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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4-08-10_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K1071-004 본문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
K1071
T2053
제4권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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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TS 음성듣기 안내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
♣1071-004♧
제4권
♥아래 부분은 현재 작성 및 정리 중인 미완성 상태의 글입니다♥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大唐大慈恩寺三藏法師傳卷第四
K1071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 제4권
혜립 언종 한역
김영률 번역
4. 첨파국(瞻波國)에서부터 가마루파(迦摩縷波) 국왕의 초청을 받을 때까지
이란나국((伊爛拏國))으로부터 긍가강의 남쪽 언덕을 따라 동쪽으로 3백여 리를 가서 첨파국(瞻波國)1)중인도의 경계이다.에 이르렀다.
이곳에는 가람이 10개 있고 2백여 명의 승려가 살고 있었는데 소승교를 배우고 있었다.
도성(都城)은 벽돌로 쌓았는데 높는 여러 장(丈)이고 성을 둘러싼 해자는 넓고 깊어서 매우 견고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그 옛날 겁초(劫初)에 사람들은 모두 굴속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뒤 천녀(天女)가 인간 세계로 내려와 긍가강(殑伽江)에서 목욕하며 놀고 있는데,
그때 수령(水靈)이 천녀의 몸과 접촉하여 네 아들을 낳게 되었다.
그들은 자라서 섬부주(贍部洲)를 나누어서 왕이 되었고,
각기 경계를 만들어 도읍을 건설하였다.
이 첨파국은 그 중 한 사람의 도읍지였다고 한다.
이 나라의 남쪽 경계로 수십 유순(由旬)되는 곳에 큰 밀림이 있는데 그 울창한 숲이 2백여 리나 이어져 있다.
그 사이에 야생 코끼리가 많이 살고 있어서 수백 마리씩 떼를 지어 다닌다.
그래서 이란나와 첨파 두 나라는 코끼리 군대가 가장 많은 나라이다.
항상 이 밀림으로 조련사를 보내어 코끼리를 잡아다가 나라에서 탈 것을 충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늑대와 악어와 표범 같은 사나운 짐승들이 들끓고 있어 사람들이 감히 다니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 사이에 전하는 말은 이러하다.
먼 옛날 부처님께서 아직 이 세상에 오시지 않으셨을 적에 소를 치는 한 목동이 있었다.
수백 마리의 소를 방목하여 밀림 속으로 몰아넣었는데,
어떤 소 한 마리가 항상 무리를 이탈하여 혼자 가버리곤 하여
그 소재를 알 수 없었으나 날이 어두워 올 무렵이면
돌아와 무리 속에 섞여 있곤 하였다.
그런데 몸에는 광채가 나며 윤기가 흐르고 우는 소리도 평소와는 달랐다.
그리고 다른 소들은 모두 두려워서 그 소 앞에 가지를 못했다.
이런 날이 많아지자 목동은 그 소가 왜 그러는지 궁금하여
몰래 그 소를 지켜보았더니 잠시 후에 또 돌아가는 것이었다.
끝까지 따라가며 살펴보니 소가 어느 석굴[石孔]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목동 역시 소를 따라 4~5리 쯤 들어가니 갑자기 밝은 세계가 나타났다.
숲도 들도 빛을 받아 빛나고 이상한 꽃과 과일이 찬연하게 눈앞에 넘쳐흐르는 것이
모두가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소는 어느 한 곳에서 풀을 뜯고 있었는데 풀의 색과 향기도 아름다워 역시 인간 세상에는 없는 것이었다.
목동이 여러 과일나무를 둘러보니 모두 황색과 적색이 나는 금빛을 띄고 있고 과일이 크고 향기로웠다.
목동은 과일을 한 개 땄지만,
비록 마음으로는 탐스럽고 사랑스러웠으나 두려워서 감히 먹을 수는 없었다.
얼마 뒤에 소가 나오기에 목동도 따라 나오는데
그 석굴 앞에 이르러 미처 나오기도 전에 한 악귀(惡鬼)가 나타나서
그 과일을 빼앗아 가버렸다.
집에 돌아온 목동은 이런 사실을 어느 유명한 의사에게 말하면서 과일의 모양을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의사가 말했다.
“그것을 먹어서는 안 되오.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를 가져오도록 하십시오.”
뒷날 목동은 다시 소를 따라 들어가서 돌아오는 길에 한 개의 과일을 따서 품속에 감추고 돌아오려는데,
또 그 악귀가 빼앗으려 했다.
그 목동은 그만 과일을 입 속에 넣었다.
그러자 악귀는 다시 목을 졸랐다.
목동은 목구멍의 과일을 뱃속으로 삼켜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몸이 마침내 커지더니
머리는 석굴 밖으로 나왔으나 몸뚱이는 나올 수가 없어서 결국 돌아오지 못했다.
뒷날 집안사람들이 찾아 나서서 그의 형체가 변해버린 것을 보고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목동은 말은 할 수 있었으므로 이렇게 된 사유를 설명하였다.
가족들은 집으로 돌아와서 많은 일꾼을 데리고 가서
그를 빼내려 하였으나 결국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마침내 국왕이 이 소문을 듣고 스스로 가서 보고는
후환(後患)이 두려워서 사람을 시켜 돌을 파내려 했으나 역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러는 동안 세월이 많이 흘러 그 목동은 차츰 돌로 변해버렸는데,
아직도 사람의 모양을 하고 있다.
후세에 다시 어떤 왕은 그가 선과(仙菓) 때문에 변해버렸다는 것을 알고 신하에게 말했다.
“그는 약(藥) 때문에 몸이 변한 것이다.
그러니 그의 몸이 바로 약인 셈이다.
보기에는 비록 그냥 돌 같지만 그의 몸은 신령(神靈)이 된 것이다.
사람을 시켜 끌과 망치로 쪼개서 조금 가져오도록 하여라.”
왕의 명을 받은 신하는 석공을 데리고 가서 힘을 다해 돌을 깎으려 했다.
그러나 10일이 지났어도 한 조각도 얻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 돌은 지금도 남아 있다.
여기로부터 동쪽으로 4백여 리를 가서
갈말올기라국(羯末祇羅國)2)중인도의 국경이다.에 이르러
성적(聖跡)을 찾아 예배하였다.
이곳에는 가람이 6~7개가 있었고,
승려는 3백여 명이었다.
여기에서 동쪽으로 긍가강을 건너 6백여 리를 가서
분나벌탄나국(奔那伐彈那國)3)남인도의 국경이다.에 이르러 성적을 찾아 예배하였다.
여기는 가람이 20여 개,
승려는 3천여 명으로 대승과 소승을 겸하여 배우고 있다.
성(城)의 서쪽 20여 리 되는 곳에 발길파(跋姞婆:Vaśibhā) 가람이 있는데
대각(臺閣)은 높고 웅장하며 7백 명의 승려가 살고 있다.
절 옆에 탑이 있는데 무우왕(無憂王)이 건립한 것이라고 한다.
옛날에 여래께서 이 자리에 계시면서
3개월 동안 설법하신 곳이며 자주 광명을 나타낸다고 한다.
그리고 4불(佛)이 경행(經行)하신 자리도 있으며,
그 옆에 있는 정사에는 관자재보살상이 있는데
지성으로 기도하면 이루어지지 않는 원이 없다고 하였다.
이 나라에서 동남쪽으로 9백여 리를 가서 갈라나소벌자나국(羯羅拏蘇伐刺那國)4)동인도의 국경이다.에 이르렀다.
이곳에는 가람이 10여 개가 있고 3백여 명의 승려가 소승 정량부(小乘正量部)의 법을 배우고 있었다.
이와는 별도로 3개의 가람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유락(乳酪)을 먹지 않았다.
이들은 제바달다(提婆達多)의 유교(遺敎)를 믿기 때문이었다.
도성 옆에 락다말지(絡多末知:Raktanrttikā)당나라 말로 적니(赤泥)라 한다.
승(僧)의 가람이 있다.
이곳은 일찍이 이 나라에 불법이 들어오기 전에
남인도의 승려가 이 나라에 들어와서 첩복외도(鍱腹外道)5)의 사론(邪論)을 꺾어버린 곳이므로 국왕이 세운 것이라 한다.
그 옆에 또 무우왕이 건립한 탑이 있는데,
그곳은 옛적에 부처님이 이 자리에서 7일 동안 설법했던 곳이다.
여기에서 동남쪽으로 출발하여 삼마달타국(三摩怛吒國)6)동인도의 경계이다.에 이르렀다.
이 나라는 대해(大海)를 끼고 있기 때문에 기후가 온화하다.
가람은 30여 개가 있고 여기서 2천여 명의 승려가 상좌부(上座部)의 뜻을 익히고 있다.
그리고 하늘에 제사 지내는 외도[天祠外道]들도 또한 많다.
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무우왕이 세운 탑이 있는데,
옛날에 부처님께서 모든 인천(人天)을 위해 여기서 7일 동안 설법하였던 곳이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또 가람이 있는데 그 안에 청옥(靑玉)으로 만든 불상이 안치되어 있다.
불상의 높이는 8척으로서 상호(相好)가 매우 단정하고 엄숙하다.
언제나 저절로 오묘한 향기가 절 안에 그윽하게 풍기며,
오색의 서광(瑞光)이 종종 하늘로 뻗쳐오르곤 하였다.
그래서 이 불상을 보는 사람은 깊은 도심(道心)을 내지 않는 사람이 없다.
여기에서 동북쪽으로 해안과 산골짜기 사이에 실리차달라국(室利差怛羅國)7)이 있고,
그 동남쪽 해안에는 가마랑가국(迦摩浪迦國)이 위치하고 있다.
동쪽에는 타라발저국(墮羅鉢底國)8)이 있고 또 그 동쪽에는 이상나보라국(伊賞那補羅國)9)이 있다.
다시 동쪽에는 마하첨파국(摩訶瞻波國)10)중국 말로는 임읍(林邑)이라고 한다.이 있으며 이 서쪽에는 염마나주국(閻摩那洲國)11)이 있다.
이들 여섯 나라는 산천(山川)이 가로막힌 깊고 먼 곳이라서 비록 그 나라에 들어가지 않아도 그 풍속을 짐작할 수가 있다.
이곳 삼마달타국(三摩怛吒國)에서 서쪽으로 9백여 리를 가서 탐마율저국(眈摩栗底國)12)동인도의 경계이다.에 이르렀다.
이 나라는 해안 가까이 위치해 있으며,
이곳에는 가람 10여 개에 승려가 1천여 명이 있다.
성 옆에는 무우왕이 건립한 높이 2백여 척의 탑이 있고,
그 곁에는 과거의 네 부처님이 경행한 유적이 있다.
이때 법사는 멀리 해상(海上)에 승가라국(僧伽羅國)13)중국말로는 집사자(執師子)라고 한다.이 있고,
그 나라에 상좌부의 삼장(三藏)에 밝고 『유가론(瑜伽論)』을 이해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 나라는 바닷길로 7백 유순(由旬)을 가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 떠나기 전에 남인도의 승려를 만났는데 이렇게 일러 주었다.
“승가라국에 가려면 수로(水路)는 안 됩니다.
해상에서는 폭풍과 약차(藥叉) 등의 어려움을 많이 만나게 될 겁니다.
남인도의 동남쪽 귀퉁이의 수로를 따라 3일만 가면 곧 그곳에 닿게 됩니다.
그렇게 하면 비록 산과 내를 건너기는 해야 합니다만 그렇게 가는 것이 안전합니다.
아울러 가는 길에 오다(烏茶) 등 여러 나라의 성적(聖跡)도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법사는 즉시 서남쪽으로 향하여 오다국(烏茶國)14)동인도의 경계이다.으로 갔다.
이곳에는 백여 개의 가람이 있고 만여 명의 승려가 있었는데 대승의 법을 배우고 있었다.
그리고 천신(天神)을 받드는 외도(外道)도 있어서 정사(正邪)의 무리가 섞여 살고 있었다.
이곳에는 탑이 10여 개나 있는데 모두 무우왕이 세운 것이며,
종종 영험한 일이 일어난다고 한다.
이 나라 동남쪽 국경에 큰 바다를 끼고 절리달라성(折利怛羅城)15)당나라 말로는 발행(發行)이라 한다.이 있는데,
이곳은 바닷길로 가려는 상인들이나 먼 곳에서 온 여행객들이 왕래하며 머무는 길목이다.
