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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queline Taieb - Petite Filles Amour
불기2562-09-18_대승법계무차별론_001
La Femme - Sur La Planche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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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t op tr] fr sfed--대승법계무차별론_K0640_T1626.txt ☞제운반야
마음 현상과 관련해 한 주체가 눈을 떠서 보는 내용을 □ 이라고 표시할 때 이런 내용을 어떤 과정으로 얻게 되는가에 대한 다양한 입장을 살피기로 한다.
그 가운데 먼저 일반적인 입장에서 눈을 떠서 보는 내용 □ 안에서 눈을 떠 보는 그런 내용 □ 을 얻게 하는 '원인요소'를 찾아 나열하는 입장이 있다.
그리고 눈을 떠서 보는 내용 □ 안에서 눈을 떠 보는 내용 □ 을 얻게 하는 '원인요소'를 찾아 나열하지만,
이와 함께 이런 내용을 얻는 '마음'을 추가해 제시하는 입장도 있다.
한편 눈을 떠 보는 내용 □ 을 얻는 데에 대해
□ 안의 내용을 통해 설명하지 않는 불교내 입장도 있다.
그런데 이런 차례로 살피면 결국 눈을 떠서 보는 □ 내용에 그렇게 문제삼는 것이나 그 생멸과 오고감 등도 함께 얻을 수 없다는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처음 내용은 앞에서 살폈고 눈을 떠서 보는 내용 □ 안에서 눈을 떠 보는 그런 내용 □ 을 얻게 하는 '원인요소'를 찾아 나열하는 입장을 살피기로 한다.
이는 어떤 현상이 나타나는 과정에 대해 인과를 살피는 문제다.
이를 위해서는 불교에서 인과를 살피는 방식과 함께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마음을 어떤 근거로 내세우는가. 그리고 경전내 다른 입장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살펴야 한다.
그리고 자세히 살피면 이 문제들이 상당히 복잡하다. 그래서 하나하나 천천히 살펴나가기로 한다.
○ [pt op tr]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Etienne Daho - Duel Au Soleil.lrc
● 불교내 각 입장들의 관계
먼저 불교 경전과 논서에서 각기 다른 입장들이 서로 어떤 관계인가를 이해해야 한다.
눈을 떠서 보는 내용 □에 대해서 일반적인 입장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경전 부분은 다음이다.
현실에서 어떤 이가 눈을 떠서 보면 그 안에 산과 들 대지 달 별과 영희나 철수 뿐 아니라 자신의 몸도 보이고
그리고 그 안의 내용이 없다가 생겨나고 이리저리 오가기도 한다고 여기는데
이런 내용을 놓고 거기에 그런 내용과 그 생멸이나 생사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그런 내용은 대승법계무차별론에서도 살필 수 있다. 예를 들어 이런 부분이다.
...
이른바 짓는 바가 없으니
무위(無爲- *생주멸 변화가 없음)이기 때문이고,
시초가 없으니 일어남이 없기 때문이며,
다함이 없으니 멸함이 없기 때문이고,
물들어 더러워짐이 없으니 자성이 청정하기 때문이며,
...
이는 보리심과 관련해 제시하는 내용이지만, 이는 현실 일반에 대한 내용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렇게 보는 사정은 다음과 같음을 살필 수 있다.
“세존이시여,
생사란 단지 세속의 말에 따라 존재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죽음이란 온갖 근(根)이 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태어남이란 온갖 근이 새로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래장에는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이 일어난다거나
사라진다거나 하는 일이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장은 유위상(有爲相)을 넘어섭니다.
적정(寂靜)하고, 상주(常住)하며, 변하지 않고
단절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경전에서 이와는 조금 다른 내용을 제시하는 사정을 이해해야 한다.
본래 사정은 이와 같아서 생멸을 논의할 어떤 내용 자체를 얻을 수 없는데 그런데 망집을 일으켜 현실에 임하는 경우 이런 내용을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다.
그래서 처음에 일단 일반적 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방편 시설을 통해 내용을 제시하여 이를 통해 최종적으로 위와 같은 내용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그런 취지를 경전에서 뗏목의 비유로 나타낸다. 그래서 이 사정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어떤 이가 현실에서 눈을 떠 □과 같은 내용을 얻을 때 우선 그와 같은 내용에 대해 근- 경 - 식 이런 내용을 제시하여 가르침을 베풀고 이를 통해 최종적으로 언설을 떠난 '승의제'를 이해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순서로 내용을 살펴나가면 각 경전과 논서에서 제시하는 내용과 함께 각 경우마다 조금씩 차이나는 사정도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왜 한 분이 매 경우마다 조금씩 달리 설명하는가하고 부처님께 그것을 문제삼으면 곤란하다.
이 사정을 현실에서 유치원부터 초등학교 중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 이렇게 각 학교가 있을 때 어떤 수학이나 물리학 대학교수가 이들을 대상으로 무언가를 제시하고자 할 때 각 경우마다 어떤 방편을 취하게 되는가를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현실에서 이 대학교수가 각 학교를 돌아다니면서 어떤 내용에 대해서 설명하는 내용을 살펴보니 하나의 내용에 대해서 각 학교에서 조금씩 달리 설명함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런 경우 이는 오히려 그 대학교수가 각기 다른 상대에 맟주어 상대가 내용을 쉽게 이해하도록 배려한 것으로서 오히려 그 교수의 뛰어난 점으로 보아야 하고 이를 그의 잘못으로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경전내에서 조금씩 내용이 달리 제시되는 것도 기본적으로 이와 사정이 마찬가지임을 이해해야 한다.
어떤 이가 눈을 떠 보는 과정에 대해 일반적으로 자신이 눈으로 보는 것이 곧 외부세계의 내용이고 외부대상이고 마음과는 구분되는 외부물질로 이를 여기고 대하는 한편, 또 이와 상대되는 자신에 대해서도 그처럼 잘못된 망상분별을 갖고 있으므로 이런 사정을 이해시키기 쉽지 않다. 그렇기에 처음에는 일반적인 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을 방편적으로 시설해서 하나하나 이해시켜나가고자 하는 취지인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살필 때도 역시 그런 입장에서 하나하나 살펴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 한 주체가 눈을 떠 보는 내용 □ 에 대해 각기 서로 달리 이해하는 사정
한 주체가 눈을 떠 보는 내용 □ 에 대해 각기 서로 달리 이해하는 사정을 다음 비유로 살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최면술사가 최면쇼를 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최면술사가 최면을 걸어 혁대를 뱀으로 보이게 한다거나 양파를 딸기라고 여기게 해서 먹게 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관객의 입장에서 보면 그런 뱀이나 딸기는 그 현장에 없는데 그런데 이상하게 최면에 걸린 이들은 마치 뱀이나 딸기가 있는 것처럼 여기고 매번 반응을 보인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현실 상황과 비슷하다.
부처님을 여래라고 표현하는데 여래는 본 바탕이 되는 청정한 실상인 진여에서 생사현실로 이런 사정을 알려주기 위해 오신 분 이런 의미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이는 앞의 최면상황을 놓고 보면 일반적인 최면 쇼와 달리 아주 특이하게 어떤 최면술사가 상대를 결코 최면에서 풀어주지 않으려 하는 가운데 최면에 걸린 이들이 그 최면으로 심한 고통을 받는다. 관객 입장에서는 뱀이나 호랑이가 하나도 없는데 그러나 상대는 매번 뱀이 문다거나 호랑이가 자신을 물어 뜯는다고 하면서 매 순간 비명을 지르고 이리저리 구르는 상황에 놓여 있다.
그래서 어떤 이가 이를 보고 그런 내용을 전혀 얻을 수 없는데도 잘못된 최면에 걸린 이들이 그처럼 고통을 무한히 받는 것이 안타까워 자비심을 일으켜 그런 최면 상황안으로 들어가 다양한 방편을 마련해서 최면에 걸린 이들이 최면에서 벗어나게끔 노력하는 입장과 비슷하다.
그런데 상대는 최면에 너무 단단히 걸려 그 상황에 그런 것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해도 이를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고 매번 뱀이나 호랑이가 있다거나 하면서 점점 더 깊은 고통의 상태로 나아간다.
그리고 무한히 지켜보아도 그런 방안으로는 상대가 스스로 벗어나오기 힘들다고 보기에
그 입장을 이해하여 그 상대처럼 그 상황을 대하여 들어가 직접 바로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지 않고, 방편을 달리해서 각 내용을 방편적으로 시설해서 설명을 시작하고
이런 내용을 점차 상대가 이해하게 되면 최종적으로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음을 이해시켜서 3 해탈문을 통해 실답지 않은 생사고통에 묶여 고통을 받는 상태에서 벗어나도록 한다는 취지다.
그런데 그런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려면 일단 단계적으로 하나하나 그 사정을 이해해야 할 뿐 아니라, 그와 함께 그렇게 생사고통을 받아나가게 만드는 업의 장애도 제거하는 수행이 함께 필요하다.
어떤 주체가 그런 심한 고통을 받는 것은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고 최면술사가 그 주체가 그런 고통을 되돌려 받아야 한다고 여길만한 업의 장애를 쌓았기에 그렇게 된다는 사정을 이해하고
그런 업의 장애를 제거하는 수행을 함께 행해야 함을 제시하는 것이다.
물론 이론적으로만 보면 그 상황에서 곧바로 그런 내용이 실답지 않음을 관하고 바로 벗어나오는 것이 원칙적인 방안이지만, 대부분 경우는 이것이 잘 되지 않는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그 사정이 본래 그러함도 잘 이해하는 한편 또 한편 그 상태에서 그를 생사고통에 계속 묶이게 만드는 업의 장애도 해소하는 수행노력을 함께 해야 한다. 그것이 곧 계의 수행항목이다.
알고보면 이 계의 덕목은 그 주체가 앞의 비유에서 최면술사에 해당하는 이에게 어떤 사유로든 불쾌나 고통을 준 것에 대해서 참회하는 한편
반대로 좋음을 아낌없이 베풀고 또 그처럼 다른 이가 집착하는 좋음을 침해하며 고통을 가하지 않고 또 한편 그런 고통을 받을 때도 망집에 바탕해 상을 일으키지 않고 평안하게 참는 안인 수행을 실천함으로써 업의 장애를 제거하고 생사의 묶임에서 풀려나 벗어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망집과 생사고통에 묶인 상태에서 벗어나 풀려나는 해탈이 갖는 의미다.
그리고 그 원칙적인 방안으로 3 측면에서 해탈을 이루는 공, 무상, 무원무작 해탈문이 제시되는데 이와 함께 앞과 같은 수행이 함께 따라야 생사의 묶임에서 쉽게 벗어나게 된다. 이것은 그처럼 최면걸린 상황에서 그렇게 해야
최면술사도 그 사정을 보고 비로소 풀어주게 된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쉽다.
현실에서 각 주체마다 생사고통을 겪고
본래 얻을 수 없는 온갖 내용을 있다고 여기며 대하게 된 것은 결국 그 주체가 행한 업에 의해 그런 상태에 묶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불교 용어로 업감연기로 표현한다.
자신이 눈을 뜰 때 자신은 왜 메뚜기나 박쥐나 벌이 보는 것과 달리 세상이나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는가 이렇게 묻거나, 또는 귀로 대하면 소리만 들리는데 눈만 뜨면 왜 이상하게 하늘이나 달 등이 보이는가.
그리고 각각 그런 내용을 왜 그렇게 얻는가. 그리고 이 가운데 어떤 내용이 더 참된가. 이런 문제를 제기하면 결국 그 주체가 메뚜기나 박쥐나 벌이 아니고 인간으로 태어나 그렇다라고 제시할 도리 밖에 없다. 왜냐하면 일단 그 상황에서 바위는 그런 보고를 아예 하지도 않고 다른 메뚜기나 박쥐나 벌이 각기 보고한다면 그와는 다른 보고를 하는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사정을 이해해야 한다.
일단 처음에는 현실 사정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다해도 위 비유로 자신이 놓인 사정을 스스로 파악하고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수행으로 전환해 임하면 점차 그런 상태에서 풀려나 마치 관객이 최면 상황을 대하는 것처럼 본래 그런 내용을 거기에서 얻을 수 없음을 이해하고 대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한 주체가 망집상태에서 생사에서 벗어나는 처음 계기는
일단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음으로 대해 앞에 제시한 계행을 비롯해 수행에 열심히 정진함으로써 생사의 묶임에서 풀려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된 사정을 이해하는 것은 그 다음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기회가 되면 과거에 올렸던 최면 자료를 한번 올려 놓고 지금 살피는 문제가 각 경전이나 논서마다 조금씩 그 내용이 달리 제시되는 사정을 이를 통해 대강 이해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고 본다.
앞과 같은 최면상황의 비유로 최면걸린 입장에서는 관객입장에서는 거기에 얻을 수 없다고 보는 무엇이 있다고 여기며 매번 반응하는 것처럼 현실이 그러함을 이해하면 좋은데 그런데 현실에서 생활하는 입장은 자신이 그런 상태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굳건하게 믿고 현실에 임하는 것이 바로 문제점이다.
이것이 눈을 떠서 보는 내용 □을 놓고 현실에서 각 주체가 갖는 문제다.
그런데 이 문제가 여기서 해결 되지 못하면 다른 상태에서도 마찬가지다. 즉 지금 현실에서 □을 얻고 이를 대단히 생생하게 실답다고 여기듯 경전에서 반복해 예고하는 축생, 아귀, 지옥에서도 그 주체는 마찬가지로 임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생사현실의 문제다.
그리고 현재 생사현실이 자신만 아니라, 대부분 자신과 비슷한 상태이고 이런 형태로 몇 천년 반복되어 왔다고 보게 되듯 앞의 축생, 아귀, 지옥의 사정도 이와 마찬가지고 사실은 더 심하다.
상식적으로 인간이 대하는 세상에서 그래도 인간상태가 가장 낫다고 보는데 그러나 각 개인은 대부분 자신의 상태가 썩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여긴다.
피라미드로 놓고 보면 인간은 0.1% 상태라고 보게 되는데도 사정이 그렇다. 그런데 어떤 축사에서 살아가는 축생에 초점을 맞추면 그 상황은 대단히 힘들다.
그리고 바로 이런 현실이 생사현실의 문제임을 이해해야 한다.
