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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조각글/불기2561(2017)

불기2561-12-15-무량의경덕행품

진리와 가치를 고루고루 2017. 12. 15. 13:02



®

『무량의경덕행품』
K0114
T0276

무량의경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 [pt op tr] 무량의경덕행품_K0114_T0276 핵심요약





♣0114-001♧
『무량의경덕행품』




무량의경



○ [pt op tr]







◆vhoj4538

◈Lab value 불기2561/12/15/금/13:08




mus0fl--David & Jonathan - Est-ce que tu viens pour les vacances.lrc

쉬는 동안 게송과 시 노래 가사 등을 놓고 연구를 해보았다. 

이미 오래 전에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낳네  
라는 민요 가사에 담긴 깊은 의미를 
해석을 제시한 적이 있는데 

현실에서 아리고 쓰리다고 느끼게 되는 생사고통은 
생사과정에서 좋음을 추구하며
그것을 성취할때 아라리요라고 외치던 그 내용들이
그렇게 만들어 낸 내용이고
그래서 그런 상호 관계가 있음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인 동요나 가사에도 이처럼 
다 깊은 의미가 들어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 노래를 아주 친숙하게 잘 아는 일반 한국인에게 
위 노래가사의 의미를 물어보면 
친숙하기는 하지만, 의미는 잘 모르겠다고 답하는 경우가 
또 대부분이라고 본다. 

그리고 오히려 위와 같은 해석이 
근거가 없다거나 
심지어 궤변에 가까운 해석이라고 
이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위 가사 다음에는 누구나 넘기 힘들다고 여기는
구비구비 고개를 힘들게 넘어간다. 
이런 가사가 이어지므로
맥락상으로도 조화를 이루는 해석인데도 
일반적으로는 잘 받아들이지 않는 해석인 것도 현실이다. 


오늘 무량의경을 살피는데 
PRAJNA 님이 경전 안에 해석을 붙여 놓은 것을 보았다. 

문단 정리하는 가운데 신경을 기울여 읽지만, 
그러나 그저 글자만 따라 가는 가운데
잘 파악하기 힘든 부분이 많은데 
해설을 붙여 놓아서 읽어보니
그 부분이 그런 의미였음을 새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불교에서 3 승이 나누어 지는데
그 사정은 중생을 제도하려는 부처님 입장에서 볼 때
그 중생의 사정이 다 제각각 다르기에
하나의 내용으로
이들을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다. 
그런데 대략적으로 3 부분으로 나누어
단계적으로 가르침을 베풀게 되면 
끝내는 하나의 큰 불승으로 마침내 합류되어  
들어올 수 있다는 입장에서
이렇게 나누었음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중고과정을 마치고 졸업을 한 다음
한 분야에 진입해서 대략 3,40 년 종사하게 되면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된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상태에서 다른 분야에 종사하는 이를 대하면 
마치 갓 태어난 병아리를 대하는 느낌을 받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본다. 

공통된 원리는 초중고 시절 동안 다 같이 배웠다고 할 수 있지만, 
예를 들어 의료계에서 40 년을 종사한 입장에서 
법률계에서 40 년을 종사한 다른 분야 전문가를 대하면 
서로가 마찬가지 입장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의료계나 법률계만 그런 것이 아니고 
각 분야가 그렇다는 의미다. 
분야가 비슷하다고 해도 구체적으로 보면 
보일러 수리에 40 년을 종사한 이와 
타일 붙이는 분야에 40 년 종사한 이가 있다면 
서로 또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에서 한 분야의 전문가가 
그 분야 내용을 전혀 모르는 이를 상대할 때 
어떻게 하면 그 분야의 최고 상태까지
끌어올릴 수 있을까를 놓고 궁리하다보면 
또 마찬가지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사정이 그런 것이다. 

결국 교육과정을 왜 초중고로 나누어서 교육을 하게 되었는가
하는 사정도 또 마찬가지다. 


글이 길어지는데 핵심으로 들어가면 
부처님이 그런 입장에서 
3 승으로 나누어 가르침을 베푸신 사정이 있는데 

그런 가운데 
동일한 표현으로 가르침을 베푸셨는데 
정작 그에 담은 뜻이 다르기도 하고
또 상대에 따라 그 뜻을 제각기 달리 알아듣는 현상이
있음을 기본적으로 무량의경에서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문승에게 가르침을 베풀 때도 A 라고 제시하고 
연각승에게 가르침을 베풀 때도 A 라고 제시하고 
보살승에게 가르침을 베풀 때도 A 라고 제시하였는데 
표현은 모두 A 로서 동일하다고 보지만, 
그에 담긴 뜻이 조금씩 다르고 
또 듣는 입장에 따라 또 제각각 내용을 달리 취해
나아갔다는 사정을 또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문승에게 A 라는 가르침을 제시하였는데도 
정작 연각승이나 보살이 들을 때는 그것을 
다시 자신에 맞게 연각승과 보살승의 가르침으로 받아들여서 
취해 나아가는 사정을 제시하고 
각 경우마다 그런 사정이 있음을 제시한 것이다. 


prajna 님이 해설을 붙인 것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이 
편하다고 보는데 다음과 같다. 
...

4 제법문은 주로 성문승을 위한 가르침인데 

여기서는 하늘 중생이 보리심을 일으키어 대승에 들고 


또 12 인연의 가르침은 주로 벽지불을 위한 가르침인데 

보리심을 일으키거나 성문에 머무는 이가 있고 


방등 반야 화엄의 가르침은 주로 대승을 위한 가르침인데 

성문 4 과와 벽지불에 들기도 함을 제시하고 있다.

...

이 부분인 것이다. 






오늘 오타 문제를 놓고 고민을 하는데 
prajna 님 글자를 입력하는데 
다음과 같은 오타가 발생한다. 

ㅔㄱ머ㅜㅁptr prajna 

이 현상이 글쓰는데 대단히 성가심을 유발시키는 현상이라고 본다. 
본인 컴퓨터만 그런 줄 알았더니 일반적인 현상으로 보게 된다. 
한글을 입력하다가 영문키로 바꾸면 키 전환에 약간의
시간을 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오타가 발생할 때 그 부분으로 돌아가서
영문키로 바꾸고 입력을 해보면
대부분 작동이 안 되어서 또 오타가 발생한다. 

이런 현상이 너무 많이 반복해서 사정을 알아보니 
키 전환과정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이런 경우는 재즈연주기법으로
오타가 발생해도 발생한대로 그대로 두고 그 이후부분에서 
영문키 전환키를 누르고 입력하면 그래도 영문전환이 곧바로 되기에
그렇게 입력하고 나서 나중에 돌아가 수정하는 것이 낫다고 보게 된다.

그렇지 않고 오타가 발생한 부분을 백페이스를 통해 지우며
곧바로 돌아가고 그 상태에서 수정하기 위해 영문키 전환키를 누르면
대부분 전환이 잘 안된다는 것까지는 알아낸 것이다. 

연습을 해보자. ㅔㄱ머ㅜㅁ 이 부분이 prajna 라는 단어를 입력할 때 
키전환을 안하고 입력한 부분이다.
그래서 이런 오타가 발생함을 알아채고 그 부분으로 가서 
다시 영문전환키를 누르고 입력해보려면 또 오타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증상이 있어서 병원에 가서 상담하면 
또 그런 상황에서는 별 이상이 없이 잘 된다. 
그래서 공연히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는 것이다. 

페이지에 글 하나 짧게 쓰는데 
다시 읽어보면 오타가 70 개 80 개 이렇게 나오면 
상당히 민망해진다. 

한글도 한글이지만, 특히 한글 입력하다가 
한자어를 입력해야 한다거나 영문을 입력해야 하는 경우가 발생하면 
더 작업이 힘든 것이 사실이다.

물론 과거에 prince님이 오타 발생을 줄이고
입력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 
축약용 핫키를 이용하는 방안을 제시하였었다. 
그래서 prince 님의 단어는 오타가 거의 발생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핫키로 축약해 놓았기에 그런 것이다. 

그런데 이 방법의 문제는 
prince 님에 대한 핫키를 또 외어야 하는 것이 문제다.
어떤 단어를 많이 반복하는 경우는 그 단어에 핫키를 따로 정해서 배당하면 되는데 
그러나 어쩌다 한 번 입력하는 단어를
모두 다 핫키로 배당하면 그것이 더 부담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왜 글 쓰다가 갑자기 오타 문제로 넘어갔는가하면 
너무 맺힌 것이 많아서 그런 것이다. 
사레 관게 이런 글자의 오타는 shift 키를 누르면서 입력해야 할 경우에서 
종종 발생하는 오타라고 할 수 있다.

prince 님이 사람의 뇌파를 읽어서 입력창에 나타나게 하는
키보드가 있다고 하는데
요즘 핸드폰에서 말을 하면 글자를 입력해주는 방안과
거의 비슷한 방안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사람 목소리가 조금씩 다 다르고
여기에서도 오타가 종종 발생해서
상당히 여러 번 반복해서 말을 하게 하고 
귀찮게 하는 경우가 많아서 완전하지 않듯,
뇌파타자기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글을 쓰다가 앞 부분을 잘못 입력했으니 삭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잘못 입력된 부분 다음에 '잘못 입력되었으니 삭제해야 겠는데'
이 글자를 입력해버리는 것이다. 
어떡하지. 

