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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무량행문으로의 진입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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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xx--무량행문으로의-진입.txt
http://buddhism007.tistory.com/3466
● 이하 글은 단상_조각글 내용을 주제별로 '편집중'인 상태의 글입니다.
>>>
같은 a 이지만, 각 상황마다
그 값이 달라지는 기본 내용이기도 하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기에
신혼부부가 공원에서 체포되기도 하고
또는 반대로
신혼부부가 안방에서 약봉지를 들고 벌을 서기도 하고
그런 것인데
특별히 맹구나 영구 스타일만 아니고
정상적인 상식만 갖추어져 있으면
별 문제가 없는 것이다.
짜장면이 아주 유용한 고문 수단이 된다는 것은
이미 이문세 옹께서 보고한 적이 있는데
턱수술하는데 옆에서 짜장면 먹으면
상당히 고통스러워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물 하나를 그대로 놓고
이 물이 다이아몬드보다 비싸게 가격표가 붙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지극한 고통을 주는 고문 수단도 되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부터는
이것이 다 같은데
그 가치가 왜 이 경우는 이렇고 저 경우는 저런가.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아야 한다고 본다.
그것보다는 매 경우
가장 좋고 좋게 하는 내용을 찾아서
조화를 이루는 형태로 잘 각 내용을 활용하는 것이
좋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생활의 간단한 팁이라고 할 수 있다.
라이터 삼매도
같은 내용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는
라이터를 구하면 아주 쉽게 얻지만,
직접 이것을 처음부터 만들어내려면
상당히 곤란하다.
어떤 경우는 10 억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뜻과 같이 만들어내기 힘들다라고도 보게 된다.
그런데 그런 사정은
그 반대로 소비과정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경우는
라이터 하나를 소지한 이유로
체포될 수도 있고
반대로 이것으로 삼천대천세계를
안전하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왜 하나의 같은 라이터가
매 경우 그렇게 되는가는 또 묻지 않는 것이
좋다고 본다.
원래 그런 것이다.
그래서 무량행문은
다라니와 삼매로 들어가서
다라니와 삼매로 정리해 나오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
● [pt op tr] fr
>>>
죽음이란 삶 가까이 있는 것인데
살아갈 때는 잘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생노병사의 고통을 놓고
생각할 때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좋다고 할 것인가.
이 문제의 해결이
무량행문의 목표점이기도 하다.
위 문제를 가장 쉽게 살펴보기로 하자.
지금 자신의 손이 묶여서
손이 톱으로 잘려지고 있는 상황이라고 하자.
생노병사의 고통이 상징하는 내용이
위와 같은 것이다.
그 상황에서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가가
문제인 것이다.
가장 원칙적인 방안은
우선 그 상황의 정체부터 잘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
기본이고 핵심이다.
자신의 손이 묶여져 있고
지금 그 손이 하나하나 톱으로 잘리워지고 있다고 하는데
그 상황에서 그 가운데 선명한
그 정지화면을 딱 붙잡고
우선 그 정체부터 잘 살피라고 일단 제시한 것이다.
자신이 자신이라고 본 것이 자신이 맞는가.
자신이 자신의 손이라고 보는 것이 자신의 손이 맞는가.
그리고 톱으로 본 것이 톱이 맞는가.
그리고 자른다거나 잘리워진다는 것이 거기에 있는가.
처음 제시한 내용은
그런 것을 그 정지 화면 하나에서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 것이다.
정지화면만 유독 그런 것이 아니고
연속화면이던
그 어디에도 얻을 수 없는데
그래도 전도몽상상태에서
그래도 비교적 잘 살피고 헤아릴 수 있는
내용이 정지화면이라고 보므로
우선 이것부터 먼저 잘 살피라고 한 것이다 .
그리고 자주 반복하지만,
자신이 눈을 떠 얻는 감각현실을 놓고
그 감각현실이 그대로
그에 대해 생각한 내용인가.
이것을 이와 관련하여 묻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내용을 얻는 본 바탕이라고 할 실재를
다시 또 놓고
그런 실재가 그대로 그 감각현실인가를
묻는 것이다.
그래서 그에 대해 a 라고 생각했다면
그에 대해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그러나 그런 a 가 있다고 생각하는
그 감각현실이나 실재에서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 것이다.
그리고 이들간의 관계를 살피기 위해서
다시 묻기를
그러면 그런 감각현실은 그런 실재를 떠나서 얻는 것인가.
또 그런 생각 분별내용은 그런 내용들을 떠나서 얻는 것인가.
이것을 또 다시 물은 것이다.
이것이 자신이 문제삼는 a 의 정체를
스스로 확인하는 기본 내용이다.
여기서
문제삼는 관념분별 a 를 얻지 못한다거나,
또 눈을 뜰 때 보게 되는 생생한 감각현실을 얻지 못한다거나
그런 내용을 얻는 본 바탕이 되는 실재가
아무 것도 전혀 없는 것이라고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 정체나 존재가 문제되는 영역으로서
실재 - 감각현실 - 관념분별을 놓고
앞과 같은 방식을 통해
이 각각의 정체나 그 관계가 무언가를
잘 살피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잘 관하는 것이
곧 그 현장에서
공 무상 무원무작 해탈의 문을
찾아내는 열쇠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문에 들어서면
무엇이 뒤바뀐 전도몽상의 내용이고
무엇이 그 주체를 묶어서
이런 생사고통을 겪게 하는 것인가.
즉, 무엇이 그런 주체를 그렇게 묶어
그런 고통의 사역을 시켜 나가는 것인가를
파악할 수 있고
그렇게 그 사정을 잘 파악하게 되면
또 이를 통해
그 묶임에서 풀려 벗어나올 있다고 하여
이들을 공 무상 무원무작 해탈의 문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그런데 앞의 상황으로 다시 돌아가보자.
이제 그 실재가 공하고
감각현실은 그런 실재가 아니고
그런 감각현실은 또한 자신이 있다고 여기고 생각하게 되는 그런 분별내용을 얻을 수 없고
또 그런 분별 내용에는 그것이 가리키고자 하는
감각현실의 내용이 들어 있지 않다는 등을
이해하고 깨닫게 되었다고 해서
그런 깨달음으로
그처럼 자신의 손이 톱으로 잘리워진다고 보는
그 상황에서
평안해질 수 있는가가
핵심 문제인 것이다.
그렇다고 보는가.
그렇다고 보고
정말 그럴 수 있으면
그렇게 수행이 성취된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면 어떤가
그렇게 이해되지 못하고
이해되더라도 그것을 그처럼 평안하게 대하지 못하고
고통을 겪으면서 대하는 부분만큼
수행을 통해 앞으로
성취해나갈 부분이 남아 있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위 문제에서
첫 부분에 제시된 iq 테스트형 퀴즈 문제부터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면
일단 그 문제부터 잘 스스로 헤아려야 하는 것이다 .
그런데 알고보면 이 문제자체가
쉽지 않다.
아무리 설명해도
prince 님을 포함해서
이 내용을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우선 왜 그렇게 되는가부터
생각해보기로 하자.
우선 곰이나 사람이나 생명이란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그런데 어떤 이가
곰에게 4 + 3 의 덧셈문제를 내고
곰이 그 답을 계산해 내지 못한다고 하여
왜 곰은 그런가라고 문제를 제기하면
이에 대해서 무엇이
문제라고 보게 되는가.
그것은 왜 곰은
그런 상태가 되었는가부터
다시 살펴야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행하는 분별이나 판단이나
4 + 3 과 같은 산수문제 계산을 행하는 것을
일반적인 것으로 이해하지만,
사실은 그렇지는 않은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든다면
왜 눈으로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가.
이렇게 누가 문제를 제기하고
또 왜 귀로는 색을 보지 못하는가.
그리고 반대로
왜 눈으로는 색을 보는가.
왜 귀로는 소리를 듣는가
이렇게 물으면
그에 대해 무엇이라고
답하게 되는가.
사정이 으레 그런 것이다라고만
답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나 다른 주체가
왜 어떤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무언가를 보지 못하는가.
또 반대로 왜
어떤 것을 놓고
무엇이 있다 없다
이다 아니다라고 하는가는
먼저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더 앞으로 나아가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 주체의 근본 정신이
근본 어리석음(무명)에 의해
전도망상을 일으키고
그에 바탕해 탐욕 분노 번뇌에 집착하고
업을 행한 가운데
그런 상태가 된 것이라고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각 생명이 갖는 근본정신 자체는
깨끗한데
전도망상 번뇌와 업에 의해
그 근본정신에
오염물질이 잔뜩 접착되어
붙어 있는 상태와 상황이 같은 것이다
그래서 이런 사정을 이해하고
그런 상태를 제거하고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수행의 기본적 노력이기도 한 것이다.
그 다음 그 사정을 그렇게 이해해도
여전히 수행할 내용이 남아 있는 것이다.
아무리 손을 톱으로 잘리우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이나 자신의 손이나 톱을 얻을 수 없고
자르거나 잘리움도 얻을 수 없다고 이해해도
그것만으로
그 상황에서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거나
이 상황을 평안히 참고 임할 수 있다거나
수행의 방향에 따라 임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되지 못하는 내용을 놓고
여전히 수행할 내용이 남아 있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다시 그 상황은
어떻게 되어 나타난 것인가를 살펴보자.
그 상황에서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는데
어떤 이가 근본 무명과 전도망상 분별에
바탕해서
그 상황에 그런 내용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그렇다고 한다면
그런 내용이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는가를 놓고
다시 살펴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a + b => C 의 관계나
3 + 4 = 7 의 관계를 놓고
이것을 설명해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아무리 3 + 4 나 4 + 3 은 값이 다르지 않다고 해도
그래도 4 + 3 이 3 + 4 보다는 낫다고 여기고
고집하는 상태가 해소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조삼모사의 고사라고 전해지는 내용이다.
동업자간에 상호를 정하는 데
a 와 b 의 가게라고 이름을 붙일까.
b 와 a 의 가게라고 이름을 붙일까.
논의하다가
결국 서로 다른 주장을 내세우는 가운데
시비를 일으켜
동업 자체가 무산되었다는 사례가 많은데
알고보면 별 차이가 없다고 하지만,
이런 문제를 놓고 시시비비에 임하는 경우가
현실에 대단히 많은 것이다.
그렇다고 웃을 수 있는 일만은 아니다.
자신부터 그로부터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이 어떤 한 내용을
C 라고 보면서도
그 C 가 나타나는 관계를
a + b => C 로 제시하면
그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임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봄에 씨를 뿌리면
가을에 열매가 맺는다.
이런 관계 조차도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남의 손을 자르면
자신의 손이 나중에 잘려진다.
물고기를 살을 잘라 먹으면
자신의 살도 잘라진다.
이런 내용을 제시하면
역시 또 마찬가지로
의문을 제기한다.
그런데 봄에 씨를 뿌리면
가을에 열매가 맺히는 것이
이상한가.
사람은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지만,
그 내용을 과연
곰이 이해한다고 보는가는
또 다른 문제다.
그런데 이처럼
사람 가운데
남의 손을 자르면
자신의 손이 나중에 잘려진다는
관계를 이상하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다.
더더욱 이상한 것은
이 내용을 놓고
남의 손을 자르면 좋다고 기뻐하면서
그러나 반대로
자신의 살이 잘라질 상황이 되면
비명을 지르면서 고통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왜 두 내용이 그 본 사정에 별 차이가 없고
그리고 하나는 씨이고 하나는 그로 인해 나타난 열매의
관계일 뿐인데
왜 이것을 놓고
자꾸 또 문제를 삼고
문제를 삼는가.
이상한 일이 아닌가.
처음 남의 살을 자를 때
평안하고 좋았다면
왜 뒤의 경우는 그렇게
평안히 임하지 못하는가.
이런 여러 문제가
모두 수행과 관련된 문제들인 것이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
곰 조련사나 원숭이 조련사가
3 + 4 나 4 + 3 이나 마찬가지임을 알려주려다가
상대가 도무지 이해를 못해서
답답해
자신부터 화병에 걸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잘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처음에 정리할 문제는
현실의 한 정지화면을 놓고
그것이 a 이다
a 가 있다라고 할 때
정작 그 화면에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는
점을 잘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감각해 얻는 감각현실이란 그 정지화면 하나도
사정이 그렇지만,
연속화면도 마찬가지고
더 나아가 그런 내용의 본 바탕이 되는 실재도
사정이 그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도
왜 자신의 손이 묶여 톱에 잘리워진다고
보게 되는 상황이 나타났는가.
가장 근본적으로 살피면
앞의 내용을 그렇게 보지 못하기에 그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게 사정을 이해해도
그 상황에서
톱이 자신의 손을 자를 때
고통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다시 두번째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왜 그런 상태로 묶여 들어가게 되었는가를
또 살피는 것이다.
그것이 봄에 씨를 뿌리면
가을에 열매를 맺는 관계라고 제시되는 내용이다.
