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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공함이 목적인가. 좋음이 목적인가. 본문
[ 요약 ]
|
● 공함이 목적인가. 좋음이 목적인가.
이 논의는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을 한다고 할 때
왜 어려움과 힘듬을
참고 수행하는가에
관련된 논의이다.
밖에서 보기에도 힘들어 보이는 여러 수행을 열심히 행하고 있고,
또 행하고자 하는데
그것은 최종적으로 무엇을 얻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인가.
왜 힘들게 어떤 수행을 하는가.
수행을 직접 하는 입장이건 이를 바라보는 입장이건 이런 의문이 생길만한다.
여기에 대한 결론적 내용은
쉽게 말해 수행을 안 하는 것보다 하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오래오래 좋고
좋음을 얻기 위해서 수행을 하는 것이다라고
간단히 정리할 수 있다.
○ 그런데 이런 수행과 관련하여
불교에서 강조되는 기본적 판단내용들이
개입되어 혼동을 갖는 경우가 많다.
즉, 일체는 무상하고 무아 무자성이며 공하다.
이런 판단은 불교에서 행하는 근본적 판단이다.
그런데 그런 판단들이 왜 수행하는가에 대한 의문에
혼동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모든 것'은 공하다.[일체개공]
수행을 통해 도달하는 최종상태도 또한 공하다.
부처님의 상태도 공하다.
===>
그래서 공을 증득해 공한 상태가 되는 것이 불교 수행의 목적이다.
이런 생각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일체가 공하다는 내용을 통해
이런 혼동을 일으켜 갖는 경우가 현실적으로 대단히 많다.
그래서 과연 여러 수행방안을 통해 수행하는 것이
공함을 위한 것인가.
또는 공하게 되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좋게 되기
위해서인가.
이런 의문을 갖기도 한다.
그래서 이런 기본적인 의문에 대해 논의해보고자 한다.
앞에서는 공함을 가지고 말했지만 일체에 관한 다른 판단내용,
즉 영원하지 않음[무상], 고통[고],
영원불변한 실체가 없음[무아, 무자성] 등의 판단도
역시 최종 목적상태와
관련해 혼동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예를들어 다음과 같은 경우들이다.
일체는 무상, 고, 무아, 무자성, 공이다.
그렇다면
오랜 수행을 거쳐 얻는 그 상태도
역시 영원하지 않은 것 아닌가.
역시 고통의 상태인가.
역시 무아이고
무자성인가.
공한가.
이미 일체가 그러하다는 판단을 행한 상태에서
수행을 통해 최종적으로 향하는 상태 역시 그렇다고 한다면,
오랜 시간에 걸쳐 어렵게
힘들게 행하는 수행은
최종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고
어떤 상태를 향하는 것인가.
일체가 그렇고 수행을 통해 최종적으로 얻는 상태도 역시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그런 수행을 하는가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의문을
'공함이 목적인가, 좋음이 목적인가'
라는 간단한 명제로 정리해 제시한 것이다.
우선 이 논의를 살피기 위해
불교에서 행하는 기본적인 판단들의 내용을 대략 살필 필요가 있다.
○ 불교에서는 일체에 대해 행하는 판단 내용으로는 다음 내용들이 있다.
모든 것은 영원함이 없다. [제행무상]
모든 것은 고통의 현상[법]이다. [일체개고]
모든 것에 나라는 본체가 없다. [제법무아]
모든 것은 다 공하다. [일체개공]
이런 내용들이 그런 내용들이다.
● 여기서 현상에 관한 판단으로는
'모든 것에는 영원함이 없다'[제행무상]을 내용을 들 수 있다.
이는 비교적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다.
찰나의 순간에 모든 현상은 없어지고 또 나타남을 실제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눈으로 얻는 모든 현실 모습은 눈 한번 뜨고 감을 때마다 그 모습이 나타나고 사라진다.
다른 감각내용도 그렇고, 마음 속 생각도 그렇다.
그래서 현상의 모든 내용에는 영원함이 없음을 쉽게 증명할 수 있다.
● 한편
모든 것이 고통의 법이다 라는 내용도 있다.
이 내용은 일반적으로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도 있다.
왜냐 하면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 가운데는
그것이 즐거움인 경우도 있고,
즐겁지도 않고 고통스럽지도 않은 내용도 있고
조금은 즐겁고 조금은 고통스러운 그런 내용도 있어서
즐거운 내용도 함께 뒤섞여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석존께서는 즐거움이 현실세계에 전혀 없다는 의미로
위와 같은 판단을 하신 것은 물론 아니다.
