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4-04-28_제법무행경_001 본문

과거조각글/불기2564(2020)

불기2564-04-28_제법무행경_001

진리와 가치를 고루고루 2020. 4. 28. 22:07



®

『제법무행경』
K0168
T0650

제법무행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 해제[있는경우]
● TTS 음성듣기 안내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 [pt op tr] 제법무행경_K0168_T0650 핵심요약





『제법무행경』 ♣0168-001♧





제법무행




♥아래 부분은 현재 작성 및 정리 중인 미완성 상태의 글입니다♥
비영리-동일조건변경허락원문번역문
제법무행경




제법무행경(諸法無行經) 상권

요진(姚秦) 구마라집(鳩摩羅什) 한역
김달진 번역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왕사성의 기사굴산(耆闍崛山)에서 큰 비구승 5백 명과 함께 계셨다.

보살은 9만 2천 명이었는데,
그 이름은 중덕장엄(衆德莊嚴)보살마하살과 사자유보(師子遊步)보살ㆍ광무장정왕(光無障淨王)보살ㆍ
고산정자재왕(高山頂自在王)보살ㆍ애희정광(愛喜淨光)보살ㆍ광폐일월(光蔽日月)보살ㆍ
묘정수(妙淨鬚)보살ㆍ신출연화광(身出蓮華光)보살ㆍ범자재왕음(梵自在王音)보살ㆍ
유희세사자왕음(遊戱世師子王音)보살ㆍ금색정광위덕(金色淨光威德)보살ㆍ유연신(柔軟身)보살ㆍ
금색상장엄신(金色相莊嚴身)보살ㆍ십광파마력(十光破魔力)보살ㆍ제근위의선적(諸根威儀善寂)보살ㆍ
덕여고산보살(德如高山菩薩)ㆍ천음성보살(天音聲菩薩)ㆍ법력자재유행(法力自在遊行)보살ㆍ
산덕정신(山德淨身)보살ㆍ묘덕(妙德)보살마하살을 비롯한 이와 같은 9만 2천의 사람들이었다.


이때 사자유보(師子遊步)보살은 이 큰 모임을 보고,
곧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꿇고서
합장하고 부처님을 향해 게송으로 말씀드렸다.



세존(世尊)이시여,
대도사(大導師)시여
이름과 덕의 칭송(稱誦) 한량없는 분이시여
이제 여기에 대중들 모였으니
적멸(寂滅)의 법을 설하여 주소서.

■ 삿된 견해와 온갖 애욕과 교만
질투와 성냄의 성품이
왜 곧 그것이 도(道)입니까.
대음(大音)의 방편으로 설해 주소서.

■ 왜 열반의 모습이
세간의 법과 다름이 없습니까.
모든 법에 둘이 없음을
대비로 연설해 주소서.

어찌하여 모든 법의 성품
끝내 장애가 없으며
그 성품 열반과 같고
또 해탈과 같습니까.

묶임도 없고,
푸는 일도 없으며
또한 허공과 같다 하시니
가라빈가(迦羅頻伽)1)의 소리요
대범(大梵)의 맑고 깨끗한 음성입니다.

몸의 빛깔 하늘의 금과 같고
청정한 생활에 무량한 덕 갖추신 분이여
실상의 법을 연설하소서
끝내 묶이고 푸는 일이 없는.

왜 이 5개(蓋)가
보살과 같습니까.
왜 이 보리가
곧 모든 업(業)의 성품과 같습니까.

이 법(法)과 이 비법(非法)이
왜 동일한 모습[相]입니까.
이와 같은 필경의 청정함을
원하오니 연설해 주소서.

수(數)도 없고 비수(非數)도 없어
모든 법은 끝내 적멸하나니
일체종지(一切種智)의 모습과
그리고 보살의 도(道)에는
두 가지 법이 왜 없는지
오직 원하오니 연설해 주소서.

지음도 없고 지음이 아닌 것도 없으며
집착도 없고 집착이 아닌 것도 없으며
끝내 중생도 없어
모든 법에 걸림 없나이다.

계(戒)도 없고 인욕(忍辱)도 없고
또 계를 깨뜨림도 없으며
지(智)도 없고 혜(慧)도 없고
또 지혜(智慧)가 아닌 것도 없어
이 법은 항상 청정하나니
오직 원하오니 연설해 주소서.

왜 일체의 법이
적멸하여 허공과 같고
심(心)과 심수법(心數法:
心所法)이 없고
견해와 끊음과 증득과 닦음도 없습니까.

일체 모든 중생은
모두 허공의 모습과 같고
일상(一相)의 법 또한 없으며
심행(心行) 또한 얻을 수 없나이다.

모든 법 생멸이 없고
유학(有學)도 없고 나한(羅漢)도 없으며
또한 벽지불(辟支佛)도 없고
또 보살을 구하는 자도 없나이다.

머무름도 없고 쉴 자리도 없으며
오는 일도 없고 가는 일도 없나니
모든 법은 움직이는 모습 없어
항상 머무름이 수미산(須彌山)과 같습니다.

상(相)도 없고 색(色)도 없나니
색(色)의 성품이 곧 도(道)입니다.
색의 성품과 불도(佛道)가 하나인
이와 같은 법 연설해 주소서.

왜 불(佛)과 법(法)이 없으며
또한 중승(衆僧)도 없습니까.
이 삼보(三寶)의 일상(一相)을
오직 원하오니 연설해 주소서.

공(空)도 없고 무상(無相)도 없고
또한 무작(無作)도 없으며
합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으며
이름과 모습의 법도 또한 없습니다.

모든 법은 필경 공하여
메아리에 작자(作者)가 없음과 같나니
생(生)도 없고 무생(無生)도 없으며
멸(滅)도 없고 오고 감도 없습니다.

하늘도 없고 용과 귀신도 없고
야차와 긴나라 등도 마찬가지며
사람도 없고 지옥도 없고
아귀와 축생도 없나니
중생의 5도(道)가 없다는
이와 같은 법을 연설해 주소서.

세상의 길잡이와 같은 분이시여
외도(外道)와 잘못된 견해 가진 자들
그들이 연설하는 것들이
왜 평등하여 둘이 없습니까.

여러 문자와 언어(言語)
이런 법들은 모두 일상(一相)이니
세존이시여,
큰 자비와 연민으로
원하오니 이 법문(法門) 열어주소서.



이때 세존께서 사자유보(師子遊步)보살마하살을 칭찬하여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구나.
선남자야,
너의 질문은 너무도 희유해 일체의 세간이 믿기 어려운 것이다.

그만두라, 그만두라.
묻지 말라. 무슨 까닭인가?
새롭게 뜻을 일으킨 보살들은
이 공(空)의 견해와 무상(無相)의 견해와 무작(無作)의 견해와 무생(無生)의 견해와 무소유(無所有)의 견해와
모습을 취함이 없는 견해와
부처의 견해와
보리(菩提)의 견해에 미칠 수 없기 때문이다.


선남자야,
이와 같은 법은 새로 배우는 보살 앞에서 설해선 안 된다.

무슨 까닭인가?
만약 이 법을 들으면
혹 선업(善業)을 끊고
불도(佛道)에서 곧 삿된 도를 행하거나,
혹은 단멸(斷滅)에 떨어지거나,
혹은 영원하다고 헤아리는 데에 떨어져
여래가 어떤 방편으로 적절하게 설한 것인지를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사자유보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세간을 가엾이 여기셔서 꼭 설해 주십시오.
장차 올 세상에 공의 견해와 무상의 견해와 무작의 견해와 무생의 견해와 무소유의 견해와
모습을 취함이 없는 견해와
부처님의 견해와 보리의 견해에 대해
이것은 공이고,
이것은 무상이고,
이것은 무작이라고 분별하여
항상 찬탄하고 배우기를
좋아하고 사업(事業)을 부지런히 하며,

문자를 좋아하고 집착하며 변설(辨說)을 묘하게 하고
명예와 이익을 귀하게 여기는 보살이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이 여래께서 설하시는
필경 청정한 이 문자가 없는 법을 듣는다면
분명 이런 온갖 견해를 버릴 것입니다.



그런 보살들은 중생들이 믿고 이해할 수 있는 것에 따라
방편의 힘으로 법을 설하고,

비록 소욕지족(少欲知足)2)을 설하긴 하지만 그것을 으뜸으로 여기지 않으며,
비록 경(經)과 계(戒)를 설하긴 하지만 역시 그것을 으뜸으로 여기지 않으며,
비록 대중에 머무는 과오를 설하긴 하지만 역시 일체법이 멀리 벗어난 모습임을 알며,
번잡하고 시끄러운 곳에서 지내지 않고 홀로 지내는 것을 항상 칭찬하긴 하지만 그것을 으뜸으로 여기지 않으며,
비록 보리심(菩提心) 일으키는 것을 칭찬하긴 하지만 심성(心性)이 곧 보리임을 알며,
비록 대승의 경을 칭찬하긴 하지만 일체 모든 법이 다 대상(大相)임을 알며,
비록 보살의 도를 설하긴 하지만 아라한과 벽지불과 모든 부처님을 분별하지 않을 것입니다.

비록 보시(布施)를 칭찬하긴 하지만 보시의 평등한 모습을 통달하며,
비록 지계(持戒)를 칭찬하긴 하지만 모든 법이 다 곧 계의 성품임을 분명히 알며,
비록 인욕을 칭찬하긴 하지만 모든 법이 무생(無生)과 무멸(無滅)과 무진(無盡)의 모습임을 알며,
비록 정진을 칭찬하긴 하지만 모든 법이 일으키지 않고 행하지 않는 모습임을 알며,
비록 선정(禪定)을 갖가지로 칭찬하긴 하지만 일체법이 항상 선정의 모습임을 알며,
비록 지혜를 갖가지로 칭찬하긴 하지만 지혜의 참된 성품을 분명히 알 것입니다.

비록 탐욕의 잘못을 설하긴 하지만 법에 탐할 만한 것이 있음을 보지 않으며,
비록 성냄의 잘못을 설하긴 하지만 법에 성낼 만한 것이 있음을 보지 않으며,
비록 어리석음의 잘못을 설하긴 하지만 모든 법에 어리석음이 없고 걸림이 없음을 알며,
비록 중생들에게 3악도(惡道)에 떨어지는 두려운 괴로움을 나타내 보이긴 하지만 지옥ㆍ아귀ㆍ축생의 모습을 얻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여러 보살들은 비록 중생들이 믿고 이해할 수 있는 것에 따라
방편의 힘으로 그들을 위해 법을 설하긴 하지만
스스로는 일상(一相)의 법을 믿고 이해할 것이니,
이른바 공(空)ㆍ무상(無相)ㆍ무작(無作)ㆍ무생(無生)ㆍ무소유(無所有)ㆍ무취상(無取相)입니다.