여기서 남쪽에 있는 승가라국과의 거리는 2만여 리나 되는데 고요하고 구름이 없는 밤에 멀리 남쪽을 바라보면 승가라국의 불아탑(佛牙塔) 위의 보주(寶珠)가 밝게 빛나는 것이 흡사 하늘의 별빛 같다고 한다.
여기에서 서남쪽의 큰 밀림 속을 거쳐 1천2백여 리를 가면 공어타국(恭御陀國)16)동인도에 이른다.
여기서 서남쪽으로 큰 밀림 속을 1천4백~1천5백 리쯤 가면 갈릉가국(羯▼(食+夌)伽國)17)남인도의 경계이다.에 이르는데,
이곳에 가람은 10여 개가 있고 5백여 명의 승려가 상좌부의 법을 배우고 있다.
이 나라는 옛날에 인구가 많았으나 한 오통선인(五通仙人)18)을 괴롭힌 일 때문에 선인이 진노하여 나쁜 주문(呪文)으로 나라 사람을 해쳐서 애 어른 할 것 없이 모두 다 죽어 버렸다고 한다.
그 뒤로 다른 곳에서 조금씩 옮겨 와서 살고 있으나 아직도 충분하지는 않다.
여기에서 서북쪽으로 1천8백여 리를 가서 남교살라국(南憍薩羅國)19)중인도의 경계에 이르렀다.
이 나라의 왕은 찰제리(刹帝利)20)라고 하는데,
불법을 숭배하고 존경했으며 학예(學藝)를 좋아하고 장려했다.
이 나라에는 백 개의 가람이 있고,
1만 명의 승려가 있으며,
천신을 섬기는 외도들 또한 매우 많았다.
성의 남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옛 가람이 하나 있고,
그 옆에는 무우왕이 세운 탑이 있는데 옛날 여래께서 이곳에서 큰 신통변화를 나타내시어 외도를 항복시켰다고 한다.
그 후로 용맹보살(龍猛菩薩)이 이 가람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 당시 이 나라의 왕은 사다파하(娑多婆訶)당나라 말로 인정(引正)이라 한다.라 하였는데 용맹보살을 대단히 존경하여 정중하게 공양하였다.
그때 제바보살(提婆菩薩)이 집사자국(執師子國)21)에서 찾아와 논쟁하기를 청하였다.
그래서 문 앞에 와서 들여보내주기를 청하자 문지기가 용맹보살에게 알렸다.
용맹보살은 본래부터 제바보살의 이름을 알고 있던 차였다.
그래서 발우에 물을 가득 담아서 제자에게 그것을 가지고 나가 제바에게 보이게 했다.
그러자 제바는 발우에 가득 찬 물을 보더니 아무 말 없이 그 발우 안에다 바늘을 던져 넣었다.
제자가 이것을 들고 돌아왔는데 용맹이 보고는 대단히 기뻐하고 감탄하며 말했다.
“맑은 물을 가득 채운 것은 나의 덕을 비유한 것이다.
그런데 그는 여기에 바늘을 던져 마침내 그 밑바닥까지 가라앉도록 했다.
만약 이런 사람이라면 더불어 깊은 도를 논의할 수 있고 전등(傳燈)을 맡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제바보살을 맞아들였다.
그가 자리에 앉자 말을 주고받으면서 서로가 기뻐하기를 마치 고기가 물을 만난 듯했다.
용맹보살이 말했다.
“나는 이미 늙었으니 불법을 빛내는 것[慧日]은 그대에게 달려 있지 않겠는가?”
제바보살은 자리에서 일어나 용맹보살의 발에 절하고 말했다.
“저는 비록 불민하오나 감히 자애로우신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마침 이 나라에는 인명(因明)에 능통한 한 바라문이 있어서 법사는 1개월 남짓 거기에 머물면서 매일 『집량론(集量論)』을 읽었다.
여기서부터 남쪽의 큰 밀림을 지나 동남쪽으로 9백여 리를 가서 안달라국(案達羅國)22)남인도의 경계이다.에 이르렀다.
성 옆에 큰 가람이 있는데,
구조와 조각이 아주 웅장하고 불상의 얼굴은 아름답고 엄숙했다.
가람 앞에는 높이 수백 척이 되는 석탑이 있는데 아절라(阿折羅:
Acāra)당나라 말로 소행(所行)이라 한다.아라한이 세운 것이라고 한다.
나한(羅漢)의 가람 서남쪽 20여 리 되는 곳에 고산(孤山)이 있고,
그 산 위에 석탑이 있는데 진나(陳那:
Diṅnāga)23)당나라 말로 수(授)라 한다.보살이 이곳에서 『인명론(因明論)』을 지은 곳이다.
여기에서 남쪽으로 1천여 리를 가서 태나갈책가국(駄那羯磔迦國)24)남인도의 경계이다.에 이르렀다.
성 동쪽에는 산을 의지하여 불파세라(弗婆勢羅:
Pūrvaśaila)당나라 말로 동산(東山)이라 한다.
승가람이 있고,
성 서쪽에도 산을 의지하여 아벌라세라(阿伐羅勢羅:
Avarasaila)당나라 말로 서산(西山)이라 한다.
승가람이 있는데 이 나라의 선왕(先王)이 부처님을 위해 세운 것이다.
큰 건물의 양식을 다 갖추었고 정원은 수려하기가 그 극치를 다했으며 천신(天神)이 보호하고 있고 많은 현성(賢聖)들이 살고 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뒤 1천 년 동안은 1천 명의 범부승(凡夫僧)이 함께 와서 안거(安居)했는데 안거가 끝나면 모두 아라한을 증득하여 허공을 날아서 돌아갔다.
그러나 천 년이 지난 뒤에는 범승(凡僧)과 성승(聖僧)이 함께 살게 되었고,
지금으로부터 거슬러 백여 년 동안은 산신(山神)이 모습을 바꾸어 행인을 괴롭히기까지 하였다.
그래서 모두가 공포에 질려 다시는 지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은 모두 황폐하여 적막하기만 할 뿐,
승려는 살지 않는다.
성 남쪽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하나의 큰 석산(石山)이 있는데,
여기는 바비폐가(婆毘吠迦:
Bhāviveka)당나라 말로 청변(淸辯)이라 한다.
논사가 아소락궁(阿素洛宮:
Asura)에 머물면서 자씨보살(慈氏菩薩)의 성불을 기다렸다가 자신의 의문을 해결하려 했던 곳이다.
법사는 이 나라에서 두 명의 승려를 만났다.
한 사람은 이름이 소부저(蘇部底:
Subhūti)이고,
다른 한 사람은 이름이 소리야(蘇利耶:
Sūrya)였다.
두 사람은 모두 대중부(大衆部)의 삼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법사는 여기서 여러 달 머물면서 대중부의 근본 아비달마(根本阿毘達摩) 등의 논을 익혔다.
그들 역시 법사에게 대승의 여러 논을 배웠는데 마침내 뜻을 같이하여 함께 성적(聖跡)을 순례하게 되었다.
여기서부터 서쪽으로 1천여 리를 가서 주리야국(珠利耶國)남인도의 경계이다.에 이르렀다.
성의 동남쪽에 무우왕이 세운 탑이 있는데 옛날에 부처님께서 이곳에서 대신통을 나타내시어 외도를 항복받고 법을 설하여 인천(人天)을 제도하신 곳이다.
성의 서쪽에 옛 가람이 있다.
이곳은 제바보살이 이 절의 올달라(嗢怛羅:
Uttara)당나라 말로 상(上)이라 한다.
아라한과 논쟁했던 곳이다.
그런데 아라한은 일곱 번째 질문에 이르러 대답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몰래 신통으로 도사다궁(都史多宮)으로 가서 자씨보살에게 물었다.
그러자 보살은 설명을 해준 다음 이렇게 말했다.
“저 제바라는 사람은 오래전부터 공을 쌓아왔으므로 마땅히 현겁(賢劫)에 부처를 이룰 사람이니 그대는 가볍게 여기지 말라.”
아라한이 돌아와서 다시 조금 전의 어려운 질문에 해답을 하자 제바가 말했다.
“이것은 자씨보살의 해석이지,
그대 스스로의 지혜로는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오.”
그러자 아라한이 부끄러워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절하고 사죄했다는 그런 곳이다.
여기서부터 남쪽의 넓은 숲을 지나 1천5백~1천6백 리를 더 가면
달라비다국(達羅毘茶國)25)남인도의 경계이다.에 이른다.
이 나라의 큰 도성(都城)은 건지보라(建志補羅)26)라 하는데,
이 건지보라성은
바로 달마파라(達磨波羅)27)당나라 말로 호법(護法)이라 한다.보살이 태어난 곳이다.
보살은 이 나라 대신의 아들로서 어려서부터 총명했다.
20세가 넘어서자
왕은 그의 재주를 사랑하여 사위로 삼으려고 했다.
그러나 보살은 오랫동안 애욕을 멀리하는 수행을 했으므로
애정을 그리는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혼례를 앞둔 저녁에는 깊이 번뇌하면서
불상 앞에서 기도하면서
부처님의 가호(加護)로 이 어려움을 벗어날 수 있게 해달라고 기원했다.
그랬더니 지성(至誠)에 감응하였는지
대신왕(大神王)이 나타나 그를 업고 나가
이 성에서 수백 리 떨어진
한 산사(山寺)의 불당(佛堂) 안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이 절의 승려들은 그를 보고 도둑이라 하였다.
그래서 보살이 이렇게 된 경위를 말하자
듣는 사람들은 경탄하면서
그의 고결한 뜻을 중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 일로 인해서 그는 곧 출가하였고,
그 뒤로 오로지 정법(正法)에만 정진하여
마침내 여러 부(部)에 능통했고 많은 저술을 남겼다.
즉 『성명잡론(聲名雜論)』 2만 5천 송(頌)을 지었고,
또 『광백론(廣百論)』과 『유식론(唯識論)』과 『인명론(因明論)』 수십 부를 해석하여 모두 널리 읽히게 되었다.
그의 두터운 덕과 높은 재능에 대해서는 다른 전기에도 나와 있다.
건지성(建志城)은 즉 인도 남부 해안의 항구이다.
승가라국은 여기서 수로로 3일을 더 가면 도착할 수 있다.
그런데 법사가 출발하기 전에
승가라국의 왕이 죽고 나라에 기근이 들어 어수선했다.
이 때문에 대덕(大德) 보리미저습벌라(菩提迷祇濕伐羅:Bodhimeghe- śvara)당나라 말로는 자재각운(自在覺雲)이라고 한다.와
아발야등슬찰라(阿跋耶鄧瑟▼(哳/心)羅:Abhayadaṁṣtra)당나라 말로는 무외아(無畏牙)라고 한다.
등 3백여 명의 승려들이 인도로 피난하여
건지성에 와 있었다.
법사가 그들을 만나 물었다.
“그 나라의 대덕들은 상좌부의 삼장과 유가론을 잘 알고 있다기에
나는 지금 그 나라에 가서 그들에게 배우려고 하고 있소.
그런데 그대들은 어째서 이곳으로 왔소.”
승려들이 대답했다.
“우리나라의 왕은 죽었고 백성들은 기근에 허덕이고 있어서 우리는 의지할 데가 없습니다.
들으니 섬부주(贍部洲)는 풍요롭고 안락하며,
게다가 여기는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곳이라
많은 성적(聖跡)이 있다고 하기 때문에 온 것이오.
그리고 법을 아는 무리로서는 우리보다 나은 사람은 없을 것이오.
장로(長老)께서 의심나는 게 있으면 마음대로 물어보시오.”
그러자 법사는 유가의 주요한 글의 대목을 들어 질문해 보았으나
역시 계현(戒賢) 법사의 해석을 뛰어넘지는 못했다.
이 나라의 국경으로부터 3천여 리 되는 곳에
말라구타국(秣羅矩吒國:Malakuda)28)남인도의 경계이다.이 있다는 것을 들었다.
해안을 끼고 있으므로 진귀한 보물이 매우 많은 곳이다.
그 성(城)의 동쪽에 무우왕이 세운 탑이 있는데,
옛날에 여래께서 여기에서 설법하시고 큰 신통변화로 한없는 중생을 제도한 곳이다.
이 나라 남쪽 바닷가에 말라야산(秣剌耶山:Malaya)이 있는데
계곡이 매우 깊고 험준하다.
산에는 백단향(白檀香) 나무와 전단니바(旃檀儞婆) 나무가 있다.
나무의 모습은 백양(白楊)과 닮았고 나무의 질은 껍질이 얇고 깨끗하다.
