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과문제는 현실 내용을 설명하는 방안이다. 현실에서는 평소 너무 자주 반복해서 당연하다고 여기면 당연하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그러나 왜 하필 그것이 그렇게 되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하면 대단히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볼 수 있는 일들을 끊임없이 대한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 다양한 개념들이 논서에서 낯선 표현으로 제시되고 있다.
쉽게 생각하면 이런 문제다.
살다보면 그전까지 보지 못한 어떤 것이 새로 보이는 경우가 있다. 화단에 장미꽃이 어제까지는 없었는데 오늘 보니 장미꽃이 피어 있다.
이런 경우 당연히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왜 없던 것이 있게 되었는가. 이런 의문이다.
그런데 화단을 만든 벽돌을 보니 어제도 있었는데 오늘도 보인다. 이런 경우는 다음 의문이 생긴다. 왜 저 벽돌은 그런데 그대로 있는가. 이는 왜 있던 것이 계속 있는가 이런 의문이다.
그런데 또 오래 전에 화단에 버린 음식을 보니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 이런 경우는 다음 의문이 생긴다. 왜 있던 음식이 지금은 썩어 사라져버렸나. 즉 왜 있던 것이 이제는 없게 되었나 이런 의문이다.
만일 이 상황에서 다시 다음과 같은 조금 엉뚱한 의문도 함께 가질 수도 있다. 자신이 화단에 나무를 심은 것은 금이 열리기를 바란 것이다. 그런데 금을 찾아보니 어제도 없고 오늘도 없다. 그래서 왜 화단에서 금은 나오지 않는가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이는 왜 없던 어떤 것이 계속 없는가 이런 의문이다.
이들 내용은 하나하나 다 당연한 내용으로 보면 당연하다고 여길 수 있는데 그러나 이 가운데 어느 하나를 당연한 내용으로 여긴다면 일단 다른 내용들은 다 이와 다른 이상한 내용이라고 해야 한다. 그러니 설명을 해야 할 필요가 생긴다.
즉 무언가가 없다가 있게 되는 현상 즉 생한다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면, 나머지는 다 이상한 일이다.
또 반대로 한 번 있었던 것은 계속 있는 것이 당연하다면 또 나머지는 다 이상한 일이다.
예를 들어 평생 잘 변하지 않는 금반지만 계속 대하던 입장은 한번 있는 것은 늘 그렇게 있는 것이라고 여기기 쉽다. 그런데 어떤 음식을 보면 그렇지 않다. 그러니 이것은 왜 곧바로 썩어 없어지는가. 이런 의문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늘 음식만 취급하던 이는 어떤 것이 있더라도 곧 없어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데 반대로 금과 같은 것은 왜 그렇지 않은가. 이런 의문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의문을 가질 때 이 설명을 해야 한다고 보게 된다.
사실 이 내용은 망집 상태에 있는 이들이 갖는 생각이나 의문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 경전의 본 입장은 이런 현실에 각 주체가 있다고 여기는 그런 주체나 물건이나 그것들의 생멸 생사나 오고감이나 동작 작용 변화 등등을 본래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는 입장이다.
그런데 이렇게 제시하면 앞과 같은 내용을 현실에서 각기 당연한 내용으로 대하던 입장에서는 대단히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라고 여기게 된다.
그래서 이런 경우는 차선책을 택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엉뚱하지만, 엉뚱한 내용을 그 사정으로 제시하면 이제는 수긍하게 된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왜 지금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가.
누군가 이렇게 물을 때 그 소리는 철수가 방금 컵을 떨어뜨려서 그렇다. 이렇게 제시하면 고개를 끄덕인다는 의미다.
그런데 철수와 컵을 아무리 보아도 소리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 관계는 냉정하게 생각하면 대단히 서로 엉뚱한 것이다. 마치 손바닥을 부딪히면 소리가 난다고 설명하는 것과 같다. 손바닥을 부딪히면 소리가 나는데 그 손바닥을 바라보면 소리는 얻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손바닥이라고 여기고 대하는 그 모습과 자신이 들은 소리는 대단히 서로 엉뚱한 내용들인 것이다.
처음 소리가 날 때 왜 소리가 나는가가 궁금하였는데 그런데 이런 경우 그것과는 대단히 엉뚱한 내용인 컵이나 손바닥을 제시하면 이제 소리가 난 것에 대해서 처음에 가졌던 궁금함을 해소하고 만족해하게 된다는 의미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처음 문제삼은 내용과는 엉뚱한 내용을 그 이유나 사정으로 제시한 것을 놓고 왜 그런 내용에 만족하게 되는가가 문제다.
거기에는 사연이 있다. 그가 망집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망집상태에서 그런 관계를 그런 형태로 대단히 '반복'해 대한다는 것이 그 사정이라면 사정이다.
조금 더 이 문제를 살피면 그런 내용이나 관계가 대단히 엉뚱해도 사정이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그에 대단히 실다운 무언가가 있어서 그렇다라고도 망집을 증폭시켜 나가게끔 되기 쉽다.
그리고 그런 망집으로 인해 이후 그가 생사현실에서 생사고통을 겪게 되는 것이다.
이 망집이 그 주체에게 아무런 고통을 주지 않게 된다면 큰 문제가 아니라고 할 수도 있는데 사정이 그렇지 않기에 우선 근본적으로 그 망집을 벗어나야 한다고 보게 된다.
그래서 현실에서 자신이 a 라고 보는 주체나 대상도 얻을 수 없고 그 a 의 생멸이나 생사, 왕래, 동작 등도 얻을 수 없음을 잘 이해해야 한다. 예를 들어 반야심경에서 제시하는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이런 사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
본래 현실사정이 이러하여 문제삼는 어떤 것을 얻을 수도 없고 그것의 생멸도 역시 얻을 수 없는데 그런 바탕에서 어떤 것이 생겨나고 멸하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문제삼을 수 있겠는가. 본래는 그렇지 않다고 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사정을 잘 관해서 그가 망집을 바탕해 겪는 당면한 고통을 벗어날 수 있으면 대단히 바람직한데 대부분 처음 수행하는 입장에서는 이것이 쉽게 되지 않는다.
