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1-09-22_회쟁론_001 본문

과거조각글/불기2561(2017)

불기2561-09-22_회쟁론_001

진리와 가치를 고루고루 2017. 9. 22. 15:19



®


『회쟁론』
K0630
T1631

회쟁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 해제[있는경우]
● TTS 음성듣기 안내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 [pt op tr] 회쟁론_K0630_T1631 핵심요약



『회쟁론』 ♣0630-001♧

회쟁



♥아래 부분은 현재 작성 및 정리 중인 미완성 상태의 글입니다♥





○ [pt op tr] 회쟁론_K0630_T1631 핵심요약 



♣0630-001♧
『회쟁론』

회쟁론







[오래된 조각글재정리 안내]
☎잡담☎ = 순전한 잡담부분
● = 논의부분
재검토시작 Lab value 불기2564/05/24/일/21:38
♥아래 부분은 현재 작성 중인 미완성 상태의 글입니다♥
문단, 표현 재정리 작업중
경전정리 (▽정리중) (▼마침)
논의 (○정리중) (●마침)
조각글 (☆정리중) (★마침)




참고 =>  
■■■ 


●회쟁론 판본에서 논자별구분 내용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0/04/k0630t1631001.html#010 
sfed--회쟁론_K0630_T1631.txt ☞회쟁론 
sfd8--불교경율논코너sp_2563_05.txt ☞ ☞●회쟁론 판본에서 논자별구분 내용 
----



참고 회쟁론을 살피기 전의 기본적인 내용


[p]불기2561-09-22_회쟁론_001 [ 현재페이지]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0/04/2561-09-22001.html

=> 변경예정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0/05/k0630t1631.html


[p]불기2561-12-24_회쟁론_001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0/04/2561-12-24-001_27.html














○ 2019_1004_171228_nikon_Ar28.jpg






○ [pt op tr]  mus0fl--Raphaël fait son «Live».lrc 














Lab value 불기2564/01/12/일/23:25 재보충



○ 회쟁론의 판본 확정과 가정적 논의 

『회쟁론』이란 논서 내용은 비교적 짧다. 

그런데 상대의 주장과 용수보살의 주장이 서로 뒤얽혀서 
이를 구분해서 잘 살피지 않으면 이해하기 힘들다. 

 『회쟁론』을 살피기 위해 판본을 살펴보면 
범어본과 티벳본 한문본 그리고 서로 다른 표현으로 된 한글번역본이 있다. 

따라서 지금 살피는 한글 본에도 이런 내용을 참조해 부분부분 붙여가며 살필 수도 있다. 


그런데 각 판본마다 우선 표현이 통일적이지 않다. 

이처럼 각 판본 가운데 서로 표현이 다르게 되면
우선 이 가운데 어느 표현이 보다 정확하고 적절한가가 문제된다.

예를 들어 첫 부분에 만약 일체에 자체[體]가 없다면 ~ 하고 문장이 시작된다. 

그래서 처음 내용을 살피는 입장에서는 이런 주제에 관한 논의로 알고 임하게 된다. 
그런데 나중에 다른 판본을 보니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되는 표현으로 되어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런 경우 이 가운데 어떤 내용이 보다 적절한 표현인가를 살펴야 한다. 

이런 내용들을 먼저 살피지 않으면 
엉뚱한 이가 쓰거나 엉뚱하게 해석하거나 엉뚱한 의미로 잘못 번역한 내용을 붙잡고 
살펴나가는 것이 된다. 
그래서 논의를 살피려면 우선 판본 검토 확정부터 필요하다. 


그런데 이 문제는 아래에 살피는 것처럼 대단히 해결 곤란한 사정이 있다. 

그리고 불교를 처음 대해 살피는 입장에서는   

이런 자세로 임하면 오히려 핵심 내용을 빨리 파악하기 힘들다. 

그리고 그런 작업이 수행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들 내용을 빨리 이해하고 실천 수행에 옮기는 데에도 지장이 생기게 된다. 

그리고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 방식은 기본 논의를 마친 후 
좀 더 심화된 연구를 행할 때 

관련 어학 학습을 병행해가며 살펴나가는 것이 낫다. 

따라서 수많은 다른 판본을 바탕으로 내용을 살필 때에는 

논의를 통해 얻어내야할 핵심 결론이 무언가와 
그 결론에 바탕해 행할 수행내용과 실익이 무언가를 먼저 잘 파악한 가운데 
그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임하는 것이 낫다. 


따라서 현재 한글역경원에서 제공하는 판본이 

설령 100 % 만족스럽지 않다해도 
일단 이 판본을 가지고 살펴나가기로 한다. 
그리고 그렇게 살피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무언가 이상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이 발견되면 
그때 한문원전이나 관련 원전을 보조적으로 참고해보면서 살펴나가기로 한다. 

따라서 여기서는 이들 내용을 간략하게 추상적 가정적 논의 방식으로 살펴나가기로 한다. 

이는 '추상적으로 누군가에 의해 이러이러한 내용이 주장된다면'[가정적], 

그런 내용에 대해 한 번 살펴보겠다는 입장으로 논의 내용을 살펴나가는 방식이다. 

이런 방식으로 살피는 사정을 아래에서 보기로 한다. 




●판본확정문제와 추상적 가정적 논의


논의를 살필 때는 각 주장 내용을 먼저 명확히 잘 확정하고 논의를 살펴야 한다. 
처음부터 어떤 내용을 문제삼는가부터 불명확하면 이후 논의를 살펴나가기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외국어로 저술되고 오래된 저서에서는 

일반적으로 판본 확정문제가 많이 발생한다. 

관련 판본이 여럿 되는 경우 어느 한 판본을 기준하면 
다른 판본 내용은 잘못이라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논서나 경전을 살필 때마다 이런 문제가 매번 제기된다. 

그리고 논의를 살피려면 일단 이부터 먼저 해결해야한다. 

그래서 처음부터 이를 붙들고 집착하게 되기 쉽다. 

그런데 먼저 각 판본을 비교 정리하고
각 부분의 표현과 의미를 확정시키려면 
장구한 세월을 들여도 이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그 사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문제되는 각 부분을 놓고 
여러 판본의 표현이 각기 다르다고 하자. 
그런데 현실에서 어떤 부분에서 '어'와 '아'는 하늘과 땅 차이가 있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이 가운데 어느 표현이 과연 적절한가. 
또는 어떤 내용이 원래의 원본과 정확히 일치하는가.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런 사정 때문에 각 판본을 나열해 일일히 비교하게 된다. 

그런데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우선 각 판본이 쓰여진 언어를 배워야 한다. 

논의가 복잡할 때 그 내용을 제시하는 언어표현의 이해가 중요하다. 

그래서 해당 언어에 아주 능숙하게 되어야 한다. 
그리고 각 부분의 표현이나 번역이 적절한가도 검토해야 한다. 
그래서 어학자의 입장에서 각 표현을 살피기도 한다. 

다만 외국어를 능숙하게 익히는 시간과 노력이 쉽게 이뤄지는 일이 아니다.
그런 가운데 각국의 언어의 문법체계나 해석방법 숙어 관용어 용법의 논의 이런 식으로 

범위가 확대되면 해결이 어렵게 된다. 


그런데 나중에는 해당 내용은 해당 저자가 쓴 것이 아닌 위조본이라는 주장도 만날 수 있다. 

그러면 또 그 논의까지도 살펴야 한다. 
예를 들어 단어 몇개가 후대에 사용된 표현이어서 
저자나 내용이 위조 변조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러면 또 그런가 아닌가를 붙잡고 논의해야 한다. 
그래서  문헌학자의 입장에서 각 문헌의 고증과 역사적 진위와 

각 판본의 문헌적 정확성도 검토해야 한다. 


그리고 한편 과연 그 저자는 그 당시 그런 내용을 그런 의미로 정말 제시했는가. 

이런 의문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이런 경우는 역사학자나 탐정입장이 되어
논서를 쓴 구체적 인물과 상대방 그리고 번역자들의 신원확인 문제까지 살펴야 한다. 



