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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3-05-16_대승기신론_001 본문
『대승기신론』
K0616
T1666
대승기신론 제1권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 [pt op tr] 대승기신론_K0616_T1666 핵심요약
♣0616-001♧
『대승기신론』
대승기신론 제1권
[...]
● 해석분 세가지-현시정의 대치사집 분별발취도상
● 현시정의 - 한 마음의 두가지 문 -심진여문-심생멸문
● 심진여(心眞如)
● 진여의 두가지 이치[義] - 여실공, 여실불공
● 여실공
● 여실불공
● 심생멸
● 아리야식
● 아리야식의 두가지 이치 - 각의-불각의
● 각의 - 법신 - 본각- 이념(離念)
● 본각 - 시각과 불각의 상대적관계
● 구경각과 비구경각
● 상사각
● 수분각
● 구경각 - 무념과 무시무명
● 본각과 지정상과 부사의업상의 관계
● 지정상(智淨相)
● 무명(無明 각성의 관계- 바다와 바람과 물
● 부사의업상(不思議業相)
○ [pt op tr]
이전 내용 참고
=>
문서정보 ori http://buddhism007.tistory.com/3672
sfed--대승기신론(진제역)_K0616_T1666.txt
sfd8--불교단상_2561_10.txt ☞◆vjpv1454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Les Cowboys Fringants - Histoire De Peche.lrc
● 난해한 언어시설[용어]이 가리키는 언어를 떠난 그 무엇
『대승기신론』은 유명한 논서이지만,
난해한 용어가 많이 사용되어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일단
1- 눈에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는 마음
1- 그리고 마찬가지로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고 얻어지지 않는 가운데
현실 내용이나 그 내용을 얻어 내는 마음 등 그 모든 일체의 본 바탕이 된다고 보는 진여 실재
1- 그리고 현실에서 이런 마음을 통해 얻고 일으키고 이후 망집을 일으키는 재료가 되게 되는
마음안 내용인, 감각현실이나 분별
1- 그리고 이처럼 현실에서 얻는 감각현실과 분별을 재료로 해서 일반적으로 일으키는 망상분별적 내용
이처럼 현실에서 문제삼게 되는 각 내용들의 본 정체를 한편으로 올바로 파악하는 가운데
그런 바탕에서 대승의 가르침을 바탕해서
자신만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지 않고[소승]
무량한 중생을 제도하고 성불하기 위해서는
어떤 상태를 향해 어떤 수행을 행해 나아가야 하는가[대승-마하연] 하는 측면에서 내용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우선 낯선 용어 하나하나가
정확히 무엇의 어떤 상태나 내용을 가리키며 설명하고 있는가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이런 문제때문에 다양한 혼동을 일으킬 여지도 많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살펴가기로 한다.
이는 비록 현실에서 모든 주체가 눈을 떠 세상 모습을 잘 보는 한편
마음으로도 많은 내용을 얻고 활동하지만,
정작 자신이 그렇게 생활하고 생사를 겪는 과정 자체에 대해
스스로 파악하거나 이해하기 힘들다는 사정과도 관련된다.
그런 가운데 마음이 스스로 마음을 보거나 만지지도 못한 가운데
그런 마음과 관련해 낯선 표현으로 설명이 이뤄진 경우
도대체 각 표현이 무엇의 어떤 측면을 가리키는가를
명료하게 구분해 파악하기 힘들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 전에도 이런 내용과 관련해서 한번 대강 살폈다.
그래서 그 부분은 중복을 되도록 피하고 살피고자 한다.
● 진여 - 심 - 색 - 분별 - 망상분별과 관련한 혼동
이미 이전에 살필 때 언어표현이 일으키는 혼동에 대해서 지적했는데
우선 심진여나 1심 이런 등등의 표현이 상당히 많은 혼동을 일으키는 측면이 있다.
그런 혼동과 오해 가운데서 가장 대표적인 경우는
이 내용을 다음처럼 오해하는 경우도 생각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눈으로 지금 영희와 철수도 보고 옆에 바위와 나무를 보고, 내 모습 일부도 스스로 본다.
그런데 눈을 감으면 그 모습들을 보지 못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눈을 감으면 그 직전까지 보고 그 상황에 있었다고 여긴
영희 철수 바위 나무 그리고 나 자신의 모습들이 이제 모두 없어져 버린가.
아니면 내가 그런 모습을 보거나 보지 않거나 관계없이
그대로 실재한다고 할 어떤 내용이 따로 있는가.
그런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이런 의문을 갖게 된다.
이 때 나와 관계없이 그대로 있다고 할 무엇을 '실재, 진여'라고 표현하고
그 내용이 무엇인가를 찾아 나서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처음 진여, tathātā, 실재, 실상 이런 표현을 사용하게 된다.
참고로 여기서 진여의 진은 현실 내용은 꿈과 같은 가짜인데
그렇게 찾는 진여는 꿈과는 성격이 달리 실답고 영원분별한 진짜내용으로서 참되다. 이런 의미인 것처럼 오해하기 쉽지만,
그렇지는 않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즉, 현실은 무아 무자성이지만, 지금 문제삼고 찾는 실재 진여 실상은 무아 무자성이 아니다. 그래서 실다운 것이다.
그렇기에 그 내용을 실재 진여라고 한다. -- 이런 뜻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 문제삼는 진여 실재를 '진'-여라고 표현하는 것은
현실에서 얻는 각 내용의 본 바탕이 되는 내용이면서
그에 대한 다른 엉터리 주장과는 성격이 다른 내용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고 보게 된다.
그리고 같을 '여'란 표현을 실재 진여를 나타내는데 사용하게 된 배경을 추정해보면
지금 문제삼는 본 바탕이 되는 진여 실재라는 내용은
현실에서 얻는 내용을 그 출발점으로 해서 찾아나서게 된다.
그런 과정에서 각 주체가 그것이 일단은 자신이 얻는 현실 내용과 엇비슷한 무엇일 것이라고 추정하는 가운데
그것을 찾아나서기에 그런 표현을 사용하게 된 것으로 보게 된다.
여하튼 '진여'란 표현은 현실과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즉, 현실에서 얻는 내용이 무언가가 있다면
그 본 바탕이 되는 무엇으로서
그런 현실 내용과 관련되는 그 무엇이지만,
그러나 현실 내용 그 자체는 아닌 다른 그 어떤 것을 가리키고자 기본적으로 사용되는 표현이다.
그래서 본래는 현실에서 얻는 내용을 곧 진여라고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영희와 철수로 보게 되는 내용은
낮에 밝은 빛에서 대할 때와 저녁에 볼 때 그 모습이 다르고
멀리서 볼 때와 가까이서 대할 때가 다르다.
100M 만 떨어져서 영희나 철수를 바라보면 그 영희나 철수는 자신의 손각락의 한 마디보다고 작고
콩알보다도 작게 보인다. 그런데 또 자신을 향해 가까이 다가오면 올수록
매번 형태가 달라지고 커진다.
현실에서 얻는 내용은 매순간 이런 형태로 얻는다.
그런 가운데 눈을 감으면 그 모습을 얻지 못한다.
이런 가운데 현실에서 자신이 영희나 철수 또는 자신이라고 여긴 각 부분
또는 나무나 바위라고 여긴 각 부분이 있다면
그런 내용의 본 바탕은 어떤 것이길레 이렇게 매 순간 그런 내용을 얻게 하는가.
이것이 그 각각의 진여 실재는 과연 무언가라는 주제로 논의하고 연구해갈 때 갖게 되는 1 차 문제다.