즉 경전에서 제시하는 것처럼 현실을 그 실상을 꿰뚫어 넒고 길고 깊게 관하여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게 하는 지혜 즉 반야바라밀다를 닦아 [행심반야바라밀다] 세상 일체가 공하다는 것을 관하고[조견오온개공] 그로 인해 곧바로 일체고액을 쉭 벗어날 수 있으면 [도일체고액] 대단히 바람직한데 일반적으로 곧바로 그것이 쉽게 되지 않는다.
어떤 이가 비록 일체가 공함을 잘 관해도 당장 손발이 잘려나가는 그런 상태에 처하면 극심한 고통과 함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받기 마련이다.
또 한편 비록 일체가 공함을 잘 관해도 3 악도에 묶여 끌려들어갈 업을 이미 많이 쌓은 경우 그것만으로 지옥 아귀 축생세계와 같은 3 악도에 처하는 것을 벗어나기 힘들다.
일체가 차별없이 공하고 꿈처럼 실답지 않음은 평안하고 안락한 그런 상황만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극심한 고통의 상태도 모두 차별없이 그러함을 의미하는데 그처럼 업의 장애가 제거되지 않은 경우는 매번 극심한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에 처해서 그 상태가 차별없이 공함을 관하여 이를 극복해 나와야 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평소 당장 손발이 잘려 나가는 상황에서 공을 관함을 통해 고통을 잘 벗어나지 못하듯, 그런 상황에 처해서도 상황이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런 고통을 받게끔 만드는 업의 장애를 예방하고 제거할 수행도 평소 망집에 묶여 행하기 어렵다고 여기는 한편, 공함을 관하여 무소득을 방편으로 평소 수행을 원만히 잘 행하지 못했던 것처럼 당장 고통을 받아나가야 하는 상태에 처하면 역시 마찬가지로 그 일체가 공하고 실답지 않음을 관하는 것만으로 그 고통을 극복해 벗어나기 힘들다.
그래서 어떤 이가 업의 장래를 제거하지 못하여 극심한 고통을 받는 3 악도에 처하면
매 순간 당면하는 고통을 그런 원칙적인 방안으로 해결함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따라서 이런 상태에서는 그런 실상에 대한 깨달음도 필요하지만, 그 이전에 또는 그런 깨달음을 얻은 이후에도 3 악도에 묶이게 하는 업의 장애를 제거하는 기본적 수행을 잘 성취해서 그런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일단 벗어나야 한다. 그것이 계의 항목에 들어가는 보시, 정계, 안인, 정진의 항목이다.
간단히 말하면 현실에서 대부분 자신의 생명, 신체, 재산, 가족, 명예...등 자신이 평소 좋다고 보는 것이 그처럼 있다고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그에 집착을 일으키고 현실을 대한다.
그리고 그처럼 현실에 임하는 것은 유독 자신만 그런 것이 아니고 그런 망집을 일으킨 주체는 대부분 그렇게 임한다.
그래서 그처럼 제각각 망집을 일으켜 임할 때 어떤 이가 어떤 좋음을 갈구할 때 다른 이들도 그것을 집착하며 대단히 아끼고 베풀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이런 경우와 같다. 자신이나 자신의 부인이나 아이가 몸이 아파 응급치료를 받아야 살 수 있는데 병원에 가니 치료비가 없으면 치료해줄 수 없다. 이렇게 임한다. 그래서 치료비를 빌리려고 여기저기 도움을 요청하니 다 핑계만 대고 아무도 돈을 빌려주지 않는다. 그런 사이에 자신이나 부인이나 아이가 결국 사망하거나 대단히 큰 고통을 겪고 오랜 기간 그 후유증과 장애를 겪게 되었다고 하자.
그 이후 그가 그런 이들을 어떻게 대하게끔 되는가. 이것이 문제다.
어떻게 보면 세상이 원래 남의 일에는 무관심한 것이어서 원래 그런 것이므로 별 일이 아니라고 넘길 수도 있는데 그러나 당사자는 이후 이를 평생 잊지 않고 미움과 원망과 한을 품고 이후 그 상태로 죽 임하게 된다.
그런데 이것이 다른 주체의 입장에서는 그 내용이 그런 형태로 비축되고 보관저장된 상태가 된다. 그리고 이것이 결국 그렇게 임한 입장에게는 그가 과거에 쌓은 업의 장애의 하나가 된다. 즉 그 다른 주체 입장에서는 그 입장대로 자신이 좋음을 얻기를 바라며 그렇게 노력하고 추구하는 것인데 어떤 상황에 처해 정작 그런 뜻대로 되지 못하고 뜻과 달리 어떤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되는 그 사정을 살펴보면 그가 과거에 다른 생명을 대할 때 그처럼 임하여 쌓은 업의 장애 때문에 그러함을 보게 된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살다보니 그가 어느날 입장이 바뀌어서 등산을 가 실수로 절벽에 떨어진 상태가 되었다. 그래서 하루 종일 도와달라고 소리를 질렀는데 한 사람이 이를 듣고 자신을 바라본다. 그런데 그가 보고 그냥 간다. 또는 구해주려면 밧줄이 필요하니 혹시 갖고 있는 밧줄을 자신에게 던져주면 구해주겠다고 말하며 가만히 있다. 그래서 구조를 끝내 받지 못하고 그 상태로 죽게 되었는데 그 상태에서 그 상대가 누군인가 생각해보니 바로 과거에 자신이 그렇게 상대한 앞 사람이었다. 이런 내용인 것이다.
드라마나 영화 같은 이런 일이 없어야 하는데 그러나 넓고 길고 깊게 보면 한번 행한 업은 사라지지 않고 그 과보를 받고 씨를 뿌린 이들은 그런 열매를 나중에 거두게 된다. 이렇게 제시하게 된다. [ 탐욕을 바탕으로 인색하고 '보시'의 수행덕목을 행하지 않은 업의 장애]
나머지도 마찬가지다. 대부분 자신의 생명, 신체, 가족, 명예, 등등 좋다고 여기는 것을 집착하는데 그런데 자신은 그런 것을 얻기 위해 거꾸로 다른 생명이 집착하는 것을 함부로 해치고 나쁨을 주는 행위를 매 순간 반복한다.
예를 들면 자신의 몸에 좋다거나 맛있는 식사를 위해 매끼마다 닭이나 오리나 소 돼지를 잡아 먹는다. 비록 직접 죽이지 않더라도 그런 취지로 그런 식품을 구하는 이에게 팔기 위해 죽임을 당한 축생의 고기를 먹는다. 이런 경우가 그런 사례다.
