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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2-01-23_중론_001 본문
『중론』
K0577
T1564
중론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 [pt op tr] 중론_K0577_T1564 핵심요약
♣0577-001♧
『중론』
참고 =>
중론_K0577_T1564_001-01
http://buddhism007.tistory.com/3238
○ [pt op tr]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Michel Berger - Si Tu T'en Vas.lrc
오늘 짧게 살피려고 관인연품 한 품을 살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 관인연품 하나를 놓고
용수보살님이 도대체 무엇을 제시하려고 이런 내용을 제시했는가를
일반적인 입장에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려면
대단히 많은 분량의 설명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서 실재가 공하다는 사정을 잘 이해할 수 있으면 좋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 중론을 읽어서
실상이 공하다는 것을 잘 이해하게 되고
그래서 시원하다고 여기는 경우는 드물다.
반대로 도대체 용수보살님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기가 힘들고 골치 아프다고 여기는 경우가 더 많다.
그리고 현실을 놓고 생각해보건대
오히려 용수보살님이 억지 궤변을 내세우는 것 같다고 여기는 경우가 더 많다.
또 한편 살면서 용수보살님의 『중론』이라는 책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고,
들었다해도 살펴볼 여유가 없다고 여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세간의 사정은 그렇지만,
불교 내에서는 용수보살님은 8 대 종파의 종사의 지위를 차지할 정도로
그 영향력이 대단하다.
그래서 세간의 입장과 불교의 입장의 차이가 극과 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불교 경전 논서를 일반인이 대하면
어리둥절한 상태로 시종일관 임하게 되기 쉽다.
지금까지 각종 논서를 살피면서
논서를 살피는데 기본적으로 필요한 사항을 많이 제시했다.
그래서 이런 내용을 바탕으로
이제 논서 본 내용을 살펴나가기로 한다.
『중론송』은 이미 『회쟁론』이나 『100론』을 살필 때도 살폈지만,
가정적 '항변'방식으로 상대의 주장을 폐기시키는 노력을 하는 논서다.
○ 오래된 외국 논서의 내용 확정의 어려움
오래된 외국 논서를 살피려다 보면
이 논서와 관련해 한 10 인 이상이 제각기 내용을 조금씩 달리 제시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 이 가운데 원래 이 논서가 내세우는 본 내용이 어떤 내용인지 혼동을 일으키게 된다.
이는 마치 한 가게에서 물건을 사려는데
그 가게의 사장으로 서로 다른 10 인이 나타나서
저마다 조금씩 다른 가격을 제시하고 나타나
누구와 거래를 해야 할 지 모르게 되는 경우와 비슷하다.
각 논서마다 이런 사정이 있어 문제가 되므로
논서를 살필 때마다 기본적으로 이 문제를 먼저 살피게 된다.
이런 경우 본인이 제안하는 방안은
어떤 내용이 정확한가를 살피는 것은 별도 문제로 돌리고
일단은, 추상적으로 어떤 주장이 이와 같이 제시된다면 [=가정적]
그런 경우 그 내용이 옳은지 또는 올바르고 적절한지 등을 살펴보자는 입장으로
논의하는 방식이 낫다고 본다. [가정적 논의]
『중론』의 사정을 살피면
이 논서도 사정이 비슷하다.
이 사정을 먼저 살펴보자.
용수보살님이 『중론』이란 논서를 썼다.
그런데 청목스님이 붙인 주석이 덧붙여져 있다.
그리고 이를 다시 구마라집 법사님이 중국어로 번역을 하였다.
그리고 오늘날 이를 국내 학자들이 한글로 번역하였다.
그래서 이런 사정만 보아도 벌써 최소 한 4 분이 관여되어 있다.
그런데 좀 더 자세히 보면 그 번역판본들도 다른 여러 판본이 또 있다.
그리고 각기 조금씩 표현도 다르다.
예를 들어 『중론』과 관련된 여러 다른 판본을 놓고 살핀다면
『중론』은 독일어 번역본도 있고 영미본도 있고 티벳본도 있고 일본어본도 있다.
그런데 또 각 언어 체계마다 각 단어가 나타내는 의미의 범위나
언어 표현 방식 등이 모두 100 % 같지 않다.
또 하나의 언어 체계안에서도 한 내용을 표현하는 방식이 다양하다.
그런데 설령 이것을 모두 통일해도
의미를 정확하게 1의적으로 확정하는 문제는 잘 해결되지 않는다.
즉 언어표현을 어떻게 해도
언어적으로 하나의 언어표현이 나타낼 수 있는 다양한 의미 가운데
이 가운데 어느 하나로만 의미를 확정시켜 고정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이런 문제는 어느 경우나 발생하게 된다.
그런데 각 주장 내용을 놓고 옮고 그름을 예민하게 살피는 경우에는
각 표현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해서 논의를 진행해야 하는 문제가 많이 발생한다.
이런 사정때문에 어떤 부분과 관련해
과연 어떤 내용이 중론송에서 제시하고자 한 본 의미인가.
또는 조금씩 다른 판본 가운데 어떤 것이 가장 정확한지 부터 확정하고
논의를 살피자고 임하면 이 문제 해결이 곤란하게 된다.
즉, 어떤 문장 표현이나 단어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명료하지 않고
판본마다 각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거나,
또는 각 판본의 진위부터 문제되거나
또는 그 각 저서의 저자의 진위나 존부 자체가 불확실하여 문제될 때
이런 내용부터 먼저 명확하게 확정한 다음에 본 내용을 살피자고 임하면 그렇게 된다.
그런데 그런 문제는
그와 관련된 이들을 지금 당장 자신의 바로 앞에 놓고 대한다해도
그 사정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설령 용수보살님과 구마라집 법사님이 한글마저 잘 구사해서
현재 자신과 의사 소통에 아무 지장이 없다고 해도
그래도 문제가 남는다.
예를 들어 상대가 말을 분명히 하고 그것을 바로 듣는다해도
그 말로서 나타내고자 하는 내심의 속 뜻이 무언가는 역시 확정하기 힘들다.
그리고 가정해서 타임머신을 타고 그 당시 현장에 직접 간다해도
과연 그 당사자가 그 저자가 정말 맞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면
설령 오늘날 행하는 dna 검사를 한다해도
문제되는 내용의 진위나 그 정체를 확정하기 곤란하다.
이런 어려움 때문에 이를 생략하고 넘어가면
반대로 혹시 자신이 원래 저자가 문제삼지 않은
엉뚱한 주제를 엉뚱하게 붙잡고 논의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할 수 도 있고
사실 그럴 가능성도 많다.
그런데 그런 문제도 실질 내용을 살펴야 해결될 수 있다.
그래서 확정이 곤란한 문제는 따로 떼어 놓고
우선 표현상 이해되는 내용을 추상적으로 띄어 놓고 살펴보는 것이 낫다.
그래서 일단 표현상 이해되는 이러이러한 의미로 만일 누군가가 주장'한다면', [가정적]
이는 옳다고 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르다고 해야 하는가 입장에서 이를 살펴나가면 된다.
이는 정말 구체적으로 어떤 특정한 이가 자신이 이해하는 그런 의미를 나타내었는가.
또는 그런 주장을 한 이도 구체적으로 자신이 이해하는 이와 일치하는가 등을 살피는 논의는 아니다.
이런 성격의 논의는 앞에서 본 사정들로 인해 논의해도 그 결론을 얻기 힘들다.
따라서 그런 주장을 한 이의 정체나.
정말 그런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표현했는가 아닌가는 확정할 수 없지만,
일단, 가정하여 추상적으로 어떤 주체가 자신이 이해하는 그런 내용을 주장한 것이라면,
그런 바탕에서 그 내용에 대해 논의를 살펴나가면 ['가정적 '방식의 논의]
실질 내용의 검토에 빨리 들어갈 수 있다
『중론』이나 『100론』과 같은 중관 계열 논서들은
가정적 항변의 방식으로 다른 상대의 주장을 논파해서
상대가 그런 입장을 폐기하도록 이끄는 성격을 갖는다.
그런데 이 논서 자체를 대하는 이도 역시 이와 비슷한 입장으로
이들 논서안의 내용을 가정적인 방식으로 대하여 살펴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래서 논서의 어떤 구절을 붙잡고
이 부분을 정말 용수보살님이 주장한 것이 맞는가. 아닌가
이런 결론을 얻기 곤란한 내용은 살피지 않고,
그런 문제와 관계없이
추상적으로 만일 그런 주장이 누군가에 의해 제시된다면
그것은 옳은가 올바른가, 적절한가. 어떤가.
이렇게 살펴나가는 것이 낫다.
그렇지 않으면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를 하나 살피려고 할 때
이 저서와 이에 대에 주장을 제시한 이들이 사용한 언어를
그리스어부터 라틴어 독일어 불어 영어 이런 식으로 다 이해하는 바탕에서
그런 주장자의 진위나 판본의 진위 등까지 다 살피고 난 다음
내용을 살피려고 하는 것과 사정이 비슷해진다.
그런 경우는 한 생의 기간만으로 실질 내용을 살피는 것이 현실적으로 곤란해진다.
그러나 지금 살피는 『중론』은
그 논의 내용 자체가 가정적 항변을 제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다.
그리고 『중론』 논서가 제시하고자 하는 입장은
결국 어떤 주체나 내용과 관련해
진짜에 해당하는 내용은 없음을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중론』의 내용을 살필 때는
자신 역시 가정적인 입장에 서서
어떤 이가 만일 이러이러한 주장을 제시한다면
그렇다면 그 내용은 과연 옳은가 적절한가 등을 놓고
살펴나가면 충분하다.
○ [pt op tr] ▼mus0fl--Jean Ferrat - POTEMKINE.lrc
이제 『중론』의 본 내용으로 들어가기로 하자.
하나의 논서 안에 여러 주장이 혼재되어 있어서
조금씩 입장이 다를 수 있다.
그런데 가정적 항변에서는 이것을 너무 크게 문제삼지 않아야 한다.