한편 현실에서 어떤 이가 언어로 표현하면 

그런 표현을 해석하고 이해하게 되는 내용이 
그런 표현을 한 이의 내심의 의사[진의]와 일치하는가 하는 의사의 착오여부도 문제된다. 
예를 들어 말하는 이는 '잔다'라고 표현하려 했는데 
표현이나 표기과정에서 '산다'라고 잘못 말하거나 적는 경우도 있다. 
현재 글을 적는 과정에서도 다시 살피면 각 부분에 오타가 많이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런데 이런 문제가 늘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한편 삶을 살아간다라는 뜻으로 '산다'라고 적었는데 
이를 듣는 입장에서는 그가 물건을 '산다'라는 뜻으로 잘못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이처럼 내심의 본의와 표시의 불일치 착오문제까지 검토하려면 
먼저 그런 주장을 한 이의 신원이나 정체부터 정확히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과거 오래된 저서라면 이 문제 해결이 기본적으로 곤란하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현실적으로 저자나 역자를 직접 찾아가 
대면해 확인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리고 설령 대면할 수 있어도 다른 주체의 내심을 확인하려면
이론상 타심통까지 익혀야만 해결가능하다. 

그러나 여하튼 이런 내용들이  먼저 확정되지 않으면 

엉뚱한 이가 쓰거나 엉뚱하게 해석하거나 엉뚱한 의미로 잘못 번역한 내용을 붙잡고 
살펴나가는 것이 된다.
따라서 학문연구과정에서는 이런 다방면의 노력이 필요하게 된다. 

그리고 각 부분과 관련한 전문 연구분야가 있다. 

그리고 매 중요 논서나 경전의 해석과 관련해  현실 학계의 사정이 이와 같다. 


그렇지만 판본확정과 관련한 이런 여러 문제의 근본 해결은 쉽지 않다. 
그 사정이 위에 본 것과 같다. 

그런데 여하튼 논의를 살피는 과정에서 이들 문제가 가장 기본적으로 해결되야 하기에 
일반적으로 이 문제부터 매달리게 된다. 


그런 가운데 각 표현이 이런 의미일 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어 모호한 가운데
이런 문제가 명확하게 확정되지 않으면 
논의 과정에서 계속 의문을 품고 임하게 된다. [회의懷疑] 

그런 가운데 다양한 가능성을 검토하며 회의[會議]만 하는 상태로 남기 쉽다. 

따라서 대부분 판본 확정단계부터 연구가 막히게 된다. 

그런 가운데 다양한 입장을 그대로 모두 나열해 벌려 놓고 
이들을 모두 함께 다 살피려면 논의가 대단히 번잡하게 된다. 

이런 경우는 
한 가게에 주인이 수십 수백명이 나타나 
다 제각각 어떤 물건의 주인이라고 주장하여 혼란스런 경우와 사정이 같다. 
이 경우 제각각 다른 가격과 다른 조건을 제시하면서 하나의 물건을 팔려고 한다. 
그런 상태가 되면 이 가운데 누구와 상담해서 물건을 사야 하는가를 판단하기 곤란하다. 
그래서 난처하고 혼란스런 상황에 빠진다. 
판본 확정이 되지 않고 수많은 다른 입장을 다 함께 모아 나열하여 
살피는 경우는 이런 상태와 비슷하다. 

그리고 현재 살피는 논서마다 다 이런 사정을 갖고 있다. 
그래서 이전에 각 논서를 살필 때마다 이런 문제를 제시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우선 경전과 논서를 살필 때 자신이 초점을 맞추는 부분이 

판본의 진위여부에 초점이 있는가. 
아니면 실질 내용의 논의인가를 먼저 결정해야 한다. 
그래서 실질 내용을 살피려는 경우에는 
그런 전문분야의 연구결과를 신뢰해 받아들이는 한편, 
이 부분을 건너 뛸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이런 문제를 생략하고 실질 내용을 살피려면 

다음과 같은 추상적 가정적 논의방식으로 살피는 것이 낫다. 


이는 '추상적으로 누군가에 의해 이러이러한 내용이 주장된다면'[가정적], 

그런 내용에 대해 한 번 살펴보겠다는 입장으로 논의 내용을 살펴나가는 방식이다. 
이는 판본 확정과 관련해 들여야 하는 노력과 시간을 대폭 절약하는 장점이 있다. 


예를 들어 다양한 판본간의 해석과 입장이 서로 차이가 날 경우 

이에 관해 다양한 시시비비 논의가 제기될 수도 있다. 
그리고 어떤 판본은 해당 저자가 쓴 내용이 아닐 수 있다. 
그리고 그 저자가 쓴 내용이어도 그 번역이나 표현이 적절하지 않아서
그 저자의 본 입장이 아닐 수도 있다. 
이런 경우, 자신은 이런 문제와 관계없이 

여하튼 '추상적으로 누군가에 의해 그런 내용이 주장된다면'[가정적], 

그런 내용에 대해 자신이 한 번 살펴보겠다는 입장으로 임하는 방식이다. 

즉, 어떤 이가 정말 그런 내용을 그런 의미로 그렇게 주장했는가 여부를 문제삼지 않고 

단순히 추상적 가정적 논의를 진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논의를 위해서는 여하튼 논의 대상으로 삼을 내용을 우선 추려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취사장과 사단장 방식을 사용할 수 있다. 


취사장[取捨長]은 각 입장의 장점만 취사 선택해 사용함을 뜻한다. 
사단장[捨短長]은 각 입장의 단점 장점 분별을 모두 버리고 제시되는 대로 내용을 살펴나감을 의미한다. 





◧◧◧ para-end-return ◧◧◧
















『회쟁론』을 추상적 가정적 방식으로 살펴서
판본 검토와 관련된 논의를 생략하고 살펴나가는 사정을 살폈다.

그런데  『회쟁론』은 내용은 짧지만 복잡한 논점이 많다. 
그리고 『회쟁론』 내용 자체도 가정적 논의로 대부분 되어 있다. 


가정적 논의란 만일 ~ 라면 이런 구문을 통해 가정적인 논의를 진행하는 것을 나타낸다. 

그런데  『회쟁론』 에 제시되는 가정적 구문은
용수보살이나 상대가 제시하는 방식이 모두 엇비슷하게 보인다. 

그런데 용수보살은 자신의 사용하는 가정적 구문은 
상대와 그 성격이 다르다고 밝힌다. 
그래서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중론송』을 살필 때도 대략적으로 살폈다. 
이는 용수보살은 '가정적 항변' 방식으로 가정적 논의를 전개한다는 취지다. 
따라서 가정적 항변은 상대가 사용하는 가정적 논의와 어떤 차이가 있는가부터 잘 파악해야 한다. 
그래야 『회쟁론』의 입장에 대해 혼동을 일으키지 않을 수 있다. 


여하튼 회쟁론의 가정적 항변 방식을 살피려면 
기본 문제부터 정리를 해야 한다. 
그래서 이를 이어 살핀다. 








●언어표현과 의미확정문제


예를 들어 어떤 이가 다음처럼 추론식을 사용해 결론을 주장한다고 하자. 

장미꽃은 꽃이다. 
꽃은 한글이고 글자 하나다. 
※ 따라서 장미꽃은 한글이고 글자 하나다. 

누가 이렇게 추론식을 사용해  
'(세 글자로 된) 장미꽃을 글자 하나다'라고 주장한다고 하자. 
이런 경우 이론 추론은 엉터리임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글자는 다 같다.
그러나 정작 첫부분과 두번째 '꽃'이란 글자는 서로 다른 측면의 내용을 가리킨다. 
그럼에도 각 부분의 '꽃'[글자]이 다 같은 내용을 가리킨다고 혼동을 일으키면
위와 같은 이상한 결론을 제시하게 된다. 

그래서 가정적 논의를 제대로 전개하려면
각 단어(언어)가 가리키는 내용부터 정확히 잘 파악해야 한다. 
그것부터 안 되면 이후 논의할수록 계속 혼동이 일어나 뒤엉키게 된다. 
따라서 이런 경우 위 기본 문제부터 잘 정리하고 내용을 다시 살펴야 한다. 



○ 언어표현에 의존한 의미확정 곤란성

'만일 ~라면 --이다' 이런 방식으로 추론을 행할 때 

가장 기본적으로 일으키기 쉬운 혼동을 위에서 사례로 살폈다. 

형식은 
S 는 M 이다. 
M 은 P 이다. 
※ 따라서 S 는 P 이다. 
의 형식인 듯 하다.
그러나 위 사례와 같은 추론이 이상함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예를 들어 논의 중에 이런 문제가 제기될 때 
각 판본을 대조하며 언어 표현만으로 의미 확정문제를 하려고 하면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가를 먼저 살펴보자. 