그런데 자신은 이를 자신의 생존과 즐거운 맛을 위해 불가피한 일들로 여긴다.
그런데 이는 세상에서 유독 자신만 그런 것이 아니고 대부분 망집에 빠져 임하는 생명상태가 다 그러하다.
그런 사정으로 자신도 그렇게 현실에 임하는 다른 주체들로 인해 어느 순간 그런 피해를 당하는 사례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느날 돌아보니 자신의 집에 강도가 들어와 가족 대부분을 살해하고 금품을 다 가져가고 부인은 감금하고 협박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후 범인은 부인마저 끝내 살해하고 증거를 없애고 도망갔는데 이후 어떻게 어떻게 해서 그 범인이 누구인지를 알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에게 묻고 따지니 자신은 그런 일이 없다며 거짓말까지 하며 오히려 거꾸로 자신을 무고죄로 고발한다.
그런데 세상을 살다보면 이런 경우가 대단히 많다. 갑자기 이 부분에서 공연히 이웃나라 수상을 떠올릴 수도 있는데 역사를 살피면 이런 사례가 대단히 많음을 쉽게 보게 될 것이다.
어떤 이들이 이웃 나라를 침략하면 대부분 그 나라에서 법으로 금지하는 행위를 집단적으로 함께 행하고 나중에는 그런 일을 누가 언제 했는가 하며 시치미를 떼고 오히려 그처럼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을 감옥에 가두거나 억누르고 다시 가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알고보면 이런 경우는 대단히 억울한 상황인데 이상하게 그런 상황에 자신이 처해 거꾸로 갇혀 고통을 받게 된 것이다. 이 대목에서 유** 누님이 생각난다는 경우도 있지만, 역사 현장에서는 대단히 많은 사례이기도 하다.
그런데 앞 사례처럼 자신이 강도를 당하고도 거꾸로 감옥에 들어간 이가 너무 궁금해서 잠깐 그 상대를 만나 묻기를 평소 잘 알지도 못하고 큰 원한도 없는 자신을 상대로 왜 그렇게 행했는가를 물어보았다고 하자.
그러자 그가 귓속말로 다음처럼 답했다고 한다. 당신은 그로 인해 극심한 고통을 당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 당시 그런 일이 대단히 좋았다. 대단히 큰 이익도 얻고 즐거운 맛도 얻었다. 그래서 그렇게 한 것 뿐이다. 이렇게 말해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상대가 그런 사정을 명확하게 말해주던 말해주지 않던간에 다른 이가 가해를 하는 사정은 대부분 그와 같은 사정 때문이다.
그리고 알고보면 자신이 평소 다른 물고기나 닭이나 오리를 괴롭히고 살해한 사정도 사실은 이와 마찬가지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런 상태에 처한 자신이 이후 어떻게 그 상대를 대하게 될 것인가. 이것이 문제다.
역시 마찬가지다. 원래 어떻게 보면 세상이 다 약육강식의 세계여서 힘이 센 이가 약한 이를 잡아서 괴롭히고 먹고 살아가는 것은 원래 세상이 그런 것이어서 별 일이 아니고 심지어 법정에서 명확하게 판단이 내려졌으니, 그것을 인정하고 잊고 지내거나, 또 한편 생각하면 자신도 평소 자신보다 약한 물고기나 짐승을 매끼마다 잡아 죽여서 먹고 산 것이므로 세상이 결국 공평하다고 여기고 잊고 평안히 지내야 할 듯한데
그러나 자신이 그렇게 피해를 당한 입장에서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고 이를 대단히 원통하고 억울한 일로 여기고 이후 평생 잊지 않고 가슴에 미움과 원망과 한을 품고 이를 보복할 때를 기다리며 억울함을 누르고 세상에 임하게 된다.
그런데 이것이 앞과 같은 일을 행한 그 상대의 입장에서는 그런 형태의 내용이 그처럼 비축되고 보관저장된 상태가 된다.
그리고 이것이 결국 그렇게 임한 입장에게는 그가 과거에 쌓아 놓은 업의 장애의 하나가 된다. [ 살도음망 등의 '정계(계율)'의 수행덕목을 실천하지 않은 업의 장애]
또 다음 사례도 마찬가지다.
앞처럼 망집 상태에서 좋음을 얻기 위해
다른 생명이 집착하는 것을 함부로 침해하던 이도 거꾸로 자신이 그런 침해를 당하면 상대에 극심한 분노를 일으키고 미움과 원망을 갖고
보복하여 고통을 되돌려 주려하는 것이 거의 대부분이다.
그런데 어떤 이가 그런 침해를 당할 때 그 침해가 이 세상에서 최초로 자신을 상대로 대단히 억울하게 행해진 경우도 물론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어떤 경우는 앞의 사례의 연장선으로 상대가 자신이 당했던 피해를 되갚기 위해 그런 가해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여하튼 이 가해와 피해는 한 단면만 보면 단순한 가해와 피해의 관계지만, 자세히 살피면, 세상에 최초로 그렇게 발생한 가해관계는 오히려 드물고 무한한 기간에 걸쳐 다양한 주체간에 그리고 시간적으로 장구하게, 그리고 각 측면마다 대단히 복잡하게 가해와 피해가 중첩된 관계임을 대부분 보게 된다.
이것을 간단히 '가피' 중첩관계라고 줄여서 표현하는데 이는 반대로 무한히 이어져 나가는 이런 상태를 예방하고 벗어나려면 부처님과 보살님의 특별한 '가피(加被-자비 보살핌)'가 필요하다고 보는 입장에서 업의 장애를 만들어 내는 이런 가해와 피해의 중첩상태를 이처럼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하튼 이는 앞 내용과 관련되는데 그 상황을 이어서 살펴보자.
어떤 이가 자신의 좋음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마구 추구할 때 그런 상대로 인해 세계 최초로 대단히 억울하게 즉 자신이 그런 상대에게 어떤 가해를 한 적도 없는데도 아무 이유없이 전혀 억울하게 자신의 가족이 다 희생되고 재물을 빼앗기게 되었다고 해보자.
이후 그런 피해를 당한 이는 그런 가해를 한 상대를 대단히 증오하고 복수를 꾀하고 기회를 보고 지내다가 드디어 어느 날 그 기회를 만나게 되어 자신이 당한 고통에 상응하게 고통을 되돌려 주는 복수를 가한다고 하자.