그런데 일단 『대승기신론』에서 심진여라는 표현이나
1심, 여래장, 본각 이런 용어를 사용하면서
현실에서 각 주체가 망집을 일으키고 임하게 된 바탕에서
그 본 정체를 올바로 파악하고
수행을 통해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고 중생을 제도하고 깨달음을 얻어 성불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가운데
필요해 시설해 표현하는 각 표현들로 혼동을 일으킬 수 있다.
대표적인 혼동을 다음과 같은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앞에서 문제되는 현실 각 내용의 본 바탕이 되는 내용을 진여 실재라고 표현하고
그 내용이 무언가를 찾아 보았더니
세상의 내용을 마음과 마음 아닌 물질 이런 식으로 2 분법상의 구분을 할 때
놀랍게도 그 진여 실재의 정체는 색이라고 보는 물질 이런 것이 아니고 마음이더라.
그래서 심진여라고 한다. 이렇게 이해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즉 진여가 무아 무자성 공하다고 하는데
알고보니 그렇게 표현하며 찾는 그 진여는 색은 아니고 심이었다.
즉 진여 본 바탕에 1 심이라는 내용이 있고
그것이 바로 찾고자 한 진여 본 바탕의 내용이다.
이런 의미로 오해하는 경우다.
이는 현실 내용이 알고보니 마음안에 모두 맺힌 마음 내용이다.
그리고 그 현실 내용이 자신이 대하는 대상인 줄 알았는데 그 안에 그런 대상은 없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유식 무경 이런 의미와는 또 다르다.
그런 의미가 아니고 이제 다시 그런 현실 내용과 그런 내용을 얻는 마음의 본 바탕이 되는 실재 진여를 찾아보니
그 실재 진여가 우리가 이해한 그 마음이더라.
이렇게 또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실 일체의 본 바탕이 되는 실재 진여는 다른 것이 아니고 마음이다.
그리고 그것도 2심 3 심도 아니고 1 심이다.
이렇게 이해하는 경우다.
그래서 이제 지금 문제삼는 현실 내용 일체는
그런 하나의 마음을 본 바탕 진여 실재로 하는 가운데 나타난 것이다.
더욱이 놀랍게도 그 본 바탕 실재의 위치에 있는 그 마음은
영희나 철수, 그리고 자신의 마음 이런 형태로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마음 뿐이다.
그래서 세상은 부처님, 영희 철수 자신 그리고 생명이 아니라고 보는 바위 나무...이런 것들이 있다고 여겼는데
알고보니 그 본 바탕은 모두가 하나의 마음이다.
즉, 1 심을 그 본 바탕으로 한 가운데 현실에서 이 모든 내용을 얻게 된 것이다.
그래서 알고보면 부처님 영희 철수 돼지 닭....이런 수많은 생명과 자신까지 모두 1 심인 것이어서
이미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고 성불한 상태이기에 이 가운데 부처님이 성불하고 깨달았으니
나 자신도 알고보면 부처님이다.
또는 내가 앞으로 성불하면 세상은 모두 1심이므로
내가 지금까지 본 모든 것은 다 함께 부처님의 상태가 된다.
이런 식으로 이상하게 이해하고 이 내용을 혼동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과연 지금 심진여 1심 이런 등등의 표현이
이런 내용을 지금 가리키고 있는 내용인가.
이것부터 기본적으로 잘 확인해야 한다.
『대승기신론』 논서를 대해서 읽어가다보면
이미 현실에서 기본적으로 일으키고 있는 망집과 함께
다양한 혼동을 일으키고 대할 부분들이 많이 있다.
일반적으로 일으키는 이런 망집의 사정은 이미 기존에 많이 살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지금 여기서 다시 반복하기는 곤란하다.
여기서는 일단 현실에서 한 주체가 눈을 떠서 보게 되고
귀로 듣고...하는 가운데 얻는 감각현실이 있을 때
이들 내용이 자신의 외부에 있는 외부 세상이고
자신의 감관이 대하는 외부 대상이고
그리고 이들은 마음과는 별개이고 마음과는 떨어진 외부의 물질이면서
영희나 철수 그리고 자신할 것 없이 모든 주체가 다 함께 대하는 외부의 객관적 실재다.
그리고 현실에서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하는 그 부분이 바로 자신의 본 정체다.
이러한 식으로 망집을 일으키고 대한다.
그런데 이런 망집은 기본적으로 해결한 가운데
현실에서 대하는 그 일체 내용은
일단 자신의 마음에서 얻어낸 마음내용이다.
이 정도는 파악한 가운데 대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다시 그런 상태에서
그런 마음과 그 마음이 얻어낸 현실 내용의
본 정체나 본 바탕이 되는 내용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이런 실재 진여나 현실 내용에는
꿈과는 성격이 다르다고 할 참된진짜의 내용이 있고 그래서 무아 무자성이라고 할 수 없는가.
또 그런 가운데 왜 현실의 상황은
이렇게 각 주체가 망집을 일으켜서 생사고통을 받아나가는 상태에 처하게 되었는가.
그런 상황에서 각 주체는 어떻게 해야 이 문제를 해결하는가.
이런 것을 놓고 살펴나가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처음부터 결론적으로 간단하게 내용을 제시해 가는
이 논서 내용을 파악하기도 힘들고
파악하는 과정에서도 자신이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망집을 바탕으로
이들 내용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가운데
오히려 혼동과 망집의 문제가 증폭될 수도 있다.
참고 ● 일반적이고 기본적인 망상분별
http://buddhism007.tistory.com/4615
● 1심
그런데 여하튼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마음을 논의하고
그것도 눈으로 무언가를 볼 때 관여하는 마음
귀로 소리를 들을 때 관여하는 마음
코로 향기를 맡을 때 관여하는 마음
입으로 맛을 볼 때 관여하는 마음
몸으로 촉감을 얻을 때 관여하는 마음
그리고 이들 내용과 관련해 각 부분을 묶고 나누어가면서
명료하게 분별을 일으킬 때 관여하는 마음
이렇게 현실에서 각 주체가 비교적
생생하고 명료하게 내용을 얻는 과정에서
표면에서 파악하게끔 되는 마음도
그 마음 자체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기에
파악하기가 쉽지는 않다.
그런데 다시 그런 감각이나 분별을 행하거나 행하지 않거나,
심지어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여전히 일정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1 생 동안 계속해서 망집을 바탕으로 붙들고 임하여 활동하게 하는데 관여된 마음 [ 제 7 말나식]
그리고 생사 전후를 통해 이어지고
그런 가운데 매 생마다 이런 형태로 각 마음을 분화 생성시킨다고 보게 되는 근본적인 마음-- [아리야식]
이렇게 여러 마음을 놓고 생각할 때
왜 이것을 1 심이라고 표현하는가도 문제되지만,
현실에서 영희는 영희대로 보고 생각하고
철수는 철수대로 보고 생각하는 상황인데
또 왜 이 일체를 다 1 심에 넣는가도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한편,
마음안 내용이 그런 마음에 맺혀 있고 마음안에 머물고
마음을 떠나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정작 그렇게 마음안에 들어온 마음내용
예를 들어 눈으로 보는 노란 색 또는 파란 책상 바위로 여기고 대하는 부분 들은
정작 마음이 행하는 기능을 하는 것으로는 파악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왜 그런 내용 일체를 다 함께 마음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이는 예를 들어
거울과 거울면에 비춰진 바위나 의자와 사정이 같다.
거울면에 비춰진 바위가 거울면에 있다고 보지만,
그러나 그 바위부분을 거울이라고 하고
그것이 무엇을 비춰주는 거울 기능을 한다고 할 것인가.
그러면 사정이 그렇기에 그것은 거울은 아니라고 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사정이 그렇다해도 거울이라고 할 것이낙.
