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가지 바야제법의 일부가 제시되고 있다. 바야제(바일제)는 계율 가운데 가벼운 것으로서, 전문적으로 출가해 단체를 이루어 수행하는 수행자들 사이에 수행에 장애되는 일을 주로 금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출가해서 승가에 속해 전문적으로 수행에 임하지 않는 일반인의 입장이라고 해도 이런 내용을 대하면 당시 수행자들의 상황을 이해하는데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되고 서로 생각과 개성이 다른 개개인이 단체를 이루어 수행하며 생활하는 가운데 수행에 장애를 일으킬 수 있는 문제들이 어떤 형태로 발생할 수 있는가도 대강 살필 수 있다고 본다.
계와 율의 구분이나, 계 가운데에서도 본성적인 계와 그렇지 않은 계 그리고 그런 계율이 어떤 과정을 거쳐 제정되는가는 계율과 관련된 내용을 살피는 앞 조각글에서도 살폈는데 마하승기율 안에서도 앞 부분에 그 배경이 자세히 소개되고 있으므로 이를 참조하면 그 대강을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참조 마하승기율 http://buddhism007.tistory.com/5174 ☞
여하튼 이런 계율조항은
경전에서 반복해서 제시되는 내용으로서 현실에서 본래 좋고 나쁨, 선과 악을 얻을 수 없고 일체가 공하다는 내용을 반복해 대하다 보면 그런 바탕에서 왜 이런 계율이 제시되는가하고 그 관계에 대해 혼동을 일으킬 여지가 있다고 본다.
계율이란 결국 현실에서 아무렇게 해도 된다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고 일정한 내용을 일정하게 해야 하거나 하지 않아야 함을 요구하는 규범적 내용으로서 그 일체가 본래 차별없이 공하다는 내용과는 언뜻 모순되는 내용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규범이 제시되려면, 먼저 무엇이 무엇보다 좋다거나 나쁘다는 가치 판단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 그것은 또 어떤 좋은 상태나 나쁜 상태는 무엇을 원인으로 해서 그런 상태가 나타나는가에 대한 인과 판단과 함께 종합적으로 행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나쁜 상태를 만들어 내는 원인은 그 결과가 나쁘기 때문에 따라서 그런 결과를 만들어내는 원인도 함께 나쁘다라는 가치판단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어떤 좋은 상태를 이루고 반대로 나쁜 상태가 나타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위와 같은 인과판단을 전제로 해서 현실에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판단이 뒤따르게 된다. [실현방안]
그런 결과, 한 주체는 나쁜 상태가 나타나는 원인을 행하지 않아야 하고 좋은 상태가 나타나는 원인이 되는 내용을 행해야 한다는 형태로 의사를 결정하고 선택해 나가야 한다는 내용[의사결정규범]을 바탕으로 다시 현실에서 일정한 행위를 해서는 안된다고 금지시키는 금지규범이 제정되고 반대로 좋은 상태가 나타나는 원인은 적극적으로 일정한 방식으로 행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행위규범이 제정되는 것이다.
그것은 또 각 개인이 그런 규범 내용을 지킬 것을 단순히 권고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런 규범을 잘 지키고 따를 수 있도록 그런 규범을 지키거나 지키지 않거나 함에 따라 어떤 차별적인 결과가 따르게 하는 처벌규범 내용이 덧붙여지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주체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행위를 하면 바일제다. 이런 내용이 바로 그런 내용이 된다.
이것은 그런 행위를 하는 것은 그 자체가 나쁘거나 어떤 나쁜 결과를 일으키게 되므로 [인과판단 ] 그것은 나쁘다. [가치판단] 그래서 그런 행위를 하려고 뜻을 일으키고 그런 내용을 선택해서는 안 되고 [의사결정규범] 그런 행위를 해서는 안된다. [금지규범] 그런 경우는 반대로 이렇게 이렇게 해야 한다. [ 행위규범 ] 그리고 그런 규범을 어겨 그런 행위를 하면 어떠어떠한 조치를 취한다. [ 처벌규범 ] 이런 형태로 제시되는 내용이다.
그런데 진리에 대한 사실판단 과정에서는 일체에 대해 그 일체가 공하고 본 바탕인 실재에서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고 그래서 현실 내용이 실답지 않다는 내용을 제시하게 되는데 이 내용과 앞 내용이 어떤 관계에 있는가가 잘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즉 본 바탕에서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면, 그것은 현실 내용이 어떻던지 관계없다거나 사정이 그렇기에 현실에서 아무렇게 하거나 또 아무 것도 하지 않거나 다 무방하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이해하기 쉽다.
그래서 차별없이 공하다고 제시하는 부처님께서
왜 다시 차별적인 내용으로 계율을 제시하면서
이것은 해야 하고 저것은 하면 안 된다고 제시하는가 그리고 이런 계율을 잘 지키고 수행을 해야만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제시한 것인가. 그 근거가 무언가 이런 식으로 의문을 일으키게 되기 쉽다는 의미다.
그래서 이런 혼동을 일으킬 경우에는 현실이 차별없이 공하여 꿈처럼 실답지 않다라는 내용을 놓고 . 현실에 대해 올바른 사실과 진리판단을 하는 데에서부터 이들 내용의 관계를 잘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있다고 보게 된다.
오늘 올려진 마하승기율 내용을 보면 일반인 입장에서 왜 그런 계율 내용이 제정된 것인지 그런 계율을 부처님이 제정해 금지하게 된 그 취지나 그 배경을 쉽게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일부 보게 된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그런 것일 수 있다.
>>> 이런 맹세를 하는 자는 바야제의 죄를 범하는 것이다.
‘스스로 주문과 맹세를 한다’고 하는 것은
‘나무불’이라고 하면서 부처님을 가리켜 맹세를 하고,
아사리를 가리켜 맹세하기를
“내가 만일 그런 짓을 하면
마땅히 제바달다(提婆達多)의 죄보를 얻어서
거짓말한 죄와
은혜를 배반한 죄와
두 말을 한 죄를 얻을 것이요,
만일 내가 그런 행동을 하면 범행이 성취되지 못할 것이요,
가사를 입고 죽지 못할 것이요,
지옥에 들어가고
축생과 아귀에 떨어질 것이요,
만일 그대가 나를 비방하여도
또한 마땅히 이 죄보를 받을 것이오”라고 하는 것이니,
이런 맹세를 하는 자는 바야제의 죄를 범하는 것이다.
>>> 비구니는 의사가 되어 목숨을 살려서는 안 된다
오늘부터는 세속 사람이나 외도들에게
치료 방법을 일러주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
비구니가 세속 사람인 외도에게
자신이 직접 먹을 것을 주면
바야제의 죄를 범하느니라.
마땅히 정녀인(淨女人)을 시켜서 주어야 하고...
>>>
자기가 (음식을) 손수 끓이고 볶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
세속 사람의 집에서 세속적인 일을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
세속 사람이나 외도들과 친하게 가까이 살면
만일 하루 종일이거나 잠깐이든
또 원민과 사미에게 이르기까지 가까이 지내면
바야제의 죄를 범한다.”
>>>
이런 내용들이 계율로서 제시되고 있다. 그래서 왜 이런 내용이 계율로서 제시된 것인가. 그 취지와 배경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느낄 수 있다.
예를 들어 자신이 무언가를 약속하고 꼭 지키기 위해 맹세를 한다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그러면 자신이 어떤 결심을 하고 그것을 대충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인가. 이런 식으로 자칫 극단적으로 나아가 생각할 여지도 있다고 본다.
또 비구니가 의사가 되어 질병치료를 해서 다른 이의 목숨을 살리면 또 왜 안 된다는 것인가. 그러면 극단적으로 나아가 주변에 다른 이가 병에 걸려 죽어가도 수행자는 그냥 모른 척하고 외면해야 한다는 것인가. 등등으로 의문을 일으킬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그러한 계율이 제정되게 된 배경과 그 계율이 제정된 그 근본 취지를 잘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본다.
우선 이런 내용은 출가하여 함께 승가를 구성해 수행하는 출가수행자에게 요구된 내용이다. 그리고 출가수행자는 일반인과는 그가 놓인 상황이 같지 않다는 것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출가수행자는 한마디로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출가해 함께 수행생활을 하는 성직자로서 일반인과는 다른 특수한 상태에 놓인 입장이라는 의미다.
이를 조금 쉽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비유하면 각 중생은 망집에 바탕해 생사고통을 무한하게 겪어 나가는 중병에 걸린 환자의 상태인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그 치료를 위해 각 개인이 일단 병원에 입원해 그 병을 낫고 생사과정에서 벗어나는 치료과정에 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이렇게 한 개인이 치료를 받아 생사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상태를 출가수행자가 수행을 통해 도달하는 아라한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또 한편 그런 환자 가운데 뜻을 조금 넓게 가져서 자신의 그런 질병도 치유하는 한편, 다른 이의 질병도 치유하고 더 나아가 장차 자신이 자신의 질병을 고쳐주던 그런 의사선생님처럼 되고 더 나아가 그런 의사를 양성해내는 의과대학의 교수나 병원장 처럼 되려고 하는 뜻을 일으켜 임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는 결국 수행자가 보리심을 일으켜 보살도를 닦고 성불하는 과정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각 개인의 각 상태는 처음 그런 중병에 걸려서 그것이 병인지도 이해하지 못하고 매 순간 생사고통을 겪으면서 무량하게 나아가는 상태부터 포함해서 각 경우가 다 제각각 다른 것이다.
