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명(因明) 6부정과(不定過)의 하나. 입론자(立論者)와 대론자(對論者)가 각기 어긋나는 종(宗)을 세워 서로 대립하는데, 그 논법이 모두 완전무결한 것. 이런 인(因)은 입론자의 종을 성립함에 만족하지 못하므로 과(過)라 함. 예를 들면 어떤 이는 “은(殷)나라 탕(湯)왕은 난신적자(亂臣賊子)다[宗]” “임금을 죽였기 때문에[因]” “비유하면 왕망(王莽) 등과 같다[同喩]” “주공(周公) 등과 같다[異喩]”고 함에 대하여, 다른 이는 “은나라 탕왕은 명군(名君)이다[宗]”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했기 때문에[因]” “비유하면 요순(堯舜)과 같다[同喩]” “왕망(王莽) 등과 같다[異喩]”고 함과 같은 것.
57 대덕 세존이시여, 호로, 滸盧<五十七> huru, (~!~) 속히 속히 속히 영원히 행복한 세제에 이르게 하소서.
『대승대집지장십륜경』
♣0057-001♧
18 관세음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말씀하시되 "세존이시여, 만약 모든 중생이 대비신주(大悲神呪)를 외우고 수행하는 자가 목숨이 마칠 때면 10방의 모든 부처님이 오셔서 손을 주시며 어느 부처님 계신 국토든 원하는 대로 태어나게 되나이다. 다시 부처님께 말씀하시되 "세존이시여 만약 모든 중생이 대비신주를 외우고 지니는 자가 삼악도에 떨어지게 되면 나는 맹세코 성불하지 않겠습니다. 또 대비신주를 외우고 지니는 자가 만약 모든 부처님의 국토에 태어나지 못한다면 나는 맹세코 정각을 이루지 않겠습니다. ● 다냐타(다질타) 怛姪他<十八> ta dya thāoṃ
『불설천수천안관세음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다라니경』
♣0294-001♧
36 아바 례다먀- 마바라 바 入嚩<二合>隸哆尾野<二合引>摩鉢囉<二合>婆<三十六>
『성관자재보살일백팔명경』
♣1122-001♧
신소는 속성이 왕씨(王氏)이고 자는 소칙(紹則)이며 그의 선조는 태원(太原) 사람이다. 먼 조상인 왕용(王勇)이 우주(虞州)에서 벼슬을 하다가 마침내 안읍(安邑)과 명조(鳴條)의 들판으로 옮겨 살았다. 집안은 명망이 있는 가문이었으므로 번거롭게 글을 짓고 쓰는 일이 필요 없었다. 젊어서 도걸(道傑)과는 장소(張邵)와 범식(范式)의 사이처럼 우정이 깊었고 서로 팔을 끼고 도를 물었으며 유학(儒學)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면서도 『예기(禮記)』와 『주역(周易)』에 더욱 능란하였고 시편에 대하여도 훌륭한 것을 계승하여 아름답게 빛냈다. 그러므로 그들이 강원을 돌아다니며 배우면서 나라 안을 두루 돌아다닐 때에도 반드시 서로 따라 다녔는데 마치 한 사람 같았다. 그들이 익힌 글의 뜻과 많은 책을 읽고 터득한 것을 놓고 말하면 누가 낫고 누가 못한지를 가르기 힘들었다. 경을 외우고 선정을 배워 그 즉석에서 숨은 이치를 찾아내는 데서는 도걸에게 뒤졌으나, 글의 이치를 알고 통달하는 데서는 신소가 앞섰다. 그가 도걸을 위하여 안반과 4념처와 관행을 내놓아 그로 하여금 막힌 곳을 통하게 한 것은 『도걸전』에서 서술한 바와 같다. 대업 4년에 도걸이 강의를 그만두자 학인들이 신소를 찾아와 수레를 계속 몰아줄 것을 요청하기에 전적으로 『아비담』을 40여 차례 강의하고 이어서 『성실론』을 거의 20여 차례 강의하였으며 그 밖의 작은 경들에 이르러서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그는 강의에서 짧은 한 마디 말로 이치에 일치시켜 적은 말로 많은 것을 해석하여 학자들이 깊이 깨닫게 하였으므로 듣고 보아도 피곤을 모르게 한 점에서는 도걸이 신소보다 높은 경지에 있었지만, 같고 다른 점을 펼쳐 놓고 널리 시비를 접하여 정중하게 비교하면서 생각한 뜻을 열어 주는 데서는 신소가 도걸보다 현명하였다. 