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를 짓는 이도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밤늦게까지 애쓰고 SNS 에서 글 올리는 이도 쉼없이 노력하는데 지옥에서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수행자가 56 억 7 천만년이란 장구한 기간이 지나가는 동안 적당히 임하면 되겠는가. 이런 메세지를 전하는 노래로 시감상하게 된다.
노래가 경쾌해서 이미 MUN 님이 이퀄라이저 변환 지휘까지 마치고 스크립트에 넣었던 곡인데 수행자에게 많은 교훈을 제시해주는 노래라고 개인적으로 본다.
노래에서 숙왕화님도 등장하는데 이 숙왕화님은 요즘 휴일날만 되면 전국 산 어딘가에는 가 있는 상태다. 일주일전에는 새벽부터 시작해서 지리산 종주를 했다는 보고를 받았는데 주 중간 공휴일에도 또 어느 산인가를 갔다오고 지금은 덕유산 근처를 또 등반중이라는 소식이다.
왜 그러는가. 알고보니 운동까지 보시한다는 자세로 그렇게 임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운동을 보시하는가. 여하튼 주장이 그렇기에 그런 줄 알고 있는데 본인은 현재 몸이 안 좋은 상태라서 연구실 밖을 나가지 못하는 상황이라, 상당히 부러운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 두 내용이 서로 극과 극으로 반대되는 내용이어서 유명한 사찰 어리둥절을 방문해서 이런 내용을 제시하는 경전을 대하게 되면 일반인들은 이를 대단히 어리둥절하게 여기게 된다.
그런데 경전에 제시된 설명을 듣다보면 그럴 듯하게 여길 수도 있는데 그러나 현실에서 망상분별편집증상이 쉽게 치유가 되지 못하는 사정은 아무리 그런 내용을 이론적으로 이해해도 현실에서 단 한 순간이라도 임하게 되면 곧바로 망상분별 증상이라고 제시한 그 내용을 그대로 다 적용받게 된다고 그 주체가 여기게끔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두 내용을 오락가락하다보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상태로 임하게 되기 쉽다고 본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즉 어리둥절이란 유명한 사찰에서 제시하는 내용이 맞다면 왜 현실에서는 매번 그렇게 현실을 대하고 이해하게 되는가. 이 부분이다.
이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으므로 비록 어리둥절이란 사찰에서 제시해주는 내용을 대할 때는 한편 그럴 듯하게 여기다가 다시 현실에 임하면 또 망집에 바탕해 임해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본 사정이 그런데도 어떤 사정으로 현실에서는 그렇게 계속해서 망집에 묶이게 되는가 하는 사정까지 추가로 잘 살펴서 이처럼 생사의 묶이게끔 되는 각 과정 각 단계마다, 거꾸로 이런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오는 해탈문을 찾아서 잘 벗어나와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현실에서 길거리에 있는 벽돌과 같은 성격의 것을
처음 어느 순간 자신이라고 여기고 생사고통에 묶이게 되었는가. 이 문제를 이어 살피기로 한다.
이는 쉽게 말하면 밭에 있는 배추를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몸이라고 보게 되었는가. 이런 문제로 이해해도 마찬가지다.
『수능엄경』과 『원각경』 이런 경전을 살피는 가운데
이 문제를 살핀 적이 있는데 이 부분이 잘 이해되지 않으면 결국 현실에서 생사에 묶여 지내는 것은 또 마찬가지가 된다고 보기에 이 부분을 조금 잘 정리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거리에 떨어져 있는 벽돌과 같은 것을 놓고 왜 현실에서 각 주체가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단히 집착을 갖고 진지하게 임하는 가운데 업을 행하고 그로 인해 3 악도 속으로 묶여 들어가게 되는가.
현실에서 그것이 비록 실답지 않은 것이라고 해도 그 주체가 그것을 자신으로 여기고 그에 집착하여 그 자신에 좋다고 보는 것을 그렇게 열심히 추구하는데 왜 그로 인해 생사고통을 극심하고 무량하게 받는 3 악도의 상태로 들어가는가. 이상한 일 아닌가.
그런데 이 이상한 일이 현실이다. 자신이 좋다고 보는 일을 열심히 잘 하는데 그것이 생사고통을 받게 되는 사정은 그 주체가 임하는 딱 하루만 놓고 그 사정을 살펴도 그 사정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그가 거꾸로 뒤집힌 상태에서 현실을 대하고 그리고 그 인과를 살피고 그리고 또 현실에서 무엇이 좋고 나쁜 것인가에 대해서도 또 마찬가지로 거꾸로 뒤집힌 상태에서 분별을 행하고 그리고 그처럼 좋다고 보는 상태를 얻어내기 위해 취하는 방안도 마찬가지로 거꾸로 뒤집힌 상태에서 그것을 찾아 행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수많은 전도망상분별의 가장 근본되는 내용이 현실에서 무엇을 자신이라고 보는가 그 부분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이 내용을 이전 조각글에서 살폈던 수능엄경과 원각경에서 자세히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본 사정이 그렇지 않다. 그런데 계속해서 거꾸로 이 현실을 그처럼 대하고 있다. 알고보면 허공의 꽃이나 눈을 손가락으로 눌러서 보게 되는 두번째 달과 같은 것인데 그것을 자신과 세계로 이해하고 그렇게 그 안에서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그에 바탕해 행하기에 생사고통을 무량하게 받아나가고 그 상태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이들 경전은 각 중생이 극심한 생사고통을 무량하게 받아나가는 그 생사현실은 알고보면 곧 그런 생사고통을 떠난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라고 반복해 제시하고 있다.
