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경전에 내용을 잘 파악하기 힘든 다라니나 조금 낯선 의식 작법 등이 제시되는 경전수가 대단히 많다. 경전 분류체계상 T번호 848에서 1420 번까지가 주로 이런 경전에 해당하는데
현재 고려대장경이 전체 1514 권이므로 그 비중이 상당하다. 그러나 밀교부 경전으로 분류되지 않은 그외의 경전에도 이와 관련된 내용이 상당히 많다.
진언 다라니는 가장 기본적인 경전이라고 할 아함부 경전에도 나타난다. 불교가 기본적으로 세속에서 통용되는 엉터리 주문을 의존하고 임하는 행태를 문제시하는 입장이면서도 또 한편, 부처님과 보살이 제시하는 진언(다라니, 명주, 총지)의 양은 상당하다.
현실에서 음식을 먹기 위해 물을 끓일 때 불을 떼지 않고 진언 주문을 외운다면 이것이 합리적이라고 보겠는가. 일반적으로 그렇지 않다. 그런 자세를 취하면 미신적인 입장이라고 보게 된다.
그런데 현대의학으로 도저히 치료하기 힘든 불치의 병에 걸렸다거나 또는 일반적으로 이루기 힘든 소원을 갖고 있다거나 하는 경우 이들 진언 다라니 수행에 의존하면 불가사의하게 치유가 된다고 제시된다. 이것이 합리적인가. 이렇게 의문을 갖기 쉽다.
수행을 하는 과정에 동원되는 의식의 경우도 사정이 비슷하다. 불상을 만든다거나 탑을 만든다거나, 만다라를 그려 건다거나, 단을 만든다거나 등등의 내용은 단지 불교신자로 불교를 대하는 입장에서는 대단히 낯선 내용이고 가까이 하기 힘든 내용이다. 그리고 아무리 전문 수행자를 지향하는 수행자 입장에서도 그 사정이 비슷하다. 결국 사찰에서 이런 내용을 잘 소화해서 의식행사에 반영하게 되는 것일 뿐 일반적인 입장에서는 아무리 경전을 보아도 내용을 이해하기도 힘들고 또 그 만큼 불교를 오히려 멀게 느껴지게 하는 내용이 많다.
그래서 일일경전공부에 밀교부 경전이 뽑혀 내용을 살피는 입장에서도 무엇을 어떻게 살펴야 하는가 하는 고민이 많다.
그런데 일단 이 사정을 쉽게 생각하면 다음과 같다.
불교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른다고 해도 그리고 사찰을 방문해서 스님을 만나지도 못하고 또 만나서 스님으로부터 어떤 법문을 듣지도 못하고 그저 사찰을 방문해 부처님 상이나 탑이나 걸려 있는 등이나 기타 등등을 구경하고 돌아왔다고 하자.
그래도 그렇지 않은 경우와 차이가 있다. 그것은 단순한 차이가 아니고 그 주체가 마음에서 이를 통해 일정한 변화를 일으키게 하는 요소가 되어준다.
긍정적인 방향이라면 그냥 사찰을 한번 방문하고 뜻을 알지도 못하는 스님의 독경소리만 그냥 좀 듣거나 아니면 종소리나 법고를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거나 아니면 향 냄새나 법당의 모습을 보고 그냥 돌아 왔을 뿐이지만, 그래도 무언가 마음이 정돈되고 차분하게 맑아지는 느낌이 들 수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만드는 그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결국 불교 경전 곳곳에서 제시하고 있는 그런 내용들이다.
물론 그 핵심은 그런 사찰에서 거주해 수행하는 스님들의 수행이 핵심이지만, 그 수행이 일정한 법식에 의해 매일매일 반복되는 가운데 사찰에 자연스럽게 베어 있는 향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차이를 알려면 만일의 가정이 필요하다. 사찰에 그런 법식도 없고 사찰을 방문했더니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소란스럽게 소리를 내고 떠들고 움직이고 때로는 어느 곳에서는 시끄럽게 서로 멱살을 붙잡고 다투기도 하고 한쪽 계곡 쪽에서는 물놀이를 하고 있고 한쪽에서는 백숙을 끓이려고 닭을 잡고 있고 이런 형태라면 그와는 또 전혀 다른 내용이 된다.