이처럼 드라마나 영화의 단골 소재인 복수극이 펼쳐질 때 대부분 이를 정의의 실현이라고 여기고 이 부분에서 관객도 통쾌함을 느끼게 된다.
문제는 이렇게 행한 경우 그런 가해를 받는 상대가 문제된다.
이 경우도 마찬가지다. 원래 어떻게 보면 세상이 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이런 형태로 보복을 서로 주고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한편 피해자는 그 고통을 되갚기 전까지는
대단히 소심하게 이를 평생 잊지 않고 간직하고 임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상황이 바뀌면 이제 자신이 통쾌함을 느끼게 될 때까지 반복해서 다양한 형태로 보복을 가하게 된다.
그런데 가해자는 대부분 이후 이를 대범하게 잊고 지내고 그런 가운데 그런 보복을 당할 때는 정작 자신이 무슨 사정으로 그런 피해를 받게 되는지, 잘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또는 수많은 일들로 이런 일을 잊어 버리게 된 것이거나 치매와 같은 질병이나 사고 등으로 과거 일을 기억하지 못한 상태가 될 수도 있다.
사정이 이러므로 어떤 보복을 당하는 이는 비록 그 순간에 자신이 과거에 행한 업이 잘 생각나지 않더라도 이를 당연하고 공평한 일로 여기며 이를 인정하고 참고 평안히 받아들여야 할 듯한데 그러나 그 상대는 또 결코 그것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경우 대부분 앞에서 그런 보복을 행하는 입장이 처음 처한 상태와 거의 똑같은 형태로 임하게 된다.
즉 이를 놓고 자신이 세상 최초로 아무 연유없이 지극히 억울한 고통을 당한다고 여기며 이를 대하게 된다는 의미다.
그런데 세상 최초로 억울한 고통을 받고 이에 대해 보복을 가하는 경우도 그 상대가 이런 상태가 되기도 하지만, 서로 쉼없이 보복을 주고 받는 경우는 이보다 한층 사정이 더 심하게 된다.
그런데 이것이 앞처럼 자신이 어떤 보복을 하는 경우 그 상대의 입장에서는 거꾸로 그런 형태의 내용이 그처럼 비축되고 보관저장된 상태가 된다.
그리고 이것이 결국 그렇게 행한 이에게는 그가 과거에 쌓아 놓은 업의 장애의 하나가 또 된다 [ 억울한 고통에 대해 '안인' 수행덕목을 실천하지 않은 업의 장애]
결국 좋음(+)을 아끼고 베풀지 않거나 반대로 자신의 좋음을 추구하면서 다른 생명이 집착하는 좋음을 함부로 침해하며 나쁨(-)을 가하거나, 또 자신이 나쁨을 받을 때 이를 평안히 참지 않고 미움과 원망을 갖고 그 상대에게 나쁨(-)을 되돌려주고 보복하거나 이렇게 임하는 것은
이들 모든 내용이 그 주체 입장에서는 망집상태에서 집착하는 좋음(+)을 얻고 나쁨(-)을 제거하고자 하는 것이지만,
세상에서 유독 자신만 그렇게 임하지 않는 사정으로 이를 대하는 다른 입장에서는 하나같이 대단히 고통을 준 내용으로 보관저장되고 그런 사정으로 그런 행위를 한 주체의 업의 장애로 쌓이게 된다.
그런 사정으로 대부분 주체가 위와 같은 방식으로 좋은 상태가 되기를 원하고 노력하지만, 위와 같은 형태로 매순간 꾸준히 행해온 그 업 때문에 그 뜻과 달리 원하지 않는 3 악도에 묶이게 된다.
결국 일체가 차별없이 공하고 현실은 꿈과 같다고 제시하지만,
그 생사 현실은 정작 꿈은 아니어서 일정한 상황이 되면 각 주체가 대단히 생생하게 반복해 얻고 또 같은 형태로 무한한 기간에 걸쳐 얻어 나가고 또 자신만 얻는 것이 아니라 영희 철수를 포함해 다수가 얻고 또 그 내용도 대단히 다양한 형태로 생생하게 얻게 되는 것이어서 꿈과는 다르다. 그리고 그런 생사현실에서 위와 같은 업의 장애가 해소되지 않으면 결국 이 과보를 모두 그처럼 돌려 받아야 하는 것이 된다.
일체가 차별없이 공하다는 것은 바로 그런 과보를 돌려 받아 극심한 고통을 받는 상태가 그처럼 꿈과 같고 실답지 않음을 의미한다. 사정은 그렇지만, 정작 일체가 공함을 아무리 잘 관해도 업의 장애를 해소할 수행, 즉, 계에 해당하는 보시 정계 안인 정진과 같은 기본 수행을 성취하지 않으면, 그 업의 장애가 해소되지 않아 결국 앞과 같은 극심한 생사고통을 겪는 상황에 반복해 처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고통을 받는 상태에서는 그것이 공함을 관하는 것만으로 그 고통을 극복해 벗어나는 것이 대단히 힘든 것이다.
그것은 당장 현실에서도 손과 발이 잘리는 상태에서 단지 일체가 공함을 관해서 그 고통을 잘 극복해 벗어나지 못하는 것과 사정이 마찬가지다.
결국 비록 일체가 차별없이 공함을 잘 관해도 매 순간 앞과 같이 임하면 각 주체가 망집에 바탕해 임하는 욕계에서는
결국 이런 업의 장애로 인해 자신이 고통을 되돌려 받는 상태에 반복해 처하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신이 도움이 필요할 때 아무도 자신에게 도움을 베풀지 않고 그런 상태로 어떤 수용소나 축사 등에 끌려가 묶여 지내다가 어느 순간 손발이 짤리거나 모든 것을 뺐기고 죽음을 맞이하는데 다른 이는 그것을 자신이 즐거운 일이라고 여기며 그것을 행하고,
또 이에 대해 자신이 보복을 행하면 또 그런 상대로부터 되갚음을 당하는 형태로 이런 생사고통을 끝없이 서로 주고 받으며 계속 이어지는 상태에 처하게 된다.