이 산에는 뱀이 많이 살고 있는데 겨울이 되면 동면하기 위해 다른 나무로 옮겨 간다.
또 갈포라향(羯布羅香:Karpūra) 나무가 있는데
줄기는 소나무와 같으나 잎이나 꽃과 열매는 다르다.
생나무로 젖어 있을 때는 향기가 없지만
꺾어서 말린 뒤에 쪼개 놓으면 그 안에 향이 있다.
그 모양은 돌비늘 같고 색깔은 눈처럼 희다.
이것이 소위 용뇌향(龍腦香)이다.
또 들으니 동북쪽 해안에 하나의 성(城)이 있고,
여기서 동남쪽으로 3천 리 되는 곳에 승가라국(僧伽羅國:Siṁhala)당나라 말로 집사자(執師子)라 한다.
이 나라는 인도의 국경이 아니다.에 있다고 한다.
나라의 둘레는 7천여 리가 되고,
도성의 둘레는 40여 리이다.
인구가 조밀하고 곡식도 풍부하나
사람들은 피부가 검고 키가 작으며
성질이 급하고 격렬한 것이 그 나라의 풍토이다.
이 나라는 원래 보물섬이라서 진기한 것들이 많이 난다.
어느 때인가 남인도의 한 처녀가 이웃 나라로 시집가게 되었는데
도중에 사자왕(師子王)을 만나
함께 오던 사람들은 겁에 질려 도망쳐버렸고
오직 처녀 혼자 가마 속에 남아 있었는데
사자가 와서 보고는 그 처녀를 업고 갔다.
멀리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과일을 따오기도 하고 짐승을 잡아다가 먹도록 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사내아이와 계집아이를 낳아 길렀는데,
모습은 사람 같았으나 성질이 포악했다.
사내아이가 성장하게 되자 어머니에게 말했다.
“나는 도대체 무슨 종류이기에 아버지는 짐승이고 어머니는 사람인가요?”
그러자 어머니는 옛날에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더니 아들이 말했다.
“사람과 짐승은 전혀 다른데 어찌하여 버리지 않고 서로 살고 있는지요?”
어머니가 말했다.
“마음으로는 도망갈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나 벗어날 길이 없었단다.”
그 뒤로 사내아이는 아버지를 따라 산을 오르고 계곡을 건너면서
도망갈 길을 익혀 놓았다.
어느 날 아버지가 먼 데로 간 틈을 타서
즉시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데리고 마을로 내려왔다.
그래서 어머니의 나라로 가서 외할아버지를 찾았으나
집안은 이미 대가 끊어지고 없었으므로 시골에 몸을 의탁하게 되었다.
한편 사자왕이 돌아와 보니
처자가 보이지 않았으므로 크게 노하여
산을 뛰쳐나와 마을로 가서 울부짖으며
왕래하는 남녀들에게 많은 해를 끼쳤다.
백성들이 이런 일을 왕에게 아뢰자
왕은 4병(兵)29)을 이끌고 나가서
용맹한 장사를 뽑아 사자를 에워싸고 사살하려고 하였다.
사자가 이를 보고는 성난 소리로 울부짖자
사람과 말[馬]이 놀라 넘어지는 등 감히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이런 상태라서 비록 많은 날을 보냈으나
끝내 아무런 공력이 없었다.
왕은 다시 상금을 걸고,
만약 사자를 죽이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억금(億金)을 하사한다는 포고를 내렸다.
이때 사내아이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굶주림과 추위로 어려움에 놓여 있으니
왕의 모집에 나갈까 하는데 어떠한가요?”
어머니가 말했다.
“안 된다.
그는 비록 짐승이지만 너의 아버지가 아니냐?
만약 아버지를 죽인 자라면 인간이라 할 수 있겠는가?”
아들이 말했다.
“만약 죽이지 않는다면 그는 끝내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우리들을 찾으러 이 마을로 들어올 것입니다.
일단 왕이 알게 된다면 우리들이 도리어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만류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사자가 난폭하게 된 것은 어머니와 나 때문인데,
하나를 위해서 많은 사람을 괴롭혀서야 되겠습니까?
두 번을 생각해도 세 번을 생각해도
응모하는 것이 상책일 듯합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떠나갔다.
사자는 아들을 보자 온순해져서 기뻐할 뿐
전혀 해치려는 마음이 없었다.
사내아이는 드디어 예리한 칼로 목을 찌르고 배를 갈라버렸다.
그러나 사자는 이러한 고통을 가해도
자애로운 정이 더욱 깊어 아무 저항도 없이 꾹 참더니 이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왕이 이 말을 듣고는 기뻐하면서도 이상히 여겨 그에게 물었다.
“어떻게 네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느냐?”
끝내 사실대로 말하지 않자
왕이 갖가지 말로 추궁하고 협박하니 마침내 사실대로 전부 진술했다.
그러자 왕이 말했다.
“저런, 너 같은 짐승의 종자가 아니고서야 누가 그런 마음을 낼 수 있겠느냐?
비록 그렇다고는 하나
이미 상을 주기로 했으니 약속을 어기지는 않겠다.
그러나 너는 애비를 죽였으니 인륜에 어긋나고 나라에 반역한 죄인이다.
그러므로 나의 나라에 살게 할 수는 없다.”
그리고는 유사(有司)에게 칙명을 내려
많은 금과 보화를 주고는 나라 밖으로 추방했다.
두 척의 배에다 많은 황금과 식량을 실어서
바다에 띄워 보내서 파도를 따라 흘러가도록 한 것이다.
사내아이가 탄 배는 바다에 표류하다가 이 보물섬에 닿게 되었다.
그는 진기한 보물이 많은 것을 보고는 곧 여기에 머물러 살게 되었다.
그 뒤에 상인들이 가족을 데리고 보물을 캐러 다시 이곳에 찾아왔는데,
그는 상인들을 죽이고
부녀자들만 머물게 하면서 이처럼 자손을 낳아 길렀다.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흐르자
인구가 점점 많아졌기 때문에
군신(君臣)의 구별도 세우고,
먼 조상이 사자를 잡아서[執] 죽였다 하여
나라 이름도 집사자(執師子)라 하였다.
한편 누이동생이 탄 배는 표류하다가
파랄사(波剌斯)30) 서쪽에 이르러 귀매(鬼魅)에게 붙잡혀 많은 딸아이를 낳았다.
지금의 서대여국(西大女國)이 바로 그 나라이다.
또 다른 설에는 승가라(僧伽羅)는 이 상인 아들의 이름인데,
그는 지혜가 많아서 나찰귀(羅刹鬼)31)의 해를 모면하고 뒤에 왕이 되었다.
그리고 이 보물섬으로 와서 나찰을 제거하고
국도(國都)를 세워 자신의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이 말은 『서역기(西域記)』32)에 기록되어 있다.
이 나라는 옛날에는 불법이 없었다.
여래가 열반한 뒤 1백 년 동안에 무우왕의 아우 마혜인다라(摩醯因多羅:Mahendra)가
인간의 욕망을 싫어하고 버려서
4사문과(沙門果)33)를 얻어 하늘을 날아 왕래하면서
이 나라에 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신통변화를 나타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경모하여 가람을 세웠는데
현재도 백여 개가 있고 승려도 만 명이나 되며
대승과 상좌부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다.
승려들은 화목하고 계율이 청정하며,
서로 노력하며 게으른 자가 없다.
왕궁 옆에 불아정사(佛牙精舍)가 있다.
높이 1백여 척인데 수많은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다.
정사 위에는 표주(表柱)를 세우고 커다란 발담마라가(鉢曇摩羅伽:Padmarāga) 보석을 그 위에 놓았는데,
그 광휘가 하늘에 비친다.
구름이 없는 한밤에는 비록 만 리 밖에서라도 다 볼 수가 있다.
그 옆에 또 절이 있는데 역시 여러 가지 보석으로 장엄되어 있고
그 안에 금상(金像)이 있는데
이 나라의 선왕(先王)이 조성한 것이다.
육계(肉髻)34)는 값을 가늠할 수 없이 귀중한 보주(寶珠)로 되어 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보주를 훔치려고 했으나 수비가 철통같아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몰래 땅굴을 파고 방으로 들어가서 훔치려 하니
금상의 형체가 점점 높아져서
도적은 훔칠 수가 없게 되자 물러서서 이렇게 말했다.
“여래께서 옛날에 보살도를 닦으실 때에
모든 중생을 위해 신명(身命)을 아끼지 않았고
나라마저 미련 없이 남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째서 오늘은 이토록 견고하게 지키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옛날의 그 말들은 사실이 아닌 것 같다.”
그러자 불상은 몸을 구부려 그 보주를 도적에게 주었다.
그리하여 그 도적은 보옥을 시장 가지고 가 팔려고 했는데
그 보주에 대해 알고 있던 어떤 사람이 그를 잡아 왕에게 데리고 갔다.
왕이 보주를 훔치게 된 경황을 묻자 도적이 말했다.
“부처님께서 몸소 저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사실대로 갖추어 말했다.
그래서 왕이 몸소 가서 보니
불상의 머리가 아직도 구부러져 있었다.
왕은 이런 영험을 직접 보고 신심이 더욱 깊어졌다.
그래서 도적에게 많은 보물을 주고
그 구슬을 되찾아다가 다시 불상의 머리 위에 갖다 놓았다고 한다.
보주는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승가라국의 동남쪽 구석에 능가산(楞迦山)35)이 있는데 거기엔 많은 귀신들이 살고 있다.
옛날에 여래께서 이 산에서 『능가경(䮚迦經)』옛날에 능가(楞伽)라 한 것은 잘못이다.을 설하셨다.
이 나라 남쪽 바다 건너 수천 리에 나라계라주(那羅稽羅洲:
Nārikela- dvipa)가 있다.
그 주의 사람들은 키가 작아서 3척 정도밖에 되지 않으며,
몸은 사람인데 입은 새의 부리처럼 생겼다.
농사를 짓지 않고 야자열매를 먹고 산다.
이 나라는 바다 멀리에 있기 때문에 직접 갈 수는 없었지만 여러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달라비다국(達羅毘茶國)에서 사자국(師子國)36) 승려 70여 명과 함께 서북쪽으로 가면서 성적(聖跡)을 순례하였다.
여기서 2천여 리를 가면 공건나보라국(恭建那補羅國)37)남인도의 경계에 이른다.
이곳은 가람이 백여 개 되며 만여 명의 승려들이 대승과 소승을 겸하여 배우고 있으며,
천신을 섬기는 외도 역시 대단히 많다.
왕의 궁성 옆에 큰 가람이 있고 거기에 사는 승려는 3백여 명이 되는데 모두가 박학한 사람들이다.
그 절 안에는 일체의성태자(一切義成太子:
Siddhārtha)옛날에 실달태자(悉達太子)38)라 한 것은 잘못이다.의 보관(寶冠)이 있는데 높이가 2척이 조금 못되며 보함이 들어 있다.
항상 재일(齋日)이 되면 꺼내서 높은 대 위에 올려놓는데,
여기에 지성으로 예배하면 이상한 광채가 나는 것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성 옆의 가람에 정사(精舍)가 있고 그 안에는 높이 10여 척이 되는 자씨관음을 백단(白檀)으로 조각해 놓았는데 이 역시 자주 서광을 나타낸다고 한다.
이는 문이백억(聞二百億:Soṇakotivisa) 나한이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성 북쪽에 둘레가 30여 리나 되는 다라수(多羅樹)39)의 숲이 있다.
다라수의 잎들은 길고 윤기가 있어서 여러 나라에서 서사용으로 사용하는 데에 가장 좋다고 한다.
여기에서 서북쪽으로 맹수들이 득실거리는 밀림을 거쳐 2천 4~5백 리를 가면 마하랄타국(摩訶剌侘國:
Mahāratha)40)남인도의 경계에 이른다.
이곳의 풍속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절의(節義)를 중히 여기고 있다.
왕은 찰제리 종족으로서 전쟁을 좋아하고 숭상하므로 그 나라의 병마는 잘 정비되어 있고 법령도 엄하다.
이 나라에서는 장군이 적과 싸우다가 패전하여 군사를 잃고 손해를 보았다 해도 형벌을 주지 않는다.
그 대신 여자 옷을 입혀서 수치심을 갖게 한다.
그렇게 하면 그 사람은 심한 부끄러움에 대부분 자살을 한다고 한다.
그리고 항상 수천 명의 용사와 사나운 코끼리 수백 마리를 기르고 있으며,
전쟁터에 나갈 때에는 용사에게 술을 많이 먹여 취하게 한 뒤에 진군의 깃발을 흔들고 나간다.
