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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4-04-12_소품반야바라밀경_001 본문
『소품반야바라밀경』
K0007
T0227
소품반야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 해제[있는경우]
● TTS 음성듣기 안내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 [pt op tr] 소품반야바라밀경_K0007_T0227 핵심요약
♣0007-001♧
『소품반야바라밀경』
소품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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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품반야바라밀경
해제보기
■ 소품반야바라밀경(小品般若波羅蜜經) 제1권
후진(後秦) 구자국(龜玆國)삼장 구마라집(鳩摩羅什) 한역
■ 1. 초품(初品)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왕사성(王舍城)의 기사굴산(耆闍崛山)에 계실 때
큰 비구 1,250인과 함께 계셨다.
이들은 모두 아라한(阿羅漢)이었으며,
마치 조상왕(調象王)처럼 온갖 번뇌를 여의었다.
뛰어난 수행으로 무거운 짐을 벗고
자신에게 이익된 것을 얻어 모든 구속을 떨쳤으며,
바른 지혜로 해탈하여 마음에 걸림이 없었는데,
오직 아난(阿難)만이 그렇지 못하였다.
■ 그때 부처님께서 수보리(須菩提)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설법에 능하므로
여러 보살들에게 반드시 반야바라밀을 성취해야 함을 말하도록 하라.”
사리불(舍利佛)은 곧 생각하였다.
‘수보리가 설법하는 것은 자신의 힘으로 하는 것일까,
아니면 부처님의 위신력을 빌려서 하는 것일까?’
■ 사리불의 생각을 알고 수보리가 말했다.
“부처님의 제자들이 설법하는 것은 모두 부처님의 위신력에 의한 것입니다.
왜냐 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이들은 법상(法相:제법의 실상)을 증득(證得)하고,
부처님의 말씀을 증득하여 법상과 어긋나지 않으니,
이것은 법상의 위신력 때문입니다.”
그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저로 하여금
‘보살들에게 반드시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성취해야 한다고 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만,
세존이시여,
보살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저는 무엇을 가리켜 보살이라고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보살을 본 적도 없고 보살을 만져 본 적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반야바라밀을 본 적도 없고 만져 본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살들에게 반야바라밀을 가르치겠습니까?
만약에 보살들이 저의 설법을 듣고도 놀라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낙담하지 않고 물러나지 않고 배운 대로 행한다면,
이야말로 보살들에게 반야바라밀을 가르쳤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존이시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닦을 때에는 결코 이러한 것을 보살의 마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 하면 마음에는 마음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고 원래 청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마음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 것에는 마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수보리가 사리불에게 말했다.
“마음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 것에서 마음을 붙잡을 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사리불이 말했다.
“붙잡을 수 없습니다.”
■ 수보리가 사리불에게 말했다.
“만약 마음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 것에서 마음을 붙잡을 수 없다면
마음이 있다,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리불이 말했다.
“무엇을 마음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 것이라고 합니까?”
수보리가 말했다.
“무너짐도 없고 분별도 없는 것입니다.
보살은 이와 같이 들어도 놀라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낙담하지 않고 물러서지 않으니,
이러한 보살은 반야바라밀의 실천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만약 선남자와 선여인이 성문(聲聞)의 지위를 얻고자 한다면
반드시 반야바라밀을 지니고 독송하여 이와 같이 말하고 닦을 줄 알아야 합니다.
벽지불(辟支佛)의 지위를 얻고자 할 때도 반드시 반야바라밀을 지니고 독송하여 이와 같이 말하고 닦을 줄 알아야 합니다.
보살의 지위를 얻고자 할 때도 역시 반드시 반야바라밀을 지니고 독송하여 이와 같이 말하고 닦을 줄 알아야 합니다.
왜냐 하면 반야바라밀 가운데에는 보살이 배워야 할 모든 것이 상세히 말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보살을 볼 수도 잡을 수도 없는데,
어떻게 보살들에게 반야바라밀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세존이시여,
저는 보살이라는 존재가 오는 것도 가는 것도 보지 못했는데,
보살이라는 글자만을 놓고 이것을 보살이라고 한다면,
저는 곧 의심하고 후회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또한 보살이라는 글자에는 실체도 없고 정해진 자리도 없습니다.
왜냐 하면 이 글자에는 있는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있는 바가 없는 까닭에 실체도 없고 자리도 없습니다.
만약 보살이 이와 같이 듣고도 놀라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낙담하지 않고 물러서지 않는다면,
이러한 보살은 머무름이 없이 불퇴전(不退轉)의 자리에 영원히 머무르게 된다는 점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닦을 때는 색(色)에 안주해서도 안 되고,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에 안주해서도 안 됩니다.
왜냐 하면 색에 안주하면 색인 것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고,
수ㆍ상ㆍ행ㆍ식에 안주하면 고정 관념[識行]에 의해 세상을 바라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세상을 파악하게 되면
반야바라밀을 접할 수도 없고,
반야바라밀을 배울 수도 없고,
반야바라밀을 완성할 수도 없고,
살바야(薩婆若:一切智)를 성취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 하면 색에는 수ㆍ상도 없으며,
수ㆍ상ㆍ행ㆍ식에도 수ㆍ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색에 수가 없다면 이것은 색이 아니고,
수ㆍ상ㆍ행ㆍ식에 수가 없다면 이것은 정신 작용이 아니며,
반야바라밀 역시 수가 없습니다.
보살은 반드시 반야바라밀을 이와 같이 배우고 실천해야 합니다.
이것을 일컬어 모든 대상을 느끼지 않는 보살의 삼매가 드넓고 아득하여 매여 있지 않다고 합니다.
성문이나 벽지불은 결코 이것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이 삼매는 겉모양으로 파악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것을 겉모양으로 파악할 수 있다면 일찍이 선니(先尼)라는 범지(梵志:
바라문) 수행자가 살바야지(薩婆若智)에 이르고자 하는 염원을 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선니 범지는 유량지(有量智)1)를 가지고 이 법에 들어와서 마침내 색에도 얽매이지 않고,
수ㆍ상ㆍ행ㆍ식에도 얽매이지 않는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그 바라문은 듣고 보는 것으로 이것을 얻지 않았습니다.
이 지혜는 안에서 대상을 찾아내어 얻은 것이 아닙니다.
이 지혜는 밖에서 대상을 찾아내어 얻은 것이 아닙니다.
이 지혜는 안팎에서 대상을 찾아내어 얻은 것이 아닙니다.
이 지혜는 역시 안팎을 여읜 곳에서 대상을 찾아내어 얻은 것도 아닙니다.
이 지혜는 안에서 수ㆍ상ㆍ행ㆍ식을 통하여 얻은 것이 아닙니다.
이 지혜는 밖에서 수ㆍ상ㆍ행ㆍ식을 통하여 얻은 것이 아닙니다.
이 지혜는 안팎에서 수ㆍ상ㆍ행ㆍ식을 통하여 얻은 것이 아닙니다.
이 지혜는 또한 안팎을 여읜 곳에서 수ㆍ상ㆍ행ㆍ식을 통하여 얻은 것이 아닙니다.
이 지혜는 선니 바라문이 믿어 터득한 살바야지로 모든 존재의 참 모양을 깨달아 해탈을 얻은 것입니다.
이미 해탈을 얻었기에 어떤 대상을 버리지도 취하지도 않습니다.
열반조차도 취하거나 버리지 않습니다.
■ 세존이시여,
색에도 얽매이지 않고,
수ㆍ상ㆍ행ㆍ식에도 얽매이지 않는 이것을
보살의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색에 얽매이지 않고,
수ㆍ상ㆍ행ㆍ식에 얽매이지 않을 뿐,
부처님의 지혜에 깃든 10력(力)ㆍ4무소외(無所畏)ㆍ18불공법(不共法)을 갖추지는 못해서
끝내 중도(中道)를 따라 완전한 열반에 이르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세존이시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는 반드시 이와 같이 생각해야 합니다.
무엇이 반야바라밀인가,
누구의 반야바라밀인가,
색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 반야바라밀인가?
