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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밀해탈경-공부-11-성자문수사리법왕자보살문품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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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밀해탈경-공부-11-성자문수사리법왕자보살문품

진리와 가치를 고루고루 2013. 12. 17. 22:17



®

심밀해탈경-공부-11-성자문수사리법왕자보살문품-

경전 파일에 관한 일반적 안내는 => http://buddhism007.tistory.com/619


[ 관련 경전 내용 ] 

Kor★n153_0_0_0_0_0_0 ●심밀해탈경 ◎深密解脫經 ▶V.10_0673_1⇔V.10_0709_1

Kor★n1669_0_7_9_0_0_0 ●심밀해탈경오권 ◎深密解脫經五卷 ▶V.34_0818_3⇔V.34_0818_3

Kor★n1915_0_179_0_0_0_0 ●심밀해탈경오권 ◎深密解脫經五卷 ▶V.42_0645_2⇔V.42_0646_2


≪K0153≫ [v10-p0673] ≪T0675≫ {v16-p0665} ∴심밀해탈경(深密解脫經)


≪K0154≫ [v10-p0709] ≪T0676≫ {v16-p0688} ∴해심밀경(解深密經)

≪K0155≫ [v10-p0745] ≪T0677≫ {v16-p0711} ∴불설해절경(佛說解節經)

≪K0156≫ [v10-p0751] ≪T0678≫ {v16-p0714} ∴상속해탈지바라밀요의경(相續解脫地波羅蜜了義經)

●K0153_T0675.txt★ ∴≪A심밀해탈경≫_txt_≪K0153≫_≪T0675≫

●K0154_T0676_x.txt★ ∴≪A해심밀경_x≫_txt_≪K0154≫_≪T0676≫_x

●K0155_T0677.txt★ ∴≪A불설해절경≫_txt_≪K0155≫_≪T0677≫

●K0156_T0678.txt★ ∴≪A상속해탈지바라밀요의경≫_txt_≪K0156≫_≪T0678≫

≪T16n0675≫ p0665 5 ∴심밀해탈경 [원위 보리유지역] 深密解脫經 【元魏 菩提流支譯】

○ 한글 번역본 링크 http://ebti.dongguk.ac.kr/h_tripitaka/v1/search.asp
* 번역본에서 인터넷 한글 사전에 나오지 않는 표현 => 한글 뜻 풀이 
○ 한문본 링크 
고려대장경 판본 http://kb.sutra.re.kr/ritk/search/xmlSearch.do
신수대장경 판본 http://www.cbeta.org/index.htm








○ 대강의 내용 요약 
○ 중요 개념과 주제에 대한 논의 





테이블 





◈Lab value 2013/12/17/화/22:27


● 논의 주제 
법신과 해탈신의 비교 연구

● "법신은 일체 함이 있는= 생멸 변화가 있는 현상의 [有爲] 모습[행상]을 여의었다." 
라고 하여 
법신은 마치 진여 또는 무위법의 내용을 나타내는 것처럼 연상되지만, 

법신은 진여 
즉, 모든 현상이 다 떠나지 않고 모든 상태에 차별이 있다고 할 수 없는 '진여의 상태'와는
또 다르다고 본다. 


즉, 
"해탈신에 의지하여 

성문ㆍ연각과 모든 여래는 그 몸이 평등하거니와 

부처님의 법신은 차별되어 수승하다. "

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경전에서  
"여래의 법신(法身)은 생겨나지 않는다[불생]"
고 밝히고 있다. 

이로써 법신이란, 무엇인가를 미루어 알 수 있다고 본다. 




문서정보



참조자료 

◈Mun Tokyun 2013/12/18/수/00:42


법신=유위행상을 떠남 +성문,연각과 차별 수승함 +불생(不生)
은 경전에 내용이 나와서 이를 합쳐 미루어 알겠지만, 
그러나 그렇게 설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무엇때문이라고 보는가
에 대해서 추가 설명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문서정보













참조자료 

◈Lab value 2013/12/18/수/07:55

이에 관해 간단히 말하면,

황교수의 아라한-범부차별유사설이 있고 
박교수의 구별수승차별설이 있고
김교수의 실용적 접근설이 있습니다.  

다 일장일단이 있는 해석 접근방법입니다. 

간단히 약술하면,
범부의 상태에서 아라한이 되어 열반 해탈을 증득한다고 할 때 
이 경우에도 그 열반 해탈을 얻지만,
그것은 생하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이와 같은 관계가
성문아라한-연각과 법신과의 관계에서도
 유사하게 성립한다는 것이 
황교수의 아라한-범부차별유사설입니다. 



