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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3해탈문 본문
sfxx--3해탈문.txt.htx
sfxx--3해탈문.txt
http://buddhism007.tistory.com/3744
● 이하 글은 단상_조각글 내용을 주제별로 '편집중'인 상태의 글입니다.
공해탈문과 무상해탈문 무원무작해탈문은
수행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삼삼매의 수행 내용이기도 하다.
이미 있고 없음의 문제나
존재가 문제되는 영역으로서
실재 - 감각현실 - 관념분별의 영역을 크게 나누어 제시한 바 있는데
위 수행은 이 각각의 영역과 기본적으로 관련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사전을 참조하면 위 삼삼매의 내용은
모두 실재의 공함과 관련된다고 설명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 각 내용을 실재- 감각현실 - 관념분별 영역에
각기 배당해서 이해하고
수행에 임하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본다.
무상삼매에서 상은 한자로 相이라고 표기하는데
범어로는 Lakṣaṇa 라고 하는데
이는 상(想 Saṃjña )이라는 표현과 구분되는 내용이다.
그런데 한자어 相이나 想 의 표기나
범어 Lakṣaṇa 나 Saṃjña 나
다 시감상을 잘 하면
이것이 무슨 문제를 언급하는가를
잘 음미할 수 있다고 보게 된다.
사전 풀이를 참조하면
상(相)은 외계의 모습
상(想)은 그에 대한 마음작용으로 얻는 내용
이런 식으로 대강 구분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상(相)을 외계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눈을 떠서 대하는 모습을
자신의 외부에 있는 대상이라고 이해하는 일반 입장에 맞추어
이에 준해 그 내용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상(相)이라는 글자를 잘 보면
나무 목(木)과 눈 목(目)이 겹쳐서 글자를 이루고 있는데
이 상황도 이 내용의 의미를 시감상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본다.
그리고 다시 이에 대해 마음에서 생각하는 내용을
상(想)이라고 표현할 때는 다시 마음 심(心)을 아래에 놓고
결합시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망상분별과정에서
문제되는 내용들로 지목되는 내용들이기도 한 것이다.
그 사정을 이전에 살핀 그림을 놓고
다시 이해해보자.
[img2-02]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http://buddhism007.tistory.com/228 ☞○ 마음과 색의 의미에 관한 논의
http://thegood007.tistory.com/1172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03fl--ghpt/r1030.htm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1 이 눈을 떠서 보는 세계의 내용이 위와 같다고 할 때
1 이 추리하게 되는 2 의 내용과 그 성격이 같은 것이다.
그래서 그냥 2 를 놓고 이 내용을 음미해보기로 하자.
2가 눈을 떠서 무언가를 본다고 한다면
그는 5 ^ 와 같은 내용을 얻을 때 무언가를 본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가 얻는 감각현실을 놓고 생각을 하는데
4 ^ 와 같은 나무목(木)을 자신의 2 ^에 달린 눈 목(目)이 대해서
4 ^ 를 얻고 있다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4 ^ 와 같은 감각현실을 외부 대상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4 ^ 와 같은 내용을 상(相)이라고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런 감각현실을 각 부분을 나누고 묶어 생각을 하는 가운데
4 ^ 와 같은 부분에 맞추어
그것은 나무라는 생각분별을 행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은 위 그림과 같이 감각현실의 내용이 아니고
관념영역의 내용인 것이어서
그것은 결국 마음 심(心)을 아래에 놓아 결합시킨
상(想)이라고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이렇게 2 를 놓고 보면 그 내용이 5 ^ 에 있는 내용인 것임을
쉽게 이해하는데
정작 1 자신이 얻는 내용을 놓고 이것을 생각할 때는
다시 혼동을 일으키기가 쉽다.
그런데 1 자신이 저처럼 얻는 세계나 자신의 모습이
바로 2를 놓고 살핀 그런 성격을 갖는 내용임을
잘 헤아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1 이 4 와 같은 꽃나무를 놓고
외부의 대상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잘못인 것이다.