문제는 본 바탕이 이처럼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인데 그러나 현실에서는 각 중생이 마치 거꾸로 매달려서 고문을 받는 상태처럼 극심한 생사고통을 받아나가면서 열반 즉 생사로 거꾸로 뒤집혀 그 상황을 대하고 있기에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즉, 생사 => 즉 열반 이렇게 이해하면 좋은데 열반 => 즉 생사 이렇게 거꾸로 대하고 있기에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거꾸로 매달려서 고문을 받고 있는 당사자에게 그 사정을 말하면 오히려 분노를 일으키게 될 것이다. 이 현실이 장난인가. 지금 자신이 이렇게 억울하게 극심한 고통을 받는데 어떻게 이것을 청정한 니르바나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래서 어떻게 이것을 이해시켜야 할 것인지 조금 막막하게 된다.
생각해보면 지금 본인도 몸이 아프다. 한달째 잘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이렇게 몸이 아픈 이 상황을 청정한 니르바나라고 할 수 있는가.
그래서 심정적으로 이런 입장을 이해하지만, 그러나 거꾸로 뒤집힌 것은 사실이다.
부처님이 그 사정을 기본적으로 잘 제시해주었는데 다만 잘 안 되는 부분은 본 사정이 그런데도 왜 현실에서는 그런 망상분별을 일으키게 되는가 이 부분에 대한 이해가 뒤 따르지 않기에 그 증상이 깨끗하게 치유가 되지 않는다고 본인은 본다.
그래서 논의를 할 부분은 왜 본 사정이 그런데 현실에서는 망상분별의 형태로 현실을 일반적으로 대하게 되는가. 이 부분에 대한 내용을 잘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처음 눈을 떠서 세상과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고 하자.
여기서 눈을 떠서 대한다는 내용은 그 주체입장에서는 현실의 정보의 90 %을 차지하는 중요한 내용이 된다. 눈의 중요성이 그만큼 큰 것이다.
그래서 눈을 뜬 상태에서 그릇을 앞에 놓고 막대로 이 그릇을 두드리면 소리가 들린다고 할 때
눈으로 본 내용을 기본 바탕으로 놓고 이 현상을 이해하게 마련이다.
즉 자신이 눈으로 본 그런 내용이 귀로 듣는 그런 소리를 듣게 한 것이다. 이렇게 이해하게 된다는 의미다.
만일 눈이 그 주체가 현실에서 얻는 정보의 대부분을 차지하여 중심적인 위치에 있지 않다면 이 내용을 그 반대로 이해했을 것이다.
어떻게 이해했겠는가. 그 소리가 그렇게 들리니까. 그 그릇이 그렇게 흔들린다. 이런 식으로 이해를 반대로 했을 것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여하튼 이 내용을 그대로 놓고 또 살펴보자.
앞과 같은 상황에서 자신이 귀로 소리를 듣게 되면 그는 이 상황에서 그 소리를 어떻게 듣게 되었는가라고 물으면 결국 앞 내용을 그대로 진술하게 된다.
막대로 그릇을 두드렸다. => 귀를 통해 => 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보고를 하는데 그 자신이 자신이 보고한 내용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소리가 어떻게 들리게 되었는가 물으니 막대로 그릇을 두드린 일에 갖다 붙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 자신이 들은 그 소리와 막대와 그릇을 살펴보기로 하자.
막대나 그릇을 아무리 뚫어지게 살펴 본다고 해서 자신이 들은 그 소리가 거기에서 찾아지는가.
사실은 그가 이해하는 그 내용이 이 내용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파악하는 인과의 내용은 대부분 그 주체가 그 상태에서 생사를 벗어날 수 있는 해탈문도 함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무슨 이야기인가.
현실에서 생사고통으로 대하는 것이 앞의 상황의 소리라고 이해해보자.
그런데 그 소리의 본 정체가 무언가 어떻게 생겨나는 것인가를 찾아보니 그 소리와는 엉뚱한 그릇과 막대를 떡 제시한다는 의미다.
여기서 그 그릇이란, 여하튼 그 소리는 아닌 그 무엇이어서 소리가 삶에 고통을 주는 어떤 문제라고 한다면 그것이 그릇에서 나오게 되었다고 하는 그 내용은 그 자체가 거기에서 그런 내용을 찾을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는 내용도 된다는 의미다.
비록 앞에 처음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관계가 엉터리인 망상분별이지만, 설령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그 내용은 바로 그런 사정으로 그 주체가 대하는 그런 생사고통은 다른 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는 것임도 함께 보여주고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 문제는 망집을 일으킨 상태에서는 이 내용을 그렇게 대하지 않고 그 반대로 대하는 것이다.
그 소리가 실다운 것은 자신이 눈으로 보는 그 그릇이 또 그것을 근거지워주는 하나의 내용이다. 그래서 실답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또 그 그릇이 실답다고 할 때도 마찬가지다. 눈으로 보는 그 그릇도 마찬가지로 실답지 않은 것인데 왜 그것을 실답다고 하는가 물으면 그 그릇을 두드리면 그런 소리가 난다. 그러니 실답다 이렇게 나아간다는 의미다.
현실에서 이것은 음식이라고 보고 음식을 열심히 먹을 경우 그것이 왜 실답다고 여기는가 라고 물으면 이 음식을 먹으면 한 30 분 지나서 배가 부르다. 그리고 만일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프다.
