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cques Brel - Les Filles Et Les Chiens
불기2562-11-01_방광반야경_018
Marie Myriam - Du Blues Au Feeling
http://buddhism007.tistory.com/5227
● [pt op tr] fr sfed--방광반야경_K0002_T0221.txt ☞방광반야경 제18권
○ [pt op tr]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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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잡담 ♥망상의잔류에 비례상응하는 방편(구화구사라)
조각글이 많이 밀린 상태에서 11 월을 맞이했다. 요즘 계속 밀려져 있는 경전을 읽고 정리하느라 바쁜데 쉽게 보충이 되지 않는다.
그 가운데는 9 월달에 빠뜨리고 온 경전도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불설관정칠만이천신왕호비구주경_K0174_T1331 이란 경전인데 여기에 보면 범왕이 신책을 뽑는 것을 소개하고 있다.
그래서 다시 이를 스크립트로 만들어 보았다. 어떻게 해야 할 지 잘 모를 때 일종의 복점을 치는 것인데 100 부분으로 나눠야 하는데 구분이 명확하지 않아서 좋은 내용과 나쁜 내용이 함께 들어가 균형을 되도록 이루도록 나누어보았다.
좋은 말도 있지만, 조금 좋지 않는 내용도 많아서 그냥 궁금해 점을 쳐보려다가 좋지 않은 내용을 대하면 기분이 상할 수도 있다.
그리고 나중에 이것이 습관이 되면 뭐든지 점을 치고 선택을 하려는 경향도 생기기 쉽다.
알고보면 현실에서 미래가 다 투명하고 분명하게 예측되는 것이 아니고 매 경우 그 각 선택마다 좋고 나쁨이 엇갈리기 때문에 사람들은 매 경우 선택할 때마다 약간씩 불안을 가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이 자동차를 사면 좋은 일이 있을까. 아니면 사고를 당할까. 이 버스를 타고 가면 좋은 일이 있을까 아니면 사고를 당할까. 등등으로 매번 그런 의문을 갖고 불안해지기 쉽다.
또 그런 점을 자꾸 대하다보면 이렇게 생각하면 그런 것도 같고 저렇게 생각하면 저런 것도 같게 생각되어서 오락가락하게도 된다.
본인이 아무 생각없이 거리를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거나 할 때도 비슷한 심정이 된다. 오른쪽으로 가도 되고 왼쪽으로 가도 되고 뒤로 가도 되고 앞으로 가도 되는데 이왕이면 어떤 쪽으로 가는 것이 좋을까. 이런 심정을 많이 느끼는데 여하튼 선택을 해야 하지 않는가.
어떻게 해야할까.
여기서 자신이 생사현실에서 우선순위를 두는 것이 전혀 없다면 정말 어느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우선순위로 두는 것이 있다면 여하튼 그 방향으로 조금이라도 가까워질만한 것이 어떤 것인가를 놓고 선택을 하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도 안 된다면, 그 다음 순위 그 다음 순위 이렇게 되겠지만, 이제 정말 어떤 순위도 없다면 말 그대로 점을 쳐야 할 지도 모른다.
점을 치는 내용이 경전에 나와서 스크립트로 만들어 보았는데 이것이 과연 도움이 될 지 모르지만, 경전에서 부처님이 인가를 한 것이므로 일단 문서 작성용 스크립트 페이지에 올려 놓았다.
또 한편 하루에 여러 음악을 듣는데 어떤 장르의 어떤 음악을 들을까 선택하기 힘들때 대략 12 만 여곡 가운데 장르를 선택해서 유튜브를 통해 감상할 수 있는 스크립트도 새로 만들어 보았다. 요즘 왠만한 곡들은 유튜브에 올려져 있는 상태라 곡명 목록만 있으면 자신이 원하는 장르에서 곡을 랜덤으로 뽑아 들을 수 있다고 보기에 목록을 통해서 만들어 본 것이다. 이것도 랜덤으로 뽑아서 듣는 방안의 하나여서 결국 위와 사정이 비슷하다고 본다.
불교 경전을 살피면서 이번에 살피는 방광반야경과 같은 내용을 대하면 상당히 이해하기 힘들다고 느끼기 쉽다.