박교수의 구별수승차별설은
위 황교수의 주장을 반대하는 주장이기도 합니다. 


참고로 박교수가 황교수의 주장을 반박할 때 사용한 비유는
매우 적절한 비판이기도 합니다. 

즉 아라한의 해탈신과
여래의 법신이 무슨 깔창인가. 

하나를 벗기면 또 본래 있고
또 하나를 벗기면 본래 있는
보온 매트 깔창과 같은 관계인가. 


처음의 아라한의 해탈신에 대해서는
그런 관계를 인정해도

다시 법신의 상태에 대해서는
인정하기 힘들다는 비판입니다. 


그러면 법신은 무엇인가.

법신은
아라한의 해탈신과는 구별되는 수승차별의 상태에 대한 
별도의 설명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아이가 어른이 되고 그 어른이 선생님이 되고자 할 때, 
그들 가운데 갑, 을, 병이 모두 선생님이 되었다고 하는 경우 
갑, 을, 병은 다 모습도 다르고 제 각각인데
그러나 다 선생님이라고 칭하게 된다. 

반대로 말하면,
선생님이라고 칭하게 하는 어떤 요소를
그들 갑, 을, 병이 얻어서 
선생님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 갑, 을, 병이 선생님이 될 때
그들 각 입장에서는 자신이 선생님이 되는 것 같이[ 생하는 것처럼 ]
생각되지만,
본래 선생님이란 상태는
갑, 을, 병과 관계없이 본래 그렇게 있었다는 그런 설명방식입니다. 

다만, 이 논의는 박교수가 제시한
이런 비유적 설명외에
자세한 이론적 내용을 모두 옮겨 소개하기에는
조금 복잡한 주장입니다. 


실용적접근설은 황교수와 박교수의 논의가 
단순히 이론적인 논의를 위한 논의 즉 희론의 성격으로서 

실용적으로 법신론에 접근할 때는
단지 아라한과 여래의 상태에는 이런 차별이 있으니,
수행시에 그 방향으로 목표를 두고 
노력을 행해 나가는 것에
오히려 중점을 두고
법신론에 접근해야 한다는 실용적 입장입니다. 


즉 불필요한 이론을 위한 이론적 논의를 깊이 천착하지 말고, 
실용적인 실천 수행론의 입장에서는

우선 당장 해탈을 얻지 못한 상태라면,
해탈을 얻어 해탈신의 상태에 이르러야 하고

그리고 해탈을 얻더라도 그것이 끝이 아니고,
다시 그 다음에는 더 수승한 상태로서 법신을 증득함이
필요하니 이런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더 실천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며, 

이런 내용을 떠나서 이론적 해석을 가하는 것은 
범부의 입장에서는
크게 의미있는 논의가 아니라는 반론입니다. 


대강 여기까지가 최근에
박교수와 황교수 김교수 사이에서 진행된 논의내용이고  
이런 논의의 기초배경이 되는 전통적으로 논의되어 온 
논의내용까지 함께 포함시켜 논의하려면 

법신설에 관련된 자세한 논의를 함께 전개해야 합니다. 



황교수와 박교수의 논의의 큰 차이점이란, 

법신이란 일반 범부에게도
본래는 그 법신의 내용이 갖추어져 있다고
이론상 보아야 하는가. 

그렇지는 않다고 보아야 하는가의 차이에 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비록 실용설의 입장을 취해
일단은 이런 상태를 목표로 해서 
수행을 해나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입장을 취할 수도 있지만, 

목표로 하는 상태들이
각기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가를 명확히 한다는 것은
자신이 목표로 하는 상태가 과연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 것인지를
이해하는 데에서
실용적인 의미를 잃는 것은 아니라는 비판이 가능합니다. 

즉 황교수와 박교수의 논의가
반드시 실용적인 논의가 아니라는 비판은 
곤란하다는 것이 제 개인적 입장입니다.


여하튼 이들 논의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기회가 되는대로 이어서 
진행해나가고자 합니다. 


참고로 위에 소개하지 못했지만,

신교수의 2차원설(승의제,세속제2차원설)도 참조할 만한 내용입니다. 

결국 하나의 법신을 놓고
승의제적 차원에서의 설명과
세속제적인 차원의 설명을 동시에 
제시하는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다만 이 설명은 이런 2차원적인 설명은
유독 법신에만 국한되는 내용이 될 수 없다는 점이 
이론적인 약점으로 보입니다. 




