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연과 공(空)은 평등하여 허공과 같아서 무량 무앙수의 중생들을 구호해 줄 수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이 마하연입니다.
보살마하살은 오는 때도 볼 수 없고 또한 가는 때도 볼 수 없으며,
또 주처(住處)도 볼 수 없습니다.
마하연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또한 전후도 볼 수 없고,
또 중앙도 볼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이런 까닭으로 마하연이라고 이름하는 것은 함께 동등한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쌍(雙)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까닭으로 마하연이라고 이름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렇다.
수보리여,
마하연이란 6바라밀이다.
또 마하연이란 모든 다라니문ㆍ모든 삼매문ㆍ수능엄삼매,
나아가 허공제해탈무소착삼매[虛空際解脫無所著三昧]이다.
이것이 보살마하살의 마하연이다.
수보리여,
또 마하연이란 내외공 나아가 무유공이다.
이것이 마하연이다.
또 마하연이란 37품과 부처님의 18법이다.
이것이 보살마하살의 마하연이다.
수보리가 말한 것처럼 마하연은 모든 천ㆍ아수륜ㆍ세간 사람들에서 벗어난다.
수보리여,
가령 욕계 가운데 소유한 실체가 있고,
진리와 다르지 않고,
전도(顚倒)된 것이 아니고,
항상 견고하고 강함이 있고 또한 변하지 않고,
공한 법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마하연은 또한 모든 천ㆍ용ㆍ아수륜ㆍ세간 사람들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수보리여,
마땅히 알지니,
욕계의 겁(劫)이 타버릴 때에 모든 것이 없어져서 항상함도 없고,
강함도 없고,
또한 견고함을 쓸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하연은 세간 사람들과 모든 천ㆍ아수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색계에 또한 마땅히 항상함이 있고 항상 견고함이 있다면,
마하연은 또한 그 위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색계는 공하므로 항상 견고한 것도 없으며,
또한 무너져 다해 버리며,
또 오래 머물지 못한다.
그러므로 마하연은 그 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며,
무색계에 이르기까지도 마땅히 멸진(滅盡)하여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수보리여,
만약 색이 담연(湛然)하고 견고하고 항상함이 있고 전도되지 않아서 견고한 법이 있다면,
마하연은 또한 모든 천ㆍ아수륜ㆍ세간 사람들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색은 무상하고 견고함이 없으며 진리는 전도됨이 없으므로,
마하연은 그 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통(痛:
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이 모두 다 무상하며,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만약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와 색ㆍ성ㆍ향ㆍ미ㆍ세활(細滑)ㆍ법 및 12인연이 담연하고 항상함이 있고 견고하고 굳센 진리가 있어 전도되지 않고 항상 오래 안주한다면,
마하연은 또한 다시 그 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법과 12인연은 항상함이 없고,
견고함도 없고 강함도 없고 탄탄함도 없고 굳셈도 없고,
진리가 전도되지 않음은 마치 겁이 타버리는 것처럼 안주하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하연의 덕은 모든 천ㆍ용ㆍ귀신ㆍ세간 사람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수보리여,
만약 법성 가운데 소유할 것이 있다면 마하연이 아니다.
법성은 무소유이므로 마하연이 된다.
가령 여여함과 진제(眞際)와 불가사의한 실체에 소유가 있다고 한다면,
또한 마하연이 아니다.
여여함과 진제와 불가사의한 실체에 소유가 없으므로 마하연이 되는 것이다.
수보리여,
만약 6바라밀에 소유가 있다고 한다면 마하연이 아니다.
6바라밀은 무소유이므로 마하연이라고 하는 것이며,
모든 천ㆍ용ㆍ아수륜ㆍ세간 사람들에게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내외공과 유무공에 소유함이 있다고 한다면 마하연이 아니다.
내외공과 유무공은 무소유이므로 마하연이라고 하며,
모든 천ㆍ아수륜ㆍ세간 사람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37품과 18법에 소유가 있다고 한다면 마하연이 아니다.
37품과 부처님의 18법은 무소유이므로 마하연이라고 하며,
모든 천ㆍ아수륜ㆍ세간 사람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수보리여,
만약 8배지법(輩地法)1)ㆍ수다원법ㆍ사다함법ㆍ아나함법ㆍ아라한법ㆍ벽지불법ㆍ아유삼불법(阿惟三佛法)2)ㆍ불법에 소유가 있다고 한다면 마하연이 아니다.
8배법(輩法)에서 수다원,
나아가 불법에 이르기까지 무소유이므로 마하연이라고 한다.
그리고 모든 천ㆍ아수륜ㆍ세간 사람들에게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수보리여,
만약 8배법ㆍ수다원ㆍ사다함ㆍ아나함ㆍ아라한ㆍ벽지불ㆍ아유삼불ㆍ불에 소유함이 있다고 한다면 마하연이 아니다.
종성(種性) 수다원에서 위로는 부처에 이르기까지 무소유이므로 마하연이라고 하며,
모든 천ㆍ아수륜ㆍ세간 사람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수보리여,
만약 모든 천ㆍ아수륜ㆍ세간 사람들이 소유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마하연이 아니다.
모든 천ㆍ아수륜ㆍ세간 사람들은 무소유이므로 마하연이라고 하며,
그 가운데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수보리여,
만약 어떤 보살마하살이 처음 뜻을 발한 때부터 불좌(佛坐)에 이를 때까지 그 중간에 지을 것이 있고 뜻을 발한 이래로 소유할 것이 있다면,
마하연이 아니다.
보살마하살이 처음 뜻을 발한 때부터 불좌에 이르기까지 무소유이므로 마하연이라고 한다.
그리고 모든 천ㆍ아수륜ㆍ세간 사람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수보리여,
만약 보살마하살의 금강혜(金剛慧)에 소유할 것이 있으면 보살은 모든 번뇌[習緖]를 깨닫지 못하여 살운야를 이루지 못한다.
금강혜는 무소유이므로 보살은 모든 번뇌를 깨달아서 살운야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천ㆍ아수륜ㆍ세간 사람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수보리여,
만약 여래ㆍ무소착ㆍ등정각ㆍ서른두 가지의 대사상(大士相)에 소유가 있다면 여래ㆍ무소착ㆍ등정각은 모든 천ㆍ아수륜ㆍ세간 사람들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위덕(威德)과 신비롭게 빛나는 광명과 숭고한 일이 없다.
서른두 가지의 상은 무소유이므로 여래ㆍ무소착ㆍ등정각에게 위덕이 있고 신령한 광명이 숭고하게 벗어날 수 있으며,
모든 천ㆍ아수륜ㆍ세간 사람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수보리여,
만약 여래ㆍ무소착ㆍ등정각의 광명에 소유할 것이 있다면,
여래의 광명은 시방의 갠지스강의 모래 수처럼 많은 국토에 두루 이르지 못할 것이다.
수보리여,
광명은 무소유이므로 능히 갠지스강의 모래 수처럼 많은 국토를 두루 비출 수 있는 것이다.
수보리여,
만약 여덟 가지 음성[八種聲]3)에 소유할 것이 있다면 여래의 음성은 시방의 갠지스강의 모래 수처럼 많은 무량한 국토에 두루 이르지 못할 것이며,
만약 부처님의 법륜에 소유할 것이 있다면 여래께서는 법륜을 굴리시지 못할 것이며,
모든 사문ㆍ바라문ㆍ세간 사람들과 모든 천ㆍ귀신ㆍ용과 모든 마군과 모든 범(梵)에 대해서도 능히 굴리시지 못할 것이다.
수보리여,
만약 중생이 소유할 것이 있다면 여래께서 어떻게 중생을 위해서 법륜을 굴리실 수 있으며,
중생들로 하여금 무여니원계(無餘尼洹界)에서 반니원에 들게 하실 수 있겠는가?
중생은 사물이 아니며 무소유이므로 여래께서 법륜을 굴리시는 것이며,
니원을 얻게 하시는 것이며,
미래에도 또한 마땅히 반니원을 얻게 하실 것이다.”
24. 연여공등품(衍與空等品)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말한 것처럼 마하연과 허공은 동등하다.
참으로 그러한 것이다.
실로 허공과 동등하다.
비유하면 허공은 동쪽을 알지 못하고,
또 서쪽을 알지 못하고,
또 남쪽을 알지 못하고,
또 북쪽을 알지 못하고,
또 4유(惟)ㆍ상하(上下)를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수보리여,
여래의 마하연에도 또한 동서남북이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4유ㆍ상하도 없는 것이다.
수보리여,
비유하면 허공이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고 모나지도 않고 둥글지도 않은 것처럼,
여래의 마하연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비유하면 허공이 또한 푸르지도 노랗지도 않고,
또 붉지도 희지도 않고,
또한 붉지도 파르스름하지도 않는 것처럼,
여래의 마하연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수보리여,
마하연과 허공은 동등한 것이다.
그러므로 마하연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비유하면 허공이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며 또한 현재도 아닌 것처럼,
여래의 마하연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마하연과 허공은 동등한 것이다.
비유하면 허공은 길지도 않고 크지도 않고 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는 것처럼,
여래의 마하연도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마하연과 허공은 동등한 것이다.
수보리여,
비유하면 허공은 집착하지도 않고 또한 단절되지도 않는 것처럼 여래의 마하연도 이와 같은 것이다.
비유하면 허공은 생하지도 않고 또한 멸하지도 않고,
또한 머물지도 않고 또한 달라지는 것도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마하연과 허공이 동등하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비유하면 허공은 착하지도 않고 또한 착하지 않은 것도 아니며,
또한 말[言]도 아니며 또한 언어도 아닌 것처럼,
마하연도 또한 이와 같아서 말도 아니고,
또한 선악도 아니다.
그러므로 마하연과 허공은 동등한 것이다.
수보리여,
비유하면 허공이 보는 것도 없고 또한 듣는 것도 없고 또한 소유한 것도 없고 또 아는 것도 없는 것처럼,
마하연도 또한 듣는 것도 없고 또 보는 것도 없고 또한 소유한 것도 없고 또 알고 있는 것도 없다.
그러므로 마하연과 허공은 동등한 것이다.
수보리여,
비유하면 허공이 생각도 없고 깨달음도 없고,
또한 증득함을 짓지도 않고 또한 버리지도 않고 또한 염(念)하지 않는 것처럼,
마하연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비유하면 허공이 음란한 법도 없고 또한 음란함이 없는 것도 아닌 것처럼,
마하연도 이와 같은 것이다.
수보리여,
비유하면 허공이 또한 욕계에 속한 것도 아니고 형계(形界)에 속한 것도 아니고 또 무형계(無形界)에 속한 것도 아닌 것처럼,
마하연도 이와 같아서 또한 삼계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마하연과 허공은 동등한 것이다.
비유하면 허공이 처음 발심한 뜻도 없고,
또한 두 번째ㆍ세 번째ㆍ네 번째ㆍ다섯 번째ㆍ여섯 번째ㆍ일곱 번째ㆍ여덟 번째ㆍ아홉 번째에 머무는 뜻도 없으며 열 번째에 머무는 뜻[十住意]도 없는 것처럼,
마하연도 또한 이와 같아서 또한 10주의 뜻이 없다.
그러므로 마하연과 허공은 동등한 것이다.
비유하면 허공이 또한 수다원도ㆍ사다함도ㆍ아나함도ㆍ아라한도가 없는 것처럼,
마하연도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마하연과 허공은 동등한 것이다.
수보리여,
비유하면 허공이 제자의 지위[弟子地]가 아니고,
또한 벽지불의 지위도 아니며 또 아유삼불의 지위도 아닌 것처럼,
마하연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마하연과 허공은 동등한 것이다.
비유하면 허공이 또한 형색(形色)도 아니고 또한 형색 아닌 것도 아니며,
또 걸림도 없고 또한 걸림이 없는 것도 아니며,
또 상응하는 것도 아니고 상응함이 없는 것도 아닌 것처럼,
마하연도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마하연과 허공은 동등한 것이다.
수보리여,
비유하면 허공이 항상함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무상한 것도 아니며,
또한 괴로움도 아니고 또한 즐거움도 아니며,
또 아(我)도 아니고 또한 아(我)가 아닌 것도 아닌 것처럼,
마하연도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마하연과 허공은 동등한 것이다.
비유하면 허공이 공도 아니고 또한 공 아닌 것도 아니며,
또 상(相)도 아니고 또한 상 아닌 것도 아니며,
또한 원(願)도 아니고 또한 원 아닌 것도 아닌 것처럼,
마하연도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마하연과 허공은 동등한 것이다.
수보리여,
비유하면 허공이 또한 청정함을 멸하는 것도 아니고 청정함을 멸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또한 고요한 것도 아니고 또한 고요하지 않은 것도 아닌 것처럼,
마하연도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마하연과 허공은 동등한 것이다.
비유하면 허공이 또한 밝은 것도 아니고 또한 어두운 것도 아닌 것처럼,
마하연도 이와 같은 것이다.
수보리여,
비유하면 허공이 또한 볼 수 없는 것이고 또 볼 수 없는 것도 아닌 것처럼,
마하연도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마하연과 허공은 동등한 것이다.
비유하면 허공이 또한 행(行)하는 것도 아니고 또한 행하지 않는 것도 아닌 것처럼,
마하연도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마하연과 허공은 동등한 것이다.
이런 까닭에 수보리여,
마하연과 허공은 동등한 것이다.
수보리가 말한 것처럼 허공이 헤아릴 수 없는 아승기의 사람들을 덮고 보호하듯이 마하연도 이와 같은 것이다.
수보리여,
중생에게는 시작이 없으며 허공도 또한 시작이 없다.
허공에 시작이 없으므로 마하연도 또한 시작이 없는 것이다.
마땅히 이렇게 생각하며,
마땅히 이렇게 알아야 한다.
수보리여,
그러므로 헤아릴 수 없는 아승기의 사람들이 마하연을 숭앙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중생과 마하연과 허공은 모두 무소유이기 때문이다.