앞에 문제된 상황에서
평안하게 임할 수 없다면
그런 열매를 맺게하는 씨부터
그렇게 처음에 뿌리지 않아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씨를 뿌리지 않으면
그런 열매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열매에 해당하는 내용을
평안하게 대할 수 없다면
처음에 그런 열매를 나타나게 하는 씨를 뿌리지 말고
반대로 수행의 씨를 뿌리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씨를 뿌리는 상황에서
그 관계를 그렇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이 앞의 곰의 상태인 것이다.
아무리 보아도
씨는 씨인데
왜 씨라고 보는 부분에 씨를 얻을 수 없다고 하는가 하는 한편
자신이 또 씨라고 보는 그 부분은 씨일 뿐이고
그 씨에서 열매가 보이지 않는데
무슨 열매가 이 씨로부터 나타난다고 하는가.
이렇게 주장하는 것이다.
이 이중의 답답함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a + b => C
의 관계에서
만일 C 를 평안히 참을 도리가 없다면
a + b 라는 씨를 만들어 내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반대되는
수행에 해당하는 씨를 밭에 열심히 뿌리면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C 를 평안히 참을 도리가 없다는 입장에서는
a + b 라는 씨를 만들어 내는 상황에서 그것을 그렇게
만들지 않고 중지하고
수행의 방향으로 행해 나가는 것도
역시 힘들다고 여기는 가운데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고집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그 둘 가운데 어느 것이 그래도 더 쉬운가
이것을 먼저 물어 보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수행의 방편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원래 첫 문제에서 문제를 해결한다면
이 두 경우가 다 같은 원리로 해결할 수 있다고
이론상으로 보게 된다.
그런데 그래도 현실적으로
이 둘 가운데 어느 것이 더 나은가를
묻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은 처음
계에 해당하는 내용
즉 좋음(+)에 해당하는 내용을 아끼지 말고 베풀고
나쁨(-)에 대항하는 내용은 함부로 다른 생명에게 가하지 말고
또 반대로 자신이 나쁨(-)을 받으면 상을 취하지 말고
그것을 평안히 참고 미움과 원망을 제거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보시, 정계, 안인, 정진의 수행부터 잘 성취해야 한다고
제시하고
그런 수행을 원만히 성취하면
자꾸 자신을 묶어 톱으로 신체를 잘라대는 세계로
자신을 묶어 끌고 가는 업의 장애를 제거하게 되고
그리고 반대로 복덕자량(양식, 식량)을 쌓게 되어서
그 바탕에서 지혜 자량을 쌓아 나갈 수 있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자신이 묶여서 신체가 톱으로 계속 잘리워져
고통을 겪는 상황에서
정려 수행이나 반야 지혜를 닦는 수행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할 것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대단히 행하기 힘들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한순간 쉴 틈이 없이
이리저리 묶여 끌려 다니고
이 절벽에서 뛰어 내리고
저 절벽에서 묶여 있게 되는 그런 상황에서
그것이 쉽게 이뤄질 수 있다고 보는가.
그것은 손이 묶여 톱으로 잘리워질 때
평안하게 임할 수 있는가의 첫 질문과 성격이 같다.
그러니 그런 상황에 처하게 만드는
씨를 뿌리는 앞 단계에서부터
그것을 중지하고
기본적인 수행을 통해
그 반대의 상태로 나아가는 가운데
수행을 성취해나가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원래 원칙적인 내용만 놓고 보면
이 어느 경우나
문제삼는 그런 생사 고통은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는 것이고
그 원칙을 통해서 다
공 무상 무원무작 해탈문에 들어서서
벗어날 수 있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지만,
현실에서 그것이 대단히 힘들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니 수행을 단계적으로 차례차례
일단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 해나갈 것을 제시하는데
그러나 앞에서 요구한 수행은 또 수행대로
그것이 힘들다고 하지 않으니
그 열매가 맺히는 상황에서는 그러면
그것은 그 상태에서 잘 견딜 수 있을 것인가.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보지만,
그러나 그렇게 임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히 희박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것이 처음 3 + 4 의 문제를
곰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답답한 상황인 것이다.
그런 가운데 현실을 넒고 길고 깊게
살펴보면서
위 문제가 지금 어떤 문제들인가를 하나하나
음미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
>>>
- 무량행문으로의 진입 -
수행과 관련한 유무 논의의 대강을
다 마친 즈음
여전히 자신의 뜻이 자신의 뜻대로
잘 성취되지 않는다면서
우주를 대하는 경우가 많다고 보게 된다.
원래 이론대로라면
곧바로 생사를 벗어나고
무량행문에 진입해서
무량한 기간에 걸쳐 유희 자재 신통력으로
복덕과 지혜 자량을 원만히 성취하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고
보는데
그러나 뭔지 모르게
수행에 진입한 것과 진입하지 않은 상태의
차이를 실감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보게 된다.
이를 과거에 쌓은 업의 장애
또는 연기나 향이 옷에 배는 것과 같이
과거의 생각이나 말과 행동이 남기는 세력이나 씨가 있어[습기]
이것이 마음에 잔류하는 [훈습] 현상과 관련된다고 본다.
현재 전단향을 기지에 두었는데
방문을 닫아 두었다가 열면
향 내음이 진하게 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또 손에 고무밴드를 한 경우
고무밴드를 풀어도 그 자국이 곧 없어지지 않고
어느 정도 남는 것도 경험하게 된다.
또 다리나 손이 골절되어서 깁스를 하는 경우
일정 기간이 지나 깁스를 풀게 되어도
이전처럼 근육을 곧바로 사용하지 못하고
일정기간 물리치료를 받거나 재활활동을 해야
정상적으로 사용하게 된다고 본다.
그래서 비록 유무 논의를 통해
현실에서 가진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해도
어느 정도 기간까지는 과거의 영향을 받는 상태가
지속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현재 태어나서 삶을 살아가는 것은
태어날때 부터 일정한 깁스를 한 상태로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비유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삶에서 행한
생각과 말과 행동이 이후의 삶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래서 깁스를 한 상태에서는
지금 당장 자유롭게 무엇을 할 수 없다고
답답하게 여길 수 있지만,
깁스를 푼 상태에서 자신이 행할
서원의 내용을 생각하면서
미리 하나하나 준비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통상 깁스를 하면 깁스를 풀 때까지
의사는 안정을 취하라고 권유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의사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쉼없이 병상을 움직여 돌아다니는 환자들이
가끔 있다.
그런데 이런 환자는 이상하게 깁스를 풀면
바로 그 부분을 잘 사용한다는 것도
보고가 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양극단을 피하고
의사의 권고도 잘 새겨 듣고
한편 깁스를 푼 상태에서
따로 장기간 물리 치료나 재활활동을 받지 않고도
곧바로 활동을 잘 할 수 있으려면
깁스를 한 상태에서 깁스를 푼 상태를 념두에 두고
계속 마음을 기울이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보게 된다.
그것은 굳이 여기저기 병상을
깁스 상태로 걸어 다니지 않아도
마음만으로 그런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깁스를 풀려면 깁스라는 단어를
일단 풀어야 한다고 본다.
깁스 = 기브 + 스 = 기부 + 스
이런 형태로 영어나 한글식으로
모두 분해할 수 있는데
깁스를 한 상태에서
비록 몸과 마음은 자재하고 자유롭지 않더라도
계속 다른 생명에게 좋음을 주기 위한 활동을 하면서
삼매를 통해서
자신의 서원이 성취된 후 할 일과
그것을 위해 해야 한다고 보는 일들을
앞 뒤로 한 서너 단계까지만 살펴가면서
당장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삼매를 통해서 행해 나가면
그 이후 7 단계의 버퍼가 자연스럽게 마련된다고
보게 된다.
여기서 자신이 나중에 치뤄야 할 시행착오가
단지 삼매만으로 그 단계에서
미리 다 해소된다는 효과도 함께
얻는 것이다.
요즘 다양한 사회 부분에서 갑을 관계가
문제로 되고 있다.
이 문제만 보면 그 부분을 금지 해체시키거나
다른 것으로 대체하면 곧바로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만,
그러나 그 상태가 되면 또 다른 문제가 일어남을
계속 이어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MUN 님이 이런 방식으로 99 단계까지
미리 나아가서 문제를 풀지만,
그런데 그렇게 해도 여전히 문제가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사실은 근본적인 해결방안이 아니고
이런 방편을 통해서 0 3개로 상징되는
0 00 의 공 무상 무원무작 해탈문과 무량행문에
어떻하던 그 당사자들을 넣어주지 않으면
그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되기 힘들다는 사정을
보게 되는 것이다.
대부분 갑을관계란
서로 집착과 번뇌에 묶여서 사역을 당하는 한편
또 다른 이를 사역시키는 그런 관계를 의미한다.
이런 갑을 관계에서의 원칙은
자신이 상대로부터 대우받고 싶은 내용을 먼저
다른 이들에게 자신이 먼저 행하라는 것을 제시하게 되지만,
여하튼 이런 관계가 총체적으로
윤병임병의 사자성어로 표현되는 가운데
한 주체가 다른 수많은 주체와
과거와 현재 미래에
이 측면과 저 측면과 온갖 측면마다
서로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를 동시에
점유한 가운데 서로 얽혀진 관계라고 보는 것이다.
이미 이 관계를 사장과 과장의 관계로 제시했는데
그래도 이해의 편의를 위해 다시 되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사장은 과장에게 무언가 가해를 해 과장이 피해자라면
과장은 다시 대리에게 무언가 가해를 해 또 가해자의 입장에 놓이고
과장이 알고보면 과거에 사장에게 가해를 했다면
현재는 사장이 과장에게 가해를 하는 상태이고
나중에는 또 과장이 사장에게 가해를 하는 상태가 되기도 하고
또 봉급측면에서는 사장이 과장에게 가해를 하는 것이라면
시설이용 측면에서는 과장이 사장에게 부당한 이익을 거두고
피해를 주는 그런 측면이 있다고 보는데
이것이 주체별로 수없이 다중적으로 얽혀 있어서
간단히 심각하게 하나만 떼어서 살펴 보기는
대단히 곤란한 사정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현실에서
운동을 하나 배우려면 감독과 코치와 선수의 관계가 있고
공부를 하려면 선생님과 학생의 관계가 있고
연예계에 종사하려면 pd 와 매니저와 연예인과 관객의 관계가 있고
이런 식으로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직업 가운데 하나로
의사가 되어도 그렇고
법관이 되어도 그렇고
또 최근 보고가 된 것처럼 장군이 되어도 그렇다.
[...]
이런 것을 일일히 로봇처럼 규율해 낼 도리는
본래 없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학식과 인격을 왠만큼 다 갖추었기에
기본적으로 왠만하면 다 잘 된다고 보는 것이지만,
그러나
연구에 임하는 박사과정의 학생이나 교수와의 관계나
법률을 다루는 이들이나
병을 고치는 의사들이나
한나라의 국방을 책임지는 장군들이라고 해도
층층으로 그렇게 마냥 편한 것은 아닌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깁스 상태에서
나중에 깁스를 풀고 나서는
자신이 어떤 상태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가를 놓고
미리 깁스를 풀 상태를 놓고
평소 훈련을 잘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래서 기브를 수없이 행하고
그리고 깁스가 된 상태에서 무상삼매를 통해 아상을 제거하고
안인을 성취하는 가운데
깁스가 완전히 풀리면
곧바로 재활치료가 없이도 바로
그 상태로 진입할 수 있도록 평소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0 00 이라는 공 무상 무원무작 해탈문과
무량행문의 출입구가 없다면 되겠는가.
없는 곳이 없는 것이다.
[...]
여하튼 사회전반에서 문제되는 갑을관계나
취직문제나 금수저 흙수저 문제등
다양한 사회문제를 놓고
여기에 어느 부분에
무량행문의 출입구가 있는가하는 문제에서
사실은 그 하나하나가
다 무량행문의 통로라고 보야야 한다고 본다.
이런 내용은 자연의 생명 전반에서 보게 되는데
이를 간단히 '카터필러' 수행이나
'깁스 수행'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고 본다.
애벌레가 나비가 될 때
날개가 돋아나면 비행을 어떻게 하는가를 따로 어디서 배우지 않아도
곧바로 날아다닐 수 있다고 보는데
어떻게 그렇게 되는가는
사실은 애벌레가 잎을 먹고 꿈틀거리고 돌아다니고
또 고치를 풀고 나오는 과정 하나하나가
다 그런 내용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 나비가 되어 먹는 음식과
애벌레가 먹는 음식은 서로 다른데
이것이 서로가 서로를 보호해주는 그런
기능도 갖는다는 것이다.
조금 더 자세히 살피면
이런 과정 어느 부분에서
옆에서 관찰자가 예를 들어
나비가 고치에서 나오는 것이 너무 힘들어 보여서
관찰자가 이것을 도와주면
이상하게 그 애벌레가 나비가 되어도
날지를 못하게 된다는 보고도 받게 된다.
현실에서 아무 문제가 없고 병도 없고
범죄도 없고 오로지 청정하기만 한 상태가 좋다고 보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떤 환자가 병이 걱정되어
무균실에서 일체 바이러스나 세균도 없는
상태로 마냥 지내면
좋다고 보는 것과 사정이 같다고 본다.