비슷한 사례를 또 살펴보자. 

장미꽃은 flower[꽃]이다. 
이 flower는 영어다.
※ 따라서 장미꽃은 영어다. 

이번에는 flower 란 단어가 각기 가리키는 내용에서 혼동을 일으켰다. 
그런데 위 문장을 아무리 영어나 범어 티벳어 이런 식으로 옮겨 놓고 살펴도 
그런 문제는 역시 마찬가지로 발생한다. 
그래서 결국 아무리 어학적 역사학적 문헌학적으로 문제를 다 해결해도 
여전히 본 실질 내용을 살피기 힘들게 된다. 
어떤 언어표현이 가리키는 내용을 
언어표현만 붙들고는 본래 찾아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무역계약시 금액 숫자에 컴마가 하나 있고 없고에 따라  
10 억원이 없어지고 생기는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 
그런 입장에서 논서 표현을 놓고 각 경우마다 예민하게 표현에 집착하기 쉽다. 
그런데 사실은 사정이 그렇지는 않다. 

언어표현은 본래 다양한 측면의 다양한 의미를 가리킬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다양한 의미 가운데 어떤 것을 가리킨다고 정확히 결정해주는 힘은 갖지 못한다. 
예를 들어 경전에서 여시아문(如是我聞)의 아(我)와 

무아(無我)의 아가 서로 같은 의미인지 아닌지가 문제된다고 하자. 
이런 경우 그 글자를 아무리 현미경으로 살펴도 그 글자만으로는 알 도리가 없다. 

따라서 각 표현의 구체적 의미를 파악하려면
먼저 논의의 본 취지가 무언가부퍼 파악해야 한다.





○ 논의 취지와 배경 맥락에 따른 의미 파악 

어떤 논의에서 살피는 주제의 초점과 
그 논의의 전후 배경이나 맥락을 잘 파악하면 
구체적 표현에 크게 영향받지 않고도 내용을 살필 수 있다. 

예를 들어 
버스에서 어떤 아저씨가 아라고 하는 소리와 
가게에서 어떤 아저씨가 아라고 하는 소리가 얼마나 같고 다르고를 떠나서 
그런 입장에서 임하면 모두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찰떡같이 말해도 쑥떡처럼 잘 알아들어야 한다'는 세간의 말은 
비록 구체적으로 정확한 표현이 아니어도 
전체 맥락을 통해 그 의미를 적절하게 잘 찾아 이해해야 함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런 내용은 논의과정에도 적용할 수 있다.  

다음 문제를 보자. 


『회쟁론』에서는 일단 계속해서 
만약 일체에 체[體]가 없다면 ~
만약 일체가 체가 있다면 ~ 
이런 형태로 그런 가정에서는 어떤 문제가 나타난다고 계속 제시해간다. 

그리고 결국 if~ 라면 구문을 사용하는 가정적 방식의 추론은 이와 같다. 
그래서 잘 음미하며 읽어가면 
대부분 그 내용이나 그 상호 관계가 이해된다. 
그러나 논의의 취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초점을 잘 맞추지 못하면 
'if~라면 - 구문 표현이 글자임은 알지만, 
각 부분이 무슨 이유로 그렇게 제시되는지를 이해하기 힘들게 된다. 

따라서 논의를 살필 때 
일체가 체가 있으면 어떻고 없으면 또 어떤가. 
왜 이것이 문제되는가부터 먼저 살펴야 한다. 
이처럼 논의의 배경과 취지를 이해하면 
큰 어려움없이 각 부분의 의미를 쉽게 찾아낼 수 있게 된다. 




○ 배경사정 이해 없이 논의를 살피는 문제점 

논의 배경 사정을 살피지 않으면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가를 살펴보자.

예를 들어 처음 『회쟁론』에서
'체'가 있다면 또는 없다면 하는 논의가 진행될 때 
논의 배경사정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선 여기서 '체'란 표현이 가리키는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게 된다. 

우선 이 '체'라는 글자는 언어상 다양한 의미를 본래 가리킬 수 있다.

그래서 다음처럼  문제를 제기해볼 수 있다.
우선 그 '체'라는 표현이 한글로 된 하나의 글자인가를 문제삼는부터 살펴보자. 
상식적으로 여기서는 그런 논의를 하려는 취지가 아님은 쉽게 판단할 수 있다. 

그래서 상식적으로 체는 한글이다. 體는 한자다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추면 곤란하다. 

그러나 다시 그 단어가 가리키는 내용을 다시 파악해보려면 
하나의 표현이 나타내는 의미가 상당히 다양함을 볼 수 있다. 

『대승기신론소』를 살필 때도 체, 상, 용 이런 표현이 나온다. 
그런데 『회쟁론』에서도 나온다. 
그리고 또 다른 논서에서도 사용한다. 
그리고 일상생활에서도 '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각 경우 표현이 같다고 각 경우마다 가리키는 내용이 같은가를 놓고 
주의깊게 살필 필요가 있다. 

체가 '있다'거나 '없다'라고 할 때 
'있다'와 '없다'가 무엇을 말하는가도 사정이 같다. 

그런데 이는 그 글자만 의존해서 확정할 도리가 없다. 
즉 글자 자체가 어떤 의미인가를 결정해주는 힘을 갖지 못한다. 
그런 사정으로 이제 각 경우 각 표현의 의미를 모르겠다면 
이후 논의를 살피기 곤란해진다. 

따라서 논의를 이해하려면 
앞에 살핀 것처럼 논의 배경과 논의취지 그리고 논의초점부터 먼저 파악해야 한다.
그래서 지금 문제삼는 체는 어떤 상항에서 
어떤 사정으로 그 유무를 따지는가하는 배경사정부터 잘 살펴야 한다. 
그리고 체가 있거나 없으면 어떤 차이가 있는가.
무엇때문에 그것을 문제삼는가를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이 문제를 잘 해결하면 
그 바탕에서는 위와 같은 if-라면 논의는 굳이 살피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또 살펴도 되고 살피는 김에 잘 살피면 더 낫다. 
그래서 이런 입장에서 편하게 임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이런 입장에서 이런 논의를 하게되는 배경사정부터 살펴야 한다. 





 『회쟁론』이 불교 전체에서 어떤 배경사정을 바탕으로 
어떤 논의를 진행하려 하는가 
그  배경사정을 이해해보기 위해 
조금은 엉뚱하게 비바시 여래님이 남긴 게송을 먼저 살펴보자. 








● 실체없음과 공함을 제시하는 배경사정

- 생사고통 해결의 전제로서 무아무자성 공의 이해 


현실 일체에 진짜라고 할 참된 실체가 있는가 없는가
그리고 본 바탕이 되는 실재는 공한가 아닌가. 
이런 논의와 관련해 과거 부처님 가운데 비바시여래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을 남겼다고 한다. 

죄복개공무소주...
죄나 복이나 다 공하고 머무는 바가 없다는 뜻이다. 

불교 전반에서 

실체가 없고  바탕인 실재는 공하여 얻을 수 없음을 제시한다.  
즉, 무아, 무자성, 무소유 불가득 공 이런 내용을 반복해 제시한다.

그래서 앞 게송 내용을 놓고 먼저 살펴보자.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죄와 복은 큰 차이가 있다.


그런데 위 게송에서는 그와 정반대 내용을 제시한다. 
즉, 그 일체가 모두 공하다. 그리고 머무는 바를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다. 
그래서 이 내용을 잘 음미해야 한다. 

일단 이렇게 의문을 제기해보자. 
죄와 복이 다 공하고 차별을 본래 얻을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그 내용은 현실이 어떻다는 것인가. 
그리고 그렇다면 그런 바탕에서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렇게 문제를 제기해보자. 

만일 일체가 체가 없고 공하기에
무엇을 어떻게 할 지 모르겠다면 . 
그 내용의 취지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결국 논의를 살핀 의미도 없게 된다. 

그래서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이런 내용은 그렇지 않다고 제시하는 입장과  
어떤 차이가 있기에 제시하는가를 살펴야 한다. 



일체가 공함을 바탕으로 
다음처럼 주장하는 입장도 있을 수 있다. 

