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매일 경전 사이트에서 경전을 살펴보는데 시간을 보내고 있다. 매일 50 권을 보는 것이 목표인데 하루가 다 갈 때쯤 확인해보면 많이 본 날 겨우 20 권 정도를 보는데 그치고 있다. 목표 달성이 매번 쉽지 않다.
그런데 매번 아침부터 경전만 살피기에 마음 한편으로 내가 경전 보고 외우는 기계인가 하는 생각도 드는 한편 또 매번 하루가 다 갈 시점에 그날 목표가 성취가 안 된 상태에서 마감을 하고 더욱이 그날 읽었던 내용도 제대로 떠오르지 않는 상태로 지친 가운데 마감을 매번 하다 보니
우울증이 생기려고 한다.
경전 사이트에서 경전을 살피면서 느끼는 느낌은 이것이다.
전문 수행자를 지향하는 수행자 입장에서도 매번 새로 만나는 경전이 낯설고 내용을 파악하기 어렵고 힘들다고 느끼는 한편, 이것을 소화해서 일반인에 전달해야 하는 입장에서 일반적인 입장을 놓고 생각하면 경전 내용은 한층 더 이질적이고 어렵다고 느끼게 된다.
물론 경전 내용이 이처럼 많고 그 내용이 다양한데에 대한 부처님 입장은 경전에서도 그 사정이 제시되고 있다.
막연히 일반인 입장이라고 하지만, 그 일반인 입장이 하나같이 그 입장이 같지 않고 제각각 다른 것이 현실이고 그 각 경우마다 부처님이 배려하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는 것이 그 사정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하튼 경전을 매번 살피는 입장에서는 이런 경전이 마치 어떤 영화나 만화 사이트를 방문할 때 느끼는 느낌과 함께 조금이라도 더 오래 더 빨리 이런 경전을 살펴보고자 하는 의욕을 강하게 주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런데 경전을 몇 달째 계속 살피는 본인 입장에서도 사정이 그렇지는 않다. 죽기 전에 1514 권을 한번이라도 대강이라도 내용을 한번은 살펴보자 이런 의무감에서 하루 종일 억지로 붙들고 살펴보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능하면 이런 자세가 앞의 입장으로 변환이 되어야 바람직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미 수록된 경전 내용을 어떻게 바꿔서 그렇게 만들 수가 있겠는가. 곤란하다. 그런 사정 때문에 우울해질 뿐만 아니라 골치까지 아파오게 된다.
이런 입장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풀어 보려고 조금 성격이 가벼운 sns 사이트에 들러 시간을 보내보려고 방문해보면, 여기는 더 상황이 심하다. 방문하는 각 sns 사이트마다 왜 그런 내용을 올려 놓는지 알 수 없지만, 도대체 이곳에서는 어디에 눈높이를 맞추어서 활동을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그처럼 눈 높이가 서로 안 맞은 가운데 대화를 나누거나 활동하면 서로가 서로를 약간은 돈 사람으로 여기게끔 마련이고 활동이 이후 어렵게 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고민이다.
그런데 이것이 전문 수행을 지향하는 수행자가 해결해나가야 할 현실 문제라면 문제다.
갑자기 과거에 자동차 면허 시험 볼 때 생각이 떠오른다. 당시 주행시험을 별 문제없이 다 마쳤는데 옆에 앉은 시험관이 불합격을 통보하였다. 그래서 의아해서 왜 불합격이냐고 물어보았다.
시험관이 답하기를 깜박이를 넣어야 할 때 안 넣는다거나 등등 실수는 자신이 조금은 사정을 보아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길을 모르는 가운데 운전하는 경우는 치명적이기에 도저히 합격시켜줄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운전학원에 돌아와 재시험접수를 하니 이런 일이 별로 없고 흔하지 않은데 왜 떨어졌냐고 접수 담당자도 의아하게 여긴다.
난 사실 운전학원에서 주행시험 준비할 때 내가 어디를 가고 싶은 곳이 따로 있어 운전하는 입장이 아니고 그 때 그 때 옆에 앉은 운전교습 강사님이 가라는 방향대로 가는 것이 주행시험의 성격인 줄 알고 임하고 시험 볼 때도 그렇게 임했다가 떨어졌다고 말했는데 생각해보면 현실 사정이 이와 같다고 본다.
결국 주행시험이란 시험보는 이가 그 코스를 미리 다 파악한 가운데 운전하는 것이 주행시험이었던 것이다. 난 그걸 몰랐던 것이다. 그런데 현실 사정도 마찬가지다.
현실에서도 제각각 무언가를 성취해야 하고 그 성취를 위해 다들 분주하게 바삐 임하는 것이 현실인데 그러나 정작 그것을 도대체 왜 성취하려고 하는가 그리고 그것이 성취된다면 그 상태에서 무엇을 앞으로 어떻게 하려고 하는가에 대해서는 정확히 그 답을 제시해주는 이가 별로 없다. 이는 결국 삶의 궁극적 목적에 대한 답이 없이 그저 당면한 방편이나 수단적 목표의 성취에 급급한 문제 상황을 의미한다.