이렇게 제시하는 것과 사정이 마찬가지다.
즉 무엇이 실다운가 실답지 않은가가 문제되면 그 문제를 또 다른 실답지 않은 내용에 갖다 붙이고는 그런 실답지 않은 내용이 있기에 처음 내용이 실답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근거로 제시한 것이 또 왜 실다운가를 물으면 이것도 마찬가지 형식으로 또 다른 실답지 않은 것을 나열해서 그렇다고 주장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하나같이 다 실답지 않은데 현실에서 각 주체는
자신이 그런 내용을 한번만 대하는 것이 아니고 수없이 반복해서 대하고 이것은 지금만 그런 것이 아니고 수천년전을 거슬러 올라가거나 앞으로 수천년을 내려가거나 그 사정이 같다.
또 자신만 그런 내용을 대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과 증상이 같은 입장에 있는 이들이 대단히 많다고 제시하고 일단 자신과 비슷한 수많은 인간을 제시하게 마련이다.
물론 여기에서 자신과 아주 다른 감각을 얻는다고 여겨지는 수많은 곤충이나 도마뱀 상어 고래 이런 종류는 일단 제외하지만, 그러나 자신의 입장을 지지해주는 사람이 대단히 많은 것이다.
그리고 자신도 그런 내용을 단순하게 시각으로만 얻는 것이 아니고 다른 청각이나 후각, 미각 촉각을 통해서도 내용을 얻고 또 이에 대해 명료하게 분별을 행하기에 자신이 현실에서 얻는 내용은 하나같이 실답다.
더 나아가 비록 본 바탕의 내용을 직접 얻지는 못하지만, 현실에서 이렇게 반복해서 그런 내용을 다수가 얻게 되는 것은 본 바탕도 역시 그런 내용이 있기에 그렇다. 이렇게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또 전도망상분별 증상을 이전보다 더 증폭시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면 이전 조각극글에서 살폈던 『수능엄경』이나 『원각경』 등에서 제시한 내용이
다 무시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살펴야 한다.
그릇에서 소리가 났다고 이해한다면 그릇이 소리인가. 만일 그릇이 아니고 손바닥을 마주칠 때 소리가 났다면 손바닥에서는 그 소리가 보이는가. 그렇지 않다.
그래서 그렇게 이해한다고 해도 그 내용은 소리를 실답다고 이해할 근거로 사용하면 곤란하고 바로 그런 사정으로 자신이 소리라고 이해하고 집착하는 것은 알고보면 그런 것을 얻을 수 없는 엉뚱한 내용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자신이 하얀 벽지로 보는 내용도 손을 대서 만지면 어떤가. 촉감이다.
그리고 눈으로 본 그 내용과 손으로 얻는 촉감을 놓고 그 관계를 살펴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들 내용은 현실에서 자신이 얻는 내용이 실답지 않고 마치 침대에서 누어 잠을 자는 가운데 꾼 바다나 황금꿈처럼 서로 엉뚱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꿈이 실답지 않고 허망한 것이라고 하듯 현실에서 얻는 각 내용도 상호간 그런 관계로 파악되므로 마찬가지로 이해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현실에서 이것을 모두 거꾸로 이해하고 대한다.
자신에 대한 이해에서는 그 상태가 더 심하다.
원래 길거리 벽돌과 성격이 비슷한 것을 어떤 계기로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현실에서 임하게 되었는가를 이해하려면 다음 경우를 놓고 이 문제를 먼저 살펴야 한다.
현실에서 버스 운전을 하는 이가 있다면 어느 버스에 올라타서 운전대를 잡고 엑셀을 밟으면 그 버스가 전체적으로 자신의 뜻에 따라 움직이고 멈추고 방향을 돌려 나아가기도 한다. 그래서 이것만 놓고 보면 이 버스 전체와 버스 안 승객이 모두 자신이 갖는 뜻에 따라 움직임을 보게 된다.
그런데 그렇다고 과연 그 버스와 그 버스 승객들을 모두 운전사 자신이라고 볼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런데 평소 자신이 자신으로 보는 부분이 거리의 벽돌과 같다는 것은 사정이 본래 앞의 예에서 운전사와 운전사가 몰고 다니는 버스의 관계와 성격이 같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또 한편 그런 벽돌의 성격을 갖는 것을 자신이 평소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하는 사정은 그 벽돌이 어느 계기를 통해 앞에 비유로 든 운전사와 버스의 관계처럼 되어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뜻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는 사정 때문에 그런 벽돌을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하고 있다는 의미다.
그래서 그런 상황에서는 그 벽돌을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주장하는 입장도 상당히 근거가 있다고 여겨지는 것도 사실인데
바로 이런 사정이 현실에서 본래 자신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을 자꾸 붙들고 자신이라고 여기며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집착을 갖고 대하게 된 사정인 것이다.
그래서 이 부분을 좀 더 자세히 살펴야 한다.
물론 배추밭에 있는 배추가 어느날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신체가 되는 과정도 사정은 이와 마찬가지다. 앞의 벽돌 비유도 이와 관련된다. 결국 그런 사정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비록 이전에는 배추밭에 있는 벽돌이어도 이제 자신의 몸에 들어온 이상 자신으로 보고 그것을 집착해야 한다는 입장은 일반적인 전도망상 편집증상을 일으킨 입장이고
반대로 사정이 그렇기 때문에 그런 상태로 계속 임하면 벽돌을 운전하는 운전사까지 불속으로 들어가는 벽돌과 함께 극심한 고통을 받게 되므로 빨리 자신이 집착하는 것의 정체를 잘 관하고 그 상태에서 벗어나오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바로 경전에서 제시하는 핵심내용이 된다.
