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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4-03-01_무진의보살경_005 본문
『무진의보살경』
K0071
T0397
제5권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 해제[있는경우]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 [pt op tr] 무진의보살경_K0071_T0397 핵심요약
♣0071-005♧
『무진의보살경』
용어
‡사무애변 = 4무애, 4 무애지, 4 무애해
‡사념주 = 4념처
제5권
비영리-동일조건변경허락원문번역문
무진의보살경
무진의보살경 제5권
송나라 양주 사문 지엄 보운 공역
정관유 번역
사리불이여,
■ 보살마하살의 네 가지 걸림 없는 지혜도 다함이 없으니,
그 네 가지란 어떤 것인가 하면,
첫째는 이치에 걸림이 없는 것이요,
둘째는 법에 걸림이 없는 것이요,
셋째는 말에 걸림이 없는 것이요,
넷째는 기뻐서 하는 말에 걸림이 없는 것입니다.
■ 이치에 걸림이 없다는 것은
모든 법 가운데 으뜸가는 이치[第一義]를 아는 것이니,
이것은 바로
비교하여 아는 지혜[比智]요,
인(因)의 지혜요,
연(緣)의 지혜요,
화합하는 지혜요,
치우침[邊]에 떨어지지 않는 지혜요,
중도(中道)에 머물지 않는 지혜요,
12인연의 지혜입니다.
이것은 바로
법성과 다르지 않은 지혜요,
실다운 지혜요,
참된 경지의 지혜요,
‘공’을 깨닫는 ‘공’한 지혜요,
상(相)이 없는 상의 지혜요,
원(願)이 없는 원의 지혜요,
함이 없는 함의 지혜요,
한 모양을 관찰하는 지혜입니다.
이것은 바로 ‘나’가 없음을 관찰하는 지혜요,
중생이 없음을 관찰하는 지혜요,
수명이 없음을 관찰하는 지혜요,
‘나’가 없음을 관찰하는 으뜸가는 이치의 지혜요,
과거를 관찰하는 걸림 없는 지혜요,
미래를 관찰하는 치우친 소견이 없는 지혜요,
현재를 관찰하는 일체의 씨앗이 되는 지혜입니다.
이것은 바로 모든 쌓임을 원수나 도둑 같다고 관찰하는 지혜요,
모든 경계를 독사와 같다고 관찰하는 지혜요,
모든 감관을 공(空)이 모인 것과 같다고 관찰하는 지혜요,
부처님 법[內法]은 영원히 적멸하다고 관찰하는 지혜요,
부처님 법 이외의 법[外法]은 행할 곳이 없다고 관찰하는 지혜입니다.
이것은 바로 반연하는 대상이 허깨비 같다고 관찰하는 지혜요,
생각이 바르게 머묾을 관찰하는 지혜요,
인욕의 바른 법을 관찰하는 지혜요,
자기 몸을 관찰하는 지혜요,
모든 진리를 분명하게 앎을 관찰하는 지혜요,
괴로움[苦]과 화합하지 않는 지혜요,
쌓임[集]을 짓지 않는 지혜요,
사라짐[滅]의 자성의 지혜요,
도(道)에 도달할 수 있는 지혜입니다.
이것은 바로 모든 법을 분별하는 지혜요,
중생의 모든 근기와 마음의 움직임이 들어가는 곳을 따름을 관찰하는 지혜요,
어떤 힘으로도 굴복시킬 수 없는 지혜요,
모든 깨달음을 사실대로 아는 지혜요,
선정을 받아 지니는 지혜요,
슬기로운 광명의 지혜요,
허깨비로 장엄한 지혜요,
더울 때의 아지랑이처럼 미혹(迷惑)한 지혜입니다.
이것은 바로 꿈속에서 욕망하는 지혜요,
메아리가 반연하는 지혜요,
거울 속의 형상은 오고 감이 없는 지혜요,
갖가지 모양은 모양이 없는 지혜요,
세간의 멍에와 멍에를 여읜 지혜요,
태어남을 취하거나 태어남을 여의는 지혜요,
성문승이 다른 이로부터 들은 지혜요,
연각승이 12인연을 관찰하는 지혜요,
대승이 모든 선근을 원만하게 갖추는 지혜입니다.
사리불이여,
이것을 보살의 이치에 걸림이 없는 지혜라고 합니다.
■ 또한 이치에 걸림이 없다는 것은 모든 법의 이치를 생각하는 것이니,
왜냐하면 이 모든 법은 나와 중생이 없고 수명이 없고 남도 없기 때문입니다.
나와 중생이 없고 수명이 없고 남도 없는 것을 곧 이치라고 하며,
수명의 이치와 같이 물질 등의 모든 법도 또한 이와 같으니,
이것을 이치에 걸림이 없다고 합니다.
또 이치에 걸림이 없다는 것은
머무름이 없는 말이요,
다함이 없는 말이요,
일체의 법을 얻은 말이니,
이와 같이 이치에 걸림이 없는 것은 모든 여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 진실한 이치는
구별함이 없고
다름이 없으므로
지혜로 분별함에 장애가 없으니,
이것을 보살의 이치에 걸림이 없는 지혜라고 합니다.
■ 사리불이여,
보살의 법에 걸림이 없는 지혜란 어떤 것인가 하면,
이른바 착한 법과 착하지 않은 법과
세간의 법과 출세간의 법과
조작할 수 있는 법과 조작할 수 없는 법과
번뇌가 있는 법과 번뇌가 없는 법과
함이 있는 법과 함이 없는 법과
그릇된 법과 옳은 법과 생사의 법과 열반의 법 등
이러한 모든 법은 바로 법성(法性)이 평등함을 관찰하는 것이니,
이 지혜 보리가 평등하며,
이 지혜의 성품이 평등하므로 이것을 법에 걸림이 없는 지혜라고 합니다.
또한 법에 걸림이 없다는 것은
중생의 욕심(欲心)이 많은 행과
욕심이 적은 행과
처음 욕심을 일으킨 행과
탐욕을 내는 모양의 행과
현재 반연한 욕심의 행과
현재 인연한 욕심의 행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어떤 중생은 안으로는 욕심의 행이 있어도 밖으로는 욕심의 행이 없고,
밖에는 욕심의 행이 있어도 안에는 욕심의 행이 없으며,
안과 밖으로 욕심의 행이 있기도 하고 안과 밖 모두 욕심의 행이 없기도 합니다.
또 물질에 대한 욕심의 행은 있어도 소리와 냄새와 맛과 감촉에 대한 것은 없으며,
소리에 대한 욕심의 행은 있어도 물질과 냄새와 맛과 감촉에 대한 것은 없으며,
냄새에 대한 욕심의 행은 있어도 물질과 소리와 맛과 감촉에 대한 것은 없으며,
맛에 대한 욕심의 행은 있어도 물질과 소리와 냄새와 감촉에 대한 것은 없으며,
감촉에 대한 욕심의 행은 있어도 물질과 소리와 냄새와 맛에 대한 것은 없으니,
이와 같이 중생들의 모든 욕심으로 행하는 문(門)을 관찰하는 행에 들어갑니다.
욕심으로 행하는 것은 2만 1천 가지 행이 있고,
성내는 행에도 2만 1천 가지가 있으며,
어리석은 행에 2만 1천 가지가 있고,
이 셋을 함께 가진 행이 2만 1천 가지가 있으므로
이와 같이 중생의 8만 4천 가지 마음의 행을 관찰하여
사실 그대로 알아서 거기에 알맞은 것을 따라 설법하니,
사리불이여,
이것을 보살의 법에 걸림이 없는 지혜라고 합니다.
사리불이여,
■ 어떤 것을 보살의 말에 걸림이 없는 지혜라고 하는가 하면,
모든 음성을 다 관찰하여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이른바 하늘과 용과 귀신과 건달바와 아수라와 가루라와 긴나라와 마후라가와
사람인 듯 사람 아닌 듯한 것 등의
이러한 언어와 문자와 음성을 모두 다 알 수 있으며,
이러한 다섯 갈래 여러 부류의 중생에 대해서도
그 종류에 따라
하나하나의 음성과 언어와 문자를 알아서 설법하니,
이것을 말에 걸림이 없는 지혜라고 합니다.
이러한 말과 법과 문자를 생각하고 깨달아서 걸림이 없으므로
이 보살은 한 가지 말과 두 가지 말과 세 가지 말과
나아가 아무리 많은 말에 이르기까지,
곧 남자의 말과 여자의 말과 남자의 말도 여자의 말도 아닌 말과
과거의 말과 미래의 말과 현재의 말까지도 모두 알며,
한 글자로부터 많은 글자의 말에 이르기까지 다 아니,
이것을 말에 걸림이 없는 지혜라고 합니다.
