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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2-08-05_미사색부화혜오분율_016 본문

과거조각글/불기2562(2018)

불기2562-08-05_미사색부화혜오분율_016

선현 2018. 8. 5. 01:23



®



미사색부화혜오분율
K0895
T1421

제16권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 [pt op tr] 미사색부화혜오분율_K0895_T1421 핵심요약



♣0895-016♧

미사색부화혜오분율(彌沙塞部和醯五分律) 제16권

3. 제삼분(第三分) ②

불타집(佛陁什) 축도생(竺道生) 등 공역

7) 수계법(受戒法) ②



◆vcfn1443

◈Lab value 불기2562/08/05/일/13:19




○ [pt op tr]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Michel Sardou - Lelque Sommes-Nous.lrc

♥ 잡담 ♥오락가락하는세상


어제는 광명동굴이란 곳을 다녀왔다.
과거에 금 은 구리를 캐는 곳이었는데
지금은 관광용 동굴이 되어서 하루에 3 만명 정도가 들르고
작년에만 56 억 수입을 올렸다고 전한다.

그런데 이곳은 아픈 과거가 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 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럽게 일하면서 
금은 구리 등을 수탈당한 곳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곳 지명을 보다보니 가학로이기도 하고 가학동이기도 하다. 
과거 광산 이름도 가학광산이었다고 한다. 

가학이란 표현으로 많이 나타내는 의미는 
몹시 심하게 학대하거나[苛虐] 

괴롭힌다[加虐]는 의미여서
가학광산에서 그런 의미를 연상해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한자로 보면 그것은 아니고 가학(駕鶴)광산이어서
멍에와 학이란 의미인데 멍에란 부분이 조금 괴로움과 관련되는 듯하다. 


여하튼 과거 그 광산에서 얼마나 많은 금을 수탈해갔는지 
정확히 파악은 안 되는데 
독립후 광산을 운영하면서 채굴한 양을 바탕으로 대강 추산하면 
1 년에 5 KG 정도 되는 금과 기타 은 구리를 채굴했을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최근에 그곳이 관광용 동굴로 바뀌어서 
많은 관광객이 방문해 수입을 또 올리고 있다고 하니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한다. 

그래서 부정적 의미의 가학이란 단어를 
새로 의미를 부여해보면
'공부를 더한다'. 
이런 의미를 새로 생각해보게 된다. 

공부를 조금 더하면, 굳이 고통스럽게 임하지 않아도 
서로 좋음을 증가시킬 수 있다 이런 의미다. 

현재는 더 이상 광물을 그곳에서 캐지 않고 
저장공간으로 지금까지 사용되던 그곳을 개발하여 
관광용 동굴로 사용하고 있는데 
지금 상황에서 그곳을 방문한 관광객이 고통스러운가. 
그리고 그런 방문객이 방문하도록 설비를 하고
비용을 거두어 수입을 올리는 지자체 단체가 
고통스러운가. 
전혀 수고와 고통이 없다고 하지는 않겠지만,
그러나 기본적으로 즐거움과 이익이 바탕이 되어
그런 활동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재료는 같다고 하더라도 
그에 임하는 이들의 마음 자세가 어떤가에 따라서 
그 결과가 다르다고 보게 된다. 
 



mus0fl--Guy Mardel - N'AVOUE JAMAIS.lrc

관광을 다니다 보면 조각글이 밀리게 된다. 

그래서 경전만 정리해 살피고 올리는 작업만 간신히 마치고 
끝내게 되기 쉬운데 
이전 조각글에는 사진만 대강 붙이고 

해당 경전 내용이 범어 글자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 부분이기에 
이전에 범어 글자에 대해 살피는 내용이 나오는 
부분을 링크해 붙이고 마쳤다. 

대반야바라밀다경-9999.TXT

http://buddhism007.tistory.com/226



오늘 살피는 미사색부화혜오분율은 
내용이 비교적 쉬어서 그냥 읽으면 쉽게 이해되는 부분이어서 
특별히 더 추가할 내용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런데 범어 글자 및 실담자에 대해서
전체를 한번에 다 외우기는 힘들다고 보고 
종전에 
참 예쁘지 삼삼하지 아라바자나 나자바라아 
이런 수행자 수행공식을 제시한 적이 있기에 
이와 관련된 아라바자나 이 글자만 참고로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아라바자나는 
한글로는 무언가를 알아보았다는 의미를 연상시킨다. 
나자바라아는 이 아라바자나를 거꾸로 한 것도 되는데
아라바자나 다라니가 도출된 사정을 제시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한글로는 나를 잡아라 이런 의미를 연상시킨다. 
이렇게 연상이 되면 좀 쉽게 기억할 수 있다. 


아라바자나 다라니 한자표기는 다음과 같다. 

阿囉跛左曩

언덕아 소리섞일라 절음발이파 왼쪽좌 앞서낭 


그런데 이 한자도 제각각 뜻이 위와 같이 있지만, 
이 한자는 뜻글자인 한자에서 
산스크리뜨 글자의 소리를 되도록 비슷하게 적기 위해
동원된 일종의 발음표기 수단이다. 
그래서 그 뜻에 너무 매일 필요는 없다. 