그것은 2 가 자신의 마음에서 얻은 5 ^ 안의 4 ^와 같은 내용을
그 내용을 그처럼 감각해 얻게 한 외부대상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엉터리인 것처럼 엉터리인 것이다.
그리고 경전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다시 무엇을 강조하는가 하면
이렇게 얻은 감각현실을 놓고
각 부분을 나누고 묶고
관념분별을 행할 때 얻는 상(想)에는
감각현실에서 얻는 그런 상(相)이 없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 상(想)이란 관념분별에서는
감각현실에서 얻는 내용으로서 상(相)의 내용을
빼야 하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를 불교의 전문적인 표현을 사용하면
변계소집상의 상무자성이라고 표현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내용은 반대측면으로 말하면
감각현실에서는
그가 분별과정에서 그것을 놓고 이리저리 묶고 나누면서
생각하고 분별하는 상(想)에 해당한 내용들은
그 각 부분에서 얻어지지 않음을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또 감각현실은 실재와의 관계에서는
그런 감각현실이 실재의 내용의 지위에 있는 내용이 아니라는 사정을
이해하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이 내용은 의타기상의 생무자성이라고 표현하게 된다.
여기서 의타기상이란 표현은
결국 감각현실이란 a + b => C 와 같은 관계에서만
그 내용을 얻게 되는 내용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바로 이 관계식 자체가
그렇게 얻은 내용 C 는
일단 그런 관계를 떠나서도 실재한다고 보는 실재의 내용의
지위에 있는 내용은 아니라는 사정도 함께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현실에서 얻는 감각현실은
각 주체가 얻는 현실내용들의 본 바탕이 된다고 보는
실재의 내용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실재가 무엇인가를 논의할 때
prince 님을 비롯하여 일반적인 입장에서는
현실에서 얻는 감각현실이나
그에 대해 행하는 관념분별의 내용을
그대로 그 영역에 밀고 들어가
그 내용이 실재의 영역에 그대로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이미 각 내용을 얻게 되는 a + b => C 와 같은 관계식이
사정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함께 제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번 자신이 어떤 감각현실을 얻고
그에 대해 일정한 부분이 각기 무엇이라고 관념분별을 행하고
이에 집착하는 입장에서는
그런 내용들이 실재에 그렇게 있어서
그런 내용을 얻게 된 것이라고 고집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이 총체적 전도망상 편집증상과 깊게 관련되는
내용들이다.
실재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고
그것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에서 행하는 이분법적인 분별을 행할 수 없는 것이어서
공하다라고 표현하게 되는 사정을 기본적으로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이런 실재나
감각현실이나 관념분별 영역 어디에도
진짜라고 할 참된 고정되고 불변하는 어떤 C 와 같은 것은
없다라는 것도 이 내용을 통해 함께 이해해야 한다.
비록 실재가 모든 존재의 본 바탕이고
어떤 주관과 관계하지 않아도 그대로 존재하는 내용이라고 제시하는 것이지만,
그 실재의 영역에서도 그런 진짜의 내용은 없는 것이다.
만일 그런 내용이 있다고 하면
처음 실재가 무엇인가가 문제될 때
그런 C 를 찾아 실재는 C 라고 제시했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정이 그렇지 않고
그리고 한편 그 실재는 앞과 같은 사정에 있기에
그것을 공하다라고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내용을 잘 이해해야 하는데
이 내용을 원성실상의 승의무자성이라고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런 기본적인 존재에 대한 판단을 바탕으로
공삼매와 무상삼매 무원무작삼매의 수행이
요구된다는 사정도 함께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공삼매는
기본적으로 실재가 사정이 그렇다는 것을 관하고
참된 진짜의 내용이 존재하지 않고
집착을 가질만한 실다운 내용이 없음을 잘 관하는 수행을 의미한다.
무상삼매도 기본적으로 위와 같은 입장을 내용으로 하지만,
다시
현실에서 자신이 얻는 감각현실을 놓고
행하는 다양한 망상분별을 시정하는 수행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자신이 얻는 감각현실이
곧 자신이 그런 감각현실을 얻은 실재대상이라고 생각한다거나,
또 그 각 부분에 대해 자신이 분별을 일으키고 대할 때
그 각 부분에 그런 내용이 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것을 잘 관해서 시정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제시하는 것이다.
