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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2554-09-05_석가씨보_00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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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2554-09-05_석가씨보_001

진리와 가치를 고루고루 2007. 4. 4. 06:38



®

『석가씨보』
K1049
T2041

석가씨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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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t op tr] 석가씨보_K1049_T2041 핵심요약





♣1049-001♧
『석가씨보』




석가씨보





♥아래 부분은 현재 작성 및 정리 중인 미완성 상태의 글입니다♥

비영리-동일조건변경허락원문번역문

석가씨보





석가씨보(釋迦氏譜)



당(唐)나라 도선(道宣) 지음

송성수 번역



1. 소의현겁(所衣賢劫)


무릇 천지(天地)의 개벽(開闢)은 습속(習俗)에서도 늘 말하고 있고, 

태소(太素)와 태역(太易)은 음(陰)과 양(陽)이 덮어 주고 실어 주고 있으므로 그 영원한 일을 상고하여 검사해 보더라도 바로 정확하게 찾아낼 수 없고 백가(百家)에 맡겨 보아도 거기에 허구(虛構)가 없는 것은 아니다.

혹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늘은 서북쪽으로 기울어 있고 땅은 동남쪽이 이지러져 있으므로 다섯 개의 돌을 단련하여 위에다 보태고 자라의 발을 끊어다 아래에 잇는 것이다.”

이에 천황(天皇)ㆍ지황(地皇)ㆍ인황(人皇)과 뱀의 몸에 소의 머리를 한 것이며 구기(九紀)와 사성(四姓), 

목축을 하는 이ㆍ임금ㆍ인민 등에 이르기까지의 이런 길들은 혼잡하고 뒤섞여서 족히 설명할 것조차 없다.

지금은 정교(正敎)에 의거하여 겁의 인연을 갖추어 들어 보겠다. 

겁(劫)이란 무엇을 이름하는가? 

이것은 때[時]를 말한다. 

만일 서역의 범어에 의거하면 겁파(劫波)라고 하고, 

이 나라의 말로 번역하면 대시(大時)라고 한다. 

이 하나의 대시는 그 햇수를 셀 수조차 없으니, 

비유를 빌려서 나타내어야 비로소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경에서 말하였다.

“마치 하나의 큰 성(城)의 사방 40리(里)에 겨자씨[芥子]를 가득히 채워 놓고 장수천인(長壽天人)이 3년마다 한 알씩 가지고 가서 성이 비록 텅 빈다 하더라도 겁은 오히려 다하지 않는다. 

또 둘레 40리 되는 돌을 3년마다 옷으로 한 번씩 스쳐서 그 돌이 비록 다 닳아 없어진다 하더라도 겁은 오히려 다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겁과 겁이 서로 잇닿아 전전하여 끝이 없으며 목숨이 있는 4생(生:태생ㆍ난생ㆍ습생ㆍ화생)이 있되 언제나 [생사의 바다에] 가라앉아 나오지 않는 것이니 지금의 이 겁을 바로 현(賢)이라고 한다.”

겁초 때에 큰 물이 가득 차고 푸른 연꽃이 피어 그 수가 1천이 되니, 

제4선천(禪天)이 일찍이 지나간 일을 보면서 곧 서로 말하였다.

“지금의 이 세계는 천 분의 부처님[千佛]께서 출현하시겠구나.”

이때를 가리켜 현겁(賢劫)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말한 곧 현겁 중의 천 분 부처님이 바로 이것이다.

구류손(拘留孫)으로부터 시작하여 최후에 부처님이 되시는 분의 명호는 누지(樓至)이다. 

그러므로 첫 번째가 구류손여래요, 

두 번째는 가나함모니(迦那含牟尼)이며, 

세 번째는 가섭파(迦葉波)요, 

네 번째는 석가모니(釋迦牟尼)이니, 

우리들이 섬기고 있는 분은 현겁 중의 네 번째 부처님임을 알 수있다.

마치 소승경(小乘經)에서는 현겁 앞에는 겁이 텅 비어 부처님께서 계시지 않으셨고, 

91겁 동안에는 오직 비바시(毘婆尸)부처님만이 계셨고, 

34겁 동안에는 두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셨으며 현겁 안에 들어와서 네 분의 부처님까지 하여 일곱 분의 부처님으로 보는 것이니, 

일반적인 설명과 같다.

마치 대승경(大乘經)에서는 3세의 3겁 동안에 겁마다 천 분의 부처님께서 계시며 과거는 장엄겁(莊嚴劫)이라 하고 현재는 현겁(賢劫)이라 하며 미래는 성수겁(星宿劫)이라 하여 3천의 왕자(王子)가 차례로 성불한다고 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마음으로는 밝고 어둠[明昧]을 알면서 감응은 다른 길을 나타내기 때문에 근기[機]에 따라 교화를 펴는 것을 견주어 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취산(靈鷲山)의 하나의 법회 같은 데에서도 오히려 5천이 물러났고 반야(般若)의 큰 공[大空]에서도 작은 과위의 증득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토(淨土)가 줄어들지 않는 것은 보살의 경지인 주(住)에 대장부이고 대화재1))로 모조리 타버리는 것은 일어나고 없어지는 선비[起沒之士]로 귀결되는 것이니, 

이렇게 비교하여 헤아린다면 의심할 것이 없게 된다.

이 겁을 현(賢)이라 하고 천 분의 부처님께서 출현하시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니 모름지기 알아야 한다.





2. 씨족근원(氏族根源)


이러한 성씨(姓氏)의 일어남은 본래 그 바탕[質]을 부르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물질의 종류를 따라 그것의 형상으로 이름을 짓게 되었다.

마치 동하(東夏)의 성씨의 근본에는 오직 아홉 가지가 있었던 것과 같다. 

그러므로 혹은 시호(諡號)로 부르기도 하였으니 당(唐)ㆍ우(虞)ㆍ문(文)ㆍ무(武) 등이 바로 그것이요, 

혹은 작봉(爵封)으로 부르기도 하였으니 왕(王)ㆍ후(侯)ㆍ송(宋)ㆍ위(衛) 등이 바로 그것이며, 

혹은 관직의 이름[官字]으로 부르기도 하였으니 사마(司馬)ㆍ사도(司徒)ㆍ백(伯)ㆍ중(仲)ㆍ숙(叔)ㆍ계(季) 등이 바로 그것이요, 

혹은 사는 처소로 부르기도 하였으니 성(城)ㆍ곽(郭)ㆍ원(園)ㆍ지(池)와 같은 것이며, 

혹은 종사하는 일로 부르기도 하였으니 곧 도(陶)ㆍ구(丘)ㆍ무(巫)ㆍ복(卜)과 같은 것이요, 

혹은 맡은 직책으로 부르기도 하였으니 곧 삼오(三烏)와 오록(五鹿)과 같은 것이다.

자손들은 그가 하는 일에 따라 퍼지고 넓어지면서 점점 더 불어났으며 곧 그 자체의 형상을 가리키는 것이니 번거롭게 기술하지 않겠다.

태하(太夏)의 종성(種姓)에는 네 가지가 있으되 동일하지 않나니, 

이를테면 찰제리(刹帝利)와 바라문(婆羅門)과 비사(毘舍)와 수다라(首陀羅)이다.

찰제리는 왕의 종성(種姓)으로서 가장 높고 귀한 이들이다. 

겁초(劫初)로부터 서로 이어받아 끊어지지 않았으며, 

나머지 세 성씨는 여기서 논할 바가 아니므로 다만 부처님의 성씨만을 밝히자면 스스로 다섯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구담(瞿曇)이요, 

둘은 감자(甘蔗)이며, 

셋은 석가(釋迦)요, 

넷은 사이(舍夷)이며, 

다섯은 일종(日種)이다.

구담이라고 함은, 

『십이유경(十二遊經)』에서 “옛날에 보살(菩薩)이 아승기겁(阿僧祈劫)에 국왕(國王)이 되었는데 부모가 일찍 죽었으므로 임금의 자리를 선양하고 도(道)를 구하였는데 그 스승의 성(姓)이 구담(瞿曇)이었으므로 그의 성씨를 따랐다”고 한 것과 같다.

당(唐)나라 말로 구담은 별의 이름이다. 

이와 같이 씨(氏)가 늘어난 것은 별이름으로 성을 지었기 때문이다.

『열반경(涅槃經)』에서 말하였다.

“조상이 구담이라는 성이었다는 것은 예로부터 대대로 전해진 것이다.”

구담이라 함은 이곳의 말로 진흙이라고도 말하는데 다만 이것은 번역한 사람이 말의 경중(輕重)에서 취한 것이다. 

요사이 범승(梵僧)에게 물어보았더니 구다(瞿茶)라는 말이 진흙이라고 하였다. 

구담이라 함은 바로 별의 이름이다. 

그러므로 별이름으로 성을 지은 것이지 결정코 진흙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감자(甘蔗)라고 함은, 

곧 저 경에서와 같이 보살은 옛날 감자원(甘蔗園) 가운데 머무르면서 도를 닦았으므로 그 동산으로 인하여 씨(氏)가 지어진 것이며, 

또 이름을 감자(甘蔗)라고 한 까닭이다.

『불소행찬(佛所行讚)』에서 “감자의 후예이다”라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때에 보살은 동산에서 도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전생의 업 때문에 도둑에게 잡혀가서 나무 위에 몸이 꿰여 피가 땅으로 흘러내렸다. 

대선(大仙) 구담은 천안(天眼)이 청정하였으므로 보살이 후사(後嗣)가 끊어져 뒷날 부처님이 될 인연이 없게 될 것을 보고, 

산으로부터 날아와서 가엾이 여기며 시신을 염(斂)하고 흙 속의 피를 가지고 진흙으로 덩어리를 만든 뒤에 두 개의 그릇 안에다 넣고 다시 있었던 곳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신주(神呪)를 외운 힘으로 열 달이 차자 왼쪽 덩어리는 변하여 남자가 되고 오른쪽 덩어리는 변하여 여인이 되어 구담선(瞿曇仙)의 성씨는 마침내 다시 일어났다고 한다.

사이(舍夷)라고 함은 『사분율(四分律)』에서 “부처님은 사이의 종성(種姓)이다”라고 한 것과 같고, 

또한 사이국(舍夷國)이라고도 하였는데 이 이름은 자세히 알지 못하겠다.

석가(釋迦)라고 함은 『장아함(長阿含)』에서 말하였다.

“과거의 왕이 있었는데 이름은 의마(懿摩)곧 제10의 전륜왕이며 보살의 몸과는 1백 세(世) 떨어진다.였다. 

네 아들넷째 아들이 장엄(莊嚴)인데 곧 백정왕(白淨王)이 그 계통을 이었다.을 내쫓아 멀리 나라 밖으로 나가게 하였으므로 왕명을 받들어 이미 북설산(北雪山)에 이르러 직림(直林) 속에 머물렀다.”

『미사색율(彌沙塞律)』에서 말하였다.

“설산의 북쪽에 살았는데 사방이 멀고 넓었으며 나물과 열매가 무성하였고, 

수레를 멈춘 지 수년(數年) 만에 덕(德)에 귀의하는 것이 저자와 같이 번성하여 강한 나라가 되었다. 

부왕이 생각하여 가서 부르며 허물을 빌었으나 돌아오지 않았다. 

부왕은 세 번 감탄해 말하기를, 

‘나의 아들에게 능력이 있구나’라고 하였다. 

그로 인하여 석종(釋種)으로 불렀다.”

『본기(本紀)』에서 말하였다.

“정광부처님[錠光佛]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다음 세상에 부처가 되리니 명호는 석가문불(釋迦文佛)이라 하리라’고 하셨다.”

석가(釋迦)는 능(能)이요, 

문(文)은 인(仁)이다. 

지금의 당나라 번역에 준하면 이 『본기경』과 같다. 

그러므로 이 네 아들은 능(能)으로 성씨를 지은 것이다. 

그리고 석가라는 성씨를 경문(經文)에서는 한 글자 또는 두 글자로 쓰는데 이런 경우는 우리나라에도 있으니 방삭(方朔)ㆍ마경(馬卿) 등이 그것이다.

『미사색』에서 말하였다.

“직수림(直樹林)에 머물렀으므로 또 석(釋)이라고 한다.”

이제 이것을 범음(梵音)에 의거하면 직(直)을 부를 적에는 석(釋)이 되는 것이니, 

천축(天竺)에서는 모든 경우에 한 사물에도 여러 이름이 있다. 

이것은 또 숲으로 인하여 성씨가 지어진 것이다.

또 『별전(別傳)』에 준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저 토지에 석가(釋迦)라는 나무가 있었는데 뿌리와 줄기가 무성하였다. 

관상을 잘 보는 이가 말하기를, 

‘반드시 나라의 임금[國主]이 나오리라’고 하였다.

네 아들이 옮겨간 것으로 인하여 나라를 세웠고 성씨의 이름이 지어진 것이다.”비록 경교(經敎)는 아니지만 그런대로 우선 다른 견문을 붙여 둔다.

일종(日種)이라고 함은 『담무덕율(曇無德律)』에서 말하였다.

“아버지의 성(姓)을 일(日)이라 하였다.”그 사연은 자세하지 않다.

통틀어 다섯 가지의 다른 것을 밝혔다. 

종(宗)이 동일한 하나의 성씨인데 일에 따라 흐르고 변하였기 때문에 이런 부류가 있게 되었다. 

그리고 석(釋)이라는 한 성씨에 대하여 많은 책에서 여러 가지로 밝히고 있는데 이 밖의 출몰(出沒)에 관하여는 거기서의 사연으로 들어 보이는 것에 맡겨 둔다.

그러므로 승우 율사(僧祐律師)가 말하였다.

“정광부처님께서 수기(授記)하시며 말씀하셨다. 

명호를 석가로 한 것은 오묘하게 계합하기 때문에 석종(釋種)으로 수기한 것이다. 

이름은 아직 형상이 있기 전에 나왔고 자취는 이미 탄생한 후에 양육되어서 천상과 인간에 환히 빛나고 광겁(曠劫)에 길이 이어져 끊어지지 않았으니 그 근원은 깊고도 깊구나.”

내가 살펴본 바로는 구담이란 성씨는 아버지를 따랐고 석가라는 성씨는 어머니를 따른 것이리라. 

그러므로 다섯 사람으로 보살을 따랐던 이들은 부처님을 구담이라고 불렀던 것이니, 

여기에서 곧 아들이 아버지의 성을 따랐다는 이치가 환히 드러난다.

『사분율(四分律)』에서 말하였다.

“아버지의 성명은 일(日)이요, 

태어난 곳은 석가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어머니의 성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구담의 고선(古仙)이 피를 취하여 그릇에 간직했던 것이 뒷날 남자와 여인으로 변화하여 마침내 석씨 문중이 있게 되었다면, 

그 근원을 조사하여 밝히건대 하나의 피로 뒤에 두 개의 몸이 나뉜 것이니 겹사돈[姻媾]의 태(胎)가 변하면서 지류(支流)가 드디어 넓어진 것이 된다. 

근본에 의거하여 말한다면 진실로 예수(禮數)를 업신여긴 것이요, 

그 사연(事緣)에 결부시켜 본다면 그 대의(大義)는 천도에 어그러진 것이다.

왜냐하면 석씨가 혼인한 것을 살펴보건대 다 같이 족친(族親)과 단절한 것은 우리 나라의 주공(周孔)이 세운 가르침과 은연 중에 합치되고, 

세대(世代)마다 전륜왕으로 이어받아 그 성망(聲望)이 천하에 높았으며 종(宗)을 분간하여 여인을 맞아들였고 낮은 성바지[卑族]와는 서로 혼인을 맺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두 성(姓)의 조상이 같이 고선(古仙)이라고 헤아린다면, 

태(胎)의 피가 다르지 않는지라 이치로나 전례로 보나 끊어지기 어렵다. 

마치 동하(東夏)의 성씨 대부분이 오제삼왕(五帝三王)을 근본으로 하고 지금은 교구(交媾)와 인척(姻戚)을 특별히 갈라서 취하고 좇은 것이 없는 것과 같다.

위에서는 성씨의 유래를 밝혔고 여기서는 씨족의 근원이 일어난 바를 설명하겠다.

『장아함』에서 말하였다.

“대겁(大劫)이 처음 이루어질 때 아직 해와 달이 없어서 광음천(光音天)의 모든 하늘들이 복(福)이 다하여 내려와 태어나서 모든 사람이 되어서는 환희(歡喜)로써 밥을 삼고, 

몸의 광명은 멀리까지 비추며 날아다니는 것이 자재하고 남자ㆍ여인ㆍ높은 이ㆍ낮은 이ㆍ친척ㆍ권속이 없었다. 

이때에 저절로 생겨난 지미(地味)가 마치 소(酥)나 꿀과 같았는데 시험삼아 맛본 이가 있어 드디어 주먹밥[摶食]이 생기게 되면서 광명이 소멸하고 신통이 없어지고 땅에 쓰러지면서 슬피 탄식하였다. 

그리고 많이 먹은 이는 모습이 초췌해지고 적게 먹은 이는 형상이 윤택해지면서 곧 승부(勝負)가 일어났고 지미는 곧 없어져 버렸다. 

그리고는 또 지피(地皮)가 생겨났고 그 다음에는 또 지부(地膚)가 생겨났으며 그것을 많고 적게 먹음에 따라 모든 악(惡)이 모이게 되었다. 

그리고 또 멥쌀[粳米]이 생기면서 온갖 맛이 갖춰지게 되었으니, 

탐욕을 내어 먹은 이는 남자와 여자의 성기가 갖춰지면서 이와 같이 차츰차츰 발전하여 곧 부부(夫婦)가 되었고 드디어 태에서 태어나기 시작하였다.”

『누탄경(樓炭經)』에서 말하였다.

“저절로 생긴 멥쌀은 아침에 베어 내면 해질녘에는 익었다.”

『중아함경』에서 말하였다.

“쌀의 길이는 네 치였는데 사람들이 다투어 미리 베어 가고 그와 같이 서로에게 가르쳤는데 미리 베어 간 곳은 그 뒤로 다시는 나지 않았다.”

승우 율사는 말하였다.

“경박한 바람이 이미 움직이고 나서 순후한 근원은 물러가는 것이요, 

정령(精靈)이 감통하면 번갯불이 치다가도 더디게 된다. 

가만히 듣건대 양한(兩漢) 때에 동래(東萊)에서 조세(租稅)를 더 받자 바다의 고기가 숨어 들어갔고 합포(合浦)에 세금을 늘리자 물에서 나는 구슬과 조개가 멀리 사라졌다고 한다. 

근대(近代)의 것을 가지고 옛날 일에 견주어 보아도 더욱 부합되는 일이니, 

멥쌀이 생기지 않았다는 것이 그리 이상할 것이 없다.”

『장아함』에서 말하였다.

“그때에 중생들은 이미 멥쌀이 거듭 생기지 않는 것을 보았으므로 저마다 슬퍼하고 근심하면서 서로 밭과 집을 정하여 경계를 만들었으며 마침내는 자기의 쌀은 감춰 놓고 남의 밭 곡식을 훔치게 되었으니, 

이로부터 일이 일어나도 결단해 줄 이가 없는지라 의논하여 한 사람을 세워 착한 이에게는 상(賞)을 주고 나쁜 이에게는 벌(罰)을 주는 평등한 주인[平等主]이라고 부르고 그 대가를 공급하기로 하였다. 

그때에 용모와 바탕이 뛰어나고 위엄이 있으면서 모든 것에 엄숙한 한 사람이 있었으므로, 

여러 사람들은 믿고 따랐으며 곧 함께 그에게 맡아 주기를 청하였다. 

그가 이미 수락하고 나자 드디어 백성의 주인[民主]이라는 이름이 있게 되었다.”

『누탄경』에서 말하였다.

“여러 사람들은 스스로 ‘우리를 위하여 어른이 되어 주었으니 그를 왕(王)이라고 부르고 그가 조세를 취하였기 때문에 찰리(刹利)당나라 말로 찰리를 번역하면 밭과 땅의 주인이라고 한다. 

처음 땅을 나누고 나자 날마다 각각 다투었으므로 이런 주관하는 이를 세운 것이다.라고 부르자’고 말하였다.

이때에 염부제(閻浮提)의 천하는 풍부하고 즐겁고 안온하였으며 땅에서는 푸른 풀이 마치 공작새의 털과 같이 났고, 

8만여 나라의 마을들이 서로 소리를 들었으며 추위나 더위나 병들거나 괴로운 자가 없었다. 

왕은 바른 정치로써 열 가지의 선(善)을 받들어 행하여 서로서로 숭앙하고 공경하는 것이 마치 아버지와 아들 사이 같았고 사람의 수명은 극히 오래 살아서 헤아릴 수도 없었다. 

그러나 뒤의 어떤 다른 왕은 바른 법[正法]을 행하지 않았는지라 그 수명이 드디어 줄어들면서 10만 살에 이르렀고 이와 같이 차츰차츰 줄어지면서 오늘의 백 살에 이르게 되었다.”

위는 석씨(釋氏)의 선조(先祖)에 관하여 밝힌 것이나 본래는 겁초(劫初)에 처음으로 왕(王)이라는 것이 생겨난 것이니, 

차츰차츰 내려오면서 전륜왕(轉輪王)과 속산왕(粟散王)이 서로 이어받은 모양을 나열해 보겠다.

맨 처음 민주왕(民主王)은 이름이 대인(大人)이다.『사분율』에서 나오고 그 밖에 『장아함』에도 나온다.

제2의 왕 이름은 진보(珍寶)이다.대인(大人)의 아들이다.

제3의 왕 이름은 호미(好味)이다.진보의 아들이다.

제4의 왕 이름은 정재(靜齋)이다.호미의 아들이다.

제5의 왕 이름은 정생(頂生)이다.

제6의 왕 이름은 선행(善行)이다.

제7의 왕 이름은 택행(宅行)이다.

제8의 왕 이름은 묘미(妙味)이다.

제9의 왕 이름은 미제(味帝)이다.

제10의 왕 이름은 외선(外仙)이다.

제11의 왕 이름은 백지(百智)이다.

제12의 왕 이름은 기욕(嗜慾)이다.

제13의 왕 이름은 선욕(善慾)이다.

제14의 왕 이름은 단결(斷結)이다.

제15의 왕 이름은 대단결(大斷結)이다.

제16의 왕 이름은 보장(寶藏)이다.

제17의 왕 이름은 대보장(大寶藏)이다.

제18의 왕 이름은 선견(善見)이다.

제19의 왕 이름은 대선견(大善見)이다.

제20의 왕 이름은 무우(無憂)이다.

제21의 왕 이름은 주저(洲渚)이다.

제22의 왕 이름은 식생(殖生)이다.

제23의 왕 이름은 산악(山岳)이다.

제24의 왕 이름은 신천(神天)이다.

제25의 왕 이름은 견력(遣力)이다.

제26의 왕 이름은 뇌차(牢車)이다.

제27의 왕 이름은 십차(十車)이다.

제28의 왕 이름은 백차(百車)이다.

제29의 왕 이름은 뇌궁(牢弓)이다.

제30의 왕 이름은 십궁(十弓)이다.뇌궁의 아들이다.

제31의 왕 이름은 백궁(百弓)이다.십궁의 아들이다.

제32의 왕 이름은 양수(養收)이다.백궁의 아들이다.

제33의 왕 이름은 선사(善思)이다.양수(養收)의 아들이며 율(律)에서는 진사(眞闍)라고 하였다.

선사왕으로부터 그 뒤에는 열 씨족의 전륜성왕(轉輪聖王)이 서로 이어받았다.율(律) 가운에도 역시 그러하나 이름이 혹 동일하지 않기도 하다.

제1의 전륜성왕에 대하여 『누탄경』에서 말하였다.

“진사왕(眞闍王)의 아들이 상속하였으며 이름은 파연가(波延迦)이며 다섯 분의 전륜성왕이 있다.”

제2의 전륜성왕에 대하여 『누탄경』에서 말하였다.

“다라업왕(多羅業王)이며 다섯 분의 전륜성왕이 있다.”

