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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현량 본문
현량
[한문]現量
[범어]pratyakṣa-pramāṇa
[티벳]rjes su dpag pa
[영어]direct perception
인명(因明)의 3양(量) 중 하나.
직접적인 지각(知覺)에 의해서 사상(事象)을 인식하는 것.
색(色) 등의 모든 법을 분별하여 헤아리는 인식(認識) 작용을 가리킴.
[동]진현량(眞現量).
● From 고려대장경연구소 불교사전
현량
[한문]現量
인명(因明) 3량인 현량(現量)ㆍ비량(比量)ㆍ비량(非量)의 하나.
심식(心識) 3량의 하나.
비판하고 분별함을 떠나서 외경계의 사상(事象)을 그대로 각지(覺知)하는 것.
예를 들면,
맑은 거울이 어떤 형상이든 그대로 비치듯,
꽃은 꽃으로 보고,
노래는 노래로 듣고,
냄새는 냄새로 맡고,
매운 것은 매운대로 맛보고,
굳은 것은 굳은대로 느껴서,
조금도 분별하고 미루어 구하는 생각이 없는 것.
● From 운허 동국역경원 불교사전
○ 2019_1106_151633_can_bw0_s12 화순 계당산 쌍봉사
○ 2019_1106_123310_nik_Ab27 화순 영구산 운주사
○ 2020_1114_132401_can_CT28 삼각산 도선사
○ 2019_1104_113103_can_ab51 구례 화엄사 구층암
○ 2020_0907_140940_can_BW17 양산 통도사
○ 2020_1114_162604_can_CT28 삼각산 도선사
○ 2018_1022_132318_can_ori 공주 계룡산 갑사
○ 2020_0905_114656_can_CT33 오대산 월정사
○ 2018_1023_142842_can_AB7_s12 예산 덕숭산 수덕사
○ 2019_1201_164102_nik_CT27 원주 구룡사
○ 2020_0907_145001_nik_Ab27 양산 통도사
○ 2020_1017_163622_nik_ar14 삼각산 화계사
○ 2020_1017_153751_nik_BW25 삼각산 화계사
○ 2020_1002_121547_nik_CT28 파주 고령산 보광사
○ 2020_1114_131204_nik_AB4_s12 삼각산 도선사
○ 2020_1017_145739_can_ab40 삼각산 화계사
○ 2020_1017_151259_can_ct8 삼각산 화계사
○ 2019_1106_124257_can_CT27 화순 영구산 운주사
○ 2020_0905_164136_can_ar12 오대산 적멸보궁
○ 2018_1024_160411_can_ori 부여 고란사
○ 2019_1106_124227_nik_exc_s12 화순 영구산 운주사
■ 추가적 불교사전 상세 참조사항
○ [pt op tr]
■ 불교사전 링크 및 불교 사전 출처 종합 안내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0/04/blog-post_21.html
●● 관련정보 사용페이지
----[‡사용한 다른 페이지]---
♥단상♥정신내용을 얻는 과정[현량 비량 성교량등]과 옳음의 문제
옳고 그름의 판단을 위해 인식론이나 논리학 인명론 등의 지식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현량을 통해 얻는 내용을 옳다고 잘못 여기는 인명론 입장이 있다.
그런데 이것이 잘못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망집에 바탕해서 현실을 대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먼저 간단히 살피고자 한다.
현실에서 한 주체가 생활하는 가운데 많은 내용을 얻는다.
예를 들어 눈을 감은 상태로 지내다 눈을 뜬다고 하자.
그러면 그 순간에 일정한 모습을 보게 된다.
또 소리도 듣고 냄새도 맛고 맛도 보고 촉감도 얻는다.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 좋다 아늑하다 상쾌하다 우울하다 등등의 느낌도 받는다.
한편 일정한 분별도 한다.
그리고 꿈도 꾼다.
이런 식으로 다양한 형태의 내용을 얻는다.
이렇게 현실에서 많은 감각현실, 느낌, 분별 내용등을 얻는다.
그래서 그것을 나열한다고 하자.
그렇다고 그것을 옳다 그르다라고 하기 곤란하다.
예를 들어 어떤 학생이 단순히 4 라는 숫자를 제시한다고 하자.
그렇게 4 라는 숫자를 생각해 제시한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이를 옳다 그르다라고 하기 곤란하다.