오늘 올려 놓은 곡을 듣는 가운데 이런 글을 쓰는데 
마침 노래에서 고치지 않고 왜 바꾸는가. 이런 메세지를 전한다. 

고친다라는 말과 바꾼다라는 말은 엇비슷한 말인데 
맥락상 고친다는 - 어떤 종이에 쓴 글이 있으면 수정해서 사용한다. 
바꾼다는 - 그 종이를 버리고 새로 종이를 마련해서 작성한다. 
이런 차이가 있는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여하튼 prajna 님도 핫키로 배당해둔 적이 있는데 
prince 님과 핫키가 거의 비슷하게 되는 사정이 있어서
혼동이 발생해 사용하지 않고
그냥 입력하다보니 
오타가 발생하게 되는데 사정이 어렵다. 


몽타쥬로는 이런 분이다.


 


그런데 다시 무량의경 내용을 살펴보자. 

부처님이 아주 똑같은 표현으로
A 라는 내용을 제시해도 
그 뜻이 다르고 
또 그것을 듣는 상태에 따라서
제각각 달리 내용을 취해간다는 사정을 먼저 살폈는데 

그런데 사실 경전이 대단히 많은데 
경전마다 다 똑같은 말씀만 하시는 것은 또 아니다. 

그런데 어제 살핀 금강경에서는 결국 이런 말씀도 하시는 것이다. 
부처님이 과연 한 마디라도 설한 것이 있다고 보는가?

이런 질문을 받으면 답을 잘 해야 하는데 
잘 모르면 방안이 하나 남아 있다고 본다. 
잘 모르겠습니다 하고 
부처님께 다시 여쭤보는 방안이다. 

그런데 답을 해주실 부처님이 
가까운 곳에 안 계시는 상황이면 
혼자 깊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리가 뻔히 보듯 
다양한 경전에 다양한 말씀을 하셨는데 
이것이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들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래서 많은 말씀을 하신 것이 맞다고 답할 수도 있는데
그러나 한 마디도 설한 바가 없다고 볼 수 있는 측면도 
또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중간입장에서 또 살피면 
부처님이 수많은 다른 표현으로
각 경우마다 다른 가르침을 베푸시는 것 같은데 
그러데 알고 보면 그 수많은 가르침은 
다 하나의 가르침을 제시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라고 이해할 부분이 또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들 내용을 종합하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는 것이다. 

1,2,3,4,5,6,7,8,9 =>  a 

a,a,a,a,a => 가,나,다,라,마, 바, 사 



1,2,3,4,5,6,7,8,9 a,a,a,a,a => 가,나,다,라,마, 바, 사  =>  [   ] 



이것은 무슨 내용을 제시하는 것인가 하면 
부처님이 표현상 
1,2,3,4,5,6,7,8,9 이라는 다양한 표현으로
각 경우마다 다양하게 설법하셨는데 
그 뜻을 헤아리면 결국 그것은 하나의 가르침 
a 를 제시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의미가 첫 부분이다.


현실에서 비유를 들면 
철수가 말하길,
오늘 시험을 잘 보았으니 기분이 대단히 좋다고 말하고 
자신이 내일 친구와 놀기로 했다고 말하고 
요즘 가게에서 파는 물건값이 과거보다 많이 비싸졌다고 말하고 
아무리 친해도 서로 오가는 것이 있어야 관계가 원만해진다고 말하고 
여러 말을 다양하게 하는데 
그 여러 표현이 결국 
돈 좀 있으면 조금 주었으면 좋겠다. 
여기에 뜻이 있다는 경우와 같다. 


그것이 1,2,3,4,5,6,7,8,9 =>  a 가 나타내는 내용인 것이다. 

그런데 이제 
a,a,a,a,a => 가,나,다,라,마, 바, 사 
이 부분은 또 무슨 내용인가 하면 

매 경우 같은 표현으로 a 를 말하는데 
그런데 그 각 경우마다 그에 담긴 뜻이 다르고
또 상대도 각기 다른 내용을 취해 간다 
이런 사정을 또 제시하는 것이다. 

현실에서 비유를 들면 

철수가 계속해서 각 경우마다 
a,a,a,a,a 라고 발음을 한 것이다. 
한국어로 아라고 발음해도 마찬가지 현상을 볼 수 있다. 

에이 =>  시험을 치뤘는데 잘 보았다. A 학점을 받을 것 같다. 
에이 =>  시험을 망쳤다. 짜증난다. 
에이 =>  알았다. 지시한 내용이 조금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해드리겠다. 
에이 =>  마땅히 하고 싶지는 않고 힘들지만 이제 그냥 일을 시작하자. 
에이 =>  여러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때는 서로 매너있게 예으이 범절을 잘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 등등 

그래서 이런 현상이 현실에 있음을 쉽게 볼 수 있다.



마지막 부분
1,2,3,4,5,6,7,8,9 a,a,a,a,a => 가,나,다,라,마, 바, 사  =>  [   ]
은 다음을 나타낸다.

이런 여러 내용들은
결국 말을 떠난 어떤 상태를 이해시키기 위하여
사용한 방편이고 시설인 것 뿐이고
사실은 [  ]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설한 바는 하나도 있다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의미다. 




그런데 이런 사정들이 종합되어서 
사정이 복잡해지는 측면이 분명 현실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생사고통을 벗어나는 그 방안을 제시해서 
상대를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취지로 
부처님이 가르침을 중생들에게 베푸시는 과정에 
바로 이 문제가 았고

이로 인해서 부처님 가르침을 대하는 입장에서는
대단히 많은 혼동을 일으키게 되고
복잡하게 서로간에 갑론을박하게 되는 사정이
있게 된다는 것도 제시하는 내용이다. 



현실 사정이 그렇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을 대하는 입장도 
마냥 마음이 편하게 되는 것이 아닌 것이기도 하다. 

자신은 기껏 a 를 대하고 a 로 잘 이해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그것이 아니라고 누군가 제시하면 
그로 인해서 시시비비를 다투면서 
갑론을박하는 상황이 되는 경우 
마음이 편하겠는가. 

그런 상황인데
최종적으로 금강경에서와 같이
부처님이 수많은 가르침을 베푸신 것 같은데
정작 부처님이 한 마디라도 설했다고 보는가라고 
물으시는 대목에 이르면 

갑론을박을 진행하는 입장에서
최종적으로 무엇이라고 답을 해야 하는가.
이 부분이 또 상당히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 동안의 가르침을 소중하게 여기고
열심히 내용을 외우고 했는데
이 모두를 한 순간에 다  
허공에 날리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뗏목의 비유가 
제시하는 핵심 사항이기도 하다. 

강을 건너기 전까지는 
강을 건너게 하는 소중한 방편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강을 건넜는데도
그 이후로도 계속 그렇게
머리에 이고 다닐 것은 또 아니다. 
이런 의미가 뗏목에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또 상황에 따라서는 
그 뗏목을 계속 보관하고 지니고
늘 주의깊게 살펴야 한다고 보는 입장도 있다. 
뱃사공의 상황을 생각하면
그 사정을 또 헤아릴 수 있다. 


여하튼 금강경의 위 구절 부분은  
문맥상 부처님께서
한 마디도 설하신 바가 없다는 내용을 제시하는 것 같은데

그러나 그렇다고 이 질문을 단순하게 생각하고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 없다라고 답하면
또 같은 문제에 부딪힌다.

그 질문의 본 취지가 
있다 없다라고 분별을 일삼는 가운데
있다 아니면 없다 이런 식으로 분별을 행하고 임하거나 답을 하면
그 자체가 희론이 된다는 사정을
위 구절이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질문까지 포함해서 사정이 그런 것이고 
그런 질문이므로 
그 답을 그렇게 하면 되겠는가. 


그런데 또 생각해보면
부처님이 그런 취지로 말씀도 하시고 질문도 하신 것처럼
그렇게 그런 취지에서 그렇게
답을 해도 되는 것이다. 

알고보면 그 사정이 또 부처님 사정인 것이다. 
그래서 어느 경우나 다 그런 바탕이라면 
또 정답처리가 되는 것이다. 