경전에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가지면
수행자가 아니다.
이런 내용이 제시되는데
일반적으로 어떻게 감각현실을 얻고 그에 대해
생각을 하기에 그런 것인가 하면
바로 위와 같이 1 이 눈을 떠 세계를 대할 때
1 과 같은 부분을 묶고 나누어
그것이 나라고 생각하고 그 부분을 취하고 머물기에
그것이 문제라고 지적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부분과 같은 감각현실과
그에 대해 행한 생각내용이
그대로 실재에 있다고 다시 나아가기에
그것 역시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이 엉터리 전도 몽상분별을 제거하지 못하면
그런 망상분별과 집착에 바탕해
생사고통을 겪게 되는 것이어서
그것을 근본적으로 제거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제 감각현실을 그렇게 얻고
이리저리 각 부분을 나누고 묶어 가면서
온갖 망상분별을 행하고
이에 바탕해 탐욕 분노와 어리석은 견해를 일으켜 집착을 갖고
현실에 임하는데
이 과정에서 가장 문제되는 것이
바로 이런 전도망상에 바탕해 일으켜 집착하고 추구하는
망상적 희망들이 문제인 것이다.
희망이란 if 구문을 사용하여
자신이 좋다고 보는 내용을 관념영역에서 그려내어서
만일 그런 좋은 상태가 된다면 좋겠는데라고 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처럼 전도몽상에 바탕해 판단을 행하고
다시 이런 희망을 갖고 임하면
그 희망이 그를 끌고 가는 세계가
바로 축생 아귀 지옥의 세계이고 생사현실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니 관념분별영역에서 시급하게 제거해야 하는 내용은
그처럼 전도몽상분별과 집착을 바탕으로
만들어가진 희망과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의 쓸모없는 갈증의 몸부림들인 것이다.
그래서 그 본 정체가 그처럼 실답지 않고
엉터리라는 것을 잘 이해하고 관해서
자신을 끝내 생사고통의 상태로 묶어 끌고 가는
주된 동인인 그런 쓸모없는 희망을 제거해내는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곧 무원무작삼매의 주된 핵심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이런 수행을 각 영역과 관련해 잘 수행하면
그런 전도몽상과 집착을 통해 생사고통에 묶인 상태에서
벗어나 풀려나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런 수행이 해탈문의 내용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조금 더 전문적으로 설명하면
실재와 사성제의 고집멸도의 내용과 관련해서
설명을 해야 한다고 보지만,
여하튼 위처럼 이해하고
마음에서 티끌과 같고 손님처럼 들어와 차지하고 있는
내용들이 자신에게 전도몽상을 일으켜
그것이 실다운 대상이라거나 실다운 자신이라는 등으로 분별하게 하고
집착을 갖게 하고
자신을 묶어 고통의 생사를 받아 나가게 하는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위와 같이 그 기본 정체를 잘 관하는 수행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 상태에서 다시 요구되는 것은
이제 그렇게 비워진 각 영역에
올바른 진리의 깨달음을 대신 채워 넣고
중생제도와 불국토 장엄 성불과 관련된
서원을 채워 넣고
그 원만한 성취를 위한
무량행문의 수행 노력을 채워 넣은 것이
수행의 핵심이기도 한 것이다.
[...]
참고로
실재 - 감각현실 - 관념분별 각 영역의 내용에서
그 각 내용을 실답게 볼 중요한 요소가
결여되고 없음을 앞에서 제시했는데
그런데 그런 사정을 잘 관하고
이 각각에 대해 기존의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하고 임하면
이제 바로 그처럼 각 내용에 그것을 실답게 볼 요소가 없다는 사정이
곧 그 각각의 내용이 그 자체로
청정한 니르바나라는 것도 제시하는 내용이 되는 것이다.
처음 실재를 공하다고 하고
그 실재가 참되고 진짜라고 할 내용이 없이 무아무자성의 상태임을 제시하지만,
그 실재를 청정한 니르바나라고 제시하는 것은
현실에서 문제삼는 그 일체의 생사 고통이
그 영역에서는 그처럼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정 때문이다.