이런 것과 마찬가지다.
어느 상황에서 좋은 느낌을 느낀다고 하자.
그렇다고 그것이 옳다고 할 것인가 그르다고 할 것인가.
그렇게 판단하기 곤란하다.
또는 연필이란 생각을 하고나서 이를 통해 기차를 연상해 떠올린다고 하자.
그 상황에 그런 경로와 과정으로 그런 기차란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그런 기차를 옳다거나 그르다고 하기 힘들다.
침대에 누어서 자면서 꿈에서 바다에서 황금을 얻는 꿈을 꾸었다고 하자.
그런 꿈을 꾼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그런 황금꿈 내용이 옳은가 그른가를 말히기 곤란하다.
그래서 어떤 내용을 단순히 얻는 것과 그것의 옳고 그름의 판단은 다른 문제다.
현실에서 한 주체가 다양한 내용을 얻는다.
이 경우 한 주체가 그런 내용을 각기 어떤 과정으로 얻게 되는가를 살필 수도 있다.
그런데 어떤 내용을 어떤 과정을 통해 얻는 사정만으로 그렇게 얻어진 결과를 곧 옳다고 하기도 곤란하다.
한편, 인명론자들은 감각현실을 얻는 과정이 직접적이라고 제시한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그렇지도 않다.
소리를 듣는 과정 하나만 나열해도 오늘날 생리학자는 대단히 복잡한 과정을 나열한다.
눈으로 볼 때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안경을 써서 보는가. 아닌가에 따라 얻는 모습이 다르다.
그리고 눈을 통해서 망막의 시신경을 거쳐 모습을 보게 된다고 제시한다.
그래서 직접적으로 곧바로 얻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어느 요소만 조금 달라져도 다른 결과를 얻는다.
다만 어떤 모습을 보는 경우 그 주체는 그런 경로를 일일히 파악하기 곤란하다.
단지 매순간 얻어진 결과물만 얻게 된다.
그래서 마치 감각현실은 그저 곧바로 얻게 된다고 잘못 이해하는 것 뿐이다.
어떤 감각현실을 대해서 일정한 관념분별을 한다.
이것은 관념영역에서 추리 등을 통해 일정한 내용을 판단하는 것과는 성격이 다르다.
그런데 이 경우도 사정이 비슷하다.
그런 감각현실을 얻고 일정 부분을 묶고 나눈다.
즉 초점을 맞추고 구획을 한다.
그래서 일정 부분은 꽃이라거나 바위라는 분별을 일으킨다.
이런 경우 그 분별을 통해 일정한 관념내용을 곧바로 관념영역에서 일으키게 된다.
그래서 이런 경우도 직접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그 과정을 자세히 검토하면 눈으로 무언가를 보는 과정과 사정이 비슷하다.
즉 간단한 것은 아니다.
이는 감각현실을 대하면서 멍한 가운데 아무런 분별을 행하지 않는 경우
또는 일정한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서 면밀히 살피고 분별하는 경우 등을
서로 대조해 봄으로써 그 차이를 이해할 수 있다.
또 구체적으로 그 이전에 어떤 분별을 한 상태에서 대하는가에 따라서도 영향을 받는다.
그 이전에 자라를 보고 놀랐다고 하자.
그런 가운데 솥뚜껑을 대하면 또 놀랄 수도 있다.
이런 내용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도 어느 요소만 조금 달라져도 다른 결과를 얻는다.
그런데 각 경우 그런 내용을 어떤 과정을 통해 얻는가의 문제와
그렇게 얻어진 내용이 옳은가 그른가 판단문제는 별개 문제다.
옳은가 그른가 판단은 다음을 놓고 생각해야 한다.
어떤 주체가 무언가를 대상으로 해서 일정한 과정을 거쳐서 어떤 내용을 얻는다고 하자.
여기에서 먼저 무엇을 대상으로 얻었는가.
또 어떤 과정을 거쳐 얻었는가.
그 내용이 무언가
이런 것들이 다 함께 문제된다.
예를 들어 앞에서 비유를 든 4 라는 숫자를 생각해보자.
만일 그 학생이 1 더하기 3은 얼마인가라는 문제를 대해서
이것을 손가락을 꼽아서 4 라는 답을 얻었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 4 는 그런 상황에서 그 문제와 관련해 옳은 답이라고 할만하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 않다고 하자.