금강경에서는 그러나 어떤가. 
수보리존자가 답한 내용이 나오는데 
그 표현이 어떻든 표현에 매이지 말고 
그 표현이 나타내고자 한 본 취지를
종합적으로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결국 a이다 a가 아니다. 
a가 있다 없다 ~와 같다 다르다 깨끗하다 더럽다 좋다 나쁘다.
생한다 멸한다. 등등으로
현실에서 쉼없이 행하는 이런 망상분별과 희론을
근본적으로 다 떠나야 한다는 것을 
종합적으로 제시하고자 하는 취지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으로 
문맥상 이해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여하튼 이와 같이
다양한 가르침을 경전에서도 다양하게 대하는데 
그렇게 다양하게 제시하게 되는 내용을 대하는 가운데 
또 각 경우마다 그 표현에 담긴 의미를
매 경우에 조화롭게 잘 이해해야 할 사정이
그렇게 있다는 것을 잘 헤아리면서
내용을 대해야 한다고 본다. 

또 그런 취지에서 
조각글안에서도 오타로 보이는 부분이 있으면
또 그런대로 잘 조화롭게 의미를 찾아내고
또 기회가 되면 잘 수정해나가야 한다고 본다. 


한글만 입력하는데에도 너무 오타가 많다. 
요즘 왜 그럴까. 
일단 쉬기로 한다. 

쓰고자 한 내용은 이것이 아니었는데 
도입부분만 쓰다가 마치려니 아쉽다. 





mus0fl--Les Forbans - Chante.lrc

글을 입력하는 데 오타가 많이 나타나서 
조금 쉬기로 하고 

옥상기지에서 음악을 들으면서 쉬는데 
컵에 들어 있던 마시다 남은 커피는 얼어 있고 
팩에 들어 있는 마시다 남은 쥬스는 그대로여서 
쥬스를 마시고 왔다. 

추위는 같은데 각 상황마다 다 상태가 다른 것을
볼 수 있는 대목이라고 본다. 

요즘 왜 이렇게 오타가 많이 발생하는가 생각하면 

- 작업이 많아서 많이 지쳤다. 
- 노쇠현상의 일환이다. 
이런 해석도 가능한데
- 요즘 날씨가 춥고 난방상태가 안 좋아서 손이 얼었다. 
- 생각은 급히 앞서 가는데 손이 따라주지 않는다. 
이런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고 본다. 

글자 하나 입력하는데 서버번 - 서너번 입력을 하려면 힘들다.
서너번 이런 부분을 입력하려는데 서버번이라고 입력하고
'입력'을 입력하는데 자꾸 일력 이렇게 입력하게 되는 것을 또 보게된다. 

그런데 상황이 그럴수록 일단 중요한 핵심부터 적기로 한다. 

어제 금강경과 관련해서
상相과 상想의 구분과 상호관계에 대해서 자세하게 살폈는데 
현실에서 특히 아상과 관련해서 이것이 대단히 중요한 문제라고 보게 된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 생사고통에서 벗어나는 
3 가지 해탈문 공 무상 무원무작해탈문에 대해서도 언급했는데 

이것이 현실에서 존재를 문제삼게 되는 3 영역 
실재 - 감각현실 - 관념분별 영역의 문제와 관련이 되고 

또 이것이 생사현실을 곧 청정한 니르바나라고 관하는 가운데 
생사현실에서 중생제도를 위해 무량행문을 닦아 나가는 
수행자가 수행을 하는 방안 

즉 법의 공한 자리에 앉아서 
인욕[안인]의 옷을 걸치고 
자비의 방에서 수행을 한다는
법화경의 내용과도 관련이 됨을 살핀 바 있다. 

그런데 이런 내용을 살핀 가운데
오늘 무량의경을 살피다 보면 
무량의경에서도 같은 내용을 제시하는 취지를 또 보게 되는 것이다. 

이미 prajna 님이 발췌해 놓은 핵심 부분을 살피면 
그 사정을 살필 수 있다고 본다. 

다음 내용이다. 

無量義者從一法生

무량의자종일법생


其一法者卽無相也

기일법자즉무상야


如是無相無相不相

여시무상무상불상


不相無相名爲實相

불상무상명위실상


---- 



무량한 뜻[무량의無量義]이란 

한 법에서 나왔나니, 

그 한 법이란 

곧 모습 없음[무상無相]이니라. 

이러한 모습 없음[무상無相]은 


모습도 없으며 모습도 아니니, 

모습이 아니면서 모습이 없으므로 

실상(實相)이라 하느니라.




글자만 따라 읽으면
그 관계를 잘 파악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보는데 

처음 '무량한 뜻'이라고 제시한 부분과 
그 이하의 부분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고 보게 된다. 

무량한 뜻 <- 한 법  상없음 무상 <- 모습이 아니고 없는 실상 

이런 관계를 살필 수 있다. 

결국 이는 
관념분별 영역에서 일으키는 무량한 관념분별 [무량의] - 감각현실의 상황 [ 무상 ] - 실재의 상황 [실상]
이런 관계성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본인의 해석은 
또 다른 시시비비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는데 
여하튼 어제 살핀 논의를 바탕으로 대하다 보면 
그런 의미가 읽히게 된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원래 존재가 발생하는 과정을 헤아리면 
본바탕인 실재 => 감각현실 => 관념분별 
이런 단계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고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어떤 존재의 정체를 추구하는 입장에서 보면 
이와는 거꾸로 그 존재의 정체를 찾아나가는 상태가 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처음 무언가를 놓고 문제삼을 때 
그런 내용은 모두 관념분별 영역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논의를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이 대하는 감각현실을 놓고 
헤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다가
그런 감각현실은 자신의 감관이 관계해서
자신의 마음에 얻어지는 내용임을 헤아리는 가운데

자신의 주관과 관계하지도 않고도
그대로 실재하는 내용은 없는 것인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이런 주제로 넘어가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 헤아리는 존재의 발생적 차례와는 
역순으로 각 존재를 헤아려 나간다고 사정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실재가 무언가 이런 주제를 
눈을 뜨고 보는 내용과 관련시켜 이해하면 


자신이 눈을 떠서 어떤 모습을 보다가 
눈을 감으면 이제 그 내용을 보지 못하는 것이므로 
자신이 눈을 떠서 보는 것은
자신의 눈이 관계해서 얻는 것이라고 이해하게 되는데 

자신이 눈을 떠서 무언가를 보다가
눈을 감으면 그것을 보지 못하게 될 때
그렇다고 눈을 떠서 무엇을 보게 만드는 그 무엇도 
그 순간에 같이 사라지고 없게 된다고 할 것인가.
아니면  눈을 뜰 때 무엇을 보게 만드는 그 무엇은 
자신이 눈을 떠서 무언가를 보게 되던
눈을 감아서 보지 못하던 그에 관계없이 
별도로 따로 실재한다고 할 것인가. 
이런 의문을 먼저 제기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처럼 자신이 눈을 뜨던 감던 관계없이 
별도로 실재하는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이 눈을 감고 있을 때의 어떤 상태와 엇비슷한 것일까 
아니면 눈을 떠서 보게 되는 그 모습과 엇비슷한 것일까. 
이런 의문을 다시 갖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여하튼 자신이 현실에서 이미 얻어 놓고
관념분별을 통해 해아린 내용들을 기초로
이런 내용들과 비슷한 무엇일 것이라고 
그 실재를 추리하면서 

자신이 얻어 놓은 내용과 관련해
실재의 영역에서 그것들의 정체를 찾고
논의해가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수사리 보살님에게 이런 내용이 발각되면 
곧바로 수행자 자격증을 박탈당하거나 
심한 질책을 받게 되는 사유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실재가 무언가를 찾는다면, 
실재를 문제삼아야지 
왜 망상분별 상태에서 얻은 그런 망상분별을 기준으로 놓고 
그런 실재의 정체를 찾아나가는가. 
이런 문제점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현실에서 어떤 것을 놓고 그것은 a이다
또는 그것은 a가 아니고 b 이다 등등으로 분별한 내용은 
그 영역에서의 내용인 것이고 
그런 시설 분별은 실재에서는 해당되지 않는 것이다. 


꿈에서 바다도 보고 황금도 보고 한 것은 이해하지만, 
그것은 꿈 영역에서의 문제인 것이지 

현실의 정체를 찾는데 
꿈에서 분별하고 나눈 그런 내용들을 가지고 
꿈에서 본 황금은 현실의 영역에서는 무엇이고
바다는 또 현실의 영역에서는 무엇인가. 
또 현실에서의 무엇이 꿈에서 그런 황금으로 보이는 것일까. 
이런 식으로 연구자세를 취하고 연구를 하면 
그 연구 기본자세 자체가 엉터리이고 
수행자 자격 박탈 사유가 된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실재에서는 그런 시설을 하면서 
'갑의 실재'는 무엇이고 
'을의 실재'는 무엇이고
이렇게 문제 자체를 삼을 수 없는 것임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이미 갑과 을의 분별을 행한 가운데 
각각의 실재가 무언가를 문제삼아 나가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그렇게 문제를 찾고 
나중에 갑의 실재나 을의 실재는 다 차별없이 공하다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사정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내용을 제시하면 
그래서 또 갑이나 을이나 그 실재는 차별없이 공하다고 하므로 
=> 그 갑이나 을의 실재는 다 같다. 
이렇게 나아가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또 수행자 자격증을 박탈당하고
수행자 자격증 재발부 심사를
다시 받아야 하는 어려움에 처하게 되는것이다. 