세존이시여,
오직 원하오니 이 불가사의한 방편의 법을 설하여 주십시오.
일체의 성문(聲聞)과 벽지불
그리고 새롭게 뜻을 일으킨 보살들은 미칠 수 없는 것이니,
오직 깊고 깊은 일상(一相)의 법을 믿고 이해하는 자를 위해서 설해 주십시오.”



이때 부처님께서 사자유보보살마하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너는 지금 분명하게 듣고 이것을 잘 사념(思念)하라.
내 마땅히 너를 위해 이 뜻을 해설하리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마땅히 받아들이겠습니다.”



이때 세존께서 게송으로 대답하셨다.


만약 성불(成佛)하려는 사람 있다면
탐욕을 무너뜨리지 말라
모든 법이 곧 탐욕이니
이를 알면 곧 성불하리라.

탐욕 그리고 성냄과 어리석음을
얻을 수 있는 자 없나니
이런 법들 모두 허공과 같아
이를 알면 곧 성불하리라.

견해와 견해가 아닌 것 일상(一相)이요
집착과 집착하지 않음 또한 그러하며
여기엔 부처도 없고 법도 없나니
이를 아는 것을 큰 지혜라고 하네.

마치 사람이 꿈속에서
도를 얻어 중생을 제도하는 것과 같나니
도(道)도 없고 중생도 없으며
불법의 성품 또한 그러하다네.

도량(道場)이란 얻을 것 없나니
만약 얻는다면 곧 있지 않네.
명(明)과 무명(無明)은 일상이라
이를 알면 세존이라 하네.

중생이 곧 보리(菩提)요
보리가 곧 중생이니
보리와 중생은 하나라
이를 알면 세존이라 하네.

마치 재주 좋은 요술쟁이가
갖가지 일을 환술(幻術)로 만들어내듯
소견(所見)에 진실은 없고
여러 가지 수의 지혜도 없다네.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 허깨비와 같아
허깨비는 3독(毒)과 다르지 않거늘
범부(凡夫)들 스스로 분별하고서
나는 욕심난다,
나는 성이 난다고들 하네.

이와 같은 어리석은 사람들
곧 3악도(惡道)에 떨어지리니
실상에는 탐욕과 성냄이 없고
어리석음도 또한 얻을 수 없네.

허깨비와 같은 법임을 분별하고
자성과 번뇌의 열기 분별해 보면
실상에는 번뇌가 없고
중생도 없고 부처도 없네.

무생법(無生法)을 분별하고서
범부들 부처되기 바라나니
모든 부처님 법도 보지 않고
또한 중생도 보지 않는다네.

이런 법의 모습 아는 자
중생들이 존경하는 자가 빨리 되리니
만약 사람이 보리를 구하면
곧 보리는 없게 된다네.

이런 사람 보리와 멀어지나니
비유컨대 하늘과 땅이라
모든 법이 허깨비와 같음을 알면
사람 가운데 으뜸인 자 빨리 되리라.

만약 사람이 계(戒)를 분별하면
계는 곧 없게 되나니
만약 계를 보는 자 있다면
이는 곧 계를 잃는 것
계와 계가 아닌 것은 일상(一相)이라
이를 알면 도사(導師)라 하네.

마치 꿈에서 5욕(欲)을 누려
즐기면서 스스로 쾌락하는 것과 같나니
여색(女色)을 분별하고 보지만
그 가운데 실제로는 여색이 없네.

계와 계를 깨뜨리는 것 꿈과 같거늘
범부들 둘이라고 분별하나니
실은 계도 계를 깨뜨림도 없어라
이것을 알면 도사(導師)라 하네.

범부들 이름[名字]에 집착해
언어(言語)의 성품 알지 못하나니
이름과 이름 아닌 것
이를 알면 무생(無生)을 얻네.

스스로를 보살이라 일컬으며
독송하고 사람들에게 설하면서
자신은 행하는 바 없이
그저 종성(種性)만 믿고 의지하는구나.

그저 경이나 읽으며 도를 구하고
항상 남의 잘못을 보고
위의(威儀)와 문장과 게송에 집착하고
사람들이 존경하는 것 보며 잘난체하는구나.

종성과 문장과 게송만 믿고
법의 실상을 알지 못하는
이와 같은 사람들
끝내 부처가 되지 못하리라.

모든 법의 공(空)함을 설하면서도
나쁜 마음으로 다투기 좋아하는
이런 사람에게 불법(佛法)은 없으리라
또한 보리도 없으리라.

성냄과 인욕이 같은 모습임을 알고
이에 통달하면 끝내 성내지 않나니
중생의 성품을 알지 못하면
그러면 곧 진에(瞋恚)를 일으키리라.

스스로 보살이라고 말하는 자
또한 이와 같이 말하네.
나는 일체를 가엾이 여기고
성불하여 중생을 제도하리라고.

그러나 남이 괴롭히면 화를 내고
분노를 품고서 말도 하지 않으며
항상 남의 잘못을 찾고
다투고 싸우기를 좋아하는구나.

또한 인욕을 칭찬하고
모든 법의 공함을 설하면서도
자신의 마음엔 교만이 넘치고
항상 남의 잘못을 살피는구나.

좋은 맛에 탐착하여
밤낮으로 5욕을 생각하면서
이런 사람 성읍(城邑)에 들어가선
사람을 제도한다고 스스로 말하네.

중생을 가엾게 생각하고
항상 풍요롭기를 바란다고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지만
마음으론 남 괴롭히기 좋아하네.

나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네
자비로우면서 괴롭히는 것을.
함께 서로 성내고 괴롭히면서
아미타불(阿彌陀佛)세계에 태어나기 원하는 걸.

만약 사람이 항하 모래 같은 세월에
나쁜 말을 듣고 칼과 몽둥이를 맞아도
이와 같은 것 모두 참을 수 있다면
곧 정토(淨土)에 태어나리라.

불국토와 불국토가 아닌 곳
허공의 모습과 같음을 알아
국토(國土)를 분별하지 말고
국토의 공덕도 분별하지 말라.
그와 같은 사람
모든 부처님나라에 태어날 수 있으리라.

스스로 말하기를,
온갖 악을 참고
보살을 부처님처럼 본다고들 하지만
나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네
부처님의 모습이 성내는 자라는 걸.

제각기 남 헐뜯는 걸 자랑하고
단월(檀越)과 친구를 좋아하면서
이렇게들 말하네,
내가 교화할 자들
보호하여 법답게 하리라.
너는 내가 제도해야 할 자이니
다른 사람은 가까이하지 말라고.

그 사람들의 행동 순수하지 않고
항상 시끄럽고 번잡한 곳에 머무나니
그런 사람은 불도(佛道)에서
부지런히 수행할 수 없네.

참으로 불도를 구하는 자라면
낮과 밤 각각의 3시(時)에
모든 보살에게 정례(頂禮)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내야 하리라.

그가 행하는 도에 따라
그 잘못을 말하지 말고
5욕에 탐착하는 것을 보더라도
그 과오를 말하지 말라.

마땅히 염해야 하리라,
그 사람
오랜 뒤엔 그 역시 도를 얻고
차례로 업도(業道)를 행하리라고.
단박에 성불(成佛)할 순 없느니라.

혹은 오래지 않아 발심하여
그도 이런 일을 행하리니
탐욕을 분별하지 말라
탐욕의 성품이 곧 도이니라.

번뇌는 과거에 스스로 없었고
미래에도 역시 없다네.
이와 같이 믿고 이해할 수 있다면
곧 무생인(無生忍)을 얻으리라.

좋고 나쁜 음성을 관하여
음성의 성품이 아님을 알면
분명 들어가리라,
문자가 없는
실상(實相)의 법문(法門)으로.

만약 이 법을 믿을 수 있다면
곧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없고
탐욕과 어리석음을 관하면
곧 이것이 한량없는 모습이니라.

이 두 가지에 문자란 없나니
문자로써 설하기는 하지만
모든 문자가 있는 곳
이 모두에 실다움은 없다네.

일체의 모든 음성
이것은 하나의 소리의 성품이라 관하나니
부처님의 말씀과 삿된 말
이 모두에 분별이 없다네.

법을 비록 말하기는 하지만
실은 법도 없고 설함도 없나니
일상의 문에 들어갈 수 있다면
곧 무상인(無上忍)을 얻으리라.

이것은 인(忍)이고 이것은 인이 아니라는
그런 분별을 짓지 말라.
탐욕과 성내는 마음에서
그 가운데 이익을 헤아리지 말라.
이 두 가지가 무생(無生)임을 알면
분명 세간에서 으뜸이 되리라.

동쪽 서쪽 남쪽 북쪽의
항하 모래처럼 많은 국토를
모두 부수어 미세한 티끌을 만들고
한 티끌을 한 나라라고 하자.

그 세계에 가득한 온갖 진귀한 보배를
헤아릴 수 없는 오랜 겁 동안
모든 여래께 공양하여
얻는 그 공덕
만약 사람이 이 경을 들으면
그것을 능가함이 백천 배니라.

만약 출가한 사람이 있어
일심으로 불도를 구한다면
나는 그런 사람에게 부촉하리라
이 비밀스런 요법(要法)을.

만약 이 경을 독송하고
그 뜻을 이해하는 자 있다면
무량한 총지(總持)와 변재를
자연히 모두 얻게 되리라.

날카로운 근기와 다함이 없는 지혜
즐겁게 말하는 변재를
한량없는 수억의 모든 부처님께서
또한 모두 이 사람에게 주리니
모든 경의 오묘한 법보를
저절로 모두 설할 수 있으리라.



이때 사자유보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지금 설하신 이 게송으로 몇 곳의 사람들이 스스로 이익을 얻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너는 이 대중을 보느냐?”
“그렇습니다.
이미 보았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지금 이 법을 설했을 때 모임에 한량없고 무수한 중생이 함께 모였고,
하늘ㆍ용ㆍ야차ㆍ건달바ㆍ아수라ㆍ긴나라ㆍ가루라ㆍ마후라가 등이 허공에 가득 찼으며,
설법의 밝음으로 다른 세계까지 이롭게 한 것이 많았다.