이 말에 걸림 없는 지혜는
말할 때 잘못 말함이 없어서 막히거나 걸림이 없으며,
미묘한 말로써 환하게 통하여 하는 말이
다 자세하고 정직하여 거칠지 않으며,
모든 문자와 말에 장엄을 원만히 갖추므로 듣는 대중이 기뻐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이러한 갖가지의 미묘한 음성은
깊고 멀고 넓고 커서
세속의 진리와 제일의 진리를 장엄하여
지혜의 화살로 삿된 소견을 잘 쏘아 물리니,
이 말에 걸림이 없음은
모든 부처님이 허락하신 것으로
중생에게 모두 기쁨을 얻도록 할 수 있습니다.
사리불이여,
이것을 보살의 말에 걸림이 없는 지혜가 다할 수 없다고 합니다.
■ 사리불이여,
무엇을 보살이 기쁘게 하는 말의 걸림이 없는 지혜가 다할 수 없다고 하는가 하면,
그 하는 말이 걸림이 없고,
한 말에 머물지 않고,
하는 말이 빠르고 민첩하고 영리하여
묻는 대로 대답하니,
걸림이 없는 대답이요,
어긋남이 없는 대답입니다.
이것은 곧 상응(相應)하는 대답이며,
참는 힘에 머무는 대답이며,
진제(眞諦)와 속제(俗諦)의 두 가지 진리에 의지하는 대답이며,
보시와 지계와 인욕과 정진과 선정과 지혜에 의지하는 대답이며,
모든 법의 장구(章句)에 의지하는 대답이며,
네 가지 생각 두는 곳[念處]과 바른 정근(正勤)과 뜻대로 하는[如意] 신통과
다섯 가지 뿌리[五根]와
다섯 가지 힘[五力]과
일곱 가지 깨달음의 갈래[七覺支]와
여덟 가지 바른 도[八正道]의 아주 깊은 이치에 의지하는 대답이며,
적멸한 생각에 의지하는 대답이니,
■ 이른바 기쁘게 하는 말의 걸림이 없는 지혜라는 것은
모든 언어와 문자를 입으로 분별하여 정직하게 대답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모든 선정 삼매의 참된 진리의 지혜로써 대답하고,
삼승(三乘)을 변론하되 중생들의 모든 마음의 행이 상응하는 바에 따라 대답하며,
교묘한 말씨는 벙어리나 염소와 같지 않아
억세고 거칠거나 경솔하고 포악하거나 희롱하는 따위의 말씨가 없으니,
펼쳐서 말한 것이 고요하고
사람들이 받아서 사용하는 위엄과 공덕 있는 말이어서
아무런 얽매임이 없습니다.
서로 들어맞아 어그러짐이 없고
미묘하고도 부드러우며
조롱하거나 꾸짖음이 없으므로 성인의 칭찬을 받고,
부처님이 가르치신 말씀과 같이
그 범음(梵音)이 청정하여 모두 다 들으니,
이것이 바로 기쁘게 하는 말의 걸림이 없는 지혜입니다.
모든 부처님이 다른 중생을 위해
미묘한 법을 연설하는 것을 허락하셨으므로
이 법을 듣는 자는 출세간의 기쁨을 얻고 모든 괴로움을 없애버리니,
이것을 기쁘게 하는 말의 걸림이 없는 지혜라고 합니다.
사리불이여,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네 가지 걸림이 없는 지혜가 다할 수 없다고 합니다.
■ 또한 사리불이여,
보살마하살은 네 가지 의지하는 법이 있어 또 다함이 없으니,
그 네 가지란 어떤 것인가 하면,
이치에 의지하고 말에 의지하지 않음과
지혜에 의지하고 알음알이에 의지하지 않음과
요의경(了義經)에 의지하고 요의경이 아닌 것에 의지하지 않음과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는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 어떤 것을 이치에 의지하고 말에 의지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인가 하면,
말이란 세간 법속에 들어가서 말하고,
이치란 세간에서 벗어나는 법을 알아 문자의 모양이 없는 것이며,
말이란 보시와 조복(調伏)과 옹호(擁護)를 말하는 것이고,
이치란 보시와 지계와 인욕을 알아 평등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말이란 생사를 헤아려 말하는 것이요,
이치란 생사에 성품이 없음을 아는 것이며,
말이란 열반의 맛을 설명하는 것이고,
이치란 열반의 성품이 없음을 아는 것이며,
말이란 모든 승(乘)을 해설하여 곳에 따라 편히 머무는 것이고,
이치란 모든 승을 잘 알아 한 모양의 지혜의 문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말이란 모든 버림[捨]을 설명하고,
이치란 베푸는 이와 베푸는 물건과 받는 사람의 세 가지가 청정한 것이며,
말이란 몸과 입과 뜻으로 깨끗한 계율의 공덕과 위의를 받아 가질 것을 말하고,
이치란 몸과 입과 뜻으로 지음이 없음을 분명히 알아서 모든 깨끗한 계율을 옹호해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말이란 인욕으로 성냄과 스스로를 높임과 교만을 끊어버림을 말하고,
이치란 모든 법을 분명히 통달하여 무생법인(無生法忍)의 지혜를 얻는 것이며,
말이란 모든 선근을 부지런히 행하는 것을 말하고,
이치란 정진에 편히 머물러 처음과 끝이 없는 것이며,
말이란 모든 선정과 해탈 삼매와 삼마발제1)를 말하고,
이치란 멸진정(滅盡定)을 아는 것입니다.
말이란 온갖 문자와 지혜의 근본을 모두 들어 간직할 수 있는 것이고,
이치란 이 지혜의 이치는 말로 할 수 없음을 아는 것이며,
말이란 37조도법(助道法)을 말하고,
이치란 모든 조도법을 올바로 알아 수행해서 능히 그 깨달음의 과(果)를 증득하는 것입니다.
말이란 고통과 쌓임과 도(道)의 진리를 말하고,
이치란 사라짐의 진리를 증득하는 것이며,
말이란 무명의 근본과 나아가 태어남을 인연하여 늙고 죽음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고,
이치란 무명의 사라짐과 나아가 늙고 죽음의 사라짐을 아는 것이며,
말이란 선정과 지혜 돕는 법을 말하는 것이고,
이치란 해탈의 지혜를 밝히는 것입니다.
말이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말하는 것이고,
이치란 착하지 않은 뿌리가 곧 해탈의 지혜임을 아는 것이며,
말이란 장애되는 법을 벗어남을 말하는 것이고,
이치란 걸림 없는 해탈을 얻는 것이며,
말이란 삼보의 한량없는 공덕을 칭찬하여 말하는 것이고,
이치란 삼보의 공덕은 욕심을 여읜 법성과 함께 함이 없는 모양인 것입니다.
말이란 발심으로부터 도량에 앉는 데 이르러 닦아 모아서 장엄하는 보살의 공덕을 말하는 것이고,
이치란 일념(一念)의 지혜로 모든 법을 깨닫는 것이니,
■ 사리불이여,
요약하여 말하자면 8만 4천의 법 무더기[法聚]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을 말이라 하고,
모든 문자로써 말해줄 수 없음을 아는 것을 이치라고 합니다.
■ 어떤 것을 지혜에 의지하고 알음알이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는가?
알음알이란 네 가지 알음알이에 머무는 것이니,
무엇이 네 가지인가 하면,
물질의 알음알이에 머무르는 것과,
느낌의 알음알이에 머무르는 것과,
생각의 알음알이에 머무르는 것과,
행의 알음알이에 머무르는 것이며,
■ 지혜란 이 네 가지 알음알이의 성품은 머무는 바가 없음을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알음알이란 땅과 물과 불과 바람을 아는 것이고,
지혜란 이 네 가지가 법성에 다름이 없음을 아는 것이며,
알음알이란 눈의 알음알이는 물질에 머물고 귀 코 혀 몸 뜻의 알음알이는 법에 머무는 것이고,
지혜란 안의 성품이 적멸하여 바깥으로 행하는 것이 없으므로 모든 법에 기억할 것이 없음을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알음알이란 오로지 반연한 것을 취하여 생각하고 분별하는 것이며,
지혜란 마음에 반연하는 것이 없어서 어떤 모양도 취하지 않고 모든 법에 대해 바라는 것이 없는 것이며,
알음알이란 함이 있는 법을 행하는 것이고,
지혜란 함이 없는 법에는 알음알이도 행하는 바가 없고 함이 없는 법의 성품에는 알음알이가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 알음알이란 나고 머물고 사라지는 모양이고,
지혜란 나고 머물고 사라지는 모양이 없는 것이니,
사리불이여,
이것을 지혜에 의지하고 알음알이에 의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 어떤 것을 요의경에 의지하고 요의경이 아닌 것에 의지하지 않는다고 하는가 하면,
요의경이 아닌 것이란 분별하여 도를 따르는 것이고,
요의경이란 과(果)를 분별하지 않는 것이며,
요의경이 아닌 것이란 어떤 업을 짓고 행함에 과보가 있다고 믿는 것이고,
요의경이란 모든 번뇌를 다한 것입니다.