물론 경전에 제시되는 축생 아귀 지옥세계가
강 건너 불처럼 자신과 관련되는 내용이 아니라면 그것이 무슨 문제인가 할 수 있지만, 눈을 떠 얻는 내용 □을 놓고 그 사정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 원하던 원하지 않던 거의 대부분 이 상태로 들어간다. 사정이 그러므로 어떤 계기가 되었던 경전 내용을 잘 대해 그 사정을 이해하거나 아니면 일단 믿음을 갖고 제시된 수행방안을 잘 실천해 그런 사태를 막아야 한다. 그러나 정작 망집에 빠진 상태는 대부분 이것이 자신과 무관한 일인것처럼 이를 외면한다.
그래서 묘법연화경에서는 이런 현실사정을 3계화택의 비유를 들어 불난 집에서 상황을 모르고 정신없이 노는 아이와 같다고 제시한다. 이는 욕계에서 태어나 생활하는 생명 대부분이 태어나는 단계에서부터 망집에 단단히 매듭이 지어져 뒤집힌 상태로 현실을 계속 대하는 가운데 번뇌에 묶여 사역을 당하는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인간으로 현실을 대하는 것은 욕계 내에서는 그나마 상태가 양호해서 비유하면 마치 가석방 상태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상태에서는 자신이 일으킨 망집의 사정을 이해하고 수행으로 벗어날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렇지 못하면 아예 그런 수행을 기대하기 힘든 3 악도에 묶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다시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날 기회를 갖는 것도 개다히기 힘들게 된다.
그런 사정을 잘 판단하려면 마치 예비법조인들이 인턴생활을 하면서 교도소를 방문해 잠시 교도소 상황을 경험해보는 것처럼 경전에서 3 악도라고 표현되는 상태를 수행자도 대강 한번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돼지 축사에서 생활하는 상태를 놓고 자신이 과연 그 방향으로 가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런 가운데 10 m 장대위에 앉아서 수행하는 자세로 수행을 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심각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생사고통을 벗어나는 방안은 원칙적으로 그런 상황에서 반야심경에서 제시되듯, 이들 현실이 모두 공하고 문제삼는 생멸이나 생사를 본래 얻을 수 없음을 깨닫고 조견오온개공 => 도일체고액 이런 형태로 쉭 벗어나는 원칙적인 방안이 하나 있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기에 이런 사정을 이해하거나 또는 이해하지 않더라도 3 악도에 묶이게 하는 업의 장애를 제거하고 복덕을 성취해서 일단 수행을 할 바탕을 확보해야 한다.
이런 입장에서 눈을 떠 얻는 내용 □을 놓고 살피는 것이고 공연히 지적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 살피는 것이 아니다.
이 문제를 이렇게 이해해야 한다 .
본래 한 주체가 얻는 □ 내용에 그 주체가 문제삼을 a 나 그 a 의 생멸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주체는 최면걸린 상태처럼
거기에 그 주체가 문제삼는 a 나 그 a 의 생멸 등이 있다고 여긴다. 이 상태에서 앞 내용을 반복해 제시해도 이 사정은 변화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변화가 되어야 하는데 잘 안 된다.
그래서 다시 방편을 마련해서 상대가 그렇게 문제삼는 a 나 그 a 의 생멸 등이 있다고 하니까 이를 이해하는 입장에서 일단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가정적 논의가 시작되는 부분이다.
이 가정적 논의란, 상대의 그런 망집에 바탕한 주장을 받아들이려고 그런 내용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고 상대를 이해시켜 그런 망집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일단 이를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그래서 본래는 그런 □ 안에서 a 라고 할 것이나 그 생멸도 얻을 수 없는데 여하튼 그렇게 여기는 상대에게 그 사정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일단 방편으로 언어로 시설을 해서
일정한 부분을 가리키며 논의를 시작한다.
한편 본래 □ 내용이 발생하는 과정을 □ 안 내용으로는 설명하기는 곤란하다. 사정은 그렇지만, □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 주체가 얻지 못하는 어떤 것을 가지고 설명할 도리는 없고 상대의 입장에서 얻을 수 있는 □ 내용을 가지고 일단 가정적인 논의에 임하게 된다.
그런데 그렇게 시설을 해서 그런 관계를 확립하려는 것이 아니고 그런 내용을 통해 본래 그런 현실에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음을 이해시키고 그에 대한 망집을 제거하려는 것이다.
이는 처음 대학교수의 비유에서, 대학교수가 유치원 생을 상대로 한 어떤 이야기는 이를 통해 다음 초등학교에서 제시할 내용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들기 위한 것이고 또 초등학생에게 제시한 이야기는 마찬가지로 중학교에서 제시할 내용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들기 위한 것이라는 의미다. 그렇게 하지 않고 유치원 생에게 곧바로 대학원에서 제시할 내용을 제시하면 유치원생이 이해할 도리가 없다고 현실에서 보게 된다. 그런데 또 대학교수가 유치원 생을 상대로 할 때는 그 내용에만 집중하고 이를 통해 나중에 대학원 과정에서 살필 내용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이처럼 이야기한다는 사정 등은 말하지 않게 된다. 현실을 놓고 이해하면 그 사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어떤 유치원교사가 글자 공부를 하면서 이는 장차 대입 시험을 위해서라거나 대학원에서 논문을 작성하기 위해서라는 등으로 이야기하지 않는 것과 그 사정이 마찬가지다.
알고보면 욕계 현실에서 일반인의 상태가 대부분 그런 상황에 있기에 부처님 입장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리고 각 경전에서 제시되는 각 내용이 각기 달리 제시되는 사정을 이처럼 이해해야 각기 조금씩 달리 제시되는 내용을 놓고 혼동을 일으키지 않을 수 있다.
어떤 이가 눈을 떠 보는 내용 □ 을 얻는 과정에 대해 앞에서 각 경전에서 제시하는 여러 입장을 대강 살폈는데 이것이 전체적으로 어떤 관계인가를 다시 살피자.
처음 일반적인 입장에서 □ 내용에 대해 그런 내용이 곧 외부 세계의 내용이고 자신 및 자신의 감관이 대하는 외부 대상이고 자신의 마음 밖에 정신과는 별개로 존재하는 외부 물질이고 이 내용이 모든 주체가 다 함께 대하는 외부의 객관적 실재라고 여기게 되는 사정을 보았다. 그리고 이것이 일반적인 입장일 뿐 아니라, 과학책에서 소개하는 입장이기도 한 것이다.
이 입장의 문제를 앞에서 살폈는데 그런데 이렇게 보게 되는 사정도 함께 이해해야 한다.
책상 위에 하나의 사과를 놓고 이것을 어떤 이가 바라보면서 손으로 두드리면 소리를 듣고 코를 대면 사과향을 맡고 입으로 먹으면 사과 맛을 보고 손으로 만지면 또 촉감을 얻는다.
지금 이 상황에서 제각각 다른 감각내용을 얻는데 모두 하나의 사과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자신이 눈으로 보는 그 사과모습을 대상으로 해서 이런 내용을 얻는 것으로 그 주체는 여기게 된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이와 상대적으로
이런 내용을 대하는 부분을 스스로 자신이라고 여기며 대하게 된다.
그런데 이에 대한 부처님의 입장은 여기에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참고로 그런 내용을 제시하는 경전 일부를 다음에 제시해보기로 한다.
...
이 반야바라밀다의 매우 깊은 이치 안에는 유정이 없고
유정이라고 내세울 만한 것도 없으며,
색(色)이 없고 색(色)이라고 내세울 만한 것도 없으며,
무유정무유정시설가득 無有情無有情施設可得 무색무색시설가득 無色無色施設可得
느낌·생각·지어감·의식이 없고
느낌·생각·지어감·의식이라고 내세울 만한 것도 없느니라.
또 눈의 영역이 없고
눈의 영역이라고 내세울 만한 것도 없으며,
귀·코·혀·몸·뜻의 영역이 없고
귀·코·혀·몸·뜻의 영역이라고
내세울 만한 것도 없느니라.
또 빛깔의 영역이 없고
빛깔의 영역이라고 내세울 만한 것도 없으며,
소리·냄새·맛·감촉·법의 영역이 없고
소리·냄새·맛·감촉·법의 영역이라고
내세울 만한 것도 없느니라.
눈의 경계가 없고
눈의 경계라고 내세울 만한 것도 없으며,
빛깔의 경계·안식의 경계와
눈의 접촉 및 눈의 접촉이 연이 되어 생긴 모든 느낌이 없고
빛깔의 경계 내지 눈의 접촉이 연이 되어 생긴 모든 느낌이라고
내세울 만한 것도 없느니라. ...
sfed--대반야바라밀다경[301-400]_K0001_T0220[301-400].txt
위 부분에서 유정은 중생을 의미하고 오늘날 표현으로 생명 이런 표현에 가깝다. 그래서 자신이 자신이라고 보는 그런 내용이나 영희나 철수 기타 새나 두더쥐 이런 생명을 모두 얻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런 내용을 시설해 제시할 만한 것도 없다. 이런 의미다. ...
여기서 색色 부분은 물질로 주로 번역하는데 물질이란 표현은 일반적으로 정신 밖에 있고 정신과는 상대되는 별개의 존재로서 물질 이런 의미로 이해하는 경향이 많아서 이런 착오를 방지하기 위해 그냥 색(色)이라고 표현하기로 한다.
좁게는 어떤 이가 눈을 떠 보는 내용 □ 을 색(色)이라고 표시하고 또 넓게는 색성향미촉과 같이 감각을 통해 얻는 내용 전체를 색(色)이라고도 표현한다. 그런데 이들 내용이 정신 밖에 있고, 정신과는 구별되는 내용으로 볼 것인가가 문제되는 한편 이 문제를 살피는 과정에서 혼동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무색무색시설가득(無色無色施設可得) 부분에서
시설이란 부분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어떤 이가 눈으로 떠 보게 되는 내용을 □ 라고 표시할 때 이 내용을 처음 색(色)이라고 표현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시설이다. 부처님은 여기에 그런 것을 본래 얻을 수 없다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눈도 마찬가지다. 각 주체가 감각해 얻는 내용 안에서 무언가를 붙잡고 눈이라고 여기는데 이것도 마찬가지다. 그외 문제되는 나머지가 다 그렇다.
그런데 이는 일반적 입장과 대단히 다르다. 그래서 이 부분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한 주체가 눈을 떠 얻는 내용을 □ 이라고 표현하면 여기서 부처님이 문제삼는 내용이나 일반인이 문제삼는 내용이 서로 달라서 이렇게 달리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일반적으로 망집에 바탕해 대할 때는 그런 색이나 눈 등이 다 거기에 그렇게 있다고 여기고 대하는 것이고 경전에서 반야바라밀다라고 표현하는 깊은 지혜로 관할 때는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제시하는 것이다.
사정은 그렇지만, 상대를 이해시키기 위해서 언어시설로 그처럼 나타내지만, 사실은 그런 시설을 할만한 것을 얻는 바도 없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여하튼 이렇게 극단적으로 차이가 나는 내용을 검토해야 한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다면 왜 다른 경전 등에서 색성향미촉법 - 안이비설신의 - 안,이,비,설,신,의식 이런 형태로 제시한 것인가. 이 사정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일반인 입장에서는 눈을 떠 보는 내용 □ 에 이러저러한 내용이나 영희나 철수 등등이 그렇게 있다고 여기는데 반야바라밀다를 통해 살피면 왜 그런 것이나 그런 시설을 할만한 것도 얻을 수 없다고 하는가를 살펴야 한다.
반야바라밀다를 닦는 수행자는 다른 이들이 보는 내용 □을 눈을 떠도 전혀 보지 못해서 그런가.
또는 그에 대해서 색이라거나 눈이라거나 영희나 철수라는 분별을 못 해서 그런 것인가. 이렇게 오해하기 쉬운데 그것은 당연히 아니다. 그런 문제가 아니다. 논의 중에 처음부터 논의할 대상이 아닌 부분만 잘 확인해도 혼동이 많이 제거된다. 만일 그렇다면 경전에 위와 같은 표현 자체를 할 수 없을 것이다. 분별을 못하는데 그런 표현자체를 어떻게 하겠는가. 또 눈을 떠 보는 내용 □처럼 논의대상이 되는 내용 자체를 얻지 못한다면, 그에 대해 왜 이렇다 저렇다 논의하겠는가. 그렇지는 않다.
어떤 이가 눈을 떠 보게 된 내용 □ 이 도대체 어떻게 얻어진 것이고 그 정체는 무언가.
이런 문제에 대해 일반적으로 망집을 일으켜서 이해하는 내용과 함께 불교내 경전과 논서에서 제시하는 여러 입장의 상호관계를 살피는데
첫 부분에 일반적으로 이에 대해 망상분별을 일으켜 이해하는 내용을 살폈고 결론적으로 이에 관해 제시하는 내용도 대략 살폈다.
그런데 이 두 입장이 너무 극단적으로 차이가 난다.
일반적 입장은 어떤 이가 보는 □이 곧 그 자신의 외부 세계이고 그가 대하는 외부 대상이고 마음과는 별개의 외부 물질이고 영희나 철수와 함께 다 같이 대하는 외부의 객관적 실재라고 여기고 대하는 상태이고 또 이와 상대적으로 □ 안에 그런 감각을 하는 자신이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런 망상분별이 그냥 영화처럼 환상적 이야기라면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그런데 바로 이를 바탕으로 그 주체가 무한히 생사고통을 겪게 되기에 생사현실에서 생생하게 겪는 생사고통을 해결하려면 이 부분을 올바로 수정해야 한다.
그런데 여하튼 일반적인 입장에서는 이미 사과를 하나 놓고 설명한 것처럼 매번 그 사과를 손대거나 만지거나 하면 소리도 듣고 촉감도 얻는 경험을 반복한다.
그런데 부처님의 입장은 그런 □에 그가 있다고 여기는 그런 내용을 하나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다. 그리고 그런 □ 을 얻는 대상과 그 주체의 감관도 모두 □ 안에서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다.
이 두 입장의 차이가 너무 큰데 여하튼 처음에 제시한 것처럼 일반적으로 일으키는 망상분별을 그 망집상태에서 그가 이해하고 경전에서 제시하는 내용을 이해할 수 있게 되려면 중간에 시설해 설명해야할 내용이 상당히 복잡하다.