일체가 차별없이 공하다. 
따라서 현실 일체가 선하던 악하던 다 근 본 바탕은 차별없이 공하다.
따라서 현실에서 선이던 악이던 다 무방하므로 방치해도 된다. 
또한 현실에서 자신 마음대로 아무렇게 해도 된다. 
따라서 수행도 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도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처음부터 복잡하게 이런 내용을 살필 의미도 없다. 
원래 그런 내용이 없어도 
현실에서 제각각 마음 내키는 대로 행하고 엄청난 사고를 일으키며 

생사고통을 받아간다. 

그런 상태에서 이 일체가 공하기에 그런 상태로 방치하거나
아무렇게 해도 무방하다는 입장이라면 
이런 내용을 따로 살필 의미도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입장과 다른 입장은 현실에서 어떤 차이가 있는가.

우선 어느 경우나 현실에서 아무런 고통을 겪지 않는다면 
체가 있거나 없는 문제를 살피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그런 경우는 단지 세상에 체가 있는지 여부가 너무 궁금해 
지적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 논의하는 것 뿐이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현실에서는 견디기 힘든 생사고통을 겪는다. 
그리고 그 해결이 문제가 된다. 
따라서 이런 생사고통을 해결하여 벗어날 방안을 찾게 된다. 
그리고 그런 사정에서 앞과 같은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생사고통을 받는 현실의 본 바탕을 살피면 
본 바탕인 실재는 공하고 그런 내용 자체를 얻을 수 없음을 파악하게 된다. 
이는 생사현실에서 고통을 받거나 그렇지 않거나 그 본 바탕에서는 다 차별없이 공함을 뜻한다. 
따라서 공한 바탕의 측면에서는 생사고통이나 차별을 얻을 수도 없고
이런 문제의 해결을 요구한 적도 없다. 
그런데 본 바탕이 그렇게 차별없이 공함에도
생사현실 안에서 왜 하필이면 극심한 고통을 받는가가 문제된다. 

그것은 본 바탕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음에도 
망집을 일으켜 그런 내용이 있다고 잘못 여기면서 
그에 바탕해 업을 행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 바탕에서는 얻을 수 없는데도
생사현실에서 하필이면 겪는 생사고통을 해결하려면 
먼저 이런 본바탕의 사정을 이해하고
그런 망집을 제거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위와 같은 게송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고통을 받는 상황에 처할 경우 이를 잘 극복해 벗어나야 한다. 
또 미리 그런 생사고통에 묶이지 않을 예방노력을 함께 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노력이 각 경우마다 행하기 힘들다. 
그래서 이를 원만히 성취하기 위해서도
역시 본 바탕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음을 잘 관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바탕이 되야 위와 같은 수행도 힘들지 않게 여기며 원만히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본 바탕에서는 어느 경우나 차별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생사현실에선 이런 본 사정을 잘 깨닫고
수행을 잘 성취하는가에 따라 생사고통에 묶이는가 아닌가의 차이가 있게 된다. 
따라서 그런 사정때문에 이런 내용을 살피는 의미가 있다. 

◧◧◧ para-end-return ◧◧◧










● 생사고통의 해결 원칙과 공의 이해

- 계의 수행덕목을 기본으로 제시하는 사정



생사고통이 문제될 때
이를 해결하는 방안만 결론적으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1  고통을 당장 직면해 겪는 상황에서는
그 내용이 실답지 않음을 관하고 평안히 잘 참고 임해야 한다. 

2  한편, 생사현실안에서 그런 고통은 아무 원인없이 받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예방차원에서 그 원인을 잘 제거해야 한다. 


○ 원칙적인 1의 방안의 어려움 

각 경우마다 생사고통을 벗어나는 두 방안을 행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대단히 어렵다. 
그런데 두 방안 가운데에서도 처음의 원칙적 방안을 행하기가 한층 더 어렵다. 


우선 이론적으로 처음의 원칙적 방안만으로 생사고통 일체를 바로 벗어나게 된다면, 
수행은 지극히 간단한 일이다. 
즉, 단지 생사현실이 실답지 않음만 관하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또 만일 그렇다면, 장차 고통을 겪게 된다해도 역시 무방할 것이다. 
매번 실답지 않음만 관하면 그런 고통을 바로 벗어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현실 사정이 그렇지 않다. 


현실은 꿈처럼 실답지 않다.
그런데 현실은 정작 꿈은 아니다. 

꿈은 대부분 그것이 실답지 않음을 쉽게 이해한다. 
한편, 꿈에서 설령 고통을 받아도 그것은 일시적이다. 
따라서 꿈에서 겪는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그다지 필요없다. 

그러나 현실은 다수 주체가 일정한 상황과 조건에서 유사한 생사고통을
생생하고 실답게 대단히 장구하게 반복해 받는다. 

따라서 이런 점이 꿈과는 다르다. 


이처럼 현실이 꿈과 달리 갖는 특성 때문에 각 주체는 현실을 대단히 실답게 여긴다.
또한 현실이 실답지 않음도 잘 이해하지 못한다.
또 그런 사정을 이해해도 단순히 그것만으로 곧바로 고통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현실이 꿈처럼 실답지 않지만, 

현실에서 그 고통이 지속되고 반복되는 정도와
그런 고통을 생생하고 실답게 여기게 되는 정도에 비례해서 

꿈과는 달리 수행을 통해 벗어나야 할 필요성이 있다. 

그리고 이것이 생사현실의 문제다. 

경전에서 제시하는 방안은 결국 다음이다. 

우선 억울한 고통을 당장 직접적으로 겪게 될 때   

이론적으로 그런 고통이 꿈과 마찬가지로 실답지 않음을 잘 관하여 극복해야 한다. 


평소 일반적으로 감각현실 각 부분에 대해 

예를 들어 자신이나 영희나 철수 꽃 바위 라는 등으로 분별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런 감각현실 각 부분은 그런 내용'이다'라거나 
또는 그 부분에 그런 내용이 '있다'고 여기며 망집을 일으킨다. 


그러나 본 바탕이되는 실재나 그런 감각 현실에는 
그가 있다고 여기는 내용을 본래 얻을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따라서 현실에서 일체의 상을 취하여 머물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그런 현실이 실답지 않음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그에 대한 집착을 제거해야 한다. 


한편 현실에서 가장 집착을 일으키는 내용은 아상 인상 수자상 중생상 등이다. 
모든 집착이 자신이 가장 집착을 갖는 자기자신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각현실을 대하며 이런 상을 일으켜 각 부분을 잘못 취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이런 상에 머물러 잘못 업을 행하지 않아야 한다. 

평소 스스로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하는 부분은 자신의 참된 실상이 아님을 잘 이해해야 한다. 
굳이 생사를 이어가는 자신의 본 정체를 찾는다면 자신의 근본 마음(아뢰야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평소 자신이라고 여기는 부분이 무너지고 사라진다고 자신이 아예 없어진다고 여기면 곤란하다. 
따라서 그 상태를 평안히 참고 안인 수행 방안을 실천해 생사고통을 벗어나야 한다. 


그런데 우선 현실에서 그런 이론적 내용을 이해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리고 설령 그 내용을 이해해도 

그 내용을 현실에서 적용해 고통을 극복해 벗어나는 것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그것은 매 순간 현실 내용이 대단히 생생하게 얻어지고 명료하게 분별되기 때문이다. 

이 사정은 스스로 실험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금강경』에서 가리왕에게 사지를 절단당하는 수행자의 사례가 나온다.
그래서 이처럼 자신이 억울하게 왕에게 체포되어 묶이고 

눈과 귀를 잘리우고 사지를 톱으로 잘리운다고 가정해보자.

또는 단순히 망치로 손발을 내리쳐 고통을 받는 경우를 놓고 생각해보자. 

그외 현실에서 겪는 극히 억울하고 심한 고통이 다 그런 생사현실 문제다. 

예를 들어 뺑소니 음주 운전으로 억울하게 부상을 당한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 부상으로 장애상태로 평생을 지내야 한다.
그런데 사고를 낸 이가 도망가 병원비를 자신이 내야 한다. 
그리고 병원비로 진 빚을 남은 생 동안 갚아야 한다. 
그런데 상황이 너무 어려워 나머지 가족이 모두 자신을 버리고 행방을 감추어 버렸다. 
이런 상황을 생각해보자. 