우선 현실에서 각 주체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여기면서 우선순위로 두는 것에 대해 모두 그런 것은 본래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다.
그것은 세속에서 일반적으로 우선순위를 두는 것 일체 예를 들어 생명이나 신체 재산 가족 지위 명예... 이런 것 일체를 그렇다고 제시할 뿐 아니라,
다시 수행자가 수행목표로 두는 것도 사정이 그렇다고 제시한다.
처음에 이해하기 힘든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그런데 두번째 이해하기 힘든 부분은 사정이 이런데도 생사현실 안에서 수행자는 또 일정한 수행방안을 취해서 수행을 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부분이다.
그것도 대부분 세속에서 일반적으로 도무지 행하기 힘들어 하는 내용 즉 일반적으로 누구나 대단히 집착하고 대하는 일체의 것에 대해 집착을 제거하고 좋음을 베풀고 [보시] 나쁨을 가하지 않고 [정계] 자신은 나쁨을 받아도 평안히 참는 [안인] 의 수행 등을 꾸준히 정진해 행하라는 것이어서 한마디로 현실에서 다른 생명을 위한 봉이 되어 임하라는 내용들이다.
그래서 다시 이 부분을 이해하기 힘들게 된다. 본래 얻을 수 없는데 그런데 왜 또 일정한 행위를 해야 한다고 제시하는가.
그렇게 해서 얻는 수행목표도 얻을 수 없고 심지어 그런 행위를 하는 주체나 상대나 그 행위나 그 행위 대상도 일체 얻을 수 없는데 왜 그런 행위를 해야 한다고 하는가.
또 그 행위는 일반적 입장에서 왜 당장 자신에게 손해가 되고 고통을 준다고 여기는 그런 행위를 그렇게 행해야 한다고 하는가.
그래서 이 부분을 다시 이해하기 힘들어하고 또 그 사정과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므로, 현실에서 이를 성취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번에 살피는 방광반야경 부분도 바로 이 부분에 대해 내용이 제시되고 있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 그렇게 하면 도대체 어떻게 되기에 그런 것인가.
이 사정을 보면 그것이 곧 구화구사라라고 표현되는 방편의 문제임을 이해할 수 있다. 이 선교방편이란 종전에 외우기 쉽게 '오빠야'라고 표현한 우빠아야 [방편]이란 표현과 관련된다. 선교방편 [upāyakauśalya] <= 방편 [upāya ]
본래 얻을 수 없기에 그 측면에서는 일체가 평등하다고 기본적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바탕에서 부처님이 제시하는 수행을 취하여 집착없이 행하면 차별없이 공한 가운데 자신도 생사고통을 겪는 상태에서 벗어나고 다른 중생도 역시 생사고통을 벗어나게 하고 그로 인해 또 무량한 복덕과 생명과 지혜를 성취할 수 있다는 의미다.
여기서 말하는 생사고통은 원칙적인 입장에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인데 그러나 망집에 바탕해 생활하는 일반 생명입장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그 부분에서 수행자가 위와 같이 임하면 차별없이 공한 바탕에서 동가홍상의 상태를 얻는 것이 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러거나 저러거나 차별없이 공한데 생사현실에서 그 사정을 이해하는 수행자는 어떻게 선택을 하고 성취해가는가에 관한 내용이다.
여하튼 이 사정을 기본적인 내용도 이해하기 힘들지만, 그런 바탕에서 왜 그런 방안을 취하는가도 이해하기 쉽지 않다.
이런 수행방안은 결국 현실에서 각 생명이 생사현실에서 갖는 망상분별과 그 망집의 잔류현상과 관련이 깊다.
기본적인 입장에서 한 주체가 대하는 현실에 무엇이 있고 무엇이 좋다고 여기는 상황에서 본 사정이 그렇지 않다고 아무리 제시해도 그렇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망집을 계속 잔류시키면서 현실을 대하게 만드는 사정이 있다. 그리고 그 생사현실에 임해 그 주체는 그렇게 생사고통을 겪어 나가게 되는 것이다.
이 문제가 처음에 그런 것을 얻을 수 없다는 원칙적인 부분에서 모두 잘 해결된다면 이 뒷 부분은 상당히 간단하게 해결되었을 것이다.