태어날 때부터 묶여서 삶을 시작하였기에 그 증상의 위험성을 잘 파악하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계속 그 자세로 임하기 쉽고 또 죽음을 맞이 한 이후에는 또 이번 생과 마찬가지로 한 번 더를 외치게 되기 쉬운데 미리 이런 망집을 제거하고 벗어나는 것이 훨씬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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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왜 이렇게 되는가를 살피면 결국 모든 것을 거꾸로 뒤집힌 상태로 파악하고 현실에 임하기에 사정이 그렇다.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거리의 벽돌이 어떻게 되면 현재 자신이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처럼 되겠는가를 놓고 생각해보면 된다.
현재 자신이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에서 그 부분이 다른 부분과 다른 특성을 갖는다고 보는 내용을 다 뽑아 나열한 다음 그것을 거리에서 보는 벽돌에 부착시키면 그것이 현재 자신의 상황이다.
그래서 그런 것을 붙잡고 임하면 곤란하다.
이 이해를 위해서는 처음 현실에서 어떤 부분을 자신이라고 자신이 보는 가운데 집착을 갖는 과정을 천천히 잘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눈을 뜨면 자신이 자신이라고 여기는 부분 외에도 이것저것 온갖 것이 보이는데 왜 그 가운데 하필이면 그런 부분을 자신이라고 보게 되었는가.
수능엄경에서도 이 사정을 객진의 내용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다. 즉 호텔이 하나 있는데 어떤 것이 호텔에 들른 손님이고 어떤 것이 주인인가. 또 방이 있다면 어떤 것이 티끌이고 어떤 것이 방인가. 이것을 먼저 잘 판단해야 한다.
이것이 뒤바뀌면 결국 뒤바뀐 상태의 결과를 얻는다.
손님을 주인으로 보고 티끌을 방으로 잘못 뒤바꿔 보면 결국 엉뚱한 비극적인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그것이 전도망상분별 편집증 환자에게서는 전 판단 부분과 행위 과정이 모두 그런 상태로 일어난다.
자신이 눈을 떠 보는 것이 무언가 이렇게 물을 때 답하는 내용도 거꾸로 되어 있고 여기서 어떤 부분이 자기 자신인가라고 물어도 그것도 거꾸로 되어 있고 이 가운데 무엇이 좋은가라고 물어도 거꾸로 되어 있고 그것을 어떻게 해야 나타나게 하는가를 물어도 또 거꾸로 되어 있다
그래서 그처럼 망집에 바탕해 현실에 임하면 그 결과가 본래 청정한 니르바나를 놓고 온갖 생사 고통의 현장에서 가지가지 고통을 겪으며 이리저리 각 세계를 묶여 끌려 다니는 상태가 된다.
그래서 이상하게 이런 주체를 옆에서 보면 다른 이들이 신경을 기울이지 않고 초점을 맞추지 않는 이상한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온 신경을 곤두세워서 하루 종일 그것을 가지고 고민하고 결국 고통을 극심하게 받는 상태로 나아간다.
그런데 그 망집환자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지극히 정상적이라고 스스로 이해한다.
그래서 처음 문제를 잘 해결해야 한다.
처음 자신이 눈을 뜨면 자신의 모습 뿐만 아니라 이것 저것 온갖 것을 함께 보게 되는데 왜 하필이면 이상한 부분을 자신이라고 보고 대하게 되었는가.
그것을 잘 이해해야 한다. 경전에서 처음 제시한 내용이 그것이다.
이것이 뒤집혀서 벽돌에 불과한 것을 지금 하루 이틀 계속 볼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을 자신이라고 여기고 현실에 태연하게 임하고 그렇게 나아간다. 이는 알고보면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다.
앞에서 처음 어떤 이가 눈을 떠서 세상의 모습을 보는 가운데 어떻게 거꾸로 뒤집힌 판단을 하는가를 대략 살폈다.
그것이 자신이 스스로 무엇을 자신이라고 보는가에서부터 거꾸로 뒤집한 상태가 된다.
그런데 이것은 처음 자신이 눈을 통해 대하는 내용과 관련된 부분이 이와 같다.
그래서 처음 1 이 그림에서 1 과 같은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게 될 때 이 내용을 가지고 청각정보나 후각정보 미각정보 촉각정보로 얻는 내용을 또 관련시키게 된다.
그리고 이런 부분을 놓고 자신이 일으키는 엉뚱한 관념분별과도 이를 관련시키게 된다.
이 과정이 하나같이 다 거꾸로 뒤집힌 판단이 된다.
그런데 현실에서 어떤 주체가 무엇을 만진다거나 어디론가 움직이고자 한다면 처음 자신이 자신이라고 망상분별을 일으킨 1과 같은 부분이 그렇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게 된다.
원래는 호텔에 임시로 들어 온 손님이나 방에 잠시 머물러 떠도는 먼지나 티끌과 같은 부분 가운데 평소 자신이 자신이라고 보게 되는 그 부분이 그렇게 움직이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이는 그렇지 않겠는가. 그렇다.
그것이 바로 앞에 버스 운전사와 버스의 관계와 같다. 버스 운전사가 수많은 버스가 서 있는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대할 때는 이 버스나 저 버스나 다 사정이 같은데 그런데 어느 순간 자신이 올라타서 그 버스를 운전하게 되면 그 버스가 자신과는 그렇게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된다.
