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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경록
K1499V044P0459a
종경록 제84권
연수 지음
송성수 번역
● 허망한 마음-인성가 상속가 상대가
무릇 허망한 마음은 거짓이어서 모든 성인들이 한결 같이 추궁했다.
이 마음의 고집은 굳고 단단하기 때문에 반드시 갖추어 인용해야겠다.
또 경론(經論)에 결부하여 보면 세 가지 가(假)가 있다.
첫째 인성가(因成假)이니,
앞의 대경(對境)을 인연으로 하여 비로소 마음을 낸다.
둘째 상속가(相續假)이니,
처음의 마음은 경계로 인하고 그 뒤에는 분별을 일으켜 생각생각마다 상속하면서 일을 이루기에 이른다.
셋째 상대가(相待假)이니,
마치 허공은 생김이 없다는 것에 상대하여 마음은 생김이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또 마음이 있는 것은 마음이 없는 것에 상대가 된다고 헤아린다.
마치 짧은 것은 긴 것에 상대가 되는 것과 같고 가까운 것은 먼 것에 상대가 되는 것과 같다.
이 세 가지는 진실이 아니기 때문에 가(假)라고 하나니,
그런 까닭에 다른 모양[異相] 이란 서로 없다.
○ 상대적 가유 『중론』 『백론』 마치 중관론(中觀論)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다른 것 가운데서 다른 모양이 없고
다르지 않은 가운데서도 또한 없나니
다른 모양이 없기 때문에
이것저것의 다름이 없다.
참고 K0577V016P0374a22L 『中論』 觀合品 第十四[八偈]
다른 것[異]에 다름[異相]이 있지 않고
다르지 않은 것[不異]에도 있지 않네.
다름이 있지 않으니
이것은 저것과 다르지 않네. (7)
異中無異相,
不異中亦無,
無有異相故,
則無此彼異.
마치 긴 것과 짧은 것의 다름과 같다.
긴 것 가운데는 짧은 모양이 없나니 긴 것에 상대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긴 것이 없다.
짧은 것 가운데는 긴 모양이 없나니 짧은 것에 상대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짧은 것이 없다.
긴 것 가운데는 긴 모양이 없나니,
짧은 것에 상대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짧은 것이 없다.
짧은 것 가운데는 짧은 모양이 없나니,
긴 것에 상대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긴 것이 없다.
이미 길거나 짧은 것이 없거늘 누가 다르다고 말하겠는가.
또 『백론(百論)』에서 이르되,
“만일 실로 긴 모양이 있다면,
긴 것 가운데에 있거나 짧은 것 가운데에 있거나 길고 짧음이 함께 하는 가운데에 있거나 이는 모두 성립될 수 없다.
참고 『백론(百論)』 K0581V16P0557b13L;
若實有長相 若長中有 若短中有 若共中有 是不可得 何以故 長中無長相 以因他故 因短故 爲長短中亦無長性相違故 若短中有長不名爲短長短共
왜냐 하면,
긴 것 가운데는 긴 모양이 없음은 다른 것으로 인하기 때문이요,
짧은 것으로 인하여 긴 것이 되기 때문이다.
짧은 것 가운데도 긴 모양이 없나니,
성품[性] 과 모양[相] 이 반대되기 때문이다.
만일 짧은 것 안에 긴 것이 있다면 짧은 것이라 하지 아니하며,
길고 짧음이 함께 하는 것 가운데에도 긴 것이 없나니 두 가지 모두가 잘못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긴 모양이 이미 없는지라 짧은 모양 또한 그러하며,
만일 길고 짧음이 없다면 어떻게 상대가 되겠는가.
그러므로 다르다 함을 막으면서 다르지 않다 함을 말하는 것이요 다름이 있고 없고 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다.
이것이 둘 다 끊어짐으로써 성품에 계합된다는 것이다.
만일 쌍으로 드러냄[雙顯] 에서 본다면,
위에서 진실만을 드러내면 성품일 뿐이어서 다른 것이 아니겠으나,
여기서는 성품과 모양이 모두 갖추어졌기 때문에 다른 모양이 아니고 차별되기 때문에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다.
이것은 둘 다 그것이다[雙是] 는 것을 들어서 둘 다 아니다[雙非] 는 것을 드러내나니,
이야말로 하나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이면서 다르다.
막음(遮)과 비춤[照] 이 걸림 없고 성품과 모양이 융통하며,
길고 짧음이 이미 그런지라 만법이 모두 그렇다.
만일 처음의 마음에서 이 세 가지 가[三假] 를 타파한다면 한 생각도 생김이 없으면서 공관(空觀)에 들어가게 된다.
무릇 공관이란 온갖 관(觀)의 근본이어서 이로부터 다음에는 가관(假觀)에 들게 된다.
그로 인하여 가(假)를 얻으면서도 , ≺공≻에 들지 아니하고 다시 ≺공≻을 얻으면서도 가에 들지 아니하며 ≺공≻도 아니고 가도 아닌 뒤에는 중관(中觀)에 들게 된다.
이렇게 하여 관이 끊어지기에 이른다.
그런 까닭에,
지관(止觀)에서 널리 타파하였지만,
4구(句)로 조사하여도 얻지 못하고 이리저리 추궁하여도 생김이 없으며 성품과 모양이 모두 ≺공≻한지라 이름 또한 고요하다.
만일 한 생각의 마음이 일어나면 곧 세 가지의 가(假)가 갖추어지므로 이 한 생각인 마음을 관찰하여야 한다.
만일 마음이 저절로 생긴다면,
앞 생각[前念] 은 감관[根] 이 되고 뒷 생각[後念] 은 식(識)이 되는 것이니,
감관으로부터 마음을 내는 것인가.
식으로부터 마음을 내는 것인가.
만일 감관이 식을 낸다고 하면,
감관에는 식이 있게 되어도 본디 식을 내고 식이 없게 되어도 본디 식을 내게 된다.
감관에 만일 식이 있다면 감관과 식이 나란히 성립되고 또 감관을 내는 주체나 객체가 없을 것이며,
만일 식이 없는데도 식을 낸다면 모든 식이 없는 물건은 식을 낼 수 없는 것이다.
감관에는 벌써 식이 없게 되거늘 무엇으로 식을 낼 수 있는가.
감관에 비록 식이 없다 하더라도 식의 성질[性] 이 있기 때문에 식을 낼 수 있다 하면,
이 식의 성질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있다면 벌써 이것은 식이므로 감관에 나란히 있는 것인데 무엇을 말하여 성질이라 하는가.
감관에 식의 성질이 없다면 식을 낼 수가 없다.
또 식의 성질과 식은 하나인가,
다른가.
만일 하나라면,
성질이 곧 식일 것이므로 주체도 없고 객체도 없다.
만일 다르다면,
도리어 이것은 다른 것에서 생기는 것[他生] 이요 마음 스스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만일 마음 스스로 생기지 않고 대경[塵] 이 와서 마음을 일으키기 때문에 마음의 생김이 있다고 한다면,
경(經)에서 “반연하는 생각이 있으면 생기고,
반연하는 생각이 없으면 생기지 않는다”고 말씀한 것을 인용하겠다.
만일 그렇게 대경이 뜻[意]
밖에 있다가 와서 안의 식[內識] 을 일으킨다면 마음은 다른 것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이다.
이제 이 대경을 살펴보자.
이것이 마음이기 때문에 마음을 내는 것인가,
마음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을 내는 것인가 대경이 만일 마음이라면 대경이라고 이름하지 못할 것이요,
또한 뜻밖의 것이 아니라면 똑같이 스스로 내는 것이리라.