그래서 다라니 아라바자나(阿囉跛左曩)는 

결국 अ र प च   ( अरप ) a ra pa ca na


라는 범어글자의 소리를
한자로 되도록 비슷하게 나타내기 위해 동원한 글자들이라는 의미다.
그러니 뜻으로 번역하면 안 되고 되도록 이 글자로
범어 비슷하게 발음하는 것을 목표로 하면 된다고 본다.  

다라니 한자를 기초로 한글로 표시한 글자도 
그런 취지로 이해하면 된다. 
다라니 글자나 단어에서 뜻을 직접 찾으려 하면 곤란하고 
소리를 그대로 읽고
그에는 본래 뜻이 없다고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아라바자나를 오늘날 범어 발음으로 정확히 하자면 
아라빠짜나 이런 소리에 비슷하다고 한다. 

그런데 5 자 진언을 제시하는 문수보살님에 의하면 
이 각 글자에 다음과 같은 뜻을 담았다고 제시한다. 


그리고 이 내용과 이 다라니가
모든 경전을 그 안에 담고 있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다음 내용이다. 

아 阿  ādyanutpāda 본불생(本不生) => 무생(無生)

라 囉 rajas  진염(塵染; 티끌과 번뇌오염)   =>  청정무염이진구(淸淨無染離塵垢)

바(빠) 跛 paramārtha 제일의제 => 무제일의제제법평등(無第一義諦諸法平等)

자(짜)  左 caryā 행  => 제법무유제행(諸法無有諸行)

나 曩 nāma 명  => 제법무유성상 설언문자개불가득(諸法無有性相 說言文字皆不可得)


K1350V37P0175a17L; 

阿者 是無生義

囉者 淸淨無染離塵垢義

跛者 亦無第一義諦諸法平等義

左者 諸法無有諸行義

曩者 諸法無有性相說言文字皆不可得義

以曩 字無有性相故 左字無有諸行.... 

..


출처 금강정초승삼계경설문수오자진언승상_K1350_T1172



범어를 나타내는 데 있어서
불교에서 사용하는 실담자가 있다. 
이는 결국 산스끄리뜨 데바나가리 문자를 의미하지만, 
글자 형태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Devanagari (데바나가리)[편집]

U+ 0 1 2 3 4 5 6 7 8 9 A B C D E F

0900

0910

0920

0930 ि

0940

0950

0960

0970 ॿ











अ र प  





mus0fl--Alexis HK - Le dernier Présent.lrc


결국 소리 아자 하나를 적으려고 하다보니 
동원되는 형태가 대단히 많음을 보게 된다. 




아 => a  => 한자 阿(언덕아)


  



이런 여러 형태를 함께 관련시켜야 한다. 

아라바자나에서 아만 살피면 서운하다고 보고 
라자까지 살피면 다음과 같다. 


라 => ra => 囉(소리섞일라)



 다라니 한자표기는 다음과 같다. 

阿囉跛左曩

언덕아 소리섞일라 절음발이파 왼쪽좌 앞서낭 









이렇게 '아라' 를 적을 수 있으면 
잘 아는 것은 아닌데 
안다고 표명하는 것처럼 된다. 



그런데 문수보살님이 제시하는 5 자 진언에서는 

또 이 각 글자에 다음과 같은 뜻이 담겨졌다고 하니
그 의미도 같이 외어야 한다. 

아 阿  ādyanutpāda [아아디안우뜨빠아다] 본불생(本不生) => 무생(無生)

라 囉 rajas  [라자스] 진염(塵染; 티끌과 번뇌오염)   =>  청정무염이진구(淸淨無染離塵垢)


이런 내용이다. 

처음 아란 글자에 본불생이라는 뜻이 담겼다고 해서 
아자본불생(阿字本不生)이라고도 표현하는데 
이것은 오늘날 아이들이 알파벳을 배울 때 과정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영어 a 라는 알파벳을 하나 배울 때 
이 a 는 apple 의 에이다. 이런 식으로 배우는 것이다. 

즉 a 란 글자를 처음 알려줄 때 
이것은 apple 이란 단어를 만들 때 들어가는 글자로서
에이라고 소리낸다. 이런 식으로 알려주고 또 배우게 되는 것이다. 
a 가 들어가는 단어는 대단히 많은데 
이 글자를 가르쳐 주는 이가 그 가운데 
가장 배우기 쉽다거나 많이 사용한다고 보는 단어를 하나 뽑아서 
그 단어와 관련시켜 그 글자와 소리를 알려주고자 하는 의미다.

범어도 마찬가지다. 


란 글자가 들어가는 단어가 대단히 많은데 
그 가운데 불교를 배우는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나 핵심 의미가 담긴 단어가 무언가. 
이것을 하나 찾아서 
그 글자는 그 단어를 대표한다고 제시하는 의미다. 

