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Japan
- 방광반야경
- 금강삼매경론
- 가섭결경
- 종경록
- 대방광불화엄경60권본
- 대방광불화엄경
- 무량의경
- 묘법연화경
- 대지도론
- 유마경
- 백유경
- 반야심경
- 정법화경
- 대승기신론
- 대반열반경
- 마하승기율
- 유가사지론
- 중아함경
- 유마힐소설경
- 잡아함경
-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
- 마명
- 수능엄경
- 대반야바라밀다경
- 원각경
- 아미타불
- 마하반야바라밀경
- 장아함경
- 증일아함경
- Since
- 2551.04.04 00:39
- ™The Realization of The Good & The Right In Wisdom & Nirvāṇa Happiness, 善現智福
- ॐ मणि पद्मे हूँ
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4-09-17_방광반야경-K0002-003 본문
『방광반야경』
K0002
T0221
제3권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안내
○ 해제[있는경우]
● TTS 음성듣기 안내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방광반야경』
♣0002-003♧
제3권
♥아래 부분은 현재 작성 및 정리 중인 미완성 상태의 글입니다♥
○ 2019_1105_113536_nik_ar22.jpg
○ 2019_1105_125959_can_ar11.jpg
○ 2019_1105_170513_can_ar47.jpg
○ 2019_1106_102018_nik_ar10.jpg
○ 2019_1201_160603_can_ar47.jpg
○ 2019_1105_155142_nik_ct32_s12.jpg
○ 2019_1105_123105_nik_CT33.jpg
○ 2019_1105_123441_can_BW25.jpg
○ 2019_1106_121459_can_ar33.jpg
○ 2019_1106_152259_nik_AR35_s12.jpg
○ 2019_1106_171722_can_exc.jpg
○ 2019_1105_123105_nik_bw0_s12.jpg
○ 2019_1104_172851_nik_bw24_s12.jpg
○ 2020_0430_123847_can_ar31.jpg
○ 2019_1106_112852_can_bw7.jpg
○ 2019_1105_130624_can_BW25.jpg
○ 2019_1105_164542_can_AB7.jpg
○ 2019_1106_113537_can_ar27.jpg
○ 2019_1106_141523_nik_CT33.jpg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放光般若經卷第三
K0002
방광반야경 제3권
서진 우전국 무라차 한역
소진홍 번역
12. 공행품(空行品)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구화구사라(漚惒拘舍羅)가 없으면
5음은 행상(行相)이 되며,
만약 5음에 항상함이 있다고 생각하면 행상이 되며,
5음이 무상하다고 생각하면 행상이 되며,
5음이 괴로움이라고 생각하고 5음이 이 아소(我所)라고 말하면 행상이 되며,
5음이 적정하다고 생각해도 행상이 됩니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이 구화구사라 없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37품과 부처님의 18법을 배우는 것도 또한 행상이 됩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스스로 ‘나는 반야바라밀을행한다’고 생각하고 얻는 바가 있기를 바란다면 또한 행상이 됩니다.
만약 보살이 ‘이와 같이 배우는 것이 반야바라밀을 배우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면
이것도 또한 행상이 됩니다.
이와 같이 배우는 자는 마땅히 이 보살이 구화구사라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수보리가 사리불에게 말하였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이와 같이 배운다면 색에 머무는 것이 되며,
색을 분별하여 앉는 것이 되며,
색을 분별하면 색을 구하는 행을 짓습니다.
이미 이와 같이 행하면,
생로병사의 고통을 여의지 못하게 됩니다.
보살은 다시 구화구사라가 없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에 처하여 6정(情)으로 분별하고
다시 18성(性)으로 분별하고
다시 37품과 부처님의 18법에 머물고 각각 분별하고 계교하여 색을 구하므로
또한 다시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 보살은 오히려 성문ㆍ벽지불도 증득할 수 없거늘
하물며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한 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구화구사라가 없다고 마땅히 알아야 합니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물었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구화구사라가 있는지 어떻게 마땅히 알겠습니까?”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색(色)ㆍ통(痛)ㆍ상(想)ㆍ행(行)ㆍ식(識)에서 상행(相行)을 짓지 않고,
또한 5음이 유상(有常)ㆍ무상(無常)하다고 말하지 않고,
5음에서 또한 고락행(苦樂行)을 짓지 않고
또한 아소이다 아소가 아니다라는 행을 짓지 않고,
5음에서 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이라는 행을 짓지 않고
5음에서 또한 적정하다는 행도 짓지 않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사리불이여,
5음을 공하다고 하면 5음이 아닌 것이 되며,
5음이 공을 여읜 것도 아니고 공이 5음을 여읜 것도 아니므로
5음이 바로 공이고 공이 바로 5음입니다.
6바라밀ㆍ37품과 부처님의 18법이 모두 공하며,
가령 공이라 하는 것은 또한 18법을 여의지 않고 18법도 또한 공을 여의지 않습니다.
보살이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이것이 곧 구화구사라입니다.
보살이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곧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룰 것입니다.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또한 반야바라밀을 보지 않고
또한 행함을 보지 않고 행하지 않음도 보지 않습니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물었다.
“무슨 까닭에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반야바라밀을 보지 않는 것입니까?”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반야바라밀의 모양은 본래 실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있는 것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볼 바가 없는 것입니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보살은 모든 법에 있는 바가 없음을 빠짐없이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모든 법에 생함이 없는 삼매라고 이름하니,
모든 보살마하살의 무량하고 무한하고 광대한 작용으로
성문ㆍ벽지불이 알 바가 아닌 것입니다.
보살마하살이 이 삼매를 여의지 않으면
곧 속히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얻을 것입니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물었다.
“단지 이 삼매가 보살로 하여금 속히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루게 하는 것입니까,
다시 다른 삼매가 있습니까?”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또한 다른 삼매가 있어 보살로 하여금 속히 부처를 이루게 합니다.”
사리불이 물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수보리가 말하였다.
“수능엄(首楞嚴)이라고 이름하는 삼매가 있는데,
보살이 이 삼매를 행하면 또한 속히 부처를 이룰 것입니다.
또 보인(寶印)삼매ㆍ사자유보(師子遊步)삼매ㆍ월(月)삼매ㆍ작월당(作月幢)삼매ㆍ제법인(諸法印)삼매ㆍ
조정(照頂)삼매ㆍ진법성(眞法性)삼매ㆍ필조당(必造幢)삼매ㆍ금강(金剛)삼매ㆍ제법소입인(諸法所入印)삼매ㆍ
삼매왕소입(三昧王所入)삼매ㆍ왕인(王印)삼매ㆍ역진(力進)삼매ㆍ보기(寶器)삼매ㆍ필입변재(必入辯才)삼매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삼매를 보살마하살이 빠짐없이 배우면 곧 속히 부처를 이룰 것입니다.
사리불이여,
다시 무앙수의 헤아릴 수 없는 삼매가 있으니,
보살은 마땅히 배워야 하며,
또한 보살로 하여금 속히 부처를 얻게 할 것입니다.”
수보리가 부처님의 위신력을 이어받아 말하였다.
“만약 어떤 보살마하살이 이 삼매를 행한다면 이미 과거의 부처님께 수기를 받은 것이,
지금 현재의 모든 부처님들도 또한 수기를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삼매를 보지 않고 삼매를 생각하지 않고
또한 스스로를 높이면서 ‘나는 이 삼매를 얻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또한 ‘나는 이 삼매에 머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도무지 삼매에 대한 생각[三昧想]이 없습니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물었다.
“이런 모든 삼매에 머물러 과거의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았습니까?”
수보리가 말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사리불이여.
왜냐하면 반야바라밀과 삼매는 보살과 다르지 않으며
보살이 바로 삼매이고
삼매가 바로 보살입니다.
반야바라밀도 또한 이와 동등하며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데 선남자는 모든 법과 삼매가 동등함을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보살은 보지 않음을 삼매로 삼는 까닭에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세존께서 수보리를 찬탄하여 말씀하셨다.
“훌륭하고도 훌륭하구나.
내가 찬탄한 것처럼 그대는 저 모든 공적(空寂)을 행함에 제일이다.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6바라밀과 37품과 부처님의 18법도
이와 같이 배워야 한다.”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이렇게 배워야 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6바라밀과 37품과 부처님의 18법은 마땅히 이와 같이 배워야 한다.
그러나 또한 얻을 것도 보는 것도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떤 것을 얻을 바가 없고 보는 바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나와 중생을 볼 수 없는 것은 안팎이 공하기 때문이다.
5음ㆍ18성ㆍ12쇠(衰)를 얻을 수도 볼 수도 없는 것은 본래 청정하기 때문이다.
12인연을 볼 수 없는 것은 항상 청정하기 때문이다.
고(苦)ㆍ습(習)ㆍ진(盡)ㆍ도(道)를 볼 수 없는 것은 항상 청정하기 때문이다.
욕성(欲性)ㆍ형성(形性)ㆍ무형성(無形性)을 볼 수 없고
37품과 부처님의 18법을 볼 수 없는 것은 청정하기 때문이다.
6바라밀과 수다원에서부터 나아가 부처에 이르기까지 볼 수 없는 것도 청정하므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무엇을 청정하다고 합니까?”
세존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생하지도 않고 있지도 않고 볼 수도 없고 하는 바가 없는 것을
청정한 것이라고 한다.”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배우는 것은 어떤 법을 배우기 위해서입니까?”
세존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보살은 저 모든 법이 배울 바가 없다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왜냐하면 법은 범인(凡人)이 받아들이는 것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법은 무엇입니까?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법의 소유는 지은 바가 없는 것과 같으므로 무소유라고 말한다.”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떤 것을 무소유이면서 있는 것이라고 합니까?”