좋을 것 같지만, 그것이
좁고 짧고 얕은 관찰에서 그런 입장을
취하는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
자신의 서원이 성취된 상태는
현실과 대단히 거리가 멀다고 보지만,
서원은 그렇게
'미리 제일 앞서 가서' 잘 살펴보고
그것을 놓고 시행착오도 줄이고
그런 가운데 현실을 대하면서 그 성취 방안을 살피고
당장 현실에서 행할 수 있는 것을 하나하나 그렇게
카터필러 수행방안이나
깁스 수행방안을 통해서
행하는 가운데 임하면
이제 날개가 생기거나
기브스를 풀게 되는 순간부터
곧바로 일사천리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
그런데 현실 상황에서
그런 자세로 미리 자신의 서원이 다 뜻대로 성취된 상태로 나아가서
임하지 않으면
나중에 정작 그렇게 되어도
날개도 생겨도 어디로도 날지도 못하고
깁스를 막상 풀어도 어디로도 걸어가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어
임하게 된다는 사정을 말하는 것이다.
>>>
유가사지론에서 수행자의 지위를
7 단계로 나누고 있는데
잠깐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무엇이 7 가지냐 하면,
첫째는 종성지(種性地)요,
둘째는 승해행지(勝解行地)요,
셋째는 정승의요지(淨勝意樂地)요,
네째는 행정행지(行正行地)요,
다섯째는 결정지(決定地)요,
여섯째는 결정행지(決定行地)요,
일곱째는 도구경지(到究竟地)이니,
....
이렇게 내용이 계속 알기힘든 단어들로 나열되니
졸리움이 생기는 것이라고 보는데
알고보면 위 말은
아주 간단한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본다.
보리심을 일으키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수행자의 기본 자세 [ 종성지 ]
=>
그에 관련된 기본적 이해 [승해 행지]
=>
서원을 세우고 의욕을 일으킴 [정승의요지]
=>
올바로 계(보시+정계+안인) 정(정려) 혜(반야) 수행을 행함 [행정행지]
=>
올바로 발심하고 수행을 성취하여 더 이상 물러나지 않는 상태로 결정됨 [결정지]
=>
온갖 것에 장애없이 행하는 상태가 됨 [결정행지]
=>
수행의 최고의 상태에 이름 [도구경지]
수행을 시작했다해도
결정지에 이르러야
어느 정도 수준이 높은 단계에 이른 수행자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수행자가 어떤 고통이나 어려움에 부딪힐 때
원래의 상태로 물러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의해서
그런 구별이 이뤄지게 된다고 본다.
수행자가 처음에는 자신 나름대로
이상적인 불국토를 설계하고
불국토 건설에 필요한 벽돌을 열심히 구해나가는 활동을
의욕적으로 시작하게 되지만,
어떤 어려움이 생겨나고
자신의 서원의 성취는 요원하다고 여길 때
쉽게 원래의 전도몽상에 묶여 지내던 상태로
다시 물러나 임하게 되기 쉬운 것이다.
유가사지론에서
결정지 이후와 그 이전의 차이를
유가행 유공용 무상주〔有加行 有功用 無相住]와
무가행 무공용 무상주〔無加行 無功用 無相住]로 제시하는데
표현이 어렵지만 이것도 알고 보면
그렇게 어려운 내용은 아니라고 보게 된다.
가행이란, 번역서에는 '더하는 행' 이런 식으로
번역되어 있어서 의미를 파악하기가 조금 쉽지 않다고 본다.
그런데 원래 어떤 수행목표를 성취하는데
그에 대한 표준적인 수행방안이 a 라고 있다면
가행이란, 이 성취를 위해
미리 준비하는 어떤 예비적 수행이나
목표를 조금 더 빨리 성취할 수 있도록 덧붙이는 수단이나 방편을
의미한다.
암벽등반을 하는데
미리 운동장을 달려서 체력을 강화시킨다거나
또는 맨 손으로 오르른 것보다 조금 안전하게 오르려고
자일이나 헬멧을 준비한다거나
아래에 구급약품을 준비하고
이런 행위를 한다면
이것이 말그대로 원래의 표준적 수행에
무언가를 더한 수행 => 가행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목표를 위해 취하는 방편이기에
넓은 의미의 방편이라고 할 수 있다. ㅏ
그러나 현실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말이기에
어려운 표현인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가행 = 예비적 준비적 수행 + 수행을 위해 취하는 여러 방편 수단
이런 내용이라고 본다.
공용이란 표현도 잘 사용하지 않는 어려운 표현으로 본다.
그러나 공용이란
수행을 위해 수행자가 하는 행동과 말과 뜻 일체를 의미한다.
그래서 결국 공용은 수행행위를 의미하는 것이다.
공용이란 한자어를 번역한 표현은
'하염'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 말은 정작 국어사전에도 나오지 않고
오히려 번역된 말이 더 이해하기 어렵다고 보게 된다.
무언가 하는 것이기에 하염이라고 한 것인지
하염없이 먼 산만 바라본다는 구절에서와 같이
'하염없이 => 생각없이'에서 생각의 의미인지 잘 알 수 없는데
여하튼 그 원래 의미는 이와 같다고 본다.
결국 수행자가 더 이상 물러나지 않는 상태에서는
그런 방편이나 수행행위가 더 이상 필요없다는 의미를
위 내용이 나타낸 것으로 보게 된다.
반대로 말하면
그 이전이나 이후 수행 단계는
모두 무상에 머문다는 점에서는 차별이 없는데
이전 단계에 있어서는
이런 방편이나 수행행위가 상당히 필요하다는 점에서
그런 차이가 있음을 나타낸다고 보게 된다.
그런데 왜 그런가.
그 사정과 내용을 파악하는 것은
일단 숙제라고 본다.
개인적으로 가설적으로 이 답을 찾아 보면
안인과 무생법인 등을 성취하여
더 이상 물러나지 않는 상태가 된 수행자는
그냥 평소에 하는 것 그 모든 내용 자체가
다 중생제도인 상태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혹시 아닐까.
이런 가설적인 생각을 일단 해보게 된다.
깁스 수행 내지는 카터필러 수행 방안을
제시했는데
현실에서 수행에 임하는 입장은
대부분 이와 비슷하다.
죽어야 바뀌고 바뀌어야 멈춘다는 메세지를
시감상으로 듣게 되는데
그런 사정이 현실 사정인 것이다.
망상상태에서 죽음이라고 이해하는 현상은
사실은 그런 것이다.
그런데 망상상태와 수행의 차이는
망상상태는 그렇게 매번 옷을 갈아입는 과정이
감옥에서 수의를 갈아입는 형태처럼
강제로 이뤄진다는 점이 큰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감옥에서는 밖에서 사용하던 온갖 편리한 도구나
컴퓨터 사용도 제한받고
라이터 사용도 제한받고
심지어 볼펜 사용도 제한을 받아서
불편함을 느끼게 마련인데
그런 상태로 옷을 갈아입고
문제를 자꾸 일으키게 되는 내용을
포맷을 당해 치매상태처럼
새로 출발을 요구받는 상태가 된다면
수행자가 옷을 갈아입고 떠나는 여행은
수행자가 서원을 갖고 있는 내용과 관련해서
필요한 여행지가 된다는 점이 차이라면 차이인 것이다.
그것은 누구나 살면서 행하게 되는
많은 실수나 잘못이
수행자에게 있어서는 그것을 자신이 행하여
그런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이 보관됨으로써
그것의 성격이 바뀌어 그것이 수행자의 보물로 된다는 점에서
그런 차이가 발생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아라한이 되어 읊는 해탈지견의 게송에
아생이진 범행이립 ...이런 내용이
이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성경버전으로 풀이하면 선악과를 통해서
이제 영생과를 얻었다고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라한이 되어 생사를 벗어나는 상태라고
표현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사회에서 물의를 일으킬 때
예를 들어 어떤 수상이
자신들이 과거에 ●●●를 했다.
이것을 시인하라고 요구하는 경우가 많은데
도대체 그것을 그렇게 시인하면
과거가 없어지기라도 하고
그런 일로 피해를 받은 이들이 받은 고통이 모두
즐겁고 이익되는 일로 바뀌기라도 하는가.
그런데 한쪽은 그것을 계속 요구하고
한쪽은 그것을 거부하거나 하더라도
돌아가서 궁시렁 궁시렁 대면서
자신을 합리화하는 발언을 또 이어나가서
도대체 이 일이 언제 끝이 아름답게 될 지
궁금함을 자아내게 한다.
그런데 사실은 그 성격이 그런 것이다.
그런 일도 했는데
그 주체가 자신이 과거에 ●●●을 했다.
그것은 안 좋은 일이다.
진심으로 참회한다.
이렇게 발언을 하면
그 사실에 위 내용이 덧붙여짐으로써
그 일 자체가 성격이 화학적으로
변화한다고 보는 것이다.
여하튼 그 피해자부터 더 이상
속이 상하지 않는다고 대부분 임한다는 것이고
거기에 추가적인 노력을 하면
더 예쁘게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유가사지론에서도
이런 사정이 적혀 있다.
내용을 요약헤 제시하면
세상에 원수나 은인은 따로 고정되어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인데
그래도 원문을 복사해 붙이면 다음과 같다.
...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온갖 원수 품류는
모두가 이는
나의 친한 품류가 아님이 없다.
또,
원수 품류거나
친한 품류가 결정되어서
진실이라고 할 수조차 없다.
왜 그러냐 하면,
친한 품류라도
다른 때에는 변하여 원수 품류로 되기도 하고,
원수 품류라도
다른 때에는 변하여 친한 품류로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두가 결정된 것은 없다.
...
참고 유가사지론 제 29 권
여하튼 어떤 것이 누구 보아도
좋지 않다고 여기는 내용인데
그 본래는 죄와 복이 모두 공하여 차별이 없다는 내용을
제시하는 한편
현실에서도 그런 분별을 통해 선과 악을 분별하는 경우에도
그 내용들은 고정된 성격을 갖지 않고
그런 잘못이 그에 무엇을 더하면 다시
그 성격이 수행자의 자산이 되는 것임도
살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과거에 ●●●을 했다.
이것은 안 좋은 것이라고 한다면
과거에 ●●●을 했다. + 그것을 잘못이다.
+ 앞으로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아야 겠다.
+ 그리고 대신 그와 반대되는 이런 ○○○ 를 하겠다.
+ 그리고 그 가운데 당장 할 수 있는 이런 일부터 하나하나 한다.
이런 형태가 되면
이상하게 그 내용이 화학적 변화를 일으켜
훨씬 더 좋은 형태가 된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고 수행자가 각 세계를 여행다닐 때
언제나 잃지 않게 되는 수행자의 보물창고에 보관되는 보물이 되고
또 그래서 다른 불국토에서 비자도 발급되는 사유가 되고
그리고 생사 과정에서 옷을 갈아입을 때
수행자가 원하는 형태대로 옷을 갈아입고
그 내용을 포맷을 당하지도 않고
계속 이어서 수행을 하는 변역생사를 하게 되는
기본 바탕이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 않으면
또 그 반대로
아무리 좋다고 보는 ○○○ 내용도
그 반대로 처리되고
위와는 모두 반대로 되고
그래서 생사고통에 그대로 묶여서
돌게 되는 상태로 남게 됨을 제시하는 것이다.
무량행문에 들어간 수행자는
사실은 그 일들이
이전에 자신이 아주 익숙하게 반복하고
잘 하는 일임을 그 상태에서 보게 된다.
왜 그런가.
자신이 잘 즐겁게 하면서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일을 찾다보면
결국 원래 자신이 잘 즐겁게 하던 일이 그런 것임을
또 쉽게 보기 때문이다.
단지 그를 통해서 얻고자 하는 내용이나
그런 뜻을 성취한 후 그 상태에서 하고자 하는 일들이
조금 달라진 것 밖에는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mun 님처럼 당장 파리로 변신해서
암파리 화두를 들고 연구하는 수행을 할 필요성은
대부분 거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위와 같은 일을 계속 잘 하는 가운데
그 극한에 이르러서
더 이상은 더 나아갈 것이 없다고 스스로 느낄 때
그 상태에서 조금 다르지만 이전 상태를 놓고
옮겨가면 또 쉽게 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을
또 시작하면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처음 개그맨으로 연예활동을 하다
어느 계기로 가수활동을 하고
어느 계기가 되어 다시 영화배우로 활동을 하는
사례를 보는데
그런 것이 그런 것이라고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런 것이 수행자가 갖추어야 할 기본 수행덕목으로
수희 회향 원요라는 항목인데
간단히 말하면 운전자가 어떤 사거리에서
지금까지 운전하던 것과 방향을 달리하여
핸들을 돌리는 그런 활동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곧 더 좋은 상태를 향해 방향을
turn 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수행자의 회향의 항목으로
나열되는 내용들이다.
기존에 작은 음식점만 경영했다면
어느날 이것을 세계로 넓혀서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작한다는 것도 그런 것이고
지금까지 샌드위치만 팔았는데
김밥도 하나 더 추가한다는 것도 그런 것이다.