부처님 가르침을 제시하는 데 동원되는 단어가 
수없이 많다고 보지만, 
그런 측면에서 찾다보면 본래 생멸함이 없다라는 
본 불생이란 단어가 가장 핵심이 된다고 보고 
이를 뽑아서 

는 본불생의 아다 이렇게 제시하게 된다는 의미다. 

아라바자나의 나머지 글자들도 다 마찬가지다. 

그런데 알고보면 꼭 아가 이것만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본래 다라니글자는 소리를 나타내고 
아무런 뜻도 나타내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그래서 다라니 글자는 뜻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은 아라바자나 다라니에서 '나'란 글자가 
나타내고자 하는 내용과 관계된다. 

즉, 본래 언설 문자는 얻을 수 없고 
성품과 모습도 얻을 수 없다는 내용과 관련되는 것이다. 

그런데 또 사정이 그렇기 때문에 
다라니는 그 안에 무량한 뜻을 다 담게 된다고 제시하게 된다. 

한 글자나 소리가 본래 뜻이 있다면 
그래서 그 글자는 어떤 특정한 뜻만 나타내도록 결정되어 있다면 
그렇게 되지 못하고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하겠지만, 
사정이 그렇지 않기에 
무량한 뜻을 그 안에 담아 넣을 수 있고 
또 그래서 수행자가 수많은 내용을 배우거나 익힌 다음 
그것을 모두 잘 기억해서 보관하고 지니고 다니는데 [ 총지 ] 
이 다라니를 활용하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결국 다라니 글자나 소리에 본래 그런 뜻은 없지만,
아라바자나 다라니에서 아자는 

'본래 생멸을 얻을 수 없다'. 
이런 의미를 나타낸다고 하는 것은
또 이런 측면이다. 


그런데 어떤 아이가 알파벳을 몰라서 
처음 a 를 배우려는 입장에 있다면 
a, 도 모르는 상태인데 
apple 을 알고 
apple 이 사과라는 것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고 
또 그것을 '애플'이라고 읽는다는 것도 알고 
그 글자에서 a 는 '에이'라고 읽는다는 것을 알겠는가. 

처음 a 를 몰라서 이것을 에이라고 읽고 그렇게 쓴다는 것을 
배우기도 힘든데 
알지도 못하는 apple 을 떡 제시하면서
여기에 사용하는 a 라고 알려주면 쉽게 배울 수 있겠는가. 

사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쉽게 a 를 알려준다고 제시하는 내용들이
사실은 더 부담이 된다. 
이것은 이미 영어를 아주 잘 말하고 사용하는 상태에서 
단지 글자를 몰라 배우려는 모국어 환경에서만 
적절한 내용이다. 

영어에 관련해서 글자도 모르고
영어로 말도 못하는 상태라면 
반대로 그 상대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내용을 바탕으로 
a 란 글자를 쉽게 이해하고 외울 수 있는 방편을 찾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고 보게 된다. 


범어 글자를 처음 대해서 
익히려는 입장도 마찬가지다. 

지금 a 자 하나를 잘 모르는데 
ādyanutpāda [아아디안우뜨빠아다] 본불생(本不生) => 무생(無生)
이런 내용을 먼저 제시하고 

그리고 그 a 자의 데와나가리 형태나 실담자형태

अ 

를 익혀보자 
이러면 머리에 경기가 일어나기 쉬운 것이다. 


이럴 때는 방안을 달리해야 한다고 본다. 

한국인 입장에서는 
자신입장에서 비교적 형태가 분명하면서도 
아로 가장 많이 생각나는 것이 무언가 
이것을 먼저 떠올리는 것이 낫다. 

생각해보면 아자로 생각나는 한국인입장에서도 무량하다고 할 수 있다. 

아플 때도 아라고 하고 
무언가 새삼 이해가 될 때도 아라고 하고 
잊어 버린 것이 갑자기 생각나거나 
무슨 좋은 생각이 갑자기 떠오를 때도 아라고 하고 
아쉬울 때도 아라고 하고 
찾아보면 굉장히 많다. 

그런데 아쉽게 위 내용들은 형체가 잘 파악이 안 된다. 
그러면 글자 연상에 큰 도움이 안 될 수 있다. 
그래서 또 찾다보면 
어린아이 아이 아가의 아를 생각할 수 있다고 하자 .
꼭 이것만 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아는 아이의 아다. 
이렇게 연상한다는 의미다. 

그 다음 이 아이를 놓고 
새로 배워야 할 범어 글자 형태나 기타 등등을 모두 
이와 관련시켜서 결합시키는 노력을 해보는 것이다. 

먼저 다믐 글자 형태에서 아이가 보이는가? 그렇지는 않다. 
अ 



그런데 이 글자를 처음 배워야 한다면 
그렇게 아로 자신이 바로 잘 연상되는 형태가 뚜렷한 내용을 
하나 떠올리고 
그 내용과 이 글자를 어떻하던지 관련시켜 기억하는 것이 
낫다는 의미다. 