9만 2천의 야차와 귀신이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었고,
얻지 못하고도 얻었다고 하던 5백의 증상만(增上慢)을 가진 비구가 이 법을 듣고는 증상만이 없어졌으며,
참된 법을 얻어 일체의 법이 모두 일상(一相)이란 것을 믿고 이해하게 되었으며,
모든 법을 받아들이지 않은 까닭에 번뇌[漏]가 다하고 해탈을 얻었다.
이 보살의 무리 중 6만 2천 명은 모든 법의 장애 없는 모습을 믿고 이해하여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었다.
무슨 까닭인가?
이와 같은 설법은 모든 설법 중에서 가장 으뜸이기 때문이다.

선남자야,
나도 연등불(然燈佛)의 처소에서 모든 법이 일상으로서 장애가 없음을 믿고 이해하였으며,
그런 뒤에 무생법인을 얻고 6바라밀(波羅蜜)을 구족하였다.
왜냐하면 만약 보살이 항하의 모래처럼 많은 겁에 보시하고 지계하며 인욕하고 정진하며 선정을 닦고
지혜를 닦더라도 만약 이와 같은 법상(法相)을 알지 못하면,
그 사람은 혹 일체의 선근을 끊어 없앨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선남자야,
너는 큰 공덕과 선근이 있어서 32대인상(大人相)을 성취한 제바달다(提婆達多)를 보아라.
이와 같은 공덕이 있었지만 이와 같은 법상을 몰랐기 때문에 선근을 끊어 없애고 큰 지옥에 떨어졌다.
선남자야,
마땅히 알아야 한다.
오래도록 발심(發心)하여 큰 공덕이 있다 하더라도 이 법문에 들지 않으면 모두 선근의 공덕을 끊어 없앨 수 있다.

선남자야,
저 과거 한량없고 가없는 불가사의한 아승기겁에 부처님이 계셨으니,
그 명호는 고수미산왕(高須彌山王) 여래ㆍ응공ㆍ정변지ㆍ명행족ㆍ선서ㆍ세간해ㆍ무상사ㆍ도법어(道法御)ㆍ천인사ㆍ불세존이시다.
수명(壽命)은 9천9백천만억 나유타(那由他) 세(歲)였으며,
국토의 이름은 금염명(金焰明)이었다.
그 나라는 흙이 모두 황금으로 되어 있었으며,
그 설하신 법 역시 3승(乘)으로 중생들을 제도하고 해탈시켰다.

그 부처님의 첫 모임에는 80백천만억 나유타의 성문제자가 있었고,
다음 두 번째 모임에는 70백천만억 나유타의 성문제자가 있었으며,
세 번째 모임에는 60백천만억 나유타의 성문제자가 있었고,
네 번째 모임에는 50백천만 억 나유타의 성문제자가 있었다.
그들은 모두 아라한을 얻고,
모든 무거운 짐을 버리고 자신의 이익을 얻었으며,
모든 존재의 결박을 없애고 바른 지혜로 해탈을 얻었다.

비구니 대중의 수는 그 배(倍)였고,
우바새 대중의 수도 또 그 배였으며,
우바이 대중의 수도 또 그 배였다.
보살 대중의 수도 또 그 배였는데,
그들은 모두 아유월치(阿惟越致)의 무생법인을 얻고,
모두 한량없고 가없는 다라니문과 삼매의 문을 얻어 물러서지 않는 법륜(法輪)을 굴릴 수 있었으니,
하물며 새롭게 보살의 뜻을 일으킨 자들이겠는가.
또한 벽지불도(辟支佛道)의 마음을 낸 자들 역시 한량없고 가없었다.

선남자야,
그때 그 부처님 모임의 제자 대중의 수는 한량없고 가없었다.
그 금염국(金焰國)에는 나무가 모두 7보로 되어 있고 그 보배 나무에서는 항상 법의 소리가 났다.
이른바 일체 모든 법의 공(空)한 소리와 무상(無相)의 소리와 무작(無作)의 소리와
무생(無生)의 소리와 무소유(無所有)의 소리와 무취상(無取相)의 소리로서 그 나라 인민들은
이 법의 소리를 듣고 자연히 모두가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얻었고,
마음에 해탈(解脫)을 얻었다.
그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뒤,
법은 천 년을 머물렀고 모든 보배 나무의 소리 역시 다시는 나지 않았다.

선남자야,
그 고수미산왕불(高須彌山王佛)께서는 법을 정위의(淨威儀)보살에게 부촉하여 법을 수호하게 하셨고,
부촉하신 뒤에 곧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드셨다.
그때 유위의(有威儀)라는 이름의 비구가 있었는데 지계(持戒)가 청정하지 못하였고,
4선(禪)ㆍ4무색정(無色定)과 5신통(神通)을 얻고 비니장(毘尼藏)을 잘 독송하였으나 고행을 즐기며 남의 마음을 잘 알지는 못하였다.
그 제자들 역시 모두 고행하며 두타(頭陀)의 행을 귀하게 여겼다.

이 정위의(淨威儀) 법사는 계율을 청정하게 지니며 무소유법에서 교묘한 방편을 얻었다.
또 언제가 정위의 법사는 여러 제자들을 이끌고 유위의(有威儀) 비구가 머무는 곳으로 가서 함께 머물게 되었다.
정위의 법사는 중생을 가엾이 여기는 까닭에 머무는 곳으로부터 항상 마을로 들어가 음식을 먹은 뒤에 돌아오곤 하였다.
그렇게 백천만의 집을 교화하여 모두 제자로 삼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키게 하였다.
그 제자의 무리 또한 교화를 잘하여 여러 마을로 가서 설법을 하였고,
여러 백천의 중생들을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키게 하였다.

유위의 비구는 항상 탑사에 머물기를 좋아하였고,
그 제자의 무리들도 청정한 계(戒)를 지니지 않고서 두타(頭陀) 행하기를 좋아하였다.
유위의 비구는 부지런히 정진하고 그 마음이 확고하며,
자신이 행한 것으로 모든 제자들을 교화했지만 선법(善法)에 탐착하여 소견을 가지고 있었다.
이른바 일체의 유위법은 모두가 무상하고,
모두가 괴로우며,
일체의 법은 무아라고 설하며 여러 선정의 법을 잘 행할 수 없었고,
또 보살이 행하는 도에 능숙하질 못했으니,
본심(本心)이 순수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정위의 법사는 날카롭고 우둔한 중생들의 여러 근기를 잘 알았고,
유위의 비구의 마음을 아는 까닭에 다시는 마음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여러 제자들은 전과 다름이 없었다.
유위의 비구는 정위의 법사의 여러 제자들이 항상 마을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청정하지 못한 마음을 일으켰고,
곧 건추(犍椎)를 울려 대중을 모으고 규율을 세웠다.

‘너희들은 지금부터는 마땅히 마을에 들어가선 안 된다.
일심(一心)으로 고요히 정묵(靜黙)을 행하지 못하면서 자주 마을에 들어가 무슨 이익을 얻겠느냐.
부처님께서 칭찬하신 곳은 아련야주처(阿練若住處)이다.
너희들은 선의 즐거움을 행해야지 남의 집에 들어가는 것을 좋아해서는 안 된다.’

정위의 법사의 여러 제자들은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여전히 마을로 들어갔다.
그 후 언젠가 유위의 비구가 그 제자들이 마을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는 다시 건추를 울려 대중을 모으고 이렇게 말하였다.
‘만약 다시 마을에 들어가는 자는 다시는 이곳에 머무를 수 없다.’

이때 정위의 법사가 유위의 비구를 보호하려고 여러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들은 지금부터 마을에 들어가지 말라.’
그러자 곧 스승의 가르침대로 마을에 들어가지 않았다.

이때 여러 인민들은 그 스승과 여러 제자들이 보이지 않자 모두들 근심과 고뇌를 품었으며 선근(善根)을 잃어버렸다.
정위의 법사는 석 달을 보내고 자자(自恣)3)을 마친 뒤에 그곳을 떠나 다른 승방(僧坊)에 이르렀고,
그곳에 머무르며 스승과 제자들은 다시 성읍(城邑)의 마을에 들어가 사람들에게 법을 설하였다.

나중에 유위의 비구는 정위의 법사가 다시 남의 집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그 제자들이 일상의 위의를 훼손하고 잃은 것을 보고는 다시 청정하지 못한 나쁜 마음이 생겨 이렇게 생각하였다.
‘이 비구는 계를 깨뜨리고,
계를 훼손하였다.
어찌 보리가 있겠는가.’
곧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이 비구는 잡스럽게 행동하니 불도(佛道)와는 거리가 너무도 멀다.’

유위의 비구는 이런 업(業)을 일으키고 나서 나중에 목숨이 다하였는데,
그 업의 과보로 아비(阿鼻:
無間)의 큰 지옥에 떨어졌고,
9백천억 겁 동안 온갖 고뇌를 받았다.
지옥을 나와서는 63만 년 동안 항상 비방(誹謗)을 받고서야 그 죄가 점차 엷어졌으며,
그 후 32만 년 동안 비구가 되었으나 출가한 뒤에는 이 업(業)의 인연 때문에 도를 거스르고 환속하곤 하였다.
또 다른 죄업의 인연 때문에 정명불(淨明佛)의 처소에서 출가하고 도에 들어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 은근히 정진하였지만 천만억 년 동안에도 유순법인(柔順法忍)을 얻지 못하였고,
한량없는 천만 년 동안 모든 근기가 어둡고 둔하였다.

사자유보야,
네 생각에는 어떠하냐?
그때 유위의 비구가 어찌 다른 사람이겠느냐.
그렇게 보지는 말라.
곧 나 자신이 그였다.
나는 그때 그런 미세한 부정한 마음을 일으켜 그 죄업을 받고 지옥에 떨어졌었다.

사자유보야,
만약 이런 미세한 죄업을 일으키려 하지 않는 자라면 저 보살에게 나쁜 마음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보살이 행하는 도를 모두 믿고 이해해야 하며,
성내고 원망하는 마음을 일으켜서는 안 되며,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나는 남의 마음을 잘 알 수 없다.
중생이 행하는 것,
그것 역시 알기 어렵다.’

선남자야,
여래는 이런 이익을 보았기 때문에 항상 이 법을 설한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사람을 저울질해서는 안 된다.
오직 여래나 여래와 비슷한 자만이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수행자가 만약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고자 한다면 사람을 저울질해 서로 거슬리는 짓을 절대 삼가야 한다.
보살이 만약 불법(佛法)을 닦고 모으고자 한다면 항상 밤낮으로 부지런한 마음으로 전념해야만 한다.
보살의 마음을 깊이 일으킨 자라면 사람의 장단점 찾는 걸 좋아해서는 안 된다.