그렇게 계속 해나가는 가운데
어느 계기가 되면 이제
다른 이는 도저히 하기 힘들다고 보는 형태로
파리로 변신해서 수행을 해보겠다는 상태가
되는 것 뿐이지,
처음부터 자신이 지금까지 전혀 해보지 못한
분야에 뛰어들어야 그런 무량행문에 임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알고 보면 대단히 쉬운 것이기도 하다.
이전까지 대략 30 년동안 자신이
무엇을 쉼없이 꾸준히 해왔는가를 놓고
앞으로는 어떤 무량행문에 들어가서
이것으로 중생을 무량하게 제도할까를 놓고
서원의 시나리오를 구상하면
곧바로 그 기획안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30 년 동안 의료계에서는 한 번도
활동한 적이 없는 이가
갑자기 시태희 박사의 이야기를 듣고
오늘부터 의학공부 등을 시작한다고 한다면
또 말릴 필요는 없는 것이기도 하다.
[* 시태희 박사 = 시바이쩌 태레사수녀 희포크라테스 ]
그래서 그것은 각 수행자가 알아서 할 일인데
다만 처음 무량행문에 들어설 때
자신도 mun 님처럼 당장 파리로 변신해서
암파리를 찾아 나서야 하는가 이런 식으로
너무 이것을 어렵게 여기는 경우가 있으므로
그렇게 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을
여기에 제시하는 것 뿐이다.
어떤 곳은 너무 냄새가 나서
처음 그곳을 방문하는 이는 그것을
불쾌하게 여기는 경우가 많다.
이것도 마찬가지 문제다.
같은 재료를 놓고 거기에 무엇을 더하고 빼면
그것이 아주 묘한 향기로 바뀐다는 것을
살필 수 있다.
수소는 아무리 보아도 수소인데
여기에 산소가 있는 곳에서 불을 당기면
폭발을 일으키고 물이 된다.
그리고 수소와 물을 비교해보면
너무 다른 것이다.
이상한가.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현실의 상황이 문제라고 할 때
거기에 무엇을 더하고 빼고
때로는 나누고 곱하면 모두다 좋아하는 상태가 되는가만
열심히 찾아나서면 되는 것이다.
답은 간단한 곳에 있는데
그 답은 늘 그것을 행하던 이가 쥐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것을 왜 현실에서는 못 찾아내는가하면
그렇게 해서 무엇을 어떻게 하려고 하는가에 대한
답을 정확히 자신부터 적어내지 못하기에
그런 상태가 되는 것이라고 그 사정을 쉽게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그 답을 정확히 적어내면
그것을 장애하던 것들이 모두 그 성격이 바뀌어서
그것을 돕는 형태로 바뀐다는 것 뿐이다.
그래서 쉽게 그 답을 얻어내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즘 향공양을 하는 가운데
향 성분을 유심히 살펴보게 되는데
대부분 이것 저것 섞어서
여하튼 향기가 나는 상태로 만든다는 것이
그 향기의 제작 방안이다.
향수가 비싼 것은 아주 작은 병 하나에 수백만원이다.
그런데 그 제작 원리는 그렇게 복잡한 것은 아니다.
대부분 기본 원료를 병에 적어 팔고 있기에
여기서 힌트를 얻어 꾸준히 그런 것을 찾아나서면
그것이 그렇게 바뀌는 것이다.
일하는 작업장에 음악을 들려주는 라디오만
하나 걸어 놓아도
그런 입장에게는 그 때마다 필요한 정보를
음악 dj 가 쉼없이 알려주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음악을 싫어하고
그런 것이 귀찮다고 외면하면
태양이 열심히 빛을 비추어도
스스로 눈을 감고
어둡다고 하는 장님의 상태처럼
답답한 상태로 남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반대로 임하는 것이
무량행문에 임하는 수행자의 자세인 것이다.
어차피 마찬가지이고
어차피 공수래 공수거인데
그러나 그 어차피 마찬가지이고 공수래 공수거인 바탕을 놓고
그것을 잘 활용해서
나 좋고 남 좋고 온 생명이 제한없고 차별없이 다 좋고
지금 좋고 나중 좋고 오래오래 무한히 좋고
이 측면이 좋고 저 측면이 좋고 두루두루 온 측면이 좋게 하는 방안을
찾아서
마음을 기울이면
그것이 자신의 눈에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마음을 갖지 않고
기울이지 않으면
자신의 눈에 걸고 있는 안경이나
자신의 옷 안에 넣어 둔 지갑도
때로는 보이지 않아 찾아 나서는 경우도 있게 되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런 자세로 임하기에
치매 상태에 진입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점차 그런 상황에 들어가는 것임을
스스로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나중에 옷을 바꿔 입는 상태가 되면
이제 전문적으로 그렇게 임하는 상태가
된다는 것이
지금까지 유무 논의에서 기본적으로
살핀 내용들인 것이다.
[...]
>>>
이미 유무논의와 현실에서 좋음을 얻는 방안에
대해서 기술을 마쳤다.
그러나 아무리 유무논의를 살펴도
현실에서 생활하다보면
여전히 상을 취하여 머물고
그것이 실답게 여겨지는 증상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고 보게 된다.
그렇게 자신과 자신의 것을 보고 머물게 되면
통상 자신이 대하는 5 가지 요소(색수상행식)를 자신으로 보게 되고
자신과 자신의 것에 대한 집착을 갖고
번뇌를 양산하게 된다.
그리고 혹시나하며 먼 일로 생각하던
자신의 늙음과 병과 죽음도
어느 순간 어쩔도리없이 역시나하고 맞이하게 되고
그리고 그런 기본적인 망상을 해결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생사 고통을 벗어나려고 노력하더라도
이런 노력에 장애를 만들어 내는 천마를 만나게 마련이라고 보게 된다.
이것이 유가사지론에서는 4 마의 내용으로 제시되는데
온마(蘊魔) 번뇌마(煩惱魔) 사마(死魔) 천마(天魔)가 그것이다.
즉 생사고통이란 이런 상황에서
3 계 안에서 받게 되는 고통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자신과 자신의 것에 집착하여
탐욕을 일으켜 추구하게 되면
탐욕은 무한한데
그 희망은 잘 이뤄지지 않아
갈증을 느끼며 고통을 받는 상태가 된다.
그 이유는 그런 상태에서 갖는 희망은
자신은 그것을 좋다고 여기며 추구하는 것이지만,
다른 생명은
그로부터 좋음을 얻지 못한다거나
나쁨을 받게 된다고 보기에
하나같이 그 성취를 방해하는 형태가 되어
그것을 성취하기 힘든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그것을 추구하면 추구하는 만큼
자신의 업의 장애는 늘어나는 상태가 된다.
그래서 성취되기전 까지는
희망이 뜻과 같이 성취되지 않아
갈증을 일으키면서 고통을 받는 가운데
그것을 갈구하는 상태가 되고
그것이 성취되더라도
이를 통해 얻는 만족감은
오래가지 않고 곧 사라져버리게 되는데
그러나 자신의 욕망은 무한하기에
쉼없이 그런 구조로 그런 욕망을 대해 나가게 된다.
또 한편 이미 성취한 것들은
자신에게는 큰 쓸모가 없다해도
다른 이게게 베풀지 않고 아끼는 가운데
그로 인해 수많은 번뇌를 일으키게 되고
또 한편 그것이 언젠가는 끝내 무너지고 사라질 것을 알기에
그것을 두려워하면서 임하게 된다.
이것이 기본적으로 아귀가 갖는 특성이고
이런 경향을 지속적으로 갖고 임하면
결국 전문적으로 아귀세계에 들어가서
살아가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수행이란,
이런 구조를 벗어나서
자신과 자신의 것에 대한 집착을 제거하고
수행의 계속에 필요한
최소한의 음식, 옷, 주거로
발우와 시체의 옷을 빨아 기운 분소의 3 벌, 숲 무덤가 나뭇밑
이런 정도만 구비되어도
수행에 임하는 것으로 원칙적으로 제시된다.
현실에서 아무리 전문적인 수행자라도
이렇게 임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여하튼 위 조건을 넘는 것은 모두
다 덤이고 자신의 복이라고 여기고 나머지를 대하여
자신과 자신의 것에 대한 탐욕을 남김없이 제거하고 임하는 것이다.
반면 자비를 바탕으로
중생제도와 불국토의 장엄과 성불과 관련한
무량한 대원을 갖고 수행에 임하게 되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생사고통을 벗어난 상태에서
모든 생명을 제한없고 차별없이
최상의 상태로 이끌려는 취지에서
좋음을 차별없이 베푸는 형태로 임하는 것이고
사정이 그렇기에
그것을 막고 방해하려는 장애가 제거되게 되고
또한 수행자는 이런 수행을 함에 있어
얻을 바 없음(무소득)을 방편으로 집착없이 임하므로
성취과정이나 그 후에도
앞과 같은 문제를 겪지 않게 되는것이다.
그래서 아귀가 갖는 소원과
수행자가 갖는 서원을 비교하면
수행자의 서원은 아귀의 소원에 비해
무량하게 광대무변함에도
수행자는 그것을 즐겁게 잘 성취하고
그 자신도 그로 인해 번뇌를 받지 않고
생사고통을 벗어나 여여하게 임하게 되는데 반해
아귀의 상태는
이와는 모두 반대로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차이로
수행자가 생사현실에 임해
나쁨은 남김없이 제거하고
좋고 좋음만 쌓아가며
무한히 복덕과 지혜자량을 쌓고 굴려 나가게 된다고 할 것이다.
세상에서 처음 생계해결을 위해
구하고 평생 행하는 일은 다양하고 그 종류가 다르다.
어제도 TV 를 통해서 어려운 문제로
부부가 눈물을 흘리면서 임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사실 그 상황은 객관적으로 보면
그런 상황은 아니라고 보게 된다.
예를 들어 다른 이는 자동차가 없어서 한없이 근심인데
어떤 경우는 단지 자동차에 에어컨이 없어서
그것이 문제라고 하는 것과 사정이 같은 것이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주머니에 구멍이 난 상태에서
한없이 채워 넣어도 그것이 끝내 다 채워지지 않는다고
그것을 바라보고 눈물을 흘리자면
한이 없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인류역사상
부처님과 예수님이 가장 한심한 삶을
산 것이라고 해야 한다.
수많은 일을 하는 가운데
무엇을 기준으로 놓고 이 의미를 찾고
또 무엇을 기준으로 그 가치를 평가하는가에 따라
매번 그 내용이 달라지게 된다.
그것이 곰과 사육사와 관객의
서로 다른 입장이기도 한 것이다.
수많은 시간 노력하고 비용도 들이고 나서
곰은 맛있는 식사를 하는가가 중요하고
사육사는 수입과 지출의 차액이 얼마나 되는가가 중요하고
관객은 얼마나 수고하고 많은 즐거움을 얻었는가가 중요하다고 보면서
이것을 달리 평가하는 것이다.
그래서 각기 묶인 상태에서 이처럼
다른 자와 저울을 사용하여 평가를 하는 것은 자유인데
그렇게 매번 사용하는 자와 저울이
곧 자신의 삶의 의미이기도 한 것이다.
여기서 위에 든 비유는
이 가운데 어느 형태던지
그런 사정으로 그런 형태로 삶에 임하면
곤란하다고 제시하고
다 함께 생사고통을 벗어나야 함을 제시한 것이지
이 가운데 곰이 낫다거나
사육사가 낫다거나
또는 관객이 낫다고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유무 논의에서 자세한 내용은
과거에 대단히 많이 반복했기에
다 생략하는데
자신이 눈으로 무언가를 보고
그것이 a 나 자신이라고 여기는 가운데
현실에서 이런 내용을 보게 되고
또 그런 생각을 하게 되면
그에 상응한 실다운 내용이
그처럼 각 영역에 있는 것이고
자신이 눈을 떠 보거나 감거나 관계없이 그대로 있다고 할
실재 영역에서도
그런 내용이 그렇게 있다고 여기며
집착을 갖는 것을
망상분별 증상이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주체는 늘 자신의 주관과 화합한 내용만을 얻는 것이이서
주관과 관계없이 존재한다고 할 실재는
그 내용을 얻지 못하는 것이므로
그 실재는 전혀 없다고 할 것은 아니나
그 내용을 얻지 못하고 공하다고 하는 것인데 [불가득 공]
앞과 같은 망상을 제거하려면
이미 자신이 현실에서 얻는 내용
즉 평소 늘 잘 보고 생각하게 되는 내용부터
그런 관계인가를 잘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미 이전 글들에서
현실에서 자신이 자신이라고 보는 것을 놓고
그렇게 망상을 일으키게 된 사정을 제시하면서
그 사정을 잘 살펴서
그 망상을 제거해야 함을 이미 제시한 바 있다.
자신이 눈을 떠서 얻는 것이
감각현실이라고 할 때
그것은 다 같이 자신의 마음에 들어온 감각내용이다.
그런데 왜 그 가운데 일부를 자신이라고 보고
나머지는 외부 세계라고 보는가.
그런데 대부분 그런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대하게 되는 그 사정을
상-락-아-정의 사정에 대비해서 살폈던 것이다.