그외 역사상 전쟁 포로가 되거나 민족이나 인종이 달라, 
극심한 모욕과 차별과 고통을 당한 상황을 놓고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현실에서 각 주체가 생노병사 전반에 걸쳐 이처럼 고통을 모두 겪어나간다. 

그래서 고통은 수용소나 축생을 도살하는 장소나 
응급 수술실에서만 특별히 있는 현상이 아니다.

그런데 일체가 모두 차별없이 공하다고 제시한다.
따라서 현실은 그런 바탕에서 본바탕에서는 얻을 수 없는 내용을 얻는 것이다.
따라서 현실은 환과 같고 꿈처럼 실답지 않다. 

그런데 이런 내용을 관하는 것만으로 당장 생생하게 겪는 생사고통을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다. 

이것이 쉽다면 심한 고문을 받는 현장에 처해서도 
이를 평안하게 참고 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대부분 그렇지 않다. 

그런데 여하튼 경전에서는
그런 생사고통을 해결할 원칙적인 방안을 앞처럼 제시한다. 

결국 현실에서 겪는 생사고통을 극복하려면 

우선 이론적으로 현실의 본 정체나 사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그에 바탕해 원칙적인 1의 방안을 직접 현실에 적용해 고통을 벗어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수행을 시작해 
현실에서 본래 생멸을 얻을 수 없음을 인가하여 무생법인을 증득하고  
어떤 고통도 평안히 참고 견디는 안인수행을 성취하게 되려면
대단히 장구한 노력이 요구된다.  
그래서 생각처럼 쉽지 않다.








● 계의 수행덕목을 기본으로 제시하는 사정 

일반적 입장에서는 원칙적인 1의 방안만으로
생사고통을 바로 벗어나기는 곤란하다. 
즉, 일체가 공하여 실답지 않음만을 관하여 
생사고통을 극복해 벗어나기 힘들다. 


따라서 원칙적인 1의 방안과 함께 
다시 생사고통을 예방할 수 있는 2의 수행방안을 함께 행하는 것이 요구된다. 

생사현실에서 고통은 일정한 인과관계로 받게 된다. 
이런 경우 그런 결과를 받는 상태에서 고통을 극복하는 것도 방안이지만, 
미리 그런 고통을 받는 원인을 제거하는 예방방안도 필요하다. 

예를 들어 벼랑에서 굴러 고통을 받는 것이 문제라고 하자. 
그런데 벼랑에서 굴러 고통을 받는 것은 아무 원인없이 받게 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벼랑에서 굴러 고통받는 상태에서 고통을 극복하는 것도 방안이지만, 
그보다 미리 벼랑 가까이 다가가지 않아 그런 결과를 예방하는 것이 훨씬 낫다. 

따라서 생사고통을 받게 되는 원인을 미리 제거하는 수행이 필요하다. 

생사고통은 생사고통을 받는 업을 행해서 받게 된다. 

처음 망집을 일으키면 그에 바탕해 업을 행한다. 
그리고 그로 인해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에 처한다. 
따라서 이를 예방하려면 망집을 제거하고 그에 바탕해 행하는 업을 멈추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생사의 묶임에서 바로 벗어나기는 곤란하다. 
그간 행한 업의 장애가 쌓여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업의 장애를 해소할 수행을 또 실천해야 한다. 

그것이 곧 '계율'에 해당하는 수행덕목들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우선 좋음을 아끼지 말고 다른 생명에게 좋음을 베풀어야 한다. [보시]
한편 다른 생명이 집착하는 좋음[생명, 신체, 재산, 가족,...]을 함부로 침해하며 나쁨을 가하지 않아야 한다. [정계]
그리고 자신이 억울한 고통을 받는 경우에도 분노를 일으키지 않고 평안히 참고 다른 상대를 보복해 해치지 않아야 한다.  [ 안인]
그리고 이런 수행을 꾸준히 행하는 것이 계에 해당하는 기본 수행 덕목들이다. [정진]

그리고 이런 수행덕목 역시 그 일체가 본 바탕이 공함을 관하는 가운데 행해야 한다. 
즉, 이들 수행덕목 역시 얻을 수 없음을 방편으로 집착없이 행해야 

이런 수행을 원만히 성취할 수 있게 된다.

이론상 1의 원칙적 방안 외에 이런 2 의 방안이 제시되는 것은 
물론 1의 원칙적인 방안만으로는 생사고통을 곧바로 극복해 벗어나는 것이 곤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칙적인 1의 방안과 함께
생사고통을 예방하기 위한 수행을 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생사고통을 이들 방안으로 해결하고 예방해야 한다는 사정자체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또 한편 이 두 방안을 각 경우마다 모두 실천하기 어려워하고 힘들게 여긴다. 
그러나 결국 생사고통을 해결하려면 이 두 방안을 취해 실천해야 한다. 

한편 이 두 방안 모두 행하기 힘들지만, 
그래도 미리 예방하는 수행방안이 좀 더 쉽고 낫다. 

따라서 기본적으로는 2의 수행을 원칙적으로 먼저 강조하게 된다. 

한편, 수행자는 비록 자신이 생사묶임에서 벗어나더라도
다시 다른 생명들의 생사고통을 제거해주기 위해 생사현실에 들어가 임해야 한다. 
생사현실에서 다른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는 
생사현실에서 다른 중생과 눈높이를 맞춘 가운데 임해야 한다. 
그리고 생사현실에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는 수행자 자신이 복덕과 지혜자량을 구족해야 한다. 
따라서 역시 2의 수행방안을 원만히 성취하는 것이 요구된다. 

2 의 방안은 처음 생사에 묶이게 하는 업장을 해소시켜준다. 
그리고 업의 장애가 다 해소되면 이후에는 복덕자량을 쌓게 해준다. 
꾸준히 저금을 하면 처음에는 있던 빚이 줄어들고 
빚이 다 없어진 후에는 자산이 증가하는 것과 사정이 같다. 

그래서 결국 2 의 방안은 원칙적인 1의 방안과 함께 
현실에서 생사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기본 방안이 된다. 


○ 생사고통 해결에서 무아 무자성 공의 이해의 가치


생사현실이 본래 공하고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는 것은 
결국 생사고통을 직면한 상황에서 이를 극복하는 데에도 기본적으로 필요하다. 
또 그런 생사고통을 예방하는 수행을 원만히 실천하는 과정에서도 필요하다. 
그런 기본 사정을 이해해야 수행을  힘들게 여기지 않고 원만히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실은 체가 없어 진짜가 아니고 무아 무자성이고 공함을 이해하는 것은 

결국 생사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필요하다. 

현실의 삶에는 각 주체가 극심한 생사 고통을 겪는다.

그리고 생사고통의 해결에 체가 없음을 이해하는 것이 관계없다면, 

이를 크게 문제삼을 바는 아니다. 


생사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그 정체를 살피면
본래 그런 생사고통은 참된 체가 없어 진짜라고 할 내용이 아님을 파악하게 된다. 

본 바탕은 체가 없고 공하다. [무아, 무자성, 공]
그래서 현실은 본바탕에서는 얻을 수 없는 내용을 꿈처럼 얻는 것으로서 실답지 않다. 
다만 각 주체가 망집을 일으켜 그것을 실답게 여기며 집착하여 업을 행하여 
생사고통을 겪게 된다. 
따라서 그런 생사고통을 벗어나고 해결하려면 
이런 본 사정을 잘 관하여 망집과 업을 끊어 내야 한다.
그리고 망집을 제거하는데 
현실의 본 정체가 무아 무자성 공임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편, 생사고통을 벗어날 수행을
어렵게 여기지 않고 원만히 잘 성취함에 있어서도 
이들 내용이 무아 무자성 공이고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 para-end-return ◧◧◧











Lab value 불기2564/01/12/일/23:04 재보충










● 무아 공 제시배경과 『회쟁론』의 논의 초점 


현실 내용이 참된 진짜인 실체가 없어 무아 무자성이고
그 본바탕이 되는 실재가 공하고 실답지 않다.

그런데 이런 사정을 이해하는 것은
생사현실에서 겪는 생사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다. 