또 두 개의 마음이 나란히 성립되면서 주체나 객체가 없을 것이며,
대경이 만일 마음이 아니라면 어떻게 마음을 낼 수 있겠는가.
앞에서 타파한 것과 같다.
만일 대경 안에 내는 성질이 있어서 그 때문에 마음을 낸다고 한다면,
이 성질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성질이 만일 있다면 성질과 대경은 나란히 성립되면서 역시 주체나 객체는 없게 되고 만일 없다면 없으므로 생길 수 조차 없다.
만일 감관이 대경과 합하기 때문에 마음의 생김이 있다고 한다면,
감관과 대경은 저마다 마음이 있기 때문에 합하여 마음을 내는 것이요,
저마다 마음이 없기 때문에 합하여 마음을 내는 것이다.
만일 저마다 있어서 있는 것이 합친다면 양쪽의 마음이 생기되 다른 것의 성질 안에 떨어져 있을 것이며,
만일 저마다 없다고 한다면 합하여도 역시 없게 된다.
또 감관과 대경이 저마다 마음의 성질을 갖고 있다가 합해져서 마음이 생긴다고 한다면,
이 성질을 살펴보자.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마치 앞에서 타파한 것과 같다.
만일 감관과 대경이 저마다 떨어져서 마음이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인연이 없이 생긴 것이다.
있으면서 이것이 떨어지는 것인가,
없으면서 이것이 떨어지는 것인가.
만일 있으면서 이것이 떨어진다면 도리어 인연으로부터 생긴 것이거늘 어찌 떨어진다고 말하겠으며,
만일 없으면서 이것이 떨어진다면 없거늘 어떻게 생길 수가 있는가.
만일 이것이 떨어지되 생기는 성질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는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만일 성질이 있다면 도리어 인연으로부터 생기므로 떨어진다고 이름하지 못할 것이며,
만일 성질이 없다면 없는 것이거늘 무엇으로 생길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4구(句)로 살펴보아도 마음은 마침내 생기지 아니함을 알 것이니,
이것을 가(假)로부터 공에 들어가는 관이라고 한다.
만일 아직도 깨치지 못했다면 차츰차츰 상속가(相續假)로 들어가면서 타파하겠다.
왜냐 하면,
비록 인성가(因成假)에서 사구로 타파하여도 마음의 생김을 얻지 못하였으나,
지금 현재 나타나는 마음은 생각생각마다 생기다 소멸하고 하면서 계속 이어지며 끊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생기지 않는다고 말하는가.
이 생각과 생각하는 것이 앞 생각[前念] 이 소멸할 적에 뒷 생각[後念] 이 생기는 것인가,
앞 생각이 소멸하지 않았을 적에 뒷 생각이 생기는 것인가.
앞 생각이 소멸하기도 하고 소멸하지 않기도 했을 적에 뒷 생각이 생기는 것인가,
앞 생각이 소멸한 것도 아니고 소멸하지 않는 것도 아닐 적에 뒷 생각이 생기는 것인가.
만일 앞 생각이 소멸하지 않았을 적에 뒷 생각이 생긴다고 한다면,
이것은 곧 생각 스스로가 생각을 내는 것이어서 양쪽에서 생기는 모양이 나란히 성립되어 주체나 객체도 없게 된다.
만일 앞 생각에 생기게 하는 성질이 있어서 뒷 생각을 생기게 한다면,
이 성질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있다면 성질이 아니고 없다면 생기지 않을 것이다.
앞에서 타파한 것과 같다.
만일 앞 생각이 소멸되고 뒷 생각이 생긴다면,
앞에서는 소멸하지 않고 생기는 것을 제 성품[自性] 이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소멸하고서 생기는지라 소멸하지 않는 것을 소멸한 것에서 바라보면 어찌 다른 것의 성질이 아니겠는가.
다른 것의 성질[他性] 이 소멸하는 것 안에서는,
생김이 있어도 본디 생기고 생김이 없어도 본디 생긴다.
생김 있는 것은 바로 생긴 것이라 생김과 소멸은 서로 반대이다.
나아가 생김이 있음에서 생기[生生] 는 것이거늘 어찌하여 소멸하고서 생긴다고 하는가.
만일 소멸하여 생김이 없다면 없는 것이거늘 어찌하여 생길 수 있겠는가.
만일 소멸하되 생기게 하는 성질이 있다고 한다면,
그 성질에 관해서는 앞에서 타파한 것과 같다.
만일 앞 생각이 소멸하기도 하고 소멸하지 않기도 하면서 뒷 생각이 생긴다고 한다면,
만일 소멸한 뒤라면 소멸한 것에 속한다.
만일 소멸하지 않았다고 하면 벌써 소멸하지 않은 것에 속한다.
만일 소멸하지 않은 것이 소멸한 것과 합하였을 적에 생긴다고 한다면 이것은 곧 함께 생기는 것[共生] 이다.
함께라고 하면 저절로 서로가 반대된 것이며,
서로가 반대되거늘 어떻게 생길 수가 있겠는가.
또 저마다 생기는 것이 있다면 곧 두 가지의 허물이 있게 될 것이고 저마다 생기는 것이 없다면 합친다 하여도 역시 생기지 아니한다.
만일 소멸하기도 하고 소멸하지 않는 것 가운데서 생기게 하는 성질이 있다고 한다면,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만일 그 성질이 결정코 있다면 어찌하여 소멸한다느니,
소멸하지 않는다느니 하는가.
만일 그 성질이 결정코 없다면 그 역시 어찌하여 소멸한다느니,
소멸하지 않는다느니 하고 말하는가.
이것은 단견(斷見)ㆍ상견(常見)의 허물을 면하지 못할 것이며,
도리어 함께[共] 라는 허물에 떨어지고 만다.
만일 앞 생각이 소멸한 것도 아니고 소멸하지 않는 것도 아니면서 뒷 생각이 생긴다고 한다면,
있으면서 이것이 소멸한 것도 아니고 소멸하지 않는 것도 아닌가,
없으면서 이것이 소멸한 것도 아니고 소멸하지 않는 것도 아닌 것인가.
만일 있다고 하면 원인이 없는 것이 아니고,
만일 없다고 한다면 원인이 없는 것이므로 생길 수 없다.
만일 원인은 없되 생기게 하는 성질이 있다고 한다면,
이 성질이 그대로 원인이거늘 어찌하여 원인이 없다고 말하겠는가.
만일 없다고 한다면 없으므로 생길 수가 없다.
이와 같이,
4구(句)로 상속가(相續假) 를살펴보면서 마음을 구하여도 얻지 못하고 네 가지에 진실한 성품이 없고 마음이라고 하는 이름만이 있을 뿐이다.
이름조차도 안이거나 바깥이거나 양쪽 중간에도 머무르지 않고 항상 저절로 있지도 않다.
상속하되 성품이 없는지라 곧 세속 이치[世諦] 로 성품을 타파하는 것을 성품의 공함[性空] 이라고 하고 상속하되 이름이 없는지라 곧 참된 이치[眞諦] 로 거짓을 타파하는 것은 모양의 공함[相空] 이라고 하며,
성품과 모양이 모두 공함에서부터 열 여덟 가지 ≺공≻[十八空] 을 짓기에 이른다.
만일 들어가지 못한 이가 오히려 마음이 있는 것[有心] 을 마음이 없는 것[無心] 과 상대하여 헤아린다면 상대라는 혹(惑)이 일어나므로,
이것은 위의 것들과 다르다.
인성가(因成假)는 감관과 대경의 두 법이 화합되는 것을 취하여 인연으로 삼고,
상속가(相續假)는 세로로 뜻 감관[意根] 의 앞과 뒤를 취하여 상속하는 것으로 삼는다.