그래서 일반적인 입장에서는 그 구체적 내용이 무엇인가는 자세히 모르지만, 이 두 극단적인 상황 차이가 주는 의미가 다르고 그렇게 만드는 내용이 무언가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알고보면 일반적인 입장에서는 대단히 낯설고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지만, 이런 내용들이 경전에서 제시되고 그것을 받아들여 실천 수행하는 부분 때문에 발생한다고 본다.
수행이 그냥 경전을 읽고 그 내용을 이해하고 그치는 것에 불과하다면 어떤 이가 도서관에서 철학서적 읽듯 경전을 뽑아 경전에서 제시된 내용을 놓고 조금 깊게 한번 문제를 생각하는 활동이나 경전에서 제시하는 수행이나 별 차이는 없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경우는 차이가 크다. 그래서 그런 차이를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를 놓고 곰곰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 다라니 암송의 부담
어릴 때부터 학교에 다니면서 어려움을 느낀 부분이 있다. 시험에 나온다고 해서 무언가 이해되지도 않고 잘 외어지지도 않은 내용을 무조건 외워야 하는 경우가 그런 경우였다. 그 트라우마가 아직도 남아 있고 거의 평생을 가게 된다. 무언가를 배우는 학교 생활이란 거의 대부분이 그런 과정이다. 수학공식부터 시작해서 왜 나무를 나무라고 하지 않고 tree 라고 해야 하는가. 왜 3 인칭 현재 단수에는 공연히 동사에 -s 를 붙이자고 하는가. 안 붙이면 무슨 문제가 있는가부터 해서 내용도 알지 못하는 어떤 책을 누가 언제 썼는지 등등까지 외우고 각 국가의 왕들의 이야기를 또 년도까지 살펴가면서 외어야 하는지 모르지만, 여하튼 그런 것을 외우면서 부담을 느끼게 된다. 그 중에서 지금도 생각나는 내용도 있다. 예를 들어 아편전쟁 발발시기 안정복이 쓴 역사책 동사강목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등등이 그것이다. 문제는 정작 그런 책을 읽어 본 적은 없는데 마치 읽어보기라도 한 것처럼 그 책이 갖는 의미 성격 이런 것을 외우고 있다. 그런데 정작 그런 지식은 도대체 어디에 쓰는 것인가. 그런 것이 많다. 2 차방정식의 근의 공식은 가물가물하지만 도출식은 지금도 알고는 있는데 문제는 이 2 차방정식의 근을 구하는 공식을 현실에서 어떤 경우에 사용하기에 지금까지 외우고 있는가는 의문이다. 사전을 거의 외우다시피할 정도로 열심히 외우고 다녔던 영어단어는 내 평생 별로 사용해본 경험이 없다. 그래서 지금도 외국인을 만나면 회피하는 경향이 많다. 혹시라도 외국인이 말을 걸 다양한 경우를 예상해서 내가 미리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딱 1 문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그것만은 지금까지 외우고 있다.
이 문장은 상대가 이에 대해 답하는 내용을 못 알아들어도 무방하고 또 그에 대한 답내용이 무엇이든 그 상태로 고개를 적당히 긍정적이던 부정적이던 아무렇게 흔들면서 그 상황에서 나오고 내 할 일을 하면 된다고 보는 문장이다. What do you think is the most important in the universe now? 이 문장이다. 이 문장의 취지는 상대가 이 질문에 대해 무엇이라고 답하던, 대화를 그만 나누고
이제 각자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찾아서 하자. 이런 취지다.
여하튼 학교를 다니면서 매번 만나야 했던 이런 각 내용을 암기하는 부담이 대단해서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상태인데 불교 연구를 하면서 만나게 되는 다라니가 새로 그런 부담을 상당히 준다. 그외에도 불교 경전에서 제시하는 내용도 사정이 이와 비슷하다.
그런데 경전을 덮자 마자 방금 전에 본 내용이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는다면 무엇때문에 자꾸 보는가. 이런 의문이 다시 생긴다. 그래서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래서 또 학교 다닐 때 사용해온 수많은 방편을 다 동원하게끔 된다. 그래서 역시 부담을 느끼게 되는데 어쩔 도리가 없다.