가정적 항변의 성격이 그렇다.
그런데 일단 처음부터 너무 세세하게 살피면 복잡하다.
따라서 핵심적인 게송만 추려 건너 뛰면서 살펴보기로 한다.
용수보살님이 무슨 내용을 밝히려고 하는가.
보통 문장이 길 때
핵심 내용을 주로 맨 앞에 놓거나 맨 끝에 놓는다.
또 내용이 너무 길면 중간 중간에도 한번씩 넣게 된다.
사람 마음이 다 비슷하다고 보고
그런 입장에서 핵심적 게송을 찾는다면
결국 처음과 끝 부분을 살피게 된다.
첫 부분은 다음과 같다.
■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으며
상주하지도 않고
단멸(斷滅)하지도 않으며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네.
不生亦不滅 不常亦不斷 不一亦不異 不來亦不出
불생역불멸 불상역부단 불일역불이 불래역불출
관 인연품의 끝 부분은 다음이다.
■
결과는 연(緣)에서 발생하지도 않으며
연 아닌 것에서 발생하지도 않네.
결과가 있지 않으니
연과 연 아닌 것 또한 있지 않네. (14)
果不從緣生 不從非緣生
과부종연생 부종비연생
以果無有故 緣非緣亦無
이과무유고 연비연역무
오늘 이 두 부분은 살피고 마치기로 하자.
경전이나 논서상의 의미를 살필 때
각 단어가 가리키는 의미를 잘 찾아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도 사정이 같다.
글자는 다 같은데 그 가리키는 의미가 무언가를 맥락을 통해서
잘 찾아내지 못하면 그로 인해 발생하는 혼동을 정리하기 힘들게 된다.
그래서 이런 주장을 제시하는 경우
이는 무엇을 논의하기 위해서
어떤 성격으로 이런 내용을 제시하는가를 잘 살펴야 한다.
이런 사정을 이미 『회쟁론』 등을 살필 때 많이 제시했다.
글자는 같은데 그 글자로써 무엇을 가리키는가를
앞뒤 맥락을 통해서 찾아내지 못하면
논서를 읽으면 읽을수록 혼동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나중에는 서로 엉뚱한 것을 붙잡고
쉼없이 갑론을박을 진행하게도 된다.
그런 경우는 일단 논의를 멈추고
현재 무엇을 초점으로 논의하고 있고
그 논의의 끝에 도달하면 그 결론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고자 한 것인가를
늘 중간 중간 살펴야 한다.
● 불생불멸의 의미
첫 게송부분을 보자.
不生亦不滅 不常亦不斷 不一亦不異 不來亦不出
불생역불멸 불상역부단 불일역불이 불래역불출
이렇게 제시된다.
위와 같은 취지의 표현은 『반야심경』에도 나오고
다른 경전에서도 자주 제시된다.
그런데 위 표현이 의미하는바가 무엇인가에 따라
다양한 견해를 일으킬 수 있다.
예를 들어 '생이 아니다'라는 문장에서 아니다를 강조해 읽으면서
용수보살님이 생이 '아님'을 밝히기 위해서 이런 주장을 한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잘못된 이해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위와 같이 표현했는데
이렇게 이해하지 않고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 문제는 결국 반야경전과 『중론송』의 전체 맥락을 통해서
이 구절의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예를 들어 『반야바라밀다심경』에서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이라고 제시할 때 '무'라는 표현을 강조해 세기면서
공한 가운데는 ~이 '없다'라고 이해하하면 이와 비슷하게
본래 유무를 떠난 공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게 된다.
이런 사정 때문에
논의의 본 취지를 잘 이해한 가운데 각 표현을 대해야 한다.
그래야 각 부분의 표현들이
어떤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어떤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이처럼 표현하여 제시하는가를 찾아낼 수 있다.
○ 언어 차원의 '생멸'
만일 본 바탕의 실상이 공함을 표현하는 '불생역불멸' 이란 표현을
생이 아니다, 생이 없다라는 의미로 이해하고
더 나아가 극단적으로 이 표현을 통해 다음처럼 주장한다고 가정해보자.
'갑' 이란 글자는 공하다.
왜냐하면 갑이란 글자는
'생'이란 글자도 아니고 '멸'이라는 글자도 아니다.
그러니 불생불멸이다.
그래서 갑이란 글자가 공하다라고 주장한다면 어떤 문제가 있는가.
불생불멸이란 표현은 어떤 글자가 생이나 멸이란 글자가 아니라고
제시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위 표현만 놓고 보면 그렇게 이해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이런 여러 의미 가운데 한 표현이 어떤 의미를 나타내는가가 문제되면
이것을 판단하는 것이 상당히 어렵게 된다.
글자는 같지만, 각 글자부분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결정할 어떤 기준을 표현에서는 찾기 힘들다.
예를 들어 사전이 不生亦不滅 이란 표현에서 사용된 각 글자가
무슨 의미를 가리키는가를 판정해주는 힘을 갖지 못한다.
그리고 이런 경우 용수보살님을 직접 만나 결정해보자고 한다면,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지만, 설령 가능해도
다른 이의 내심을 알아낼 수 없기에 역시 한계가 있다.
그런데 전후 사정상 그리고 맥락상 앞 뒤 관계상
앞의 표현이 글자가 있고 없음을 문제삼는 것이 아님은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결국 의미를 파악하는 문제는
무엇이 맥락상 문제되는가를 파악해야 하고,
그런 입장에서 접근하는 한편,
이를 앞에서 살핀 가정적 논의방식으로 논의해가면 충분하다.
그래서 『중론송』에서 처음 제시된
'불생불멸'이란 표현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먼저 본 논서가 무엇을 어떤 초점에서 어떤 측면에서 논의하는 것인가를
살펴서 이해해야 한다.
○ 감각현실 및 관념분별 사이의 망집 측면의 '생멸'
이를 다음처럼 살펴보자.
현실에서 자신이 영희가 저기에서 태어나는 것을 본다던지
꽃이 어제 저녁에는 없었는데 오늘 화분에 활짝 핀 것을 보았다고 하자.
그런 경우 일반적으로
'영희가 생겨났다' '꽃이 없다가 생겨났다'라고 여기고
그렇게 말하게 된다.
그런 경우 일반 현실에서는
이런 말을 전해듣고 그것이 정말인가 아닌가를
처음 문제삼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문제를 지금 여기서 살피겠는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물론 현실내용을 놓고 살피기는 하는데
그러나 정작 이런 측면의 문제를 살피는 것은 아니라고 답해야 한다.
○ 본 바탕 실재 차원의 생멸
중론송에서 앞과 같은 내용을 살피지 않는다고 파악하는 사정은 다음과 같다.
일반적으로 처음 영희가 어떤 곳에서 태어났다고 하자.
그런 경우 일반적 입장에서는
영희가 '없다가 있게 되었다[=생겨났다]'고 여기는 한편
그 상황에서 영희가 있다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런데 그 경우
영희라는 주체나, 그런 영희의 생겨남
이런 문제가 과연 실재에도 그러한가가 문제되는 사정이 따로 있다.
그것은 꿈을 생생하게 꾸었을 때
그 꿈이 과연 실다운가를 놓고 따지는 문제와 그 사정이 유사하다.
그래서 그런 내용을 놓고
그에 해당하는 내용을 실재에서 얻을 수 있는가.
또는 실재는 과연 어떤가 이런 것을 문제삼을 필요가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이 실다운가 아닌가를 살피기 위해
본 바탕이나 감각현실 영역 등에
문제삼는 그런 내용이 있는가 없는가를 판단하게 되는
그 배경사정을 이해해야
비로소 중론송에서 표현하는 각 표현의 의미도
그에 맞추어 찾아내면서 살펴갈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그 논의의 결론을 가지고
다시 현실에서 어떤 상태로 임하고
또 어떻게 수행해갈 수 있는가하는 문제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이런 배경 사정에 대한 이해가 먼저 안 되면
내용을 읽어도 내용 파악을 하기 힘들고
다시 읽고 나서도 이런 내용을 바탕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가 하는 문제도
파악하기 힘들게 된다.
그런 상태에서는 중론송에서
각 주장에 대해서
이것도 아니라고 하고
저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계속 아니라고만 하니
도대체 무슨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고
사정이 그러니 그런 결론을 전제로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이야기인가.
이렇게 엉뚱하게 임하게 된다.
○ [pt op tr] ▼mus0fl--Jean - Jacques Goldman - Long Is Road (Américain).lrc
영희가 저기 있고 영희가 저기에서 생겨났다
이런 판단도 같은 문제다.
가장 쉬운 사례로
어제는 볼 수 없었던 꽃이 화분에 피어났다던지
종이에 불을 붙이니 그 때까지 볼 수 없던 연기가 나타난다던지
또는 왼손과 오른 손을 부딪히니 그 때까지 듣지 못하던
손뼉 소리가 난다던지 하는 현실의 모든 내용을 놓고
처음 자신이 문제삼는 영희나 꽃이나 연기나 소리가 그렇게 그 상황에 있다고 여기고
그것은 또 없다가 있게 된 것이고
또 그렇게 머물다가 조금씩 변화하다가 사라지게 된다.
보통 이렇게 이해한다.
이것이 일반적 입장에서 행하는 상식적인 판단 내용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각 판단의 구조를 살펴보자
처음 어떤 a 가 문제된다.
그리고 그 a 가 있다고 판단한다.
그런데 그 a 는 없다가 있게 된 것이라고 판단한다.
이 부분에서 없다가 + 있다.
이 두 내용을 일정한 관계로 묶어 표현하는 것이 '생한다'는 표현이
일반적으로 갖는 의미다.
또 반대로 있다가 + 없게 된다라는 내용은
'멸한다'라고 표현하게 된다.
그리고 조금 자세하게 표현하면 '생주멸' 또는 '생주이멸' 이라고
일반 현상의 변화과정을 표현한다.
변화가 사람과 관련되면 생노병사가 되고
우주적인 변화는 성주괴공이라고 표현하지만, 그 성격은 같다.