그래서 용사들은 사기가 충천하여 적을 무너뜨리지 못한 적이 없었다.
왕은 이러한 힘을 믿고 오만해져서 이웃 나라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계일왕(戒日王)41)은 스스로 지략이 뛰어나고 군대도 강하다고 자만하면서 매번 이 나라를 정벌하려 했으나 역시 제압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 나라는 백여 개의 가람이 있고 승려는 5천여 명인데 대승과 소승을 겸하여 배우고 있다.
또 천신(天神)을 섬기는 사람과 재[塗灰]를 바르는 외도들도 있다.
큰 성 안팎에 다섯 개의 탑이 있다.
모두 높이가 수백 척이나 되며,
이곳은 과거의 4불[過去四佛]이 다니시던 유적으로 무우왕이 건립한 것이다.
여기서부터 서북쪽으로 천여 리를 지나 내말타(耐秣陀:
Narmadā) 강을 건너 발록갈첩파국(跋祿羯呫婆國)남인도의 경계이다.에 이른다.
여기서 서북쪽으로 2천여 리를 가면42)남나라국(南羅羅國)으로 남인도의 경계이다.에 이른다.
이 나라의 풍속은 성격이 온순하고 부드러우며 예업(藝業)을 숭상하고 있다.
다섯 인도(印度) 중에서 오직 서남쪽의 남마랍파와 동북의 마게다(摩揭陀) 두 나라만은 학문을 좋아하고 현인(賢人)을 존경하며,
담론을 잘하고 기품이 있다고 한다.
이 나라에는 백여 개의 가람이 있고 만여 명의 승려가 있는데 소승의 정량부를 배우고 있다.
그리고 재[灰]를 바르거나 천신을 섬기는 외도의 무리도 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에 계일(戒日)43)이라는 왕이 있었다.
그는 재주가 높고 박학하며 인자하고 온화하여 백성을 사랑하고 삼보(三寶)를 받들어 존경하였다.
왕위에 즉위하여서부터 서거할 때까지 입으로 거친 말을 하지 않았고 얼굴에 노한 빛을 나타내지 않았으며,
신하나 백성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모기나 개미도 죽이는 일이 없었다.
왕은 코끼리나 말에게 물을 먹일 때에도 물을 걸러낸 다음 먹였는데 이는 물에 사는 벌레의 생명을 해칠까 두려워해서였다.
그리고 마침내는 온 나라의 백성들에게 역시 살생을 금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로부터 야수들은 사람을 따르게 되었고 맹수들도 온순해졌다.
나라 안은 태평하여 상서로움이 날마다 일어났다.
왕은 정사를 건립했는데 정교한 장식을 다했고 그 안에 7불(佛)44)의 상(像)을 만들어 놓고 무차대회(無遮大會)를 열었다.
이와 같이 훌륭한 정치를 하여 재위 50여 년 동안 잠시도 태만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백성들은 그를 사모하기를 지금도 그치지 않고 있다.
큰 성에서 서북쪽 20여 리 되는 곳에 바라문 마을이 있다.
그 옆에 움푹 파인 구덩이가 있는데,
이곳은 대만(大慢) 바라문이 대승(大乘)을 비방하다가 산 채로 지옥으로 들어간 곳이다.
이 이야기는 『서역기』에 있다.
여기에서 서북쪽으로 2천 4~5백 리를 가면 아타리국(阿陀釐國)45)남인도의 경계이다.에 이른다.
이 나라에는 후추(胡椒) 나무가 있는데 잎은 촉(蜀) 나라의 호추와 비슷하다.
그리고 훈육향(薰陸香) 나무가 있는데 잎은 중국의 배와 같은 종류이다.
여기서부터 서북쪽으로 3일 동안 가게 되면 계타국(契吒國)46)남인도의 경계이다.에 이르고,
여기에서 북쪽으로 천여 리를 가면 벌랍비국(伐臘毘國)47)남인도의 경계이다.에 이른다.
이 나라에는 백여 개의 가람이 있고 6천여 명의 승려가 소승 정량부의 법을 배우고 있다.
여래께서 생존해 계실 때 종종 이 나라에 오셨다 하며 무우왕은 부처님께서 다녀가신 곳마다 모두 비석을 세워 놓았다.
지금의 왕은 찰제리 족인데 즉 갈야국사국(羯若鞠闍國) 시라아일다왕(尸羅阿迭多王)의 사위인데 이름은 두로파발타(杜魯婆跋吒)당나라에서는 제주(帝胄)라 한다.라고 한다.
그는 성격이 조급하고 행동에는 침착성이 없었으나 덕을 존중하고 학문을 숭상하며 삼보를 받들고 있었다.
그래서 해마다 7일간의 무차대회를 열어 여러 나라의 승려들을 초빙하여 최상의 맛있는 음식과 보물과 책상과 의복 등을 베풀었으며 심지어는 약품에 이르기까지 모두 갖추어 주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 나라에서 서북쪽으로 7백여 리를 가면 아난다보라국(阿難陀補羅國)48)남인도의 경계이다.에 이른다.
다시 서북쪽으로 5백여 리를 가면 소랄타국(蘇剌吒國)49)서인도의 경계이다.에 이른다.
여기에서부터 동북쪽으로 1천8백 리를 가면 구절라국(瞿折羅國)50)에 이르게 되고,
다시 동남쪽으로 2천 8백여 리를 가면 오사연나국(烏闍衍那國)51)남인도의 경계이다.에 이른다.
이 나라의 성(城)에서 멀지 않은 곳에 탑이 있는데,
무우왕이 지옥을 만든 곳이다.
여기에서 동북쪽으로 천여 리를 가면 척지타국(擲枳陀國)52)남인도의 경계이다.에 이르고,
여기서 동북쪽으로 9백여 리를 가면 마혜습벌라보라국(摩醯濕伐羅補羅國)53)중인도의 경계이다.에 이른다.
여기서 또 서쪽으로 소랄타국(蘇剌吒國)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다시 서쪽으로 가서 아점파시라국(阿點婆翅羅國)54)서인도의 경계이다.에 이르렀다.
이곳은 여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자주 밟으신 곳이며 무우왕은 그 성적(聖跡)이 있는 곳을 따라 모두 탑을 세웠는데 지금도 모두 남아 있다.
여기에서 서쪽으로 2천여 리를 가서 낭게라국(狼揭羅國)55)서인도의 경계이다.에 이르렀다.
이 나라는 바다를 가까이 끼고 있고 서녀국(西女國)으로 가는 길에 있다.
여기서 서북쪽으로 가면 파랄사국(波剌斯國:
Pārsa)56)북인도의 경계이다.에 이른다.
듣기로는 이 땅에는 보주(寶珠)가 많고 대금(大錦)ㆍ고운 모직물ㆍ말ㆍ낙타 등이 특산물이다.
가람은 2~3개 있고 수백 명의 승려가 소승교의 설일체유부를 배우고 있으며 석가모니 부처님의 발우가 이 나라 왕궁에 있다고 한다.
이 나라의 동쪽 경계에 곡말성(鵠秣城)이 있다.
이 나라의 서북쪽으로는 불름국(拂懍國:
Furum)57)과 접해 있다.
그 서남쪽 섬에 서녀국(西女國)이 있는데 모두 여자뿐이고 남자는 없다.
여기서 나는 많은 보배는 불름국에 속해 있다.
불름국왕은 해마다 남자들을 보내어 여자들과 짝지어 주지만 이 나라의 풍속은 남자 아이를 낳으면 키우지 않는다고 한다.
또 낭게라국에서 동북쪽으로 7백여 리를 가면 비다세라국(臂多勢羅國)58)서인도의 경계이다.에 이른다.
성안에는 무우왕이 세운 높이 수백 척이 되는 탑이 있고,
그 안에 사리를 모셨는데 자주 광명을 나타낸다고 한다.
이곳은 여래께서 옛날에 선인(仙人)으로 있을 적에 국왕을 위해 죽음을 당한 곳이다.
여기서부터 동북쪽으로 3백여 리를 가면 아삼다국(阿參茶國)59)서인도의 경계이다.에 이른다.
성 동북쪽 넓은 밀림 가운데 가람의 옛터가 있는데,
부처님이 옛날에 이곳에서 모든 승려[苾芻]들에게 기박사(亟縛屣)당나라 말로 화(靴)라 한다.를 신도록 허락하였다.
그리고 탑이 하나 있는데 무우왕이 세운 것이다.
그 옆에 정사가 있고 그 안에 청석(靑石)으로 세운 불상(佛像)이 있는데 자주 광명을 나타낸다.
또 남쪽으로 8백여 보 되는 곳의 넓은 숲 속에 무우왕이 세운 탑이 있다.
여기는 여래께서 옛날에 이곳에 머무셨을 때 밤에 추워서 세 벌이나 껴입었기 때문에 다음날 모든 승려들에게 납의(納衣)60)를 입도록 허락한 곳이다.
여기서부터 다시 동쪽으로 7백여 리를 가서 신도국(信度國)61)서인도의 경계이다.에 이르렀다.
이 땅에는 금과 은과 유석(鍮石)과 소와 양과 낙타와 적염(赤鹽)과 백염(白鹽)과 흑염(黑鹽) 등이 산출되는데,
다른 지방에서는 이런 것을 가져가서 약으로 쓴다고 한다.
여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자주 이 나라에 들르셨는데 그 성적(聖跡)이 있는 데마다 무우왕은 모두 탑을 세우고 비문을 새겼다.
그리고 오바국다(烏波鞠多:
Upagupta) 대아라한이 여행했던 유적도 있다.
여기서부터 동쪽으로 9백여 리를 가다가 신도하(信度河)62)를 건너 동쪽 강 언덕에 있는 무라삼부로국(茂羅三部盧國:
Morasambur)63)서인도의 경계이다.에 이르렀다.
이곳 풍속은 천신(天神)을 섬기며 사당의 건물은 매우 화려하다.
일천상(日天像)은 황금으로 주조하였고 여러 가지 보석으로 장식하였다.
여러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러 찾아온다.
화단과 연못은 절의 돌계단과 접해 있어서 관람하는 사람들은 경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여기서는 동북쪽으로 7백여 리를 가면 발벌다국(鉢伐多國)64)북인도의 경계이다.에 이른다.
성 옆에 큰 가람이 있고,
백여 명의 승려가 다 대승을 배우고 있다.
여기는 옛날 신나불달라(愼那弗怛羅:
Jinaputra)당나라 말로 최승자(最勝子)라 한다.
논사가 이곳에서 『유가사지석론(瑜伽師地釋論)』65)을 저술한 곳이며,
또 현애(賢愛) 논사나 덕광(德光) 논사가 출가한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나라에는 2~3명의 대덕이 있는데 모두 학업에 뛰어났으므로 법사는 이곳에 2년간 머물면서 정량부(正量部)의 『근본아비달마(根本阿毘達摩)』와 『섭정법론(攝正法論)』ㆍ『교실론(敎實論)』 등을 배웠다.
여기에서부터 다시 동남쪽으로 가서 마게다국(摩揭陀國)의 시무염사(施無厭寺)로 돌아와 정법장(正法藏)을 참례했다.
이때 법사는 절의 서쪽 3유순 되는 곳에 있는 저라택가사(低羅擇迦寺)에 출가한 대덕 반야발타라(般若跋陀羅:
Prajñabhadra)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그는 본래 박라발저국(縛羅鉢底國) 사람으로 살바다부(薩婆多部)에서 출가하여 그 종파의 삼장과 『성명론(聲明論)』ㆍ『인명론(因明論)』 등에 정통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법사는 2개월 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의심나는 곳을 풀었다.
여기서 다시 장림산(杖林山)66) 거사인 승군(勝軍) 논사가 있는 곳을 찾아갔다.
승군 논사는 본래 소랄타국(蘇剌佗國:
Surāṣtra) 사람으로 찰제리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먼저 현애(賢愛) 논사에게서 인명(因明)을 배우고 또 안혜보살(安慧菩薩)에게 성명(聲明)과 대승ㆍ소승론을 배웠으며,
그리고 계현(戒賢) 법사에게서 유가론(瑜伽論)을 배웠다.