세존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5음이 무소유인 것은 내외소유가 무소유공이기 때문이다.
37품과 부처님의 18법이 무소유인 것은
내외소유가 무소유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범부와 어리석은 사람은 어리석음을 따라서
애(愛)에 들어가며 그 가운데서 어리석은 행을 지어서
양제(兩際:有無)에 얻는 바 되어 알지 못하고 보지도 못한다.
법은 어리석은 바가 없는데 명색(名色)에 들어가고,
6입(入)에 들어가고
37품과 부처님의 18법에 들어가고
비록 그 가운데에 들어가나
법은 없는 것인데,
다시 생각하여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다.”
“무엇을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 것이라고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5음은 아는 것이 아니며,
5음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37품과 부처님의 18법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범부와 어리석은 사람의 범주에 떨어지고
어떠한 것으로부터도 벗어나지 못한다.
욕계ㆍ형계(形界)ㆍ무형계(無形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성문ㆍ벽지불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다시 불신(不信)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무엇을 믿지 않는가?
5음이 공함을 믿지 않고
37품과 부처님의 18법이 공하며 또한 머물지 않음을 믿지 않는다.
어느 곳에 머물지 않는가?
6바라밀에 머물지 않고,
아유월치지(阿惟越致地)에도 머물지 않고
나아가 부처님의 18법에도 머물지 않는다.
그러므로 범부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다.
곧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에 들어가며,
5음ㆍ6쇠(衰)에 들어가며,
18성(性)에 들어가며,
음욕ㆍ성냄ㆍ어리석음에 들어가며,
모든 견[諸見]에 들어가며,
37품과 부처님의 18법에 들어가며,
도(道)에 들어가는 것이다.”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보살은 이와 같이 배워야 하나,
반야바라밀을 배우지 않으면
살운야혜(薩云若慧)를 이룰 수 없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배워야 하나,
반야바라밀을 배우지 않으면 살운야에서 나오지 못한다.”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째서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배우지 않으면 살운야혜를 이루지 못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이 구화구사라가 없어서
상념(想念)으로 6바라밀과 37품과 부처님의 18법에 들어가며,
이 상념으로 살운야에 들어간다.
그러므로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배우지 않으면
살운야혜를 생성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리불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보살이 어떻게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살운야혜를 이루게 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반야바라밀을 보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배워서 살운야혜를 이루려면,
마땅히 보는 바도 없어야 하며 얻을 바도 없어야 한다.”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떤 것을 보는 바도 없고 얻을 바도 없는 것이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일체법을 보지 않음이니 공하기 때문이다.”
13. 문환품(問幻品)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어떤 사람이 묻기를,
‘환인(幻人)이
보시ㆍ지계ㆍ정진ㆍ인욕ㆍ일심(一心)ㆍ지혜를 배우고 37품과 부처님의 18법을 배우고
살운야(薩云若)를 배우면
살운야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까?’라고 한다면,
저는 마땅히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다시 그대에게 묻겠으니,
그대의 뜻에 따라 나에게 대답하여라.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5음과 환(幻)은 다름이 있는가?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와 색ㆍ성ㆍ향ㆍ미ㆍ세활ㆍ법과 18성과 환은 다름이 있는가?”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다름이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37품ㆍ부처님의 18법ㆍ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
나아가 도(道)와 환은 다름이 있는가?”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다름이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5음이 바로 이 환이고 환이 바로 5음이며,
12쇠와 18성이 모두 이 환이며,
37품과 부처님의 18법도 또한 환이며 환이 곧 18법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환인(幻人)에게 집착이 있고,
번뇌[縛]가 있고,
생(生)이 있고,
사(死)가 있는가?”
대답하였다.
“없습니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환인은 또한 생하지도 않고 또한 멸하지도 않는데,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살운야를 이룰 수가 있겠는가?”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얻을 수 없습니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명자(名字)에 집착하고,
법과 5음 숫자를 합하여 보살이라고 하는가?”
대답하였다.
“이와 같습니다.
세존이시여.”
“명자에 집착하고 5음 생멸을 볼 수 있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볼 수 없습니다.”
“또한 일어남도 없고 멸함도 없고,
명자도 없고 또 신행(身行)도 없고,
의행(意行)도 없고,
집착도 없고,
번뇌[縛]도 없는데 반야바라밀을 배운다고 해서 어찌 살운야를 얻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이룰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배우면,
응당 얻을 바가 없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보살이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배우면 아뇩다라삼야삼보에 이르게 되니,
마치 환인의 배움과 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5음은 환인과 같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5음으로 반야바라밀을 배우면 살운야를 이루겠느냐?”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5음의 소유(所有)는 무소유(無所有)이고,
무소유란 것도 또한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5음은 꿈과 같고 메아리와 같고 그림자와 같고 더울 때의 아지랑이와 같고 변화와 같은데,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겠느냐?”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5음ㆍ6쇠는 꿈과 같고 환과 같고 무소유이니,
볼 수가 없습니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새롭게 대승의 뜻을 발한 보살이 반야바라밀의 법문을 들으면 공포가 없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새롭게 대승을 배우는 보살은
반야바라밀과 구화구사라를 얻지 못하고
선지식과 같이 하지 못하여
혹은 두려워하고 혹은 무서워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보살이 어떤 구화구사라를 행해야만
보살들로 하여금 무서워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게 되겠습니까?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살운야의 행과 상응하며,
5음은 무상하다고 관하여 5음에 의지하지 않는다.
이것을 보살이 반야바라밀과 구화구사라를 행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수보리여,
보살이 뜻으로 살운야의 행과 상응하여 5음이 고(苦)이고,
공하며 아(我)가 없음을 관하며,
5음이 공하고 상(相)이 없고 원(願)이 없음을 관하며,
5음이 적정한 것임을 관하면 마땅히 얻을 것이 없게 되며,
의지할 것이 없게 된다.
이것을 보살이 반야바라밀과 구화구사라를 행하는 것이라고 한다.
보살은 마땅히 ‘나는 모든 중생들을 위해서 무상(無常)ㆍ고(苦)ㆍ공(空)ㆍ비아(非我)를 설하고,
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ㆍ적정의 법이 응당 얻을 것도 없으며,
의지할 것도 없음을 설하리라’고 생각하면 이것을 보살의 단바라밀이라고 한다.
또한 수보리여,
보살은 또한 나한ㆍ벽지불의 뜻으로 5음이 무상하고 고(苦)이고 공하고 아(我)가 없음을 관하지 않으며,
또한 나한ㆍ벽지불의 뜻으로
공ㆍ무상ㆍ무원ㆍ적정을 관하지 않으면
이것을 보살이 계를 범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보살은 공포에 떨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는 것이다.
보살이 온 힘을 다해서 봉행하고 능히 참을 수 있으면
이것을 보살이 찬제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수보리여,
보살이 뜻으로 살운야의 행과 상응하여 5음이 무상함을 관하나 응당 소견이 없어야 하며,
집착도 없어야 하며,
살운야의 뜻을 버리지 않으면
이것을 보살이 유체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라고 한다.
보살이 마땅히 이러한 행을 지으면 나한ㆍ벽지불의 뜻을 일으키지 않고
다른 사람의 악한 마음에 구속되어도 이러한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선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라고 하며,
무서워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또한 수보리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마땅히 이렇게 관해야 하는 것이
5음이 공하므로 공이 바로 5음인 것은 아니다.
6정(情)ㆍ18성ㆍ37품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무서워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게 되는 것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어떤 선지식과 함께 반야바라밀의 설법을 듣고
무서워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보살은 5음이 무상하고 고(苦)이고 공하고 아(我)가 없는 것이고,
공하고 모양이 없고 원하는 것도 없으며,
적정하여 희망하는 바가 없으며,
이 희망하는 바가 없는 복을 가지고 나한ㆍ벽지불지의 행은 짓지 않고
단지 살운야만을 구한다.
이것을 보살의 선지식이라고 한다.
6정ㆍ18성ㆍ적정을 설하면서 희망하는 바가 없다.
이 공덕을 가지게 되면 성문ㆍ벽지불지는 원하지 않는다.
이것을 보살의 선지식이라고 한다.
또한 수보리여,
보살이 37품과 부처님의 18법을 생각하고 살운야를 생각하며 도(道)를 생각하고,
일체 설법에 희망하는 바가 없음으로써
희망하는 바가 없는 복을 가지고
성문ㆍ벽지불지를 위하지 않고 다만 살운야를 위한다.
이것을 보살의 선지식이라고 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떤 것이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배울 때
구화구사라가 없고 악지식(惡知識)이 되며,
반야바라밀의 설법을 듣고 무서워하고 두려워합니까?”
세존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보살이 살운야의 뜻을 여의고 반야바라밀에 의지하여 스스로를 높이고
선ㆍ정진ㆍ인욕ㆍ지계를 행하고 보시를 행하며 단바라밀에 의지하게 되니,
스스로를 높이는 것이다.
또한 수보리여,
보살이 살운야의 뜻을 여의고,
5음의 내외공(內外空)을 생각하며,
이 공으로 스스로를 높이고 의지하게 된다.
6정(情)이 공함을 생각하고,
18성이 공함을 생각하며,
이로써 스스로를 높이고 37품과 부처님의 18법이 공함을 생각하고,
18법에 의지하여 스스로를 높이는 것이다.