중생은 한량없으며,
허공도 또한 한량없으며,
마하연도 또한 한량없어 헤아릴 수 없다.
그러므로 수보리여,
한량없는 아승기의 중생들이 마하연을 바라보는 것이다.
수보리여,
허공과 마하연과 중생은 모두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수보리여,
중생이 한계가 없는 것처럼 허공도 한계가 없는 것이다.
마땅히 이렇게 알아야 한다.
마하연도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중생에게 시작이 없으며 법성도 또한 시작이 없으며,
법성이 시작이 없는 것처럼 허공도 또한 시작이 없는 것이며,
허공에 시작이 없는 것처럼 마하연도 또한 시작이 없는 것이다.
마하연에 시작이 없는 것처럼 무량하고,
무한함도 또한 시작이 없는 것이다.
무한함에 시작이 없는 것처럼 헤아릴 수 없음도 또한 시작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보리여,
헤아릴 수 없는 중생들이 마하연을 희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중생과 법성ㆍ허공ㆍ마하연ㆍ아승기겁ㆍ한량없음ㆍ헤아릴 수 없음은 모두 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중생에게 시작이 없는 것처럼 여래도 또한 시작이 없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부처가 시작이 없는 것처럼 허공도 또한 시작이 없으며,
허공에 시작이 없는 것처럼 마하연도 시작이 없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마하연에 시작이 없는 것처럼 아승기도 시작이 없는 것이다.
아승기가 시작이 없는 것처럼 무량하고 무한함도 또한 시작이 없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무한함에 시작이 없는 것처럼 일체 중생들도 또한 시작이 없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수보리여,
이와 같이 헤아릴 수 없는 아승기 사람들이 모두 마하연을 숭앙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중생과 부처ㆍ허공ㆍ마하연ㆍ아승기겁ㆍ무량함ㆍ무한함ㆍ일체의 모든 법은 모두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수보리여,
자아[我]라는 것의 시작도,
나아가 지견[知見]의 시작도,
진제(眞際)의 시작도 없는 것이다.
진제가 시작이 없는 것처럼 모든 법도 시작이 없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수보리여,
무앙수 아승기의 사람들이 모두 마하연을 숭앙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중생과 모든 법은 모두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자아와 중생의 시작과 지견과 불가사의한 실체도 이와 같다.
불가사의하므로 5음의 시작도 모든 법의 시작도 없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수보리여,
헤아릴 수 없는 아승기의 사람들이 마하연을 희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아라는 것과 모든 법은 모두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자아[我相]의 시작과 지견의 시작처럼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도 또한 시작이 없는 것이다.
6정(情)에 시작이 없는 것처럼 모든 법도 또한 시작이 없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와 같으므로 수보리여,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아승기의 사람들이 모두 마하연을 숭앙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아와 모든 법은 모두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자아에 시작이 없는 것처럼 지견도 또한 시작이 없다고,
이와 같이 알아야 한다.
6바라밀도 또한 시작이 없으며,
반야바라밀도 또한 시작이 없는 것처럼 모든 법도 또한 시작이 없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수보리여,
그러므로 무앙수 아승기의 사람들이 모두 마하연을 숭앙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아라는 것과 모든 법은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자아가 시작이 없으므로 내외공도 시작이 없으며 나아가 유무공에도 또한 시작이 없다.
유무공에 단서가 없는 것처럼 모든 법에도 또한 단서가 없다.
그러므로 헤아릴 수 없는 아승기의 사람들이 모두 마하연을 희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아와 모든 법은 모두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자아와 중생 나아가 지견에도 단서가 없으며,
37품과 18법에도 또한 단서가 없다.
이와 같이 18법에 단서가 없는 것이다.
수보리여,
그러므로 헤아릴 수 없는 아승기의 사람들이 마하연을 희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아라는 것과 모든 법은 모두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자아에 단서가 없으며,
종성(種姓)이 이미 분별되어 있는 것과 모든 법에도 단서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헤아릴 수 없는 중생들이 마하연을 희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아와 모든 법은 모두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수다원에 단서가 없으며,
사다함ㆍ아나함ㆍ아라한ㆍ벽지불과 위로 부처에 이르기까지와 살운야와 나아가 모든 법에 단서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 중생들이 마하연을 희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아라는 것과 모든 법은 모두 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니원의 성품이 일체 중생들을 위해서 덮어 보호함을 짓는 것처럼 마하연도 일체 중생들을 위해서 덮어 보호함을 짓는 것이다.
수보리여,
말한 대로 마하연은 오는 때도 볼 수 없고,
또한 가는 때도 볼 수 없으며,
또한 머무는 곳도 볼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법은 동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법은 가지도 않고,
또한 오지도 않고,
또한 머무는 곳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5음의 성품[五陰性]ㆍ5음의 모습[五陰相]ㆍ5음의 일[五陰事]ㆍ5음의 여여함[五陰如]은 또한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며,
또한 머무는 곳도 없기 때문이다.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와 색ㆍ성ㆍ향ㆍ미ㆍ세활ㆍ식ㆍ법의 성품ㆍ여여함ㆍ사상(事相)은 또한 오는 것도 아니며,
또한 가는 것도 아니며,
또한 머무는 곳도 없는 것이다.
4대의 성품ㆍ여여함ㆍ사상과 식(識)의 성품ㆍ공허함ㆍ여여함ㆍ사상도 또한 오는 것도 아니며,
또한 가는 것도 아니며,
또한 머무는 곳도 없는 것이다.
여여함ㆍ진제(眞際)ㆍ불가사의한 성품도 또한 오는 것도 아니며,
또한 가는 것도 아니며,
또한 머무는 곳도 없다.
6바라밀의 성품ㆍ여여함ㆍ사상도 또한 오는 것도 아니며,
또한 가는 것도 아니며,
또한 머무는 곳도 없다.
37품과 18법의 성품ㆍ여여함ㆍ사상도 또한 오는 것도 아니며,
또한 가는 것도 아니며,
또한 머무는 곳도 없다.
도(道)와 부처의 성품ㆍ여여함ㆍ사상도 또한 오는 것도 아니며,
또한 가는 것도 아니며,
또한 머무는 곳도 없다.
유위ㆍ무위의 성품ㆍ여여함ㆍ사상도 또한 오는 것도 아니며,
또한 가는 것도 아니며,
또한 머무는 곳도 없는 것이다.
수보리여,
그대가 말한 것처럼 마하연은 또한 동서남북ㆍ4유(惟)ㆍ상하를 볼 수 없어서 삼세와 동등하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하연이라고 한다.
수보리여,
그대가 말한 것처럼 진실한 진제는 다름이 없다.
왜냐하면 과거세는 과거세에 있어서 공하고,
미래세는 미래세에 있어서 공하고,
현재세는 현재세에 있어서 공하고,
삼세가 동등함은 동등함에 있어서 공하고,
마하연은 마하연에 있어서 스스로 공하고,
보살은 보살에 있어서 스스로 공하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공이란 숫자도 아니고,
또한 많은 것도 아니며,
또 적은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보살마하살의 마하연은 삼세와 동등한 것이다.
우(偶)도 없으며,
쌍(雙)도 없으며,
음욕ㆍ성냄ㆍ어리석음도 없으며,
또한 음욕ㆍ성냄ㆍ어리석음을 여읜 것도 아니고,
또한 성냄[恚]도 없으며,
또한 볼 수 없는 것이다.
선악도 볼 수 없으며 유상(有常)ㆍ무상과 자아라고 하는 것도 또한 볼 수 없으며,
고(苦)ㆍ낙(樂)ㆍ아(我)ㆍ비아(非我)도 또한 볼 수 없는 것이다.
삼계도 볼 수 없으며 삼계를 벗어나는 것도 볼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형사(形事)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색은 과거색에 있어서 스스로 공하고,
미래색은 미래색에 있어서 스스로 공하고,
현재색은 현재색에 있어서 스스로 공하다.
통ㆍ상ㆍ행ㆍ식도 그러한 것이다.
과거색은 공하여 볼 수 없으며,
과거의 공도 공하여 볼 수 없으며,
현재의 5음색(陰色)도 공하여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미래와 과거의 5음이 공함을 볼 수 있겠는가?
공은 또한 5음을 보지 못하고,
5음도 또한 공을 보지 못한다.
가령 공(空)이 능히 5음을 본다면 5음도 또한 마땅히 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수보리여,
과거의 6바라밀도 볼 수 없고,
미래의 6바라밀도 또한 볼 수 없고,
현재의 6바라밀도 또한 볼 수 없다.
삼세가 동등한 가운데서 6바라밀을 또한 볼 수 없고,
동등한 것도 또한 볼 수 없다.
삼세가 동등하여도 동등함을 볼 수 없고,
동등함은 동등함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삼세를 볼 수 없는 것이다.
과거ㆍ미래ㆍ현재의 37품ㆍ18법도 볼 수 없는 것이며,
삼세가 동등함도 또한 볼 수 없는 것이다.
수보리여,
동등함도 또한 볼 수 없는 것이며,
37품과 18법이 과거ㆍ미래ㆍ현재에 동등함도 또한 삼세에서 볼 수 없는 것이다.
삼세 가운데서 또한 37품과 18법을 볼 수 없는데,
하물며 삼세가 동등한 것을 가히 볼 수 있겠는가?
또한 수보리여,
과거의 범인(凡人)과 미래의 범인과 현재의 범인도 또한 볼 수 없으며,
삼세가 동등한 가운데서도 범인을 또한 볼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중생은 본래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ㆍ미래ㆍ현재의 제자(弟子:
성문)ㆍ연각ㆍ보살ㆍ여래도 또한 볼 수 없으니,
삼세가 동등한 가운데서도 제자ㆍ연각ㆍ보살ㆍ여래ㆍ중생은 본래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에 머물러 마땅히 삼세의 일을 알며 마땅히 살운야를 구족해야 한다.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삼세가 동등한 가운데서 마하연을 배우는 것이라고 한다.
보살마하살이 이미 그 가운데 머물면 곧 모든 천ㆍ아수륜ㆍ세간의 사람들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살운야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훌륭하십니다,
훌륭하십니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은 마하연 가운데서 배워서 살운야혜를 구족하는 데 이를 것입니다.
과거 시방의 모든 보살들은 모두 이 마하연으로부터 살운야혜를 얻어 성취했으며,
미래 시방의 모든 보살들도 또한 마땅히 이 마하연 가운데서 배워서 살운야를 이룰 것이며,
지금 현재 시방의 무수하고 헤아릴 수 없는 모든 보살마하살들도 또한 모두 이 마하연으로부터 살운야를 이루고 구족하니,
이런 까닭에 보살마하살의 마하연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다,
그러하다.
수보리여,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부처님들도 모두 마땅이 이 마하연 가운데서 배워서 살운야를 이루었다.
이미 이룬 자와 아직 체달하지 못한 자와 곧 당장 이루는 자도 모두 마땅히 미하연 가운데서 배워서 살운야혜를 구족할 것이다.”
25. 합취품(合聚品)
이때 빈누문타니자(邠耨文陀尼子)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수보리로 하여금 반야바라밀을 설하게 하시고,
왜 마하연의 가르침을 설하십니까?”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제가 설한 마하연의 가르침이 장차 반야바라밀을 여읨이 없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수보리여,
그대가 설한 마하연의 가르침은 반야바라밀의 가르침을 수순하였고 어긋나지 않았고 잃지 않았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모든 존재하는 일체의 선법(善法)과 나아가 모든 성문ㆍ벽지불의 법과 위로 불법에 이르기까지가 모두 반야바라밀 가운데에 합취하기 때문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무엇이 선법과 성문ㆍ벽지불의 법과 보살법과 불법이 모두 반야바라밀 가운데 합해 있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이른바 6바라밀ㆍ4의지(意止)ㆍ4의단ㆍ4신족ㆍ5근ㆍ5력ㆍ7각의ㆍ현성팔품도ㆍ3탈문(脫門)ㆍ4무애혜ㆍ대자대비ㆍ10종력ㆍ4무소외ㆍ18불공ㆍ무소망법(無所望法)을 항상 동등하게 행하는 것이다.
수보리여,
이것을 선법이라고 한다.
37품ㆍ성문법ㆍ벽지불법ㆍ보살법ㆍ불법이 반야바라밀 가운데 합취되는 것이다.
수보리여,
이른바 마하연ㆍ6바라밀ㆍ5음ㆍ12쇠ㆍ18성ㆍ37품 나아가 부처님의 18법ㆍ3탈문ㆍ선법(善法)ㆍ누법(漏法)ㆍ유위법ㆍ무위법ㆍ고습진도법(苦習盡道法)과 욕계ㆍ형계ㆍ무형계와 내공ㆍ외공ㆍ소유공ㆍ무소유공과 모든 삼매문ㆍ다린니문ㆍ부처님의 18법과 이와 같이 여래가 설한 법ㆍ가르친 율법의 성품과 나아가 여여함ㆍ진제ㆍ불가사의한 성품과 니원과 일체의 모든 법은 또한 합하는 것도 아니고 흩어지는 것도 아니며,
또한 형상도 없으며,
또한 볼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상대[對]가 없는 한 가지 모양[一相]이며,
한 가지 모양이란 이른바 모양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보리여,
그대가 설한 마하연의 가르침과 반야바라밀은 그 뜻이 수순하여 서로 어긋남이 없다.
왜냐하면 마하연과 반야바라밀은 차이도 없으며,
다름도 없기 때문이다.
마하연과 37품 나아가 18법도 또한 다르지 않다.
마하연이 바로 불법이며,
불법이 바로 마하연이다.
이것은 하나이며,
둘이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서로 위배되지 않는다.
수보리여,
이런 이유로 마하연의 가르침을 설하는 것은 곧 반야바라밀을 설하는 것이다.”
26.
불가득삼제품(不可得三際品)
이에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보살마하살은 단서(端緖)가 없으며 변제(邊際)가 없으며 또한 바닥[底]도 없습니다.
색ㆍ통ㆍ상ㆍ행ㆍ식도 또한 단서가 없으며 변제도 없습니다.