요즘은 뉴스도 잘 안 보고 sns 에서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조금씩 접하는데 여러 사회 문제나 상황도 이런 사정과 관련이 되어 있다고 본다. 그래서 답답함을 많이 느끼게 된다. 그런데 세상이 복잡한 가운데 그것이 매번 문제현상으로 나타나는 그 사정도 결국 그런 각 목표를 성취해 끝내 무엇을 성취하려고 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본다. 간단히 말해 끝내 성취하려는 것이 자신의 범위 밖의 다른 이를 해치고 손해를 주려고 하는 것이 최종 목적이면 그 목표는 성취되기 힘들다.
그런데 현실 내용을 들여다 보면 그 속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쉽게 보게 된다. 그래서 문제라면 문제다.
이런 문제는 다음 성격을 놓고 생각하면 쉽다. 우선 내가 나 혼자만 생각하고 사는 것보다는 자신의 가족이나 넓게 자신이 속한 사회를 함께 고려하고 방향을 찾는 것이 훨씬 나은 것처럼 여기게 된다.
예를 들어 자신 혼자만 잘 살기 위해 노력한 이보다는 자신이 속한 민족이나 계층 또는 인종 전체를 위해 노력한 이가 훨씬 착하고 선한 것 처럼 여겨진다.
그런데 알고보면 사회의 엄청난 악이란 대부분 이런 입장에서 나타난다. 알고보면 단지 자신 혼자만 생각하고 사는 것보다 훨씬 악한 입장이 바로 이런 경우들이다. 예를 들어 역사적으로 그런 입장에서 게르만 민족이나 아리안 인종 전체를 위해 그렇게 활동한 히틀러를 놓고 살펴보면 앞에 제시한 문제점이 무언가를 쉽게 볼 수 있다.
히틀러를 놓고 볼 때도 분명 그가 자신 개인이나 자신의 가족만 위해서 살아간 경우보다 넓게 독일 민족이나 인종을 위해 일한 것이어서 오로지 자신 개인만 위해 산 경우보다 훨씬 위대하고 선한 것처럼 생각되지만 그 결과는 극단적으로 그 반대다.
그리고 사회에서 무언가 비난하는 내용도 성격이 모두 위와 같다.
그런데 왜 어떤 노력에 대한 가치평가가 그렇게 되는가를 잘 이해해야 한다. 자신이 a 라는 상태의 성취를 위해서 무언가를 한다고 할 때 그 a 의 범위가 닫혀서, a 를 위한 노력이 a 를 위한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일지라도 그것이 그 a라는 일정 범위 이외의 다른 이를 배제하고 피해를 주는 성격의 활동이 되면 일은 하나인데 그것을 대하는 입장따라 평가가 달라진다는 점도 작용하지만, 결국 그것이 사회에서 크게 문제삼는 악의 성격이 된다.
그래서 세상의 악마는 알고보면 닫힌 범위에서 그 닫힌 범위에만 가장 좋은 무언가를 설정하고 열심히 노력하는 입장인 것이고 그 닫힌 범위가 크면 클수록 좁은 경우보다 훨씬 그 악성이 증대한다. 그래서 오로지 자신에만 갇혀서 오직 당장 자신에게 좋은 일만 행하는 것이 작은 악이라면 그 범위가 닫힌 가운데 고려하는 그 범위가 이보다 좀 넓어서 예를 들어 일정한 집단, 계층, 지역사회, 민족, 인종 이런 식으로 확대될 때 그 악의 정도가 앞의 경우들보다 점점 훨씬 더 심해진다.
따라서 현실에 임할 때 그렇게 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자신이 이익을 주고 위하는 일정한 범위를 자꾸 넓혀 나가면서도 그 형태가 독선적이면서 닫힌 형태가 되어 범위 밖의 다른 이를 해치거나 손해가 되는 방향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래서 현실에서 자신이 나아가는 주행 방향이 이런 형태가 아닌 경우는 차라리 자신 외의 일에 대해서는 일체 관심을 끊고 오로지 자신의 만족의 성취를 위해 조용히 임하는 것이 그 악성이 훨씬 덜하게 된다.
최근 시공간 여행에서 수행자에게 필요한 중요 재산의 항목을 살펴 보았다. 7재 10 무진장 그런 항목이다.
그런데 이는 결국 삶에서 오래 지속되고 유지될 수 있는 가치가 큰 것이 무언가에 대한 내용이기도 하다. 그것은 또 대부분 현실에서 가치가 있다고 보는 항목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이는 왜 이런 항목은 가치높은 재산의 항목이 되고 일반적으로 가치가 있다고 보는 항목들은 반대로 그렇지 못한가에 대한 답변을 요구하게끔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