이것을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구화구사라가 없고,
반야바라밀의 설법을 들었으나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것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떤 것이 보살의 악지식(惡知識)이 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6바라밀을 멀리 여의도록 가르치며,
보살이 말하기를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이 아니니 배우지 말라고 하며,
단지 모일 줄만 알고 들으려고 하지 않고,
수지(受持)하지 않고,
경전을 독송하지 않고,
또한 타인을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이 보살의 악지식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다시 보살에게 악지식이 있어
마군이 즐겨 하는 일을 말하고
마왕 파순(波旬)이 부처님의 형상을 하고서
보살의 처소에 가서 보살들에게 6바라밀을 멀리 여의라고 말하며,
보살에게 ‘선남자여,
이러한 6바라밀을 배우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라고 말한다.
이것이 보살의 악지식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마군이 다시 부처님의 형상을 하고서
보살의 처소에 가서 성문에 해당하는 행동과 경을 분별하고 자세히 설하지만
이것은 마군의 일을 설하는 것이다.
이것이 보살의 악지식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마군이 다시 부처님의 형상을 하고서
보살의 처소에 가서 보살에게 ‘선남자여,
그대는 또한 보살의 뜻이 없고,
또한 아유월치도 아니다.
그대는 또한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룰 수 없다’고 말한다.
가령 보살을 가르치지도 않고,
마군의 일을 깨닫게 하면 이것이 보살의 악지식이다.
마왕 파순이 다시 부처님의 형상을 하고서
보살의 처소에 가서 보살에게
‘선남자여,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가 공하며,
6쇠ㆍ18성이 모두 공하며,
6바라밀과 37품과 부처님의 18법이 모두 공한데,
아뇩다라삼야삼보를 배운들 무슨 소용인가?’라고 말하고,
이와 같이 가르친다면 이것이 보살의 악지식인 것이다.
또한 수보리여,
마군이 다시 벽지불의 형상을 하고서 보살의 처소에 이르러서
보살에게
‘선남자여,
시방은 모두 공하며 부처님도 없고 또한 보살도 없고 또한 성문도 없다’고 말하며,
보살들에게 이러한 마군의 일을 설한다.
이것이 곧 보살의 악지식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마군이 다시 성문의 형상을 하고서 옷을 입고,
보살의 처소에 가서 보살들에게 살운야의 뜻을 단절하게 만들고,
성문ㆍ벽지불의 행을 설한다.
이와 같이 지어야 한다고 가르친다면,
이것이 보살의 악지식이다.
마군이 다시 보살의 스승의 몸을 하고서
그에 맞는 옷을 입고 보살의 처소에 가서
보살행을 여의도록 가르치고,
살운야ㆍ37품ㆍ부처님의 18법을 여의도록 가르친다.
공하여 모양이 없으며 원하는 것도 없어야 한다 하고,
보살에게 이 법을 가지게 하면서 ‘
그대는 마땅히 이 법을 생각해야 하고 성문지(聲聞地)를 증득하는데,
아뇩다라삼야삼보를 배우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라고 할 것이다.
이렇게 하면 마군의 일일 뿐이다.
또한 수보리여,
마군이 다시 보살의 어머니 모양을 하고서
보살의 처소에 이르러서 ‘아들아,
너는 마땅히 수다원을 증득해야 하고 나한과를 익혀 증득해야 하는데,
아뇩다라삼야삼보가 무슨 소용인가?
이것을 얻으려면
무량한 겁 동안 생사를 받을 것이며,
응당 손을 끊고,
다리를 끊는 아픔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보살들을 향해서 이러한 마군의 일을 설한다면,
이것이 마군의 일을 짓는 것이다.
또한 수보리여,
마군이 다시 비구의 형상을 하고서 그대 옷을 입고
보살의 처소에 가서 보살에게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는 무상(無常)하고 고(苦)이고 공하고 아(我)가 없는 것이라 하고,
공하여 모양도 없으며 원하는 것도 없어 적정한 것인데,
37품과 부처님의 18법을 설하는 것은 모두 모양을 설하고
일에 집착한 것이라고 말을 한다면,
이것이 보살의 악지식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미 알았으면 마땅히 속히 널리 여의어야 한다.”
14. 요본품(了本品)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보살이라는 호칭이 보살이 되는 것입니까?
그 글 구절의 뜻은 무엇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이란 구절[句]의 뜻은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도라는 것에는 구절의 뜻이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나라 할 것도 없는 것이다.
보살이라고 하는 뜻도 이와 같은 것이다.
수보리여,
비유하면 새가 허공을 날지만 발자취가 있지 않은 것처럼
보살이란 뜻도 이와 같은 것이다.
비유하면 꿈과 같고 환과 같고,
아지랑이와 같고,
그림자와 같고,
여래가 변화한 것과 같아서 무소유이니,
보살의 뜻도 이와 같은 것이다.
비유하면 법성과 진제(眞際)도 또한 무소유이다.
비유하면 환사(幻士)가 5음을 얻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것처럼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보살마하살이란 뜻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비유하면 환사가 내외에 공을 행하는 것과 같으니,
또한 무소유이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그 뜻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수보리여,
비유하면 환사가 6바라밀과 37품과 부처님의 18법을 행하는 것과 같아서
있는 것이 아니며,
보살의 뜻도 이와 같은 것이다.
수보리여,
비유하면 부처님께서 5음을 얻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5음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지만 보살이란 글귀의 뜻은 볼 수 없는 것이다.
수보리여,
비유하면 달살아갈(怛薩阿竭)ㆍ아라하(阿羅訶)ㆍ삼야삼불(三耶三佛)의 6정(情)이 무소유인 것처럼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그 뜻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수보리여,
비유하면 부처님께서 내외공을 행하는 것과 같아서 그 끝[際]을 볼 수 없는 것이다.
37품과 부처님의 18법을 행하는 것도 볼 수 없는 것이니,
보살이란 그 뜻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유위(有爲)와 무위(無爲)의 성품도 또한 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다.
수보리여,
비유하면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것처럼
짓는 것도 없고 집착하는 것도 없으며 단절하는 것도 없는 것이니,
그 뜻은 또한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것이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고 단절되지도 않고 있지도 않고 짓지도 않는 것입니까?”
“5음은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또한 집착하지도 않고 또한 단절되지도 않으며,
또한 볼 수 없는 것이다.
18성ㆍ6정ㆍ6쇠ㆍ5음도 볼 수 없는 것이며,
37품과 부처님의 18법에 집착할 것도 없으며 집착도 없고 끊어버릴 뜻도 없으니,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보살의 그 뜻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수보리여,
비유하면 37품과 부처님의 18법은 본래 청정해서 뜻이 없는 것처럼
보살이란 뜻도 이와 같은 것이다.
비유하면 아(我)가 청정한 것처럼
아에 변제(邊際)가 있지 않으므로
우리의 수명도 청정해서 볼 수 없는 것이다.
중생이 변제가 없으므로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그 뜻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비유하면 해가 뜰 때 모두 어두운 자취는 다시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보살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비유하면 천지겁(天地劫)이라 해서
불이 타오를 때에 세간에 있는 모든 것은 모두 다 타서 그 자취를 볼 수 없는 것처럼,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그 뜻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수보리여,
비유하면 세존께서 계(戒)를 구족하셨을 때에
악계(惡戒)의 자취는 다시 나타나지 않고,
삼매를 얻으면 어지러운 뜻의 자취는 다시 나타나지 않고,
지혜를 얻으면 어리석음[愚癡]의 자취는 없고,
해탈을 얻으면 해탈하지 못한 자취는 다시 볼 수 없고,
이미 해탈의 지혜를 보았으면 해탈하지 못한 지혜는 다시 볼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비유하면 불광(佛光)이 나올 때에
일월(日月)과 도리(忉利)의 모든 천왕과 아가니타천의 광명이 다시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그 글귀의 뜻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도라는 것과 보살ㆍ보살의 뜻은
또한 합하지도 않고 또 흩어지지도 않으며,
형상이 없어서 볼 수 없는 것이다.
상대[對]가 없는 한 가지 모양[一相]이며,
한 가지 모양은 곧 모양이 아니다.
수보리여,
보살은 마땅히 모든 법에 집착하는 바가 없음을 배워야 하며,
또한 마땅히 모든 법을 깨달아야 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떤 것이 모든 법이며,
어떤 것이 보살이 모든 법에 집착함이 없음을 배우는 것이며,
어떤 것이 보살이 모든 법을 깨달아 아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법이란 이른바 선법(善法)ㆍ악법(惡法)ㆍ
기법(記法)ㆍ미기법(未記法)ㆍ
속법(俗法)ㆍ도법(道法)ㆍ
유루법(有漏法)ㆍ무루법(無漏法)ㆍ
유위법ㆍ무위법이다.
이것을 보살이 마땅히 모든 법에 집착이 없음을 배워야 하는 것이라고 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떤 것이 세속의 선법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세속의 선법이란 부모에게 효순(孝順)하고 사문과 도인에게 공양하고,
장로(長老)를 양육하고 모든 복을 베풀고 몸을 단속하여 수절하고,
정근하고 선한 뜻을 생각하고 방편으로 10선(善)을 수행하는 것,
속인의 내상(內想)ㆍ
부패상(腐敗想)ㆍ청어상(靑瘀想)ㆍ혈상(血想)ㆍ식불초상(食不消想)ㆍ어지러운 상(亂想)ㆍ
골상(骨想)ㆍ반초상(半燋想)ㆍ
4선(禪)ㆍ4등(等)ㆍ4무형선상(無形禪想)ㆍ
불상(佛想)ㆍ법상(法想)ㆍ비구승상(比丘僧想)ㆍ
계상(戒想)ㆍ시상(施想)ㆍ천상(天想)ㆍ정근상(精勤想)ㆍ
안반상(安般想)ㆍ신상(身想)ㆍ사상(死想)을 말하는 것이다.
수보리여,
이것을 세간의 선법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세속의 악법입니까?”