그리고 불전(佛典) 이외에도 4베다와 천문ㆍ지리ㆍ의학ㆍ술수(術數)에 이르기까지 근원적으로 연구하여,
그 세밀한 부분에까지 익히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미 학문적으로는 내외(內外)에까지 미쳤기 때문에 그 덕은 당대에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때 마게다국의 만주왕(滿胄王:
Pūrṇavarman)은 현인을 존경하고 학자를 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
왕은 승군 논사에 대한 말을 듣고 대단히 기뻐하여 사신을 보내어 맞아들여 국사로 삼고 20개의 대읍(大邑)을 봉(封)하려 했으나 논사는 받지 않았다.
만주왕이 서거한 뒤 계일왕이 또 스승으로 모시고 오다국(烏茶國)의 80개 대읍에 봉하려 했으나 논사는 역시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왕이 거듭 요청했으나 역시 번번이 사양하며 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가 듣기로는 남의 봉록을 받으면 남의 일 때문에 항상 근심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지금 생사(生死)에 허덕이고 있는 사람을 구제하는 것이 더욱 급한데 어찌 한가하게 임금의 일을 도울 수 있겠습니까?”
말을 마치고 미련 없이 나와 버렸다.
왕이라 해도 도저히 그를 머물게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승군 논사는 항상 장림산에 있으면서 학도를 가르치고 불경을 강술하였기에 도속(道俗)으로 귀의하는 자가 수백 명을 넘었다.
법사는 승군논사에게 가서 2년 간 머물면서 『유식결택론(唯識決擇論)』ㆍ『의의이론(意義理論)』ㆍ『성무외론(成無畏論)』ㆍ『부주열반(不住涅槃)』ㆍ『십이인연론(十二因緣論)』67)ㆍ『장엄경론(莊嚴經論)』을 배웠고,
유가ㆍ인명 등에서 의문 나는 점을 물어 풀었다.
어느 날 밤 법사가 꿈을 꾸었다.
나란타(那爛陀) 절의 승원(僧院)은 황폐해져서 그 안에 물소들만 매여 있을 뿐 승려라고는 없었다.
그래서 법사가 유일왕원(幼日王院)의 서문(西門)으로 들어가 사중각(四重閣)의 위를 쳐다보니 금인(金人) 한 사람이 있었다.
얼굴은 단정하고 광명은 방 안에 가득했다.
법사는 마음속으로 기뻐하며 그 위로 올라가려 했으나 올라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좀 이끌어 달라고 부탁했더니 금인이 말했다.
“나는 만수실리(曼殊室利)보살이다.
너는 업연(業緣) 때문에 올라올 수가 없다.”
그리고는 곧 절 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는 저것을 보아라.”
법사가 가리키는 곳을 따라 절 밖을 보니 불길이 마을을 태워 모두 잿더미가 되어 있었다.
그 금인이 말했다.
“너는 빨리 이곳에서 돌아가도록 하라.
10년 뒤에는 계일왕도 당연히 서거할 것이고,
인도에는 내란이 일어나 악인들이 나타나 서로를 죽일 것이다.
이 일을 너는 알고 있어야 한다.”
이 말이 끝나자 사라져 버렸다.
법사는 꿈에서 깨어난 후 괴이하게 여겨서 승군 논사에게 가서 얘기를 했더니 승군이 말했다.
“이 삼계(三界)68)는 편안함이 없으니 혹 그렇게 될지도 모르겠소.
이미 그렇게 알리는 말씀이 있었으니 그대가 스스로가 알아서 하시오.”
이렇게 현장 대사(大士)가 행동을 할 때에는 언제나 보살의 보살핌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법사가 인도로 가려고 할 때에는 보살이 계현에게 미리 알렸고,
또 법사가 인도에 오래도록 머물면서 중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자 이렇게 무상함을 보여서 돌아가기를 권한 것이다.
만약 법사의 행위가 부처님의 마음과 계합되지 않았다면 어찌 이런 영험이 있었겠는가?
그 뒤 영휘(永徽:
650-655) 말년에 과연 계일왕이 서거하고,
인도는 기근과 가뭄이 들었으니 모두 보살이 말한 대로 되었다.
그 상황은 당나라의 사신 왕현책(王玄策)69)이 상세히 보고 왔던 대로이다.
때는 마침 정월 초였다.
서국(西國)의 법으로는 이 달이면 보리사(菩提寺)에서는 부처님의 사리를 꺼내서 여러 나라의 도속(道俗)들이 모두 모여들어 친견하고 예배를 올린다.
법사도 승군과 함께 사리골(舍利骨)을 친견하러 갔다.
사리는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었는데,
큰 것은 둥근 진주만하고 홍백색으로 빛이 났다.
그리고 육사리(肉舍利)는 완두콩만하고 붉은 빛에 광택이 있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향과 꽃을 바치고 예배가 끝나자 다시 탑 안에 안치해 놓았다.
그날 밤 1경(更)이 지났을 쯤에 승군과 법사는 함께 낮에 보았던 사리의 크고 작음이 서로 같지 않은 것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승군이 말했다.
“내가 다른 곳에서 보기로는 사리의 크기가 쌀알만 했는데,
여기서 본 것은 어찌 그리 큰가?
법사의 마음에는 의문이 있지 않았는가?”
법사가 대답했다.
“저 역시 그런 의심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뒤에 방 안엔 등불도 없었는데 갑자기 안팎이 낮처럼 밝아졌다.
이상하게 생각되어 밖에 나가 보니 그 사리탑에서 휘황한 빛이 위로 뻗치고 그 불꽃은 날아 하늘에 닿았으며 색은 오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온 천지가 환하여 별과 달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윽한 향기가 원(院) 안에 가득 넘쳐흘렀다.
이때 두 사람은 사람들에게 알렸다.
“사리에 큰 신변(神變)이 일어났다.”
그러자 대중들이 곧 알고 모여들어 사리에 예배하고 처음 있는 일이라며 찬탄하였다.
이렇게 긴 시간이 지나서야 빛은 차츰 사라지기 시작했다.
남은 빛이 사라질 때까지 사람들은 탑 둘레를 여러 번 돌고 난 뒤에 비로소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천지는 다시 캄캄해지고 별들도 하나 둘 나타났다.
대중들은 이러한 신변을 본 후로 모든 의혹을 풀고 보리수와 여러 성적(聖跡)들에 예배하였다.
법사는 8일 동안이 지난 다음에 다시 나란타 절로 돌아왔다.
그러자 계현 논사는 법사에게 대중을 위하여 『섭대승론(攝大乘論)』과 『유식결택론』을 강의하도록 하였다.
그때 대덕 사자광(師子光:
Siṁharasmi)은 먼저 대중[四衆]에게 『중론(中論)』과 『백론(百論)』을 강의하고 있었다.
그는 이들 종지만을 중히 여기고 『유가론』의 뜻을 공격했다.
법사는 이미 『중론』과 『백론』에는 통달했고 또 『유가론』에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이렇게 생각했다.
‘성인(聖人)이 교(敎)를 세울 때에는 인연에 따라 각기 그 뜻을 말했을 뿐,
궁극적으로는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이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서로 모순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 잘못은 전하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어찌 법에 결함이 있겠는가?’
이에 법사는 사자광의 생각이 좁은 것을 안타깝게 여겨서 자주 가서 질문도 해 보았으나 전혀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학도들은 차츰 사자광을 떠나 법사에게 귀의하게 되었다.
그러나 법사 역시 『중론』과 『백론』의 뜻을 논하며 단지 사자광의 편계소집(遍計所執)70)만을 논파했을 뿐 의타기성(依他起性:
假有)71)과 원성실성(圓成實性:
實有)72)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자광은 전혀 깨치지를 못하고 경론(經論)에 ‘일체의 것은 얻을 바가 없다[一切無所得]’고 한 것을 보고 말하였다.
“유가론에서 말하는 원성실(圓成實) 같은 이론도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항상 말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에 법사는 2종(宗)의 가르침은 화합된 것이지 서로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하며 『회종론(會宗論)』 3천 송(頌)을 저술하였다.
논이 완성되자 계현(戒賢)과 대중에게 보였는데,
모두 훌륭하다고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아울러 널리 보급하였다.
그러자 사자광은 부끄러워하며 마침내 보리사(菩提寺)로 떠났다.
그러면서 자신이 도반인 동인도의 승려 전다라승하(旃陀羅僧訶:
Candrasiṁha)에게 나란타 절로 와서 법사와 논쟁하도록 하였다.
그렇게 하여 자신의 수치심을 씻으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승려가 와서는 법사의 위엄에 눌려 침묵할 뿐 감히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리하여 법사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애초에 사자광이 떠나기 전에,
계일왕이 나란타 절 옆에 유석(鍮石)으로 정사를 지었다.
그 정사는 높이가 10장(丈)이 넘었기에 여러 나라 사람들이 모두들 알고 있었다.
그 뒤에 왕은 스스로 공어다(恭御陀)를 정복하고 오다국(烏茶國)으로 행차하게 되었다.
이 나라의 승려들은 모두 소승만을 배우고 대승을 믿지 않았기에 이렇게 말하였다.
“대승은 공화외도(空花外道:
Sūnyapuṣpa)73)이지 부처님께서 설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왕이 온 것을 보고는 비난하는 투로 이렇게 말했다.
“들으니 왕께서는 나란타 절 옆에다 유석으로 정사를 지으셨다 하시니 그 공력이야말로 참으로 장하고 위대하십니다.
그런데 어째서 가파리(迦波釐) 외도74)의 절에다 짓지 않고 유독 거기에다가 지었습니까?”
왕이 말했다.
“그 말은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대답했다.
“나란타 절은 공화외도이기 때문에 가파리 외도와 다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전에 남인도 왕의 관정사(灌頂師)였던 반야국다(般若鞠多:
Prajñā agupta)라고 하는 늙은 바라문이 정량부(正量部)의 뜻에 밝아서 『파대승론(破大乘論)』 7백 송을 지었는데,
모든 소승의 사람들이 모두 존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파대승론』을 왕에게 보이면서 말했다.
“우리의 종지(宗旨)는 이런 것입니다.
그러니 대승을 믿는 사람들이 어찌 한 글자라도 능히 논파할 수가 있겠습니까?”
왕이 말했다.
“내가 듣기로는 여우나 쥐 같은 무리들은 스스로는 사자보다 훌륭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자를 직접 보면 혼이 빠져 달아난다고 했다.
그대들은 아직 대승의 여러 대덕(大德)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어리석게도 소승만을 고집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대승의 대덕들을 한 번이라도 만나보게 되면 저 여우나 쥐와 마찬가지로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그들이 말했다.
“왕께서 만약 그렇게 의심하신다면 어째서 대승 승려를 불러다가 대결하게 하여 시비를 가리려 하지 않습니까?”
왕이 말했다.
“그런 일이야 무엇이 어렵겠는가?”
그날로 즉시 친서(親書)를 보내어 나란타 절의 정법장(正法藏) 계현 법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오다국에 와 있습니다.
이곳 소승 사람들이 좁은 소견만을 믿고 의지하여 대승을 비방하는 논을 지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 논리가 매우 위험해서 사람의 마음에는 영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법사 등과 함께 시비를 따져 논쟁을 하겠다고 합니다.
나는 나란타 절의 대덕들이 모두 재주와 지혜가 많고 학문도 두루 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즉석에서 그렇게 하자고 허락을 하였습니다.
삼가 받들어 아룁니다.
원컨대 대덕 네 사람을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대승과 소승의 종지에 다 통하고 내외의 학문을 겸한 사람을 오다국의 내가 있는 곳으로 보내주십시오.”
정법장은 이 글을 보고 대중을 모은 뒤 사람을 뽑았다.
그리하여 해혜(海慧)ㆍ지광(智光:
Jñānaprabha)75)ㆍ사자광(師子光)과 법사 등 네 사람을 뽑아서 왕명에 따라 응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해혜 등의 다른 승려들이 걱정을 하자 법사가 말했다.
“소승 여러 부(部)의 삼장에 대해서는 제가 본국에 있을 때나 가습미라(迦濕彌羅)에 들어온 뒤에도 두루 다 배웠기에 그 종지를 모두 알고 있습니다.
만약 그 교지(敎旨)로 대승의 뜻을 타파하려 한다 해도 끝내 그렇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비록 학문이 얕고 지혜가 없지만 반드시 그들을 굴복시키겠습니다.
바라건대 여러 대덕께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만약 패한다 해도 나는 지나국(支那國)의 승려이기 때문에 이번 일의 승패와는 아무 관계가 없을 것입니다.”
이 말에 여러 사람은 모두 기뻐하였다.
그런데 얼마 뒤 왕에게서 다시 이런 편지가 왔다.