만약 보살이 이와 같이 생각하고 이와 같이 관찰할 때
놀라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떨지 않고 낙담하지 않고 물러서지 않는다면,
이 보살은 반야바라밀의 실천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점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 그때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만일 색이 색으로서의 성품을 여의고,
수ㆍ상ㆍ행ㆍ식이 정신 작용으로서의 성품을 여의고,
반야바라밀이 반야바라밀로서의 성품을 여의었다면,
보살에게 굳이 반야바라밀의 실천을
소홀히 말라고 설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수보리가 말했다.
“사리불이여,
이와 같이 색은 색으로서의 성품을 여의고,
수ㆍ상ㆍ행ㆍ식은 정신 작용으로서의 성품을 여의고,
반야바라밀은 반야바라밀로서의 성품을 여읜 것과 같이
이 법은 모든 성품을 여의고 성품의 흔적까지도 여의었기 때문입니다.”
사리불이 말했다.
“만약 보살이 이 가운데에서 배운다면 살바야를 성취할 수 있겠습니까?”
■ 수보리가 말했다.
“사리불이여,
보살이 이와 같이 배운다면 살바야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왜냐 하면 어떤 것도 새로 생겨나거나 성취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보살이 이와 같이 실천한다면 살바야에 바로 다가서게 될 것입니다.”
그때 수보리가 사리불에게 말했다.
“만약 보살이 색으로 세상을 파악한다면 이는 모양에 얽매이는 것입니다.
색을 새로 지어내도 모양에 얽매이는 것입니다.
색을 멸하는 것도 모양에 얽매이는 것입니다.
색을 여의어도 모양에 얽매이는 것입니다.
색을 공(空)이라고 해도 모양에 얽매이는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행한다고 해도 역시 모양에 얽매이는 것입니다.
수ㆍ상ㆍ행ㆍ식의 정신 작용으로 세상을 파악해도 모양에 얽매이는 것입니다.
정신 작용을 새로 일으키는 것도 모양에 얽매이는 것입니다.
정신 작용을 멸하는 것도 모양에 얽매이는 것입니다.
정신 작용을 여의는 것도 모양에 얽매이는 것입니다.
정신 작용을 공이라고 해도 모양에 얽매이는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행한다고 해도 역시 모양에 얽매이는 것입니다.
만일 이와 같이 행하는 것을 반야바라밀을 실천하는 것으로 생각해도
역시 모양에 얽매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보살은 방편을 잘 알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이제 보살은 어떻게 행해야 반야바라밀을 행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수보리가 말했다.
“만약 보살이 색으로 세상을 파악하지 않고
색을 새로 일으키지 않고,
색을 멸하지 않고 색을 여의지 않고,
색을 공(空)이라고 하지 않고,
수ㆍ상ㆍ행ㆍ식으로 세상을 파악하지 않고,
정신 작용을 새로 일으키지 않고 정신 작용을 여의지 않고
정신 작용을 공하다고 하지 않으면,
반야바라밀을 행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야바라밀을 행한다고도 생각하지 않고
행하지 않는다고도 생각하지 않으며,
행하지도 행하지 않는다고도 생각하지 않고,
또한 행함도 아니고 행하지 않음도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반야바라밀을 행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 하면 모든 대상에는 느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일컬어
모든 대상을 느끼지 않는 보살의 삼매가
드넓고 아득하여 매여 있지 않다고 합니다.
모든 성문이나 벽지불은 결코 이것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보살이 이러한 삼매를 행하면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습니다.”
수보리가 부처님의 위신력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보살이 이러한 삼매를 행하되,
이 삼매에 내가 마땅히 들어간다든가
내가 지금 들어간다든가 이미 들어갔다고 분별하지도 않고 생각하지도 않는다면,
이 보살은 이미 여러 부처님으로부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리라는 수기(授記)를 받은 줄 알아야 합니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보살이 이러한 삼매를 행하게 되면
여러 부처님으로부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리라는 수기를 받는다는데,
그렇다면 이 삼매는 모양을 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수보리가 말했다.
“사리불이여, 볼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선남자들은 이러한 삼매를 알아보지 못하니,
삼매에는 소유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 부처님께서 수보리를 칭찬하여 말씀하셨다.
“참으로 훌륭하구나.
내가 말한 바와 같이 그대는 무쟁삼매(無諍三昧)2)에서 뭇 사람들 가운데 제일이로구나.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
만약 이와 같이 배우는 자는 그야말로 반야바라밀을 배운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리불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보살은 이와 같이 배우되 정작 어떤 것을 배워야 합니까?”
■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이라면 이와 같이 배우되 정작 배울 것이 없는 것을 배워야 한다.
왜냐 하면 사리불이여,
이 모든 것은 범부들이 집착하여 좇는 것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사리불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그것은 지금 어떻게 있습니까?”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소유할 수 없는 모습으로 있다.
이와 같이 모든 법(法)이 소유할 수 없는 모습인 줄을 모르기 때문에
무명(無明)이라고 한다.
범부들은 무명을 분별하고 무명을 탐착(貪着)하는 양극단에 빠져서,
있지도 않은 것을 분별하고 색에 집착한다.
집착하기 때문에 소유할 수 없는 모습인 법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고
벗어나지 못하고
믿지 못하고
머물지 못하고
이 때문에 범부의 숫자 놀음에 떨어지고 만다.”
사리불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이와 같이 배우더라도 살바야를 터득하지는 못합니까?”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이 이와 같이 배우더라도 살바야를 터득하지는 못하며,
이와 같이 배우더라도 살바야를 배워 그 지혜를 성취했다고 할 수는 없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만약 허깨비가 살바야를 배운다면 이것을 성취할 수 있겠는가, 없겠는가?’ 하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세존이시여, 저는 어떻게 답변해야 합니까?”
“수보리여,
내가 반대로 그대에게 묻겠으니,
생각대로 말해 보아라.
어떻게 생각하는가?
허깨비는 색과 다르고 색은 허깨비와 다르며,
허깨비는 수ㆍ상ㆍ행ㆍ식과 다른가?”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허깨비는 색과 다르지 않고 색은 허깨비와 다르지 않으니,
허깨비가 곧 색이고 색이 곧 허깨비이며,
허깨비는 수ㆍ상ㆍ행ㆍ식과 다르지 않고,
이 정신 작용이 허깨비와 다르지 않으니,
허깨비가 곧 이 정신 작용이고,
이 정신 작용이 곧 허깨비입니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5음(陰)을 가리켜 보살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할 수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배우는 것을
마땅히 허깨비가 이것을 배우는 것과 같다고 알아야 한다.
왜냐 하면 5음이 곧 허깨비인 줄 알아야 하니,
나는 색이 허깨비와 같고,
수ㆍ상ㆍ행ㆍ식도 허깨비와 같다고 말한다.
정신 작용은 곧 6정(情:6根)이고 5음이다.”
“세존이시여,
처음으로 배우는 보살이 이러한 가르침을 들으면
혹시 놀라거나 두려워하거나 물러서거나 낙담하지 않겠습니까?”
“만약에 처음으로 배우는 보살이 악지식(惡知識)을 섬기고 있다면
틀림없이 놀라거나 두려워하거나 물러서거나 낙담할 것이다.
만약 보살이 선지식(善知識)을 섬기고 있다면
이러한 가르침을 들어도 결코 놀라거나 무서워하거나 물러서거나 낙담하지 않을 것이다.”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무엇을 가리켜 보살의 악지식이라고 합니까?”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반야바라밀을 멀리하고 깨달음을 즐거워하지 않도록 하며,
헛된 겉모습을 따르고 분별하도록 가르치며,
글귀를 번잡스럽게 꾸미도록 가르치며,
성문과 벽지불의 잡스러운 경전을 가르치며,
마군과 관련된 일을 꾀하는 것을 가리켜 보살의 악지식이라고 한다.”
“세존이시여,
무엇을 가리켜 보살의 선지식이라고 합니까?”
“반야바라밀을 배우도록 가르치고
마군에 대해 그 과오를 설하여 깨닫게 하며 이를 멀리하도록 가르치면,
수보리여,
이것을 일컬어 대승(大乘)의 마음을 품고
크게 장엄(莊嚴)하는 보살마하살의 선지식이라고 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보살이라는 말은 어떤 뜻입니까?”
■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대상을 걸림 없이 다 배우고
모든 대상이 그대로 진실 됨을 아는 이를 보살이라고 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모든 대상을 꿰뚫어 아는 이가 보살이라면
마하살은 또 어떤 뜻입니까?”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중을 위해 항상 앞장서기 때문에 마하살이라고 한다.”
