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2562-01-28_불설제법본경_001
Magazine 60 - Rendez-Vous Sur La Costa Del S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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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잡담 ♥가정적항변의 끝판왕
가끔 세상과 삶을 셍각하다보면 왜 세상은 이런 모습이고 자신은 이런 모습으로 이렇게 살고 있는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늘 대하는 세상 모습이라 익숙해서 모든 것이 그런 내용인 것이 너무 당연하다고 여기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렇게 당연하게 여기는 그런 내용이 왜 하필이면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인가.
그 답을 구하다보면, 답을 하기가 곤란해진다.
눈을 떠서 세상을 보면 이런 모습인데 그러나 왜 이런 모습으로 이렇게 보이는 것인가.
그리고 자신은 왜 이렇게 태어나서 이렇게 살고 또 이 삶을 마치면 자신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런 문제가 해결이 쉽지 않은 문제다.
그래서 자신이 이렇게 세상을 대하기 전에 본 바탕의 세상은 어떤 상태로 되어 있는 것이기에 자신이 이렇게 대하게 되는 것인가 . 이런 의문을 가질 때 그 답을 찾는 문제는 곧 본 바탕의 실재는 어떤 내용인가하는 주제의 논의가 된다.
그런 경우 보통 현실에서 자신이 대하는 내용을 그대로 본 바탕이 되는 실재 영역에 밀어 넣고 자신이 대하는 현실 내용이 곧 원래 본 바탕이 되는 내용 그대로라고 추리하고자 한다.
그런데 실재가 공하다라고 제시하는 입장에서는 사정이 그렇지 않다고 제시하는 한편, 상대가 그런 주장을 제시할 때는 그 주장에 어떤 문제가 있는가를 밝히기 위해 상대의 주장을 일단 그렇다고 받아들이고 그러한 상태에서 나아가면 어떤 문제를 만나게 되는가를 밝히게 된다.
그래서 자신이 눈으로 본 세상 모습이 그대로 본 바탕에도 있는 것이라면 그러면 왜 그런 내용을 놓고 귀나 코가 대하면 또 그런 내용을 얻지 않고 그와는 엉뚱한 내용을 얻게 되는가가 문제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귀나 코로 얻는 내용이 그대로 본 바탕의 실재내용이라면 왜 그런 내용을 놓고 또 눈으로는 그런 모습을 보게 되는가 하는 것이 문제된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그런 촉감이나 향기에서 그런 모습을 보게 된다는 것은 상당히 엉뚱하면서도 이상한 일이다. 또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불가사의한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기본 바탕이다.
자신은 이런 형태로 살아가고 싶지 않다고 해도 왜 이런 형태로 무한하게 계속 살아가게 되는가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생각해보면 너무 이상한 일이다.
그런데 사실은 세상에서 만나는 단 하나의 내용도 명쾌하게 왜 그렇게 그런 내용으로 나타나게 되어야 하는가가 명확하지 않다. 단지 자신이 그런 모습을 반복해 대해서 그 내용이 그런 관계에서 얻게 된다는 것에 익숙해지면 마치 그것이 자신이 그에 대해서 무언가를 안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고 나서 그에 적응하는 것 뿐이다.
왜 물은 온도가 0 도가 되면 어는가. 그냥 그런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온도가 0 도가 되면 그렇다라는 관계를 반복해 경험한다는 내용을 추가하면 자신은 그런 현상에 대해 무언가 알게 된 것 같고 익숙하게 된 것 같고 그리고 그 현실에 그렇게 적응하게 된다.
그러나 다시 질문을 반복해서 그런데 왜 온도가 0 도가 되면 물이 얼음이 되어서 그 형체나 성품이 달라지게 되는가를 또 물으면 또 답이 곤란해진다. 고체가 되어서 그렇다고 만일 답을 한다면 그것도 마찬가지다.
왜 고체가 되면 그런가 이런 식으로 물을 때도 사실은 이 답이 그저 그런 내용은 으레 그런 것이므로 그렇게 이해하고 익숙해져라 이런 주문을 걸고 있는 것 뿐이다.
그런데 실재가 공하다고 제시하는 입장에서는 사실은 이 관계가 실재하는 내용이 아니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앞의 내용도 자세히 보면 이상한 내용이지만, 실재가 공하다면서 왜 현실은 반복해서 이런 내용을 경험하는가를 놓고 생각하면 더 이상하고 더 불가사의하게 여기게 된다.
왜 그럴까.
그래서 처음 왜 이런 망상분별을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는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런 경우 일단 앞과 같이 현실에서 대하는 내용을 모두 실재에도 그렇게 있는 내용이라고 하고, 그런 상태에서 처음 어떤 모래나 레고블럭과 같은 것을 놓고 그것이 어떤 형태로 되어야 지금과 같은 형태로 망상을 일으키고 그런 모래를 자신으로 여기고 그렇게 매 순간 대하면서 살아가게 되는가를 거꾸로 생각하는 것이 낫다.
이런 논의를 가정적 항변이라고 할 때 가정적이라고 함은 그런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실재가 공하다는 입장이지만, 그러나 이해를 위해서 일단 그런 내용을 일단 그렇게 받아들이고 나서 그 문제를 생각해 보는 부분을 의미한다.
그래서 현실에서 대하는 내용을 그대로 실재 영역에 밀어 넣고 나서 그 상태에서 하나씩 거꾸로 되짚어 보는 것이다.
사실 갓난아이가 처음 태어나서 점차 외부에서 레고블럭과 같은 음식을 섭취하면서 어른이 되어갈 때 그 하나하나 과정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왜 밭에 있던 양배추와 축사에 있던 돼지나 소의 일 부분을 구성하던 것들이 점차 자신의 몸에 들어와 마치 자신인 것처럼 행세하다가 사라지는가.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다.
현재 직수를 공급하는 부분이 얼어서 물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오늘 멀리 떠나야 하는 상황이라 세면도 못하는 상황이서 동네 목욕탕에 들러 씻고 시간이 여유가 있어서 살피게 되는데 왜 이런 일이 이렇게 일어나는가 이런 것을 놓고 그 사정을 이해하려면 결국 처음부터 하나하나 되짚어서 이것을 다 헤아려 나가야 한다. 시간이 없어서 일단 이 상태로 마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