그런데 지금 이런 내용을
본 바탕이 실재 영역이나 현실 영역에서
'얻을 수 없다'라는 의미로 불생불멸이란 표현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상식적인 입장에서는 이상한 주장으로 여기게 된다.
앞에서 다양한 사례에서
무언가가 없다가 있게 되고
또 어떤 내용이 있다가 없게 되는 예들을 제시했는데
이런 현실을 놓고
그런 상황에 '생멸'을 얻을 수 없다라고 제시하는 한편,
그런 상황에서 그런 '생멸'이 있다고 여기는 것은
전도망상 분별 집착 - 망집을 일으킨 상태라고 제시한다.
더 나아가 그런 상태에서는
그처럼 본래 얻을 수 없는 생멸을 매 순간 '있다'고 여기면서 업을 행하는 가운데
자신은 자신대로 생사고통을 겪고 다른 이도 생사고통을 겪게 하면서
장구하게 3 악도를 헤메 다니게 된다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과연 그런 주장이 맞는가 아닌가를 놓고
논의를 하는 상태인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놓고 생각해보자.
예를 들어 자신이 오늘 생활하는 가운데
자동차도 타고 다니고
식사도 하고 차도 마시고 하는 가운데
수많은 것이 없다가 생겨나는 것을 보고
또 있다가 사라지는 것도 매 순간 보았다고 여기게 된다.
그런데 이런 현실을 놓고
본래 그런 것들과 그런 생겨남과 멸함 자체를 얻을 수 없다고 하면서
불생불멸을 제시하는 것이 옳다고 보는가.
아니면 평소 생각대로 생멸함이 있다고 하는 것이 옳다고 보는가.
각 개인의 생각은 자유지만,
문제는 그 자유로운 판단과 선택으로 인해
생사고통에 묶여 3 악도를 무량한 겁에 걸쳐서 돌아다니게 되는가.
아니면 이 내용을 잘 이해하고
이를 계기로 망집을 제거하고
자신을 생사의 묶이게 하는 업의 장애를
수행을 통해 제거하여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고
무량겁에 걸쳐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풀려난 니르바나의 상태에 머물면서
무량한 복덕과 지혜와 수명을 구족하는 상태로 나아갈 것인가 하는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그래서 이 논의가 대단히 충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앞의 문제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
비유를 들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이 제시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최면쇼를 보면
최면술사가 무대에 있는 이들에게 최면을 걸면
그들은 무언가가 없는데 무언가가 있다고 여기고
또 그러다가 최면술사가 이제 그것이 사라졌다고 말하면
또 그것이 사라졌다고 슬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현실에서 상식적으로 표준상태라고 보는 이들이
하나같이 이와 유사한 상태로 전도망상 분별을 일으킨 상태에 있고
그런 상태로 본래 얻을 수 없는 생사고통을 생생하고 실답게 받아나가고 있다고
지금 중론송에서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정을 전도된 망집을 일으킨 상태에서는
도무지 이해해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는 것 뿐이다.
그런 가운데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생각이 맞는데
자꾸 부처님이나 용수보살 같은 분들이
그렇지 않다고 하니 오히려 더 어리둥절하게 여기는 한편
답답하다고 여기게 된다.
그런데 그 상황은 최면에 걸린 이들이 엉뚱한 말과 행동을 무대에서
하는 것을 관객들이 보고 배를 잡고 구르는 상황인데도
정작 최면 걸린 이는 그 사정을 파악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경우와 같다.
현실에서 다음 경우들에서 인과 판단을 행하게 된다.
처음 꽃이 어제는 없었는데 오늘 새로 피어났다.
그리고 왼손과 오른 손을 가만히 두었을 때는 아무 소리가 안 났는데
이제 오른 손을 들어 왼손에 세게 갖다 대니 그 때까지 없던 소리가 나타났다.
소리가 없다. 그러다가 ( ---- 을 하니 그러자 ) 소리가 있다.
소리가 생겨났다면 무엇때문에 생겨났는가 ?
만일 그 상황에서 그 손을 그렇게 움직이지 않았다면 소리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손을 그렇게 움직이고 부딪힌 것이 소리를 만들어낸 원인이다.
꽃이 피는 경우는 이런 형태로 씨를 원인으로 보게 된다.
그런데 꽃이 피어 나는 일을 놓고
앞에서 손을 부딪힌 동작을 그 원인이라고 하거나
소리가 나는 것을 봄에 화분에 씨를 뿌린 일과
옳은 판단이 아니라고 보게 된다.
현실에서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넣거나 빼거나 어떤 a 에 아무 차이가 없다면
이를 그 a 와 관련시키기가 곤란해진다.
그래서 어떤 C 가 있다고 할 때
그것을 어느 상황에서나 그렇게 빼고 넣고를 반복해 보아도
a 에 끝내 아무 변화가 없다면
이 내용만 가지고는 그것을 a 에 대한 원인으로 내세울 도리가 없다.
그런데 앞에서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있다고 여기는 것들은
적어도 그렇지 않다고 여기게 되는 것들이다.
즉 일정한 상황에서 무언가를 넣고 빼고 하니까.
그에 따라 다른 것도 있다가 없게 되거나,
또는 없다가 있게 되는 이런 의미있는 차이를 보게 된다.
그래서 이 둘을 인과관계로 관련시키게 된다.
그리고 그런 관계가 있다고 보게되는 내용으로
중론송에 제시된 것처럼 4 연의 내용을 제시하게 된다.
그런데 지금 이런 내용들을
모두 망상분별이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잘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데 현실을 놓고 생각하면,
현실에서 인과를 인정하는 것이 오히려 적절하고 옳다고 보게 된다.
용수보살이나 청목보살님만 특이하게
꽃이 화분에서 피어 나는 것을 전혀 경험하지 못했거나
나무를 불에 태우면 연기가 나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거나
손을 마주쳐도 소리가 안 나는 특수한 상황이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래서 왜 이런 현실을 놓고 그런 인과를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는가를
잘 이해해야 한다.
여하튼 앞과 같은 현실 상황이 되면
거의 대부분 그렇게 망집을 일으키게 딘다.
그래서 대부분 무량한 겁에 걸쳐서
이 상태를 벗어나오지 못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한 사람이 수사관에 붙잡혀 수갑이 채워지게 되면
거의 대부분 감옥까지 그 상태로 그대로 끌려 가게 된다고 보게 되고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신통하게 수갑을 풀고 달리는 차에서 뛰어 내리고
수백명이 계속 추격해도 다 따돌리면서
신출괴몰하게 작전을 완수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
마찬가지로 현실에서 그런 내용을 대하면
그처럼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그런 것들에 집착을 갖고 대하면서
한 순간 한 순간 보내고 그렇게 해서 무량겁을 계속 나아가게 된다.
그것이 실답지 않더라도 그로 인해 고통을 겪지 않는다면
별 문제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논의는 그런 가운데 겪는 고통이 너무 극심해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 원인을 찾고
그 원인부분에서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 된
망집을 제거하고 해결하기 위해
이 모든 논의가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 논의를 지금 잘 해결하지 못하고
수행으로 전환해 벗어나지 못하면
생사현실에서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는 것이
대단히 힘들다고 보아야 한다.
비교적 한가하고 여유가 있을 때
이 문제를 잘 해결해 수행으로 전환해
꾸준히 수행을 계속해 업의 장애를 제거하지 않으면
무량겁에 걸쳐서 그 상태를 벗어나기 힘들다.
지금 순간이 그렇듯
그 주체가 대해 나가는 매 순간 매 순간 사정이 마찬가지고
그것은 갈수록 더 상황이 힘들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수행으로 전환해서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 해탈을 하려면
지금 다루는 이 문제를 잘 이해하고 파악해야 한다.
수행이 잘 안 되는 것은
현실 사정이 이와 같다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그런 가운데 망상을 바탕으로 현실을 대하고 임하기에 그런 것이다.
그래서 장래 3 악도의 고통을 벗어나려면
지금 이 상태에서 생사현실의 사정이 어떻게 되어 있는가를
잘 파악해야 한다.
망상분별을 해결하려면
다음 문제를 잘 살펴야 한다.
처음 현실에서 자신이
이 현실에 A 가 저기 있다.
그리고 그 A가 앞에서 본 것처럼
다른 무엇과 관련이 있어서 그런 것을 원인으로 해서
그렇게 생겨나고 또 그러그러한 사정으로 멸한다.
이렇게 생멸이 있다고 여긴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그것이 본래 그렇지 않음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이를 이해하는데에는 여러 방안이 있다.
가장 원칙적인 방안은 문제되는 각 내용을 직접 붙들고 잘 살피는 방안이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도 그 내용이 이해가 잘 안되고
현실에서 망상을 갖고 대하는 상태에서는
오히려 그 망상분별이 더 적절하고 옳다고 여기게 만드는 사정이 있다.
앞에서 든 수갑의 비유처럼
현실에서 한번 망상을 일으키고 임하면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 풀어 내기 힘든 것과 사정이 마찬가지다.
그래서 원칙적 방안으로 해결이 잘 안 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사정이 그렇기에
자신의 망상분별을 바탕으로
계속 고집을 피우면서 억지 주장을 행하는 경우가 나타나게 된다.
그래서 이런 경우에는
이런 상대의 고집을 그대로 받아들인 다음
그런 전제에서 계속 나아가면
어떤 벼랑에 서게끔 되는가를 보여주어서
그것을 포기하게 만드는 가정적 항변의 논의가 이뤄지게 된다.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 이 문제를 살피는 것이
중론송의 내용이다.
그래서 용수보살이 생도 아니고 멸도 아니다라고 할 때는
그 사정을 다음처럼 이해해야 한다.
본래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런데 상대가 하도 억지를 피우고
생멸함이 있다고 주장하고 고집하니까.
그것을 페기시키기 위해서
그것을 놓고 부정하는 것일 뿐
이런 과정에서 그런 전제나 그 결론내용이나,
그리고 그 전제와 결론의 관계나
그 어느것도 내세워 주장하는 것이 없다.