“앞서 대덕을 청했으나 즉시 출발하지 마시고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이 당시 순세파의 외도[順世外道]76)가 있었는데 나란타 절로 찾아와서 논쟁하기를 청하면서 이에 40조(條)의 뜻을 써서 절 문에 걸어 놓고 이렇게 말했다.
“만약 한 가지 조문이라도 논파할 사람이 있다면 나는 목을 내놓고 사죄하겠다.”
수일이 지났으나 이에 대응할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법사는 집안 청소를 하는 사람을 시켜 그 40조의 뜻을 걷어 내어 찢어버리고 발로 짓밟아 버리도록 했다.
이를 본 바라문은 크게 화를 내어 말했다.
“너는 무엇 하는 사람이냐?”
대답했다.
“나는 마하야나제바(摩訶耶那提婆:
Mahāyānadeva)77)의 하인이다.”
그 바라문 역시 평소에 법사의 이름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으므로 매우 부끄러워하면서 다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법사는 그 바라문을 불러 들여 계현 법사에게로 데리고 가서,
여러 대덕들에게 증인이 되어 달라고 한 후 그와 더불어 논쟁을 벌였다.
법사는 그 종지의 원칙에 입각하여 외도 여러 파의 뜻을 꿰뚫었는데 그 논리는 다음과 같다.
“포다외도(餔多外道)78)ㆍ이계외도(離繫外道)79)ㆍ누만외도(髏鬘外道:
Kapali)ㆍ수치가외도(殊徵伽外道:
Jutika)의 네 가지는 모두 그 형태가 같지 않다.
또 수론외도(數論外道:
Sāmkhya)80)옛날에는 승거(僧佉)라 했다.와 승론외도(勝論外道:
Vaiśesika)81)옛날에는 위세사(衛世師)라 했다.의 두 파의 뜻도 다르다.
포다의 무리들도 재[灰]를 몸에 바르는 것이 도를 닦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온몸이 허옇게 되어 마치 부뚜막에서 자고 있는 고양이 같이 하고 다닌다.
또 이계의 무리들은 맨몸을 드러내고 머리털을 뽑는 것을 덕(德)으로 삼고 있다.
그 때문에 피부는 갈라지고 발이 터져서 그 형상이 꼭 강가에 서 있는 고목나무 같다.
누만의 무리들은 뼈로 가면을 만들어 머리에 장식하고 목에 걸고 있으니 그 돌무더기 같은 모습은 마치 무덤 옆에 서 있는 약차(藥叉) 귀신과도 같다.
수치가의 무리들은 똥 묻은 옷을 걸치고 더러운 대소변을 먹으니 그 더러운 악취를 풍기는 것이 비유하자면 꼭 우리 속의 돼지와 같다.
그대들이 이런 행동으로 도를 삼으니 어찌 어리석은 일이 아닌가.
그리고 수론외도와 같은 것은 25제의(諦義)82)를 세워서 자성(自性)으로부터 대(大)를 내고,
그 대로부터 아집(我執)을 내고,
다음으로 5유량(唯量)83)을 내고,
다음 5대(大)84)를 내고,
다음 11근(根)을 낸다고 한다.
그리고 이 24제(諦)의 의(義)를 아울러 나에게 공양하고 내가 수용(受用)하여,
그것들을 차례로 제거하고 여읜다면 나는 청정의 경지를 얻는다고 했다.
또 승론사(勝論師)들은 6구의(句義)85)를 세웠다.
말하자면 실(實)ㆍ덕(德)ㆍ업(業)ㆍ유(有)ㆍ동이성(同異性)ㆍ화합성(和合性)이다.
이 여섯 가지는 아(我)가 받아서 갖추는[受具] 것인데,
해탈하지 못하면 여섯 가지를 수용하는 것이 되고 만약 해탈하게 된다면 이 여섯 가지와 상리(相離)되어 열반에 이른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 수론이 세운 교의를 논파하겠다.
그대들은 25제(諦) 가운데 아(我)라는 것을 별개의 성질로 하고,
나머지 24제가 전전변이(展轉變異)하여 한 몸이 된다고 했다.
그리고 자성(自性)은 3법(法)86)으로써 체(體)를 삼고 있으니,
말하자면 살타(薩埵)87)ㆍ랄사(剌闍:
rajas,
비관)ㆍ답마(答摩)88)의 3법이 전전변이하여 대(大) 등의 23제를 합성한다고 했다.
그리고 23제의 하나하나가 모두 3법으로써 체를 삼는 것이라고 했다.
만약 ‘대’ 등 23제의 하나하나가 모두 3법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면,
그 숫자는 무한하니 이는 곧 허위일 것이다.
어떻게 이 모두를 실(實)이라 할 수 있겠는가.
또 이 ‘대’ 등이 각기 3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하나가 곧 일체가 되어야 한다.
만약 하나가 곧 일체라 한다면 그 하나하나에 모두 일체의 작용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되지 않고서야 어떻게 3을 가지고 일체(一切)의 체성(體性)이 된다고 하겠는가.
또 만약 하나가 일체라 한다면 입이나 눈 등의 기관이 곧 대소변을 배설하는 통로가 될 수 있어야 한다.
또 하나하나의 기관마다 일체의 작용이 있다고 한다면 입이나 귀 등의 기관으로도 냄새를 맡고 색깔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만약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3을 가지고 일체의 법체(法體)로 삼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니 지혜 있는 사람이라면 어찌 이런 논리를 세우겠는가.
그리고 자성(自性)은 항상 아(我)의 체(體)와 같은 것이라고 한다면 어찌 그것이 전변(轉變)하여 ‘대’ 등의 법을 만들 수 있겠는가.
또 아집의 ‘아(我)’라는 그 성(性)이 항상 존재하여 자성(自性)과 같은 것이라면 이것은 ‘아’가 아닌 것이다.
만약 자성처럼 그 체가 ‘아’가 아니라면 마땅히 24제는 수용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아’가 수용될 것이 아니라면 24제도 수용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처럼 이미 다 수용할 수가 없다면 제의(諦義)도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여러 번 반론했으나 바라문은 말없이 침묵을 지키다가 일어나 말했다.
“이제 제가 졌습니다.
전에 약속한 대로 마음대로 하십시오.”
법사가 말했다.
“우리는 석문(釋門)의 제자이므로 절대로 사람을 해치지 않소.
지금 그대를 노복(奴僕)으로 삼아 나의 교명(敎命)을 따르게 할 것이오.”
바라문은 기뻐하며 경복하였다.
곧 그를 데리고 방으로 갔는데,
이 일을 들은 사람들도 감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때 법사는 오다국으로 가기 위해 곧 소승(小乘)에서 저술한 『파대승의』 7백 송을 갖고 있는 사람을 찾아갔다.
법사가 찾아가서 살펴보니 몇 군데 의문이 있었다.
그래서 조복(調伏) 시킨 그 바라문에게 말했다.
“그대는 『파대승의』를 들은 적이 있는가?”
그가 대답했다.
“일찍이 다섯 번이나 들었습니다.”
그래서 법사는 그에게 강의를 해보도록 하니 그가 말했다.
“저는 지금 노복인데 어찌 주인에게 강의하겠습니까?”
법사가 말했다.
“이 글은 다른 종파의 글이며 나는 보지 못했으니 그대는 걱정 말고 강의해 주게.”
그가 말했다.
“그러시다면 청컨대 밤이 되면 하시지요.
남들의 귀에 노복에게 법을 배운다는 말이 들리게 되면 법사님의 명예를 더럽히게 될까 두렵습니다.”
마침내 밤이 되자 모든 사람을 물리치고 한 차례의 강의를 듣고는 그 뜻을 완전히 알게 되었다.
여기에서 마침내 잘못된 점을 찾아내고 대승의 뜻을 바탕으로 하여 그것을 바로잡아 1천6백 송을 만들고는 『파악견론(破惡見論)』이라 하였다.
이것을 계현 법사에게 바치고 여러 사람에게 보이니 모두가 감탄하며 말했다.
“이 논으로 따지고 들면 어떠한 논적인들 이기지 못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 논은 별목(別目)과 같다.
이에 법사가 바라문에게 말했다.
“그대는 논으로 굴복하여 노복이 되었으니 받은 수치심은 그것으로 족하다.
지금 그대를 자유의 몸이 되게 하겠으니 마음대로 떠나도록 하라.”
바라문은 기뻐하면서 떠났다.
그는 동인도의 가마루파국(迦摩縷波國)89)으로 가서 구마라왕(鳩摩羅王)에게 법사의 덕행(德行)과 의리(義理)에 대해서 말했다.
왕이 듣고는 매우 기뻐하며 즉시 사신을 보내서 법사를 모셔오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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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지금의 Bhāgalpur 근방에 Campanagara와 Campapura라는 두 마을이 있는데,
그곳이 도성지이다.
인도 16대국의 하나인 Aṅga국으로서,
인도지나반도의 점파국(占波國)도 이 나라의 이민(移民)들에 의하여 형성되었다.
2)
2) Bhāgalpur의 동남동 약130km,
간가강의굴 절부(屈折部) 서안(西岸)의 Rajmahal (Kankjol)로 추정된다.
3)
3) 범명은 Puṇḍra-vardhana이고,
파리명은 Puṇḍra-varddhana이다.
위치는 동파키스탄의 RajshahiㆍBogra 부근이라 하며,
그 도성은 Bogra의 북쪽 약 11km인 Mahasthan으로 추정된다.
4)
4) 금이국(金耳國)이라는 뜻으로,
갠지스강 서쪽 언덕의 Mursh-idabad현(縣)의 Rāṅgāmāti로 추정된다.
5)
5) 학예(學藝)가 다능하기를 바라서 허리에 동첩(銅鍱)을 두르고 다니는 외도를 말한다.
6)
6) 『서역기』에는 달(怛)을 달(呾)로 표기하고 있다.
해빈국(海濱國)이라는 뜻이다.
지금의 동파키스탄의 갠지즈강 입구의 삼각주 지대에 해당된다.
그 도성은 여러 설이 있으나 지금은 Dacca 동쪽,
Comilla의 서쪽 약 19km의 Bād-Kāmta로 추정되고 있다.
7)
7) 버마의 이라와디 강변 푸롬 동쪽 수키로에 그 유적이 있다.
8)
8) 샴의 옛 서울 아유트야(Ayuthya)의 범명(梵名)이다.
메남강 하류에 위치한다.
9)
9) 메콩강 하류의 캄보디아 지방에 해당한다.
10)
10) 인도지나 동남단에 있는 임읍(林邑)이다.
11)
11) 『서역기』에서는 방위를 서남쪽이라고 방향을 나타내고 있다.
『법현전』의 야바리(耶婆提)와 같으며 지금의 자바에 해당한다.
12)
12) 간가강 하구 서쪽 끝의 Hooghly강 서쪽 언덕의 탐루크(Tamlūk)로 추정된다.
예로부터 벨간만(灣) 해상 교역의 중요한 중계 역할을 하는 기지였으므로 서양에도 이름이 알려 있고,
Ptolemy의 지리책에도 Tamalites로 기록되어 있다.
13)
13) 집사자국(執師子國)이라고 한역하고 사자국(師子國)이라 약칭한다.
지금의 실론섬,
즉 스리랑카이다.
이곳은 인도양 중앙에 있으며,
항해상 모두에게 주목되는 극히 중요한 거점이었다.
14)
14) 지금의 오릿사(Orissa) 북부로 추정되며,
그 도성은 CuttackㆍMidnaporeㆍJajpurㆍYajapur 등에 해당된다.
15)
15) 우다국의 동남 해안에 있으며 실론 교역의 요항(要港)으로 Cunningham은 Puri로 보고,
그 밖의 cuttack의 하류 24km의 Nendra로 보는 설도 있다.
16)
16) 지금의 오릿사의 Ganjām현에 해당한다.
도성은 지금의 Ganjām시 부근의 Jaugaḍa로 추정된다.
17)
17) Ganjām으로부터 남쪽은 고다바리(Godavarī)강까지의 사이를 가리킨다.
도성은 고다바리강 하류 Rājamahendri를 비롯하여 Kaliṅganagara,
MukhalingamㆍSrīkakulam 등 여러 설이 있다.
18)
18) 다섯 가지 신통력,
즉 5신통(神通)을 얻은 선인을 말한다.
5통이란 신족통(神足通)ㆍ천안통(天眼通)ㆍ천이통(天耳通)ㆍ타심통(他心通)ㆍ숙명통(宿命通) 등을 말한다.
19)
19) 『서역기』에는 교살라국(憍薩羅國)으로 되어 있다.