석존은 스스로 출가하기 전 왕자로써 세속의 지극한 즐거움을 맛보았으며,
상식적으로 그런 즐거운 내용이 현실에 있음을 모르시는 것이
아니다.
위 판단은 다음을 의미한다.
현상의 모든 내용 가운데 해결해야하는 문제상황은 고통이다.
그런데 현상의 모든 내용은 이 고통과 결국 관련되고 또 고통에 귀결된다.
따라서 일체의 모든 것이 해결해야 할 문제상황, 고통과
관련되고, 이에 귀결된다.
그래서 일체의 모든 것이 고통이다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우선 모든 것은 그것이 고통을 주거나, 즐거움을 주거나, 그 둘다 아니거나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고통스러움을 주는 것은
그 자체가 고통스러움이기 때문에 고통이라고 할 수 있다. [ 고고 ]
한편 현실에서 즐거움을 주는 것은,
그것이
소멸될 때 고통스러움을 주기 때문에 고통과 관련된다. [괴고]
그 외 고통스럽지도 않고 즐거움을 주지도 않는 것은,
그것이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고통과 관련된다. [ 행고]
그래서 결국은 '모든 것은 고통이며, 고통과 관련되는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가운데 특히 즐거움이나 좋음을 주는 것이 고통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석존 당대에도 그러했던 것 같다.
석존 당대에 사랑스런 아이가 죽어 고통스럽게 울부짖는 아버지가 한 사람 있었다고 한다.
석존은 그에게 그 고통의 원인은 그 아이를 죽게 한 원인들 때문이 아니라,
그 아버지가
갖는 아이에 대한 사랑 때문이라고 설법하신 적이 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먼 나라의 사람이 죽거나, 발 앞의 곤충이 죽어간다고 하여 크게 슬퍼하지 않는다.
자신과 관계없는 일이고
자신이 애착을 갖는 대상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이 무척 애착을 갖는 것이 부서지거나 없어지거나,
사랑하는 이들이 병들거나 죽어가거나 하면 몹시 가슴아파하게 된다.
이 두관계의차이를 낳는 것은 결국 무언가를 좋아하는가 안하는가의 차이에 있다.
그래서 사실 무엇인가 애착을 갖고 사랑함은
그것이 소멸할 때 고통을 느끼는 데 대한 원인이 됨을 알 수있다.
● 한편 무아 무자성은 영원불변한 실체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영원불변한 실체가 없음을 증명할 때는,
이 세상 이 우주를 전 시간대에 뒤져서 그런 것이 없음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것이 없음을 증명하기 위하여,
예를 들어 영원불변한 실체가 있을 때는 어떠어떠하다.
그런데 어떠어떠하지 않으므로
그것은 없다는 '실증적' 논증형식을 취하기도 어렵다.
영원불변한 본체가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이가
'그런 것이 있을 때는 어떠어떠하다' 라고 어떤 '실증적인' 내용을 전제로 내세우는 것이
자기 모순에 빠지는 내용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아, 무자성의 증명은 그런 식으로 행하기 어렵다.
그 증명은 다음 방식으로 행하게 된다.
우선 현실에 대해 이를 현상과 실재의 면에서 관찰할 때의 내용을 하나 얻는다.
한편 영원불변한 본체로서의 무아,
무자성이란 관념이 갖는 속성들을 통해,
그 개념이 갖는 속성으로 필연적으로 갖게 되는 다른 관념적 내용을 얻는다.
참고로 이런 관념적 내용은 이를 경험적으로 '실증'해 얻는 것은 아니다.
이들 관념은 단지 그런 관념에 해당하는 내용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세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찾고자 하는 내용으로 주장된 개념적 내용으로부터
그 개념이 속성으로 갖는 여러 내용들을 제시받게 된다.
그리고
그런 내용이 다시 개념적 형식적으로 필연적으로 이끌어내게 되는 다른 속성을 얻게 된다.
이들은 순수하게 개념적 형식적 관념적
내용이며
경험적인 실증을 통해 얻는 내용은 아니라는 점에서 위와 구별할 수 있다.
그 다음 현실의 내용과 이런 관념의 내용이 서로
모순 상충됨을 통해,
그런 개념에 해당하는 것은 있을 수 없음을 밝히는 방식[귀류논증방식]을 논증방법으로 택하게 된다.