사리불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도 마하살이라고 하는 이유를 기꺼이 말씀드리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좋을 대로 하여라.”
사리불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보살은 5온(蘊)에 나라는 실체가 있다는 생각을 끊고,
다섯 가지의 모임에 의해 자신이 생겨났다는 생각을 끊고,
자신에게 일정한 수명이 있다는 생각을 끊고,
인간만이 우월하다는 생각을 끊고,
있다는 생각을 끊고,
없다는 생각을 끊고,
덧없다는 생각을 끊고,
변함이 없다는 생각 등을 끊으라고 가르치기에 마하살이라고 합니다.
또한 이 가운데 어느 것에도 마음이 집착하지 않기에 마하살이라고 합니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물었다.
“이 가운데 어느 것에도 마음이 집착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수보리가 말했다.
“마음이 없는 까닭에 이 가운데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습니다.”
부루나미다라니자(富樓那彌多羅尼子)가 말했다.
“세존이시여,
보살은 거룩한 서원으로 장엄된 가르침과 대승의 가르침을 따르기 때문에 마하살이라고 합니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거룩한 서원으로 장엄된 가르침을 따른다는 말은 어떤 뜻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은 반드시 더 이상 제도할 중생이 없을 때까지
아승기 수의 중생을 제도하리라고 다짐한다.
왜냐 하면 모든 법의 모양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마술사가 네거리에 판을 벌여 놓고
요술로 많은 허깨비들을 만들어낸 다음 그 목을 자르는 것과 같으니,
그대 생각에 허깨비들이 다치거나 죽는 일이 있겠느냐, 없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 역시 이와 같이 더 이상 제도할 중생이 없을 때까지
아승기 수의 중생을 제도하는 자이니라.
만약 보살이 이와 같이 일을 전해 듣고도 놀라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이 보살은 반드시 거룩한 서원으로 단장된 가르침을 따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부처님의 가르침대로라면,
이 보살은 거룩한 서원으로 장엄된 가르침을 따름으로써
자신을 장엄한다는 점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왜냐 하면 살바야는 대상을 일으키지도 않고 지어내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살이 중생을 위해 거룩한 서원으로 장엄된 가르침을 따른다면
중생들도 역시 이와 같이 대상을 일으키지도 않고 지어내지도 않을 것입니다.
왜냐 하면 색에는 속박도 해탈도 없고,
수ㆍ상ㆍ행ㆍ식에도 속박과 해탈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루나가 수보리에게 말했다.
“색에도 속박과 해탈이 없고,
수ㆍ상ㆍ행ㆍ식에도 속박과 해탈이 없습니까?”
수보리가 말했다.
“색에도 속박과 해탈이 없고,
수ㆍ상ㆍ행ㆍ식에도 속박과 해탈이 없습니다.”
부루나가 말했다.
“수보리여,
색에 속박과 해탈이 없다는 말은 어떤 뜻이며,
수ㆍ상ㆍ행ㆍ식에 속박과 해탈이 없다는 말은 어떤 뜻입니까?”
수보리가 말했다.
“마치 허깨비와 같이 색에는 속박도 해탈도 없으며,
마치 허깨비와 같이 수ㆍ상ㆍ행ㆍ식에도 속박과 해탈이 없습니다.
소유할 모습이 없기 때문에 속박도 해탈도 없습니다.
여읜 까닭에 속박도 해탈도 없습니다.
새로 낳지 않는 까닭에 속박도 해탈도 없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보살마하살이 거룩한 서원으로 장엄된 가르침을 따름으로써
자신을 장엄한다고 합니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대승이란 또 어떤 뜻입니까?
보살이 대승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러한 수레는 어느 곳에 있으며 어느 곳에서 옵니까?”
■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양(量)을 헤아릴 수 없고 수(數)를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대승이라고 한다.
이 수레가 어느 곳에서 오고 어느 곳에 머무느냐 하면,
이 수레는 삼계(三界)로부터 와서 살바야에 머문다.
이 수레를 타고 오는 이는 없다.
왜냐 하면 새로 나오는 대상과 새로 나오는 사람 모두 있는 바가 없는데,
새삼 어떤 대상이 나오겠는가?”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말씀하신 마하연(摩訶衍:대승)이란 천상과 인간과 아수라 등이 모든 세간을 뛰어넘습니다.
세존이시여, 마하연은 마치 허공과 같습니다.
허공이 아승기 수의 중생을 품고 있듯이
마하연도 한량없이 많은 중생을 받아들입니다.
허공이 온 곳도 없고 간 곳도 없고 머무르는 곳도 없듯이
마하연도 지난 시간에서도 붙잡을 수 없고
현재의 시간에서도 붙잡을 수 없고
다가오는 시간에서도 붙잡을 수 없으니,
이 수레는 3세에 걸쳐 모두 같습니다.
이 때문에 마하연이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칭찬의 말씀을 하셨다.
“참으로 훌륭하구나.
보살마하살의 마하연이란 그대가 말한 바와 같다.”
그때 부루나미다라니자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수보리로 하여금 반야바라밀을 설법하게 하시더니,
이제 다시 마하연을 설법하게 하시는군요.”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제가 말씀드린 것이 혹시 반야바라밀의 본뜻에서 벗어나지는 않았습니까?”
“수보리여, 그렇지 않다.
그대가 말한 것은 반야바라밀의 본뜻에 잘 들어맞는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과거세의 보살도 붙잡을 수 없고,
또한 미래세의 보살도 붙잡을 수 없으며,
현세의 보살도 붙잡을 수가 없습니다.
색이 가없는 까닭에 보살 또한 가없으며,
수ㆍ상ㆍ행ㆍ식이 가없는 까닭에 보살 또한 가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어떤 곳에서도 어떤 시점에서도
어떤 대상에서도 보살을 붙잡을 수 없는데,
어떻게 보살에게 반야바라밀이 무엇인지를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보살을 붙잡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데,
어떻게 반야바라밀에 들어가는 법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 세존이시여,
보살이란 단지 일컫는 이름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치 나라고 말할 때 나라는 존재가 새로 생겨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것의 성품이 이와 같습니다.
그럼에도 색은 생겨나지 않고 머무르지도 않는다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입니까?
수ㆍ상ㆍ행ㆍ식이 생겨나지도 않고 머무르지도 않는다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입니까?
색도 마치 보살과 같아서 붙잡을 수 없습니다.
수ㆍ상ㆍ행ㆍ식도 역시 보살과 같아서 붙잡을 수 없습니다.
붙잡을 수 없다는 것조차 붙잡을 도리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어떤 곳에서도 어떤 시점에서도 어떤 대상에서도 보살을 붙잡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반야바라밀로 들어가는 법을 가르치겠습니까?
세존이시여,
보살이란 단지 일컫는 이름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치 나라는 존재가 끝내 생겨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것의 성품도 이와 같습니다.
그럼에도 색은 생겨나지 않고 머무르지도 않는다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입니까?
수ㆍ상ㆍ행ㆍ식이 생겨나지도 않고 머무르지도 않는다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입니까?
이러한 성품 역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역시 생겨난 적이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지금 생겨남이 없는 법으로
반야바라밀에 들어가라고 가르쳐야 합니까?
왜냐 하면 생겨남이 없는 법을 여읜 법은 붙잡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보살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행할 때
혹시 보살이 이러한 가르침을 듣고 놀라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이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고 있음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따르고 행할 때에는
어떤 것도 색으로 느껴서는 안 되는 줄 알아야 합니다.
왜냐 하면 색은 생겨난 적이 없으니 색이라고 할 수 없으며,
색은 사라지는 일이 없으니 색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생겨남과 사라짐은 둘이 아니며 다르지 않습니다.
색은 둘이 없는 법이라고 말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수ㆍ상ㆍ행ㆍ식의 정신 작용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정신 작용은 생겨난 적이 없으니 정신 작용이라고 할 수 없으며,
정신 작용은 사라지는 일이 없으니 정신 작용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생겨나지 않는 것과 사라지지 않는 것은 둘이 아니며 다르지 않습니다.
정신 작용은 둘이 없는 법이라고 말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그대가 말한 대로라면 보살은 생겨난 적이 없습니다.