말 그대로 그런 것을 얻을 수 없는데 누가 문제를 삼겠는가. 그런데 생사현실에서 생사고통을 겪는 중생입장에서는 아무리 그런 내용을 반복 제시받고 또 노력해도 쉽게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전쟁이 일어나 전투에 임하는 병사의 입장을 놓고 생각해보자. 어제까지 같이 친하게 대화하던 동료 병사가 여기저기서 폭탄이 터져 팔 다리가 끊어지거나 내장이 터지고 또는 여기저기 총알을 맞고 피흘리며 고통받고 죽어가고 있다. 적군은 자신을 죽이기 위해서 계속 공격하고 자신도 역시 마찬가지로 그런 적을 죽이기 위해서 열심히 공격하고 있는 상황이다.
원래 왜 싸웠는가를 생각하면 결국 마찬가지 문제를 보게 된다. 무언가에 대해서 견해가 다르고 좋고 나쁨을 두고 서로 다투고 있고 또 좋음을 얻는 방안에 대해서도 서로 뜻이 달라서 그렇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자신이나 자신의 동료의 손과 발이 끊어져서 피흘리고 고통을 받고 죽어가고 있는데 이 상황을 놓고 여기에 그런 것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면 그것을 이해하고 이를 평안히 참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이가 도대체 누가 있겠는가.
본인이 쉬는 가운데 여러 영화를 보기도 하는데 최근에 본 한 전쟁영화 라이언 일병의 구출 이런 영화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라이언 일병의 형제가 다 이미 전투에서 사망했기에 배려 차원에서 라이언 일병을 귀환시키는 작전이 진행되었는데 구출하려는 병력이 구출작업을 하다가 대부분 희생되는 내용이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적의 상황도 알고보면 마찬가지다.
굳이 극단적인 이런 비극이 아니더라도
이와 유사한 비극과 수많은 사건 사고가 쉼없이 일어나는 것이 현실인데 이 현실을 놓고 부처님이 앞과 같이 이런 생사현실에 그런 내용 일체를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니 어떻게 이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첫 문제다.
그런데 그것을 이해해도 왜 다시 수행자가 그 생사현실에서 앞과 같은 비극적인 사건 사고에서 가장 비극적인 피해를 당하는 입장에서 자발적으로 그런 상태를 향해 나아가서 봉이 되어 임하라고 하는가를 또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그리고 그 사정의 이해가 설령 된다해도 정말 현실에서 그처럼 행할 수 있는 이는 또 얼마나 되겠는가.
어떻게 보면 그래서 이런 내용을 이해하고 실천하여서 성불하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대단히 힘들다고 보게 된다.
경전을 글자만 따라가면서 이론상 대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넘어가기 쉽지만,
이 내용을 현실에서 직접 실천할 수 있으려면 이런 내용들을 하나같이 추상적 글귀로만 피상적으로 대하지 말고 구체적인 현실에서 자신의 이해관계가 가장 극단적으로 걸려서 자신의 생명이 오가며 서로 대립하는 상황을 하나 그려 놓고
경전 내용을 적용하면 이 상황에서 자신이 어떻게 하라고 한 것인가를 놓고 이를 살펴야 이 문제의 심각성을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적군이 갑자가 자신의 집에 들어와 마음대로 가족을 폭행하고 재산을 불지르고 파괴하고 다 가져가고 그런 상황인데 여기에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평안히 참자. 이런 방안이 가능하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하면 생사를 벗어나고 복덕을 성취하고 불국토를 장엄하는 등의 수행목표가 성취된다고 볼 수 있기에 그렇게 하려는 경우도 있겠지만, 경전에서는 다시 그런 수행목표도 끝내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다.
사정이 그렇다면 더욱이 왜 그렇게 해야 할 것인가.
사정이 그러한데 과연 어떤 수행자가 그런 상황에서 그렇게 임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경전에서 부처님은 사정이 그렇기에 오히려 그렇게 임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이것이 결국 망집현상과 관련된 문제인데 어떻게 보면 어리석음과 지혜의 문제와 관련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하튼 앞과 같은 구체적 현실을 놓고 하나하나 살피면 결코 치료가 쉽지 않다.