세로[堅] 로 생기고 소멸하는 것에서 보면 이것은 개별적인 소멸[別滅] 이다.
개별적인 소멸이면 협소한 것이지만,
여기서의 상대가(相待假)는 공통적인 소멸[通滅] 이라 이 이치로 하면 관대하다.
공통적인 소멸이라 함은,
마치 세 가지 무위(無爲)가 비록 다 같이 소멸하지는 않는 것이라 하더라도 생김이 없음을 얻는 것과 같다.
허공의 생김이 없는 것과 상대하여 마음의 생김을 설명하지만 이것이 곧 상대가이다.
이제 이 마음을 살펴보자.
생김이 없는 것과 상대하여 마음이 생기는 것인가,
생김이 있는 것과 상대하여 마음이 생기는 것인가,
생기기도 하고 생김이 없기도 한 것과 상대하여 마음이 생기는 것인가,
생기는 것도 아니요 생기지 않는 것도 아닌 것과 상대하여 마음이 생기는 것인가.
만일 생김이 없는 것과 상대하여 마음이 생긴다고 하면,
이 생김이 없는 것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만일 있다면 생기는 것에 상대될 수 있으므로 도리어 이것은 상대가 있는 것이거늘 어찌하여 상대가 없다고 말하겠는가.
있다면 상대가 있는 것이라 곧 이것은 저절로 생기는 것[自生] 이다.
만일 이것이 없는 것과 상대하여 없는데도 마음을 낸다고 한다면,
온갖 것이 없고 없는 데서도 역시 마음을 내어야 하리니,
없다는 것을 있다는 것에서 바라보면 없다는 그것이 곧 다른 것에서 생기는 것이다.
또 생김이 없는 것이 비록 없다 하더라도 생기게 하는 성질이 있어서 이 성질이 상대되기 때문에 마음이 있음을 안다고 하면,
이 성질은 이미 생긴 것인가,
아직 생기지 않은 것인가.
만일 이미 생겼다면 생기는 그것이 바로 생김에서인데 어찌하여 성질이라 하는가.
그 성질이 만일 아직 생기지 않았다면 아직 생기지 못했거늘 어찌하여 생길 수 있겠는가.
만일 생기는 것과 상대하면서 마음이 생긴다면,
생기는 것은 도리어 생기는 것과 상대하고 긴 것은 마땅히 긴 것과 상대해야 된다.
이미 이런 이치가 없다면 무엇이 상대되어 마음이 생기는가.
만일 생김과 생김이 없는 것과 상대하기 때문에 마음의 생김이 있다면,
마치 짧은 것에 상대하는 것은 긴 것에 있게 됨과 같나니,
이것에서는 두 가지 허물에 떨어지고 만다.
저마다 있다면 두 가지 생김이 나란히 성립되고,
저마다 없다면 생기는 것은 전혀 얻을 수 없는 것이니,
앞에서 타파한 것과 같다.
만일 생기는 것도 아니요 생김이 없는 것도 아닌 것과 상대하면서 마음의 생김이 있다고 하면,
논(論)에서 이르되 “인연으로부터 생기는 것조차도 오히려 얻을 수 없거늘,
하물며 인연이 없는 것이겠는가”고 한 뜻과 같다.
또 이 인연이 없는 것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만일 있다면 도리어 이것은 상대가 있는 것이요,
만일 없다면 도리어 이것은 상대가 없는 것이거늘 어찌하여 원인이 없다고 하는가.
만일 성질이 있다고 한다면,
그 성질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성질이 있다면 생긴 것인가,
생기지 않은 것인가.
만일 생긴 뒤라면 이것은 생긴 것인데 어찌하여 성질이라고 하는가.
만일 생함이 없다면 어떻게 생할 수 있는가.
이렇게 4구(句)로 상대가를 살펴보면서 마음을 구하여도 얻지 못하고 성품의 진실됨을 일으키지 못하니,
단지 이름만 있을 뿐이다.
이름으로 생기는 것은 생겨도 곧 생겨남이 없는 것이다.
다시 성품과 모양 안에서 5음(陰)ㆍ12입(入)ㆍ18계(界)를 구한다 하여도 이것이 곧 법공(法空)이다.
성품과 모양에서 인아(人我)의 지견(知見)을 구한다 하여도 얻을 수 없는 것을 중생공(衆生空)이라 하나니,
이렇게 하여 열 여덟 가지 ≺공≻(空)에 이른다.
보행기석(輔行記釋)에 인성가에서 처음 저절로 생긴다[自生]
함을 타파하는 것 가운데서 이르되,
“앞 생각이 감관[根] 이 되고 뒷 생각이 식(識)이 된다면 감관에는 다른 체성이 없고 도리어 끊임없이 소멸되는[無間滅]
뜻[意] 을 가리켜 체성을 삼는지라 감관[根] 을 능히 내는 것[能生] 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앞 뜻의 소멸로 말미암아 뒷 뜻의 식이 생기니,
그러므로 구사론(俱舍論)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곧 6식신(識身)이 끊임없이 소멸됨으로 말미암아 뜻[意] 으로 삼는다.
신(身)이라 함은 바탕[體] 이다.
끊임없이 소멸할 때에는 뜻 감관[意根] 의 바탕이 된다.
그때에 다섯의 식[五識]
또한 끊임없이 소멸하는 뜻에 의지함으로써 친연(親緣)으로 삼고 다섯 가지 감관을 사용함으로써 소연(疎緣)을 삼아서 다섯 가지 식을 낸다.
다섯의 식에 끊임없이 분별이 생길 때를 곧 의식(意識)이라 한다.
지금 문장의 뜻에서 이것은 다섯 식이 아니고 바로 제 6식이 나타남이 있는 것을 반연하여 법진(法塵)을 삼으므로 곧 의식이라 한다는 것이다.
곧 이 식을 그 감관에 상대하여 연구하고 물어본다.
그러므로 이르되,
“감관[根] 에 식이 있어서 식을 내는가 감관에 식이 없으므로 식을 내는가.”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물었다.
“앞생각이 만일 소멸된다면 어찌하여 뒷생각을 낼 수 있는가.” 대답하였다.
“두 가지 이치가 있어서이니,
첫째 생각생각마다 소멸함[念念滅] 에서요,
둘째 생각생각마다 생김[念念生] 에서다.
이 두 가지 이치 때문에 옛것이 소멸하고 생기게 된다”고 했다.
단견(斷見)을 낼까 염려하여 모름지기 세웠고 지금은 옛 것을 타파하기 위하여 이 때문에 책망해야겠다.
생김과 소멸이 비록 다르기는 하나 감관[根] 과,
식(識)이 모두 자기의 마음이다.
감관을 쫓거나 식을 쫓거나 모두 제 성품[自性] 에 속하므로 제 성품 중에서는 감관과 식이 서로서로 책망하면서 구하여도 얻을 수 없다.
또 마음과 식은 모두 대경[塵] 을 대상으로 하여 마음이라는 이름이 붙여진다.
나아가 감관에 만일 식이 있다면 두 가지 거리낌[妨] 이 있게 된다.
즉 감관과 식이 나란히 서게 되고,
주체와 객체가 나란히 서게 된다.
그렇다면,
생김이 있으면 끝없는 허물이 생기게 되고,
만일 주체와 객체가 없다면 생긴다는 이치조차 성립되지 않거늘 어떻게 생긴다고 말하겠는가.
또 끊임없이 소멸하여야 비로소 식을 낸다고 이름한다.
감관에 만일 식이 있다면 생기고 소멸함이 서로가 어긋나기 때문에 나란히 허물이 있게 되고,
감관에 만일 식이 없다면 곧 식이 없는 것과 유사한 것이 식을 낼 수 있게 된다.