간단히 말해 석존은 세상에 티끌만한 것이라도 영원불변한 본체가 있다면
지금 대하여 보는 것과 같은 현상은 성립하지 못함을 통해,
굳이 모든 우주를 모든 시간대에 걸쳐 관찰하고 찾아보지 않는다하여도
일체에 영원불변한 본체가 없음을 쉽게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곧 무아, 무자성의 판단이 된다.
● 한편 일체 개공의 공의 의미는 한층 더 어렵다.
그래서 어떤 차원에서 일체가 공하다는 말을 하게 되는가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현상을 대한다.
비가 내리기도 하고 꽃이 피기도 하는 그런 모습을 보고 대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러 현상을 우리가 대할 때 앞처럼 그 내용은 현상적으로 영원하지도 않다.
또 그 안에 영원불변한 본체가 없다. 등등으로 판단한다.
그런데 또하나 판단해야 할 내용이 있다.
그것은 실재로 무엇인가.
그것의 실재 모습[실상]은 무엇인가.
그것의 실재내용은 무엇이라 할 것인가 등의
의문이다.
예를 들어 꽃이라던지 바위라던지 우리가 대하는 현상의 모습을 놓고 이 문제를 생각해보자.
이런 현실의 모습들은 우리가 대할 때는 그 모습을 얻고 보이게 된다.
그러나 그 모습을 대하지 않을 때는 얻을 수 없고 보이지 않게 된다.
결국 우리가 얻고 생각하고 하는 모든 내용은
우리의 감각기관과 인식기관이 관계할 때 이를 통해 얻는 내용들이다.
그런데 그렇게 얻어 놓은 모습이나 내용들은
우리 자신이 없고 우리의 감각기관 등이 관계하지 않을 때는
그것 자체로서는 독립적으로 어떠한 모습 내용으로
있다고 할 것인가.
예를들어
우리가 본 모습은 우리와 관계하지 않고서도
있다고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아예 없다고 해야 할 것인가.
또 그 존재들이 우리와 관계없이 있는 것이라면,
그 모습은 우리가 본 모습과 같다고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인가.
등의 판단이 문제된다.
이런 문제의식이 무엇의 실재내용을 찾을 때의 문제다.
그리고 이런 의문이
어떤 것의 실재모습(실상)은 무엇인가
또는 어떤 것은 실재로는 무엇인가.
또는 어떤 것의 실재내용은 무엇인가 등의 문제가 된다.
그런데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은 다음과 같다.
우리와 관계하지 않는 상태에서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의 실재내용은 끝내 얻을 수 없다.[불가득]
그런 실재내용은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고,
-이다고도 할 수 없고 -아니다고도 할 수 없고
-과 같다고도 할 수
없고 -과 다르다고도 할 수 없고,
기타 온갖 이분법상의 분별을 행할 수 없고 [불이]
언어 표현을 떠나게 된다[ 불가설]
그래서 이런 상태를 언어로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는 표현이 '공'이라는 표현이다.
일체가 다 공하다는 표현은
바로 모든 것이 이와 같은 상황에 공통적으로 놓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 수행의 목적과 무상, 고, 무아, 무자성, 공 등의 판단과의 관련성
위와 같은 여러 판단은 불교의 실상론에서 매우 중요시되는 내용들이다.
우리가 대하는 것에 대해
현상적으로,
가치적으로,
실체적으로,
실재적으로,
어떤 판단을 행해야 하는가에 관한 기본적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는 한마디로 그것은 무엇인가에 관한 내용들[실상론]이다.
그리고 이 가운데 공에 관련된 내용은 특히 이해하기 힘들고,
그래서 이에 대한 깨달음이 강조되게 된다.
● 앞에서 논의제목을 공함이 목적인가, 좋음이 목적인가로 붙인 것은
앞의 여러 내용 특히 공에 대한 내용의 깨달음이
수행과정상
강조되는 가운데
자칫 수행목적과 관련하여 혼동을 일으키기 쉽다는 사정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여러 수행을 한다.
그런데 그 수행은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매우 행하기 힘든 내용이 많다.
편안한 집을 나와 나무 밑에서 선정을 닦는다거나,
구걸하여 생계를 이어간다거나,
경전내용을 이해하고
외운다거나,
등의 여러 수행은 행하기 힘든 내용인데
왜 이런 수행을 하는가가 의문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도 현실적으로 어떤 어려움을 마다하지 않고 행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때 왜 그렇게 행하는가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그것은 여하튼 그를 통해 좋음을 얻기 위해서다.
즉, 그런 어려움을 마다하지 않는 이유는
나쁨을 막거나 줄이기 위해서
또는 좋음을 얻거나 더 키우기 위해서다.
그런데 불교수행은 어떠한가.