보살은 이와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합니다.
색을 보살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통ㆍ상ㆍ행ㆍ식을 보살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저는 도무지 보살이 있음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마땅히 누구를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설하며,
누구를 가르치겠습니까?”
수보리가 말하였다.
“이른바 보살이란 단지 보살이라고 하는 글자일 뿐입니다.
세존이시여,
비유하면 스스로 나라고 말하지만 유무의 법이 생겨나지 않는 것처럼 어떠한 색ㆍ통ㆍ상ㆍ행ㆍ식도 생겨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생겨나지 않는다면 색(色)이 아니며,
또한 통ㆍ상ㆍ행ㆍ식도 아닙니다.
하물며 생겨나는 바가 없다면 마땅히 누구를 위해서 반야바라밀을 설할 것이며,
또한 생하는 곳을 떠나서 보살이 도를 행하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설을 행하면 보살은 이를 듣고도 두려워하지도 않고 무서워하지도 않고 후회하지도 않고 물리치지도 않습니다.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물었다.
“만약 보살이 전후의 변제ㆍ중앙제(中央際)를 얻을 수 없다면 무슨 이유로 색(色)과 보살이 모두 끝[邊]이 없는 것입니까?
무슨 이유로 색ㆍ통ㆍ상ㆍ행ㆍ식은 보살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까?
무슨 이유로 도무지 보살을 볼 수 없다고 말하며,
그런데 마땅히 누구를 위해서 반야바라밀을 설하는 것입니까?
무슨 이유로 보살은 단지 글자만 있다고 말합니까?
무슨 이유로 자아라고 말하지만 유무의 법은 생겨나지 않으며,
5음은 어떻게 생겨나는 것입니까?
무슨 이유로 생겨나지 않으면 5음이 아니라고 말합니까?
무슨 이유로 생겨남이 없다고 하면서 누구에게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가르치고 설하는 것입니까?
무슨 이유로 생함을 여의고서 보살도를 행함을 볼 수 없다고 말합니까?
무슨 이유로 보살은 이것을 듣고도 두려워하지 않고 무서워하지 않고 반야바라밀을 행한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수보리가 사리불에게 말하였다.
“중생은 처음과 끝의 단서를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보살은 전후ㆍ중앙제를 볼 수 없습니다.
사리불이여,
중생이 공하기 때문에 보살의 단서도 또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중생은 적정하기 때문에 보살의 단서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5음은 변제가 없으며,
5음은 공하며,
5음은 적정하며,
5음은 진실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살이란 단서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6바라밀은 바닥이 없으며 변제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리불이여,
공과 5음과 보살은 동등하여 다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 가지는 하나이며 둘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리불이여,
보살이란 단서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6바라밀은 공하고 적정하며 진실되지 않으므로 보살이란 단서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리불이여,
공하여 본제(本際)도 볼 수 없는 것이고,
말제(末際)도 또한 볼 수 없는 것이고,
중제(中際)도 또한 볼 수 없는 것이고,
공과 보살은 모두 또한 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리불이여,
공과 보살이란 단서도 하나이며 둘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보살이란 단서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내공ㆍ외공과 유무공(有無空)의 변제(邊際)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살이란 단서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사리불이여,
37품과 부처님의 18법은 모두 단서가 없는 것이며,
불법은 공하고 불법은 적정하며 불법은 진실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보살이란 단서는 볼 수 없는 것입니다.
6바라밀에서 부처님의 18법에 이르기까지 모두 단서가 없고 모두 공하고 모두 적정하고 모두 진실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보살이란 단서도 얻을 수 없으며,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사리불이여,
모든 삼매문과 다린니문은 모두 단서가 없으며 모두 공하고,
모두 적정하고 모두 진실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보살이란 단서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사리불이여,
법성과 여여함ㆍ진제ㆍ불가사의한 성품은 모두 단서가 없는 것이며 공하고 적정하며 진실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보살이란 단서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사리불이여,
성문ㆍ벽지불ㆍ여래가 모두 단서가 없는 것이며 모두 공하며 모두 적정하며 모두 진실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보살이란 단서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도(道)ㆍ살운야가 모두 단서가 없는 것이며 모두 공하며 모두 적정하며 모두 진실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보살이란 단서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리불이여,
공ㆍ처음과 끝ㆍ단서ㆍ중변(中邊)은 모두 볼 수 없는 것이므로 보살도 또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사리불이여,
공ㆍ5음ㆍ보살이라는 이 세 가지는 모두 하나이며,
두 가지 법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보살이란 단서는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사리불이 질문한 것처럼 5음은 바닥[底]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살도 바닥이 없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합니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5음은 허공과 같은 것입니다.
허공은 또한 변(邊)도 없으며,
또한 제(際)도 없으며,
또한 헤아릴 수 없으며,
또한 바닥이 없는 것입니다.
단지 명자(名字)로써 허공이라고 한 것입니다.
사리불이여,
색은 공하여 변제가 없으며 통ㆍ상ㆍ행ㆍ식도 식이 공하여 변제가 없으며 또한 볼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리불이여,
허공의 바닥과 5음의 바닥과 보살의 바닥을 또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12쇠(衰)ㆍ12인연ㆍ37품ㆍ부처님의 18법 이 모든 법의 단서와 보살이란 단서는 모두 볼 수 없는데 모두 변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사리불이 5음이 보살인가라고 물었는데,
이것도 볼 수 없는 것이며,
또한 변(邊)도 없으며,
또한 제(際)도 없으며,
또한 헤아릴 수도 없으며,
또한 바닥도 없는 것입니다.
다만 명자로써 허공이라고 했을 뿐입니다.
사리불이여,
색은 공하여 변제가 없으며 통ㆍ상ㆍ행ㆍ식의 식도 공하여 변제가 없으며 또한 볼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리불이여,
허공의 바닥과 5음의 바닥과 보살의 바닥도 또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12쇠ㆍ12인연ㆍ37품ㆍ부처님의 18법,
이 모든 법의 단서와 보살이란 단서는 모두 볼 수 없으니,
모두 변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사리불이 5음이 보살인가라고 물었는데,
이것도 또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5음과 보살은 모두 다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사리불이여,
6바라밀은 6바라밀 스스로 공하며,
내외공은 내외공 스스로 공하며,
나아가 유무공은 유무공 스스로 공합니다.
37품은 37품 스스로 공하고 나아가 부처님의 18법은 18법 스스로 공합니다.
여여함과 진제ㆍ부사의한 성품과 다린니문ㆍ삼매문과 살운야ㆍ도(道)의 일과 성문ㆍ연각ㆍ부처ㆍ부처님의 뜻도 각각 스스로 공합니다.
사리불이여,
여래와 5음은 공하여 또한 있는 것도 아니고,
볼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리불이여,
이런 이유로 보살과 5음은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사리불은 무슨 이유로 보살은 볼 수도 없고 얻을 수도 없는데,
마땅히 어떻게 누구를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설할 것인가라고 물었습니다.”
수보리가 사리불에게 말하였다.
“색은 색을 볼 수 없고,
색은 또한 통(通)을 볼 수 없고,
통은 또한 색을 볼 수 없습니다.
통은 또한 행을 볼 수 없고 행은 또한 통을 볼 수 없고,
통은 또한 상(想)을 볼 수 없고,
상은 또한 통을 볼 수 없습니다.
상은 또한 식(識)을 볼 수 없고,
식은 또한 상을 볼 수 없습니다.
색ㆍ통ㆍ상ㆍ행ㆍ식도 또한 이와 같은 것입니다.
눈[眼]은 눈 가운데서 또한 있지 않으며,
또한 볼 수도 없는 것입니다.
나아가 뜻은 뜻 가운데 또한 있지 않으며,
또한 볼 수도 없는 것입니다.
안식(眼識)과 의식도 또한 있지 않으며 또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안재(眼栽)는 뜻에 이르고,
의재(意栽)는 인연법에 이르지만 또한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볼 수도 없는 것입니다.
나아가 6바라밀도 또한 있지 않으며,
또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내공ㆍ외공에서 소유공ㆍ무소유공ㆍ37품과 부처님의 18법에 이르기까지 또한 있지 않으며,
또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삼매문과 다린니문도 또한 있지 않고,
또한 볼 수도 없는 것입니다.
수다원법에서부터 나한법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있지 않으며,
또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10주(住)도 또한 있지 않고,
또 볼 수도 없는 것입니다.
도법(道法)과 살운야법도 또한 있지 않으며,
또한 볼 수도 없는 것입니다.
수다원에서 나한ㆍ벽지불 나아가 부처에 이르기까지도 있지 않으며,
볼 수도 없는 것입니다.
나아가 교법(敎法)도 또한 있지 않으며,
또한 볼 수도 없는 것입니다.
사리불이여,
모든 법은 무소유이므로 볼 수 없는 것이며,
보살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가르칠 바가 없는 것입니다.”
수보리가 사리불에게 말하였다.
“질문한 것처럼 무슨 이유로 단지 문자로써 보살이라고 합니까?
문자법은 단지 명자(名字)이며,
보살은 거짓된 이름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다만 문자가 보살일 뿐입니다.
색ㆍ통ㆍ상ㆍ행ㆍ식도 또한 거짓된 이름으로 문자일 뿐입니다.
모든 명자가 있는 것에도 또한 색ㆍ통ㆍ상ㆍ행ㆍ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공하여 진실한 이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공하다면 이는 보살이 아닙니다.
이런 이유로 단지 문자로써 보살이라고 말했을 뿐입니다.
또한 사리불이여,
6바라밀은 다만 글자일 뿐이며,
6바라밀은 또한 글자가 아니며,
문자도 또한 6바라밀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문자와 보살과 모든 바라밀은 모두 동등하여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보살이라고 하는 것은 다만 거짓된 이름으로써 문자일 뿐입니다.
사리불이여,
내외공과 유무공도 또한 다만 문자에 집착했을 뿐입니다.
문자가 또한 공이 아니며,
공도 문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공(字空)ㆍ내외공 나아가 유무공에 이르기까지 모두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리불이여,
이런 이유로 단지 문자로써 보살이라고 한 것일 뿐입니다.
사리불이여,
37품과 18법도 또한 거짓된 이름이며,
문자일 뿐입니다.
모든 삼매문과 다린니문도 또한 이와 같고 나아가 살운야에 이르기까지 널리 모두 이와 같은 것입니다.
사리불이 질문한 것처럼 무슨 이유로 나라고 이름하지만 본래 생한 바가 없다고 합니까?
본래부터 나[我]에 이르기까지 또한 마땅히 생하는 바를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생이 있고 명[命]이 있음에서부터 지견(知見)에 이르기까지 항상 그 생하는 바를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이름이 있는 것에서부터 5음에 이르기까지 볼 수 없는데 마땅히 생하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6정(情)에서 12인연기(因緣起)에 이르기까지 또한 볼 수 없는데,
하물며 생함이 있겠습니까?
6바라밀도 또한 볼 수 없는데 하물며 생함이 있겠습니까?
내외공에서 유무공에 이르기까지 항상 볼 수 없는데 하물며 생함이 있겠습니까?
이름이 있는 이래로 37품과 18법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볼 수 없는데 마땅히 어디로부터 생하겠습니까?
이름이 있는 이래로 모든 삼매문과 다린니문도 또한 볼 수 없는데,
마땅히 어디로부터 생하겠습니까?
이름이 있는 이래로 성문ㆍ벽지불과 나아가 부처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볼 수 없는데,
마땅히 어디로부터 생하겠습니까?
사리불이여,
이런 이유로 나라고 이름하지만 모든 법은 다 생겨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리불이여,
질문한 것처럼 모든 법의 유무의 일에는 작자(作者)가 없는 것입니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물었다.
“무엇을 소유한 것에 작자가 없다고 합니까?”
수보리가 말하였다.
“5음의 소유에는 작자가 없으며,
6정(情)ㆍ내외(內外) 나아가 12연기의 소유에도 또한 작자가 없으며,
6바라밀의 소유에도 또한 작자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연으로 사리불이여,
모든 법은 또한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없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사리불이여,
일체 모든 법은 모두 다 무상한 것이며,
능히 무너뜨리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모든 법에는 항상함도 없고,
무너짐도 없는 것입니까?”
대답하였다.
“5음에는 항상함이 없고,
무너짐도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상하고 무소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법에는 항상함이 없고 무너짐도 없는 것입니다.
나아가 유위법ㆍ무위법ㆍ유루법ㆍ무루법ㆍ이기법(已記法)ㆍ미기법(未記法)에는 항상함이 없으며,
무너짐도 없는 것입니다.
사리불이여,
무상하고 무소유이므로 다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모든 법은 항상함이 없고 무너짐도 없는 것입니다.
사리불이여,
모든 법은 또한 모이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는 것입니다.”
사리불이 말하였다.
“무엇이 모이지 않는 것이며,
무엇이 흩어지지 않는 것입니까?”
수보리가 말하였다.
“5음은 모이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품이 스스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선법ㆍ악법ㆍ유위법ㆍ무위법ㆍ유루법(有漏法)ㆍ무루법도 또한 모이지도 않고,
또한 흩어지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품이 스스로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모든 법은 또한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없는 것도 아닙니다.
사리불이 5음은 생하는 바가 없는 것인가라고 질문하였습니다.
5음ㆍ6쇠는 작자가 없으며,
작자가 있음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법은 모두 작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하는 바가 없는 것입니다.
사리불이 생하는 바가 없으면 5음이 아닌가라고 질문하였습니다.
이는 5음의 성품이 스스로 공하기 때문에 또한 생하지도 않고 또한 멸하지도 않고 또한 머물지도 않는 것입니다.
나아가 유위성(有爲性)의 성품이 공하기 때문입니다.
성품이 스스로 공하여 또한 일어나지도 않고 또한 멸하지도 않으며 또한 머물지도 않습니다.
이런 이유로 생하는 바가 없으면 5음이 아닌 것입니다.