공하다는 표현이 무엇이 있다 없다
같다 다르다 이런 분별을 모두 떠나야 함을 제시하는 표현인데 
그 공이란 표현이 같다고
언제 그 갑이나 을의 실재가 같다고 제시한 것인가. 
그리고 도대체 실재에서
갑, 을 이런 것으로 나뉘고 묶이면서 그런 시설을 할 수 있다고 
누가 제시했는가. 
이런 문제를 지적당하게 되는 것이다. 


문수사리 보살님은 다른 보살님들과 달라서 
지옥에 보내야 할 수행자는 곧바로 보내고 
이후 같이 지옥에서 관찰 감독을 행하는 스타일이신 분이라서 
잘못 걸리면
아직 안인 수행을 감당할 상태가 아닌데도
곧바로 안인 수행과정에 진입하게 되는 어려움에 처한다고 볼 수 있다. 

금강경에서 제시한 가리왕 
유마힐경에서 제시하는 마파순, 즉 수행자를 향해 고문을 행하는 마파순의 본 정체 
이런 내용들이 바로 이 부분에 해당하는 사항이라고 할 수 있다. 



mus0fl--Dalida & Alain Delon - Paroles, paroles.lrc

쉬는 동안 들은 위 노래는 
무언가 구주 지위에 있는 세 자매와 관련해 
추격을 받고 도주하고 법정에 서는 어떤 입장과 관련한 내용을 
메세지로 전한다고 듣게 된다. 

그런데 그처럼 스위스와 같은 곳까지 도주를 하는 입장은 

처음 어떤 경로로 그렇게 되는가 하면 
어제 살핀 금강경에서 제시하는 아상과 관련된 내용을
처음부터 잘 해결하지 못해서
그렇게 되는 것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 가운데 자신 입장에서
자신이나 자신의 것으로 보는 것에 집착하며 행하다가
또 나중에는 그렇게 자신이나 자신의 것으로 보는 것을 끌고
그렇게 열심히 도주 도피의 길을 나서게 되는데 

첫 문제를 엉터리로 푼 상태이니 
그 도주가 제대로 될 리가 있겠는가. 

결국은 그런 상태에서 고스란히 생사고통을 
받아나갈 도리밖에는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처음에 문제를 잘 해결한 경우는 
그 이후 현실에 임하는 자세부터가 수행방향으로 전환이 되지만, 

또 그런 고통을 직접 만나는 상황이 되어도 
그와 같이 되지 않는다는 사정을 반복해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현실에서 자신이 자신으로 보고 대하는 내용이 
엉터리라고 제시해도 
그러나 반복해서 그런 상태에 머물게 되는 그 사정이
대단히 뿌리깊다는 것도 함께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그런 전도망상 분별 증상이
어느 한 순간 잠깐 경전을 살펴서 
그것이 제거되고 곧바로 생사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오히려 현실 사정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상相과 관련한 이런 혼동의 발생 사정을 
자세히 살폈는데 그 사정이 그런 것이다. 

노래에서 말로만 듣던
지옥이 드디어 내것이 되었다고 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이것이 바로 
어떤 주체가 지옥에 도착하게 되면 
그 주체의 전도망상 상태를 전제로
곧바로 생각하게 되는 그 내용인 것이다. 

그런데 기존에 갖던 망상을 그대로 전제하고 
그 지옥의 상황을 대하니 그렇게 표현하게 되는 것은 이해하지만, 
알고보면 이것이 얼마나 엉터리인가. 

그래서 처음 전도망상 상태를 전제로 
대부분 좋다고 보고 나쁘다고 보는 것을 놓고 망상을 일으키고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에 바탕해 행위를 계속 하다보면 
그 전제에서 그렇게 지옥 아귀 축생세계에 들어가게 되고 
또 그 상태에서는 그런 고통을 생생하게 대하게 되는 상태가 된다는 사정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본다. 


처음 단계에서 그런 망상을 갖지 않았다면 
그 이후 그런 상태로 나아가는 행위도 하지 않고 
수행으로 전환해 나아갔을 것이지만, 

설령 지옥에 도달해도 
그 지옥에 그런 내용이 있다거나 
그 지옥에서 고통을 받는 자신이 있다거나 하는 망상도 
역시 갖지 않는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론은 그렇지만, 
그 부분이 수행자라고 해도 쉽게 되는 것이 아니므로 
일단 상당히 깊은 수행을 많이 해야 하고 
그것도 단계적으로 수행을 밟아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는 것이다. 

수행자 라이센스는
처음 어떤 이가 보리심을 일으키고 서원을 장착하면
그것만으로 발급이 되는데 
이 단계를 초발심 수행자라고 보통 칭하게 된다. 

이 단계만 되어도 대단한 것이라고 보는데 
그런데 현실적으로 수행을 하다보면 
많은 어려운 상황을 만나게 마련이고 
그래서 다시 원 상태로 물러나게 되기도 하고 

또 앞과 같은 여러 문제로 인해서 
문수사리 보살님과 같은 분이 나타나 
수행자 라이센스를 박탈시키고 
지옥에서 안인 수행을 일단 시작하는 단계가 되고 
나중에 또 다시 수행자 라이센스 재발급을 신청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보는 것이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낳네 
고친다 바꾼다 이런 가사를 해석하는 내용도 제시했지만, 
본래는 초발심 수행자와 신발의 수행자 이런 용어가 
같은 의미라고 보지만, 
그러나 조금 다른 의미가 있다고 개인적으로 감상하게 된다. 

초발심은 말 그대로 처음 보리심을 일으키고 
수행에 진입하는 단계라고 한다면 

신발의보살은 일신 일신 우일신 이런 표현이 제시하듯 
과거에 발심을 했었으나
일단 상황이 어려워 다시 물러났다가 
또 사정이 좋아지거나 상황이 바뀌면 
또 새로 다시 한번 수행에 임해보자 이렇게 하는 
수행자를 의미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경우 
매 순간 담배를 피고 매순간 담배를 끊고
또 기회가 되면 다시 소신공양에 임하려고 하는 시도를 반복하는 
그런 상습적인 신발의 수행자형태가 될 우려도 있는 것이다. 







이미 자신이 자신으로 보는 내용이 왜 엉터리인가를 
자세하게 살폈는데 

쉽게 이해하면 5 살때 자신이 자신으로 보는 내용을 기준으로 하면 
60 살이 된 자신이 자신으로 보는 내용이 엉터리이고 

반대로 60 살이 된 자신이 자신으로 보게 되는 내용을 기준으로 하면 
5 살 때나 10 살때 그 당시 자신이 자신으로 본 내용이
또 엉터리라는 것을 쉽게 파악하게 된다고 본다. 


그런데 이상하게 매 순간
그렇게 엉터리인 내용을 붙들고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그것을 붙잡고
그렇게 계속 장소를 이동해가는 것이다. 

나중에는 그 장소가 달라도 너무 차원이 다른 다른 세계가 되면 
노래처럼 말로만 듣던 지옥이 드디어 내것이 되었다라고 하거나 
말로만 듣던 아귀계에 드디어 도착했다
이런 형태가 된다는 사정을 미리 잘 파악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그것이 곧 자신의 정체에 대한 미스테리를 
잘 해결해야 하는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설명을 해도 
현실에서는 자신이나 자신의 것이라고 보는 내용을 붙들고 
그처럼 매순간 그것이 자신이나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집착을 갖고 나아가게 하는 사정이
또 깊게 있다고 그 사정을 잘 헤아려야 한다. 

이 사정은
망상을 일으킨 입장에서는
그런 판단이 대단히 타당하고 적절하다고 보게 만드는
근거라고 일반적으로 여기지만, 

사실은 그렇게 엉터리인 전도망상을 일으키고
이후 그것이 옳다고 받아들이고
그 자신을 생사현실에 묶이게 만드는
사정이라고 보는 내용인 것이다. 

그래서 그 사정은
결국 그 중생을 그런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에 묶어 놓는
수갑이나 족쇄와 같은 것이고 
그런 수갑이나 족쇄가 
그런 기능을 그처럼 잘 수행하게 되는 사정이 곧 그런 사정이라고 
잘 이해해야 한다. 