그래서 현실에서 어떤 이가 1 과 같은 부분을 자신이라고 보게 될 때 이 부분이 자신과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다. 관계는 있지만, 그 관계가 자신이 이 생 그 순간 순간에 잠시 걸치고 있는 옷과 같은 관계라거나 앞의 버스 비유를 사용하면 잠시 올라타서 내릴 동안 움직이는 버스와 같은 관계라는 의미다.
현실에서 어떤 이가 처음 태어나 눈을 떠 위와 같은 모습을 전체로 얻게 될 때 이 모든 내용이 그 마음안에 들어온 손님이고 티끌인데 왜 굳이 하필이면 1 과 같은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고 이후 임하게 되었는가 하는 그 사정은 분별을 행하는 정신이 공연히 그 전체부분에서 그런 부분을 붙잡고 임하게 된 것은 아니다.
알고보면 손님이고 티끌인데 이렇게 임하게 된 것은 망상분별인데 그런 망상분별이 발생한 그 기본 사정은 사실은 관념분별을 행하는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이 관념분별 영역에서 현실에서 행하게 되는 망집은 오히려 후발적이다.
즉 생을 시작하는 단계에 미리 근본정신에서 파생된 제 7 식에서 현재 분별을 맡은 의식부분이 행하는 그런 망상분별처럼 처음 별 근거없이 그런 버스를 붙잡고 올라타서 그것이 곧 그런 나라고 애착을 갖고 임하였기에
후발적으로 분화된 1,2,3,4,5,6 식은 그런 상태에서 그렇게 관계를 파악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분별을 행하는 의식에서도 그것이 거꾸로 뒤집힌 내용이지만, 그렇게 거꾸로 뒤집힌 분별을 행하게 된 그 기본 사정은 처음 근본정신과 제 7 식에서부터 그런 내용이 그렇게 형성되었기에 그렇게 후발적으로 망상분별을 연이어 행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과정이 공중 3 회전에 걸친 망집현상이 연이어져 이것이 단단히 매듭이 지어진 상태이기에 현실에서는 이것을 스스로 풀어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누가 자신이 다음 생에 돼지나 송아지로 태어나서 돼지나 소를 부모로 삼아 삶을 살기를 원하겠는가. 그런데 그런 축생이나 아귀 지옥의 세계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것은 그 주체의 뜻과는 관계없이 그가 그 전까지 행한 업에 의해서 그렇게 묶이게 된다.
이 과정에 공중 3 회전에 걸쳐 망집을 일으켜 임하게 되면 지금의 상황처럼 아무리 그 사정을 알아내보려고 해도 잘 알아내지 못할 뿐 아니라 설령 그 사정을 알아도 그것만으로 그 상태에서 곧바로 쉭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만일 현실에서 자신이 행하는 분별이 주인과 손님을 거꾸로 뒤집어 잘못 보기에 이것만이 문제라고 한다면 그런 분별만 올바로 바꾸면 그 이후 그렇게 임하지 않을 수 있을 것처럼 여기기 쉽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이 아니다.
자신이 평소 자신은 무언가. 또는 어느 부분이 진정한 자신이라고 할 것인가 이런 분별을 행하던 행하지 않던간에 그리고 심지어 자신이 어떤 사고를 당하거나 심하게 술을 많이 마셔서 의식을 잃거나 해서 그런 분별을 행하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여전히 호흡도 하고 자신이 평소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을 그렇게 잘 관리하는 정신이 여전히 기능하게 된다.
그래서 현실에서 일정한 부분을 자신이라고 보고 엉뚱하게 관계를 뒤집어서 거꾸로 망상분별을 행하는 것은 사실은 이미 기본적인 망집을 일으킨 바탕에서 이후 후발적으로 일으키는 또 다른 망집인 것이다.
생을 처음 현 상태로 시작하게 만든 공중 3 회전에 걸친 망집을 놓고 이 망집을 살핀다면 현실에서 행하는 망집은 공중 3 회전에 걸쳐 일으킨 망집 가운데 3 번째에서 나타난 감각과 분별을 맡은 정신부분을 바탕으로 이후 후발적으로 각기 일으키는 망집현상이 된다.
그래서 이제 그런 상태에서는 자신의 손으로 그릇을 만지니 촉감이 느껴지고 그리고 그 그릇을 두드리니 소리가 들린다 . 이렇게 보고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그 상태에서는 오히려 대단히 자연스러운 망집현상이라고 보게 된다. 본래는 그런 일이 대단히 엉뚱한 것인데 그 주체에게는 엉뚱하지 않다는 의미다.
자신의 입장에서는 엉뚱하지 않은 이 관계가 엉뚱한 관계지음이라는 것을 이해하려면 자신과는 감각이나 분별 체계가 서로 확연히 다른 생명들을 놓고 처음 자신이 행한 분별을 다시 음미해본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자신과 비슷하지만, 눈이 먼 장님이나 귀가 들리지 않는 장애를 겪는 다른 주체를 놓고 생각하면 조금 이해가 쉬울 수 있다.