사리불은 생하는 바가 없는데 누구를 위해서 반야바라밀을 설할 것인가라고 질문하였습니다.
만약 생하는 바가 없다면 반야바라밀이 아니며,
반야바라밀은 또한 생하는 바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생하는 바가 없음과 반야바라밀은 하나의 법이며,
둘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누구를 위해서 반야바라밀을 설할 것인가를 말한 것입니다.
사리불은 또한 5음이 생하는 것을 여의지 않고,
보살도를 행하는 것인가라고 질문하였습니다.
생하는 바가 없음은 바로 반야바라밀이며,
반야바라밀은 바로 생하는 바가 없음입니다.
생하는 바가 없음이 바로 5음이며,
5음이 바로 생하는 바가 없음입니다.
이 법은 다르지 않으며 또한 둘이 아닙니다.
사리불이여,
그러므로 또한 생함을 여의지 않고 보살도를 행하는 것입니다.
사리불은 무엇이 이것을 듣고도 두려워하지도 않고 무서워하지도 않고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인가라고 질문하였습니다.
보살마하살은 모든 법이 공하여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아지랑이와 같고 메아리와 같고 그림자와 같고 변화와 같음을 봅니다.
그러므로 보살은 이 가르침을 듣고 두려워하지도 않고 무서워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이와 같이 관해야 합니다.
이때 색(色)을 보지도 않고,
색에 들어가지도 않고,
색을 생하지도 않고,
색에 머물지도 않고,
이것을 색이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통ㆍ상ㆍ행ㆍ식은 또한 식(識)을 보지 않고,
식에 들어가지도 않고,
또한 식을 생하지도 않고,
또한 식에 머물지도 않고,
또한 이것을 식이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를 또한 보지도 않고,
또한 들어가지도 않고,
또한 생하지도 않고,
또한 머물지도 않고,
또한 이것을 나의 것이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6바라밀을 보지 않고,
또한 들어가지도 않고,
또한 생하지도 않고,
또한 머물지도 않고,
또한 이것을 나의 것이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내외공과 유무공을 또한 보지도 않고,
또한 들어가지도 않고,
또한 생하지도 않고,
또한 머물지도 않고,
또한 이것을 나의 것이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37품과 부처님의 18법을 보지도 않고,
또한 들어가지도 않고,
또한 생하지도 않고,
머물지도 않고,
또한 이것을 나의 것이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모든 삼매문과 다린니문을 보지도 않고,
또한 들어가지도 않고,
또한 생하지도 않고,
또한 머물지도 않고,
또한 이것을 나의 것이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색을 보지 않고 나아가 살운야도 보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색(色)은 생하는 것이 아니어서 색이 아니고,
또한 통ㆍ상ㆍ행ㆍ식은 생하는 것이 아니어서 식이 아닙니다.
6쇠(衰)는 생하는 것이 아니어서 6쇠가 아니고,
6바라밀은 생하는 것이 아니어서 6바라밀이 아닙니다.
6바라밀과 생하는 바가 없음은 한 법이며,
둘이 없는 것입니다.
내외공은 생하는 것이 아니어서 공이 아니고,
유무공은 생하는 것이 아니어서 공이 아닙니다.
유무공과 생하는 바가 없음은 한 법일 뿐이며 둘이 없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37품은 생하는 것이 아니어서 37품이 아니며,
부처님의 18법도 생하는 것이 아니어서 18법이 아닙니다.
생하는 바가 없음과 부처님의 18법은 한 법이며 둘이 없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생하는 바가 없음은 한 법일 뿐이며,
또한 둘도 아니고,
또한 셋도 아니고,
또한 넷도 아니고,
또한 다섯도 아니고,
또 약간(若干)의 수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법과 생하는 바가 없는 법은 한 법[一法]이며,
둘이 없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여여함과 부사의한 성품은 생하는 것이 아니어서 여여함도 아니고,
부사의한 성품도 아닙니다.
도(道)는 생하는 것이 아니어서 도가 아니며,
살운야는 생하는 것이 아니어서 살운야가 아닙니다.
생하는 바가 없음과 살운야는 한 법이며 둘이 없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생하는 바가 없음도 또한 하나가 아니며,
약간의 수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살운야라고 하면 살운야가 아니며,
색을 멸했다고 하면 색이 아닙니다.
멸함과 색은 한 법이며,
둘이 없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멸함은 하나이며 둘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색을 멸했다고 하는 것은 색이 아니고,
통ㆍ상ㆍ행ㆍ식을 멸했다고 하는 것도 식이 아닙니다.
이런 이유에서 식을 생하게 했다고 하면 식이 아니며,
내공ㆍ외공 나아가 유무공과 37품ㆍ부처님의 18법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이와 같은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약간만 멸하는 것이 아닙니다.
식(識)에서부터 살운야에 이르기까지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입니다.”
27. 문관품(問觀品)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물었다.
“보살마하살은 어떻게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모든 법을 관하는 것입니까?
무엇이 보살이고,
무엇이 반야바라밀이며,
무엇이 관(觀)하는 것입니까?”
존자 수보리가 사리불에게 말하였다.
“질문한 것처럼 무엇이 보살이냐고 했는데 보살은 도사(道士)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살이라고 이름하는 것입니다.
도(道)로써 모든 법의 일을 알며 들어갈 바가 없는 것입니다.”
“무엇이 모든 법의 일들을 아는 것입니까?”
“색의 일[色事]을 알지만 색에 들어가지 않고,
통ㆍ상ㆍ행ㆍ식의 일들을 알지만 식(識)에 들어가지 않고,
부처님의 18법의 일을 알지만 18법에 들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사리불이 물었다.
“어떤 것을 모든 법의 일이라고 합니까?”
수보리가 말하였다.
“이름할 수 있는 모든 법의 모양으로 색ㆍ성ㆍ향ㆍ미ㆍ세활ㆍ법과 내법ㆍ외법ㆍ유위ㆍ무위법의 모양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름할 수 있는 것이 모든 법의 일입니다.
사리불은 어떤 것을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가라고 물었는데,
반야바라밀은 멀리 여의는 것을 이름합니다.”
“무슨 이유에서 멀리 여읜다고 이름합니까?”
수보리가 말하였다.
“5음을 멀리 여의며,
18법을 멀리 여의며,
6쇠를 멀리 여의며,
단바라밀에서부터 선바라밀에 이르기까지를 멀리 여의고,
내외공에서부터 유무공에 이르기까지를 멀리 여의고,
37품에서부터 18법에 이르기까지를 멀리 여읩니다.
이것을 멀리 여읜다고 이름합니다.
살운야를 멀리 여의고 살운야의 일도 멀리 여읩니다.
존자 사리불이여,
이런 까닭에 반야바라밀을 멀리 여읜다고 이름하는 것입니다.
사리불은 무엇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관하는 것인가라고 물었습니다.
보살은 또한 5음이 항상함이 있다거나 항상함이 없다고 관하지 않으며,
또한 5음은 고락이라고 관하지도 않으며,
또한 5음에 아(我)가 있다거나 아가 아니라고 관하지도 않습니다.
또한 공(空)도 아니고 또 공이 아님도 아니며,
또한 상(相)도 아니고 상이 아님도 아니며,
또한 원(願)함도 아니고 또한 원함이 아닌 것도 아니며,
또한 멸(滅)하는 것도 아니고 또 멸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또한 고요한 것도 아니고 고요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자음[作]도 아니라고 관해야 합니다.
6바라밀에 이르기까지,
내외공에서부터 유무공에 이르기까지,
부처님의 18법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이와 같은 것입니다.
모든 삼매문과 다린니문에서부터 살운야에 이르기까지,
나아가 멸함에서부터 멸하지 않음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항상함이 있다거나 항상함이 없다고 관하지 않아야 합니다.
사리불이여,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관해야 합니다.”
사리불이 존자 수보리에게 물었다.
“무슨 이유로 현자(賢者)는 5음은 생한 바가 없으므로 5음이 아니고,
나아가 살운야도 생한 바가 없으므로 살운야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5음은 공하며,
공은 5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5음은 생한 바가 없어서 5음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6바라밀은 공하며,
공은 또한 6바라밀이 아니며,
또한 생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6바라밀은 생한 바가 없으므로 6바라밀이 아니라고 합니다.
내외공에서부터 유무공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고,
37품에서부터 부처님의 18법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고,
살운야도 또한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5음은 생하는 바가 없어서 5음이 아니며,
5음은 또한 생하는 것도 아닙니다.
나아가 살운야도 또한 생한 바가 없는 것입니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물었다.
“무슨 이유로 5음은 둘이 아니므로 5음이 아니고,
나아가 살운야도 둘이 아니므로 살운야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5음은 둘이 아니고,
또한 합하지도 않고,
또한 흩어지지도 않고,
또한 형상이 없어서 하나의 상(相)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의 상이란 상이 없는 것입니다.
살운야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이런 까닭에 5음은 둘이 아니므로 5음이 아니며,
살운야도 둘이 아니므로 살운야가 아닌 것입니다.”
사리불이 물었다.
“무슨 이유로 5음에는 둘이 없는데 수(數)를 짓는 것이며,
나아가 살운야도 둘이 없는데 수를 짓는 것입니까?”
수보리가 말하였다.
“생하는 바가 없음과 5음은 둘이 없어서 5음은 바로 생하는 바가 없음이고,
생하는 바가 없음은 바로 5음입니다.
그러므로 5음은 둘이 없지만 수를 짓는 것일 뿐입니다.
나아가 살운야도 또한 둘이 없지만 수를 짓는 것일 뿐입니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이 법을 관할 때 5음이 생하지 않음을 보니 항상 청정하기 때문이며,
자아가 생하지 않음을 보니 항상 청정하기 때문이며,
단바라밀에서 반야바라밀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생하지 않음을 보니 항상 청정하기 때문입니다.
내외공에서부터 유무공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생하지 않음을 보니 항상 청정하기 때문이며,
37품과 부처님의 18법이 또한 생하지 않음을 보니 항상 청정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다린니삼매문이 또한 생하지 않음을 보니 항상 청정하기 때문이며,
살운야가 생하지 않음을 보니 항상 청정하기 때문이며,
범인(凡人)과 범인의 법도 또한 생하지 않음을 보니 항상 청정하기 때문입니다.
수다원과 수다원의 법,
사다함과 사다함의 법,
아나함과 아나함의 법,
아라한과 아라한의 법,
벽지불과 벽지불의 법,
보살과 보살의 법,
부처님과 부처님의 법이 모두 생하지 않음을 보니 항상 청정하기 때문입니다.”
사리불이 물었다.
“제가 수보리로부터 들은 바로는 5음은 생하는 바가 없고,
나아가 도(道)도 또한 생하는 바가 없고,
불법도 또한 생하는 바가 없고,
또한 얻은 바도 없습니다.
수다원에서부터 아라한ㆍ벽지불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얻은 것이 없습니다.
보살도 또한 얻은 바가 없으며,
살운야도 또한 얻은 바가 없으며,
보살마하살도 얻은 바가 없는 것입니다.
살운야는 5취(趣:
5道)를 무너뜨리며,
보살은 5취 가운데서 도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사리불이 말하였다.
“만약 모든 법이 생한 바가 없다고 한다면,
무슨 이유로 수다원은 3응(應)을 멸하여 도를 이루려고 생각하며,
사다함은 3구(垢)를 엷게 하여 도를 이루려고 생각하며,
아나함은 5응(應)을 멸하여 도를 이루려고 생각하며,
아라한은 위의 5소득(所得)을 멸하려고 하며,
벽지불은 이러한 인연을 알아서 도를 이루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무슨 이유로 보살은 부지런히 고행을 하며 중생의 여러 가지 고통을 대신 받는 것입니까?
무슨 이유로 여래ㆍ무소착은 등정각을 얻어 법륜을 굴리는 것입니까?”
수보리가 말하였다.
“사리불이여,
나는 또한 무소생법(無所生法)으로 하여금 얻은 바가 있게 하지 않고,
나는 무소생으로 하여금 수다원도와 사다함ㆍ아나함ㆍ아라한ㆍ벽지불도를 얻게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또한 보살로 하여금 힘든 고행을 하지 않게 하고,
보살행도 또한 근고(勤苦)라는 상(想)이 없습니다.
사리불이여,
보살은 또한 괴로움이라는 생각[苦想]을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사리불이여,
괴로움이라는 생각으로는 능히 헤아릴 수 없는 아승기의 중생들을 위해서 근본을 지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보살은 중생을 아버지같이 생각하고 어머니같이 생각하고 자식같이 생각하고 몸과 같이 생각하는데 무소유이기 때문입니다.
보살은 내외법에 대해서도 마땅히 이와 같이 생각합니다.
마땅히 이와 같이 생각하면 말한 것처럼 나와 일체 중생들이 또한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내외법에 대하여 마땅히 이와 같이 생각해야 하며,
이와 같이 상념(想念)을 지으면 괴로움이라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일체가 무소유이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생하는 바가 없음에서 나의 것은 있지 않으며,
능히 여래ㆍ아유삼불을 얻게 되나 또한 생하는 바가 없습니다.
여래는 생하는 바가 없으므로 법륜을 굴리지 않는 것입니다.”
사리불이 존자 수보리에게 물었다.
“생하는 바가 없음으로 깨달음을 얻는 것입니까,
생하는 바가 있음으로 깨닫음을 얻는 것입니까?”
수보리가 말하였다.
“나는 또한 생하는 바가 없음으로부터 깨달음을 얻게 하지 않고,
또한 생하는 바가 있음으로부터 깨달음을 얻게 하지도 않습니다.”
사리불이 말하였다.
“말한 것처럼 깨달음도 없고,
얻음도 없다는 것입니까?”
수보리가 말하였다.
“깨달음도 있고 얻음도 있습니다.
둘이 있는 것이 아니지만 세속의 일에는 깨달음도 있고,
얻음도 있습니다.
다만 세속의 일이어서 수다원ㆍ사다함ㆍ아나함ㆍ아라한ㆍ벽지불과 부처가 있는 것입니다.