예를 들어 누군가 철수에게 철수 앞에 있는 물건이 무엇인가라고 물었다고 하자.
그런데 철수가 뒤를 보고 벽에 써 있는 숫자를 읽었다.
그래서 4 라고 답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엉뚱한 내용이다.
이 각 경우에 철수가 4 라는 숫자를 마음에서 일으켜 얻는 것은 마찬가지일 수 있다.
그런데 각 경우마다 옳고 그름의 판단은 달라진다.
감각현실을 한 주체가 단순히 감각과정을 거쳐 얻었다고 하자.
그래서 이런 경우 그런 감각현실을 얻었다는 그 사실만으로
그 감각현실을 옳다 그르다라고 제시하기 곤란하다.
여기서는 그가 무엇을 대상으로 그런 내용을 얻었는가가 우선 문제된다.
그런데 감각현실은 마음 내용이다.
그리고 그 주체가 얻는 내용 안에 그런 내용을 얻게 한 외부대상은 얻지 못한다.
또 그가 얻은 감각현실 내용은 실재의 실상도 아니다.
그런 사정으로 그 내용은 옳다고 할 수 없다.
=> 감각현실처럼 직접적으로 어떤 내용을 얻는다.[ 현량 ]
그러면 그런 사정만으로 그 내용은 옳다.
이런 인명론의 주장은 잘못이다.
● 감관을 통해 얻는 감각현실이 그 자체로 옳다고 여기는 잘못의 문제
현실에서 얻은 감각현실에 대해 그 자체로 그 내용이 옳다고 잘못 혼동을 일으키게끔 하는 사정이 있다.
그 사정을 이전에 제시했다.
그런데 여기서 간략하게 그 사정을 다시 살펴보자.
http://buddhism007.tistory.com/228#056 ☞○ 마음과 색의 의미에 관한 논의
http://thegood007.tistory.com/1172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
03fl--ghpt/r1030.htm
[img2]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1 이라는 관찰자가 눈을 떠서 본 내용을 그림으로 표시해보았다.
이 상황에서 옆에 철수라는 2 를 세워 놓고 실험을 한다.
앞에 꽃4 를 놓고 2 에게 눈을 수저로 가리거나 감으라고 하면 꽃이 안 보인다고 보고한다.
다시 눈을 뜨라고 하면 2 는 꽃모습이 보인다고 한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관찰자 1은 별 변화를 파악할 수 없다.
그래서 그런 변화는 2 영역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로 추정하게 된다.
다만 관찰자 입장에서는 매 순간 2의 내부에서 얻는 내용 자체를 직접 얻어낼 수는 없다.
단지 위 사실로 그렇게 추정할 뿐이다.
두번째 실험이다.
이 상황에서 관찰자 자신도 철수가 행한 것처럼 해본다
마찬가지 결과를 경험하게 된다.
눈을 뜨면 위 그림 전체와 같은 모습이 보인다.
눈을 감으면 보이지 않는다.
이런 내용이다.
그런데 이 두 간단한 실험과정에서 대부분 착각과 혼동을 일으키기 쉽다.
먼저 처음 철수의 실험을 놓고 보자.
관찰자 1이 생각할 때는 자신이 보는 4라는 꽃을 대상으로 2 의 눈이 관계해 2 가 무언가를 본다고 '잘못' 여기게 된다.
위 실험만 놓고 보면 마치 이들이 서로 관계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2 의 눈을 가리면 보지 못한다.
2 의 눈을 가리지 않고 뜨게 하면 본다.
이런 관계성이 파악된다.
또 4 라는 꽃을 치우면 보지 못한다.
그런데 다시 앞에 갖다 놓으면 본다.
그래서 이런 관계성으로 4를 2 의 눈이 대하는 대상이라고 '잘못' 여기게 된다.
그런데 여하튼 그 상황에서 자신과 철수를 다시 비교해보자.
이 경우 자신도 4 의 모습을 본다.
앞 실험에서 4 를 2의 눈이 대하는 대상으로 잘못 여긴다고 하자.
그러면 곧바로 이 경우에도 4 를 1 자신의 눈이 대하는 대상으로 잘못 여기게 된다.
그런 가운데 다시 1 자신의 실험 상황으로 들어와 보자.