보살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의 중생을 가르쳐 10선을 행하게 한다고 해도 보살이 한 식경(食頃)동안 일심으로 조용한 곳에서 일상(一相)의 법문을 염하는 것만 못하다.
나아가 듣고 받아들여 독송하고 해설한다면 그 사람의 복덕은 그보다 더 많을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모든 보살은 이 법문을 사용하여 모든 업장의 죄를 없앨 수 있고,
또한 일체 중생 속에서 미움과 사랑의 마음을 떠나 곧 일체종지(一切種智)를 빨리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문수사리(文殊師利) 법왕자(法王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업장의 죄를 없앤다고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업장의 죄를 없앱니까?”

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보살이 모든 법의 성품에 업이 없고 과보가 없음을 본다면 곧 업장의 죄를 완전히 없앨 수 있다.
또 문수사리야,
만약 보살이 탐욕의 경계가 곧 진실의 경계임을 보고,
성냄의 경계가 곧 진실의 경계임을 보고,
어리석음의 경계가 곧 진실의 경계임을 본다면 곧 업장의 죄를 완전히 없앨 수 있다.

또 문수사리야,
만약 보살이 모든 중생의 성품이 곧 열반의 성품임을 본다면 곧 업장의 죄를 완전히 없앨 수 있다.
왜냐하면 만약 사람이 스스로 소견을 가지면 곧 업을 일으킬 수 있고,
아는 것이 없고 들은 것이 없는 범부나 어리석은 사람은 모든 법이 완전히 없어진 모습을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스로 자신을 보고 또 남을 보며,
이런 견해 때문에 곧 몸과 입과 뜻의 업을 일으킨다.

이런 사람은 망령된 견해로 생각하고 분별하여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탐욕스럽고 성내며 어리석은 자이다.’

이와 같이 분별하는 까닭에 불법에 출가하여 도를 배운다.
또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계를 지니며 범행(梵行)을 닦는 사람이다.
나는 생사를 초월하고 열반을 얻어 모든 고뇌를 벗어나리라.’

이런 사람은 모든 법을 분별하고서 이것은 선(善)이고,
이것은 선이 아니며,
이것은 알아야 하고,
이것은 끊어야 하며,
이것은 밝혀야 하고,
이것은 닦아야 한다고 한다.
이른바 괴로움[苦]을 보아야 하고,
괴로움의 모임[集]을 끊어야 하며,
괴로움의 소멸[滅]을 증득해야 하고,
괴로움을 멸하는 도(道)를 닦아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또 이렇게 분별한다.
‘일체의 모든 행(行)은 모두 다 무상하고,
일체의 모든 행은 모두 다 괴로움이며,
일체의 모든 행은 모두 다 3독(毒)이 치성하니,
나는 이 유위법(有爲法)을 빨리 버리리라.’
항상 이렇게 사유하며 모든 행에서 갖가지로 모습을 취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낸다.

이때 곧 이렇게 생각한다.
‘모든 행을 이와 같이 보는 것,
이것을 괴로움을 보는 것이라 한다.
모든 행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
이것을 괴로움의 모임을 끊는 것이라 한다.’

모든 행을 분별하고 멸제(滅諦)를 보고는 곧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이제 괴로움의 소멸을 보았으니,
이것을 괴로움의 소멸을 증득하는 것이라 한다.
나는 도를 닦으며 곧 고요한 곳으로 가 이와 같은 법을 생각하리라.’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는 마음을 거두어 잡고 선정에 머문다.

이 사람은 앞서 싫어하는 마음을 얻고,
지금은 선정의 마음을 얻었기 때문에 모든 행에서 마음을 곧 버리고 떠났으며,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고 싫어하여 기뻐하지도 않고 즐거워하지도 않는다.

또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지금 일체의 법에서 이미 해탈을 얻었으며 다시는 짓는 것이 없다.
나의 몸은 이미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었다.’
이 사람은 목숨이 다한 뒤에 태어나는 곳을 받는 것을 보고는 곧 보리에서 마음에 의혹과 뉘우침을 일으킨다.
이런 의혹 때문에 목숨이 다한 뒤에는 큰 지옥에 떨어진다.
무슨 까닭인가?
이 사람은 무생법(無生法) 가운데서 분별했기 때문이다.”

이때 문수사리법왕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제 어떻게 네 가지 거룩한 진리를 관해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행자가 일체의 법이 곧 무생(無生)의 성품임을 볼 수 있다면 이것을 괴로움을 보는 것이라고 한다.
만약 일체의 법이 모이지 않고 일어나지 않음을 볼 수 있다면 이것을 괴로움의 모임을 끊는 것이라고 한다.
만약 일체의 법이 필경 적멸한 모습임을 볼 수 있다면 이것을 소멸의 증득이라고 한다.
만약 일체의 법이 존재가 없는 성품임을 볼 수 있다면 이것을 도를 닦는 것이라 한다.

문수사리야,
만약 행자가 이와 같이 네 가지 거룩한 진리를 볼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이 법은 선하다.
이 법은 선하지 않다.
이 법은 보아야만 한다.
이 법은 끊어야만 한다.
이 법은 증득해야만 한다.
이 법은 닦아야만 한다’는 그와 같은 분별을 하지 않는다.
이른바 괴로움은 보아야 하고,
괴로움의 모임은 끊어야 하며,
괴로움의 소멸은 증득해야 하고,
괴로움을 없애는 도는 닦아야 한다고.

무엇 때문인가?
범부의 소행(所行)인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행자는 이런 법이 모두 공하고,
무생이며,
무소유이고,
분별할 수 없는 것으로서 그저 허망이 쌓이고 모인 것뿐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때 법에서 취하는 것이 없고 버리는 것도 없고 삼계(三界)에서 마음이 걸리는 것도 없다.
일체의 삼계는 필경 나지 않는다[不生]고 보며,
모든 선법(善法)과 불선법(不善法)은 허망하고 거짓되며 실답지 않아 허깨비와 같고 꿈과 같고 그림과 같고 메아리와 같고 불꽃과 같다고 본다.

행자는 탐욕의 성품이 곧 열반의 성품이며,
진에의 성품이 곧 열반의 성품이며,
어리석음의 성품이 곧 열반의 성품이라고 본다.
만약 일체법의 성품이 이와 같다고 볼 수 있으면 곧 일체 중생 가운데서 미움과 사랑을 일으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행자는 이런 법을 얻지 않기 때문에 혹 사랑의 세계[處]에 태어나건 혹은 미움의 세계에 태어나건 허공과 같은 마음에 안주(安住)하며,
내지 부처를 보지 않고 법을 보지 않고 승가를 보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곧 일체의 법을 보지 않는 것이다.
만약 일체의 법을 보지 않으면 모든 법에서 의혹을 일으키지 않는다.
의혹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곧 일체의 법을 받아들이지 않고,
일체의 법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곧 스스로 적멸하다.

문수사리야,
장로(長老) 수보리(須菩提)는 이와 같은 법을 아는 까닭에 찾아와 부처의 발에 예배하지 않는 것이다.
수보리는 자신의 몸도 얻지 않는데 하물며 여래의 몸을 얻겠느냐?
자신의 몸을 얻지 않으면서 여래의 몸을 얻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문수사리가 다시 부처님에게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행자는 어떻게 4념처(念處)를 관해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장차 올 세상에 이렇게 말하는 비구가 있을 것이다.
‘안으로 신처(身處)를 관하기를 만약 부정하다고 관하면 이것이 신념처(身念處)이다.
즐거움은 모두 공한 것이라고 관하면 이것이 수념처(受念處)이다.
마음이 나고 멸하는 성품을 관하면 이것이 심념처(心念處)이다.
화합상(和合相)을 파괴하는 것을 관하여 법상(法相)만을 얻으면 이것이 법념처(法念處)이다.’”

문수사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참으로 4념처를 관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만두라.
그만두라.
문수사리야,
물을 필요 없다.
여래의 적절한 설법은 이해하기 어렵다.”
문수사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중생을 가엷게 여겨 꼭 설해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행자가 몸을 허공처럼 본다면 이것을 신념처라고 한다.
만약 행자가 느낌을 안에서도 밖에서도 그 중간에서도 얻을 수 없다고 본다면 이것을 수념처(受念處)라고 한다.
만약 행자가 마음이란 오직 이름[名字]만 있을 뿐이라고 안다면 이것을 심념처(心念處)라고 한다.
만약 행자가 선법도 얻지 않고 불선법도 얻지 않는다면 이것을 법념처(法念處)라고 한다.
문수사리야,
마땅히 이와 같이 4념처(念處)를 관해야 한다.”

문수사리가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행자는 어떻게 8성도분(聖道分)을 관해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행자가 일체의 법은 평등하여 둘이 없음을 보고 분별함이 없다면 이것을 정견(正見)이라고 한다.
일체의 법을 보고 사유함이 없고 분별함이 없다면 이렇게 보는 까닭에 이것을 정사유(正思惟)라고 한다.
일체법에 언설(言說)의 모습이 없음을 보고 언어의 평등한 모습을 잘 닦는 까닭에 이것을 정어(正語)라고 한다.
일체법의 짓지 않는 모습을 보면 짓는 자를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을 정업(正業)이라고 한다.

정명(正命)과 사명(邪命)을 분별하지 않고 평등한 명(命)을 잘 닦고 익히는 까닭에 이것을 정명이라고 한다.
일체의 법을 내지 않고 일으키지 않아 행하는 바가 없는 까닭에 이것을 정정진(正精進)이라 한다.
일체의 법에 대해 기억하고 생각하는 것이 없어 모든 기억과 생각의 성품을 떠나는 까닭에 이것을 정념(正念)이라 한다.
일체법의 성품이 항상 적정함을 보아 산만하지도 않고 반연하지도 않고 얻을 수도 없는 까닭에 이것을 정정(正定)이라고 한다.
문수사리야,
행자는 마땅히 이와 같이 8성도분을 관해야 한다.”

문수사리가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행자는 어떻게 5근(根)을 관해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행자가 일체법이 필경 나지 않고 본래부터 지금까지 항상 스스로 그러함을 믿는다면 이것을 신근(信根)이라 한다.
일체법에서 마음이 머무는 곳이 없어 멀고 가까운 모습에서 벗어나는 까닭에 이것을 정진근(精進根)이라고 한다.
일체의 법에 대해 기억하고 생각하는 것이 없으며,
인연의 성품에서 벗어난 까닭에 인연에 생각이 묶이지 않으면 이것을 염근(念根)이라고 한다.
일체의 법에서 사유(思惟)하는 것이 없어 두 가지 법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을 정근(定根)이라고 한다.
일체법은 항상 공하여 생상(生相)을 벗어난 것임을 보면 이것을 혜근(慧根)이라고 하다.
문수사리야,
행자는 마땅히 이와 같이 5근을 관해야 한다.”