즉,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에서 생사고통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해야 잘 극복할 수 있다.
또 이를 예방하는 수행도 이런 기본 사정을 잘 이해해야 원만하게 성취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이들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요구된다.
그래서 이에 관한 내용들이 경전에서 반복해 제시된다. 
그리고 이런 배경 사정을 이해하는 가운데 
『회쟁론』논의를 살피면 이 논의의 초점을 찾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생사고통을 실답다고 여기며
업을 행하고 생사고통을 받는다. 
그리고 그처럼 고통을 직면해 받는 상황에서는 
그것을 대단히 생생하고 실답게 여기며 받고 벗어나오지 못한다. 

또 한편, 현실을 실답다고 여기는 가운데 
생사고통을 예방하기 위해 필요한 수행을 힘들게 여기며 대부분 행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회쟁론』은 현실에 진짜라고 할 내용인 실체가 없고 실재가 공하여 실답지 않음을 이해시키는데
취지가 있다. 
즉 다음과 같은 내용을 밝히는데 초점을 둔다.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현실내용이 실답게 '있다'고 여기고 집착한다. 
그런 가운데 매 순간 업을 행하여 생사고통을 받는다. 

=> 그러나 본 바탕에 그런 내용은 얻을 수 없다. 
=> 따라서 현실 내용은 마치 침대에서 침대에선 얻을 수 없는 바다나 황금의 꿈을 꾸는 것과 같다.
따라서 현실은 꿈처럼 실답지 않다. 
그리고 현실에서 죄와 복의 차별이 극심하지만, 본 바탕에서는 이런 차별을 얻을 수 없고 공하다. 
그런데 그런 바탕에서 현실에서 그런 생사고통을 겪는 것이다. 
따라서 이를 해결해야 한다. 

=> 따라서 생사현실에서 당장 고통을 겪는 상황에서는 
현실의 본 정체를 올바로 파악해야 한다. 
그래서 현실이 실답게 있다는 망집을 제거하고 벗어나와야 한다. 

즉, 그런 내용은 참된 진짜 내용이 아니다. [=무아, 무자성으로서 체가 없다. ]
또 그 본 바탕의 실상은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고 공하다. 

따라서 그런 내용이 실다운 내용이라고 잘못 여기는 망상분별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자신이 집착하는 자신이나 자신의 수명 등과 같은 상을 취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분노를 일으키지 않고 평안히 참아 안인을 성취해 벗어나와야 한다. 
 

그리고 아직 생사고통을 당장 겪지 않는 상황에서는 
장차 그런 생사고통을 받게 하는 원인[업의장애]을
미리 잘 제거해야 한다.
그래서 그런 생사고통에 묶이지 않도록 수행을 원만히 잘 성취해야 한다.

즉, 망집을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망집에 바탕해 행하는 업을 중지해 새로 만들어내지 않아야 한다. 
또 이미 쌓여진 업의 장애를 제거하기 위한 수행을 잘 성취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수행 역시도 본래 얻을 수 없음을 잘 이해하여 
이 수행 자체에 대해서도 역시 망집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생사현실에서 수행을 행함을 어렵게 여기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생사현실에서 무소득[얻을바 없음]을 방편으로 이들 수행을 원만히 성취해야 한다. 
이로써 생사고통을 장구하게 받는 3 악도에 묶이지 않고 벗어나야 한다. 

이런 내용을 제시하는데 핵심이 있다. 

따라서 이 논의의 핵심은 다음이다. 

일반적으로 생사현실을 생생하고 실답게 여기며 집착한다. 
그러나 이들은 체가 있는 참된 진짜가 아니다.
그리고 본 바탕에서는 이들은 얻을 수 없고 공하다. 

=> 따라서 그처럼 생생하고 실답게 여기는 내용은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는 침대에서 꾼 바다나 황금 꿈과 같다.
=> 실답지 않다. 
=> 따라서 그런 내용을 실답게 있다고 여기는 망상분별을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망상분별에 바탕한 집착을 제거해야 한다. 


이런 사정때문에 어떤 내용이 체가 있는가 아닌가를 살피는 것이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 para-end-return ◧◧◧

















○ 악취공견과 무아 공 제시취지의 오해문제


'현실에 참된 진짜의 내용[체]가 없고 공하다고 하자. 
그런 경우 다음 내용을 제시하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차별없이 공하다.
따라서 현실에서 이렇게 하거나 저렇게 하거나 다 무방하다. 
그래서 그런 바탕에서는 아무렇게 해도 된다. 
또 자신이나 어떤 생명이 생사현실을 겪어도 그냥 방치해도 된다.'  
이런 내용을 제시한 것으로 잘못 오해하기 쉽다.

단순히 이런 내용을 제시하려고 한다고 하자. 
그러면 굳이 그런 내용을 제시하지 않아도 된다. 
생사현실이 처음부터 그런 상태였다. 
따라서 따로 이를 추가로 제시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공함을 제시하는 취지를 잘못 오해하지 않아야 한다. 
그런 경우는 실재의 공함을 이해해도 

이득이 될 내용을 얻기 힘들다. 



생사현실은 어차피 차별없이 공하다.
그런데 그런 바탕에서  하필이면 생사고통을 받게끔 되는 업을 행한다. 
그리고 하필이면 극심한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에 처한다. 
그런 상태에서 이를 그런 내용만으로 극복해야 한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부분적으로만 잘못 취한 입장이다.
그래서 악취공견을 일으키고 임하는 상태다. 


이런 악취공견도 부처님의 입장과 원칙적으로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이런 악취공견을 취하는 입장은

일체가 체가 없고 무아무자성이고 공하다는 내용을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본 바탕이 되는 실재는 전혀 아무것도 없다고 잘못 이해한다.
또 사정이 이렇기에 생사현실 일체가 없다는 의미로 잘못 이해한다. 
또 현실 내용을 얻어도 이 일체를 무시하고 아무렇게 행해도 무방한 것으로 잘못 이해한다. 
또는 사정이 그러므로 생사현실에서 아무렇게 임해도 되는 것으로 잘못 여기기 쉽다. 

그처럼 잘못 이해해 '없음'의 극단으로 나아간다. 

그러면 수행자가 생사현실에서 중생을 제도하는 것도 곤란하다. 

그리고 무량한 선법을 모두 다 상실하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잘못 이해하기 쉽다. 
그런 가운데 생사현실 자체를 모두 외면하고 무시하기 쉽다. 


그런 가운데 지옥과 같은 세계에 처하게 딘다. 
어차피 차별없이 공하다.
그런 가운데 하필이면 굳이 

생사고통을 장구하게 받는다.  
이는 중생제도나 자신의 생사고통의 해결에 무익하다. 
그런 경우 매순간 겪는 생사고통은 이론적인 이해만으로 극복하기 극히 힘들다. 
그런데 이를 실답지 않고 공함만으로 극복하고 벗어나와야 한다. 




생사현실에서 생사고통을 겪는다.
이는 현실에서 망집을 갖고 업을 행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근본원인이 되는 망집을 제거해야 한다. 
생사현실은 생생하고 얻고 명료하게 얻는다. 

그러나 본 바탕에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음을 제시한다.
이는 어떤 주체가 직접 얻지 못한다. 
그래서 2 분법상의 분별이나 언설을 떠난다.
그래서 이를 공하다고 제시한다. 

이는 생사현실이 마치 꿈과 그 성격이 같음을 제시하려는 취지다. 
생사현실은 본 바탕에서 얻을 수 없는 내용을 인과 화합을 통해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침대에 누어 꾼 꿈과 성격이 같다.
따라서 집착을 가질 실다운 내용이 아니다.
이런 사정을 이해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망집을 제거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이는 본 바탕에 '아무 것도 전혀 없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한편 생사현실안의 감각현실이나 관념분별 자체가 전혀 없다는 의미도 아니다.
생사현실에서 감각현실이나 관념분별은 망집을 일으키는 재료가 된다.
그러나 그 자체는 그렇게 얻는 것이다. 그래서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  


◧◧◧ para-end-return ◧◧◧






[img2-49] [그림] - 이하 아래 부분은 현재 [작성, / 표현교정, 수정, 보완/ 문단 재배치 순서 정리 등 ] 작업중입니다. -

작업시작시점 2564_0524_220055 

● [p]불기2561-09-22_회쟁론_001 과 [p]불기2561-09-22_회쟁론_001 [ 현재 페이지] 내용
을 전체적으로 중복서술을 피하는 한편 체계적으로 내용을 재배열 하는 작업중임 





○ 차별없이 공함과 수행 필요성


일체가 공하다.
그래서 모든 생사고통은 실답지 않다.
그래서 생사현실은 일체가 문제되지 않을 듯 하다. 