이것이 가정적 항변의 성격이다.
그런데 논의만 살피다 보면
그 취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용수보살님이나 청목보살님이
어떤 내용을 적극적으로 내세우는 것이라고 오해하기 쉽다.
그래서 앞 부분에서 상대가 있다라고 주장하니
그것을 비판하면서 없다라는 주장을 열심히 내세운 것으로
오해하게 된다.
그런데 다시 나중에는 없다라는 내용이 문제된다면서
그것을 또 비판하니,
도대체 무슨 주장을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가운데
어리둥절하게 되기 쉽다.
일반적 입장에서는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다고 해야 되고
처음에 있지 않다고 비판했으면 없다고 해야 되고
처음에 없지 않다고 비판했으면 있다고 해야 하는데
가능한 경우수를 다 놓고 그것이 다 아니라고 하니
도무지 어떤 주장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고 여기게 된다.
그리고 그처럼 생멸이나 오고감이 없다고 하면서
정작 여기저기 오가기도 하고
식사도 여기저기서 하고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는가.
이렇게 상황을 이해하게 된다.
여하튼 가정적 항변이란
원칙적인 방식으로 그 사정을 직접 이해하지 못하고 고집을 피울 때
그처럼 상대가 고집하는 내용을 일단 그대로 받아들여서
그런 바탕에서 나아가면 만나게 되는 벼랑 앞까지 가서
그 문제점을 보여주고
처음의 입장을 폐기하게끔 이끄는 방식을 말한다.
이 과정에 이런 노력을 하는 이가
이를 통해 내세우고 행하는 바는 없다.
그리고 그것이 가정적 항변의 의미다.
그런데 아무리 이렇게 해도
오히려 용수보살이 상식에 맞지 않는 억지 궤변을 늘어 놓는 것이고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고 여기고
원래 현실에 임하던대로 임하려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그 사정은 앞에서도 살폈다.
아무리 생겨남을 얻을 수 없다고 해도
지금 손을 부딪히면 또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자동차는 저기 오간다.
이런 식으로 계속 현실에서 대하게 되기 때문이다.
>>>
그래서 다시
처음에 어떤 형태로 망집을 일으킨 가운데
삶을 시작하게 되기에
현실에서 그런 형태로 임하게 되었는가
그 배경 사정까지 잘 이해하고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
한번 물고기가 미끼를 물고 삼키면 쉽게 빠지지 않고
그 이후 힘을 주면 줄수록 더 빠지지 않게 된다.
수갑을 찬 이도 수갑이 불편해서 풀어내려 하면
수갑이 더 채워질 뿐 더 조여진다.
그런데 그런 상태에서 불편하고 고통스러워 한다고 해서
상대가 이를 풀어주고
안락한 호텔에서 편하게 쉬게 해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래서 가정적 항변으로도 해결이 안되면
어떤 배경 사정때문에 현실에서 그처럼 망상을 일으키고 대하게 되었는가를
다시 자세히 살피고 이해해서
벗어나와야 한다.
결국 이 모든 내용은
현실에서 생사고통을 벗어날 수 있도록
현실에 대한 정체를 올바로 판단하게 하고
그에 바탕해 수행에 진입해 업의 장애를 제거할 수 있게 하는데
논의의 취지가 있다.
[img2-49]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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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 시점 2563_0920_145739
망상분별을 해결하는데 있어서
관인연품에서는
먼저 불생불멸이란 내용을 제시하고
인과와 관련된 문제를 살피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용수보살님이나
주석을 붙인 청목보살님이 무엇을 제시하여 비판하던
너무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본래 처음 내용부터 받아들이지 않는데
그러나 상대가 하도 억지를 피우므로
상대의 주장을 받아들여 사정이 그렇다고 하면
이러이러한 문제가 나타나서 곤란하게 된다.
이런 형태로 그 문제점을 제시하고
사정이 그러니 그런 문제점을 잘 이해하고
처음 주장을 폐기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취지다.
그러므로 그런 취지를 달성하는 방안이면
가정적 항변에서는 그 내용이나 그 관계에 어떤 제한이 본래 있지 않다.
그래서 가정적 항변은
상대의 입장에서 그것이 치명적인 것일 뿐
이 내용을 용수보살님이 제시했다고 해서
용수보살님이 이 내용을 내세우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그 최종 목표 상태에 빨리 들어가
처음 가졌던 망상을 폐기하면 된다.
즉 무엇이 거기에 그렇게 있고
그처럼 생멸함이 있다는 등의 망상을 폐기하면 되고
그런 상태에 이끌기 위해 동원된 가정적 항변 내용을
너무 세세하게 문제삼고 대할 필요는 없다.
가정적 항변 논의를 잘 살피려면
매 순간 말도 되지 않는 듯한 가정법 문장을
실험실도 이용하지 않고 매번 놓고 시 감상을 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여기서 시감상이란
현실이 그렇다고 보지 않지만, 그와 관계없이
계속 앞 뒤 관계를 살펴 말이 되게끔 하는 작업을 말한다.
무엇이 있다 없다를 따질 때
가정적 항변을 사용하는 입장은 대부분
자신의 원 입장과는 모순되는 내용을 전제로 하여 그런 시감상을 행하게 된다.
그런데 이것이 사실은 자체적으로 말이 안 되는 내용이기도 하다.
이런 if 문장을 자꾸 제시받으면
수학문제를 대하는 것처럼 골치아파오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 if 문장에 해당하는 내용을
직접 실험실에 마련해 놓고 그런 실험을 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그런데 그것이 가정적 항변이 갖는 성격이기도 하다.
>>>
먼저 현실에서 본래 생함을 부정한다고 하면
'없다가 있다'=[생] 이런 내용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가정적 항변으로 그렇다고 해보자.
그냥 없다가 있는 그런 어떤 현상은 없음을 받아들인다고 해보자.
그러면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처럼 여겨지는가를 생각해보자.
'없다가 있게 되는' 즉 생겨나는 현상이 없다면,
상대는 그런 분별이 전도된 망상분별임을 지적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가를 잘 음미해야 한다.
없다가 있게 되는 것[생]이 아니라고 한다.
이는 a + b 로 조합된 내용이 아니라고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면 그런 경우에는 다시 어떤 경우들이 나열될 수 있는가.
없다가 없다. 그리고 또 없다. 그리고 죽 없다.
있다가 또 있다. 그리고 또 있다. 그리고 죽 있다.
있다가 없다.
보통은 이렇게 방향을 잡고
또 전과 같은 형식으로 전도몽상 분별을 증폭시켜 행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가운데
처음 가정적항변을 통해
본래 그런 생겨남을 얻을 수 없다고 물리치면,
상대는 이 내용을 놓고 달리 오해하게 된다.
즉 그런 분별 일체가 망상분별임을 이해시키고자 이렇게 제시하는데,
상대는 그렇게 이해하지 않고
있음을 비판하는 것은 반대로 없음을 내세우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으로 오해한다.
그래서 생겨남을 부정하면
이와 반대되는 멸함을 내세우기 위해서라고 오해한다.
또 생멸이 없음을 부정하면
생멸 자체가 없다고 보는 항상함을 내세우기 위해서라고 오해하게 된다.
왜냐하면 현실에서 귀류논증을 제시하는 일반적입장은
대부분 그런 취지에서 행하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저 사람은 여자가 아니다
여자라면 매번 남자 화장실을 사용하겠는가.
이런 내용을 자꾸 주장하면
이는 결국 저 사람은 남자인 것 같다
그러니 요금을 제대로 받자
이런 내용을 내세우려고 그런 주장을 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런데 가정적 항변에서는 원칙적으로
원래 어떤 입장이었는가 하면
지금 문제삼는 A 나 그 A 의 있고 없음 자체를 얻지 못함을 제시한 것이다.
그런 바탕에서는
다시 A가 없다가 있게 된다거나
있다가 없게 된다는 생멸을 내세울수도 없다.
또 그런 생멸을 세울 수 없으므로
그 생멸이 무슨 사정과 무슨 원인으로 그처럼 생겨나고 사라지는가도 역시 세울 수 없다.
용수보살님의 본 입장은 이와 같다.
그리고 그런 사정때문에
그런 A 나 그 생멸을 얻을 수 없음을 제시하고 공함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제시하면
이제 상대가 자신이 처음부터 행한 망상분별이 잘못임을 인정하고
그 일체를 폐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이런 저런 근거를 제시해서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게 된다.
그 뿐 아니라, 또 다른 주장을 다시 내세우게 된다.
예를 들어 A의 생겨남을 부정하게 되면
이제 상대는 그렇다면 A 의 생함은 없지만,
그러나 A 의 멸함은 있다고 나아가기도 한다.
또는 아예 생멸함이 없고
늘 있거나 늘 없거나 하는 상태라고 나아가기도 한다.
또는 한번 논의할 A 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더라도
그 이후 한번 없어지면 무한하게 없는 상태가 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다시 새로운 망상분별을 증폭해 행하며 나아가게 된다.
그래서 용수보살님이 사용하는
망상퇴치방안의 주요한 방식은
'상대'의 입장에서 어떤 분별을 행하는데
분별할 수 있는 경우수를 남김없이 나열해 놓고
그 하나하나가 다 문제가 있어서 폐기해야 한다.
이런 내용을 제시하는 데 초점을 두게 되는 것이다.
경우수가 2 이면 이 두 경우를 놓고 다 폐기처분해야 하는 상태로 몰고가고
3 경우 4 경우 5 경우가 있으면 그 경우를 놓고 또 그렇게 한다.
그런데 처음 용수보살 입장에서 세상에 그런 경우수가 있다고
그런 범주나 그런 시설을 허용하는가 하면 원래는 그렇지 않다.
만일 용수보살이 이런 주장이나 논파과정에서 의존하는 것을 하나라도 확립한다면,
그것은 용수보살 입장에서는 자승자박의 상태가 된다.