이미 앞에서 살폈듯 대학교수가 유치원에서 가르칠 때는 대학원에서 가르칠 내용은 단지 몇개의 단어만 공통한 상태로 상대가 이해하기 쉽게 내용을 제시하듯, 부처님도 각 경우마다 달리 제시하는 내용들에서 공통된 몇몇 핵심 단어는 있지만, 여하튼 그 내용이 서로 차이가 많고 하나의 상황에서 다른 내용까지 함께 제시하지는 않기에 이 각 내용들의 관계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처음 수행을 시작하는 상태에서는 부처님이 제시한 것처럼 단계적으로 하나하나 이해해가면 된다고 보지만,
그러나 지금까지 그런 내용을 반복해 살폈기에 지금은 그 각 내용이 그처럼 달리 제시된 사정을 종합적으로 한 번 살필 필요가 있다.
이는 현실에서 망상분별을 일으키는 상대에게 어떤 형태로 내용을 제시해야 그런 내용을 본래 얻을 수 없다는 사정을 이해하게 만들 수 있는가하는 문제와 관련된다.
이는 반대로 보면 결국 경전에 제시된 각 수행방안을 하나하나 전념해 잘 수행내하가면 점차적으로 앞과 같은 내용을 이해하게 되는데 그것이 어떤 과정을 거쳐 그렇게 되는가를 이해하는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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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앞 문제를 다시 살펴보자.
일반인의 입장은 학력을 불문하고 거의 예외없이 거의 대부분 처음에 제시한 상태에 놓여 있다고 보아야 한다.
반복하지만, 자신이 눈으로 보는 내용 □을 놓고 그것이 곧 외부 세계고, 외부대상이고, 외부 물질이고 외부의 객관적 실재이며 또 그런 □ 안에서 이런 내용들을 상대하는 부분이라고 여기는 그 부분을 또 평소 스스로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현실에 임하고 있다.
그래서 책상에 사과를 하나 놓고 손을 뻗쳐 만지고 두드리고 소리를 듣고 맛을 보는 과정에서나 길거리에서 오가는 사람이나 자동차나 건물을 보는 상황에 위 내용이 모두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태에 해당되지 않는 경우는 욕계 현실에서는 거의 드물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이런 상태에 놓여 있는 중생을 전제로 해서 부처님이 가르침을 다양하게 베풀어서 최종적으로 앞에 제시한 내용을 이해하게끔 이끌었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 내용이 오늘날 경전에 각기 다른 형태로 제시되고 있는 내용들이다.
그래서 이들 각 내용은 본래 어떤 취지로 그런 형태로 제시된 것이고 또 어떻게 이를 통해 앞과 같은 상태에 있던 중생을 점차적으로 최종적 내용을 이해하고 깨닫는 상태로 이끌게 한 것인가를 전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다음 문제를 살피기로 한다.
우선 처음 제시한 일반인의 일반적 입장과 부처님이 최종적으로 제시하고자 하는 내용은 극단적으로 차이가 난다. 이 상태에서 일반인이 그런 망집을 벗어나오게 하려면 어떤 방편이 필요할 것인가.
우선 생각해보면 비록 부처님 입장에서는 각 주체가 얻는 □ 내용에 대해 어떤 부분이 a 라거나 그 a의 생멸 등을 일체 얻을 수 없고 언어로 표현할 길도 본래 없다고 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이런 사정을 이해하게 하려면 일단은 상대가 이미 이해하는 내용을 전제로 놓고 다시 위와 같은 사정을 이해할 수 있게할 일정한 시설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건물을 건축하려면 비록 건물이 완성되고 나서는 다 철거해야 한다고 보지만, 먼저 일정한 비계와 같은 시설을 만들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부처님도 상대의 상태에 맞추어 앞과 같은 사정을 이해하게 이끌려면 그 전에 상대가 이해할 수 있는 일정한 내용을 언어를 통해 방편적으로 시설한 다음 그 상태에서 세속에서 가장 옳다고 보는 내용을 제시한 가운데 점차 앞과 같이 최종적으로 언어를 떠나고 문제삼는 것을 본래 얻을 수 없다는 등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끌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시설을 만든 다음에는 이런 시설을 가지고 다음 방향의 노력이 다시 필요하다.
우선 그런 시설을 통해서 일반인의 입장에서 가진 그런 생각이 어떤 점에서 잘못인가를 이해시켜서 일단 그런 망집을 폐기해 제거할 수 있게 이끌어야 한다.
또 한편 이와 반대로 부처님이 본래 제시하고자 한 내용이 본래 언어를 통해 나타낼 수는 없더라도 결국 앞과 같은 시설을 통해서 그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상태로 제시하여 이끌어야 한다.
또 하나 남는 문제는 사정이 그런데도 왜 현실에서 보는 중생들은 대부분 거의 예외없이
그런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현실을 대하게 되었는가 그 사정도 앞과 같은 시설을 통해 세속 안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또 추가적으로 내용을 제시해주어야 한다.
그 문제는 다음이다.
즉 어떤 주체가 현실에서 얻는 □ 에서 그 주체나 일체의 생명이나 어떤 대상이나 눈,귀,코 등을 얻을 수 없고 이에 대해 일반적으로 갖는 견해가 잘못이라면
정작 현실에서 사과 하나를 책상에 놓고 손을 뻗치면 왜 각 주체는 귀나 손 등에서 소리나 촉감을 얻는 등의 경험을 매번 반복하고 이에 대해 왜 그런 망상분별을 일으키게 되는가. 그 사정이 무언가. 이 부분까지 일반적 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그 사정을 제시해주어야 한다.
이는 쉽게 비유하면 게임기 밖에서는 그런 내용이 전혀 얻을 수 없어도 게임만 들어가 화면 일정 부분에 마우스 커서가 놓이면 매번 어떤 아이템이나 화면 등이 나타나고 매번 캐릭터가 각 단계마다 이런 저런 모습으로 바뀌게 되는가. 이런 의문을 가질 때 이것을 그 안의 내용을 가지고 잘 설명해주어 그 의문을 해결해주어야 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런 사정으로 이런 각 방면으로 부처님이 각 내용을 제시해주는 것이 결국 각 경전에 제시되는 내용들이다.
처음 부분에서 일반인이 눈을 떠 보는 내용 □ 에 대해 이해한 내용이 하나같이 잘못된 망상분별임을 이해시키고 이런 망집을 폐기하고 제거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일체가 무상, 고, 무아, 무자성, 열반, 공임을 이해하게 하고 이와 함께 그런 내용들이 그 안에서 각기 갖는다고 보는 인과(연기)관계의 내용과 함께
각 주체가 얻는 그 일체 내용이 모두 마음내용임을 이해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현실에서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하고 또 그에 바탕해 행하는 업을 중지하는 한편 수행으로 전환하여 임하게 하여 일단 그 주체가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풀려나게 하는 것이 그 취지다.
그래서 처음 이와 관련된 내용이 제시된다.
그리고 그런 사정으로 우선 일반적으로 사과 하나가 나타난 과정에 대해 설명하는 방식과 불교에서 설명하는 방식이 먼저 서로 차이가 나타난다. 그것이 곧 부처님이 제시하는 연기관계에 대한 내용이다. 그리고 논서에서도 이에 대해 6 인 4 연 5 과 이런 형태로 관련 내용을 살펴나가게 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일반적인 입장이 잘못임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그 내용을 얻을 수 없고 언설을 떠난 것이지만, 그러나 또 앞과 같은 언어 방편 시설을 통해서 그 사정을 일단 제시하고 이해시켜야 한다.
예를 들어 반야경전에서 그것을 얻을 수 없고 언설을 떠난 것이라고 제시하지만, 정작 언어를 통해 그런 내용을 그처럼 제시하는 것과 사정이 같다.
이 가운데 존재의 유무와 정체를 살필 때 주로 문제삼게 되는 내용은 결국 실상(實相 dharmatā ; dharma-svabhāva) - 상(相 Lakṣaṇa ) - 상(想 Saṃjña)의 내용이 된다.
그리고 이에 대해 이들 각각의 관계를 잘 이해하고 깨달아서 생사현실에서 공, 무상, 무원무작의 3 해탈문을 얻어내 생사현실의 묶임에서 해탈을 얻게 해야 한다.
그런데 이들 내용은 결국 한 주체가 현실에서 얻고 이를 바탕으로 문제삼아 나가는 각 영역의 내용을 놓고 직접 그 각 내용을 대조해 그 관계를 살피면 된다.
그리고 이런 형태로 각 영역의 관계를 살펴야 할 문제가 현실에 몇 경우가 있다.
즉 먼저 각 주체가 색,성, 향, 미, 촉과 같은 각 감각현실을 얻고 이 각 부분을 놓고 어떤 주체가 분별을 일으킬때 먼저 이런 각 감각현실들과 이에 대해 일으킨 관념분별의 관계가 문제되고,
또 이들 각 내용과 이런 각 내용을 얻는 본 바탕이라고 할 '실재 진여'와의 관계가 문제된다.
그래서 먼저 이 가운데 눈귀코입몸 등을 통해 얻는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의 상호관계가 문제되면 다음과 같이 이를 살피면 된다.
이를 위해 우선 문제되는 감각현실과 관념분별내용을 먼저 잘 구분해서 확보한 다음
그런 감각현실 자체는 곧 관념분별인가? 또 반대로 그런 관념분별 자체는 곧 그런 감각현실인가?. 이렇게 문제를 제기하고 문제되는 각 내용을 살피면 되는 것이다.
이 경우 그렇지 않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내용이 그렇다고 서로 아주 무관한 것이라고 할 수 없으므로 또 이어서 다음 문제를 놓고 그 관계를 살피면 된다.
즉 사정이 그렇다고 해도, 그런 감각현실을 떠나서 그에 대한 관념분별을 얻는 것인가? 이런 형태로 문제를 제기해서 다시 이들 관계를 살피면 된다.
그래서 첫 문제는 쉽게 해결된다.
그리고 실재나 감각현실의 관계를 살피는 그 형식도 위와 같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한 주체가 얻는 감각현실 즉,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그런 감각현실 내용들 일체 내용 □ 즉 넓은 의미의 색이 실재 그 자체인가? - 아니다. 그러면 반대로 실재진여 그 자체는 곧 현실에서 보는 색□인가? - 아니다. 그렇다고 현실에서 보는 색은 그런 실재진여를 떠나서 얻는 것인가 - 아니다.
그래서 이런 사정을 종합해서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공중 무색 무 수상행식... 이런 등의 내용이 반야심경에서 제시되는 것이다.
그외 실재나 관념분별의 상호 관계를 살피는 형식도 위와 마찬가지고 실재 진여와 마음의 관계나 마음과 마음안에 맺힌 내용의 관계나 기타 꿈과 현실의 관계나 거울과 거울면에 비친 내용의 관계를 살필 때도 다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마음을 거울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거울과 거울에 맺힌 어떤 한 영상도 위와 같은 형태로 그 관계를 살피게 된다.
거울에 맺힌 의자나 책상 모습을 놓고 그런 모습을 맺힌 거울과의 관계를 살필 때 거울에 맺힌 의자모습이 정작 거울 기능을 하는 거울은 아니고, 또 거울 자체도 그런 거울에 맺힌 모습은 아닌데 그러나 거울에 맺힌 그런 각 모습들은 그 거울을 떠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의미다.
그래서 이처럼 서로 각 영역에서 얻어지고 문제되는 내용이 있을 때 그들 상호간의 관계를 살피는 형식 자체는 공통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문제되는 이들 각 내용을 살피는 것은 반야경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즉, 현실에서 각 주체가 얻는 감각현실 □ 은 그에 대해 그 주체가 분별을 일으키는 분별내용이 아니다. 또 반대로 그런 분별 내용 자체는 그런 감각현실 □ 이 아니다. 그러나 각 주체는 그런 감각현실 □ 을 떠나 그러한 관념분별을 얻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처럼 이런 내용에 대해 제시하는 그 형식은 실재진여와 감각현실의 관계나 실재진여와 관념분별의 관계나 실재진여와 마음의 관계를 살피는 경우에서 다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 내용이 위에서 살핀 경전 내용처럼 제시되는 것이다.
이들 각 관계 가운데 실재진여와의 관계가 특히 더 문제되지만, 또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의 관계 등 현실에서 각 주체가 얻는 내용들의 각 관계도 현실에서 대단히 많이 문제되므로 이들 각 영역의 내용을 위와 같이 살펴서 결국 앞과 같은 결론적 내용이 제시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만 제시하면 대부분 여전히 상쾌하지 않다고 여기게 된다.
즉 사정은 그렇다지만, 그러나 여전히 현실에서 자신은 사과 하나를 놓고 눈으로 보면서 그것을 사과라고 여기게 되는 한편 또 그 부분을 손으로 두드리고 만질 때마다 소리도 듣고 촉감도 얻는 경험을 반복한다. 그리고 거리에 서서 다닐 때 보게 되는 내용에서 앞 부분에 있는 것은 영희고 또 저걱은 자동차고 건물이고 그런 가운데 자신이나 영희는 그런 차를 타고 여기저기 오간다는 등으로 분별하면서 생활해나가는 상황이다.
그래서 처음 이에 대해 이해했던 내용이 잘못인 한편 뒤의 내용이 원칙적으로 맞는다고 해도,
그러나 현실에 임하면 위와 같은 경험을 반복하는 가운데 자꾸 처음 일으킨 형태대로 망상분별을 일으키게 되고 그래서 그런 부분을 놓고 자신에 대한 상을 취하여 임하게 되고 또 그런 바탕에서 집착해 업을 행하게끔 되는 것이다.