가장 제일인 것을 논하려고 하면 깨달음도 없고 얻음도 없는 것입니다.
수다원에서부터 위로 부처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깨달음도 없고 또한 얻음도 없는 것입니다.”
“수보리여,
무슨 이유로 단지 세속의 일이기 때문에 깨달음도 있고,
얻음도 있는 것입니까?
5취(趣)를 무너뜨리는 것도 또한 이와 같은 것입니까?”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속의 일이기 때문에 깨달음도 있고 얻음도 있는 것입니다.
세속의 일이기 때문에 5취의 가르침이 있는 것입니다.
무슨 이유로 사리불이여,
가장 제일의 법에는 생사도 없고 선악의 과보도 없고 끊음도 없고 집착도 없는 것입니까?”
사리불이 말하였다.
“무슨 이유로 수보리여,
생하는 바가 없음이 생하는 것입니까,
생하는 바가 있음이 생하는 것입니까?”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나는 또한 생하는 바가 없음을 생하게 하지 않았고,
또한 생하는 바가 있음을 생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사리불이 말하였다.
“어떤 무소생법을 생하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수보리가 말하였다.
“나는 5음은 있지 않고 공하여 생하게 하지 않고,
나아가 도(道)도 있지 않고 공하여 또한 생하게 하지 않습니다.”
사리불이 말하였다.
“생하지 않는 것이 생하는 것입니까,
생하는 것이 생하는 것입니까?”
수보리가 말하였다.
“생함도 또한 생함이 아니며,
생하지 않음도 또한 생함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든 생하는 바가 있음과 생하는 바가 없음은 하나일 뿐입니다.
또한 다르지도 않고,
형상이 없어서 또한 볼 수도 없고,
하나의 상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의 상이란 소유한 모양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리불이여,
생하는 것이 있음도 또한 생하는 것이 아니며,
생하는 것이 없음도 또한 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리불이 말하였다.
“마땅히 생하는 것이 없는 무소생법을 설하며,
생하는 것이 있는 무소생법을 설하시오.
나는 즐겁게 듣고자 합니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뜻대로 즐거워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사리불이여,
생함이 없는 법에도 생함이 있는 법에도 즐거움은 없는 것입니다.
생함이 없음은 생함이 없는 것인가라고 질문했는데,
이 모든 법은 또한 합하지도 않고,
또한 흩어지지도 않고,
또한 형상도 없으며,
볼 수도 없고,
하나의 상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의 상이란 곧 상이 없는 것입니다.”
사리불이 말하였다.
“생하는 것은 또한 생하는 바가 없고,
즐거워하는 것도 또한 생하는 바가 없고,
법도 또한 생하는 바가 없고,
과보도 또한 생하는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합니다,
그러합니다.
사리불이여,
모든 법은 모두 생하는 바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5음은 생하는 바가 없으며,
6정(情)도 또한 생하는 바가 없으며,
6성(性)은 지ㆍ수ㆍ화ㆍ풍ㆍ공ㆍ식이고 6성도 또한 생하는 바가 없는 것이며,
신(身)ㆍ구(口)ㆍ의(意)의 행(行)도 또한 생하는 바가 없는 것이며,
살운야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생하는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리불이여,
과보도 또한 생하는 바가 없으며,
인연이 있어 즐겨 듣는 것도 모두 생하는 바가 없는 것입니다.”
사리불이 말하였다.
“존자 수보리 같은 분은 법사 중에서 최상의 법사입니다.
왜냐하면 질문한 바에 대하여 능히 대답을 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법은 의지할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리불이 장로 수보리에게 물었다.
“모든 법은 무슨 이유로 의지할 바가 없는 것입니까?”
“사리불이여,
색의 성품[色性]은 공해서 안에도 의지하지 않고 밖에도 의지하지 않고 또한 양쪽의 중간에도 의지하지 않습니다.
통ㆍ상ㆍ행ㆍ식의 성품도 공해서 안에도 의지하지 않고 밖에도 의지하지 않고 양쪽의 중간에도 의지하지 않습니다.
6정ㆍ12쇠의 성품도 공하여 안ㆍ밖ㆍ중간에 의지하지 않고,
6바라밀의 성품도 공해서 또한 안ㆍ밖ㆍ중간에 의지하지 않습니다.
내외공에서 유무공에서 이르기까지의 성품도 안ㆍ밖ㆍ중간에 의지하지 않고,
37품에서 부처님의 18법에 이르기까지의 성품도 공해서 또한 안ㆍ밖ㆍ중간에 의지하지 않습니다.
모든 법의 성품이 다 공하여 안ㆍ밖ㆍ중간에 의지하지 않습니다.
사리불이여,
그럼으로써 의지할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6바라밀을 행하는 보살은 능히 5음에서부터 살운야에 이르기까지 청정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물었다.
“무엇이 보살이 6바라밀을 행하면서 보살도를 청정하게 하는 것입니까?”
대답하였다.
“사리불이여,
또한 도(道)의 단바라밀이 있고 속(俗)의 단바라밀이 있습니다.
반야바라밀에 이르기까지도 도가 있고 속이 있습니다.”
다시 물었다.
“어떤 것이 속의 단바라밀이며,
어떤 것이 도의 단바라밀입니까?”
대답하였다.
“보살은 보시에 머물러 사문이나 바라문이나 빈궁한 자나 질병이 있는 자나 형색이 초라한 자에게 그 원하는 바에 따라서 성(城)ㆍ나라ㆍ진보(珍寶)ㆍ옷과 음식을 주고 처자ㆍ권속과 머리ㆍ눈ㆍ살과 수뇌(髓腦)와 골혈(骨血) 등 일체 소유한 것을 모두 베풀어 줍니다.
줄 수 있되 의지하는 바가 있어서 속으로 말하기를 ‘나는 주고 그들은 받지만 나는 타인이 주는 것을 질투하지 않는다’고 하고,
‘나는 시주한 자’라 하고,
‘나는 일체를 주었다’고 하고,
‘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른다’고 말하고,
‘나는 단바라밀을 행하였다’고 합니다.
비록 베풀었다고 하지만 의지한 바가 있고 지은 바가 있으며,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중생과 함께 공유합니다.
이렇게 베풀어 줌으로써 중생으로 하여금 무여니원에서 반니원에 들게 합니다.
비록 보시를 했으나 세 가지 장애의 뜻[三礙意]이 있습니다.
무엇이 세 가지인가 하면 아상(我想)이 있고 피상(彼想)이 있고 시상(施想)이 있으니,
이것이 세 가지의 장애입니다.
이것은 세속의 보시입니다.
왜냐하면 세속의 보시라고 이름하는 것은 세속을 능히 여의지 못하여 세속의 일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세속의 보시라고 합니다.
어떤 것이 도(道)의 보시인가?
세 가지 일이 청정한 것입니다.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보살의 보시는 자신을 보지 않고 또한 받는 자도 보지 않고,
그 과보도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살이 세 가지의 일에 청정한 것입니다.
사리불이여,
보살의 보시는 중생에게 베풀어 주며 또한 중생에게 의지하지 않고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위하지 않으며,
또한 아뇩다라삼야삼보의 조짐[兆]도 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도의 단바라밀입니다.
무슨 까닭에 도의 단바라밀이라고 이름하는가 하면,
도의 단바라밀은 세간에서 뛰어나게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단바라밀에서 반야바라밀에 이르기까지 세속에는 의지할 바가 있지만,
도는 의지할 바가 없는 것입니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이것을 보살이 6바라밀을 행하면서 보살도를 청정하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물었다.
“어떤 것을 보살마하살의 도라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37품이 보살마하살의 도이며,
공ㆍ무상ㆍ무원의 3해탈문4)과 내외공에서 나아가 유무공에 이르기까지와 모든 삼매문ㆍ다린니문과 부처님의 열 가지 힘[十種力]ㆍ4무소외(無所畏)ㆍ부처님의 18법ㆍ4무애혜(無礙慧)ㆍ대자대비가 보살마하살의 도입니다.”
사리불이 말하였다.
“훌륭하고 훌륭합니다.
수보리여,
어떤 것이 바라밀의 공덕력입니까?”
수보리가 말하였다.
“이것이 반야바라밀의 공덕력입니다.
왜냐하면 반야바라밀은 모든 선법(善法) 공덕의 어머니이고,
반야바라밀은 삼승의 법을 빠짐없이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과거의 부처님 세존도 모두 반야바라밀을 행해서 스스로 아유삼불을 이루었으며,
미래의 모든 부처님 세존도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스스로 아유삼불을 이룰 것이며,
현재 시방의 갠지스강의 모래 수처럼 많은 나라의 모든 부처님 세존도 또한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스스로 아유삼불을 이루는 것입니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만약 반야바라밀을 설하는 것을 듣고서 의심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으면 이것이 보살의 능히 보살도를 행하는 것이며,
중생을 버리지 않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합니다.
능히 일체 중생들을 위해서 보호하며 또한 의지하지도 않으며 마침내 이 생각을 여의지도 않으니,
이른바 대자대비의 생각입니다.”
사리불이 다시 물었다.
“보살이 대자대비의 생각을 버리지 않으려고 한다면 이것을 여의지 않고,
일체 중생들을 위해야 모두 마땅히 보살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체 중생들은 마침내 이 생각을 여의지 않기 때문입니다.”
수보리가 찬탄하여 말하였다.
“훌륭하고 훌륭합니다.
사리불이여,
나는 이미 기미가 오는 자취를 깨달아 알았으므로 나는 마땅히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중생이 없는 것처럼 생각[想]도 없으며 유무도 또한 무소유입니다.
중생이 적정한 것처럼 생각도 적정합니다.
중생이 공한 것처럼 생각도 또한 공합니다.
중생에게 깨달음이 없는 것처럼 생각에도 또한 깨달음이 없습니다.
5음이 소유가 없는 것처럼 생각도 또한 소유가 없습니다.
5음에 실체가 없는 것처럼,
5음이 공한 것처럼,
5음이 고요한 것처럼,
5음은 깨달을 바도 없는 것처럼,
생각도 또한 깨달을 바가 없음을 마땅히 알아야 합니다.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와 색ㆍ성ㆍ향ㆍ미ㆍ세활ㆍ법과 지ㆍ수ㆍ화ㆍ풍ㆍ공ㆍ식도 또한 그러한 것입니다.
방광반야경 탄연품은 비교적 짧은 분량이다. 그 가운데 핵심내용을 다음과 같이 뽑아 제시해보았다.
...
수보리여,
마하연이란
6바라밀이다.
또 마하연이란
모든 다라니문∙모든 삼매문∙수능엄삼매,
나아가 허공제해탈무소착삼매[虛空際解脫無所著三昧]이다.
이것이 보살마하살의 마하연이다.
수보리여,
또 마하연이란
내외공 나아가 무유공이다.
이것이 마하연이다.
또 마하연이란
37품과 부처님의 18법이다.
이것이 보살마하살의 마하연이다.
수보리가 말한 것처럼
마하연은
모든 천∙아수륜∙세간 사람들에서 벗어난다.
수보리여,
가령 욕계 가운데
있는 바[소유所有]가 실로 있고,
진리와 다르지 않고,
전도(顚倒)된 것이 아니고,
항상 견고하고
강함이 있고
또한 변하지 않고,
공한 법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마하연은
또한 모든 천∙용∙아수륜∙세간 사람들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
수보리여,
마땅히 알지니,
욕계의 겁(劫)이 타버릴 때에 모든 것이 없어져서
항상함도 없고,
강함도 없고,
또한 견고함을 쓸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하연은
세간 사람들과 모든 천∙아수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
이런 내용이다.
『방광반야경』 탄연품에서도
○ 대승의 의미 우선 여기서 보이는 마하연이란 표현은 대승을 의미한다.
수행자 입장에서는 우선 자신이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는 것도 중요하다.
수행자가 자신이 생사고통을 벗어나는 것만을 목표로 수행에 임하는 입장을 생사를 벗어나는 작은 수레[소승]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이와 구별하여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중생까지 널리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을 목표로 수행에 임하는 입장을 대승이라고 구별해 표현한다.
그러나
자신이 그런 수행으로 생사고통을 그렇게 벗어나게 되어도 그처럼 생사고통을 벗어나 해탈한 상태에서 회신멸지(灰身滅智)의 반열반의 상태에 곧바로 들지 않는다.
생사 현실이 곧 청정한 니르바나임을 관한다. 그런 가운데 중생이 생사고통을 받는 생사현실에 같이 임한다. 그리고 그런 중생을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그에 필요한 복덕과 지혜 자량을 구족하는 수행을 무량겁에 걸쳐서 계속 행한다. 그래서 중생제도와 불국토의 장엄과 성불을 목표로 수행에 임하게 된다. 그래서 이를 마하연(대승)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 경전에서 무소유의 의미
경전에서 사용하는 일체의 언설이 모두 일정한 내용을 가리키기 위한 가명이고 시설이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이런 사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
언어표현이란 상당히 다의적인 의미를 함께 갖는다. 따라서 구체적으로 앞 뒤 부분과 함께 맥락을 살펴서 그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
경전에서 '있는 바[소유所有]'라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 이 소유(所有)란 말은
오늘날 현실에서는 어떤 물건을 소유한다거나 지닌다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한편 '있는 바'라는 의미로도 자주 사용된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소유란 말이 어떤 의미를 나타내는가는 전체 맥락을 통해서 찾아내야 한다.
그런데 현실에 영원불변한 어떤 참되고 진짜인 내용이 있는가가 문제된다. 그리고 현실에서 어떤 내용이 나타나는데는
그 안에 그런 참된 진짜에 해당하는 실체가 있어서 그런것인가가 문제된다. 이와 관련해 경전에서는 그런 참된 진짜는 없음을 제시한다. [무아 무자성] 그런데 반야경전에서그런 참된 진짜는 없음을 나타내고자 할 때
'무소유'란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그래서 탄연품에서 '무소유'라고 표현하는 것은 모두 그런 주제와 관련된 표현으로 해석된다. 즉 여기서 나열하는 각 항목이 자신의 것인가 아닌가를 살피려는 것은 아니다. 즉, 이들이 자신의 소지품인가 아닌가를 살피려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각 부분을 그렇게 해석해서 '있는바[소유]'란 형태로 바꿔 넣었다.