그런데 지금 처음 그런 질환에 걸려 고통받던 상태에서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고자 출가해서 수행하는 일반적인 입장은 마치 어떤 환자가 병원에 입원해 입원생활을 하며 치료를 받는 상황과 같은 것이다.
그런 경우 그 환자는 일단 자신의 병이 어느 정도 나을 때까지는 그 환자부터 그런 병의 치유에 전념하고 입원해 단체로 입원생활을 하는 가운데 병원 내외에서 지켜야 할 일정한 규칙이 있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병원에서 생활할 때는 일정한 환자복을 입고 손도 잘 씻고 손을 씻을 때도 다른 이에게 손 씻은 물을 튀켜 불쾌를 주는 일도 하지 않아야 하고 식사 때는 공연히 더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면서 병원 식당에 들어가 소란을 피우지도 않아야 하고 자신이 섭취할 식판을 들고 다른 환자에게 준다거나 하면서 이리저리 소란을 피우지 않아야 하고 또 치료를 위해 입원생활을 하는 가운데 공연히 질병을 악화시키는 일반인이나 사이비 약장사들과도 공연히 가깝게 지내며 접촉하지 않고 또 질병을 악화시키는 주된 원인이 되는 일반인이 행하는 갖는 욕심과 그에 바탕해 행하는 온갖 잡일을 다 중지하고 치료에 전념해야 한다거나, 하는 등등의 규칙 등이 필요한 것이다.
일반 병원에서 환자가 입원생활을 해 치료를 받을 때도 사정이 그렇지만, 망집을 일으켜 생사고통을 받아나가는 상태에서 처음 출가를 해서 수행을 통해 생사의 병을 치유하는 수행을 행하는 수행자들도 사정이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후 그런 수행자가 어느 정도 수행을 쌓아 자신의 병을 치유하는 상태가 많이 진전된 상태에서는 또 사정이 다르고 더 나아가 그 수행자가 단지 자신의 생사의 병만 치유하는데 목표를 두지 않고 다른 환자들까지 모두 치유하는 의사가 되어 활동하고자 하는 뜻을 갖게 된 경우는 또 사정이 달라지게 된다고 이 사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알고보면 계율 항목도 그런 각 사정에 따라 그 내용이 조금씩 달라지는 사정이 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수행자가 출가해 함께 수행을 하는 상황은 각 개인이 독립해서 독립적으로 생사를 벗어나는 홀로 수행을 해가는 상황과는 또 다른 것이다. 이는 부처님 제자가 되어 출가를 하고 승가에 속해서 부처님 가르침을 받들어 함께 수행해가는 성문승과 연각(독각)승이 처하는 입장은 또 다르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 어떤 가수가 혼자 노래부를 때와 달리 가수가 여럿이 함께 춤을 추고 노래 부를 때는 어떤 한 가수가 자신 마음대로 춤추고 노래부르고 싶다고 해서 자신 뜻대로 자유롭게 마음대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한 가수의 노래나 동작은 여러 다른 가수와 함께 조화를 이루어서 함께 좋은 결과가 나오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원래는 가수는 매 경우 이렇게 저렇게 자유로이 노래부를 수도 있고 또 그 때마다 이렇게 저렇게 자유로이 손과 발을 움직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함께 청중 앞에서 노래부르고 춤추는 상황일 때는 어떤 경우는 갑이 이 부분을 노래 부르고 어떤 때는 을이 노래 부르고 갑은 그 노래를 그저 듣고만 있어야 하기도 하고 또 매 경우 동작은 제각기 이렇게 취하거나 저렇게 취해야 한다는 등등으로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형태가 되도록 규율이 필요하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수행자가 출가해 승가를 구성해 수행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생사묶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출가를 해서 단체를 이루어 수행활동을 하는 상황에서는 각 개인이 그런 출가 수행을 통해 그 목적을 잘 성취해야 한다는 요구와 함께 또 한편 각 개인의 행동이 전체 수행자의 수행에 장애를 일으키지 않고 수행자들의 수행이 원만하게 잘 성취될 수 있도록 해야 하고 경전에서 제시되는 것처럼 전체적으로 선법을 증장시키는 결과가 되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그러한 특수한 계율 내용들이 제정되게 된다는 그 사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그것은 각 경우 그런 내용을 허용하고 그 상태로 방치하면 그 이후 어떠어떠한 결과가 이어져 나타나게 되고 또 그런 상태는 그 수행자나 함께 수행하는 다른 수행자의 수행목적 성취에 어떤 장애나 문제를 나타나게 하는가를 일일히 잘 살펴야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떤 구체적인 상황에서 그 하나 내용만 보면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도 같지만, 이런 입장에서 판단을 하게 되면 그런 내용을 계율로서 금지할 필요성이 있음을 또 이해하게 된다고 본다.
여하튼 전문 출가 수행자에게 요구되는 이런 계율내용이 하나하나 제정되는 사정도 그렇지만,
이와 같은 계율이 제시되는 사정은 앞에서 살핀 것처럼 기본적으로 현실이 차별없이 공하고 실답지 않다고 제시하는 가운데
왜 이런 내용들이 세세하게 차별적인 형태로 제시되는가와 관련해 그 사정을 기본적으로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여기에서 가장 근본적으로 문제되는 것은 일체가 다 차별없이 공하고 현실에서 문제삼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는 내용을 바탕으로 할 때
왜 그런 바탕에서 이러이러한 내용은 꼭 해야 하고, 또 어떤 내용은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고 또 어떤 내용은 꼭 하지 않아야 하고 그것도 또 어떤 신분은 이렇게 해야 하고 또 어떤 신분은 이렇게 하면 안되고 하는 등등으로 세세하게 차별적인 내용들이 제시되게 되는가. 하는 그 사정과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앞에서 그 사정을 잘 이해하려면 현실이 꿈처럼 실답지 않다는 내용을 사실에 대한 진리판단 차원부터 잘 파악해야 한다고 제시했는데 그 사정은 간단하다.
현실이 꿈처럼 실답지 않은데 바로 이와 같이 꿈처럼 실답지 않은 현실에서 각 주체가 극심한 생사고통을 매순간 겪어 나가고 있기에 그런 것이다. 이것이 생사현실의 문제다.
일체가 차별없이 공하다는 것은 바로 각 중생이 극심하게 생사고통을 겪어나가는 이런 생사현실을 놓고 그렇게 제시한 것인데
그렇게 차별없이 공한 생사현실에서 각 중생이 각 상황에서 극심하게 생사고통을 겪고 있기에 그것이 문제인 것이고 그래서 그런 생사현실에서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 목표가 되고
이를 위해서는 이러이러한 행위는 하지 않아야 하고 또 이러이러한 수행은 마땅히 잘 실천해 성취해야 하고 특히 출가해 수행하는 전문 출가 수행자의 신분일 때는 또 각 출가자의 상태나 수행기간 등에 맟추어 이러이러한 행위는 하지 않아야 하고 또 이러이러한 행위는 이러이러한 방식에 따라 잘 실천해 성취해야 한다는 등등이 요구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위 내용들은 서로 모순되는 내용이 아니다.
그런데 언뜻 잘못 이해하면 이들 내용이 서로 모순된 내용인 것처럼 오해하기 쉽다.
그래서 현실이 꿈처럼 실답지 않고 공하다는 내용에 대한 이해를 먼저 잘 해야 한다고 본다.
현실이 꿈처럼 실답지 않다는 내용은 우선 현실에서 얻는 내용은 그런 조건에서 그렇게 생생하게 내용을 얻지만, 본 바탕이 되는 실재영역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이런 의미다. 그래서 현실 내용이 실답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 내용 일체가 차별없이 공하고 실답지 않다는 내용은 현실에서 그런 실답지 않은 현실 내용을 그렇게 얻지 못한다거나 그런 내용이 전혀 없다고 한 것이 아니다.
그런 내용을 현실에서 생생하게 그렇게 얻는데 그 실재가 공하고 그래서 그런 현실 내용이 실답지 않다고 한 것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현실이 꿈처럼 차별없이 공하여 실답지 않다고 제시하면 간혹 현실이 아무 것도 없다거나 본 바탕이 되는 실재 역시 전혀 아무 것도 '없다'고 제시한 것처럼 오해하는 수가 많고
또 그 내용이 곧 현실에서 어떤 이가 아무렇게 행해도 무방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무방하다고 제시한 내용처럼 오해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고 보게 된다.
그것은 위 부분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라고 본다.
○ [pt op tr]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Marc Lavoine - C'est La Vie.lrc
최근 쉬는 동안 TV에서 영화 하나를 본 적이 있는데
이 영화에서는 1940 년대 즈음 한 유대인 고아 소년이 독일군인들을 피해가며 이 농장 저 농장 돌아다니면서 겪는 내용을 그리고 있다.
그러다가 한 농장에서 손을 다쳐 병원에 가는데 그 병원에서 한 의사는 그 소년이 유대인임을 알아보고 그 소년을 치료하다가 자신도 공연히 곤경에 처한다면서 그 소년을 치료하지 않고 방치한다. 그래서 간단히 치료를 마칠 손 부상을 치료하지 못하고 침대에 그냥 누어 있다가 나중에 다른 의사에 발견되어
팔을 잘라내는 수술을 통해 간신히 회복한다.