따라서 다시 그런 현실 사정이 왜 그렇게 되는가에 대해서 그 사정을 또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단지 앞에 제시한 내용만 가지고는 그 상황에서 자신이 어떤 사정으로 그런 망집을 반복해 일으키게 되는가 그리고 그 상황에서 어떻게 임해야 그런 상태에서 벗어나게 되는가. 이런 내용 전반을 스스로 잘 이해하지 못하고 또 수행을 행하지 못하게 되고 결국 망집을 바탕으로 한 생사묶임에서 끝내 잘 벗어나오지 못한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처음에 행한 설명과 비슷하지만, 좀 더 깊게 생을 출발하는 과정에서부터 근본 무명 어리석음을 바탕으로 어떤 형태로 임하여 어떤 사정으로 자신이 이 세계에서 이런 형태로 세상을 대하고 삶을 대하게끔 되었는가 그 사정에 대해 역시 앞처럼 임시방편으로 각 내용을 시설해서 이에 의존하여 그에 관한 내용을 또 제시하고 설명해서 그 사정을 잘 이해하게끔 제시해 이끌어야 할 필요가 있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것이 생사 현실에서 앞의 결론처럼 본래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는데도 그러나 어떤 형태로 망집을 일으키고 이후 이를 바탕으로 이후 어떤 형태로 업을 행하는 가운데 각 생명이 각 세계에서 생을 받아 삶을 살아가게 되고 그런 가운데 감각현실을 얻고 관념분별을 행하고 업을 행하고 또 그 업으로 인해 또 다시 어떤 다른 세계에 그런 식으로 무한히 반복해 임하게끔 되는가에 대해 그 과정과 사정을 1,2,3,4,5,6,7,8 이런 여러 정신을 통해서 설명해가는 내용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내용을 통해서 결국 그런 사정으로 매 생마다 각 주체가 근본 무명 어리석음에 바탕해 번뇌 망집을 일으키고 그에 바탕해 업을 행해서 그러한 상태로 임하게 된다는 번뇌[혹]- 업 - 고의 관계와 그 사정을 잘 이해하는 한편,
또 이런 내용을 바탕으로 그런 현실 내용이 대단히 반복하고 다수가 경험하고 무한히 그런 상태를 얻어 나가게 되지만, 그러나 그 하나하나가 앞과 같은 관계로 실답지 않다는 사정까지 이해하면 기본적으로 망집을 제거하는데 이르게 된다고 일단 보는 것이다.
물론 이 각 부분의 자세한 내용은 또 자세히 살피면 복잡하지만, 여하튼 크게 위와 같은 방향으로 각 내용이 제시되는 사정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는 가장 기본적으로는 각 주체가 처음에 제시한 형태로 망집을 일으켜 이에 바탕해서 업을 행하여 극심한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에 들어가 묶이는 것을 해결하는 데 그 목표가 있다.
이는 결국 어떤 주체가 무언가를 얻으면 그 내용이 다른 영역에도 그처럼 있다고 여기면서 그것이 실답다고 여기는 한편 그에 대해 집착을 갖고 대하며 업을 행해나가는 증세와 관련된다.
결국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경전 등을 통해 처음 일으킨 그런 망상분별이 옳지 않고 현실 사정이 본래 그렇지 않음을 반복해 살피는 것이다.
이는 쉽게 이해하면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일으키는 다음 증상과 관련된다고 할 수 있다. 즉, 현실에서 어떤 이가 굶주리 상태에서 라면을 먹으면 그 라면이 대단히 맛있고 좋다고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가 이후 매번 그런 상태로 라면을 먹을 때마다 그런 좋음을 반복해 얻게 되면 이후 그 주체는 그런 사정 때문에 그 라면에 자신이 느끼는 그런 좋음이 있다고 여기게 된다.
이 현상은 다음을 의미한다. 즉 어떤 이가 어떤 경로로 어떤 영역에서 하나의 내용을 반복해 얻으면 다른 영역에도 그 내용이 그대로 있다고 여기면서 그런 사정으로 그것이 실답다고 여기고 집착을 갖게 되는 현상과 관련이 된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 않기에 앞에서 제시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잘 살펴서 그렇게 얻은 내용이 실답지 않음을 기본적으로 잘 이해하고 그 내용을 대해야 한다.
이러한 사정은 '꿈의 비유'가 나타내는 내용이기도 하다. 침대에 누어서 바다나 황금 꿈을 꾸었다는 경우가 그것이다. 이 경우 침대가 없다고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 꿈을 꾸지 않았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 꿈 내용은 그런 조건에서 그렇게 얻은 것 뿐이고 그 내용은 침대에서는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고 그런 사정으로 그런 꿈은 실답지 않고 집착을 갖고 대할 내용이 아니라고 제시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내용들도 앞에 제시한 형식을 통해 판단하면 그 관계와 사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제 처음 문제로 가보자. 어떤 이가 현실에서 눈을 떠 얻는 내용 □ 에 어떤 '생명'이나 '생멸' '오고감'이나 그런 행위를 하는 '주체'나 '대상' 등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는 어떤 이가 눈을 떠 얻는 그런 내용 □ 을 그 상황에서 얻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내용을 얻고 관념분별 영역에서 그 각 부분이 무엇이라거나 생멸한다거나 있다 없다 등등의 분별을 일으키지 않았다거나 또는 못한다거나 또는 그런 분별을 행하면 안 된다는 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런 분별은 분별영역에서 일으킨 내용일 뿐 그 내용은 감각현실 □ 에서는 '얻을 수 없음'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분별을 감각현실을 놓고 행할 때는 분별을 한다해도, 그런 사정까지 함께 잘 이해하면서 분별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영화를 본다면 그것이 영화라는 것을 알고 그래서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고 그런 바탕에서 영화를 대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과 같다.
또 이와 마찬가지로 그런 관념분별의 내용은 관념분별 내용일 뿐 본 바탕이 되는 실재 진여 영역에서는 마찬가지로 그 내용을 얻을 수 없음도 또 그런 바탕에서 제시한 것이다.
또 한편 그렇게 문제삼는 감각현실 내용 □ 은 또 그 내용대로 그런 감각현실을 그런 감각영역에서 그렇게 얻은 것일 뿐 본 바탕이 되는 실재 진여 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음을 제시하는 것이다.
또 마찬가지로 그런 감각현실은 반대로 관념분별을 얻는 영역에서도 얻을 수 없음도 마찬가지다.
경전에서 제시하는 것은 결국 이 부분이다.
이런 여러 측면을 골고루 살피는 가운데 가장 중요한다고 보는 것은 물론 본 바탕이 되는 실재 진여의 영역과의 관계이지만, 앞에 제시한 여러 영역의 내용들이 하나같이 현실에서 다 문제가 되므로 함께 취급하게 된다.
현실에서 문제삼는 것은 알고보면 관념분별 영역안의 내용이거나 언어표현일 뿐이다 그리고 이 내용이 앞에 제시한 구절에도 제시되고 있다.
즉 다음이다. ..
생사란
단지 세속의 말에 따라 존재하는 것입니다.
...
이는 반야경전에서도 예를 들어 수행에서 문제삼는 보살이나 반야바라밀다는 명칭뿐이다라는 형태로 제시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렇게 제시하는 사정은 위 내용 때문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거의 대부분은 이렇게 서로 구분되는 각 영역의 내용을 놓고 이들 각 내용을 서로 접착시켜서 대하고 망집을 일으킨다. 그래서 어떤 한 내용은 다른 영역에서도 그처럼 있다고 여기면서 그것을 실답다고 여기며 집착을 일으켜 대하고 그에 바탕해 업을 분주히 행해가며 임하게 된다.
앞에서도 그 예를 들었는데 라면을 먹고 좋음을 느꼈다고 하면 그 좋은 느낌을 자신이 보는 라면의 감각현실에 밀어 넣고 이 내용을 접착시키는 현상이다.
그리고 문제되는 각 영역마다 다 이런 형태로 임하게 된다.
즉 자신이 거리에서 어떤 내용을 눈으로 보고 그 다음에 그 일정 부분이 영희라고 생각을 일으켰다면, 이후 그렇게 생각한 내용을 역시 감각현실 영역에 그대로 밀어 넣고 자신이 생각한 내용이 그 감각현실 영역에 그처럼 '있다'고 여기고 이후 그런 감각현실부분은 곧 그런 내용'이다' 이렇게 여기면서 대하게 된다. 그런데 바로 이 부분부터가 망상분별 증상이다.
왜냐하면 정작 그 감각현실 영역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는데 자신이 일으킨 그런 분별내용을 거기에 밀어 넣고 그런 내용이 거기에 '있다'고 여기는 한편 곧 그 감각현실 부분이 자신이 생각한 내용'이다'라고 여기고 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부분이 망상분별 증상이다. 병원에서 어떤 망상환자가 화분을 대할 때마다 화분에는 없는 우주인이 거기에 있다고 망상을 매번 일으키는 것과 이 사정이 마찬가지다.
그리고 나머지도 마찬가지다. 위와 같은 망집을 일으켜 대하는 이는 본 바탕이 되는 실재 진여가 무엇인가가 문제될 때도 역시 앞과 같은 형태로 자신이 현실에서 얻는 감각현실이나 자신이 일으킨 관념분별을 모두 본 바탕이라고 할 실재 진여 영역에 밀어 넣게 된다.
그리고 그런 내용이 거기에 '있다'. 그리고 실재 진여는 곧 그것'이다'라고 여기면서 자신이 얻는 내용이 그런 사정으로 실답다고 여긴다.
또 이를 문제삼으면 사정이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그런 감각현실을 얻고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지 사정이 그렇지 않으면 무슨 연유로 그런 감각현실을 매번 얻고 또 매번 그런 생각을 일으키게 되는가 이렇게 오히려 반문하면서 자신이 그처럼 일으킨 망상분별을 집착하며 이에 바탕해 업을 행하며 나아가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그 이후 그 바탕에서 그 자신을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로 묶이게 만드는 업도 중단하고 제거할 도리가 없게 된다.
또 그런 사정으로 그런 업으로 이후 생사에 묶이게 되는 것도 어쩔 도리가 없다.
그리고 그런 업을 통해 그런 세계에 처하게 된 이후에는 또 마찬가지 형태로 하나같이 실답지 않는 내용을 놓고 생생하고 실답게 생사고통을 무한하게 겪어나갈 도리 밖에는 없다.
그리고 생사현실의 문제는 바로 이 부분이다.
정작 그런 생사고통을 만들어 내는 근본원인은 그가 일으킨 망집이지만, 여하튼 이를 통해 업을 행하고 3 악도에 들어가 그런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에 묶이면 이후 그런 상태에서는 그런 상태를 벗어날 수행방안을 제대로 실천하고 성취할 도리도 또 없다. 그래서 이것이 종합적으로 문제가 된다.
여하튼 넓게 경전에서 각기 제시되는 각 내용들이 어떤 취지로 각기 그렇게 제시되는가를 살폈는데 이후에는 이렇게 대강 제시한 각 부분의 내용을 조금 더 세세하게 이어 살펴나가기로 한다.
우선 부처님이 중생의 상태에서 현실의 본 사정을 이해할 수 있게끔 사용하는 방편 시설이 어떤 성격을 갖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 주체가 눈을 떠 얻는 내용 □ 을 놓고 이 사정을 살피면 부처님은 이런 내용 □ 안에 그런 주체가 있다고 보는 주체나 대상이나 행위 등등을 일체 얻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그런 내용 □ 안에 그런 주체나 대상이나 그 주체가 행하는 행위나 생멸 생사 등등이 있다고 여기며 이를 대하는 일반적인 입장은 그런 본 사정을 스스로 바로 깨닫지도 못하고 또 부처님이 그런 취지로 직접 이에 대해 제시하는 내용도 또 바로 이해하지 못하므로,
여하튼 일단 그런 내용 □ 을 놓고 일반인의 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언어를 통해 일정한 시설을 해서 그 사정을 설명하고 이해시킬 도리 밖에는 없다.
그래서 결국 경전에서 보듯, 부처님이 일정한 언어를 통해서 그런 사정을 단계적으로 제시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일반적인 입장에서 그 주체가 눈을 떠 □ 과 같은 내용을 얻고 그 각 부분에 대해 이 부분은 사과고 이 부분은 영희이고 철수고 나무고 또 이 부분은 그런 것을 상대해 대하는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그렇게 말한다면,
부처님은 일단 그런 현실 내용 □ 안에 그런 내용을 본래 얻을 수 없다고 보지만, 그러나 일단 그런 사정을 이해시키고자 상대가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임시방편으로 그런 각 부분을 언어를 사용해 '가리키는' 입장인 것이다.
그래서 외관만 놓고 보면 일반인이 눈을떠 보는 내용 □ 을 '색'이라고 표현한다면 부처님도 그런 내용 □ 을 '색'이라고 표현하여 내용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같다.
그런데 여기에 차이가 있다.
일반인이 눈을 떠 보는 내용 □ 을 '색'이라고 표현하고 또 그 안에서 어떤 부분은 대상[경]이라고도 하고 어떤 부분은 눈[안]이라고도 하고 어떤 부분은 영희고 사과고 어떤 부분은 자신이라고 하고 그런 각각의 생멸이나 생사 등을 말한다면 그런 입장은 우선 그런 각 부분에 자신이 그런 표현으로 이해하는 그 내용이 거기에 그렇게 '있다'라고 여기는 한편 또 그런 각 부분은 곧 그런 내용'이다'라고 여기면서 즉 그런 감각현실과 자신이 일으킨 분별내용을 서로 접착시킨 가운데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 상태다.
그리고 결국 이런 현상이 망상분별 증세다.
그런데 이런 망상분별 증상을 제거하기 위해서 방편상 그러한 언어로 시설을 해서 그 사정을 나타내는 입장은 그처럼 각 주체가 눈이나 귀, 코, 혀, 몸 등으로 얻는 각 감각현실 □ 에 그가 생각하는 그런 내용을 본래 얻을 수 없음을 잘 이해하지만, 그러나 상대를 이해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일단 상대의 상태에 맞추어 그런 각 부분의 내용을 그런 언어로 일단 '가리킨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일단 그런 언어표현으로 그런 내용을 가리키면서 그 사정을 설명해야 비로소 일반인이 그런 망상분별과 집착 증상을 제거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차이를 먼저 잘 구분해 이해해야 한다.
같이 눈을 떠 보는 어떤 내용을 놓고 일반인도 그것을 색이나 꽃이나 영희라고 표현하고 그에 대해 그 본 사정을 설명하는 입장도 역시 그것을 색이나 꽃이나 영희라고 표현해 가리켜서 외관은 비슷해보이지만, 일반적인 입장은 자신이 그렇게 표현하고 나타내는 내용이 그 감각현실 부분에 그대로 '있다'고 여기는 한편 그 부분은 곧 그런 내용'이다'고 여기면서 그런 표현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경전의 입장은 본래 그런 내용은 그런 부분에서 얻을 수 없지만, 다만 상대에게 그런 사정을 이해시키는 방편 시설로서 그런 부분을 일단 '가리키고자' 하는 취지에서 그런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가명'이나 '방편' '시설' '안립' 이런 표현 등이 나타내는 의미다.
그런데 외관상으로는 언어 표현은 같으므로 이 각 표현이 정작 어떤 취지에서 제시된 것인가에 대해 혼동을 일으킬 여지가 있다.
그래서 처음 경전을 대할 때는 각 언어표현이 자신이 평소 이해하는 그런 의미를 나타내는 것으로 기본적으로 오해하면서 표현을 대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의 언어표현이 갖는 의미나 취지에 혼동을 일으키기 쉽다. 이것이 방편시설을 통해 행하는 가정적 논의가 초보 수행자에게 일으키는 문제의 하나다.