그래서 참된 진짜라고 할 성품이나 그런 영원불변하고 고정된 실체가 있는가에 대해서는 무소유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다시 현실 내용의 본 바탕이 되는 내용을 어떤 주체가 얻을 수 있는가 또는 얻을 수 없어서 공하다고 할 것인가의 문제에서는 주로 불가득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문제삼는 실재가 어떤 상태인가를 나타낼 때 무소유 불가득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이런 표현은 그런 주제를 가지고 논의할때 결국 무아(인무아, 법무아) 무자성(승의무자성) 공을 제시하는 내용과 관련된다. 그래서 이런 배경 사정을 미리 잘 이해하는 것이 경전 구절을 이해하는데 필요하다.
○ 무아 무자성과 공의 관계
경전에서 진짜라고 할 실체가 없음 무아(인무아,법무아) 무자성(승의무자성)을 제시한다. 그리고 실재가 공함도 제시한다. 이런 의미를 각각 나타내기 위해 무소유, 불가득이란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런데 무아 무자성과 공은 측면은 서로 관련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같은 의미는 아니다.
문제삼는 내용이 조금은 서로 다르다 즉, 진짜라고 할 실체가 없다는 측면과 본 바탕이 되는 실재 영역에서 어떤 내용을 얻지 못하고 그래서 실재란 어떤 것이라고 적극적으로 제시할 수 없어 공하다는 내용은 완전히 같은 의미는 아니다.
현실에서 어떤 내용을 얻을 때 그것이 참된 진짜인가. 또는 그런 내용을 얻게 하는 뼈대로서 참된 진짜의 내용이 어딘가에는 있는가 이런 문제가 제기된다.
그리고 또 한편 그런 현실 내용을 얻는 본 바탕이 되는 실재란 어떤 것인가. 그 실재 영역은 아무 것도 전혀 없는 것인가. 아니면 무엇인가 있는 것인가. 그리고 본 바탕이 되는 실재영역에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이런 문제가 제기된다.
>>>
경전에서는 무아(인무아, 법무아) 무자성(승의무자성) 공을 제시한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결론을 얻어내게 되는가가 사실은 문제된다.
이 사정의 이해를 위해 경전에서 제시된 부분을 살펴보자.
경전에서 이렇게 제시한다.
...
가령 욕계 가운데
있는 바[소유所有]가 실로 있고,
진리와 다르지 않고,
전도(顚倒)된 것이 아니고,
항상 견고하고
강함이 있고
또한 변하지 않고,
공한 법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마하연은
또한 모든 천∙용∙아수륜∙세간 사람들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
...
라고 제시한다.
여기서 앞 내용은 만일 욕계라는 세계의 현실 내용에 참된 진짜라고 할 어떤 내용이 그렇게 있고 그리고 그 본바탕이 되는 실재가 공하지 않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가를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 내용을 제시하는 부처님은 기본적으로 그런 성품은 본래 없어서 무아 무자성인 것이고 본 바탕인 실재는 공하다라고 제시한다.
그래서 부처님 입장에서는 무아 무자성이 아닌 어떤 상태가 있고 공하지 않은 어떤 상태도 있어서 그런 경우는 이렇다는 것을 한번 관찰하고 또 그렇지 않고 무아 무자성 공한 상태가 있어서 또 그 경우도 한 번 관찰한 가운데
현실은 뒤의 경우에 해당되기에 그렇다고 제시한다는 입장이 아니다.
만일 그런 입장이라면 현실내용은 그 본 바탕이 무아 무자성 공일 수도 있고 또 그렇지 않고 진짜라고 할 실체가 있는 한편 공하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는 공하다라고 보아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처럼 된다. 그러면 그 자체에 문제가 있게 된다.
그러나 일단 그런 입장이 아니다. 따라서 다음 의문이 이어져 나타나게 된다.
앞과 같은 내용을 부처님이 제시한다. 그런데 그렇다면 과연 그런 관계나 그런 내용은 도대체 어느 현실에서 그런 관계를 살핀 것인가. 그리고 만일 그러그러하다면 이러이러하게 된다고 그 관계를 그렇게 제시하는 것인가.
그리고 만일 현실이 본래 그렇지 않아서 그런 관계를 본래 볼 수 없는 것이라면 어떤 바탕에서 그런 내용을 파악해 제시하는 것인가. 이런 의문이 이어져 나타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문제를 놓고 어떻게 보는가가 문제된다.
여하튼 부처님이 경전에서 이런 내용을 제시했으므로 그냥 부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자는 입장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도대체 부처님은 어떤 바탕에서 어떤 내용을 근거로 이런 내용을 제시하고 현실 일체에는 그런 진짜라고 볼 참된 내용은 없다고 제시한 것인가를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또 이와 관련해서 현실에서 대하는 그 일체 내용은 사정이 그렇기에 실답다고 보면서 집착을 갖고 대할 내용이 아님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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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 참되고 진짜인 실체가 있는가는 다음 사정에서 논의된다.
꿈이 실답지 않다고 한다. 그런데 꿈이 갖는 성격과는 반대로 참되고 진짜에 해당하는 내용이 있는가가 문제된다.
어떤 내용이 진짜의 내용이라면, 꿈과는 달라야 한다. 그래서 일정한 조건에서만 임시적으로 얻는 꿈과는 달리 진짜의 내용은 영원불변하고 고정된 내용이어야 한다고 보게 된다.
그래서 관념영역에서 이처럼 꿈이 갖는 성품과는 달리, 참된 진짜가 가져야 한다고 보는 성품을 뽑아 낸다. 그리고 이를 통해 관념영역에서 참된 진짜에 해당하는 몽타쥬를 만들게 된다.
그리고 그런 몽타쥬에 해당하는 내용이 현실이나 실재 어딘가에 정말 있는가를 이후 살피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진짜에 해당하는 실체가 있는가를 살피는 논의다.
그런데 이는 일종의 가정적인 논의다.
현실에서 그런 몽타쥬에 해당하는 내용이 정말 있어서 그런 것을 직접 관찰하면서 문제를 살펴 나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 논의는 일단 관념영역에서 진짜에 해당하는 몽타쥬를 먼저 그려 놓는다. 그리고 그런 내용이 어딘가에 있다면 각 주체가 현실에서 얻는 내용은 그처럼 얻을 수 없다는 관계성을 살피게 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그렇게 찾는 몽타쥬에 해당하는 내용은 있을 수 없음을 제시하게 된다. 따라서 이들 논의는 가정적 논의의 형태가 된다.
그런데 이 논의는 그런 몽타쥬 내용이 현실 내용과 어떤 모순관계가 있게 되는가를 살펴야 한다. 그래서 자세히 보면 복잡하다.
다만 현실에서 그런 몽타쥬에 해당하는 내용이 정말 있다고 받아들인 다음 그런 상태에서는 어떤 문제가 있게 될 것인가를 가정적으로 하나씩 검토해보자. 그러면 이런 복잡한 논의를 좀 더 짧게 줄일 수도 있다.
만일 현실에 그런 영원불변한 어떤 것이 있다면 어떤 문제가 있는가.
우선 현실에서 얻는 일체의 내용은 매 순간 변화를 통해서 얻는다. 그래서 일단 그런 몽타쥬에 해당하는 내용이 있다고 전제해도 현실에서 얻는 그런 내용은 일단 이런 영원불변한 내용과는 무관하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두 찰나를 놓고 있고 없음의 문제만 살펴 보아도 그런 몽타쥬에 해당하는 내용은 여기에 포함시킬 도리가 없다.
그것은 한 순간에 얻어서 그렇게 있다고 보는 내용과 그 다음 순간에 그것이 사라져 없게 된 상태에서 다시 있다고 보는 다른 내용을 놓고 함께 검토해보기로 하자.
그러면 앞에서 몽타쥬로 찾는 영원불변하는 내용은 최소한 한 주체의 현실 내용에 포함시키기 곤란하다.
그리고 현실에서 생활하는 자신도 결국 그처럼 매순간 변화해가는 존재다. 따라서 그런 영원불변하여 진짜와는 관계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내용만 간단히 살펴도 앞과 같은 논의를 대단히 짧게 생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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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실재가 공함을 제시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무아 무자성이라는 측면도 그 안에 함께 포함해 제시하는 것이 된다.
그 사정을 간단히 보면 다음과 같다. 만일 실재가 무아 무자성이 아니고 어떤 진짜라고 할 내용이 있는 것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본 바탕이 되는 실재가 무언가라는 문제가 제기될 때 그런 진짜에 해당하는 내용으로서 어떤 A 를 그렇게 제시하면 된다. 그리고 공하다라고 제시할 일이 아니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 않다고 하자. 실재에는 그런 진짜에 해당하는 영원불변하고 고정된 것이 없는 한편[무아 무자성]
실재는 전혀 아무 것도 없다고 할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 주체는 어떤 내용을 마음에서 화합을 통해 얻는다. 따라서 이런 주체는 그런 관계를 떠나 실재를 끝내 얻어낼 수 없다. [불가득] 따라서 이분법상의 분별을 떠나게 된다. [불이법] 그런 사정으로 언설로 무엇이라고 적극적으로 제시할 수도 없다. [언어도단] 결국 이런 사정에서 실재는 어떤 의미를 갖지 않는 '공'이란 표현을 빌려 '공'하다라고 제시하게 된다.
그래서 공하다는 내용은 결국 이들 내용을 다 함께 포함해 제시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엄격하게 보면 본래 문제삼는 측면이 조금은 다름을 잘 이해해야 한다.
즉, 무아 무자성과 공은 서로 관련된다. 그렇다고 완전히 동일한 의미는 아니다.
예를 들어 현실내용도 실체가 없기에 무아 무자성이다. 그러나 현실내용은 현실에서 각 주체가 얻는다. 따라서 현실 내용 자체는 공하다라고 표현할 내용은 아니다.
현실에서 생계문제는 당장 당장 해결해야 한다. 그리고 건강 취직 재산 연애 결혼 등등 삶에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문제가 있다. 이런 문제는 매 순간 순간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처럼 여겨진다.
그런데 누구나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는 삶을 살아가는 이상 누구나 피하기 힘들다. 이는 누구나 예상한다. 그렇지만, 이런 생사문제는 삶에서 쉽게 해결하기 힘들다.
이런 생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세상과 자신의 본 정체를 관해야 한다. 그리고 수행을 해서 생사를 벗어나와야 한다. 그러나 이런 주제는 너무 근본적이다. 결국 경전에서 살피는 수행이란 이 근본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과 관련된다. 그런데 대부분 당장 그것을 어떻게 해결하기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오히려 자신의 삶과는 너무 동떨어진 문제처럼 여기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현실과는 조금 동떨어져 있다고 여기게 된다.
그런데 삶의 문제의 해결순서란 사실은 그 반대다.
앞에 나열한 여러 문제 예를 들어 생계를 해결하고 질병을 치료하고 건강을 회복하고 직업문제나 재산 문제 등등을 다 해결한다고 하자. 그렇다 해도 결국 생사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결국 생사현실에서 죽음을 맞이하면서 그 모든 것이 의미를 잃게 된다. 그래서 결국 하나도 해결하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그런데 생사현실을 놓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수행방안을 찾아 수행에 임한다고 하자. 이런 경우는 반대로 생사 문제도 해결하지만, 같은 원리로 세상에서 만나는 수많은 문제도 함께 해결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이제는 그런 생사현실에 임해 무량한 겁에 걸쳐서 성취해나갈 서원의 내용도 그런 바탕에서 구상할 수 있게 된다. 그런 가운데 무량한 수명과 복덕과 지혜를 구족하여 광대무변한 서원을 성취해나가게 된다.
어떤 수행자가 수행을 통해 업의 장애를 해소하고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면 어디로 달리 임하는 것이 아니다.
한편으로 수행방안을 행하면서 임했던 그런 중생의 국토에 다시 임해 활동하게 된다. 그래서 그런 국토를 곧 자신의 불국토로 장엄하는 수행을 다시 이어나가야 한다.
그래서 수많은 문제가 펼쳐지는 현실 어떤 현장에서든 수행을 병행해야 한다.
예를 들어 다라니는 다라니대로 외워야 한다. 또 경전에서 본 내용은 또 그것을 요약해서 또 정리해 외어야 한다. 그리고 현실을 대하는 연습을 꾸준히 병행해야 한다. 그런데 현실 문제를 대하다보면 현실은 현실 수행은 수행 이렇게 따로 놓고 대하면서 둘 다 잘 행하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게 된다.
『유마힐소설경』의 다른 판본으로 『설무구칭경』이 있다. 이 『설무구칭경』에 중생들의 국토가 바로 보살의 청정한 불국토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 구절을 늘 염두에 두고 현실을 대해 나가야 한다.
그래서 현실의 매단면에서 수행의 방안을 어떻게
적용해 임할 것인가를 늘 생각해야 한다.
수행방안은 기본적으로 생사현실을 벗어나는 방안이다. 마음 현상에 대해 살피는 것도 결국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결국 생사를 벗어나는 수행방안을 살피기 위한 것이다.
이런 수행방안은 세상에서 나타나는 온갖 문제의 해결에 무력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수행방안은 세상에서 문제되는 온갖 문제를 해결해낸다.
그 뿐 아니라 ,생사문제까지 벗어나게 하는 방안임을 이해해야 한다.
○ [pt op tr]
▼mus0fl--Charles Aznavour - Le Palais De Nos Chimères.lrc
○ 실재의 문제와 수행의 관계
앞 조각글에서 실재와 현실의 관계도 살피고 현실에서 각 주체가 갖게 되는 망상분별과 집착 그리고 이에 바탕해 행하는 업을 제거하기 위해 일정한 시설을 하여 그런 문제현상을 제거하고 그리고 그런 작업을 위해 시설한 내용도 다시 제거하는 문제를 살폈다.