문서정보
















































































▼▼▼일반문서창 

참조자료 

◈Mun Tokyun 2013/12/18/수/12:15


이런 식으로 내용을 제시하면 곤란합니다. 
제가 강조한 바와 같이 논문 형식을 준용해주세요. 

황교수, 박교수, 김교수, 신교수
이런 분들이 실존인물입니까. 
가상입니까?
실존인물이면 실명을 사용하고
해당 논문의 페이지도 기록해 줘야 합니다. 

그리고 이분들이 
제가 아는 그 분들입니까. 

성씨만 알려주고 교수라고 칭하니, 
제 구역에서는 그냥 선생님 칭호 사용하듯 
서로 교수라고 하는데요. 

정식 교수 직위가 있는 분인지도 궁금합니다. 
정식 논문에서 발표한 내용이 아니고
사석의 대화내용이라도 실명을 밝혀주셔야지,

이렇게 두리 뭉실 황교수의 ~설, 이런 식으로 소개하면 
안 된다고 봅니다. 

그나저나 여하튼 내용이 중요하다는 측면에서
이를 문제삼지 않고 내용을 음미해보면  
각 입장이 또 각기 그럴 듯 하기도 합니다. 


그런 논의 차원에서
제 생각도 하나의 학설로 넣어 주세요.
이름하여 
mun 교수의 잠재발현설입니다.

(참고로 제가 의미하는 교수는
일반 의미의 교수와는 다릅니다.
mun씨의 잠재발현설 보다는 표현이 낫다고 보는 차원에서 
교수의 특수 의미로 mun 교수라고 표현합니다. 
지도학생이 lab님을 포함하여 단 3 명인~ 개인교수 )

여하튼 제 잠재발현설의 내용은  

즉 아뢰야식에 법신의 종자가 잠재해 있다가 
발현되는 것이다. 

그래서 법신이 새로 생하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본래 그 법신의 측면에서 보면 
생멸한다고 볼 수 없다. 

이런 주장을 한번 개진해 봅니다. 
검토과정에서 한 번 음미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황교수님의 아라한-범부차별유사설에서는 

아라한이 되어
해탈을 하면
그 해탈 상태가 
새로 얻은 상태라고 보지 않고 

그것도 생멸을 떠난 상태라고 보는 지에 대한 
문제가 따로 해결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어떤 입장에서는 당연하다고 보는 내용이 
다른 입장에서는
논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문서정보
























































▼▼▼일반문서창 

 테이블 


댓글 테이블





◈Lab value 2013/12/20/금/10:01


[pt] ● 타 학설의 인용, 견해의 다툼, 견해로 인한 번뇌, 인생의 스승문제


제가 교수와 관련된 mun님의 글을 보다가 

교수란 관념이 사라는 관념을 불러 일으키고 
다시 3 인행 필유아사 라는 말이 생각나고 
좀 엉뚱하지만 이사와 둔사라는 말도 생각나고 
유여사 라는 말도 생각납니다. 

연구실을 옮겨서 이야기를 하자니까, 
무슨 이야기인가 엉뚱한 감이 있지만, 

이 이야기의 배경은 
http://buddhism007.tistory.com/618


에서 소개한
법신설에 관한 여러 학설의 소개에 있어서 

왜 저작권법에 준해 주장자의 실명을 정확히 
제시하지 않았는가.  
의 논의와 관련됩니다. 

그래서 각 학설의 주장자로 제시된 
황교수, 박교수, 김교수, 신교수 등이 
실존인물인가,
아니면 가공의 인물인가. 

등등을 문제삼습니다. 

물론 이 분들의 학설이 
제가 주장하고자 하는 주장이라면, 

굳이 이렇게 제시하지 않아도 되지만, 
사정이 다르기에 
그와 같이 표현한 점도 있지만, 

반드시 논문 형태로 제시되지 않는 논의라고 하더라도 
타인의 주장 내용은
실명을 밝혀주는 것이 좋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또 사정이 다 다릅니다. 



모든 사람은 스스로 반성해보면 
어제는 이런 생각을 하다가
오늘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과거의 생각을 바꿔 갖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어제 잘못된 생각을 한 번 하였다고 하여, 

그것을 실명을 거론하면서 
평생 그것을 비난, 비판하고 나서면 

그것이 서로에게 매우 심한 감정상 대립과 불화를 

일으키는 경우가 잦습니다. 