자신이 이 상황에서 눈을 감는다.
그러다가 눈을 뜬다고 하자.
이 때 자신이 눈을 떠서 보는 모습이 무언가 하면 바로 4 의 모습이다.
그래서 이 경우 관찰자 1은 다음과 같은 혼동을 일으키게 된다.
4 라는 부분은 철수나 자신의 눈이 대하는 대상이라고 잘못 여겼다.
그런 가운데 자신이 눈을 떠서 보는 꽃의 모습은 바로 그 4 다.
그래서 자신의 눈이 보는 4 라는 꽃 모습에 2 중적인 지위를 부여한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눈이 대한 대상이다.
그런데 그것은 곧 자신이 눈을 통해 보게 된 감각현실 내용이기도 하다.
이렇게 혼동한다.
이런 상태에서는 자신이 얻은 그 감각현실은 대상과 완전히 일치하는 내용이라고 잘못 여기게 된다.
그래서 인명론에서 그런 주장을 하는 배경이 된다.
그러나 위 주장은 모두 잘못된 내용이다.
우선 철수는 결코 자신이 보는 자신의 마음안 내용을 대상으로 무언가를 보는 것이 아니다.
=> 그래서 4 라는 부분은 철수의 눈이 대하는 대상도 아니다.
한편 4 라는 부분은 관찰자 1이 눈을 떠 본 내용일 뿐, 1 이 대하는 대상도 아니다.
그래서 이 부분의 잘못된 판단을 먼저 잘 시정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자신이 눈을 떠 본 내용을 평가해야 한다.
그것은 그 순간에 자신이 감각을 통해 얻어낸 내용이다.
그러나 그것 뿐이다.
그리고 그런 내용을 얻게 한 외부 실재의 대상이나 실재영역의 사정은 파악되지 않는다.
그래서 단지 그런 내용을 얻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그것을 옳다거나 그르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더욱이 사과를 하나 놓고
눈으로 보고 두드려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맛고 손으로 만진다고 하자.
이 경우 각 감관을 통해 얻는 감각현실은 서로간에 대단히 엉뚱하다.
그래서 이들을 비교하더라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이 경우도 앞의 오류가 시정이 되지 않으면 다음처럼 또 잘못된 판단을 이어나가기 쉽다.
즉 눈으로 보는 그런 색을 대해서 자신이 촉감을 얻는다고 잘못 여기기 쉽다.
현실에서는 그렇게 보인다.
즉 자신의 손이 사과를 닿는 모습을 눈으로 본다.
바로 그 순간에 촉감을 느낀다.
이런 경험을 반복한다.
그래서 자신의 눈으로 본 그 모습이 대상이라고 잘못 여긴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사과를 댄 자신의 손 모습이 그런 촉감을 느끼는 감관이라고 잘못 여긴다.
그런데 사정은 그렇지 않다.
한편 이 상황에서 처음 그 모습을 촉감을 얻게한 대상이라고 판단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더 이상하다.
그 촉감은 그런 색상 모습과는 전혀 이질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렇게 얻는 촉감을 옳은 내용이라고 하기 곤란하다.
그런데 사실은 이 상황에서 눈으로 본 그 내용은 촉감을 얻게 한 대상이 아니다.
또한 얻어진 촉각정보 안에 그 촉각을 얻게한 대상이 들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에 준해 시각의 과정도 마찬가지로 이해해야 한다.
이 사정은 그림에 그려진 2의 상황을 놓고 판단하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1이 눈을 뜨고 감고 실험하는 과정을 그 옆에서 2 가 거꾸로 관찰한다고 하자.
그 상황에서 2는 다음처럼 잘못 여길 수 있다.
즉 2 가 본 내용 가운데에서
4^ 라는 부분을 대상으로 1^ 의 눈부분이 관계해서 1^ 라는 사람이 어떤 내용을 본다.
이렇게 잘못 여기기 쉽다.
그리고 그 1^ 가 본 내용은 1^ 부분 안에 들어 있게 된다.
이렇게 잘못 여기기 쉽다.
그런 가운데 2는 또 자신이 보는 과정도 이와 마찬가지로 잘못 이해하기 쉽다.
즉 자기 자신도 2^ 부분으로 잘못 여긴다.