그냥 물인데 공수병 걸린 개는 왜 물을 보고 두려워하는가. 그런 현상을 통해 자신이 평소 물을 물로 보고 대하는 그 현상이 또 엉뚱한 것임을 이해하게 하는 내용도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것이 하나같이 엉뚱한 망상분별임을 잘 이해하면 그 바탕에서 계속해서 이런 형태로 자신의 뜻과 달리 생사고통을 받게 하는 업의 장애를 제거할 수 있는 수행을 행하여 생사묶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공중 3 회전에 걸쳐 각 정신을 파생시키는 과정을 다음 그림을 놓고 대강 살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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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눈을 떠서 무언가를 본다고 할 때 그 가운데에서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이 위 그림에서는 a! 와 같은 ◇ 부분으로 표시되어 있다.
현실 한 단면을 놓고 보면 이 ◇ 부분과 같은 벽돌을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을 수 있는데 그러나 장시간을 놓고 살피면 그것은 사실 엉뚱하다.
이미 100m 를 뛰어 오는 영희의 모습이 매 순간 α,β,γ,δ,ε,ζ,η,θ,ι,κ,λ,μ,ν,ξ 이런 형태로 그 크기나 형태가 달라진다고 제시했는데 한 주체가 태어나 갓난아이에서 초등학생 그리고 그 이후 살아가는 전 과정을 놓고 살피면 한 순간에 자신이라고 보는 ◇ 부분도 사정이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눈을 떠서 보는 내용 가운데 어떤 부분이 늘 있고 어떤 부분이 들고 나는 손님이고 티끌인가를 놓고 판단하면 한 단면에서 ◇ 부분과 같은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는 것은 거꾸로 뒤집힌 판단이 된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 것은 위 그림에서 1! 라고 표시한 눈과 관련된 정신에 그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또 그것을 놓고 그런 분별을 행하는 6@와 같은 분별을 행하는 정신 영역에 그 문제가 있다기 보다는
생을 출발하는 단계에서부터 그런 망상분별을 일으켜 생을 출발하였던 그 이전 단계의 정신 영역에 그 원인이 오히려 있다.
그 사정을 위 그림에서 8 과 7 부분이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비록 하나의 근본정신에서 이들 각 정신이 매 생매다 파생 분화하게 되지만, 여하튼 1! 로 표시한 정신이 파악하는 내용과 2,3,4,5,6, 등 각 정신이 파악한 내용은 서로 엉뚱한 것이 된다.
여기서는 색깔로 그 내용을 얻고 여기서는 소리로 그 내용을 얻는데 왜 그 가운데 어떤 내용을 붙잡고 그것이 실다운 내용이라고 망집을 일으키고 그것을 붙잡고 늘어지는가. 이것이 문제다.
이것이 어느 계기를 통해 시정이 되지 않으면 그런 상태로 계속해서 매 생마다 그런 형태로 임하게 되고 그래서 3 악도에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알고보면 그런 내용이나 그런 내용을 얻게 하는 정신이나 본 바탕이 모두 청정한 니르바나의 바탕에 있다고 경전에서 제시한다.
이것이 생사현실이 곧 청정한 니르바나라는 생사 즉 열반이란 표현이 의미하는 바다.
그런데 같은 내용을 놓고 이 관계를 그렇게 관하지 못하고 거꾸로 각 정신에 임시적으로 들어와 맺히는 그런 내용을 엉뚱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붙잡고 임하면 이것이 거꾸로 뒤집혀서 본래 청정한 니르바나인 내용을 매 순간 극심한 생사고통을 받거나 그런 상태로 묶여 끌려 들어가는 업을 행하는 내용으로 대하고 그렇게 생사고통을 겪어나가게 된다.
그리고 생사현실에서 수행을 통해 해결해야 할 문제는 바로 이 부분이다.
그 안에 티끌 손님이 들거나 나거나 관계없이 늘 일정한 근본정신을 기준으로 놓고 망집을 제거하고 이를 관하면 그런 생사고통을 얻을 수 없는데
그러나 이상하게 각 정신마다 엉뚱하게 매 순간 얻어내는 α,β,γ,δ,ε,ζ,η,θ,ι,κ,λ,μ,ν,ξ 와 같은 내용을 놓고 그 가운데 일부를 자신이라고 여기거나 영희나 철수나 꽃이나 바위라고 여기면서 망집을 일으켜서 임하게 되면 이것이 거꾸로 뒤집힌 전도망상분별로서 이후 그런 바탕에서 생사고통을 생생하고 실답게 받아나가게 되는 바탕이 된다.
그러니 이렇게 현실에 임하게 된 상태에서 어떻게 임해야 이 상태에서 벗어나는가가 수행의 과제다.
그것이 경전에 제시되는 다양한 수행항목의 내용인데 그 수행도 반야바라밀다에 입각해서 무소득을 방편으로 집착을 제거하고 올바로 잘 행해야 된다는 내용이다.
현실에 임해 매 순간 각 주체가 대하는 내용을 놓고 극과 극으로 엉뚱하게 매 경우 판단하고 선택하며 행하는 가운데 결과적으로 극과 극으로 다른 상태에 놓이게 된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단적으로 망집을 제거하고 수행에 임하는 입장은 생사현실을 놓고 그것을 생사고통을 떠난 청정한 니르바나[열반]으로 관하고 대하는데 반해
망집에 바탕해서 엉뚱한 것을 붙잡고 업을 행하는 입장은 거꾸로 청정한 니르바나[열반]를 놓고 그것을 곧 극심한 생사고통으로 여기고 대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 내용이 결국 3계화택이란 표현과 관련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망집에 바탕해 3 계 6 도를 헤매도는 중생의 입장은 그 3 계가 하나같이 불타는 집과 사정이 마찬가지다.