또 식에 생하는 성질이 있다는 것을 책망하여 보면 이것은 종적(縱的)으로 타파하는 것이다.
있다면 오히려 함께 있는 것이니 역시 나란히 생기는 것이 되고,
없다면 도리어 함께 없는 것이니 무정(無情)에서 생기는 것과 같이 된다.
또 식과 생하는 성질이 같으냐 다르냐 하는 것을 지어 책망한다.
만일 같다면,
무릇 성질이란 뒤에 비로소 생기게 됨을 말하는데,
식과 성질이 같기 때문에 주체와 객체가 없게 된다.
만일 다르다면 식과 다르므로 바깥의 경계와 같아져서 경계가 식을 내는 것이니 곧 다른 것과 같은 것이거늘 어떻게 자기라고 헤아리겠는가.
다음에,
다른 것의 성질이라는 것을 타파한다.
비록 마음이 스스로 생기지 않고 바깥에 있는 대경이 와서 마음을 일으킨다 하더라도,
대경을 감관에서 바라보면 그 대경을 다른 것이라고 하게 된다.
먼저 이것이 마음인가를 따져 보면 세 가지 거리낌이 있다.
첫째 대경은 마음이 아니다라는 거리낌이니,
곧 마음을 대경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둘째 대경은 뜻이 아니므로 바깥도 동시에 저절로 생기게 된다는 거리낌이다.
셋째 나란히 생기게 된다는 거리낌이니,
대경이 만일 마음이 아니라면 대경이 생기게 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고,
대경이 마음이라 한다면 도리어 마음이라는 곳에서 마음을 내는 것이 되므로 곧 두 마음이 나란히 생기게 된다 할 것이다.
만일 씨에서 싹이 생긴다면 주체와 객체가 있게 되지만,
씨에서 도리어 씨를 낸다고 하면 두 개의 씨가 나란히 생긴 것이 되거늘 무슨 주체와 객체가 있게 되겠는가.
대경이 만일 마음이 아니라면 그 감관과 더불어 식이라는 이치가 없게 되며,
뜻[意] 을 똑같이 책망하는 것도 역시 그렇다.
그러므로 이르되,
“앞에서 타파한 것과 같다”고 한다.
대경에 식과 생하는 성질이 있다는 것도 앞을 예(例)로 하여 보면 알 수 있으리라.
함께 생긴다[共生] 고 하는 것을 타파한다.
자기와 다른 것의 성질에 떨어지는 것을 함께 생긴다고 하는데 이제 타파해 보자.
만일 자기와 다른 것에 저마다 생함이 없다면 화합하여도 없게 된다.
마치 두 개의 모래에 진끼가 없으므로 화합시켜도 붙지 아니함과 같다.
원인 없이 생기지 않음을 타파하는 것도 그러하다.
성품과 모양이 둘 다 ≺공≻하다는 것에 결부시켜 본다.
다만 성품이 없다고 헤아리기만 하면 성품의 ≺공≻함[性空] 이라 한다.
성품이 이미 타파되고 나면 물질과 마음[色心] 이라는 안팎의 모양이 있을 뿐이어서 이미 4구(句)가 없는 것에도 머무르지 않으며 모양 역시 얻을 수 없는지라 모양의 ≺공≻함[相空] 이라고 한다.
안과 바깥과 중간에도 있지 않다고 함은,
안은 원인[因] 이요 바깥은 조건[緣] 이며 중간은 원인과 조건이 함께 함[共] 일 뿐이다.
항상 스스로 존재한다 하면 이것은 인연이 없을 뿐이요,
이런 분별이 없기 때문에 네 가지 성질이 없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공≻을 비록 앞과 뒤로 말한다 하더라도 뜻에서는 시간을 달리하지 않는다.
또 두 가지 이치[二諦] 로써 두 가지 ≺공≻을 결부시켜 본다.
만일 성품에 대한 고집이 있다면 세간이면서도 이치가 아니지만,
성품에 대한 고집이 파괴되고 나면 비로소 세속 이치[世諦] 라 하게 된다.
이르되,
“세속 이치로 성품을 깨뜨린다”고 했다.
성품에 대한 고집이 파괴되고 나면 이름만이 있을 뿐이고 이름은 거짓이어서 거짓 그것이 곧 모양이며,
≺공≻한 모양 때문에 법성(法性)을 관(觀)하게 된다.
도리를 관하고 진실을 깨달으므로 “참된 이치[眞諦] 로 모양을 깨뜨린다”고 했다.
≺공≻은 앞과 뒤가 아니요 두 가지 이치는 시간을 같이하나 성품과 모양을 분별하기 위하여 앞과 뒤로 설명할 따른이다.
또 네 가지 마음을 돌리는 것[四運心] 이 있다.
첫째 아직 일으키지 않았고[未運] ,
둘째 일으키려고 하고[欲運] ,
셋째 지금 일으키고 있고[正運] ,
넷째 이미 일으킨[運己]
그것이다.
부 대사(傅大士)가 이렇게 게송으로 읊었다.
홀로 스스로 나에게 묻노니
마음 가운데 집착할 바 무엇인가.
마음 일어나는 네 가지 모습[運心]
추궁해도 모두 생김 없으니
천 가지 실마리[千端]
만 가지 묶음[萬累] 이 어찌 묶을 수 있으리오.
해석하여 보자.
아직 일으키지 않았거나 일으키려고 하는 두 가지 마음의 움직임은 미래에 속한 것인데 미래의 어느 곳에 마음이 있겠는가.
지금 일어나고 있는 한 가지 마음의 움직임은 현재에 속한 것인데,
현재조차도 머물러 있지 않거늘 어느 곳에 마음이 있겠는가.
또 생기는 때에 속하는 것은 아직 생기지 못했거나 이미 생긴 것을 인하여 생기는 때가 성립된다.
아직 생기지 못했거나 이미 생긴 것에는 이미 생함 없으니 생기는 때 역시 생김이 없게 된다.
마치 이미 떠나감과 아직 떠나 가지 않음과 떠나가는 때 이 셋은 모두 떠나가는 법이 없는 것과 같다.
마치 중론(中論)에서 타파한 바와 같다.
이미 일어난 한 가지 마음의 움직임은 이미 과거에 속한 것이라,
과거는 이미 사라졌거늘 어느 곳에 마음이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금강경(金剛經)에서 이렇게 말했다.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 세 세상이 모두 공하거늘 한 마음인들 어디에 있겠는가.
의지할 바의 근본인 마음조차도 오히려 있지 않거늘,
의지하게 되는 가지와 끝인 온갖 만법이 어찌 진실이겠는가.
그러므로 천 가지 실마리와 만 가지 묶음이 어찌 묶을 수 있으리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한 생각이 공한 줄을 알면 모든 대경은 저절로 파괴되며,
의지할 바[所依] 가 이미 있지 않거늘 능히 의지함[能依] 이 어떻게 생길 수 있겠는가.
마치,
근원이 다하면 물 흐름이 마르고 뿌리가 위태하면 잎이 시들어짐과 같다.
그런 까닭에,
아난(阿難)은 일곱 군데를 고집하였으나 의거한 데가 없었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삿된 법은 지탱하기 어렵다.
2조(祖)는 바로 그 아래서 구했는데도 생기지 않다가 ≺공≻을 알고 나서야 비로소 깨쳤다.
조사(祖師)와 부처의 대요(大要)는 이 종지[宗] 를 가리켰을 뿐이다.
이미 일으키는 주체인 마음을 얻지 못한지라 역시 일어나는 객체인 경계도 얻지 못한다.