점을 쳐서 선택을 하는 문제를 살폈다. 그것은 자신은 몰라도 다른 존재는 그것에 대해서 잘 알고 있으리라는 일종의 판단에 바탕한다.
그리고 그 판단은 또 자신이 기본적으로 추구하는 좋음을 많이 얻고자 하는 데에 바탕한다.
그런데 부처님은 기본적으로 그런 것 일체를 본래 얻을 수 없다고 하는 한편, 생사현실에서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고 무량한 복덕과 수명과 지혜를 구족하기 위해서는 또 수행에 임해야 한다고 제시한다.
그것이 곧 우빠아야 내지 구화구사라라고 제시하는 수행방편의 내용이다.
본인도 자전거로 가끔 운동삼아 길을 다니는데 4거리가 나오고 어디로 가야 할 지 모를 때는 어디로 가야 좀 더 아름다운 풍광이 많고 또는 아름다운 여인이 많이 다니는가 이런 생각으로 방향을 잡기도 한다.
왜냐하면 어차피 이 거리나 저 거리나 마찬가지인데 그래도 아름다운 풍광이 조금이라도 많은 쪽이 낫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또 어떤 좋음을 추구할 때도 이왕이면 적은 비용으로 많은 좋음을 얻기를 원하고 어떤 아름다움과 평안함을 추구하다보면 이왕이면 욕계보다는 초선 양이 있는 색계 범천에서 시간을 보내기를 원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것이 결국 동가홍상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차별없이 공한데 왜 생사현실에서 극심한 번뇌를 일으키고 생사고통을 받아가는 상태에 묶일 것인가. 그것이 중생의 제도에 도움이 되고 자신의 생사고통의 해소에 도움이라도 된다면 모르는데 그렇지도 않다면 왜 굳이 그래야 할 것인가. 그럴 이유가 없다.
그런데 대부분 중생이 그렇게 묶이는 데에는 또 그 주체가 각기 가장 집착하는 좋음을 추구하기 위해 그렇게 업을 행해서 그처럼 묶이게 된다는 사정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망집을 바탕으로 자신이라고 여기는 부분을 기준으로 놓고 다시 대단히 좁고 짧고 얕게 관찰하는 가운데 당장 직접 자신이 집착하는 좋음을 얻는 방안이라고 보는 것을 취해서 매순간 업을 행하기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과거를 한 십년 이십년을 놓고 잘 복기해보면 그 사정을 스스로도 잘 파악할 수 있다고 보지만, 대부분 그것을 무시하고 지나치게 된다. 그래서 그런 상태로 계속 생사를 받아 나가는 것이다.
앞에서 기본적으로 가장 이해하기 힘든 첫 부분으로 현실에서 자신이나 남이나 어떤 사물로 보는 것을 놓고 거기에 그런 것을 얻을 수 없다는 사정을 제시했다.
방광반야경 신본제품 제 80 에서도 수보리가 다음과 같이 의문을 제기한다.
...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가령 처음부터 중생과 그 처소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보살이 어째서 반야바라밀을 생각하고 행하는 것입니까?”
...
여기서는 그런 것을 얻을 수 없는데 왜 반야바라밀과 같은 수행을 해야 한다고 하는가를 문제삼는다. 그런데 이는 기본적으로 이미 기본 경전 가르침등을 통해서 세속에서 대부분 집착하는 것들이 하나같이 실답지 않고 얻을 수 없다는 사정을 먼저 잘 파악한 것을 전제로 한 질문이다.
그런데 일반적인 입장에서는 이 부분부터가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아무리 보아도 현실에서 자신과 세계의 모습이 그렇게 보이고 그것들이 하나같이 실답고 또 그것이 대단히 중요하게 여겨지는데 왜 그런 것이 거기에 없다고 전제하고 이런 질문을 하는가. 이것부터가 잘 이해되지 않는다.
특히 극단적으로 자신이 가장 집착하는 생명과 신체 재산 가족 명예...등이 관계되면 이 현상은 더욱 심해진다.
비록 실재와 감각현실 관념분별의 영역을 놓고 어느 한 영역에서 얻는 내용은 다른 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는 것임을 반복해 제시해도 이 망집 현상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망집이 제거되지 않는 이 현실이 바로 생사현실의 문제다.