이런 혼동을 일으키는 문제에 비유할 수 있다.
그래서 1심이란 표현이 일으키는 이런 혼동도 문제지만,
다시 이 심을 놓고
심진여문 심생멸문 이런 표현을 사용하게 되면
현실 각 내용의 본 바탕이 되는 진여를 찾을 때
그 진여가 알고보니 지금 문제삼고 파악하는 이런 마음이었다.
이런 내용을 가리킨다고 오해하기 쉽다.
만일 그렇다면 경전 내용을 수정해야 한다.
찾는 진여 실재는 무아 무자성 공한 것이 아니고
참된 1 심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바꿔 제시해야 한다.
또는 세상의 모든 것은 자신의 마음 하나 1 심인데
그것이 바로 온 세상의 모든 본 바탕이 되는 실재 진여이기도 한 것이다.
이렇게 제시해야 한다.
그래서 온 세상의 일체가 알고보면 1 심인 것이고
자신의 마음 1 심이 알고보면 온 세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또 그 안에 부처님도 계신 것이고
그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었기에 나도 마찬가지다.
반대로 자신이 지옥에 들어가면 그 1 심에 있는 모두가 다 지옥에 처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온갖 망집을 새로 일으키게 되기 쉽다.
그런데 과연 지금 『대승기신론』이
그런 내용을 제시하고 있는것인가부터
기본적으로 잘 파악하면서 내용을 살펴야 한다.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Serge Gainsbourg - Raccrochez C'est Une Horreur.lrc
● 심진여 = 심즉진여
그런데 이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반야심경의 구절이 일으키는 혼동과
성격이 비슷하다.
여기서 사용된 즉이라는 표현이나 색은 공하다라고 말할 때
색이나 공이 처음부터 같은 것을 가리키는 표현처럼 오해하는 문제와 관련된다.
그런데 혼동을 줄이려면 색은 색이고 공은 공인데
그러나 그 관계를 살피면 색은 공을 떠나지 않고 공한 바탕에 놓여 있다
그 관계를 색즉 시공이라고 표현한다. 이렇게 순서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낫다.
그래서 색즉시공 공즉시색 색불이공 공불이색...공중 무색 무수상행식
이렇게 종합적으로 표현하게 된다는 사정을 이해해야 한다.
지금 여기서는 위 표현에서 색보다는 심이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어서
심과 진여의 관계에 대해서 색즉시공이란 표현에서 일으킨 혼동을
심진여 이런 표현과 관련되어 일으키게 될 여지가 있다.
이는 심을 진여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또는 진여를 찾아보니 그것이 알고보니 심이다 이렇게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렇게 오해할 여지가 많다.
그리고 지금 대승기신론은
현실에서 문제되고 논의하게 되는 내용을
그 발생 순서형태로 즉
본 바탕이 되는 진여 - 심 - 색[감각현실,색성향미촉], - 상[분별] - 망상분별
이런 순서로 [현시정의]해 살펴나간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현실에서 이들의 정체 파악이 문제되어서
이들 각 내용의 올바른 정체를 파악하고 논의할 때는
사실은 이 역순으로 이 각각의 정체를 파악하며 논의해가게 된다.
그것은 문제되는 진여실재는 어떤 주체도 본래 그것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닌데도
그 내용을 직접 얻지 못하고
현실에서 어떤 이가 어떤 내용을 얻고 또 분별하고
언어로 표현해가며 문제삼을 때는
현실에서 얻는 감각현실과 분별을 재료로 한 가운데
그것을 가지고 처음 이런 내용을 논의하기 시작하는 사정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진여에 대해서 설명할 때 『대승기신론』에서 여실공 여실불공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처음 진여- 색 이렇게 구분해 표현할 경우에서의 진여는
대승기신론에서 여실공이라고 표현한 부분이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대승기신론에서 여실불공이라고 표현하면서
이를 진여의 한 부분이라고 제시하는 부분은
처음에 색과 공을 구분해 표현하는 가운데
이 관계를 살펴서 색즉시공이라고 다시 종합적으로 표현하는 그런 측면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우선 마음을 계속해 언급하지만,
마음을 보거나 만지거나 하면서 얻어내기가 곤란하다.
그런데 이런 각 내용의 모든 본 바탕이 된다고 할 진여 실재는 더더욱 사정이 그렇다.
그리고 그런 진여 실재나 현실에서 얻는 각 내용의 본 정체를 확인해 얻고자 할 때
그에 대한 올바른 정체를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하고
또 본각 시각 구경각 등등의 표현으로 이런 상태를 나타내고자 할 때도
목표로 하는 진여 실재의 내용을 얻어낼 수가 없다.
이는 경전에서 제시되듯 3세 제불도 끝내 얻을 수 없다. [불가득공]
그 사정은 비록 마음에 있는 모든 내용을 비운다해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마음에 들어온 엉터리 내용을 비워서
그런 엉터리 내용이 더 이상 들어차있지 않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래 목표로 한 것을 얻어내기에 그런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런 부분을 잘 정리할 필요가 있다.
만일 진여 실재라는 것은 수행을 통해 어떤 상태가 되면 얻어낼 수 있는 내용이고
그래서 일반 범부는 못 얻지만,
부처님만은 얻게 되는 어떤 내용이라고 본다면,
부처님이 경전에서 그렇게 제시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런데 이제 진여 실재가 그렇게 본래 그 내용을 얻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해서
반대방향으로 어떤 것을 얻지 못하고 비운 상태가 되면
지금 문제삼은 그런 내용을 얻은 상태라고 여기면 또 곤란하다.
각이라는 표현을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의미로 이해하면 그렇게 오해하기도 쉽다.
예를 들어 어떤 어리석은 이가 엉뚱한 생각을 하는 경우에도
여전히 문제삼는 진여 실재 자체를 얻지 못하는 측면은 부처님과 하등 다르지 않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2 라는 숫자를 생각할 때나
2 더하기 2 는 4 라고 생각하고 그 생각에 집중할 때도
여전히 문제로 삼는 그 실재 내용은 다 함께 얻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얻지 못하는 그 측면은 모든 범부를 포함해서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문제삼는 내용을 얻지 못하는 측면을
대단히 수준이 높은 어떤 상태라고 이해할 도리는 없다.
그리고 이제 그런 상태에서 갑자기 멍한 상태로 있게 되고
그래서 일체 실답지 않는 생각마저 다 없어진 상태가 되거나
의식이 혼절된 상태가 되어서 그 전에 가졌던 생각을 다 못하게 되었다고 해서
이제 부처님의 상태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진여 실재를 직접 얻지 못하는 그 측면은
그 때나 그 이후나 전혀 다르지 않다.
그렇다고 어리석었던 이가 그 생각마저 이제 못하게 된 상태라거나,
아예 처음부터 그런 생각 일체가 없다고 할 바위나 모래 물 이런 무정물을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도 아니다.
비록 이런 측면이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엉터리 내용을 비우는 긍정적인 측면을 분명 갖더라도
일단 이와 관련한 혼동된 이해는 잘 정리해야 한다.
그리고 색즉시공 이런 표현에서
색은 한 주체가 감각을 통해 얻는 색성향미촉과 같은 감각현실을 함께 묶어 가리키는 표현이라고 한다면,
지금 자주 등장하는 심이라는 표현은 색 부분에 가까운 내용이다.