그래서 아무 근거나 사정없이
그런 부분을 자신이라고 보면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임하는 것이 아니고
그런 사정 때문에
그런 부분을 자신이라고 보면서
현실에 임하는 것이지만,
바로 그런 사정이 곧
그렇게 그런 부분을 자신이라고 보는 것이
잘못이라고 보아야 할 사정이 됨도
함께 제시해 살핀 것이다.
즉 자신이 눈을 뜰때마다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이 늘 그렇게 보이기에
그것은 자신이고
나머지부분은 매번 그 내용이 바뀌는 것으로
그런 나머지 부분은 손님처럼 일시적으로
그 주변에 있는 것이라고 이해하지만,
그렇게 보는 그 부분은 사실은
40 년전 30 년전 그리고 앞으로 10 년 후 20 년 후
이런 식으로 살핀다면
그 사이에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것임을 제시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공통점은 오히려
자신이 매일 조금씩 식사해 섭취하여 자신의 생체를 만드는데
사용하는 레고블럭과 같은 재료가 있다고 할
지금 순간의 배추밭이나 축사에 있는 생명이
자신과 더 공통점이 많다고 보거나,
또는 자신이 지금 생체내 레고블럭을 배설하여
그것이 나가있는 강가나 들판의 내용이
자신과 더 공통점이 많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육체가 그러듯
자신의 정신내용도 사정이 같은 것이다.
비유하면 어떤 소설가의 소설 내용이 어제의 자신의 정신이라면
내일은 또 다른 소설가의 소설이나
영화나 드라마 시나리오가 자신의 정신내용일 수도 있고
나중에는 부처님과 같은 상태도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 사정으로
그런 내용을 자신이라고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이다.
그보다는 40 년 30 년 이런 시간을 가며
그것이 모두 변해도
여전히 일정하게 그런 내용을 생생하게 받아들이면서
현실에 임하게 하는 그런 근본정신을
오히려 그 주인이라고 보면서
이 오류를 시정해야 한다고 제시한 것이기도 하다.
나머지 사정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움직이자고 마음을 가지면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지고
그래서 사는 동안 자신의 뜻과 같이 변화시키는 부분이
바로 자신이 현실에서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이기도 하다.
즉, 자신이 걸어가고자 하면
그 뜻에 따라 움직이고 변화한다고 보는 부분이
자신이 보는 전체 부분 가운데 자신의 몸으로 보게 되는
그 부분인 것이다.
그러나 경전에서
과연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나이겠는가라고
반문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는 즉
그렇게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자신의 뜻에 의해서 그런 것이고
그래서
자신의 뜻과 달리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그런 부분을
자신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하고
묻는 내용이다.
그리고 사정이 그렇기에
그런 부분을 나라고 보고 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지적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일시적이지만 매순간
그런 부분이 자신의 뜻에 의해 그렇게 변화된다고 여기기에
또 그런 부분을 붙잡고 자신이라고 여기며
임하는 가운데 계속 살아가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자신의 뜻에 따라 일시적으로
그렇게 따라 움직인다고 보는 부분은
사실은 버스 운전사가 버스를 몰고 갈 때
버스가 같이 움직인다고 해서
그 버스 전체를 자신이라고 보는 것과
사정이 같다고 제시한 바 있다.
그것은 버스 운전사의 망상이 될 지는 모르지만,
사정은 그렇지 않음을 제시하는 것이다.
당장 버스안의 승객부터 그에 동의하지 않고
일정한 목적지에 도착하면
승객은 미련없이 내리고 버스를 떠나 버리듯
자신의 몸과 마음안의 그 모든 요소도
이와 성격이 비슷한 것이다.
그래서 알고보면
자신의 몸이라고 보는 그 부분은
수많은 미생물이 자신의 음식으로 여기고 대하거나
또는 자신의 집이나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로 대하는
그런 부분이기도 한 것이고
그래서 자신이 자신의 몸을 놓고 자신이라고 본다면
그 몸은 수많은 생명체가 빙의된 상태로
함께 이를 점유한 가운데
그래도 자신이 조금은 주인인 듯
그런 몸이란 버스를 움직이는 운전사 역할을
임시로 행하는 상태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몸이라고 보는 것은
일시적으로 자신이 입고 다니다
때가 되면 벗어 버리는 옷처럼 관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생사를 통해
매번 옷처럼 버리고 입어가면서
매번 모습을 달리한 버스에 올라타는 것처럼
몸을 바꾸어 가는 그 주인은
무엇이라고 보아야 하는가하면
앞에서 본 근본정신이
차라리 그런 것이라고 보아야 함을 제시하는 것이다.
나머지 부분도 사정이 같다.
현실에서 자신이 손을 뻗어 컵을 쥐는 모습을 대하거나
컵을 손으로 두드려 소리를 내는 과정들을 놓고
손은 자신이고 컵은 자신의 손이 대하는 외부 대상이라고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이 관계를 그렇게 이해하지만,
사실은 이 모두가 이미 자신의 마음에
얻어 놓은 감각 내용인 것이다.
감각내용의 각 부분이
서로 어떤 대상과 이를 대하는 주관의 지위에서
서로 관계하는 것도 아니고
또 한편,
시각정보가 촉각정보나 기타 촉각정보를 얻어내는
원인요소가 되는 것도 아닌 것이다.
그래서 이처럼 자신의 몸 부분을
다른 외부 대상과 구별되는 주체라고 이해하는 것도
엉터리 망상분별인 것이다.
그런데도 그렇게 매 상황에 이해하면서 대하게 된 것은
처음 이번 생에 이런 형태로 삶을 시작하는 단계에서
감각내용과 분별내용이 관계하는 형태로
근본정신과 근본정신이 분화해 낸 제 7 식이 관계하는 가운데
일정한 부분을 나라고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아견을 갖고 집착하는 가운데
그런 바탕에서 각 기관과 앞과 같은 각 정신을
분화생성시켰다는 사정이 바탕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상태에서는 이 체계가 완전히 붕괴되는 생사과정과
업에 의해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생명형태에
근본정신이 얹혀 새로운 옷을 입기 전까지는
현 상태처럼 현재의 옷을 자신으로 보고 생활하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다고 보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렇다해도 그것이
외부대상과 상대하는 주체나 주관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도
함께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한편,
이미 생물학 지식을 통해
자신이 눈에도 잘 보이지 않는 형태에서
현재처럼 계속 변화해 왔다고 대부분 상식적으로 이해하는데
이런 가운데 자신은 그래도 다른 생명체와 달리
인간으로서 아주 특별하고 가치있는 형태라고 임하기 쉽지만,
사실은 이 변화과정에서
자신을 대표할 형태도 얻을 수 없는 것이고
이 변화는 또 이 생만으로 끝나는 것도 아닌 것이다.
이미 생물학책을 보면 태내에서 초기 발달과정에서는
어류 파충류 양서류 형태와도 구분이 잘 되지 않는다고도 하고
dna 구조를 놓고 보아도
이들 각 생명이 큰 차이가 그다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등의 내용도 제시한다.
그래서 mun 님의 암파리 화두를 통해서
파리도 자신의 몸은 그처럼 아끼고
수파리는 암파리를 좋다고 여기고 가까이하는 것처럼
자신도 그런 최면 상태와 유사하게 임하는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고
자신에 대해
자신은 특별히 그렇게 애착을 가질만한
좋고 아름답고 가치있는 어떤 것이라는 망상을 갖고
집착을 갖고 임하는 자세를 벗어나고
평소 그런 망상분별과 집착을
잘 제거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대부분
이런 상태로 망상분별을 일으켜 현실에 임하고
자신과 자신의 것을 추구하는데
이것이 사실은 앞에서 말한
욕계의 최고상태까지 이어지면서
모두 번뇌에 묶여 사역을 당하고
다른 생명을 사역시키는 관계에 놓이는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자신의 뜻을 잘 성취하고
즐거움을 얻는다고 보는 것이
역시 욕계 타화자재천의 천자이지만,
문제는 그 자신부터 사실은
그런 번뇌 망상에 묶여 사역을 당하는 상태인 것이다.
앞글들에서 목동의 비유를 들어
이 욕계안에서 어떤 생명을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려 하면
당장 목동부터 그것을 꺼려하게 되고
더 나아가 목동에게 사역을 당하는 입장인 소 역시도
그 상황의 의미를 모르고
당장 자신의 집착하는 사료나 자신의 생명에 집착하여
그것을 두려워하는 상태로 임하는 것이 보통인 것이다.
그것이 유가사지론에서 제시하는 4 마의 내용과
관련되는 것이다.
또 이런 상황에서 서로 이해가 달라
시시비비를 다투며 임하는 것인데
이런 가운데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한 단면만 보면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라고 하지만,
이들은 사실은 무수한 시간 동안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를 서로 엇갈려 바꿔가며
중첩적으로 얽혀 있음을 보게 되고
그것이 주체와 주체간에
그리고 과거와 현재 미래간에
그리고 이측면과 저측면 간에 두루두루
그렇게 중첩되어 있음을 보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과장은 사장으로부터 가해를 당한 피해자인데
그러나 대리에게 피해를 주는 가해자이기도 하고
과장은 과거 사장에게 가해를 한 가해자이고
지금은 사장으로부터 피해를 당하는 피해자이고
과정은 급여의 측면에서는 피해자인 듯한데
시설 이용의 측면에서는 가해자이기도 하고
이런 식으로 한 주체가 복합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는 그런 의미다.
그래서 이런 상태에서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면
이 모든 관련 당사자를 다함께
생사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좋고 좋은 상태로 옮겨야만
이것이 근본적으로 해결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것이 불교전문용어로 '천도'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게 하지 않고
일시적으로 어떤 한 측면의 한쪽을 억누르면
그것은 지금의 문제를
장차의 다른 주체나 다른 측면의
문제로 옮겨 놓는 것 뿐인 것이다.
법정에서 시비를 다툴 때
소송의 최고 상태는 화해라고 보는 것인데
그렇게 하지 않는 경우
어떤 소송에서 패한 이는
비록 그것은 그렇게 패했지만,
이제 다른 공격수단을 찾아서
그 상대를 공격하려는 경향을 대부분 갖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나중에는 루팡형 해결사가 따로 등장하게 된다고
보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당사자는 이유나 사정도 잘 모르는 가운데
어떤 피해를 갑자기 당하기도 하는데
그러나 그렇더라도
이런 망정에 점유된 정신이
어느 한 순간 그것을 점유하는 내용이 제거되는 상태가 되면
또 곧바로 그 사정을 다 알아내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현실에서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보지만,
사실은 그렇게 죽음을 맞이한 이가
그 상태에서 선배가 되어
그 사정을 다 살핀 가운데
상대를 기다리거나 상대가 알지 못하는 형태로
해를 가하는 상태가
서로 무한히 반복되는 사정이 그것이다.
닭을 잡으면 닭이 죽은 후
계속 자신의 옆에서 자신의 머리를 쪼아댄다거나
양을 먹으면 양은 사람이 되고
사람은 양이 된다는 내용들이
경전 등에서 제시되는데
현실에서는 그럴 이치가 없다고 보지만,
현실에서 보는
자신이나 남과 같은 부분을
그런 각 주체의 본 내용이라고 보는 것부터가
잘못인 것이고
각 주체의 정신은 크기나 형체가 없는 가운데
모기나 코끼리나 모두 그 근본정신은
다르지 않다고 보는 가운데
이들의 관계를 살피면
바로 이처럼 무한히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로
서로 얽혀서 그렇게 임하는 사정임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업에 의한 장애를 해소하지 못하고
계속 망상분별에 바탕해
자신과 자신의 것이 있다고 보고 임하는 가운데
뜻과 말과 행동의 내용을 올바른 형태로 변화시키지 못하면
그 근본 해결은 무한 겁을 보내도
이루기 힘들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사정이 어렵다.
그런데 단순히 현실만 놓고 생각해본다면
앞에서 평소 자신과 자신의 것을 집착하고 임하는 이가
현실에서 대학교나 병원이나 사회 공익시설을
크게 세우고 운영할 가능성이 많은가.
아니면 그저 세상에 자신과 자신의 것으로
자신이 집착을 가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임하면서
현실에 임하는 이가
그런 가능성이 많은가만 놓고 살펴도
현실에서 자신과 자신의 것에 집착하여
임하는 경우는
자신의 쓸데없는 무한한 욕망부터
잘 성취하지 못한 가운데
생사고통을 깊게 받아가며
현실에 임하는 한편
그 반대의 경우는 또 그 반대임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온 생명을 생사고통에서 구해내는 무량한 서원은
그 서원대로 즐겁게 잘 성취하고
자신과 자신의 것을 놓고 일으키는 번뇌나
그로 인해 받는 생사고통은 받지 않는 그런 삶을
앞으로 살아가도록
변화를 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이 곧 수행의 내용인 것이고
그 사정이 왜 그런가를 이해하는 것이
경전 공부이기도 한 것이다.
그 사정을 아주 짧게 줄여
현실에서 실천해야 할 내용만
간단하게 압축해 제시하기도 하지만,
여하튼 수행자는 어느 계기가 되면
왜 그런 내용이 그렇게 제시되는가 하는
자세한 사정과 배경도
시간을 내어서 스스로 이해하고
임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
실재 - 감각현실 - 관념분별의 관계를 살필 때
실재 그 자체가 곧 감각현실인가.