글자를 보면 아라비아 숫자 3 이 보이기도 하고 
실담자에서는 123 도 보이기도 하는데 
여하튼 아이 1 이 숫자 3 을 처음 붙잡고 배우는 형태를 그린 것이 
범어 아자다. 이런 식으로 연상이 잘 되게 기억하면서 
반복해 그려보면 된다는 의미다. 

그 다음 
이런 '아'가 들어간 범어 단어가 대단히 많겠지만,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단어는 
ādyanutpāda [아아디안우뜨빠아다] 본불생(本不生) => 무생(無生)
이다 이런 것은 한국인 입장에서는 
또 앞 내용을 가지고 새로 추가해 넣어야 할 내용이 된다. 


라도 이와 마찬가지다. 

라는 
라디오나 라면 이런 등등 여러단어가 떠오르는데 
이 가운데 하나를 붙잡고 
범어 글자 형태를 연상해서 기억하고 
나중에 
이 글자로 나타내는 여러 단어 가운데 
라 囉 rajas  진염(塵染; 티끌과 번뇌오염)   =>  청정무염이진구(淸淨無染離塵垢)
이런 내용까지 결합시켜 외우면 된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렇게 단어 뜻은 알았다고 해도 
현실에서 생겨나고 멸하는 것을 매 순간 대하고 보는 것 같고
그래서 삶에는 생사가 뚜렷하게 있고
더욱이 그런 생사현실에는 온갖 더러움과 고통과 악이 범람하고 있고 
그것이 매순간 문제된다고 보는데

경전에서는 수없이 
이런 생사현실에서 정작 생멸을 얻을 수 없다는 내용을 제시하고
또 본래 청정한 니르바나라고 제시하고 
이것이 모든 경전의 핵심이 된다고
문수보살님이 제시하는가.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결국 수행자가 그 사정을 이해하여 공부하거나 
그 내용을 실천하는 수행 문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결국 
이론상 왜 현실을 놓고
그것이 불생불멸하고 청정하다고 하게 되는가. 
이것을 먼저 이해하여 깨닫고 

두번째로 그런 바탕에서 
생사현실에서는 어떻게 임해야 하는가를 
잘 이해하고 
이 내용을 생사현실에서 실천해나가야 함을 의미한다. 


즉, 
현실에서는 눈을 뜨면 그 전까지 보지 못하던 것도 
생생하게 보게 되고 
그러다가 눈을 감으면 그 모습이 사라지고 

그리고 그렇게 보는 자신이나 
다른 영희나 철수도 여기에서 태어나 이런 활동을 열심히 하다가 
좀 있으면 저기서 병에 걸리고 저기서 저렇게 고통을 받다 죽고 
그러고 나면 이제 그런 영희나 철수를 보지 못하게 된다고 여기고 
그래서 생사가 있다고 여기는데 

왜 이런 생사현실에서 그런 것을 얻을 수 없다고 하는가.
그리고 그렇다면 이런 생사현실에서 
수행자는 어떻게 임해야 한다는 것인가. 
이것을 잘 이해하고 실천해나가야 한다는 의미다. 


결론적으로 간단히 제시하면 
세상에서는 망집에 바탕해서 
그런 내용이 있다고 여기고 오락가락하지만, 

그것은 실상도 아니고 
실재 진여에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고 
또한 그런 감각현실에서조차도
자신이 그에 대해 생각하는 그런 내용 자체를 얻을 수 없다. 

사정이 그렇기에 
그런 내용을 생생하게 매순간 대하지만, 
그에 대해 집착을 갖지 않고 

우선 기존에 그에 대해 행하던 태도나 반응 자세를 중지하고 
그와는 반대로 수행방안으로 제시하는 내용을 실천하여 
그전까지 그렇게 행해서 쌓아 놓은 업의 장애를 해소해서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고

생사현실에서 극히 고통을 겪게 되는 상황에서는 
본래 생멸을 얻을 수 없다는 그 측면을 붙잡아서 
모든 번뇌와 고통을 벗어나고 

또 한편 그런 내용이 있다고 보는 생사현실의 측면에서는 
그런 입장에서 생사고통을 겪는 중생을 제도해
생사의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자신이 그처럼 집착하지 않고 임하는 가운데 

자신은 또 그 생사현실에서 
일반적으로 번뇌와 집착에 바탕해서 
생사에 묶이는 형태로 행하는 행위는 미리 끊는 한편 
반대로 수행을 집착없이 잘 행해나감으로써 
그 생사현실에서도 
아무런 번뇌를 일으키지 않게 되는 무루복덕을 
무한히 쌓고 
자신부터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난 바탕에서 
이후 다른 중생을 제도하는 수행을 해나감으로써 
생사현실에서도 역시 좋고 좋은 상태를 성취해나가면 
되는 것이다. 

결국 이는 본  바탕인 실상의 측면과 
망집에 바탕해서 겪는 생사현실의 측면 모두에서 
좋고 좋은 내용을 취해 사용하는 방안이 되는 것이다. 