왜냐하면 심(마음)이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그런 무언가를 심이라고 언어로 시설해 표현하는 사정은
사실은 그렇게 현실에서 얻는 색과 같은 내용들을 근거로 시설해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비유하면 현실에서 얻는 그런 색과 같은 내용을 담는
일종의 그릇이나 거울과 같은 것에 비유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써
현실에서 한 주체가 얻는 색과 같은 내용들에 관계가 깊은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한 주체가 그런 내용을 얻거나 얻지 못하는 것과 관계없이
그 본 바탕이 되는 내용으로서 그대로 있다고 할 진여 실재에 가까운 것은 아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각 표현이 원래 가리키게 되는 내용간의 관계는
본 바탕이 되는 진여 실재 --- (심) --- 심안에 얻어진 감각현실 ~~ 관념분별
이런 형태로 파악해야 한다.
그런데 심진여라는 표현을 잘못 이해하면
문제삼고 찾는 본 바탕의 진여 실재 위치에 '심'이라는 글자를 써놓고
이 두 글자 표현이 가리키는 내용이 완전히 동일한 것을 가리킨다고 오해하기 쉽다.
그렇지 않다.
여기에서 잠깐 진여와 심 사이에서 일으키는 혼동을 정리해보자.
현실에서 이 두 내용다 한 주체가 그것을 직접 보지 못하고 만지지 못하여서
얻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 둘이 다 같은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혼동하기 쉽다.
그렇지만 그 둘이 같은 내용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현실에서 눈이나 귀 등으로 얻는 내용은 색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 이 색을 얻어낸 것을 심이라고 한다.
즉 심 안에 들어온 것이 색인 것이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심 밖에 있다고 할 실재가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심안에 들어온 색은 한 주체가 확인하지만,
정작 그것을 얻게 한 심은 보지 못하고 만지지 못하는 상태다.
또 한편 그런 심 밖에 있다고 할 진여 실재도 역시 보지 못하고 만지지 못한다. 얻지 못한다.
사정이 이렇기에 현실에서 한 주체는 그런 점에서 심이나 진여나 같은 것이 아닌가 혼동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나 원래 그 표현이 가리키는 바는 그렇지 않다.
정리하면 심을 기준으로 놓고 심이 얻어낸 내용을 현실에서 색이라고 한다면
그 심이 그런 내용을 얻어내거나 얻지 못하거나 그와 관계없이 심 밖에 그대로 있다고 할
본 바탕을 진여 실재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이들 관계를 살피면 그 심이나 심안에 들어온 색을 놓고
그 상호 관계를 살피면 결국 심즉 진여 이렇게 보게 되는 것이다.
심진여라는 표현만 놓고 보면
일단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심의 진여는 무엇인가. - 이는 눈으로 보는 색의 진여는 무엇인가. 이런 측면과 같다.
심 자체가 진여다. - 이는 눈으로 본 색이 곧 찾는 진여 실재다. - 이런 측면과 같다.
심 즉 진여다. - 이는 눈으로 본 색이 진여는 아니지만, 그러나 진여를 떠나 따로 있는 것이다. 그래서 색 즉 진여라고 본다. 이런 측면이다.
그런데 심은 진여는 아니라면서 왜 심이 진여라고 다시 제시하게 되는가는
색은 진여 실재는 아니지만, 색즉 공이라고 다시 제시하는 사정과 마찬가지다.
우선 심안에 얻어진 감각현실인 색과 본 바탕이 되는 진여 실재의 관계를 살피면
문제삼는 색은 본 바탕의 내용[진여] 자체는 아니고
본 바탕도 그런 색은 아니고
본 바탕에서 그런 색을 얻을 수는 없다. [ 공중 무색, 무상행식]
그러나 문제삼는 색은 그런 본 바탕을 떠나서 별개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그렇기에 색즉시공이라고 표현하게 된다.
그러나 색즉 시공이라는 표현이 색이 진여 자체라는 표현은 아니다.
또 그렇다면 공중 무색이라고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 사정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지금 살피는 심을 놓고 다시 살펴보자.
우선 심은 색즉시공이란 표현에서 색이라고 쓰여진 부분에 가깝다.
그리고 진여는 공이라고 쓰여진 부분에 해당한다.
심은 색을 얻어내는 것이고
진여는 그런 심 밖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위 관계를 위와 같이 살피면
심은 비록 진여 그 자체는 아니지만,
진여를 떠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심 안에 맺혀 얻어지는 색이나,
그런 색을 얻게 한 심 그 일체는 모두
진여 실재와의 관계에서
색즉시공과 같은 관계처럼 다시 나타낼 수 있다는 의미다. => 심즉 진여
그래서 이런 측면에서 대하면
대승기신론에서 심진여라는 표현으로 나타내고자 한 바와 가깝다고 보게 된다.
그런데 그렇게 보는 것은 이 관계를 올바로 파악한 입장에서의 일이다.
그런데 한편, 그렇지 못하고 망집을 일으켜서 이를 대하면
그 재료 자체는 지금 문제삼는 심이나 심 안에 맺혀 얻는 색으로서 같은데도
그 상태에서 망집을 일으켜서
그런 내용이 거기에 있고
거기에서 생멸이 있다고 여기면서 대하는 망집현상을 일으키고
그에 바탕해 대하는 일반 범부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는 심생멸의 표현이 나타내고자 한 바와 가깝다고 보게 된다.
그런데 이들 각 내용이 각 측면에 따라 따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심과 심안에 얻어지는 색을 놓고
거기에서 생멸을 얻을 수 없음을 잘 관하는 한편,
원래 진여 실재라는 표현으로 가리키는 내용을 놓고 이들의 관계를 살피면
이들 일체 즉 진여 실재라고 보아야 하는 것임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것을 비유로 쉽게 이해해보기로 하자.
사과를 하나 놓고
그것을 눈으로 그 모습을 보면서
손으로 두드리고 소리를 듣고
또 손으로 만지면서 촉감을 얻는다고 해보자.
눈으로 볼 때는 사과의 둥그란 모습도 보고 빨간 색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촉감으로 대하면 그저 미끈한 사과촉감을 얻는다.
눈으로 본 빨간색은 사과 촉감이 아니다.
사과촉감도 빨간 색이 아니다.
그런데 이 두 내용은 서로 떨어져 얻은 별개의 내용도 아니다.
그래서 결국 빨간 그 사과색은 즉 자신이 만진 사과촉감이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 뿐이다.
여기서 사과 각 부분에서 보는 각 색깔의 다양한 차별상이 얻어지지만,
그런데 그런 내용 일체를 얻지 못하는 촉감을 기준으로 붙잡고
그 색깔 각 부분의 차별상을 대하면
그런 구분이나 차별 일체는 다 마찬가지로 다 함께 얻을 수 없다.
이는 물론 현실에서 한 주체가 각 감관마다 달리 얻는 감각현실 사이의 관계다.
그리고 본 바탕이 되는 진여실재의 관계를 비유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내용이다.
색 - 심 - 진여 실재라는 표현이 원래 가리키는 내용을
그림으로 이해해보자.
[img2-30] 실재 진여와 심
08pfl--image/실재진여_심.jpg
현실에서 눈을 떠 나무를 보았다고 하자. 이런 내용은 보거나 보지 못하거나 한다.
그런데 그런 나무를 포함한 현실에서 얻는 내용 일체는 심안의 내용이다.
=[ 이를 통상 외부세상 외부대상 외부물질로 이해하지만 그렇지 않다. ]
그런데 정작 그런 내용을 얻어낸 심은 보지 못하고 만지지 못한다.
그런 상태에서 자신이 이런 현실 내용을 얻거나 얻지 못하거나
그대로 있다고 할 본 바탕이 되는 진여 실재는 무엇인가?를 찾아나선다.
=> 그런 진여 실재는 어떤 주체가 끝내 얻지 못하고 같다 다르다 이다 아니다 등의 2 분법상의 분별을 떠나고 공하다.