문수사리가 또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행자는 어떻게 7보리분(菩提分)을 관해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문수사리야,
행자가 일체법을 볼 수 있어 기억과 생각이 없다면 이것을 염보리분(念菩提分)이라고 한다.
일체의 법은 선(善)이건 불선(不善)이건 혹은 무기(無記)이건 선택할 수 없고 얻을 수도 없으니 결정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택보리분(擇菩提分)이라고 한다.
만약 모든 삼계의 모습을 취하지 않으면 삼계를 잘 무너뜨리는 까닭에 이것을 정진보리분(精進菩提分)이라고 한다.
만약 일체의 유위법(有爲法)에서 기쁨의 모습을 일으키지 않고,
기쁨의 모습을 잘 무너뜨리는 까닭에 이것을 희보리분(喜菩提分)이라고 한다.

만약 일체의 법에서 그 마음을 없애면 인연의 모습을 얻을 수 없는 까닭에 이것을 제보리분(除菩提分)이라고 한다.
만약 일체의 법이 얻을 수 없으면 무너뜨리는 모습을 잘 닦는 까닭에 이것을 정보리분(定菩提分)이라고 한다.
만약 일체법에 의지하는 것이 없어서 탐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으면 일체의 법을 보지 않는 까닭에 사심(捨心)을 얻으니,
이것을 사보리분(捨菩提分)이라고 한다.
문수사리야,
행자는 마땅히 이와 같이 7보리분을 관해야 한다.

만약 행자가 이와 같이 4성제(聖諦)와 4념처(念處)와 8성도분(聖道分)과 5근(根)과 7보리분(菩提分)을 본다면 나는 이런 사람을 이미 건넌 자,
피안에 도달한 자,
두려움이 없는 곳인 육지로 올라온 자,
이미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온갖 티끌과 때를 없앤 자라고 한다.
이런 사람을 소유함이 없는 자,
걱정이 없는 자,
받아들이는 것이 없는 자라고 한다.

이를 아라한이라 하고,
이를 사문이라 하며,
이를 바라문이라 하고,
이를 비구라 하며,
이를 정결하게 목욕한 자라고 하고,
이를 지혜로운 자라고 하며,
이를 벗어난 자라고 하고,
이를 들은 자라고 하며,
이를 부처의 아들이라고 하고,
이를 석가모니의 아들이라고 하며,
이를 가시나무를 벤 자라고 하고,
이를 관문의 열쇠를 부순 자라고 하며,
이를 이미 참호[塹]를 건넌 자라고 하고,
이를 출가하기를 바라고 구하는 자라고 하며,
이를 문을 연 자라고 하고,
이를 현성의 뛰어난 모습을 가진 자라고 한다.

문수사리야,
만약 이와 같은 법을 성취하는 비구가 있다면 하늘과 사람과 세간에서 복 밭이라고 불리며 공양을 받을 것이다.
문수사리야,
이 비구가 만약 나라의 보시를 헛되게 먹지 않기를 바라는 자이고,
마왕의 그물을 파괴하는 자이고,
생사의 바다를 건너려는 자이고,
열반을 얻으려는 자이고,
일체의 고뇌를 벗어나려는 자이고,
일체 하늘과 사람의 세간을 위해 복 밭이 되려는 자라면 부지런히 이와 같은 법을 닦고 익혀야 한다.”

이 법을 설하셨을 때,
3만 2천의 모든 하늘이 모든 법의 실상을 얻고는 제각기 하늘의 만다라 꽃을 부처님 위에 뿌리며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만약 사람이 이와 같은 법을 듣게 된다면 그 사람을 훌륭한 출가자라 할 것입니다.
하물며 믿고 받아들여 독송하며 말씀처럼 행하는 자이겠습니까?
세존이시여,
만약 잠깐이라도 이 법을 듣는 자가 있다면 그를 곧 증상만(增上慢)이 없는 자라 할 것입니다.”

이때 문수사리법왕자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오직 원하오니,
세존이시여,
다라니(陀羅尼)를 설해 주십시오.
그 다라니가 있으면 모든 보살이 걸림없는 변재를 얻어 모든 음성에 두려움이 없게 할 것이며,
모든 법을 다 불법으로 만들고 또 모든 법이 곧 일상(一相)임을 믿고 이해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지금 분명하게 들어라.
마땅히 너를 위해 움직이지 않는 종성[不動種性]의 법문을 설하리라.
이 법문에 들어가는 모든 보살은 지혜의 광명으로 일체의 법을 비추어 무생법인(無生法忍)을 빨리 얻을 수 있다.”

문수사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무엇을 움직이지 않는 종성의 법문이라고 합니까?”
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일체의 중생은 그 마음이 모두 하나이다.
이것을 종자의 성품[種性]이라고 한다.”

“세존이시여,
왜 그것을 종자의 성품이라고 합니까?”
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일체의 중생은 모두 마음이 없으니,
인연의 성품은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종자의 성품이라고 한다.
문수사리야,
일체의 중생은 모두 동일한 양(量)이니,
이것을 종자(種子)라고 한다.”

“세존이시여,
왜 그것을 종자의 성품이라고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일체 중생은 모두 허공의 양과 같아 결국 장애가 없음으로 돌아간다.
이것을 종자라고 한다.
문수사리야,
일체 중생은 모두 곧 하나의 중생이니,
이것을 종자라고 한다.”

“세존이시여,
왜 그것을 종자의 성품이라고 합니까?”
“문수사리야,
일체 중생은 모두 일상(一相)으로서 끝내 나지 않고 모든 이름을 벗어났으니,
같고 다름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종자의 성품이라고 한다.
문수사리야,
탐욕이 바로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다.”

“세존이시여,
왜 그것을 움직이지 않는 모습[不動相]이라고 합니까?”
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탐욕이 바로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다.
법의 성품에 안주하지만 머무르지 않기 때문이며,
이 탐욕은 성품을 얻을 수 없고 항상 벗어나 있기 때문에 이것을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라고 한다.
문수사리야,
진에(瞋恚)가 곧 금강(金剛)이다.”

“세존이시여,
왜 그것을 금강이라고 합니까?”
“문수사리야,
성냄은 끊을 수 없고 무너뜨릴 수 없는 것이 또한 금강을 끊을 수가 없고 무너뜨릴 수 없는 것과 같다.
일체법도 또한 이와 같아 끊을 수 없고 무너뜨릴 수 없으니,
모든 법은 본래 확고하게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를 금강과 같다고 한다.
문수사리야,
어리석음이 곧 지혜의 성품이다.”

“세존이시여,
왜 그것을 지혜의 성품이라고 합니까?”
“문수사리야,
일체의 법은 지혜를 벗어나고 또 어리석음을 벗어난 것이니,
비유컨대 허공과 같아서 지혜도 없고 또 어리석음도 없다.
일체의 법도 이와 같아 지혜도 없고 또 어리석음도 없다.
지혜와 어리석음,
지혜와 알 수 있는 법은 본래부터 지금까지 모두 적멸(寂滅)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어리석음과 지혜의 처소라고 한다.
문수사리야,
색음(色陰)이 곧 움직이지 않는 곳이다.”

“세존이시여,
왜 그것을 움직이지 않는 곳이라고 합니까?”
“문수사리야,
천제(天帝)의 당간은 뿌리가 깊고 단단하여 동요하지 않는 것처럼 일체의 법 또한 그와 같아 머무르지 않기 때문이다.
법의 성품에 안주하여 이 법은 오는 곳도 없고 가는 곳도 없고 취함도 없고 버림도 없으니,
머무름 없는 곳에 안주하는 까닭이다.
이런 까닭에 색(色)을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라고 한다.
문수사리야,
수음(受陰)이 곧 적멸의 성품이다.”

“세존이시여,
왜 그것을 적멸의 성품이라고 합니까?”
“문수사리야,
일체의 모든 느낌의 모습과 성품이 항상 적멸하기 때문이다.
모든 느낌은 안도 바깥도 아니며,
동쪽이 아니고 남쪽ㆍ서쪽ㆍ북쪽과 네 귀퉁이와 위와 아래에서 온 것도 아니다.
무슨 까닭인가?
만약 즐거운 느낌이 안에 있다면 일체 중생은 항상 즐거움을 느껴야만 한다.
만약 괴로운 느낌이 안에 있다면 일체 중생은 항상 괴로움을 느껴야만 한다.
만약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안에 있다면 일체 중생이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을 느껴야만 한다.

문수사리야,
지금 일체의 모든 느낌은 실로 안에 있지 않고,
밖에 있지 않고,
둘의 중간에 있지 않고,
동쪽ㆍ남쪽ㆍ서쪽ㆍ북쪽과 네 귀퉁이와 위와 아래에도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일체의 모든 느낌은 풀이나 나무,
기왓장이나 돌처럼 끝내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모습이 없다.
이런 까닭에 느낌을 적멸의 모습이라고 한다.
문수사리야,
상음(想陰)이 곧 종자의 성품이다.”

“세존이시여,
왜 그것을 종자의 성품이라고 합니까?”
“문수사리야,
이 생각의 모든 기억과 분별은 허망한 것에서 생기니 빈주먹과 같고 아지랑이와 같아 본성이 스스로 벗어난 것이다.
이런 까닭에 상음을 종자의 성품이라고 한다.
문수사리야,
행음(行陰)이 곧 종자의 성품이다.”

“세존이시여,
왜 그것을 종자의 성품이라고 합니까?”
“문수사리야,
일체의 모든 행(行)은 수(數)와 무수(無數)를 벗어나 평등한 수에 들어간다.
비유컨대 파초(芭蕉)는 끝내 알맹이가 없고 본성이 스스로 그러한 것과 같다.
일체의 법도 또한 이와 같으니,
이름이 없고 성품이 없는 까닭이다.
이런 까닭에 행음을 종자의 성품이라고 한다.
문수사리야,
식음(識陰)이 곧 종자의 성품이다.”

“세존이시여,
왜 그것을 종자의 성품이라고 합니까?”
“문수사리야,
이 알음알이는 허깨비와 같아서 알맹이가 없고 일어남이 없고 남이 없어 공이고 모습이 없고 성품이 없으니 다섯 손가락으로 허공을 칠하여도 허공에는 나타나는 모습이 없음과 같다.
이런 까닭에 식음을 종자의 성품이라고 한다.
문수사리야,
빛깔[色]이 곧 종자의 성품이다.”