또 일체가 공함을 잘 이해하면 
이론상 그것만으로 모든 생사고통을 벗어날 수 있을 것처럼 여기기 쉽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특히 그처럼 일체가 공함을 이론상 이해한다고 하자.
그러나 기본적 수행덕목을 행하며 현실에서 겪게 되는 어려움조차  
그 이론을 통해 잘 극복하지 못하기 쉽다.
그래서 수행을 원만히 성취하지 못하기 쉽다.

그런 경우 극심한 생사고통을 직접 당장 겪게 되는 3 악도의 상태에 처하게 된다.
그런 경우 더더욱 그 이론만으로 그 상태를 극복해 내기 힘들다. 


이론이 생사현실에 갖는 의미를 잘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론을 현실에 적용하는 수행하는 노력을 현실에서 잘 실천해 행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이런 문제상황에 처하게 되기 쉽다. 



더욱이 비록 생사현실이 실답지 않아도 
이런 생사현실에서 장구하게 생사고통을 생생하고 실답게 받아나가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생사현실에 들어가 중생제도를 위한 수행을 행하는 수행자의 입장에서는 

비록 그것이 실답지 않다고 해도 자비심을 바탕으로 
그 생사현실에서 생사고통을 받는 중생에 눈높이를 맞추어 제도하는 가운데 
그 생사현실에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필요한 
복덕자량과 지혜자량을 구족할 수 있도록 
그에 필요한 수행을 원만히 잘 성취하는 것이 요구된다. 


- 악취공견과 수행의 필요성 

그래서 일체가 공하다는 사정으로 생사현실에서 
아무렇게 임해도 어차피 차별없이 공하기에 그런 사정으로 
수행을 행하지 않아도 무방하고
또 반대로 아무렇게 행해도 되고 
심지어 악행을 극단적으로 행해도 다 무방하다는 식으로 여기고 임하는 것은 
일체가 공하다는 내용을 잘못 취하는 악취공견의 입장이 된다. 

이는 생사현실에서 생사고통을 해결하기 위한 전제로 
그런 생사고통을 받게 하는 업을 중지해야 하고 
또 그런 업을 행하게 하는 망집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일체가 공하다는 내용을 잘 이해하여,
그가 대하는 생사현실이 실답지 않아서 집착을 갖고 대할 내용이 아님을 이해하여
망집을 제거하게 하고 
다시 이를 바탕으로 수행을 원만히 성취하게 하기 위하여 
이들 내용을 잘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므로 
이들 내용을 제시하게 된다는 기본 취지를 전체적으로 잘 이해하지 못한 가운데 

이들 내용을 잘못 취해 현실에 임하는 입장이 된다. 


그런데 본래 일체가 차별없이 무아 무자성이고 공함을 잘 이해한다면 
그런 바탕에서 어차피 차별이 없는데 
굳이 받지 않아도 될 생사고통을 받을 필요가 없고 

또 어차피 차별이 없는 가운데 그런 생사고통을 받게끔 하는 업을 굳이 행할 필요도 없다.  

또 반대로
어차피 차별없지만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는 것이 낫고,
또 그런 가운데 다시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갖추는 것이 낫고 
따라서 그렇게 될 수 있는 수행을 어렵게 여기지 않고 원만히 잘 성취하는 것이 나음도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그처럼 수행에 정진하면 어차피 차별없이 공한 가운데
자신과 모든 중생에게 좋고 좋은 상태를 잘 성취할 수 있다.

따라서 부처님은 중생들이 이런 기본 사정을 잘 이해하여 
어차피 차별없이 공한 가운데
일으키지 않아도 될 망집을 일으키지 않고
받지 않아도 될 생사고통을 받아나가지 않고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구족하여
다른 중생을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방향으로 
수행을 행할 수 있도록 이들 내용을 제시하는데 본 취지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악취공견과 부처님의 입장은
일체가 체가 없고 무아 무자성이고 공함을 인정하는 입장에서는 비록 같지만, 
이런 점에서 큰 차이가 있게 된다. 



- 일반적 입장과 수행의 필요성 

그런데 이런 차이는 무아 무자성 공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를 인정하지 않는 일반적 입장과의 사이에서는 더 극심하게 나타난다. 

즉 일반적인 입장은 
처음부터 현실 내용을 실체가 있는 참된 진짜라고 여기는 한편, 

본 바탕인 실재도 그와 일치하거나 상응한 내용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꿈에서 꾼 황금이나 바다는 
그 꿈을 꾼 침대에서는 얻을 수 없고
따라서 실답지 않고 참된 진짜의 내용이 아니지만, 
그러나 현실 내용은 이런 꿈과 사정이 다르다.
=> 현실 내용은 대단히 실답고 참되다고 여긴다. 
그래서 그렇게 현실을 실답게 여기는 가운데
매순간 행하는 생각이나 말이나 행위[업]를 하는 것은 
각 상황에서 달리 어쩔 도리가 없고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여긴다. 

따라서 일체가 무아 무자성이고 공하다고 제시하며 
그런 생사고통을 벗어나려면 그런 본 사정을 잘 이해하여 그에 대한 망집을 제거하고
그런 바탕에서 생사고통을 예방할 수행을 잘 성취해 벗어나와야 한다는 부처님의 가르침도
기본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잘못된 내용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경우 생사고통을 벗어나게 하기 위해
현실 내용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시키고 망집을 제거하게 하려면 
현실 내용이 비록 생생하고 실답게 여겨지지만,
그러나 이는 체가 없어 참된 진짜의 내용이 아니고
그 본 바탕은 공하다. =>
그래서 현실내용은 마치 침대에 누어 꾼 바다나 황금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실답지 않다. 
이런 사정을 이해시키는 것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참된 체가 없고 실상이 공함을 밝히는 논의는
이런 배경에서 논의가 시작된 것이다. 






● 논의 배경사정과 혼동문제


- 생사고통과 관련된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대하는 경우 

『회쟁론』과 같은 논의가 어떤 전체적인 배경에서 논의된 것인지를 파악하지 못하면 
우선 체가 있거나 없거나 이런 일이 자신의 삶에 무슨 관계가 있는가하면서 

논의의 초점을 찾지 못하게 된다. 

- 지나치게 논의나 희론에 집착하며 임하는 경우 

또는 정반대로 논의의 본 취지를 이해하지 못한 가운데 
논의에 사용된 언어 표현에 과도하게 집착하며 시시비비에 임하게 되기도 쉽다. 
그래서 어떤 주장으로 원래 무아 무자성 공한 현실이
그로 인해 공하지 않게 변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집착하며 임하게 되기도 쉽다. 

- 악취공견의 입장에서 무아무자성 공을 살치는 취지를 잘못 이해하게 대하는 경우 

또 한편, 이 논의가 처음 논의된 배경 사정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 
정작 일체가 체가 없고 무아 무자성이고 그 본 바탕은 공하다는 논의를 통해 
일체가 차별없이 공함을 이해해도 
사정이 그러니까. 현실에서 자신 마음 내키는 대로 아무렇게 행해도 된다고 제시하는 것으로 

논의 취지를 엉뚱하게 잘못 이해하고 악취공견의 입장을 취해 나아가기도 쉽다. 
그래서 이런 경우는 처음부터 엉뚱하게 논의를 살피는 것이 된다. 




그래서 일체가 무아 무자성이고 공하다는 내용을 이해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설령 그런 내용을 이해해도 단지 공하다는 것만 이해하는 가운데 
그런 바탕에서 다시 악취공견과 같은 엉뚱한 결론을 붙잡고 임하게 된다면 
처음부터 이 논의를 살필 필요성이 별로 없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예를 들어 과거 비바시부처님이 죄와 복이 모두 다 함께 차별없이 공하고 
그래서 머무는 바가 없음을 제시한 내용을 대하여 
그러니까 아무렇게 마음내키는 대로 행하면서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이해하고 임하는 것과 사정이 같다. 

이는 물론 부처님의 게송을 일 부분만 잘못 취하여
그 기본 취지에 대해 오해와 혼동을 일으켜서 발생한다. 