제3의 전륜성왕에 대하여 『누탄경』에서 말하였다.

“아파섭왕(阿波葉王)이며 일곱 분의 전륜성왕이 있다.”

제4의 전륜성왕에 대하여 『누탄경』에서 말하였다.

“건타리왕(揵陀利王)이며 여덟 분의 전륜성왕이 있다.”

제5의 전륜성왕에 대하여 『누탄경』에서 말하였다.

“가릉가왕(迦陵伽王)이며 아홉 분의 전륜선왕이 있다.”

제6의 전륜성왕에 대하여 『누탄경』에서 말하였다.

“차파첨파왕(遮波瞻婆王)이니 열네 분의 전륜성왕이 있다.”

제7의 전륜성왕에 대하여 『누탄경』에서 말하였다.

“구렵라파왕(拘獵羅婆王)이며 서른한 분의 전륜성왕이 있다.”

제8의 전륜성왕에 대하여 『누탄경』에서 말하였다.

“반사라왕(般闍羅王)이며 서른두 분의 전륜성왕이 있다.”

제9의 전륜성왕에 대하여 『누탄경』에서 말하였다.

“미시리왕(彌尸利王)이며 8만 4천 분의 전륜성왕이 있다.”

제10의 전륜성왕에 대하여 『누탄경』에서 말하였다.

“일마미왕(壹摩彌王)이며 백 분의 전륜성왕이 있다.”율에서는 의사마(懿師摩)라고 한다.

이 열 분의 전륜성왕은 경(經)과 율(律)에서 함께 나오는데 이름과 수효는 대체로 같으나 다만 범부와 성인이 마구 섞여 있을까 염려될 뿐이다. 

이제 그 일을 밝힌다면 8만이 순수한 성제(聖帝)라는 것은 용인하지 못하며, 

다만 열 분의 전륜성왕만이 바르다고 할 수 있다. 

그 밖의 자손들은 바로 범부이다.

율에서 밝힌 바는 다만 다음과 같다.

“차례대로 서로 계승하여 왕이 되었다.”

경에서 보면 다 같이 성제라고 하였으니 반드시 이들이 본계(本系)를 좇아서는 성인이지마는 지류(支流)를 좇는다면 다 같이 범부에 속한다고 할 것이다.

또 제10의 전륜성왕에서는 “백 분의 전륜왕은 부처님의 부조(父祖)이며 다 같이 이 분들은 성제이다”라고 하였지만 지금은 다만 보살(菩薩)에게 나타나는 감응을 글에서는 성제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밖의 부족(父族)은 모두 범부의 왕인 것이니 예(例)로써 알 수 있다.

부처님으로부터 7세(世)의 인연을 순서대로 매긴다면 제7세조(世祖)의 이름은 대선생(大善生)이다.

『사분율(四分律)』에서 말하였다.

“의사마(懿師摩)에서 차례로 백 명의 왕이 있은 뒤에 왕이 있었으니 이름은 대선생(大善生)이다.”

어떤 사람은 “이 분이 곧 마(摩)의 아드님이며 지금은 마후의 제94세(世)의 왕이 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기를, 

“최후의 왕의 이름은 대선생이다”라고 한 것이니, 

이것이 좋은 증거가 된다.

제6세조는 이름이 의사마이다.경에서는 오바라(烏婆羅)라고 하였다.

제5세조는 이름이 우라타(憂羅陀)이다.누바라(淚婆羅)이다.

제4세 고조(高祖)의 이름이 구라(瞿羅)이다.니구라(尼求羅)이다.

제3세 증조(曾祖)의 이름이 니부라(尼浮羅)이다.

제2세 할아버지의 이름은 사자협(師子頰)이다.

제1세는 보살의 아버지이며 이름은 정반(淨飯)이다.『누탄(樓炭)』과 율(律)에서는 다 같이 말하기를 “사자협의 아들의 이름은 열두단(悅頭檀)이다”라고 하였다.

금륜왕(金輪王)의 이름은 보살실달(菩薩悉達)이다.

철륜왕(鐵輪王)의 이름은 나후라(羅睺羅)이다.

이 앞의 것에 의거하여 조사하건대 처음 우주(宇宙)의 조화(造化)가 막 이루어지며 황극(皇極)이 세워지기 시작할 때 여러 많은 백성을 모아 유지하였으며 그 근원은 민주(民主)에서 출발하여 선사(善思)에까지 이르렀으니, 

혈통과 적자가 서로 33세(世)를 이어받았다.

이로부터 이후의 10대(代)가 발흥하였으니, 

이들은 다 같이 성왕(聖王)이었고 모두가 성제(聖帝)의 종성이라 일컬었다. 

같은 자손은 본처에서 난 맏아들을 따랐고 다른 계통은 혹 이리저리 갈라졌으되 모두가 천명(天明)의 명(命)을 받지 않음이 없이 천하에 군림(君臨)하였으니 근원이 길고 또 후사가 먼지라 측량하여 알기는 어렵다.

마치 양한(兩漢)에서와 같이 여러 황제 가운데 적자(嫡子)가 아닌 사람이 많고 위(魏)ㆍ진(晋)ㆍ송(宋)ㆍ제(齊)는 인척[瓜葛]이 뒤를 이었으니 이런 예(例)로 보면 이치가 진실로 그러하다.

이제 처음으로부터 그 수효를 들어 보면 무릇 8만 4천2백53왕(王)이며 뒤에 보살에까지 이른다.처음의 33왕은 속산(粟散)일 뿐이요, 

다음의 열 분은 전륜성왕이며 그의 종족이 8만 4천2백10왕이다. 

또 종주(宗主)에 열 분의 전륜성왕의 수(數)를 더하면 동일하다.

보살의 할아버지, 

사자협왕(師子頰王)에게는 네 아들이 있다.

첫째의 이름은 정반(淨飯)이다.『본기경(本起經)』에서는 백정(白淨)이라 하였으며, 

어떤 경에서는 다만 정(淨)이라고만 하였다.

둘째는 이름이 백반(白飯)이다.『십이유경(十二遊經)』에서는 반(飯)이라는 글자가 없으며 네 분의 왕도 역시 그러하다.

셋째는 이름이 곡반(斛飯)이다.

넷째는 이름이 감로반(甘露飯)이다.경에서는 그렇게 말하였다.

정반왕에게 두 아들이 있었으니 장자(長子)는 실달(悉達)곧 보살임이요, 

차자(次子)의 이름은 난타(難陁)이다.

백반왕에게 두 아들이 있었으니, 

장자의 이름은 조달(調達)이요 차자의 이름은 아난(阿難)이다.

곡반왕에게 두 아들이 있었으니, 

장자의 이름은 마하남(摩訶男)이요 차자의 이름은 아나율(阿那律)이다.

감로반왕에게 두 아들과 한 딸이 있었으니, 

장자의 이름은 사바(裟婆)요 차자의 이름은 발제(跋提)이며딸의 이름은 감로미(甘露味)이다.

『십이유경』에서 말하였다.

“조달은 4월 7일 식사 때에 낳았고 키는 한 길[丈] 다섯 자 네 치이고부처님의 종형제(從兄弟)이며 둘째 숙부의 아들, 

보살은 4월 8일의 명성(明星)이 나올 때에 탄생하셨고 키는 한 길 여섯 자이시며, 

부처님의 아우 난타는 4월 9일에 태어났고 키는 한 길 다섯 자 네 치이고, 

아난은 4월 10일에 태어났으며 키는 한 길 다섯 자 세 치이다.부처님의 종제(從弟)이며 형(兄)은 바로 조달이다.”





3. 소탁방토(所託方土)

여기에서 여섯 가지의 뜻으로써 방토(方土)의 그 중앙을 결정한다.


1) 징명(徵名)

내가 들으니 부처님은 큰 성인[大聖]이라 일컬어지고 근기와 가르침이 보통이 아니거늘 그 뜻이 어찌 변두리의 비루한 방토(方土)에서 바르게 교화하겠는가? 

그런 까닭에 염부(閻浮)라는 한 지역은 주변으로 네 개의 바다와 잇닿아 있고 바다에 둘러싸인 주(洲)인지라 이치로 보아서 한가운데에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과경(因果經)』에서 말하였다.

“보살이 옛날 도솔천(兜率天)에서 보처(補處)의 행을 설할 적에 시운(時運)이 아직 이른지라 내려가서 부처님이 되어야 하였으므로 모든 국토에서 어디가 중앙에 처해 있는가를 관찰하시다가 곧 가비라국(迦毘羅國)이 가장 토지의 중앙인 것을 아셨다.”

또 『본기경(本起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의 위신(威神)은 지극히 높고 지극히 중한지라 변두리 땅이나 경사(傾斜)진 데서 태어날 수 없었다. 

이 가비라성(迦毘羅城)은 3천의 해ㆍ달ㆍ천지의 중앙이었으며 옛날의 부처님께서도 모두 여기서 출현하셨다.”

또 『구사론(俱舍論)』에서 말하였다.

“섬부주(剡浮洲) 가운데이 주(洲)를 혹은 염부(閻浮)라고 하고 섬부(剡浮)ㆍ섬부(贍部)라고도 하는데 모두가 음(音)을 취한 것이므로 같지 아니하다.에 금강좌(金剛座)가 있는데 위는 땅과 가지런하고 아래는 금강륜(金剛輪)의 가장자리에 닿았으며 이 자리에 보살이 앉아서 금강정(金剛定)에 들어가 각도(覺道)를 이루게 된다. 

이 자리를 제외한 땅은 훌륭하지 않으며 오직 이 주(洲)에 세 방토가 있으니 부처님이 거기에 가서는 성도(成道)하지 않으신 분이 없는 까닭이다. 

그 까닭은 진실로 사람들이 지극히 뛰어난 성인이라 부르고 도덕(道德)이 높고 높으신지라 사람이나 하늘의 모든 이들이 회향(廻向)하지 않음이 없어서이다. 

그러므로 이 수승한 자리에 의탁하여 만물을 교화하는 좋은 인연을 나타낸다.”

진단(震旦)에 이르러서는 한 주(洲)의 가장자리요, 

바다의 오른쪽에 있어서 헌원(軒轅)ㆍ오악(五岳)ㆍ곡지(曲指)ㆍ숭산(崇山)의 중앙이 된다. 

그렇다면 주단(周旦:周公旦)의 사물의 많고 적음을 추측함[揆日圭程]과 경분(景分)으로도 미처 다 헤아리지 못하였고, 

한(漢)의 철(徹)이 높은 데서부터 모든 하(夏)로 벌여 펴 도와도 해[年]가 있게 되었으니 국한하여 중원(中原)이라 부르고 치우쳐서 중국(中國)이라 일컬은 것이다.

이 일로써 고찰한다면 중앙을 정한다는 뜻은 저절로 없어진다. 

원래 중앙이라는 이름을 세우는 것은 변두리에 상대하여 일컬은 말이다. 

신주(神洲)는 동쪽으로 바다에 막혀 있고 세 방면에 대해서는 들은 것이 없으니 이렇다면 변두리라는 뜻이 저절로 드러나며 분석을 기다릴 것도 없다. 

비록 사해(四海)가 폐백을 바치고 온갖 나라가 마음으로 기뻐한다 하더라도, 

이에 한 조정을 과장하게 장식하는 것이지 끝내 실로 천 대(代)를 등지게 된다.

지금은 섬부주의 한 지역으로써 가운데를 총령(葱嶺)으로 나누어 서쪽은 대하(大夏)라 하여 5천축(天竺)이 통괄하고, 

동쪽은 적현(赤縣)이라 하여 5악(岳)이 통괄한다. 

비록 양쪽 방토가 모두 다섯 가지 일에는 반드시 치우친 중앙이라 하더라도 여기의 방토는 동쪽에 있고 저기의 국토는 바른 데[正]에 있다.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염부도(閻浮圖)』에서 말하였다.

“총령의 서쪽은 향산(香山)에 의지했고 동남쪽은 길게 연이어 뻗쳐서 촉부(蜀部)이 산의 모양은 서북쪽과 동남쪽은 모서리를 잡아 묶어서 죽 늘어선 것과 같으며 겨울이나 여름이나 눈이 쌓여 있다에 닿았기 때문에 이 산의 동쪽을 적현(赤縣)이라 한다. 

비록 중국(中國)이 사악(四岳)을 국한해 이름붙인 것이라고 하더라도대략 『음양택경(陰陽宅經)』의 예를 들면 무릇 집 안[宅中]의 주인은 범하지 말 것이니 이것 역시 한 집안에서도 꺼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산의 서남쪽에 닿아 있어서 이름하여 천축(天竺)이라 한다.”

『산해경(山海經)』에서 말하였다.

“신독(身毒)의 나라에는 헌원씨(軒轅氏)가 살고 있다.곽박(郭璞)의 주(注)에서 ‘곧 천축이다’라고 하였다. 

그 토지는 저절로 나뉘어 다섯 나라가 되었으니 중천축국(中天竺國)이 하늘과 땅의 중앙이다.”

이름이 이미 변두리가 아니며 사방의 끝이 바로 끊어져 있으니, 

이런 이름에 근거하여도 꼭 중앙이라는 뜻이 있게 된다.


2) 약량(約量)

두 번째는 이수(里數)로써 양(量)에 결부시켜 밝히겠다.

섬부주(剡浮洲)라 함은 수미산(須彌山) 남쪽에 있는 한 지역의 도읍 이름이다.

『성론(聖論)』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물이 당시에 지나는 길은 동서(東西)로 24만 리요 남북(南北)으로 28만 리이다. 

또 사람과 사물이 살고 있는 데에 의거하면 동서로 11만 6천 리요, 

남북으로도 대략 동일하다.”

이제 중천(中天)으로써 정중(正中)을 삼는다면 사방이 서로 막혀 있는 것이 각각 5만 8천 리요, 

이 방토(方土)의 동쪽은 바다 끝으로 막혔으며 세 방향[三方]은 더욱 멀기에 곧 이런 일로써 구하여 본다면 어찌 비교가 될 수 있겠는가?

또 섬부주라 함은 바로 나무의 이름[樹名]이다. 

수미산왕(須彌山王)은 대해(大海)의 한가운데이며 그 사방에 4주(洲)가 있고 이 주가 곧 1천하(天下)이다. 

이 나무는 남주(南洲)의 북쪽에 나 있고 가지는 큰 바다에 뻗쳐 있으며 바다 밑에는 금(金)이 있는데 그 금을 염부(閻浮)라 하고 광명이 물 위에 떠 있다. 

때문에 이 주의 이름은 그 금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당(唐)나라의 번역에 의하면 염부는 으뜸가는 금[上勝金]이요, 

제(提)는 바로 주라는 말이어서 이것은 곧 상승주(上勝洲)라는 의미이다. 

대하(大夏)의 천축은 그 중심에 있다.


3) 변시(辯時)

세 번째는 시서(時序)로써 밝히겠다.

저 음양(陰陽)으로 보면 추위와 더위는 지방에 따라 일어나 작용한다.

우리 나라의 신주(神洲)는 더위와 서늘한 것이 같지 않아서 남쪽은 풍토병인 장기(瘴氣)로 인한 병이 걸릴 만큼 더위가 아주 심하고, 

북쪽은 한창 덥다가 얼음이 언다. 

비록 꽃이 조금은 있으나 끝내 크게 들어 보일 것이 못 되거니와 중천축국은 겨울이나 여름이나 언제나 알맞아서 지독한 추위나 더위가 없으며 풀과 나무는 언제나 무성하고 근심할 만한 큰 물이나 서리가 없다. 

대개 변두리의 척박한 곳이 아니므로 바람이나 비의 들쑥날쑥함이 없으며 음양이 조화하여 편안한지라 만물이 독(毒)을 멈추게 된다.

그러므로 『서역도경(西域圖經)』에서 말하였다.

“5천축국은 북쪽은 설산(雪山)에 미치고 남쪽은 대해(大海)에 이르는 6만여 리요, 

시내와 못이 평탄하여 다시는 산이나 언덕이 없고 다만 하수(河水)만이 갈라져 흐르며, 

숲이나 나무들이 촘촘하게 늘어서 있거니와 그 밖의 세 방향은 산언덕과 붙어서 끊어지지 않고 죽 이어졌으며 치우치게 동쪽으로 시내가 있다.”

진실로 세계가 처음 만들어질 때 중생의 업력(業力)으로 말미암아 이런 좋은 땅을 결구(結搆)하게 되어 부처님의 출현을 기다리게 되었다. 

곧 이런 일로 모든 것을 구하여 본다면 중앙이 아니고 무엇이라 하겠는가?

『고승전(高僧傳)』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옛날 진(晋)나라 하승천(何承天)은 조짐을 예언하는 데 아주 밝아서 해시계[晷儀]의 그림자를 아는 데에는 둘도 없는 분이었는데 지엄(智嚴) 법사와 함께 치우친 것과 바른 것을 논하고 있었다. 

지엄이 말하였다.

‘내가 일찍이 천축을 돌아다닐 적에 성의(聖儀)를 빠짐없이 뵈옵고 시각[晷剋]에 이르러서는 자못 생각한 바가 있었습니다. 

중천축국을 처음부터 끝까지 죄다 보았는데 하지(夏至)에는 방위가 한가운데가 되어 그림자가 없었으니 진실로 여기가 땅의 한 중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의 낙양(雒陽) 남쪽에서 측정(測定)하는 영대(影臺:기상대)에는 하지가 되어서도 끝내 여분(餘分)이 있기 때문에 대하(大夏)가 아니고 다만 동하(東夏)라고 할 뿐입니다.’

승천은 이 말을 듣고 아무런 대항하는 말이 없었다.”


4) 종세(從勢)

네 번째는 수원(水源)으로써 밝히겠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사해(四海)로써 구렁의 물이 흘러내려가 끝나는 데에 있다. 

염부주 가운데에는 큰 향산(香山)이 있으니 곧 곤륜(崑崙)의 다른 이름이다. 

이 산은 유독 높이가 주(洲) 안에서는 제일 높으며 그 산의 남쪽에 못이 있는데 이름이 아뇩달(阿耨達)이니 이것을 바로 무열뇌지(無熱惱池)라고 한다.

여덟 가지 공덕(功德)을 갖추었고 큰 용(龍)이 살고 있으며 수부(水府)라고 한다. 

사방에서 하나씩의 강물이 나와서 사해로 흘러들어간다. 

물은 높은 데의 형세에 따라 아래로 흘러내려가기 때문에 거기는 높고 여기는 낮은지라 중앙과 변두리가 결정된다.

우리 나라 황하(黃河)의 근원이 거기에서 나온다. 

때문에 『이아(爾雅)』에서 말하였다.

“황하는 곤륜(崑崙)의 구렁에서 나오며 색깔이 희다.”

곽박(郭璞)의 『도찬(圖贊)』에서도 말하였다.

“곤륜의 3층(層)을 천주(天柱)라 하는데 진실로 여기만이 황하의 근원이며 물의 영부(靈府)이다. 

『서경』의 「우공(禹貢)」편에서 하수의 발원지는 적석(積石)에서부터라고 하였으니, 

그것은 땅 속으로 스며 흐르는 물이 솟아 나오는 것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므로 물은 높은 데서 내려가는 것이므로 높은 데가 중앙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하도(河圖)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곤륜산(崑崙山)에서 동남쪽으로 5천 리 되는 데를 신주(神州)라 하고, 

또한 적현(赤縣)이라 하며 곤륜을 천주(天柱)라 한다.”

이치로 보아 한쪽으로 치우친 것은 아니지만 여기를 동남(東南)이라 한 것은 분명히 틀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이형(李夐)이 서쪽으로 곤륜을 달릴 적에 또한 조종(朝宗)이라 한 것이 근거가 있어서요, 

황제(皇帝)가 꿈에 화서(華胥)에서 놀 적에 ‘그 일에 있어서는 중앙으로부터 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서도 또 분명히 나타난다.왕소(王邵)는 화서국(花胥國)이란 곧 천축의 나라라고 해석하였다.


5) 자승(藉勝)

다섯 번째는 영승(榮勝)한 일로써 밝히겠다.

천하의 큰 보배는 임금으로서 존귀한 자이니 전륜왕(轉輪王)이 바로 그 사람이요, 

영혼을 가진 큰 성인이면서 4생(生)을 인도하는 이는 법왕(法王)이 바로 그분이시다.

주(洲) 중앙의 자리는 이 두 분의 왕이 오르시는 것이니 그 중앙에 있으면서 먼 데까지 제복(制伏)한다는 것은 이치로 보아 당연하다. 

그 밖의 작은 성인이나 작은 왕은 그의 근기에 따라 바르게 다스리고 그 국토에 맡겨 교화하게 하는지라 치우치다거나 바르다는 것을 논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토지와 산천은 다 같이 사람의 의보(依報)이니, 

사람이 수승하다거나 하열하다는 데에 따라 의보도 반드시 정밀하거나 거칠거나 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중천축국(中天竺國)은 처소가 이미 높고 화려한지라 두 왕의 복의 과보로 받게 된 곳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우리 나라의 성제(聖帝)도 역시 존경할 바가 있으나 5제(帝)와 3왕(王)은 계전(鷄田)의 땅에 미치지 못하였고, 

진(秦)ㆍ한(漢) 이후에야 비로소 서역(西域)이라는 방토를 듣게 되어 드디어 감영(甘英)과 박망(博望)으로하여금 설령(雪嶺)을 따라가게 하였으며, 

곽공(霍公)과 정원(定遠)이 앞뒤를 이어 오르고 밟게 되었으나 대개는 총하(葱河)의 북쪽을 지나고 향산과 설산의 남쪽으로는 조금만 나갔다.

그런 까닭에 철문(鐵門)의 서쪽은 막혀서 실로 대원(大宛)과 월지(月支)가 고작이었는데 본래 이들은 오랑캐[獫玁]의 마을로 문자도 없는 나라였다. 

어찌 함부로 중앙의 방토라고 일컬으면서 교(敎)가 있는 지방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이 때문에 하서(河西)의 4군(郡)은 휴도(休屠)가 살고 있었으며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개척하고서야 비로소 지금처럼 있게 되었다.


6) 고문(考文)

여섯 번째는 문자(文字)로써 밝히겠다.

우리 나라의 방언(方言)은 검토하고 찾아볼 책[本]이 없다. 

문자(文字)로 풍속이 열린 것은 옛날의 황제[古皇]로부터 시작되었다. 

혹은 새 발자국을 보고 문자를 만들기도 하였고, 

혹은 올챙이[科斗] 같은 글자 모양을 만들기도 하였으며, 

혹은 사주(史籒)가 전자(篆字)를 만들기도 하였고, 

혹은 정막(程邈)이 예서(隸書)를 만들기도 하였으며, 

육문(六文)으로 빛나는 모양을 드날리기도 하고, 

팔체(八體)로 환하게 드러나게도 하였다.

모든 사책(史冊)을 살펴보아도 일정한 지침을 얻기 어려운지라 고씨의 논[顧氏之論]을 상고하고 또한 보공의 편[寶公之篇]을 붙이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삼창(三蒼)』이나 『삼아(三雅)』는 『설문(說文)』을 통틀어 모은 것인데 자본(字本)은 9천 자로 된 『자원(字源)』이 가장 극치에 이르렀다. 

『자림(字林)』ㆍ『자통(字統)』ㆍ『자원(字苑)』ㆍ『계원(桂苑)』으로 세상에 2만 자나 늘어나면서 물이 흐르듯 점차로 번성하게 된 것이니, 

또한 인정(人情)으로 생각한다면 그 사실을 증명할 만한 근거는 없다.

천축(天竺)의 음자(音字)는 한결같이 상천(上天)에 준(准)한다. 

하늘을 28부(部)로 나누어서 다 같이 범왕(梵王)을 존숭하여 주(主)를 삼는다. 

그런 까닭에 세계가 처음 성립할 적에 사람이나 물질이 모두 텅 비었는데 범천(梵天)이 내려와서 드디어 정(情)을 가진 품류가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범천은 중생이 있게 된 원시(元始)이며 음자도 역시 그것에 따라 모이게 되었다.