“살생하는 것ㆍ도둑질ㆍ음욕ㆍ성내는 것ㆍ악구(惡口)ㆍ망언(妄言)ㆍ기어(綺語)ㆍ질투ㆍ사견 등을 세속의 악법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기법입니까?”
“선법이든 선법이 아니든 이것을 기법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미기법입니까?”
“신(身)ㆍ구(口)ㆍ의(意)가 있지 않고,
4대(大)가 있지 않고,
5음ㆍ18성(性)ㆍ12쇠(衰)가 있지 않은 것을 미기법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세속법입니까?”
“5음ㆍ12쇠ㆍ18성ㆍ10선(善)ㆍ4선(禪)ㆍ4등ㆍ4무형선을 세속법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도법입니까?”
“37품ㆍ3해탈문ㆍ3근(根)ㆍ3삼매(三昧)ㆍ해탈섭의(解脫攝意)ㆍ8해탈문ㆍ9차제선(次第禪)ㆍ18공(空)ㆍ
부처님의 10력ㆍ4무소외(無所畏)ㆍ부처님의 18법을 도법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누법(漏法)입니까?”
“5음ㆍ12쇠ㆍ18성ㆍ12인연ㆍ4선ㆍ4무형선을 누법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무루법입니까?”
“37품과 부처님의 18법을 무루법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유위법입니까?”
“욕계(欲界)ㆍ형계(形界)ㆍ무형계의 37품,
나아가 부처님의 18법을 유위법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무위법입니까?”
“무위법이란 생하는 것도 아니고 또한 멸하는 것도 아니며,
마침[終]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시작이 있는 것도 아니며,
상주(常住)하여 변화도 없고,
음욕ㆍ성냄ㆍ어리석음이 다하여
법성과 진제(眞際)와 같아 다름이 없는 것을 무위법이라고 한다.”
“보살마하살은 공상(空相)의 법에 집착함이 없으며,
경동(傾動)함이 없으며,
모든 법이 둘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떤 것이 마하살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대중들에는 반드시 상수(上首)가 있으므로 마하살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떤 중생이 상수가 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대중이란 수다원ㆍ사다함ㆍ아나함ㆍ아라한ㆍ
벽지불ㆍ
처음 발심한 보살마하살에서
아유월치지에 머무는 자에 이르기까지가 대중의 모임이며,
이 가운데서 보살이 상수이며,
이 가운데서 마땅히 금강의 뜻[金剛意]을 발하여
곧 상수가 되는 것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금강의 뜻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은 다음과 같이 뜻을 발해야 한다.
‘나는 마땅히 한량없는 생사를 받는 동안 정진행을 지을 것이다.
나는 마땅히 중생을 위해서 일체의 소유(所有)를 버릴 것이다.
나는 마땅히 일체 중생들에게 마음을 평등히 할 것이다.
나는 삼승으로써 중생을 제도하며 해탈케 하고,
반니원(般泥洹)에 이르게 할 것이며,
또한 중생이 반니원에 드는 것을 보지 않을 것이다.
나는 모든 법이 어느 곳으로부터 와서 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고,
항상 살운야혜(薩云若慧)의 뜻으로 6바라밀을 행할 것이다.
나는 마땅히 배워서 반드시 일체를 구할 것이다.’
수보리여,
이것을 보살이 금강의 뜻을 발한 것이라고 한다.
즉 대중을 위하는 최고의 상수가 되는 것이다.
보살이 다시 다음과 같이 뜻을 발해야 한다.
‘나는 마땅히 니리(泥犁:지옥)와 벽려(薜荔:축생)에서
죄인이 받는 고통을 받을 것이다.
나는 마땅히 중생을 위해서 무량한 겁 동안 고통을 대신 받을 것이며,
중생으로 하여금 무여니원(無餘尼洹)과 반니원에 이르게 한 후에
나 자신 스스로 몸으로 선한 근본을 지어
억백천 겁 후에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룰 것이다.’
수보리여,
이것을 보살이 금강의 뜻을 발한 것이며,
대중들 가운데 상수(上首)가 되는 것이라고 한다.
보살은 마땅히 묘의(妙意)를 가지며 묘의로써 중생 가운데 상수가 되는 것이다.
처음 뜻을 발한 이래로
또한 음욕ㆍ성냄ㆍ어리석음의 뜻을 일으키지 않고,
또한 중생을 혼란스럽게 하지 않고,
또한 성문ㆍ벽지불의 뜻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묘한 뜻을 가져서
대중 가운데서 상수가 되는 것이라고 하며,
또한 스스로 높이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보살은 마땅히 살운야의 뜻에서 동요하지 않고,
또한 스스로 높이지도 않는다.
보살은 항상 중생을 호념(護念)하는 마음을 일으키며,
또한 중생을 버리지 않는다.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법을 행하니,
응당 법락(法樂)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어떤 것이 법락입니까?”
“그 아는 바를 따라서 외우고 수지하며,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모든 법공(法空)에 머물고,
대중을 위해서 인도하지만 또한 의지하지도 않고,
또한 얻을 것도 없는 것이다.
보살은 37품과 부처님의 18법에 머물고,
대중을 위해서 상수가 되지만 의지함도 없고,
어떠한 소견도 없다.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금강과 같은 삼매를 행함에 머물고
나아가 허공 끝이 다하도록
물들지 않는 해탈삼매를 체득하여
곧 대중 가운데 상수가 되지만
얻을 바도 없고, 또한 의지할 것도 없는 것이다.
수보리여,
보살은 이와 같은 법지(法地)에 머무므로 곧 능히 중생을 위해서 상수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하살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15. 마하살품(摩訶薩品)
이때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도 또한 마하살이 되는 까닭이 무엇인지 설하고 싶습니다.”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설해 보아라.”
사리불이 말하였다.
“보살은 모든 망견(妄見)을 다 끊었으므로 마하살이라고 이름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을 모든 견[諸見]ㆍ망견이라고 하는 것인가?
아견(我見)과 인견(人見)과 중생견이 있고,
단견(斷見)이 있고,
상견(常見)이 있고,
유견(有見)ㆍ무견(無見)ㆍ5음견(陰見)ㆍ18성견(性見)ㆍ12쇠견(衰見)ㆍ제견(諦見)ㆍ12인연견ㆍ37품과
부처님의 18법견이 있고,
육양중생견(育養衆生見)이 있고,
정불토견(淨佛土見)이 있고,
도견(道見)이 있고,
불견(佛見)ㆍ전법륜견(轉法輪見) 등이 있는데,
일체의 모든 견을 모두 끊으며
이와 같이 설법을 하므로 마하살이라 이름하는 것입니다.”
수보리가 사리불에게 물었다.
“보살마하살이 무슨 이유로
5음ㆍ12쇠ㆍ18성ㆍ12인연의 견해가 있으며,
무슨 이유로 37품ㆍ부처님의 18법견,
나아가 망견이 있는 것입니까?”
사리불이 대답하였다.
“보살마하살은 구화구사라가 없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므로
5음ㆍ6정ㆍ18성ㆍ12인연에 힘쓰고,
6바라밀ㆍ37품ㆍ부처님의 18법에 의지하여 모든 견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구화구사로써 모든 견해를 끊고
사람들을 위해서 설법을 하되
의지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도 마땅히 마하살이 되는 까닭이 무엇인지 설하고 싶습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설해 보아라.”
수보리가 말하였다.
“도의 뜻과 동등함이 없음은 성문ㆍ벽지불이 아는 바와 다릅니다.
왜냐하면 살운야의 뜻은 무루(無漏)여서
뜻에 집착하지 않으므로 마하살이 되는 것입니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보살의 동등함이 없는 뜻으로
모든 나한과 벽지불이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까?”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보살마하살은 처음 뜻을 발한 이래로 법에 생멸이 있음을 보지 않고,
또한 증감(增減)이 있음을 보지 않고,
또한 집착도 보지 않고 또한 단절함도 보지 않습니다.
사리불이여,
모든 법은 생하는 것도 아니고 멸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나한ㆍ벽지불의 뜻도 없고,
또한 도의 뜻도 없고,
또한 부처의 뜻도 없습니다.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동등함이 없는 뜻은
나한ㆍ벽지불이 알 수 있는 것과 다르다고 합니다.”
사리불이 말하였다.
“수보리의 뜻처럼
나한ㆍ벽지불지에 집착하지 않고
5음에도 집착치 않고
또한 37품과 부처님의 18법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하였다.
“가령 살운야의 뜻이 무루라고 한다면,
범인의 뜻도 또한 마땅히 무루이니 성품이 공하기 때문입니다.
나한ㆍ벽지불과 모든 부처님 세존의 뜻도 또한 마땅히 무루입니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그대가 말한 바와 같습니다.”
사리불이 말하였다.
“5음도 또한 무루이니 그 성품이 본래 공하기 때문입니다.
37품ㆍ부처님의 18법도 또한 무루(無漏)이니 성품이 공하기 때문입니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사리불이 말한 것과 같습니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물었다.
“뜻이 없어서 뜻과 합하지 않습니까?
색ㆍ통ㆍ상ㆍ행ㆍ식이 없어서 식과 합하는 것이 아닙니까?”
수보리가 말하였다.
“그대가 말한 것과 같습니다.”
사리불이 다시 물었다.
“37품과 부처님의 18법과 18법이 아닌 것에 집착하지도 않고,
합하지도 않는 것입니까?”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유무의 일은 모두 합하는 것입니다.”
수보리가 사리불에게 말하였다.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도의 뜻을 갖지 않은 이와
나한ㆍ벽지불은 능히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스스로 높이지도 않고
의지함도 없으며
의지함에도 법에도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16. 문승나품(問僧那品)
그때 빈누문타니자(邠耨文陀尼子)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도 마땅히 마하살이 되는 까닭을 설하고 싶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가 설하고자 하면 곧 설하라.”