그런 가운데 2^ 자신도 4^ 라는 꽃 부분을 대상으로 해서 무언가를 본다고 잘못 여긴다.
이 내용을 관찰자 1이 위 그림에서 파악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런 판단이나 보고가 모두 엉터리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처음 1이 행한 판단도 사정이 같다.
그래서 이들은 잘못된 판단이다.
그런 사정으로 1이나 2가 감각을 통해 얻는 내용은 대상과 일치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단지 감각을 통해 어떤 내용을 얻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옳은 지식이라고 할 수 없다.
관념분별의 경우는 이와 또 성격이 다르다.
그렇지만 관념분별이 감각현실을 대상으로 이뤄질 때는
모두 같은 사정을 갖는다.
감각현실은 관념분별이 아니다.
그리고 관념분별은 감각현실이 아니다.
그래서 관념으로 행하는 일체 판단은 모두 희론적 성격을 본래 갖는다.
그리고 이런 희론을 통해 얻어야 할 내용은 다음이다.
본래 사정이 그렇지 않다.
평소 행하던 그런 판단을 잘못된 망상분별이다.
이런 사정을 이해해야 한다.
부처님이 제시하는 내용도 그런 취지다.
금강경에서 그 사정을 다음처럼 제시한다.
상은 실로 상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상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이런 사정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 관념분별을 일으키는 다양한 경로
한편 한 주체가 얻는 내용은 오직 감각현실에 국한하지 않는다.
관념분별도 현실에서 한 주체가 일으켜 얻는다.
그리고 이 관념분별을 일으켜 얻는 경로나
그 내용의 옳고 그름이 문제된다.
우선 관념분별은 대단히 다양한 경로로 얻게 된다.
감각현실을 얻는 상태에서 곧바로 관념분별을 일으킬 수 있다. [5구동연의식]
그리고 어떤 경우는 단순히 관념을 떠올릴 수 있다. [독산의식]
예를 들어 과거에 기억한 내용이 갑자기 불현듯, 떠올려질 수도 있다.
또는 어떤 것을 통해 연상해 떠올릴 수도 있다.
감각현실에서 연필부분을 대하고 기차를 연상해 떠올리는 경우와 같다.
또는 단순히 사과를 생각한 다음 이 관념을 바탕으로 바나나라는 과일을 떠올릴 수도 있다.
또 다른 이가 어떤 말을 해서 그 말을 통해 떠올릴 수도 있다.
또 책을 읽고 보아서 떠올릴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이 말을 해주어서 그런 분별을 할 수도 있다.
또는 어떤 이가 비유적인 이야기를 해주어서 일정한 판단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새로운 비행기가 나타났다고 한다.
그런데 보지 않아서 잘 모른다.
그런데 그가 참새 비슷한 형태라고 설명해준다고 하자.
그러면 그런 내용을 통해 비슷한 내용을 떠올릴 수 있다.
또는 일정한 내용을 바탕으로 추론을 해서 어떤 내용을 판단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S 는 M 이다.
M 은 P 다.
그래서 S 는 P 다.
이런 식으로 앞 부분과 형태와 내용이 다른 새로운 판단을 이끌어낼 수도 있다.
이런 경우도 있다.
이런 식으로 관념 분별을 행하고 얻는 경로가 다양하다.
꿈 내용이나 정려 수행과정에서 얻는 내용도 이와 성격이 비슷하다.
이들은 감관을 통해 얻는 감각현실로 얻는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각 경우 얻는 내용들은 제 각각 그런 일정한 과정과 경로로 얻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그런 관념내용을 일으키고 얻었다는 자체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그 관념내용이 옳다 그르다고 하기는 곤란하다.
이 경우도 그 관념은 무엇을 대상으로 해서 얻었는가.
또 그 관념은 어떤 경로와 과정으로 얻게 되었는가.
그리고 그렇게 일으키게 된 관념은 어떤 내용인가.
이런 것이 함께 문제된다.
○ 감각현실부분에 대해 일으키는 관념분별의 경우
어떤 감각현실의 일정부분을 대상으로 어떤 관념을 일으키는 경우만 우선 살펴보자.
예를 들어 자신의 안경이 어디에 있는가라고 찾는다고 하자.
이 경우 방에서 안경을 찾는다고 하자.
그런데 아직 눈에 안경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자.