이 두 측면을 둘 다 빠뜨리고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거나 
하나라도 빠뜨리고 제대도 사용하지 못하거나 
또는 현실에서 이 두 측면의 내용을 모두 정반대로 사용하면 

본 바탕은 본래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는데도 
이상하게 그 주체는 생사현실 곳곳의 매 현장에서 
비명을 지르고 고통을 당하는 상태로 
임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수행이 해결해야 할 문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는 본 바탕의 진여실재가 아니고
바로 생사현실 안의 이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이 부분을 잘 이해하고 
현실에서 이 내용을 잘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생사현실에서 
어떤 이가 본 바탕이 공하여 생멸이 없고 청정하다고 선언한다고 해서 
비로소 본 바탕이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선언하고 표현을 하던 
그렇지 않다고 하던 
아니면 침묵을 지키던 

또는 무소득을 방편으로 수행을 행하던 
또는 수행을 하더라도 그 수행으로 무언가 얻을 것이 있다고 여기면서 행하던 
아니면 또는 수행을 전혀 하지 않고 이렇게 행하던 저렇게 아무렇게 행하던 
또는 이전헤 행하던 대로 행하거나 아니면 오히려 이전보다 더 극심하게 악을 행하던 
또는 이런저런 아무런 행위를 하지 않건 
본 바탕에서는 아무런 차별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본 바탕의 측면에서는
수행이나 성불의 필요성 자체가 요구되지도 않는 것이다. 

그런데 본 바탕은 그런데도  
생사현실에서는 각 주체가 온갖 생사고통을 겪게 되므로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이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서 
본 바탕이 그렇다는 것을 그 '생사현실 안에서' 그처럼 잘 관하고 
또 그 내용도 잘 표현해 선언하고 

또 그에 바탕해 
생사현실에서 그런 내용을 잘 관하여 집착을 제거한 바탕에서 
수행을 잘 해나가야 하는데 
사정이 그렇기 때문에 
수행자는 그런 수행을 할 때에도 하필이면
무소득(얻을 것이 없음)을 굳이 방편으로 택해서 

이 수행에 관해서도 집착을 잘 제거하여
수행을 원만히 잘 성취해나가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본 바탕에선 그렇게 하던 그렇게 하지 않던 
아무 차별을 얻을 수 없지만, 
그러나 생사현실에서는 
생사에 묶여 3 악도에 들어가 극심한 생사고통을 받아나가거나 
받지 않거나의 차이가 바로 이에 의해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 생사현실은 본 바탕을 놓고 보면 
그런 내용을 본 바탕에서는 얻을 수 없는 내용으로서 
마치 침대에 누어서 꾼 바다나 황금꿈과 같이
실답지 않은 것이지만, 

그러나 정작 꿈은 아니어서 
매 순간 생생하게 다양한 감각을 통해 얻고 
또 지금만 그런 내용을 얻게 되는 것이고 
그런 조건이 충족되면 몇 천년전이나 몇 천년후에도 
지옥이나 아귀 축생은 축생대로 인간은 인간대로 
그런 내용을 반복해 얻고 
또 그런 내용을 자신만 얻는 것이 아니고 
지옥이나 아귀 축생은 축생대로 인간은 인간대로 
수없이 많은 중생들이 같이 그런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이므로 
이것을 단순히 꿈처럼 실답지 않다는 사정만으로
그대로 방치할 도리는 없고 

하나하나 실답지 않고
종합적으로도 실답지 않지만,
매 순간 생생한 고통을 반복해 받고  
더 나아가 무량한 기간에 걸쳐 반복해 받게 되는 이런 생사현실 문제를 
잘 해결하는 것이 요구된다는 의미다. 

그것은 한편으로 이 생사현실에서 
이 현실 내용이 진짜도 아니고
실재의 실상의 지위에 있는 내용도 아닌 한편 
본 바탕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는 것이어서 

비록 하나하나 대단히 생생하고 매순간 진짜처럼 여겨지지만, 
그것은 침대에 누어 자면서 침대에서는 얻을 수 없는 
바다나 황금 꿈을 꾸는 상태와 사정이 마찬가지임을 
잘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현실에서 대하는 내용을 놓고 
그것이 집착을 가질만한 실다운 내용이 아님을 잘 관하여 집착을 제거하고
그리고 그런 망집에 바탕해 일으키는 소원이나 
그에 바탕해 행하는 업 일체를 중지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런 망집과 그 망집에 바탕해 일으키는 소원과
그 업이 일시적으로는 좋음을 자신에게 가져다 주는 것 같지만,  
욕계에 임하는 각 중생의 상황이 다 이와 같기에 
바로 그런 사정으로 
그런 자세로 임하면 업의 장애로 
종국적으로 그 주체가 3 악도에 들어가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받아나가게 되기 때문이다. 