요의경이 아닌 것이란 모든 번뇌를 꾸짖는 것이고,
요의경이란 맑고 깨끗한 법을 칭찬하는 것이며,
요의경이 아닌 것이란 나고 죽음의 고뇌를 말하는 것이고,
요의경이란 나고 죽음과 열반이 한 가지 모양이어서 둘이 없는 것이며,
요의경이 아닌 것이란 갖가지로 장엄한 문자를 찬양하는 것이고,
요의경이란 아주 깊고 깊은 경전의 가지기 어렵고 알기 어려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의경이 아닌 것이란 흔히 중생을 위해 죄와 복의 모양을 말하여 설법을 듣는 자로 하여금 마음을 기쁘게도 하고 슬프게도 하는 것이며,
요의경이란 모든 연설이 반드시 듣는 자에게 마음으로 조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요의경이 아닌 것이란 ‘나’와 남과 중생과 수명과 양육과 대장부와 짓는 자와 받는 자 따위의 갖가지 문자와
모든 법에 베푸는 자와 받는 자가 없음을 말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베풂이 있고 받음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며,
요의경이란 ‘공’하여 모양과 원(願)이 없음과 지음이 없고 태어남이 없음과
‘나’와 남, 중생과 수명, 양육과 장부, 짓는 자와 받는 자가 없음을 말하면서 항상 한량없는 모든 해탈문을 말하니,
이것을 요의경에 의지하고 요의경이 아닌 것에는 의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 어떤 것을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않는다고 하는가 하면,
사람이란 ‘나’와 남에 집착한 견해에 짓는 이와 받는 이가 있음을 거두어 취하는 것이요,
법이란 ‘나’와 남에 집착한 견해에 짓는 이와 받는 이가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범부와 착한 사람과 믿음으로 행하는 사람과 법으로 행하는 사람과 팔인(八人)2)ㆍ수다원(須陀洹)ㆍ사다함(斯陀含)ㆍ아나함(阿那含)ㆍ아라한(阿羅漢)ㆍ벽지불(辟支拂)ㆍ보살 등의 사람과, 오직 한 사람이 세상에 나오더라도 이익 됨이 많아 많은 사람들이 안락하게 되며 세간을 가엾이 여겨 대비심을 내어서 사람과 하늘에 많은 은혜를 주시는 이른바 불세존이니,
이와 같은 이름들은 부처님께서 세간의 이치에 따라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이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만약 이런 견해를 받아들여 취한다면 이것이 바로 사람에 의지하는 것이니,
여래는 사람이라는 견해를 받아들이는 이를 교화하기 위하여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법성(法性)이란
변하거나 바뀔 수 없고,
지음도 짓지 않음도 없으며,
머물거나 머물지 않음도 없고,
모든 것이 평등하여 평등함 또한 평등하고 평등하지 않음도 평등하며,
인(因)도 없고 연(緣)도 없이 바르게 결정함을 얻어
모든 법에 대해 차별과 다름이 없으므로
그 성(性)과 상(相)에 걸림이 없는 것이 마치 허공과 같으니,
이것을 법성이라고 합니다.
만약 이 법성에 의지한다면 마침내 한 모양의 법을 여의지 않을 것이며,
이 법문에 드는 자는 모든 법이 한 법성과 같음을 관찰할 것이니,
그러므로 모든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리불이여,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네 가지 의지함이 다함이 없다고 합니다.
■ 또한 사리불이여,
보살마하살이 조도법을 닦아 모으는 공덕과 지혜도 다함이 없으니,
닦아 모으는 공덕이 다함이 없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하면,
■보시와 지계로써 마음을 닦아 모으고
자비를 일으켜 행하여 자기의 모든 죄를 드러내어 참회하며,
또 중생을 대신하여 그들의 죄를 드러내어 참회하고,
■ 참회한 다음에는 자기의 일처럼 따라 기뻐하며,
모든 중생을 비롯하여 배움이 있거나 배울 것이 없는 사람 및
벽지불과 발심한 보살과 이미 익혀 행한 자와 견고히 머물러 물러나지 않는 자와
일생만 지나면 부처를 이룰 이러한 여러 사람들의 삼세 동안에 닦아 모은 공덕을
마땅히 한 마음으로 자기 일처럼 따라 기뻐하고
다시 과거ㆍ미래ㆍ현재 부처님들의 모든 선근에도 따라 기뻐하는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이 따라 기뻐하는 보살은 모두 이러한 공덕을 성취하며,
■ 따라 기뻐함을 마치고는 또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께 권청하되,
처음 도를 이룬 이에게는 법의 바퀴를 굴리기를 청하고
열반을 보이는 분에게는 항상 세상에 머물기를 청하며
모든 보살 성인에게는 늘 세상에 머물러서 중생을 위해 설법하기를 청하여,
■ 이러한 선근이나 선근의 생각 같은 것을 모두 위없는 보리에 회향 합니다.
■ 이 보살은 발심하지 못한 자에게 권하여 발심하게 하고,
이미 발심한 자를 위해서는 모든 바라밀을 설하며,
가난한 자는 재물로써 구호하고 병이 들었으면 의사와 약품을 베풀어 수시로 치료하며,
세력이 없는 자에게는 인욕을 행하기를 권하고,
금계를 범하는 자가 있으면 그 허물을 덮거나 숨기지 못하게 하고
이미 덮거나 숨긴 자에게는 그 허물을 드러내도록 권합니다.
■ 현재의 모든 부처님과 열반에 드는 분께 모두 발심하여 공양ㆍ공경하고,
스승과 어른을 부처님처럼 존경하며,
법을 구할 때에는 목숨을 걸어 게을리 하지 않고 이 법보를 가장 값진 보배로 생각하며,
설법하는 자에겐 부처님과 같이 생각합니다.
설법을 듣기 위해서라면
백 유순(由旬)을 지나더라도 마음을 바야흐로 더욱 용맹스럽고 날쌔게 하여
지치거나 괴로운 생각이 없으며 이양을 위해서 강설을 하지 않습니다.
부모의 은혜를 알아 그 은혜를 갚되 모든 공양하고 섬기는 일에 마음에 처음부터 후회함이 없으며,
공덕을 지은 것에는 항상 충분하다고 여기지 않고,
몸과 입과 뜻을 막아 지켜서 아첨하거나 그릇됨이 없게 합니다.
■ 불탑(佛塔)을 세워 공덕을 얻는 것은 범천의 권청하는 복과 같으며,
이 모든 상(相)을 원만히 갖춤은 문호를 열어 크게 보시하기 때문이며,
갖가지 좋은 상호를 얻음은 모든 선(善)을 닦기 때문이며,
몸을 장엄함은 교만이 없기 때문이며,
입을 장엄함은 입의 허물을 여의기 때문이며,
뜻을 장엄함은 법에 머물지 않기 때문입니다.
불토를 장엄함은 신통으로 교화하기 때문이며,
법을 장엄함은 모든 욕심을 여의기 때문이며,
대중을 장엄함은 이간질하는 말과 나쁜 말로써 다른 사람을 파괴하지 않기 때문이며 법을 받는 자에게 사실대로 말하기 때문입니다.
설법하는 것을 기뻐하여 거룩하다고 칭찬함은 그 지은 공덕이 황당하지 않기 때문이며,
덮개를 여의는 것은 일부러 가서 법을 듣기 때문이며,
보리수(菩提樹)를 장엄함은 좋은 동산과 숲을 부처님께 바치기 때문이며,
도량을 장엄함은 일체의 모든 선근을 성취하기 때문입니다.
청정함을 내는 것은 번뇌에 더럽혀지지 않기 때문이며,
보배 손을 얻음은 모든 소중히 여기던 물건을 베풀었기 때문이며,
다함없음을 얻음은 한량없는 보배 창고[寶藏]를 보시하였기 때문이며,
보는 이마다 기뻐함은 항상 온화하고 즐겁기 때문입니다.