보살이 생겨난 적이 없다면
중생을 위해 궂은 일을 하면서 고통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수보리가 말했다.
“나도 보살이 짐짓 궂은 일을 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궂은 일이라는 생각과 괴로운 일이라는 생각을 내면
한량없고 아득히 많은 중생을 이롭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중생을 친밀히 여기고 반가이 여기며 부모처럼 여기고 자식처럼 여겨야만
무수히 많은 중생을 이롭게 할 수 있습니다.
마치 나라는 존재를 어떤 곳에서도 어떤 시점에서도 어떤 대상에서도 붙잡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보살은 안팎의 모든 것에 대해 반드시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보살이 이와 같이 마음을 쓰는 것도 역시 난행(難行)이라고 합니다.
사리불이여,
그대가 이야기한 대로 보살은 생겨난 적이 없습니다.
사리불이여,
이와 같이 보살은 결코 생겨난 적이 없습니다.”
사리불이 말했다.
“보살이 생겨난 적이 없다면 살바야도 생겨난 적이 없습니다.”
수보리가 말했다.
“살바야도 생겨난 적이 없습니다.”
사리불이 말했다.
“살바야가 생겨난 적이 없다면 범부 역시 생겨난 적이 없습니다.”
수보리가 말했다.
“범부도 생겨난 적이 없습니다.”
■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보살이 생겨난 적이 없다면 보살의 법도 생겨난 적이 없으며,
살바야가 생겨난 적이 없다면 살바야의 법도 역시 생겨난 적이 없으며
범부가 생겨난 적이 없다면 범부의 법도 생겨난 적이 없으니
생겨남이 없는 것으로 생겨남이 없는 것을 붙잡음으로써 보살은 마침내 살바야를 얻습니다.”
수보리가 말했다.
“나는 생겨남이 없는 법에 의해 얻는 바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생겨남이 없는 법은 붙잡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리불이 말했다.
“생겨난 것이 생기는 겁니까,
생겨남이 없는 것이 생기는 겁니까?
그대는 생겨난다거나 생겨남이 없다는 말을 즐겨 하시는군요.”
수보리가 말했다.
“어떤 것도 생겨나지 않습니다.
생겨남이 없다고 즐겨 말하는 것도 역시
생겨난 적이 없고 즐겨 말한다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사리불이 말했다.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수보리님께서는 법을 설하는 사람 가운데 제일이십니다.
왜냐 하면 수보리님은 모든 질문에 능숙하게 답변하실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수보리가 말했다.
“법이 원래 그러할 뿐입니다.
어떤 불제자도 질문에 능숙하게 답변하기 위해 의존할 데라고는 없습니다.
왜냐 하면 어떤 법도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리불이 말했다.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이것은 어떤 바라밀의 능력입니까?”
수보리가 말했다.
“이것은 반야바라밀의 능력입니다.
사리불이여,
만약에 어떤 보살이 이와 같이 설하고 이와 같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의심하지 않고 후회하지 않고 어려워하지 않는다면
이 보살은 이에 대한 생각을 여의지 않고
이것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 사리불이 말했다.
“만약에 보살이 이에 대한 생각을 여의지 않고 이러한 행동을 여의지 않는다면
모든 중생 역시 이에 대한 생각을 여의지 않고 이러한 행동을 여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중생이 곧 이 보살과 같겠습니까?
왜냐 하면 모든 중생들도 이에 대한 생각을 여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가 말했다.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사리불이여.
그대는 어려운 질문을 던져
내가 말한 뜻을 분명히 하고자 하시는군요.
왜냐 하면 나의 말은 중생의 성품이 없는 까닭에
그러한 생각도 생겨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알아야 합니다.
중생을 여의기 때문에 생각 역시 여읩니다.
중생을 붙잡을 수 없기 때문에 생각 역시 붙잡을 수 없습니다.
■ 사리불이여,
나는 보살이 이러한 깨달음으로 반야바라밀을 행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 2. 석제환인품(釋提桓因品)
그때 법회장에는 4만 명의 천자(天子)를 거느린 석제환인과
2만 명의 천자를 거느린 사천왕과
2만의 범천(梵天)을 거느린 사바세계의 주인 범천왕과
정거천(淨居天)의 무수한 중생들이 함께 있었다.
이들의 몸에서 나는 업보의 광명은 부처님의 몸에서 나는 신묘한 광명에 묻혀서 더는 빛나지 않았다.
그때 석제환인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여기에 모인 무수한 하늘 중생들은 반야바라밀의 뜻에 대한 수보리님의 설법을 듣고자 합니다.
보살은 반야바라밀에 어떻게 머물러야 합니까?”
수보리가 석제환인과 하늘 중생들에게 말했다.
“교시가(憍尸迦:석제환인의 다른 이름)여,
나는 지금 부처님의 신묘한 능력을 빌어 반야바라밀을 설하고 있습니다.
혹시 모든 천자들이 아직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지 않았다면 지금 당장 마음을 내십시오.
혹시 성문으로서 이미 열반에 든 이가 있다면
이러한 이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기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왜냐 하면 이미 나고 죽는 일로 장애의 벽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가 만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낸다면 마찬가지로 나는 크게 기뻐할 것입니다.
끝내 그 공덕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니,
훌륭한 사람은 반드시 훌륭한 법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칭찬의 말씀을 하셨다.
“참으로 훌륭하구나.
그대는 이와 같이 능숙하게 권고하여 모든 보살들을 즐겁게 하는구나.”
수보리가 말했다.
“세존이시여,
저는 당연히 부처님의 은혜를 갚아야 합니다.
과거세의 여러 부처님 및 불제자들이
여래께서는 공(空)의 법에 머무르시며,
여러 가지 바라밀을 배우고 가르치시며,
여래 역시 이 법을 배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세존이시여,
이제 저도 이와 같이 여러 보살들을 수호하고 사념(思念)하겠습니다.
저의 수호와 사념에 의해 여러 보살들은 신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입니다.”
수보리가 석제환인에게 말했다.
“교시가여,
그대는 보살이 어떻게 반야바라밀에 머무르는지를 일심으로 들으십시오.
교시가여,
보살은 공(空)의 법으로 반야바라밀에 머무름으로써
거룩한 서원으로 장엄된 가르침과 대승의 가르침을 따릅니다.
색에는 머무르지 않으며,
수ㆍ상ㆍ행ㆍ식에도 머무르지 않습니다.
영원하든 영원하지 않든 색에는 머무르지 않으며,
영원하든 영원하지 않든 수ㆍ상ㆍ행ㆍ식에도 머무르지 않습니다.
즐겁든 괴롭든 색에는 머무르지 않으며
즐겁든 괴롭든 수ㆍ상ㆍ행ㆍ식에도 머무르지 않습니다.
청정하든 청정하지 않든 색에는 머무르지 않으며,
청정하든 청정하지 않든 수ㆍ상ㆍ행ㆍ식에도 머무르지 않습니다.
나[我]라는 것이 있든 나라는 것이 없든 색에는 머무르지 않으며,
나라는 것이 있든 나라는 것이 없든 수ㆍ상ㆍ행ㆍ식에도 머무르지 않습니다.
공(空)이든 공이 아니든 색에는 머무르지 않으며,
공이든 공이 아니든 수ㆍ상ㆍ행ㆍ식에도 머무르지 않습니다.
성인(聖人)의 맨 처음 단계인 수다원과(須陀洹果)에도 머무르지 않으며,
한 차례 외에 더 이상의 윤회가 없는 사다함과(斯陀含果)에도 머무르지 않으며,
욕망의 세계에 다시 태어나지 않는 아나함과(阿那含果)에도 머무르지 않으며,
성문 가운데 최고의 지위인 아라한과(阿羅漢果)에도 머무르지 않으며,
홀로 깨치는 벽지불도(辟支佛道)에도 머무르지 않으며,
부처님의 법에도 머무르지 않으며,
수다원이 무위과(無爲果)라도 머무르지 않으며,
수다원이 복밭[福田]이라도 머무르지 않으며,
수다원이 곧 일곱 번만 생사를 반복하면 되는 데 이르렀어도 머무르지 않으며,
사다함이 무위과라도 머무르지 않으며,
사다함이 복밭이라도 머무르지 않으며,
사다함이 한 번만 윤회하면 모든 고통이 사라지는 단계라도 머무르지 않으며,
아나함이 무위과라도 머무르지 않으며,
아나함이 복밭이라도 머무르지 않으며,
아나함이 금생에 열반을 얻는 단계라도 머무르지 않으며,
아라한이 무위과라도 머무르지 않으며,
아라한이 복밭이라도 머무르지 않으며,
아라한이 무여열반(無餘涅槃)을 얻는 단계라도 머무르지 않으며,
벽지불이 무위과라도 머무르지 않으며,
벽지불이 복밭이라도 머무르지 않으며,
벽지불이 부처의 지위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성문의 지위를 뛰어넘어 완전한 반열반(般涅槃)을 얻는 단계라도 머무르지 않으며,
■ 부처님의 법에도 머무르지 않으며,
무수한 중생을 이롭게 하며 무수한 중생을 열반에 들게 합니다.”