경전에서는 실체의 유무나 실재에 대해서 반복해 살핀다. 즉, 어떤 것의 참된 진짜의 영원불변한 실체가 있는가 또는 어떤 것의 본 바탕의 실재가 그 내용을 얻을 수 있는가 없는가. 그래서 공한가 공하지 않은가를 자주 살핀다.
이런 주제는 어떻게 보면 당장의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별 관계가 없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공연한 이론적인 논의처럼 여기기 쉽다.
그리고 본 바탕인 실재는 어떤 주체고 그 내용을 직접 얻어낼 수 없다. 따라서 막연한 주제를 놓고 이론적인 논의를 전개할 뿐이라고 여기기 쉽다. 그래서 이런 주제는 한가로운 이가 공연히 공허한 철학적인 사색을 하며 활동으로 여기기 쉽다.
그리고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킬 뿐 별 의미가 없다고 여기기 쉽다.
현실에서는 당장의 생계문제 해결이 급하다. 질병이나 건강 재산 가족 이런 문제의 해결이 또 급하다고 여긴다. 그런데 실체나 실재에 대한 논의는 이런 다양한 문제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예를 들어 생계해결이나 건강 직업 재산 가족 등등의 문제와 어떤 관계인가.
그러나 이는 결국 현실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문제되는 생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 논의가 제기된 것이다.
현실에서 각 중생이 겪는 생사고통은 전도망상분별과 집착으로 발생한다. 그리고 이런 전도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하는데 위 내용의 이해가 필수적이다. 따라서 이 내용을 반복해서 각 경전과 논서에서 논의하게 된다. 따라서 이 주제가 논의되는 기본 배경을 잘 살피고
중요하게 대해야 한다.
생사문제를 해결하려면 현실에서 대하는 생사고통의 본 정체를 먼저 확인해야 한다. 그런 가운데 이들이 실다운 내용인가가 문제된다. 그래서 생사현실이 집착을 갖고 대할만한 내용인가가 문제된다.
그런 현실내용이 실다운가를 판단하려면 현실내용의 본 바탕인 실재가 어떤가를 놓고 함께 판단해야 한다.
꿈 속에서 황금이나 바다꿈을 꾸었다고 하자. 그런데 그런 꿈을 꾸었던 현실의 침대에서도 그런 꿈을 얻을 수 있는가가 문제된다. 그리고 현실의 침대에서는 그런 내용은 본래 얻을 수 없음을 확인하다. 그래서 꿈 내용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게 된다.
이와 같이 현실 내용이 실다운가 여부는 본 바탕의 내용을 살펴야 이해하게 된다.
현실내용은 본 바탕인 실재영역에서는 본래 얻을 수 없다. 현실 내용은 매 순간 생생하게 얻어지고 진짜처럼 여겨진다. 그렇지만, 그 관계가 꿈과 성격이 같음을 잘 관해야 한다.
그런 가운데 현실 내용이 집착을 갖고 대할 실다운 내용이 아님을 확인하게 된다. 현실에서는 그런 바탕에서 수행방안을 원만히 실천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게 된다.
본 바탕이 되는 실재 영역에서는 본래 그런 생멸과 생사를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실재 영역에서는 생사를 벗어나는 수행도 본래 요구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생사고통의 묶임을 벗어나 있다. 그래서 생사를 벗어난다는 수행목표는 본 바탕애서는 이미 성취되어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사실을 잘 이해한 가운데 현실 영역에서 수행에 임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현실 영역에서 문제삼게 되는 생사고통의 문제를 잘 해결하려면 본 바탕에서는 그런 문제를 본래 얻을 수 없음을 잘 관해야 한다. 즉, 실재영역에서는 그런 문제를 얻을 수 없다. 그런데도 망상분별과 집착으로 인해 그런 실답지 않은 생사를 현실에서 겪어나가게 된 것이다. 이런 기본 사정을 잘 관하고 수행에 임해야 한다.
이제 현실에서 행하는 수행은 그런 본 바탕이 되는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를 덮어 가리게 된 그런 실답지 않은 망상분별을 수행으로 제거해내야 한다. 그래야 그런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게 된다 . 이런 사정을 잘 이해하고 그런 방향으로 현실영역에서 수행에 임해야 한다. 그래야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게 된다.
실재가 공하다는 사정을 관하는 것은 또 수행에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수행자는 기본적으로 생사의 묶임에서 자신이 벗어나야 한다.
그런데 수행자는 생사현실에 묶인 다른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그런 중생들의 생사고통을 받는 생사현실에 들어가 중생을 제도하는 수행을 하게 된다.
이런 경우 기본적으로 그런 생사현실이 그 자체로 생사 즉 열반이라는 사정을 잘 관해야 한다. 그래서 그런 생사현실에서도 본래의 청정한 니르바나에 상응한 상태를 얻어 그런 생사현실영역에서도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로 여여하게 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다시 그런 바탕에서 중생을 제도하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함에 있어서 요구되는 복덕과 지혜 방편을 구족하는 수행을 해나가야 한다.
그런데 이 경우 그런 생사현실 영역에서 일정한 상태를 방편으로 성취해내야 한다. 이런 경우 깊은 반야지혜를 통해 그 현실을 본 바탕이 되는 실재를 꿰뚫어 함께 관하는 수행이 필요하다.
실재는 언뜻 자신이 당면한 현실문제와 직접 관련되지 않는 것처럼 여기기 쉽다. 그리고 그 내용을 직접 얻을 수 없다. 그렇지만, 이런 실재를 관하고 살피는 것은 현실에서 부딪히는 생사문제와 온갖 삶의 문제를 해결해내는데 대단히 중요하다.
현실에 참된 진짜라고 할 영원불변하고 고정된 실체가 있는가 없는가가
왜 문제되는가 하는 사정을 또 살펴보기로 한다.
이 문제는 역시 꿈의 내용을 살피는 일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이해가 쉽다고 할 수 있다.
꿈을 살펴보자. 꿈은 아무리 생생하게 꾸었다해도 그것이 실답지 않다고 보게 된다. 왜 그런가.
그것은 그 꿈을 꾸는 순간에는 아무리 그 꿈을 생생하게 꾸었다 하더라도 그 꿈내용은 그런 조건과 그런 상황에서만 임시적으로 얻는 내용이고 그리고 그런 내용은 다른 현실 영역에서는 얻지 못하고 그런 꿈내용에서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다른 성품을 얻지도 못하는 것이기에 그것을 실답지 않다고 판단하게 되는 것임을 이미 보았다.
그런데 꿈이 실답지 않다는 것은 꿈을 꿀 때 그런 꿈 내용을 전혀 얻지 못한다거나 그런 꿈 내용을 그렇게 얻으면 안된다거나 하는 내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그런 꿈을 생생하게 꾸고 얻었지만, 그러나 그런 꿈 내용은 실다운 것이 아니고 그래서 그 내용을 놓고 집착을 일으켜 대할 내용이 아니라는 의미다.
그것은 또 반대로 말하면 그 사정을 그렇게 관하지 못하고 그것이 실다운 내용이라고 여기고 집착을 갖고 그에 바탕해 업을 행하면 그 바탕에서는 그로 인해 나타나고 얻게 되는 상태에서 극심한 고통을 그렇게 생생하고 실답게 여기면서 받아나가게 되고 그런 상태로 매순간 순간 임하는 가운데 무량겁에 걸쳐서 그처럼 생사고통을 받아 나가는 상태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는 사정 때문에 이 본 사정을 올바로 관하는 것이 강조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꿈이 앞과 같은 사정으로 실답지 않다고 한다면 그러면 반대로 이런 꿈이 갖는 성품과는 다른 성품을 가져서 진짜라고 볼 어떤 참되고 실다운 내용이 어디에는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가 다시 제기되는 것이다.
꿈도 사정이 그런데 현실 내용도 그런 문제가 제기되는 사정이 있다.
우선 현실에서 한 주체는 불가사의하다고 할 일이지만, 눈을 뜨고 세상을 대하면 그로 인해 일정한 현실 내용을 마음에서 얻게 되는 경험을 반복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그 가운데 어떤 부분은 꽃이고 바위고 산이고... 하는 등등으로 분별을 행하고 또 어떤 부분은 자신이라고 분별을 행하면서 그것을 대하게 되는데
그러나 이런 감각현실을 반복해서 대하게 되면 하나의 꽃이나 바위나 산 등등은 매 주체의 각 감관마다 그리고 매순간 매 상황 조건마다 그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는 사정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하나의 바위를 놓고 이 사정을 살핀다면, 그 바위는 자신이 아침에 일어나서 보면 이런 빛깔로 보았는데 저녁에 해가 지고 난 상태에서 보면 또 그러그러한 모습으로 달리 보이고 또 멀리서 보면 이런 모습이었다가 가까이가서 보면 조금 다른 모습으로 보이게 되고 색안경을 끼고 보면 또 조금 달리 보이고 이런 식으로 각 경우마다 조금씩 다른 내용을 얻게 된다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 다른 감관 예를 들어 귀나 코나 혀나 손으로 얻는 그런 내용과는 또 대단히 엉뚱하게 다른 내용임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리고 비록 다른 생명들이 어떤 감관으로 어떤 내용을 얻게 되는가를 자신이 직접 그 내용을 얻어 확인할 수는 없다고 보지만, 앞의 예에 준해서 메뚜기나 두더쥐 박쥐 방울뱀... 등등 여러 생명은 또 그 생명대로 그리고 그 생명이 갖는 각 감관과 각 상황과 조건 별로 제각각 다른 내용을 얻는 것이라고 추리하게 되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이런 사정을 종합해서 말하면
자신이 어느 순간 어떤 감각현실을 얻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 내용을 가장 표준적이고 대표적인 진짜의 내용이라고 제시하기가 상당히 곤란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정이 있는 한편, 그러나 또 생각해보면 자신이 한번 바위로 보고 대한 그 내용은 다음날 다시 그것을 대해도 일정하게 바위라고 파악할 수 있는 모습이고 또 다른 이도 비슷한 보고를 하게 되는 내용인 것이기에
비록 구체적으로 보면 그 내용이 제각각 다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각 경우마다 일정하게 비슷한 골격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은 그런 감각현실을 얻게 되는 데에는 실재든 현실 내용안이던 어딘가에 그런 내용을 그렇게 일정하게 얻게 하는 참된 진짜의 내용이 빼대로서 들어 있기에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추리를 하게 되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정말 그런 것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고
그런 입장에서 처음에 꿈이 실답지 않아서 그에 대해 집착을 갖고 대하지 않아야 한다고 제시한 내용과 관련해서
현실 내용에는 꿈과는 달리 어떤 참된 진짜의 내용이 들어 있는 것인가가 앞의 주제와 관련해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게 된 사정이 있다.
그래서 만일 그런 참된 진짜의 성품이 있다면 그런 내용은 실답지 않다고 볼 그런 내용도 아니고 그래서 그것을 놓고 그런 사정으로 집착을 갖고 대하지 않아야 한다고 제시하기는 곤란하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곧 생사현실에서 겪는 생사고통과 바로 관련되는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현실에서 어떤 주체가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겪는데 그 생사고통이 단지 망상분별과 집착을 통해 실답지 않은 어떤 내용을 그렇게 붙잡고 그런 상태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고,
그런 생사고통을 겪는 데에는 그런 생사고통을 겪게 하는 진짜라고 볼 어떤 내용이 그렇게 정말 있기에 그런 것이라고 한다면 이 문제를 대처하는 데에서는 결국 이와는 조금 다른 바탕에서 이 문제를 접근해야 한다고 보게 되는 사정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가 이런 입장에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가 된다. 경전에서는이에 대해 그런 내용이 없음을 제시한다.
그런 바탕에서 현실을 수행방안으로 전환해 임하면 사정이 그렇기에 하늘이나 아수라 등등으로 제시하는 3 계 6 도의 생사고통의 현실을 벗어나게 된다. 이런 내용을 앞 경전의 뒷 부분에서 제시한다.
결국 실재나 그 본바탕이 이러이러하다는 내용을 잘 관하고 이해해야 한다. 이는 생사고통을 받는 현실에서 수행을 행하면 그런 문제상황을 벗어날 수 있음을 제시한다. 그래서 수행과 관련된다.
현실에서 문제삼는 생사고통을 해결하고자 할 때 생사현실이 집착을 갖고 대할 실다운 내용인가를 먼저 살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살피기 위해 본 바탕인 실재를 살펴야 한다.
○ [pt op tr]
▼mus0fl--Brice De Nice - Le Casse De Brice.lrc
여하튼 이런 내용은 모두 현실에서 각 주체가 얻는 내용과 현실에서 각 주체가 스스로 자신이라고 보고 집착을 갖고 대하는 그런 내용이 하나같이 그렇게 집착을 갖고 대할 실다운 내용이 아님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다.
또 생사현실에서 중생을 제도하는 수행에 있어서는 중생 제도를 위해 필요한 방편을 얻고 성취함에 있어서도 대단히 중요하다.
그 사정이 바로 앞에 제시된 방광반야경의 내용에 제시된다. 그것은 그 사정이 그렇지 않다면 그런 수행을 해서 그러그러하게 생사를 벗어난다는 일도 본래 가능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문제는 중생제도를 위해 생사현실에 임해 수행하는 대승 수행자 입장에서는 대단히 중요하다.
대승수행자는 중생제도를 위해 생사현실에 임한다. 그리고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난 것을 해탈이라고 한다. 그렇지 못하고 생사고통에 묶인 상태를 속박이라고 한다.
『설무구칭경』에서는 속박과 해탈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제시한다.
즉, 보살의 속박[무방편혜박無方便慧縛, upāyānu pātta-prajñā]에 대해서
... 방편이 없는 지혜는 속박이며,
방편이 있는 지혜는 해탈입니다.
지혜가 없는 방편은 속박이며,
지혜가 있는 방편은 해탈입니다.