하나의 언어표현을 놓고 일으키는 혼동은 결국 앞에서 제시한 여러 입장 즉 일반인이 갖는 망상분별의 입장과 그 본 사정을 이해시키기 위해 그런 언어 방편을 통해 다양한 취지에서 내용을 제시하는 입장이 서로 다르기에 발생한다.
간단히 다시 정리하면 색이나 근, 경, 식 이런 표현을 대하면 일반인은 자신이 이해하듯 그 표현이 가리키는 그 부분에 곧 그런 내용이 '있고' 그런 부분은 그런 내용'이다'. 그리고 그런 표현은 그런 내용을 그 안에 담고 있다. 이렇게 자신의 망집에 바탕해서 그 각 내용을 접착시켜서 이를 이해하게 된다.
또 그런 내용은 곧 자신 외부에 있는 외부세계의 내용이고 자신 감관이 대하는 외부대상이고 마음과는 별개의 외부물질이고 모든 주체가 다 함께 대하는 외부의 객관적 실재라는 형태로 그 각각의 표현에 그런 실질내용을 담아 이해하고 또 이와 상대적으로 평소 자신이라고 여기는 부분도 그와 같다고 여기며 이를 대한다.
그리고 감각현실과 관념분별 그리고 언어표현 사이에서도 그렇게 그 내용이나 의미를 이해하지만, 이런 바탕에서 본 바탕인 실재 영역에 대해 논의할 때도 또 마찬가지 자세로 임하게 된다.
그런데 본래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이해하고 그런 사정을 이해시키고자 일단 그런 언어 표현을 시설해서 그런 부분을 '가리키는' 입장은 비록 그렇게 그런 부분을 그런 언어 방편 시설로 가리키지만, 정작 그런 언어나 그런 언어가 나타내는 분별내용이 그런 부분에 그렇게 있다거나 그 부분이 곧 그것이라고 그런 내용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차이가 있다.
그리고 이런 시설 방편을 통해 최종적으로 그 상대가 그런 본 사정을 잘 이해하게 되면 마치 건축을 위해서 임시로 시설한 비계와 같은 시설 등은 나중에는 철거해야 한다고 보게 된다.
그래서 부처님이 설한 모든 가르침은 비유하면 강을 건너가게 하기 위해 임시로 제공한 뗏목과 같아서 강을 건너가면 이후에는 버려야 할 내용이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뗏목이 강을 건너는데 소중했다고 강을 건넌 이후까지 머리에 짊어지고 다니면 곤란한 것처럼
부처님이 망집과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중생들이 벗어나 해탈을 얻게 하기 위해 방편으로 언어 시설을 통해 제시한 내용을 놓고
이들 내용은 부처님이 제시했기에 각 영역에 그처럼 실답게 있는 내용이다 이런 식으로 임하면 오히려 곤란하다는 의미다.
그래서 이런 방편시설을 통해 강을 건넌 상태는 본래 청정한 상태라고 할 본 바탕을 가리고 있던 온갖 망상분별과 실답지 않은 내용에 대한 집착을 모두 제거하고 수행을 하여 생사고통에서 벗어나 해탈을 얻고 회신멸지의 상태에 이르는 것을 일단 기본목표로 하게 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주의할 점이 있다.
건축을 마친 뒤 건축과정에서 시설한 시설물을 철거할 때 처음 망집을 일으킨 입장은 시설만 철거하지 않고 건축물까지 함께 다 철거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기 쉽다.
즉, 부처님이 본래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지만, 어떤 이가 얻는 감각현실 □ 에 색이나 경-근-식 또는 색- 안 -안식 등등을 시설하여 가르침을 설하여 현실의 본 사정을 깨닫게 하여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게 한 후 이런 취지로 시설한 뗏목과 같은 것은 철거하여 한다고 제시하면 망집을 일으킨 입장에서는 그 표현에 접착시켜 놓았던 내용들까지 모두 철거하려는 경향을 갖는다.
이는 다음 사정 때문이다.
부처님이 방편시설을 통해 일정한 표현으로 어떤 주체가 감각한 내용 □ 등의 각 부분을 가리켰다면 망집에 바탕한 입장은 처음 그런 표현으로 관념분별과 그런 감각현실의 각 부분 □을 모두 접착시켜 대하고 더 나아가 실재 영역까지도 접착시켜서 이를 대하게 된다. 그러다가 그런 내용은 뗏목과 같은 것이라고 제시하여 이것을 버리라고 하면 이제는 또 앞과 같이 접착시켜 놓은 그 모든 것을 다 버려야 한다고 오해하고 임하게 되기 쉽다.
다음과 같은 예를 들 수 있다.
예를 들어 망상분별과 생사의 묶임에서 완전히 벗어나 아라한이 되면 그는 이제 망집에 묶인 상태에서 벗어나 해탈지견을 얻었다고 하고 평소 살아 있을때도 그런 해탈의 상태를 그처럼 표현하게 된다. 즉 살아 있는데도 그런 사정에서 생사에서 벗어났다고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망집에 바탕해 임하는 일반인들의 입장에서는 아라한이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났다는데 여전히 일반인들과 마찬가지로 여기저기 오가며 생활하는 한편 정작 때가 되면 일반인들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똑같지 않은가. 이렇게 이해하게 된다.
즉 일반인 입장에서는 망집에 바탕해 이들 각 내용을 모두 접착시켜 대하는 상태이기에 예를 들어 아라한이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났다는 표현으로
위와 같은 내용까지 모두 없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위와 같은 의문을 갖는 것이다.
또 마찬가지로 반야경전이나 중관론 등에서 생사현실에 생멸이나 오고감 등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면 앞과 마찬가지로 정작 그런 내용을 제시하는 이는 현실에서 여기저기 오고가는데 그런 생멸과 오고감을 얻을 수 없다고 하니, 결국 이것이 궤변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런 식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처음 이 부분을 잘 이해해야 한다. 즉, 경전 등에서 생사현실에 생멸이나 오고감이나 같고 다름, 있고 없음 등을 일체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는 것은 그 상황에서 각 주체가 감각내용 □ 을 그렇게 얻지 않았음을 제시한 것이 아니다. 또는 그런 감각내용 □을 얻지 못한다거나, 또는 얻으면 안 된다고 제시한 것이 아니다.
또 마찬가지로 그런 감각현실에 바탕해 그 주체가 일으키는 관념분별 등도 그 상황에서 그 주체가 일으키지 않았다거나, 얻지 못한다거나, 또는 그런 관념분별을 일으키면 안 된다고 제시한 것이 아니다.
또 본 바탕이 되는 실재 영역의 내용과의 관계도 그 사정이 마찬가지다. 본 바탕에 그런 오고 감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는 것은 본 바탕인 실재에는 전혀 아무 내용이 없음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망집을 일으켜서 각 영역을 접착시켜 대하고 있던 입장에서는 경전에 제시한 그런 표현이 모두 곧 그런 내용을 의미한다고 이해하기 쉽다.
그래서 그런 감각현실 □ 을 놓고 그안에 그런 주체와 그런 대상과 그 생멸, 생사, 오고감이 '있다'고 여기던 입장에서는 이제 그런 내용은 거기에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면
이를 통해 그가 그 표현으로 접착시켜 이해하던 그런 감각현실 □ 을 아예 얻지 못하고 그런 내용 □ 은 없다거나, 또는 그런 분별 내용 자체가 없다거나, 또는 이를 통해 본 바탕인 실재영역에 아무 것도 전혀 없다고 제시한 것으로 오해하면서 이 문제를 대하기 쉽다.
그래서 이런 오해를 먼저 논의에서 제거해야 한다. 이렇게 오해하고 논의에 임하면 언어표현을 통해 일으킨 혼동을 제거하기 어렵게 된다. 그런데 이런 문제는 그가 평소 망집에 바탕해서 각 영역에서 문제삼는 내용들을 평소 서로 다 접착시켜 놓고 각 표현을 대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앞에서 실재 - 감각현실 - 관념분별의 각 영역을 놓고 그 관계를 살필 때 어떤 한 영역에서 어떤 내용을 얻을 때 그것은 다른 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는 내용으로서 그런 상황 그런 조건에서 그런 영역에서만 얻게 되는 것으로서 그런 사정으로 집착을 갖도 대할만한 실다운 내용이 아니라고 제시하는데
이는 위 관계에서 자신이 어떤 관념분별을 일으킬 때 이 관념분별을 다른 영역에 밀어 넣고 다른 영역에도 그런 내용이 있다고 여기면서 집착을 갖지 말라는 의미다.
즉 관념분별 x=> 감각현실 관념분별 x=> 실재 또 더 추가하면 관념분별 x=> 참된 진짜로서 영원불변한 실체
이처럼 각각 문제되는 관계에서 그런 관념분별내용을 다른 영역으로 밀어 넣고
그런 내용이 다른 영역에도 그처럼 있다거나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기지 말라고 x[부정과 금지]를 표시해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관념분별을 일의키면 자꾸 그것을 가지고 위와 같이 대하게 되므로 그렇지 않음을 잘 이해하라는 의미다.
또 마찬가지로 한 주체가 얻는 각각의 감각현실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즉
감각현실 x=> 실재 또 더 추가하면 감각현실 x=> 관념분별 감각현실 x=> 참된 진짜로서 영원불변한 실체
이처럼 각각 문제되는 관계에서 그런 감각현실을 다른 영역으로 밀어 넣고
그런 내용이 다른 영역에도 그처럼 있다거나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기지 말라고 역시 x[부정과 금지]를 표시해 나타내는 것이다.
문제삼는 각 내용이 발생하는 순서를 놓고 생각하면 본 바탕이되는 실재에 바탕해 => 감각현실을 얻고 => 또 이에 바탕해 관념분별을 일으킨다고 보기에 실재 => 감각현실 => 관념분별 이런 순서 형태로 보게 되지만,
정작 현실에서 이런 내용을 얻고 나서 각 내용의 본 정체를 문제삼을 때는 거꾸로 자신이 최종적으로 얻는 관념분별을 바탕으로 이런 내용을 언어로 표현해가며 논의해가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앞과 같은 망집을 바탕으로 이들 내용을 다 접착시켜 놓고 대하기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망집을 제거하라고 하면 이제는 또 그런 망집만 제거하면 되는데 여기에서 처음 망집을 바탕으로 해서 접착시켜 놓은 것을 다 함께 제거하려고 임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또 이것이 문제된다.
그래서 앞에 제시한 것처럼 생멸이나 오고감이 없다고 제시하면 이제 그 말을 듣고 나서는 그래서 실재 진여는 아무 것도 전혀 없다고 했다고 이해하거나 아예 감각현실이나 관념분별을 아무 것도 없다고 이해하거나 또는 현실에서 그런 감각현실이나 관념분별 자체를 처음부터 얻지 않아야 한다고 이해하거나 이런 식으로 또 임하게 되기 쉽다.
그래서 앞 내용을 다시 잘 살펴야 한다. 위 내용은 어떠 내용을 얻고 나서 그 내용을 얻지 못하는 다른 영역에 그런 내용이 그처럼 있다고 여기는 그런 망집을 일으켜 그런 내용이 실답다고 여기며 집착하고 더 나아가 그런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해서 그런 망집을 벗어나지 못한 전제에서는 극심한 생사고통을 받는 세계에 묶여 무한히 지내는 상태에 묶이는 문제를 제거하라고 제시한 것이다.
여기서 각 주체가 생사현실에서 얻는 감각현실이나 관념분별은 역시 본 바탕을 놓고 살피면 역시 실답지 않은 것이어서 회신멸지를 추구하는 입장에서는 물론 이 내용까지 제거해도 무방하지만, 그러나 처음에 그런 망집을 제거하라고 한 내용은 이들 각 내용을 얻고 이를 통해 일으키는 망집을 제거하라고 한 것이지,
그런 감각현실과 관념분별 자체가 문제이기에 아예 그런 내용을 얻지 못하도록 각 감관이나 인식기관에 독을 투여해 그런 감각현실이나 관념분별을 아예 처음부터 일으키지 못하도록 해서 바위나 돌 같은 무정물 상태처럼 되어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런 것이 목표라면 처음부터 그렇게 독이나 수술도구를 가지고 그것을 제거하는 것을 수행이라고 제시해야 할 일이겠지만, 그런 것을 생사묶임에서 벗어나는 수행이라고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또 그렇게 하면 그런 망집을 일으킨 주체가 이를 통해 생사묶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 상황은 그렇지만, 그런 생사묶임에 묶이게 되는 근본 사정이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간혹 혼동을 일으켜 위 내용을 위처럼 오해하고 대하는 경우도 많다. 그것은 처음부터 그가 그런 망집상태에서 이들 내용을 대하고 이해했기에 그런 것이다.
그리고 또 한편 위와 같은 기본적 내용과 사정을 이해한 후에도 수행과 관련해서는 조금 더 복잡하게 살펴나가야 할 부분이 많다.
현실에서 한 주체가 눈을떠 얻는 내용 □ 을 놓고 이에 대해 일반적으로 일으키는 망상분별과 그것을 제거해내고 또 그 본 사정을 제시해 이해할 수 있도록 사용하는 방편 시설의 문제를 앞에서 살폈다.
그런데 위와 같은 기본적 내용과 사정을 이해한 후에도 수행과 관련해서는 조금 더 복잡하게 살펴나가야 할 부분이 많다.
그 사정은 다음이다.
원래 위와 같은 내용만 잘 이해하고 생사현실에서 일으키는 망집을 잘 제거하면 원칙적으로 생사고통에서 바로 벗어날 수 있다고 보게 된다.
그것이 곧 반야심경에서 제시하는 행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 도일체고액 이런 구절이 의미하는 내용이다.
즉 실상이 공하다는 것을 관함으로써 곧바로 생사현실에서 겪는 일체의 고통과 재앙에서 쉭 벗어나게 된다는 내용이다.
즉 어떤 주체가 생사현실에서 얻는 감각현실 내용□과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일으키는 분별내용들 그리고 현실에서 얻는 내용들의 본 바탕이 되는 실재 진여의 관계는 비유하면 어떤 한 영역에서 라면을 얻으면 다른 영역에서 벽돌을 얻는다는 관계처럼 알고보면 엉뚱하다. 그것이 얻어져서 그렇게 얻었다고 보지만, 라면과 벽돌의 관계처럼 사실은 좀 엉뚱한 것이다.