그때 사리불이 마음속으로 ‘보살은 어떻게 머무르는 것일까?’라고 생각하였다.
이를 알아챈 수보리가 사리불에게 물었다.
“어떻습니까?
여래는 어떻게 머무는지 생각해 보았습니까?”
사리불이 말했다.
“여래는 머무르는 곳도 없고 머무른다는 마음도 없기에 여래라고 일컫습니다.
여래는 끊임없이 원인과 결과가 되풀이되는 단계[有爲性]에도 머무르지 않으며,
또한 원인과 결과가 더 이상 되풀이되지 않는 단계[無爲性]에도 머무르지 않습니다.
사리불이여,
보살마하살은 반드시 여래가 모든 대상에 머무르되,
머무르는 것도 아니고 머무르지 않는 것도 아닌 것처럼 머물러야 합니다.”
그때 대중 가운데에 있던 모든 천자들은 마음속으로
‘야차(夜叉)들의 말은 잘 알아들을 수 있는데,
수보리님의 설법은 알아듣기 힘드는구나’하고 생각하였다.
■ 수보리가 모든 천자들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말했다.
“여기에는 법을 말한 이도 없고
법을 내보인 이도 없고
법을 들은 이도 없습니다.”
천자들은 다시 마음속으로 ‘수보리님은 쉽게 이해시키려고 하지만 그 말씀은 더욱 깊고 미묘하구나’라고 생각하였다.
수보리가 모든 천자들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말했다.
“만약에 수행자가 수다원과를 얻고자 하거나,
수다원과에 머물러 이 지혜를 여의지 않고자 하며,
사다함과와 아나함과와 아라한과를 얻고자 하거나 벽지불도를 얻고자 하거나
부처님의 법을 얻고자 할 때도 또한 이 지혜를 여의어서는 안 됩니다.”
그때 모든 천자들은 마음속으로 ‘수보리님의 설법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라고 생각하였다.
수보리가 모든 천자들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말했다.
“허깨비라면 나의 설법을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이들은 듣지도 않고 증득하지도 않습니다.”
천자들은 다시 마음속으로 ‘듣는 것이 허깨비라면 중생이 허깨비와 같다는 말인가,
수다원과부터 더 나아가 벽지불에 이르기까지 또한 허깨비와 같다는 말인가?’라고 생각하였다.
수보리가 천자들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말했다.
“나는 중생을 허깨비와 같고 꿈과 같다고 말합니다.
수다원과도 역시 허깨비와 같고 꿈과 같습니다.
사다함과도 아나함과도 아라한과도 벽지불도도 모두 허깨비와 같고 꿈과 같습니다.”
모든 천자들이 말했다.
“수보리시여,
부처님의 법 역시 허깨비와 같고 꿈과 같습니까?”
■ 수보리가 말했다.
“나는 부처님의 법 역시 허깨비와 같고 꿈과 같다고 말합니다.
나는 열반 역시 허깨비와 같고 꿈과 같다고 말합니다.”
모든 천자들이 말했다.
“대덕 수보리시여,
열반까지도 허깨비와 같고 꿈과 같다는 말씀이십니까?”
수보리가 말했다.
““모든 천자들이 혹시 열반보다 더 훌륭한 법을 듣더라도
나는 역시 그것이 허깨비와 같고 꿈과 같다고 말할 것입니다.
모든 천자들이여,
허깨비와 꿈과 열반은 둘이 아니며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때 사리불과 부루나미다라니자(富樓那彌多羅尼子)와
마하구치라(摩訶拘絺羅)와 마하가전연(摩訶迦栴延)이 수보리에게 물었다.
“반야바라밀의 뜻을 이와 같이 말하면 누가 알아듣겠습니까?”
그때 아난이 말했다.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의 뜻을 말하면 성불로 나아가는 길에서
아비발치(阿毘跋致:不退轉)의 지위에 있는 보살과
바른 견해를 갖춘 사람과 모든 서원을 성취한 사람과 아라한 등은 잘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수보리가 말했다.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말하면 잘 알아듣지 못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왜냐 하면 이 반야바라밀법에는 법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어서
법을 내보일 수가 없기 때문에 잘 알아듣지 못하는 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때 석제환인이 마음속으로
‘수보리 장로께서 법의 비를 내려주시니,
나는 요술로 꽃을 만들어 수보리에게 뿌려드려야겠다’고 생각하고
바로 요술로 꽃을 만들어 수보리님의 머리 위에 흩뿌렸다.
수보리는 마음속으로 ‘석제환인이 꽃을 뿌려 주다니.
나는 도리천에서 이러한 꽃을 본 적이 없다.
이 꽃은 마음의 나무에서 난 것이지 여느 나무의 것은 아니다’라고 생각하였다.
석제환인이 수보리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말했다.
“이 꽃은 진짜 꽃도 아니고 마음의 나무에서 난 것도 아닙니다.”
수보리가 석제환인에게 말했다.
“교시가여,
그대는 이 꽃이 진짜 꽃도 아니고
마음의 나무에서 난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생겨나지 않는 것은 꽃이라고 할 수 없는 것과 같군요.”
석제환인은 마음속으로
‘장로 수보리님의 지혜는 정말로 깊구나.
허울뿐인 이름을 온전히 두고도
그 참뜻을 설파하시다니’하고 생각하고,
수보리에게 말했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수보리시여.
수보리님이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보살은 반드시 이와 같이 배워야 합니다.
보살은 이와 같이 배우는 이로서
수다원과와 사다함과와 아나함과와 아라한과와 벽지불도는 배우지 않습니다.
만일 이와 같은 것을 익히지 않으면
부처님의 법을 배우고 살바야를 배운다고 할 만합니다.
만일 부처님의 법을 배우고 살바야를 배운다면
이것은 가없이 넓고 큰 부처님의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만일 가없이 넓고 큰 부처님의 법을 알게 되면
색을 배우는 데에 더함도 덜함도 있지 않으며,
수ㆍ상ㆍ행ㆍ식을 배우는 데에 더함도 덜함도 있지 않으며 색을 배우되 받아들일 것이 없으며,
수ㆍ상ㆍ행ㆍ식을 배우되 받아들일 것이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어떤 대상도 취하지 않고 버리지 않는 까닭에
참되게 배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수행자는 짐짓 살바야를 취하지 않으며 살바야를 버리지 않기 때문에
참되게 배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수보리가 말했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사리불이여,
보살은 살바야를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기 때문에 참되게 배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아야만 살바야를 배워서 살바야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때 석제환인이 사리불에게 말했다.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어디에서 구해야 합니까?”
사리불이 말했다.
“반야바라밀은 반드시 수보리님께서 말씀하신 바에서 구해야 합니다.”
석제환인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그것은 누구의 신묘한 능력입니까?”
수보리가 말했다.
“이것은 부처님의 신묘한 능력입니다.
교시가여,
그대는 반야바라밀을 어디에서 구해야 하느냐고 물었지요?
반야바라밀은 색에서 구해도 안 되고,
수ㆍ상ㆍ행ㆍ식에서 구해도 안 되며,
또한 색을 여의고 구해서도 안 되고,
수ㆍ상ㆍ행ㆍ식을 여의고 구해서도 안 됩니다.
왜냐 하면 색도 반야바라밀이 아니고,
색을 여읜 것도 반야바라밀이 아니며,
수ㆍ상ㆍ행ㆍ식도 반야바라밀이 아니고,
수ㆍ상ㆍ행ㆍ식을 여읜 것도 반야바라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석제환인이 말했다.