부처님을 가장 괴롭힌 인물로 알려진 제바달다라는 인물도 
세세생생 그런 계기로
부처님을 괴롭힌 것으로 전해지는데 

그 최초의 계기가 
학술 발표에서 모욕을 당했기 때문인 것으로 전해집니다. 


즉 제바달다가 
자신이 대중들 앞에서 무엇무엇이라고 발표했는데 

그 잘못된 점을 부처님으로부터 지적받고 
분심을 일으킨 다음 
그 이후부터 세세생생 부처님을 괴롭히겠노라고 
굳은 서원을 일으켜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 사건의 전말입니다. 


mun님이 자신이 여러 지도학생을 가르치는 

개인 교수이기 때문에 
자신도 교수라고 명칭을 붙이고 
자신의 주장도 제시하라고 하고 
또 그 지도학생에 저도 포함시키는데 

이 말이 전혀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것이 3인행 필유아사라는 내용입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필요한 지식이 한도 끝도 없고 
자신이 아는 내용 외에 다른 분야 다른 내용에서 
자신을 가르쳐주는 분들은 모두 자신의 스승입니다. 


그래서 그런 의미는 맞다고 봅니다. 


저도 오늘 운동을 나가는데 

거기에도 많은 스승님들이 계십니다. 
정식 코치 선생님 외에도 
잘못된 습관을 지적해주고 
고쳐주는 분들이 많습니다. 

길 가는데 길을 몰라 
지나가는 분에게 물을 때 
잘 알려주시는 분이 많은데 
이런 분들은 

또 그런 의미에서 모두 자신의 스승입니다.  

그래서 무언가 모르는 것을 알려주고 
이끌어 주는 분은 모두 자신의 스승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는 
미생물이나 곤충도
 다 그런 존재로 볼 수 있습니다. 

또 한편, 어떤 경우는 배우지 않아야 할 내용만 
자꾸 보여주고 가르쳐 주는 분도 계십니다. 
그런데 이 경우도 또한 가르쳐주어야 할 내용을 
반대 면을 통해 가르침을 주시는 
스승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경우는 정면 교수가 아닌, 
반면 교수라고 이름붙일 수 있습니다. 

우스개 소리로 한다면 이 경우들은 
성씨가 정씨인, 정 교수가 있고 
성씨가 반씨인, 반 교수가 있다고 표현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여하튼 이런 저런 사유로 
모든 생명이 다 자신에게 

스승과 같은 분이다라고 생각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스승은 스승인데 
각 스승들이 다른 주장을 제시할 때 
이것을 어떻게 소개해야 하는가 등이 문제됩니다. 

여기에 이사와 둔사의 관념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자어로 되어 있어서 
그 뜻이 잘 들어오지 않을 수 있는데 

이사는 날카로운 번뇌 
둔사는 둔한 번뇌 정도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사는 신견, 변견, 사견, 견취견, 계금취견,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한마디로 진리 탐구 과정에서 일어나는 번뇌로서, 성질이 날카로워 
중생의 마음을 괴롭히는 번뇌입니다. 

반면 둔사는
탐(탐욕), 진(분노), 치(어리석음), 만(자만, 교만 등), 의심(불신)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앞의 이사가 진리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일어나는 날카로운 번뇌임에 대하여 
이는 사물의 참된 모습을 깨닫지 못하여 일어나는 번뇌로, 그 성질이 둔하므로 
이와 같이 이름을 구별해 붙이게 됩니다. 




문제는 학자들간의 견해 주장과정에선

이런 이사와 둔사가 다 함께 관련되어 문제를 일으킬 
여지가 대단히 많다는 점입니다. 

같은 논문 발표회에서 한 번 만난 이후 
평생을 서로 원수로 지내는 이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그저 아닌 것처럼 지낼 뿐
속 마음이 그런 상태로 서로를 

대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서로 견해가 달라서 논의하는 가운데 

수치를 당하거나 감정을 상하게 되어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좋은 뜻으로 논의를 한 것 뿐이고 
또 그 논의는 이후 다시 검토하여 
더 좋은 견해로 바꿔 가질 수 있는 문제인데 
한번 상처를 받거나 자존심이 상한다고 생각하는 경우, 
자신의 견해가 좀 문제가 있어도 
다시 되돌리지 않고
계속 고집해 나아가는 증상도 

갖게 됩니다. 