“세존이시여,
왜 빛깔을 종자의 성품이라고 합니까?”
“문수사리야,
비유컨대 거울 속 모습은 눈으로 볼 수는 있지만 실체가 없는 것과 같다.
일체의 빛깔 또한 그와 같아 볼 수 있지만 실체가 없고,
그저 눈을 속이고 마음을 속이며 허망하고 실답지 않을 뿐이다.
이런 까닭에 빛깔을 종자의 성품이라고 한다.
문수사리야,
소리[聲]가 곧 종자의 성품이다.”

“세존이시여,
왜 소리를 종자의 성품이라고 합니까?”
“문수사리야,
일체의 법에 다른 모습은 없으니,
필경 공하여 산 속의 메아리와 같다.
이런 까닭에 소리를 종자의 성품이라고 한다.
문수사리야,
냄새[香]가 곧 종자의 성품이다.”

“세존이시여,
왜 냄새가 종자의 성품입니까?”
“문수사리야,
일체의 법에 냄새의 모습과 성품이 없고 앎도 없다.
따라서 공(空)함이 허공과 같아 코도 냄새도 그에 대한 알음알이도 얻을 수 없다.
이런 까닭에 냄새를 종자의 성품이라고 한다.
문수사리야 맛[味]이 곧 종자의 성품이다.”

“세존이시여,
왜 맛을 종자의 성품이라고 합니까?”
“문수사리야,
맛의 성품이 곧 불가사의한 성품이어서 알 수가 없고 앎을 벗어났기 때문이며,
자성이 항상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맛을 종자의 성품이라고 한다.
문수사리야,
촉감[觸]이 곧 종자의 성품이다.”

“세존이시여,
왜 촉감을 종자의 성품이라고 합니까?”
“문수사리야,
촉감은 허공처럼 그 성품이 스스로 벗어나 있어 닿음도 없고 합함도 업다.
일체의 법 또한 이와 같으니 몸을 잘 무너뜨리기 때문이며,
촉감의 모습을 벗어나서는 촉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촉감이 곧 종자의 성품이다.
문수사리야,
법(法)이 곧 종자의 성품이다.”

“세존이시여,
왜 법을 종자의 성품이라고 합니까?”
“문수사리야,
일체의 법은 모습이 없고 마음도 없으며,
마음의 성품을 떠나고 이름을 떠나서는 확고하게 정해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모두가 이런 법의 성품과 모습이니,
이런 까닭에 법이 곧 종자의 성품이다.
문수사리야,
흙[地]이 곧 종자의 성품이다.”

“세존이시여,
왜 흙을 종자의 성품이라고 합니까?”
“문수사리야,
일체의 법에는 견고한 모습이 없고 부드러운 모습도 없다.
허망하게 화합한 것을 사람들이 견고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흙을 종자의 성품이라고 한다.
문수사리야,
물[水]이 곧 종자의 성품이다.”

“세존이시여,
왜 물을 종자의 성품이라고 합니까?”
“문수사리야,
일체의 법에는 축축함이 없고 합함도 없으니,
아지랑이에 물이 없는 것과 같다.
이런 까닭에 물을 종자의 성품이라고 한다.
문수사리야,
불[火]이 곧 종자의 성품이다.”

“세존이시여,
왜 불을 종자의 성품이라고 합니까?”
“문수사리여,
일체의 법에는 열(熱)이 없다.
허망한 열의 모습을 벗어나면 본성은 적멸하니,
전도를 벗어낫기 때이다.
그 실재를 분별해 보면 결정된 것도 없고 생(生)도 없다.
이런 까닭에 불을 종자의 성품이라고 한다.
문수사리야,
바람[風]이 곧 종자의 성품이다.”

“세존이시여,
왜 바람[風]을 종자의 성품이라고 합니까?”
“문수사리야,
일체의 법은 막힘이 없고 걸림이 없고 모습이 없고 성품이 없으니,
동요하지 않기 때문이며 바람의 모습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바람을 종자의 성품이라고 한다.
문수사리야,
부처가 곧 종자의 성품이다.”

“세존이시여,
왜 부처를 종자의 성품이라고 합니까?”
“문수사리야,
일체의 법은 깨달음[覺]이 없고 앎[知]도 없으니,
앎의 모습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부처를 종자의 성품이라고 한다.
문수사리야,
법이 곧 종자의 성품이다.”

“세존이시여,
왜 법을 종자의 성품이라고 합니까?”
“문수사리야,
모든 법은 무너뜨릴 수 없고 끊을 수도 없다.
무너뜨림과 끊음을 벗어났기 때문에 모습이 없고 이름이 없고 성품이 없으며 언어(言語)의 길을 벗어났다.
이런 까닭에 법을 종자의 성품이라고 한다.
문수사리야,
승가[僧]가 곧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다.”

“세존이시여,
왜 승가를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라고 합니까?”
“문수사리야,
성스러운 대중은 법다운 성품의 실제와 안정됨과 어지러움이 평등한 가운데 안주한다.
지혜와 어리석음과 해탈과 번뇌가 평등한 일체의 법 가운데 안주하며 마음이 머무는 곳이 없으니,
머묾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승가를 움직이지 않는 성품이라고 한다.
문수사리야,
일체의 법이 행하는 곳을 움직이지 않음이라고 한다.”

“세존이시여,
왜 그것을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라고 합니까?”
“문수사리야,
모든 허공이 행하는 곳은 불가사의하게 행하는 곳이며,
행을 끊은 곳이며,
근본이 없고 다름이 없으며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일체법이 행하는 곳을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라고 한다.
문수사리야,
일체 법의 인연 없음을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라고 한다.”

“세존이시여,
왜 그것을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라고 합니까?”
“문수사리야,
일체의 법은 의지함이 없고,
머무는 곳이 없고,
인연이 없고,
순응함도 없으니 모든 인연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일체법의 인연 없음을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라고 한다.
문수사리야,
일체법의 취하지 않고 버리지 않는 모습을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라고 한다.”

“세존이시여,
왜 그것을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라고 합니까?”
“문수사리야,
일체의 법은 모두 여여(如如)로 돌아가고 법의 성품에 있어서 한가지이다.
이 법은 취할 수 없고 버릴 수 없으며,
구함도 없고 원함도 없다.
모든 원이 끊어진 까닭에 본래부터 지금까지 항상 적멸한 모습으로서 허공과 같다.
이런 까닭에 취하지 않고 버리지 않는 것을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라고 한다.
문수사리야,
일체법의 때[垢] 없음을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라고 한다.”

“세존이시여,
왜 그것을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라고 합니까?”
“문수사리야,
일체법은 때가 없고 소유함이 없어 청정하고 밝고 밝아 가림이 없는 허공과 같으니,
모든 죄의 공한 모습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일체법의 때 없음을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라고 한다.
문수사리야,
일체법의 돌아갈 곳 없음을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라고 한다.”

“세존이시여,
왜 그것을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라고 합니까?”
“문수사리야,
일체의 법은 공하고 근본이 없는 까닭에 돌아갈 곳이 없다.
이런 까닭에 돌아갈 곳 없음을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라고 한다.
문수사리야,
일체법의 배움 없음을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라고 한다.”

“세존이시여,
왜 그것을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라고 합니까?”
“문수사리야,
일체법의 성품은 배움이 없는 것으로서 배워서는 안 되고,
닦아선 안 되고,
사유해선 안 되고,
기억해선 안 되고,
머물러선 안 되고,
일으켜선 안 되고,
행해선 안 되고,
끊어선 안 되고,
증득해선 안 되고,
말해선 안 되고,
이야기해선 안 되고,
구해선 안 되고,
설해선 안 되고,
취해선 안 되고,
버려선 안 되고,
벗어나선 안 되고,
없애선 안 된다.

무슨 까닭인가?
문수사리야,
일체 모든 모습을 필경 벗어났기 때문이다.
본래부터 지금까지 취할 것이 없고 항상 버리는 모습이며,
모든 법은 지혜가 미치는 곳이 아니고 어리석음이 미치는 곳도 아니다.
이런 까닭에 배움이 없는 것을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라고 한다.”



-------------------
1 새의 이름이다.
이 새의 소리는 너무도 아름답고 부드러워 싫어하는 자가 없다.
부처님의 음성을 비유하는 말이다.
2 많이 구하지 않는 것을 소욕,
적다고 괴로워하지 않고 만족할 줄 아는 것을 지족이라 한다.
3 하안거 마지막 날 대중이 함께 모여 보고,
듣고,
의심한 죄과를 서로 지적하고 참회하는 의식이다.

○ [pt op tr]





Lab value 불기2564/04/29/수/00:22

● 제법무행과 제행무상의 관계

기본적으로 제행무상이 제시된다.
그런데 여기서는 제법무행이 제시된다.
제법에 행이 없다면, 제행무상도 제시할 수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두 내용이 모두 부처님에 의해 제시되는 내용이다.

그래서 이 관계를 이해해야 한다.




◆vyvz1351
◈Lab value 불기2564/04/28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Antoine Henaut - Je Compte.lrc


Antoine Henaut - Je Compte


○ 2019_1004_134040_canon_ct19.jpg



○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Utagawa-Kuniyoshi-the-young-benkei-holding-a-pole.jpg!HD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Amazing_flowers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Palau_Capitol_Complex,_Olbiil_Era_Kelulau_Building


♡Wat Suwan Khuha


○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상세정보=>




♥ 잡담 ♥택배 받아보기 힘든 아파트

한국에서는 어느 정도 코로나 바이러스사태가 진정되고 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언제쯤 진정될 지 알 수 없다.

그런데 글 작성하는 입장에서는 요즘
글 작성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

대략 기존에 각 사이트에 올려 놓은 페이지 수만 해도
대략 17000 장 정도가 된다.

지금은 불교 경전을 공부하는 중이다.
그래서 필요한 불교 용어 풀이를 위해서
풀이가 필요한 불교 용어단어를 가나다순으로 올리는 중이다.

그런데 어떤 사이트는 하루에 올리는 페이지 수도 50 개 제한이 있다.
그리고 페이지 한번 올릴 때마다 9 개 그림조각이 떠서
일일히 인증을 요구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 상당히 번잡할 뿐 아니라 불쾌하기도 하다.

물론 경우에 따라 사용자 신분인증을 위해 한번 정도 인증을 요구할 수도 있다.
그런데 어떤 사이트는 글을 올리고 수정 한번 할 때마다
매번 인증해달라고 팝업창이 뜬다.
이런 경우는 거의 편집 업무방해 수준이다.
그래서 결국 그런 방해를 하지 않는 상황에서작업을 해야 한다.

그런데 기존에 사이트에 올려 놓은 페이지가 문제다.
이들 페이지를 병행 사이트에 옮겨 놓기 위해
편집작업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에도 인증창이 떠 번잡하게 만든다.
이는 어떻게 보면 올려진 글을 가지고 인질을 삼아서 업무를 방해하는 형국이다.