그런데 이후 치료를 회피했던 그 의사가 끝내 독일군에게 신고를 해서
다시 도망가고 그 이후 계속 도망다니는 그런 내용들이 그려진다.
그런데 어린 소년의 입장에서 민족과 종교가 달라서 주변 사람들에게 그런 차별대우와 따돌림을 당하고 또 계속 자신을 체포해가려는 군인들을 피해다니면서 매 순간 겪게 되는 두려움과 고통이 얼마나 심한가.
그 당시 왜 그 소년이나 유대인들이 그런 대우을 받고 살아가야 했는가. 그런 배경을 일일히 살피는 것을 떠나서 일단 그 소년의 상황에 자신을 넣어 놓고 입장을 바꾸어 놓고 보면 그 하나하나가 대단히 견디기 힘든 내용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도 또 쉬는 동안 갑자기 인턴연구원이 연구실에 바퀴벌레가 나타났다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다가 결국 진공청소기로 빨아들이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이를 지켜보다가 그렇게 끝내면 또 곤란하다고 보고 본인이 또 옥상에 올라가 청소기를 분해해
청소기에 들어간 바퀴벌레에 대해 방생조치를 취하게 되었는데 이것도 알고보면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어떤 개가 대로변에 줄이 풀린채 여기저기 돌아다니면 이후 사람들의 신고를 받고 곧바로 붙잡혀 가고 이후로도 그 개를 찾아갈 주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처하게 되는 사정이나 일반적으로 현실에서 축사에 갇힌 축생들이 받는 대우도 알고 보면 그 사정이 마찬가지다.
그래서 세상을 살펴보면 각 생명이 각기 다른 생명에게 붙잡혀 고통을 겪고 두려움을 받게 되는 상황이 도처에 펼쳐져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모습들이 하나같이 각 생명이 겪어 나가는 생사고통의 일부인데 이런 일이 과연 현실에 없는가하면 그렇게 생생하게 매 순간에 있는 것이다.
자신이 지금 별 문제가 없고 평안하다고 여기면 그런 현실 일체를 놓고 이들 일체가 차별없이 공하다 공하지 않다 이렇게 제시하는 내용이 무슨 의미인가 하고 별 생각이 없을 수 있지만,
앞에 제시한 내용처럼 자신이 극심한 고통이나 공포를 겪는 상황을 놓고 그런 현실 일체가 공하다라고 제시하면
과연 이런 경우 일체가 공하여 실답지 않다는 내용이 과연 무슨 의미를 갖는 내용인가를 놓고 깊게 잘 생각해야 한다.
예를 들어 자신이 팔이 잘려지거나 거꾸로 매달려져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는 상태를 놓고 그 상황이 공하다라고 제시하는 것은 과연 무슨 의미인가. 이것을 먼저 잘 파악해야 한다는 의미다.
일체가 차별없이 공하다는 내용은 바로 그런 상황을 포함해서 그런 현실 일체가 다 차별없이 그렇다라고 제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렇게 한 소년이 차별대우를 받아가며 팔이 잘리우거나 또는 체포를 두려워하며 도망다니며 고통을 당하는 상황을 놓고 이런 현실 일체가 공하고 실답지 않다고 하는 것이 그렇게 생사고통을 생생하게 겪어 나가는 각 주체에게 도대체 어떤 해결방안을 제시해주는 것이기에 그런 내용을 제시하는가를 먼저 잘 살펴야 하는 것이다.
결국 현실 일체가 공하고 실답지 않다는 내용은 그런 생사고통을 해결하기 위하여 제시하는 중요한 내용이다. 그래서 그런 내용이 생사고통의 해결에 중요한데
그런 현실에서 그런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려면 현실 일체가 본 바탕이 공하다는 사정을 잘 관함과 함께 그런 바탕에서 생사현실에서 각 주체가 지켜고 실천해야 할 계율이나 여러 수행방안이 그처럼 제시되는 그 사정도 잘 이해하면서 그 내용을 잘 실천하고 닦아야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 [pt op tr]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Gerard Berliner - Louise.lrc
현실 일체가 공하고 꿈처럼 실답지 않다는 내용과
그 현실에서 각 상황에서 각 생명이 다양한 고통을 겪는다는 내용을 놓고 그 두 내용의 관계와 함께 수행자가 현실에서 계, 정, 혜 3 학을 골고루 닦아야 하는 사정을 살피고 있다.
아름다운 풍광 스크립트에 의해 세계 각곳의 풍광을 살피는데 영화에서 본 그 소년이 독일군에게 체포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이곳 저곳을 도망다니던 상황이 연상되어 떠오른다.
부모도 없는 상태로 어린 소년이 맞이해야 했던 당시의 상황은 세계 어디서나 비슷하게 매 순간 발생하는 일이기도 하고 또 그런 각 상황에 놓인 각 주체는 지극히 고통스럽고 힘들게 그 상황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이는 이런 일이 어떤 특정한 시기 특정한 곳 예를 들어 1940 년대 유럽에서만 있었던 특수한 일이 아니고
지금 이 순간의 현실이나 또 장래에도 이와 마찬가지로 어디에선가는 발생하고 또 앞으로도 계속 해서 그런 형태로 발생하여 그와 같은 생사고통을 겪어 나가는 일이 무량하게 이어지고 있다는 의미다.
그것은 예를 들어 지금 자신이 있는 주변을 살펴보아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한국이 과거에 처한 상황을 놓고 어느 시기 어느 시대를 가서 살펴보아도 마찬가지다.
극히 최근에도 다양한 사건 사고의 내용을 보고받게되는데 그 가운데 하나로 과거에 한 TV 프로에서 선감도라는 이상한 수용소에 대해 보고한 내용을 본 적이 있다.
당시 그 방송에서 그 피해를 받은 이가 회고하기를 매일 같이 곡괭이 자루로 별 이유도 없이 매를 때리는데 그래서 단 하루라도 그렇게 매를 맞지 않게 되기를 기도도 드리고 했다는데 그러나 그렇게 맞지 않은 경우가 거의 없었다고 회고하는 내용을 본 적이 있다.
그런데 더 심한 것은 그렇게 노역을 시키면서 글도 안 가르치고 아무 교육을 시키지 않아서 그 수용소를 나온 다음에 이후 겪은 고통이 수용소에 겪은 더 고통보다 더 심했다고 회고하였던 것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자신보다 열악한 상황에 있는 다른 이들을 대해 취하는 자세가 일반적으로 그런 수용소에서 대하는 자세보다 더 심해서 수용소를 나와 그런 상태로 열악한 상태로 다른 이들과 대하며 생활하게 된 상황이 바로 광범위한 수용소 상황과 같았음을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그런 이들을 대할 때 대하는 일반인들의 자세는 수용소에서 그들을 대하는 자세와 별 차이가 없고 오히려 더 가혹하고 심했다는 그런 의미다.
그런 가운데 그런 수용소에 수감된 이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부랑 생활을 한 것도 아니고 가족과 함께 살고 있던 상태였는데 그렇게 수용되었다는 점도 문제지만, 사회 전반적으로 그런 보호자마저 전혀 없어서 부랑생활을 어렵게 하는 다른 이들을 대할 때 마음으로 이들을 어떻게 대하고 이후 이들을 대하게 되는가가 문제의 핵심이라고 본다.
결국 이런 각 개인의 마음자세가 독일에서 어떤 지도자라고 나선 이가 다른 인종이나 민족에 대해 가진 마음자세이기도 하고 그것이 곧 그런 이가 어떤 지시를 할 때 그것을 따라 대다수가 집시나 부랑자를 대해 행한 내용과 하등 차이가 없는 내용들인 것이다.
그리고 이후 그런 피해를 당한 이는 왜 그 당시 잠시 길을 잃고 헤맨 어린이들을 납치해 길게는 10여 년간 모질게 구타하고 강제노역을 시켰던가에 대해 아무런 답변을 듣지 못하고 그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는 내용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일반인들이 자신과 별로 관련이 없고 그리고 보호자가 없이 돌아다니는 다른 이들을 대하는 일반적인 마음상태와 다 함께 관련이 된다고 본다. 그리고 현실에 임하는 이들이 제각각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생사고통을 겪어나가는 주된 원인도 사실은 바로 그런 사정이기도 하다.
그런 가운데 유대인이 당한 고통을 보다보면
독일인만 유독 그렇게 다른 민족이나 다른 국가 사람들에게 그렇게 잔혹했는가 하고
또 다른 편견을 갖기 쉬운데 역사 전체를 넓게 살펴보면 그 사정이 그렇지 않은 것이다.
먼저 유대인만 놓고 보면 왜 유대민족이 유럽 전체에서 그런 상태에 놓이게 되었는가. 그 연원을 살피면 결국 예수님이 제시한 방안과 바라바가 제시한 방안 가운데 일반적으로 택하기 쉬운 방안을 당시 유대민족이 택하고 유대민족을 침략한 로마를 이후 그렇게 상대하다가 결국 그런 상태에 처음 놓이게 되었다는 사정을 보게 된다.
그런데 결국 알고보면 이런 내용이 일반인이 부랑자를 대하는 그 반응자세와 그 근원이 사실은 같다.