=> 그런데 그런 진여실재와 현실에서 얻는 현실 내용 및 심의 관계를 살피면
현실 내용 및 심 역시 이런 진여 실재를 떠나 있는 것이 아니다.
=> 심안의 내용 및 심도 곧 진여 실재다. [ 심즉 진여 ]
*
현실에서 얻는 수많은 차별적 내용을 대할 때
그런 내용을 일체 얻지 못하는 진여 실재를 기준으로 놓고 이를 대하면
그런 일체 차별은 그것이 곧 진여 실재 자체는 아니지만,
그러나 이 일체는 다 진여 실재를 떠난 것도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실에서 얻고 문제삼는 색과
그 색을 얻어내는 심도
진여를 떠나지 않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이들이 진여 그 자체라는 의미는 비록 아니지만,
이들은 즉 진여라고 관하게 된다는 의미다.
일단 이렇게 각 표현이 원래 가리키고자 한 부분을
혼동을 일으키지 않은 가운데
이들 표현을 가지고 『대승기신론』에서 종합해서
이들 관계를 나타내는 내용을 서로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
추가로 망집을 일으킨 상태에서는 이렇게 오해하기 쉽다.
자신이 나무와 집과 영희 철수 그리고 자신의 몸을 보게 될 때
이들 내용이 실재 전체인가. 실재 자체인가. 또는 실재의 일부분이 이런 내용인가.
이런 식으로 실재를 찾아나서기 쉽다.
그런데 진여 실재의 바탕에서는 그런 구분이나 차별 자체를 얻을 수 없다.
그런 구분이나 차별은 단지 심안의 내용을 기준으로 할 경우다.
진여 실재는 크기나 시간적 공간적 전후 생멸 자체를 얻을 수 없다.
자신이 어떤 모습을 얻거나 못 얻거나 이 가운데 어느 측면을 곧 실재 자체나 전부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그런 내용이 실재를 떠나 따로 있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거울(유리)와 거울면- 그리고 거울에 비친 나무 모습을 놓고 이 관계를 비유적으로 이해하면 쉽다.
거울면에 비친 나무가 거울 자체는 아니다.
그런데 그런 모습이 거울 면이나 거울을 떠나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또는 침실 - 침실에서 자면서 꾼 꿈 - 그 꿈안의 내용들을 놓고 비유적으로 이해해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꿈에서 무인도와 바다와 배를 보았다고 해서
침실에서 무인도에 해당한 부분 바다에 해당한 부분이 어디인가를 찾아나서면 곤란하다.
그리고 꿈을 곧 침실 자체라고 이해해도 곤란하다.
그렇지만, 그 꿈을 침실을 떠나서 다른 곳에서 꾼 것은 아니다.
또는 눈으로 본 각 모습과 그 상황에서 귀로 들은 소리나 손으로 만진 촉감의 관계를 놓고 비유해도 마찬가지다.
눈으로 각 모습을 보면서 귀로 소리를 듣는다고 해서
자신이 눈으로 본 노란색이 귀로 들은 소리들 가운데에서 어떤 소리에 해당한가
이렇게 찾아 나서면 곤란하다.
눈으로 본 각 색깔의 구분은 눈을 통해 얻는 내용 안의 일이다.
소리 영역에서는 그런 내용 자체를 얻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둘은 서로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들 내용은 앞의 내용을 비유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비유이고,
이것이 곧 진여 실재 - (심) - 심안의 내용이라는 의미는 물론 아니다.
● '일체가 마음내용이고 1 심이다'와 자신과 영희 철수의 마음
현실에서 어떤 나무나 바위 영희 철수 그리고 자신의 몸을 본다면
이들 일체는 자신의 마음에 맺힌 내용이라고 제시하게 된다.
이는 일반적 입장에서 이렇게 눈을 떠 대하는 내용이
자신의 외부에 있는 외부 세계이고
자신의 감관이 대하는 외부 대상이고
마음과는 별개의 것으로 마음 밖의 마음과는 다른 물질이라고 여기고
또 이 내용이 곧 자신을 비롯한 영희나 철수 그 모두가 다 함께 대하는 외부의 객관적 실재라고 여기는 입장과는
다르다.
그런데 현실 내용 일체가 자신의 마음안 내용이고
그래서 이들 일체가 하나의 마음이라고 제시하는 것은
다음 내용, 즉,
세상에는 자신 마음 하나 밖에는 없고
마음 밖에는 아무 것도 전혀 없다고 이해하는 것과는 또 다르다.
그런데 앞 내용이 뒷 내용까지 의미한다고 오해하기 쉽다.
유식무경이라고 제시할 때도 이 표현이 나타내는 의미에 대해
앞과 같이 두 방식으로 서로 달리 이해하기 쉽다.
현실에서 얻는 내용은 마음 내용이고
그 안에는 그 내용을 얻게 한 외부 대상이 없다라고 제시할 때
이 내용이 마음 밖에는 전혀 아무 것도 없다 이런 내용까지 제시한다고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이 두 입장은 서로 다른 내용이고 그래서 이 두 입장을 서로 혼동하면 안 된다.
그리고 마음 밖의 실재 진여는 내용을 얻을 수 없어 공하고
있다 없다를 떠나는 상태라고 제시하는 것이고
아무 것도 전혀 없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얻을 수 없음'과 '아무 것도 전혀 없음'은 같은 의미가 아니다.
비유하면 눈으로는 귀로 듣는 소리를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사정이 그렇다고 해서 귀로 듣는 영역에서 아무 것도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이 두 내용을 서로 혼동하면 안 된다.
그래서 자신이 얻는 내용 일체가 마음안 내용이고
그리고 마음 밖의 실재 진여는 그 내용을 '얻을 수 없고 공함'을 제시하는 것이
마음 밖에 아무 것도 전혀 없음을 제시한 내용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만일 마음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제시하려면 이 내용을 놓고 별개로 다시 입증해야 한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가 문제다.
[img2-30] 실재 진여와 심
08pfl--image/실재진여_심.jpg
위 그림에는 마음안에 나무 하나만 그려져 있지만,
이 나무가 평소 자신의 몸이라고 여기는 대하는 부분이거나
영희 철수라고 여기고 대하는 부분에 해당한다해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그래서 자신이 대하는 세상 일체의 모습은 마음안 내용이라고 제시한다.
그런데 여기서 일단 다음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현실 일체가 하나의 마음안에 들어온 내용이라고 제시하지만,
그러나 그 내용을 놓고 보면
거기에는 자신의 몸도 보이지만, 영희나 철수의 몸도 보인다.
이 경우 영희나 철수라고 여기고 대하는 부분이 자신의 마음안 내용이라고 제시하는 내용을 놓고
영희나 철수가 자신의 마음 안에 들어와 활동하는 것이라고 여기면 곤란하다.
또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한 부분에 대해서도 그 부분이 곧 자신의 본 정체라고 여기는 것도 곤란하다.
이 모든 내용 일체는 알고보면 모두 자신의 마음안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다고 해서
세상에는 자신 마음 하나 밖에 없고
그 마음 밖에는 다른 것은 전혀 없다고 이해하면 곤란하다.
자신의 마음으로 얻는 내용에서 자신이라고 여기는 몸 부분을 놓고
그것이 자신의 본 정체라고 이해하는 것이 곤란하고,
또 마찬가지로 그 부분에 자신의 마음이 위치한다고 이해하면 곤란하듯,
영희라고 보는 부분이 곧 영희의 본 정체라고 여기는 것이 곤란하고
영희의 마음이 그 부분에 위치한다고 여기면 곤란하다.