또는 그 반대로 감각현실 그 자체가 곧 실재인가
이렇게 놓고 그 상호관계를 살피고
한편, 사정이 그렇지만, 그렇다고
실재를 떠나서 감각현실을 얻는가.
이런 형태로 다시 살피는 가운데
그 상호 관계가 전혀 무관한 것도 아님을 같이
살펴야 한다고 제시한 바 있다.
이런 구조는
감각현실이나 관념분별의 관계를 살필 때도 마찬가지고
실재와 근본정신의 관계를 살필 때도 마찬가지고
나아가 정신과 정신에 맺힌 내용의 관계를 살필 때도 마찬가지고
또는 거울과 거울면에 비친 모습의 관계를 살필 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는
유와 무의 어느 한 극단에 치우지지 않는 가운데
있는 그대로 내용을 잘 파악하고
망상분별을 제거하기 위하여
각 내용을 검토할 때 사용하는 기본방식이 된다.
그런데 이런 방식만으로
이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여전히 망상분별을 고집하는 경우는
결국 something special 이론이나 representative 이론을
선호하고 여전히 집착을 갖고 임하게 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자신이 무엇을 보고
그런 부분을 a나 자기자신이라고 생각하면
그런 내용이 감각현실에도 그렇게 있다고 주장하고
실재도 그런 내용이 실답게 있어서
그런 내용을 얻는다고 주장하는 가운데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내용을
하나같이 실다운 내용으로 여기고 집착하면서
고집하고 나아가게 마련이다.
그리고 대부분 지옥과 아귀 축생계의 수용소에
집합하게 되는 생명들의 상태가 이런 상황이다.
그래서 수능엄경 등에서는 이런 사정을
한 주체의 정이 반절이상이라거나
7 분이상이라거나
9 분 이상이라거나
이런 식으로
각 주체별로 그 정도는 다르지만,
그렇게 각 주체가
전도망상을 일으키고 집착을 갖고 임하는 정도에 따라서
그와 같은 세계에 전문적으로 임하여
생을 살아가게 되는 사정을 제시하는데
이런 상태는
현재의 삶의 현실만 놓고 살펴도
그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문제는
그 각 당사자의 입장만 놓고 살피면
하나같이 그 당사자 입장에서는
그 자신의 자세가 가장 정당하고
타당하다고 보게 된다는 점이 문제라면 문제다.
그것은 심지어 강간범이나 강도 살해범이라고 해도
그 사정이 그와 같은 것이다.
자신의 입장에서 자신에게 좋다고 보는 것을 행하고
그래서 아무 문제가 안 된다고 여기는 입장은
가정 주부가 집에서 닭을 잡아 요리할 때도
그 입장이 마찬가지다.
그러나 문제라면 여기서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그 닭이 그것을 동의하지 않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그 입장이 바뀌면
자신도 닭처럼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임하는 것이다.
사정은 간단한데 욕계에서 겪는 이런 심한 생사고통은
그 사정이 실답지 않은 것을 놓고
그렇게 매번 자신과 자신의 것이라고
강하게 집착하면서
그에 대한 반응을 그렇게 취하기에
그렇게 된다고 그 사정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차피 다 미래에 성불할 존재임에도
하나같이 자신이 상대를 대할 때는
아무렇게 대해도 되는 하찮은 존재로 보면서
그렇게 함부로 해를 가하는 것이고
그 반대입장은
단지 막연히 가능성만으로
장차 부처님이 될 가능성을 갖는 입장일 뿐이며
또 단순히 언젠가는 가공할
타화자채전의 지위에 오를 가능성만 갖는 것 뿐이고
현실에서는 아무 힘이 없는 미미한 존재인 것이지만,
여하튼 그런 입장에서조차
당장 그에 동의하지 않고
그렇게 보지 않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입장이 바뀌어
그 상대가 정말 타화자채천의 천주가 되는 상황에서는
어느날 갑자기 지옥에 집단 집합하여
고통을 받는 상태가 되는 것이라고
여기서 그 사정을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경우 물론 그런 타화자재천의 천주가
자신이라면 아라리요라고 좋아하게 되겠지만,
그러나 그 반대로 되면
장구하게 아리고 쓰린 고통을 계속 받는 가운데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낳네라고
하지 않을 도리가 있겠는가.
그래서 일단
자신이 눈을 떠서
자신의 몸을 윤곽을 떠서
그 부분을 자신이라고 볼 때
평소 그 대응관계가 과연 그런가부터 잘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부분에서
귀나 눈 하나만 떼어 내거나
또는 점 하나만 떼어 놓고
우선 그것이 자신인가를 진지하게 스스로 물어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수없이 달리 나뉘고 묶어서 대할 때마다
왜 하나같이 자신이 아닌 부분을 놓고
어느 순간 그렇게 윤곽을 떼어서 대하면
또 그것을 자신이라고 여기게 되는가
이 퀴즈부터 잘 풀어보아야 한다고 보게 된다.
사실 위와 같이 각 부분을 떼어서
그것이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내용인가를 물어가며
그렇게 그런 내용이 아니라고 볼 부분을
하나하나 검은 색으로 칠해나간다면
결국 전체가 그런 내용이 아닌 부분으로서
그 전체를 검은 색으로 칠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그렇게 윤곽을 잡아 다시 물으면
또 그 때는 그것이 a 라거나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이처럼 각 부분을 묶고 나누고 하면서
생각을 일으킬 때마다
정말 그 감각현실 부분은 그렇게 바삐 서로 묶이고 나뉘고 하기는 하는가
하는 문제도 살피고
그런 가운데 정말 매번
새로운 관념을 일으키고 대한다면
그 현상이 과연 감각현실 영역에서도 있는 일인가도
잘 음미해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이처럼 감각현실과 그에 대해 일으키는 관념분별이라는
이 두 내용을 동시에 얻는 가운데
이것을 서로 접착시켜서 대하기에
그런 전도망상 증상이 발생하고
이를 바탕으로 욕계의 세계가
그렇게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일단 이 문제를 잘 검토할 필요가 있다.
한편, 이와 마찬가지로 실재와 관련해서도
현실에서 각 부분을 나누고 묶고 하는 가운데
자신의 실재는 무엇인가.
저 꽃의 실재는 무엇인가 이렇게
문제를 제기하면서
실재와 다른 내용의 관계를 살피기 쉽다.
그러나 사실은 실재에는 그처럼
나누고 묶어가면서
각 부분은 a 또는 b 이런 식으로 시설하는 것부터가
가능하지 않다는 것부터 잘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실재를 자꾸 인과 관계에 넣어서
실재의 무엇이 현실의 무엇을 만들어 내었다는 식으로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실재의 내용은 그처럼 넣고 빼고
그런 가운데
무엇이 있고 없고를 분별할 수 있는 내용 자체가
아니라는 사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
현실에서 손을 마주치면 소리가 난다는 관계가
시각정보로 청각정보가 얻어진다는 주장처럼
엉터리 연결이라고 지적하면
이제 이 내용을 그대로 실재 영역에 밀어 넣고
이 관계를 이해하려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실재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고
그런 시설도 처음부터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실재에서 무엇이 있다가 없으면 어떻게 되고
무엇을 넣고 빼고 함에 따라
무엇이 있고 없는 차이가 있게 된다
이런 내용 자체를 여기에 시설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전에
이미 자신이 얻는
감각현실과 관념분별 사이에서도
그런 관계성이 확립이 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이 눈으로 보는 노란 색은
귀를 통해 얻는 정신 영역에서는 무엇인가.
그리고 귀로 든는 이런 소리는
눈의 정신 영역에서는 과연 무슨 색깔인가.
여기에 그런 비례관계나 유무의 내용의
상응관계가 파악이 되는가.
눈의 영역에서는 있다고 해도
귀의 영역에서는 아예 그런 것 자체가 얻어지지 않는 것이기도 하고
또 그 반대도 마찬가지로 반대가 되는 경우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그 내용을 얻는 것 사이에서도
자신이 생각하듯
어떤 내용을 어떤 영역에서 얻으면
다른 영역에도
그에 비례하고 상응하는 어떤 특별한 무엇이
그렇게 있어서 그렇다고 보기는 힘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꿈에서 황금 꿈을 꾸었다고
그 황금을 그 꿈을 자면서 꾼 침대에서 찾지 않아야 한다고
하는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감각현실을 대하면서
그에 대해 어떤 분별을 하면
그런 내용이 그 감각현실에 있다고 여기면서
임하는 것은
마치 꿈에서 어떤 내용을 얻으면서
현실을 대하는 어떤 이가
꿈의 내용을 그대로 현실에 있다고 하면서
이 둘을 접착시켜 놓고 자꾸 현실을 대하는 것과
상태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는
현실에서 감각현실을 얻고
그에 대해 관념분별을 일으킨 이가
이 두 내용을 그대로 접착시킨 가운데
그런 감각현실 부분을 그런 생각을 바탕으로
그 부분을 a 나 자신이라고 여기며 떼내고
그렇게 그 부분을 취하고 머무는 가운데
계속 생각하고 말하고 행위하는 업을 행하기에
이후 사태는 바로 그에 바탕해
그런 생사가 있다고 여기며
그런 생사고통을 받아 나가는 사태가 된다고
그 사정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관계를 좁고 짧고 얕게 살피면
그 관계를 잘 살피지 못할 수 있고
그래서 현실에서는
이런 망상분별을 바탕으로 해서
자신과 자신의 것에 집착을 일으켜 갖는 가운데
자신이 탐욕을 일으킨 대상에 장발잔 형태로 임하거나
투우장에서 돌진하는 소처럼 욱하는 형태로 임하거나
루팡처럼 자신나름으로는 상대에게 피해를 주어도
교묘하게 잡히지 않으리라고 보면서 어리석은 지혜를 발휘하며 임하거나 하게 되지만,
그러나 넓고 길고 깊게 살피면
모두 이는
생사고통을
그만큼 넓고 길고 깊게 받아나가게 되는
사정이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실은
장래 언젠가 중간에는
타화자재천왕이 된다거나 할 분이기도 하고
또 하나같이 장래 끝내 부처님이 될 분을 놓고
서로 그렇게 대하면서
그렇게 함부로 행하는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계기로든
이것을 시정하고
수행모드로 변해야
이 문제가 근원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
>>>
왜 외관상 하나의 내용으로 보이는데
그것을 수행자가 각 상황 각 관계마다
다른 방식으로 임해야 한다고 제시하는가.
그 이유나 취지가 무엇이고
왜 이것이 모두
그 실상이 공하고 무아 무자성이라는
하나의 이론이나 원리에 의해
모두 도출되는 내용이고
또 그에 의해 설명이 된다고 하는가.
이런 것이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설명하기가 복잡한데
아주 쉽게 설명하자면
이를 신혼부부의 천일야화의 사정과 같다고
설명하게 된다.
일단, 세상에서 모두 탐을 내고 좋아하는 보석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것을 누군가 몰래 훔치려 한다면 무엇이라고 하는가.
그런 것에 욕심을 일으키고 훔치는 것은 나쁘다.
훔치지 말라고 하게 된다.
이것이 상식적인 내용이다,.
부처님도 수행자에게 역시 같은 말씀을 하신다.
그것이 본성적인 계에 해당하는 내용으로서
살, 도, 음, 망의 계율이라고 할 수 있다.[성계=본성적인 계율내용]
이는 각 생명이 그 자신의
생명 신체, 재산 가족, 진리 이런 것에 대해
집착하는 것이
거의 99.9 % 라는 것을 바탕으로 한다.
자신의 생명, 신체를 침해하는 것을
거의 대부분 고통스럽게 여기고
수행자도 현실의 생사에 임하는 이상
그 기본 사정이 이와 거의 다르지 않고
그렇게 자신의 생명이나 신체를 침해하는 다른 상대가 있으면
그것을 나쁘다고 여기고
그것을 막고 보복하고 응징하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자신만 유독 그런 것이 아니고
모든 생명이 거의 대부분 그렇다,
이상한가.
이런 가운데 정말 이상한 것은
자신만 유독 특별히 그런 줄 알고
그런 가운데 자신이 배가 고파 맛있는 음식이 먹고 싶다거나
좋은 것을 갖고 싶으면
자신만 그렇다고 여기고
그런 좋음을 얻기 위해
다른 생명을 함부로 해치고 죽이면서
그 일은 자신이 좋음을 얻기 위애 불가피한 것으로서
별 일이 아니고 당연한 것이라고 무시하고
이를 과감히 행하려는 경우가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단순한 이 이치를
이해하는 것 자체가 상당히 어려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신의 손톱이 하나 빠지는 것은
지극히 고통스럽다는 사정을
아무 것을 배우지 않는 어떤 생명이라도
그런 사정에 처하면 그로부터 곧바로 쉽게 아는데
그와는 달리
자신의 좋음을 얻기 위해 자신이
다른 생명의 손과 발을 갈기갈기 찢고
그로 인해 다른 생명이 지극한 고통을 느끼며 피를 흘려도
정작 그는 그로부터 고통을 느끼지도 못하기에
그것은 자신에게 아무렇지도 않고
너무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거나,
심지어 통쾌하기까지 하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다는 의미다.