즉, 일반적으로 어떤 이가 자신이 집착하는 좋음을 아끼고 다른 이에게 베풀지 않으려는 마음은 반대로 자신의 좋음을 어떤 다른 이가 침해하고 나쁨을 가하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이런 형태로 미움과 원망을 갖고 철저하게 보복하고 되갚아주려는 마음을 갖고 대하게 되는데
근원적으로 이런 좋고 나쁨에 대해 일반적으로 그와 같은 마음을 일으키고 그런 반응을 하며 그런 자세를 취하게 만드는 그 망상분별과 집착의 내용이 같은 것이다.
그래서 일반 망상분별 과정에서 망집에 바탕한 분별 판단 내지 추론 방식 가운데 대표적으로 문제되는 방식이 바바라식(a-a-a 형태의 3 단논법)이라고 표현하는 형태가 대표적이라고 보듯,
결국 로마가 침략한 당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이 제시한 방식과 바라바가 제시한 방식 가운데 유대사회에서 취한 바라바 방식이 대표적으로 문제가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와 같은 방안을 택한 유대민족은 결국 로마에 의해 거주지에서 쫒겨나고 이후 2 차대전 이후까지 세계 각곳을 방랑하는 상태가 되었는데
일반적으로 대부분 탐욕을 갖고 살아가는 경향은 어차피 다 비슷하다고 보지만, 각지에 들어가 이방인의 입장으로 생활하게 된 유대인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종교를 바탕으로 독선적인 선민사상을 갖고 다른 이웃을 배타적으로 대하는 경향을 갖는 한편, 자신의 입지가 이방인의 입장인 배경 때문에 생존을 위해 더욱더 자산에 집착을 갖는 경향을 갖게 되었다고 사정을 이해할 수 있는데 이처럼 유대민족이 갖게 된 특성이 또 한편 유대민족이 역사상 끊임없이 세계 곳곳에서 당한 피해와 관련이 된다고 보게 된다.
그리고 이후 유대민족이 따로 나라를 세우고 그 이웃 민족에게 대하는 방안과 자세도 이런 내용들이 또 관련이 되어 이어지고 있음을 현실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어떤 이방인이 있는데 자신들과 여러 다른 점을 비록 갖는다고 해도, 그들이 이익을 베풀고 서로 조화롭게 도움을 주고 받고 또 그들이 특별히 배타적이지도 않고 다른 이들과 사이좋게 잘 지내고 나중에는 그 사회에 섞여 서로가 다른 이와 크게 같고 다름의 차별을 볼 수 없게 된다면, 왜 그렇게 각 지역에서 따로 그들만 붙잡아 박해를 가하는 일들이 반복하겠는가.
이렇게 그 사정을 반대로 생각해볼 수 있는 점이다.
그리고 2 차대전 당시 유대인들을 향해 그렇게 가혹한 일을 행했던 독일인들도 알고보면 그 사정이 유대인들과 별 차이가 없음을 또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1618 년대 30 년전쟁이 유럽에서 일어났을 때는
당시 통계가 비록 정확하지는 않지만,
다른 주변국에 의해 독일 주민 3 명 가운데 1 명 정도로 희생을 당하여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는 사실을 살필 수 있다.
그래서 넓게 보면 이처럼 가해와 피해를 서로 반복해 주고 받는 현상이 광범위하게 각 개인이 일으키는 망집을 바탕으로
전 세계를 주변으로 여기저기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하튼 그런 세상에 놓여서 서로 가해와 피해를 끊임없이 서로 주고 받는 현실을 대할 때
이처럼 고통을 받는 현실은 각 주체가 생생하게 대하고 겪는 내용이어서,
이런 현실 일체가 다 차별없이 공하고 실답지 않다는 내용이 도대체 이런 고통을 받는 상태에 대해 제시하는 의미가 과연 무엇인가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것은 다음 문제와 관련된다.
자신이 눈을 떠서 세상을 보면
저기 나무가 서 있고 여기에 사람이 오가거나 자동차가 오가고
또 저기에는 산과 들이 있고
이런 내용들이 너무나 생생하고 선명하게 구별되어서
이런 내용은 대단히 진짜같고 실답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대부분
자신이 이처럼 눈을 떠 생생하게 각 내용을 구분해 대하는 이 현실은 그것이 곧 자신의 마음 밖의 내용으로서 외부 세상의 내용이고
또 자신의 감관이 대하는 외부 대상이고
또 한편 그것은 마음과는 구분되는 마음과 별개의 외부 물질이고
그리고 이런 내용은 자신만 그렇게 대하고 얻는 것이 아니고
영희나 철수를 비롯해서 다른 사람들이 다 함께 대하는 외부의 객관적 실재라고 잘못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이해가 각 개인이 평소 대하는 감각현실을 놓고 그것이 실답다고 여기며 집착을 갖고 대하는 자세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이 실답지 않고 공하다는 것은
사정이 그렇지 않고 위와 같은 이해가 잘못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사정을 쉽게 꿈의 비유로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침대에 누어 꿈을 꾸었는데 바다에서 황금을 얻는 꿈을 꾸었다고 하자. 이 때 꿈에서 꾼 바다나 황금의 꿈 내용은 '실답지 않다'고 말한다.
이 경우 꿈이 '실답지 않다'는 그 말의 의미는 자면서 그런 꿈을 생생하게 꾸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또 현실에 그렇게 누어 잔 침대 등이 전혀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런 꿈을 그런 침대에 누어 꾼 것은 사실이고 그래서 그런 꿈 내용은 그런 상황에서 그런 조건에서 생생하게 얻은 것이지만, 다만 그런 꿈은 그런 조건에서만 그렇게 임시적으로 얻게 된 내용이고
그런 조건을 떠나면 얻지 못한다.
그리고 그런 내용은 현실을 비롯해 다른 영역에서는 얻지 못한다. 그리고 그런 꿈 내용을 놓고 거기에서 기대하는 다른 성품을 얻지도 못한다.
이런 의미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꿈을 꾸는 동안 그 꿈은 대단히 생생하게 얻기에
그것을 대단히 실답게 여긴다해도 꿈이란 위와 같은 특성을 갖는 것이므로 이를 실답다고 여기면서 집착을 갖고 대할만한 것이 아니다라는 내용을 '꿈은 실답지 않다'는 표현이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이 공하고 실답지 않다는 내용도 위와 그 사정이 같다. 이는 현실에서 한 주체가 매 순간 대하는 현실 내용도 알고보면
위에서 제시한 꿈과 같은 성격을 갖고 있다는 의미다. 그래서 자신이 대단히 실답게 여기는 현실 내용의 성격을 이해하려면
위 문장에서 꿈에서 본 바다나 황금 부분에 현실 내용을 대입해 넣고 관계를 살피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즉 그런 각 현실 내용은
한 주체가 매 순간 그런 조건에서 감관을 통해 생생하게 얻는 것이고 그런 내용을 얻지 못한다거나, 그런 내용이 없다고 할 것은 아니지만,
정작 그 주체가 그런 내용을 얻게 되는 그런 조건을 떠나면 그런 내용을 얻지 못한다. 예를 들어 눈을 감아도 그런 내용을 얻지 못하고 어두어도 얻지 못한다. 그리고 그렇게 얻는 내용은
본 바탕이라고 할 실재 영역이나 다른 영역들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지 못한다.
그리고 그렇게 한 주체가 얻는 내용은
역시 그에 기대하는 다른 성품을 거기에서 얻지 못한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 자신이 사과를 하나 본다면
그렇게 본 사과 모습 자체에는
자신이 그에 대해 생각하고 분별하는 분별 내용도 얻을 수 없고
또 사과에 대해 귀로 듣거나 냄새맡거나 맛보거나 손으로 만질 때 얻는 내용도 얻을 수 없다. 이는 그런 내용을 대해 자신이 어떤 생각을 '일으킨다'거나
자신이 그런 모습을 대하는 상황에서
동시에 다른 청각정보나 후각정보, 미각정보 촉각정보를 얻는다는 것과 혼동을 일으키기 쉽지만 서로 잘 구분해야 한다.
그래서 이런 사정은 마치 어떤 이가 침대에 누어서 꿈을 꾼 것은 사실인데
그러나 침대 자체에 꿈에서 본 황금이나 바다는 얻을 수 없고
그런 내용은 침대에는 없기에 꿈을 실답지 않다고 하는 것과 사정이 같다는 의미다.
즉, 한 주체가 현실에서 얻는 각 감각현실은
비록 그런 조건에서 매순간 생생하게 얻고
그런 조건을 유지하는 한 그것이 계속 얻어지기에
그것이 대단히 실다운 것으로 이해하고 대하기 쉽지만,
하나하나 내용이 위와 같은 성격을 갖는 것이어서
결국 그 전체가 다 함께 실답지 않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주의할 점이 있다.
앞에서 현실은 꿈과 '같다'고 하는 표현은 꿈과 그런 측면에서 성격이 비슷하므로 실답지 않다는 의미인 것이고 현실이 곧 꿈이다라는 의미는 아니다.
즉 실답지 않다는 그런 점은 꿈과 성격이 비슷하지만, 다른 부분은 꿈과 다른 것이다. 그래서 현실은 꿈과 비슷하지만, 꿈은 아니고 꿈과는 구별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다.
현실이 실답지 않지만, 그러나 꿈은 아니고 꿈과는 다르다고 볼 측면은 다음들이다.