지금의 범음(梵音)과 범문(梵文)은 5천축이 궤칙(軌則)을 같이하며 범부와 성인이나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으므로 하나의 음(音)으로 연설한 바는 오직 범언(梵言)을 지칭할 뿐이며 백성들이 저마다 이행하는 것은 이에 방소의 종류에 따랐다.

우리 나라에서 기술한 호어(胡語)와 호서(胡書)라는 것은 곡지령(曲指嶺) 북쪽의 36번국[蕃]에 속하며 실로 오랑캐는 대하(大夏)에 참예하지 못했으니 때문에 대원(大宛)과 월지(月支)의 글과 말은 각기 달라 천축과는 통하지 않았다. 

부처님께서 태어나신 땅과는 서로 수만 리가 떨어졌으므로 뒤섞일 수가 없었다.

대설산(大雪山)의 남쪽 5천축의 나라는 글과 말이 하늘을 이어받으면서 만대(萬代) 동안 항상 정해져 있었으며 지키는 바가 이미 수승한지라 변두리가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거니와 진단(震旦)이 글과 말은 하방(下方)의 벌레나 새를 본떴다. 

혹은 범부의 생각에서 나와 일찍이 전거도 없었으니 그 뜻은 중앙이 아니다.





4. 법왕화상(法王化相)


법왕께서 하강하신 자취를 밝힌 것이다.

근본을 추구하건대, 

석보(釋譜)가 일어나는 바는 법왕께서 하강하심에 있을 뿐이다. 

그 때문에 대선(大仙)이 나눈 피가 녹아 합쳐서 형상을 이루었고 이로 말미암아 후사를 잇게 되어 비로소 석종(釋種)이 이어지게 된 것이다.

법왕이 자취를 내리시어 인방(忍方)에 임하여 굽어보시면서부터 중생에게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이 교화와 깨우침을 우러름으로써 25유(有)로 하여금 생사(生死)의 인(因)을 끊게 하고 98사(使)로 하여금 계속해서 끌어당기는 업연을 끊게 하여 나란히 삼계(三界)를 초월하고 다 함께 1승(乘)에 올라서도록 품어 기르면서 대조(大造)의 은혜를 입히고 덕이 극치에 이른 사람은 부지런히 힘쓸 생각을 이끌었다.

때문에 이 거룩한 자취를 드리우고 이 신령한 거동을 펴면서 무겁게 혼몽한 이로 하여금 그 현묘한 기틀을 움직이게 하고 유랑하는 식(識)으로 하여금 그 표류하는 분노를 고요하게 하여 바야흐로 도(道)에 들어가 행적을 널리 펴고 또한 유(有)의 첫 문에서 벗어나게 한다.

그러면서도 일에는 그윽한 연[冥緣]이 모였고 뜻[義]은 신령한 운[神運]에 부합되나니, 

또한 하늘이 준 것이 아니요 진실로 이것은 사람의 꾀라고 생각된다. 

다만 복되고 상서로운 기운이 어리고 경사스러운 길상(吉祥)이 한데 뒤섞여 천지(天地)를 눈부시게 하고 유명(幽明)을 이끌어 빛나게 하나니, 

그런즉 문물(文物)은 만고(萬古)에 빛나고 성명(聖明)은 사람이 보고 듣는 것보다 높을 뿐이다.

그런 까닭에 큰 계획을 문서로 나열하여 그로써 홍범(弘範)을 보게 되었고 경(經)에 이르러서는 8상(相)을 전하고 자취가 5생(生)으로 보이면서 스스로 교(敎)의 문(門)을 맺게 되었다.

이제 대략적인 문[闕]을 적어 보이겠는데 이것은 다만 사연을 묶어 통틀어 들어서 계보의 근원을 보인 것이다.


1) 처도솔천적(處兜率天迹)

『인과경(因果經)』에서 말하였다.

“석가여래(釋迦如來)께서 아직 성불하지 않으셨을 적에 대보살(大菩薩)로서 이름은 선혜(善慧)라 하였고, 

공행(功行)이 원만하게 되어 지위가 보처(補處)에 올라 도솔천에 태어나서는 이름을 성선(聖善)이라 하였다. 

모든 천왕들을 위하여 보처의 행(行)을 설하셨고 또한 시방에 몸을 나타내어 설법하셨으며 때의 운[期運]이 장차 이르러 내려오시어 부처가 되어야 했다.”

2) 강염부주적(降閻浮洲迹)


(1) 흥념(興念)

『보요경(普曜經)』에서 말하였다.

“보살이 도솔천에 머물러 계실 적에 거기에 있던 66억의 모든 하늘들이 다 함께 의논하였다.

‘지금 보살께서 내려가려 하시는데 어느 나라에 나셔야 될까요? 

부모가 진실하고 바르면서 종족(宗族)이 화목하며 위덕(威德)이 굳세고 용맹하며 지성(志性)이 넓고 청아해야 합니다.’

저마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어느 나라든 다 있을 것입니다.’

곧 보살께 물었다.

‘어느 나라에 강신(降神)하시렵니까?’

보살은 대답하였다.

‘그 나라의 종성(種姓)에게 예순 가지 덕이 있어야 일생보처(一生補處)는 거기에 강신하느니라.글이 많으므로 기재하지 않는다. 

지금의 이 석종(釋種)은 성대하고 오곡(五穀)이 풍성하며 인민들은 번화하여 서로 덕의 근본을 받들며 아버지는 성품이 어질고 어머니는 생각이 정량(貞良)하며 전생 5백 세(世) 동안에 보살의 어머니가 되었으니 가서 강신하여 그의 포태(胞胎)에 들 것이니라.’”

『인과경(因果經)』에서 말하였다.

“또 다섯 가지 일을 관(觀)하게 된다. 

첫째는 중생으로서 도(道)를 받아 성숙하였는가, 

아직 성숙하지 못했는가를 관하여 곧 모두가 이는 처음 발심(發心)하여서부터 성숙한 자임을 안다. 

둘째는 시기[時]를 관하여 곧 청정하고 미묘한 법을 받을 수 있음을 안다. 

셋째는 어느 나라가 땅의 중심에 처하여 있는가를 관하여 곧 이 삼천세계(三千世界)의 염부제 안에서 가비라국이 가장 땅의 중심에 있음을 안다. 

넷째는 어느 성바지가 귀하고 흥성한가를 관하여 곧 석가(釋迦)가 제일이며 감자(甘蔗)의 후예이며 성왕(聖王)의 후손임을 안다. 

다섯째는 전생의 인연을 관하여 곧 백정왕(白淨王)과 과거에 인연이 있고 바르고 진실한 부모가 될 수 있음을 알며, 

또 그 어머니의 수명이 다 되어서 열 달을 채우고 나면 7일 만에 곧 수명이 다할 것임을 안다.

보살은 그때에 모든 하늘들을 널리 이롭게 하기 위하여 짐짓 다섯 가지 쇠퇴한 상(相)을 나타내었다.그 글은 모든 하늘의 쇠퇴한 상과 같다.

또 다섯 가지 상서를 나타내었으니, 

첫째는 광명이 대천(大千)세계를 비추고, 

둘째는 대지(大地)가 열여덟 가지 모양으로 진동하며, 

셋째는 악마의 궁전을 숨어 가리게 하고, 

넷째는 세 가지 광명이 밝지 않으며, 

다섯째는 8부(部)가 놀란 것이다. 

곧 이렇게 모든 하늘들이 이 양쪽의 조짐을 보고 자세히 보살에게 묻자 보살은 그때 대답하였다.

‘이 하늘을 버리고 염부제에 태어날 것이다.’

모든 하늘들은 들은 뒤에 다 함께 오래 머물러 계시기를 바라자 보살은 대답하였다.

‘태어나 죽지 않는 이가 없고 사랑하는 사람과는 만났다가 반드시 이별하며 모든 행(行)은 무상(無常)하여 적멸(寂滅)을 즐거움으로 삼아야 하느니라. 

나는 석종(釋種)으로 태어나서 출가하여 성불한 다음 장차 중생들을 위하여 큰 법의 깃발을 세워 번뇌의 바다를 모두 마르게 하고 8정도(正道)를 청정하게 하며 큰 법회(法會)를 베풀어서 모든 하늘과 사람들을 청할 것이므로 너희들도 역시 법의 음식을 같이 먹게 될 것이니라.’

모든 하늘들은 듣고 나서 다 함께 기뻐하면서 태어나기를 기원하였다.”


(2) 입태(入胎)

『보요경』에서 말하였다.

“보살이 하늘들에게 물었다.

‘어떠한 형모(形貌)로써 어머니의 태에 강신하면 되겠느냐?’

범천(梵天) 강위(强威)가 아뢰었다.

‘범전(梵典)에서 존숭하는 바는 코끼리 형상이 제일입니다. 

왜냐하면 세 가지의 짐승이 물을 건널 적에 토끼와 말은 미처 깊고 얕은 것을 알지 못하나니 그로써 이승(二乘)은 법의 근본에 통달하지 못한 이에 비유하는 것이며, 

코끼리는 걸음이 바닥에까지 닿기에 대승(大乘)으로 삼계를 환히 통달해 아는 이로 비유되기 때문입니다.’

곧 늦봄 초여름중국(中國)은 12월 16일을 초봄으로 삼고 4월 16일을 여름으로 삼으며 세 철이 각각 넉 달씩이다.에 나무에 꽃이 피기 시작하고 불수(沸宿)가 내려가야 할 적에 흰 코끼리로 변하여 모든 감관[根]이 고요히 안정되어서 햇빛을 따라 드러났으며 행하는 것이 왼쪽이 아닌 어머니의 오른 겨드랑이로 내려가셨다.”

『서응(瑞應)』과 『수행(修行)』의 두 경에서는 모두 말하였다.

“변화하여 여섯 어금니를 지닌 흰 코끼리를 타고 해의 정기를 쓰고 도솔천궁[兜率宮]을 출발할 적에 모든 하늘들이 보좌하여 허공 가운데에 가득 찼으며 음악을 울리고 꽃을 뿌리며 큰 광명으로 널리 비추면서 4월 8일 명성(明星)이 나올 때 어머니의 태에 강신(降神)하였다. 

부인(夫人)은 자다가 꿈에 사람이 코끼리를 타고 오른 겨드랑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는데, 

그 그림자가 밖으로 나타난 것이 마치 유리(琉璃)에 있는 것 같았으며 몸이 편안해지고 마음이 즐거워졌다. 

깬 뒤에 자세히 설명하자 왕은 상서로운 조짐으로 보고 점을 잘 치는 이들을 소집하여 물어보자 모두 말하기를, 

‘이 태(胎)는 성자(聖子)로서 마땅히 전륜왕이 될 것이며 만일 출가하면 반드시 정각(正覺)을 이루겠습니다’라고 하였다.태 안으로 들어간 달[月]이 너무 이른 것이 의심된다. 

그때에 모든 하늘들은 모두가 보살이 이미 왕궁(王宮)에 나셨음을 보고는, 

‘장차 불도(佛道)를 이루게 되면 우리들은 권속이 되어 법의 교화를 받아야 한다’고 하고, 

그때에 무릇 99억의 모든 하늘들이 내려가 인간 세상에 태어났다. 

또 타화천(他化天) 이하에서 인간 세상에 태어난 수효도 한량없었고 또 색계(色界)의 모든 하늘들도 도(道)를 받기 위하여 인간 세상으로 내려가 태어나서 선인(仙人)이 되었다.”


(3) 주태(住胎)

『본기(本起)』에서 말하였다.

“보살이 태 안에 계셨을 적에 부인은 여섯 가지 바라밀을 수행하였고 하늘의 음식이 저절로 내려왔으며, 

삼천세계는 언제나 광명으로 환히 밝았고 병든 자들은 나았으며 3독(毒)은 그치고 쉬었다. 

보살 자신은 뼈 마디와 상호(相好)가 모두 다 완전히 갖춰졌으며 가고 서고 앉고 눕는 데에 아무런 장애가 없었다. 

또 이른 아침에는 색계의 모든 하늘들을 위하여 설법하였고 한낮에는 욕계(欲界)에게, 

저녁때에는 귀신(鬼神)에게 설법하셨으며, 

밤에도 역시 세 때[三時]에 바른 법요(法要)를 설하여 중생을 이익되게 하셨다.”

『보요경』에서는 말하였다.

“태 안에 있는 열 달 동안에 36재(載)의 하늘과 사람들을 깨우치고 교화하여 삼승(三乘)의 거룩한 도(道)를 세우셨다.”


3) 현생탄영적(現生誕靈迹)


(1) 왕림엄식상(往林嚴飾相)

『보요경』에서 말하였다.

“때에 왕은 ‘잉태한 아이의 해산달이 다 찼을 것이다’라고 생각하였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때에 부인이 왕에게 아뢰기를, 

‘동산으로 나가서 구경하고 싶습니다’라고 하자, 

곧 람비니동산[藍毘尼園]을 장엄하라고 칙명을 내렸으니 꽃ㆍ열매ㆍ샘물ㆍ못과 난간이며 계단을 칠보로 장식하였으며 난새ㆍ봉새의 여러 새들이 그 안에 날아들었고, 

번기ㆍ일산ㆍ음악ㆍ기예와 향과 꽃들이 빠짐없이 가득 채워졌으며 10만의 보련(寶輦)과 4병(兵)이 바깥을 방비하였고 아름다운 8만 4천의 채녀(婇女)들이 부인의 시중을 들었다. 

또 동녀(童女) 8만 4천을 골라서 향과 꽃을 가지고 먼저 그 동산으로 가게 하였고 또 칙명으로 신하의 부인들도 모두 시중을 들게 하였다. 

부인은 그때에 곧 보배 수레에 올라 인도하고 따라 숲으로 갔으며 허공에 가득 찬 8부(部)들도 역시 같이 따라갔다.”

『대화엄(大華嚴)』에서 말하였다.

“숲 속에 상서로운 조짐이 나타났으니 모두 열 가지가 있으며, 

나아가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는 배꼽 속에서 광명을 놓아 이 숲을 널리 비추어 부처님께서 지금 오신다는 것을 나타내셨다.”


(2) 정탄영의상(正誕靈儀相)

『보요경』에 말하였다.

“왕후가 해산하려 할 적에 운모거(雲母車)를 타고 인비(燐鞞)나무에서 놀다가 사자좌(師子座)에 앉자 3천의 국토가 여섯 가지로 진동하였으며 사천왕이 수레를 끌고 범왕이 앞에서 인도하였으며 나무는 그를 위하여 가지를 구부렸다.”

경에 말하였다.

“열 달이 다 차고 4월 8일에 해가 처음 떠오를 적에 꽃과 잎이 무성한 무우수(無憂樹) 아래에서 문득 오른손을 들어올려 끌어당겨 잡자 보살이 조금씩 오른 겨드랑이로부터 나왔다.”

『불소행찬(佛所行讚)』에서 말하였다.

“옛날 왕이 태어날 적에 어떤 이는 넓적다리로부터 나오기도 하였고, 

손에서 나오기도 하였으며, 

정수리에서 나오기도 하였고, 

겨드랑이로부터 나오기도 하였는데, 

나는 오른 겨드랑이로부터 나오리라.”

『대선권경(大善權經)』에서 말하였다.

“보살은 포태(胞胎)를 통하지 않고 한 번에 성불하려 하였으나 사람들이 의심하여 이러한 변화를 두려워하고 법을 받지 않게 될 것을 막기 위하여 짐짓 태(胎)를 받아 낳는 것을 나타내셨다.”

경의 앞뒤에 실린 내용은 모두가 의심을 없애고 믿음을 내게 하는 것이나 문장이 많으므로 기재하지 않는다.지금 4월 8일에 태 안으로 들어가서 또한 이 달의 8일에 낳았다면 곧 열두 달 동안 태 안에 있었던 것이 된다.


(3) 발호현덕상(發號顯德相)

경에서 말하였다.

“그때 나무 아래에 일곱 줄기의 칠보로 된 연꽃이 나 있어서 크기는 마치 수레바퀴만 했는데 보살은 그 연꽃 위에 떨어졌으며 부축하여 모시는 이가 없는데도 스스로 일곱 걸음을 걸어갔다.”

『대선권(大善權)』에서 말하였다.

“7각(覺)에 응하기 위하여 짐짓 일곱 걸음을 걸었다.”

『열반경(涅槃經)』에서 말하였다.

“시방의 방향으로 각각 일곱 걸음씩을 걸었다.”

경에서 말하였다.

“곧 오른손을 들어 올리고는 말하였다.

‘나는 온갖 천상과 인간 가운데서 가장 존귀하고 가장 뛰어나며 한량없는 생사(生死)를 다하였으니 온갖 하늘과 사람들을 이롭게 하리라.’”

『대선권』에서 말하였다.

“손을 들어 상(相)을 나타낸 것은 외도(外道)가 스스로 높은 체하여 반드시 악도(惡道)에 떨어지는 것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본기』에서 말하였다.

“천상과 천하에 오직 나만이 높을 뿐이다. 

삼계(界)가 모두 괴로운 것이어늘 어찌 즐거워할 만한 것이 있겠느냐?”


(4) 제천봉시상(諸天奉侍相)

경에서 말하였다.

“때에 사천왕이 하늘의 비단으로 받아 모시어 보배 안궤[几] 위에 놓았고 제석(帝釋)이 일산을 잡았으며 범왕(梵王)이 흰 불자(拂子)를 가지고 좌우에 모시고 섰다. 

난타(難陁)용왕의 형제는 공중에서 물을 토하면서 따뜻한 물과 시원한 물로 몸을 목욕시켰다.”

『보요경』에서 말하였다.

“제석과 범왕이 향을 뿌렸고 아홉 마리의 용이 향수를 내려 몸을 목욕시켰다.”

『수행(修行)』에서는 말하였다.

“물의 왼쪽 것은 따뜻한 물이고 오른쪽은 찬물이었으며 옷을 벗어서 몸을 감쌌다.”


(5) 현대서응상(現大瑞應相)

경에서 말하였다.

“태자의 몸은 황금빛으로 32상(相)의 광명이 대천(大千)을 비추었으며 천ㆍ용 등 8부(部)는 공중에서 음악을 울리고 노래로 부처님의 덕을 찬송하였으며 향을 사르고 꽃을 뿌렸으며 우의(雨衣)와 영락(瓔珞)이 어지러이 떨어져 내렸다. 

그때에 부인은 나무 아래에 편안히 머물러 있었는데 갑자기 네 개의 우물이 생기면서 여덟 가지 공덕의 물이 채워졌으므로 차례대로 씻고 양치질하였다. 

모든 야차왕(夜叉王)은 에워싸서 수호하였고 온갖 하늘과 사람들은 종지(種智)로 빨리 부처님 도를 이루고 일찍 법륜(法輪)을 굴려 중생을 제도하고 해탈하게 할 것을 찬탄하였으나 오직 마왕(魔王)은 제자리에서 안절부절 못하였다.”

그때 서응(瑞應)이 서른네 가지나 더 내렸으나 글이 많으므로 기재하지 않는다.

“그때에 채녀(婇女)들은 하늘의 비단 모전으로 태자를 싸서 안고 부인에게로 갔으며 또 스물여덟 대신(大神)들이 네 귀퉁이에서 받들어 보호하였다. 

하인[靑衣]들이 공중으로 돌아가서 왕에게 기특한 상(相)을 아뢰자 왕은 4병을 장엄하게 차리고 억(億)의 석씨[釋姓]들과 인도하고 따르면서 동산으로 들어가 상(相)이 특이함을 보고는 기쁨과 두려움을 함께 품었는데 모든 석씨가 하루 동안에 5백의 사내아이를 낳았다.”

『수행』에서 말하였다.

“나라 안의 장자(長者) 8만 4천이 저마다 이런 사내아이를 낳았고 마굿간의 말들은 망아지 8만 4천 마리를 낳았으며 그 한 마리가 특이하여 털이 희고 머리칼이 붉었다.”

『본기』에서 말하였다.

“종의 이름은 차닉(車匿)이요, 

말의 이름은 건척(犍陟)이었다. 

코끼리와 말은 흰 새끼를 낳았고, 

소와 양은 다섯 가지 빛깔의 양새끼와 송아지를 각각 5백 마리씩 낳았으며 5백 명 하인들도 저마다 창두(蒼頭)를 낳았다.”

『보요경』에서 말하였다.

“5천의 역사(力士)를 낳았고 5백 개의 묻힌 보배 창고가 저절로 나타났다. 

또 여덟 나라의 왕도 같은 날에 아들을 낳았으니, 

이때에 이런 길상과 복이 있었다.”


(6) 입천사상(入天祠相)

경에서 말하였다.

“때에 백정왕(白淨王)이 데리고 가서 천신(天神)에게 예배하고자 하여 앞에서 태자를 안고 코끼리가 끄는 수레 위에 타고는 여러 신하와 채녀들과 모든 하늘이 음악을 울리면서 따르며 성으로 들어가 천사(天祠)로 나아갔다. 

범왕과 제석의 천상(天像)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태자의 발에 예배하며 말하기를, 

‘이 태자는 천상과 인간 가운데 존귀한 사람이어늘 어찌하여 지금 저희들에게 예배하려 하십니까?’라고 하고, 

여러 신하와 안팎의 모든 이들은 이런 일을 보고 나서 전에 없었던 일이라고 찬탄하였으며, 

태자를 데리고 나와서 다시 본 궁전으로 들어갔다.”


(7) 입명건호상(立名建號相)

경에서 말하였다.

“왕은 이름을 짓고자 하여 널리 바라문(婆羅門) 등을 청하여 모이게 한 뒤에 태자를 안고 나가서 이름을 지어 주기를 청하자 곧 모두가 다 같이 말하기를, 

‘태자가 탄생하였을 때에 묻혀 있던 보배[寶藏]가 모두 나타났고 모든 상서와 길상(吉祥)이 있었으니, 

이름을 살바실달(薩婆悉達)이라고 지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당(唐)나라 말로는 돈길(頓吉)이다. 

공중에서 천신(天神)들은 커다란 하늘북을 치면서 향을 사르고 꽃을 뿌리면서 외치기를, 

‘장하십니다’라고 하였다. 

그로 인하여 이런 이름이 지어졌다.


(8) 소선점도상(召仙占覩相)

경에서 말하였다.

“왕이 관상을 잘하는 이 5백 명을 소집하여 대보전(大寶殿)에서 태자에 관하여 점을 치게 하자 모두 함께 말하였다.

‘출가하면 부처를 이루고 집에 있으면 전륜왕이 되겠습니다.’

그리고는 또 말하였다.

‘향산(香山)에 아사다(阿私陁)라는 큰 선인이 있습니다. 

다섯 가지 신통(神通)을 갖추어서 왕의 의심을 끊어 줄 수 있습니다.’

그 선인은 그러한 생각에 꼭 맞추어 허공을 날아 궁전으로 왔다. 

태자를 데리고 나가서 공경을 드리게 하자 곧 말리면서 말하기를, 

‘이 분은 바로 삼계(三界) 가운데 존귀하신 이입니다’라고 하며, 

곧 일어나 합장하고 태자의 발에 예배하였으며 곧 상호(相好)를 완전히 갖춘 것을 보고 나서는 갑자기 슬피 울면서 ‘나이 열아홉에 이르면 전륜왕이 되겠으며 만일 출가하면 일체지(一切智)를 이루겠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부처님이 되셔서 설법하여 사람들을 제도하겠습니다. 

상호가 분명히 드러나며 모두가 그 자리에 위치해 있습니다. 

나는 지금 벌써 1백20세가 되었는지라 오래지 않아 무상천(無想天)에 태어날 것이므로 부처님께서 출현하시는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 슬퍼할 뿐입니다’라고 말하였다.”


(9) 보부수시상(保傅隨侍相)

경에서 말하였다.