그런데 한편 자신이라고 여기는 몸 부분에 대응하여 자신의 마음을 생각한다면
영희나 철수라고 여기는 부분에 대응하여 영희나 철수의 마음을 생각하는 한편
바위나 나무를 볼 때 마음 밖에는 본 바탕이 되는 실재가 어떤 내용인가를 생각하고
바위나 나무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몸이나 영희 철수의 몸을 보게 될 때
그 각각에 대응하여 마음 밖에는 어떤 내용이 있어서 그런가를 생각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자신의 마음은
사실은 자신이 현실에서 얻는 이들 모든 내용 일체를 얻어내는 그 무엇이라고 이해할 때
자신의 마음은 그렇게 시설하지만,
그러나 그 안에 영희나 철수의 마음이 들어와 있다거나 포개져 겹쳐 있는 것이라고 이해하지 않는다면
영희나 철수의 마음은 어디에 있다고 해야 하는가를 또 생각해야 한다.
세상에 50 억 이상의 인구가 살고 있다고 하고
부처님이나 아라한 보살이 있다고 할 때도 마찬가지다.
세상 일체가 다 자신의 마음안 내용이라는 내용을 잘못 오해하면
자칫 이 모든 이가 다 자신의 마음안에 있다고 하는 내용으로 오해하기 쉽다.
또 마음 밖에는 아무 것도 전혀 없고 그래서 자신이 영희나 철수라고 대한 것은
자신의 마음 밖에는 전혀 없는 허구적인 존재일 뿐
자신의 마음 밖에는 전혀 아무 것도 없는 상태다. 이렇게 이해하기도 쉽다.
그래서 과연 그런가가 문제다.
그러나 여하튼 엄격하게 보면 자신의 경우에서는
자신이 직접 현실 내용 일체를 얻어내는 이런 마음을 직접 보거나 만지지 못하고,
또 마찬가지로 영희나 철수의 마음 역시도 마음 밖이던 안이던 직접 보거나 만지지 못하는 상태다.
단지 이런 영희나 철수를 이야기하는 그 근거는 역시 자신의 마음으로 얻는 현실 내용을 근거로 하는 것 뿐이다.
한편 위 그림은 눈을 통해 얻는 내용을 가지고 제시한 것이다 .
그런데 귀로 통해 얻는 내용은 또 위에 그린 내용과는 또 다르다.
마찬가지로 제 6 식이나 제 7, 8 식이 얻는 내용도 위와는 다르다.
그런데 그 기본 성격 자체는 마찬가지로 이해해야 한다.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https://www.youtube.com/watch?v=pBfodVMAWNc
● 마음을 비움과 진여 실재의 문제
[img2-303] 상이 맺히지 않은 심
08pfl--image/실재와심.jpg
위 그림은 그런 마음에 앞과 같은 내용이 들어오지 않는 상태를
나타낸 것이다.
설령 마음에 그런 내용이 들어오지 않는다 해도
마음 자체는 앞의 경우와 다르다고 할 것은 아니다.
다른 것은 그 마음에 어떤 내용이 들어오고 안 들어오고의 차이다.
현실에서 눈을 뜨면 무언가 모습이 보이고
눈을 감으면 보이지 않는다.
이 두 상황에서 그 차이는 그런 모습이 있고 없고의 차이일 뿐
그런 내용을 얻어내는 마음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아니다.
한편 현실에서 마음에 어떤 내용이 맺힐 때
이들 내용을 놓고 많은 분별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런 분별 내용 역시도 마음안 내용이라는 사정이 마찬가지다.
그래서 눈을 떠 어떤 내용을 얻는 관계는 다른 감각현실들과 분별에 모두 적용된다.
그리고 이들 모든 경우에서
본 바탕의 내용을 기준으로 놓고 판단하면
마음에 어떤 내용이 있고 없음은 모두 본 바탕의 내용 자체는 아니다.
그런데 여하튼 마음에 맺혀진 내용을
그 자체를 진여 실재라고 이해하면 곤란하다.
그러나 사정이 그렇다고 해서 반대로
앞 두 경우에서 마음에 어떤 내용이 전혀 없고, 완전히 비워진 상태가
또 반대로 본 바탕 진여 실재의 내용이라고 이해하는 것도 곤란하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눈을 떠서
보게 되는 어떤 모습이 곧 진여 실재자체라고 이해하면 우선 곤란하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다고 해서
눈을 감아서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상태를 붙잡고
그 상태가 곧 진여 실재 자체라고 이해하는 것도 곤란하다.
그런데 사정은 그렇지만,
심 즉 진여 이런 입장에서 관한다면,
이런 마음과
그 마음안에서 어떤 내용이 있거나 없거나 하는 상태는
본 바탕인 진여 실재를 떠나서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진여 실재는 마당에 있고
자신이 보는 내용은 그 마당 밖에 멀리 떨어진 숲과 같은 곳에 있는
어떤 내용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그리고 이 모든 내용이 본 바탕이 진여를 바탕으로 나타나는 일이라는 뜻이다.
문제는 이런 감각현실과 분별을 일으킨 상태에서
이들 내용을 재료로 다시 망상분별을 일으키는 현상이 문제된다.
그리고 그런 망집의 바탕에서 업을 행하고
그런 바탕에서 생사고통을 무량하게 매생마다 겪어 나가는 것이 생사현실 문제다.
그래서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고
또 그 근본원인이 되는 망집을 제거하고자 할 때
이런 망집을 일으키게 하는 재료가 되는
마음안 감각현실과 분별 일체를 다 제거하고 비우고
그런 망집을 일으키는 재료 자체를 얻어내게 되는 바탕을 제거한 상태를
기본적인 이상적인 상태로 설정하게 된다. [=> 아라한의 회신멸지]
그 사정은 이런 바탕에서 실답지 않은 감각현실과 분별내용을 얻고
그 바탕에서 망집을 일으켜 업을 행하고 생사고통에 묶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본적으로는 이런 망집을 일으키는 재료가 되는
감각현실과 분별 일체를 제거하는 상태를
회신멸지의 열반의 상태라고 제시하지만,
그러나 또 한편 이들 감각현실과 분별은
비록 망집현상을 일으키는 재료는 되지만,
그 자체가 망집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이런 망집을 일으키는 감각현실과 분별 내용을 놓고
진여 실재와의 관계를 깊게 관하면
이들 생사현실의 재료 자체가
역시 실재 진여를 떠나 있는 것이 아닐 뿐더러,
그리고 이들 재료 자체는 생멸이나 생사고통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 생사 즉 열반 ]
즉 본 바탕이 되는 진여 실재에서는 이런 차별을 얻을 수도 없고
그런 내용을 요구한 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 앞에서 살핀 색즉시공, 심즉 진여 이런 표현으로 살핀 내용이기도 하다.
다만 앞과 같이 생사현실 안에서 망집을 일으켜 겪는 생사고통이 문제이므로
이 생사현실 안에서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고
또 벗어나게 하는 수행이 요구되는 것 뿐이다.
그리고 그런 생사묶임에 매인 중생의 상태나
생사의 묶임에서 그 자신이 벗어난 상태로서 아라한이나 연각
그리고 중생제도를 위해 수행하는 보살 수행자나
중셍제도나 성불한 부처님과 성불은
모두 이 생사현실 안에서의 구분이다.