즉 한 주체입장에서 얻는 현실 내용은 그런 내용을 얻게 되는 그런 조건이 되면 그와 비슷한 내용을 몇 천년 몇만년 무량한 기간을 놓고 대단히 반복해서 유사한 형태로 얻게 되고 또 그런 내용은 자신과 비슷한 감관을 가진 다른 주체도 비슷하게 경험하고 그리고 그 주체는 그 매순간 단지 시각정보로만 그런 내용을 얻는 것만 아니고 청각이나 후각 미각 촉각 등을 통해 대단히 다양하게 내용을 중첩해 함께 얻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측면에서 현실은 꿈과는 다르다. 그래서 한 주체가 얻는 현실은 꿈과는 달리 좀 더 생생하고 실답다고 여기면서 집착을 갖고 대하기 쉬운 것이다. 그런데 사정은 그렇지만, 그래도 이런 현실 한 단면 단면의 내용은 역시 꿈과 그 성격이 같아서 실답지 않다는 의미다.
그래서 결국 현실은 꿈처럼 실답지 않지만, 그러나 정작 꿈은 아닌 것이다.
이는 현실에서 살아가는 곤충이나 다른 생명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즉 어떤 곤충이나 개 방울뱀 두더쥐 박쥐 상어 등등을 놓고 보면 이들은 사람과는 다른 감관을 갖고 그에 따라 제각각 다른 감각현실을 얻게 되는데
그 경우에서도 앞과 마찬가지 현상이 나타난다.
즉 예를 들어 바퀴벌레가 더듬이로 세상을 대할 때
그 내용은 그 바퀴벌레들 입장에서는 대단히 생생하고 실답다고
여기게 되는 그런 내용이 된다는 의미다.
그리고 다른 세계의 중생도 사정이 같다.
그리고 그런 세계는 지금 이 순간만 그런 것이 아니고
그런 조건이 충족되는 한 무량한 기간을 걸쳐서
그와 유사한 형태로 반복되고 또 그것은 그 주체만 혼자 그런 것이 아니고
그 세계에 임하는 수많은 중생이 다 함께 비슷하게 경험하게 되고 그리고 그 내용도 단순하지 않고 한 주체의 다양한 감관이나 인식기관에 따라 예를 들어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및 관념분별과 같은 다양한 형태로 중첩해 얻는 가운데 그 주체가 대하는 현실을 대단히 생생하고 실답게 여기면서 생사고통을 겪게 된다는 그런 의미다.
그래서 이들 생사현실은
앞에서 본 것처럼 각 주체가 망집을 바탕으로 그런 내용이 곧 외부세계나 외부대상이고, 마음과는 구분되는 별개의 외부물질이라고 여기는 한편
다른 주체가 다 함께 대하고 있는 객관적인 외부실재라고 여기고 대하지만,
그러나 알고보면 그런 내용은 각 주체가 마음에서 얻는 마음안 내용으로서
본바탕이라고 할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도 아니다.
또 한편, 그렇게 각 주체가 매 순간 반복해 얻는 그런 현실내용은
앞에서 본 것처럼 침대에 누어 꾼 바다나 황금꿈처럼 비록 그런 조건에서 각 주체가 반복해 얻지만, 하나같이 본 바탕이라고 할 실재나 다른 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는 내용이어서
꿈처럼 집착을 갖고 대할만한 실다운 내용이 아니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다만 현실을 실답다고 여기는 입장에서는
자신이 현실에서 얻는 내용들은 매우 생생하고 너무 뚜렷하게 구별되는 것이어서 자신이 현실에서 그런 내용을 반복해 얻는 것은
마음 밖 외부의 실재 영역에 그와 일치하는 내용이 그처럼 정말 있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와 비슷하거나 비례하는 그 무언가가 정말 실답게 있어서
그런 내용을 그렇게 얻는 것이라고 집착을 갖게 되기 쉬운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입장에서는 거꾸로 이렇게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자신이 비록 침대에 누어서 꿈을 꿀 때는
침대에 없는 바다나 황금 꿈을 엉뚱하게 꾸게 된다고 해도,
자신이 현실에서 얻는 내용은 이와는 다르다.
현실은 꿈과 상황이 달라서 현실에서 그런 내용을 매 순간 대단히 반복해 얻고
또 자신뿐 아니라 자신과 비슷한 다른 이도 그렇게 얻고 그런 조건이 유지되는 한 무량한 기간 반복해 그런 내용을 얻고
또 동시에 다양한 감관별로 다양한 내용을 함께 중첩해 얻는 것인데
만일 본 바탕에 그와 일치하거나 비례하는 어떤 내용이 전혀 없다면
어떻게 자신이 세상을 대할 때마다
매번 이전과 비슷한 바위나 영희나 철수 모습을 그렇게 매번 대하게 되는가. 이렇게 의문을 제기하면서 자신이 현실에서 얻는 내용은 꿈과는 달리
대단히 실다운 것이라고 여기면서 집착을 갖고 대하게 된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런 현실을 놓고 그런 내용 하나하나는 앞과 같은 사정으로 실답지 않음을 잘 이해하고 사정이 그렇기에 그런 실답지 않은 내용을 아무리 무량한 기간에 걸쳐 수없이 반복해가며 다양하게 중첩시켜 놓는다해도 그로 인해 실답지 않은 것이 실답게 되는 것은 아님을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
예를 들어 자신이 매순간 거리에 서서 대할 때마다
영희나 철수의 모습이나 자동차나 건물이나 숲과 나무 등등을 뚜렷하게 구분해 대하고
각각에 대해서 제각각 다른 촉감도 얻고 한다해도
본 바탕에 그런 내용이 그처럼 실재하고 있어서
그런 내용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이는 실재영역에 전혀 아무 내용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고 또 현실에서 어떤 내용을 전혀 얻지 못함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지만,
여하튼 그 하나하나 내용이 침대에서 누어 꾼 바다나 황금 꿈의 관계처럼
현실에서 얻는 그런 내용과는 전혀 엉뚱한 것으로서 실재는 여하튼 현실에서 문제삼는 그런 내용은 아닌 그 어떤 것으로서 어떤 주체가 그 내용을 직접 얻지 못하여 공하다고 표현하게 된다는 의미다.
결국 현실이 실답지 않다는 것은 각 주체가 그러한 현실 내용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고 매 순간 생생하게 반복해 얻지만, 그것은 본 바탕에서는 얻을 수 없는 내용으로서 하나하나가 매번 그런 조건에서만 얻는 실답지 않는 내용이라는 의미다.
이제 이 관계를 잘 이해하려면
자신이 사과를 하나 들고 이를 눈으로 보고
그 사과를 손으로 두드려 소리를 듣고 코를 대어서 향도 얻고
입으로 먹으며 맛을 보고 손으로 만지면 촉감을 얻는 상황을 놓고 그 각 내용의 관계를 검토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일반적으로는
자신이 보는 사과 모습을 놓고 자신은 그런 모습을 '대상'으로 삼아 자신의 눈,귀,코,입,손 등이 관계해서 그런 색이나 소리나 향이나 맛이나 촉감을 얻게 된다고 망집을 일으켜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이제 그렇게 얻게 된 각 내용을 놓고 서로 비교해보면 현실에서 얻는 내용이 왜 본 바탕인 실재에서는 얻을 수 없는 내용이고 실재와는 엉뚱한 내용이어서 실답지 않다고 하게 되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즉, 자신이 눈으로 사과모습을 보면서 그 부분을 손을 대어 만지면 촉감을 얻는다고 할 때 그 촉감은 자신이 눈으로 보는 그 사과 표면이나 손 때문이라고 대부분 여기게 된다. 그런데 그 상태에서 눈으로 본 내용을 아무리 살펴도 자신이 손으로 얻은 그 촉감은 거기에서는 찾아지지도 않고 얻어지지도 않는다.
즉, 자신의 그 사과 모습 + 손 => 손으로 얻는 촉감 그렇게 이들 내용을 서로 관계짓고 이해하지만, 뒷 부분의 촉감 내용은 앞 부분의 시각 정보내용의 지위에 놓일 내용도 아니고, 뒷 부분의 촉감내용은 앞에 제시한 시각 정보를 얻는 영역에서는 그 어느 한 부분도 얻어지지도 않고 더 나아가 이들 내용은 서로 전혀 일치하지도 않고 서로 비례하거나 유사한 관계도 아닌 것이다.
그리고 현실에서 얻는 각 영역의 내용의 관계가 서로 다 이와 같다. 예를 들어 일반적으로 어떤 모습을 보고 그 부분이 영희나 철수나 꽃이라고 여길 때 그런 분별내용과 그런 모습은 서로 일치하거나 유사한 내용이라고 망집을 갖는 경우가 많은데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의 관계도 앞과 마찬가지다.
현실에서 얻는 각 내용들의 상호 관계가 꿈과 현실의 관계를 비롯해서 모두 이와 같기에 자신이 현실에서 얻는 내용만 유독 실재와의 관계에서 사정이 그렇지 않다고 볼 근거는 별로 없다.