그런데 일단 현실에서 각 주체는 매번 그런 라면을 얻고 벽돌을 얻는 관계를 무한히 반복하므로 이런 사정으로 자신이 얻는 벽돌이 라면에 그렇게 '있다'거나
그 라면이 곧 그 벽돌'이다'라고 여기면서 실답게 집착하며 대하는 상태다.
그런데 반야바라밀다 지혜로 깊게 이 사정을 관찰하면 각 영역의 내용은 그렇지 않음을 관하는것이다.
그래서 실재 진여는 아무 내용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현실에서 문제삼는 그런 내용과 관련한 참된 진짜라고 할 영원불변한 것이 없고 [무아, 무자성 ] 또 현실에서 그런 조건에서만 각 현실내용을 얻는 주체는 그 내용을 끝내 얻을 수 없는 것으로서 이를 일단 별 의미를 갖지 않는 '공'이라는 표현으로 방편적으로 시설해 제시하는 것이다. [일체개공]
한편 한 주체가 얻는 감각현실은 감각현실대로 본 바탕이 되는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도 아니고 단지 그러그러한 상황과 조건에서 얻게 되는 마음안 내용임을 제시하는 것이다.
또 그런 상황에서 일으키는 분별내용은 분별 내용대로 그런 내용을 얻게 된 바탕이 된다고 보는 감각현실과 그 관계를 살피면 그 감각현실을 얻고 그것을 이리저리 묶고 나누면서 헤아리는 가운데 일으키는 것으로서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은 라면과 벽돌처럼 사실은 엉뚱한 내용이어서 관념분별 안에는 그런 감각현실에 해당하는 내용이 들어있지도 않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임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늘 현실에서 이 둘을 접착시켜 이해하던 입장에서는 이들 사정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침대에 누어서 꾼 바다나 황금꿈의 비유나 눈에 병이 생겨 본래 없는 허공의 꽃을 보는 상태라거나 수정구슬에 빛이 비치면 거기에 황금이나 사파이어가 있다고 오해하게 된다는 파지가 보배의 비유나 세모를 그린 비닐과 동그라미를 그린 비닐을 겹쳐 놓고 대하면 세모가 있는 비닐에도 동그라미가 있다고 여기면서 각 비닐에는 본래 없는 안이 세모인 도너츠 모양이 각 비닐에 있다고 여기게 되다는 비유나 먹물을 흩뿌려 놓은 상태에서 그것을 거미나 사람으로 보고 대하거나 또는 격자로 나눈 가운데 각 부분을 어떻게 묶고 나누고 대하는가에 따라 각 경우마다 다른 관념을 일으킨다는 등을 통해 이 사정을 좀 더 쉽게 빨리 이해하는 것이 낫다.
여기서 감각현실을 얻고 나서 관념영역에서 각 부분을 이리저리 묶고 나누면서 그때마다 엉뚱한 관념분별을 일으키는 사정은 그 감각현실을 격자로 나누어 놓고 설명하면 조금 이해가 쉽다.
감각현실을 얻고 이를 일정부분을 함께 묶어서 관하면 거기에 집이 있다고 여기게 되는데 정작 그 상황에서 각 부분을 떼어서 대하면 이 부분은 기둥이나 마루 처마 이런 식으로 또 분별을 일으키게 된다. 그런 경우 기둥을 놓고 그 기둥이 집이라고는 할 수 없고 전체 집을 놓고 그것이 기둥이라고 할 수는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일정부분을 묶어서 대하면 거기에 영희가 그렇게 있다고 여기고 그 부분은 영희다 이렇게 여기고 대하는데 그 상황에서 달리 부분을 묶고 나누면 이 부분은 손이라거나 다리라거나 이런 식으로 분별하게 된다. 그런데 그 손만 떼어내서 그것이 영희라고 할 것인가 또는 반대로 영희 전체를 놓고 그것이 손이라고 할 것인가 문제된다.
결국 하나의 감각현실을 놓고 살필 때 그 각 부분에는 영희가 없는데 그런데 그 각 부분을 모아서 대하면 영희라고 여기는 분별이 나타나고 그래서 그 부분을 영희라고 여기고 대하게 된다.
또 마찬가지로 시인이 이 상황을 대하면 또 그가 어떻게 대하는가에 따라서 각 부분에서 엉뚱한 가을도 보고 눈 부분에서는 떨어진 낙엽도 보고 이렇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제각각 달리 묶고 나눌 때마다 그런 관념분별을 일으키면 다른 관념분별은 그때마다 일단 없어지고 그런 주체의 의식표면에서는 나타나지 않게 된다.
그런데 이 현상을 놓고 본래 그 감각현실에 그런 내용이 있지만, 다만 잠시 숨어 있는 것이고 그 주체가 그런 감각현실을 대하며 그 때마다 일정한 관념을 일으키는 현상은 라면을 놓고 벽돌을 얻는 것처럼 그 감각현실에서는 얻을 수 없는 관념을 일으켜 얻는 것이 아니고 본래 그 감각현실에 있던 그런 관념을 그런 형태로 그 주체가 잧아내는 것 뿐이라고 여기는 경향을 갖는다. 그리고 이런 형태로 실재 - 감각현실 - 관념분별의 각 관계를 이해한다.
그래서 이를 망집현상이라고 제시하게 된다. 다른 영역에서 본래 얻을 수 없는데 일단 어떤 내용을 얻고 그것이 반복되면 그런 사정으로 그런 내용이 다른 영역에도 얻어지고 또 그런 내용이 그렇게 다른 영역에도 있는 것이어서 그것은 실다운 내용이라고 이해하는 한편, 또 사정이 그렇지 않다면 왜 그런 내용을 반복해 그에 대해 일으키겠는가. 이렇게 거꾸로 반문하며 그 망집을 고집해 나가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 현실적으로 문제가 있다.
이 사정을 앞 부분에 최면술사가 최면을 걸어서 본래 그 상황에 얻을 수 없는 각종 내용을 있다고 여기게 만들고 매번 그에 그렇게 반응하여 업을 행해 나가게끔 하고 그리고 이로 인해 계속 고통을 당하고 비명을 지르게 되는 상태에 들어가게끔 하여 그런 상태에 묶어 놓고 그를 이후 무한히 풀어주지 않는 최면상황으로 비유를 들어서 설명한 바 있다.
이는 엄격히 보변 관념영역에서 일으키는 문제인데 꿈이나 환영, 또는 환사의 환술 이런 비유가 상징하는 것은 실재 - 감각현실 - 관념영역의 각 관계에서 다 마찬가지다. 쉽게 말해 라면과 벽돌의 관계다.
손을 마주치면 그 손에서 나는 소리나 사과모습과 그 사과에 코를 대해 맡는 향이나 또는 사과의 맛이나, 사과로 얻는 촉감이나, 또 그런 내용을 얻고 그에 대해 일으키는 각 분별 내용이나 또 본 바탕이 되고 어떤 주체가 끝내 그 내용을 직접 얻지 못하는 실재 진여와의 관계나 그 사정이 다 그렇다.
그리고 여하튼 이런 상태로 각 주체가 대하는 생사현실이란,
결국 제각각 망집을 일으켜서 업을 행하는 가운데 가해와 피해를 주고 받으며 이런 업의 장애로 인해 서로 얽혀서 생사고통에서 묶여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 곧 생사현실의 생사고통의 문제가 된다.
그래서 이처럼 망집을 바탕으로 해서 업을 행하여 각 주체가 각 세게에 처해 그런 세계모습을 그렇게 각기 대하면서 그런 생사고통을 겪어 나가게 되는 과정을 업감연기로 제시하게 됨을 앞에서 살폈다.
그리고 이런 생사현실 상황에서 각 주체가 그런 생사고통을 받는 것은 앞의 최면의 상황을 비유로 하면
그 주체가 제각각 반대로 최면술사가 그를 상대로 그런 최면을 걸어 묶어놓게끔 할만한 그가 성격의 업을 그렇게 꾸준히 행해서 그런 업의 장애가 쌓이고 그런 업의 장애가 제거되지 않아서 그렇게 된다는 사정을 제시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그런 주체를 그런 망집 번뇌에 묶여 사역을 당하며 고통을 당하게끔 곰처럼 부려가면서 고통을 가하는 입장도 사실은 사정이 마찬가지다.
그 역시 그렇게 행하는 것은 그 주체도 역시 상대와 같은 망집에 바탕해서 처음 그렇게 임하였기 때문에 서로간에 그렇게 얽혀 그렇게 행하게 되는 것이다.
쉽게 예를 들어 어떤 한 좋은 보물이나 또는 어떤 아름다운 한 여인을 놓고 두 사람이 서로 다투다가 한 사람이 다른 이를 묶고 이를 차지하자 나중에 그 다른 이가 그에게 미움과 원망을 갖고 그에게 어떤 보복을 가하고 그래서 그 상대를 어떤 곳에 감금해서 죽을 때까지 만두만 먹이면서 고통을 준다고 한다면
그 상대도 처음 그런 망집에 바탕해 그런 업을 그렇게 행해서 그런 상태에 처하게 되는 것이어서 문제라고 제시하지만,
그렇게 상대를 묶어 고통을 가하는 입장도 사실은 그 상대와 그 바탕이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리고 이 관계를 넒고 길고 깊게 관하면 이들이 서로 이런 가해와 피해를 주고 받으면서 무한히 그 바탕에서 그 관계를 이어나가게 되기에 끝내는 무량한 고통을 무한한 기간에 걸쳐 받아나가는 상태에까지 나아가게 된다.
그래서 결국 생사현실 안에서 욕계에서 다른 중생을 그렇게 묶어서 사역시키며 욕계 내에서 최고의 지위에 있는 파순과 같은 입장도 알고보면 그 출발점이 3 악도에서 묶여 생사고통을 쉼없이 받아나가는 그런 중생의 상태와 그 바탕은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이들 각 주체를 모두 그런 망집에서 벗어나 풀려나게 하는 것이 가장 근본 방안이 된다.
그런데 앞의 내용을 통해 그 주체가 그런 생사고통에서 풀려나려면 일단 그 사정을 잘 이해해야 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렇게 잘 관하는 노력과 함께 또는 그 이전에 또는 그렇게 관하고 난 이후에
그 주체를 그렇게 묶어 놓고 고통을 받게끔 만드는 그의 업의 장애를 수행을 통해 해소시키는 노력을 같이 기울여야 한다.
그래서 아라한이 해탈지견의 상태를 읊게 되는 것은 게송이 나타내는 것처럼 청정한 범행을 닦아서 해야 마땅하고 하지 않아야 할 수행 내용을 다 원만히 성취한 바탕이 되어야 그러한 생사 묶임에서 벗어나 해탈을 얻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또 그렇게 되면 이후 또 이전처럼 그런 망집에 바탕해 생을 받아 그 세계에 태어나 망집 번뇌에 묶여 사역을 당하는 상태를 이후 맞이하지 않게 된다.
그런데 만일 그럴 경우는 드물지만, 위와 같은 내용만 이해하고 관하는 가운데 생사현실에서 자신이 쌓은 업의 장애를 제거하여 해소시킬 계, 정, 혜수행을 행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자신은 계속 노력하겠지만 , 그러나 앞에서 비유로 든 자신을 고통을 받는 최면에 걸고자 하는 최면술사는 그런 사정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 주체가 고통으로 대할 만한 세계에 그를 체포해 묶어 놓으려고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현실에서 각 범죄를 행한 이는 그 주체 입장에서는 결코 자신이 체포당해 감옥에 갇히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지만, 그 범죄로 피해와 고통을 당한 입장에서 그가 당한 고통이 상대의 어떤 노력을 통해 깨끗하게 해소되지 않는다면 그런 노력을 쉬지 않고 행하게 되는 것과 그 사정이 마찬가지다.
사정이 그렇기에 자신은 그런 상황에 처해 앞과 같은 내용을 바탕으로 그러한 내용이 거기에 없다고 관하는 노력을 해야 하겠지만, 정작 자신이 쌓은 업의 장애를 제거하는 수행을 함께 실천하지 않는 경우에는 하나같이 실답지는 않다지만, 매번 매 상황마다 이상하게 자신이 고통으로 대할만한 내용들 예를 들어 자신이 매일마다 일정 시각이 되면 거꾸로 매달려 쉼없이 매를 맞거나 고문을 당하는 상태에 반복해서 놓여서 그러 상태에서 앞과 같이 관하는 것만 계속 반복해나가야 하는 것이 된다.
이것이 앞과 같은 사정을 잘 관해서 일체가 공하다는 사정을 잘 이해하지만, 정작 그에 바탕해서 해야 할 수행은 하지 않아 무한히 반복해 지옥에 묶여서 임하게 되는 지옥의 공 수행자가 처하게 되는 상황이다.
그런데 이론상은 위 내용으로 쉽게 그 상황에서 이를 극복해 벗어나올 수 있어야 한다고 보지만, 정작 자신의 손가락 하나만을 톱으로 잘라낸다해도 쉽게 그 고통을 극복해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그렇게 업의 장애를 제거할 수행을 생사현실에서 잘 행하지 못하는 사정을 살피면 비록 그가 그런 사정을 이론상 이해한다고 해도 사실은 매 상황에서 그 주체가 여전히 망상분별과 집착을 끝내 제거해지 못해서 현실 사정에 그런 내용이 실답게 있다고 여기며 대하는 가운데 수행을 하지 못하고 기존에 행하던 형태로 업을 계속 행하는 상태에 있기에 그로 인해 생사고통을 받아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차피 실답지 않고 차별없이 공한 바탕이라지만, 이 문제를 잘 해결하려면 비록 실답지 않고 본래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지만, 그런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대, 그래서 그런 상태에서 자꾸만 그렇게 임하여 자신을 묶어 두려는 그런 최면술사를 상대로 일단 그가 행한 업으로 쌓여 있는 업의 장애를 수행방안을 통해서 제거하는 노력을 함께 기울여야 한다. 그래야 그 주체가 그런 문제로부터 쉽게 잘 벗어나게 된다.
그래서 사실 부처님 입장에서는 위와 같은 내용을 이해함과 함께 가장 기본적으로 그를 생사묶임에 묶어 놓게 하는 업의 장애부터 먼저 제거하는 계의 항목부터 잘 성취하고 그런 바탕에서 업의 장애가 해소되고 어느 정도 복덕이 쌓여 생사고통의 상황에서 풀려나는 바탕에서 이와 같은 기본 사정을 잘 관하는 수행에 들어가게끔 이끄는 사정이 있다.