“왕은 이때 선인의 결정적인 설명을 듣고 나서 출가할까 염려되어 5백의 하인들을 골라 유모를 도와 갖가지로 받들어 모시게 하였으며, 

삼시전(三時殿)을 세워 칠보로 장엄하였고 성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40리까지 들리게 하였으며, 

5백의 채녀(婇女)들로 하여금 밤새도록 전우(殿宇)를 호위하게 하고, 

꽃과 열매며 못과 새들은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그때에 이모가 태자를 젖을 먹여 길렀으며 나이를 먹어 점차로 자라게 되자 왕은 보배 관(冠)과 영락(瓔珞)이며 좋아할 만한 장난감들을 만들어 주지 않음이 없었으며, 

온 나라가 어질고 은혜로우며 편안하고 즐거운 것은 말로 다하기 어려웠다.”


(10) 모씨승하상(母氏昇遐相)

『태자본기경(太子本起經)』에서 말하였다.

“보살은 본래 어머니 되실 분의 덕(德)이 예(禮)를 받을 만하지 못하고 그로 인하여 목숨을 마치실 것을 알고서 거기에 태어났다.”

『보요경(普曜經)』에서는 말한다.

“태자를 낳은 지 7일 후에 어머니는 곧 목숨을 마치고 도리천(忉利天)에 태어났으며, 

5만의 범천(梵天)이 저마다 보배 병(甁)을 가지고 2만의 악마 아내들은 손에 보배 실을 가지고 함께 모시고 호위하였으니, 

삼세(三世) 부처님의 어머니는 모두가 이런 모양과 같았다.”

『대권경(大權經)』에서 말하였다.

“복이 다하여 천상에 난 것이요, 

보살의 허물은 아니다. 

먼저 도솔천에 있을 적에 모후(母后)의 수명이 열 달과 7일이 남은 것을 알고 짐짓 정신을 의탁한 것이다.”


4) 집예역시적(集藝歷試迹)


경에서 말하였다.

“태자가 7세가 되자 왕은 선우(選友)를 불러서 태자의 스승이 되게 하고는 학당(學堂)을 세워 놓고 글을 가르치게 하였다.”

『보요경』에서는 말하였다.

“손으로 금붓[金筆]을 잡고, 

구슬로 된 책상에다 전단으로 예서(隸書)를 쓰면서 스승에게 ‘서(書)에는 예순네 가지가 있거늘문장이 많으므로 기재하지 않는다. 

어찌하여 다만 두 가지만 가르쳐 주십니까? 

곧 그 본말(本末)을 분별하여 주십시오’라고 물었다.”

스승은 통달하지 못하였는지라 도리어 그의 뜻[志]을 알렸다. 

무릇 모든 기예(技藝)ㆍ전적(典籍)ㆍ사어(射御)ㆍ천문(天文)ㆍ산술(算術)을 저절로 알게 되었다.

나이 열 살이 되었을 적에 종제(從弟) 조달(調達)이 5백의 석씨 동자들과 함께 서로 말하기를, 

‘태자가 총명하고 슬기로워서 글과 논(論)에는 아주 밝지만 근력(筋力)에서 어찌 우리들을 이기겠느냐? 

함께 겨루어 보기를 청하고 북을 울리며 큰 소리로 무예(武藝)를 연습하고자 한다’고 외쳤다.

어떤 코끼리가 문에 있자 조달은 머리를 때려서 땅에다 쓰러뜨렸고, 

난타(難陁)는 발로 차서 길 곁에다 밀어뜨려 놓았으며, 

태자는 손으로 성 밖으로 던졌다가 다시 땅에 붙들어 놓으면서 고통이 없게 하였다. 

또 동산 안으로 들어갔는데 죽 벌여 놓은 금ㆍ은ㆍ동ㆍ철 등으로 된 북이 각각 일곱 개씩이 있었다. 

조달은 먼저 활로 쏘아서 세 개를 꿰뚫었고, 

난타도 역시 그러하였으며, 

태자는 선조(先祖) 윤왕(輪王)의 활을 가지고 쏘아서 모든 북을 꿰뚫고 지나가 땅으로 들어가서는 샘물이 솟아나게 하였고 대철위산(大鐵圍山)을 지나갔다. 

조달과 난타는 씨름의 힘이 균등하였는데 태자는 천천히 두 아우를 붙잡고 땅에 넘어뜨렸다.”


(1) 입위저후상(立爲儲后相)

경에서 말하였다.

“때에 왕은 태자를 세워야겠다고 모여 의논하고 2월 8일에 물건을 갖추어 4대해(大海)의 바닷물을 담았다. 

모든 신선과 모든 사람들도 저마다 정수리에 이고 와서는 부왕(父王)에게 주었으므로 곧 태자의 정수리에 붓고 보인(寶印)을 맡기고는 북을 치면서 널리 영(令)을 내려 ‘이제 살바실달(薩婆悉達)을 태자로 삼는다’라고 말하였다.

공중의 하늘과 8부(部)가 같은 소리로 ‘장하십니다’라고 찬탄하였으며, 

모든 여덟 나라 왕이 낳은 태자들도 역시 동시에 즉위하였다.”


(2) 관경생염상(觀耕生厭相)

경에서 말하였다.

“태자가 나가 노닐다 왕전(王田) 옆에 있는 염부수(閻浮樹) 밑에서 쉬고 있는데, 

햇빛이 내리쪼이자 나무가 그를 위하여 가지를 구부려 주어 태자의 몸에 그늘을 드리웠다. 

여러 밭가는 사람을 보고 있는데 정거천(淨居天)이 죽은 벌레로 변하여 까마귀가 그 뒤를 따라 쪼아먹게 하였다. 

그것을 본 뒤에 자비를 일으켜 4선(禪)을 얻기에 이르렀다. 

왕이 이윽고 뒤따라와서는 위로하고 이끌고 돌아와서는 그가 출가할까 염려하여 다시 기녀(妓女)들과 여러 오락거리를 더 늘려 주어 그의 마음을 잡아 두려고 하였다.”


(3) 시납비잉상(示納妃孕相)

경에서 말하였다.

“태자가 17세가 되자 왕은 혼처(婚處)를 찾고 구하였다. 

석종(釋種) 바라문에게 딸이 있었는데 예의를 빠짐없이 갖추었으므로 곧 맞아들여 궁중에 이르렀는데 가고 눕는 것을 함께하였으나 세속의 뜻이 없는지라 고요한 밤에는 선관(禪觀)을 하였으므로 기녀들이 보고 의심하였다.

『수행도지경(修行道地經)』과 『서응경(瑞應經)』에서 말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다 함께 의심하면서 태자가 고자[不男]라고 하였으므로 곧 비(妃)의 배를 가리키면서 ‘이로부터 6년 뒤에 당신은 아들을 낳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드디어 임신하게 되었다.”

『대권경(大權經)』에서 말하였다.

“보살은 욕심이 없었으나 고자라는 의심을 끊게 하기 위하여 짐짓 구이(瞿夷)를 받아들였다. 

나운(羅雲)이 하늘에서 없어져 화생(化生)한 것이지 교합(交合)으로 낳은 것이 아니며 또한 이것은 본원(本願) 때문에 빚어진 일이었다.”


(4) 출유사문상(出遊四門相)

경에서 말하였다.

“태자는 동산 숲에서 기녀들의 노래를 들으면서 문득 놀며 구경하고자 앞에서 인도하고 뒤를 따르며 성의 동쪽 문으로 나갔는데 구경하는 이들이 마치 구름과 같았다. 

정거천(淨居天)이 노인으로 변하여 있었는데 그 노인을 모시는 자가 그렇게 대답하였다.……또 모든 이는 다 늙는다는 말을 듣고 곧 ≺나의 몸에 늙음이 이르는 것도 마치 번갯불과 같거늘 몸을 어찌 믿고 있겠느냐?≻고 생각하고 수레를 돌려 궁으로 돌아가서는 싫어하는 마음이 더욱 더하였다. 

가비라(迦毘羅)의 사면(四面)에는 각각 하나의 동산이 있었는데 숲과 못과 누관(樓觀)이 장엄하여 이만한 다른 것은 없었다. 

태자가 나가 놀려고 남쪽 성문 밖으로 나갔는데 정거천이 병든 사람으로 변화하였으므로 보고는 곧 근심하면서 이내 수레를 돌려 돌아왔다. 

바라문의 아들 우타이(優陁夷)라는 이가 있었다. 

총명과 말재주가 남보다 뛰어났으므로, 

왕은 그를 불러다 태자의 벗으로 삼아 근심하고 심란해함을 풀고 달래 주면서 잠시도 떨어지지 못하게 하였다. 

또 얼마 뒤에 성의 서쪽 문으로 나갔는데 길에서 죽은 사람을 보았다. 

네 사람이 상여에다 메고 집안사람들이 함께 전송하였는데 정거천이 변화한 것으로서 오직 태자와 그 벗만이 보았을 뿐이었다. 

곧 문답을 한 뒤에 더욱 두려워하며 몸을 벌벌 떨면서 ‘온갖 모두가 죽거늘 난들 어찌 오래 살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 

곧 돌아와 궁중에 있다가 다시 다른 동산으로 들어가서 옛 선관(禪觀)을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싫증을 내며 벗어나려 하였다. 

또 북쪽 문으로 나가 말에서 내려 나무 밑에 쉬면서 시중들을 물리치고 선관을 사유하였다. 

정거천이 비구(比丘)로 변하여 법복(法服)을입고 발우를 가지고 석장(錫杖)을 짚고는 땅을 보면서 천천히 태자 앞을 지나갔는데 묻자 ‘나는 바로 비구입니다. 

속박의 도둑을 능히 깨뜨리고 6진(塵)에 물들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고는 문득 신통력을 나타내어 허공을 날아올라 떠나갔다. 

관속(官屬)들도 모두가 보았는데 본래의 생각에 깊이 계합되었으므로 태자는 ‘장하구나, 

이것만이 통쾌한 일이로다’라고 말하였다. 

도를 닦겠다고 다짐하면서 곧 수레와 말을 되돌려 크게 기쁜 생각을 내었다.”


5) 출가심교적(出家尋敎迹)

첫째는 계출가상(啓出家相)이며, 

둘째는 천신접송상(天神接送2)相)이며, 

셋째는 체발사속상(剃髮捨俗相)이며, 

넷째는 심선비탈상(尋仙非奪相)이며, 

다섯째는 왕사추적상(王師追3)迹相)이며, 

여섯째는 동사고행상(同邪苦行相)이며, 

일곱째는 욕신수식상(浴身受食相)이다.


(1) 계출가상(啓出家相)

경에서 말하였다.

“나이 19세가 되어서 출가할 때가 이미 이르렀다고 생각하여 부왕에게로 가서 머리 조아려 예배하자 왕은 그를 부둥켜 안고 자리에 앉으라고 하자 그가 아뢰었다.

‘출가하려고 합니다. 

거룩한 도(道)를 배우도록 반드시 허락하여 주소서.’

왕은 그의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였다.

‘마땅히 그런 생각은 그만두어야 한다. 

나라에 아직 후사(後嗣)가 없구나.’”

『보요경』에서는 말하였다.

“‘늙지 않으려는 등의 네 가지 원(願) 때문에 출가할 뿐입니다.’

왕은 말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면하기 어렵거늘 너는 어찌하여 미리 근심하느냐?”


(2) 천신접거상(天神接擧相)

『보요경』에서 말하였다.

“관상하는 이가 왕에게 아뢰었다.

‘지금 출가하지 않으면 7일 지난 뒤에 전륜왕의 자리가 저절로 와서 응할 것입니다.’

왕은 듣고 더욱 기뻐하면서 곧 4병을 엄히 차리어 1유순(由旬) 안에 배치하여 방어하고 지켰으며 안팎을 더 엄하게 경계하였다.”

『인과경(因果經)』에서 말하였다.

“‘나는 나이 19세가 되었고 이제 2월 7일이니 출가할 때가 되었다. 

또 나라의 후사 때문에 만류하였는데 부왕의 소원도 만족시켰다.’

문득 몸의 광명을 발하여 사천왕(四天王)을 비추었고 정거천(淨居天)에 이르자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게 하면서 모든 하늘들이 곧 내려와서 발에 예배하고 말하였다.

‘한량없는 겁에서부터 수행한 것이 이제 성숙하였습니다.’

대답하였다.

‘그대들의 말과 같다. 

그러나 안팎을 막고 지키고 있으므로 떠나가고 싶어도 방법이 없구나.’

하늘들이 신력(神力)으로 모조리 다 혼몽하게 만들어 누워 자게 하였다.”

『보요경』에서 말하였다.

“모든 하늘들이 멀리서 아뢰었다.

‘불성(沸星)이 마침 나타났으니 곧 차닉(車匿)을 명하여 건척(揵陟)을 끌고 오게 하십시오.’

사천왕과 야차(夜叉)와 용 등이 모두 갑옷을 입고 사방으로부터 왔다. 

그때 말이 울고 종이 슬피 울자 모두 편히 달랜 뒤에 밝은 모양이 나와 광명이 시방을 비추는 것을 보았다. 

태자는 곧 사자처럼 외쳤다.

‘과거의 모든 부처님의 출가도 또한 그러하셨다.’

이에 모든 하늘들이 말의 네 발을 받치고 아울러 차닉을 붙잡았으며, 

제석천은 일산을 가지고 북쪽 문으로부터 나왔다. 

태자는 또 말하였다.

‘여덟 가지 괴로움을 끊지 못하고 법륜(法輪)을 굴리지 못하며 보리(菩提)를 이루지 못하면 반드시 여기에 돌아오지 않으리라.’

하늘들은 찬탄하면서 말하였다.

‘장하십니다.’

새벽이 되어 곧 멈추어 보니 벌써 3유순을 와 있었으며 모든 하늘들은 없어져 보이지 않았다.”


(3) 체발사속상(剃髮捨俗相)

경에서 말하였다.

“태자는 아무도 없는 고요한 숲에 이르러 보배 관(冠)과 밝은 구슬과 영락이며 장식한 꾸미개들을 벗어서 차닉에게 준 뒤에 검(劍)으로써 자신이 수염과 머리를 깎고 서원을 하였다.

‘원컨대 일체(一切)와 함께 번뇌를 끊어 없애 주소서.’

그때에 하늘과 제석(帝釋)이 머리카락을 받아 떠나가면서 찬탄하였다.

‘장하시옵니다.’”

『대권(大權)』에서 말하였다.

“보살의 정수리는 볼 수 있는 이도 없는데 하물며 머리를 깎을 수 있겠느냐? 

그러므로 스스로 머리를 깎으신 것이요, 

또 왕의 회한을 없애기 위한 때문이었다. 

또한 과거의 모든 부처님 법에 옷은 칠보로 장식한 것을 입지 않은 것을 생각하자 정거천이 알아채고는 변하여 사냥꾼이 되어 몸에 가사(袈裟)를 입고 나타나자 보살은 곧 그 보배 옷을 그와 바꾸었다.”

『지도론(智度論)』에서는 말하였다.

“바꾸어서 얻게 된 옷은 거친 삼베의 승가리(僧伽梨)였다.”

경에서 말하였다.

“차닉은 그것을 보고는 돌아가지 않으려는 뜻을 알았고 말도 울면서 같이 돌아왔다.”


(4) 심선비탈상(尋仙非奪相)

경에서 말하였다.

“태자가 발가선(跋伽仙)이 있는 숲 속에 이르렀을 때 날짐승ㆍ길짐승이 눈독을 들이고 있자 선인은 천신(天神)이라고 여기면서 무리들과 함께 맞이하여 앉기를 청하였다. 

태자가 모든 선인들을 보니 풀과 나무껍질이나 잎사귀로 옷을 해 입은 이가 있기도 하고, 

혹은 꽃과 열매와 초목을 먹는 이가 있기도 하였으며, 

혹은 하루에 한 끼 또는 사흘 만에 한 끼를 먹는 이도 있었고, 

혹은 물ㆍ불ㆍ해ㆍ달을 섬기기도 하며, 

다리를 들고 서 있기도 하고 재나 가시나무나 물이나 불 위에 누워 있는 이가 있기도 하였으므로 그러한 까닭을 묻자 대답하였다.

‘천상에 태어나기 위해서입니다.’

곧 신선에게 말하였다.

‘당신들이 구하는 모든 것으로는 끝내 괴로움을 여의지 못합니다.’

이런저런 것을 논의하다가 날이 저물었으므로 다음날 아침에 하직하고 떠나려 하자 모든 선인들이 대답하였다.

‘닦는 도(道)가 다르므로 감히 만류하지 않겠습니다. 

북쪽으로 향해 가시면 거기에 큰 선인이 계시니 가서 논의해 보십시오.’

거기에도 가 보았으나 볼 필요가 지극히 없었는지라 그만 돌아왔다.”


(5) 왕사심적상(王師尋迹相)

경에서 말하였다.

“그때에 왕은 차닉이 돌아온 것을 보고는 사랑하는 정(情)이 깊었으므로 자신이 그 뒤를 쫓아가려고 하자 왕사(王師)와 대신(大臣)이 왕에게 가지 말 것을 간(諫)하였다.

‘태자가 탄생하던 날에 온갖 신(神)들이 상서를 나타내었고 모든 하늘들이 다 받들었거늘 어떻게 세간을 즐기겠습니까? 

선인이 결정적으로 말하기를 왕위에 오르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었습니다. 

저희들이 찾아 나서겠습니다.’

그들은 드디어 선인의 처소에 이르러 다 같이 말하였다.

‘이미 떠났습니다.’

거기를 지나쳐 가는 도중에 멀리 나무 아래에서 사유(思惟)하고 있는 것을 보고 신하들이 곧 자세히 아뢰자 태자는 말하였다.

‘어찌 은혜를 모르겠습니까마는 다만 네 가지 환고(患苦) 때문입니다.’

끝내 발길을 돌리지 않고 곧 일어나서 선인을 찾아갔다.

왕의 신하들은 곧 다섯 사람을 머물러 있으면서 있는 곳을 잘 살피게 하였다. 

곧 항하(恒河)를 건너 왕사(王舍)에 갔는데 온 나라의 왕과 백성들이 수레를 차려 뒤를 따라왔으며 지위까지 버려가며 모시려고 하였으나 끝내 뜻을 꺾지 못하였고, 

그들을 위하여 세간의 환난을 설하였다. 

드디어 가란선(迦蘭仙)이 있는 데에 이르러서 함께 논의하였으나 뜻을 빼앗기지 않은 것은 역시 위에서 말한 것과 같다.”


(6) 동사고행상(同邪苦行相)

태자는 두 선인을 조복한 뒤에 가사산(迦闍山)의 고행림(苦行林)으로 나아갔다. 

교진여(憍陳如) 등 다섯 사람이 머물고 있는 곳이며 니련하(尼連河) 곁이다. 

6년 동안 고요히 생각하면서 고행으로 지냈다. 

하늘들은 깨와 쌀을 바쳤으나 마음을 청정하게 하고 계(戒)를 지켰다. 

하루에 한 알의 깨와 쌀을 먹기도 하고, 

혹은 7일에 한 톨의 깨와 쌀을 먹기도 하였다.

교진여 등 다섯도 역시 고행을 하며 사람을 보내어 그가 고행하는 모습을 자세히 아뢰게 하였더니, 

왕이 듣고 크게 슬퍼하면서 곧 5백 승(乘)의 수레를 차려 이모와 야수다라(耶輸陁羅)와 함께 각각 5백 채의 수레에 살림을 싣고 차닉으로 하여금 거느리게 하여 그곳까지 도달하였으나 받지 않고 도로 궁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7) 욕신수식상(浴身受食相)

경에서 말하였다.

“보살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이제 고행으로 몸이 마치 바짝 마른 나무와 같으며 거의 6년을 다 채웠는데도 해탈을 얻지 못하였다. 

생각해 보니 옛날에 닦았던 선정(禪定)만이 가장 진실하고 바른 것이다. 

적멸을 위한 그 밖의 삿된 것은 스스로 굶주리기만 하는 것이지 도(道)가 아니다. 

나는 마땅히 음식을 받아 먹은 뒤에 성불(成佛)하여야겠다’고 하고, 

곧 자리에서 일어나 하천으로 들어가서 목욕하였으며 몸이 파리하고 약하였는지라 하늘이 그를 위하여 나무를 눌러 주었으므로 그것을 부여잡고 못에서 나올 수 있었다. 

소를 치는 여인에게 정거천이 권하여 우유죽을 보시하게 하였으므로, 

곧 가져다 받들어 올리자 축원[呪願]하신 뒤에 죽을 받아 드시고 몸의 기력이 충족하게 되어 보리(菩提)를 얻는 것을 감당할 수 있었다. 

다섯 사람은 그것을 보고 놀라면서 퇴전(退轉)하였다고 여기고는 저마다 자기들이 있는 데로 가 버렸으므로, 

보살은 혼자 필발라(畢鉢羅)나무로 나아갔다. 

그런데 덕(德)이 중하였기 때문에 땅이 진동하면서 소리를 내었고 눈먼 용(龍)이 눈을 크게 뜨게 되어 상서를 보고 찬송하였으며 5백 마리의 푸른 공작새들이 왼쪽으로 돌면서 허공을 날았고 상서로운 구름과 향기로운 바람이 서로 떨치면서 반사하였다. 

과거의 부처님과 같이 풀로써 자리를 삼으려 하자 제석(帝釋)이 사람으로 변하여 깨끗하고 부드러운 풀을 바쳤으므로 받으신 뒤에 자리를 깔고 과거의 부처님과 같이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앉아 말하였다.

‘정각(正覺)을 이루지 못하면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라.’

하늘과 용이 기뻐하였고 모든 조짐은 말로 다하기 어려웠다.”

『관불삼매(觀佛三昧)』에서 말하였다.

“하늘의 조화로 나무를 만들었으니 이에 높이가 8천 리에 이르렀으나 하열하고 박복한 이는 풀 깔개에 앉아 있는 것만을 보았다.”


6) 오도승시적(悟道乘時迹)


(1) 항마현덕상(降魔顯德相)

『처태경(處胎經)』에서 말하였다.

“보살이 염부수(閻浮樹)에 앉아 48일 동안 나무를 관(觀)하면서 사유(思惟)하자 천지가 감동(感動)하고 광명이 악마의 궁전[魔宮]을 가리웠다. 

파순(波旬)은 누워 자다가 꿈에 서른두 가지 변(變)문장이 많으므로 기재하지 않는다.을 보았으므로 깨어나자마자 두려워하면서 신하와 병사들을 불러 모았고 아울러 천 명의 아들5백의 아들들은 보살을 믿었고, 

5백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랐다.을 불러 모았다. 

또 네 딸에게 말하여 먼저 가서 파괴하게 하였으므로 서른두 가지의 요염한 자태문장이 많으므로 기재하지 않는다.를 나타내다가 변화하여 늙은 할미가 되었다.”

『관불삼매(觀佛三昧)』에 말하였다.

“세 딸은 장식하고는 곁눈질을 하고 홀릴 만큼 아양을 떨면서 보살에게 예배하고 공경하며 몸으로 받들어 모시겠다고 하고 보배 그릇에다 하늘의 진미(珍味)를 담아 올렸으나 보살은 그때에 몸과 마음이 고요하여 동요하지 않았으며 백호(白毫)로써 여인의 몸의 아홉 개의 구멍과 근본되는 두 내장을 비추자 스스로 보고는 싫어하고 미워하였고 8만의 죽은 벌레들과 모든 내장의 음식물을 보고는 이내 먹는 것을 게워 내었다. 

몸의 왼쪽은 뱀의 머리요 오른쪽은 여우의 머리며 중간의 머리는 개의 머리가 되게 하였고, 

등은 구부러진 늙은 할미가 되어서 죽은 아이를 안고 있게 하자 그 여인들은 놀라 울부짖으면서 땅을 기어서 떠나갔다. 

마왕은 크게 성을 내어 6천(天)과 8부(部)를 모두 거느리고 각각 4병을 일으켜 모조리 그들을 다른 형태로 변화시켰으며, 

또 염라왕(閻羅王)에게 명하여 아비(阿鼻)에서 고통 주는 기구들을 모두 들고서 보살이 있는 데로 향하게 하였다. 

