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松廣寺)의 말사이다. 신라 경문왕 때 철감선사(澈鑒禪師)가 중국에서 귀국하여 산수의 수려함을 보고 창건하였다. 철감선사의 법력과 덕망이 널리 퍼지자 왕이 궁중으로 불러 스승으로 삼았다고 하며, 창건주 철감선사의 도호(道號)가 쌍봉이었으므로 사찰명을 쌍봉사라 하였다고 한다.
847년(문성왕 9)에 귀국한 철감선사는 이 절에서 선문9산의 하나인 사자산문(獅子山門)의 기초를 마련하였고, 이곳에서 그의 종풍(宗風)을 이어받은 징효(澄曉)가 영월의 흥녕사(興寧寺)에서 사자산문을 개산(開山)하게 되었다.
철감선사는 출가하기 전의 성이 박씨이고 도호가 쌍봉이다. 한주(서울) 사람이며 신분은 육두품 이하 향족 출신이었다. 18세 되던 헌덕왕 7년(815)에 당시 화엄십찰 가운데 하나였던 김제 모악산의 귀신사(歸信寺)로 출가하여 10년 동안 화엄학을 공부했다. 28세 되던 헌덕왕 17년(825)에 사신의 배를 얻어 타고 당나라로 갔다. 그곳에서 마조 도일(馬祖 道一)의 제자로서 혜능의 법증손(法曾孫, 3대째 법제자)에 해당하는 지주(池州) 남천 보원(南泉 普願)으로부터 법을 받았다. 철감선사는 스승인 남천선사가 열반한 뒤에도 13년 동안 더 당나라에 머물다가 문성왕 9년(847)에 신라로 돌아온다.
귀국한 후 금강산 장담사로 가서 머물던 철감선사는 대략 문성왕 17년(855) 무렵에 쌍봉사로 와서 10여 년간 종풍을 떨치다가 경문왕 8년(868)에 입적했다. 그가 쌍봉사에 머물던 기간에 쌍봉사는 사세가 번창했고 제자가 많이 나왔다. 철감선사는 이 절에서 구산선문의 하나인 사자산문의 기초를 마련하였고, 그의 종풍을 이어받은 징효(澄曉)가 영월의 흥녕사(지금의 법흥사)에서 사자산문을 열었다. 생전에 그의 덕망이 널리 퍼지자 경문왕이 그를 궁중으로 불러 만나 본 후 스승으로 삼았고, 그가 죽은 후에는 철감국사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후 고려 시대 소성(紹聖) 연간(1094~1097)에 혜소(慧昭)국사가 중창했다는 내용이 적힌 사적비가 절의 동쪽에 있다. 『고려사』 권42 최충헌전에는 최씨 정권 제3대 집정인 최항이 송광사 2대 사주인 진각국사의 제자가 되어 쌍봉사에 주석하면서 무뢰승도를 모아 문도로 삼고 세도를 부렸다는 기록도 있다. 공민왕 때는 전라도 관찰사 김방(金倣)의 시주로 중창을 보았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절 아랫마을 쌍봉리 양씨 가문의 세력에 눌려 조광조와 양팽손 등을 모신 죽수서원의 예속 사찰로 전락하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절이 불타 버린 후 인조 6년(1628)에 중건했고 현종 8년(1667)과 경종 4년(1724)에 중창했다. 정조 10년(1786)에 이조판서 김종수가 사적비를 쓸 때까지만 해도 전각 등 건물이 모두 400여 칸이었다고 한다.