용수보살이 주장하는 기본 입장에서는 그런 내용을 본래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비판을 할 수 있는가하면
용수보살님이 직접 그런 주장을 하고
그런 논리체계를 세우고 그런 망상분별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고
상대가 그렇게 내세우면 상대입장에서 그렇게 됨을
상대입장에서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사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상대가 거꾸로
용수보살님에게 가정적 항변 방식을 사용하면
용수보살님이 거꾸로 논쟁에서 궁지에 내몰리게 된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된다.
그렇다. 용수보살님이 제시한 그런 내용이 옳다고 하자.
그렇다면, 하고 이후 용수보살님이 제시한 내용을
용수보살님 입장에서 살피면 그것이 다
거꾸로 용수보살님의 원칙적 입장과 모순되는 내용을
확립해 내세우는 것이 된다.
이렇게 보게 되는것이다. .
왜냐하면 원래 용수보살님의 원칙적 입장에서는
그런 내용 자체를 처음부터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런데 처음에 용수보살님이 상대 입장을 받아들여 그렇다고 한다면
이렇게 시작한 부분부터가 벌써 문제다.
그것부터 원래의 입장과 다르기 때문이다.
또 그 이후 그런 전제에서는 필연적으로 이렇게 된다고
제시하는 부분도 마찬가지다.
만일 이런 내용을 확립한다면 그것도 용수보살님 입장에서는 문제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상대를 논파하려고 임하면 자승자박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처럼 그런 관계를 확립해 그런 내용을 제시하지 않으면
앞의 내용도 깨뜨리기 곤란하다고 보게 된다.
그런데 가정적 항변이란 본래 그런 내용이 아니다.
용수보살님의 입장은 원칙적으로 그런 내용을 일체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다만 상대를 이해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상대가 주장하는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상대의 주장과 상대가 의존하는 망상적 추론 체계 등에 의해서
그런 심각한 문제가 필연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니 그것을 당신이 해결하고
되도록 빨리 폐기하라고 이끄는 노력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이렇게 여러 방안을 사용해도
현실에서 커피 한 잔만 마시려고 해도
당장부터 원래 자신이 의존하던 그런 생각들이 오히려 더 적절하다고 보게 된다.
그만큼 현실에서 그런 망상분별을 일으켜 집착을 갖게 되는 경향은 뿌리깊다.
본래 생멸을 얻을 수 없는데
저기서 연기가 피어오르거나
꽃이 피거나 커피 잔이 떨어져 깨지면서 소리를 듣게 되고
왜 그렇게 생멸이 있다고 보게끔 되는 것인가.
이 문제를 쉽게 이해하려면
이전 조각글에서 제시한
비닐 마술 과정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본래 내용이 없는데
그러나 현실에서는 자꾸 생생하게 매 순간 대하는 그런 내용이 진짜 있는 것처럼 여겨지고
오히려 그런 생각이 더 그럴 듯하다고 마음이 기울게 되는 사정은
바로 그처럼 망집에 걸려 있기에 사정이 그렇다.
비닐마술 비유를 자주 드는데 다시 반복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의 비닐에 세모를 그려 놓고
또 다른 하나의 비닐에 큰 동그라미를 그려 놓고
이 두 비닐을 겹쳐서 바라보면
그 비닐에는 안쪽이 세모인 도너츠가 그렇게 있다고 보게 된다.
이상한 일이다.
각 비닐에는 없는 그런 안이 세모인 도처츠를
그것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어떻게 보면 유치한 마술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자꾸 얻을 수 없는 생멸과 생사 이런 것을 놓고
매 순간 묶여 지내는 사정은
바로 그런 비닐마술의 경우처럼
각 비닐에서 얻을 수 없는 도너츠를 놓고
매 순간 생생하게 그 내용이 각 비닐에 그렇게 있다고 여기는 상황과 같다.
그래서 이 문제 상황을 그림으로 그려 제시한 내용을
붙여 놓고 앞의 내용을 잘 음미해 나가면
논서를 살피는데 도움이 된다.
[img2-9]
08pfl--image/8식-9.jpg
[img2-8]
08pfl--image/8식-8.jpg
[img2-10]
08pfl--image/사람.jpg
현실에서 어떤 이가 a 라고 보는 것은
이를 모두 격자이론으로 살피면
그렇게 보는 부분에는 그런 내용을 일체 얻을 수 없음을
쉽게 가정적 항변 방식으로 밝힐 수 있게 된다.
평소 자신이나 영희나 철수라고 여기고 대하는 어떤 부분도
사정이 그러함을 상징적으로 위 그림이 제시한다.
목에 캥거루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있다는 사실은 요즘에는 상식적인 내용이다.
그런데 그런 것은 사람이 아니라고 그런 것을 하나하나 제거하면
나중에는 허공만 남게 된다.
이런 사정을 격자이론을 통해서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각 부분을 묶고 나누는 격자란
본래 감각현실에 있는 것이 아니다.
관념분별 영역에서 그렇게 행하는 것 뿐이다.
그래서 위 그림에서도 관념분별이 행해지는 6 영역에 그런 격자를 놓고
이렇게 묶고 저렇게 나누어서 일정한 부분을 처음 a 라고 보는 그런 현상을
그림으로 표시하고 있다.
하나 더 추가해보자.
처음에 작업할 때는 조금 힘들지만 이후는 복사해 붙이기만 하면 되므로 쉽다.
08pfl--image/8-vinyl-magic.jpg
세모가 그려진 비닐과 동그라미가 그려진 비닐을 함께 합쳐서 대하면
매 순간 안이 세모인 도너츠가 그 각 영역에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이런 현상을 설명하는 그림이다.
생사 현실 생멸, 인과, 유무,
중론에서 대표적으로 나열하는 그런 내용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 전도망상분별 상태에서 일으키는 온갖 분별이 사정이 위와 같다.
그런데 원칙적으로
상대나 용수보살님이나
원래 어떤 영역의 문제를 놓고 논의하고자 한 것인가하면
위 그림에서 # 이라고 표시한 실재의 내용이 무엇인가.
또 영원불변하고 고정된 참되고 실다운 진짜의 내용은 어딘가에 있는가.
이런 문제를 놓고 논의를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논의를 살펴보면
그 내용은 직접 제시되지 않고
매번 1! 과 6 @ 영역에서 얻는 내용들만
반복해서 제시되고 있다.
그것은 가정적항변의 논의 셩격과 논의 사정이 그렇기 때문이다.
어떤 내용이 문제되면 어떤 가게에서 문제되는 것을 실험실에 가져와 살피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것의 실재가 어떻다 이렇다 저렇다를 놓고 논의할 때는
그렇게 해결할 수 없다.
따라서 실재와 관련되는 논의를 할 때는
문제되는 실재와 현실내용을 잘 붙잡고
원칙적으로 이 두 영역의 본 사정을 잘 관하고 논의를 그쳐야 한다.
그런데 상대가 이 원칙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편,
망집에 묶인 가운데
앞과 같이 한쪽에서 세모 모양[감각현실]을 생생하게 얻고
그 세모를 놓고 동그라미[분별]를 명료하게 분별해 일으키고 나서는
이 두 내용을 겹쳐 놓고 안은 세모고 밖은 동그라미인 도너츠가 현실에 있다고 여기게 된다.
그리고 이후 이 도너츠가 그런 사정으로
각 영역에 다 실답게 들어 있다고 주장하게 된다.
그래서 이것이 문제가 된다.
그런데 세모나 동그라미나 그리고 그것을 겹쳐 놓아서 보게 되는 '안이 세모인 도너츠'
이런 것들이 하나같이 실답지 않음은 이 상황에서 어떻게 살펴야 되는가라는
문제를 처음 살펴보아야 한다.
원칙적으로 이를 살피는 방안은 『대반야바라밀다경』에 나온다.
즉, a 와 b가 그 정체나 관계가 문제된다면
이렇게 문제되는 것을 잘 붙잡고
이 a 자체가 그렇게 문제삼는 그 b 인가.
반대로 그 b 가 곧 이 a 인가를 직접 살피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지는 않지만,
그것이 전혀 무관한 관계에 있는 것은 또 아니므로
그 b 가 그런 a 를 떠나서 얻게 되는 것인가.
이것도 또 함께 살핀다.
그래서 문제되는 a 와 b 가 있는 그대로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살피는 것이다.
실재나 - 감각현실 - 관념분별 사이
즉, 실상(實相 dharmatā ; dharma-svabhāva) - 상(相 Lakṣaṇa ) - 상(想 Saṃjña) 사이에서
각 내용의 정체나 관계가 문제될 때도 같은 방식을 사용하면 된다.
거울에 어떤 모습이 보이면 사람들이 대부분 혼동을 하게 된다.
거울에 자신의 모습이나 꽃의 모습이 비추이는데 그 모습이 거울면에 있다.
사정이 그러므로 그 모습이 거울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그 부분은 거울이 또 아니라고 보아야 하는가.
그런 경우에도 앞의 방식을 놓고 살펴서 있는 그대로 기술하면 된다.
솜을 만지면서 부드러움을 느꼈다.
이 부드러움은 솜에서 느꼈는데
이 부드러움이 솜과는 어떤 관계일까. 이 문제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짜장면을 배가 고플 때 먹으니 너무 맛있다고 느꼈다.
그런데 5 그릇을 먹고 나서 쉬는데 또 배달된 짜장면을 보니 갑자기 구토증이 일어났다.
이런 경우도 마찬가지다.
처음 짜장면을 보면서 정말 맛있다고 생생하게 느꼈는데
그러면 그 맛이 그 짜장면에 있었던 것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아니라고 해야 할까.
이런 문제도 다 성격이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런 경우 모두 위와 같이 해결하면 된다.
그런데 대부분 이런 문제에서 망상분별 집착증세를 갖는 입장은
자신이 그짜장면을 대할 때 마다 좋음을 느끼게 되면
그런 사정으로 그 좋음은 그 짜장면에 보이지 않은 형태로 들어 있다고 여긴다.
그리고 하나의 문제에서 이렇게 망상적 분별을 행하는 입장은
이런 성격의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대부분 이와 같이 임한다.