파순이 으르렁거리면서 모든 병사들에게 명을 내렸으므로 무기가 가로 세로로 엇갈리면서 공중을 가득 채워 서로 협박하여 들어갔으나 가까이 갈 수 없었다. 

보살이 천천히 눈썹 사이의 백호(白毫)를 들어 올리자 지옥의 죄인들은 백호에서 나온 물에 불이 다 꺼지고 그런 뒤에 스스로 지었던 죄를 기억하게 되면서 마음이 청량해지는지라 ‘부처님께 귀의합니다’라고 말했고, 

그로 인하여 인간 세상에 태어났다. 

마왕은 가까이 나아가 부처님과 서로 힐난하였으며,그 글은 『본기(本起)』에서와 같다. 

보살은 지혜의 힘으로 손을 펴서 땅을 눌렀다. 

그러자 바로 그때 땅이 진동하여 마왕과 그의 병사들은 거꾸로 떨어져 버렸다.”


(2) 단혹성각상(斷惑成覺相)

경에서 말하였다.

“그때 보살은 인자하고 착한 힘으로 2월 7일 밤에 악마를 항복받고 광명을 놓았고 정(定)에 들어 법을 관하였더니 곧 3명과 6통을 얻어 구족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삼계와 삼세(三世)의 일을 두루 관찰하고 모두 명색(名色)이 모든 악의 원인이요, 

8정도(正道)를 받아 행해야 뭇 고통이 곧 소멸할 것임을 알았다. 

보살은 이미 3독(毒)과 생사(生死)의 근본을 제거하였고 할 일[所作]을 이미 마쳤으며 지혜가 환히 밝아졌음을 스스로 알았다. 

명성(明星)이 나올 적에 넓고 휑하니 크게 깨치면서 정각(正覺)을 이루게 되어 열여덟 가지 법과 열 가지 신령한 힘과 네 가지의 두려움 없음[無所畏]를 얻었다. 

그때 대지(大地)는 열여덟 가지 모양으로 진동하였고 하늘에서는 상서로운 구름이 일면서 감로(甘露)의 비를 뿌렸다. 

또 하늘꽃이 비처럼 내리고 하늘북은 저절로 울리면서 보리수(菩提樹)를 돌았으며 36유순까지 8부(部)가 가득 찼고 모든 하늘들이 차서 넘쳤으며 음악과 당기ㆍ번기를 갖춘 것이 한량없었다. 

온갖 중생들은 서로 자애(慈愛)롭고 5정거천(淨居天)과 5신통의 신선과 그리고 그 밖의 모든 고취(苦趣)들도 다 함께 크게 기뻐하였다.”


7) 설법개화적(說法開化迹)


(1) 흥념민물상(興念愍物相)

경에서 말하였다.

“여래는 7일 동안 나무를 관하며 다음과 같이 사유(思惟)하였다.

‘나는 번뇌를 다하여 본래의 서원이 원만하게 되었고 매우 깊은 법을 얻게 되었으니 오직 부처님만이 알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중생들은 5탁(濁)의 세상에 처해 3독에 가려지고 박복하여 지혜가 없으며 깊은 법을 알지 못하는지라, 

만일 법륜(法輪)을 굴리면 죄다 비방하게 되어 장차 악도(惡道)에 떨어져 한량없는 고통을 받게 되리니 이제 차라리 반열반(般涅槃)에 들어가야겠다.’”

『보요』에서 말하였다.

“정각의 도를 이루시고는 석실(石室)로 옮겨 앉으시어 96사(師)들이 저마다 믿고 받든 바를 생각하시기를, 

‘나는 이제 어떻게 하면 그들을 구제하게 될까?’라고 하셨다.”


(2) 범왕래청상(梵王來請相)

경에서 말하였다.

“때에 대범왕(大梵王)은 성과(聖果)를 이루시고도 잠자코 계시는 것을 보고 마음으로 근심하고 괴로워하면서 생각하였다.

≺중생들이 오랜 세월 동안 생사(生死)에 빠져 있으니, 

이제 마땅히 가서 큰 법륜(法輪) 굴리시기를 청해야겠다.≻

그리고는 곧 부처님께로 와서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옛날에도 중생을 위하여 오래도록 생사에 머무시면서 널리 덕의 근본을 닦으셨거늘 이제는 불도(佛道)를 이루셨으면서 어찌하여 잠자코 계시옵니까?’

욕계(欲界)의 6천(天)들도 역시 똑같이 권하고 청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세 번이나 하였는데 7일이 되자 잠자코 수락하셨으므로 저마다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3) 회토염기상(懷土念機相)

경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수신(樹神)에게 말씀하셨다.

‘이 바라내(婆羅柰)의 선인이 머무는 곳과 녹원(鹿苑) 안의 인민은 비록 적기는 하나 전생의 인연이 있으므로 법안(法眼)을 얻어 청정하여지리라.’

곧 도안(道眼)으로써 그 두 선인(仙人)을 염(念)하였으나 모두 이미 목숨을 마쳤다. 

그리고 ≺다섯 사람은 시중하면서 갖은 고생을 겪었으니 그들을 위하여 설법하여야겠다≻고 생각하셨다.”


(4) 수공상자납발상(受供商者納鉢相)

『본기경』에서 말하였다.

“수신(樹神)은 ≺부처님께서 도(道)를 얻으신 지 7일이 되었으나 아직 공양을 받치는 이가 없구나≻라고 생각하였는데, 

마침 5백의 상인들이 산 밑을 지나가고 있었으므로 수레와 소를 모두 걸려서 자빠지게 하였다. 

제위(提謂)와 파리(波利)라는 두 대인(大人)은 대중과 함께 이런 모양을 보고는 신(神)에게 나아가서 복을 빌자, 

그 신이 몸을 나타내어 앞서 생각했던 것을 자세히 말하였으므로 곧 미숫가루와 꿀을 섞어서 나무로 나아가 부처님께 올렸다. 

그때에 여래께서는 생각하시기를, 

≺모든 부처님은 발우로써 밥을 받으셨다≻고 하셨다. 

그때 사천왕은 곧 파나산(頗那山) 꼭대기로 가서 돌 가운데서 네 개의 큰 발우를 내어 네 왕이 저마다 가지고 가서 부처님께 올렸다. 

그러자 모두 다 받아 왼손 위에다 포개 놓고 오른손으로 눌러서 네 개의 가장자리기 분명하게 나타나게 하셨다. 

축원[呪願]을 하신 뒤에 미싯가루를 받아 잡수시고 손을 씻고 양치질하고 발우를 씻으시고는 곧 삼귀(三歸)를 받게 하고 이내 그들과 작별하였다.”

율(律)에서는 머리카락과 손톱을 그들에게 주어서 탑(塔)을 세웠다는 말이 더 있다.탑은 지금도 남아 있다.


(5) 도봉비기상(道逢非機相)

경에서 말하였다.

“여래께서 앞으로 가실 때 위의(威儀)가 자상하고 정연하셨는데 길에서 우파가(優波伽)라는 외도(外道)를 만났다. 

그 외도는 부처님 모습을 보고 탄복하면서 게송으로 문답하다가 마음속으로 희유(希有)하다고 하면서 합장하고 주위를 돌고는 떠나갔다. 

조금 뒤에 뒤를 돌아다보았으나 안 보였으므로 그만두었다.”


(6) 우우용공상(遇雨龍供相)

『본기』에서 말하였다.

“다니시다가 문린(文鱗)이라는 눈먼 용이 있는 물가에 이르러서 정(定)에 들어 7일 동안 앉아 계셨는데, 

바람과 비가 크게 일었다. 

그러나 부처님은 숨을 헐떡이지도 않고 광명이 물속을 비췄으므로 용이 눈을 뜨게 되었다. 

곧 여래임을 알고는 예전의 세 분 부처님께 한 것과 같이 향을 갖춰 물에서 나와 앞에서 일곱 바퀴를 돌고 몸이 부처님 계신 데서 둘레 40리(里)를 떨어져서 용의 일곱개의 머리를 부처님 위쪽에 벌려 덮어서 가렸다. 

7일 동안이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계시면서 배고픔과 목마름을 근심하지 않으셨는데 비가 그치자 나이 젊은 도인(道人)이 변화하여 옷을 산뜻하게 입고 머리 조아려 문안 드리고는 곧 삼귀를 받았다.”


(7) 승기수법상(乘機授法相)

경에서 말하였다.

“곧 다시 바라내(波羅柰)의 다섯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가셨다. 

멀리서 부처님이 오시는 것을 보고 아직 도(道)를 이루지 못했으리라고 여기면서 저마다 서로 일어나서 공경하지 않기로 약속하였는데, 

부처님께서 그곳에 이르시자 모르는 결에 일어나서 예배하고 서로 여러 일을 맡아 하게 되었다. 

이미 본래의 약속을 어겼는지라 몹시 스스로 부끄러워하여 옛날을 징험(徵驗:증거ㆍ효험)하여 나무라지 않았다. 

부처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5음(陰)의 윤회(輪廻)와 3유(有)의 모든 고통을 자세히 설하였다. 

교진여(憍陳如)가 맨 먼저 4제(諦)를 깨치면서 법안(法眼)이 생기게 되었으며 8만 나유타(那由他)의 허공에 있던 하늘들도 역시 법안이 청정해졌다.”


(8) 성고화경상(聲告化境相)

경에서 말하였다.

“지신(地神)이 교진여가 도(道)를 얻은 것을 보자마자 큰 소리로 외쳤다.

‘여래께서 세간에 출현하시어 묘한 법륜(法輪)을 굴리셨습니다.’

허공에 있던 하늘들도 외치게 되어 곧 아가니타천(阿迦膩吒天)에까지 이르렀으며, 

천지는 열여덟 가지 모양으로 진동하였고 천ㆍ용 등 8부(部)는 음악을 울리면서 찬탄하였으며 세계는 크게 밝아졌다. 

그 다음에는 네 사람을 위하여 거듭 4제를 설하시자, 

역시 번뇌의 티끌과 때[塵垢]를 여의고 법안이 청정하게 되었다.”


(9) 출가표승상(出家表僧相)

경에서 말하였다.

“때에 그 다섯 사람은 이미 도(道)의 자취를 보고 나서 출가하기를 청하였으므로 세존께서는 부르셔서 말씀하셨다.

‘잘 왔다. 

비구야.’

수염과 머리카락이 저절로 떨어지면서 곧 사문(沙門)이 되었다. 

거듭 5음(陰)을 말씀하시자 깨달아 아라한(阿羅漢)이 되었으니, 

세간에는 아라한이 여섯 분이 있게 되었다. 

부처님은 바로 불보(佛寶)요, 

4제는 법보(法寶)며, 

5인은 승보(僧寶)이다. 

이 세간에는 삼보(三寶)가 있어서 천상과 인간에 제일의 복전(福田)이 완전히 갖추어지게 되었다.”


(10) 차제도인상(次第度人相)

경에서 말하였다.

“다음에는 장자의 아들 야사(耶舍)를 제도하여 초과(初果)를 얻게 하셨고, 

또 그의 아버지가 와서 아들을 찾으니 부처님께서 그에게 설법하시어 법안이 청정하게 되었으며, 

그에게 3귀(歸)를 말씀하셨으니 최초의 우바새(優婆塞)였다. 

또 야사의 동우(同友) 쉰 명을 제도하여 모두가 초과(初果)를 얻게 하였다.오래지 않아 모두 아라한이 되었다.”


(11) 분두화인상(分頭化人相)

경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할 일을 다 마쳤으므로 복전(福田)이 될 만하다. 

마땅히 각자 지방을 다니면서 자비로써 중생을 제도해야 한다. 

나는 혼자 마갈제(摩竭提)에 가서 여러 인민들을 제도하겠노라.’

곧 머리를 조아려 발에 예배하고 옷과 발우를 가지고 길을 나누어서 떠나갔다.”

경에서 말하였다.

“부처님은 마갈제국으로 가셨다. 

우루가섭(優樓迦葉) 형제 세 사람은 옛 선인의 도를 배웠는데 왕과 신하들이 귀의하여 믿었고 근기가 영리하며 아만(我慢)이 있어서 꺾어 조복하기가 어려웠다. 

그리하여 곧 그곳에 가셔서 머무르시며 용의 굴로 들어가 그날 저녁 용을 항복시키고 다음날 그들에게 보이셨다. 

비록 항복시키는 신통력이 있었는데도 오히려 ‘나는 응진(應眞)이다’라고 말하였다. 

뒷날 사천왕이 내려오고 제석이 내려오고 범왕이 내려와서 저마다 광명을 놓자 마음속으로 사사로이 우러렀으며, 

뒤에 불을 섬기는 기구를 부처님의 신통력으로 제지시키자 비록 강하였으나 하는 수 없이 스승과 도제(徒弟)들이 부처님께 나아가 항복하여 허락받은 뒤에야 비로소 그들의 뜻을 이룰 수 있었다. 

또 함께 머무르기를 청하여 네 가지 일로써 공급하였고, 

날마다 좋은 음식을 장만하고는 스스로 찾아가서 부처님을 청하였는데 부처님은 이 주(洲)의 북쪽으로 가셔서 염부 열매[閻浮果] 등을 따 오셨다.”

『보요』에서 말하였다.

“도리천(忉利天)에 가셔서 주도수(晝度樹)의 열매를 가져오셨고 그 밖의 3천하(天下)에서도 열매를 따 가지고 그보다 먼저 이르시자, 

모두가 감탄하면서 신기하게 여겼다. 

제석이 땅을 가리켜 못을 이루게 하고 여덟 가지 공덕[八德]을 완전히 갖춘 것을 부처님께 공양하니 손을 씻고 양치질을 하셨는데, 

가섭은 자세히 묻고 하늘의 상서[瑞]를 기쁘게 여기면서도 오히려 항복하여 따르지 않았다. 

부처님께서 해진 비단을 보고 주워다 빨고자 하여 마음속으로 돌을 필요로 하자, 

제석이 변화를 부려 네모진 돌을 나무 사이에 놓아 두었다. 

또 향산(香山)으로 가시자 큰 돌통을 가지고 와 물을 담아 공양하면서 씻으시게 하였는데, 

가섭은 자세히 물어보고는 사사로이 탄복하고 숭앙할 뿐이었다. 

또 다른 날에 부처님께서 못으로 들어가 목욕을 하시자 수신(樹神)이 가지를 눌러 주어 부처님은 그 나무를 잡고 나오셨다. 

가섭이 7일 동안 모임을 베풀어서 국왕과 신민(臣民)들이 크게 모이게 되었는데 부처님께서 거기에 오면 상호(相好)를 보고 감동할까 두려워하여 그 모임에 오지 않기를 원하였으므로, 

곧 북주(北洲)로 가셔서 이레 밤 동안 돌아오지 않으셨다. 

모임이 끝나고 남은 음식이 있게 되자 부처님께서 오셨으면 하고 생각을 하였으므로 그 생각에 맞추어 거기로 가시자 곧 그 동안 오시지 않으셨던 뜻을 물었고, 

부처님은 자세히 그에게 대답하셨다. 

그러자 마음으로 놀라서 털이 쭈삣해지면서 비록 기특한 일이라고 여기면서도 끝내 자기는 응진(應眞)이라고 생각하였다. 

또 다른 날 그의 근기가 성숙해졌음을 아시고 강가에 가셨는데 마왕(魔王)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마땅히 열반하셔야 하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4부(部)를 아직 갖추지 못하였고 외도(外道)들도 아직 항복시키지 못하였다.’

곧 천궁(天宮)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때 부처님은 물로 들어가 물을 양쪽으로 갈라지게 하시고 가시는 곳마다 먼지가 나오게 하셨는데, 

가섭은 멀리서 보고는 물에 빠졌다고 여기면서 곧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와서 구하려고 하다가 그것을 보고는 탄복하고 우러러 부처님께 배에 오르시라고 청하였다. 

여래께서 배 밑을 뚫고 나와 그 가운데에 가부(跏趺)하고 앉으시자 스승과 그 제자들은 탄복하며 크게 칭찬하였다. 

그러나 입으로만 말할 뿐이요, 

항복하지는 않았다.”

『본기』에서 말하였다.

“‘그대는 아라한이 아니며 도증(道證)을 알지 못하고 있거늘 어찌하여 뻔뻔스럽게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스스로 도덕(道德)이 있다고 하는가?’

가섭은 마음으로 부끄럽게 여기면서 머리 조아리고 아뢰었다.

‘대선(大仙)이시여, 

저의 마음을 잘 아시옵니다. 

오직 부처님께서 받아들여 주소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는 나이 120살이요 제자들도 많이 있고 여러 사람들에게 공경을 받고 있는 터이니, 

반드시 나의 법에 들어오려면 마땅히 그들에게 말하여 알려야 하느니라.’

드디어 함께 의논하여 다 같이 바른 교화를 따랐으니 먼저 가섭을 제도하여 제4과(果)를 증득케 하셨고, 

다음으로 문인(門人) 5백 사람도 제도하셨다. 

하류(下流)에 있던 두 아우도 저마다 2백50인씩의 제자들이 있었는데 불을 섬기는 기구들이 상류로부터 떠내려오는 것을 보고 다 같이 형의 처소에 이르러 역시 부처님의 교화를 받았다. 

그들을 위하여 설법하시자 다 같이 4과(果)를 이루었다.”

(12) 부병사본원상(赴洴沙本願相)

부처님께서는 세 선인을 제도하신 뒤에 ‘왕사(王舍)에 본원(本願)이 있다’고 하시고, 

곧 빈바사라왕(頻婆裟羅王)에게로 나아가 죽림(竹林) 안에 머물러 계셨다.

『보요경』에서 말하였다.

“왕은 부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면서 8만 4천을 인도하고 뒤따라 부처님 계신 데로 와서는 다 함께 사제(師弟)의 관계를 의심하였다. 

이에 가섭으로 하여금 신통을 나타내어 의심을 없애 주고 게송으로 대중에게 말하도록 하셨으며 왕을 위하여 설법하시자 법안(法眼)이 청정하게 되었고 8만 나유타(那由他)의 사람과 96나유타의 하늘들이 똑같이 법안을 얻었다. 

왕은 죽원(竹園)을 부처님께 보시하였다.”

모든 왕으로서 부처님을 뵈온 이는 병사왕이 맨 처음이었고 승가람(僧伽藍)으로서는 죽원이 맨 처음이었다.


(13) 도사리불목련상(度舍利弗目連相)

경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죽원에 계셨다. 

왕성(王城)에 두 바라문(婆羅門)이 있었는데 큰 지혜가 있었으므로 온 세간에서 칭송을 받았으며 각각 1백 명씩의 제자들이 있었고 모두 친한 벗이었다. 

아기(阿耆) 비구가 성으로 들어가서 걸식(乞食)하였는데 사리불(舍利弗)이 보고 기이한 마음이 온몸에 두루하였으므로 그가 배우는 것을 자세히 물어보았다. 

간략하게 하나의 게송을 말해 주었으나 곧 초과(初果)를 얻게 되었다. 

돌아가서 목련(目連)에게 재차 말해 주었더니 그도 도(道)를 얻고는 곧 제자들을 데리고 죽원으로 나아갔다. 

부처님께서는 멀리서 오는 두 사람에게 수기(授記)하셨다.

‘나의 상족(上足)이 되리라.’

그리고는 곧 ‘잘 왔노라’라고 하시니, 

그들은 출가하여 성도(聖道)를 깨쳤다.”

그때에 마갈제국(摩竭帝國)에는 1천2백50의 비구가 있었고 모두가 대아라한(大阿羅漢)이었으니, 

경 가운데서 많이 기술하였고 거듭 그 맨 처음에 나온다.


(14) 도금색대가섭연(度金色大迦葉緣)

투라국(偸羅國)의 바라문에 가섭(迦葉)이라는 자가 있었다. 

32상(相)을 갖추고 모든 서론(書論)에 통하였으며 거부(巨富)이면서도 잘 보시하였고 그 아내 역시 상(相)을 구족하였다.

다 같이 세간에 욕심이 없었는지라 집을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서 ‘모든 부처님은 출가하여 도를 닦으셨으니 나도 역시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곧 입고 있던 천 냥 값어치의 옷을 빛깔을 파괴하여 누더기로 만들어 입고, 

스스로 수염과 머리를 깎고는 산중에서 고요히 생각하고 있는데 공중에서 하늘이 말하였다.

“지금 부처님께서 출현하여 계시니 곧 죽원으로 나아가십시오.”

부처님께로 가니 다 함께 맞이하였으며 설법을 받들어 받고 깨쳐서 아라한이 되었다. 

큰 위덕(威德)이 있어서 하늘과 사람들이 존중하였기 때문에 대(大)라는 글자를 붙였다.

또한 부처님께서 멸도(滅度)하신 뒤에 법의 교화에 머물러 유지하며 오는 세상의 6만 년 동안 가피한 것도 바로 이 사람의 힘이다.


(15) 불환본생연(佛還本生緣)

『보요경』에서 말하였다.

“왕이 도를 얻었다는 소식을 들은 지도 벌써 6년이나 지나게 되어 슬픔과 기쁨이 엇갈려 보고 싶어졌다. 

우타이(優陁夷)라는 범지(梵志)가 있었는데 그는 본래 보살을 모셨던 이다. 

왕은 그로 하여금 가서 청하게 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이별하여 만나지 못한 지도 벌써 12년이 지났으니 한 번이라도 만나보고 싶소.’

명(命)을 받고 가서 청하자 부처님은 ‘잘 왔다’고 말씀하셨고, 

4과(果)를 깨치게 되었다.

곧 그를 보내어 다시 가서 아뢰게 하자 신통을 나타내어 본국(本國)으로 가서는 말하였다.

‘이로부터 7일 후에 부처님께서 오실 것입니다.’

왕은 40리를 나가 부처님을 영접하면서 길게 줄을 지어 시위(侍衛)하였으며 대천세계(大千世界)가 진동하였다. 

왕은 만나보고 크게 기뻐하였으며 호족(豪族) 5백 인을 선발하여 사문이 되어 모시게 하였다. 

그때에 난타도 역시 사문이 되었으며 전에 하인이었던 사람에게 예배를 하자 천지가 크게 진동하였다. 

부처님께서 궁중으로 들어가시자 나운(羅雲)이 앞으로 나왔는데 부처님께서는 많은 몸으로 변화하시어 모두가 똑같았다. 

나운은 곧장 와서 진짜 부처님께로 가서 하자(瑕疵)가 없음을 표시하였다. 

그러자 온 나라는 같이 경하하며 안락해 하였고 일이 없었으며 세삼(歲三) 월륙(月六)에 재계를 받듦이 끊이지 않았다.”




8) 기궁화엄적(機窮化掩迹)


(1) 마왕중청입멸상(魔王重請入滅相)


『장아함(長阿含)』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비사리(毘舍離)에서 아난만을 데리고 계셨다. 

뒤에 여름에 온몸이 모두 아팠으므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존재로서 4신족(神足)을 닦은 이가 마음으로 그렇게 하고 싶다면
1겁(劫) 또는 더 넘게도 죽지 않을 수 있다. 

부처님은 이보다 더 많이 살며 하늘과 사람들이 안락을 얻으리라.’


이와 같이 두 번 세 번 말씀하셨는데도
아난은 악마에게 가려져 부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였으며, 

악마는 부처님께 청하면서 말하였다.

‘원컨대 열반에 드소서.’

이에 세 번 청하자 말씀하셨다.


‘이로부터 석 달 뒤에 본래 태어났던 곳인
구시나갈(拘尸那竭) 사라원(裟羅園)의 쌍수(雙樹) 사이에서 멸도(滅度)하겠노라.’


그러자 곧 천지가 크게 진동하고 사람과 만물이 놀라며 두려워하였다.


부처님은 8동(動)과 8상(相)을 말씀하시면서
곧 대중들을 모아 널리 말하여 열반하겠다는 것을 알리게 하셨다. 


2월 15일의 이른 아침에 광명을 놓아 대천세계를 비추었으며, 

나아가 시방의 6취(趣) 중생에게까지 미쳐 광명을 만난 이들은
죄가 소멸되어 소리를 같이하여 슬퍼하고 연모하였다. 