좋은 것에 대한 탐욕을 끊고
분노가 일어날 때 분노를 터뜨려 통쾌함을 얻는 행위도 끊고,
화를 참고 모욕이나 수치나 불쾌를 참고 견디고자
하고,
어려운 경전 내용을 이해하고 외우고 하는 등을 만일 한다면,
그것은 무엇을 향해 하는 행위인가.
사실 결론은 앞의 세속적인 행위가 향하는 내용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함으로써 더 좋고 좋으며 오래 오래 좋은 상태를 얻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다.
다만, 그 좋고 좋은 상태가
세속생활에서
직접 감각적으로 얻는 좋음과는
조금 내용이 다르기 때문에
쉽게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또 이 내용에서 다시 혼동과 오해를 일으키는 것은
앞에서 행한 여러 판단들이다.
즉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 일체개공 등의 판단이
수행목적 상태와 관련하여 혼동을 일으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수행의 궁극적 목적 상태는
수행을 통해 아라한[성자]가 되고,
보살이 되고,
더 나아가 부처의 상태를 이루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그런 부처의 상태도 다시 공하다라는 설법을 자주 행한다.
그래서 결국 부처도 공하고 일반인이나 다른 생명도 공하고
선도 악도 모두 공하고
결국 모든 것이 다 공하다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또 한편 이런 공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 것이 수행과정상 강조된다.
그런 가운데, 공을 증득함이 불교 수행의 궁극적 목적인가.
심지어 공한 상태가 되는 것이 수행의 궁극적 목적인가
하는 혼동을 일으켜 갖게 되는 것이다.
○ 그러나 위 의문은 다음과 같이 정리해야 한다.
공을 깨닫는 것은 중요하다.
그런데 불교수행에서 깨닫고 증득해야 할 많은 내용 가운데 중요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전부는 또한 아니다.
또한 깨닫거나 깨닫지 못하거나,
일반인이거나 부처가 되거나,
돌이나 바위마저도 모두 그 상태그대로 본래 공하다.
그러니
본래 모든 것과 모든 주체가 다 공하다.
그래서 모든 것이 이처럼 본래 공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본래 공한 것인데
'수행을 통해 공해진다'는 것은 말 자체가
어불성설이며 의미 없는 것이다.
즉, 공의 증득이란,
어떤 것이 공하지 않은 것이 있었는데
그런 상태에서 노력을 통해 새삼스럽게 공해지게 된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따라서 그렇게 새삼 공해진다는 등은 수행의 목적상태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공의 증득이란,
우리가 실상의 내용을 찾을 때
그 실상의 내용이 앞처럼 그러그러하다는 진리를 올바로 깨닫는 차원에서
증득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공을 깨닫는다고 할 때,
깨닫는 실재 대상과 그 내용들은 이미 앞에서 본 것처럼
얻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불가득 공 ]
오히려 무언가의 실재내용은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공의 깨달음과 관련된다.
그래서 공에 대한 위와 같은 이해, 깨달음이 중요한 것이지만,
이는 불교 수행의 유일무이한 목적은 아니다.
또 이런 깨달음을 바탕으로 행해 나가야 하는 여러 수행들이 있다.
그리고 이런 여러 수행이 향하는 최종 궁극적 상태는
그것이 공하기 때문에 추구되는 것도 아니다.
만일 그것이 공하기 때문에 추구되는 것이라면,
이미 수행전의 상태도 공하므로,
그런 이유로 그런 수행을 굳이 해야 할 이유도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 그러면
수행을 하고 공을 깨닫고 증득하고
또 여러 수행방안을 따라 수행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사실 그런 수행을 하지 않는 것에 비해
그런 수행을 하는 것이 좋고 좋으며 오래 오래 좋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이런 관계에 대해
혼동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고 본다.
다만 그 좋음이란 현실에서 추구하는 여러 좋음이 갖는 단편적인 성격,
그리고 일시적인 성격,
즉 감각적이고 일시적인 좋음,
또는 짧게 관찰하고
얻는 짧은 지혜와 견해에서 좋다고 추구하는
부나 권력 명예 등의 좋음과는 차원이 다른 좋음을 향하는 것이다.
시간적으로 무량한 겁에 걸쳐
공간적으로 무한하고 끝없는 공간에 걸쳐
그리고 살고 죽음에 관계없이 생사 윤회를 뛰어넘는 가운데
오래
오래 좋고 좋은 상태를 추구하는 가운데
여러 수행방안이 제시되고 강조되는 사정을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Ω♠문서정보♠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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