지금 쌍봉사에는 대웅전, 명부전, 극락전과 새로 지은 요사채, 그리고 국보 제57호인 철감선사 부도와 보물 제170호인 철감선사 부도비가 있다. 일제 시대의 사진자료인 『조선고적도보』에만 해도 대웅전, 호성전, 극락전, 오백전 등 여러 전각의 사진이 실려 있지만, 이제는 절 여기저기에 초석들만 남긴 채 여러 건물이 사라지고 없다.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기로는 신라 경문왕(861~876년 재위)때 철감선사(澈鑑禪師) 도윤(道允)이 쌍봉사를 창건했다. 쌍봉사라는 절 이름에는 두 가지 유래가 전해온다. 하나는 중조산(中條山)의 한 가지기 왼쪽으로 돌아서 에워싸면서 절을 향해 우뚝 솟아 있어 마치 남북의 두 봉우리가 서로 읍(揖)하고 있는 것 같으므로 절 이름을 쌍봉이라 하였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철감선사가 중국 소주(蘇州) 쌍봉사에서 도를 깨치고 귀구한 뒤 이산의 수려함을 보고는 머무르면서 절을 창건하여 쌍봉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그가 근본을 잊지 않고자 함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쌍봉사에 대해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철감선사는 중생을 깨우치기 위해 법도량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살피다가 우연히 지금의 이양면 증리 구역인 중조산을 찾게 됐다. 그는 능주 고을을 들어서서 이양면의 산수가 역류로 남출북류(南出北流)함을 기이하게 여기고 찾아들어 자세히 살폈다. 용이 구름을 타고 하강하는 듯한 기상이엇다. 철감선사는 마음이 밝아오고 정신이 다시 깨우쳐지는 듯해 장엄한 지세를 따라 한없이 찾아 올라가다 지금의 쌍봉사에 이르렀다. 그 깊고 깊은 산골에 아방궁을 연상케 하는 기와집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를 본 철감선사는 크게 실망하였으나 하룻밤쉬어 갈 심산으로 주인을 찾아 쾌히 승낙을 얻었다. 그 집의 종들이 물을 산골의 시냇물을 길러오는 것을 보고 선사는 주인에게 그 연유를 물으니 여기는 물이 귀해 시냇물을 길러서 먹고 살아야한다고 하였다. 선사는 집터가 불가(佛家)의 터임을 밝히고 다음날 아침을 먹고 쌍봉 마을편으로 내려가 그 터를 다듬고 우물을 파니 옥수(玉水)가 솟아올랐다. 주인은 그 뒤 철감선사를 지극히 받들면서 절을 세우는데 모든 힘을 다해 도와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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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세종대(1436~1449)에 전라도 관찰사 김방(金倣)이 절의 3창불사를 하였다고 한다. 이것을 기리기 위해 쌍봉사 스님들이 김방의 상을 그려서 전각에 보관하였다. 세조대에 와서는 절은 나라의 보살핌을 더욱 받게 된다. 세조 3년에는 이 절의 크기가 전각 · 누각 · 암자 · 승방 · 요사 등 전부 400여칸에 달했다고 한다. 그리고 세조 14년(1468년)에 세조의 원당(願堂)을 지었고 사방 30리에 달하는 불량(佛糧畓)답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절 아랫마을 쌍봉리 양씨 가문의 세력에 눌려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와 학포 양팽손(學圃 梁彭孫)등을 모신 죽수서원(竹樹書院)의 예속 사찰로 전락적도 있었다.
* 철감선사탑 - 대웅전 뒤 왼편으로 이어진 대숲을 돌아난 오솔길을 오르면 보인다. 통일신라시대 석조부도의 기본 양식인 팔각 원당형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각 부분의 조각이 매우 정교하고 아름답다. 세부의 화려함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인상은 장중하다. 부도 높이는 2.3m이고 국보 제 57호로 지정되어 있다.
* 철감선사탑비 - 비신은 없어지고 귀부와 이수 만이 남아 있으나 전체적인 조형과 조각기법이 매우 뛰어나 다. 청년거북처럼 매우 씩씩하고 기운찬 모습으로 거북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 생동감이 있다. 보물 제 170호이다. * 화순 쌍봉사 대웅전 목조삼존불상 - 조선숙종 20년(1694) 조성되었으며 2001년 6월 5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51호로 지정되었다. * 화순 쌍봉사 극락전 목조아미타불여래좌상 - 조선숙종 20년(1694) 조성되었으며 2001년 6월 5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52호로 지정되 었다. * 화순 쌍봉사 지장전 목조지장보살상 일괄 - 조선현종 8년(1667) 조성되었으며 2001년 6월 5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 253로 지정되었다. * 화순 쌍봉사 극락전 - 전라남도 문화재 자료 제66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