그래서 수행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보시, 정계, 안인, 정진과 같은 계의 항목을 원만히 성취하고 이를 통해 자신을 생사고통에 묶이게 만드는 업의 장애를 제거하는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가운데 안인을 가장 성취하기 힘든 수행의 고비점이라고 보는 사정은 다른 수행은 자신이 당장 얻을 좋음(+)을 포기하는 형태라면 안인은 당장 자신이 극히 억울하고 심한 고통(-)을 적극적으로 받는 상태에서 이를 평안히 참는 수행이기에 이런 상황에 처하면 대부분 그런 안인 수행을 성취하지 못하고 앞의 상태로 다시 물러나게 되기에 이 부분이 곧 계의 수행을 성취하고 보다 높은 수행 단계로 올라가는 고비점이 된다.
여하튼 이를 위해서는 비록 본래 일체가 공하고 생사나 생멸을 얻을 수 없지만, 그런 바탕에서 왜 하필이면 그런 생사고통이 나타나는가 하는 그 사정에 대해 기본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를 통해 수행의 필요성을 이해하고 나서 최종적으로 일체가 공하고 본래 그런 주체나 그 생사나 생멸 오고감 변화 등등을 모두 얻을 수 없음을 잘 이해하고 깨닫는 것이 요구된다.
그리고 수행을 통해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더라도 앞의 기본적 내용은 여전히 요구된다.
그것은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도 다시 생사고통에 묶인 다른 중생을 제도하려면 그런 중생이 처한 생사현실에 들어가서 중생을 제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그러려면 그 생사현실에서 복덕자량을 쌓고 생사에 묶이지 않게 되는 것이 기본적으로 요구되는데 이 사정은 처음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계의 항목의 성취가 요구된 것과 사정이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런 바탕에서는 결국 현실에서 왜 손바닥을 부딪히면 소리가 나는가. 또는 왜 저기 마당에 씨를 뿌리면 가을에 열매가 맺히는가. 이런 내용을 놓고 기본적인 이해를 잘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결국 인과(연기)관계에 대한 설명이다.
그리고 이것은 본래 그런 것을 얻을 수 없음에도 세속에서 그런 것을 모두 얻을 수 있고 그래서 그런 것이 있다고 여기며 대하는 망집상태를 바탕으로 하여 행하는 설명이기도 하다.
그런데 결국 이런 세속제(세속의 진리)를 통해 본래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는 승의제(본 바탕의 초월적진리)의 내용까지 이해하게 되므로 이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즉, 망집을 바탕으로 하면 그런 관계로 그런 과보를 받아나가는 것이 무한하게 이어지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 어느 한 단면이나 연속 단면에도 그처럼 있다고 보는 그런 내용을 본래 얻을 수 없음[승의제]을 이를 통해서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이 문제는 이미 본 조각글에서 살피게 되는 성유식론에도 자세하게 제시되지만, 다른 경전과 논서에서도 대단히 반복해 제시된다.
그런데 이런 내용을 대할 때 왜 경전에서 이런 내용을 제시하면서도 한편으로 이런 현실에 그런 생멸이나 생사 왕래 변화를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는가도 함께 잘 이해해야 한다.
일단 현실에서 한 주체가 생멸이라고 보는 현상은 다음을 의미한다.
무언가 a 가 없다가 있다. => 생한다. 있다가 없다. => 멸한다. 이런 의미다.
그리고 현실에서 대부분 무언가가 생멸한다는 표현으로 가리키는 그 상황은 예를 들어 눈을 뜨니 그 전까지 못보던 내용들이 얻어지고 어떤 내용이 들고 나고 한다는 이런 상황을 그런 표현으로 가리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런 현실에 그런 생멸을 얻을 수 없고 그래서 불생불멸이라고 제시하는 입장은 그런 표현으로 각 주체가 가리키게 되는 감각현실내용을 그렇게 얻지 못하거나 또는 그런 '생멸'이라는 관념을 관념영역에서 일으켜 얻지 못해서 그런 상태를 놓고 불생불멸 불래불거 이런 식으로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렇게 생멸함이 있다고 대하는 망집 상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데 그러나 그런 현실에 그가 보는 그런 a 나 그 a 의 생멸은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현실에서 종이에 불을 붙이면 연기와 재가 난다거나 손을 부딪히면 소리가 난다는 내용처럼
종이, 불 <=> 연기, 재 손 <=> 소리 양쪽 내용이 서로간 대단히 차이나는 엉뚱한 내용으로서 서로 엉뚱한 관계인데도
이것을 서로 관련된다고 이해하는 사정은 이미 앞에서 보았다.
그것은 결국 연기(인과)관계의 공식처럼
그런 내용들의 각 관계가 그런 형태로 반복해 파악되기에 그런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다음 내용이다. ---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
(차유고피유此有故彼有 차기고피기此起故彼起)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고,
이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저것이 사라진다.
(차무고피무此無故彼無 차멸고피멸此滅故彼滅)
---
왜 현실에서 엉뚱한 것의 있고 없음 생겨남 멸함 [유,무,생,멸]등을 이와 다른 엉뚱한 것의 있고 없음 생겨남 멸함 [유,무,생,멸]과 관련시켜 이해하게 되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다른 입장이 있는데 경전에서 제시하는 위와 같은 기본 입장은 이에 대한 다른 입장은 잘못된 판단임을 우선 의미한다.
이는 다음 내용이다. 처음 생멸을 문제삼을 이것 저것 자체를 본래 얻을 수 없고 또 그런 것의 생멸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승의제'라고 표현하게 된다.
그런데 그런 바탕에서 다시 생사현실에서 a 와 b 의 인과관계를 제시하는 것은 이런 입장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현실에서 반복해 나타나는 각 내용의 관계를 일단 세속에서 가장 옳다고 보는 형태로 파악해서 일단 그런 내용을 그처럼 '방편'으로 '시설'해서 그런 것이 그처럼 있다고 보는 그런 바탕이라면 그렇다라고 '가정적'으로 제시하는 입장이다.
그런데 그 내용이 세속의 측면에서는
가장 옳다고 보게 되는 내용이기에 이것을 세속제[세속의 진리]라고 표현하게 된다.
그래서 결국 이런 세속제를 통해서 앞에서 처음 제시한 승의제를 밝히고 또 그런 승의제를 바탕으로 해서 이런 세속제가 제시되는 사정이 있다.
이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 처음에 위와 같은 각 내용을 경전에서 제시받고 나서 더 나아가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라고 할 무상, 고, 무아, 무자성, 열반적정, 공과 같은 내용을 포함해 경전에서 제시된 내용이 모두 본래 얻을 수 없고 부처님이 설한 내용도 하나도 얻을 수 없고 무량한 부처님 가르침은 결국 모두 각 중생이 망집을 제거하고 깨달음을 얻어 생사를 벗어나게 하기 위해 사용하는 '뗏목'과 같은 임시적 시설 방편이라고 제시받게 되면 당황하게 되기 쉽다.