그런데 본 바탕과 그 각 영역의 내용이 다 그런 사정임에도
망상분별을 갖고 집착을 갖는 바탕에서는
감각현실을 얻고 망상분별을 일으킨 다음
그에 집착을 갖고 그 내용을 각 영역에 관통시켜
그에 접착되어
업을 행하고
그로 인해 나타나는 내용에 다시 고통을 받아 나가는 과정을
무한히 반복하게 되므로
이런 망상분별이 문제라고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이제 올바른 관을 갖고
그 각 내용이 그런 내용을 실답게 볼 요소가 결여되어 없다는 사정을
잘 이해하여 깨닫고
이런 내용에 상응하게 현실에서 임하게 되면
그 각 내용이 바로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이기도 하고
또 그에 상응한 상태가 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이런 상태를
생사 즉 열반이라고 표현하게 되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전도몽상과 집착을 바탕으로 이 각각을
대하면 그것이 또 어떻게 되는가하면
열반 즉 생사고통의 현실로 뒤바뀌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무명 어리석음과 망상분별을 바탕으로 현실을 대하면
그 일체에는 본래 얻을 수 없는 생멸을 있다고 보게 되고
또 그래서 일체가 고통이다라는 명제가 이 측면에서 선언되는 것이지만,
그러나 알고보면
어느 영역에도 참되고 진짜라고 할 영원불변하고 고정된 내용은 없어 무아 무자성이고
그 모든 내용 자체가 그런 생사고통을 얻을 수 없고 생멸을 얻을 수 없는
청정한 니르바나인 것이고
그 실재는 이처럼 무아무자성 공한 상태임을 관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이런 내용이 부처님이 제시하는
현실에서 논의하는 일체에 모두 적용되는
가장 기본적인 진리의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이를 한자어로 표현한다면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
열반적정
일체개공
이런 표현들에 해당하는 내용들인 것이다.
>>>
사실 현실에서 자신이 외부대상으로 보던 것이
외부대상이 아니고
자신이 자신이라고 여겼던 것이
자신의 정신안에 잠시 들어와 있는
손님과 같은 내용이라고 제시하면
전도몽상을 바탕으로 할 때는
어리둥절하게 생각되고
어떤 것을 올바른 기준으로 잡아서
생활을 해나가야 하는가에 대해서
혼동을 일으키기 쉽다고도 보게 된다.
그만큼 기존의 전도몽상의 뿌리가 상당히
깊은 것이다.
반복해 제시하지만,
이런 전도몽상증세가 그 상태에서 "
좋고 좋음을
온 생명에게 제한없이
길고 길게
그리고 두루두루
줄 수 있다면
그것이 실답지 않은 내용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중지할 것을 제시할 이유는 그다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자신이 자신이라고 여기고 집착을 갖고
이에 바탕해서 온갖 것을 추구하다가
그것이 허물어지거나 사라지는 상태가 된다거나,
또는 이로 인해 이후 이상한 고통의 세계에서
생활하게 된다거나 하는 경우
그 문제가 심각해진다.
현실에서 모든 생명이 각각의 상황에
잘 적응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 되지만,
그러나 일반적인 입장에서 생각할 때에도
문제가 된다고 보는 상황이 대단히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왜 그런 상태가 나타나는가 하면
처음에 그런 전도몽상을 일으켜 갖고
그에 바탕해 업을 행하면
그런 전제에서는
그렇게 그 자신이 고통으로 대하고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것을 세계의 내용으로 대하고
또 그 상태에서 그것이 대상이고 또 그런 감각을 하고 분별을 하는 것이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대하게 되는 것이다.