이미 상에 관한 문제를 
유식론에서부터 살피기 시작했는데 
바로 그런 사정들이
각 경전과 논서에 반복해 제시되는 것을 살필 수 있다. 

기본적으로 
현실에서 대하는 내용들이
모두 마음안의 내용이라고 제시하거나 

현실에서 자신이라고 보는
그런 부분이나 내용을 자신이라고 여기는 것은
하나같이 엉터리이니 
그런 것을 붙잡고 임하지 말라고 제시해도 

여기에 대해서 일반적인 입장에서 
반론을 제기하게 되는 사정이 있다면 
그 사정들이 바로 그런 것이다. 


그 내용이 곧
어떤 주체가
아무리 그 상태를 벗어나려고 해도 
어쩔 도리가 없이 
역시 자신이 기존에 자신으로 보는 것을 붙잡고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매순간 그렇게 임할 도리 밖에 없고 

예를 들어 이 부분에 전기자극이나 상처가 나면 
그에 따라 반응해가면서
그로 인해 고통을 아주 생생하게 받는 세계로
묶여 끌려갈 도리 밖에는 별 도리가 없다. 
이렇게 임하게 되는 사정들인 것이다.
그래서 이런 사정들이  
바로 생사고통을 받는 전도망상의 상태에
그 자신을 계속 묶어두는 족쇄 기능을 
그처럼 충실히 잘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은 자신은 그런 상태가 아니라고 보는 것이지만, 
그런 족쇄가 채워진 상태로 이미 삶을 출발하고
그 상태에서 계속 살아온 이상, 
어디를 가고 어디로 도주를 해도 
그 사정이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된 상태에서는 그런 사정 때문에 
그가 스스로 그런 상태를 벗어나서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로부터 도주할 수 있으리라고 
마 파순이 걱정을 일체 하지 않는 것이다. 







글을 쓰기 전에 동요를 놓고 
경전 게송과 관련해서 생각해보았는데 

그것은 경전 게송은 외우기 힘들고
경우에 따라서는 거부감을 갖는 경우도 많고
또 이해도 잘 안되는데 
동요는 그렇지 않다. 
이런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살피게 된 것이기도 하다. 


이미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이런 가사를 보았는데 
이 노래를 보다 보면 
다시 
리리 리자로 끝나는 말은~ 
하는 노래가 생각이 난다. 

그러다가 
나리 나리 개나리 입에 따다 물고요. 
병아리떼 종종종 봄나들이 갑니다. 

이런 노래가 갑자기 떠오르게 된다. 

이는 윤석중 님 작사 권태호 님 작곡의
봄나들이라는 동요라고 한다. 

이것이 리자와 관련되어 떠오르는 노래들인데 
이 노래는 
나리 나리 개나리 병아리 봄나드리 
이런 각운이 적용된
랩가사의 일종이라고 보게 된다. 

그런데 여하튼 이 노래가 
바로 나에 대해서 갖는 아상을 해결하는 이치
=> 나에 관한 이치 => 나리 
와 대단히 밀접한 곡이라고 우겨보게 된다. 

이것이 바로 동요와 경전 내용의 접합을 통한 해탈문의 시설
또는 동요에 해탈문의 부착 공사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나리 나리 두번 반복되고 뒤의 개나리까지 합치면 
나리가 세번 반복된다고 보는데 
무량의경을 통해 이미 살핀 내용을 여기에 적용한다면,
비록 세 경우의 표현이 같아도
그 각각마다 다 다른 뜻이 있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의 나리는 일단
=> 현실에서 전도몽상 상태에서 나라고 보는 부분을 나라고 보게 하는 사정 및 그 이치와 
관련된 표현이라고 보게 된다. 


그리고 두번째 나리는 
다시 
=> 그처럼 현실에서 엉터리로 보는 나, 즉 매 순간 달라지고 원하는대로 되는 부분도 별로 없고, 
자신이 나라고 이해하는 그런 것은 알고보면 외부 대상을 상대하는 주관이라고 할 지위에 있는 것도 아니라는 등의 
사정을 파악하는 가운데 
그러나 이런 내용에서 진짜라고 할 나는 과연 어디엔가 있다고 할 것인가.
이런 문제로 넘어가게 된다고 보는데 
이 때 이런 진짜의 나와 관련된 내용과 그 이치가 두번째 나리에 관련된다고 
또 보고자 하는 것이다. 


일단, 논서나 경전을 살피다 보면 
무아나 무자성 공을 제시하는데 
이에 대해 엉뚱한 망상분별에 바탕해서 계속해서 시비를 제기하고 

그런 가운데 자신이 생각하는 내용은 그처럼 현실에 실답게 있는 것이고 
실재영역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주장하고 
더 나아가 그런 내용을 현실에서 얻게 되는 것은 
진짜의 나가 이 안에 있기에 그런 것이라고 주장하는 입장이 있는데 
결국 이런 입장과 관련된 내용이 두번째에 모두 담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알고보면 현실의 99 % 가
처음 부분에서 그런 내용을 자신이라고 보는 경우가 또 대부분이고 
또 그런 상태에서는 그런 나의 실재나
진짜의 나의 존부를 문제삼게 되면
또 그 논의에서 대부분 뒤의 입장에 가까운 내용을 붙들고 주장하게 된다고
보아도 지나친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런 상태가 곧 경전에서 반복해
생사고통을 받아나가는 근본원인인
전도몽상 편집증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이런 상태가 거의 대부분인 사정은 
수행을 통해 그 사정을 이해한 분들이 대부분 
족쇄를 풀고 난 후에는
바로 바로 차원이 높은 장소로 이동해 가는 현상 때문에
욕계 특히 인간계에서는
대단히 희박한 비율이 되는 사정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요즘에는 왜 부처님의 출신지인 인도에서
정작 불교를 믿는 이가 적은가
그런 의문을 제시하는 경우도 있는데
인도에서 불교를 믿던 분들은 이미 세계를 달리해
떠날 분은 떠난 것이다.

현실에서 어떤 이가 음식을 먹고 바삐 떠나면 
나중에 그 음식 그릇에는 무엇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생각하면 이 이치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고 나중에 왜 당신이 먹고 남은 그릇마다 
세균만 가득하고 파리만 몰려드는가.
이렇게 처음 그 그릇을 대한 이에게 물으면
무엇이라고 답하겠는가. 

그 그릇에서 영양가있는 부분은
이미 다 자신이 섭취해서 세계를 옮겨 있는 상태다. 

나머지 남은 부분은 또 기회를 살펴야 하는데 
자신이 그렇게까지 경제사정이 어려운 것은 아니고 
다시 보니까 다시 섭취할 마음도 별로 안 일어난다. 
이렇게 말하게 되지 않을까 한다. 


여하튼 그래서 
자신이 대하는 그 일체는 마음안 내용이고 
그것은 또 자신 외부의 내용도 아니고 
또 자신의 감관(주관)이 대하게 되는 외부 대상도 아니고 
그리고 자신의 마음 밖에 있고 그래서 마음과는 별도라고 할 외부물질도 아니다. 
라고 제시해도 

그와는 반대로 모두 이 내용을 대하고 여기는 것이고 
더 나아가
현실에서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은 알고보면 
자신이 눈을 떠서 대하고 
손으로 만지면서 얻는 감각현실 가운데 
부분을 나누어서
일정한 부분은 자신 외부의 세계내용이고 
일정한 부분은 자신이라고
매순간 여기면서 살아가는 것인데 

그런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그것을 계속 고집하고 살아가게 되는 데에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입장에서
그런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는 것이 마땅하다고 볼 근거로 
나열하게 되는 그 사정들이
바로 하나같이
자신을 처음 그런 생사고통을 겪는 상태로
그 부분에 묶어 놓은 사정이기도 한 것이고 

그것은 곧 
자신이 근본 무명 어리석음에 바탕해
전도망상을 일으켜서 그것을 대하게 된
기본 사정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알고보면
하나같이 실답지 않지만
어떤 주체가 매 순간 생생하게
그런 생사고통을 겪어 나가게 되는
근본원인과 책임은 
그렇게 엉터리인 부분을 붙잡고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매 순간 임하게 만든 
근본 무명이 바로 그 원인인 것이다. 



그런데 유식론에서도 그렇지만, 
아무리 그것이 자신도 아니고
또 자신의 감관이 대하는 대상이라고 보고 
자신 외부에 있는 내용으로 보는 것들이
하나같이 그런 것이 아니라고 제시하지만, 


그런 내용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여전히 현실에서 그런 내용을
그렇게 보아야만 할 근거가 한 두가지가 아니라고
계속 반론을 제시하게 되는데
그런 사정이 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만 놓고 헤아리면
정말 그렇게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니 바로 그런 사정이
곧 그런 주체가 그런 전도몽상을 일으키고
그에 바탕해 각 부분에 집착을 일으키고
생사고통을 무량하게 받아나가는 사정인 것이고 

또 반대로 말하면 
그것이 곧 그런 생사고통에 그 주체를
묶어 놓은 족쇄 기능을 하는 것이고
또 그런 족쇄가 그런 기능을
확고하게 행하는 사정도 그것인 것이다. 