법성을 체득함은 마음의 지혜 광명이 중생들을 고루 비추기 때문이며,
광명을 장엄함은 배우지 않은 자를 깔보지 않고 잘 지도하기 때문이며,
태어날 때마다 청정함은 지계의 공덕을 모두 성취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태(胎) 중에 있을지라도 청정한 것은 다른 사람의 죄를 보지 않기 때문이며,
인간과 천상에 태어남은 10선(善)을 깨끗이 행하기 때문이며,
지혜의 광명이 홀로 뛰어남은 교화할 대상에게 분별심을 내지 않기 때문이며,
모든 법에 자재한 것은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법에 대해 인색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간에서 홀로 빼어난 것은 필경에 청정하기 때문이며,
미묘하게 해탈함은 조그마한 행을 구하지 않기 때문이며,
일체의 공덕을 행함은 모든 슬기로운 마음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며,
일곱 가지 재물을 만족하게 갖춤은 믿음으로 근본을 삼기 때문입니다.
바른 법을 거두어 가짐은 신명을 아끼지 않기 때문이며,
세간을 속이지 않음은 본래의 서원을 갖추기 때문이며,
일체의 불법을 원만히 갖춤은 모든 선의 근본을 이미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 사리불이여,
이것이 바로 보살의 공덕을 간략하게 말한 것이니
만약 자세히 말한다면 한 겁(劫)을 지나고 또 한 겁을 지나도록 말하여도 다할 수 없을 것입니다.
■ 어떤 것이 보살의 지혜가 다함이 없는 것인가 하면,
낱낱의 인(因)으로 지혜를 말한 것을 듣거나
낱낱의 연(緣)으로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인이라 함은 안으로 더욱 정진하려는 의욕이요,
연이라 함은 바깥으로 부지런히 법을 구하는 것이니,
이러한 인과 연으로 부처님의 지혜에 의지하고
성문과 연각의 지혜에 의지하지 않습니다.
지혜로운 이를 가까이 하여 마음에 교만함이 없어서
항상 그 사람에 대해 세존처럼 여기는 생각을 일으키며,
이 모든 지혜로운 이들은 법을 받은 사람을 알아 마음이 이미 부드러워져서
그를 위해 지혜를 말하여 의지하도록 가르치고는
그 바른 그릇에 따라 물듦이 없는 법을 말하며,
설법을 듣는 사람도
이 법 가운데서 부지런히 닦고 모아
조도법(助道法)을 정진하니,
이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 보살이 조도법을 정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아무런 바라는 것이 없이 사무(事務)를 간략히 단절하고,
말을 적게 하며,
모든 하고자 하는 바에 대하여 마음으로 항상 만족할 줄 알고,
이른 밤이나 늦은 밤에 수면을 줄여서
모든 들은 이치를 잘 생각하여 헤아려 분별하고,
착한 법을 자주 구하되 마음에 애착하거나 흐리멍텅함이 없는 것입니다.
모든 쌓임과 덮개를 제거하여 막히거나 가림이 없게 하고,
잘못된 허물은 곧 없애버리며,
바른 행에 굳게 나아가 우러르고,
법다운 행을 존경하여 모두 정진하여 행하며,
법을 구하되 게으르지 않기를 머리에 타는 불을 끄듯이 하니,
이것은 곧 ‘나’없는 행이요,
느리지 않은 행이요,
근본을 버리지 않는 행이요,
마음을 증상시키는 행입니다.
또 대중의 시끄러움을 꾸짖는 행이요,
홀로 있기를 좋아하는 행이며,
고요한 곳에 나아가 생각하는 행이요,
성인의 종자로 만족함을 아는 행이요,
흔들림 없는 두타(頭陀)행이며 법을,
즐거워하는 행이요,
세간의 말을 생각하지 않는 행이요,
세간을 벗어나는 법을 구하는 행이요,
바른 생각을 잃어버리지 않는 행이요,
모든 법의 이치를 일으키는 행이요,
참되고 바른 도의 행이요,
인연을 아는 다라니의 행이요,
부끄럽게 여김으로 장엄하는 행입니다.
또 지혜가 견고한 행이요,
무명의 그물과 번뇌의 묶임을 제거하여 지혜의 눈을 깨끗이 하는 행이며,
잘 깨닫는 행이요,
널리 깨닫는 행이요,
깨달음을 줄이지 않는 행이요,
깨달음을 분석하는 행이요,
현재를 아는 행이요,
남의 공덕을 따르지 않는 행이요,
공덕을 스스로 과시하지 않는 행이요,
다른 사람의 공덕을 찬탄하는 행이요,
업을 잘 닦는 행이요,
인과를 움직이지 않는 행이요,
청정한 업을 아는 행입니다.
사리불이여,
이것을 조도법으로 정진한다고 합니다.
■ 또한 사리불이여,
보살마하살은 또 네 가지의 보시가 있어 지혜를 원만히 갖추니,
네 가지란 첫째 종이와 붓과 먹을 법사에게 보시하여 경전을 베껴 쓰게 하는 것이요,
둘째 갖가지로 꾸며서 미묘하게 장엄한 자리를 법사에게 보시하는 것이요,
셋째 모든 필요한 공양거리를 법사에게 바치는 것이요,
넷째 아첨하거나 왜곡된 마음이 없이 법사를 찬탄하는 것입니다.
사리불이여,
이것을 보살이 네 가지 보시로써 지혜를 원만히 갖춘다고 합니다.
■ 보살은 또 네 가지로 금계(禁戒)를 지녀 지혜를 원만히 갖추니,
네 가지란 첫째 계를 지니고 항상 법을 연설하는 것이요,
둘째 계를 지니고 항상 부지런히 법을 구하는 것이요,
셋째 계를 지니고 바르게 법을 분별하는 것이요,
넷째 계를 지니고 보리에 회향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살이 네 가지로 계를 지녀 지혜를 원만히 갖춘다고 합니다.
■ 보살은 또 네 가지 인욕을 닦아 지혜를 원만히 갖추니,
네 가지란 첫째는 법을 구할 때 다른 사람의 욕설을 참는 것이요,
둘째는 법을 구할 때 굶주림과 목마름과 춥고 더움과 비와 바람을 피하지 않는 것이요,
셋째는 법을 구할 때 화상(和上)과 아사리(阿闍梨)의 행에 따르는 것이요,
넷째는 법을 구할 때 ‘공(空)’과 모양 없음과 원(願)이 없음을 참는 것입니다.
사리불이여,
이것을 보살이 네 가지 인욕을 닦아 지혜를 원만히 갖춘다고 합니다.
■ 보살은 또 네 가지 정진을 닦아 지혜를 원만히 갖추니,
네 가지란 첫째 많이 들음에 부지런함과,
둘째 다라니에 부지런함과,
셋째 기꺼이 말하는 데 부지런함과,
넷째 바른 행에 부지런함이 그것입니다.
사리불이여,
이것을 보살이 네 가지 정진을 닦아 지혜를 원만히 갖춘다고 합니다.
■ 보살은 또 네 가지 선정이 있어 지혜를 원만히 갖추니,
네 가지란 첫째는 홀로 있기를 항상 좋아하는 것이요,
둘째는 한결같은 마음을 항상 좋아하는 것이요,
셋째는 신정과 신통을 구하는 것이요,
넷째는 걸림 없는 해탈의 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사리불이여,
이것을 보살이 네 가지 선정으로 지혜를 원만히 갖춘다고 합니다.
■ 보살은 또 네 가지의 지혜가 있어 지혜를 원만히 갖추니,
네 가지란 첫째는 단견(斷見)에 머물지 않는 것이요,
둘째는 상견(常見)에 들지 않는 것이요,
셋째는 12인연을 통달하는 것이요,
넷째는 무아행(無我行)을 체득하는 것입니다.
사리불이여,
이것을 보살이 네 가지 지혜를 수행하여 지혜를 원만히 갖춘다고 합니다.
■ 보살은 또 네 가지의 옹호하는 법이 있어 지혜를 원만히 갖추니,
네 가지란 첫째 법사(法師)를 자기의 임금처럼 옹호하는 것이요,
둘째 모든 선근을 옹호하는 것이요,
셋째 세간을 옹호하는 것이요,
넷째 다른 사람을 옹호하여 이익 되게 하는 것입니다.