그들이 키워서 성사시킨 자들로서는 개(蓋)ㆍ유(裕)ㆍ륭(隆)ㆍ심(深)ㆍ영(英)ㆍ태(泰) 등의 제자들이 있었다. 그러므로 진천(晉泉) 지방에서는 “신소와 도걸 두 사람은 가을철 국화와 봄철의 난초처럼 각기 그 아름다움을 차지하는 사람들이다”라고 칭찬하였다. 그러나 신소는 온화하고 공손하며 물러나고 사양할 줄 알며 자애롭고 엄숙하고 어질었으며 선비를 모시고 현인을 사모하며 자기 자랑을 하지 않았다. 정관 2년에 서암사(栖巖寺)의 대중이 사임(寺任)을 맡아달라고 청하였으나 법사(法事)가 계승되고 있는데 승단의 법에 저해가 된다고 하면서 사양하다가 대중들이 굳이 요청하여서야 도걸의 옛일에 따라서 마침내 허락하고 말았다. 그는 성품이 너그럽고 후하였으며 사람들의 성질을 잘 파악하기 때문에 상하가 화목하고 어지럽게 일어나던 일들이 잠잠해졌다. 그는 정관 17년 2월 23일 서암사에서 생을 마쳤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72세였다. 그는 한평생 도를 행하면서 생각을 서방세계에 두고 있었다. 임종하던 날 두루 제자들과 가족들까지 불러놓고 그들과 석별하고 나서 스스로 가부좌를 틀고 위용을 바로잡은 다음 『관경(觀經)』을 두 번 읽게 하고 한마음으로 조용히 듣고서는 스스로 나무아미타불을 불렀다. 이렇게 대여섯 번 부른 후에 다시 한 사람이 선창하면 다른 사람들이 화답하면서 밤중까지 하게 하였으며 의젓하고 단정히 앉아 있었기에 사람들은 그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곧 앉은 채로 입관하였다. 그후 살은 비록 다 없어졌어도 백골만은 처음과 같았다. 또 감응되어 상서로운 징조들이 일어났으나 일부러 생략하고 서술하지 않는다. 처음 그가 생을 마치던 날 저녁에 인수사(仁壽寺)의 지관(志寬) 법사가 밤에 좌선을 하는데 가슴이 답답한 것 같더니 꿈결에 신소가 찾아와 한 침상에서 쉬면서 은근히 작별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여래는 크나큰 자비심으로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기나긴 겁 동안 고행하면서 꾸준히 큰 법을 구하여 사람들과 천신들에게 유포시켜 그것이 끊어지지 않게 하려고 하셨다. 우리들은 비록 하류(下流)에 자리 잡고 있지만 부처님께서 남기신 부탁을 아직 발휘할 수 없었으니 도업은 마침내 존재하지만 마지막 단계가 눈앞에 있을 뿐이다. 신소는 비록 변변치 못하기는 하나 부처님의 뜻을 저버린 것을 가슴깊이 품고 늘 그 칙명을 밀고 나가려고 어리석으나마 정성을 다하여 황제에게 말씀드리려고 했다. 그런데 큰 운수가 홀연히 트인 때에 길이 영원한 이별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대는 이곳에 잘 머물러서 힘써주기 바란다.” 지관은 눈길이 미치는 데까지 그를 전송하다가 문득 깨어보니 꿈이었다. 이튿날까지도 부고가 없었는데 얼마 되지 않아 부고가 와서야 비로소 그가 전날 생을 마쳤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관이 편지에다 회포를 적어서 제자들에게 준 일은 그의 전기에서 말한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