그런 가운데 아라한 연각 부처님은
모두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난 해탈신을 이뤄뤘다는 점에서는 다시 같지만,
아라한 연각이 자신만의 생사 해탈에 그치는데 반해
보살 수행자는 자신외에 다른 중생까지 제도하기 위해
다시 생사현실에 들어가 수행을 하는 점에서 구분되고
그런 가운데 부처님은 법신을 이뤘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차별된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본다면
생사현실에서 중생을 제도하는 입장에서는
생사현실 안의 내용을 자신이 모두 비우고 제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오히려 그 생사현실 자체는
비록 망집을 일으키는 재료가 되지만,
그 본 정체를 여실히 관하면
그 자체가 곧 본 바탕인 진여 실재를 떠나 있는 것이 아닌 가운데
그 생사현실이 즉 진여 실재이고
생사고통을 벗어난 니르바나의 상태라고 관하는 가운데 [ 생사 즉 열반 ]
그 생사현실 안에서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복덕자량과 지혜자량을 원만히 구족하기 위한 수행을 해나가야 한다고 보게 된다.
그리고 그 구극적인 상태에 이르를 때 법신을 증득하여
이 부분에서 부처님과 보살수행자 및 아라한 연각이 다시 구분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과 다른 아라한 연각을 구분하게 되는 법신의 특성을
어느 부분에서 찾아야 하는가를 주의해야 한다.
부처님이 다른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가르침을 베풀 때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기본 바탕을 성취할 때
부처님이 제도하고자 하는 다른 중생들이 눈을 떠서 무언가를 보고
다시 그런 바탕에서 각 부분에 대해 분별을 일으키고
다시 그런 분별내용이 그 감각현실이나 심지어 본 바탕에도
그런 내용이 그대로 있다고 여기며 집착을 갖고 업을 행하는 망집현상을 일으킨다고 할 때
부처님은 눈을 떠서 그런 모습도 보지 못하고
또 그에 대해 어떤 분별도 일체 하지 않거나 못하는 상태에서
중생을 제도하고자 임하는 것인가.
이런 것을 놓고 살펴보아야 한다.
아니면 그와는 반대로
부처님은 단순히 중생이 갖는 육안 뿐만 아니라,
거기에 더하여 육안 천안 혜안 법안 불안 이런 5 안을 갖춘 상태이고
비유를 한다면 중생과 마찬가지로 생사현실에 임해 법신을 증득해가는 상태이기에
눈병이 들어 허공에 없는 꽃모습을 여전히 보게 되는 상태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런 꽃 모습은 눈병이 걸려 보게 되는 내용이라는 것을 다시 아는 상태가 되어
그런 허공꽃에 집착하고 업을 행하는 상태에서 벗어난 상태와 같다고 보아야 할 것인가.
이런 문제를 놓고 잘 살펴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생사현실에 임하면 그처럼 실답지 않고 망상분별을 일으키는 재료가 되는
허공꽃의 모습을 보게 되고 또 그에 대해 엉뚱한 분별을 행하며
집착하게끔 되기 마련이다.
그런 사정 때문에 처음부터 아예 그런 것을 얻어낼 근본 바탕을 제거하여
회신멸지의 상태에 들어 홀로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는 아라한의 상태를 놓고
이와 잘 구분해보아야 한다.
그리고 생사현실에 임해서도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무량겁에 걸쳐 수행을 해나간다고 할 때
도대체 중생제도를 위해서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요구되고
어떤 부분이 성취가 어렵기에 그런 수행이 장구하게 요구되고
또 그런 가운데 어떤 부분들이 성취되었기에
법신을 증득하고 그런 보살 수행자와 다시 구분되는 부처님이 되었다고 하게 되는가를
놓고 잘 살펴야 한다.
생사현실에 임해 수행하는 가운데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되는 상황에 처하더라도
생사현실에 본래 그런 생사나 생멸을 얻을 수 없다는 생사 즉 열반
심 즉 진여 색즉 시공과 같은 이론적 내용을
그 이론과 원칙대로 생사현실안에서 실천 성취하여
그처럼 극심한 고통을 겪는 상태에서도 그에 대해
이 부분은 자신이고 저 부분은 영희고 철수고 이것은 내 신체고 목숨이다 등등으로
상을 일으켜 취하거나 머물지 않고
그런 가운데 분노를 일으키지 않고
평안히 임하여 안인을 성취하여 무생법인을 증득해서
더 이상 수행에서 물러나지 않는 불퇴전위에 이르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시 그 상태에서 망집을 일으켜 생사고통을 겪는 무량한 중생이
망집을 제거하고 수행에 진입해서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게끔 이끌기 위해
수행자가 갖추어야 하는 무량한 복덕자량과 무량한 방편지혜 및 보리자량을 원만히 구족해야 한다고 할 때
그 구체적 내용들이 도대체 무엇들인가하는 것을 살피면서
이 측면에서 어떤 점에서 부처님과 단순한 보살 수행자가
구분되는가를 놓고 잘 살펴보아야 한다.
단순하게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오지 못하게 하는 사정을 번뇌장 소지장이라고 하지만,
수행자가 다른 중생을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게 하려면
가장 기본적으로 그 수행자 자신부터
일반 중생이 일으키는 '망집'을 제거해 임하는 것이 가장 기본이 되지만,
그러나 그 상태를 바탕으로 다시 어떤 내용들을 구족하고
그 수행자가 전반적으로 어떤 형태로 변화되어야
이후 중생을 그런 상태에서 벗어나게 이끌 수 있는가를 놓고 잘 살펴야 한다.
그리고 앞에서 살핀 내용들은 모두 눈과 관계된 마음 및 그 마음에서 보게 되는 모습을 놓고
살핀 것이기는 하지만,
이들 내용은 근본 정신이라고 할 아뢰야식과 그 안의 내용과의 관계에서도
그 사정이 마찬가지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 본각과 시각 - 커피 맛
현실에서 무엇에 대해 알게 되었다는 것은
그 이전까지 모르던 내용을 새로 얻게 되었다는 의미로 사용한다.
2 곱하기 2 의 답을 그전까지 몰랐다.
그런데 학교를 다니면서 2 곱하기 2 는 2 를 두번 더한다는 의미이고
그것은 4 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대승기신론』에서 제시하는 각이라는 표현은
이런 일반적인 의미로 대하면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왜 그런가 하는 사정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우선 일상생활에서 일반적으로 맛보기 힘든 특이한 보리차가 있다고 하자.
물맛과 다르다.
그런데 이 보리차를 맛본 이가 있고 맛보지 않은 이가 있다.
그래서 맛본이에게 그 보리차에 대해 알려달라고 해보자.
그 맛을 언어로 설명해서 보리차를 맛보지 않은 이가
보리차를 맛본 상태처럼 되게 해달라는 뜻이다.
우선 그것이 가능한가 생각해보자.
지금 문제삼는 내용은 어떤 단어에 대해서 사전을 펼쳐서
그 설명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여하튼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것은 물론 비유다.
지금 무언가를 깨달아야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깨달음을 강조하면서 이와 관련하여
다양한 표현으로 언어시설을 해서 각 내용을 벌려 세우고 있음을 보게 되는데
여기서 깨달아야 할 어떤 내용이 무엇에 대해서 그 무엇이 어떤 상태임을 깨달아야 하기에
열심히 학교 다니면서 배우고 익힌 내용들처럼 무언가를 채우고 얻어야 한다고 제시하기보다는
무언가를 기본적으로 제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제시하게 되는가를
잘 이해해야 한다.
이른바 경전에서 '얻을 바 없음'을 깨닫는 것이 얻는 것이다라고
제시하는 부분이 이와 관련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도대체 수행자들이 기본적으로 무엇에 대해 어떤 내용을 얻고자 하기에
마음의 원 상태에서 무언가를 채우는 것이 아니고
본 바탕의 청정한 마음에 덮여진 티끌과 같은 객진번뇌와 망집을
기본적으로 비워야 한다고 하는가. 이 사정부터 먼저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동시에 그런 상태는
또 처음부터 그런 노력을 할 필요조차 없는
바위나 물 이런 상태와는 무엇이 다르기에
그것을 강조하는가도 함께 이해해야 한다.