그런데도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현실에서 얻는 내용을
모두 본 바탕인 실재 영역에 그와 일치한 형태로 그런 내용들이 실답게 있다고 고집하면서 실재 영역에 현실 내용을 그대로 밀어 넣으려 한다면 그 경우 현실에서 보는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현실 각 내용에서 살핀 위와 같은 문제는
다시 본 바탕인 실재영역에서도 똑같은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즉, 처음에 자신이 눈으로 어떤 모습을 볼 때 그와 일치하는 내용이 실재영역에도 그대로 있다고 밀어 넣고 또 각 감관으로 얻는 내용들도 그처럼 밀어 넣어서 그런 내용이 실재에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 경우 그 주장자는 그런 주장으로 인해 자신이 현실에서 얻는 각 내용은 그런 실재를 바탕으로 얻는 실다운 내용이라고 여기고 만족할지는 모른다.
그러나 정작 실재가 현실에서 얻는 각 내용과 일치한다면
정작 왜 그런 실재내용을 놓고 각 감관이나 각 상황마다 그런 모습을 얻는가
이런 문제가 여전히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런 경우에는 실재는 자신이 눈으로 본 사과 모습과 같은 것이라고 해야 하는데 왜 정작 그에 손을 갖다 대면 그런 실재와는 전혀 엉뚱한 촉감을 얻는가하는 문제가 여전히 나타난다.
그리고 각 감관을 통해 얻는 각 내용을 모두 종합시켜 놓아도 그 사정은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자신이 대하는 것은 시각과 청각 후각 미각 촉각내용을 모두 종합시킨 어떤 것이라고 주장해도 앞의 문제는 여전히 남게 된다. 그리고 이 경우는 왜 그런 종합적인 그런 내용을 대해 왜 매번 각 감관마다 있고 없음을 비롯해 각 내용이 서로 달라지는가가 다 함께 문제된다. 예를 들어 귀로 대하면 내용이 없다고 해야 하는 어떤 실재가 왜 눈으로 대하면 또 없음이 있음으로 바뀌는가 이런 문제다.
그리고 더 나아가 다른 주체 특히 인간과 감관 사정이 많이 차이나는 곤충이나 방울뱀 박쥐 이런 각 생명마다
제각각 달리 얻는 내용까지 여기에 모두 겹쳐 놓으면 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더 해결되기 힘든 상태가 된다.
예를 들어 한 상태에서 개는 저렇게 냄새 맡고 반응하는데 왜 사람은 이 상태에서 그런 내용을 얻지 못하고 그래서 없다고 여기게 되는가.
이런 문제가 여기서 나타난다.
그것은 반대로 사람의 입장에서
자신이 얻는 현실 내용을 그대로 실재 영역에 있는 실다운 내용이라고 밀어 넣을 때도 마찬가지로 발생한다
일정한 촉감을 얻게 되는 경험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또 이는 자신만 그런 것이 아니고 자신과 비슷한 영희나 철수도 같은 내용을 보고하고 그것은 지금만 그런 것이 아니고 과거나 미래도 비슷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실답지 않는 현실 내용을 실답다고 여기면서 그런 생사현실에서 각 중생이 특히 축생 아귀 지옥과 같은 3 악도에서 극심한 생사고통을 무량하게 겪어 나간다는 내용과 관련된다.
즉 쉽게 생각해서 축생이 매 순간 겪는 두려움과 고통은 하나의 개 돼지 소만 그렇게 겪는 것이 아니고 수많은 축생이 그런 상황에서 그렇게 겪는 것이고 그것은 지금만 그런 것이 아니고 과거에서 먼 미래까지 그 상황이 이와 같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것이 생사현실의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대단히 반복해서 각 주체가 겪는 이런 생사고통이 공하여 실답지 않다는 의미는 앞의 상황을 놓고 다음과 같이 비유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한 주체가 사과 하나를 놓고 손으로 만질 때 촉감을 얻는 경험을 반복하는데 그런데 그 상황에서 눈으로 본 사과모습 안에서 그 촉감을 찾으면 찾아지는가. 그렇지 않다.
그런데 매번 그런 촉감을 얻을 수 없는 사과모습을 눈으로 보면서 그 부분에 손을 대는 모습을 보는 상태에서는 그런 촉감을 얻는 경험을 수없이 반복해 겪는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얻는 촉감을 아무리 그렇게 수없이 반복해 얻는다 해도 그 사과모습을 놓고 그 촉감을 그 안에서 얻을 수 있는가를 살피면 그 촉감은 눈으로 보는 내용에서는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이는 마치 침대에 누어서 꾼 바다나 황금꿈처럼
하나같이 실답지 않는 내용이라고 해야 한다.
즉 사과의 모습을 대해서 촉감을 얻는 관계는 그 관계자체가 엉뚱한 내용을 대해 엉뚱한 내용을 얻는 것으로서 마치 침대에 누어 바다나 황금꿈을 얻은 관계와 마찬가지여서 그런 내용을 아무리 수없이 반복해도 그로 인해 그 촉감이 그처럼 눈으로 본 사과모습에서 찾아지지 않고 따라서 그런 사과모습과의 관계에서 그 촉감은 실다운 내용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한편, 다시 이 내용을 자세히 살핀다면, 눈으로 보는 그 사과모습은 시각정보이고 손으로 얻는 그 촉감은 촉각정보인 것이다. 그래서 시각정보를 통해 촉각정보를 얻는 것도 아니다.
이는 설령 어떤 이가 그런 사과모습을 눈으로 보지 않는 상태에서 손으로 만지더라도 그런 촉감을 계속 얻는다는 사정을 통해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 경우 자신이 눈으로 본 그 모습이 촉감을 얻게 한 대상이 아니라는 사정을 이해하게 되지만, 그렇다 해도 앞과 같은 망집을 일으킨 입장에서는 자신이 눈으로 본 모습을 여전히 본 바탕인 실재 영역에 그대로 밀어 넣고 실재에 그런 내용이 실답게 있어서 이를 대상으로 그런 시각정보를 얻는다고 이해하고자 하기 쉽다.
그것은 자신이 현실에서 얻는 그런 내용과 자신이 이해한 그 관계를 그대로 실재영역에 밀어 넣고 이를 이해하고자 고집하는 입장이다.
그 경우는 앞에서 본 문제가 다시 일어난다. 즉, 이 경우 실재는 자신이 눈으로 본 사과 모습과 같은 것이 그대로 있고 그런 실재를 손이 대해서 촉감을 얻는다고 보는 그 관계나 그런 현실 내용도 역시 실재에 그대로 있다는 주장이 되는데 그렇게 놓고 보면 그런 사과모습에 해당하는 실재를 대해서 얻게 된 그런 촉감이 엉터리인 것은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결국 이들 내용은 역시 침대에 누어 꾼 바다나 황금 꿈처럼 실답지 않다고 해야 되는 것이다.
이 경우 좀 더 망집을 고집하게 되면 이제 그런 시각정보는 그런 실재로서 그런 모습을 상대해 얻고 그런 촉각정보는 그런 실재로서 그런 촉감내용을 상대해 얻는다고 새로 고집을 일으킬 수도 있다. 그래서 결국 현실에서 얻는 내용은 그대로 실재에도 그 내용이 있다고 주장하고 고집할 수 있는데 이 경우도 마찬가지다. 현실에서는 사과 모습을 보면서 손을 대면 그 때 촉감을 얻는데 사정이 그렇다면 현실에서 보는 그런 상호 관계도 역시 실재에 그대로 있다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앞의 문제가 또 여기에도 나타나게 된다. 즉, 자신이 눈으로 본 모습과 같은 실재와 자신의 손으로 얻은 촉감과 같은 실재는 왜 서로 그런 관계를 갖는가가 문제된다.
그리고 현실에서 이들 상호관계를 앞처럼 이해하여 그들 내용이 실재영역에 각기 있더라도 자신은 자신의 손이 그 사과모습에 닿는 것을 보는 상태에서 그런 촉감을 얻는다고 이해하면 결국 엉뚱한 내용과 엉뚱한 내용이 서로 그런 관계를 갖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이는 결국 처음 a 라는 한 내용은 마치 침대에서 누어 꾼 황금이나 바다내용처럼 다른 내용과 엉뚱한 관계로 얻는 것인 한편, 그 내용은 다른 엉뚱한 부분에서는 역시 얻을 수 없는 것이어서 따라서 실다운 내용이 아님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앞과 같은 주장들은 단지 자신이 얻은 현실 내용을 실답다고 여기면서 현실에서 얻는 내용을 바탕으로 그런 주장을 내세우는 것일 뿐 그런 주장을 하는 이가 정말 실재영역에서 어떤 내용을 얻어서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자신의 생각에서 그렇게 망집을 일으키고 나서 그런 내용이 실재 영역에도 그대로 있다고 주장하는 것인데 설령 그런 주장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처음 현실에서 얻는 각 내용들에서 보게 되는 그 관계나 그 문제점은 여전히 있게 된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는 결국 각 내용이 다른 영역에서는 얻어지지 않아서 서로가 실답지 않은 엉뚱한 내용임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다만 그 주체가 그런 상태에서 엉뚱한 내용을 바탕으로 그런 엉뚱한 내용을
반복해 얻는다는 것만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현실에서 각 주체가 망집을 일으켜 현실에 임한 상황에서 겪어 나가는 생사현실의 사정이다.