54의 대중이 일시에 구름처럼 모여 와 저마다 공양구를 베풀었고, 

나아가 시방의 한량없는 부처님 국토에서도 모두 왔으나 오직 가섭(迦葉)과 아난(阿難)만이 오지 않았다. 

상응하는 것을 나타내신 뒤에 광명은 입으로 들어갔다. 


모임 가운데는 순타(純陁) 등 10인의 우바새(優婆塞)가 있어
다 함께 공양을 베풀고 제도되었으며 지은 멥쌀밥이 여덟 섬이어야 만족할 수 있었는데
부처님의 신력으로 그 큰 모임에 있는 이들을 다 충족시켰다.”


(2) 촉루종사상(囑累終事相)

경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선 그때 대중을 편안하게 위로하면서 널리 그들을 위하여 설법하셨고 삼보는 항상 머물러 있다는 것을 밝히셨으며, 

이미 법을 듣고 나서는 소멸한다는 생각을 내지 않았다.”

또 말씀하셨다.

“모든 선남자들아, 

스스로 그 마음을 닦아 조심하여 부디 방일(放逸)하지 말라. 

나는 이제 등[背]이 아프므로 보통 병든 사람과 같이 눕고자 한다. 

너희들 문수(文殊)야, 

대중을 위하여 설법하여라. 

이제 큰 법을 너에게 부촉(付囑)하느니라. 

또한 가섭과 아난 등이 오면 역시 부촉할 것이니라.”


(3) 표처현멸상(標處現滅相)

『장아함경』에서 말하였다.

“부처님은 성으로 들어가 쌍수(雙樹) 사이를 향하시고 아난으로 하여금 자리를 깔게 하여 발은 남쪽으로 하고 머리는 북쪽으로 하며 얼굴을 서쪽으로 향하게 하였으니 법이 오래도록 북쪽에서 유포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부처님은 스스로 승가리(僧伽梨)를 네 번 접어서 오른 겨드랑이에 대고 마치 사자왕처럼 발을 포개어서 누우시자 귀신이 꽃을 땅에다 뿌렸다. 

부처님은 옛날 여섯 번이나 전륜왕이 되었을 적에도 이 땅에다 뼈를 묻었던 것을 자세히 말씀하셨다.

‘나는 정각(正覺)을 이루었는데도 이제 이곳에서 다시 몸과 목숨을 버리고 열반하리라.’

가섭(迦葉)이라는 보살이 있다가 병의 원인을 묻고 아울러 모든 의심을 결단하였다.

부처님께서 누운 데서 일어나 큰 광명을 놓아 한량없는 국토를 비추시자 8열(熱)과 8한(寒)의 모든 지옥의 고통이 소멸하였으며 광명 가운데서 많이 나왔다.

‘온갖 중생에게는 모두 불성(佛性)이 있느니라.’

널리 법요(法要)를 설하여 사람들을 제도함을 셀 수 없었다. 

때문에 누워 계심을 보이면서도, 

아직 도(道)를 얻지 못한 이로 하여금 도의 인[道因]을 얻게 하셨다. 

또한 8부(部)가 위하여 크게 공양을 베풀었고 천 단(端)의 모전으로써 몸을 싸고 칠보의 관(棺)에 향유(香油)와 관향목(灌香木)을 담고 두 모전에 불을 붙였으나 타지 않았으니 하나는 바깥에 있고 하나는 안에 있었다. 

이는 모든 중생들에게 사리(舍利)를 나누어 주기 위해서였다.”

『장아함경』에서 말하였다.

“부처님은 1천2백의 제자에게 얻게 될 도과(道果)를 수기하시고는 울다라승(鬱多羅僧)을 펴고 금빛 팔을 내시어서 말씀하셨다.

‘부처가 세간에 출현하는 것은 마치 우담화(優曇華)와 같다.’”


(4) 정멸도상(正滅度相)


두 권의 『니원(泥洹)』에서 말하였다.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 남기신 가르침을 반드시 함께 삼가하고 지켜야 한다. 

지금부터 1억 4천 년 후에 다시 부처님이 계시리라. 

나는 성사(聖師)로서 79세가 되어 해야 할 일을 모두 궁구하여 통달하였으니 너희는 힘쓸지니라.’

이때 이미 한밤중이 되었고, 

‘마땅히 방일하지 않아야 선한 법이 그로 말미암아 생기며 만물은 무성하니라’라는 것이 바로 가장 나중에 하신 말씀이었다.

이에 세존께서는 곧 초선(初禪)ㆍ2선(禪)ㆍ3선ㆍ4선과 공(空)ㆍ식(識)ㆍ불용(不用)에 들어가서 비상정(非想定)에 이르고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가셨으며 멸진정에서 일어난 뒤에 비상정과 나아가 4선ㆍ3선ㆍ2선ㆍ초선에까지 들어가셨고 다시 초선으로부터 2선ㆍ3선ㆍ4선에 들어가셨으며 그 정으로부터 일어나시자마자 열반에 드셨다. 

그때에 대지가 진동하고 유명(幽冥)은 크게 밝아졌으며, 

하늘에서는 향과 꽃비를 큰 모임 위에 뿌렸다. 

법왕ㆍ제석ㆍ귀신ㆍ하늘 등은 저마다 게송을 지어 읊었으며, 

모든 비구들은 몹시 슬퍼하여 통곡하다가 기절하기도 하였다.

아나율(阿那律)이 말하였다.

‘그만 그치시오. 

모든 하늘들이 공중에 가득한데 비구들이 모두 슬프게 울부짖고 시끄럽게 하면 괴이하다고 책망할까 두렵소.’

이런 타이름을 듣고는 서로 억제하며 우러러보았다.”


(5) 종후빈렴상(終後殯殮相)

경에서 말하였다.

“모든 비구들이 밤을 새워 법을 강(講)하다가 날이 밝아졌다.

아나율이 아난에게 말하였다.

‘성(城)으로 들어가 ≺여래께서 이미 멸도하셨으니 마땅히 할 일을 알아야 한다≻고 알려 주시오.’

아난이 가서 알리니 듣자마자 소리 내어 슬피 울었으며, 

저마다 향과 꽃과 악기를 가지고 나무로 나와 공양하여 마쳤다.

하루가 지난 뒤 사리(舍利)를 상(床) 위에 안치하니 모든 하늘들이 모서리를 들고 성의 동쪽 문으로 들어가 온 거리를 돌았고 그러자 나라 사람들이 모두 나왔다. 

다시 성의 서쪽 문으로 나가 높게 보이는 곳에 모시자 하늘들의 뜻에 따라 7일 동안 멈추어 계시어 공양할 수 있었다. 

또 북쪽 문으로 나와 희련하(熙連河)를 건너 천관사(天冠寺) 안에서 각자 여러 기구를 차리되 전륜왕이 법에 따라 장구(葬具)를 마련하고는 향수로 목욕시킨 뒤에 솜[劫具]으로 두루 감아서 금관(金棺) 안에 모시고 바깥은 철로 만든 관곽으로 씌우고 침향(沈香)과 전단향(栴檀香)의 좋은 향을 위에 쌓고 불로 태우려 하였으나 하늘들이 그 불을 꺼버렸다. 

그것은 가섭(迦葉)을 기다렸기 때문이었다.”


(6) 모래중기상(母來重起相)

『마야경(摩耶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실 때에 부인(夫人)께서는 천상에서 다섯 가지 힘들어 하는 모양이 나타났고 다섯 가지 매우 나쁜 꿈을 꾸었다. 

그때 아나율(阿那律)이 여래를 염습한 뒤 하늘로 올라가 부인에게 알리니 부인이 듣고는 기절하였다가 깨어난 뒤에 권속들과 함께 내려왔다. 

멀리서 부처님의 관(棺)을 보고는 어쩔줄을 몰라 하다가 나아가 머리 조아려 예배하고 하늘 꽃을 뿌렸는데 대의(大衣)와 발우와 지팡이를 돌아보고는 그것들을 붙잡고 슬피 울면서 흘린 눈물이 강물을 이루었다.

부처님은 신력(神力)으로써 관 뚜껑을 갑자기 열고 합장하여 모두를 위문하고는 그 안에서 일어나 앉으시어 천(千)의 광명을 놓았으며 1천의 부처님도 합장하고 멀리서 내려오신 마야부인께 문안하였다.

‘모든 행(行)은 으레 그렇게 되는 법이니 슬피 울지 마소서.’

그리고는 여러 게송을 널리 말씀하셨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여래는 훗날에 불효(不孝)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일부러 위의 일을 행한 것이니, 

이 경을 바로 『모자상견경(母子相見經)』이라고 하라.’

곧 작별하시자 관이 저절로 닫혔으며 삼천세계가 진동하고 8부(部)는 슬픈 마음을 느꼈다.


(7) 현쌍족상(現雙足相)


경에서 말하였다.

“대가섭(大迦葉)은 파파국(波波國)에 있다가 니건(尼乾)이 하늘 꽃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는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것을 알았다. 

천관사(天冠寺)로 나아가서 부처님 몸을 뵙고자 세 번이나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관(棺)을 돌며 합장하자 부처님은 거듭 관에서 두 발을 내미셨으며 다른 빛깔이 있었는데 자세히 묻고 나서 여인의 눈물로 더럽혀졌다는 것을 알았다.

4부(部)와 모든 하늘들이 부처님 발에 예배하였고 잠깐 만에 저절로 들어가 버렸으며 가섭이 관을 세 바퀴 돌면서 게송을 외우자 타지 않던 불이 저절로 타게 되어 수신(樹神)이 나중에 불을 껐고 향과 꽃으로써 공양하였다.”

『장아함경』에서는 말하였다.

“밤새도록 다 탄 뒤에 홀연히 네 그루의 나무가 생겨났다.”


(8) 천상인중분골상(天上人中分骨相)


두 권의 『니원경』에서 말하였다.

“모든 왕들이 4병을 엄히 차리고 와서 청하였다.

‘옳게 분배해 주면 화평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힘으로 다투겠오.’

어떤 바라문이 말하였다.

‘여래의 유신(遺身)은 널리 일체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것이므로 당연히 나누어 가지고 공양해야 합니다.’

그리고는 먼저 윗어금니를 아사세왕(阿闍世王)에게 보내 주어 몸을 다치고 기다린 것에 대하여 보답하였으며 돌병에 꿀을 발라서 그것을 여덟 나라에 분배하였는데 병에 묻는 것을 청하였으므로 의논하여 그에게 주었다. 

또 땅에 남은 재와 숯을 청구한 것만도 49섬이나 되었고, 

그것에 의하여 49기(基)의 탑(塔)을 세웠으며 모든 왕들은 자신의 몫을 얻어 가지고 가서 곧 8기의 탑을 세웠고 병과 재와 숯과 머리카락을 가지고 세운 것이 11기나 되었다.머리카락은 살아 계실 때의 것이다.

처음 아직 분배하기 전에 제석천과 모든 용왕들이 와서는 사리(舍利)를 요구하며 말하였다.

‘만약 사리를 주지 않으면 힘으로 조복시키겠소.’

그리하여 함께 세 등분으로 나누어 한 몫은 모든 하늘에게 주고 한 몫은 용왕에게 주었으며 한 몫은 여덟 나라에 주었다. 

유야리(維耶離:비야리국)에는 높이 49길[仞]이나 되는 보배 탑을 세웠다.”

『아육왕경(阿育王經)』에서 말하였다.

“모든 왕에게 분배하자 각자 8만 4천 과(顆)의 사리를 얻었으며 부처님의 입 위의 윗수염은 감히 취하는 이가 없었는데 아사세왕이 처음 왔을 때에 부처님께서 멸도하셨음을 듣고 수레 안에서 몸이 땅에 쓰러지며 기절하였으므로 그의 마음을 중히 여겨 짐짓 그에게 주었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 난타용왕을 만났는데 힘으로 빼앗으려 하였으므로 윗수염을 그에게 주었더니 그는 수미산(須彌山) 아래에 있는 물의 높이가 8만 4천 리(里)까지 솟은 곳에 수정탑(水精塔)을 세웠다. 

아육왕이 그 사리를 거두려고 귀신에게 명하여 철 그물을 만들고 바다에 던져 용왕을 포획하려고 하였으므로 용은 두려워하면서 아육왕이 잠드는 것을 엿보았다가 그대로 받쳐 들고 바다 궁전으로 데려와서는 높고 큰 탑을 보이고 곧 용서를 빌면서 말하였다.

‘부처님과 나는 ≺겁(劫)이 다할 때까지 모든 경계(經戒)와 가사(袈裟)와 응기(應器)를 이 탑에 간직하였다가 미륵(彌勒)이 내려오셨을 적에 다시 내놓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무너뜨리면 안 됩니다.’

아육왕은 이 말을 듣고 용서하고 위로 나왔다.”





5. 성범후윤(聖凡後胤)


대저 법왕(法王)이 세간에 출현하면 세속을 깨우침이 우선이 되거니와
세속에서는 곧 조상으로서 증조와 고조를 배워 익히니
족씨(族氏)의 인연을 계속 이어받기 때문이다. 


세속에 따라 성씨의 이름을 갖는 것은 앞에서 나열한 것과 같다.


법(法)의 문에서 지키는 것은 막음이 없음을 첫째로 삼기 때문에
4성(姓)으로서 법에 들어온 이는 모든 차별이 없어져 버리고
다만 법의 종성에 의지하여 대를 잇게 된다.


그러므로 『증일아함경』에서 말하였다.

“4하(河)가 바다에 들어가면 다시는 본래의 이름은 없고
똑같이 대해(大海)라고 부르게 되는 것과 같이
4성(姓)이 출가하면 다시는 본래의 성(姓)이 없고
다만 사문(沙門) 석가자(釋迦子)라고 할 뿐이다. 


그 까닭은 태어남은 나로 말미암으며
이루어지는 것은 법으로부터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마땅히 방편을 구하여 석자(釋子)가 될 수 있어야 하며
마땅히 이와 같이 배울 것이다.”


『미사색』과 『장아함』에서도 말하였다.

“나아가 미륵불(彌勒佛) 때에 모든 비구들의 성은 자(慈)였으니
모두 자자(慈子)라고 부를 것이다.”




1) 종형조달생멸상(從兄調達生滅相)

『중본기(中本起)』에서 말하였다.


“부왕은 가섭(迦葉) 등 천 인(人)이 마음은 정묘하지만
형상이 누추하고
겉의 용모가 보잘것없는 것을 보고
곧 종족(宗族)으로서 위의가 있는 이들을 선발하여
부처님의 모습을 빛내려고 하였다. 



그러자 저마다 아주 화려하게 장식하였고
구경하는 이들이 길을 메웠는데
그들이 부처님께로 오려고 할 때에
조달(調達)은 관(冠)이 떨어졌고
화리(和離) 코끼리가 엎어졌기 때문에
점쟁이는 상서롭지 못하다고 하였으나
모두 출가하기를 청하자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대개 사문이 되는 것은 진실로 쉬운 일이 아니다. 

너는 집에 있으면서 단(檀)을 나누어 보시나 하여라.’


이렇게 세 번을 말씀하시자
조달은 ‘부처님이 나를 질투하는 것이다’라고 나쁘게 생각하면서
곧 스스로 머리를 깎고 범행(梵行)을 수행하였다.


뒷날 5역(逆)을 범하여 산 채로 지옥에 떨어지면서
입으로는 ‘나무(南無)’를 불렀다. 


이내 부처님께서는 수기(授記)하시기를
‘뒷날 해탈하여 벽지불(辟支佛)이 될 것이며
이름은 나무(南無)라고 하리라’고 하셨다.



목련(目連)은 64음(音)을 이해하는지라
지옥으로 가서 그를 위로하였는데, 

대답하기를, 

‘나는 아비지옥에 누워서 고통을 받을 때라도 게으름이 없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대론(大論)』에서 말하였다.

“가리(迦離)가 사리불(舍利弗)을 비방하였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연화지옥(蓮花地獄)으로 들어갔다.”




2) 종제나율발제출가상(從弟那律跋提出家相)


『사분율』에서 말하였다.

“아나율의 어머니는 그를 위하여 삼시전(三時殿)을 지어
채녀(婇女)들과 재미있게 즐기게 하였으나

그는 형 마하남(摩訶男)에게 집안일을 맡기고
자신은 석씨 종족 8인과 동시에 출가하였으며

먼저 우파리(優波離)를 득도(得度)시켰는데, 

그것은 마음에 오만함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그때에 발제가
혼자 나무 사이에 앉아 있다가 밤중에 큰 소리로 외쳤다.

‘아주 즐겁구나.’


그 일을 부처님께 아뢰었다.

‘제가 출가하기 전 집에 있을 때에는 안팎에서 호위하고 있는데도 오히려 두려움이 있었으나
지금은 홀로 무덤 사이에 있는데도 두려움이 없게 된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저는 벗어남[出離]에서 즐거움을 생각하였으므로 그러하였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장하구나. 

석자(釋子)야, 

이 도(道)는 매우 유쾌하느니라.’”


3) 제손타라난타출가연(弟孫陀羅難陀出家緣)


『보요경』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가유국(迦維國)에 계셨다. 

아난을 데리고 성으로 들어가 걸식하셨을 때 난타가 누각 위에 있다가 멀리서 보고 부처님께로 내려와 발우를 가져다 밥을 담아 드렸으나 받지 않고 가지고 가게 하셨다. 

동산까지 이르렀는데 억지로 출가하게 하면서 일곱 개의 고요한 방[七靜室]에 두고 문을 걸어 놓았다. 

뒤에 몰래 도망쳐서 돌아가다가 길에서 부처님을 만났는데 나무가 스스로 숨겨 주지 않았으니 부인을 보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다. 

부처님께서 데리고 천상으로 올라가 곧 천녀(天女)의 계책을 듣게 되었고 오는 길에 지옥에 들러서 지옥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로 두려워하게 하였다.”

부처님께서 애꾸눈 원숭이에 비유해 그를 비방한 일은 잡장(雜藏)에 나타나 있으며 아난(阿難)이 게송으로써 그를 비방한 것은 다음과 같다.

마치 숫양[羝羊]이 뿔로 서로 받을 적에

앞으로 나갔다가 다시 물러나는 것 같나니

그대가 계(戒)를 지니려고 하였던

그 일도 역시 이와 같구나.운운


4) 나운출가연(羅雲出家緣)

『미증유경(未曾有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은 목련으로 하여금 본성(本城)에 가서 부처님과 세 분의 숙부께 문안드리고
아울러 야수다라(耶輸多羅)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도록 하였다.

‘사랑의 집착을 끊고 아들을 낳아서 출가시켜 성도(聖道)를 얻은 뒤에
돌아가 어머니를 제도하여 태어나고 죽는 근본을 끊게 하라.’

모두가 부처님의 마음을 따랐다. 


부모는 또한 호족(豪族) 50인에게 명하여
각각 아들 하나씩을 버려 나후라(羅睺羅)를 따라가게 하였으니 그때의 나이는 9세였다. 


부처님은 아난으로 하여금 머리를 깎아 주게 하였고
아울러 50인이 일시에 출가하였으니
사리불을 화상(和上)으로 삼고 목련을 아사리(阿闍梨)로 삼아 10계(戒)를 주었다. 


이어 선제라(扇提羅) 등을 말해 주어 행함이 없이
보시를 받으면 뒤에 죄보(罪報)를 받는다고 하자
곧 도(道)를 버리려고 하였으나
거듭 그들에게 설법하시자 마음이 열리고 뜻이 풀렸다.”



『보요경』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돌아와 궁중으로 들어오시자
구이(瞿夷:야수다라)는 나운을 이끌고 와서 머리를 조아렸다. 



그때 왕과 신하들은 의심을 품어
≺부처님께서 출가하신 지 12년이 되었거늘
어디서 아들이 나왔단 말인가?≻라고 생각하였는데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아이는 나의 아들이며
나로 인하여 화생(化生)한 것이니 구이를 허물치 마시오.’”



『미사색』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스스로 나후라를 데리고 돌아가서
사리불로 하여금 득도(得度)시키게 하자
정반왕은 그 일을 듣고 말하기를, 

‘나라의 후사가 영원히 끊어졌다’고 하며, 

몹시 괴로워하면서
비구들이 함부로 사람을 득도시키지 못하게 하도록 청하였다.”



승우(僧祐)의 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율(律)과 경(經)의 사연이 크게 다른 것은
진실로 대하는 정(情)이 같지 않았기 때문에
그 설(說)이 두 가지가 있게 되었으리라. 


또 살펴보건대 석씨 종족이 왕성할 때에 그 구름이 적택(赤澤)에 깔렸으니
비록 법과 세속이 진실로 다르다고 하더라도
도를 얻게 됨은 동일한 것이다. 


난타가 영욕(榮欲)을 버리고 도를 따랐고
나운이 전륜왕[輪王]의 지위를 버리고 법을 이어받았으며
전단(栴檀)이 주위를 에워싸고 용상(龍象)이 많은 무리를 이루었으니, 

친한 이도 없고 소원한 이도 없이 응(應)함에 따라 제도하셨다. 

조어사(調御士)의 아름다움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5) 석가이모출가연(釋迦姨母出家緣)

『중본기경』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본국으로 돌아가시자 대애도(大愛道:마하파사파제)가 아뢰었다.

‘나는 듣건대 여인도 출가하면 네 가지 도과(道果)를 얻는다고 하였으니, 

원컨대 출가할 수 있게 해 주소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만두십시오. 

여인이 법에 들어오면 범행(梵行)을 궁구하여 펴지 못합니다.’

이와 같이 세 번이나 말씀하셨으므로 물러나왔다. 

뒷날 거듭하여 청하였으나 앞에서와 같이 허락하지 않으셨다. 

곧 다시금 여인들과 함께 부처님을 따라가 강가에 머물러 있으면서 앞에서처럼 청하였으나 역시 허락하지 않으셨으므로 물러나 문 밖에 있으면서 맨발로 서서 울고 있었다.

아난이 그것을 보고 까닭을 물었더니 자세히 대답해 주었으므로 곧 그를 위하여 나아가 청하니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만두어라, 

그만두어라. 

마치 남자가 적고 여인이 많으면 그 집안은 쇠약해지는 것처럼 여인이 출가하면 법이 오래 머무르지 못하느니라.’

널리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거듭하여 청하였다.

‘부처님을 양육하여 자라고 크도록 해 주신 분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진실로 그런 은혜가 있다. 

그러나 내가 성불(成佛)하게 되어 받게 된 은혜도 역시 많다. 

삼보에게 귀의하고 4제(諦)를 의심하지 않게 되었으며 5근(根)에 대한 믿음이 서고 5계(戒)를 받아 지닐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나로 말미암아서이니라. 

가령 여인이 사문이 되어서 8경(敬)의 법을 위반함이 없고 모조리 받아 행하게 된다면 법률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느니라.’

아난이 나가서 그 일을 말하자 곧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경히 받들겠다고 하였다.

또 말씀하셨다.

‘여인을 득도시킴으로써 나의 정법(正法)은 나중 5백 년이 줄어들고, 

이학(異學)이 받들어 공경함은 점점 쇠미(衰微)해질 것이다.’”

『대방편경(大方便經)』에서 말하였다.

“하늘의 악마와 나쁘고 삿된 이들이 불ㆍ법ㆍ승을 헐뜯게 될 것이기 때문에 득도를 허락하지 않으시니 아난이 청하였다.

‘여래께서는 어찌 과거의 부처님께서 4부중(部衆)을 완전히 갖추셨던 것과 같지 않으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큰 정진(精進)을 일으켜 8경법(敬法)을 닦으면 되느니라.’

또한 말씀하셨다.

‘미래 세상 동안 모든 선여인(善女人)들이 아난의 은혜를 생각하며 이름을 부르고 공양한다면 아난은 큰 위신(威神)으로써 소리에 응(應)하여 도와 줄 것이니라.’”

승우 율사는 말하였다.

“우러러 생각하건대 3세의 모든 부처님께서는 4부(部)를 모두 다 갖추고 계셨다. 