사리불이여,
이것을 보살이 네 가지 옹호하는 법으로 지혜를 원만히 갖춘다고 합니다.
■ 보살은 또 네 가지 만족하는 법이 있어서 지혜를 원만히 갖추니,
네 가지란 첫째 설법의 만족,
둘째 지혜의 만족,
셋째 이양(利養)의 만족,
넷째 모든3) 법의 만족이 그것입니다.
사리불이여,
이것을 보살이 네 가지 만족하는 법으로 지혜를 원만히 갖춘다고 합니다.
■ 보살은 또 네 가지의 힘이 있어 지혜를 원만히 갖추니,
네 가지란 첫째는 정진의 힘이니 많이 듣기를 구하여 해탈을 얻기 때문이요,
둘째는 생각하는 힘이니 보리의 마음을 잊어버리지 않기 때문이요,
셋째는 선정의 힘이니 평등하여 차별이 없기 때문이요,
넷째는 지혜의 힘이니 많이 들음을 닦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네 가지 힘으로 지혜를 원만히 갖춘다고 합니다.
■ 보살은 또 네 가지 방편이 있어 지혜를 원만히 갖추니,
네 가지란 첫째 세간의 행을 따르는 것이요,
둘째 중생의 행을 따르는 것이요,
셋째 모든 법의 행을 따르는 것이요,
넷째 지혜의 행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을 네 가지 방편으로 지혜를 원만히 갖춘다고 합니다.
■ 보살은 또 네 가지의 도(道)가 있어 지혜를 원만히 갖추니,
그 네 가지란 첫째 모든 바라밀의 도요,
둘째 보리를 돕는 도요,
셋째 여덟 가지 성인의 도를 행하는 것이요,
넷째 모든 지혜를 구하는 도입니다.
이것을 네 가지 도로 지혜를 원만히 갖춘다고 합니다.
■ 보살은 또 네 가지 만족함이 없는 행으로 지혜를 원만히 갖추니,
그 네 가지란★★ 첫째 많이 들음을 좋아하여 만족함이 없는 것이요,
둘째 설법을 좋아하여 만족함이 없는 것이요,
셋째 혜(慧)를 행하되 만족함이 없는 것이요,
넷째 지(智)를 행하되 만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살이 네 가지 만족함이 없는 행으로 지혜를 원만히 갖춘다고 합니다.
■ 또한 지혜를 돕는 것이 있으니,
모든 중생의 마음을 따르는 행과
모든 법을 따르는 행과 보시를 따르는 행과 지계와 인욕과 정진과 선정과 지혜를 따르는 행과
사랑하고 가엾이 여기고 기뻐하고 버림을 따르는 행입니다.
이 행을 얻어 지혜를 원만히 갖추니,
왜냐하면 보살이 일으키는 행은 모두 지혜로 근본을 삼고,
지혜를 성취하고 나서는 도로 지혜에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보살은 지혜에 편히 머물러 모든 지혜에 의지해서 어떤 마구니의 권속도 방해할 수 없으니,
그러므로 모든 지혜를 갖추게 됩니다.
사리불이여,
이것을 보살의 지혜를 돕는 행이 다함이 없다고 합니다.
■ 또한 사리불이여,
보살마하살은 네 가지 생각 두는 곳[念處]도 다함이 없습니다.
■ 그것은 보살이 몸을 관찰하여
몸의 행을 닦아서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몸의 뒤바뀜과 화합됨을 보되,
마치 바깥의 풀과 나무와 담과 벽과 기와와 돌이
인연을 따라 있어서
자라날 수 없고 얽매임이 없는 것처럼
이 몸도 그러하여
인연을 따라 생기므로
자라날 수 없고 얽매임이 없으며,
이 다섯 가지 쌓임[陰]과
열여덟 가지 경계[界]와
열두 가지 감관과 대상[入]속에
‘나’나 ‘내 것’도 공(空)하며,
상(常)과 무상(無常)도 공하고,
이 몸은 ‘나’도 없고 ‘내 것’도 있지 않으며,
이 몸은 견고하지 않아 의지하거나 믿을 수 없으므로
마땅히 보리를 바르게 깨달은 몸을 구하여야 합니다.
보리를 바로 깨달은 몸이란
어떤 것인가 하면,
이른바 법신(法身)이며,
금강의 몸이며,
파괴할 수 없는 몸이며,
견고한 몸이며,
삼계에서 벗어난 몸입니다.
나의 몸에 비록 한량없는 허물이 있을지라도
마땅히 그 허물을 제거하고
여래의 몸을 성취하기를 서원하니,
이 보살이 모든 것을 견뎌내면서
오래도록 사대[四大]로 이루어진 몸뚱이와
불타는 번뇌에 처하는 것은
다 모든 중생을 이익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마치 밖에 있는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 네 가지 성분의 갖가지 문(門)과
갖가지 짓는 바와
갖가지 모양과
갖가지 기물(器物)과
갖가지 쓰임이
다 중생을 이익 되게 하는 것처럼,
지금 나의 이 몸도 중생을 이익 되게 함이 그와 같습니다.
보살마하살은 이러한 이익 됨을 보고
몸의 여러 가지 고통을 관찰하고서도 싫어하여 여의려는 생각을 내지 않고,
몸의 덧없음을 관찰하여도 생사를 싫어하지 않고,
몸에 ‘나’라고 할 것이 없음을 관찰하여도 교화하기를 버리지 않고,
몸을 적멸하다고 관찰하여도 버림에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 보살은 안의 몸을 관찰할 때
번뇌를 내지 않고
바깥의 몸을 관찰할 때도 그러하며,
이 보살은 더러운 몸을 여의고
깨끗한 몸의 업을 이루어
미묘한 상호를 원만히 갖추어 스스로 장엄해서
하늘과 사람을 이익 되게 함이 많으니,
이것을 보살이 몸을 관찰하여 몸을 닦는 행이라고 합니다.
■ 어떤 것이 보살의 느낌[受]을 관찰하고 느낌을 닦는 행인가 하면,
보살은 모든 느낌이
다 고통이라고 생각하여
그 느낌을 잘 분별하고 지혜로 헤아려
느낌의 적멸함을 알아서,
즐거움을 느낄 때도
탐욕을 내지 않으며,
고통을 느낄 때에도
세 가지 나쁜 갈래[三惡道]를 관찰하여
크게 슬퍼하는 마음을 일으켜서 성내지 않고,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을 느낄 때에도
어리석음을 일으키지 않으니,
이것은 보살이 느끼는 대상을 바르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가 받은 느낌이
고통스럽거나,
즐겁거나,
고통스럽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거나 간에
이 모든 느낌에서 벗어날 줄 알고
닦을 줄 알며,
모든 중생의 느낌은 적멸하고 장엄하다고 관찰해서
‘이 중생들은 모든 느낌에서 벗어남과 닦음을 알지 못하므로
즐거움을 느낄 때는 탐착하고,
고통을 느낄 때는 곧 성내며,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을 느낄 때는 곧 어리석음을 내니,
나는 이제 마땅히 나아가 지혜를 닦아서
일체의 느낌을 제거함과 동시에
선근을 내고 대비심을 일으켜 지혜를 거둬 가지며
또 중생들의 온갖 느낌을 제거하기 위하여 설법하되,
아직 느낌을 이해하지 못한 자에겐
고통을 느끼고
고통을 이해한 자에겐 즐거움을 느끼게 하리라’고 합니다.
느낌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하면,
이른바 느낌이 없는 것이니,
‘나’와 남, 중생과 수명, 양육(養育)함과 장부(丈夫)가 없어서,
느낌을 거두어 가짐과
거둠과 가짐을 느낌과
느낌을 느낌과
존재를 느낌과
뒤바뀜을 느낌과
분별을 느낌과
모든 소견을 느낌과
눈의 모양을 느낌과
귀ㆍ코ㆍ혀ㆍ몸ㆍ뜻의 모양을 느낌과
빛깔의 모습을 느낌과
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ㆍ법의 모양을 느낌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눈이 빛깔을 인연함을 느껴서 감촉이 생기므로
고통을 느끼고
즐거움을 느끼고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을 느끼며,
귀는 소리를
코는 냄새를
혀는 맛을
몸은 감촉을
마음은 법을 느껴서 감촉이 생기므로
고통을 느끼고
즐거움을 느끼고
고통스럽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을 느끼니,
이것을 느낌이라고 합니다.