마음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곧 ≺나≻[我] 가 상실되고 경계를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곧 법(法)이 없어진다.
만일 사람[人] 과 법이 모두 ,≺공≻하면 곧 한 마음인 묘한 도리가 드러난다.
다만 마음과 대경이 상대하면 만 가지 법이 종횡으로 있게되고 경계와 지혜가 한결같으면 천 가지 차별이 단번에 고요하다.
이렇게 하여야 본각(本覺)이요 신령한 지혜인 참 마음을 분명히 깨치리니,
머무름도 없고 의지함도 없어서 법계(法界)에 두루하게 된다.
광백론(廣百論)에서 이르되,
“경에서는 ‘조그마한 법의 제 성품도 얻을 수가 없고 짓는 주체만이 있을 뿐이다’고 하였나니,
짓는 주체가 바로 마음이요 심수(心數)의 법이다”고 했다.
또 ‘3계(界)는 유심(唯心)이다’고 하였으니,
이러한 경전 등은 그 수가 한량없다,
그러므로 모든 법마다 유식(唯識)이란 도리가 성립되거늘 어찌 결정적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온갖 법은 실로 식(識)으로 있을 뿐이라고 고집한다면 역시 뒤바뀜이 되는 것이니,
경계조차 없거늘 식인들 어떻게 있겠는가.
경전에서 유심이라고 한 말씀은 식을 관하면서 저 바깥의 대경을 버리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미 바깥 대경을 버렸다면 허망한 마음은 따라 쉬게 되고 허망한 마음이 쉬어지기 때문에 중도(中道)를 깨달아 알게 된다.
그러므로,
경의 게송에서 이렇게 말한다.
경계가 유심임을 통달하지 못한지라
갖가지 분별을 일으키게 되지만
경계가 유심임을 통달하고 나면
분별은 이내 생기지 아니한다.
만일 경계가 유심임을 알면
바깥 대경의 모양을 버리리니
이로부터 분별을 쉬게 된다면
평등한 참 ≺공≻[眞空] 을 깨치게 되리.
현식론(顯識論)에서 물었다.
“‘경계와 식을 모두 보내 버리면 어느 식이 성립되는가.’ 대답하였다.
‘경계와 식이 모두 없어져버리면 바로 이것이 진실한 성품[實性] 이니,
진실한 성품이 곧 아마라식(阿摩羅識)이다’”고 했다.
유마경(維摩經)에서 이르되,
“화엄(華嚴)보살이 말하였다.
‘나로부터 두 가지를 일으키면 둘이 되지만,
나의 참 모습[實相] 을 본 이면 두 가지 법을 일으키지 아니한다.
만일 두 가지 법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앎[識] 이 없을 것이니,
앎이 없는 이라야 둘이 아닌 법문[不二法門] 에 들게 됩니다”고 했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둘의 법이거나 작은 털끝만큼까지라도 있다고 보는 것은 모두 식에 속한 것이므로 경계와 식이 모두 없어져야 진공(眞空)의 도리에 들어간다.
그런 까닭에,
지광(智光) 논사(論師)는 중근기[中根] 를 세우면서 설명하기를,
“법 모양의 대승[法相大乘] 은,
경계는 공하되 마음은 유식(唯識)의 도리에 있으므로 아직은 평등한 진공에 완전히 들지 못했다”고 했고,
상근기[上根] 를 위한 설명에서는 “모양 없음의 대승[無相大乘] 은,
마음과 경계가 모두 공하여 평등한 한 맛이다”고 했나니,
참으로 분명한 이치[了義] 가 된다.
그러므로,
유식으로 인하여 진공인 마지막의 문에 들어가나니,
이것을 여의고 따라 구한다면 참된 해탈이 아니다.
유식초(唯識鈔)에서 다음과 같이 문답했다.
“물었다.
‘속마음의 식일 뿐이라면,
이것은 진실로 있는 것인가,
진실로 있는 것이 아닌가.’
대답했다.
≺‘논(論)에서 이르되,
모든 심심소(心心所)는앞의 진술이니,
종(宗)에 해당한다 다른 것에 의지하여 일어나기 때문에인(因)에 해당한다 역시 요술로 된 일과 같나니,
비유(喩)에 해당한다 진실로 있는 것이 아니다법(法)이니,
결(結)에 해당한다’고 했다.
물었다.
‘그렇다면,
마음과 경계는 도무지 차별이 없거늘,
무엇 때문에 식이 있을 뿐이라고 설명하는가.’
대답했다.
‘외도(外道)들이 심심소 이외에 실로 경계가 있다고 고집하는 것을 제거하기 위해 가정으로 식이 있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요,
식만이 진실하다고 하는 것도 아니다.
식론(識論)에서 이르되,
‘심심소 외에 실로 경계가 있다고 고집하는 것을 없애버리기 위해 식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고 했나니,
만일 유식이 진실로 있다고 고집한다면 마치 바깥의 경계를 고집한 것과 같아서 역시 이것은 법집(法執)이다.
만일 법집이 생기지 아니하면 곧 진공에 들어가게 된다’고 했다.
물었다.
‘유식의 도리에 결부시켜 사람이나 법이 모두 ≺공≻하다면,
지금 곧 수용(受用)하는 이것은 어떠한 물건인가.’
대답했다.
‘수용하고 있는 법은 바로 6진(塵)일 뿐이니,
인연 때문에 생기고 인연 때문에 소멸한 것이어서 결정코 안에서 받는 사람이 없고 밖에서 사용할 수 있는 대경도 없다.
십팔공론(十八空論)에서 이르되,
≺바깥 ≺공≻[外空] 이라 함은 받을 바의 ≺공≻[所受空] 이라고도 하나니,
바깥의 6입(入)을 여의고는 따로 받을 수 있는 법이 없다.
만일 모든 중생이 받는 바요 사용하는 바라면 이것은 육진일 뿐이니,
안에서는 벌써 받는 사람이 없는지라 밖에서도 수용할 수 있는 법이 없다.
곧 사람이나 법이 모두 ≺공≻한지라 유식이요 경계는 없기 때문에 바깥 ≺공≻[外空] 이라고 한다.
경계가 없기 때문에 식도 없나니,
바로 이것이 안의 ≺공≻[內空] 이며,
이렇게 하여 열 여덟 가지 ≺공≻에 이른다≻고 했다.’
물었다.
‘사람과 법이 모두 ≺공≻하다면 식도 성립되지 않거늘,
지금 곧 보고 듣고 하는 것은 무엇으로부터 존재하는가.’
대답했다.
‘온갖 앞의 대경에서 나타나는 모든 법은 모두 생각에 따라서 이르게 되고 다 생각에 상대하면서 생기는 것이니,
생각이 쉬면 경계도 ≺공≻하고 뜻이 비면 법도 고요하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되,
“≺모든 부처님들과 온갖 법은 뜻으로부터 생기는 형상이다≻고 했다.
또 경에서 ≺이르되 모든 법은 견고하지 않아서 생각에서만이 서 있을 뿐이니,
공인 줄 알고 보는 이면 온갖 것에 생각이 없게 된다≻고 했다.’”
그러므로 보고 듣고 하는 것은 연기(緣起)일 뿐임을 알아야 한다.
필경공(畢竟空)을 보는 것은 마치 세간에서 부리는 요술과 같고 또 허공의 꽃이 일었다 스러졌다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르되,
“보고 듣는 것은 아지랑이와 같고 3계(界)는 마치 허공 꽃과 같다”고 했다.
마치 눈의 감관에 다섯 가지 연[五緣] 이 갖추어지면 보게 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 보는 주체는 다섯 가지 연일 뿐이니,
보는 이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다섯 가지 연이 갖추어지면 식이 일어나서 볼 수 있게 된다.