그리고 여기까지가 수행자가 기본적으로 성취해야 할 내용이 된다.
그런데 또 이후 문제가 있게 된다. 그것은 앞과 같이 수행을 해서 그 자신만 놓고 보면 그 자신은 이제 그런 생사 묶임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사실인데 그것은 오직 그 주체만 놓고 볼 때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비유를 들면 생사현실에서 병을 고쳐주는 병원장이 환자들의 병을 고쳐주는데 이를 통해 그 환자가 그 병을 낫기는 하는데 그것은 그 환자의 입장에서만 그런 병이 나은 것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그 환자는 병을 낫지만, 그 환자의 부모나 형제나 자식을 포함해서 다른 세상의 환자들은 여전히 그런 병으로 고통을 받는 상태로 남는다.
그래서 수행자가 자신만 망집을 제거하고 생사묶임에서 벗어나는 것은 그 수행자 입장에서는 최고의 수행 목표를 성취한 상태라고 보고 아라한이라고 칭하게 되지만, 그러나 남아 있는 다른 환자들을 놓고 생각하면 그것만으로 수행을 마치면 대단히 안타깝다고 병원장이 보게 되는 사정이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환자가 치료를 마쳐서 병을 제거했으면 이제 그 바탕에서 좀 더 노력해서 의사도 되고 또 그 환자를 처음 치료해준 병원장처럼 되고 또 의과대학도 만들어서 그런 의사를 수없이 교육시켜 양성해내는 일도 할 수 있는데 왜 자신 병만 낫고 그것으로 다 되었다고 퇴원을 바삐하고 사라지는가. 이것을 문제로 보게 된다.
그리고 그런 사정때문에 앞에 병을 치료하기 위해 임시로 시설했다는 시설 방편에 대해서도 이런 입장에서 또 다른 내용을 제시하게끔 된다.
그래서 처음은 그런 망집을 제거하고 더 나아가 감각현실이나 관념분별을 포함해 그런 망집을 일으키는 재료가 된다고 보는 일체를 다 제거해서 회신멸지의 상태에 드는 것을 처음에는 기본적으로는 수행의 목표점으로 제시하지만,
그러나 그런 상태에 도달해서 그 주체가 생사묶임에서 벗어나면 그런 상태에 만족해 머물지 말고
다시 다른 중생들이 생사고통을 받는 그런 생사현실에 다시 거꾸로 들어가서 처음의 자신처럼 생사고통을 받아 나가는 다른 중생들을 대해 그런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게 하는 중생제도의 노력을 해야 한다고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앞에서 처음 현실에서 얻는 내용들이 실답지 않다고 제시하고 그에 관해 일으키는 망집을 제거해야 한다고 제시하지만,
그런데 생사현실에 다시 들어와 그 안에서 고통을 받는 다른 중생을 제도하려는 입장에서는 여기서 제거해야 할 내용이 있는 한편 그러나 또 한편 이런 망집을 일으키는 재료가 되지만, 그 자체가 망집은 아니기에 굳이 제거하지 않아도 되는 내용도 있고
더 나아가 중생제도를 위해서 처음 부처님이 그런 취지로 시설한 내용 등은 또 오히려 잘 파악해서 계속 그런 취지에서 중생제도를 위해 잘 사용해나가야 한다고 보는 부분도 또 있다.
그래서 이런 사정으로 본래 얻을 수는 없다고 보지만, 이런 취지로 세속 현실에 시설한 내용과 함께
그런 생사현실에서 수행자가 일단 생사의 묶임에서 스스로 풀려나고 또 다른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그 안에서 갖추어야 할 복덕자량과 수명과 지혜자량을 얻기 위해서 닦아야 할 수행 내용을 포함해서
그런 방편 시설을 통해 제도해야 할 중생이 일반적으로 갖는 망집의 내용도 다 함께 잘 파악해서 각 경우마다 잘 대해야 한다.
그것이 곧 현실을 실상을 꿰뚫어 넒고 길고 깊게 관하는 반야바라밀다 수행을 통해 얻어내야 할 내용이기도 하다.
반야바라밀다 수행은 결국 현실이 그 실상이 공하다는 사정을 잘 관하는 것도 의미하지만, 이에 바탕해서 생사현실에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보시 정계 안인 정진 정려 반야바라밀다를 포함해서 닦아 나가야 할 온갖 수행방편을 시설해 제시하는 바탕이 되고 또 이를 통해 중생을 제도하고 불구토를 장엄하고 끝내 법신을 증득하여 성불하는 상태까지 모두 이처럼 실상을 꿰뚫어 관하는 반야바라밀다를 통해 시설해 제시하고 또 얻어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와 같은 시설은 물론 본 바탕의 측면에서 다른 것과 차별없이 그 내용을 얻지 못하고, 차별없이 공하지만, 그러나 생사현실에서 무량한 복덕과 수명과 지혜를 구족해서 중생을 생사로부터 제도하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하는 공덕을 얻어내게 하는 바탕이 된다.
그리고 그런 입장에서 수행자는 이런 생사현실에서 중생을 제도할 망집에 바탕해서 이를 대하는 중생의 사정까지 같이 잘 헤아려서 이런 내용을 놓고 중생을 생사의 묶임에서 제도해낼 수 있도록 다라니와 삼매를 닦아가며 생사현실에 자재하게 임하며 무량한 방편을 닦아 나가는 가운데 이런 시설 방편을 잘 대해야 하는 사정이 있다.
이상으로 마치고 이후에는 앞과 같이 살핀 각 부분의 내용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나가기로 한다.
♣잡담♣
○ [pt op tr]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Michel Berger - La groupie du pianiste.lrc
이제 불교 경전에서 각기 조금씩 달리 제시되는 각 내용들의 관계를 살펴보기로 한다.
사실 이런 개관을 하려면 어느 정도는 문제되는 내용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관련 내용을 많이 반복한 상태다. 그래서 조금만 살피면 쉽게 살필 수 있다고 본다.
그간 살핀 내용들이 정리는 잘 안 된 상태다. 그러나 그간 살핀 내용이 다음 페이지에 링크처리되어 있으므로 이를 일부 참조하기로 한다.
쉬는 동안 노래를 듣다보니, 부처님이 각 경전에서 각 상대마다 조금씩 내용을 달리 제시한 사정을 현실에서 어떤 대학교수가 유치원-초등-중고-대학-대학원생을 각기 상대로 어떤 원리를 제시할 때 각 경우마다 내용을 조금씩 달리 제시하게 되는 사정을 비유로 들어 설명했는데 이와 관련된 메세지를 전하는 듯하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예를 들어 화학과 대학교수라고 해도 자신이 전공하는 분야와 달리 음악 분야를 접한다던지 하다못해 베드민튼이라도 시작하게 되면 그 분야에서는 초보 취급을 받을 도리 밖에 없다. 그래서 각 학문은 결국 대부분이 제각기 전문분야로 들어가기 직전 상태인 공통 수준에 맞추어서 내용을 제시해야 각 학문분야간 서로간에 소통이 되게 된다.
이와 관련해 스님이 과거에 목욕탕에 들어가 목욕한 다음 이야기가 떠오른다. 스님이 목욕탕에 들어가 옆 사람에게 등을 밀어달라고 하자, 상대는 퉁명스럽게 당신이 누군데 밀어달라고 하는가 물었다. 그래서 스님이 나 중이야 이렇게 답하니까 상대가 난 고삼이야 이러면서 때렸다는 이야기다. 그 뒤로 스님이 고등학생은 제도대상에서 제외시킨다고 했다는데 이는 과거에 중고생들이 스님처럼 머리를 깍고 다녔을 때 이야기고 요즘은 그렇지 않기에 공감을 받기 힘들다.
그런데 수행자들이 이런 일로 삐지게 되면 위험하다. 그래서 수행자들이 분노를 일으키면 허물이 많게 된다고 경전에서 주의를 준다. 분노를 일으키면 해당 상대를 제도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고 외면하게 되고 이는 결국 중생을 생사의 묶임에 방치해 버리는 것이 되기에 문제가 된다. 그래서 수행자는 이런 점을 주의해서, 분노가 일어나도 안인 수행을 정진해가며 중생에 가까이 다가가 제도를 하려는 마음을 계속 가져야 한다.
그런데 생사현실에 임하게 되면 수행자도 해탈문과 생멸문의 경계선 중간에 위치하게 되므로 일반적인 입장에서 갖는 문제를 대부분 공유하며 수행에 임하게 된다. 그래서 원효대사나 의상대사나 그런 부분에서 잘 임하는가를 대력보살님들이 수시로 점검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연못에 있으면서 물들지 않는 연꽃의 비유도 이 부분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노래가 너무 엉뚱해서 엉뚱한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여하튼 경전이나 수행에 관련된 내용은 결국은 각 일반인들이 이를 이해하고 현실에서 실천할 수 있는 형태가 되지 않으면 곤란하다.
그래서 경전 공부를 많이 깊게 했다해도 결국은 초등학교 중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쉽게 대하고 이해할 형태로 제시하지 않으면 그 만큼 장애가 있게 된다. 그런데 한국은 세계적으로도 유독 평균학력 수준이 높은 상태라, 각 전문분야에서 조금만 노력하면 서로 다른 학문분야간 소통이 쉽게 될 수 있다. 또 그것이 잘 안 되면 그것은 제각기 전문분야가 다른 일반인의 문제가 아니고 특이하게 혼자만 이해하는 형태로 내용을 제시하는 쪽의 문제라고 보아야 한다.
과거 대략 2562 년 이전의 당시 인도상황은 훨씬 더 상황이 심했는데도 부처님은 이렇게 각기 다른 상태의 상대를 모두 깨달음으로 이끌어 들였다. 그 중에는 물론 왕족을 포함해서 사리자 존자나 가섭존자처럼 이미 세속에서 대단히 높은 지식과 수행을 쌓은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부처님이 모두 가르침을 베풀어 모두 수행에 임해 수행을 잘 성취했었다.
그런데 오늘날 상황을 보면 해당 분야를 전공해도 아무리 살펴도 그 내용을 파악하기 힘든 경우가 대단히 많다. 그런데 종교 분야에서 그렇게 되면 종교가 종교로서 기능을 잃게 되기 쉽다. 일기장에 적어둔 메모처럼 혼자 대하거나, 극소수 전공자만 겨우 간신히 이해하는 내용이 되기 때문이다.
불교 경전 내용이 살피면 대단히 이해하기 어려운 형태이지만, 이는 아주 특수한 어떤 이만 살피고 실천할 내용이 아니고 욕계에서 생사고통을 받아나갈 이라면 누구나 그것을 쉽게 이해하고 실천해가야 할 내용이다.
그래서 과거 역사적 연유로 오늘날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어렵게 표현되어 있고 내용도 복잡하게 제시된 부분은 여하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형태가 되도록 노력해가야 한다.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본인도 그런 입장에서 되도록 쉽게 서술하고자 노력하지만, 그러나 본인 부터 해당 내용들의 이해자체가 위와 같은 사정으로 쉽지 않기에 역시 쉬운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앞에 제시한 내용은 그간 많이 반복해 살펴왔으므로 조금만 더 추가하면 쉽게 살필 수 있으리라 본다.
○ [pt op tr]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Jacqueline Taieb - Petite Filles Amour.lrc
♥ 잡담 ♥마음과인과
적당히 기본적 내용만 살피고 마치면 곤란하기에 이들 내용을 함께 살피느라, 글이 너무 길어졌다.
그런데 본인이 글을 적으면서 지쳐서 쉬는 부분 즉 음악이나 사진이 있는 부분에서 쉬어가면서 내용을 대하면 내용이 길더라도 관계는 없다고 보지만, 그렇지 않고 계속 대해가면 너무 길다고 볼 수도 있다. 각 부분을 따로 적어도 되지만, 한번 살필 때 같이 살피는 것도 장점이 있다.
♣잡담♣ 요즘 조각글 편집 방식이 상당히 복잡해져서 새로운 카데고리를 만들었다. 이른바 '예약등록 편집중' 카데고리다. 여기에 현재 작성중인 글과 예약글로 올리는 경전을 올려 놓기로 한다.
오늘 수리문제로 결국 서비스 기사님이 방문했는데 역시 전문 기사님에게 수리를 맡기자, 일이 깔끔하게 된다. 물론 수리 비용은 상당히 많이 들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 비용을 본인에게 주면 1 달 내내 붙잡고 살펴도 수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평소 이런 수리를 해주신 분들은 하늘에서 온 기사 천사로 대해야 한다고 개인적으로 본다. 방문해 도움을 주기에 문제가 해결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실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본인도 수리 과정을 조금 살피고 이일 저일 살피다 보니 계속 조각글이 밀려있다. 그래서 지금 날짜 경계선이 지나는 즈음에 겨우 이 문제를 살피게 된다. 여하튼 이렇게 시작을 하고 시작하자 마자 조금 쉬고 위 내용을 살펴나가기로 한다.
♥ 잡담 ♥
요즘 몸 상태가 안 좋아서 조금만 글을 적으면 상당히 문제가 있다. 그래서 자꾸 쉬면서 살펴나가게 된다.
대강 경전을 인용해 제시해서 복잡해 보이지만, 다만 경전을 전혀 인용하지 않으면 오히려 이해하기 힘들 수 있다고 보고 경전 내용을 들어 살핀다.
♥ 잡담 ♥ 쉬는 동안, 우중충한 영화를 한편 보고 나니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더 피로하다. 영화 화면을 보는 이는 그냥 보지만, 그런 영화화면을 손으로 그림으로 그리던 요즘처럼 컴퓨터로 그려내던 아니면 모조품으로 만들어내던 아니면 실물을 찍어내던 하나같이 쉽지는 않다.
♥ 잡담 ♥
글도 너무 길어진 느낌이 드는데 상당히 피로하므로 조금 오래 쉬기로 한다. 앞 부분까지 적고 상당히 오래 쉬었다. 그것은 본인 몸 상태가 별로 좋지 않기 때문이다.
평소 운동이 부족하다고 보고 여러 방안을 생각하는데 일단 타이핑 작업도 되도록 서서 하고 운동도 쉴 때마다 최소한 10 번 정도 열심히 제자리 뛰고 점차 운동량을 늘려 나가면서 몸을 좀 건강하게 만들 필요를 느낀다.