또 마음의 뜻을 분명히 깨닫는 한 가지 느낌이 있고,
안의 느낌과 바깥 느낌의 두 가지 느낌이 있고
과거ㆍ미래ㆍ현재를 느끼는 세 가지 느낌이 있고,
네 가지 원소[四大]를 분명하게 깨닫는 네 가지 느낌이 있고,
다섯 가지 쌓임을 생각하는 다섯 가지 느낌이 있고,
여섯 가지 감관[入]을 분별하는 여섯 가지 느낌이 있고,
일곱 가지 알음알이가 머무는 곳인 일곱 가지 느낌이 있고,
여덟 가지 삿된 법인 여덟 가지 느낌이 있고,
아홉 부류의 중생들이 머무는 곳인 아홉 가지 느낌이 있고,
열 가지 착하지 않은 법인 열 가지 느낌이 있습니다.
사리불이여,
요약하여 말한다면 한량없는 중생들의 모든 느낌은
생각으로 반연한 경계의 모든 것을 느낌이라고 합니다.
보살은 그 느낌 중에서 느낌을 닦고
행을 관찰하여 큰 지혜를 일으켜서
중생들의 착하고 착하지 않은 느낌이
나고 머물고 사라지는 모양을 아니,
사리불이여,
이것을 보살이 생각을 두는 곳을
바르게 느껴 다함이 없다고 합니다.
■ 보살이 마음의 생각을 두는 곳[心念處]을 관찰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보리의 마음을 잊거나 잃어버리지 않고
바르게 생각하여 어지럽히지 않아서
마음을 관찰하되
‘이 마음이 나서는 사라지므로 머무는 모양이 없고,
안에 머물지도 않고
바깥으로부터 오지도 않는다.
내가 처음 일으킨 보리심은
이 마음이 이미 다 지나가고 변하고 달라져서
어떤 곳에도 이르지 않고
말할 수도 없고
머무는 곳도 없다.
마음으로 모은 모든 선근 등도
다 지나가서 사라져 변하고 달라져서
어떤 곳에도 이르지 않고
말할 수도 없고
머무는 곳도 없다.
마음의 선근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함도
또한 사라지고 변하는 법이어서
어떤 곳에도 이르지 않고
말할 수도 없고
머무는 곳도 없다.
마음이 마음을 알지 못하고
마음이 마음을 보지 못하며
마음이 마음을 내지 못하니,
내가 무슨 마음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겠는가.
이 보리의 마음은 선근의 마음과 합하지 않으며,
선근의 마음은 회향하는 마음과 합하지 않으며,
회향하는 마음은 보리의 마음과 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만일 보살이 이렇게 관할 때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으면,
이것을 보살이 부지런히 정진한다고 합니다.
또한 보살은
깊고 깊은 12인연을 생각하고 관찰하여 인과(因果)를 잃어버리지 않으니,
이 심성(心性)은 뭇 인연에 속하여
길러낼 수 없고 지음도 없고 얽매임도 없으며,
모든 법도 다 그러하므로 법답게 수행하여 장엄할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나 이제 마땅히 닦아 익히고 장엄하여
심성을 여의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심성은 어떤 것이고 장엄은 어떤 것인가 하면,
심성이란 허깨비와 같아서 생겨남도 없고 지음도 없고 베풀어줌도 없으며,
장엄이란 짓는 보시를 모두 장엄하고 청정한 불국토에 회향하는 것입니다.
심성이란 꿈에서 본 것과 같아서 마음의 모습이 적멸함이요,
장엄이란 계율을 원만히 갖추어 모든 신통을 닦는 것이며,
심성이란 거울 속에 비친 형상처럼 그 모양이 청정함이요,
장엄이란 모든 인욕을 닦아 모두 나고 죽음이 없는 법의 지혜에 회향하는 것입니다.
심성이란 따뜻할 때 생기는 아지랑이처럼 구경에 가서는 적멸한 것이요,
장엄이란 모든 착한 것에 깊이 발심하고 정진하여 위없는 부처님 법을 원만히 갖추는 데에 회향하는 것이며,
심성이란 물질도 없고 상대도 없고 조작함도 없음이요,
장엄이란 모든 선정과 해탈 삼매 닦는 것을 부처님의 선정을 원만히 갖춤에 회향하는 것입니다.
심성이란 볼 수도 없고 가질 수도 없는 것이요,
장엄이란 모든 질문에 잘 분별하고 부처님 지혜를 원만히 갖춤에 회향하는 것이며,
심성이란 연(緣)으로 나지 않음이 없는 것이요,
장엄이란 항상 선근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심성이란 인(因)으로 나지 않음이 없는 것이요,
장엄이란 보리를 도움으로 인하여 발심하는 것이며,
심성이란 여섯 대상[六塵]을 버리므로 그 마음에 일어남이 없는 것이요,
장엄이란 부처님 경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보살은 이 심행(心行)을 관찰하고 신통을 생각하여
신통을 얻고 나서는 모든 중생의 마음을 알 수 있으니,
마음을 알고 나서는 그 마음의 국량에 따라 설법하는 것입니다.
또 심행을 관찰하고 대비(大悲)를 생각하여 중생을 교화하되 싫어하거나 지침이 없으며,
또 심행이 일어나지 않고 다 사라지고 변하여 달라지는 모양과 생사를 버리지 않아
번뇌가 서로 계속됨을 관찰하되 이 마음을 바르게 생각하여 생겨남이 없음을 알아 바른 결정을 이루니,
이와 같이 행한다면 성문ㆍ벽지불의 자리에 떨어지지 않고
이 마음의 힘을 다하여 일념(一念)의 지혜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합니다.
사리불이여,
이것을 보살이 마음의 생각을 두는 곳을 바르게 하여 다함이 없다고 합니다.
■ 사리불이여,
보살이 법의 생각을 두는 곳[法念處]을 관찰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항상 지혜의 눈으로 모든 법을 보아서
도량에 앉을 때까지 중도에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니,
이 보살은 법을 관찰할 때
한 법이나 미세한 모양에 이르기까지
공하고
모양이 없고
원(願)이 없고
지음이 없고
나거나 사라짐이 없고
물질이 없음을 여읜다고 보지 않습니다.
또 한 법이나 미세한 모양에 이르기까지
12인연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보지 않으니,
보살이 법을 관찰하여
모든 법 아닌 것이
법이 아님이 없다고 봅니다.
무엇을 법이라고 하느냐면,
이른바
‘나’가 없는 이치와
중생이 없는 이치와
수명이 없는 이치와
사람이 없는 이치이니,
이것을 법이라고 합니다.
무엇을 법이 아니라고 하느냐면,
이른바 ‘나’라는 소견과
중생이라는 소견
수명이라는 소견과
사람이라는 소견
없어진다고 여기는 소견[斷見],
항상 하다고 여기는 소견[常見]
있다고 하는 소견
없다고 하는 소견이니,
이것을 법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모든 법이 곧 법이고,
모든 법이 곧 법 아니니,
왜 그런가 하면,
공하고 모양 없고 원 없음을 관찰하는 이것을
모든 법이 곧 법이라고 하는 것이요,
아만(我慢)과 교만과 ‘나’와 ‘내 것’과
거두어 가진 모든 소견 이것을
모든 법이 법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보살은 법을 관찰할 때에
어떤 법은
보리의 인(因)이거나 세간을 벗어나는 도(道)의 인이 아니라고
보지 않으니,
이 보살은
모든 법이
다 세간을 벗어나는 도임을 알아서
걸림이 없는 대비를 얻습니다.
또 모든 법이
번뇌에 얽매임을 허깨비 모양과 같다고 관찰하여
이 모든 법은
번뇌가 있는 것도 아니고
번뇌가 없는 것도 아님을 아니,
왜냐하면 모든 법의 이치는 두 가지 성질이 없어서
이 모든 번뇌는 숨기거나 감추는 곳이 없고
쌓거나 모임이 없으므로 만약에 번뇌를 안다면 곧 보리를 아는 것이요
번뇌의 성품이 곧 보리의 성품임을 분명하게 알기 때문입니다.
이 보살은 바른 생각에 편안히 머물러서
한 가지 법도 분별할 것이 없고
아무런 장애가 없어 잘 이해할 수 있어서 바르게 법성에 머무르며,
법성에 머무른 것과 같이 중생의 성품에 머무르며,
중생의 성품에 머무른 것과 같이 허공의 성품에 머무르며,
허공의 성품에 머무른 것과 같이 모든 법의 성품에 머무릅니다.