그래서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그가 알게 하려면
입장만 잠깐 바꾸어 놓으면 된다고 보지만,
그러나 정작 그 당사자들은
거의 일평생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자신의 입장만 늘 생각하며 생활해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그런 이가 그런 자세로
뜻을 실현하기 위해서 평생 연구하고
노력하여 얻게 되는 그런 지혜나 능력이 아니고
앞과 같이 단순하게 그 사정을 이해하고
세상을 대하는 마음자세가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되는 사정이 있다고 보게 된다.
그런데 만일 그렇게 해서
마음 자세를 취하지 못하는 경우는
이제 그 각 상황을 놓고
매번 자신이 입장과 역할을 바꾸어 가면서
그 고통을 직접 하나하나 겪어 나가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과정에서는
고통의 대량 증폭 생산의 문제도 함께 보게 된다.
오늘날 어느 자동차 회사의 회장이
대량생산체계로 한 번에 수십만대의 차를
만들면 그 수입이 어떻겠는가.
하나씩 일일히 손으로 만들어 파는 것보다
몇십만배의 수입을 얻을 것이다.
그런데 그 반대 측면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누구나 한 번 생각하고 말하고 행위해서
수천만 수억의 생명에게 고통을 주는 것도
가능하다.
이 경우를 놓고 그 반대처럼
자신이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되었다고 여겨야 하고
이런 단 한번의 행위로 이후
자신이 수십 수천만의 고통을 반복해 받아 나가야 하는데
정작 이 경우는 또 엉뚱하게 생각한다.
자신은 한 번만 그런 일을 했는데
왜 그렇게 많은 고통을 장구한 기간에 걸쳐
되돌려 받아야 하는가.
그런데 이 문제를 앞 자동차 회장님의 입장에서도
그렇게 생각하겠는가.
사정이 그렇지 않은데도
그는 얄팍하게 자신에게 매번 유리한 형태를 취해
그렇게 되야 한다고 희망하고 생각하는 것뿐이다.
자신은 자신의 좋음을 얻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다른 생명의
생명이나 재산을 함부로 침해하고 해쳐도 무방하다.
그리고 자신이 살아가는 한
자신은 그렇게 계속 그런 상태로만 있게 될 것이고
그 반대로 자신이 상대하는 상대처럼
억울하게 붙잡혀
지극한 고통을 받게 되는 경우는 전혀 없을 것이다.
이렇게 믿고 나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럴 이치나 근거도 없지만,
사실 그렇게 매순간 임할 때
자신으로부터 고통을 받았던 다른 생명이
알고보면 자신의 상황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그 반대의 내용이
과거던 미래던 그것이 자신 자체의 모습임을
확실히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부처님이 과거의 자신의 모습이나
미래의 모습이 궁금하다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도 그것이다.
궁금한가. 궁금하면 오백원
[오백원=깨끗하고 청정한 서원의 중요성을 깨닫자.]
지금 자신의 모습을 보면 된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현실에서 어떤 이가 고통을 받는데
그것을 두고 통쾌하다고 여기면서 즐거워하는 경우가
있다고 해보자.
일반적으론 그런 상태를 보면
연민의 정을 느끼고 안타깝게 여길 수도 있는데
왜 유독 그는 그런 상황에서 그런 마음을
일으켜 갖는 것일까.
이에 대해 앞 뒤로 무언가 내용이 빠지고 부족해서
그렇게 임하는 상황이 이해가 잘 안 된다면
거기에서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보자.
그것을 두고 통쾌하게 여기는 입장은
거울을 놓고 그 상황의 반대의 내용은 무엇일까를
거꾸로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러면 상대가 그런 고통을 받는 내용은
사실은 그가 과거나 미래에 받았거나 받을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이것이 잘 이해가 안 되면
차근차근 그 과정을 하나하나 살펴야 한다.
그래서 만일 그 상황에서 자신이 그렇게 고통을 받으면
그 상황에서 앞으로 어떤 계획과 시나리오를 열심히
구상해나가겠는가 이것을 놓고 생각하면 쉽다.
보통 그러다가 그냥 죽게 되면 그것이 다 끝난다고 여기기 쉬운데
그렇지 않다는 내용을 지금까지 설명해왔다.
쉽게 이 사정을 이해해보자.
자신이 5 살부터 자신이 살아온 내용이 기억이 난다면
5 살부터 그 이후 모든 것이 변하고 사라지고 했는데
그렇게 그 모든 것이 어느 순간 다 사려졌는데도
그래도 계속해서 유지되는 것이 무언가를
잘 찾아내야 한다.
[...]
이번에 한 분의 장례식에 다녀왔는데
그분은 대단히 장수하시다 돌아가신 분이지만,
그래도 막상 돌아가시면 누구나 그것을
안타깝게 여기게 되는 것이 사실 아닌가.
그것은 그 영혼이 생각해도 또 그런 것이다.
그래서 그 때도
본인이 마음에서 념해드린 내용도 그런 것이다.
지금 돌아가셔서 스스로 안타깝다고 여기고 슬퍼한다면
왜 5 살 때 모습은
10 살이 된 이후로 그것이 다 사라져서 도저히 찾을 수 없는데
왜 10 살 이후로는 그에 대해 애통해하고
특정일에 기일을 정해 제사를 지내오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 이후 마찬가지로 10 살 때 모습도 그렇고
20 살 때 모습도 그렇고
30 살 때 모습도 그렇고 ...
다 마찬가지다.
이제 90 살이 되어 돌아가신 분이 그것을 놓고
그 90 살때의 순간이나 모습을 놓고
그렇게 집착을 갖고 안타깝다고 여긴다면
사실은 앞의 내용을 놓고도 다 그래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것을 놓고 안타깝게 여기는 존재가
그런 상황에서도 있다면
그것은 정작 무엇인가.
그것은 또 5 살 때 모습이나 육체나 정신안의 내용은
20 살 때 다 없여졌다고 누구나 보지만,
그래도 5 살 때나 20 살 때나 계속 그대로
유지되었다고 보는 것은 여기서 무엇인가.
그것이 또 퀴즈인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죽음 이후에는 그런 것을 놓고
안타깝게 여기고 할 존재 자체가 없다고
쉽게 생각하는 것이지만,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앞의 사정을 놓고 잘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래도 생사 전후로 맞이하는
세계가 달라진 것만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하튼 죽음 이후에는
그 분이 남아 있는 다른 분들에 대해서는
그 죽음의 선배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가 단순한 것이 아니다.
앞의 내용만 놓고 보면
아무리 변화하고 사라지고 또 생겨나도 해도
계속 이어 살아가게 되는
주체나 생명의 본질로서 근본정신이 있다고 할 것인데
그것은 그런 측면에서는 다행이라고 할 것이지만,
그러나 문제는
그 생명이 이를 바탕으로 어떤 상태로
그 이후 삶을 다시 맞이하게 되는가가
이제 문제인 것이다.
현실에서 가장 안타까운 경우를 놓고 생각하면
그 이유도 알기 힘들고
단지 안타깝다고만 생각하게 되는 경우로
삶의 대부분을 고통에서 살다가는
축사의 생명을 안타깝게 여기는데
같은 생명인데 왜 하필이면
그 축생은 그렇게 살다가 가야 하는가
이런 문제를 놓고 보면 한편 안타깝다고 보지만,
그래도 무언가 사정이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각 생명이
하필이면 왜 그처럼 고통받는 상황에
묶여서 삶을 살아가게 되는가에 대해
좁고 짧고 얕게 관찰하지 말고
넓고 길고 깊게 관찰해서
방향을 잘 잡아 나가야 할 필요가
여기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수행자도 생사 즉 열반이라고 관하면서
생사를 받는데
그것이
삼계 육도를 묶여 윤회하는 일반의 입장으로서
축생의 모습으로
또는 아귀의 모습으로
또는 지옥 중생의 모습으로
각 세계에 태어나 살아가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생각할 수 있지만,
그 부분이 다른 것이다.
수행자는 어느 세계에나 묶임이 없이
그것이 곧 니르바나의 상태라고 받아들이면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각 세계에 임한다고 한다면
다른 경우는 그렇지 못한 것이다.
여하튼 그런 관계로
죽음을 맞이했거나
그렇지 않거나
어느 상황에서나
그런 묶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안을 놓고
공 무상 무원무작
3 해탈의 문을 제시하면서
수행의 방안을 제시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것이 전체적으로
각 경우마다 마치 다른 내용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기에
그 관계나 내용이 서로 이해가 잘 안 된다고 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이제 이것을 다음과 같이 생각해보자.
세계에서 누구에게나 일반적으로
좋음을 준다고 보는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보석이 있다고 하자.
이 상황은 같은데
이 상황에 대해 수행자에게는
이를 무엇이라고
기본적으로 제시하는가.
가장 기본적으로
그 정지화면에
그런 것은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그런 것이 ~'이다' '~아니다' '있다' '없다'를
모두 떠난다는 의미다.
왜 그렇게 제시하는가를 다시 살펴보자.
일단 현실에서 대부분
눈을 떠서 보석이라고 보게 되는 내용을 놓고
그것이 보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때 그 감각현실을 놓고
그것이 그대로 그런 관념분별의 내용인가 묻는 것이다.
이 때 사정이 그렇지 않으므로
이것은 그런 감각현실은
그런 관념분별 내용이 '아니다'라는 측면을
제시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런데 다시 묻는 것이다.
그런 관념분별은 그렇다면 그런 감각현실을 떠나서 얻는 것인가.
그런데 그 경우 그에 대해 그런 관념분별을 했다면
그 둘의 관계는 또 그렇지는 않은 것이다.
그런데 이 측면만 놓고 보면
그 감각현실을 대해 그런 관념분별을 일으켰고
그것이 서로 떠나 얻는 내용이 아니므로
그 감각현실에 대해 그런 관념분별을 행하는 것이
전혀 엉뚱한 것은 아니고
그래서 그 감각현실이 곧 관념분별의 내용과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라고 보아야 하지 않는가
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prince 님을 포함하여
이런 일반적인 입장에서는
또 그 감각현실은 곧 그 관념분별이거나
그런 내용이 그 안에 있다라고
이렇게 이해하고 머물기 쉽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런 양 측면을 모두 떠나야 함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 양측면은 모두 양 극단인 것이다.
그래서 그런 양극단의 분별로서
~이다 ~아니다 있다 없다 등의 모든 분별을 떠나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감각현실은 그처럼 생생하게 매 순간 얻지만,
그에 대해 생각하는 내용처럼
무엇이다라고 할 수도 없고
무엇이 아니다라고도 할 수 없는 것으로서
그처럼 매 순간 생생하게 얻는 것이다.
한편 이런 감각현실과 그런 관념분별을 일으켜 얻을 때
그 모든 내용의 본 바탕이라고 할 실재는
그 내용을 직접 얻지 못하지만,
아주 전혀 아무것도 없는 것도 아닌 가운데
또 실재와 그런 감각현실 등의 관계는
앞과 상황이 마찬가지다.
실재는 그대로 그것이 감각현실이 아니고
그렇다고 그런 실재를 떠나서
그런 감각현실을 얻는 것도 아닌 것이다.
그래서 이런 실재는
결국 있다 없다. 이다 아니다. 와 같다 과 다르다. 좋다 나쁘다
깨끗하다 더럽다 이런 온갖 이분법적인 분별을 떠나는 것이고
그런 온갖 분별은
오직 관념영역에서 일으켜서 문제삼는 것임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런 가운데
이런 관념분별을 바탕으로 언어를 시설해서
각 감각현실이나 실재의 일정한 부분을
가리켜 나가게 되지만,
그것은 본래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는 영역에
그런 내용을 시설해 내는 것이라는 사정을 이해해야 한다.
[가명, 안립, 시설]
그것은 그렇게 언어로 시설해서
그 각각의 사정을 설명하지 않으면
그런 각 사정과 상호관계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수행자가 가장 기본적으로
이해할 내용은
세상에서 문제삼는 모든 시시비비의 분별에서
정작 그런 언어분별로 문제삼고자 하는 것들은
실재나 감각현실에서 그에 해당한 내용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현실에서 모든 문제는
그런 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는
실답지 않는 내용을 놓고 그렇게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전도몽상의 기본 증상이기도 한 것이다.
각 언어분별로 무언가
방금 맛본 커피 맛도 표현한다지만,
정작 감각현실은 그렇게 무언가 생생한 것이지만,
정작 그런 관념분별에 해당하는 내용은 아니고
그런 내용을 거기에서 얻을 수 없는
그런 생생한 그 무엇인 것이다.
그런데 전도몽상 상태에서는
자신이 그것으로부터 그런 생각을 일으켜 가졌기에
곧 그것이 그것이라고 대하고
그에 접착되어 머물고
그것을 고집해 나가는 것이다.
그러니 수행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정이 이러니
수행자는 자신도 일단 그런 증상을 치유하고
다른 중생도 그런 증상으로 받게 되는 고통에서
구해 내고자
각 경우마다 다른 자세를 취하게 되는 것이다.