그리고 현실을 보면 이 현실 각 부분에서 그 주체가 그런 망집에 바탕해 마치 불타는 집에 있는 것처럼 번뇌로 고통을 받는 상태다.
탐욕의 불, 분노의 불, 어리석음의 불이 한 주체를 묶어서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이 사역 저 사역을 힘들게 시키는데 정작 전도망상을 일으킨 그 주체는 그런 마음안 내용을 자신의 본질로 여기고 그 매 순간을 그렇게 임한다.
그래서 비유를 한다면 올라타지 않아도 되고 굳이 운전하지도 않아도 되는 엉뚱한 불 타는 버스에 올라타서 그 안의 엉뚱한 화물과 승객을 다 자신으로 여기고 그렇게 임하여 불더미로 들어가는 상황이 된다.
또 투자로 비유하면 원래 가만히 있어도 황금인 자산을 곧바로 썩어 없어질 우유에 투자를 하고 그 우유를 마냥 붙들고 임하는 상황과 사정이 비슷하다.
그런데 그 당사자가 그렇게 현실에 임하는 것은 그 입장에서는 그것이 현재 자신으로 보는 자신에게 가장 좋은 내용을 가져다 준다고 보기에 또 그렇게 행한다.
그래서 이 상황을 옆에서 보면 마치 나방이 불에 가까이 가 타죽는 상황과 같은데 그런데 이상하게 나방은 웬일인지 자꾸 그 불에 다가가서 타 죽는다.
나방에게 왜 그러냐고 물어본적은 없지만, 그렇게 행하는 사정이 현실에 임하는 각 주체의 상황과 마찬가지라고 본다.
그리고 여름철에 생선을 파는 곳 등에서는 파리지옥과 같은 끈끈이를 붙여 놓는 경우도 있는데 여기에서도 비슷한 풍경을 보게 된다.
파리가 한번 붙으면 다시는 날라가지 못하고 그 끈끈이판에 이미 새까맣게 붙어있는 상황인데
그러나 파리는 또 계속 날라 붙는다.
그런데 이것이 현실 상황이다.
옆에서 보면 그 주체가 원하는 것을 그 방안으로는 차지하지도 못하고 또 설령 차지한다고 해도 자신의 것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 주체는 죽는 순간까지 그렇게 임하고 그렇게 죽어가고 그렇게 바삐 생사고통을 심하게 받는 3 악도로 또 진입해 들어간다.
자신이 망집에 바탕해서 업을 행하면 왜 그렇게 묶이는가는 자신을 기준으로 놓고 보지 말고
자신이 좋아하는대로 마음껏 행하는 한마리 황소를 옆에서 보면서 그렇게 황소 입장에서 자신이 좋은대로 마구 행하면 그 황소를 어떻게 자신이 대하게 되는가를 놓고 이 관계를 이해하면 쉽다.
그것이 한 주체가 하루를 보내는 내용을 살피면 그 주체의 무량겁 전의 내용과 무량겁 후의 내용을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다고 경전에서 부처님이 제시하게 되는 사정이기도 하다.
왜 그런 망집을 일으켜 현실에서 엉뚱하게 임하는가. 또 그렇게 임하면 그 이후 이후는 어떻게 될 것인가는 그 주체는 자신 문제는 잘 보지 못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도 다른 주체의 사정은 잘 관하기도 하는 것이다.
상황을 판단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자신의 뜻대로 날뛰려는 황소도 그렇고 자신의 음식에 좋다고 날라드는 파리도 그렇고 자신은 아픈데 자꾸 찾아와서 물어대는 모기도 그렇고 그렇게 쉽게 알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서로 간의 업의 장애인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행했듯 자신도 그런 과보를 돌려 받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자신만 고집하면 늘 자신은 좋은 역할을 맡고 자신은 좋아하지 않은 역할을 맡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어떤 주체나 공통한 희망사항이지만, 누구나 그렇게 임하기에 또 그렇게 안 된다는 것이 업의 장애현상이다.
어떤 물고기가 세상에 칼로 자신의 몸을 잘려지기를 원해서 식탁에 올라오겠는가. 마찬가지로 자신이 무엇이 좋다고 축생과 아귀 지옥세계에 자원해서 태어나겠는가. 그렇지는 않은데 그렇게 된다는 의미다.
『대반야바라밀다경』 난문공덕품에서도
그 사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본래 본 바탕에서는 색(色)이 더하거나[증增] 덜한다[감減]고 하는 일이 없다. 그런데 그렇게 보지 않고 현실에서 각 주체가 임하기에 엉뚱하게 임하게 된다.
그 근본 망집을 잘 해결하고 공덕을 쌓으면 그 상태가 달라지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엉뚱하게 관하고 매 경우 엉뚱한 것에 초점을 맞추고 엉뚱한 일을 행해 나가면서 3 악도에 들어가 묶이는 상태에서 벗어나기 힘들게 된다.
자신이 평소 보는 파리나 모기 또는 식탁에 오르는 물고기나 축생이 곧 자신의 상태이기도 하다. 다르지 않은 것이다. 본 바탕도 차이가 날 일이 없는 가운데 망집을 일으켜 자신 입장에서 좋다고 보는 것을 붙잡고 매 순간 먹고 싸고 놀고 하고 쉬고 자는 활동에 집착하면서 행하는 업의 성격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그로 인해 처하는 상태도 별 도리가 없게 된다.