“마하바라밀이 곧 반야바라밀이고,
무량바라밀(無量波羅蜜)도 곧 반야바라밀이며,
무변바라밀(無邊波羅蜜)도 곧 반야바라밀입니다.”
수보리가 말했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교시가여.
마하바라밀이 곧 반야바라밀이고,
무량바라밀이 곧 반야바라밀이며,
무변바라밀이 곧 반야바라밀입니다.
교시가여,
색이 무량하므로 반야바라밀도 무량합니다.
수ㆍ상ㆍ행ㆍ식이 무량하므로 반야바라밀도 무량합니다.
현상의 원인이 가없으므로 반야바라밀도 가없습니다.
중생이 가없으므로 반야바라밀도 가없습니다.
교시가여,
현상의 원인이 가없으므로 반야바라밀도 가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든 대상은 앞에도 없고 중간에도 없고 나중에도 없는 까닭에
현상의 원인이 가없으므로 반야바라밀도 가없는 것입니다.
또한 교시가여,
모든 대상도 가없으며,
지나간 시간에서도 붙잡을 수 없고
현재의 시간에서도 붙잡을 수 없고
다가오는 시간에서도 붙잡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현상의 원인이 가없으면 반야바라밀도 가없습니다.”
석제환인이 말했다.
“장로 수보리시여,
중생이 가없으면 반야바라밀도 가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시가여,
중생의 수가 끝이 없어 헤아릴 수 없으므로
중생이 가없으면 반야바라밀도 가없습니다.”
석제환인이 말했다.
“대덕 수보리시여,
중생이란 무엇입니까?”
수보리가 말했다.
“중생이란 곧 이 대상[法]과 같습니다.
어떻습니까?
그대는 중생을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석제환인이 말했다.
“중생은 대상이 아니며 대상이 아님도 아닙니다.
단지 실없는 글자일 뿐입니다.
이 글자에는 근본도 없고 필연적인 이유도 없습니다.
억지로 이름을 지어 중생이라고 부를 뿐입니다.”
수보리가 말했다.
“어떻습니까?
그 가운데 진짜 중생이 있다고 말하거나
보여 줄 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수보리가 말했다.
“교시가여,
만약에 중생이 있다고 할 수도 없고 보여 줄 수도 없다면
중생이 가없으므로 반야바라밀도 가없다는 말은 어떤 뜻일까요?
■ 교시가여,
여래는 항하의 모래알처럼 많은 세월을 살면서 중생을 말씀하셨지만
중생이 실제로 있어서 나거나 죽는 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석제환인이 말했다.
“없습니다. 왜냐 하면 중생은 본래부터 늘 청정하기 때문입니다.”
“교시가여,
바로 그러한 까닭에 중생이 가없으면
반야바라밀도 가없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 소품경서(小品經序)
석승예(釋僧睿)
『반야바라밀경(般若波羅蜜經)』은
이치를 궁구하여 성품을 극진히 하는 격언(格言)이요,
보살이 부처를 이루는 큰 궤칙[軌]이다.
궤칙이 크지 않으면 뭇 다른 것을 포용하여 그 돌아갈 곳을 가리키기에 부족하고,
성품이 극진하지 않으면 중생이 어떻게 도량에 올라 정각(正覺)을 이루겠는가?
정각이 이루어지는 까닭과 뭇 다른 것이 하나로 되는 까닭이 어찌 이 도(道)를 말미암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이교(異敎)가 간절하여 삼무(三撫)1)가 이로써 자주 일어나고
공덕(功德)이 쌓여 구증(九增)2)이 이로써 빈번히 이르게 된다.
예컨대
「문상(問相)」은 현묘함[玄]을 표시해 그 현묘함을 현묘하게 하고,
「환품(幻品)」은 붙일 곳을 잊어 그 잊음조차 잊으며,
「도행(道行)」은 그 나루터를 평탄하게 하고,
「난문(難問)」은 그 근원을 궁구하며,
「수희(隨喜)」는 나아갈 곳을 잊어 종말을 궁구하고,
「조명(照明)」은 불화(不化)로써 현묘함에 나아가게 한다.
■ 장(章)은 비록 30이나 그것을 꿰는 것은 도(道)요,
말[言]은 비록 10만이나 그것을 더하는 것은 수행이다.
수행이 응집된 뒤에 무생법인[無生]을 얻고
도가 충분해진 뒤에 보처보살이 되며,
여기에 이르러야 일체지(一切智)로 변한다.
『법화경』은 근본을 밝혀[鏡本] 응연히 비추는 작용이 있고,
『반야경』은 지말에 명합하여[冥末] 중생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작용이 있다.
고통에서 벗어나고 이치를 궁구하는 것은 보살의 도[菩薩道]요,
근본을 밝혀 응연히 비추는 것은 그 최종목표가 된다.
실상에 도달한 뒤에도 화도(化道)의 작용을 없애지 않으면
돌아가는 길에 초목이 무성하여 삼실(三實)의 자취가 있게 되고,
권도(權道)가 응당 크지 않으면 어지러운 실마리가 분분하여 혹취(惑趣)의 다름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법화경』과 『반야경』은 서로 도와서 목적지에 도달하고,
방편(方便)과 실화(實化)는 합일하여
중생을 교화하는 목적에 도달할 수 있다.
이치를 궁구하여 타고난 본성을 다하는 것과
육도만행을 크게 밝히는 것을 논한다면
『반야경』의 실화(實化)는 『법화경』의 방편(方便)만 못하고,
만일 참된 교화를 크게 밝힘을 취하여
본래 일승(一乘)뿐이요 3승이 없음을 이해하면
『법화경』의 방편은 『반야경』의 실화만 못하다. ★★
그러므로
깊음을 찬탄하면 『반야경』의 공이 무겁고,
실상을 찬미하면 『법화경』의 작용이 은미하다.
이 경의 높음은 삼무(三撫)와 삼촉(三囑)이니
미혹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진(秦) 태자가 저궁(儲宮)3)에 있을 때
구외(區外)의 운(韻)을 헤아려 이 경을 완미하고
꿈속에서도 생각이 이르러
『대품(大品)』과 비교하여 번역자의 잘못을 깊이 알았다.
마침 구마라집[究摩羅] 법사에게
신(神)이 그 글을 주어
진본(眞本)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것을 들었다.
홍시(弘始) 10년 2월 6일에 번역하도록 하여
4월 30일에 이르러 교정을 모두 마쳤다.
옛 번역을 상고해 보니 참으로 거친 밭에 곡식을 재배하는 것과 같아
절반 이상 김을 매더라도
어찌 많이 고쳤다고 하겠는가.
이 경의 정문(正文)은 모두 네 가지가 있는데,
이는 부처님께서 다른 때에
교화에 알맞게 자세히 말씀하거나 생략한 말씀이다.
그 중에 많은 것은 10만 게(偈)가 있고
적은 것은 6백 게이다.
여기서의『대품』은 바로 천축의 『중품』이다.
편의에 따라 말한 것을
어찌 반드시 그 다소를 따지겠는가?
범문(梵文)은 고아하고 질박하나
본래의 뜻을 상고하면서 번역하여
기교에는 부족하지만
소박하고 바름에는 넉넉함이 있게 되었다.
삼가 글을 아는 어진 사람들은
그 화려함은 생략하고
그 실질을 살피기를 바라노라.
---------------
1 하루하루 자기 자신을 위로하는 것이다.
2 무한의 이익을 얻는 것이다.
3 동궁(東宮)과 같은 말이다.
1 한정(限定)되어 있는 지혜(智慧)를 말한다.
2 다투는 일이 없는 선정(禪定).
『금강경(金剛經)』에 “부처님께서 말하기를 나는 다툼이 없는 삼매를 얻었으니,
인간 중에 제일이다”라고 하였다.
○ [pt op tr]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Amelie-Les-Crayons - Les Jours De Neige En Ville (Live 2013).lrc
Lab value 불기2564/04/13/월/10:17
● 이상한 설법 상황
『소품반야바라밀경』의 첫부분에서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보살을 상대로 반야바라밀을 성취해야 함을 설하라고 한다.
이 상황은 상당히 이상한 상태다.
그래서 사리자가 이어서 의문을 갖는다.
경전에 다음처럼 나온다.