그런데도 교담미(憍曇彌)가 법에 들어올 것을 청하자 성급하게 거부하면서 막으셨다. 

이것이 어찌 여인의 죄장이 두터워서 바야흐로 도를 닦는 데 좀[蠱]이 되기 때문에 뼈를 깎는 노력으로 닦도록 하기 위해 배격함으로써 장래에 보다 힘쓰게 하신 것이 아니겠는가?”


6) 석가부왕니원기(釋迦父王泥洹記)

경에서 말하였다.

“부왕(父王)이 병이 위중해지자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목숨이 끊어짐은 염려할 것이 없으나 여러 아들들이 왕사성(王舍城)에 있으니 여기에서 50유순이나 떨어져 있는 것이 한스럽다. 

부처님은 큰 자비의 신통으로 모든 것을 사무치게 보시리니, 

원컨대 가까이하여 가르침을 드리게 해 달라.’

부처님께서 근심하시며 기다리시다가 방금 돌아가시려는 것을 들으시고는 곧 난타와 아난과 나후라에게 각자 살아 계실 적에 속히 가 뵙자고 말씀하시고 곧 신통력으로 홀연히 그곳에 가 이르셨다. 

그리고는 큰 광명을 놓아 아픈 곳을 비추어 드리고 금빛 팔을 왕의 이마 위에 대고는 경법(經法)을 설하시니, 

왕은 크게 기뻐하면서 부처님의 손을 끌어다 가슴 위에 올려 놓고 마음속으로 부처님께 예배하며 홀연히 저 세상으로 가셨다.

모든 석씨들이 향즙(香汁)으로 몸을 씻기고 감아서 염(殮)하고는 관(棺)에 모신 뒤에 부처님과 난타는 상(喪) 앞에 엄숙히 서 계셨고 아난과 나운은 발치에 서 있었다. 

부처님께서 세간 사람으로 불효(不孝)하고 흉모한 이들을 생각하여 법의 교화를 베풀면서 짐짓 몸소 관을 메려고 하시자 대천세계(大千世界)가 울룩불룩 솟아올랐다 내려갔다 하였다. 

욕계(欲界)의 모든 천(天)ㆍ용(龍)ㆍ신(神)이 관을 메기를 청하였으므로 부처님께서는 4왕으로 하여금 관을 어깨 위에 메도록 하고 당신은 향로를 가지고 앞에 서서 갔다. 

백천의 아라한들이 날아오자 바다의 섬으로 가서 향나무를 가져오도록 명하시고는 크게 쌓아 놓고 화장(火葬)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생사를 여의는 법을 말씀하시고는 우유로 불을 끈 뒤에 사리를 극함에다 넣고 탑을 세우셨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부왕께서는 행(行)이 청정하였으므로 정거천(淨居天)에 나셨느니라.’”

승우 율사가 말하였다.

“나는 관찰하건대 무상(無常)의 변화는 너무도 심하여 본디 형상이 있는 것은 이를 면하지 못한다. 

생각하면 천존(天尊)께서 질환을 돌보아 주셨는데도 그 수명을 연장하지 못하셨고 금 손바닥을 가슴에 대셨는데도 구제할 도리가 없었다. 

그러므로 성인은 오래 사는 과보를 닦으면서도 파초나 거품 같은 몸은 기르지 아니한다.”


7) 석가모씨등천불왕상(釋迦母氏登天佛往相)

부처님께서 도리천(忉利天) 환희원(歡喜園)의 질다수(質多樹) 아래에서 석 달 동안 안거하시고 광명으로 대천세계를 비추시니, 

광명 안의 천 송이의 꽃에는 모두 화불(化佛)이 계셨다.

부처님께서 문수(文殊)에게 말씀하셨다.

“지금 오신다면 예배하고 공경하리라.”

어머님이 듣고 나서 젖을 흘러 내려 여래의 입으로 들어갔다. 

곧 문수와 함께 부처님께로 오셨으므로 여래는 범음(梵音)을 내어 말씀하셨다.

“몸이 지나는 곳은 모두 고(苦)와 낙(樂)이 함께하게 되니, 

마땅히 열반을 닦아야 영원히 고와 낙을 여의게 됩니다.”

마야부인은 법을 듣고 수다원(須陀洹)의 과위를 얻었다.

석 달이 거의 되가자 부처님께서는 구마라(鳩摩羅)로 하여금 염부제(閻浮提)에 가서 “여래는 내려가서 열반에 들려고 한다”고 말하게 하였다. 

제석(帝釋)은 세 갈래 길에 계단을 만들었으며 부처님은 어머님과 작별하고 보배 계단을 밟아 내려가셨고 범천(梵天)은 일산을 붙잡고 4왕은 모시고 호위하였으며 사부대중은 인도하고 따르면서 허공을 가득 채웠고 모든 왕들은 크게 모여서 기원(祇園)에서 받들어 맞이하였다.

승우는 말하였다.

“삼가 생각하건대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지 7일 만에 어머니는 도리천에 올라갔으니 3세의 부처님 법에는 저절로 그렇지 않은 적이 없었다. 

마야부인은 인(因)을 쌓아서 화(化)에 의탁하여 성인을 탄생시킨 것이므로 이미 천사(天師)가 되셨는데도 바야흐로 그 젖을 맛보게 하였고 이미 열반에 들고 나서도 돌아와 공경을 드리게 되었으니 보답하려는 덕(德)이 이러한 정도까지 이르렀도다.”


8) 석가이모대애도니원연(釋迦姨母大愛道泥洹緣)

마하파사파제(摩訶波闍波提)는 당(唐)나라 말로는 대애도(大愛道)이며 또한 구담미(瞿曇彌)라고 한다.

이모 대애도가 대중에게 말하였다.

“나는 차마 부처님께서 멸도(滅度)하시는 것을 보지 못하겠다.”

그리고는 5백의 제근녀(除饉女)곧 비구니이다. 

강승회(康僧會)의 법경(法鏡) 주석에 말하기를, 

“성도(聖道)로써 6정(情)의 굶주림을 끊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붙였다”고 하였다.와 함께 부처님께 나아가 예배드린 뒤에 아뢰었다.

“먼저 멸도하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잠자코 계시자 손으로 부처님의 발을 어루만지면서 말하였다.

“이것이 여래를 뵙는 최후입니다.”

부처님은 그들을 위하여 육신은 고통이며 멸도는 안락한 것임을 말씀하셨다.

모든 비구니들은 예배하고 정사(精舍)로 돌아가서 5백 개의 자리를 펴고 곧 신족(神足)을 나타내어 위로 모든 하늘을 감동시키고는 동시에 열반에 들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성에 들어가서 두루 알려 공양하도록 하라.”

이에 사유(闍維:화장)하고 나서 사리(舍利)를 받쳐 들고 부처님께로 나왔으며, 

사방에선 천 명의 비구들이 날아와서 자리에 앉았다.

부처님은 아난으로 하여금 사리를 가져다 발우에 담게 하시고는 두 손으로 받으신 뒤에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무더기의 사리는 본래 더러운 몸으로 도(道)를 무너뜨리고 덕(德)을 깨뜨리며 음모와 질투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어머님은 어리석은 번뇌를 능히 뽑아 내고 장부의 행(行)을 닦으셨으므로 정신이 본래부터 없는[本無] 곳으로 옮겨 가셨다. 

4중(衆) 8부(部)는 탑을 세워 공양하라.”

모두 대답하였다.

“예, 

그렇게 하겠나이다.”

『잡아함경』에서 말하였다.

“난타를 친히 낳은 어머니이다.”

『증일아함경』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아난과 난타와 나운으로 하여금 대애도의 상여를 메게 하고 친히 공양하셨다. 

제석과 사천왕이 공양하려고 하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만두어라, 

그만두어라. 

부모는 아들을 낳으셨으므로 은덕이 많다. 

반드시 은혜를 갚아야 하고 갚지 않을 수 없느니라. 

3세의 모든 부처님도 어머님이 먼저 멸도하셨고 모두가 스스로 공양하셨으며 사리(舍利)를 사유(闍維)하셨느니라.’

부처님 자신도 상여의 한쪽 다리를 드셨다. 

아난도 함께 들고 무덤 사이로 날아갔으며 부처님은 전단(栴檀)을 취하여 그 몸 위에 쌓은 뒤 곧 네 사람이 탑을 일으켜 공양해야 함을 말씀하셨으니, 

이는 모두 10선(善)으로 만물을 교화하기 위한 까닭이었다.”

승우의 말을 잘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모의 덕(德)이지만 그 은혜는 낳으신 분과 같았기 때문에 무거운 상여를 메시어 어릴 때 길러 주신 은혜에 보답하신 것이다. 

그렇게 하신 까닭은 과보를 전하면서 은혜를 갚지 않는 사람들을 힘쓰게 하려는 까닭이었다.”


9) 석가족유멸상(釋迦族流滅相)

『장아함경』에서 말하였다.

“바사닉왕(波斯匿王)이 석씨(釋氏)에게 장가들고 여종을 아내로 맞아 태후(太后)를 삼으니 아들 유리(流離)경에서는 말하기를, 

‘처음 맞이할 때에 모든 석씨들이 말썽을 일으켜 서로 다투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를 낳았다. 

나이 8세가 되자 외가(外家)로 가서 활쏘기 등 여러가지 기술을 배우게 하였다. 

그때 새 강당을 지어 부처님과 스님들을 청하여 맨 처음 공양하고자 하였는데 유리가 함부로 올라가서 사자좌(師子座)에 앉았으므로 모든 석씨들이 팔을 붙잡아 끌어내 쫓아버렸다. 

그러자 유리는 원망하고 탄식하면서 좌우의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왕위를 이어받을 때를 기다려 이 일을 말해 주리라.’

그리고 뒷날 왕위를 이어받아 병사들을 엄히 하여 거느리고 갔는데 부처님께서 그 일을 듣고 말라 죽은 나무 아래 앉아 계셨다. 

왕이 보고는 예배하며 묻자 대답하셨다.

‘친족의 그늘은 본래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들보다는 낫느니라.’

이 말씀을 듣고 군사를 되돌려 돌아왔는데 아첨하는 신하들이 거듭 참소(讒訴)하였으므로 다시금 병사들을 모아 나아갔다.

목련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그 병사들을 다른 지방에 던져 버리겠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석씨 종족의 전생의 업(業)을 가져다 던져 버리겠단 말이냐?’

또 ‘철망(鐵網)으로 성을 덮어 씌우겠다’고 하고, 

또 ‘성을 들어 올려 공중에다 놓아 두겠다’고 하는 것을, 

부처님께서는 모두 위와 같이 말리면서 말씀하셨다.

‘업(業)이 성숙되면 보(報)를 받는 것이므로 그의 뜻을 빼앗을 수가 없느니라.’

이때 모든 석씨들은 1유순 안에서 멀리 있는 왕의 군사를 쏘면서도 병기만을 맞혔을 뿐 몸은 상하지 않게 하였다. 

유리가 매우 두려워하고 있는데 다시 아첨하는 신하가 간하였다.

‘모든 석씨들은 계(戒)를 받은지라 반드시 사람을 해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병사들이 가서 성을 포위하고 감히 나오는 이들이 없었는데 석씨의 동자(童子)들이 홀로 성 위에 의지하고 군사들에게 활을 쏘았으므로 죽는 이들이 수없이 많았다. 

이로 인하여 그들은 다시 흩어졌다.

석씨 종족들은 그들을 불러 내리고 말하였다.

‘너희들은 나이도 어리거늘 어찌하여 우리 문중을 욕되게 하느냐? 

사람을 죽이는 죄는 막중한 것이니, 

빨리 이 나라에서 나가거라.’

이에 네 명의 어린아이는 예배하고 물러나 성을 나갔다. 

여러 나라에서 그 말을 듣고 그들을 추대해 왕으로 삼았으니 지금의 오장국(烏長國) 왕이 곧 그의 후예이다. 

유리는 다시 병사를 집합시키고 문을 열게 하였다. 

병사들이 성으로 들어가자 모든 석씨들을 잡아 다리만을 땅에다 묻고 코끼리로 밟아 죽게 하였으며, 

5백 명의 여인들을 잡아다 자신들의 소유로 만들려고 하였는데 모든 여인들이 욕설을 퍼붓자 곧 손발을 베어 버렸다. 

마하남(摩訶男)이 물로 들어가면서 그 동안이라도 석씨들을 석방시켜 줄 것을 청하였으므로 그 말을 좇아 놓아 주었으나 업(業)이 뒤바뀌어 다시 들어갔다. 

왕이 물에 들어가서 너무나 오래 있는 것을 괴이하게 여기어 가서 찾아보게 하였더니 이미 죽어 있었다. 

왕은 후회하면서 곧 중지하였으나 무릇 9천9백90만 명을 살해하여 그 피가 흘러 강물을 이루었다. 

군사를 되돌려 사위(舍衛)로 돌아갔다. 

또한 태자 기타(祈陀)를 죽였으나 부처님께서는 그가 천상에 가 태어날 것을 수기하셨으며, 

석씨 여인들이 손발이 잘려 구덩이에 있으면서도 부처님을 생각하였으므로 부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로 가셨고 하늘은 옷과 밥을 주었으며 곧 그들을 위하여 설법하여 모두 천상에 태어나게 되었다. 

부처님께서 가비라(迦毘羅)의 동쪽 문에 이르러 불길에 싸여 훨훨 타고 있는 것을 보시고 니구율(尼拘律)나무 아래로 가서 앉으시고는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성의 속이 텅 비게 되어 갈 곳이 없게 되었구나.’

곧 사위성에 이르러 말씀하셨다.

‘왕과 군사들은 7일 뒤에 모두 멸망할 것이다.’

이 말씀을 듣고 모두가 매우 두려워하면서 외구(外寇)가 있을까 염려하였으나 7일이 다 되었는데도 편안한지라 스스로 경축하면서 병사들을 데리고 하천으로 나갔다. 

그런데 갑자기 천둥소리가 크게 울리고 폭풍이 불며 소나기가 내리면서 일시에 물에 빠져 죽어 아비지옥으로 들어갔으며 궁전은 하늘에서 내린 불로 타버렸다. 

부처님은 곧 옛날에 모든 석씨들이 고기를 잡았던 본사(本事)를 말씀하셨다.”

『석씨죄필경(釋氏罪畢經)』에서 말하였다.

“왕이 군사를 되돌려 돌아온 뒤에 사신(使臣)을 보내어 부처님께 공경을 드리게 하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왕은 자기 몸을 스스로 사랑할지니라. 

석씨의 죄는 모두 다하였으며 이로부터 7일 뒤 태산귀(太山鬼)가 불로써 왕을 핍박할 것이니라.’”문장이 많으므로 기재하지 않는다.

『법구비유경(法句譬喩經)』에서 말하였다.

“목련은 부처님의 설법을 들었으나 마음은 오히려 그만두게 못하여 사이국(舍夷國)으로 가서 아는 이들 4, 

5천 명을 발우 안에다 넣고 공중에 올려놓았다. 

왕이 3억 명을 죽인 뒤에 목련은 잘난 체 뽐내면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제자는 부처님의 힘을 받들어 여러 사람들을 구제하였사온데 지금 공중에 있사옵니다.’

부처님께서 가서 보도록 하였는데 모두가 이미 죽어 있었다. 

이어 그들을 위해 설법하시자 법안(法眼)을 체득하였다.”

승우 율사는 말하였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대성(大聖)께서 경에 드리우시는 내용은 누르거나 올리시며 혹은 징계하거나 권면하시는 것이었다. 

대개 바르게 깨달으신 세존께서는 온갖 번뇌가 오랫동안 끊어져서 티끌 같이 많은 겁[塵劫]을 지났다 해도 과보는 남아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이신 것이니, 

석종(釋種)의 멸망은 힘으로 면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것은 실로 살생(殺生)을 하지 못하게 하는 깊은 경계요, 

업(業)을 삼가하라는 분명한 규약이다.”


10) 유적원근연(遺跡遠近緣)

원래부터 글이 빠지고 없다.


11) 석가죽원정사연(釋迦竹園精舍緣)

율(律)에서 말하였다.

“마갈왕(摩竭王)이 생각하기를, 

‘부처님께서 처음 이르게 되는 동산을 곧 보시하여 머무르게 하리라’고 하였다.

부처님께서 이 생각을 아시고 곧 죽원(竹園)으로 가셨다.

왕은 곧 금병(金甁)에 물을 담아 부처님께 드리면서 그 동산을 부처님께 바치려고 하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땅히 부처님과 스님에게 보시해야 합니다. 

만일 이것이 부처님만의 물건이라서 능히 쓸 수 없는 것이라면 공양함이 마치 탑과 같기 때문입니다.’

왕은 곧 분부하신 대로 부처님과 스님에게 보시하였고 갖가지로 장엄하고는 여러 가지 살림을 갖추게 하였다.”겨울이나 여름이나 언제나 무성하였으므로 한림(寒林)이라고도 하였다.

『중본기』에서 말하였다.

“본래는 외도(外道)들에게 보시했던 것을 국왕이 지난 일을 뉘우치면서 부처님께 바치려고 하였으므로 대귀장군(大鬼將軍)이 열차(閱叉:夜叉)에게 명하여 외도들을 매로 때리게 하니 외도들은 두려워하면서 버리고 떠났으며 그 뒤에 부처님께 받기를 청하였다.”

『보살장경(菩薩藏經)』에서 말하였다.

“과거의 모든 부처님께서 이 동산에서 노니셨던 것이니, 

만일 어떤 이라도 들어가면 저절로 욕심이 없게 되고 또한 독한 마음이 없게 된다.”


12) 석가기원정사연(釋迦祇園精舍緣)

『현우경(賢愚經)』에서 말하였다.

“사위(舍衛)에 수달다(須達多)라는 대신(大臣)이 있었는데 재물과 보배가 한이 없고 가난한 이들을 구제해 주었으므로 이름을 급고독(給孤獨)이라 하였다. 

일곱의 아들에게는 남다른 재능이 있었으며 막내아들을 장가들이려고 왕사성에 갔다가 부처님이라는 이름을 처음 듣고는 마음으로 크게 기뻐하였다. 

뒤에 부처님을 뵙고 초과(初果)를 얻었으며 부처님께 동산으로 돌아오도록 청하고 먼저 정사(精舍)를 짓기 위하여 사리불(舍利弗)과 함께 와서 태자 기타(祈陁)의 동산을 사서 금으로 80경(頃)이나 되는 땅에 두루 깔았으며 동산의 나무와 문은 태자가 지었다. 

그때 외도 3억 명이 사리불과 함께 재주를 겨루고 다투어 금원(金園)을 가지려고 하였다. 

대중들이 모두 18억 인이나 모이자 사리불이 신통을 나타내고 법을 설하였다. 

각자 도적(道跡)을 얻고는 6사외도의 제자 3억 인이 출가하여 불도(佛道)를 따랐다. 

수달다와 함께 줄[繩]을 끌고 터를 일으켰으며 6천(天)은 공중에 나타나서 부처님을 위하여 변화로 전단굴(栴檀窟)을 지었으니 따로 머물러 살 방도 1천2백 개나 되었으며, 

1백20곳에서 따로 건추(揵槌)를 치도록 만들었다. 

사찰이 완성되자 왕에게 아뢰고 부처님을 청하니, 

모두 함께 와서 보시를 받았다. 

두 사람이 같이 지었기 때문에 절이름을 두 사람 이름으로 붙였다.”

『잡아함경』에서 말하였다.

“수달다가 아팠으므로 부처님께서 가시어 병을 돌보시고는 마지막에는 3과(果)를 얻고 도솔천(兜率天)에 태어날 것이라는 수기(授記)를 내리셨다. 

본래의 서원 때문에 천상에 태어난 뒤에 부처님께로 와서 게송으로 말하였다.기재하지 않는다. 

그 밖에 아나함과(阿那含果)에 의거한 사람이 욕계(欲界)에 태어나지 않는 것은 본원(本願)이 간곡하게 열려 있기 때문이다.”

승우는 말하였다.

“살피건대 마음을 쉬기 위하여 깃드는 곳을 바로 정사(精舍)라고 한다. 

죽림(竹林)과 기수(祈樹)가 최초로 시작하였는데 어찌 그 남은 기풍과 제도가 지금까지 드날릴 수 있었겠는가? 

수달(須達)은 미묘한 과보에 있어서 이른바 뚜렷이 드러난 분이라 하겠다.”


13) 석가발조탑연(釋迦髮爪塔緣)

『십송률』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오랫동안 유랑하시자 수달(須達)이 보고 싶어하였으므로 부처님께서는 머리카락과 손톱을 주셨다. 

그리하여 탑을 세우고 난간ㆍ두공[栱]ㆍ곡계[欒]를 만들어 갖가지로 장엄하고는 언제나 공양하게 되었다.”


14) 석가천상사탑기(釋迦天上四塔記)

도리천(忉利天)의 성(城)의 동쪽 조명원(照明園)에는 불발탑(佛髮塔)이 있고, 

성의 남쪽 추삽원(麁澁園)에는 불의탑(佛衣塔)이 있으며, 

성의 서쪽 환희원(歡喜園)에는 불발탑(佛鉢塔)이 있고, 

성의 북쪽 가어원(駕御園)에는 불아탑(佛牙塔)이 있다.

『대론(大論)』에서 말하였다.

“제석은 보살의 머리카락을 가져다 천상의 성 동쪽에 탑을 세웠으며 보배옷[寶衣]을 가져다 의탑(衣塔)을 세웠으니, 

이것은 아직 성불하시기 전의 일이다.”

『경률(經律)』을 살피건대 인간 세계 안에도 4기의 큰 탑이 있다.

생처탑(生處塔)은 가유라위국(迦維羅衛國)의 임미원(林微園) 가운데에 있다.

성도탑(成道塔)은 마갈제국(摩竭提國) 선승도량(善勝道場)의 원길수(元吉樹) 아래에 있다.

전법륜탑(轉法輪塔)은 바라나국(波羅奈國) 선인주처(仙人住處)의 녹야원(鹿野菀) 가운데에 있다.

열반탑(涅槃塔)은 구이나갈국(拘夷那竭國) 역사생지(力士生地)의 수림쌍수(秀林雙樹) 사이에 있다.

또 『성적기(聖迹記)』를 살펴보면 4대탑(大塔)이 있다.

승우의 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지인(至人)이 세간에 처하게 되면 그 이익됨이 넓고 커서 머리카락ㆍ손발톱ㆍ옷ㆍ발우 등도 모두 법사(法事)가 되는 것이다. 

때문에 보탑(寶塔)에서는 노을이 일어나 널리 천상과 인간에 은혜를 입힌다. 

탑을 만든 근원은 몸을 여기저기에 흩어 놓은 것만이 아니다.”


15) 우전조석가전단상연(優塡造釋迦栴檀像緣)

『증일』에서 말하였다.

“제석이 부처님께 천상에 계실 것을 청하였을 때 어머님을 위하여 설법하셨으며, 

부처님께서는 4중(衆)이 게으름을 피울까 염려하시어 시자(侍者)를 데려오지 않으시고 혼자 천궁(天宮)에 계셨다. 

그때 우전왕(優塡王) 등은 모두 여래를 사모하여 곧 솜씨 좋은 공장에게 명하여 전단(栴檀)으로 높이 다섯 자의 부처님 형상을 조성하게 하였다.”

『관불삼매경(觀佛三昧經)』에서 말하였다.

“우전왕은 금으로 상(像)을 주조하여 부처님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때 상을 같이 싣고 가서 영접하고 예배드렸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오는 세상에 크게 불사(佛事)를 지으리니, 

나의 제자들을 모두 너에게 부촉하노라.’

공중에서 변화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어떤 이라도 부처님의 형상을 조성하여 공양하면 반드시 염불청정삼매(念佛淸淨三昧)를 얻으리라.’”


16) 바사닉왕조금상기(波斯匿王造金像記)

『증일』에서 말하였다.

“왕은 부처님을 오랫동안 사모하다가 드디어 병을 얻었는데 우전왕이 부처님 형상을 만들었다는 말을 듣고 곧 공장을 불러서 금으로 조성하니 반짝거림이 마치 하늘의 금(金)과 같았고 높이는 다섯 자였다. 