문제는 앞에서 보았듯 학교다닐 때 배운 각 내용을 이해하고 기억하는 것이 부담이 되고 또 정작 그 각 내용을 어떤 부분에서 사용하고 효용을 얻는지는 모호하지만, 여하튼 그런 요구를 잘 수용해서 소화한 경우와 그렇지 못한 경우 현실에서 거두는 성과나 수익의 차이가 크다는 것만은 볼 수 있다. 한마디로 그런 부분에서 대단히 뛰어난 친구는 지금도 여전히 현실에서 대단히 두각을 나타내면서 각 부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렇지 못하고 중간에 염증을 느끼고 졸업한 이후 영어책 한 권을 보기 싫어하고 보지 않은 내 경우는 또 그 반대다.
그런데 결국 불교 경전의 경우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알고보면 불교 경전에 소개되는 다라니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현실에서 갖는 소원이 무량하고 그 소원 성취에 필요한 방편은 선악무기의 성격을 갖기에 그 방안이 제시될 때는 결국 다라니와 삼매 형태로 제시해줄 수 밖에는 없다. 여기서 다라니는 2 차 방정식의 근을 구하는 경우 그 공식을 그냥 외어 사용하는 것에 해당하고 삼매는 공식을 처음에 그대로 도출해내듯 각 문제를 대해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여하튼 생사현실에서 각 문제나 소원을 해결하는 방식은 이 두 가지 방안이 핵심이다. 그런데 그 구체적 답은 각 구체적 상황에 따라 선악무기의 성격을 함께 갖는 것이 또 문제다.
그 사정은 물이 갖는 효용을 놓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물을 벌이 마시면 꿀을 만들지만, 뱀이 마시면 독을 만들고, 사람이 마시면 피와 오줌을 만든다. 이런 내용이 그것이다. 결국 소원 성취를 도와준다고 방편을 직접 제공하면 어떤 방편이든 위 문제에 바로 부딪힌다.
과거에 화약을 개발한 이의 경우 이것이 한편으로는 도로나 채굴과정의 수고를 덜어준다는 좋은 기능을 갖지만, 그러나 동시에 전쟁과정에서 인명을 대량 살해하는 문제도 갖는 것을 보고 이 문제를 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현실에서 제공되는 방편은 다 이 문제에 노출된다. 과학자들은 진리를 탐구하다보니 이런 내용을 알게 되었다면서 자신은 이런 문제에 관련되지 않고 순수하게 가치 중립적인 입장인 것처럼 연구성과를 발표한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 않다. 결국 그로 인해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그런 내용을 그렇게 무책임한 형태로 제공한 과학자의 책임이기도 한 것이다.
원자력 이론을 발표한 아윈쉬타인이나 각종 발명품을 만들어낸 에디슨의 입장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좋은 측면만 보면 대단히 좋다고 할 수 있지만, 현실에서 이들 각 내용이 그에 버금가는 수많은 부작용과 문제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것을 미리 헤아리지 못하고 그로 인해 부작용을 만들어 내게 되는 것은 결국 좁고 짧고 얕은 협단천 관찰에 의하는가 아니면 넓고 길고 깊은 광장심 관찰에 의하는가의 차이이기도 하다.
요즘 바다가 플라스틱 쓰레기로 대단한 문제가 나타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처음 플라스틱을 사용할 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문제이기도 하다. 항생제 오남용이 일으키는 의료계의 부작용도 이와 사정이 마찬가지다. 처음 페니실린이 거의 만병 통치약처럼 사용될 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모두 그만큼 지혜가 깊지 않은 상태였다는 뜻이기도 하다.
약사여래님이 병을 치유하기 위해 사용하는 다라니에 비살사 이런 내용이 들어 있는데 이와 관련해 묘한 연상을 하게도 된다. 여하튼 다라니는 그 문제를 부작용없이 해결할 뿐 아니라 거기에 덧붙여 궁극적인 깨달음과 생사고통을 벗어나게 해준다는 보너스까지 들어 있다. 그런데 사실 다라니를 처음 제공하는 입장은 뒷 부분이 주된 목적이고 그 방편으로 소원 성취의 방안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안이 갖는 선악무기의 성격 때문에 그것을 그대로 풀어주지 않고 다라니 형태로 묶어 제공하는 것이다.