...
그때 부처님께서 수보리(須菩提)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설법에 능하므로
여러 보살들에게 반드시 반야바라밀을 성취해야 함을 말하도록 하라.”
사리불(舍利佛)은 곧 생각하였다.
‘수보리가 설법하는 것은 자신의 힘으로 하는 것일까,
아니면 부처님의 위신력을 빌려서 하는 것일까?
『소품반야바라밀경』 ♣0007-001♧
이는 수행단계를 놓고 생각하면 이상한 구조다.
군대로 비유하면,
사단장이 병장으로 제대한 이에게
소위 중위 계급의 장교들에게 군사학에 대해 강의하라고 요청하는 상황과 같다.
또 병원으로 비유하면
병원장이 막 질환을 고치고 퇴원한 환자에게
병원에서 환자를 치유하는 활동을 하는 인턴이나 레지던트 의사들을 상대로
치료법을 강의하라고 요청하는 것과 상황이 같다.
그래서 우선 사리자가 그런 의문을 일으키는 것이기도 하다.
외관상 여기서 수보리는 성문 스님이다.
그리고 성문 스님은 스스로 생사에서 벗어나 회신멸지의 상태에 이르러
아라한의 상태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수행자다.
그리고 보살 수행자는 중생제도를 목표로 보리심을 일으켜
생사현실에 임하는 대승 수행자다.
그래서 보살 수행자가 성문보다 수준이 높다고 일반적으로 보게 된다.
그런데 보살의 대승 수행과 반야바라밀에 대하여 설하는 『소품반야바라밀경』 첫부분에서
아라한인 수보리존자에게 거꾸로 보살을 상대로 반야바라밀에 대해서
설하라고 부처님이 요청하는 것이다.
비록 수보리존자가 해공제일인 부처님 성문제자이지만,
어떻게 보살을 상대로 거꾸로 반야바라밀에 대해서 설할 수 있는가.
이렇게 지혜제일인 부처님 성문제자인 사리자 존자가 의문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경전부분을 살피면 그 배경사정을 쉽게 알 수 있다.
결국 부처님의 위신력, 또는 부처님의 가피를 입어서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수보리 존자가 사정을 설명한다.
첫 부분에 서문이 붙어 있다.
그런데 내용을 읽다보니 조금 이상한 부분이 발견되어서 원문을
다시 살펴보게 된다.
그래서 조금 수정을 했다.
참고로 경전을 읽다가 이상한 부분이 발견되거나
오탈자가 발견되면 수정한다.
그리고 ★★ 표시를 붙이게 된다.
다음과 같은 부분이다.
만일 참된 교화를 크게 밝힘을 취하여
본래 일승(一乘)뿐이요 3승이 없음을 이해하면
『법화경』의 방편은 『반야경』의 실화만 못하다. ★★
...
소품경서(小品經序)
『소품반야바라밀경』 ♣0007-001♧
위 부분에 해당하는 원문에서 직접 『반야경』 『법화경』이라고 표현하지는 않는다.
다만 實과 照라는 표현으로 『반야경』의 실화(實化)는 『법화경』의 방편(方便)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앞에서는 實不如照 뒤에서는 照不如實라고 표현하여 대구를 이루고 있다.
則實不如照;取其大明眞化,解本無三,則照不如實。
...
따라서 앞 뒤 부분을 위와 같이 수정해야 할 듯하다.
그런데 여하튼 석승예(釋僧睿) 스님이 붙인 서문에
법화경과 반야경을 같이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법화경 내용을 다시 살피면
또 한번 위와 같이 수보리존자가
거꾸로 보살을 상대로 반야바라밀에 대해서 설하게 되는 사정도 다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그 배경을 알고보면 또 사정이 그럴만하기에 그렇게 하는 것임을 이해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제시되는 내용은
한편 일반적인 입장에서는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 힘든 형태다.
그래서 이어지는 2. 석제환인품(釋提桓因品)에서는
하늘 천자인 석제환인 조차도
도무지 수보리 존자가 무슨 말을 어떤 취지에서 하는지 잘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내용이 제시된다.
그래서 이들 내용은
일반적으로 하늘 천자나 인간세상의 일반인들이
쉽게 잘 알아듣지 못하는 내용 임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또 한편 바로 그런 사정 때문에라도
경전에서 수보리존자가 하는 말의 의미를 잘 알아듣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현실에서 수행을 원만히 잘 성취할 수 있다.
현실에서는 영희나 바위 그리고 자신과 남, 축생과 인간 그리고 하늘
또 부처님과 중생 이런 구분을 전제로 생활에 임한다.
그런 분별을 하지 않고서는 한 순간도 제대로 생활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런 분별은 잘못된 망상분별이다.
그래서 그것을 시정하는 것이 곧 반야바라밀의 수행이다.
그리고 그것이 곧 생사고통을 벗어나는 길이다.
또한 다른 중생을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길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부분을 강조하다보면 결국 하늘이나 인간 모두가 다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 된다.
특히 경전상에서 이런 형태로 내용을 제시하는 분들이 주로
수보리 존자, 문수사리보살, 유마힐거사, 용수보살, 이런 분들이다.
그리고 이 분들이 제시하는 내용을 이해하기 힘들어한다.
또 이해하더라도 그 내용을 현실에서 엉뚱하게 적용하는 사례가 많다.
이른바 악취공견의 사례가 그런 것이다.
그런데 경전 내용을 대할 때 그런 몰이해나 오해를 불러 일으킬 여지가 많다.
그래서 시간을 두고 위 내용을 잘 음미해서 이해해야 한다.
그런 가운데 도대체 어떻게 현실에서 수행을 해야 하는가를
잘 찾아내야 한다.
그런데 이 내용을 살피려면 그간 살펴왔던 내용을 다시 되풀이해야 한다.
그런데 사정상 이것을 다시 되풀이할 수 없다.
그래서 간단히만 논점을 제시하고 생략하고자 한다.
여기에 중요 논점이 3가지가 있다.
첫번째 일반인 입장에서는 현실에 영희도 있고 돼지도 있고 수행자도 있고
부처님도 있다. 그런데 왜 이 일체를 없다거나 얻을 수 없다고 하는가가 처음 문제다.
그런 가운데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겪는다.
그래서 이 문제를 잘 해결해야 한다. 논의의 귀결점은 이 부분이다.
그런 취지에서 처음에 기본 경전에서 기본적인 수행덕목들이 강조되어 제시된다.
무상, 고, 무아, 열반적정, 공 이런 내용과
연기(인과)관계 그리고 수행목표와 이를 성취하기 위한 수행방안 들이다.
그래서 이런 수행덕목을 잘 성취하여야 한다.
그리고 생사에서 기본적으로 벗어나야 한다.
그런데 이제 그렇게 해서 아라한의 상태에 이른 상수제자들을 상대로
반야경전의 가르침이 다시 이어진다.
그리고 여기에서 앞에서 제시한 내용 일체가 본래 얻을 수 없음을 다시 제시한다.
그런 가운데 수보리존자가 이런 사정을 다음처럼 제시한다.
대승 수행에 있어서 중요한 항목인 보살이나 반야바라밀 수행덕목 일체는 단지 명자(이름)뿐이다.
그리고 부처님도 허깨비다. 이처럼 제시한다.
그런데 이런 내용은 이것들만 유독 그렇다는 뜻은 아니다.
일체가 사정이 그러하고 이것들'마저도' 그렇다는 뜻이다.
그래서 처음에 이것을 잘 이해하는 것이 요구된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저쪽에서 여기로 바삐 영희가 걸어왔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왜 그런 영희나 그 영희의 오고감 조차도 얻을 수 없다고 하는가를
이 부분에서 잘 이해해야 한다.
경전에서 전반적으로 이 내용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다음 부분과 관련된다.
...
수보리가 말했다.
“나는 부처님의 법 역시 허깨비와 같고 꿈과 같다고 말합니다.
나는 열반 역시 허깨비와 같고 꿈과 같다고 말합니다.”
『소품반야바라밀경』 ♣0007-001♧
상당히 이상한 말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다고 제시한다.
그래서 이 내용을 먼저 잘 파악하는 것이 요구된다.
그러데 다시 또 다른 논점이 있다.
이제 그런 사정을 잘 이해하였다고 하자.