그래도 그 마음 속에는 찾는 안경에 대한 내용을 떠올릴 수 있다.
이는 그 성격이 관념내용이다.
그런데 한참 지나 그가 방의 한 부분에서 안경을 찾았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 안경이 어디 있는가를 묻는다고 하자.
그러면 그 부분을 안경이라고 가리키게 된다.
이 때 그가 손으로 가리키는 그 부분은 앞 단계에서의 관념내용이 아니다.
그가 손으로 가리킨 그 부분의 정체는 사실은 감각현실이다.
즉 그의 마음안 내용이다.
그런데 대부분 이 부분을 그 자신 외부에 있는 외부 세계로 잘못 이해한다.
또 그것을 자신의 감관이 대하는 외부 대상으로 잘못 이해한다.
또 그것은 자신의 정신 밖에 있고, 정신과는 별개의 것으로 잘못 이해한다.
또 그것은 자신이나 영희 철수가 다 함께 대하는 외부의 객관적 실재라고 잘못 이해한다.
그런데 그가 가리킨 그 부분의 본 정체는 그 마음안 내용이다.
그리고 그것은 마음안 내용 가운데에서 감각현실이다. 즉 관념내용이 아니다.
따라서 이 부분을 주의해야 한다.
여하튼 그는 그는 현실에서 그런 부분을 가리켜 그가 찾던 안경이라고 하게 된다.
이번에는 반대로 물어보자.
그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그 부분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고 하자.
그러면 그는 그 부분은 안경이라고 답을 하게 된다.
이는 그런 관념분별을 바탕으로 헌실에서 잘못 상을 취하는 현상이다.
실상(實相 dharmatā ; dharma-svabhāva) - 상(相 Lakṣaṇa ) - 상(想 Saṃjña)의 관계에서
관념분별은 상(想 Saṃjña)에 해당한다.
그런데 어떤 이가 일정한 관념분별 상(想 Saṃjña) 을 일으킨다고 하자.
그런 가운데 일정 감각현실 부분 즉 상(相 Lakṣaṇa )을 그런 내용이라고 가리킨다.
이것이 경전에서 말하는 상을 취하는 현상이다.
현실에서는 이렇게 상을 취한 바탕에서 행위해 나가고 머물게 된다.
이것이 그처럼 잘못 상을 취하고 행하고 머무는 현상이다.
그리고 안경을 찾는 현실 과정이 모두 이에 해당한다.
또는 반대로 일정 부분이 무언가 물을 때 그 부분은 안경이라고 답하는 현실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모두 그런 분별을 바탕으로 그런 부분이 그것이라고 잘못 망상분별을 일으키는 현상이다.
그런 부분에는 그가 생각하는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럼에도 이 경우 그는
그런 부분에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안경이 '있다'고 잘못 여긴다.
또는 그런 부분은 곧 그런 안경'이다'고 잘못 여긴다.
그렇게 잘못 여기기에 그런 부분을 그렇게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이다.
또 그 부분이 무엇인가의 물음에 그 부분은 안경이라고 답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망상분별이라고 칭하게 된다.
이제 그런 부분을 놓고 그런 분별을 행한다고 하자.
이 경우 그 관념은 감각현실이 아니다.
또 그 감각현실 부분도 관념이 아니다.
그래서 본래 그 내용은 그와 관련해서는 옳다고 할 내용이 아니다.
그래서 옳고 그름을 판단할 때 이런 사정으로
그런 감각현실을 대해서 그런 분별을 일으키는 것은 모두 옳다고 할 수 없다.
한편 그런 사정으로 관념영역에서만 닫혀 판단을 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이들 내용은 끝내 감각현실 영역 및 실재 영역과는 떨어지게 된다.
한편 설령 감각현실이나 실재 영역들을 대상으로 관념분별을 행한다고하자.
그렇다해도 그런 판단 일체는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일치 관계가 성립하기 곤란하다.
차를 한잔 마신다고 하자.
아무리 그것을 관념분별하거나 언어로 기술해도 그것만으로
그것이 마시는 차맛이 될 수는 없다.
이런 사정이 이를 말해준다.
그래서 이런 입장의 분별 판단은 그 일체가 희론의 성격을 갖게 된다.
다만 그런 분별을 통해 현실의 그런 사정을 이해하게 된다면
그 분별은 그런 의미에서 가치를 갖는다.