그래서 자신이 무엇을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면
그 생각내용이 거기에 있다고 여긴다.
그리고 나머지 문제도 다 그처럼 대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현실에서 어떤 내용을 얻으면
그것이 모두 다른 영역에도 그처럼 실답게 있다고 여기면서 집착을 갖고 대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수행은 수행대로 전혀 행하지 못하고
곧바로 3 악도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 생사현실의 문제다.
이것을 해결하려면
처음 그런 망상을 일으킨 그 부분을 잘 정리해야 한다.
그래서 잘 살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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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놓고 이 사정을 이해해보자.
꿈은 생생하게 꾸었다 .
이것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실답지 않은 꿈을 자꾸 실답다고 여기고
그런 바탕에서 자꾸 무언가를 꾀하고
행하는 이가 있으면
어떻게 말려야 하는가.
꿈을 꿈꾸는 그 상황을 놓고 이 문제를 살피는 것이 아니고
이제 그 내용을 현실을 놓고 함께
살피는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그렇게 생생한 꿈을
실답지 않다고 보게 된 요소가
무언가를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즉, 꿈은 꿈꿀 때는 생생한데
그런 꿈을 왜 실답지 않다고 하게 되는가.
이 부분을 잘 살펴야 한다.
꿈은 생생하고 그렇게 꾸었는데
그러나 그 내용은
'현실에서는 얻지 못한다. ' 이 부분인 것이다.
꿈이 생생한데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는 것도
바로 이런 사정 때문이다.
그래서 꿈이 실답지 않다고 하는 것은
그렇다고 꿈을 그렇게 생생하게 꾼 것이 아니라거나,
꿈을결코 못 꾼다거나,
꿈을 꾸면 절 대 안된다고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꿈을 꾸고 나서
그 꿈을 실답다고 여기며 집착하고
그에 바탕해 무언가를 기획하고
침대 밑을 굴착공사를 하면
그 건물 무너지고
이웃간에 크게 문제가 된다.
이런 문제를 지금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꿈이 실다운가를 현실을 놓고 살펴서
그것이 실답지 않음을 살피게 되는 것처럼
현실에서 문제삼는 내용이 실다운가 아닌가를 문제삼을 때는
이 내용을 실재를 놓고
그 실재가 무언가를 따지는 것과 그 사정이 같다.
그래서 실재를 놓고 이 문제를 살피는 것이다.
또 하나 꿈은 그 순간 생생한데
왜 꿈이 실답지 않다고 하는가라고 할 때
그렇게 보게 되는 사유가 있다.
생생하기는 한데
꿈은 그런 조건에서만 임시적으로 얻는 것 뿐이다.
그리고 그 내용에서 기대하는 다른 성질을 얻을 수도 없는 것이다.
이런 내용 때문에 그것을 진짜라고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반대로 현실 어딘가에는
이런 꿈과는 달리 실답게 볼 진짜가 있는가가
문제되고 논의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만일 현실 내용을 표준으로 잡고
자신이 눈으로 보는 내용은
지금 눈으로 생생하게 보이고
지금 그 내용이 대단히 좋기에
아무 불만이 없고
이런 논의를 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
그 부분은 문제삼을 이유가 없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경우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현실에서도 그런 내용은 계속 쉼없이 눈을 뜨고
그것을 대할 때만 그런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것 뿐이다.
그래서 그 내용은 당장 현실에서도
귀의 영역으로도 그 내용을 가지고 갈 수 없는 것이다.
더 나아가 생사현실에서 생명형태가 바꿔지면
더더욱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내용은 당장 눈을 감고
직전에 생생하게 본 내용을 가져오려고 해도
못 가져오기에 분명하게 파악하지만,
정작 그 매 상황마다
행한 업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가 이제 더 이상 눈으로 무엇을
보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어도
그를 대하는 이들은 여전히 보면서
다른 촉감이나 다른 내용으로
그것을 돌려주게 된다는 사정을 말하는 것이다.
처음 이 한 단면에서 그 문제를 풀지 못하고
그런 업의 장애를 해결하지 못한 이가
갑자기 그런 상태가 되면 해결할 수가 있다고 볼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는 의미다.
여하튼 현실에서 얻는 내용과 관련해서
그것이 집착을 가질만한 실다운 내용으로 볼 수 있는가가 문제되어
그 실재가 무언가를 놓고 논의하게 된다.
그런데 정작 논의에서는
문제되는 실재는 직접 얻어서 제시할 도리가 없는 것이므로
특히 앞과 같이 원칙적인 방안으로 그것을 살피는 입장이 아닐 때는
그렇게 문제되는 실재를 직접 벌려 놓고
제시하는 입장이 아니다.
일단 전도망상분별을 일으킨 이는
세모와 동그라미를 겹쳐 놓고 안이 세모인 도너츠를 보게 되면
그 내용이 각 영역에 그처럼 실답게 있다고 여기게 된다.
그래서 그 상태도 현실에서 문제다.
그런데 그런 내용이 실다운가가 문제되어
실재는 어떤가 문제되면
그 경우에도 그 내용을 그대로 실재의 영역에 적용해서
각가지 억지 주장을 제시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 가정적 항변을 제시하는 입장도
그것이 실재의 영역의 문제라고 해서
실재의 내용을 직접 꺼내서
그것이 이렇다 저렇다라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상대의 내용이
이런 실재의 논의와 관련해서
어떤 문제가 있게 되는가를
상대 입장에서 자꾸 제시해서 물리치는 입장이 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어떻게 하는가 하는 문제는
중론송에서 구체적으로 제시되는 내용을
이런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하나하나 살펴야 하는데
그러나 그것은 용수보살님이 그렇게 만들어 제시하는
새롭고 확고부동한 어떤 체계가 아니고
상대가 그렇게 어떤 용을 붙잡고 제시하면서 임하므로
그것을 그렇게 놓고 하나하나 살펴나가는 방식이 되는 것이다.
일단 글이 길어져서
조금 쉬고 내용도 조금 다시 정리해야 한다고 본다.
mus0fl--Jean-Louis Murat - L'ange déchu.lrc
시간이 많이 늦었는데
불생불멸로 시작해서
연비연역무로 끝나는 관인연품의 게송을 대하면
세간에서 행하는 현실 인식과는 대단히 다름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옥상기지에서 쉬면서
그런 사정을 메세지로 전하는 노래를 들었다.
jean louis 이런 글자만 보고 내려와서 곡을 찾으려는데
이 가수가 부른 노래만 대략 200 여곡 가까이 나열된다.
가수 가운데 곡 하나만 있는 경우도 많은데
이 분은 곡이 많다.
여하튼 잧아서 올리는데
경전에서 제시하는 내용을 대하는 경우 현실에는
극과 극의 반응이 있다는 내용을 전한다고 시감상하게 된다.
현실에서 어느 곳을 관광하고 돌아왔는데
어떤 이는 얼마나 약속되고 예정된 대로 잘 곳곳을 시간맞춰
무사히 다녀왔는가에 초점을 맞춰 평가하는 이도 있고
어떤 이는 이 과정에서 얼마나 경비를 썼는가를 놓고 그것을 평가하는 이도 있고
어떤 이는 얼마나 평소 못보던 풍광을 잘 즐겁게 많이 구경했는가를 놓고 평가하는 이도 있고
다 제각각 다르다.
그래서 현실에서 곰과 곰을 부리는 조련사
그리고 그 곰의 쇼를 보고 즐기는 관객
이런 각 입장마다 그 평가가 다 극과극으로 차이가 있다
그런데 여기에 다시 생사고통을 벗어나는데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가 하는 시각에서 대하는 수행자의 입장까지 덧붙이면
그 극과 극의 입장 차이는 더 심해진다.
그래서 결국 앞에서 살핀 문제를 놓고 다시 잘 정리해야 한다.
그리고 이처럼 현실에서 각 입장이 극과 극의 차이가 있으므로
부처님도 처음 그 내용을 중생에게 제시할 때는
이런 극과 극의 입장차이를 고려해서
중생의 입장에 먼저 맞추어 내용을 시설해 제시하고
점차 그런 망상분별을 제거하고
생사를 벗어나오게 하는 취지로 다양한 가르침을 베풀게 된 사정이 있다.
그래서 간혹 『중론』 관인연품의 마치막 부분에
연비연역무 이런 내용이 제시되고
중간에 4 연을 부정하는 내용들을 놓고
상당히 의아하게 이를 여기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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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연기법이나 4 연 12 연기
이런 내용은 모두
부처님이 그런 내용을 제시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왜 그것을 부정하는가.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정이 복잡하게 된다.
이제 그 사정을 자신이 대학원에서 수학공부를 다 마치고
어느 무인도에 가서 유치원에 갓 들어가는 아이를 놓고
이 수학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면
처음 무엇부터 가르쳐야 한다고 보겠는가 하는 사정을
놓고 잘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연기의 관계란
담배를 불을 붙이면 담배의 상태에서는
보지 못하던 연기가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되고
그것이 왜 그렇게 나타나는가를 설명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현실에서 어떻게 이것을 보게 되는가 하면
결국
담배 + 불 => 연기 + 재
이런 관계로 이것을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이 각 요소를 이 상황에서 빼거나 넣거나 하면
그에 따라 뒷 내용이 또 달라지게 되는 변화를 보게 된다는
사정이
이런 내용을 이렇게 제시하는 사정이기도 하다.
이것이 현실의 이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대부분 빠뜨리게 되는 내용까지
더 추가해서
부처님이 그런 내용을 일단 그렇게 제시한 것이다.
특히 여기에서 의미가 깊은 것은
등무간연이나 소연연과 같은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사과가 어떻게 여기에 있게 되었는가를 문제삼으면
일반적으로 대부분 씨나 물 땅 이런 것을 제시하게 되지만,
정작 소연연이나 등무간연에 해당하는 내용은
빠뜨리는 경우가 더 의외로 많은 것이다.
이것이 과학자나 의사나 생물학자 대부분의 일반적 입장이기도 하다.