또는 그렇지 못하더라도 일단 본 사정이 그렇다고 받아들인다고 하자.
그런데 사정이 그렇다면 그런 상태에서
왜 그렇게 하필 그런 내용을 말하고 또 무언가를 하자고 하는가를 이해해야 한다. .
즉 정말 현실에서 부처님이 허깨비라고 하자.
또 수행을 통해 얻는 열반도 그렇다고 하자.
사정이 그렇다면 왜 현실에서 굳이 힘든 수행을 해야 한다고 하는가.
그것부터 문제가 된다.
그리고 사정이 정말 그렇다면 그런 내용을 굳이 그처럼 제시할 필요가 있겠는가.
정말 그렇다면 말할 내용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말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보리존자도 말을 한다. 그리고 부처님도 일정한 설법을 하고 있다.
그러니 사정이 그렇다면서 왜 그런 내용을 그처럼 제시하는가를 또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본 사정이 앞과 같다고 할 때
그렇다면 현실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주제와 관련이 된다.
이 부분에서 사정이 앞과 같다고 받아들인다고 하자.
이런 경우 사정이 그러므로 아무렇게 해도 된다고 잘못 여기고 함부로 임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이 이른바 악취공견의 입장과 관련된다.
앞과 같은 내용을 수보리존자나 부처님, 용수보살, 유마힐거사, 문수사리보살 등이 많이 제시한다.
그런데 이런 내용을 일반적으로 대하면 이를 바탕으로 위와 같이 자세를 취하기 쉽다.
왜냐하면 그처럼 수행을 통해 얻어야 할 부처님의 상태나 열반 등 자체도 다 얻을 수 없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사정이 그렇지 않다.
반야 경전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사정이 그렇다면서도 한편으로 열심히 수행을 통해 성취할 내용을 제시한다.
위와 같은 내용이 향하는 귀결점은 다음이다.
즉, 그런 바탕에서 그런 사정을 기본적으로 잘 이해해야 한다.
이런 이해는 이 생사현실에서 요구되는 내용이다.
본 바탕에서는 그런 생사고통 자체도 얻을 수 없다. 따라서 그렇게 이해를 해야 한다는 요구자체도 없다.
그런데 그런 사정을 제시하는 것은 이 생사현실에서 그런 본 사정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렇게 본 사정을 이해한다고 생사현실의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본 바탕에서 생사현실에 처할 때 그 본 사정을 우선 잘 이해하여야 한다.
그리고 다시 그런 이해를 바탕으로 기본적으로 제시했던 수행덕목을 잘 성취해야 한다.
그 수행도 또한 위와 같은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 무소득을 방편으로 하여 집착을 제거하고 임해야 한다.
그런 가운데 열심히 정진해서 잘 성취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이들 내용이 모두 원만히 잘 성취된다.
이렇게 제시한다.
또 그렇게 되기 위해서 그 내용을 그렇게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 각 내용의 관계를 또 잘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그럴 사정이 그처럼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번째로 그런 바탕에서
지금 이 현실 현장에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또 잘 살펴야 한다.
처음 수보리존자가 제시한 내용만 놓고 보면
생사현실에 보살도 얻을 수 없고 수행덕목도 일체 얻을 수 없다.
그런데 그런 내용을 말하기도 하고 또 뭔가를 해야 한다고 제시한다.
그러니 구체적 현실에서 도대체 어떻게 임해야 하는가. 이것이 문제된다.
처음 수보리존자가 제시한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현실에서 수행자가 할 바가 일체 없는 것 같다.
그런데도 무언가를 해야 한다면 또 그런 내용이 현실에 있는 것같다.
그런데 그런 것은 없는데 그러나 열심히 행할 바가 있다고 제시한다.
그러니 그것을 현실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적용해 성취해가야 하는가가 문제된다.
이 사정이 경전에서 다음처럼 복잡하게 제시된다.
...
그때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만일 색이 색으로서의 성품을 여의고,
수ㆍ상ㆍ행ㆍ식이 정신 작용으로서의 성품을 여의고,
반야바라밀이 반야바라밀로서의 성품을 여의었다면,
보살에게 굳이 반야바라밀의 실천을
소홀히 말라고 설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
『소품반야바라밀경』 ♣0007-001♧
그러자 수보리존자가 그렇기 때문에
성취할 바가 있다고 또 제시한다.
...
수보리가 말했다.
“사리불이여,
보살이 이와 같이 배운다면 살바야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왜냐 하면 어떤 것도 새로 생겨나거나 성취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보살이 이와 같이 실천한다면 살바야에 바로 다가서게 될 것입니다.”
...
『소품반야바라밀경』 ♣0007-001♧
부처님도 입장이 마찬가지다.
그래서 일단 외관상 이상하다.
...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이라면 이와 같이 배우되 정작 배울 것이 없는 것을 배워야 한다.
왜냐 하면 사리불이여,
이 모든 것은 범부들이 집착하여 좇는 것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대상을 걸림 없이 다 배우고
모든 대상이 그대로 진실 됨을 아는 이를 보살이라고 한다.”
『소품반야바라밀경』 ♣0007-001♧
그렇다면 한편으로는 중생과 부처는 차별이 없다.
그러면서도 생사현실에서는 또 차별이 있다.
그런 가운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가 문제로 남는다.
그래서 다음 질문이 이어진다.
...
사리불이 말했다.
“만약에 보살이 이에 대한 생각을 여의지 않고 이러한 행동을 여의지 않는다면
모든 중생 역시 이에 대한 생각을 여의지 않고 이러한 행동을 여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중생이 곧 이 보살과 같겠습니까?
왜냐 하면 모든 중생들도 이에 대한 생각을 여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
『소품반야바라밀경』 ♣0007-001♧
그래서 다음과 같은 답이 이어지고
또 이후에 계속 그에 대한 내용들이 제시되게 된다.
...
사리불이여,
나는 보살이 이러한 깨달음으로 반야바라밀을 행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소품반야바라밀경』 ♣0007-001♧
여하튼 이렇게 오락가락 이해하기 힘든 형태로 내용이 제시되는
그 배경사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각 부분에서 문제되는 내용을 서술하자면 끝이 없다.
며칠전 『품류족론』을 살필 때도 사정이 비슷하다.
조금 더 살피자면 이와 같은 취지의 이야기를 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내용을 그간 수없이 많이 반복했다.
그리고 지금은 과거에 그처럼 두서없이 적었던 내용을 정리해야 한다.
그래서 이런 경우에는 그렇게 정리된 부분만 링크를 처리해서 연결해주고 지나쳐야 한다.
그런데 그 작업 자체가 밀려 있다.
그래서 지금 상황에서는 링크도 걸어주기 힘들다.
그렇지만 위 내용은 여하튼 너무 많이 반복한 내용이다.
그래서 일단 생략한다.
나중에 관련부분이 정리되면, 위 부분은 삭제하고 링크만 걸어주고 넘어가고자 한다.
◧◧◧ para-end-return ◧◧◧
◈Lab value 불기2564/04/12 |
♥ 잡담 ♥오늘 하루의 최고순간은 무엇일까? |
문서정보 ori
http://buddhism007.tistory.com/16222#9571
sfed--소품반야바라밀경_K0007_T0227.txt ☞소품반야 sfd8--불교단상_2564_04.txt ☞◆vsvf9571 불기2564-04-12 θθ |
■ 선물 퀴즈
다음에 해당하는 단어를 본 페이지에 댓글로 적어주시면 됩니다.
↔근본정(根本定).
하지(下地)의 수혹(修惑)을 눌러 굴복시켜 근본정에 들어가려고 준비하는 정(定).
근본정에 8종이 있으므로, 여기에도 4선(禪) 4무색(無色)의 8근분이 있다.
근분(近分)은 근본정에 가까운 분(分)이란 뜻으로,
하지의 수혹을 눌러 굴복시켜 근분정을 얻고,
다음에 그 수혹을 온전히 끊어서 근본정을 얻으므로 이같이 일컫는다.
답 후보
근분정(近分定)
금강궐(金剛橛)
금강밀적(金剛密跡)
금강심(金剛心)
금륜보(金輪寶)
기(記)
기사굴산(耆闍崛山)
ॐ मणि पद्मे हूँ
○ [pt op tr]
●K0007_T0227
ॐ मणि पद्मे 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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