논서에서 혹-업-고의 관계로 제시하는 내용이
바로 이것인데
고통을 겪는 상태에서는 또 그런 관계 자체를
살필 여유를 갖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현실에서 예를 든다면
사고가 나서 다리가 부러져 있고
의사와 간호사는 옆에서 이 환자가
수술을 받으면 살아날 확률이 10 % 밖에 안 되는데 "
수술비는 몇천만원이 드는데 보호자가 돈이 없다고 하는데
어떡해야 하는가를 놓고 이야기를 하는 소리를 듣는다거나 할 때
왜 그런 일이 발생하게 되었고
또 이 상황의 의미가 무엇이고
여기서 주관과 대상은 무엇이고
이런 것을 생각할 마음의 여유자체가 거의 없게 된다.
다른 상황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사실 여기서 제시하는 모든 수행의 원리는
원칙적으로 그런 상황이라고 해서 적용하지 못할 내용은 아니다.
문제는 그처럼 고통을 직면하는 상황에서는
그 적용이 현실적으로 어렵고
만일 적용하려면
고통이 발생하기 전에
그 원인에 해당하는 업을 행하는 단계에서
그것을 제거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원인을 제거하는 단계에서
기본적인 수행방안 자체를 행하는 것을
대단히 곤란하다고 여기는 것이 보통이다.
자신이 평소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을 놓고
그것이 실다운 자신이라고 여기는 것이
무슨 대단한 문제인가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면
그러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렇게 생각하기 쉬운데
사정이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바로 이 부분에서부터
그것이 잘못된 망상분별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이에 바탕해서
수행방안으로 제시되는 내용을
평소에 꾸준히 정진해 실천해야
자신이 고통의 수용소로 묶여 끌려 들어가는
과정에서 벗어나올 수 있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평소 전도몽상 상태에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행하는가하면
자신이 배가 고파 식사를 맛있게 하는데
저 닭이 하나 죽으면 어떤가.
저 생선이 하나 죽으면 어떤가.
이런 식으로 쉽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은
아예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생명과 관련된 경우도 그렇지만,
나머지 문제도 다 사정이 비슷하다.
자신은 자신의 생명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고
신체나 재산이나 가족 명예 지위 이런 것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는데
그것은 자신이 자신이라고 분별하는 그 부분
즉 자신과 관련된 경우에서만 그렇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아주 대범하게 대하고
대부분 이를 무시하고 지나치는 것이다.
그런데 입장이 바뀌게 되면
얼굴색 자체가 노랗게 변색이 되게 마련이다.
이런 내용이 서로 전도몽상에 바탕해서
집착을 일으켜 행위해나갈 때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수행을 하는 입장에서는
평생 단 한번도 하지 않으려고 하는 행위를 놓고
매 순간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면서
그로 인한 결과에 대해서는
전혀 의식을 갖지 않는 것은
대단한 문제라고 보는 것이다.
이는 밭에 씨를 뿌리고
그 씨에서 당장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아무 열매도 나타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임하는 농부와 비슷한 것이다.
그런데 알고보면
그것이 곧
전도몽상에 바탕한 상태에서
한 주체가 그 얽힌 업의 장애에서
고통을 받아 나가는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이런 생사고통에서
벗어나 풀려나기 위해서는
먼저 그렇게 전도몽상을 일으키고
집착을 갖는 과정부터 잘 이해하고
스스로 그것을 잘 정리해야 한다고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원칙적으로 말한다면
전도몽상상태에서 분별하고 집착하는 입장이 문제이겠지만,
그것이 일반적인 현실 상황에서는
이런 업의 장애와 묶임에서 풀려나려고 하는 자신이
먼저 그런 사정을 잘 이해하고
이에 바탕해서
수행방안을 취해서 현실에 임해야 하는 것이다.
[...]
전도몽상을 일으켜
자신의 마음에 들어온 일정한 내용을
자신이라고 여기고
그에 바탕해서 좋음을 추구한다고 할 때
그것이 무엇이 문제인가.
우선 좋음에 집착하여 탐욕에 바탕해서
반응하고 업을 행해 나가면
그것이 곧 아귀가 받는 고통의 상태를 의미하고
또 그런 업이 쌓이면 이후 아귀의 세계로 묶여 끌려가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또 어떤 좋음에 집착하는 만큼
그 반대면이 되는 나쁨에 분노로 반응하여 업을 행하면
그것이 곧 지옥에서 받는 고통의 상태를 의미하고
역시 그 업이 쌓이면 이후 지옥의 세계로 묶여 끌려가게 되는 것이다.