그리하여 염부제에는 비로소 두 구(軀)의 불상이 있게 된 것이다.”


17) 육왕제출가조석실연(育王弟出家造釋室緣)

『구리옥경(求離獄經)』에서 말하였다.

“왕의 아우 선용(善容)이 산에 들어갔다가 범지(梵志)들이 고행하며 신선을 구하면서도 음욕의 마음이 동하여 성취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는 또 스스로 생각하기를, 

‘사문(沙門)은 쾌락을 누리면서 수행하고 있거늘 어찌 음욕이 없을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왕은 아우가 한 말을 듣고 곧 쾌락거리를 늘려 주고 7일이 지나면 죽여버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죽게 될 것을 생각한 까닭에 도무지 애정(愛情)이 없었으며 스스로 무상(無常)을 말하고 깊이 믿고 좋아하게 되어 출가하기를 청하여 뒤에 곧 4과(果)를 이루었다.”

『아육왕전』에서 말하였다.

“아우가 세간을 좋아하지 않자 곧 귀신을 시켜서 그를 위하여 성안에 높이 열 길[丈]이나 되는 산수(山水)를 만들어 주고 곧 사람들의 왕래가 끊어지게 하였으며, 

자신도 옷과 물자를 버리고 높이 한 길 여섯 자의 석상(石像)을 조성하여 굴(窟)에 모셔 두고 공양하였다.”

승우는 말하였다.

“살피건대 화상(畵像)의 시초는 높고 크게 만든 데서부터 나왔으며 여기에서 금상(金像)이나 석상(石像), 

향나무와 모시, 

혹은 주조나 조각의 방법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모두가 상호(相好)를 본뜨고 존의(尊儀)를 비슷하게 한 까닭이니 우전(優塡)이 조성한 상은 아마 신력(神力)의 변화로 된 것이 아닐까?”


18) 석가유영재석실기(釋迦留影在石室記)

『관불삼매』에서 말하였다.

“용왕이 부처님을 언제나 못 곁에 계시도록 청하면서 나쁜 마음을 일으켜 도를 이루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 

신천(神天)이 또 일체 중생을 위하기를 청하고 원하였으므로 부처님은 곧 나찰(羅刹)의 석굴(石窟)을 찾아 그 안에 머물러 계셨다. 

그러면서도 여러 나라에 몸을 나타내면서 널리 그들을 위하여 설법하였으며 부처님은 용의 청을 수락하여 1천5백 년 동안 돌 안에 계시면서 밖으로 나타나게 하셨으므로 모든 사람과 하늘들은 부처님의 그림자에 공양하였고 그림자도 또한 설법을 하였다. 

굴의 높이는 한 길 여덟 자요, 

깊이는 24보(步)이며, 

돌은 청백색(靑白色)인데 나건하나국(那乾訶那國)의 옛 선인이 있던 첨복화림(薝蔔花林)의 독룡지(毒龍池) 곁이요, 

청련천(靑蓮天) 북쪽 나찰굴(羅刹窟) 안이며, 

아나사산(阿那斯山)의 바위 남쪽에 있다.”

승우는 말하였다.

“심구하건대 법신(法身)은 형상은 없되 응(應)함에 따라 나타난다. 

비록 빈 그림자며 희미하다 하더라도 바로 그 분이 여래(如來)인 것이다. 

때문에 몸을 용귀(龍鬼)에게 버리신 채 법을 하늘의 대중에게 널리 펴신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기를, 

‘이 모든 화불(化佛)은 모두 진실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하신 말씀이리라.”


19) 아육왕조팔만사천탑(阿育王造八萬四千塔)

부처님과 4중(衆)이 읍(邑)을 돌아다니셨다.

어느 두 동자가 모래밭 가운데서 장난을 치며 놀고 있다가 부처님의 상호(相好)를 보고 큰 아이가 모래 미숫가루를 부처님의 발우 안에다 넣어 드리자 작은 아이도 따라서 기뻐하며 원을 세웠다.

“1천하(天下)의 한 산개왕(繖蓋王)이 되어서 다시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게 하소서.”

부처님은 아난으로 하여금 그 모래를 부처님께서 경행(經行)하시는 곳에 놓게 하시고 그 일로 인하여 그에게 수기(授記)하셨다.

뒤에 과연 왕자로 태어나서 이름을 무우(無憂)라 하였고 몸이 크고 추삽(麤澁)하였으므로 부왕이 보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오히려 큰 뜻이 있어 오로지 정벌만을 일삼아 땅에서 무기가 나와 향하는 곳마다 모두 조복시켜 바다 끝까지 이르렀다.

왕이 죽자 자리를 물려받았고 모든 하늘들이 정수리에 물을 부어 주었으며 신인(神人)들은 기뻐하며 경축하였다.

전(傳)에서 말하였다.

“처음 왕을 배알한 날에 철륜왕(鐵輪王)이 날아 내려와서 염부제의 왕이 되었고 허공과 땅 아래에는 각각 40리까지의 신귀(神鬼)가 신하로 예속[臣屬]하였으며, 

뒤에 위엄을 보이면서 5백의 신하를 살해하였고 모든 여인들을 태워 죽였으므로 이름을 악육왕(惡育王)이라고 불렀다. 

누타(㝹陁)를 세워 대신(大臣)을 삼았으니 곧 옛날 흙을 담을 때 따라서 기뻐했던 아우였다. 

누타는 왕에게 아뢰어 옥성(獄城)을 세워 사람들을 살해하였는데 한 번 들어간 사람은 면하는 이가 없었다. 

그런데 상주(商主) 비구가 왕을 위하여 설법하자 왕은 믿고 공경하는 마음을 내어 앞의 감옥의 일을 끊게 되었으며 부처님의 옛날의 수기(授記)대로 되었다.”

『비유경(譬喩經)』에서 말하였다.

“궁중에서는 4사(事)로써 언제나 2만의 사문을 공양하였다. 

단정(端正)이라는 13세의 사미(沙彌)가 있었는데 범지(梵志) 2만 인을 통째로 먹어 버렸다가 부처님의 교화를 받게 되었다.”

전(傳)에서 말하였다.

“왕은 도인(道人)에게 물었다.

‘살해(殺害)라는 도리가 아닌 일을 범하였는데 어떻게 하면 죄가 소멸될 수 있겠습니까?’

대답하였다.

‘오직 탑을 세우고 스님께 공양하며 죄인을 용서해 주고 가난한 이를 구제하는 것뿐입니다.’

또 신력(神力)으로 손으로 햇빛을 가려도 햇살이 뻗쳐 비추는 곳에 탑을 세웠다. 

곧 7기(基)의 큰 탑을 파괴하여 사리(舍利)를 취하고 용(龍)으로부터 보배 상자와 장엄구(莊嚴具)를 가져와서는 귀신에게 명하여 이 주(洲)에서 1억의 집마다 1기의 탑을 세울 수 있게 하니, 

곧 그 달 15일 월식(月蝕)날 동시에 8만 4천의 탑을 세우게 되었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경하하였다.

아육왕이 이미 탑을 세운 뒤 계작사(鷄雀寺)로 가자 우파굴다(優波崛多)는 권속을 데리고 마투라국(摩偸羅國)으로부터 왕에게로 날아왔다. 

그 다음에는 부처님께서 유행(遊行)하셨던 곳을 두루 지시하여 모두 표탑(表塔)을 세웠고 큰 제자들의 탑도 역시 동일하게 공양하였으며 돌아가서 정전(正殿)에 올라가 향을 피우고 크게 청하자 곧 30만 비구들이 와서 모였다. 

또 빈두로(賓頭盧)도 감통하여 와서는 손으로 눈썹털을 들어 올리고 왕을 위하여 설법하였다.

‘나는 건타마라산(揵陁摩羅山)에 머물고 있으며 같이 수행하는 1만의 아라한이 있습니다.’

왕은 널리 억백천만의 금전으로 공양하였고, 

이내 쇠하여 늙게 되자 태자가 제약(制約)하였으므로 반 개의 암라(菴羅) 열매를 보내어서 잘게 부수어 국 안에 넣고는 대중이 모두 돌려 먹게 하였으며 그리고 나서 곧 저 세상으로 갔다.

제4세(世)의 왕에 이르러서 아첨하는 신하가 왕에게 말하였다.

‘이름과 덕을 오래도록 세간에 남기려면 마땅히 모든 탑들을 파괴하소서.’

맨 먼저 계작사로 갔는데 돌 사자(師子)가 으르렁거리며 울었으므로 왕은 두려워하면서 성으로 들어가 버렸다. 

드디어 승방(僧坊)을 파괴하고 비구를 살해하고 사문의 머리를 베어 온 이에게 백 금씩의 상을 주었다. 

그때 도를 얻은 사람이 변화로 많은 머리를 만들어서 상을 타게 하여 궁중의 창고가 텅 비게 만들었다. 

아치탑(牙齒塔)의 신(神)이 원망하였으므로 이에 어떤 여부신(女父神)이 산을 밀어 젖혀 왕과 병사들을 끼워 넣어 버리자 죽지 않은 이가 없었으니, 

공작(孔雀)의 후손은 여기에서 다 죽게 되었다.”

승우의 말을 잘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8만 개 탑의 인연은 뒷일까지 기록하여 설명이 광대하고 장황한데 그것은 징험이 이미 명백하기 때문이다. 

보(譜)를 찬집(撰集)하는 근원은 본래 석종(釋種)만을 기술해야 하나 다만 탑이 아육(阿育)에게서 일어났기 때문에 공작(孔雀)을 아울러 기록했을 뿐이다. 

비록 글은 번거롭지만 탑에 관한 일은 모두 갖추었다.”


20) 석가유법종한상(釋迦遺法終限相)

『잡아함경』에서 말하였다.

“‘내가 멸도(滅度)한 지 백 년 뒤에 우파굴다(優波掘多)라는 이가 크게 불사(佛事)를 일으킬 것이며 나는 정법(正法)을 인간과 천상에 부촉(付囑)할 것이므로 그 교법(敎法)은 천 년 동안 세상에서 요동하지 않을 것이니라.’

또 제석과 4왕에게 말씀하셨다.

‘정법을 수호하고 지킨 지 천 년이 지난 뒤에는 그릇된 법이 출현하고 사나운 바람과 폭우 등 여러 재앙과 환란이 많을 것이며 사방의 여러 왕들이 비구를 살해하고 탑과 절을 파괴할 것이니라. 

나머지 12년 동안에는 모든 비구들이 나라의 중앙으로 모여들 것이요, 

구섬미왕(拘睒彌王)은 아들 난당(難當)을 낳으리니 손에는 피 칠을 한 것 같고 몸은 갑옷과 같아 뛰어난 용맹과 힘이 있을 것이요, 

5백 명 신하의 아들들도 형상이 모두 같을 것이다. 

어느 날 비가 내리면 왕위를 이어받게 되어 사방의 나쁜 왕을 토벌하고 함께 싸워 모조리 죽이고는 염부제의 왕이 될 것이니라. 

3장(藏) 비구가 왕을 위해 설법하자 큰 믿음과 공경을 내고 승가에게 무외(無畏)의 보시를 베풀 것이며 갖가지로 공양하면서 12년을 채울 것인데 이양(利養)을 얻으면서 3업(業)을 닦지 않고 스스로 몸이나 장식하여 출가한 사문은 법을 여읠 것이므로 하늘과 용이 나쁘게 생각하여 다시는 호위하지 않고 큰 소리로 외칠 것이다.’

‘이로부터 7일 뒤에는 부처님 법이 멸망할 것이다’라고 계(戒)를 말씀하신 날에 이르러 승가 안에서는 싸움이 일어나 비록 백천 사람이 있다 해도 오직 한 사람의 아라한이 있을 뿐일 것이다. 

3장 비구는 차마 계를 들려 주려 하지 않아 아라한이 들려 주려 하는데 제자들이 서로 싸워서 드디어 모두 살해하게 되어 이때에는 거의 다 없어지게 되리라. 

모든 하늘과 세간 사람들은 소리 내어 슬피 울고 대지(大地)는 여섯 가지로 진동하며 저마다 뿔뿔이 흩어질 것이므로 구섬미왕은 듣고 몹시 괴로워하게 될 것이다. 

모든 삿된 견해를 지닌 사람들은 다투어 탑묘(塔廟)를 파괴하고 비구를 살해하여 불법은 흩어지고 없어져 일시에 멸망할 것이니라.”

『법멸진경(法滅盡經)』에서는 멸망하는 형상에 대하여 “세속의 옷을 좋아하고 복식을 아름답게 입으며 술을 마시고 고기를 구우면서 여덟 가지 부정한 물건 등을 쌓아 두는 것이다”라고 자세히 설명하였다.

승우는 말하였다.

“반드시 방등(方等)의 깊고 은밀함으로써 삼보가 항상 머무른다는 사실을 진실로 알 수 있다. 

항상 머무르는 법은 이치로 보아 일어나거나 없어지는 것이 없으며, 

일어나거나 없어지거나 함이 오는 것은 바로 세간의 연(緣)을 따르는 업(業)일 뿐이니 새벽에 떠나서 서쪽으로 숨어 버려도 온갖 빛을 내는 한결같은 광명은 해치지 못하는 것이다.”

느껴서 통하게 되는 도리는 대개 사람이 만들어 내는 계책이 아니며, 

정신이 교통하고 도리가 계합하는 것은 마치 한결같은 표준이 있는 듯하다. 

앞에서의 간략하게 말한 마치는 모습은 바로 하나의 기간이 되며 크게 귀착한 데에 이르면 들쭉날쭉함이 없지 않다.

『마야경』 등의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1천5백 년에는 관법(觀法)이 청정하지 못하여 그때에는 보고 듣는 이가 없으므로 비록 세간에서 행해진다 하더라도 배우는 이가 나타나지 않을 수 있으며, 

혹은 법이 멸(滅)하게 되더라도 스스로가 수행과 활용이 있다면 언제나 존재하게 될 것이니 무슨 거리낌이 있겠느냐?”

또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여인을 득도시킴으로써 정법(正法)시대가 반으로 줄어들었으나 8경(敬)을 수행하면 다시 천 년이 회복된다.”

이러한 것 또한 수행에 의거하여 나타나고 나타나지 않음이 있을 뿐이다.

여래께서 세간에 계셨을 때에도 오히려 보고 듣지 않는 이가 있었거늘 하물며 멸도하신 뒤에 근기가 무디고 죄장이 두터운 이에 있어서이겠는가? 

진실로 멸망할 모습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였다.

“나의 정토(淨土)는 헐리지 않았는데도 여러 사람들은 모두 타서 없어진 것으로 여기니, 

어찌 밝고 어두움을 믿고 이해하는 데에 의거하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흥하고 망하는 데에 다른 길이 있겠느냐?”

또 『선견론』에 말하였다.

“불법은 세간에서 1만 년 머무르되 5천 년 동안 도를 닦은 이는 3달지(達智)를 얻거니와 나중 5천 년에 도를 닦은 이는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머리를 깎고 가사(袈裟)를 입는 이들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이로써 경론(經論)에서 서로 설명된 것을 통틀어 바라보면 더하거나 덜함이 동일하지 않으니, 

어찌 인정(人情)에 따라서 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 『입대승론(入大乘論)』에서는 말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정법을 빈두로(賓頭盧)와 라후라(羅睺羅) 등 16대(大) 아라한에게 부촉하여 불법이 머무르도록 지키게 하셨고, 

또 99억의 모든 아라한이 친히 부처님 앞에서 산가지를 받고 오래 살면서 법을 끊어지지 않게 하고 있으며, 

모든 큰 아라한들은 각각 권속을 두어 염부제와 그 밖의 세 방소와 천상에 있으면서 복전(福田)이 되어 주고 법을 보호하며 머무르기 때문이다.”시후(時候)에 관하여는 밝히지 않았다.

또 『별전(別傳)』에서는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지 8백 년 뒤에 사자국(師子國)에 경우(慶友)라는 큰 아라한이 있어 멸도하려 할 적에 널리 4중(衆)을 모아 놓고 말할 것이다.

‘부처님은 정법을 가섭 및 16대아라한에게 부촉하셨으니 4주(洲)와 천상에 오래 머물면서 법을 수호한다. 

나아가 사람의 수명이 10세까지 줄어드는 도병겁(刀兵劫)이 일어나면 모든 성인들은 그때에 잠시 동안 숨게 되고 사람의 수명이 1백 살로 늘어날 때에는 성인들이 모두 나와서 앞에서처럼 교화하고 인도하여 다시 흥성하게 될 것이다. 

사람의 수명이 6만 살까지 늘어났을 때에는 모든 성인들은 염부제에 모여서 여래의 사리를 모두 거두어 1기의 큰 탑을 일으키고 칠보로 장엄할 것이다. 

그때 공중에 솟아오른 모든 아라한들은 저마다 부처님 탑에 예배하면서 ≺석가모니부처님의 모든 사리에게 공경하고 예배하나이다. 

저희들은 부처님께서 남기신 부촉을 받아 정법을 보호하고 지켰사온데 이제는 인연이 다하였고 할 일을 다 마쳤으므로 오늘 받들어 하직하고 열반하겠나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이에 원력(願力) 때문에 공중에서 변화로 일어난 불로 열반하면서 남은 몸조차 없게 될 것이며 여래의 사리는 금강제(金剛際)로 빠져 들어가게 되어 그때의 세계에는 삼보라는 이름이 소멸하게 될 것이다. 

사람의 수명이 7만 세에 이를 때에는 7만억 수의 벽지불(辟支佛)이 출현하게 되어 다만 신통으로 교화를 나타내어 세간의 복전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이 8만 살까지 이르면 미륵(彌勒)이 내려와 태어나시어 이 부처님의 교화에 의거하여 시시각각으로 서로 함께 접(接)하게 될 것이다.’”

나는 부처님의 씨보(氏譜)를 정리하면서 일정불변(一定不變)한 표준과는 다르게 서술하였다. 

세속의 계보는 서너 명에서 일어나기 시작하여 중간의 지류(支流)와 종파(從派)는 동일하지 않게 되지만 부처님의 경우에는 시초가 없는 데서 시작하니 곧 근원을 열어 도를 구하는 새벽의 일을 나타냄이고, 

마지막은 끝이 없는 곳에서 마치게 되나니 즉 교화하는 도의 인연이 다함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말하기 때문에 석가세존의 교화가 흘러온 것은 6만 년의 오랜 세월 뒤에 마치게 되고 독각(獨覺)의 접통(接統)은 천 자[尺]의 좋은 운용으로 다하게 된다. 

그러나 『경률(經律)』에서 밝힌 천 년 만 년의 형상은 다른 뜻으로 가리킨 것이 되나니 역시 막히고 맺힌 이에게나 부합할 것이다.

곧 기환(祇桓)은 사위(舍衛)와 가깝게 있는데도 부처님께서 25년 동안 머무셨고, 

성의 가구수는 9억이요, 

보고 들은 이들은 3분의 1에 해당한다. 

이런 예(例)에 준한다면 어찌 크게 통(通)하지 않겠는가?

또 석씨의 성은 법과 세속 둘 모두에 인연이 있다. 

세속이라면 아직 왕위에 있는 것을 의미하니 북천(北天)의 오장왕(烏場王) 등이 그것이요, 

도(道)에서라면 가로로는 대천(大千)세계에 가득 차고 멀리로는 6만에 통하여 죽 이어져 넝쿨지듯 끊어지지 않고 법과 함께 존재해 있으니, 

이 때문에 도는 동천(東川)에서 세 번이나 죽어 없어짐을 당하여 비록 그곳에서는 멸망하였다고 하더라도 다른 나라에서는 오히려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16대성(大聖)과 억천의 무학(無學)이 그윽한 가운데서 널리 수호하여 곧 다시 일어나게 하리니 이것이야말로 없애도 없앨 수가 없어서 처음부터 사람이 만들어 내는 계책이 아닌 것이요, 

넓히면 진실로 넓힐 수 있나니 참으로 성스런 힘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다만 준거에 의지하여 마땅히 교(敎)의 이룸과 관(觀)의 작용을 서로 좇게 되어 망령된 뒤바뀜을 꺾어 누르고 업의 물듦을 버려 없애야 할 뿐이다. 

이러한 노력을 쉬지 않는다면 엎어진 삼태기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요, 

이를 저버린다면 아득하게 멀어지면서 마침내는 헛되게 지나가 버릴 것이니 그 때문에 씨보(氏譜)의 말미에 경계하여 서술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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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씨보 서문



당(唐)나라 도선(道宣) 지음

송성수 번역


고덕(古德)이 근거 없이 하는 말은
조사와 부처님을 스승을 삼는 데에서는 보기가 부끄럽고, 


부처님의 본래의 계통인 석(釋)을 이어받아 성(姓)을 삼는 데에서는
석씨(釋氏)의 근원을 찾기가 부끄럽다. 


지금에 의거하여 헤아린다면 자못 사실의 기록의 되겠지만
이미 속된 뜻을 고치고 근거 없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옛날 남제(南齊)의 승우 율사(僧祐律師)라는 이는
학문이 내외(內外)에 통달하고 행업이 유지(維持)를 다하였는데, 

『석가보(釋迦譜)』 한 질(帙) 열 권(卷)을 지으면서
같은 일들을 끌어다 놓아 정신을 번거롭게 하였다. 


앞서 닦은 이라면 스스로 널리 관찰하여 잘 알 수 있겠지만
뒤에 오는 이들에게 요긴한 점을 들어 표시한 것이 되지는 못하였다.


내 나이에 가을이 닥쳐와 바야흐로 목숨이 슬픈 골짜기에 다다라 있는데다
자주 권면(勸勉)함을 입었기에 힘껏 다시 진술하였다. 


밝히되, 

시험삼아 다섯 가지의 조목을 들어 그로써 세 번 열어 보였고
동족의 법[同族法]을 생각하여 이 뜻을 자세히 알게 하겠다.


첫 번째는 의지하는 현겁(賢劫)이다. 이를테면 명(命)과 시운(時運)으로 이름이 붙여지는 까닭이다.

두 번째는 씨족의 근원이다. 이를테면 성(姓)을 얻게 된 때의 선후와 뿌리와 가지의 갈라짐과 모임이다.

세 번째는 의탁한 지방[方士]이다. 이를테면 어느 한 주(洲) 안에 살고 있는 것을 어떠한 뜻으로 알 수 있는가이다.

네 번째는 법왕이 변화하는 상태이다. 이를테면 씨족(氏族)이 흥기할 때 법왕이 세간에 처(處)하여 변화한 모습이다.

다섯 번째는 성인ㆍ범부 등의 후예이다. 이를테면 법(法)ㆍ속(俗)의 양쪽 후손들이 오래도록 퍼지면서 끊어지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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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삼재(大三災)의 하나. 

주겁(住劫)이 끝나고 양겁(壤劫)에 들게 되면 괴겁 끝에 일곱 개의 해가 나와 위로는 색계 초선천(初禪天)으로부터 아래로는 무간지옥에 이르기까지 모두 불살라버린다는 것이다.

2 아래 본문에는 ‘거(擧)’로 되어 있다.

3 아래 본문에는 ‘심(尋)’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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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gud1528

◈Lab value 불기2554/09/05

댓글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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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2554-09-05
θθ
 

■ 선물 퀴즈 

다음에 해당하는 단어?

천태종에서 소승교를 판별하여 4류로 나눈 것. (1) 소승유문(小乘有門). 『발지론』ㆍ『육족론』 등의 말. (2) 소승공문(小乘空門). 『성실론』의 말. (3) 소승역유역공문(小乘亦有亦空門) 『비륵론』의 말. (4) 소승비유비공문(小乘非有非空門). 『가전연경』의 말.

답 후보
소승교사문(小乘敎四門)
소향(燒香)

손타리(孫陀利)
수(數)
수념분별(隨念分別)
수도소단(修道所斷)
수륙재의(水陸齋儀)


ॐ मणि पद्मे हूँ
○ [pt op 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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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단상_2010_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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