빈누가 말하였다.
“보살은 큰 공덕을 지어서 대승에 연류하여 오르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마하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리불이 빈누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이 큰 공덕으로써 연류하여 마하살이 되는 것입니까?”
빈누가 대답하였다.
“보살마하살은 사람에게만 제한하지 않으므로 단(檀)바라밀에 머물러서 보시를 하며,
널리 일체 중생들을 위하기 때문입니다.
단바라밀과 시ㆍ찬ㆍ유체ㆍ선ㆍ반야 바라밀을 행하는 데 널리 일체 중생들을 위하기 때문이며,
겸손하게 고행을 합니다.
보살은 승나승녈(僧那僧涅)1)을 이루어서 중생에게만 제한하지 않고,
또한 ‘나는 마땅히 약간의 사람만을 제한적으로 제도하고 나머지 사람은 제도하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으며,
또한 ‘나는 약간의 사람만 가르쳐 도(道)에 이르게 하겠다’고 말하지 않으며,
또한 ‘나는 나머지 사람을 가르치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보살은 중생을 위하므로 큰 서원을 일으켜 ‘나는 스스로 6바라밀을 구족해서 마땅히 타인을 가르쳐 6바라밀을 구족하게 하겠다’고 말합니다.
보살이 단바라밀을 행할 때 보시는 살운야의 뜻에 상응하고 서원을 세워 ‘이 공덕을 일체 중생들과 함께 가져 함께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얻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사리불이여,
이것을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보시를 익히는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사리불이여,
보살의 보시는 살운야에 상응하며,
나한ㆍ벽지불지를 구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보살이 반야바라밀의 보시를 행할 때 시바라밀을 익히는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사리불이여,
보살이 보시를 행할 때 살운야를 지으며,
법이 상응하는 바의 행을 생각합니다.
이것을 찬바라밀을 익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정진과 상응하는 바의 행을 유체바라밀을 익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일심(一心)으로 하는 보시는 살운야와 상응하며,
마침내 성문ㆍ벽지불의 뜻을 일으키지 않음을 생각합니다.
이것을 선바라밀을 익히는 것이라고 합니다.
보시하는 것은 환상(幻相)과 같은 것이니,
베푸는 자도 보지 말고,
또 베푸는 물건도 보지 말고,
또 받는 자도 보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을 보살이 보시를 하면서 반야바라밀을 익히는 것이라고 합니다.
보살은 살운야의 뜻으로 모든 반야바라밀을 생각하지 않고 또 의지하지도 않습니다.
사리불이여,
그러므로 보살의 승나승녈이 됨을 마땅히 알아야 합니다.
또한 사리불이여,
보살마하살이 시바라밀을 행할 때 살운야에 상응하는 뜻을 보시하고 보시 공덕을 중생과 더불어 가져 함께 아뇩다라삼야삼보를 구합니다.
이것을 보살이 시바라밀을 행할 때 단바라밀을 구족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사리불이여,
보살이 시바라밀을 행할 때 능히 정성을 다하여 봉행하고 능히 인욕해야 하니,
이것을 보살이 시바라밀을 행할 때 찬바라밀을 구족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사리불이여,
보살이 시바라밀을 행할 때 유체바라밀을 구족하는 것을 보살이 정진을 익히는 것이라고 합니다.
보살은 시바라밀을 행할 때 나한ㆍ벽지불의 뜻을 받지 않으며,
보살은 시바라밀을 행할 때 모든 바라밀을 환상같이 여기고 스스로 높이지 않고,
또한 의지하지도 않습니다.
사리불이여,
이것을 보살이 시바라밀을 행할 때 반야바라밀을 익히는 것이라고 하며,
이것을 보살이 시바라밀을 행할 때 모든 반야바라밀을 총지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승나승녈이라고 이름합니다.
보살은 인욕바라밀을 행할 때 살운야의 뜻에 상응하여 보시하고 보살은 무형선(無形禪)에 들어가며,
또한 그 가운데 처하지도 않습니다.
이것을 보살이 구화구사라를 행하고 반야바라밀을 실행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사리불이여,
보살은 선을 행하면서 공ㆍ무상ㆍ무원을 분별합니다.
이것을 보살이 승나승녈을 행하면서 반야바라밀을 실행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이유로 승나승녈이라고 이름하는 것입니다.
사리불이여,
보살이 이와 같이 승나승녈을 지으면
시방의 모든 부처님 세존께서 모두 큰 음성으로 이 보살을 찬탄하여 ‘
어떤 국토의 보살은 모든 공덕을 갖추고 승나승녈을 세워서
마땅히 중생을 양육하고 불국토를 청정하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리불이 빈누문타니자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의 마하연삼발치(摩訶衍三拔致)입니까?
마하연삼발치라는 것은 진(晋)나라 말로는 발취대승(發趣大乘)이라 합니다.
무엇이 대승을 발하여 일으키는[發起] 것입니까?”
빈누가 대답하였다.
“6바라밀을 행할 때
모든 선(禪)을 따라 상응하여 행하고 정성들여 봉행하고 살운야를 구해야 합니다.
보살은 살운야의 뜻으로
8선(禪)에 들어서 무상을 관하고 고ㆍ공ㆍ비아ㆍ무원을 관합니다.
이것이 보살의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며,
마하연이 되는 것입니다.
보살이 37품과 부처님의 18법을 염(念)하는 것이 보살마하연입니다.
보살의 뜻은 나한ㆍ벽지불지를 가까이 하지 않고
뜻은 단지 살운야만을 숭상합니다.
이것이 보살이 4등(等)2)을 행해서 찬바라밀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보살이 살운야를 행하는 뜻에 게으름이 없을 때
이것을 보살이 유체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보살이 비록 4선(禪)과 자(慈)ㆍ비(悲)ㆍ희(喜)ㆍ호(護)와 9선(禪)을 행하지만
또한 보살은 동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구화구사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보살이 4등을 행할 때 중생을 위해 모든 번뇌[漏]를 소멸하게 하는 것을
보살이 4등을 행할 때 단바라밀이라고 합니다.
모든 법에 선(禪)을 지으며 나한ㆍ벽지불을 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항상 살운야를 구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보살이 4등을 행할 때 시바라밀을 그치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보살에게는 또한 마하연이 있어
내외공(內外空)에서
그 지혜가 전(轉)해지는 것도 아니며,
의지할 것도 없으며,
얻을 것도 없으며,
볼 바도 없습니다.
이것을 보살마하연이라고 합니다.
또 마하연이 있는데,
모든 법도 아니며,
지혜에 있는 것도 아니며,
어지러운 것에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선정[定]에 있는 것도 아니며,
지혜는 또한 유상(有常)에 있는 것도 아니며,
무상(無常)에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고락(苦樂)에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유아(有我)와 무아(無我)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을 보살마하연이라고 하며 의지할 바가 없습니다.
또한 마하연이 있는데 지혜는 미래ㆍ과거ㆍ현재에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삼세(三世)를 여읜 것도 아닙니다.
이것을 마하연이라고 하며 의지할 바가 없습니다.
마하연이란 지혜가 삼계에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삼계를 여읜 것도 아닙니다.
또한 마하연이 있는데 지혜는 속법(俗法)에 있는 것도 아니며 또 도법(道法)에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유위(有爲)에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무위(無爲)에 있는 것도 아니며,
또 유루(有漏)에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무루(無漏)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을 의지할 것이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리불이여,
이것이 보살마하살의 마하연인 것입니다.”
17. 마하연품(摩訶衍品)
그때 사리불이 빈누문타니자에게 물었다.
“어떤 것을 보살마하살이 대승을 탄다[乘]고 합니까?”
빈누가 사리불에게 대답하였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단ㆍ시ㆍ찬ㆍ유체ㆍ선 바라밀을 타고
이 6바라밀을 타지만
6바라밀을 보지 않으며
또한 보살은 의지함도 없다는 것에도 의지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대승을 탄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사리불이여,
보살마하살이 일심으로 살운야를 배우고
37품과 부처님의 18법을 구족하고
비록 이루었다고 생각해도 이것을 의지하는 것이 없습니다.
이것을 보살이 대승을 탄다고 합니다.
또한 사리불이여,
보살은 이와 같이 생각합니다.
‘보살이란 단지 글자일 뿐이며,
5음이라 하는 것도 단지 글자일 뿐이니,
5음은 의지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6정(情)이라 하는 것도 글자일 뿐이니,
6정은 의지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37품이라 하는 것도 다만 글자일 뿐이니,
37품은 의지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외공이라 하는 것도 글자일 뿐이니,
내외공은 의지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18법이라 하는 것도 다만 글자일 뿐이니,
부처님의 18법은 의지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래법(如來法)이라 하는 것도 단지 글자일 뿐이니,
법성(法性)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제(眞際)라 하는 것도 단지 글자일 뿐이니,
진제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부처님이나 도라 하는 것도 단지 글자일 뿐이니,
부처님에 의지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대승을 한다고 합니다.
또한 사리불이여,
보살마하살은 처음 뜻을 발한 이후로 보살의 신통을 구족하고 있으며,
구족한 후에는 군생(群生)들을 양육하고
한 불국토에서 다른 한 불국토로 다니면서
모든 부처님 세존을 공양하고 예배하며,
모든 부처님들로부터 법의 가르침[法敎]을 듣습니다.”
“무엇을 법의 가르침이라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보살대승(菩薩大乘)은 보살승(菩薩乘) 대승이며,
모든 불찰들을 다니면서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고 중생을 양육하지만
처음부터 불국토에 대한 생각이 없고
또한 중생에 대한 생각도 없고,
또 2지(地)에 머물지 않습니다.