이미 쓴 부분을 다시 살피고 부족한 부분을 보충했는데 작은 일이라도 완벽을 기하여 임하는 것이 좋다고 한 연구원이 제시한다.
지금까지 이와 관련된 내용을 많이 적었는데 비슷한 내용을 반복하게 되는 것은 한 번 살필 때 완벽하게 내용을 다 살피지 않고 또 정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보게 된다.
그런데 완벽을 기하려다 보면 너무 시간이 많이 걸리고 내용도 복잡하게 된다. 이렇게 하려면 각 내용과 관련된 경전이나 논서부분도 찾아 해당 부분을 인용해주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시간과 노력이 대단히 많이 걸리고 또 그렇게 관련 내용을 다 붙여 놓고 살피면 이를 제시하는 입장이나 이를 대하는 입장이 다 함께 너무 복잡해서 골치가 아파오고 더 살피는 것을 포기하게끔 되기 쉽다.
완벽을 기한다는 것은 그 완벽이란 고사에 담긴 내용처럼 화씨지벽의 고사처럼 벽돌 비슷한 돌을 하나 붙들고 옥이라고 우기면서 자칫하면 사지가 잘리거나 또는 인상여와 관련된 고사처럼 그런 옥을 아껴 지키려다 기둥에 머리를 부딪혀야 하는 문제에 부딪히기 쉽다고도 보게 된다.
그래서 적절하게 임해야 하는데 그러나 또 너무 대강대강만 살피고 넘어가면 이를 대하는 입장에서 만족감을 얻지 못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지금 단계는 일단 기존에 살핀 내용을 바탕으로 조금 더 자세하게 살펴 나가려 한다. 그래서 일단 그 대강을 위와 같이 제시하는데 이렇게 마치면 기본적 내용은 제시되었다고 보지만, 그래도 조금 부족하기에 경전에서 본 사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사용하게 되는 방편 시설과 그리고 생사현실에서 행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수행방안들과 관련해 조금 더 살피기로 한다.
○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Ernst-Ludwig-Kirchner-the-blue-tree.jpg!HD
Artist: Ernst-Ludwig-Kirchner Ernst Ludwig Kirchner (6 May 1880 – 15 June 1938) 독일 표현주의 화가 이자 판화 인 이었으며 Die Brücke 또는 20 세기 예술 의 표현주의 의 기초가되는 핵심 그룹 인 The Bridge 의 창시자 중 한 명입니다 . 그는 제 1 차 세계 대전 에서 군 복무에 자원 했지만 곧 붕괴를 당하고 퇴역했습니다. 1933 년, 그의 작품은 나치에 의해 " 퇴보 " 라는 브랜드가 붙여졌고 , 1937 년에는 600 점이 넘는 그의 작품이 팔리거나 파괴되었습니다. [...이하 줄임...] from https://en.wikipedia.org/wiki/Ernst_Ludwig_Kirchner Title : the-blue-tree.jpg!HD Info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Rose,_Kotone_-_Flickr_-_nekonomania
Kotone. Means the sound of Japanes-harp. Production in Japan. 琴音。 Date 15 May 2010, 17:18 Source Rose, Kotone Author Yoko Nekonomania Permission & Licensing : Wikipedia ● [pt op tr] f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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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gyu Samyé Ling Monastery and Tibetan Centre
○ [▼]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mus0fl--Jacqueline Taieb - Petite Filles Amour.lrc
○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Katsushika-Hokusai-sarumaru-daiyu
Artist: Katsushika-Hokusai Katsushika Hokusai (葛飾 北斎, October 31, 1760 – May 10, 1849)는 에도시대 우키요에 화가이자 판화가인 일본의 예술가로 그는 Sesshū Tōyō 및 다른 작풍의 중국화 의 영향을 받았다 . 에도 (지금의 도쿄) 에서 태어나, 국제적으로 상징적인 인쇄 The Great Wave from Kanagawa가 포함된 목판 인쇄 시리즈 후가쿠 36 경 ( 富嶽三十六景가쿠 Sanjūroku 케이 , 1831)으로 잘 알려져있다. [...이하 줄임...] from https://en.wikipedia.org/wiki/Hokusai Title : sarumaru-daiyu Info Permission & Licensing : Wikiart ● [pt op tr] f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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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en.wikipedia.org/wiki/File:Summer_Palace_at_Beijing_21.jpg Description English: Summer Palace at Beijing, China Deutsch: Sommerpalast in Peking, China Português: Palácio do Verão em Pequim, China Date February 2005 Source Own work Author Kallgan Permission & Licensing : Wikipedia ● [pt op tr] fr
○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Ernst-Ludwig-Kirchner-frauenkirche.jpg!HD
1937 년에는 600 점이 넘는 그의 작품이 팔리거나 파괴되었습니다. [...이하 줄임...] from https://en.wikipedia.org/wiki/Ernst_Ludwig_Kirchner Title : frauenkirche.jpg!HD Info Permission & Licensing : Wikiart ● [pt op tr] fr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Gele_roos_(Rosa)._Locatie,_De_Kruidhof_Kruidentuin_in_Friesland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Gele_roos_(Rosa)._Locatie,_De_Kruidhof_Kruidentuin_in_Friesland.jpg Description Nederlands: Gele roos (Rosa). Locatie, De Kruidhof Kruidentuin in Friesland. English: Yellow rose (Rosa). Location, The Kruidhof in the Netherlands. Date 25 June 2015 Source Own work Author Agnes Monkelbaan Camera location 53° 15′ 21.84″ N, 6° 08′ 17.53″ E View this and other nearby images on: OpenStreetMap - Google Earth info Locatie: De Kruidhof. De Kruidhof is de botanische tuin met de grootste collectie geneeskrachtige kruiden van West-Europa en kent een rijke historie van meer dan 80 jaar. English: Location: The Kruidhof. The Kruidhof is the botanical garden with the largest collection of medicinal herbs in Western Europe, and has a rich history of over 80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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ж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9/94/Gele_roos_(Rosa)._Locatie,_De_Kruidhof_Kruidentuin_in_Friesland.jpg ▩ mus3fl--Gele_roos_(Rosa)._Locatie,_De_Kruidhof_Kruidentuin_in_Friesland.jpg ● [pt op tr] fr
♥Denmark Aarhus
○ [▼]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Renoir portrait-of-coco-1905
Artist: Pierre-Auguste Renoir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1841.2.25 – 1919.12.3)는 인상파 스타일의 발전에서 선도적인 화가였던 프랑스 예술가였다. 아름다움과 특히 여성스러운 관능미의 기념자로서 르누아르(Renoir)는 다음과 같이 직접적으로 이어지는 전통의 최종 대표자입니다. 그는 배우 피에르 르누아르 (1885-1952), 영화 제작자 장 르누아르 (1894-1979), 도예가 클로드 르누아르 (1901-1969)의 아버지입니다. 그는 피에르 (Pierre)의 아들인 클로드 르누아르(Claude Renoir, 1913-1993)의 할아버지였다.[---이하 줄임...] from https://en.wikipedia.org/wiki/Pierre-Auguste_Renoir Title : portrait-of-coco-1905 Info Permission & Licensing : Wikiart ● [pt op tr] fr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Ningbo_Ayuwang_Si_2013.07.28_14-06-40
https://zh.wikipedia.org/wiki/File:Ningbo_Ayuwang_Si_2013.07.28_14-06-40.jpg 说明 宁波阿育王寺 —— 大雄宝殿 日期 2013年7月28日, 14:06:40 来源 自己的作品 作者 Zhangzhugang 授权(二次使用本文件) 我,本作品著作权人,特此采用以下许可协议发表本作品: GNU head 相机位置 29° 50′ 58.26″ N, 121° 44′ 20.26″ E ● [pt op tr] fr
♥Avenhorn ,Netherlands
○ [▼]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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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Theophile Steinlen-en-partance-original-drawing
Artist: Theophile Steinlen
Théophile Alexandre Steinlen (November 10, 1859 – December 13, 1923)는 스위스 태생의 프랑스어 아르누보 화가이자 판화 제작자. 몽마르트르 (Montmartre)와 그 주변 지역은 스타 인 렌 (Steinlen)의 삶 전체에서 가장 좋아하는 주제였으며, 종종 그 지역에서의 더 가혹한 삶의 일부 장면을 그렸습니다. 회화와 그림 외에도 그는 조각품을 찍었습니다. 제한된 기준 으로 볼 때, 많은 그림들에서 볼 수 있듯이 그가 가장 애정을 쏟은 고양이 인물들이었다. [...이하 줄임...] from https://en.wikipedia.org/wiki/Théophile_Steinlen Title : en-partance-original-drawing Info Permission & Licensing : Wikiart ● [pt op tr] fr
♥State of Palestine ,Hebron
○ [▼]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Albert-Bloch-impromptu-1959
Artist: Albert-Bloch Albert Bloch (August 2, 1882 – March 23, 1961)는 미국 근대주의 화가이자 20 세기 초기 유럽 모더니스트였던 Der Blaue Reiter (The Blue Rider) 와 관련된 유일한 미국 작가였다 . 1901 년에서 03 년까지 그는 St. Louis Star 신문에 만화 및 만화를 제작했습니다. [...이하 줄임...] from https://en.wikipedia.org/wiki/Albert_Bloch Title : impromptu-1959 Info Permission & Licensing : Wikiart ● [pt op tr] fr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Light_pink_unidentified_garden_flower_2
Description Begonia cultivar Camera and Exposure Details: Camera: Canon PowerShot S3 IS Lens: Canon 1:2.7-3.5 USM 12x Zoom Lens Exposure: 6mm (36mm in 35mm equivalent) f/4 @ 1/80 s. Date 23 May 2007 Source Own work Author Photo by and (c)2007 Jina Lee Permission & Licensing : Wikipedia ● [pt op tr] fr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Dry_Etosha_Pan
English: A picture (sight) of dry, hot and salt-encrusted Etosha pan over the parched savannah in Namibia. The air in the background is hot, very shimmering and dusty. The tree is an acacia tortilis. Date 21 October 2011 Author Alchemist-hp (talk) (www.pse-mendelejew.de) Camera location 18° 54′ 57.45″ S, 16° 41′ 53.01″ E Kartographer map based on OpenStreetMap. View this and other nearby images on: OpenStreetMap - Google Earth info Camera Model Canon 5D Mark II ● [pt op tr] fr
♡봉림사_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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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Terrace_at_Samarkand_Hotel
https://en.wikipedia.org/wiki/File:Terrace_at_Samarkand_Hotel.jpg Author [show]Colin Campbell Cooper (1856–1937) Link back to Creator infobox template wikidata:Q1871464 Description Terrace at Samarkand Hotel Date circa 1923 Medium oil on canvas Dimensions 14 × 20 in (35.6 × 50.8 cm) Notes Samarkand Hotel—formerly in Santa Barbara, California. Source/Photographer http://www.antiquesandfineart.com/articles/media/images/00701-00800/00764/Hankin_Cooper.pdf Licensing[edit] Public domain This work is in the public domain ● [pt op tr] fr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A_Beautiful_flower_of_snake_gourd_plant_(Trichosanthes_cucumerina)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A_Beautiful_flower_of_snake_gourd_plant_(Trichosanthes_cucumerina).jpg Description English: This photo was taken at Kim, a little beautiful village located near surat, Gujarat, India. Date 10 April 2015 Source Own work Author Ridhdhesh1994 Camera location 21° 42′ 44.07″ N, 72° 58′ 51.95″ E View this and other nearby images on: OpenStreetMap - Google Earth info Trichosanthes cucumerina is found in the wild across much of South and Southeast Asia, including India, Bangladesh, Nepal, Pakistan, Sri Lanka, Indonesia, Malaysia, Myanmar (Burma), and southern China (Guangxi and Yunnan).
Trichosanthes cucumerina is a monoecious annual vine climbing by means of tendrils. Leaves are palmately lobed, up to 25 cm long. Flowers are unisexual, white, opening at night, with long branching hairs on the margins of the petals.
Licensing[edit]
ж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0/0d/A_Beautiful_flower_of_snake_gourd_plant_(Trichosanthes_cucumerina).jpg ▩ mus3fl--A_Beautiful_flower_of_snake_gourd_plant_(Trichosanthes_cucumerina).jpg ● [pt op tr] fr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Colegio-ayacucho
Description Español: Colegio Nacional Simón de Ayacucho Flag of Bolivia.svg This medium shows the protected monument with the number L/00-048 in Bolivia. Date 1 October 2013, 05:58:44 Source Own work Author Kevin andres Camera location 16° 29′ 38.39″ S, 68° 08′ 02.5″ W Kartographer map based on OpenStreetMap. View this and other nearby images on: OpenStreetMap - Google Earth info Permission & Licensing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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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sno Cambodian Buddhist Society ♥Guyana Linden
○ [▼]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mus0fl--Etienne Daho - Duel Au Soleil.lrc
○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gustave-dore-the-conversion-of-st-paul-1866.jpg!HD
Artist: gustave-dore 폴 귀스타브 루이 크리스토프 DORE ( [ɡys.tav dɔ.ʁe] ; 1832 1월 6일 - 23. 1,883 월) 프랑스 작가, 판화 , 일러스트 레이터 , 만화가 , 풍자 만화가 도레는 결코 결혼하지 않았고, 1849 년에 아버지가 사망 한 후, 그는 짧은 병으로 파리에서 죽을 때까지 책을 보여주는 어머니와 함께 살기를 계속했다. 프랑스의 정부는 1861 년에 그에게 Chevalier de la Legion d' honneur 를 수여했다. [...이하 줄임...] from https://en.wikipedia.org/wiki/Gustave_Doré Title : the-conversion-of-st-paul-1866.jpg!HD Info Permission & Licensing : Wikiart ● [pt op tr] fr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Begonia_semperflorens_(in_a_border)_01
Description English: Flower beds in park Kolomenskoye (Moscow). Русский: Цветники в Коломенском (Москва). Бегония вечноцветущая в оформлении клумбы. Date 23 August 2009 Source Own work Author Kor!An (Корзун Андрей) Permission & Licensing : Wikipedia ● [pt op tr] fr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Yi_He_Yuan_-_A._Holdrinet
https://en.wikipedia.org/wiki/File:Yi_He_Yuan_-_A._Holdrinet.jpg Description English: Yi He Yuan Date 15 June 2006 (according to Exif data) Source Own work Author André Holdrinet Permission & Licensing : Wikipedia ● [pt op tr] fr
♥Romania ,Constanț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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