본 바탕에서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현실에서도 역시 그처럼 망집에 바탕해 그런 내용이 있다고 여기는 현상이 함께 없다면, 수행이란 처음부터 필요없었을 것이다.
또 그런 망집이 있더라도 중생들이 위와 같은 사정을 제시하면 곧바로 그 사정을 이해하고 곧바로 그런 망집에서 벗어나올 수 있다면 또 수행자가 장구한 세월을 통해서 수행을 해야 할 사정도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 않다.
이 부분을 기존에 망집 잔류현상이라고 해서 계속해서 이어서 살피는데 이처럼 현실에서 잘못된 망집을 잔류시키는 그 사정을 놓고 왜 그렇게 망집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가를 하나하나 살피고 있다.
이를 위해 사과를 하나 책상에 놓고 손으로 잡은 가운데 그 사과를 눈으로 바라보고 또 그 사과를 손으로 두드려 소리를 듣고 그 사과에 코를 대어 사과향기를 맡고 그 사과를 입으로 맛을 보고 그 사과를 손으로 만지면서 촉감을 얻는 상황을 놓고 어떤 과정으로 망집이 일어나고 그 망집이 쉽게 제거되지 않는가를 살폈다.
그리고 그 사과를 다시 영희나 철수에게 건네면 영희나 철수도 역시 그 상황에서 그것을 그처럼 사과로 여기고 대한다는 것도 이 망집을 계속 잔류시키고 증폭시키는 사정이 됨도 보았다.
여기에 다시 다음을 추가해보기로 한다.
이미 위와 같은 내용들은 그것이 모두 그 주체의 마음에 머무는 마음안 내용으로서 외부 세계의 내용이 아니고 외부 대상도 아니고 마음과는 별개의 외부물질도 아님을 살폈는데 여기에서 자신이 매일 일정한 장소에 가면 그 사과를 보게 된다는 문제를 하나 더 추가해보기로 한다.
이것은 측량을 할 때 기준점을 정하고 삼각법을 사용해서 어떤 것의 위치를 파악하는 문제와 관련된다.
예를 들어 자신이 삭딩에 있는 냉장고에 사과를 두었다고 하자.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식당에 들러서 냉장고 문을 열면 어제 둔 사과가 오늘도 또 보인다.
이 상황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처음 사과로 대한 것이 얻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사과는 실답지 않다고 해야 한다. 그리고 냉장고나 식당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상하게 현실에서는 식당에 들어가 냉장고 문을 열면 거의 어김없이 반복해서 그 사과를 그대로 또 대하게 되는 경험을 한다.
그래서 이 하나하나가 실답지 않다지만, 그러나 이들간의 각 관계는 서로가 마치 상당히 실다운 것처럼 여기게 만드는 한 요인이 되는 것이다.
이미 그 사과를 자신도 사과로 보지만, 그 사과를 영희나 철수에게 건네면 영희나 철수도 그것을 사과라고 여기면서 대하는 현상을 살폈는데
순수하게 자신만 놓고 생각해도 각 사물들 간에 일정한 관계가 파악되기에 자신이 파악하는 각 내용은 대단히 실다운 것이 아닌가 여기게 된다.
그래서 설령 무인도에 혼자 있게 되어도 각 사물들을 놓고 이것이 다 실답다고 여기는 망집 현상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이는 이들이 실다운 것이 아니라면 왜 이런 현상이 현실에서 반복해 발생하는가를 또 잘 이해해야 한다는 요구이기도 하다.
즉, 수보리 존자가 방광반야경에서 제시하는 문제 즉 현실에서 있다고 보는 중생이나 장소 등 각 내용을 하나도 얻을 수 없는데 그러나 왜 생사현실에서 반야바라밀을 닦아야 하는가하는 문제를 살피려면 먼저 현실에 분명 그런 내용이 실답게 있다고 여겨지는데 왜 그런 것을 얻을 수 없다고 하는가 하는 문제부터 잘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Sakyamuni_Buddha
English: During his life time the historical buddha specifically requested his likeness not be recorded in idolatrous form . Author Doniv79 Permission & Licensing : Wiki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