어리석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 안에
손님으로 들어와 있는
망상분별과 이에 바탕한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을 제거해야 하는데
이는 자신의 마음에 손님으로 들어오는 내용을
자신이라고 망상분별을 일으키는 그 부분부터
잘 정리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현실에서 이것을 잘 정리하지 않으면
당장은 그 열매가 달리 익어 모습이 나타날 때까지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그러나 이후 그 열매가 나타나는 상태에서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아직 그 열매가 나타나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이 집착하는 그 모든 것을 놓고
그 정체를 올바로 관하고
그런 바탕에서 자신이
평소에 생각하고 말하고 행위하고 자세나 태도를 취하는 내용을
중지하고
그 내용을 수행의 방향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아귀는 굶주린 귀신이라는 의미인데
배가 고프기에 음식을 갈구하고 돌아다니는데
음식을 얻을 때까지는 그런 갈증에 시달리다가
막상 음식을 먹게 되면 목이 불 타는 고통을 겪는
생명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런 생명들이 살아가는 세계가
아귀의 세계인 것이다.
이 아귀가 살아가는 세계에서
음식이 하나 떨어지면 이것을 가지고
아귀들이 서로 치열하게 다투게 되므로
이런 광경을 아귀다툼이라고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귀와 같은 생각과 말과 행동을 평소
꾸준히 행하면 결국 그런 세계로 옮겨가
전문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물을 자꾸 온도를 높여 끓이면
조금씩 물이 끓어 수증기가 되다가
나중에는 그 물 전체가 전부 수증기가 되는 것과
사정이 비슷하다.
현실에서도 무언가
전도몽상상태에서 자신과 외부를 구분하는 가운데
그 가운데 무언가 좋다고 보는 것이 있게 되면
이를 놓고 어떤 주체가 어떤 반응과 자세를
취하는가를 살펴보면
그 모습을 하나 보고
그 상태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관찰자는 하나를 보는 것이지만,
사실 그런 모습은 그 주체에 있어서는
평생을 관통해서 일관된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무언가 좋은 것이 있다고 할 때
그것을 놓고 아끼는가.
이것이 바로 그 판단기준이 되는 것이다.
현실에서 무언가 좋다고 보는 것이 발견되면
그것에 대해 희망을 갖게 되고
그것을 추구해나가게 마련인데
현실에서는 일반적으로 당연하다고 보는 이런 내용이
수행자에게는
모두 제거되어야 할 쓸데없는 내용일 뿐 아니라,
그것을 행하면 결국 아귀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
원인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이 곧 무원무작삼매 해탈문의 내용이기도 하다.
그 사정은 그런 전도몽상에 바탕한 희망은
그것이 성취되기 전까지는
그 주체에게 갈증을 일으키어 고통을 주고
그것이 성취되면 그 이후
그 상태가 일으키는 문제들로 다시 고통을 받게 되고
또 정작 그것이 다시 소멸되면
또 그것이 소멸되어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하나의 희망이 성취되었다고
그런 상태가 소멸되는 것도 아니고
또 다른 것을 놓고 계속 그 과정을 반복해 나가는 것이다.
뉴스에서 보고를 받고 놀랐다.
아직 개인 소득이 3만달러를 넘지 못하고
계속 2 만 달러대라고 해서
문제라는 보고였다.
생각해보면 2 만 달러도 대단하다고 여기고
자세히 생각하면 이것은 평균값이라서
이 소득이 되지 않는 개인이 대단히 많은 것인데
문제는 이 소득이 10 만달라가 된다고 해서
삶의 문제가 해결된다고 단순하게 생각하면
대단히 곤란하다는 점이다.
정말 그렇다면 현실의 사건 사고 보고에서
재벌들이 자꾸 나타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인데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그런 수치가
삶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좋음을 하나 놓고
어떤 주체가 그것을 어떻게 대하고
자세를 취하는가하는 것이
이 문제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현실에서 누구나
한 10 분 또는 30 분만 걸어나가면
수조원대의 공원을 거저 만나고
즐거움을 얻는데
그런데 문제는 이런 공원이나 공공시설에서
그런 효용을 얻고 만족하는 경우가 적다는 점이다.