그래서 여기서는 먼저 이런 내용이 위와 같은 사정으로 제시된다는 사정부터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
여하튼 위와 같은 관계가 될 때 비록 그 두 내용이 서로 대단히 엉뚱하지만, 이것을 서로 연기(인과)관계가 있다고 보는 것은 이와 같은 내용이 세속에서 가장 옳은 세속제임을 의미한다.
이는 반대로 연기(인과)에 대해 다른 입장은 엉터리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수많은 엉터리가 다양하게 나열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서양철학 가운데에서는 인과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일치법, 차이법, 일치차이병용법, 공변법, 잉여법 등을 제시하기도 하는데 이는 위 내용과 비슷해 보이지만 다른 내용이다.
그리고 구체적인 현상을 놓고 각 방법을 사용하면 구체적으로 인과유무 판단이 달리 판단되게 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참고 https://ko.wikipedia.org/wiki/밀의_방법
번개가 치면 천둥소리가 난다. 새가 날자 배가 떨어진다. 낮이 가자 밤이 온다. 의자에 화분이 올려져 있다. 막대를 세개 기대어 놓고 그 위에 사과를 올려 놓으니 떨어지지 않고 있다.
이런 등등의 사례를 놓고 어떤 내용이 서로 인과관계가 있다고 보아야 하는가를 판단할 때 위 방식을 사용하면 어떤 경우는 그럴 듯한데 어떤 경우는 엉뚱하게 잘못된 관계를 판단하게 됨을 의미한다.
현실에서 온갖 미신적인 믿음이나 문제해결방안이 제시되는 사정도 사실은 이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흰 운동화만 신고 나가면 매번 그때마다 이상하게 사고를 당한다. 이런 경우 그 주체가 이후 흰 운동화에 대해 징크스를 갖고 기피하게 되는 사정도 사실은 이런 판단에 기인한다.
그래서 간단해 보이지만, 위 연기(인과)관계의 공식이 의미하는 바를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여하튼 서로간에 엉뚱하다고 할 수 있는 a 와 b 를 연기(인과)의 관계로 서로 묶어 제시하는 것은 여하튼 앞과 같은 관계를 현실에서 대단히 반복해 그런 관계로 대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예를 들어 종이를 태우면 연기와 재가 난다는 것은 종이와 연기는 서로간에 대단히 엉뚱하다고 볼 내용이지만, 여하튼 현실에서 그 내용들을 위 관계로 대단히 반복해 대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는 그런 조건이 되면 어떤 주체는 그 내용을 수없이 반복해 대하고 더 나아가 천년전이던 천년후이던 심지어 무량겁을 두고도 반복해 대하게 되고 또 그 주체만 아니라 영희나 철수 등등을 포함해 다수가 함께 대하고 또 그 내용도 단순한 형태가 아니고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을 포함해 대단히 다양한 형태로 생생하게 그 내용을 얻게 된다고 이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망집에 바탕해 어떤 이가 업을 행하면 어떤 주체가 3 악도에서 장구한 기간 생사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은 어떤 한 순간만 그렇다는 것도 아니고 어떤 특정한 이만 그렇다는 것도 아니고 그런 업을 행한 대다수가 그런 상태로 장구한 기간에 걸쳐서 대단히 다양한 형태로 생생하게 그런 내용을 받게 된다는 사정을 지금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런 내용을 그렇게 제시하면서 왜 또 한편으로 그런 주체나 그런 내용을 본래 얻을 수 없고 그래서 그런 생멸에 관한 내용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는가 이 부분을 또 간략하게 이해하고 이 내용을 살펴야 한다.
이전 조각글에서도 그 사정을 제시했는데 그 사정은 연기관계를 제시하는 그 내용 자체가 그처럼 매 순간 대하는 그 내용 하나하나가 모두 그것이 실답지 않고 공하다는 내용까지 함께 제시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연기(인과)관계는 그것이 곧 그것이 공하여 실답지 않다는 사실까지 함께 제시하는 것이다.
'연기는 곧 공' 이런 표현에서 '연기(인과)'는 현실에서 대단히 반복해서 무한히 그런 내용을 그런 형태로 대함을 제시하는데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이들 내용이나 그 관계가 실다운 내용이라고 제시하는 것이 아니고, 사정이 그렇기 때문에 바로 그런 내용들이 공하고 실답지 않음을 함께 제시하는 내용이라는 의미다.
이것을 비유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게임기를 가지고 설명하였는데 그 사정이 마찬가지다.
오늘날 게임기를 놓고 어떤 키보드 자판을 누르면 화면에서 폭탄이 발사되고 터진다. 이렇다면 그 두 내용은 사실은 서로간에 대단히 엉뚱하고 그것이 실답지 않음은 누구나 쉽게 이해한다.
그런데 그 게임에 임하는 이는 그런 상황에서 그 키를 누르면 그런 화면을 대단히 반복해 대하게 되고 그 게임이 전제되는한 그 관계는 무한히 또 그처럼 반복된다고 할 것이고 또 어떤 특정 주체만 그런 것이 아니고 그 게임을 하는 다수가 함께 그런 상태에 처하고 그것도 요즘 게임을 보면 화면과 소리 등으로 대단히 생생하게 그 내용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하나하나 내용은 본 현실 상태에 비추어 실답지 않다.
그래서 게임내용을 '기준으로' 잡고 대하면 이들은 대단히 실답게 느껴지는 내용이지만, 정작 이는 그런 조건을 떠난 다른 영역에서는 그처럼 얻어지지도 않고 하나같이 엉뚱한 내용이고 실답지 않다.
이와 마찬가지로 생사현실도 무명 어리석음을 바탕으로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하는 상태에서는 그런 고통을 [혹-업-고]의 관계로 무한히 장구하게 반복해 얻게 되기에 문제인 것은 사실이지만,
바로 그처럼 각 주체가 망집을 바탕으로 업을 행하면 그처럼 생사고통을 무한히 반복해 받게 된다는 그 생사현실의 연기관계가 바로 그런 내용이 하나하나 그리고 종합적으로 실답지 않고 공하다는 사정을 함께 제시해주고 있다는 의미다.
일단 쉬고 그 이후 내용을 살피기로 한다.