본 바탕에 그런 것을 얻을 수 없는데도 
생사현실에서 각 주체가 서로 얽혀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받아 나가게 되는 사정은 바로 이것이다. 
즉 그가 집착하는 약간의 좋음을 징검다리 삼아 
이를 밟고 그로 인해 장구하게 3 악도에서 생사고통을 
받아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문제이고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 수행인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해결하려면 
자신이 그렇게 관하던 관하지 않던 
본 바탕은 관계없이 원래 그렇지만, 

생사현실에서 자신이 이 내용을 잘 관하여서 
마음 상태에서 그런 망집을 적극적으로 제거하는 것이 
우선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다 

이는 그렇게 하던 하지 않던
본 바탕에는 별다른 차별을 만들어내지 않지만, 
생사현실에 임한 상태에서는 
그렇게 관하고 임하는 경우와 
그렇지 않고 망집을 일으켜 임하는 경우는 
극단적인 차별을 만들어 낸다는 의미다. 

한쪽은 생사를 벗어나 청정한 니르바나를 
생사현실에서도 얻고 그렇게 여여하게 임하게 되는데 반해 
한쪽은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는 가운데에서 
그런 망집으로 매순간 번뇌를 일으키면서 업을 행하고 
그로 인해 고통을 받으며 지내다 
이후에는 3 악도에 묶여 들어가 
극심한 고통을 받고 무량하게 지내게 되기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선 그것을 중지하고 
다시 과거에 행한 업의 장애를 제거하는 한편 
생사현실에서 다른 중생을 제도함에 있어서 
필요한 복덕과 수명과 지혜자량을 구족하기 위해서 
필요한 수행을 또 잘 해나가는 것이 요구된다는 의미다. 

이것도 마찬가지다. 
생사현실에서 수행자가 
무량방편을 닦고 
불국토도 장엄하고 
중생을 제도하고 
끝내 성불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생사현실 안의 일이고 
본 바탕에서는 그러거나 않거나 차별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생사현실에서는 그런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가 극심한 차별이 있게 된다는 의미다. 

그러니 본 바탕의 측면을 통해서는
일단 생사현실에서 극심한 생사고통을 받게 하는 
번뇌와 집착을 제거하고 생사의 묶임에서 풀려나는 한편 

그것을 기본으로 한 상태에서 
다시 또 생사현실의 측면에서는 
다른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이런 바탕에서 좋고 좋은 무량한 복덕과 수명과 지혜를 구족하는 수행에 정진해
그런 상태를 증득해 내는 것이 

이 모든 측면에서 좋다는 의미다. 




○ [pt op tr]  mus0fl--Michel Berger - Chanson pour une fan.lrc


이전 조각글에서 살핀 제교결정명의론을 통해 
범어 글자도 살피고 
이와 함께 수행자 수행공식인 
참! 예쁘지 삼삼하지 아라바자나 나자바라아의 내용을 살피면서 
그 가운데 아라 이런 글자를 놓고 살피는데 

이런 가운데 혼동을 일으키는 측면이 많게 된다. 

특히 그 가운데 
본 바탕에서 생멸이나 생사고통을 얻을 수 없고 
선이나 악이나 성불이나 중생을 얻을 수 없다는 이런 측면과 

그러나 그런 바탕에서 
하필이면 중생제도와 성불을 위한 수행방안을 선택해 정진해 나가야 한다는 
이 두 내용을 놓고 많은 혼동을 
수행자들이 일으키게 되기 쉽다. 


과거 신수스님이 남긴 게송과 
혜능 스님이 남긴 게송도 이와 관련된다. 

신수스님은 

“몸은 이 보리의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 명경대와 같은지라,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티끌과 먼지가 묻지 않게 하라


身是菩提樹 

신시보리수 


心如明鏡臺 

심여명경대 


時時勤拂拭 

시시근불식 


勿使惹塵埃

물사야진애


라는 게송을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혜능이 이 시를 보고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가 아니다. 

본래에 한 물건도 없거늘, 

어느 곳에서 티끌과 먼지가 묻으리오. 


菩提本無樹 

보리본무수 


明鏡亦非臺 

명경역비대 


本來無一物 

본래무일물 


何處惹塵埃 

하처야진애 


라는 게송을 지었다는 내용이 
바로 이 내용이다. 


그런데 금강경에서는 결국 이 두 측면을 하나도 버리지 말고
다 함께 잘 취해
부처님이 가르쳐준대로 잘 사용해야 한다고 제시하는데
자칫하면 이 가운데 한 측면만 편벽되게 취하는 가운데 
생사현실에서 무언가 얻을 것이 있다고 망집을 일으켜 업을 행하거나
수행에 임함으로써 생사에 묶이거나 

아니면 또 반대로 아무 것도 얻을 것이 본래 없다는 측면만 편벽되게 취한 가운데
생사현실에서 행해나갈 무량한 선법을 닦지 않고 
생사현실에서 수행자가 구족할 수 있는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모두 잃어버리는 잘못을 범할 수 있는 것이다. 