본 바탕이나 다른 영역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어 그 내용이 실답지 않은데도 그러나 그 주체는 그런 상황 그런 조건에서 그런 실답지 않는 내용을 무량한 기간에 걸쳐 매 순간 대단히 생생하게 반복해 얻어가면서 실답지는 않지만, 그러나 대단히 생생하게 생사고통을 다양하게 겪어 나간다. 이런 의미다. 그리고 이것이 생사현실의 문제인 것이다.
이는 다음 문제다. 본 바탕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도 없다. (=> 그 일체가 공하고 실답지 않다. ) 그런데 이상하게 각 주체는 매 순간 생생하게 그런 실답지 않는 내용을 얻고 그에 바탕해 생사고통을 무한히 받아 나간다. 이 문제다.
그래서 본 바탕의 측면만을 놓고 이 생사현실의 문제를 살핀다면, 그런 본 바탕이 되는 실재 영역에서는 어떤 내용이 전혀 없다고 할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정작 생사현실에서 문제삼는 그런 생사고통을 얻을 수 없기에 그런 생사고통을 해결해야 한다거나 또 사정이 그렇기에 어떤 수행을 어떻게 하라거나 무엇을 하지 말라는 요구 자체를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측면에서 본 바탕은 본래 생사를 떠난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다.
본 바탕에서 그런 생사고통이나 온갖 생사현실의 문제를 얻을 수 없는데 무엇때문에 누가 본 바탕에서 그것을 문제삼겠는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생사고통이나 그 해결문제는 본 바탕에서 그것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다.
그처럼 본 바탕은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는데 그러나 현실에서 각 주체가 실답지 않은 그런 각 내용을 얻고 난 다음 그에 대해 망집을 일으키고 그런 바탕에서 그에 대해 집착하고 행위를 해가는 가운데 극심한 생사고통을 겪게 되는데 바로 이 부분에서 그런 생사고통을 겪는 것이고 그 해결이 문제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의 해결에 그렇게 실답게 있다고 여기는 그런 생사고통 역시 알고보면 본 바탕이 되는 실재나 다른 영역들에서는 하나같이 얻지 못하고 그 실재가 차별없이 공하여 마치 이들 내용은 꿈처럼 실답지 않은 것인데
생사현실안에서 이런 생사고통을 해결하려면 먼저 본 바탕의 사정이 그렇다라는 것을 먼저 잘 관하는 것이 요구된다는 의미다.
그런데 그렇게 관하고 임해서 그것만으로 쉽게 해결되는 부분이 있는가하면 단순히 그렇게 관하고 임한다고 해서 쉽게 해결되지 않는 생사현실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앞에서 구체적 사례를 통해 제시한 내용들과 같은 현실 내용들이다.
즉 자신이 큰 불만이 없이 평안하게 있을 때는 그런 내용이 실답다고 하던 실답지 않다고 하던 별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 경우는 왕마저도 수행자와 별 차별없이 모두 다 성인처럼 임할 수 있고 지낼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경우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3 계 6 도의 다양한 세계에서도 오직 하늘로만 구성된 색계나 무색계에서는 이와 마찬가지로 세계가 공하다고 하던 그렇지 않다고 하던 별 문제가 없다고 이를 대하게 되기 쉽다. 왜냐하면 이 경우는 생사현실에서 겪는 고통이 상대적으로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세계에서는 수행을 할 필요성도 별로 느끼지 못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상태에서는 그냥 그 상태로 계속 있으면 되지 무엇때문에 계, 정, 혜 3 학을 힘들게 닦고 중생제도와 성불을 하기 위한 무량한 수행을 해야 하는가. 이런 의문을 갖게도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경우는 심지어 왕마저도 수행자와 차별없이 평안하게 임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주변의 모든 이들이 자신의 뜻을 맞추어주고 자신이 희망하는 것들이 대부분 쉽게 충족되고 그래서 자신이 고통을 받지 않는데 왜 고통을 문제삼고 수행을 해야 할 것인가. 이런 의문을 갖게 된다는 의미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왕도 결국 생사고통에서 자유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앞에서 살핀 것과 같이 각 주체가 고통을 당하는 상태에 직면한 때부터는 그 문제가 달라진다. 그래서 이처럼 극심한 고통과 공포를 당장 겪게 되는 그 상황에서는 왕과 수행자의 입장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부분을 잘 해결해야 비로소 3 계 6 도의 상황에서 모든 생사고통을 벗어난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극심한 생사고통을 직접 당장 겪는 그 상황에서는 그런 현실 일체가 공하다고 관하고 일정한 수행을 하는 경우와 하지 않는 경우에서 그 차이가 극심하게 된다.
그것은 실재가 차별없이 공하고 현실일체가 꿈처럼 실답지 않은데 그러나 그런 실답지 않은 그런 현실이 정작 꿈은 아니고, 꿈과는 달라서 대단히 생생하게 다수주체에게 무량한 기간 극심한 생사고통을 주면서 반복되기에 그렇다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이런 현실일체가 차별없이 공하고 실답지 않다는 것은
이미 본 것처럼 본 바탕이라고할 실재가 전혀 아무것도 없다[무]를 나타내는 표현도 아니고 그런 현실이 전혀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도 아니다.
본 바탕인 실재가 전혀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어떤 주체가 그 내용을 직접 얻을 수 없어서 이를 공하다고 표현하고
또 현실 내용은 현실내용대로 그 내용을 생생하게 얻지만, 그런 본 바탕이 되는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도 아니고, 실재 영역에서도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는 것이기에 그것을 실답지 않다고 표현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생사고통의 문제는
결국 그런 내용을 본래 얻을 수 없는 실재영역에서 있어서 제기되는 문제가 아니고 실재에서는 그 본 바탕이 공하여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고 실답지 않은데도
한 주체가 실답지 않은 생사현실에 처해 현실 내용을 대하는 가운데 망집을 바탕으로 그 사정을 관하지 못하고 그것이 실답다고 여기면서
그런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하여 3 악도에 들어가 그런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받아나는 것이 바로 생사현실의 문제인 것이어서 바로 이 생사현실 영역에서 그 해결이 문제되는 것이다.
따라서 생사현실에 처한 입장에서는 기본적으로 이런 사정을 잘 관하고 그런 바탕에서 현실에서 수행을 원만히 성취하는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제 이런 상태에서 이처럼 생사현실에서 겪는 생사고통을 그 본 바탕이 차별없이 공하다는 내용만으로 극복하려고 할 때 어려움을 느끼게 되는 부분은 그 생사현실에서 평안하고 좋음을 느끼는 상태가 아니고 대단히 고통스런 상황이 문제가 된다. 이 내용을 앞에서 보았다.
즉 생사현실의 문제는 모든 것이 자신의 뜻처럼 잘 이뤄질 때가 문제가 아니고
자신의 손과 발이 잘려지고 피가 흐르고 자신은 줄에 묶여 거꾸로 매달리는 등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는 상황에서 앞의 내용이 과연 어느 정도 도움이 되는가가 문제인 것이다.
앞의 측면만 강조하다보면 그런 상태에서도 본 바탕에서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기에 그런 사정만 관하면 그런 내용이 하등 문제가 되지 않고 어떤 고통도 받지 않게 된다면, 대단히 좋을 것인데 유감스럽게도 망집을 일으켜 임하는 일반적인 경우 대부분 그렇지 않다.
그런데 원칙적으로는 이런 상태에서도 그런 사정을 잘 관해서 그런 상태에서도 이를 잘 극복하고 벗어나는 것이 원칙적인 수행 방안이기도 한 것이다.
문제는 그런 사정을 이론상 대단히 잘 이해하고 대단히 오래 수행을 한 경우에도 자신의 손과 발을 톱으로 자르고 거꾸로 매달리거나 하면 그런 내용만으로 그런 고통을 쉽게 극복하지 못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사현실의 문제이기도 하다.
즉, 자신이 설령 색즉시공 공즉시색 일체개공 이런 내용을 잘 이해하고 현실이 그러함을 인정한다고 해서 위와 같은 상황에서 평안하게 임할 수 있는가를 놓고 스스로 실험을 해보면 자신의 수행상태가 어떤 정도인가를 스스로 잘 파악할 수 있다. 손발을 자르는 것은 그만두고라도 단순히 손톱만 조금 잘라 뽑는 경우에서도 기겁을 하게 되기 마련이다. 그외 나머지는 다 마찬가지다.
그래서 경전에서 원칙적으로 제시하는 방안 즉 이처럼 고통을 극심하게 받는 상황에서 상을 취하지 않는 가운데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제거하여 평안히 임하고 참는 안인수행을 통해 극복해 벗어난다는 원칙적인 방안은 일반적으로 대단히 수행을 오래 닦아 불퇴전위에 이른 상태가 아니면 성취하기 힘든 상태가 된다.
그런 사정으로 극심한 고통을 당장 받는 상태에서 그런 생사고통은 본 바탕에서 얻을 수 없고 그 본 바탕인 실재가 차별없이 공하고, 그런 생사고통을 겪는 현실이 실답지 않다는 것만을 관해
그 생사고통을 극복해 벗어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기대하기 곤란하다.