그래서 기본적 망상은 이미 현실에서
어떤 이가 현실에서 눈을 뜨고 대하는 내용을 놓고
그것이 무엇이라고 여기고 무엇이라고 기술하는가를 살피면
쉽게 그 사정을 파악할 수 있다.
여기서 눈 앞에 있는 사과는
자신의 밖에 있는 외부 세계의 한 내용이고 그런 것들이 곧 외부 세계이고
그래서 이것은 자신의 감관이 대하는 외부 대상이다.
그리고 이것은 정신과는 별개인 외부 물질이다.
이렇게 보고
이런 내용은 단지 자신만 망상분별 상태에서 혼자 이런 내용을 보고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영희나 철수나 대부분 같은 내용을 대하고 보는
외부의 객관적 실재다
이렇게 여기고 이 내용을 과학교과서에 떡하고
기술해 제시하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그래서 그렇게 한 주체가 보고 대하는 내용은
영희나 철수나 자신이나간에
모두 그 마음에 그런 내용을 얻어져 머무는 것이어서
그렇게 현실에서 한 주체가 얻는 내용은 그런 성격의 내용이 아니다라는 것을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
또 그렇게 이해하는 바탕에서만
소연연이나 등무간연과 같은 내용도
인과의 한 요소로 그렇게 포함해서 다루게 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 의식이 있고 없고에 따라서
망상의 깊이나 정도가 다 다른 것이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는 그렇게 제시한 내용을 놓고
그렇지 않다고 제시하는 입장인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된 것인가.
그 사정이 바로 그런 것이다.
처음 부처님이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을 왜 그렇게 했는가는
바로 그런 사정을 그 내용으로 그렇게 이해하라고
그런 말씀을 제시한 것이라는 의미다.
나중에 보면 12 연기의 내용을 중론송에서 보게 되는데
여기에 그렇게 전도몽상을 일으켜 본래 생사를 얻을 수 없는데
그런 생사가 있다고 보고 대하는 그 사정이
또 그렇게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알고보면 이 내용과
여기 관인연품에서 제시하는 내용은
같은 입장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달리 대하면
앞에서 본 것처럼 각 단계 각 사정마다
극과 극으로 달리 이해하고 달리 대하게 되는
문제가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불생불멸이라고 제시하면
갑이라는 글자가 생이나 멸이라는 글자도 아니니
그래서 불생불멸이고 그래서 공하다.
이렇게 이해하는 상태도 나타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왜 이렇게 극과 극으로 엉뚱하게 이해하게 되는가를
천천히 잘 생각해야 한다.
얼마나 엉뚱한가는
현실에서 꿈을 꾸고 나서
그 꿈을 현실과 비교할 때 느끼는 엉뚱함처럼
지금 논의하는 내용이 각각 그런 관계에 있음을
제시하게 된다.
꿈에서 바다에서 황금을 캐는 꿈을 꾸고 나서
깨어나 아무것도 없는 침대를 대하면
이 내용과 이 내용이 서로 어떤 관계인가 하고
어리둥절하게 되지 않을 것인가.
마찬가지다.
자신이 손에 컵을 쥐고
커피를 마시면서
컵을 두드려 컵의 소리를 듣고
그리고 눈으로 이 장면을 본다고 해보자.
어떻게 이해하는가.
분명 손이 쥐고 있는 컵이나
입을 대는 컵이나
두드려 소리를 듣는 컵이나
눈으로 대하는 컵이나
다 같다고 여기지 않는가.
여기서도 가정적 항변을 사용해보자.
그렇다고 하자.
그런데 그 하나의 내용을 놓고
눈이 대한 내용은
귀가 대해 얻는 내용을 기준으로 놓고 보면
얼마나 엉뚱한가.
나머지도 마찬가지다.
물론 눈을 보통 기준으로 잡는다고 하면
나머지가 다 그런 것이다.
그런데 이제 자신이 눈으로 그런 모습을 보았다는 사정으로
그 내용을 다른 영역으로 마구 끌고가서
그 내용은 다 그처럼 있다고 주장을 하고 나아가면
다른 영역에서 대할 때 얼마나 엉뚱하고 황당한 주장이라고 보겠는가.
사정이 그렇다.
그래서 어리둥절해지게 되는 것이다.
나중에 현실에서 그렇게 집착하고 대한 것들이
하나도 쓸모없는 것이고
오히려 고통을 증가시키게 한 요소가 되는 것임을 보게 되면
얼마나 또 황당함을 느끼게 될 것인가.
아닐 것 같은데 당장 이 현실에서 부터
앞처럼 눈이면 눈 귀면 귀 이런 영역마다
이 내용을 다 황당하게 여기게끔 되는 것이다.
더욱이 그 내용은 계속 그 감관을 열어 놓고
그렇게 내용을 대하고
그런 망상분별로 그것을 대할 때만
사정이 그런 것이다.
나중에는 일어나보니 숲에서 낙엽을 쌓아 놓고
그것이 황금이나 되는 줄 알고 지낸 것처럼
황당함을 느끼게 되고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낙엽으로 다른 생명을 괴롭힌 것에 비례헤서
업의 장애를 일으켜
결국 또 다른 낙엽으로 그에 상당한 고통을
무량겁에 걸쳐서 3 악도를 헤메며
돌려 받게끔 된다는 사정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 첫 내용을 황당하다고 여기지 말고
잘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노래에서 죽이면 무엇하겠는가 하는 것은
수행자의 입장일 수는 있는데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지만 그래도 그렇게 한다는 것이
대부분 그런 업의 장애에 얽힌 입장인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가 결국 생사고통을 무량한 겁에 걸쳐서
받아나가는 사정인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자신을 놓고 그 내용을 거꾸로 생각하면
그것이 대부분 이해가 되는 내용이다.
그냥 자는데 갑자기 누가 망치로 뚝 때리고
지갑을 가져가고 저기서 좋다고 웃는 것을 본다.
그런데 자신이 먼저 귀신이 되어서
귀신의 선배가 되었다.
전철로 비유하면 별 생각이 없이
인천까지 가는 중인데
어떤 이에게 밀려서 종로에 강제 하차를 하고
떠나는 비행기나 배를 놓치고
못 가게 되었다.
그런 내용인데
그것이 각 경우마다 대단히 심각하게 여기고 대하는
내용들이 된다는 의미다.
그런데 원칙상 이 각 내용이 어떻다는 것을 이해하면
처음부터 그렇게 하지도 않고
또 그런 경우가 되어도
별 문제가 아니라고 보게 되는가
이것을 하나 제시하는 한편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보지 않으면
처음부터도 도저히 그렇게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고도 보는 한편
또 그런 경우가 되면
얼마나 고통을 심하게 받게 되는가
이 두부분을 놓고
생사 즉 열반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한 입장은 생사 현실을 니르바나라고 대하는데 반해
다른 입장은 니르바나를 생사고통을 무량하게 극심하게 받는 상황이라고
대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연기관계도 마찬가지다.
앞에서 담배에서 연기가 나는 관계를 놓고
a + b => C 의 내용을 제시하면
이것이 곧 4 연 6 인 5 과 이런 설명도 되고
12 연기의 설명도 되는데
이 같은 내용을 놓고
어떻게 극과 극으로 서로 다르게 이해하는가 하면
한 입장은 위 연기관계를 제시한 그 내용이
바로 그처럼
현실에서 얻는 C 는 그런 관계에서만 얻고
그 관계를 떠나면 얻지 못하는 것이어서 무상함을 나타내고
또 사정이 그런데 그런 것에 집착을 갖고 대하면
바로 그런 사정으로 그것이 고통을 주는 사정임을 제시한다고 이해하게 되고
또 그 관계는 그런 C 에 어떤 영원불변한 본체로서 진짜에 해당하는
내용이 없다는 내용도 제시하는 것이어서
곧 이것이 그런 진짜에 해당하는 실체가 없다는 무아, 무자성을 제시하는 내용이라고 이해하고
또 이 관계가 곧 현실에서 문제삼는 C 와 같은 생사고통은
본래 그 앞에 적어 놓은 내용을 보면
그 앞 단계인 a + b 도 없는 가운데 그렇게 그런 관계에서 나타나게 된다고
제시한 것이어서
결국 그런 상태를 떠난 실재는 그런 생사고통을 본래 얻을 수 없는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임도 나타낸다고 이해하는 것이고
또 바로 이런 연기관게를 나타낸 그 내용은
현실에서 어떤 주체가 감관을 통해 각 내용을 화합해 얻을 때
예를 들어 눈을 뜨면 모습을 보고
눈을 감으면 그 모습을 보지 못하게 됨을 경험하는데
그러나 눈을 감는다고 그 직전에 본 것이
전혀 아무 것도 없게 되고 아무 것도 없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러나 그렇지 않고 무언가가 실재한다면
그것은 무엇이겠는가
과연 눈을 감을 때 얻는 그런 상태와 같은가.
아니면 눈을 뜰 때 얻는 그러 상태와 같은가.
그 본바탕은 과연 무엇이라고 해야 하는가.
이런 문제가 제기될 때
그에 대한 답도 제시하는 내용이라고 보는 것이다.
왜 그러겠는가.
지금 찾는 실재가 무엇을 찾는가.
일단 저런 관계로
자신의 주관이 관계해서 얻는 내용이 아닌
그 무엇을 그렇게 찾는 것이다.
그러니 위와 같은 관계로 얻는
C 는 당연히 우선 그렇게 찾는 그런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은
일단 아닌 것이 위 식에 의해 분명한 것이다.
위 식이 이미 그런 내용은 그런 실재의 지위에 있는 그런 내용이 아님을
그렇게 떡 제시하고 있다는 의미다.
그리고 실재는 결국 이런 관계로 내용을 얻는
주체는 끝내 얻을 수 없는 그런 것임도
그 사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필경리 불가득 공 이런 내용이 이것이다.
그래서 위 관계는 결국 그런 사정으로
실재가 공하다는 내용도 그렇게 제시하는 것임을
이해하게 된다는 의미다.