이런 사정이 『금강경』에서 제시하는 뗏목의 비유와 관련된다.
즉 부처님이 설한 내용은 일체가 그런 성격을 갖는다.
○ 실용적인 측면에서 행하는 관념분별의 타당성 문제
한편, 현실에서 분별을 행할 때 다양한 측면에서 분별하게 된다.
어떤 이가 감각현실의 어떤 부분을 대하여 그것은 a 라고 분별한다고 하자.
예를 들어 손가락으로 가리킨 부분은 사과라고 분별하는 경우와 같다.
이 경우 그 주체는 현실에서 그에 바탕해 또 다른 분별을 이어서 행하게 한다.
우선 a 는 어떤 모습인가를 판단하기도 한다.
그 사과는 둥근가. 아니면 네모인가를 판단하는 경우와 같다.
또 그 a 는 어떤 성품을 갖고 있는가 어떤 기능을 갖고 있는가를 판단하기도 한다.
그 사과는 딱딱한가. 맛이 단가 신가 등도 이런 판단에 해당한다.
사과는 굴리면 굴러가는가 아니면 멈추는가 폭발하는가 이런 것도 이에 해당한다.
한편 a 를 구성하는 각 부분은 각기 무엇들인가를 분석해 판단하기도 한다.
사과는 그 안에 육질과 씨가 들어 있다는 판단이 그런 경우다.
또는 a 를 포함하고 있는 전체 부분은 또 무언가를 판단하기도 한다.
사과는 전체적으로 과일 열매에 속한다.
사과는 식탁 선반에 들어 있다 이런 판단이 그런 것이다.
또 그런 가운데 a 는 다른 부분 b,c 들과는 어떤 관계에 놓이는가를 판단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그 사과는 책상 위에 있는 것인가, 안에 있는 것인가. 등도 이런 판단의 하나다.
한편 이제 무엇이 그런 a 를 나타나게 했는가 그 원인을 찾아 나서기도 한다.
사과는 이 씨에서 나오는가 아니면 지우개에서 나오는가 이런 문제와 관련된다.
또 a 는 이후 무엇을 나타나게 하는가를 그 결과를 찾아 나서기도 한다.
사과는 이후 어떤 형태로 되는가. 이런 것도 이와 관련된다.
그리고 사과를 먹으면 그 이후 신체는 어떤 변화를 일으키게 되는가도 이와 관련된다.
이처럼 다양한 판단을 이어서 행하게 된다.
여기서 현실에서 어떤 판단이 실용적으로 유용한 경우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나뉜다.
그런데 이는 처음 어떤 판단 내용이 대상과 일치하는가 여부로 옳고 그름을 판단한 것과는 다르다.
이제 이 경우를 살펴보자.
우선 현실에서 대부분 망집을 바탕으로 현실을 대한다.
예를 들어 사과가 어디 있는가라고 묻는다고 하자.
이 경우 그가 처음 사과를 보지 못한 경우에도 마음에서 떠올릴 수 있다.
이는 그 성격이 관념내용이다.
이후 그가 눈을 떠서 사과를 보았다고 하자.
그러면 그는 자신이 얻은 감각현실 일정 부분을 사과라고 가리키게 된다.
그리고 그 부분이 사과라고 그 주체는 그런 부분이 곧 그런 a 라고 잘못 여기고 임한다.
이것이 잘못된 망상분별이다.
이 내용을 이미 앞에서 보았다.
그가 가리킨 그 부분은 그 본질이 감각현실이다.
그리고 감각현실은 관념분별이 아니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옳은 판단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판단을 바탕으로 대부분 현실에서 생활한다.
그래서 살아서 죽을 때까지 이런 망상분별에 바탕해서 업을 행해 나가게 된다.
이것이 생사고통을 일으키는 근본이 된다.
그러나 여하튼 이런 분별은 그런 바탕에서는 대단히 유용하고 타당한 판단이라고 여기게끔 된다.
그 사정은 다음과 같다.
예를 들어 사과나 안경을 찾는다고 하자.
이 경우 그가 방안을 살피다가 사과와 안경을 찾았다고 하자.
그래서 손가락으로 일정부분을 사과나 안경이라고 가리킨다고 하자.
이 상황이 상을 취하는 현상이다.