어느 연이 반드시 식을 낼 수 있는가 하면,
만일 하나하나로는 생기지 못하나 합해지기 때문에 볼 수 있다고 한다면 마치 다섯 사람의 소경이 어울리면 하나의 보는 것이 이루어져야 함과 같다.
아무리 여러 소경들이라도 원래 보지 못한 것인데,
합쳐진다 한들 어떻게 보게 되겠는가.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따로 식이 생기는 것은 아니요 보는 것만이 있는 이것이 뭇 인연일 뿐이니,
그런 까닭에 연기라고 한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되,
“눈은 스스로 보지 못하며 모든 인연에 속하는 것이니,
인연은 보는 성품이 아니어서 눈은 곧 ≺공≻이다”고 했다.
눈의 감관이 이미 그런지라 모든 감관에 대해서도 그와 같다.
다만,
생기는 것은 인연으로 생길 뿐이요 소멸하는 것은 인연으로 소멸할 뿐이다.
생기고 소멸함이 인연일 뿐인지라 사람과 법은 모두 고요하다.
만일 이 아공(我空)ㆍ법공(法空)의 두 가지를 분명히 알면 곧 원만한 진리를 증득하게 된다.
그러므로,
“만일 인연의 법임을 보게 되면,
이를 부처님을 뵙는 것이라고 한다”고 했다.
【문】범부 세계에서 취하고 버리고 분별하면서 역경(逆境)ㆍ순경(順境)에서 생각이 걸려 기뻐하거나 싫어하며,
가슴 속에 가득 차서 언제나 6진(塵)에 속박되어 막히고 거리끼고 하거늘,
어떻게 감관과 경계가 융통하게 되어 온갖 것에 뜻대로 할 수 있는가.
【답】법성(法性)만을 보면 큰 열반을 증득하게 되어 오히려 한 법도 통할 수 없는 것이 없거늘,
어찌 모든 법에 장애됨이 있겠는가.
언제나 뜻대로 되고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없으리라.
그러므로 열반론(涅槃論)에서 이르되,
“지금 ‘열반은 뜻과 같다(如意)’고 함은,
온갖 고락과 선악은 이 이치 아님이 없기 때문에 뜻과 같다고 한다”고 했다.
해석하여 보자.
‘이 이치 아님이 없다’고 함은,
모두가 한 마음인 진여의 도리이기 때문이다.
괴로움과 즐거움도 이 마음으로 느끼고 착함과 나쁨도 마음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므로,
바깥의 대경이 어기거나 막거나 함이 없다.
만일 한 마음임을 알면 어찌 뜻대로 되지 않겠는가.
하나의 법이라도 감정[情] 에서 나온다면 다툼이 성립된다.
능가경(楞伽經)의 게송에서 말했다.
이에 세워진 바가 있다면
모두 뒤섞여 어지러워지리니
만일 제 마음일 뿐이라고 본다면
이야말로 어기거나 다툼이 없네.
그런 까닭에,
미혹되었을 때는 사람이 법을 좇게 되고 깨친 뒤에는 법이 사람을 연유하게 된다.
마치 마니주(摩尼珠)가 무정(無情)인 물질의 법이로되 오히려 사사로움이 없이 보배를 비내려서 중생들에게 두루 공급하는 것과 같나니,
그러므로 여의주(如意珠)라고 일컫는다.
하물며 영대(靈臺)인 묘한 성품이 어찌 그렇게 할 수 없겠는가.
한 마음으로만 돌아가면 크게 걸림없이 되리니,
그러므로 이르되,
“하늘과 땅을 바꿔가며 자유자재로 거침없이 하리라”고 했다.
【문】논(論)에서 이르되,
‘이것은 한 마음일 뿐이기 때문에 진여라고 한다’고 하면,
진(眞)은 거짓이 없다는 것이요 여(如)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묘한 빛깔은 잔잔하여 ≺공≻하지 않은[不空]
성품이거늘,
어찌하여 경전 중에서는 또 ‘마음이 ≺공≻하면 온갖 법이 ≺공≻하다’고 했는가.
【답】무릇 ≺공≻이라 함은,
세간의 온갖 허망한 마음으로 오염된 법이 ≺공≻하다는 말이다.
제 나름으로 분별하고 고집하는지라 도리(道理)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세간을 벗어난 불법에서의 참 마음이라면 ≺공≻하지 않나니,
도리가 있기 때문이다.
기신론(起信論)에서 이르되,
“진여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여실이 ≺공≻[如實空] 한 것이니,
궁극의 진실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둘째 여실히 ≺공≻하지 않은[如實不空]
것이니,
자체에 샘[漏] 이 없는 성품 공덕을 두루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공≻하다 함은 본래부터 온갖 오염된 법과는 상응(相應)하지 않은 까닭으로 온갖 법의 차별된 모양을 여의었고 허망한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여의 제 성품은 있거나 없거나 하나거나 다르거나 하는 등의 모양이 아니라고 알아야 한다.
나아가 통틀어서 말하면 모든 중생들이 허망한 마음이 있음으로써 생각생각마다 분별하여 모두 상응하지 않음을 의지한지라,
그 때문에 ≺공≻이라고 하지만,
만일 허망한 마음을 여읜다면 실로 ≺공≻이라 할 것도 없기 때문이니라.
≺공≻하지 않다고 함은,
이미 법의 체성이 ≺공≻하여 허망이 없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곧 이 참 마음은 변하지 아니하여 청정한 법이 가득히 찬지라 ≺공≻하지 않다고 한다”고 했다.
청량기석(淸凉記釋)에서 이르되,
“허망과 합하지 아니함을 ≺공≻한 성품이라 하고,
온갖 덕[萬德] 을 갖추었으므로 ≺공≻하지 않다고 한다” 했다.
그 해석하는 글에서 이르되,
“만일 허망한 마음을 여의면 실로 ≺공≻할 것도 없다.
그렇다면 ≺공≻의 광[空藏] 이 드러남에는 허망으로 인해서 드러나지만,
≺공≻하지 않은 광[不空藏] 은 반드시 오염[染] 을 뒤집어야 ≺공≻하지 않음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이르되,
‘법의 체성이 ≺공≻하여 허망이 없음을 드러내기 때문에 곧 이 참 마음은 평등하다’고 한다”고 했다.
마치,
본래부터 단나의 덕[檀德] 을 갖추고 있으나 지금 간탐을 부리고 있고,
본래부터 시라의 덕[尸德] 을 갖추고 있으나 지금은 5욕(欲)을 따르고 있으며,
본래부터 고요한 선정[寂定] 을 갖추고 있으나 지금은 산란한 생각을 하고 있고,
본래부터 큰 지혜[大智] 를 갖추고 있으나 지금은 어리석게 되었으니,
이야말로 간탐은 보시에 감추어져 있고,
나아가 어리석음은 지혜에 감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논에서 이르되,
“법성(法性)에는 간탐이 없음을 알기 때문에 따르[隨順] 며 단(檀) 바라밀을 수행한다”고 하였으니,
만행(萬行)의 예가 다 그렇다.
그러므로 논에서 이르되,
“본래부터 이치를 진실하게 아는 것이 갖추어져 있나니,
만일 마음에 동요가 있다면 진실하게 아는 것이 아니다”고 했다.
허망한 마음의 동요는 그 진실하게 아는 것에 감추어져 있음을 밝혔나니,
그러므로,
허망에 즉(卽)한 ≺공≻은 ≺공≻하지 않은 온갖 덕을 감추고 있다.
따라서 경의 게송에서 이르되,
“허망을 알면 본래 스스로 진실이요 부처님을 보게 되면 청정하느라”고 했다.