이는 
예를 들어 

어떤 최면술사가 상대에게 최면을 걸어 
매 순간 양파를 귤로 보이게 했다면 

그 상태에서는 그가 매순간 양파를 대할 때마다
그것을 귤로 보고 대하게 되고 
그리고 그 상태를 스스로 벗어나기가 힘든 것이나 
사정이 매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그 자신이 자꾸 스스로 검토해 보아도 
자신이 귤이라고 보는 것이
귤이 아닐 이치나 도리가 없다고
자꾸 반복해서 그 상태에 고집하고 머무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망상증에 걸려서 병원에 다니는 경우 
평생 그런 증상에서 벗어나기 힘들다고 보는데 
일반적인 전도 망상증상이 바로 그런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설명하고 
경전 내용을 제시해도 
오히려 그런 내용을 제시하는 입장을
말도 안 되는 궤변을 그럴 듯하게 제시하는 것이라고 간주하고 

자신의 본래 망상과 집착에 바탕해
열심히 나아가서 
결국 3 악도에 들어가 묶여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그런 세계로 들어가는 순간까지도
그 자신은 자신이 어떤 좋은 하늘세계로 들어간다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들어가는 것이고 
그렇게 한번 들어 간 다음에는
1 겁 2 겁이 지나도록 다시는 못 나오는 것도 
바로 그런 사정인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 현실 사정도 또 사정이
이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상식적으로 
뻔히 자신을 유괴 납치 감금하는 것을 안다면 
누가 그렇게 감금당하면서 만두만 평생 먹는 상태로
스스로 걸어가서 그렇게 갇혀지내겠는가. 

그런데 그렇게 묶이게 되는 사정은 
처음에는 그것이 좋은 것으로 보이고 
그래서 가는데 그렇게 가고나서 그 상태를 확인한 이후로는
그 상태에서는 도저히 벗어날 도리가 없다고 보면서 
묶이게 되는 사정이 또 있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마음이야 그런 고통을 피할 수 있다면
스위스까지라도 도주를 떠나고 싶겠지만, 
사실 그 족쇄를 풀고 생사고통에서 벗어나는 열쇠는 
스위스에 따로 있다기 보다는
그 주체가 매 순간 대하는 그 각 순간의 
단면에 다 들어 있다고 지금 제시하는 것이다. 



일단 또 쉬기로 한다. 

그런데 쉬더라도
나리 나리 개나리는 설명을 마치고 쉬어야 할 것 같다. 


처음 나리가 이미 제시하였듯,
현실에서 망상을 일으키고 임하는 입장에서
그런 망상을 일으키는 주체가 스스로 그런 내용을 자신이라고 여기는
망상을 일으키게 되는 사정과 그 이치라고 한다면, 

두번재 나리는
경전에서 주로 무아 무자성 제법무아 이런 표현에서 사용되는 나 즉
참된 진짜의 나라고 할 그런 나의 정체와 관련된 내용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앞 경우에 비하면 조금 상태가 나아졌다고 할 수는 있는데
그러나 여전히 그런 나가 있는가 없는가를 놓고
무아 무자성이 과연 옳은가 아닌가를 문제삼는 상태여서 
일단 완전히 생사고통을 벗어난 상태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래도 일단 앞의 입장을 떠나
진짜의 나는 무언가 있는가 없는가 이런 주제를 놓고 
그것을 한자어 <아>로 표현한 가운데 무아의 문제를 살피는 경우
그런 측면에서 진짜의 나의 존부에 관련된 이치로 보는 것이다. 


이후 경전에 맞추어서 계속 내용을 붙여 나가려면 
개나리에는 어떤 내용을 배당해야 할까 고민이 되는데 
오늘 리자로 끝나는 말에서
가장 중요한 분이라고 할 수있는 문수사리 보살님을 떠올리는 가운데 
문수사리 보살님이
모든 경전을 하나의 다라니에 담았다고 제시하는 그 다라니에
나자가 또 들어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이들 나에 관한 논의는 결국 
모두 그 나라는 다라니에
귀결시켜야 한다고 일단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내용이 곧 
개나리라는 말에 넣어진다고 감상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내용이 앞에서 이미 살핀
무상삼매의 내용과도 밀접하게 관련이 된다고 본다. 


자세히 살피면 나의 정체를 찾는 문제는 
대단히 여러 존재 영역을 오가면서 
논점을 제시해야 하는데 
그것이 복잡한 것이다. 

그런데 간단하게 결론으로 나아가려면 
문수사리 보살님의 아라바자나에서 나에 해당한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 일단 가장 간단하다고 본다. 

그것은 곧 일체는 모습과 성품을 얻을 수 없고 
언설명자도 그러하다는 내용이 
아라바자나라는 다라니에서 나에 담긴 내용인데 
그 내용이 이들 문제를 해결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고 보고

그 일체가 다 그런 이치와 관련된다고 볼 때 
그 문제가 잘 해결되고 
또 그로 인해 생사고통을 벗어나는 해탈문도
함께 잘 찾아낼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또 병아리는 무언가. 

사정이 그렇고
또 그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다양하게 내용을 제시했는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원래의 망상을 고집하고 붙들고
그것을 취하고 머물고 늘어지게 만드는 나름의 깊은 사정이
현실에 그렇게 있는 것이다. 

그래서 왠만해서는
그런 업의 장애를 스스로 해소시키고 
생사고통을 벗어나기 힘들다고 보는 사정이 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는 
이 생사고통을 단번에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데 
그것이 바로 병아리라는 단어에 담겨 있다고 본다. 

그런데 여기서 아는 무엇이겠는가. 
바로 무량한 기간 그렇게 매 순간 형체를 달리해가면서 
가지가지 생사고통을 겪게 될 때 
그 매순간 그렇게 그 고통에 참여하게 되는
실질적인 내용으로서의 나 즉 근본정신이라고 할 부분을 
그렇게 매번 매생마다 병들게 하는 이치와 관련된다고 일단 본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단계의 마음에 번뇌에 해당하는 때[구]로 인한 것인데 
그것이 계속 꼬리를 이어서 증폭되고 
또 그것이 반복해서 종종 쉼없이 나타나 증폭되어 이어지는 
사정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구절들에는 
이 상태를 벗어나는 열쇠가 장착되어야 한다고 보는데 
그것은 앞에 어떤 주체를 생사고통에 묶는 내용의 반대 내용들이
곧 그 상태를 벗어나는 열쇠이기도 한 것이고 

또 그러한 내용은 일단 경전에 그에 해당하는 내용이 있다고 할 것이다. 
여하튼 동요가사는 이미 주어진 것이므로 
그것을 그 안에 지록위마형 방식으로 억지로 넣으면 되는 것이기에
별 문제는 아니지만, 
여하튼 그럴 듯하게 서로 연관이 되어야 하므로  
시와 관련된 연구는 계속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일단 
봄나들이 갑니다. =?> 이런 부분은 무언가를
잘 보아야 한다고 제시하는 내용이라고 감상해보게 된다. 

이는 반야심경 구절을 인용하면  
'행심' 반야바라밀다하고 '조견' 오온개공하고  '도' 일체고액하고 
능제 일체고 하고 아제아제바라아제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까지
잘 념해야 하는 내용과 관련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해석은 지나친 억지라고 보기 쉬운데 
그러나 이미 하나의 내용을 각 경우마다 각기 다르게 음미하고 대하게 되는 사정을 
무량의경 내용을 살피면서
그 사정을 기본적으로 살핀 것이다. 

그래서 이런 지록위마형 시감상및 해석이 
큰 문제가 없다는 사정도 함께 잘 헤아려야 한다고 본다. 

여하튼 그런 감상이 마음에 들거나 않거나 간에 
일단 길게 쉬기로 한다. 


원래는 유식론이나 기타 일반적 입장에서 
반론을 제시하게 되는 사정을 하나하나 나열해서 
자세히 살피려고 했는데 
그 가운데 일부는
이미 오래전에 상락아정 등등의 표현을 통해 살핀 내용이기도 하고
이미 글이 길어져서
다음 기회로 넘기는 것이 낫다고 보게 된다. 





mus0fl--Frédéric François - De Venise A Capri.lrc

대강 살피니 이미 쓴 부분에 오타가 많이 보이는데
오타는 천천히 나중에 수정하기로 하고 
어떤 것의 정체를 살피는 과정에서 
어떤 문제가 있는가만 간단히 추가하고
마치기로 한다. 