이번에 살피는 15처나 10 연을 통하여 10 인 4 연 5 과의 형태로 인과내용을 제시하는 입장은 기본 부파 불교 교학에서 제시하는 6인 4 연 5과의 인과 설명과는 조금 다른 형태다. 그런데 그렇게 각 내용을 제시하는 기본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이들 연기관계를 설명하는 각 개념은 예를 들어 현실에서 사과 하나를 놓고 그것이 곧 그런 개념에 해당하는 내용이라고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즉 이들 인과를 설명하는 각 개념은 어떤 이가 구체적으로 대하는 어떤 사물이나 상태를 특정해 그렇게 지칭하는 내용이 아니다.
예를 들어 4 연 가운데 인연 등무간연 소연연 증상연 이렇게 제시한다고 할 때 현실에 대하는 사과는 무엇인가 이렇게 물으면 이 가운데 무엇이라고 답할 수 없다.
그런데도 이런 개념을 가지고 인과를 분류하고 설명하는 데에는 앞에서 본 바탕에서 현실에서 나타나는 각 내용들을 서로 관련지어 설명하고자 할 때 기본적으로 이런 분류개념을 빌어서 파악하게 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앞에서 사과가 무엇인가 이렇게 물으면 답하기 곤란한데 사과는 갑의 사망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렇게 물으면 이제 이 두 내용을 각기 앞에 제시한 개념들에 포함시켜 살피게 된다.
사정이 그렇기에 이런 개념으로 현실을 어떻게 서로 인과로 묶어 관하게 되는가를 살필 수는 있지만, 이 내용이 곧바로 어떤 구체적 결과에 대한 원인은 무언가를 직접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 표현이 대부분 일상생활에서 사용하지 않는 표현이라서 일단 그 의미를 이해하기가 힘들고 다시 왜 이런 형태로 각 원인과 결과를 분류해서 살피게 되는가도 이해하기 힘들다.
그 사정은 대략적으로 앞에서 제시했는데 조금 자세히 살피면 결국 현실은 어떤 상태로 반복되어 그런 내용이 나타나는가 그리고 그 가운데 특히 수행과정에서 초점을 맞추게 되는 생사고통은 어떤 형태로 받게 되고 또 어떤 상태로 벗어나게 되는가. 이런 부분에 특히 초점을 맞추기에 이처럼 복잡한 분류가 제시되는 사정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처음에 눈 앞에 사과가 있다고 할 때 이 사과가 어떻게 나타난 것인가를 문제삼을 때 일반적인 입장이나 일반적인 과학 교과서에서 제시하는 입장이 이와는 대단히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처음 사과가 어떻게 나타난 것인가를 문제삼을 때 문제삼는 내용의 본 정체가 무언가에서부터 일반적인 입장과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앞에 제시된 용어를 하나하나 이해하고 또 필요할 때 사용하기 위해 잘 외우고 정리하는 것도 힘들지만, 이런 분류가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갖고 이렇게 제시된 것이고 이것이 일반적인 입장과는 어떤 특별한 차이를 갖는가를 먼저 명확하게 잘 파악해야 한다.
그것이 곧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행하기 쉬운 망상분별을 기본적으로 제거하고 이런 연기의 내용을 이해해서 이를 바탕으로 생사현실에 임해 수행을 통해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는 이계과를 성취하는 기본 바탕이 된다.
그래서 먼저 간단하게 사과는 왜 지금 이 책상 위에 이렇게 올려져 있게 된 것인가. 무슨 원인으로 사과가 여기에 이렇게 있게 된 것인가를 놓고 한번 살펴보기로 한다.
여기서 처음 주의할 것은 지금 이 문제를 자신이 논의하거나 다른 이와 논의할 때 이 문제 자체를 어떤 형태로 제시해서 문제삼고 있는가부터 잘 살펴야 한다.
무엇을 가지고 문제삼고 있는가.
바로 언어다.
그래서 본 조각글에서 살피는 성유식론에서도 이 언어의 문제를 처음 제시한다.
그래서 사과는 어떻게 여기에 있게 된 것인가 이런 간단한 문제를 살필 때도 가장 기초적으로 이런 '사과'라는 언어는 어떻게 사용되고 이런 언어로 문제삼는 내용은 과연 무언가부터 먼저 잘 살펴야 한다.
그래서 앞 문제에서 '사과'를 문제삼는다면 그 '사과'는 과연 현실에서 무엇을 나타내는가. 이것부터 잘 확인해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 망집을 일으킨 상태에서는 각기 성격이 다른 각 영역의 내용을 서로 접착시켜서 이 부분부터 혼동을 일으키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이 생사현실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이 부분을 살피고 각 내용을 살피자면 대단히 복잡한 내용을 살펴나가게 되는데
사과는 어떻게 거기에 있게 되었나를 살필 때 가장 먼저 살필 것은 그런 사과를 그렇게 대하고 문제삼는 그 주체를 떠나서도 과연 그런 사과를 문제삼을 수 있는가 이것부터 잘 살펴야 한다.
그래서 처음 어떤 원인을 살피고 분류할 때 일반적인 입장과 4 연 6인 또는 10 인을 제시하는 입장이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그리고 사과씨로 인해서 사과가 생겨났다. 이렇게 본다면 사과씨를 원인으로 보고 사과를 결과로 보고 제시하는 것은 일반 입장과 큰 차이는 없는데
다만 각 원인과 결과에 들어가는 각 내용들이 갖는 특성에 따라서 별개의 명칭을 붙여서 분류하기에 위와 같은 다양한 표현들로 그것을 제시한다고 이해하면 충분하다.