그러므로 논에서 이르되,
“마지막에 진실을 드러내기 때문에 ≺공≻하다고 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공≻의 광은 ≺공≻하지 않음을 능히 감추었고 능히 감춘 것이 벌써 ≺공≻한지라 ≺공≻하지 않음을 드러내는 광도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다.
둘째 제 성품의 마음 위에는 허망이 없으므로 ≺공≻이 되고,
없는 바를 따른다면 곧 ≺공≻하지 않음의 덕(德)이다.
마치 ,≺공≻하여 간탐이 없으므로 곧 단나(檀那)에 존재하는 ≺공≻이 드러나고 허망한 동요가 없으므로 성품에 존재하는 ≺공≻이 드러남과 같다.
그러므로 이 ≺공≻의 광은 ≺공≻하지 않음을 갖추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중생의 본각(本覺)에는 부처의 지혜가 본래부터 스스로 원만히 갖추어져 있으나 다만 허망에 가리워져서 스스로 알지 못할 뿐임을 알아야 한다.
만일 허망조차 ≺공≻한 줄을 알면 참된 깨달음이 단변에 나타나니,
마치 구름이 걷히면 날이 밝아지고 먼지가 벗겨지면 거울이 맑아지는 것과 같다.
성품을 보는 때이므로,
“꺼내어 얻는 것이요,
닦아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고 했다.
삼신만일(三身滿日)에도 이르기를,
“만행(萬行)을 끌어내는 것은 바깥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며,
모두가 한 마음 속에 본래부터 완전히 갖추어져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공≻하지 않은 ≺공≻의 체성은 온갖 덕을 포함해 있고 존재[有] 하지 않는 존재의 이치는 원만한 종(宗)에 계합되나니,
≺공≻과 존재가 서로 이룩되어야 모든 장애가 없게 된다.
만일 ≺공≻을 여읜 존재라면 그 존재는 항상함[常] 이요,
만일 존재를 여읜 ≺공≻이라면 그 ≺공≻은 아주 없음[斷] 이 된다.
이제 있고 없음을 가지런히 행하면 하나의 뜻[旨] 을 어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智)로는 존재를 통달하고 혜(慧)로는 ≺공≻을 관한다.
만일 존재를 통달했으면서도 ≺공≻을 모르면 지혜 눈[慧眼] 을 잃게 되고 ≺공≻을 관하면서도 존재를 비춰보지 못하면 지혜 마음[智心] 을 잃게 된다.
보살은 유위(有爲)를 다하지 않고 무위(無爲)에 머무르지도 않나니,
유위를 다하면 지혜 업[智業] 이 이루어지지 않고 무위에 머무르면 지혜 마음[慧心] 이 밝지 않다.
그러므로,
의해(義海)에서 이르되,
“만일 ≺공≻이 존재와 다르다면 곧 깨끗해도 깨끗함이라 하지 않나니,
≺공≻에 헷갈렸기 때문이다.
만일 존재가 ≺공≻과 다르다면 곧 물들어도 물들음이라 하지 않나니,
존재를 고집하기 때문이다”고 했다.
이제,
존재 그대로가 온전히 ≺공≻이라야 물들음의 갈래[分] 라 하고,
≺공≻ 그대로가 온전히 존재라야 깨끗함의 갈래라 하리니,
≺공≻과 존재가 걸림없음으로 말미암아 물듦과 깨끗함이 자재하게 된다.
만일 ≺공≻ 그대로가 존재요 존재 그대로가 ≺공≻이라면,
온갖 법에 이르기까지 모두 서로서로 상즉(相卽)한다.
이미 서로 상즉한지라,
결국에는 하나다,
다르다,
≺공≻이다,
존재다 하는 등의 법이 마음 이외에서 나타남이 없다.
설령 나타남이 있다 하여도 모두 이것은 자기 마음의 상분(相分)이어서,
범부 소인이 모르고 취하여 존재를 고집하거나 버려서 ≺공≻에 잠기는 것과는 같지 않다.
만일 이 한 마음인 중도(中道)의 문에 들어간다면 만행(萬行)인 방편의 도(道)를 이룰 수 있으리라.
마치 대장엄법문경(大莊嚴法門經)에서 이르되,
“문수사리(文殊師利)가 말하였다.
‘방편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생사를 버리지 아니함이요,
둘째 열반에 머무르지 아니함이다.
또 두 가지가 있다.
첫째 ≺공≻의 문[空門] 이요,
둘째 나쁜 소견의 문[惡見門] 이다.
다시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 모양이 없는 문[無相門] 이요,
둘째 모양을 거칠게 생각하고 세밀하게 생각하는 문[相覺觀相] 이다.
다시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원이 없는 문[無願門] 이요,
둘째 원을 내는 문[願生門] 이다.
다시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지음이 없는 문[無作門] 이요,
둘째 착한 뿌리의 행을 심는 문[種善根行門] 이다.
다시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생김이 없는 문[無生門] 이요,
둘째 생김을 보이는 문[示生門] 이니라’”고 함과 같다.
그러므로 종취[宗] 를 깨치면 역경ㆍ순경이 같은 데로 돌아가고,
체성을 통달하면 선과 악이 나란히 변화한다.
【문】논(論)에서 이르되,
“지혜[智] 와 지혜의 처소[智處] 를 모두 반야(般若)라 한다”고 했다.
지혜의 처소는 경계이거늘,
어떻게 반야를 이루는가.
【답】반야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진실하고 항상 머무르는 반야[眞實常住般若] 요,
둘째 관하고 비추어 작용이 있는 반야[觀照有用般若] 이다.
만일 진실한 반야라면,
성품이 온갖 처소에 두루하여 고요하면서도 항상 비추며 하나의 참 마음일 뿐이므로 주체와 객체를 분간하지 않는다.
곧 세간의 완고한 경계를 비출 바[所照] 로 삼는 것과는 같지 않다.
또한 편벽되고 협소한 허망한 마음을 비출 바로 삼는 것과 같지 않으며,
또한 가정으로 세운 진여를 비출 바로 삼는 것과도 같지 않다.
여기서는,
하나의 체성이 은밀히 통하여 마음과 마음이 서로 비추는 것이라,
마음 외에는 경계도 없고 경계 외에는 마음도 없다.
마음은 곧 경계의 마음이요 경계는 곧 마음의 경계이기 때문이니,
이렇게 녹아 어울리거늘 어찌 반야가 아니겠는가.
그런 까닭에 이르되,
“물질[色] 이 그지없기 때문에 반야도 그지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물질을 여의고는 마음이 없고 마음을 여의고는 물질이 없는 줄 알 것이다.
마치 반야경(般若經)에서 이르되,
“다시,
용맹(勇猛)이여,
보살마하살은 이렇게 지어가야 한다.
빛깔[色] 은 반연할 대상[所緣] 이 아니니라.
왜냐 하면,
온갖 법에는 반연할 대상이 없어서 조그마한 법도 취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것을 취할 수 있다면 이것이 바로 반연할 대상이니라.
이와 같아서 용맹이여,
빛깔은 지어가는 빛깔이 아니고,
나아가 식(識)도 지어가는 식이 아니니라.
용맹이여,
온갖 법은 지어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빛깔로 보는 것도 아니고 식으로 보는 것도 아니며,
나아가 식으로 아는 것도 아니고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만일 빛깔에서부터 식에 이르기까지 아는 것도 아니고 보는 것도 아니라면 이것을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느니라”고 함과 같다.