물론 사용자가 올린 글 내용이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그런 경우는 단 1 페이지라고 해도 문제가 된다. 

그리고 그런 경우는 글이 올려진  상태에서
문제가 발견되면 사후에 시정을 관리자가 개별적으로 요구해도 충분하다.

또 그런 경우라면 사용자가 글 내용을 검토할 기회를 주어
문제 되는 부분을 제거할 필요도 있다.

그런데 단지 사이트에 글 올리는 과정에서
사용자를 붙들고 빈번하게 그림 맞추기로 인증 요구를 행하는 사이트가 있다.
이는 관리를 빌미삼아 행하는 관리자 횡포에 불과하다.

그림 맟추는 인증방식은
어떻게 보면 프로그램을 통해서
기계적으로 페이지를 만들어 올리는 것을 방지하는 목적일 수 있다.

그런데 이는 사람이 어떤 작업을 한다는 것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글 내용을 보증해주는 것이 아니다.
또 글 올리는 이의 신원을 확인해주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오늘날 컴퓨터로 문서작업을 하는 것이 일반이다.
컴퓨터로 작업하는 것은 컴퓨터가 사용자에게 편의를 주기에 사용하는 것이다.
어떤 부분을 복사해 붙일 때도 마찬가지다.
컴퓨터로 작업하면 간단히 블록설정해 한번 복사해 붙이면 된다.
그리고 반복하는 작업을 생략하고 줄일 수도 있다.
또 일정부분 외국어 번역이 필요하면 이것도 오늘날 프로그램의 도움을 받아
쉽게 행한다.
그리고 음성 출력도 해준다.
맞춤법 검사도 해준다.
기타 멀티 자료도 링크를 찾아 복사해 이용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이들 기능이 컴퓨터가 본래 갖는 편리함이고 기능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러한 컴퓨터의 본래 기능을 사용자가 사용한다고 해서
원칙적으로 그것을 문제삼을 이유는 별로 없다.


어떤 한 사이트가 장애가 있다고 하자.
그래서 예를 들어 그 사이트에 올려 놓은 17000 페이지 분량 정도의
페이지를 다른 사이트로 옮겨 놓으려 한다고 가정해보자.
이런 경우에도 모니터를 보면서
연필로 하나하나 적고 타이핑해서 옮길 도리는 없다.
결국 마찬가지 문제다.


어떤 한 사이트에 올려 놓은 페이지가
일정한 장애가 있어 다른 사이트로 일괄적으로 옮기려 한다고 하자.
이 때 각 페이지에 페이지 관리를 위해 페이지 주소가 기재된 경우가 있다.
그리고 페이지 안에 다른 페이지주소와 링크처리가 된 경우도 많다.

그런데 이처럼 사이트를 옮기려면 이들 내용을 복사한 다음
이들 부분을 다 편집해서 다시 올려야 한다.
그리고 그런 작업전에 사이트에서 단순히 글을 새로 작성하고 수정하는 경우도 많다.
이런 과정에서도 사이트 관리는 사용자에게 편의를 주도록 노력하는 것이 낫다.

그래서 글 작성자의 수고를 덜고 도와주고자 하는 것이 관리 목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어떤 사이트에서 하루에 50 회만 올려야 한다고 제한을 둔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업무자체가 당연히 곤란해진다.
그러면 그 기간만큼 공연한 시간을 들여야 한다.

어떤 사이트에서 하루에 올리는 페이지 제한을 두는 것은 
그런 제한과 성격이 같다.

그런데 각 개별 사용자마다 글 작성 취지와 사정이 다 다르다.
사용자에 따라서는 한달 되어도 한 페이지조차 올리지 않는 경우도 현실에는 대단히 많다.
그런데 그것도 다 사정따라 다르다.

최근에 기계적으로 글을 작성해 올리는 일이 사건이 된 적이 있다.
요즘은 뉴스 기사도 AI 로봇이 작성해 올린다는 식이다.
그러나 사정이 그렇다해도 그것은 글 내용과 관련해서 문제가 된다.
사정이 그렇지도 않다면 굳이 문제삼을 필요는 그다지 없다.

사용자가 편하면 그런 도움을 오히려 주어야 한다.
맞춤법도 자동 검사해주고, 필요하면 번역도 도와주고,
페이지 환경을 꾸미는 과정 및
글 작성에 편의를 받는 것이 더 낫다.

마치 자동차와 사정이 같다.
불편함을 주는 자동차보다는
그냥 올라타면 목적지에 안전하게 데려다 주는 자동차가 나은 것과 사정이 같다.

공연히 사용자에게 장애와 불편을 주기 위해서 관리자가 활동하면 곤란하다.

물론 올려지는 글 내용이 문제가 되면
사후적으로 시정을 요구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무조건 글을 올릴 때마다

그림 맞추기 인증을 요구하는 등의 방식은 관리 방법으로 좋지 않다.

글 내용이 다른 이를 불쾌하게 만드는 것은 사회문제가 된다.
그런데 글 내용이 문제가 없는 데도
글 작성해 올리는 과정을 방해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 문제가 된다.
이는 일종의 사전 심사와 실질이 같다.

그런데 사용자로서는 별 방안이 없다.
다른 사용자도 같은 상태인지 아니면
본인만 특정해서 괴롭히는지 파악하기도 곤란하다.


아파트 관리인이 아파트에 살아가는 입주민이라고 가정해보자.
자신이 주거지로 들어갈 때 상자를 한개를 들고 운반하던 두개를 들고 운반하던
공동으로 살아가는 입주민들에게 큰 불편을 끼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안전에 큰 위험이 없게 해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는한 관리자가 입주자의 활동을 방해하면 곤란하다.

그런데 어떤 아파트 관리자가
계단을 오르내려 만날 때마다
신분증을 번번히 반복해 확인 요구를 한다고 하자.
그리고 들고 있는 상자는 상자대로 뒤져 본다고 하자.
그리고 일정시간내에 많이 들락날락하지 못하도록 횟수를 제한한다고 하자.
이것은 지나친 일이다.
이해가 안 된다.
이런 관리를 하는 곳에서는 거주자체가 불편하고 불쾌해진다.

마찬가지로 이런 환경에서
블로글 작업하게 되면 대단히 불편하고 불쾌감을 느끼게 된다.
조지 오웰의 빅브라더가 관에서 나와 옆에서 활동하는 느낌을 받는다.

결국 그런 사이트를 주된 메인 페이지로 삼아 활동하기는 곤란하다.
그래서 이런 사이트에 올려진 페이지를 결국 옮겨야 하다.

그러나 올려 놓은 페이지가 많아서 한번에 옮기기도 힘들다.


이런 현상이 발생하기 전에는
하루에 경전을 연구하면서
동시에 경전에 나오는 어려운 용어풀이를 병행하고자 했다.

그래서 미리 어려운 불교 용어 단어를 가나다 순으로 등록해서
시간이 날 때마다 하나씩 살펴서 올리고자 했다.

그런데 최근에 페이지를 미리 등록하는 과정에서
한 사이트에서
하루에도 수십번씩 그림퀴즈를 팝업창에 띄어 맞출 것을 요구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페이지에 글을 작성하다가
단순히 중간작업분 보관을 위해 중간에 임시 저장하는 과정에서도 튀어 나온다.
지금 글과 같은 페이지도 사정이 같다.

중간에 글을 적다가 작업한 분량의 중간 보관을 위해
임시로 저장하려고 해도 위 같은 문제가 튀어나온다.

그런데 그림이 잘 보이지도 않는다.
그리고 성가시다.
그리고 무슨 사정인지도 모른다.
글 내용에 어떤 문제가 있다는 사전 안내 통고도 없다.
그런 상태에서 임의로 이런 인증 팝업창이 수시로 튀어 나온다.
그처럼 글 작성 과정에서 자꾸 인증을 반복 요구하여서
글 작성자 인격을 불신하고 인격을 모욕하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그런 인증절차를 반복해 하다보면 성가실 뿐 아니라 자연스럽게 대단히 불쾌해진다.

사이트 관리자 측에서 글 내용에 문제가 있고 없고를 떠나
일방적으로 회수제한을 걸어 놓고 
그런 방식으로 요구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사용자가 그만 알아서 사이트 사용을 중지하거나,
설령 사용하더라도 페이지를 가능한 적게 만들라는 요구로 해석된다.
그런데 정작 글 내용이 어떤 사정으로 문제가 되므로 곤란하다는 식으로
안내를 하지는 않는다.

단지 페이지만 적게 만들면 문제가 예방된다는 생각인 듯하다.
그래도 참고 일단 글을 작성해보려고 하게 된다.

그러면 나중에는 퀴즈 하나를 맞추어도
또 이어서 바로 다른 퀴즈문제가 이어 나온다 .
그리고 또 나온다.

한번 페이지를 올리려면 이런 퀴즈를
연속해서 3 번 풀어야 할 경우도 있다.

이는 한마디로 관리자의 횡포면서 연구 업무방해다.
비록 물리적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 듯 하다.
그러나 엄청난 정신적 스트레스를 준다.
관리자가 임의로 사용자를 특정해
사전 검열을 이런 방식으로 행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구체적 사유도 파악하기 힘들다.
글 내용을 놓고 검토해보아도 별 문제를 발견하기는 힘들다.
그래도 별 방안이 없다.


이렇게 되면 결국 사이트를 옮겨야 된다.
그런데 사이트를 옮기는 것도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글 작성 과정 단계마다 이런 형태로 방해를 하니 결국 옮길 도리 밖에는 없다.

예를 들어 어떤 아파트에서 별 문제없이 살아왔다고 하자.
그런데 어느날 부터 관리인이 시도 때도 없이 전기차단기를 내린다.
그리고 수도물도 잠갔다 열었다한다.
그리고 가스공급도 열었다 잠겄다 한다고 하자.
그런데 정작 그렇게 하는 이유나 사정이 명확하지가 않다.
이런 상태와 비슷하다.
견딜 재주가 없다.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Thomas Fersen - La Barbe Bleue.lrc


누구나 알다시피 블로그 서비스는
사이트 입장에서는 별 수익이 발생하지 않는 서비스 차원이다.

그런데 그런 공짜 서비스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이트 전체에 대한 이미지가 바뀌게 된다.

공짜서비스로
정이 생길 수도 있고
정이 나갈 수도 있다.

병원을 예를 들면 환자가 의료진에게 불친절이나 모욕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런 경우 그 환자는 이후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그 병원을 못가게 막는
광고활동을 알아서 행하게 된다.