더 나아가 단지 어떤 이가 대단히 어리석거나
감각 인식기관에 장애가 발생해서
보지도 못하고 생각도 하지 못하는 상태와는
어떤 차이가 있어서 그런 상태를 일부로 수행을 해서
얻어야 한다고 제시하는가도 이해해야 한다.
원래는 바위나 모래 이런 무정물을 포함해서
축생이나 범부 중생이나 수행자나
그리고 수행을 통해 열반 해탈을 증득한 상태나
다 본 바탕이 공하다는 측면에서는 차별이 없다고 제시한다.
그런데 그렇다고 바위를 놓고 아라한이라고 한다거나,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은 또 아니다.
그런데 본 실재가 공하다는 그런 점에서는 차별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위에서 나열한 각 내용은 그런 측면에서
구분하거나 시설해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본 실재 측면에서는 그런 구분이 있다거나 없다거나
수행을 해야 한다거나 하지 않아야 한다거나 그 일체를
요구한적도 없다.
수행을 해야 비로소 실재가 공해지는 것도 아니고
수행을 안 한다고 해도 차별을 얻을 수 없다.
그런데 현실에서 위와 같은 구분을 하는 것은
무슨 의미 때문인가.
그것은 본 바탕이 위와 같이 차별을 얻을 수 없는데도
중생 가운데 생사현실 안에서 극심한 생사고통을 무량하게
겪어나가는 상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이가
이 현실 내용의 정체를 올바로 관하고
생사현실에서 어떤 자세로 임하면서 수행을 하게 되면
망집을 제거하고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제시한다.
그리고 그렇게 된 상태를 다시 아라한과 연각 보살 부처님 이렇게 구분해 제시한다.
이는 그런 생사묶임에서 벗어나고
해탈을 이룬 측면은 이들 사이에 차별이 없지만,
그러나 부처님은 법신을 증득했다는 점에서 차별이 있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경우 부처님이 증득한 법신은
아라한이 얻는 깨달음과는 어떤 차이가 있기에
이렇게 구분하게 되는가하는 사정을 또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이런 내용이 결국 수행자가 향해나갈 수행 목표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국 아라한과 부처님을 놓고 볼 때
그 주체만 놓고 그 주체가 생사묶임에서 벗어난 것인가하는 측면에서는
차별을 얻을 수 없지만,
다만 다른 중생을 상대해 제도하는 측면에서는
무엇인가 요소가 구비되거나 구비되지 못하는 차별 때문에
중생제도 과정에서 그 서원을 성취할 수 있거나 없거나 하는
차별이 있다고 제시하는 측면이다.
그래서 이런 내용을 죽 나열해 놓고
바위부터 축생 일반 범부 수행을 갓 시작한 수행자
수행을 통해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난 아라한 연각
그리고 중생을 제도하고 성불하기 위해 수행하는 보살 수행자.
그리고 법신을 증득한 부처님간에
어떤 측면에서 차이가 있기에 이런 차별을 벌려 세우는가를
잘 살펴서 이해해야 한다.
본래 그 실재가 공하다. 그러나 이런 내용은 여기에는 적용이 되지 않는다.
앞에 나열된 여러 상태 가운데 바위나 모래를 포함해
여기에서 해당되지 않는 경우는 없다.
그런데 바위와 달리
생명들이 무슨 측면에서 차별이 되기에 이렇게 구분하는가.
그래서 이들 생명이 각기 기본적인 심을 바탕으로
현실에 임한다고 할 때
이들 각 주체의 심에서 기본적으로 무엇이 채워지거나 채워지지 않거나 하는 가운데
도대체 여기에 무슨 차이가 있게 되기에
그런 차별이 나타나는가를 또 주의깊게 살펴야 한다.
그래서 이들 여러 사례를 놓고
어떤 수행자가 어떤 분은 부처님이고
어떤 분은 그저 아라한이고
어떤 분은 그저 범부 중생이고
어떤 분은 그저 범죄자다.
어떤 것은 그저 돼지다.
이렇게 구분해 대할 때 도대체 무엇때문에 그런가를
잘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그것은 본 실재측면에서 무슨 차별을 얻어서 그런 것인가를
함께 살피면서 대해야 한다.
그런데 또 주의할 것은
일체가 공해서
실재 진여의 측면에서는
전혀 다를바가 없고 차별할 바가 없다는 내용이
반대로 완전히 같고 하나다.
이런 뜻을 나타내는 말인가를 놓고 또 주의해야 한다.
그런 가운데
얻을 바가 없고 같고 다름을 분별할 바가 없다.
이 표현이 갖는 의미를 주의해야 한다.
그래서 이런 내용을 기본적으로 잘 이해하고
현실에서 망집을 일으켜 생사고통을 겪는 상태에서
어떤 상태를 향해 어떤 노력을 해나가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인가를 잘 이해하고
수행에 임해야 한다.
● 진여 - 심 - 색 - 분별 - 망상분별의 본 정체의 파악과 수행
앞처럼 진여 - 심 - 감각현실 - 분별 ~ 망상분별
이런 각 내용의 관계와 정체를 살핀 가운데
이제 이런 내용을 바탕으로
어떻게 해야 망상분별과 집착에서 바탕해서 업을 행하고 생사고통을 무량하게
겪어 나가는 현실 상황에서
수행을 통해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날 수 있고
또 다른 중생도 그렇게 벗어나게 할 수 있는가가 문제된다.
그리고 그런 상태는 위에 살핀 각 내용들이
어떤 상태로 되는 것을 의미하는가를
잘 파악해야 한다.
그것이 곧 생사현실에서 수행자가
성취해야 할 수행목표의 상태와 깊은 관련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내용이 길다.
일단 이렇게 기본적인 윤곽만 제시하고 마치기로 한다.
그런데 올려진 노래를 듣다가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노래 제목이 공포라는 노래를 들었는데 왜 공포인가를 생각해보니
노래에서 계속 지옥으로 지옥으로 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노래에서 서당개 3 년 어설픈 지식 이런 메세지도 듣는다.
사실 경전과 논서 내용을 살피다보면
우선 이론적으로 내용을 검토해보게 되는데
그 내용을 잘 살피던 아니던
실질적으로 필요한 것은
자신이 그 이론에 따라 잘 실천 수행해가는가
이 부분에 있다고 보게 된다.
그런 실천 수행이 바탕이 되어 있지 않으면
결국 이론은 이론이고
현실은 3 악도 상황에서 자신이 처해서
결국 강제로 축사에 묶여 몸을 보시해야 하는 상황에 묶이게 마련이라고 본다.
주의해야 할 부분이다.
이론을 심화해서 살피는 논서를 살피다보면
어떤 내용이 옳은가 그른가를 놓고 시시비비에 밤을 새우기 쉬운데
그런 내용도 내용대로 잘 살펴야 하지만,
자신이 수행의 기본 덕목이라고 할
계, 정, 혜 3 학이나
보시, 정계, 안인 정진, 정려, 반야, 방편, 원, 력, 지
이런 각 바라밀다수행부분을 잘 성취해가고 있는가를 놓고
잘 검토하면서 임해야 한다고 보게 된다.
◈Lab value 불기2563/05/16 |
♥ 잡담 ♥백업하는체계마련하느라늙어가는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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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에 조각글 작성시 휴식시점에 붙인 노래가사,사진,풍광,예술작품 자료를 편집상 옮겨 붙입니다.--
○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Giovanni-Battista-Piranesi-the-prisons-plate-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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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venice-with-the-salute-1845
♥세인트헬레나
○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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