보살은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그 응하는 바에 따라서 그 형상을 변화하며,
일체 지혜를 얻지 못해도 끝내 보살승을 여의지 않고,
일체 지혜를 체득했으면 곧 능히 법륜을 굴립니다.
이것은 나한ㆍ벽지불,
나아가 모든 천ㆍ용ㆍ열차(閱叉:야차)ㆍ아수륜(阿須倫)ㆍ세간 사람들은
능히 굴리지 못합니다.
이때 시방의 갠지스강의 모래 수처럼 많은 모든 부처님 세존께서 찬탄하여
‘어떤 나라의 어떤 보살마하살이 대승을 타고
살운야를 체득하여 법륜을 굴린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리불이여,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대승을 탄다고 합니다.”
18. 승나승녈품(僧那僧涅品)
그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의 승나승녈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6바라밀ㆍ37품ㆍ내외공ㆍ유무공(有無空)ㆍ부처님의 18법ㆍ일체 지혜는
모든 공덕의 갑옷을 입어 불신(佛身)을 이루고 광명은 삼천대천세계를 명확하게 비춘다.
또 이 광명으로써 두루 시방의 갠지스강의 모래 수처럼 많은 불국토들을 비추면
삼천대천세계를 여섯 갈래로 흔들고,
다시 시방의 갠지스강의 모래 수처럼 많은 불국토들을 여섯 갈래로 흔든다.
이미 이 광명을 받았으면,
단바라밀에 머물러 대승의 갑옷으로 곧 능히 삼천대천찰토를 변화시켜
유리(琉璃)로 만들고 스스로 그 형상을 변화시켜서
차가월왕(遮迦越王:전륜성왕)이 된다.
원하는 것에 따라 모든 것을 보시한다.
굶주리고 목마를 때에는 음식을 주며,
옷을 얻고자 하면 옷을 주며,
향화(香華)와 의약을 얻고자 하면 보시하고,
갖가지로 각 대중들이 원하는 대로 즐겁게 모든 것을 준다.
이와 같이 보시하고 난 뒤에는
곧 중생을 위해서 6바라밀을 행할 것을 설법한다.
중생은 보살의 가르침을 듣고
아뇩다라삼야삼보에 이를 때까지
6바라밀의 행을 여의지 않는다.
이것을 보살이 대승의 갑옷을 입은 것이라고 한다.
수보리여,
비유하면 마치 교묘한 환사(幻師)가 네 거리의 중요한 길목에서
대중들 앞에서 사람들이 원하는 바에 따라
음식ㆍ의복ㆍ돈ㆍ재물을 보시하고
사람들의 뜻에 따라서 구하는 바를 환인(幻人)이 빠짐없이 주는 것과 같은 것이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환사가 정말 사람들에게 보시하는 것인가?”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보시한 것도 없으며,
또한 얻은 것도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은 스스로 몸을 변화하여 차가월왕이 되어서
사람들의 즐거워하는 바에 따라서 보시하며,
사람이 하고자 하는 대로 베풀어 준다.
비록 베풀었다고 하지만 준 것이 없으며,
또한 얻을 것도 없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법이 환법(幻法)과 상응했기 때문이다.
또한 수보리여,
보살마하살이 시바라밀에 머물러 차가월라(遮迦越羅)로 시현해서
그 가운데서 사람으로 하여금
10선법(善法)을 지니게 한다.
사람들을 가르쳐서 4선(禪)ㆍ4등ㆍ4무형선을 행하게 하고,
37품과 부처님의 18법을 세우게 하여
중생들이 이 법의 가르침을 듣고 도를 얻을 때까지
마침내 법의 가르침을 여의지 않게 한다.
수보리여,
비유하면 환사가 대중을 변화로 지어서
환인에게 10선을 지니라고 가르치고
37품과 부처님의 18법을 세우게 하는 것과 같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정말 사람들이 10선ㆍ4선ㆍ4무형선을 세우는가?
진정 사람들이 37품과 부처님의 18법을 세우는가?”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세우는 자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은 모든 중생들에게 10선지(善地)ㆍ37품ㆍ부처님의 18법을 세우게 하되,
또한 어떤 사람도 이 법에 머문다고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법이 법과 자연히 상응하여 이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보리여,
보살마하살은 대승의 갑옷을 입는 것이다.
또한 수보리여,
보살은 찬바라밀에 머물러서 또한 중생도 찬바라밀을 세우게 한다.
보살은 처음 뜻을 발한 이래로 서원을 세워
‘가령 중생이 칼과 막대기로 해치려고 해도 나는 모두 받으며
끝내 잠깐동안도 악의를 일으키지 않겠다’고 말한다.
마땅히 다시 인욕지(忍辱地)에 중생을 서게 함도 또한 이와 같다.
비록 중생에게 찬바라밀을 세우게 하나,
또한 환사(幻師)와 같고,
또한 중생상이 없다.
수보리여,
이것을 보살이 대승의 갑옷을 입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수보리여,
보살마하살이 유체바라밀에 머물러서
중생에게 정진의 뜻을 세우게 하고
살운야에 상응하게 함도 또한 환사와 같은 것이며,
이것을 보살대승의 갑옷이라고 한다.
보살이 선바라밀에 머물러서
또한 모든 사람들에게 일심(一心)을 행하게 하고,
보살은 등법(等法)에 머물러서 법에 산란함이 있는지 일심이 있는지를 보지 않는다.
수보리여,
이 보살은 선바라밀에 머물러서
또한 사람들에게 일심을 가르쳐서 선(禪)을 행하게 하며,
나아가 아뇩다라삼야삼보에 이를 때까지 끝내 일심을 여의지 않게 하는데,
이것도 또한 환사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승나승녈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또한 수보리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에 머물러서
또한 모든 사람들을 권조하고 가르쳐서 반야바라밀을 세우게 된다.
수보리여,
이것이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모든 법에 차안과 피안이 있음을 보지 않는 것이다.
이 보살은 반야바라밀에 머물러서
또한 중생들을 권조하고 가르쳐서 반야바라밀을 세우게 하고,
중생을 교화하는 것도 또한 환사와 같은 것이다.
배우는 자가 있다고 보아도 안 되며,
받는 자가 있다고 보아도 안 된다.
그러므로 수보리여,
보살마하살의 승나승녈이 되는 것이다.
또한 수보리여,
보살은 대승의 갑옷을 입고서
시방의 갠지스강의 모래 수처럼 많은 불국토의 중생들을 편안한 곳에 처하게 하고,
6바라밀을 세워서 중생을 위하여 6바라밀법을 설하고
중생으로 하여금 이것을 듣게 하고,
들은 후에는 아뇩다라삼야삼보에 이를 때까지 이 법을 여의지 않게 하는데
또한 환(幻)과 같아서 또 법을 받을 자도 보지 못하며,
또 가르침을 받을 자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보살은 대승의 갑옷이 되는 것이다.
보살은 또 대승의 갑옷을 입고
뜻은 살운야와 상응하여
보살은 ‘나는 마땅히 약간의 사람을 가르쳐서 6바라밀을 세우게 하겠다’고 말하지 않으며,
또한 ‘나는 마땅히 약간의 사람을 가르쳐서 37품과 부처님의 18법을 행하게 하겠다’고 말하지 않으며,
또한 ‘나는 약간의 사람은 가르칠 수 없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또한 ‘나는 약간의 사람을 가르쳐서 수다원(須陀洹) 나아가 아라한(阿羅漢)ㆍ벽지불(辟支佛)을 얻게 하겠다’고도 말하지 않으며,
‘나는 약간의 사람은 아라한에 이르도록 가르치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으며,
‘나는 저 사람들을 모두 가르치지 않겠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보살은 제도하는 데 한계와 장애가 없으며 좋아하고 싫어함도 없다.
보살이 제도하는 데는 또한 그 수가 정해져 있지 않고 그 양도 정해져 있지 않다.
수보리여,
보살은 비유하면 환사가 환인을 가르치는 것과 같아서 가르치는 것을 볼 수 없으며,
또한 가르침을 받는 자도 볼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보살마하살의 승나승녈인 것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제가 부처님으로부터 들은 뜻대로라면
보살은 승나승녈이 아니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법은 공하기 때문입니다.
색ㆍ통ㆍ상ㆍ행ㆍ식이 공하며,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와 색ㆍ성ㆍ향ㆍ미ㆍ세활ㆍ법과
18성이 각각 그 상을 따라 각자 스스로 공합니다.
단바라밀에서 반야바라밀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스스로 공하며,
내외공이 모두 스스로 공하며,
37품에서 부처님의 18법에 이르기까지 모두 공하며,
보살도 또한 공하며,
승나승녈도 또한 스스로 공합니다.
그러므로 세존이시여,
보살은 승나승녈이 아니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말한 것과 다름이 없다.
수보리여,
살운야는 행하는 것도 아니고,
짓는 것도 아니다.
보살은 중생을 위해서
마하승나승녈을 짓지만 중생이 또한 행하는 것도 아니고,
또한 짓는 것도 아니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무슨 까닭으로 살운야와 중생들은 행하는 것도 아니고 짓는 것도 아니라고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살운야는 행함도 없고 지음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5음은 또한 지어짐도 있지 않고 짓지 않음도 아니며,
6정(情)과 6쇠(衰)도 행하는 바도 없고 지어짐도 없다.
나와 남,
수명도 행함도 없고 지어짐도 없다.
왜냐하면 변제(邊際)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꿈ㆍ메아리ㆍ그림자ㆍ허깨비ㆍ아지랑이가 지음이 없고 행함이 없는 것과 같다.
또한 내외공ㆍ37품ㆍ부처님의 18법도 행하는 바가 없고 짓는 바도 없다.