범어 kosalā의 음역이다.
흔히 코사라국이라고 하면 사위성을 중심으로 한 북인도를 말한다.
이것은 중인도 내륙부의 나라이므로 『자은전』(慈恩傳)에는 남코사라국이라 하였다.
영역과 도성에 대한 여러 설이 있으나 Majumdar의 영역은 마하나디강의 상류지방으로,
도성은 Raipur 북동쪽 약 60km인 Arang으로부터 약 24km 지점인 Sirpur로 추정하였다.
20)
20) 크샤트리야의 음역이다.
인도의 4성(姓) 중 하나로서 다른 3성(姓)을 지배하는 왕종(王種)으로,
최상 계급인 바라문 다음의 지위를 갖는다.
21)
21) 현재의 실론섬,
즉 스리랑카를 가리킨다.
범어 simhala의 음역은 승가라국(僧伽羅國)이고 집사자국(執師子國)이라고 한역하고 사자국(師子國)이라 약칭한다.
이곳은 인도양 중앙에 있으며,
항해상 모두에게 주목되는 극히 중요한 거점이었다.
22)
22) 인도의 고다바리강에서 크리슈나강 사이의 지방이며,
도성인 병기라(甁耆羅)는 지금의 Ellore의 서북쪽 약 10km인 Pedda vegī,
Cinna vagi 부근이다.
23)
23) 디그나가 또는 딘나가의 음역이다.
불교의 논리학자이며 유가행유식파의 논사로,
480-540년경에 생존하였다.
남인도의 안달라국(案達羅國) 출신으로,
세친 보살의 노선을 계승하였다.
『인명입정리론(因明入正理論)』을 저술하여 신인명(新因明)의 불교 논리학을 확립했다.
구구인(九句因)에 의해 인(因)의 3상(相)을 확립하고,
5지 작법을 3지 작법으로 개량함으로써 인명의 논리적 의의를 혁신했다.
또 유식학에서는 견(見),
상(相),
자증(自證)의 삼분설(三分說)을 세웠다.
호법(護法) 논사가 그의 노선을 계승한다.
저서로 『관소연연론(觀所緣緣論)』,
『관총상론송(觀惣相論頌)』,
『무상사진론(無相思塵論)』,
『불모반야바라밀다원집요의론(佛母般若波羅蜜多圓集要義論)』,
『인명정리문론(因明正理門論)』,
『인명정리문론본(因明正理門論本)』,
『장중론(掌中論)』,
『취인가설론(取因假設論)』,
『해권론(解捲論)』 등이 있다.
24)
24) ‘곡물의 거리’라는 뜻이다.
크리슈나강 하구 부근의 나라이며,
도성은 크리슈나강 남쪽 언덕의 Phāraṇikoṭṭa 부근이라고 한다.
25)
25) 지금의 스마트라 일대에 해당한다.
수도 칸치푸라는 지금의 Palar강 앞에 있고,
Conjecveram이라고 한다.
드라비다는 언어적으로는 남인도 일대에 퍼져 있는 Tamil어족의 총칭으로 쓰인다.
26)
26) 건지보라(建志補羅)는 범명 Kāñcipura의 음역이다.
고대 남인도 달라비다(達羅毘茶國)의 도성으로,
건지성(建志城)이라고도 부른다.
본서에서는 이 성이 달마비라보살이 태어난 곳이라 하고,
또 건지성은 인도의 남해의 항구로 승가라국(僧伽羅國)까지는 수로로 3일이면 도착한다고 한다.
혹은 지금의 마드라스(Madras) 서쪽 48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팔라(Palār) 호반의 칸저베르남(Conjeveram)이라고도 하고,
또 일설에는 네가파탐(Negapatam)이 옛날의 건지보라성이라고도 한다.
27)
27) 유식(唯識)의 10대 논사 중 한 사람인 호법(護法)의 범어 이름이다.
28)
28) 범어 Malakūṭa의 음역으로 산간지방이라는 뜻이다.
인도 반도의 남단부를 영역으로 하고,
도성은 마두라(Madura)로 추정된다.
29)
29) 네 종류의 병사,
즉 상병(象兵)ㆍ마병(馬兵)ㆍ거병(車兵)ㆍ보명(步兵)을 말한다.
30)
30) 파랄사는 파라사의 음역이다.
인도의 서쪽,
페르시아 지역에 있었던 나라의 옛 이름이며,
현재의 이란에 해당한다.
31)
31) 나찰(羅刹)은 라크샤사의 음역으로 8부중(部衆)의 하나이다.
사람의 혈육(血肉)을 먹는 나찰은 악귀(惡鬼)의 통칭으로 쓰이기도 한다.
4천왕 중에서 북방 비사문천의 권속이다.
32)
32) 당 나라 현장(玄奘) 법사가 17년 동안,
즉 629년 8월부터 645년 2월에 걸쳐서 서역(西域) 지방을 비롯하여 인도(印度) 여러 나라들을 여행한 순례기이다.
본 문헌에서 언급하고 있는 나라들의 수는 대략 138개 국에 이른다.
그 중에서 현장 스님이 직접 탐방했던 나라는 모두 110개 국이며,
그 나머지는 다른 사람의 전언이나 다른 문헌들을 기록한 것이다.
33)
33) 사문으로서 수행을 다한 뒤에 얻게 되는 과(果)를 말한다.
34)
34) 부처의 32상 중 하나로,
정수리 부분에 혹 모양으로 솟아 있는 것을 가리킨다.
산스크리트로 우슈니샤란 머리 장식을 붙일 수 있는 머리칼을 뜻한다.
하지만 삭발한 출가 수행자였던 석가모니가 머리 장식을 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고래로 인도의 귀족과 왕족들은 머리 장식을 하거나 터반(turban)을 쓰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한 머리 모양을 한 귀인(貴人)의 모습을 따서 초기의 불상이 조성되었고,
점차 민상투의 표현이 양식화되면서 마침내 큰 상투라는 의미는 상실한 채 정수리에 상투처럼 살이 솟아올랐다는 육계의 의미로 바뀌게 되었다.
육계를 풀어서 ‘살상투’라고도 한다.
35)
35) 랑카의 음역이다.
『능가경(楞伽經)』이 설해진 장소로,
인도의 남해안에 있는 산이다.
또는 현재의 스리랑카에 있는 아담스 피크 산을 가리킨다고 하며,
산 정상에는 부처의 족적(足跡)이 남아 있다고 한다.
36)
36) 사자는 싱할라의 번역이다.
현재의 실론섬,
즉 스리랑카를 가리킨다.
인도 대륙의 밑에 자리한 석란도(錫蘭島)의 옛 이름으로 예부터 땅이 비옥하고 산물이 풍부하여 보물섬으로 알려졌다.
옛날 남인도의 어느 나라 공주의 아들이 이 섬에서 아버지였던 사자를 죽이고 백성들의 원한을 풀어 주었다는 전설에 따라 사자국이라 불렀다.
그 공주의 아들이 바로 이 섬나라의 첫 지배자였다고 전한다.
또 다른 전설에 따르면,
이 섬을 차지하고 있던 나찰녀들을 정복하고 사람들이 살 수 있도록 해 준 싱할라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라도 한다.
37)
37) 범어 Koṅkaṇa-pura의 음역이다.
공(恭)자는 『서역기』에서 보충한 것이다.
38)
38) 싯다르타의 음역인 실달다(悉達多)의 줄임말이다.
원뜻은 모든 것을 성취한 이라는 뜻이며,
석가모니가 출가 전 태자였을 때의 이름이다.
39)
39) 종려의 일종으로 이 잎을 패다라(貝多羅)라고 하여 글을 베끼는 데 쓰였다.
40)
40) 그 영역은 고다바리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봄베이 동쪽에 펼쳐있는 마하라쉬트라(Mahārāṣṭra)이며,
북쪽은 Malwa,
동쪽은 kosalaㆍAndhra,
남쪽은 Konkana,
서쪽은 바다로 둘러싸인 지역이다.
도성은 봄베이 동북쪽 약 50km인 kalyan이나 그 동북쪽 약 100km의 Nasik이라고 한다.
특히 Nasik 부근에는 불탑과 석굴의 유적이 많고,
『서역기』의 기록과 합치한다고 한다.
『서역기』에 의하면 현장은 마하랄타국에서 대성 안팎에 있는 다섯 개의 탑과 성 남쪽에 있는 오래된 가람을 순례한 다음,
이 나라의 동쪽 국경의 큰 산에 있는 아잔타(Ajaṇṭā) 석굴을 순례한 것 같다.
41)
41) 7세기경 중인도에 자리했던 갈야국사국(羯若鞠闍國)의 왕 이름이다.
불교를 보호하였으며,
불교 희곡인 나가난다(nāgānada)를 저술했다.
현장 스님이 방문했을 당시에 매우 환대하였다고 전한다.
42)
42) 범어 Mālava의 음역이다.
이 나라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V.
Smith는 구자라트(Gujarāt) 중앙부의 AhmedabadㆍKaira로 추정했고,
Majumdar는 멀리 동북동쪽의 Ujjayini 지방이라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자은전』』과 『서역기』에는 모두 서북으로 2천 리를 가서 말라바국에 이르렀다고 기술되어 있는 것을 볼 때,
후자의 설은 무리인 것 같다.
『서역기』에는 “나라의 도성은 주위가 30여 리이며,
막하하(莫訶河)의 동남에 있다”고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막하는 Mahā로서 큰 강이며,
Sābarmati강에 해당될 것이라 보고,
아마다바드(Ahmadabad)로 추정하고 있다.
43)
43) 『서역기』에는 시라아질다(尸羅阿迭多,
Silāditya)라고 한다.
44)
44) 과거칠불(過去七佛)을 말한다.
석가모니불은 결코 유일무이한 부처가 아니며,
그 이전에도 이미 여섯 부처가 있었다고 한다.
즉 석가모니 이전 과거 시대에 존재했던 유위불(維衛佛)ㆍ식불(式佛)ㆍ수기불(隨棄佛)ㆍ구류진불(拘留秦佛)ㆍ구나함모니불(拘那含牟尼佛)ㆍ가섭불(迦葉佛) 등의 여섯 부처와 석가모니불을 합하여 7불이라 하는 것이다.
45)
45) 아타리국의 원어와 위치는 확실하지 않다.
현장의 기록은 『서역기』와 『자은전』을 비교,
대조해 보아도 명확치 않다.
말라바국 이래로 모두 서북 몇 리라고 쓰고 있으나,
실제로는 GujaratㆍKutch지방은 저습지대로서 추정할 만한 도시도 없고,
지금의 어디에 해당되는지 결정하기가 퍽 어렵다.
46)
46) 원음은 확실하지 않지만 수곡씨(水谷氏)는 원음을 katta로 추정하고 있다.
『서역기』에는 “말라바국으로부터 서북 3백여 리를 가면 카차국에 이른다”고 하였고 『자은전』에는 “아타리국으로부터 서북으로 3일을 간다”라고 기술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서역기』를 따랐다.
이 나라의 위치에 대하여 Cunningham은 Gujarat의 Kaira라고 하였고,
Julien은 카듸아왈 반도 대안(對岸)의 cutch라 하였고,
Watters 등도 이에 따르고 있다.
47)
47) 범어 Valabhī의 음역이다.
『자은전』과 『서역기』에는 모두 발라비국은 카차국의 북방 천 리라고 기술되어 있으나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Valabhi국은 Maitraka왕국의 서방 분국(分國)으로 카듸아왈 반도에 있으며,
그 동방 분국이 말라비국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이 지역의 방위와 거리의 기록은 의문이 많아 장차 재검토해야 할 것이다.
발라비국의 도성은 이 반도 동쪽 해안의 Bhaunagar 서쪽 약 35km의 Vala(Valabhipur)로 추정된다.
48)
48) 전에는 Cunningham 등의 설에 따라 Ahmadabad 부근이라고 생각하였으나,
현재는 거기서부터 약 96km 북쪽의 Vaḍnagar로 추정되고 있다.
49)
49) 범어 Surāṣṭra의 음역이다.
『자은전』에서는 아난다푸라국에서 다시 서북쪽으로 나아간 것처럼 기술하고 있으나,
『서역기』에는 “벌랍비국(伐臘毗國)에서 서쪽으로 5백여 리를 가면 소랄타국(蘇剌國)에 이른다”고 하였으니 이를 택해야 한다.
이 나라는 카듸아왈 반도의 남부에 있으며,
도성은 Junāgaḍh(고대의 Girinagara)이다.