또 문수반야경(文殊般若經)에서 이르되,
“문수사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을 닦을 때에는 법이 마땅히 머무른다거나 마땅히 머무르지 않는다고 보지 않으며,
경계를 취하거나 버릴 수 있는 모양으로 보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마치 모든 여래께서 온갖 법과 경계의 모양을 보시지 않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모든 부처님의 경계도 보지 않거늘 하물며 성문ㆍ연각ㆍ범부의 경계를 취하겠습니까.
말하거나 생각할 수 있는 모양도 취하지 않고 말하거나 생각할 수 없는 모양도 취하지 않으며 모든 법이 약간의 모양이 있다고도 보지 않으므로,
스스로 증득하는 ≺공≻한 법이야말로 말할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이와 같이,
보살마하살은 모두 이미 한량없는 백천만억의 부처님들을 공양하고 모든 선근(善根)을 심었어야 이 매우 깊은 반야바라밀에 대하여 놀라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고 했다.
도 이르되,
“또 반야바라밀을 닦을 때에는,
범부의 모양도 보지 않고 불법의 모양도 보지 않으며 모든 법에 결정된 모양이 있다 함도 보지 않으니,
이것을 반야바라밀을 닦는다 합니다”고 했다.
【문】세간이나 세간을 벗어났거나 이 한 마음뿐이거늘,
어찌하여 다시 진실[眞] 과 허망[妄]
및 안[內] 과 바깥[外] 을 나누는가.
【답】진실과 허망ㆍ안과 바깥은 다만 세간의 문자에 결부시켜 분별할 뿐이다.
그런 까닭에,
마음은 안과 바깥이 아니지만 안과 바깥이 바로 마음이다.
체성은 진실과 허망이 아니지만 진실과 허망이 바로 체성이다.
안으로 인하여 바깥이 성립되면서 다스림[對治] 을 이루고 허망을 빌려서 진실을 드러내지만 까닭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진취대승방편경(進趣大乘方便經)에서 이르되,
“마음이라는 이치에는 두 가지 모양이 있다.
첫째 안 마음[內心] 의 모양이요,
둘째 바깥 마음[外心] 의 모양이다.
안 마음의 모양에는 다시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진실이요,
둘째는 허망이다.
진실이라 함은,
마음 체성인 근본의 모양이 여여(如如)하여 다르지 아니하고 청정하며 원만하여 장애가 없으며 미세하고 은밀하다.
보기는 어렵되 온갖 처소에 두루하여 항상 무너지지 않으면서 온갖 법을 건립하고 생장시키기 때문이다.
허망이라 함은,
생각을 일으켜 분별하고 깨닫고 알고 연려(緣慮)하고 기억하고 생각하는 따위의 일이다.
비록 상속하면서 온갖 경계를 낸다 하더라도 속은 거짓이어서 진실이 없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바깥 마음의 모양이라 함은,
온갖 모든 법의 갖가지 경계들이 생각하는 바가 있음에 따라 경계가 앞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안 마음과 바깥 마음에는 차별이 있다.
안의 허망한 생각은 원인도 되고 체성도 되며,
바깥의 허망한 생각은 결과도 되고 작용도 된다고 이렇게 알아야 하리라.
이와 같은 이치에 의지하는 것이므로,
나는 ‘온갖 법은 모두 마음이다’라고 설명한다.
또 바깥 마음이라 함은 마치 꿈에서 본 갖가지 경계는 마음으로 생각하며 지을 분 진실한 바깥의 일은 없는 것처럼,
온갖 경계도 모두 그와 같은 줄 알아야 하리라.
모두가 무영의 식(識)에 의지하여 꿈에 보이는 것은 허망한 생각으로 지어지기 때문이다.
또 안 마음은 순간순간마다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보이는 객체나 반연의 대상인 온갖 경계도 마음에 따라 순간순간마다 머무르지 않는 줄 알아야 한다.
이른바 마음이 생기기 때문에 갖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소멸하기 때문에 갖가지 법이 소멸한다.
그러면서도,
생기고 소멸하는 모양은 이름만이 있을 뿐이요 실로 얻을 수 없다.
마음이 경계에 가 닿지도 않고 경계 또한 마음에 와 닿지도 않는다.
마치 거울 속의 형상이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음과 같다.
그러므로,
온갖 법에서 생기고 소멸하는 일정한 모양을 구한다 하여도 마침내 얻을 수 없다.
이른바 온갖 법은 결국 체성이 없어서 본래부터 항상 ≺공≻하여 실로 생기거나 소멸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온갖 법이 실로 생기거나 소멸하지 않으면 온갖 경계에는 차별된 모양이 없고 고요한 한 맛이다.
그것을 곧 진여요 첫째가는 이치[第一義諦] 며 제 성품이 청정한 마음이라고 한다.
제 성품이 청정한 마음은 잔잔하고 원만하여 분별의 모양이 없기 때문이다.
분별의 모양이 없다 함은 온갖 처소에 있지 아니한 바가 없다는 것이다.
있지 아니한 바가 없다 함은 온갖 법이 의지하고 건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화엄경의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마치 금과 금빛은
그 성품에 차별이 없듯이
법과 법이 아님 역시 그러하나니
그 체성에는 다름이 없다.
또 이르되,
“세계의 평등은 중생의 평등과 틀리지 않고 중생의 평등은 세계의 평등과 틀리지 않다.
온갖 중생의 평등은 온갖 법의 평등과 틀리지 않고 온갖 법의 평등은 중생의 평등과 틀리지 않다.
욕심 동아리를 여읜 평등은 모든 중생이 편히 머무르는 평등과 틀리지 않다.
모든 중생이 편히 머무르는 평등은 욕심 동아리를 여읜 평등과 틀리지 않다.
과거는 미래와 다르지 않고 미래는 과거와 다르지 않다.
과거와 미래는 현재와 다르지 않고 현재는 과거ㆍ미래와 다르지 않다.
세간의 평등은 부처의 평등과 다르지 않고 부처의 평등은 세간의 평등과 다르지 않다.
보살행(菩薩行)은 일체지(一切智)와 다르지 않고 일체지는 보살행과 다르지 않다”고 했다.
해석하여 보자.
세계와 중생이 어찌하여 평등하다 하느냐.
저마다 체성이 없기 때문에 모두 성취되지 아니한다.
만일 자기 종류로써 서로 바라보면 마치 세계가 세계를 바라봄이 평등한 것과 같고 만일 다른 종류로써 서로 바라보면 마치 세계가 중생을 바라봄이 평등한 것과 같다.
하나의 성품 없음[無性] 의 도리로부터 마음과 경계ㆍ자기와 다른 이ㆍ같음과 다름ㆍ높음과 낮음에 이르기까지 시방 3세(世)가 모두 다 평등하다.
또 현상과 현상이 어김이 없고[事事無違] ,
본체와 본체가 어김이 없다[理理無違] .
현상과 현상이 어김이 없다 함은 요약하여 세 가지 인연이 있다.
첫째 법 성품이 융통[法性融通] 하며,
둘째 연기하여 서로 말미암는 문[緣起相由門] 이다.
이 두 가지는 현상과 현상이 걸림없다[事事無礙] 는 이치이다.
셋째 바로 말하면 동일한 연기[同一緣起] 라 현상에도 통하고 본체에도 통한다.
마치 한 개의 잎이 떨어진 것을 보고 천하가 가을이라 동일한 가을인 줄 아는 것과 같다.
파괴되지 않은 현상과 변하지 않는 성품은 모두 동일한 연기이기 때문이다.
본체와 본체가 어김이 없다 함은 역시 두 가지 문이 있다.
첫째 세계의 성품이 없는 것이니,
곧 중생도 성품이 없고 둘째 본체가 같기 때문이니,
즉(卽)할 만한 것도 없고 어길 만한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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