이런 가운데 이처럼 매 순간 생생하게 겪게 되는 생사고통을 수행을 행하지 않고 벗어나고자 하는 것은
자신의 기존의 망집을 그대로 붙들고 이에 바탕해 자신이 평소 좋다고 여기고 대하는 것을 집착해 아끼고 베풀지 않고 [=계의 항목에 포함되는 보시의 수행덕목을 행하지 않고]
또 한편 자신의 좋음을 얻는 것을 집착해 다른 생명이 집착하는 좋음을 함부로 침해하고 [=정계 수행덕목을 행하지 않고]
한편 자신의 좋음을 다른 생명이 침해할 때는 불같이 분노를 일으키고
상대에 대한 미움과 원망을 바탕으로 그에 대한 보복과 가해를 하면서 [=안인의 수행덕목을 행하지 않고]
매 순간 꾸준히 그처럼 현실에 임하고자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렇게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하게 되면, 생사현실이 비록 실답지 않다고 하지만, 그러나 정작 꿈은 아니어서 그것이 비록 실답지 않다고 해도, 탐욕에 바탕해 아끼며 베풀지 않고 임한 경우는 결국 아귀세계에 처하게 되고 분노에 다른 생명을 함부로 해치고 임한 경우는 결국 지옥세계에 처하게 되고 어리석은 망집에 바탕해 임한 경우는 결국 축생세계에 처하게 된다.
그래서 결국 그런 상태에 처하여 이와 같은 아귀 지옥 축생세계가 근본 바탕에서는 다른 상태와 차별없이 공하고 실답지 않다는 사정만을 관하여 그 생사고통을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된다.
물론 이런 3 악도의 세계 또한 본 바탕에서 얻을 수 없고 그 실재는 차별없이 공한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그러나 그런 세계 현실이 정작 꿈은 아니어서 대단히 생생하게 다양한 형태로 무량한 고통을 장구하게 받아나가는 상태인 것이어서 그런 상태에서 단지 그런 고통이 실답지 않다는 것만을 관해
그 생사고통을 극복해 벗어나고자 하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그것이 말처럼 가능하다면, 지금 현실에서도 톱으로 손을 자르는 상태에서도 그런 내용을 관하는 것만으로 그 상태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한편 그런 상태에서 그런 수행마저도 어렵다고 여겨 그런 상태에 빠졌다는 것은 그 자체가 그런 주체가 그런 수행 정도에 이르지 못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 그것이 비록 가능하다해도 중생제도에 불필요하고 도움이 되지 않는데 굳이 일부로 자신이 그러한 생사고통을 무익하게 받는 상태에 처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차피 다 차별없이 공한 가운데
왜 굳이 하필이면 그 주체가 그런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겪는 상태에 처하게 되는 것인가 그 사정을 살피면
그 주체가 결국 어차피 다 차별없이 공하다고 하면서도 오히려 기존의 망집에 바탕해 현실에 자신이 생각하는 내용이 실답게 여기면서 집착을 갖고 임하기에
하필이면 수행방안으로 제시하는 내용을 행하기 어렵게 여기면서 그것을 행하지 않고 수행을 원만히 성취하지 못하는 한편,
또 한편 그런 망상분별과 집착에 바탕해 좋음은 아끼고 베풀지 않고
나쁨에 대해서는 분노를 일으키고 그에 상응한 보복과 가해를 하려고 임하고
세계나 자신의 본 정체와 그 인과를 올바로 관하지 못하고 망상분별과 사견에 묶여서
업을 행하여, 그처럼 망집을 일으켜 업을 행하는 이들끼리 서로 가해와 피해를 주고받는 업의 장애를 일으키고 그에 얽히고 그런 상태에 묶여 생사고통을 받아나가게 된 것이다.
처음 그 일체가 차별없이 공하다는 사정을 잘 이해하고 관한다고 해도 수행을 통해 안인을 원만히 성취하고 무생법인을 증득하고 불퇴전위에 오른 상태가 아니면 단순히 그런 사정을 관하는 것만으로는 현실에서 당면한 고통을 쉽게 극복해 벗어나지 못하는 사정을 이미 앞에서 살폈다.
그런데 일체가 차별없이 공하다는 사정 자체를 관하지 못하거나 비록 그런 사정을 관하더라도 이를 통해 끝내 기존에 가졌던 망집을 제거하지 못하여 그런 수행을 도무지 행하기 힘들다고 여기고 수행을 성취하지 못한 어떤 주체가
극심하게 생사고통을 받는 상황에서만 유독 그 일체가 차별없이 공하다는 사정을 잘 관해 그 고통을 벗어난다는 것은 더더욱 기대하기 힘들다.
따라서
처음 일체가 공하다는 것을 관하고 이를 바탕으로 당면한 고통을 안인으로 극복해내지 못하는 초보 수행자의 상태에서는
한편으로는 그런 생사고통 현실을 놓고 원칙적으로 그 실상이 공함을 관하고 그런 현실에 대해 상을 취하지 않는 가운데 안인을 통해 그처럼 억울한 고통을 극복해 내는 수행을 정진해 닦는 한편,
불필요하게 업의 장애를 만들어 자신이 극복하지 못하고 수행이전 상태로 바로 물러나게 만드는 극심한 생사고통을 겪지 않도록 미리 망집에 바탕한 업을 중단하고 끊어 내고 대신 그런 업의 장애를 제거해내는 계에 해당하는 보시, 정계, 안인 정진의 수행덕목을 닦아 원만히 성취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필요하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을 생사에 묶이게 만드는 업의 장애가 제거하고 이후 수행에 더 정진하여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게 되면
이후 다른 중생을 제도하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함에 필요한 복덕자량과 지혜자량을 쌓기 위해서 중생이 생사를 받는 생사현실에 임해서 다시 계, 정, 혜의 수행방안 즉 보시 정계 안인 정진 정려 반야, 방편, 원, 력, 지의 수행덕목을 골고루 다시 닦아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설령 자신이 안인을 성취하여
극심한 생사고통을 평안하게 대할 수 있고 더이상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하던 이전 상태로 다시 물러나지 않게 된 불퇴전의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고 해도
어차피 이런 경우나 저런 경우나 다 차별없이 공하고 실답지 않은데
하필이면 다른 중생에게 좋음을 베풀지 않고 해치고 괴롭히고
그리고 자신이 고통을 받을 때마다 분노를 일으키고 보복을 가하면서
그런 업으로 중생제도와 성불에 불필요한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받는
3 악도의 상태에 굳이 묶여 들어가 임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경우에도 앞과 같은 계, 정, 혜의 수행방안을 닦고 역시 선교 방편을 통해서 중생을 제도해나가는 것이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다르지 않다.
결국 일체가 다 차별없이 공하고 현실이 실답지 않다고 함에도 생사현실에 임해서 아무렇게 행하거나 아무 것도 행하지 않아도 무방한 것이 아니고
일반적으로 망집에 바탕해 일으킨 소원을 집착해 추구하는 노력을 모두 제거하고 중지하는 한편, 수많은 현실 내용 가운데 하필이면 앞에 제시한 것과 같은 수행방안만 선택해
이를 정진해 닦아 나가야 함을 의미한다.
그것은 다음 사정 때문이다.
이미 앞에서 본 것처럼 그런 생사현실 일체가 차별없이 공하다는 것은 본 바탕이 되는 실재가 전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또 생사현실이 전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역시 아니다.
그리고 비록 생사현실이 본 바탕이 차별없이 공하고
꿈처럼 실답지 않다고 해도 정작 현실은 꿈은 아니어서 한 주체가 행한 업은 무량한 기간에 걸쳐 소멸되지 않고 다수주체에게 무량한 기간 극심한 생사고통을 주면서 반복되기에
비록 실답지 않지만, 꿈과는 다른 이 생사현실의 내용을 그냥 방치하지 않고 다시 생사고통을 받는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자비의 마음을 일으켜
생사현실 즉 청정한 니르바나임을 관하여 이런 생사현실에서 들어가 청정한 니르바나의 본 상태에 상응하게 여여하게 임하는 한편,
그 생사현실내용도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복덕과 지혜가 구족한 좋고 좋은 상태로 만들기 위해
그렇다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사정에서는
먼저 이들 현실의 본 바탕이 차별없이 공하다는 사정을 잘 관하여
원칙적으로 그런 생사고통을 받게 하는 업을 잘 중지하여 끊어 내고
반대로 일반적인 망집상태에서는 매 순간 도저히 행하기 힘들다고 보는 수행도 그런 내용을 본래 얻을 수 없음을 잘 관하여 수행에 정진하고 그런 바탕에서 더욱더 수행을 정진하여 극심한 생사고통을 당면해 받는 상황에서도 상을 취하지 않고 평안히 임하여 안인수행까지 원만히 성취해내면,
이후 어떤 생사고통에서도 물러나지 않는 불퇴전 위에 이르게 되고
이후 그런 상태에서는 다시 중생제도를 위한 무량한 방편지혜를 닦아 생사현실 어느 상황에서도 자재하게 중생을 제도해 나갈 수 있도록
수행을 정진해 나가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이는 결국 본 바탕의 측면에서는 기본적으로 청정한 니르바나를 확보하는 한편
생사현실의 측면에서는 중생제도를 위해 자비심을 바탕으로
무량한 복덕과 지혜자량을 구족하여
중생을 제도하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하는 수행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어차피 차별없이 공한 실재를 바탕으로
생사현실 내용까지 모두 좋고 좋게 만드는 동가홍상의 방안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에 이런 내용을 살핀 적이 있는데
이번에 계율내용이 나온 것을 계기로
다시 한번 이들 내용을 이처럼 살피고
글을 마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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