이미 실재와 감각현실 관념분별의 관계를 살피고 
상相 과 상想의 관계를 제시하면서 
이해를 돕기 위해 

세모가 그려진 비닐과 동그라미가 그려진 비닐을 겹치면 
어느 비닐에도 없는 '안이 세모인 도너츠 모양'이 나타나 보이게 된다고 
비닐마술의 비유를 들어 그 사정을 설명했다. 

그런데 이미 그런 도너츠가 실답게 있다고 여기는 입장에서는 
자신이 도너츠로 보는 그 모습이 
세모가 그려진 비닐 영역에서도 그 세모가 그렇게 있고 
동그라미가 그려진 비닐 영역에도 그 동그라미가 그렇게 있는데 
왜 자꾸 그 도너츠가 없다고 하는가 하면서 
그 망상분별에 대한 고집을 포기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자신이 있다고 여기는 그 도너츠는 
실재에도 그런 내용이 있기에
현실에서도 자신이 그런 도너츠를 보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너무 당연한 것이어서 
그래서 그 실재를 자신이 직접 얻든 얻지 못하던 
현실에서 자신이 보고 생각하는 그 내용은 실재영역에서도
그대로 실답게 있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그런 도너츠를 현실에서 그렇게 보게 될 리가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매번 매 경우마다 그런 내용을 반복해서 대하게 되고 
그것은 자신만 그런 것이 아니고
자신과 같은 상태로 같은 증상을 일으킨 다른 입장이 대단히 많다. 

그래서 그런 내용을 실답지 않다고 하는 것은
도무지 이치에 맞지 않다고 여기면서
자신이 기존에 갖고 있던 그런 망상에 집착하고 머무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이런 경우는
그렇게 상대가 망상을 일으킨 과정과 그 사정을 
상대입장에 들어가 잘 헤아리면서 
그런 상대 입장을 설령 그대로 다 받아들인다해도
그 바탕에서도 그렇게 여기면 대단히 곤란에 처하게 되는 사정을 잘 제시해서 
그런 가운데 스스로 그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필요가 있다고 보게 된다. 

그러려면 상대가 그런 망상을 일으킨 과정과 그 사정부터 
하나하나 잘 살펴야 하고 
그 각 부분에 어떤 치명적인 문제가 있는가를 
이해하기 쉽도록 잘 제시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집착을 가진 상태에서는 
이런 내용에 관심을 갖게 되는 그런 계기 자체가 
쉽게 주어지지 않는 것이 또 문제인 것이다. 

사정을 보면 당장
몸의 병을 치료해야 하고 
감관에 이상이 있는 부분도 치료해야 하고 
그리고 그렇게 되면 다시 
직업활동에 바삐 임해서 생계를 해결해야 하고 
그리고 생계가 안정적이 되면 
또 자신이 만들어 가진 온갖 망상적 소원과 그로 인한 번뇌를 
또 일일히 잘 해결해야 한다고 여기면서 
한 순간도 그 묶임에서 풀려날 계기를 잘 얻지 못하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게 어렵기에 
이 상태에 있는 어떤 상대를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려면 
위 문제 하나하나에 수행자가 들어가서
신속하게 그 상대가 원하는 그 소원의 종착점까지
그 상대를 이끌어서 데려다 주는 노력과 함께 
곧바로 다음 단계로 이끌고 나와야 비로소 
상대가 수행에 진입할 수 있다고 보는 어려운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계속 다양한 경전을 살폈고 
최근에는 서로 특색이 다르다고 보는 여러 경전 

즉 무량의경

금강반야바라밀경

금강수광명관정경최승입인성무동존대위노왕염송의궤법품 이라는 긴 제목의 경전
그리고 동화책을 연상시키는 듯한 내용의 잡비유경
이런 경전들을 살폈는데 
이 각 경전들이 결국은 같은 내용을 제시하는 것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결국 1,2,3,4,5,6,7,8,9 이런 형태로 
대단히 다른 형태의 내용이 제시되는데 
그 내용은 결국 다 같은 A 를 제시하려는데 
기본 취지가 있음을 살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사정이 그렇게 복잡한가하면 
각 중생의 상태가 그처럼 대단히 다양해서 
한마디로 무량한 뜻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형태로 
현실에 임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일단 어떤 것의 본 정체
특히 자신이 자신이나 자신의 것으로 보고
현실에서 대단히 집착을 갖고 대하는 것의 본 정체가
무언가를 확인할 때는 

그 내용을 직접 얻지 못하는 실재를 놓고 
살피려고 하기 보다는 

먼저 자신이 현실에서 얻는 각 감각현실과 
관념분별 내용을 놓고 
이들의 정체부터 잘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래서 그 각각의 본 정체를 논의할 때 
엉뚱한 내용을 제시하고 고집하는 것은
대부분 사실은 이처럼 현실에서 얻는 내용을 바탕으로 
그런 견해를 형성하게 되었다는 사정을 이해할 수는 있는데 

문제는 그런 주장이 
그 주체가 현실에서 얻는 내용들 안에서부터도 
그와 같지 않다는 것부터
하나하나 이해하는 것이 더 낫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앞에서
갑의 실재가 무언가 또 을의 실재가 무언가 하는 식으로 
엉뚱하게 실재의 정체를 찾아나서는 경우 
문수사리 보살님으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게 된다고 제시했는데 

그 사정도 알고 보면 
이미 그 주체가 현실에서 그처럼 갑과 을이 그렇게
달리 구분되고 그렇게 달리 나뉘어져 있다고 
일단 망상을 일으켰기에 
그런 바탕에서 실재의 정체를 찾을 때도
그처럼 갑의 실재는 무언가. 
또 을의 실재는 무언가
이들은 서로 차별이 있는가 없는가. 
또 실재영역에서는 서로 무슨 관계인가 
이렇게 접근하면서
나중에는 이들이 다 차별없이 공하므로
그 갑과 을의  실재는 다 같은 것이다.
이런 엉뚱한 견해를 최종적으로 붙잡고 
제시하게 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경우 꿈의 비유도 많이 들어서
그 사정을 이해하게도 되지만, 


또 다른 비유를 든다면 
현실에서 눈으로 노란 옷과 파란 옷을 보게 된다고 할 때 
자신이 이 각 옷의 본 정체를 소리 영역에서 찾아나선다고 할 때 

소리의 영역에서 노란 옷의 정체는 소리로 무엇인가. 
파란 옷의 정체는 소리로 무엇인가 이렇게 찾으면 
그것이 처음부터 이치에 맞는 것인가부터
잘 헤아릴 필요가 있다. 

또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노래를 하나 올려 놓고 듣는데 
이 노래는 눈으로 보는 세계에서는 
이 소리부분은 어떤 색이고 
저 소리부분은 또 어떤 색인가 이렇게 문제를 잡고 찾아나가면 
그 각 노래 소리의 본 정체를 
눈의 영역에서 찾아낼 수 있는가. 

과거에도 이렇게 문제를 제시하자 
prince 님이 MP3 파일을 열어서 보여주고 
파장형태로 그 파일내용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으로 
파장 형태까지 보여주었던 일이 생각나는데 

이들이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할 것은 아니지만, 
그런데 지금 문제삼는 그 소리가 
그 파장 모양을 보면 그 안에서 얻어지고
그래서 그 소리의 정체가
그런 방식으로 찾아진다고 할 것인가. 

그러면 그 반대도 마찬가지라고 할 것인가. 

여하튼 한번 치솔을 쭁이라는 강아지로 보고 대하고 고집하고 임하는 경우 
그 고집을 왠만한 내용으로는
포기하게 만들기 어렵다는 것이 
해당 병원에서 보고하는 내용이기도 한데 

왜 사정이 그런가 하면 
이 논의를 진행할 때
그 상대는 그가 대하는 모든 자료를 놓고
그 바탕에서 해석을 취하고
그래서 자신이 대하는 감각현실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내용들이 매 경우 그처럼 있다고 여기면서 
그것을 근거로 삼아 살펴나가기에 
이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기 힘든 것이다. 

그런데 이 한 단면에서부터
무슨 문제가 있는가하면 

총체적인 망상증상의 근본 원인이 
바로 상相과 상想의 문제로 이미 들어 있기에
그 사정이 그런 것이다. 

그러니 그 상태에서는
백약이 효과가 없게 되는 것이다. 