50)
50) 범어 Gurjara의 음역이다.
구자라트(Gujarat)는 백훈족(族)과 관계가 있는 민족이라고 하며,
7세기에는 아직 지금의 구자라트에 남하하지 않았고 라자스탄(Rājastan) 남부에 있었으며,
Barmer 또는 Bhinmal 지방을 본거지로 하고 있었다.
51)
51) 범어 Ujjayanī,
Ujjaianī의 음역이다.
지금의 중앙주의 우짜인(Ujjain)지방이다.
고대 16개국의 하나이며 옛적부터 국제교역으로 활약하여 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하였다.
52)
52) 원명은 자세하지 않으며,
수곡씨는 ḍakida로 추정하고 있다.
그 위치도 Cunningham은 Bundelkhand의 Jajābhukti로 보고,
Watters는 우짜인 북쪽의 Chitorgarḥ로 추정하였다.
전자의 설을 취하는 자가 많으며,
그 도성은 카쥬라호(Khajuraho)로 추정되고 있다.
53)
53) 이 나라의 위치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Bundelkhand의 북서쪽에 있는 과리올(Gwalior) 지방으로 보는 설이 유력하다.
54)
54) 원음은 확실하지 않으며 추정음은 Auduṁbaṭira[Cunningham]〮ㆍAdhyarakila [Julien]〮ㆍAtyanabakhela[Beal]ㆍateṁbaśila[水谷] 등이다.
Auduṃbaṭira란 인더스강 하구의 카치(Kacch)에서 사는 민족의 이름이며,
도성은 카라치(Karāchi)로 추정된다.
55)
55) 이 나라의 원음도 확실하지 않다.
이 나라는 『자은전』과 『서역기』에서 모두 어덤바티라국의 서쪽 2천여 리로 기술되어 있는 것을 보면,
지금의 서파키스탄의 마크란(Makran) 지방으로 추정할 수 있다.
56)
56) 페르시아 즉 지금의 이란을 말한다.
57)
57) 이란어족이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등의 동(東)로마를 가리키는 말이다.
중세 페르시아 문헌에 나타나는 HrumㆍFromㆍHromㆍPorum(로마 Rum의 사투리)의 음역이다.
58)
58) 황백색산(黃白色山)이라는 뜻이다.
지금의 하이데라바드(Hyderabad)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으로 도성은 Hyderabad이다.
59)
59) 원음은 확실하지 않다.
지금의 Brahmaṇabad나 Khaipur 부근이며,
도성도 그 어느 쪽의 도시엔가 해당되고 있다.
60)
60) 누덕누덕 기워서 만든 옷을 말하는 것으로,
수행자들이 입는 옷을 일컫는다.
61)
61) 지금의 서파키스탄 북부 신두(Upper Sind)의 수크르(Sukkur) 부근이며 그 중심지는 아롤(Alor)이다.
62)
62) 신도(信度)라고도 한다.
인도 서북부의 큰 강으로 인도사하(印度斯河)ㆍ신도하(新陶河)ㆍ랍초하(拉楚河)ㆍ신두하(新頭河)ㆍ신두하(辛頭河)라고도 부른다.
즉 지금의 인도하(印度河)이다.
63)
63) 인더스강 상류의 Chenab강과 Sutlej강이 합류하는 물탄(Multan) 지방을 가리킨다.
64)
64) 범어 parvata의 음역이다.
전에는 라홀 북쪽의 잠무(Jammu)로 추정되기도 했으나,
여기서는 Multan으로부터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에 지금은 라홀 서남쪽 몽고메리(Mongomery)구의 하랍파(Harappa) 일대로 보고,
도성도 Harappa로 추정하고 있다.
65)
65) 『유가사지론석(瑜伽師地論釋)』을 말한다.
줄여서 『유가론석(瑜伽論釋)』이라고 한다.
유가사지론이 설해진 목적,
제작의 경위,
이름의 뜻 등과 본지분(本地分)에 나오는 17지(地)의 의의를 6문(門)으로 나누어 간략하게 주석한다.
저자는 유식의 10대 논사 중 한 사람이고 호법(護法)의 문하인 최승자,
즉 진나불다라(辰那弗多羅,
Cinaputra)와 그 밖의 여러 논사들이다.
유가사지론의 주석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서 후대의 주석가들은 모두 이를 계승하여 사용하고 있다.
후에 현장이 번역하였다.
66)
66) 『서역기』에는 왕사성 밖 불타벌나산의 동쪽 30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67)
67) 12가지 요소가 서로 인과 관계를 이루어 가면서 성립되는 것을 말한다.
68)
68) 중생이 윤회하는 세 가지 영역의 세계이며 생명체가 머무는 세계 전체를 뜻한다.
생사 유전하는 미혹의 세계를 세 단계로 구분한 것이기도 하다.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말한다.
무한한 대해와도 같은 미혹과 고(苦)의 영역이므로 고해(苦海) 또는 고계(苦界)라고 불린다.
69)
69) 당나라 초기에 인도로 파견된 사신으로 세 차례 인도에 다녀온 후 『중천축행기(中天竺行記)』를 저술하였으며 불교문물의 왕래를 통하여 중국ㆍ인도 양국의 문화교류에 크게 공헌하였다.
처음에는 북인도를 통일한 계일왕(戒日王:
하르샤 바르다나)의 견당사(遣唐使) 바라문의 귀국을 호위하는 부사(副使)로 643-646년 마가다왕국 등에 다녀왔다.
이어 647-648년 정사(正使)가 되어 북인도에 갔는데,
찬탈자 아라나순(阿羅那順)이 군사를 이끌고 입국을 거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공물(貢物)과 무역품을 약탈하므로 일단 몸을 피했다가 티베트[吐蕃]와 네팔에서 수천 원병을 얻어 아라나순을 격파하고 그를 잡아 당나라로 압송하였다.
그 공으로 조산대부(朝散大夫)로 등용되었고,
다시 657∼661년에 세 번째 사신이 되어 중부인도 각지를 순방하였다.
귀국 후 수년간에 찬술(撰述)한 것으로 보이는 『중천축행기(中天竺行記:
별명 王玄策行記)』 10권은 오늘날 『법원주림(法苑珠林)』 등에 20여 가지의 일문(逸文)을 남기고 있으나,
현장(玄奘)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를 보완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또한 그의 파견은 불족석(佛足石) 등 불교문물의 왕래를 통하여 중국 ㆍ인도 양국의 문화교류에 크게 공헌함으로써 그를 불후의 인물로 만들었다.
70)
70) 편계소집의 속음으로 망상된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주관적으로 구상된 것의 특질이라는 뜻으로,
어떤 대상이 실재로서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것과 유사한 형상을 마음에 떠올려서 집착함으로써 실재하는 것인 양 망상된 모습을 보는 것이다.
71)
71) 3자성(自性)의 하나이다.
다른 것에 의존하는 것을 말한다.
다른 것에 의존해 있는 상태의 존재,
인연이 화합함으로써 발생하고 인연이 흩어짐으로써 사라지는 것으로 유식설에서 유위법에 속하는 모든 것을 말한다.
비유하면 새끼줄을 뱀이라고 착각한 것은 뱀이라는 망상에 의존하기 때문인 것과 같다.
72)
72) 3자성(自性)의 하나이다.
완성된 것을 말한다.
원만하게 성취된 진실한 것,
존재하는 모든 것의 진실한 본성.
완전하게 이해된 상태의 존재이다.
진여(眞如)와 상통하는 말이다.
인연에 의해 발생한다는 의타기성에 입각하여 관찰할 때,
실재라고 오인된 것인 변계소집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비유하면 뱀으로 착각된 새끼줄은 본래 볏짚 등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파악되는 진상이다.
73)
73) 공화(空華)란 공중의 꽃이란 뜻으로,
허공중에는 본디 꽃이 없는 것이지만,
잘못 되어 이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본디 실재하지 않는 것을 실재한 것이라고 잘못 아는 것을 비유한 말로,
즉 망상(妄想)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망상에 사로잡힌 외도라는 뜻이다.
74)
74) 고대 인도의 종교 파별 가운데 하나로,
의역하면 결만(結蔓)이라고 한다.
사람 두개골로 목걸이를 만들어 달고 다녀서 붙은 이름이다.
75)
75) 인도의 나란타사(那爛陀寺)의 학승이다.
계현(戒賢) 논사의 상수로서 대승과 소승 및 외도의 학문에도 정통하여 명성이 높았다.
현장(玄奘) 법사가 인도에 갔을 때 나란타사에서 함께 수학했으며,
현장이 귀국한 후에 편지를 서로 주고받았다고 한다.
76)
76) 고대 인도의 종파의 하나로,
자연계의 지(地)ㆍ화(火)ㆍ수(水)ㆍ풍(風)을 신봉하여서 얻게 된 이름이다.
77)
77) 현장(玄奘)의 이름으로 대승천(大乘天)이라는 뜻이다.
78)
78) 외도 가운데 하나로 재를 몸에 바르는 외도이다.
79)
79) 6사 외도 중 한 사람인 니건자의 번역 이름으로,
자이나교라고도 한다.
80)
80) 수(數)에 관한 논을 기조로 하는 인도 육파철학의 하나이다.
81)
81) 인도의 정통 6파 철학의 하나로 『승론경(勝論經)』을 중심으로 하여 6구의(句義)로 이루어진 범주론을 주장하였다.
모든 논에 앞서는 논이라는 뜻으로,
흔히 유물론적 다원론자(多元論者)로 분류되며,
불교에서는 외도(外道)의 하나로서 논박하고 있다.
82)
82) 자성(自性)ㆍ각(覺)ㆍ인내(忍耐)ㆍ5지근(知根)ㆍ5작근(作根)ㆍ심근(心根)ㆍ5유(唯)ㆍ5대(大)ㆍ신아(神我) 등 25의(義)를 말한다.
83)
83) 5대를 낳는 공능(功能)이 있는 순수무구(純粹無垢)의 원리인 성(聲)ㆍ촉(觸)ㆍ색(色)ㆍ미(味)ㆍ향(香)을 가리킨다.
84)
84) 4대(大)인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 등에 공(空)을 더한 다섯 가지이다.
세상 만물을 이루고 있는 다섯 가지의 구성 요소를 말한다.
85)
85) 인도의 정통 6파 철학의 하나인 승론(勝論,
vaiśeṣika) 학파에서 주장한 범주론으로서,
모든 존재를 6종으로 구분한 것이다.
실체(實體, dravya),
성질(性質, 屬性, 德:guṇa),
운동(運動, 業:karma),
동일성(同一性, 普遍, 同:sāmānya),
차별성(差別性, 特殊性, 異:viśeṣa),
결합성(結合性, 內屬, 和合:samavāya) 등이다.
86)
86) 불법(佛法)을 셋으로 분류한 것으로,
①석가모니가 일생 동안 설한 교법(敎法).
②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실천 수행하는 법으로서 행법(行法).
③수행을 통한 결과로서 얻게 되는 보리(菩提)와 열반(涅槃) 등의 증법(證法)을 말한다.
87)
87) 중생(衆生)의 원어인 삿트와의 음역이다.
환희를 말한다.
88)
88) 수론에서 말하는 3덕(德)이다.
89)
89) 범어 Kāmarūpa의 음역이다.
앗삼의 범어명(梵語名)이다.
이 나라는 앗삼의 서부로 추정되며,
그 도성은 Kāmrup의 도시 Ganhati로 추정되고 있다.
○ [pt op 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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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Arthur H Nicolas Repac - Le Metier A Metisser.lrc
● 삼장법사의 공덕
◈Lab value 불기2564/08/10 |
♡Wat Suwan Khuha
Marc Lavoine - Auprès De Toi Mon Frè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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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0/08/2564-08-10-k1071-004.html#1619 sfed--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_K1071_T2053.txt ☞제4권 sfd8--불교단상_2564_08.txt ☞◆vtey1619 불기2564-08-10 θθ |
■ 선물 퀴즈
방문자선물 안내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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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의 계위(階位) 가운데 10회향(廻向)의 제10위. 온갖 법이 원융(圓融)하여 상대를 여의고,
중도무상(中道無相)의 이치에 증입(證入)하는 지위.
답 후보
● 입법계무량(入法界無量)
자리이타(自利利他)
자상(自相)
자성불선(自性不善)
자수용신(自受用身)
자연(自然)
자자건도(自恣犍度)
ॐ मणि पद्मे हूँ
○ [pt op tr]
○ [pt op tr]
●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_K1071_T2053 [문서정보]- 일일단상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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