이나 자신의 머리라고 여기던 부분을 자신의 몸이나 머리라고 분별하지 않고 그냥 달려왔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몸이나 머리가 떨어진 채 모임에 나갔다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는 자신이 어떤 부분을 평소 자신이라고 여기거나 여기지 않거나, 이미 일정한 살가야견이 장착된 상태임을 의미한다. 이 부분은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장착되어진 잘못된 신견(살가야견)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상태에서 화장실에 들어가서 거울을 보면서 복장 상태를 살피면서 오늘 자신의 모습이 조금 볼품없다고 판단한다면 이 부분은 이와는 성격이 조금 다른 형태로서 자신이 명료하게 분별을 행하는 과정에서 갖는 잘못된 신견에 해당한다. [분별기 신견]
그런데 이런 분별기 신견은 생을 출발하는 단계에서 제 7 말나식에서 일으킨 잘못된 신견이 그 밑바탕이 되어 있기에 그렇게 된다. 즉 평소 명료하게 스스로 자신에 대해 잘못 갖는 신견은 위와 같은 기본 바탕에서 추가로 행하는 잘못된 신견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일반적입장에서는 평소 일정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는 판단은 대단히 옳고 적절한 것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왜 그런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는 것이 잘못된 망상분별이라고 하는가를 잘 이해해야 한다. 일반적 입장에서 이 부분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현실에서 실험을 해보자. 자신이 어디론가 움직여보려고 해보자. 그러면 평소 자신이 스스로 자신이라고 여긴 그 부분만 변화해 움직이게 된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책상이나 사물은 그대로다.
또 자신의 손을 들어 벽을 만져보다가 자신의 손과 발을 만져보자 . 이 경우도 벽과는 다른 차이를 느낀다.
이것만 보아도 평소 스스로 자신이라고 여긴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는 것이 적절하게 여겨진다. 그런데 사실은 그런 분별이 잘못된 망상분별이다. 그 사정을 지금까지 대단히 많이 반복해 살폈다. 그리고 사실은 위와 같은 사정이 그런 망상분별을 제거하기 힘들게 만드는 사정이기도 하다. 아무리 생사현실에서 그런 내용이 망집분별이라고 반복해 설명해도 위와 같은 현실사정들 때문에 그 망집을 제거하기 힘들다.
그리고 거리에서 길을 걷더나 차를 몰고 다닐 때도 마찬가지다. 그런 상황에서 평소 자신이 스스로 자신으로 여기는 부분을 자신으로 여기게끔 된다. 그리고 자신이 평소 영희나 철수로 여기고 대하던 부분을 영희나 철수로 여기고 대하게끔 된다. 그리고 오히려 이렇게 여기고 현실에 임하지 않으면 대단히 큰 사고를 바로 당하게 된다. 따라서 사정이 이러하므로 이런 분별을 잘못된 엉터리 망상분별이라고 하는가를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게 된다. 그래서 또 그런 사정으로 무량겁 생사를 반복하는 가운데 그 생사현실에서 벗어나기 힘든 것도 현실이다.
그런데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려면 결국 근본적으로 위와 같은 망상분별을 제거해야만 한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현실에서 행하는 위와 같은 분별이 무엇이 잘못인가를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또 그런 바탕에서 수행해서 종국적으로는 생의 출발단계에서 일으키는 망집까지도 잘 제거해야 한다. 그래서 이 부분은 수행에서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다.
왜 앞과 같은 분별이 잘못된 망상분별인가는 기존에 대단히 많이 반복했다. 따라서 가급적 관련된 링크만 찾아 연결하기로 한다. 그리고 아래부분에서는 적당한 부분에서 이를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만 좀 더 살피고 넘어가기로 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사정이 그러해서 평소 갖는 분별이 잘못된 분별이라고 할 때 이를 제거하면 이후 어떻게 현실에 임하라는 것인가의 문제들을 주로 살피고자 한다. 그리고 평소 그런 신견을 제거한 상태와 제거하지 않은 상태는 어떤 차이가 있게 되는가를 먼저 살피고자 한다.
생사현실에서 일반적으로 생활할 때는 평소 스스로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을 대하며 그것을 자신이라고 여기고 임한다고 해서 당장 위험에 처하지 않는다. 오히려 위와 같은 신견을 갖지 않고 임하면 그로 인해 대단히 큰 사고를 당할 가능성이 많다. 이미 그 사정을 앞에서 보았다. 거리를 다니거나 차를 몰고 다닐 때 자신이나 영희 철수를 그렇게 분별하지 않으면 당장 사고를 당하기 쉽다.
그래서 이런 현실에서 그런 망상분별을 제거하고 임하라는 요구가 도대체 무슨 말인가하고 의아하게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이는 다음을 의미한다.
생사현실에서 극심한 생사고통을 겪게 되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자동차사고를 당하거나, 수술실에서 수술을 받거나, 등등만 생각해도 그 사정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불교에서 말하는 생사고통은 단순히 이런 내용뿐만 아니라, 이후 무량겁에 걸쳐 3악도에서 겪게 되는 생사고통을 다 포함한다. 그런데 위와 같은 잘못된 망집을 제거하지 않으면 바로 그런 바탕에서 업을 행한 가운데 이런 생사고통을 겪게 되므로 이것을 제거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 평소 일정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고 임한다고 해서 그 상황에서 그로 인해 당장 위험에 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것이 이후 생사고통을 무량하게 받아나가게 하는 근본원인이므로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평소 별 문제가 없는 상황에서 이 문제를 잘 시정하지 않으면 이후 직접 그런 생사고통을 겪는 그 상황에서는 이 문제 해결은 더 힘들게 된다. 그래서 아직 그런 생사고통을 겪기 이전 상황에서 정확히 현실 사정을 잘 파악해서 이것을 근본적으로 제거해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뜻이다.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Greystone011-6may08_004
An unclassified megalithic tomb situated on the north slopes of Faulagh mountain, Kilcommon, Erris, County Mayo Author Comhar Permission & Licensing : Wikipedia ● [pt op tr] fr
♥Château de Lalinde ,Fr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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