양파를 대하면서 귤이라고 여기게 되는 최면에 걸린 상대는
이를 매번 귤이라고 보면서
그 내용을 그것을 귤이라고 보아야 하는 근거로 사용하고
그것을 근거자료로 쌓아 놓는데

그가 양파를 대할 때마다
그 입장에서는 그 양파를 귤이라고 보게 되는 근거가
그에 비례헤서 그렇게 많이 쌓이는 것이니
그것을 시정해내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어려움이 많은데 

유식론에서도 그런 사정 때문에 
시시비비의 논의가 전개되는 사정을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일단 현실에서 쉽게 얻는 내용을 놓고도
그 문제해결이 잘 안 되는데 
현실에서 임하는 대부분 잘 파악하지 못한다고 보는  
지옥세계나 아귀계의 내용을 자꾸 근거로 제시하면 
그 문제가 잘 해결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또 갖게 마련이다. 
기껏 근거라고 제시한 내용이 
또 다른 근거를 다시 요구하는 새로운 문제가 되면, 
어떻게 이 문제를 수습해야 하는가라는 부분에서 
어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일단 질적인 상태변화가 있을 때까지는 
그런 전환인 곤란하다고 보는 가운데
방치하고 

나중에 질적 변화가 있고 난후
그 당사자가 직접 그 상태에 놓여서
그 상황을 일일히 경험하고 
전환이 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게 되지만,

그런데 그 상태를 벗어나면
또 지금과 마찬가지가 된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각 세계를 옮겨 다닐 때
보관 이동이 가능한 내용과
그렇지 못한 내용이 갖는 차이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알고보면 현재의 상태가
바로 과거에 그런 경험을 다 마친 그런 상태인데도
여전히 문제는 시원하게 해소되지 않는
어려움이 있다고 보게 되는데


그것은 꼭 세계간의 문제가 아니고
바로 이 순간의 단면과
다음 순간 사이에서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두 순간만 놓고도
그런 것이 가능하지 않으면
나머지는 더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즉 지금 이순간 
이 단면에서
동시에 얻는 5 종류의 감각현실과
관념분별 사이에서부터
그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면
이 문제를 다른 단면으로 넘어가서 대해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사실 문제를 잘 해결하려면
지금 이 순간에 얻는 하나의 단면을 놓고
그 단면에서 무엇을 자신의 본 정체라고 할 것인가

그리고 다음 단면에서 또 자신의 본 정체라고 보는 내용과
그 내용은 서로 무슨 관계인가 이런 것부터 먼저 붙잡고
잘 해결하는 것이

이 전도몽상 편집증세를 완화시키고 치유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일단 눈으로 보는 색을
요즘 세간에서 많이 문제삼는 가격이 대단히 높은
하나의 비트코인이라고 가정하고  

이 색을 
소리의 영역에 넣어 사용해보는 연습부터
해보는 것이 좋다고 보게 된다. 

이는 색을 어떻게 소리 영역에 찾을 수 있고
색을 소리 영역에서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가. 이런 실험이다. 

그래서 여기서 제시하는 문제는  
그 색을 보고 그것은 '이런 색이다'라고 소리를 내어  
그 문제를 해결한 것으로 보는 그런 문제는 아니다. 
눈으로 보던 색을 소리를 듣는 영역에서 찾으면
그 색이 그처럼 얻어지던가 이런 문제인 것이다. 



그런 가운데 
어떤 이가 갑의 실재 또는 을의 실재 이런 식으로 
실재의 정체를 찾아나설 때 
문수사리 보살님이 왜 그런 수행자에게 호된 질책을 하고 

또 어떤 수행자가 
문수사리 보살님 오셨습니까 라고 인사를 드리면 
그렇게 되면 이 현장에
2 문수가 있게 되겠구먼 하는 질책성 핀잔을 하게 되는지 
그 사정을 잘 헤아리면서 길게 쉬기로 한다. 


본래 문수사리 보살님이
열심히 여기저기 오가시면서 중생제도 활동을 하시는데 
그러나 이 상황 어디에도 
그런 오고감도 없고 
제도하는 중생도 얻을 수 없고 
그렇다는 것을 잘 이해하는 것이 
수행자의 기본이라고 강조하시는 입장이기에 
그 내용을 기본적으로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mus0fl--Florent Pagny - Si Tu Veux M'essayer.lrc


쉬는 동안 조금 더 앞에 제시한 문제들을
자세하게 살펴야 하지 않을까 생각도 하는데
요즘 너무 작업량이 많아서 쉬기로 한다.

대신 옥상기지에서 듣게 되는 노래가
시적으로 감상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본다.






○ [pt op tr]  mus0fl--Johnny Hallyday - Quand Revient La Nuit.lrc


옥상기지에서 두 곡을 듣고
두 곡을 올리고 글을 마치려고 제목을 외우려는데 

단기기억용량에 한계가 있기에 
노래 제목을 기억하는데 어려움이 많다. 


그래도 두 곡 제목 앞 부분만 외어 왔는데 
다행히 찾아서 올려 놓게 된다. 

아직도 불어는 본인에게 친숙한 외국어가 아닌 것이다. 

그런 사정 때문에 오히려 불어 노래는 
한국어로 주로 처음부터 끝까지 듣게  되는데 
이 현상이
왜 어떤 주체가 전도몽상을 그렇게 매번 일으키고 
매 현실을 대하는가 
그런 사정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본다. 

이미 그런 전도망상을 일으키는
바탕이 갖추어진 상태는 
그 주체가 무엇을 대하던
그 내용은 그런 바탕의 망상을 계속 일으키면서 
대하게 만드는 사정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옥상기지에서 쉬면서
노래만 듣고 온 것은 아니고 

과거 7 불 가운데 한 분이신 
구나함모니여래가 남긴 게송을 대하게 되는데 
거기에 이상한 명칭의 부처님이 두 분 제시되는 것을 보게 된다. 

불불견신지시불이란 분과 
약실유지별무불이란 분인데 
단기기억에 장애가 있는 상태이기에 
앞글자만 떼어서 외우려는데 
이 게송을 통해
불약지탄 이런 새로운 구절이 나타난다. 

이 축약 구절로부터 다시 
부처님이 생사고통을 벗어나는 데 효험이 있다고 
중생에게 제시해 주는 약은 
현실에서 지탄을 받는 경우가 많다는 
내용을 엉뚱하게 연상하게 된다. 

그런데 그렇게 이상한 연상을 하면서 내용을 외우면
이게 모니? 
이렇게 구나함모니여래님께서 핀잔을 하실 것 같다. 


그러나 여하튼 어떻하든
방편을 마련해서 외워두면 

지옥에 들어가더라도 
또 다른 게송을 외우고 있는 다른 분을 또 만나서
서로 외우고 있는 4 구게를 조합해서
이를 놓고 틈틈이 연구하다보면 
조기 출옥할 수도 있을 지 모른다. 



위 노래를 듣다보면 
여러 사정으로 인해 문제가 있는데 
우선 
현실에서 소나무를 놓고 소나무로 보는 증상을 한번 일으킨 상태는 
설령 이후 세계를 달리한다고 해도 
치유하는 것이 어렵다는 사정과 함께 

그래도 재판에서 도움을 주겠다는
그런 긍정적인 메세지를 듣게 되는데 

여하튼 시감상 차원에서
이미 무량의경에 제시된 내용과 같은 사정으로 
이런 지록위마형 망상적 감상을 통해
수행에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고 보게 된다.  


拘那含牟尼佛賢劫第二偈曰 

구나함모니불현겁제이게왈 


佛不見身知是佛 若實有知別無佛 

불불견신지시불 약실유지별무불 


智者能知罪性空 坦然不怖於生死

지자능지죄성공 탄연부포어생사


부처란 

몸을 보지 않고 

부처인 줄 알지만 

만약 진실로 안다면 

부처가 따로 없네. 


지혜로운 이는 

죄의 성품이 공한 줄 잘 알아서 

걸림이 없이 생사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네. 





○ [pt op tr]  mus0fl--Marie Laforet - Que Calor La Vida.lrc 

♥ 잡담 ♥오타의 정체 

Prajna Citta 불기2560/07/08/금/23:36


4 제법문은 주로 성문승을 위한 가르침인데 

여기서는 하늘 중생이 보리심을 일으키어 대승에 들고 


또 12 인연의 가르침은 주로 벽지불을 위한 가르침인데 

보리심을 일으키거나 성문에 머무는 이가 있고 


방등 반야 화엄의 가르침은 주로 대승을 위한 가르침인데 

성문 4 과와 벽지불에 들기도 함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표현 자체는 하나인데 

그 표현으로 부터 얻어 갖는 뜻이 달라 

중생이 각기 자신의 근기에 맞는 내용에 의해 

법을 얻고 과보를 얻고 

도를 얻는 것을 제시하는 내용으로 본다.  



어제 금강반야바라밀경 페이지에서 

상과 관련한 내용을 자세히 적었는데 
다시 읽어 보니 오타가 너무 많아서 
이것을 고치느라 힘들었다. 

오타 수정내역을 참고로 올려 본다. 


 문서정보 ori 불기2561-12-15-무량의경덕행품
http://buddhism007.tistory.com/3798#4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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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2561-12-15
θ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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