보살이 법을 관찰할 때
부처님 법에 의지하여
모든 법이 바로 부처님 법임을 이해하니,
그 마음은
이때 번뇌가 다한 지혜[盡智]의 함이 없음을 내지 않으므로
비록 다하였더라도 다한 것이 아니어서,
생겨남이 없는 지혜[無生智]에 들어가며,
또 중생을 관찰하여 붙인 이름[假名]을 버리지 않습니다.
법의 생각을 두는 곳이라는 것은
일체의 모든 법을 바르게 생각함에 편안히 머무는 것이니,
이른바 성문ㆍ연각ㆍ보살ㆍ부처님이 아시는 임시로 붙인 모든 이름의 법을
미래가 다 되도록
끝내 잊거나 잃어버리지 않고
들어가는 것이요,
법의 생각을 두는 곳이라는 것은
한량이 없는 행을 연설하여
불법을 친근히 하고
모든 마구니의 무리를 파괴하여
자연의 지혜[自然智]를 얻는 것입니다.
사리불이여,
이것을 보살이 바른 법의 생각을 두어서 다함이 없다고 합니다.
---------
1 정(定)을 말한다.
2 인(人)은 인(忍)과 같으며 팔인지(八忍地)를 말한다.
3 원문에는 설(說)로 되어 있으나 그렇게 되면 첫째와 중복되므로 제(諸)로 고친다.
○ [pt op 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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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b value 불기2564/03/02/월/18:39
● 즐겁게 설하기
『무진의보살경』은 기본 수행덕목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제시된다.
어떻게 보면 오늘날 불교사전에서 행하는 풀이와 비슷하다.
그런데 대승의 입장에서 수행덕목에 담긴 깊은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너무 자세한 설명이 이어져서
이것을 모두 다 소화하기 힘들다.
그런데 전문 수행자를 지향하는 수행자 입장에서는
결국 이들 각 내용을 잘 이해하고 외어야 햔다.
그리고 현실에서 실천해나가야 한다.
대부분 잔소리 듣는 것을 싫어한다.
물론 자신이 혼자 잘 알고 또 잘 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다른 이가 간섭하고 참견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다른 이를 돕기 위해 무언가 조언을 하고 의견을 제시하는 경우
그 뜻을 성취하기 쉽지 않다.
그런 가운데 다른 이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게 된다.
서로 같은 입장과 견해일 경우는 좋아하지만 다르면 싫어하게 된다.
그리고 무엇이 옳고 올바른가를 놓고 치열하게 시시비비를 다투게 된다.
그래서 그 결과를 보면 그로 인해 상대와 사이만 나뻐지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상대는 여전히 과거 상태를 고집하고 변화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것이 문제가 된다.
우선 어떤 내용이 옳거나 올바를 수 있다.
그렇더라도 입장과 이해관계나 의견이 다르면 이를 싫어하게 된다.
자신의 희망과 맞지 않는 내용은 그것이 옳아도 심정적으로 싫어하게 된다.
한편 그 내용이 설령 옳고 올바르다해도 이를 전달하는 방안이 나쁘면 감정이 상하게 된다.
그리고 견해와 입장이 달라 시시비비를 다투거나 하면 자연스럽게 서로 감정이 상한다.
또 상대의 말을 듣지 않고 딴청을 피우거나 토를 달거나 반박하거나 해도 감정이 상하게 된다.
상대의 인격을 모독하고 무시하거나 하면 그 상황이 더 심해진다.
또 상대의 자존심을 침해해도 감정이 상하게 된다.
우선 무언가 상대가 조언을 하게 되면 감정이 상하게 된다.
즉 상대가 잘 난 것도 아닌데 잘 난 척한다고 여긴다.
또 상대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하고 자신을 가르치려 한다고 여긴다.
또 상대가 조금 안다고 대단히 잘난 척하면서 자신을 함부로 무시한다고 여긴다.
그런 가운데 자신이 상대 의견을 인정하면 상대보다 열등함을 스스로 인정하게 되는 것처럼 여기게 된다.
그런 가운데 상대가 자신의 잘못을 조금이라도 지적하고 비난하게 되면 이제 몹시 감정이 상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감정이 한번 상하면 이후 서로 상대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분노를 일으키고 상대에게 보복을 해서 해치려 하게까지 된다.
상대가 얼마나 잘낫고 깨끗하고 올바르기에 그러는가 하면서 미움과 원망을 갖게된다.
그리고 그런 미움과 원망을 바탕으로 자신도 상대의 잘못을 이후 샅샅이 찾아 나서게 된다.
그리고 그런 자세를 이후 서로 바꾸지 않는다.
처음 어떤 이에게 무언가를 지적하거나 말을 한 것은
상대가 그 말을 듣고 변화를 일으켜서 좋은 상태로 바뀌기를 원한 것일 수 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뜻과 같지 않다.
그래서 이 문제를 잘 살펴야 한다.
어떤 내용을 남에게 제시할 때는 우선 그 내용이 옳고 올바라야 한다.
옳다는 것은 진리 사실판단 및 인과 판단 측면에서 내용이 옳아야 함을 의미한다.
올바르다는 것은 가치 판단 측면에서 선과 정의 규범에 비추어 좋아야 함을 의미한다.
그것도 대단히 넓고 길고 깊게 관찰을 해서 옳고 올바른 내용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내용을 하나 파악하려면
혼자서 대단히 열심히 연구하고 공부하고 실험이나 경험도 쌓고 대단히 오랜 기간 노력을 해야 한다.
짧은 시간에 성취하기 힘들다.
그래서 어설픈 내용을 제시하면 곤란하다.
옳지 않고 잘못된 정보를 함부로 남에게 제시하면 곤란하다.
올바르지 않고 악한 교훈 등을 남에게 제시하면 곤란하다.
또한 좁고 짧고 얕게 관찰을 해서
그 범위에서는 옳고 올바른 듯 보이는 내용을 제시해도 곤란하다.
좁고 짧고 얕은 관찰(협단천)에 바탕해서 파악하면
어떤 내용이 그 범위에서는 옳고 올바른 것처럼 여겨진다.
그런데 이런 내용은 넓고 길고 깊은 관찰을 바탕으로 살피면 대부분 그 반대다.
그래서 주의해야 한다.
이런 내용을 함부로 제시해서 상대가 이를 믿고 실천하면 곤란해진다.
그러면 당연히 문제가 발생한다.
그런데 설령 옳고 올바른 내용이도
상대가 이해하기 쉽게 전달해서
결국 그 결과 상대가 변화하고 실천에 옮기기 쉬어야 한다.
그것도 상대가 감정이 상하지 않고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다양한 방편을 찾아야 한다.
내용도 상대가 관심을 가질 형태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또 재미있어야 한다.
그래서 내용을 대하는 과정 자체가 즐거워야 한다.
그리고 간결하고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라는 요구도 첨가된다.
전달하는 내용은 상대방이 그 내용의 85 % 정도 알고 있는 내용으로 구성이 되어야 한다.
또 반대로 상대가 이미 다 아는 내용을 제시해도 곤란하다.
그래서 상대의 상황에 따라 내용이 달라야 한다.
예를 들어 초등생에게 대학원 논문 내용을 제시하면 곤란하다.
또 반대로 대학원생에게 초등학교 교과서 내용을 제시하면 곤란하다.
그래서 같은 내용이라고 해도 상대적인 관계에서 적절하게 내용을 제시해야 한다.
한편 내용이 너무 길지 않아야 한다.
어떤 내용을 아주 짧게 표현하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짧으면 그 의미를 파악하기도 힘들다.
그렇지만 내용이 길면 또 대부분 질려하게 되고 외면하게 된다.
생각하고 글을 적을 때는 만연체 형태가 생각하거나 글 쓰기가 쉬어 보인다.
그런데 읽을 때는 그 반대다.
문장이 만연체가 되면 읽은 입장에서 내용 파악하기가 힘들어진다.
다음과 같이 만연체로 서술한다고 하자.
~~~ 한 a 가 ~~~ 한 때 ~~~~~~ 한 곳에서 ~~~~~하기 위해서 ~~~~한 b 를 ~~~~~ 하게 했다.
이런 식으로 서술하기 쉽다.
여기서 ~~~ 은 하나의 문장에 해당한다.
이런 문장을 다음 형태처럼 짧은 문장으로 바꾸면 낫다.
~~~~ 한 때였다.
~~~~ 한 곳이었다.
그런데 a 는 ~~~~~ 하다.
그리고 b 는 ~~~~~ 하다.
그런데 A 가 B 를 했다.
또 ~ 하면서, ~~ 하기 위해서, ~~ 하지만, 이런 접속구를 이용해서
한없이 문장을 이어 표현하는 경우도 있다.