심지어 눈귀나 팔다리가 정상으로 달려있어도
이것으로 환희의 마음을 갖고
현실을 살아가는 이도 대단히 적다는 점이다.
이 상태가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바로 앞에 나열한 한 부분을 말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왜 그렇게 되는가는
마음에 전도망상분별이 장착된 상태에서
자신과 자신의 것에 집착을 일으켜 현실을
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가장 기본 원인이 되는 문제로
자신의 정체에 대해
잘 파악하는 노력이 중요한 것이기도 하다.
이것이 잘 파악이 되어야
이후
보시-정계-안인-정진과 같은 수행이
원만히 이뤄지고
이로써 기존의 업의 장애의 묶임에서 풀려나
해탈을 얻게 되고
복덕자량을 구족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바탕이 되어야
이후 지혜자량을 쌓아 나갈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수행을 크게 나누면
계-정-혜의 수행으로 나누는데
처음에 보시-정계-안인과 같은 계에 해당하는
기본 수행이 이뤄지지 않으면
이후의 수행도 현실적으로 잘 성취할 도리가
없다고 보게 된다.
응급실에서 팔다리가 부러져 고통을 느끼고
앞으로는 수술을 받아야 하고
또 이후 장애 상태로 지낸다면
그런 상황에서
정려와 반야 지혜를 닦는 수행이
불가능하다고 볼 것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대단히 힘들다고 보는 것이다.
단순히 축생계에서 생활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수행을 하기 힘든 것인데
아귀 지옥계에서 그것이 쉽게 되겠는가.
곰이나 원숭이를 평생 산수를 교육훈련시킨다고 해서
곱셈문제 하나를 풀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와 상황이 비슷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상황에서
세계를 대하고 그가운데 일부가 자기자신이라고
생각하면서 대하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 근본정신 자체는
차별이 없다는 점이다.
문제는 업의 장애에 묶이면
이후 그 근본정신이 그런 상태가 되어
이것을 해소시키기가 대단히 힘들게 된다는 점이다.
현미경 카메라를 하나 구입하려고 하는데
현미경 카메라가 아니고
일반 카메라 렌즈라고 해도
업의 장애를 통해서
어떤 이가 이 렌즈에 껌이나 먼지 기름을
잔뜩 붙여 놓고 본드칠을 해 놓는다면
그것을 스스로 떼내는 것이
대단히 힘든 것이다.
부처님 제자 가운데
평생 외우고 또 외어도
게송 하나를 제대로 외우지 못했다는
주리반특 아라한의 경우도
그 사정을 자세히 살피면
이런 내역을 살필 수 있다.
깨달음을 얻고 난 부처님의 입장에서는
이 모든 중생이 다 차별이 없고
본래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라고 제시하는 것이지만,
정작 현실에서는
그런 상태에 상응하게 임하는 경우가
거의 드문 것이다.
그런데 현실사정이 왜 그렇게 된 것인가는
바로 앞에 제시한 것과 같이
전도몽상에 바탕해 업을 행해
그렇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자신의 좋음을 위해
다른 생명을 침해할 때는 그 사정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데
반대로 자신이 다른 생명으로부터
조금이라도 침해를 받으면
그 사정을 바로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이 둘을 서로 합쳐서
다시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수행방안으로 방향을 전환시키지 못하고
매 상황 매 순간 그렇게 전도몽상과
탐욕 분노 어리석음에 바탕해
그렇게 행해 나간다는 것이
사실은 그 기본 사정인 것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자신이 눈을 떠 본 내용 가운데
대상과 자신의 감관과 같은 것이 없다거나
하는 내용을 이해하는 것은
그 사정을 먼저 잘 이해하고
그런 기본 삶의 자세를 전환시켜
이 고통의 묶임에서 풀려나는데
초점이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설령 그런 내용을 잘 이해하더라도
이를 통해 현실에서 그 자세 자체를
변화시키지 못하면
그것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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