왜냐하면 그 본제(本際)는 얻어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법성(法性)과 진제(眞際)에 이르기까지 또한 짓는 바가 없고,
또한 행하는 바도 없다.
보살의 살운야도 또한 지을 것도 없고,
또 행하는 바도 없다.
왜냐하면 본제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보리여,
살운야와 중생에 이르기까지 있는 것도 아니고 지을 바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살은 마하승나승녈이 되는 것이 아님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께서 설법하신 뜻을 관한 대로라면 5음은 또한 묶임도 없고 벗어남도 없습니다.”
빈누문타나자가 수보리에게 물었다.
“어떤 것을 5음에 묶임도 없고 벗어남도 없다고 합니까?”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5음은 꿈과 같고 메아리와 같고,
그림자와 같고 환과 같고 변화와 같고 아지랑이와 같아서
미래ㆍ과거ㆍ현재의 5음은 묶임도 없고 벗어남도 없는 것입니다.
5음은 단서(端緖)도 없고 묶임도 없으며,
벗어남도 없습니다.
5음은 고요해서 생하는 바도 없고,
묶임도 없고 벗어남도 없습니다.
5음의 선과 불선(不善)ㆍ5음의 속(俗)과 도(道)ㆍ
5음의 유무ㆍ무루에도 또한 묶임도 없고,
벗어남도 없습니다.
일체 모든 법이 묶임도 없고 벗어남도 없고
끝[際]이 없고 적정하여 묶임도 없고 벗어남도 없습니다.
6바라밀도 묶임도 없고 벗어남도 없으며 끝이 없고 적정합니다.
내외공에도 묶임이 없고 벗어남도 없으며,
37품에도 묶임이 없고 벗어남도 없으며,
부처님의 18법에도 묶임이 없고 벗어남도 없으며,
끝도 없고 적정합니다.
그러므로 도와 보살ㆍ살운야의 일체 지사(智事)에도
끝이 없어 적정하며 생하는 바도 없으며,
또한 묶이지도 않고,
또한 벗어남도 없습니다.
저 법성ㆍ진제는 함도 없으며 또한 묶임도 없고,
벗어남도 없고 끝이 없고 적정하여 생하지도 않고,
묶임도 없고 벗어남도 없습니다.
이와 같이 빈누여,
보살마하살은 묶임도 없고 벗어남도 없는 6바라밀 가운데서
묶임도 없고 벗어남도 없는 살운야에 머물고
묶임도 없고 벗어남도 없으므로 중생을 양육하고,
집착도 없고 묶임도 없고 벗어남도 없으므로 불국토를 청정하게 합니다.
집착할 것도 없고 묶임도 없고 벗어남도 없으므로 모든 세존들을 뵙고,
묶임도 없고 벗어남도 없으므로 법을 들음을 끝내 여의지 않습니다.
묶임도 없고 벗어남도 없으므로 모든 부처님 세존을 끝내 여의지 않습니다.
묶임도 없고 벗어남도 없으므로 모든 신통을 끝내 여의지 않습니다.
묶임도 없고 벗어남도 없으므로 5안(眼)을 끝내 여의지 않고,
묶임도 없고 벗어남도 없으므로 법을 굴리고,
묶임도 없고 벗어남도 없으므로 중생을 삼승에 안립(安立)시킵니다.
이와 같이 빈누여,
보살마하살은 묶임도 없고 벗어남도 없는 6바라밀에서
모든 법을 체득하여 깨닫는데
끝이 없고 적정하며 생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빈누는 이것이 보살마하살의 묶임도 없고 벗어남도 없는 승나승녈임을
마땅히 알아야 합니다.”
----------------
1)
1) 범어로는 Saṃnāha-saṃnad-dha.
승나는 홍서(弘誓) 또는 대서(大誓)라 번역하고,
승녈은 자서(自誓)라 번역한다.
곧 보살의 사홍서원을 말한다.
스스로 사홍서원을 맹서하는 것을 승나승녈이라 한다.
또 승나는 개(鎧),
승녈은 착(着)이라 하기도 하는데,
갑옷을 입는다는 뜻이고,
피갑(被甲)이라 번역한다.
사홍서원을 갑주에 비유한 말이다.
2)
2) 『능가경(楞伽經)』에서 나온 말이다.
그것은 제불여래의 명자 언어와 현신설법과 평등불이(平等不二)와 불불이도가 같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 [pt op tr]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Julien Clerc - Charpie de Chapka (chanson pour mon grand-pére).lrc
●행상의 문제점
『방광반야경』에서 행상(行相)의 문제점을 제시한다.
행상(行相)이란, 상을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현실에서 전도망상을 일으킨 대부분이
상을 취하고
그런 바탕에서 업을 행한다.
그래서 그런 바탕에서 생사고통을 받아나간다.
이 생사고통이 문제가 된다.
따라서 가장 근본적으로 상을 취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그런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하지 않아야 한다.
여기서 상을 행한다는 것은 곧 망집에 바탕에 상을 취하고
그런 바탕에서 업을 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수행자는 자신이 상을 취하지 않더라도
다시 자비심을 바탕으로 생사현실에 임해 중생을 제도해 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 그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경우가 극히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사현실에 들어가 그런 망집을 일으킨 중생과 눈높이를 맟주어 임해야 한다.
그런 상태에서 점차 구화구사라(漚惒拘舍羅)를 통해 중생을 수행에 진입시켜
생사에서 벗어나게 이끌어야 한다.
여기서 구화구사라는 선교방편을 의미한다.
생사를 벗어나는 방안에는 가장 원칙적인 수행방안이 있다.
그런데 그것을 망집을 일으킨 상태에서는 곧바로 취해 행하기가 쉽지 않다.
예를 들어 암벽으로 된 산이 있다고 하자.
이 산을 오르는 것은 밑에서 정상까지 직선을 그어서
그대로 수직 암벽등반을 하는 방안을 생각할 수 있다.
수행방안에서 곧바로 3 해탈문을 제시하여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게 하는 방안이
바로 이런 방안이 된다.
그런데 이런 방안으로 산을 오를 수 있는 이가 현실에서 대단히 드물다.
그래서 이런 방안은 일반적으로 초학자에게 권장되지 않게 된다.
대신 산을 빙빙 돌아가는 길을 만들어 점차 조금씩 올라가게끔 이끌게 된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망집을 그대로 바탕한 상태에서도
우선 당장 3 악도에 묶이지 않게 할 방안을 먼저 사용하게 된다.
그래서 가장 기초적으로는 10 선법과 같이
우선 하늘에 이르고 3 악도에 묶이지 않을 방안을 제시하게 된다. [인천교적인 가르침]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다시 가장 기본적인 수행방안으로 계의 성취가 강조된다.
이는 업의 장애를 제거하고 생사의 묶임에서 우선 당장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
그런 가운데 계,정,혜의 수행을 점차 닦아 나감으로써
근본적으로 망상분별과 집착 번뇌를 완전히 제거할 수 있게 된다. [ 계, 정, 혜 3 학의 성취]
그래서 생사의 묶임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무여열반- 아라한 - 회신멸지 ]
그런 경우에도 다시 그 수행자가 그 상테에 머물지 않고
생사현실에 다시 들어와 중생제도를 위한 수행을 계속 하는 상태로 이끌게 된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보살행]
그것은 올바른 깨달음을 얻고 가장 극심한 고통을 받는 상태에서도 안인을 성취할 수 있게 되면,
생사현실이 곧 열반의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생사즉 열반]
그래서 굳이 생사현실을 벗어나야만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난 상태라고 보지 않게 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생사현실에 임하는 가운데
중생을 제도하는 방편지혜를 닦아나가야 한다. [무량행문]
중생을 생사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려면
수행자자신부터 생사현실에 들어가서 생사에 묶이면 안된다.
따라서 그 자신부터 생사현실에서 요구되는 계행을 원만하게 구족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계행을 통해 복덕자량을 쌓아야 한다.
그리고 다시 이를 바탕으로 무량한 지혜자량을 구족해야 한다.
수행자 자신부터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해 업의 장애가 쌓이면 곤란하다.
그래서 자신부터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에 처하면 다른 중생을 제도할 도리가 없다.
그래서 기본적인 계의 성취는 어느 경우에나 공통적으로 강조되게 된다.
본래 보호할 것을 얻을 수 없다.
죄의 성품 역시 차별없이 공하다.
이런 내용은 계를 지키지 않고 함부로 행해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현실에서 계를 지키는 것을 대부분 어렵게 여긴다.
그것은 현실에서 각 주체가 집착을 바탕으로 대하게 하는 망집 때문이다.
그런데 위와 같은 사정을 이해하고 망집을 제거하면
그런 바탕에서 계를 원만하게 잘 성취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현실에서 그런 내용을 본래 얻을 수 없는데도 계를 잘 성취해야 하는 사정도 함께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이미 그 사정을 앞에서 제시했다.
망집을 제거하는 것이 이론처럼 쉽지 않다.
이론적으로 이해해도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에 처하면 그 적용이 쉽지 않다.
따라서 우선 망집을 바탕으로 한 상태에서 생사고통을 받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 완전히 망집을 제거한 상태라고 해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망집을 제거하고 생사현실에서 극한 고통을 받는 상태에서도 평안하게 임할 수 있다고 하자. [안인의 성취]
이는 생멸을 본래 얻을 수 없다는 이론적 내용을 생사현실에서도 그대로 적용해 인가하는 상태다. [무생법인]
그래서 그 자신만은 생사현실의 어떤 경우도 열반의 상태와 마찬가지라고 여여하게 임할 수 있다고 하자. [ 생사 즉 열반 ]
사정이 그렇다해도 그 수행자가 상대하는 중생은 그런 상태가 아니다.