대법원 판결문을 보면 한 문장으로 되어 있다.
헌법 전문도 한 문장으로 되어 있다.
이런 경우는 그 문장에 담긴 내용들이 너무 중요해서
다른 내용을 함부로 나중에 덧붙이거나 빼지 않도록 하려는 취지인 듯하다.
그래서 앞에 나열한 방식을 사용해서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
예를 들어 기껏 판결문을 작성했다.
그런데 뒤에 문장을 어떤 이가 임의로 하나 덧붙여
판결문을 바꾸면 곤란하다.
예를 들어 판결이 마음에 안 드는 입장에서는
'앞과 같은 판결을 한 바 있으나 이는 잘못이고, 무효다.'
이런 문장을 그 판결문에 덧붙이고 싶어할 수 있다.
그래서 그렇게 두 문장으로 된 판결문은 처음부터 허용하지 않으려 한 것이 아닐까 이해한다.
그런데 일반적인 입장에서는 이렇게 표현하면
내용을 이해하기 힘들다.
=>
내용은 옳고 올바라야 한다.
그리고 전달방식은 간결해야 한다.
그리고 설명이 상대의 관심을 끌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해하기 쉬어야 한다.
심지어 재미있으면 더 좋다.
그러나 내용을 제시하는 입장은 이런 요구를 다 함께 만족시키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노력을 많이 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과거에 적었던 글을 보면
본인 자신도 자신 글을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자꾸 다시 읽어 보고 고치면서 훈련을 많이 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 조금 더 추가해야 한다.
내용을 쉽고 간단하게 전달해서 이해가 되었다고 하자.
그러나 그 내용을 잘 기억하고 실천에 옮겨야 그 목표가 원만히 성취된다.
그런데 이 뒷부분이 쉽지 않다.
우선 글로 보는 경우 볼 때는 이해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책을 덮으면 곧바로 그 내용을 다 잊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불완전하다.
이는 어떻게 보면 내용을 대하는 이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하튼
머리에 남아 있지 않으면 그 내용을 실천할 도리가 없다.
그런데 내용이 길고 많으면 이를 기억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내용을 전달할 때는 기억을 잘 할 수 있는
방안까지 넣어주면 더 낫다고 보게 된다.
그리고 심지어 그 내용을 쉽게 잘 실천해갈 방안까지
넣어주면 더 낫다고 본다.
물론 어려운 요구다.
지금 『무진의보살경』을 대하면
내용 하나하나가 대단히 유익하다.
그런데 이것을 외어보려면 쉽지 않다.
위와 같은 내용을 질문받을 때
단지 간단한 불교사전 풀이 정도만 제시하기도 쉽지 않다.
즉 4무애변은 무언가라고 누군가 질문할 때
법무애 의무애 사무애 요설무애 이런 내용이라고 답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더 나아가 법과 의는 어떻게 다른가.
사와 요설은 어떻게 다른가.
그 내용이 무언가 이런 설명을 하기는 더 어렵다.
그래서 지금 대하는 『무진의보살경』의 내용을
잘 이해하고 외우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한 번에 다 살피고 외우려면 힘들다.
그래서 그 가운데 한 3 항목 정도만 외어도 좋다.
아니면 한 항목당 한 내용 정도씩만 외어도 좋다.
그런 가운데 자주 반복해 대하면 점점 내용을 풍부하게 익히고 닦아나갈 수 있다.
물론 말처럼 쉽지는 않다.
Lab value 불기2564/03/02/월/21:55
● 대승의 4념처
『무진의보살경』의 4 념처에 대한 설명을 살피면 불교사전 설명과 조금 다름을 알 수 있다.
기본 경전에서 4 념처는
결국 더러움, 괴로움, 영원하지 않음, 진짜에 해당하는 실체가 없음
이런 내용을 깨닫는 것을 목표로 한다.
[부정, 고, 무상, 무아]
처음 개별적으로
몸의 더러움을 관한다. [신부정]
그리고 느낌의 괴로움을 관한다. [수시고]
또 마음이 영원하지 않음을 관한다. [심무상]
그리고 일반현상이나 관념에 진짜에 해당하는 실체가 없음을 관한다. [법무아]
이처럼 관하는 대상과 내용이 개별적인 수행을 별상념주라고 한다.
그런데 이후에는 이들 모두가 다 부정하고 고이고 무상하고 무아임을 관하게 된다. [총상념주]
그래서 기본적으로
이를 통해서 평소 망상분별과 집착을 갖고 대하는 자세를 고치려는 것이다.
더럽다.
괴로운 것이다 .
영원한 것이 아니다.
=> 따러서 집착을 가질 내용이 아니다. => 집착에 바탕해 행하던 업을 중단한다.
진짜에 해당하는 영원불변하고 고정된 실체가 없다.
=> 해당 내용이 실다운 내용이라고 여기는 망상분별을 제거한다. => 집착의 근원을 제거한다.
이런 내용이 기본 경전에서 제시하는 4 념처의 수행목표다.
그리고 일반적인 불교사전에서도 이런 형태로 기본 설명을 한다.
그런데
『무진의보살경』의 4념처에 대한 설명은
대승의 입장에서 보살 수행자가 취할 수행방안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대승의 보살 수행자는 자신의 망집을 기본적으로 제거한 바탕에서
다시 중생제도를 하기 위해 생사현실에 임하여 수행하는 입장에서 이를 대한다.
따라서 생사현실에 처한 중생에 눈높이를 맞추어 생사현실에 임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중생의 상태와 같은 상태로 머물면 곤란하다.
그런 중생에 눈높이를 맞춘 다음 생사고통을 벗어날 수 있도록 이끄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래서 내용이 기본 경전 내용과 차이가 있다.
이런 측면에서 수행자는 이 내용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외우고 익히고 실천해야 한다.
◈Lab value 불기2564/03/01 |
● 인과판단과 문제의 근본해결방안
코로나 바이러스 문제는 그런 바이러스가 없는 무균실상황을 놓고 생각해봐야 한다. 그리고 이런 근본문제가 해결이 잘 안되면 역시 문제상황에 남게 된다. 그리고 생노병사를 해결하고자 할 때 생노병사문제 자체에 그 근본문제해결방안이 있다. 생노병사 자체에 대한 근본 문제해결방안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이들 문제를 근본적으로 잘 해결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본래 그런 생사현실에 생사를 얻을 수 없다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관련된다. 이 문제를 이처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면 온갖 질병을 다 치료하고 세상문제를 다 해결해도 결국 병목지점에서 똑같은 안타까운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그런데 이 근본문제를 해결하면 그 반대가 된다. 최근 몸이 안 좋아 산보를 다니려고 했다.
Alain Souchon - Poulailler's Song http://buddhism007.tistory.com/13248#hbjm sfed--대방광불화엄경_K1262_T0293.txt ☞제17권 sfd8--불교단상_2564_02.txt ☞◆vftz8068 쉬면서 현 상황의 어려움에 대한 노래를 또 듣게 된다. 학교도 휴교조치가 취해졌다.
그런 가운데 타령조로 노래 부르는 불어 노래를 듣게 된다. 또는 뱃사공 노래의 어기어차 소리처럼도 들린다.
|
문서정보 ori
http://buddhism007.tistory.com/14083#1235 |
03fl--nirvana\r2020.htm
■ 보조- 과거글 정리
■ 선물 퀴즈
다음에 해당하는 단어를 본 페이지에 댓글로 적어주시면 됩니다.
【범】yogācāryabhūmi 유가의 관행(觀行)을 닦는 이의 소의(所依)ㆍ소행(所行)ㆍ소섭(所攝)의 경계. 17지(地)가 있음. 오식신상응지(五識身相應地)ㆍ의지(意地)ㆍ유심유사지(有尋有伺地)ㆍ무심유사지(無尋唯伺地)ㆍ무심무사지(無尋無伺地)ㆍ삼마희다지(三摩呬多地)ㆍ비삼마희다지(非三摩呬多地)ㆍ유심지(有心地)ㆍ무심지(無心地)ㆍ문소성지(聞所成地)ㆍ사소성지(思所成地)ㆍ수소성지(修所成地)ㆍ성문지(聲聞地)ㆍ독각지(獨覺地)ㆍ보살지(菩薩地)ㆍ유여의지(有餘依地)ㆍ무여의지(無餘依地).
답 후보
유루(有漏)
유가사지(瑜伽師地)
유루지(有漏智)
유마(維摩)
유법(有法)
유분별(有分別)
유식(唯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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