그런데 같은 내용을 망상분별을 이처럼 이런 과정으로
행하게 된 입장에서는 똑같이 위 내용을 대하고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면
극과 극으로 달리 대하게 된다는 의미다.
결국 처음 짜장면을 먹고 좋음을 느끼면
,그 좋음을 들고 가 짜장면에 좋음이 있다고 써 넣는 그런 습관대로
연기라는 내용을 제시받으면
그 내용이 그처럼 실재에도 그대로 있고
더 나아가 그에 해당하는 진짜의 내용도 그처럼 있다고
나아간다는 의미다.
그래서 엉뚱하게 취하고 엉뚱하게 대하고 나서
나중에는 거꾸로 어리둥절해 한다는 의미다.
그래도 이나마 4 연이나 12 연기이 내용을 이해하는 가운데
이렇게 임하는 경우는 사정이 나은데
앞에 청목 보살님이 주석을 붙인 내용을 보면
경우가 심한 사례가 대단히 많다고 나열하고 있음을 보는데
이것이 사실은 일반적인 현실사정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가끔 노래를 듣고
글을 열심히 쓰다가
노래에서 그만 쓰라고 하면
그만 중지하기도 하고
시합에 나가기전에는 절대 한 번 신은 양말을 벗지 않는다고
여기는 이도 있는데
이런 내용이 다 여디에서 출발하는가하면
결국 망상분별과 집착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이해하게 된다.
일단 어떤 시합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집착하는 것이다.
만일 집착하지 않아서 지면 어떻고 이기면 어떤가.
이런다면
또 양말을 벗으면 어떻고 신으면 어떤가 이렇게 될 것이다.
그런데 마찬가지라면 다른 이를 불쾌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
이왕이면 새 양말을 갈아신자. 이렇게 동가홍상으로 나아갈 것이고
결국 어차피 차별없이 공한 가운데
좋고 좋은 상태로 나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놓고
수행의 방향을 택해서 나아가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처음에 붙잡힌 상태는 이 모든 문제에서
매 순간마다 그처럼 극과 극으로 달리 반응을 취하면서
삼악도에 골인하기 직전까지도 그 자세를 바꾸지 않고
심지어 들어가서도 잘 안 바꾼다는 사정이 보고되는 것이다.
그 사정이 왜 그런가하면
처음 그 문제를 그렇게 극과 극으로 잘못 이해하고
잘못 취하고 잘못 대해서
그렇다는 사정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극과 극으로 다르니
이제 실험을 해보자
시각 정보 때문에 어떤 촉각정보를 얻는다고 말하면 이해가 되는가.
엉터리다.
그리고 눈을 떠서 보는 내용을
눈을 감고 다시 되살려 내보자.
되는가.
그리고 눈을 떠서 얻는 내용을 가지고
귀로 듣는 소리의 영역에 집어 넣어 보자
되는가.
이런 것을 세계 각 곳에서 환전이 안 되는
코인을 혼자 좋다고 계속 붙잡고 있는 상태라고 보는 것이다.
황당함은 바로 이런 경우인 것이다.
그런데 계속 눈을 뜨고
계속 처음 일으킨 망상분별을 가지고
그것을 집착하면서 대하면
그 바탕에서는 마치 그것이 그런 것 같다고 여기면서
계속 대하게 된다는 의미다.
물론 그런 내용이
전혀 필요없다고 할 것은 아닌데
그러나 바로 이런 집착 때문에
그 내용을 다른 영역에서는 얻을 도리가 없고
그래서 실다운 것이 아닌데
그것을 그처럼 실답다고 여기면서
집착을 갖고 업을 행하므로
바로 그런 사정으로
결국 그가 고통을 무량하게 받게 되는
3 악도에 묶여 끌려 들어가게 되는 것임도
같이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그 사정은 자신이
그 내용을
자신이 그처럼 처한
곰이나 조련사나 관객의 입장만 붙들고 그에 몰입해 살펴보지 말고
그 각 입장을 바꿔 가면서
각 입장에서 서서 그 내용을 달리 반대로 지켜보면
그 사정이 왜 그런가를 또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 생사고통은
결국 그런 망상분별을 일으킨 이들이
그런 과정으로 그런 업을 통해서
그렇게 받아나가게 되는 것이라고
그 과정을 그렇게 제시한 것이다.
그것이 곧 그런 생사가 근본 무명을 바탕으로 그렇게
나타나게 된다는 연기의 내용이기도 하고
또
그 내용은 곧 무상 고 무아 열반적정 공
이런 내용을 중론에서 제시하듯
제시하는 내용이라고 잘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다.
일단 온갖 엉터리 견해가 난무하므로
이것을 다 붙잡고 가정적 항변으로
처리하기는 힘들다고 보므로
이런 대강만 살피고
더 자세한 내용은
나중으로 넘기기로 한다.
◈Lab value 불기2562/01/23/화/14:21 |
오늘 중론이 뽑혔다. 본 내용을 살피지 않고
보게 되는 사진 풍광 등이 많은 영향을 준다.
♥ 잡담 ♥유적지 주소 찾기 핫키의 개선사항 길게 글을 적었는데
쉬는 가운데 위 곡을 듣게 되어서 |
문서정보
ori
http://buddhism007.tistory.com/3923#7899 θθ |
-- 아래에 조각글 작성시 휴식시점에 붙인 노래가사,사진,풍광,예술작품 자료를 편집상 옮겨 붙입니다.--
>>>
mus0fl--Michel Berger - Si Tu T'en Vas.lrc
○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Exhibition_of_war_portraits_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Red_rose_-_5595
♡오성사
○ [▼]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th Naver 지도
>>>
mus0fl--Jean Ferrat - POTEMKINE.lrc
♡지장사
○ [▼]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th Daum 지도
>>>
mus0fl--Joe Dassin - Ma Bonne Etoile.lrc
○ [pt op tr]Thorn_Tree_Sossusvlei_Namib_Desert_Namibia_Luca_Galuzzi_2004
>>>
mus0fl--Jean - Jacques Goldman - Long Is Road (Américain).lrc
♡진도 청용사(청용선원)
○ [▼]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th Naver 지도
>>>
[ 중간 잡담부분 ]
한자에 대한 한글음을 다는 과정에서
不 이란 글자를 놓고 어떤 경우는 불이라고 읽고
어떤 경우는 부라고 읽는데 이것도 상당히 혼동을 일으킨다.
그런데 어떤 이가 그냥 이 不 글자만 하나 제시하고
한국사람은 이것을 어떻게 읽는가라고 물으면
뒤에 어떤 말이 오는가에 따라서 달리 읽는다라고 말하게 된다.
그런데 글자는 하나인데 왜 그렇게 매번 달리 읽는가는
발음하는데 사정이 있어서 그렇다.
처음 나오는 게송 부분은 8 번 不자를 사용한다고 해서
八不中道 라고 하는데
팔불 ~ 중도 이렇게 본다면 팔불 중도라고 읽어도 될 것 같고
그렇지 않고 앞 부분이 뒷 부분의 중도를 꾸며준다고 보고
모두 묶어서 읽는다면 뒷 말이 ㅈ 으로 시작하므로, 팔부중도라고 읽어야 할 것도 같다.
그런데 논의 과정에서 각 단어의 의미도
앞 뒤 맥락을 통해 파악해가야 하는 사정이 이와 마찬가지다.
>>>
조금 쉬어야 한다고 보는데
결론을 먼저 말하고 쉰다면
다음과 같다.
>>>
일단 쉬기로 한다.
>>>
여기서 고개를 갸우뚱하면 그래도
조금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은 파악해서
이를 계기로 생사고통을 벗어날 가능성이 보이는데
그러나 아예 고개를 갸우뚱하지도 않거나
아예 무시하고 넘어가면
그 경우는 어떻게 보면 심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지만,
축사에 들어가 묶여 지내는 축생과 상태가 거의 같게 된다고
보아야 한다.
우이독경이란 사자성어가 바로 이 상황인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 것은
또 그럴만한 업의 장애가 그렇게 많이 쌓여 있어서
그렇다고 전후 사정을 헤아리게 된다.
평생을 옆에서 이야기하고
심지어 막대기로 찌르면서 힌트를 주어도
자신의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그렇게 임한다는 의미다.
>>>
절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거의 힘들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영화에서나 한 두 번 보여줄 장면
100 층에서 줄을 잡고 몸을 날려서 95 층 창을 깨고
들어가니 자신의 요원들이 자신을 반긴다.
이런 내용과 거의 같은 내용을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
요즘 마스크를 쓰고 다니지 않으면
사람들이 대단히 문제시한다고 한다.
사정을 모르겠다.
본인 생각에
탐욕스럽게 음식을 먹는 입은
남에게 보여주기 창피하다.
그리고 망상분별을 증폭시키는 언설을 자꾸 쏟아내는
입은 고통을 불러 가져 온다.
그처럼 문제되는 입을 어떻게 함부로 남에게 보이고 다니는가.
그런 내용을 이제 세계인이 모두
각성하게 된 것인가.
여하튼 요즘 상황이 이상하다.
그래서 가끔 무엇이 정상인지 비정상인지 혼동이 오는데
어리둥절이란 사찰에서의 상황도 이와 비슷하다.
세속에서 대부분 건전한 상식이고
진리라고 여기는 내용 일체를
엉터리 망상분별일 뿐 아니라
바로 그것으로 세상에서 문제되는
온갖 끔직한 고통과 형벌은
다 빠짐없이 받아나가게 된다고 제시하기 때문이다.
요즘같이 추운 날씨에
태어날 부터 지급받은 가죽 옷 하나만 걸치고
축사에서 임하려면 그것이 쉽겠는가.
보기에는 쉬울지 모르지만
쉽지 않고
더 나아가 그 상황에서
생멸을 얻을 수 없다 이런 내용을
대하거나 이해하는 것은 더더욱 힘든 것이다.
여하튼 사정이 심긱하므로
이 문제를 잘 이해를 해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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