거리에 서서 거리를 살피면 
거리를 오가는 자동차나 영희나 철수도 보고 
그런 모습을 보는 자신도 스스로 보게 되는데 

실상에서는 그런 내용이나 그런 오고감 자체를 얻을 수 없고 
또한 그런 현실은 실상이 아니고
그런 부분에서 일으키는 그런 분별내용도 얻을 수 없고 
따라서 그런 망집에 바탕해 일으키는 
온갖 소원과 이를 추구하는 활동을 끊어 제거해야 한다는 
공 무상 무원무작 해탈문은 
본 바탕에 그런 것이 얻을 수 없다는 측면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다고 
생사현실에서 망집을 바탕으로 업을 행하고 
생사고통을 받는 문제가 
본 바탕이 그렇고 
그런 내용이 실답지 않다는 사정만으로 
모두 그대로 방치해도 무방하다거나 
그래서 생사현실에서 그런 내용을 
그렇게 관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생사현실의 문제가 모두 해결된다는 그런 의미는 아니다. 

더 나아가 본 바탕이 그렇기에 
생사현실에서 어떤 행위를 하거나 하지 않거나 
아무 행위를 하지 않으려 하거나 
또는 오히려 이전보다 더 극심하게 집착을 갖고 
악행을 해도 무방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미 앞에서도 자세히 제시했지만, 
본 바탕이 그럼에도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해 생사고통을 받아나가고
그런 내용이 꿈처럼 실답지 않은 것이지만,
그러나 정작 꿈은 아니고
매 순간 대단히 생생하게 받으면서 진짜처럼 여기며
각 중생이 반복해서 다양한 감각현실 형태로 무량하게 받아나가는 것이 
문제이기에 

그런 본 바탕 사정을 관하고 
그런 고통을 받게끔 만드는 업을 중단해 끊고 
다시 매 순간 그런 업을 행하게끔 만드는 
근본 무명 번뇌 망집을 제거한 상태에서 

어차피 본 바탕에서는 그런 차별을 얻을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는 사정이 그렇기에 오히려 
하필이면 무량한 복덕과 수명과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그런 수행 내용만 
차별이 없는 가운데 일부로 선택해서 
그것도 유소득을 방편으로 하던 무소득을 방편으로 하던 
본 바탕에서는 모두 차별을 얻을 수 없지만, 
그러나 사정이 그렇기에 오히려 
하필이면 유독 무소득을 방편으로 집착을 제거하고 
그런 수행을 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본 바탕에서
그렇게 행하면 어떤 차별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그렇게 행해야 
생사현실에서도 
본 바탕과 상응하게 
그 수행자의 생사현실이 청정하고 번뇌 망집이 제거된 상태가 되고 
더 나아가 그 수행자의 생사현실에서 본 바탕이 차별이 없는 가운데에서도 
무량한 복덕과 수명과 지혜가 구족되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중생을 제도하여 성불의 상태에 이를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래서 이 부분에서 혼동을 일으키지 말고 
그런 내용을 잘 관하고 
생사현실에서 수행을 잘 행해야 하는 것이다. 



현실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거나 도박을 행하거나 
기타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 망집에 바탕해
중독증상을 일으켜 매순간 업을 행한다고 할 때 

첫 내용은 그런 생사현실도 본 바탕은 
그런 차별을 얻을 수 없고 
모두 청정하다는 측면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다고 
그런 내용으로 생사현실의 망집 상태에서 
그 주체가 그로 인해 생사고통을 겪어나가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니다. 
위 측면은 
그 주체가 그로 인해 그렇게 3 악도에 들어가 
지옥 아귀 축생세계에서 극심한 생사고통을 겪어도 
그 자체도 역시 본 바탕은 그렇게 청정하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반대로 제시하면 본 바탕이 그렇게 공하고 청정해도 
그런 상태에서 중생이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겪게 된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생사현실 안에서' 우선 그런 실상을 잘 관해서 
이 측면을 붙잡고 당장 겪는 생사고통에서 벗어나오던지 

그것이 아니면 
미리 그런 생사고통을 받게끔 만드는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 망집과 그에 바탕해 업을 행하는 것을 끊고
수행에 임해서 그런 상태 자체에서 벗아나고 받지 않도록
예방 조치를 취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다음 내용이다.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 망집과 그에 바탕해 업을 행하던,
아니면 그 반대로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 망집에 대해 
아낌없이 보시하고 계율을 지키고 
자비심을 일으키고 안인을 수행하고 
인연 인과 연기를 잘 관하고 실상을 꿰뚤어 관하는 수행을 행하던 
이 모두가 역시 다 본 바탕에서는 차별이 없다지만, 

수행자는 사정이 그렇기에 오히려 
하필이면 동가홍상의 수행원칙에 따라 
유독 수행의 방안만을 선택해서 행하고
또 그런 수행 내용을 놓고도  
그것에서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고 관하면서 
또 그로 인해 얻을 바가 없음(무소득)을 방편으로 취하는 가운데 
매 순간 그 수행에 정진해 그것을 원만히 잘 성취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렇게 수행을 잘 해나감으로써
어차피 차별이 없는 가운데에서도
수행자는 생사현실 안에서도
본 바탕과 상응하게 청정한 니르바나에 상응하게 여여하게 머물게 될 뿐 아니라, 

그로 인해 생사의 묶임에서도 벗어나서 
무량한 복덕과 수명과 지혜를 구족하고 

자신의 서원에 맞추어 변역생사과정을 통해서 
생사 즉 열반이라는 사정을 잘 관하는 가운데 생사현실에 임해 

분단생사를 받는 중생과 달리 
원하지 않더라도 3 악에도 묶여 끌려가 생을 받아가는 상태에서 벗어나, 

자신의 수행을 무량겁에 걸쳐 이어나감으로써  
불국토를 장엄하고 중생을 제도하고 성불하는 방향을 취해나가게 된다는 점이다. 