각 경우마다 다른 수행방안이 제시되는 이유는
그것이다.
앞에서 그 내용을 얻을 수 없다는 것만 강조하면
모든 경우에 그것을 다 무시하고
어느 방안이던 모두 일관되게 제시해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 것이다.
일단, 수행자는 부처님으로부터
그런 기본 사정을 그렇게 제시받고 이해하게 된다고 하지만,
다른 중생은 거의 99 %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수행자도 사실 그런 이해를 하는데에는
수행과정에서 조금 시간이 걸린다고 보는 것이
적절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그런 사실을 깨닫더라도
그런 상태에서
다시 그런 수행자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그런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그런 중생이 임하는 그 상황에
그렇게 들어간다는 의미다.
그러니 부처님이 수행자에게는
수행자 자신은 이러이러하게 행하라고 하지만,
그러나 수행자가 다른 중생을 상대할 때는
그렇게 하면 안 되고 저러저러하게 달리 행하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런 사정이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왜 같은 바탕인데
매 경우 매 상황마다 달리 행하라고 하는가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수행자는 그런 보석이 문제될 때
우선 그 정지화면에서부터 그런 것은 얻을 수 없다
그리고 그에 해당한 진짜는 없다라는 사실
즉 무아 무자성 공의 사정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수행자 자신은 그에 대해
그런 것이 있다 없다를 놓고 분별하지도 않고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일반인이 그것을 보석이라고 보고
집착하고 이것을 놓고 아끼고 다툰다고 한다면
수행자는 그런 자세를 취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수행자가 일반인을 상대로 할 때는
이제 그런 것을 얻을 수 없음을 관하면서도
그 상대에 맞추어
기본적으로 그에 대해 탐욕이나 분노 어리석음의 번뇌와 집착을 제거한 가운데
오히려 그런 좋은 것이 있다면
그것을 집착하는 중생에게 아낌없이 베풀라고 하는 것이다.
이 때 그 상대는 그것이
수행자에게서는 사라지고
자신에게 오게 되고
그래서 수행자가 자신에게 무언가 좋음을 베푼다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지만,
수행자는 여기서 무엇을 보는가하면
그런 것은 본래 얻을 수도 없고
그런 행위를 통해 무엇이 자신에게 사라지고 없어진다고도
전혀 보지 않는 것이다.
무엇이 있었어야 없어질 것이 아닌가.
또 사정이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인 입장에서는 그것을 아끼고
그런 가운데 그런 수행을
도저히 행하기 어렵다고 보고
못하게 되는 것이지만,
수행자는 사정을 그렇게 보지 않기에
바로 그런 사정에서
그런 기본적 수행을 원만하게 성취할 수 있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이것이 반야바라밀다경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제시되는 내용이기도 하다.
얻을 것이 본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현실에서 이에 상응하게
그런 무소득(얻을 것이 없음)을 방편으로 해서
모든 수행을 그렇게 수행의 방향으로 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보시는 보시를 통해 무언가를 버림이 없음을
방편으로 해서 그 수행을 원만히 성취하라고
경전에서 제시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본래 얻을 것이 없다고
그렇다고 아무렇게 행해도 된다거나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런데 왜 그런 바탕에서 하필
그런 수행방안으로만 행하라고 제시되는가.
그러니 여하튼 여기서부터
수행자가 다른 경우와 또 달라지는 것이다.
자신은 처음에 그런 것은 거기에서 얻을 수 없고
진짜라고 할 것이 없다고
무아 무자성 공의 사정을 보고
자신은 그에 그런 분별을 일으키거나
그 상에 머물거나 취하려 하지 않고
집착을 갖지 않으면서도
그런데도 그 수행자는
다른 중생이 좋다고 보고 집착하는 것을
아끼지 않고 그런 중생에게 베푼다는 것이다.
그것부터가 서로간에 다른 내용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처음 그처럼
없고 얻을 수 없다면
무엇을 베풀 수 있다고 하는 것인가.
이 두 내용이 서로 자체 모순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여하튼 이 내용들은 모두
다른 중생들이 그런 것을 실답게 여기고
또 그것을 놓고 극도로 아끼고 집착하고
다른 이에게 베풀지 않으려 하고
또 반대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만은 그것을 취해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그리고 이하의 내용도 다 사정이 마찬가지다.
그리고 수행자는 다시 다른 수행자를 상대로
이렇게 요구하는 것이다.
일반인이라면 거의 대부분 좋다고 보는 무언가를 놓고
그것을 아끼고 집착하게 되는 것이라고 보고
그런 상태에서 어떤 이가
다른 이의 그런 무언가를 훔쳐 갖게 되면
그런 행위를 한 이를 놓고 나쁘다고 하게 되지만,
그것이 수행자인 경우는
물론 그런 계율을 준수하는 것도 요구되지만,
이에 다시
그 수행자가 그처럼 무언가를 아끼고 주지 않는 것을 놓고
오히려 그것을 나쁘다고 이야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또 이 부분에서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쉽게 사정을 이해하자면 이렇다.
유치원 아이들이 딱지를 놓고
서로 뺏고 훔치고 해서 울고 한다면
다른 아이의 딱지를 함부로 뺏고 훔치는 행위를
나쁘다고 말하게 되지만,
어떤 다 크고 직업이 의사인 어떤 이가
유치원 아이와 함께 지내는 가운데
아이의 딱지를 뺏고 훔치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런 딱지를 아끼고 아이에게 주지 않음으로써
아이와 그런 소란을 일으키면
그런 문제를 일으키는 유치원 아이가
문제라고 보기보다는
그처럼 다 큰 의사의 그런 자세가 문제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하튼 수행을 행하면
그런 수행을 하는 이가
그로 인해 무량한 복덕을 받게 된다고 제시하는데
이는 현실에서 장발쟌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좋다고 보는 것을 추구할 때
그 행위로 인해 부자가 된다기 보다는
감옥에서 장구하게 생활하게 된다고 보게 되고
오히려 그와 반대로 행할 때
오히려 빵도 많이 먹고 행복하게 지낼 수
있게 된다고 제시하는 것과 사정이 같다.
그런데 수행자는 처음부터
어느 바탕에서 출발했는가하면
그런 것을 본래 얻을 수 없음을 관하고 이해한 가운데
중생제도를 위해 그렇게 행하라고 제시된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가 그런 수행으로
자신을 묶는 업의 장애도 해소시키고
무량한 수명과 복덕을 받게 된다고 제시하지만,
그러나 정작 그 자체가
수행자의 목표가 아니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또 수행자 자신도 그런 사정을 잘 이해하고
그런 무량한 수명이나 복덕에 집착해서
그런 행위를 하는 것도 아닌 것이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다면
왜 사정이 그런데도 그런 수행을
무량한 시간에 걸쳐 수행자가 행하는가
또 의문을 제기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 사정은
역시 첫 부분에 제시되고 있는 사정과 취지 때문임을
잘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알고 보면 의사가 유치원 아이에게
딱지를 무한정 베풀고 원하는 것을 다 제공하므로
딱지를 다 잃고 거지가 되어야 할 것 같은데
알고보니 딱지 공장을 몇개를 다 사도 될 정도로
훨씬 부자로 지내는 것이다.
그런데 의사가 그렇게 지내는 것은
그런 무량한 딱지가 목표가 아니라고 제시하는 것과
사정이 같다.
그리고 이처럼 무량한 생명과 복덕을 얻고
다시 이를 바탕으로 무량한 지혜를 구족해 얻어
수행자 자신이나 다른 중생이
최종적으로 얻게 되고 이에 평안하게 머물게 된다는
니르바나도
역시 사정이 마찬가지다.
처음 그런 니르바나의 상태도
그런 수행으로 새삼 없던 상태가 새로 나타나 얻게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 아니고
본래부터 그런 상태인 것이라고 제시하는 것이고
또 그런 상태 역시도
처음에 보석을 놓고 이야기했던 것과 같이
그 정지단면 하나에서조차도
그런 것을 얻을 수 없고
진짜라고 할 내용이 없다는 사정은
여기에서도 다르지 않은 것이다.
또 사정이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앞에서 제시된 여러 내용 가운데
중생이 각 순간 받아나가는
악업을 통해
무량한 기간 무량한 고통을 받는 지옥의 상태도
그런 바탕에서 그렇게 나타나는 것이고
또 이와 반대로
선업을 통해
무량한 기간 무량한 복덕을 받는 하늘의 상태도
그렇게 나타나는 것이고
또 수행자는 수행자대로
이 모두에 망상분별과 집착을 일으켜 갖지 않고
어느 상태에서나 평안한 니르바나에 여여하게 머물면서
수행방안을 취해
중생을 제도하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을 성취하는 상태도
그렇게 그런 바탕에서
성취해 얻게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그런 것을 그 정지화면에서조차도
진짜라고 할 내용이나 그 실다운 내용을 얻을 수 없는데
여하튼 그런 생생한 내용을 현실에서
그처럼 얻게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처음 보석을 놓고 그것이
진짜도 아니고
실재에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고 하지만,
현실에서
그런 감각현실을 생생하게 얻고
그것을 보석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처럼
이 경우도 각각 마찬가지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무량한 고통을 받는 지옥이나
무량한 즐거움을 받는 하늘이나
수행자가 얻는 수행 결과도
다 그처럼 사정이 같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 실다운 내용을 얻을 수 없는데
바로 그런 사정때문에
현실에서 실답지 않지만
각 경우마다 그런 생생한 내용을 얻고
그리고 그 생생한 감각현실에는 그런 관념분별을 얻지 못하지만,
그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그런 결과를 얻는다고 제시하는 내용이다.
정리하면
본래 얻을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에 정진하면
그 무량한 복덕과 지헤를 그렇게
얻는다.
이런 관계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각 경우마다
그 내용이 서로 모순되고
각기 다른 내용을 제시하는 것 같은데
여하튼 그것이 서로 모순되는 내용이 아니고
각 경우마다 그런 형태를 취해야 하는 사정이
다 그렇게 있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이제
이를 쉽게 간단히 이해하면
신혼부부의 천일야화의 사정과 같다고
제시했는데
이는 무슨 이야기인가.
천일야화의 해석에
기본적으로 3 가지 해석이 있는데
어떤 이는 1000 일간의 밤의 이야기 이렇게 이해하는 입장도 있다.
또는 이것은 시적인 표현으로 신혼부분의 첫날밤을 발음하다보면
천날밤처럼 들리므로 그 천날밤의 이야기를 의미한다
이렇게 이해하는 입장도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이는 단순히 밤에 듣는 소설 1001 개의 이야기
이렇게 이해하는 입장도 있다.
그런데
조금 수행자버전으로 이에 다시 다른 해석을 덧붙이면
이는 하늘의 해의 빛이 반대로 밤을 만들어 내고 변화시킨다.
이렇게도 지록위마형 해석을 덧붙일 수 있다.
알고보면 하늘과 지옥은 서로 그처럼 상응해서 이뤄지는 관계에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옥 중생이 탈출해 하늘에 같이 거주하면
하늘 중생들이 그로 인해 한시도 평안할 도리가 없다는
관계가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하늘이 하늘로 장구하게 유지되려면
그에 상응한 지옥은 지옥대로 그렇게 장구하게
고통을 받는 상태로 지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더 다른 해석을 또 찾아 나아가면
어느 구절을 놓고 해석을 해나가더라도
다 무량한 해석이 가능한 것은
일반적인 다라니의 사정과 같다.
그런데 여하튼 이런 여러 해석을 놓고
신혼부부가 어떤 경우는 이것이 허용되는데
그와 똑같은 내용인데도
잘못하면 이것이
다른 이에게 지극한 고통을 주고
심지어 그것이 다른 이에게 심한 충격을 주고
고통을 주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가고
그래서 범죄행위로 취급되고
심지어 그로 인해 감옥에 가야할 경우도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니 무엇이라고 말하겠는가.
그 자체만 놓고 보면
이 경우나 저 경우나 다를바가 없다고
원칙적으로 보지만,
그러나 이 경우엔 이렇게 해야 하고
저 경우엔 오히려 그렇게 하면 안 되고
저렇게 해야 하고
이렇게 말하게 되는 것 아닌가.
그것이 이상한가.
쉽게 말해 아무리
서로 사랑하는 신혼부부라고 해서
공원에 가서 앉아있을 때에도
그렇게 애정 행위를 해도 된다고
세상에서 보겠는가.
아무리 신혼부부라고 해도
다른 이들이 다 함께 이용하는
공원과 같은 곳에서는
그곳에서 취해야 할 태도나 자세가 있는 것인데
그곳에서까지
우리 제발 마음대로 마음껏 서로 사랑하게 해주세용
좀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세용 라고
동네 사람들을 향해 목소리 높여
소리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 경우 단지 소리만 외치는데 그치지 않고
실행에 옮기면
바로 감옥으로 거처를 옮겨야 할 사유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이상한가.
그런데 prince 님은 매번
왜 같은 내용인데
이 경우는 그렇게 하면 안 되고
저 경우는 저렇게 하고
또 저 경우는 저렇게 저렇게 하고
그래야 한다고 하는가하면서
매번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이런 의문을 제기할 때
누가 답답한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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