그리고 잘못된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임하는 상태다.
사정이 이와 같음을 앞에서 이미 보았다.
그렇지만, 이 경우 사과나 안경을 그렇게 가리킨 경우와
그렇지 못한 경우는 현실에서 차이가 크다고 여기게 된다.
예를 들어 위 상황에서
어떤 이가 고무지우개를 붙들고 안경이라고 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 상대가 너무 어려서 언어 생활 자체가 잘 안되는 상태일 수도 있다.
또는 아예 지능이 낮거나 분별을 못하는 장애 상태일 수도 있다.
또는 축생의 경우는 또 아예 이런 활동을 하지 못하기도 한다.
반대로 현실에서 사과나 안경을 찾을 때 그처럼 빨리 찾아 손으로 가리키는 것이 생활에 도움을 준다.
그리고 그런 부분을 사과라고 판단하는 것은 타당하다고 여기게 된다.
그것은 다음 의미다.
예를 들어 일정 부분을 대해 것이 사과라고 판단을 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 이후 다음 활동을 다음처럼 이어서 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그가 그 부분을 붙들고 영희에게 건넬 수도 있다.
그런 경우 다시 영희가 그것을 맛보고 사과라고 여기게 된다.
또 영희가 이후 사과가 맛있다거나 배가 부르다고 답하기도 한다.
이런 형태가 생활에서 이어지게 된다.
이는 그 경우 부분을 공이나 지우개라고 판단한 경우와는 다음처럼 구별된다.
그런 경우는 위와 같은 활동을 이어 하기 힘들다.
한편, 반대로 어떤 나무조각을 붙들고 사과라고 가리킨 경우와도 구별된다.
이런 경우 그 나무조각을 그가 사과라고 여기고 영희에게 건냈다고 하자.
그 경우에는 위와 같은 내용들이 이어지지 않는다.
즉 영희는 그것을 맛보고 사과라고 하지 않는다.
또 그것을 먹고 나서 맛있다거나 배가 부르다고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앞의 경우와는 다르다.
한편, 이 경우 그는 바로 그런 사정 때문에 처음 행한 판단이 옳다고 또 잘못 여기기 쉽다.
이는 그렇지 않은 다른 경우들과 구별된다는 실용적인 근거에 의해서다.
그런데 이 경우 이어지는 매 단면 하나하나는 다 망집에 바탕한 내용들이다.
자신이나 영희나 그 사정이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런 바탕에서는 그 하나하나의 단면에서 각 내용이 옳지 않음 부터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하나 그것은 잘못된 망상 분별이다.
그 성격이 다 앞에 본 내용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내용과 관련해 잘못된 분별내용들이 무수하게 쌓여 올려질 수 있다.
사정이 그렇다고 그 분별이 옳은 내용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런 분별을 계속 행하고 임하는 이상 그런 활동이 계속 이어지게 되는 것 뿐이다.
○ 전문과 성교량의 차이
오늘날 대부분 지식은 책으로 얻는다.
글자를 보고 얻는다.
이것은 말을 들어서 내용을 얻는 경우와 사정이 같다.
이른바 전문 형태다.
그런데 여하튼 그런 과정으로 얻는 내용 가운데 일부는 옳다.
그래서 여기에서 성교량이란 내용이 또 제시된다.
그래서 일반적인 전문과 성교량은 어떻게 차이가 있는가를 다시 살펴야 한다.
이는 귀납추론을 통한 권위의 취득 과정을 함께 살펴야 한다.
즉 경험상 어떤 주체가 설한 내용은 옳다.
이런 경험이 필요하다.
그런 경험이 쌓이면 이후 귀납추론을 행하게 된다.
그래서 일정한 권위를 부여하게 된다.
이런 경우 그런 내용을 직접 그것을 경험하지 않았다해도 상당히 신뢰를 두게 된다.
이런 형태가 된다.
○ 비유 등이 갖는 효용
한편 어떤 판단을 얻는 과정에서는
부처님이 단순히 비유를 통해 쉽게 이해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그런 판단을 결과적으로 얻을 수 있다.
이 안에도 옳은 내용과 그른 내용이 있을 수 있다.
이런 가운데 분별을 얻게 하는 어떤 과정이
곧 그 분별결과를 옳게 만드는가 여부를 잘 살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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