그래서 그런 중생을 제도하려면 역시 생사현실에 임해 그런 중생과 눈높이를 맞추어 임해야 한다.
그리고 생사현실에서 중생을 제도하려면 그 자신부터 복덕자량과 지혜자량을 구족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자는 생사현실에 임해서 역시 기본적인 계를 원만히 잘 성취해야 한다.
그리고 중생을 제도할 때는 기본적으로 이런 바탕에서 선교방편을 취하고 임해야 한다.
그래야 중생이 잘 제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수행자는 한편으로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고 차별없이 공함을 잘 이해해 상을 취하지 않고 임해야 한다.
그런데 그렇다해도 위와 같은 사정으로 생사현실을 버리지 안하야 한다.
그래서 상을 취하지 않고 또 한편 생사현실을 버리지도 않아야 하는 이중적인 자세가 요구되는 것이다.
상을 취하지 않는 가운데 보시를 행한다.
중생을 얻을 수 없다. 그런 가운데 무량한 중생을 제도한다.
이런 경전의 내용이 이런 내용이다. [ 금강경]
여기까지가 기본적인 수행자의 수행방안이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게 행해도 막무가내로 악행을 행하고 고집하는 중생도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망집의 정도가 극심하고 수준이 너무 낮아 일반적인 방안으로는 제도하기 힘든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는 방편에 제한을 두지 않고 이런 중생까지 제도할 수 있는 방안을 다시 찾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수행자 자신부터 기본적으로 안인을 잘 성취하고
무생법인을 증득해서 어떤 경우에도 물러나지 않는 불퇴전위에 이르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상태가 되면 방편지혜의 취즉에 제한이 없게 된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망집이 심하고 업의 장애가 극심한 중생을 상대로 하더라도
제한없이 무량한 방편을 통해 제도할 수 있는 상태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대력보살들이 다라니 진언을 제공해 중생을 제도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런 수행과정 전반에서 수행자가 가장 기본적으로 성취해야 할 부분이
스스로 망집을 제거하는 부분이다.
그렇게 되어야 생사현실에서의 수행도 원만히 성취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바탕이 되어야 중생제도도 원만히 성취될 수 있다.
『방광반야경』애 상을 행하는 문제에 대해 다음처럼 제시된다.
...
ᖰ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구화구사라(漚惒拘舍羅)가 없으면
5음은 행상(行相)이 되며,
만약 5음에 항상함이 있다고 생각하면 행상이 되며,
5음이 무상하다고 생각하면 행상이 되며,
5음이 괴로움이라고 생각하고 5음이 이 아소(我所)라고 말하면 행상이 되며,
5음이 적정하다고 생각해도 행상이 됩니다.ᖱ
...
『방광반야경』 ♣0002-003♧
참고로 여기서 망집에 바탕해 상을 취하는 현상은 다음을 의미한다.
현실에서 거리에 영희가 어디 있는가.
이 때 일반적으로 자신이 영희라고 여기는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게 된다.
한편 현실에서 자동차가 어디 있는가라고 묻는다고 하자.
그러면 또 마찬가지로 자신이 자동차라고 여기는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게 된다.
또 현실에 자신은 무엇인가. 자신은 어느 부분인가라고 하면
마찬가지로 평소 스스로 자신이라고 여긴 여러 부분을 가리키게 된다.
이것이 망집 증상에 바탕해 상을 취하는 현상이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각 주체는 열심히 업을 행한다.
즉 자신이 옷을 입고 밖에 나가야 한다고 행한다면
위와 같이 가리킨 부분이 그처럼 행해야 한다고 여기면서 임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렇게 각 주체가 가리키는 그 부분에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자신이 예를 들어 감각현실의 일정 부분[상相 Lakṣaṇa]를 대하면서
일정한 분별[상想 Saṃjña]을 일으킬 수 있다.
그리고 한 주체는 현실에서 감각현실과 분별을 동시에 얻으며 임하게 된다.
이런 사정 때문에 그 추체는 그런 분별 내용이 그 감각현실 부분에 있다고 잘못 여긴다.
더 나아가 그런 부분(상相 Lakṣaṇa )은 곧 그런 분별 내용[想 Saṃjña]이라고도 잘못 여긴다.
그런 망집 때문에 영희가 어디 있는가라고 물으면
일정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게 되는 것이다.
이 현상을 현실에서 상을 취한다고 표현하게 된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등이다.
그것은 한 주체가 그런 내용에 가장 집착을 갖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후 그 주체가 일으키는 일체의 집착은 이 부분에서 근원하게 된다.
따라서 온갖 집착을 끊어도 이 부분에 대한 망집을 제거하지 못하면 곤란하다.
결국 이 부분에 걸리면 생사에 묶이는 것은 마찬가지가 된다.
그리고 다시 이로부터 온갖 망집을 증폭시켜 나가게 된다.
그래서 이런 망집을 현실에서 잘 제거해야 한다. [무상해탈문]
한편 이처럼 상을 취하고 이에 바탕하여 현실에서 쓸데없는 소원을 일으켜
추구하고 행하기 쉽다.
이렇게 되면 그 업으로 인해 생사에 묶이게 된다.
따라서 망집에 바탕해 추구하는 쓸데없는 일체 희망을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그에 바탕해 행하던 업을 중단해야 한다. [무원무작해탈문]
그리고 이를 대신해 대신 서원을 일으키고 업의 장애를 제거할 수행을 행하고
중생을 제도할 수행을 해나가야 한다.
한편 이런 망집을 일으키면 다시 이를 바탕으로
현실에서 얻는 이들 내용은 본 바탕에도 그처럼 실재하는 것이라고 잘못 여긴다.
그래서 실상은 차별없이 공함을 다시 잘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현실은 마치 침대에 누어서 꾸는 바다나 황금꿈처럼
본 바탕에서는 얻을 수 없는 내용임을 잘 이해해야 한다.
이는 실상(實相 dharmatā ; dharma-svabhāva)이 공함을 깨닫는 부분이다. [공해탈문]
그리고 이런 수행이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는 원칙적 방안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망집에 바탕해 임하는 일반적인 경우
이를 제거하는 것은 대단히 힘들다.
그리고 『방광반야경』에서 강조하는 내용은 이들 내용과 깊게 관련이 된다.
★%★
◈Lab value 불기2564/09/17 |
♥단상♥절에도 꽃이 있다. 이 꽃은 절꽃인가. 그냥 꽃인가. 그런데 이것을 적당히 분류해 사용해야 한다. 사찰에서 촬영했다고 하여 오직 사찰 건물만 촬영한 것은 아니다. 사찰을 올라가는데 만나는 계곡물, 숲, 꽃 등도 촬영했다. 그리고 중간 중간 숙박시설이나 식사장면도 촬영했다. 이런 것을 일일히 구분해 올리는 것이 쉽지는 않다. 그래도 구분해야 사진을 잘 뽑아 올릴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우선 생각해보게 된다. 사찰에서 꽃을 찍었다. 이것을 기존의 꽃 공양용 사진의 카데고리에 넣어야 할까. 아니면 그대로 사찰 사진 카데고리에 넣어야 할까. 아니면 양쪽에 다 넣어야 할까. 범주 분류작업은 번잡한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범주가 분류되어야 앞으로 랜덤추출시 성격에 맞는 사진이 추출되 올려질 수 있다. 약간 애매한 성격이 많다. 숙왕화님은 이번 사찰 순례를 가지 않았다. 그런 상태에서 자동차만 빌려 주었다. 조금 아쉬운지 108 개 정도의 사찰을 앞으로 시간을 내서 하나씩 방문해보자고 제의한다. 그러면서 어떤 시인이 108 개 사찰을 방문하면서 하나씩 쓴 시집을 선물해주었다. 그리고 우선 당장 방문할 사찰부터 하나씩 뽑아 보라고 한다. 그리고 숙왕화님도 사찰방문에 들어가는 일체 경비를 무상으로 제공해주겠다고 한다. 그간 전통 사찰이라고 할 곳은 많이 방문을 한 상태다. 그래도 다시 방문하면 또 전과 다른 풍광을 대할 수 있다. 그래서 한 번 방문했다고 외면할 일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자주 방문하고 또 방문해서 사찰의 기운과 향을 접하는 것이 좋다. 일단 지도를 통해 확인해보아야 할 듯 하다. 본인도 사진만 촬영하지 말고 사찰 방문시마다, 시까지 하나씩 지어 함께 올리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선 모방을 잘 해야 창작이 잘 되므로 기존 시를 잘 살펴봐야 할 듯 하다.
|
문서정보 ori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0/09/2564-09-17-k0002-003.html#1515 sfed--방광반야경_K0002_T0221.txt ☞제3권 sfd8--불교단상_2564_09.txt ☞◆vzgk1515 불기2564-09-17 θθ |
■ 선물 퀴즈
방문자선물 안내페이지
다음에 해당하는 단어를
본 페이지
에 댓글로 적어주시면 됩니다.
불기2564-09-17_방광반야경_003
불기2564-09-17_방광반야경_003
ॐ मणि पद्मे हूँ
○ [pt op tr]
○ [pt op tr]
● 방광반야경_K0002_T0221 [문서정보]- 일일단상키워드
'과거조각글 > 불기2564(2020)'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기2564-09-19_대지도론-K0549-061 (0) | 2020.09.19 |
---|---|
불기2564-09-18_대방광불화엄경-K0080-075 (0) | 2020.09.18 |
불기2564-09-16_중경목록-K1054-001 (0) | 2020.09.16 |
불기2564-09-15_불설대안반수의경-K0806-001 (0) | 2020.09.15 |
불기2564-09-14_마하반야초경-K0005-003 (0) | 2020.09.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