또 그 반대는 또 그 반대가 된다.
어떤 병원은 한번 진료를 받으려면 한참 기다려서 간신히 진료를 받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진료가 좋고 과정이 친절하면 앞과는 반대형태로 임하게 된다.
비슷한 환자를 만나면 자신이 오히려 추천을 하면서 환자를 끌고 가게도 된다. 


세상에 병원이나 상가나 주택이 많다. 
그런데 돌아다니다보면 건물 전체가 텅 비어 있는 건물도 많이 만난다. 어떤 경우는 건물이 신축되어도 몇년 동안 입주인이 거의 없는 경우도 본다.
또 어떤 경우는 처음에는 건물에 가득 입주되었다가
어느 시점 이후 하나둘씩 건물이 비어지면서 유령처럼 남아 있는 경우도 보게 된다.
그런데 각 건물이 각기 그렇게 되게 되기까지 아무 사정이 전혀 없이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알고보면 이런 무료서비스는 포털 사용자에 대한 서비스 차원이다.
그리고 포털 사이트는
검색창에서 검색되는 단어 한 줄당 막대한 수익을 거두는 것이 현실이다.
단어 하나하나마다 사정이 그렇다.
단어 하나에 검색되는 줄 하나마다 일반 상점 임대료를 넘는 수익을 거둔다.
그것이 오늘날 인터넷 시장에서 단어가 갖는 힘이다.

그런데 불교 경전을 볼 때도 이런 단어가 힘이 된다.
단어가 갖는 의미를 이해해야 경전 내용도 잘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사정이 같다.

그런 가운데 이번에 응신 법신 화신 이런 단어 풀이를 한번 올리고 공부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런 형태의 사이트 관리때문에 중간에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그래서 중간에 포기하고 말았다.

하루 몇백억원을 초과하는 생명 신체 감가상각비가 누구나 공평하게 없어져 간다.
그런데 그림 맟주는 일로 성가시게 해서 공연히 연구 업무를 방해한다.
이로 인해 사이트 측에서 어떤 대단한 효용을 얻는지 도무지 궁금하다.
사용자가 사이트에 페이지를 하나 올리려면 시간과 수고를 들여야 한다.
그렇게 사용자가 글을 올리는데 사이트 관리자가 이를 방해한다.
그러면 사이트에 관리자가 직접 내용을 살펴 관리할 페이지 수가 적어지게 된다.
그러면 사이트 관리자에게는 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이트에 올려진 페이지 수 자체가 적어지면
정작 그 사이트에 도움이 되는 것은 또 아니다.
그런데 이런 발상을 하는 자체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다.
물론 관리자 입장에서는 이로 인해 어떤 관리상 편의나
효용을 얻을 지 모른다.

그러나 글 작성하는 입장에서는 이런 상태에 갑자기 봉착하면
마음이 불쾌해진다.
그리고 공연히 행하는 번잡한 작업으로 몸에서 자연스럽게 열이 난다.
사회에서 바이러스나 세균을 만나는 경우와 증상이 같다.


그래서 조만간 이런 형태로 관리하는 사이트는
이런 증상이 개선되고 시급하게 시정이 되기를 기대하게 된다.
코로나 사태와 마찬가지로빨리 정상으로 회복되어야 한다.
그런데 뜻과 같이 되기를 기대하기 힘들다.

그래서 이런 경우 이런 환경에서 연구하는 일은 일단 중지하고 포기하게 된다.
그런 경우 페이지를 안정적인 환경으로 옮기는 작업만 당분간 몇달간 전념해야 한다.
그 다음에는 그냥 사이트를 닫고 쉬어야 한다.


기억해보면 그 사이트에서는
수개월전에도 한번 이런 식으로 관리를 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본인만 그런 불편을 겪었던 것이 아니다.
대다수 사용자가 불편을 겪었다.

그리고 다수 사용자가 이 문제에 대해 시정을 요구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곳에서는 그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여왔다.
다만 버튼을 두 번 연속 누르는 방식으로 변경한 가운데 잔존시켜 놓았다.
그래서 그 동안 그 사이트에서도 그런 현상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최근 또 다시 그 현상이 시작되었다.

사용자가 글 작성하고
여러번 버튼을 누르고 또 눌러야 글 하나가 겨우 저장이 된다.
어떻게 보면 대단한 기술이다.

그런데 그 기술로 관리자가 거두고자 하는 목표가 엉뚱해 보인다.
아이러니하기까지 하다.

그 사이트에서 사용하는 이 프로그램은 정작
그 사이트에서 자체개발한 것도 아니다.
다른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것이다.
결국 트로이 목마형 관리자가 다른 사이트에 오히려 유리한 일을 맡아서 하는 형국이다.

이 사이트 관리자는 그런 형태로
자신 사이트 사용자를 불편하게 만드는 서비스에 열성이다.
그런데 정작 사용자 글 작성에 도움줄만한 서비스 개선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때로는 이런 관리형태가 어이가 없고 아이러니함까지 느낀다.

축구경기로 비유하면
어떤 팀 골문의 키퍼자리에 상대팀 공격수가 들어와서  활동하는 형국이다.

물론 이들 서비스 자체는 무료다.
그런데 아무리 무료라고 해도 이렇게 서비스하려면
그 서비스 취지와 목적이 도대체 무엇인가 의문이 된다.





글 작성편집과정은 본래 막노동 성격을 갖는다.
전문 출판인이 아니라고 해도 사정이 같다.
어쩌다 글 한번 작성해보는 이라면 대부분 공감할 부분이다.

한번 글 작성을 마친 다음 다시 읽어보면 곳곳에 오타가 발견된다.
표현도 수정할 부분이 보인다.
그런데 조금만 그런 부분을  수정하거나
내용을 추가하고 저장하려면 어느때 갑자기 위와 같은 팝업창이 튀어 나온다.


이는 사이트와 사이트 관리자가 스스로 자해 자폭 행위를 하는 것과 실질이 같다.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얻는 사이트 측에서 얻는 수익이 별로 없다.
그리고 공연히 관리만 힘들다면 그냥 사이트를 문 닫는 것이 낫다.
그리고 올려 놓은 페이지나 사용자가 백업받을 수 있게 해주면 된다.
또 다른 사이트로 이전해주는 절차를 도와주는 것이 낫다.

그렇지 않고 별 구체적 이유도 없이 사용자 편집과정에 장애를 설치하면 곤란하다.
그것은 사용자가 이미 올려 놓은 페이지를 인질로 삼아 붙들고
사용자를 괴롭히는 행위일 뿐이다.
사이트 측에서 그렇게 할 이유자체가 별로 없다.
그런데 그렇게 행한다.
그러면 참 답답한 일이다.



-------------
그 사이트에서 조금 더 적고 최종 저장하려는 데
이런 화면이 다시 또 튀어 나온다.
글 하나 작성하는데 이런 그림 맞추기를 수회를 반복 해야 한다.

문제 난이도도 쉽지 않다.
이 문제만 해도 마우스로 8,9 곳 이상을 클릭해야 한다.

그리고 클릭을 마치면 다시 또 다른 그림이 나타나기도 한다.
글 작성자가 어느 정도 참을 성이 있는가를 심리 테스트 하는 듯 하다.
아니면 수행자에게 인내 안인을 훈련시키는 취지인지도 모른다.

관리자 입장에서는 사용자는 다음처럼 편하게 생각할 지 모른다.
사용자들은 어차피 공짜사용자들이다.
따라서 불편하면 그냥 사용을 중지하면 되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할지 모르다

그런데 사용자는 글 하나에 하루 또는 몇년의 노력을 해 간신히 올리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방해하면 쓸모없는 작업을 하는데 시간이 다 없어진다.

관리자가 컴퓨터 전문기술자인 이상
사용자가 편하게 사이트를 이용할 수 있게 하는 방향으로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런데 사용자를 공연히 불편하게 하는 노력을 굳이 찾아 하는 이유를 알기 힘들다.

이런 경우 그림을 맞춘다고 해도 글 내용이 문제가 없음을 보증하는 것도 아니다.
또 그림을 맞춘다고 해도 그것으로 글 작성자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설령 인증이 필요해도 처음 로그인할 때 한번 정도 한다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확인 인증을 수정하거나 중간 저장할 때마다 빈번히 요구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글 내용이 문제라면 단 한 장을 올리더라도 그 내용을 놓고 문제를 제기하면 된다.
그런 사정이 아니라면 하루에 만장을 올린다 하더라도 문제될 수 없다.
그것이 사이트나 이용자에게 편하면 편했지 무슨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람을 공연히 비방하고 괴롭히는 내용의 글이라면
한 페이지만 올려도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 않다면
사용자가 글 페이지 올리는 회수에 제한을 걸 필요가 무엇인가.
그리고 페이지 올릴 때마다 그림 맞추기 인증을 요구할 필요가 무엇인가.
이것은 관리자가 관리를 핑계삼아 행하는 횡포일 뿐이다 .

견디다 못해 올린 글을 다른 사이트로 옮기려하게 된다.
그래서 일단 페이지를 비공개글로 돌리고 링크 수정 작업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전을 위해서 행하는 그런 수정 작업과정까지 방해한다.
그러면 정말 난감해진다.

도무지 이유도 알 수 없다.
그렇게 행하는 취지나 목적도 알 수 없다.
관리자가 스스로에게 손해가 되는 이런 자해형 관리방식을 택해 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

관리자는 사용자가 사이트 이용에 편의와 도움을 줘야 한다.
그런데 관리자가 사용자를 공연히 괴롭히는 형태다.




문서정보 ori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0/04/2564-04-28001.html#1351
sfed--제법무행경_K0168_T0650.txt ☞제법무행
sfd8--불교단상_2564_04.txt ☞◆vyvz1351
불기2564-04-28
θθ






■ 선물 퀴즈

방문자선물 안내페이지 
다음에 해당하는 단어를 본 페이지에 댓글로 적어주시면 됩니다.
 그렇다는 뜻. 다른 이의 이해를 긍정할 때 씀.

답 후보
여시(如是)
여의통(如意通)
연(緣)
연기(緣起)

연생(緣生)
연화부(連華部)
열반대(涅槃臺)


 부처님만이 가진 10력(力)의 하나. 중생들의 나고 죽을 때와, 아울러 지난 세상의 일을 아는 지혜 힘.

답 후보
● 숙주생사지력(宿住生死智力)
습기(習氣)
승가람(僧伽藍)

승론파(勝論派)
승해작의(勝解作意)
시무외(施無畏)
시방찰(十方刹)


ॐ मणि पद्मे हूँ
○ [pt op tr]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