현실 사정을 간단히 놓고 이 사정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이가 눈을 뜨거나 뜨지 않거나 그대로 있다고 할 본 바탕을 전제로 하여 이것을 본 바탕 진여 실재라고 표현하면 이 내용은 어떤 주체가 그 내용을 직접 얻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이런 연기관계를 제시할 때는 사실상 원인결과관계로 포함해 넣기가 곤란하다. 왜냐하면 무언가를 넣고 빼고 할때 그 상황에서 그에 따라 어떤 내용이 달라지는 것을 앞에서 살핀 연기관계의 공식처럼 파악할 수 없으면 이런 내용을 연기의 관계에 있다고 제시할 도리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계과라는 내용이 결과의 한 항목에 포함되어 제시된 사정은 수행을 통해 망집이 제거되면 그런 생멸과 생사를 떠난 상태가 반사적으로 드러나서 마치 그런 상태를 새로 얻게 되는 것처럼 여겨지기에 그런 수행을 통해 최종적으로 성취하게 되는 수행목표상태를 이계과라고 표현해 제시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계과는 앞과 같은 사정 때문에 정작 앞에 제시한 여러 원인과 인과 관계를 갖고 생겨나는 결과는 아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생멸을 떠난 진여 실재는 인과의 항목에는 들어가지 않는다는 사정을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제 그런 바탕에서 어떤 주체가 예를 들어 눈을 뜨면 세상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그런 감각현실에서는 정작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지만, 각 주체가 일정한 부분을 묶고 나누어서 일정한 부분은 사과라고 여기고 일정한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고 이런 가운데 그 각각에 관련된 내용이 왜 그런가를 문제삼게 된다.
문제는 이런 분별을 통해서 인과관계를 살피는데 처음에 제시한 것처럼 이렇게 문제삼는 감각현실 자체는 그런 분별 내용은 아니다. 그리고 그런 분별 내용도 역시 감각현실 내용은 아니다.
그리고 그런 감각현실이나 관념분별 내용은 그런 본 바탕의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도 아니고 그런 실재 진여 영역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도 없다.
이런 사정을 먼저 잘 파악해야 한다.
결국 인과의 설명을 통해 현실에서 생사에 묶이는 근본 원인도 이런 사정을 잘 관하지 못하고 무명 어리석음을 바탕으로 망집을 일으켜 대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 또 인과의 내용을 통해 수행에 임하고 도달해야 하는 내용도 바로 이와 같은 내용들이다.
이미 현실에서 a 를 얻을 수 없고 생멸을 얻을 수 없음을 앞에서 제시했는데 이 내용이 이와 관련된다.
사정이 이렇기에 그런 a가 어떤 내용을 원인으로 해서 나타나는가는 더더욱 논할 수 없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그런 내용이 있다고 망집을 일으켜 임하고 있는 상태이므로 그 사정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상대의 주장처럼 그런 내용이 그 현실에 그렇게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그렇다고 가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각 내용들이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살펴나간다는 의미를 갖는 것이다.
감각현실에서 일정 부분이 사과라거나 일정부분이 자신이라고 여길 때 그런 내용이 감각현실에서 얻을 수 없다는 것은 일반인이 사과나 자신이나 그 생멸 생사라는 표현으로 가리키는 그런 감각현실을 어떤 주체가 얻지 못한다거나, 그런 감각현실을 놓고 그러그러한 관념분별을 일으키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앞에서도 살폈듯 그런 표현으로 가리키는 내용을 각 주체가 얻을 수 있지만, 정작 그런 내용에는 그처럼 생각하는 내용도 얻을 수 없고 또 본 바탕의 실재 영역도 그 사정이 마찬가지라는 사정을 제시하는 것이다.
여기서 생멸이나 각종 변화와 관련된 관념이 감각현실에서 얻을 수 없다는 것은 쉽게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생하다는 것은 한단면에서는 무언가 문제삼는 a 가 없다라고 보았는데 다음 단면에서는 그렇게 문제삼는 a 가 있다라고 본다. 그리고 무언가가 '없다가 있게 됨' 이런 것을 '생한다'고 표현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감각현실은 매 순간 그렇게 단면으로 얻는 그 내용 자체를 의미한다.
그래서 없다고 보던 한 단면과 있다고 보던 한 단면이 감각현실인데 그 어디에 없다가 있게 되는 생함이 있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비록 그런 이런 각 단면을 죽 이어서 이를 대하는 가운데 그 주체가 'a 가 생겨난다'고 하는 관념을 일으킨 것은 사실이지만, 정작 그가 대하는 감각현실이나 그 실재 영역에서는 그런 분별에 해당 내용은 얻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런 가운데 그런 감각현실로부터 그런 관념분별을 일으킨 그 주체가 그 관념분별에 해당한 내용이 감각현실이나 실재영역에 그처럼 있다고 고집하면서 그 표현으로 무언가를 붙잡고 늘어지는 상태에서부터 그것이 문제된다는 의미다.
그런데 처음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분별로 어떤 주체나 대상이나 행위 등등을 분별할 때 그런 내용 일체가 그 감각현실이나 실재 영역에서 모두 얻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면 다시 그런 것들의 생멸을 문제삼을 근거 자체도 함께 없게 된다.
일단 여기까지 살피고 그래도 현실에서 사과나 자신의 생멸과 생사가 여전히 문제된다면 다음 그림을 기본적으로 참조하고 각 논서에서 제시한 난해한 표현이 무엇을 나타내는가를 하나씩 살펴나가야 한다.
여기서 4 를 문제삼는 사과나 꽃이라고 한다면 이 4 를 자신이 대할 때와 옆에서 2 가 대할 때 어떻게 조금씩 달리 그 관계를 이해하는가하는 내용도 살피고
현실에서 4 와 같은 사과나 꽃이 어떻게 그 자리에 있게 되었는가를 문제삼을 때는 그 언어표현으로 과연 무엇을 그렇게 가리키면서 따지는가를 먼저 잘 판단해야 한다.
위 그림에서는 마치 4 와 같은 부분이 꽃이나 사과로서 그렇게 구분되어 있는 것처럼 그림으로 나타냈는데 이것이 바로 인과 설명을 위하여 기본적으로 행하는 시설이고 방편이 된다. 그것은 또 달리 말하면 사실은 그런 감각현실에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는 의미다.
그 사정은 간단하다. 감각현실 자체는 관념분별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이 두 내용이 엉뚱한 관계라는 것은 마치 손바닥을 두드리면 소리가 매번 나는데 눈으로 본 그 손바닥과 그 상황에서 매번 귀로 듣는 소리처럼 그 두 내용이 엉뚱한 관계인 것이다.
그러나 일단 망집을 일으켜서 현실에 임하는 상태는 자신이 눈을 떠서 일정 부분을 그렇게 묶고 나누어서 사과나 꽃이라고 여기고 대하면 그런 내용이 그 부분에 그처럼 있다고 여기면서 이를 대하고 그것을 문제삼는 것이다.
그리고 인과 판단 문제는 바로 이런 바탕에서 이후 각종 언어 시설 방편을 통해서 주로 그런 감각현실을 놓고 기본적으로 살펴나가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