이전 글에서 mun 님이 
잘못된 글이나 그림, 사진, 영상...등등은 
모두 서로의 몸을 베는 칼과 같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그것은 바로 그런 바탕에서 
이사와 둔사의 작용으로 일어나는 현상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단순히 대화과정에서 
의견을 개진함에 불과했다거나, 
앞으로 더 논의할 하나의 가설 차원에서 
주장을 해보았다거나, 
또는 자신의 이런 생각, 저런 생각 들이 있는데, 

이것이 자신의 결론적 생각이 아니고 

검토해 봐야 할 내용들에 불과하다는 경우 등등에서 

실명을 거론하면서
누구의 무슨 설이다. 

이렇게 접착제를 붙여 놓으면 
앞에서 나열한 여러 문제현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논서에 보면 
유여사란 명칭이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有餘師說 이란 문구로 나타나는데, 
유여사가 말씀하시길.
이런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는 쉽게 생각하면 
자동차 문제에서 자주 등장하는
김여사와 같은 경우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동차로 각 상황에서 가지가지 문제를 일으키는 분이 
반드시 김씨는 아니고 또 여자만은 아님에도 
김여사로 표현하고
그 실명을 제시하지 않는 것은 
그 상대의 입장에서는 무안한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고 
논의에서 그렇게 중요한 내용은 또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논의과정에서 
참조로 검토해 볼만한 이러이러한 주장이 있을 때 
그런 주장을 소개하고자 할 때는 
어떤 다른 스승들은 ~~
이렇게 제시하면서 
그런 다른 주장을 같이 소개하고 검토한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더 논의를 해보아야 겠지만, 
그런 논의나 비판 검토 과정에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유여사가
정말 이사와 둔사를 일으키고 
문제가 복잡해지지 않기 위한 
조치이기도 합니다. 


다른 분들의 학설이나 주장을 소개하면서 
왜 본인의 견해는 밝히지 않는가. 

각설 종합 취사 선택 절충설..이 정도가 
제 연구과정에서의 입장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황교수, 박교수, 김교수, 신교수, 이교수..

이런 명칭은 실존인물이던
가상의 인물이던 
정말 황씨라서 황교수이던 
아니면 그냥 가칭 황교수이던 
크게 신경쓸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자꾸 물들어 집착이나 선입견을 일으키면, 
H교수, P교수, K교수, S교수,  L교수,  Y교수
이렇게 바꿀 수도 있고 

심지어 교수라는
명칭에 너무 염착심이 생겨나면, 
또 다른 적절한 명칭을 붙여야 하리라 봅니다. 

강사님이나 선생님? 박사? 석사? 


여하튼 그런 취지와 그런 차원의 명칭임을 
이해하시고 

너무 엄격 집착병적 차원에서 
문제를 바라보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런 경우에는 연극 공연을 놓고 
스승 모독이라고 항의하는 경우가 되는데요.
문제가 안 된다는 것이 아니고 
양해를 구한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참고자료 [교수와 여제자]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8169106&ctg=1502


또 이런 문제를 생각하다보면 
자신이 박사 학위가 없다고 오해하지 않도록 
타이틀 명도 doctr 라고 한
어떤 유여사 님도 생각납니다. 

여하튼 집착하면 문제가 되고 
집착하지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 
내용이라고 봅니다. 
prajna 님에게 중재를 요청했더니 
아예 나타나지를 않으시길래 
mun 님에 대한 답변차원에서 

...


● 타 학설의 인용, 견해의 다툼, 견해로 인한 번뇌, 인생의 스승문제
○ 인간관계 


Ω♠문서정보♠Ω

™[작성자]™ Lab value

◑[작성일]◐ 2013-12-20-금-10-38

♨[수정내역]♨

▩[ 디스크 ]▩ [DISK] ○ 인간관계 o:/G/G/10/휴게소잡담공간/2013-12/2013-12월_댓글보전.txt ♠● 타 학설의 인용, 견해의 다툼, 견해로 인한 번뇌, 인생의 스승문제

ж[ 웹 ]ж [web] http://story007.tistory.com/912 ♠● 타 학설의 인용, 견해의 다툼, 견해로 인한 번뇌, 인생의 스승문제

⇔[ 관련문서]⇔
[pt] http://buddhism007.tistory.com/618

{!-- 관련 문서 링크--}
인터넷 상의 목록 http://thegood007.tistory.com/192

디스크 상의 목록 ●행복론각론 o:/G/G/03/ghpt/ghpt-catalog.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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