이는 어차피 차별이 없다면서 
매 순간 하필이면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 망상 분별 집착에 바탕한 
행위 반응만 선택해 해나감으로써 
어차피 차별이 없는 가운데 
유독 생사현실에서 매 순간 극심한 생사고통을 
받아나가는 3 악도에 무량하게 묶여 지내는 
중생의 상태와는 차이가 있다는 의미다. 


생사 즉 열반이란, 
생사현실이 본래 청정한 니르바나의 바탕에 있고 그와 다르지 않다는 의미인데 
일반 중생은 같은 바탕에서 
이 내용을 열반 즉 생사로 취해 
청정한 니르바나의 같은 바탕에서 유독 생사고통을 겪어 나가는 것이고 
수행자는 이를 생사 즉 열반의 형태로 
생사고통을 놓고 청정한 니르바나로 취해 
여여하게 생사현실에 임하면서 
복덕과 지혜를 구족해 나간다는 차이가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본 바탕은 이 양자간에서도 차별이 없고 
사정이 그렇기에 본 바탕에서는 그런 요구를 할 일도 없다. 

그런데 수행자는 
그런 사정을 잘 관하여
망상분별 집착은 그것대로 잘 제거하는 한편 

그런 바탕에서 생사현실에서는 또 생사현실대로 
중생을 제도할 수 있도록 
무량한 복덕과 수명과 지혜자량을 구족할 수 있는 
수행을 그렇게 취해 임한다는 의미다. 

이것이 금강경에서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내용을
어느 한 측면도 버리지 않고
모두 잘 행하라는 내용인 것이다. 



이는 예를 들어 
스님이 산 속에서 수행을 하는 중에 
어떤 아름다운 여인이 찾아와 해산을 한다면서 
도움을 요청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가 하는 문제와도 마찬가지다. 

또 반대로 자신이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억울하게 체포를 당해 
눈과 코 귀를 잘리우고 
손과 발을 끊기우는 고문을 받는 
상황에서 어떻게 임하는 것이 좋은가 하는 
문제와도 관련된다. 



탐욕 분노 어리석음에 바탕해 무엇을 추구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본 바탕에서 모두 차별이 없고 다 청정하다고 제시할 때 
이 측면을 통해서 그런 내용으로 일으키는 망집을 제거하고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는 한편 


다시 
탐욕 분노 어리석음에 바탕해 무엇을 추구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본 바탕에서 모두 차별이 없고 다 청정하다고 제시할 때 
그런 내용을 통해서 

생사현실에서는 아무렇게 행해도 된다거나
아무 것도 행하지 않고 임하는 것이 아니고 

유독 수행자는
탐욕 분노 어리석음 망집을 모두 끊고 
보시와 정계와 안인 정진 정려 반야 수행만을 택하여 
그것을 하는데 

그러나 이런 수행마저도
무소득(얻을 것이 없음)을 방편으로
그에 대한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하고 
그런 수행을 한다. 


그래서 모든 측면에서 좋고 좋은 내용을 얻고 
무량한 복덕과 수명과 지혜를 구족하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중생을 무량하게 제도하고 
성불하게 된다 

이런 의미다. 







문서정보 ori http://buddhism007.tistory.com/5061#1443
sfed--미사색부화혜오분율_K0895_T1421.txt ☞제16권
sfd8--불교단상_2562_08.txt  ☞◆vcfn1443 
불기2562-08-05
θθ

 


-- 아래에 조각글 작성시 휴식시점에 붙인 노래가사,사진,풍광,예술작품 자료를 편집상 옮겨 붙입니다.--



mus0fl--Michel Sardou - Lelque Sommes-Nous.lrc




○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Christina-Robertson-olga-ivanovna-orlova-davydova-baryatinsky-1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Rosa_'Tea_Clipper'_J4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Iheuan-2005-1



♡永保寺(えいほうじ)(岐阜県多治見市) ,Japan


○ [pt op tr]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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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Salvador-Dali-un-chien-andalou-film-still-1928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Begonia-6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Stanford_Oval_May_2011_panorama



♡백양사



○ [pt op tr]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ivan-aivazovsky-raid-on-sevastopol-1852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Clematis_Patens_X_'Asao'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Clematis_Patens_X_'Asao'



♥이화원-중간축약-Kunming 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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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0fl--Michel Berger - Chanson pour une fan.lrc




○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Katsushika-Hokusai-fujiwara-no-ason-michinobu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Astrophytum_flower_304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_08_-_ITALY_-_Forlì_under_snow_-_suggestive_winter_landscape_of_city_(christmas)


♥Towada Shr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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