...
이렇게 제시한다.
여기서 방편은 세속의 분별지 그리고 지혜는 무분별지(승의제)와 상통한다.
쉽게 이해하면 다음과 같다.
예를 들어 앞에서 현실에서 수도나 전기에 어떤 문제가 발생했다고 하자.
이런 경우 실상을 관하는 반야지혜의 측면에서 이를 대하면 그런 문제는 본바탕이 되는 실재 진여에서는 본래 얻을 수 없다. 따라서 그런 문제에 대해 망상분별과 집착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리고 그런 문제로 번뇌를 일으키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는 반야심경에서 제시하는 '조견'5온 개공 도일체고액의 내용과도 성격이 같다. 현실 일체가 공하다는 것을 밝게 비추어 관한다. 그래서 그것만으로 곧 그런 내용이 집착을 갖고 대할 실다운 내용이 아님을 이해한다. 그리고 집착을 제거해 그런 현실의 일체고액에서 바로 벗어난다. 이런 성격이다.
그리고 본 바팅이 되는 실재의 측면은 그렇다. 그러나 현실에서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생사현실에 임하는 측면에서는 그럼에도 그런 문제가 여전히 현실영역에 그렇게 남아 있다. 그래서 그 측면에서는 여전히 문제를 일으킨다. 심한 질병에 걸려 고통을 받고 장례를 치루고 화장터에 가는 문제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생활에서 만나는 작은 사소한 문제들도 번뇌를 일으키고 그에 상응한 일정한 고통을 받게 한다.
그리고 이런 경우 그런 현실 문제를 일정한 도구나 방편을 통해서 잘 해결하면 일단 그 문제는 해결된다.
현실에서는 각 중생이 질병이나 사고를 당한다. 그리고 고통을 받고 죽는다 그런데 이런 생사문제도 무량겁에 걸쳐 살아갈 방편을 마련하면 해결된다고 여기게 된다. 예를 들어 극락세계처럼 한 생명이 계속 일정한 형태로 살아가는 경우다. 또는 현실에서 하나의 영구기관을 만들어 내는 경우다. 이런 입장도 현실에서는 있게 된다.
물론 이 경우 처음 진여 실재의 측면을 놓고 보면 사실은 그렇게 임할 필요가 굳이 없다.
그러나 이미 전도몽상분별을 일으키고 생사고통을 받아나가는 측면을 기준으로 살펴보자. 그런 경우 그런 상태에 놓여 있는 중생은 앞과 같은 측면으로 곧바로 진입해 들어가지 못한다.
따라서 현실에서 그런 문제를 일단 성취하는 것을 방편으로 해야 점차 그런 상태로 진입하게 된다.
이런 사정때문에 수행자는 이런 방편을 그런 측면에서 함께 구족해 성취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그것이 생사현실에 묶인 중생을 제도하는데 도움이 된다.
대승 수행자는 생사현실에 임해 중생을 제도하려는 서원을 갖는다.
그런데 본 바탕은 그런 문제를 본래 얻을 수 없다. 그렇다고 오로지 그런 본 바탕의 측면만 붙들고 임하면 곤란하다.
그러나 반대로 오로지 세속 측면만 붙들고 시종 일관하는 것도 곤란하다. 그리고 본 바탕의 측면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곤란하다. 그런 경우는 그 자신부터 생사현실에 묶여 벗어나지 못한 속박의 상태라고 해야 한다.
결국 생사현실에 임해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대승 수행자는 지혜와 방편을 둘다 구비해야 한다. 그리고 어느 하나가 부족한 상태로 임하면 그런 생사현실의 묶임에서 스스로 벗어나지도 못하게 된다. 그리고 다른 중생도 벗어나게 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문제가 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현실문제도 잘 해결해 성취하기 쉽지 않다. 더욱이 그 그 실상이 공함을 잘 관해서 근본적으로 집착을 제거하고 생사고통을 벗어나는 것은 더욱 쉽지 않다.
그래서 말은 쉽지만, 현실에서 제기되는 무량한 번뇌에 상응해 그 각 문제를 양 측면에서 모두 잘 해결하면서 중생을 제도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데 극락세계는 바로 그런 상태를 원만하게 다 잘 성취한 국토다. 따라서 그런 극락세계를 건설해낸 아미타부처님은
대승의 수행자가 본받아야 할 하나의 사례다.
그래서 일단 이런 상태를 향해 수행자가 평소 중생제도와 불국토 장엄 성불의 서원을 잘 구상하고 이를 성취하기 위해 수행에 정진해 나가야 한다.
예를 들어 지금 편두퉁이 있을 때 곧바로 쉽게 치유할 방편이 있다고 하자. 이는 중생의 현실적 고민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리고 이를 방편으로 중생을 제도하는 측면에서도 효과가 있을 수 있다. 그런 경우에는 수행자는 이런 방편도 잘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쉽지 않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있으면 훨씬 좋다. 그리고 이런 내용이 대승 수행자의 상황이다.
○ [pt op tr]
▼mus0fl--Camelia Jordana - Non Non Non (Ecouter Barbara).lrc
○ 서원 구상
올려 놓은 노래를 듣다보니 관세음보살님도 등장한다.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가리지 않고 다 배워야 한다. 그렇게 하면 다른 경우보다 조금 빨리 중생을 제도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경우는 모든 것을 다 부처님이나 보살님에게 의존해 해결하려고만 하기 쉽다. 그려면 또 곤란하다. 그런 메세지를 노래가 전하는 듯하다.
원래 수행자는 무량겁을 놓고 서원을 구상하게 된다.
그리고 그 기본 골격은 사홍서원 즉, 중생을 제도하고 번뇌를 끊고 법문을 배우고 성불하고자 하는 내용이 된다.
그런데 사홍서원을 성취할 구체적 방안이 문제된다. 이런 구제적 방안에서 각 수행자의 개성이 달리 나타난다. 그래서 이런 구체적 부분에 신경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다가 삼국유사에 나오는 조신을 떠올리게 된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조신이라는 스님은 종이 잠깐 울리는 사이에 사랑하는 연인과 한 평생을 살고 그럼으로써 생사현실이 결국 고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수행에 정진하게 된다.
기간으로 보면 종이 울리는 잠깐 사이의 시간인데 또 달리 보면 그 사이에 한 평생을 그렇게 보낸 것이다. 그리고 그로써 수행에 대한 의지를 굳히고 수행에 정진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양 부분의 장점을 다 갖추고 수행에 임한 것이 된다.
그래서 종이 한번 울리는 짧은 시간에 그러나 아주 충분하게 번뇌를 잘 끊고 수행에 정진하게 되는 것이 바람직하리라 생각해보게 된다.
삶에서 어떤 소원을 가질 때 마음에서 미리 그 극한을 다 나아가 그런 희망이 성취된 상태가 어떤 문제를 갖게 되는지를 미리 잘 관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하면 삶의 문제를 대단히 단축시키고 줄이게 된다.
그런데 현실의 삶에서 오로지 수행만 정진하는 것도 조금 너무 단조롭게 느껴진다. 수행자가 수행을 하는 기계나 경전을 담아 놓는 메모리카드는 아니다. 그래서 평생을 경전만 보고 수행만 하면서 사는 것은 너무 단조롭게 여겨진다. 그리고 기계적이고 인간적인 면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일반 중생이 겪는 번뇌 부분도 조금은 필요하다. 그렇지만, 그런 번뇌를 해결할 어떤 교훈을 얻기 위해 너무 긴 시간을 들이는 것은 또 바람직하지 않다. 따라서 결국 조신과 같은 스님의 사례가 상당히 바람직해 보인다.
현실에서도 어떤 무익하고 쓸모없고 가치없는 어떤 소원을 놓고 집착하게 될 때는 조신의 사례에 준해 해결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짧은 시간안에 그 극한의 상태까지 나아가서 그런 내용이 갖게 되는 문제를 미리 살피고 관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런 번뇌를 제거해내는 방안이 상당히 유익하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하고 그것을 정말 무한히 하나하나 다 그렇게 현실에서 경험하고 나서야 그 문제를 보게 된다면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 된다.
관세음보살님께서 수행을 처음 시작하기 전 이름은 조리(早離)였고 나중에 대세지 보살이 되는 동생의 이름은 속리(速離)였다고 한다.
그런데 조(早)는 가능한 일찍 생사현실을 떠나야 하고
속(速)은 또 그 속도를 빨리해 생사현실을 떠나야 함을 나타낸다고 생각하게 된다.
결국 두 이름을 합치면
조속(早速)하게 생사의 묶임을 벗어나야 떠나야 함을 나타낸다고 생각하게 된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조신(調信)이라는 스님은 그런 의미의 조(早)는 아니다.
그런데 여하튼 일찍 그리고 빨리 번뇌를 끊고 생사현실을 벗어나는 내용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성인들의 가르침을 조화롭게 잘 믿고 잘 따르는 것이 필요하다.
♥ 잡담 ♥
쉬는 동안 아주 심한 영화를 한 편 보았다.
언젠가 자신의 딸이 납치당해 쉼없이 사람을 죽이면서 딸을 구출해 내는 영화를 보았다. 이번에는 또 어떤 요원이 또 그와 비슷하게 쉼없이 놀라운 솜씨로 사람을 살해한다. 영화제목이 음악의 음질을 조절하는 그런 기능을 의미한다. 그런데 영화니까 그런가보다 하지만, 또 어느 정도 현실을 반영한 것처럼도 생각된다. 일반적으로는 그런 활동이 사회의 정의를 실현하는 활동이라고 여기기도 하기 때문이다.
♥ 잡담 ♥간단한 해탈과 무량겁 생사고의 차이
구글여행사를 통해 아름다운 풍광을 구경한다. 그러면 세계 각 곳마다 이곳은 이곳대로 또 저곳은 저곳대로 독특한 풍광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저 스처 지나가는 관광객의 심정으로 잠시 스처 살펴볼 때는 그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고 여긴다. 그런 가운데 마음 편하게 보고 지나친다. 각기 다른 장소에서 각기 다른 시설을 놓고 무언가를 행하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그 구체적 입장에서는 이런 내용 하나하나가 바로 삶의 문제다. 그래서 쉽고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 수리문제
경전을 정리하고 tv를 보고 잠깐 쉬면서 졸았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하수구가 막혔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하수구를 뚫는 기구가 있는데 어떻게 사용하는지 모르겠다며 도와줄 수 있는가 묻는다. 그래서 내려가보았다. 기구를 적당히 살펴본 다음 기구에서 또 적당히 철사를 빼서 하수구에 넣어 보다 보니 하수구가 간단히 뚫린다. 그래서 문제가 간단히 해결되었다. 기구를 할아버지가 이미 갖고 있어서 쉽게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그러나 또 생각해보면 이런 일 하나하나가 상당히 삶에 여러 성가신 문제다.
졸다가 갑자기 불려나가 조금 작업하니 곧바로 문제가 풀려서 다행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면 또 CHOICE 님이나 DOCTR 님을 다시 호출해서 문제를 해결했어야 했을 것이다.
여하튼 이런 문제 하나를 보면서 삶이란 사실 간단한 것이 아님을 느낀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보면 하나하나 대단히 복잡하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생사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행방안을 실천함이 대단히 중요함을 생각하게 된다.
○ 경전공부
쉬는 동안 본인이 이번 생에서 남은 기간 할 일을 생각해보게 된다.
현재 조각글을 작성하며 매번 뽑혀 나오는 경전을 살핀다. 그런데 지금과 같은 추세로는 평생을 보아도 대장경을 다 볼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생의 남은 기간 동안 그렇게라도 대장경 내용을 다 한번씩은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 중요한 경전의 품명이나 키워드 부분이나 게송 그리고 중요한 다라니를 외어보고자 한다. 그러다가 삶을 마치고 싶다.
무량겁에 걸쳐서 어떤 계획을 세우기 보다는 그런 연후 다음 생에서 어떻게 임할 것인가를 놓고 생각해보게 된다.
그런 가운데 다음생에서는 출가 수행자가 되어서 조용한 산사에서 정진하는 수행자로 삶을 살아보고 싶다.
그런데 태어날 때부터 산사에서 태어나 삶을 시작하는 경우는 드물다. 따라서 일반 생활을 하다가 어떤 계기로 출가를 해서 수행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보게 된다. 그런 가운데 조금 여러가지 구상을 해보게 된다.
-- 아래에 조각글 작성시 휴식시점에 붙인 노래가사,사진,풍광,예술작품 자료를 편집상 옮겨 붙입니다.--
mus0fl--Alain Souchon - Pardon.lrc
○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Hungary,_Budapest_XIV._Fortepan_22513
2017_0111_141746_canon_ar31.jpg https://www.wikiart.org/en/philip-wilson-steer/young-woman-at-the-beach https://en.wikipedia.org/wiki/Philip_Wilson_Steer 출처관련링크 ● [pt op tr] fr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Rosa_sp.198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Rosa_sp.198.jpg Species: Rosa sp. Author Kurt Stüber [1] ● [pt op tr] fr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Yakushiji2
https://en.wikipedia.org/wiki/File:Yakushiji2.JPG English: Yakushiji temple, Nara Author Peter 111 Permission & Licensing : Wikipedia ● [pt op tr] fr
♥Funafuti (Tuval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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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a-d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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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Rosa_'Honorine_de_Brabant'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Rosa_'Honorine_de_Brabant'.jpg Rosa 'Honorine de Brabant', gr. Borbonianas, sect. Chinensis. Real Jardín Botánico, Madrid Author A. Barra ● [pt op tr] f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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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0fl--Charles Aznavour - Le Palais De Nos Chimères.lrc
○ [pt op tr] Renoir sleeping-cat-18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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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t op tr]-portrait-of-tyman-oosdorp-1656
Artist: Frans Hals the Elder (1582 – 26 August 1666) 는 https://en.wikipedia.org/wiki/Frans_Hals Title : portrait-of-tyman-oosdorp-1656 Info Permission & Licensing : Wikiart ● [pt op tr] f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