나이가 점점 들어갈수록 소일거리가 필요하다는 말을 많이 하게 되는데 그것은 마땅히 소일거리가 없이 하루를 보내게 되면 어디를 그가 다니던 마치 감옥에 갇힌 죄수처럼 답답하고 고통스럽게 하루를 보내게 되기 쉽기 때문이다.
또 반대로 하루에 할 일은 많은데 그것이 자신이 스스로 즐거워하고 보람을 느끼는 그런 일이 아니면 그것도 문제다. 그것은 또 마치 노예처럼 자신이 원하지 않는데도 어쩔 수 없이 그런 일을 해야만 하는 상태가 되어서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본래 수행자의 전문 수행덕목은 정려나 반야 이런 수행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나 이런 수행을 즐겁게 잘 하려면 먼저 계, 정, 혜 3 학 가운데 계에 해당하는 수행덕목이 원만히 구족되지 않으면 곤란하다. 그런 상태에서는 아무리 정려나 반야 수행을 잘 해보려고 해도 도무지 그럴 틈을 얻지 못하게 되고 마음도 여유를 갖지 못하게 된다.
왜냐하면 계의 성취가 원만하지 못하면 그 주체부터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로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생사고통과 번뇌의 묶임에서 한 순간도 자유롭지 못하고 편하지 못하게 되므로 쉼없이 바쁘게 생사고통과 번뇌에 묶여 임해야 하므로 이론처럼 곧바로 정려나 반야 수행을 임할 수 없게 된다.
현실을 보면 그래서 대부분 쉼없이 바쁘게 생활하고 있기에 수행 자체를 행하거나 그런 내용을 살필 여유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쉼없이 게임을 해야 하고 또 진학을 위해서 공부를 한다고 하고 또 설령 진학을 하면 또 그 이후 과정이 그렇고 그리고 직장을 갖거나 결혼을 하거나 하면 또 그 이후 과정이 그래서 뻔하게 예측되는 삶의 과정에서 한시도 자유롭거나 편한 상태를 찾아보기 힘들다.
이것이 모두 기본적으로 최소한의 생존과 생계를 해결하고 또 생계가 해결되면 좀더 안정적이고 평안한 생계를 해결하려고 임하고 그리고 또 자신의 뜻을 뜻대로 성취하여 즐거운 맛을 얻어내려고 하는 소원과 모두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 있다.
그것을 한마디로 복덕이라고 표현하게 되는데 이 복덕이 구족이 안 된 상태에서는 앞과 같은 희망이 자신을 묶어 풀어주지 않기 때문에 한 순간도 그로 인한 번뇌에 묶여 사역을 당하는 상태에서 자유롭게 되지 못한다.
그런데 알고보면 사실은 그렇지 않다 . 생계가 문제되고 고통스럽게 삶을 보내야 한다고 보는 일반 상황이 사실은 수행자가 수행을 아주 열심히 정진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인데 다만 망상분별과 집착 때문에 그 번뇌에 묶여서 사역을 당하고 있는 것 뿐이고 그런 망상분별과 집착만 제거하면 어느 상태에서던지 생사고통을 벗어나는 수행이 가능하다.
또 반대로 말하면 그런 망집을 제거하지 못하면 그 주체가 아무리 세상의 황제가 되고 세상의 온갖 재화를 다 갖게 되어도 그 사정이 처음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수행자가 처음 계를 잘 성취해서 이런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고 그리고 복덕을 성취하는 것이 수행의 가장 기본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이후의 수행이 원만히 진행될 도리가 없다.
사실 수행자는 계의 항목에 들어 있는 보시, 정계, 안인, 정진 이런 수행항목을 쉼없이 해야 하는데 하루 24 시간 이런 항목을 놓고 연구도 하고 노력을 무량하게 해나가야 하는 입장이기에 소일거리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알고보면 이렇게 현실에서 수행에 임할 수 있는 그 자체가 삶의 복덕이다.
일반적으로는 이런 수행을 해야 그로 인해 업의 장애가 해소되고 또 복덕을 쌓아나가게 된다고 그 관계를 이해하지만,
그러나 현실에서 이런 수행을 하고 임할 수 있는 자체가 이미 복덕이 있는 상태다.
왜냐하면 복덕이 이미 없는 상태는 그런 수행을 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파악하지도 못하고 또 그런 수행 자체를 할 바탕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줍기만 하면 복을 얻는 수표가 거리에 날려 다닌다고 할 때 현실 상황이 바로 그런 상태임을 알고 매 현실 상황에서 그것을 그렇게 알아 보고 줍게 된다면 그 자체가 복이 있어서 그렇다고 보듯, 앞에 제시한 수행은 그것을 알고 그렇게 행하기만 하면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고 또 복덕을 쌓게 되는 내용들인데 그러나 현실에서 그런 내용 자체를 잘 파악하고 행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그래서 유가사지론등에서는 이런 수행을 하는 것 자체가 복덕이 있는 상태라고 제시하고 있다.
여하튼 수행자는 점점 수행을 해나갈수록 계, 정, 혜 3 학 가운데 정려나 반야 수행에 비중을 많이 두어야 한다고 보는데 아무리 그렇더라도 사이사이 복덕을 쌓은 소일거리를 만들어 쉼없이 해야 한다.
그런데 또 알고보면 겸행6도라는 수행방안이 있어서 하나의 수행에 온갖 수행을 다 겹쳐서 함께 행하는 방안이 제시된다. 그래서 소일거리를 통해서 온갖 수행을 다 함께 행하는 상태가 사실은 바람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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