불교 경전에서 이런 방편과 관련해서는 그 일체를 다라니나 삼매의 내용으로만 제시하고 끝나는 것은 결국 이런 문제 때문이다.
즉 방편은 제공하지만, 그 방편이 오직 선한 목적으로 깨달음을 얻고 열반 해탈을 얻어내는 방향으로만 사용될 수 있도록 추가 장치를 해서 제공하는 것이 결국 다라니 삼매의 내용이다. 그것은 그와 다른 목적을 갖는 입장에서 아무리 경전을 뒤져 다라니 삼매의 내용이나 명칭을 찾아 낸다해도 그런 방향으론 끝내 사용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현실에서 갖는 뜻이 무량한 만큼 그 다라니나 삼매도 무량하다. 그 가운데 극히 일부만 또 경전을 통해 제시된다. 현실에서 불교를 믿는 불교신자 입장에서는 다시 이 가운데 극히 일부만을 취해 수행에 활용하는 상태이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천수경의 자비주, 지장보살 다라니, 문수보살님 진언, 그리고 수능엄경의 반달라주 등등이 그 대표다. 그런데 그 가운데 어느 하나만 살펴도 외우는 것 자체가 상당히 부담되는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수행자 입장에서는 이런 다라니를 갖춘만큼 그 역량이 더 뛰어난 상태가 된다는 점이다. 결국 학창시절에 대한 교과목 지식과 마찬가지다. 하나하나 어디에 사용하고 어떤 효용을 갖는가는 잘 몰라도 그것을 다 소화하고 잘 기억하면 우선 진학도 잘 되고 취직도 잘 되고 기타 일이 잘 된다. 요즘 취직에 영어 토익 토플 점수를 요구한다는데 상상을 초월한 높은 점수를 요구한다는 것도 그런 사정이다. 막상 취직해서 일을 할 때 얼마나 영어 능력이 필요한가는 둘째치고 현실이 그렇다. 그래서 매년 그런 영어 능력 시험으로 외국에 지출하는 비용자체가 천문학적이다.
그런데 알고보면 다라니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병원 의사가 되려면 자신이 갖고 있는 질병에 대한 약이름만 하나 외어서는 안 된다. 자신은 평생 걸릴 것 같지 않은 수많은 병에 대한 치유방안과 약이름 부작용 등등을 일단 알고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 개업해서 환자를 잘 치유하고 병원도 잘 경영하고 수익을 많이 올리는 활동을 비로소 시작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감기에는 아스피린 상처에는 알콜 소독 이런 것 하나 딸랑 알고 개업하면 망하고 자신도 고통을 받게 된다.
전문 수행자에게 다라니 암송이 필요한 것은 그래서 자신에게 당장 필요할 듯한 다라니만 취해 외우고 수행하는 일반 불교신자의 입장과는 또 다르다.
최근에 모 sns 사이트에 가장 간단한 다라니 5 자 진언을 소개하는 글을 올렸는데 한참후에 올려진 댓글을 한 번 본 적이 있다.
너무 어렵다. 이해하기 힘들다. 이런 심정을 토로하는 댓글이었다.
진언 가운데 가장 짧고 간단하다고 할 내용을 설명까지 덧붙여서 올렸는데 현실 사정이 그렇다.
그러나 사정이 그렇다고 전문 수행가를 지향하는 수행자가 자신마저도 다라니 공부를 적당히 넘어가면 곤란하다.
힘들더라도 결국 돌파해야 한다.
어떤 지식이던 외우는 과정에서는 그 내용을 반복하는 것이 원칙이다. 머리에서 쥐가 날 수 있어도 그렇게 하는 것이 원칙이다.
다른 방편을 동원하면 조금 더 쉽다고 해도 원칙을 준수하면서, 그런 것을 보조적으로 동원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수행이 되고 그것이 축적되면 이제 자신의 문제던 다른 중생의 문제던 해결하고 자신과 다른 이를 생사고통에서 벗어나도록 이끌 수 있는 상태가 된다. 그렇지 않으면 앞에서 소개한 의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생사현실에 임한 상황에서는 그 자신부터 이후 환자 상태로 지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