모든 악을 행하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고 
그 뜻을 스스로 청정케하라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제악막작 중선봉행 자정기의 시제불교 
(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라는
모든 부처님이 공통으로 남기셨다는 칠불통계게(七佛通戒偈)까지 함께 잘 이해한다면 
이들 내용의 종합적인 취지를 오해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러나 어떤 일부분의 내용만 취하면서 
종합적이고 전체적인 취지를 잘 이해하지 못하면 
오히려 이들 논의나 경전 구절의 표현에 집착하는 가운데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의 취지를 종합적으로 잘 이해한다면 
그런 각 내용도 그런 바탕에서 잘 살펴나갈 수 있다. 

그래서 일체가 체가 없고 무아 무자성이어서 참된 진짜의 내용이 아니고 
그 본 바탕인 실재가 공하다는 사정을 잘 이해하게 되면 
이런 내용을 통해 
생사현실에 우선 견디기 힘든 고통을 겪게 되는 상황에 처해도 
그 본 사정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여 평안하게 안인을 성취하여 극복하게 되는 한편, 

또 현실에서 어차피 차별없이 공한 가운데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해서 그런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받는 상태에 처할 필요는 없으므로
그런 상태를 미연에 예방하고 방지하기 위한 수행도 
망집에 바탕해 일반적인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힘들다고 여기지 않고 
아주 원만히 잘 성취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또 한편 이런 사정을 잘 이해하면
경전에서 어차피 일체가 차별없이 공하다고 제시하면서도 
그러나 생사현실에서 이런 행위는 하면 안 되고
또 이런 수행은 해야 한다고 제시하는가 

또 정착 본 바탕이 차별없이 공한 가운데
왜 생사현실은 현실에서 대하는 것처럼 매 순간 차별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하는 사정을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사정으로 일체가 체가 없고 공하다는 논의를 살피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 언어표현이 지시가능한 의미들


논의의 초점을 논의 배경이나 취지를 잘 파악하지 못한 가운데 
하나의 표현이 가리킬 수 있는 다양한 의미나 내용을 놓고 
그 가운데 어떤 내용이 이 논의와 관련되는가를 엉뚱하게 대하고 임하면 
하나의 if- 라면 형식의 주장은 표면적으로 보이는 1 개가 아니고 
해결하기 곤란한 무량한 if-라면의 문제로 나아가게 되기 쉽다.
그런 경우에는 그 논의가 정리되기 힘든 사정이 있게 된다.
이 사정을 처음에 제시하였다. 

즉, 처음 위 문장에서 제시된 표현으로서 
'만약'이란 표현이나 
'언어'란 표현이나 
'자체[體]'란 표현이나 
'없다'란 표현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물으면 
바로 그렇게 수없이 많은 if-라면의 문제가
그 각 경우마다 무량하게 나열된다는 사정을 쉽게 살필 수 있다. 

이것이 이 논의 과정에서 아예 문제가 되지 않거나 
아니면 문제되더라도 어떤 사전을 하나 놓고 찾으면 바로 해결이 된다면 
문제가 간단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정이 전혀 그렇지 않기에 문제를 삼으면 다 문제가 된다고 보게 된다.


어떤 경우는 이런 자세가 문제를 공연히 복잡하게 따지며 시비를 일으키는 것으로 여길수도 있다. 

그런데 현재 이런 논의가 진행되는 것은 
바로 그처럼 전도몽상을 일으켜서 엉뚱한 내용을 놓고 
엉뚱한 분별을 행하고 이를 집하고 임하는 입장 때문에 이 논의가 진행된 사정이 있다. 
그런데 이런 문제제기가 지나친 생각이라고 여기고 단순하게 접근하면 

제일 처음에 지적한 논리문제의 함정에 바로 빠지게 된다. 

즉, 장미꽃은 꽃이다. 꽃은 한글이고 글자 하나다. 
그래서 장미꽃은 한글이고 글자 하나다. 
이런 식으로 추론을 해가는 것은 처음 대하는 꽃이란 단어를 

언어차원을 가리키는 의미로 파악하고 잘못 접근해서 발생하는 문제다. 
그래서 엉뚱한 내용을 붙잡고 엉뚱한 논의를 진행하고
그 결론으로 다시 엉뚱한 내용 예를 들어 '(영어인)rose 는 한국말이고 글자 하나다' . 
이런 형태의 엉뚱한 결론을 붙잡고 내세우게 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그것이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일으키는 망집현상의 문제이기도 하고 
또 이를 놓고 논의에 참여하는 이들이 대부분 일으키는 혼동 문제이기도 하다. 

물론 자신은 그런 내용이 이 논의에서 다루려는 주제라고 여기고 
열심히 임해 논의할 수는 있겠지만, 

다른 이들이 밤에 관심을 갖고 있는데 
자신만 그 밤이 자신이 이해하는 밤인줄 알고 
밤을 붙잡고 밤을 논의하면서 밤을 지새우는 이상한 상태로 들어가게 된다. 
물론 위 문장은 저녁을 의미하는 밤, 먹는 밤을 섞어서 
각 부분의 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하기 힘들 가운데 
서로간 혼동을 일으키는 상황을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논의 상황에서 각 부분이 가리키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면 
논의 전체가 이런 성격으로 대단히 복잡하게 얽히게 된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이 경우 정작 어떤 밤을 놓고 논의하는 것이 옳다고 할 것인가를 처음 잘 살펴야 한다. 


아래 그림에 어떤 a와 관련해 

그 정체나 그 유무가 논의될 수 있는 다양한 존재의 측면이 
시루떡 얹혀진 형태로 제시되어 있다. 




08pfl--image/존재의_영역_설명.png
[img1]
08pfl--image/존재의_영역_설명.png




 

그래서 무엇인가가 '있고 없음'을 문제삼는 가운데 
그 각 경우마다 이런 경우는 이렇고 저런 경우는 저렇다고 하면서 
관련 내용을 IF- 라면 구조로 문제를 살피려고 한다면 
그 문제는 위 다양한 측면 가운데 어느 측면의 어떤 내용을 붙잡고 
그런 IF- 라면 구조로 문제를 살피려고 하는가 문제부터 가장 먼저 잘 살펴야 한다. 


그런데 논의가 진행되는 각 문장의 단어 하나하나마다, 

그 단어가 가리키는 내용이 어떤 종류의 감각현실인가, 관념내용인가. 언어차원의 내용인가. 
아니면 실재영역의 무엇을 가리킨 것인가. 실체의 유무를 따지는 내용인가. 
이런 식으로 하나같이 다 문제가 제기된다면 이 문제를 쉽게 해결하기 어렵게 된다. 

그래서 예를 들어 '체'를 놓고 그 체란 표현이 
도대체 이런 다양한 영역의 내용 가운데 
어떤 영역의 어떤 내용을 가리키는 것인가가 문제된다고 해보자. 

그리고 갑이 이해하는 '체'의 의미와 을이 의해하는 '체'의 의미가 다를 때 
이 가운데 예를 들어 갑이 이해하는 '체'의 의미가 
여기서 등장하는 용수 보살이나 그 상대방이 
이해하는 '체'의 의미와 같다고 볼 근거는 무엇인가를 문제삼는다고 하자. 

그런데 어떤 이가 이 논서에 적힌 이 단어는 위 여러 내용 가운데 
어떤 내용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면 
그것은 그 글자 모양이나 형태를 현미경으로 살펴서 그렇다고 할 것인가?

아니면 불교사전이나 어학사전에 그렇게 적혀 있다는 것을 그 근거라고 볼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그 근거를 세울 수 있는가. 이런 문제다. 

예를 들어 '체'란 단어로 문제를 제기할 때 

이 논의가 그런 '체'란 글자가 
자음 하나 모음 하나로 구성된 한국어이다 또는 아니다. 
이런 문제를 놓고 논의하는 것은 아님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이가 그런 내용을 이해하고 주장하면 또 
무엇을 근거로 이를 살필 것인가?

글자 '체'만 놓고 본다면 그 글자는 그런 내용은 제외한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여기서 당장 일체를 문제삼고 또 처음 언어를 문제삼고 있다. 
그래서 이런 내용들은 어떤 주제와 관련해 살피는 가운데 
공연히 억지를 부리는 것이 아니고 
이런 문제가 제기되는 현실 사정이 있기에 
이들 문제를 잘 정리하지 않으면 
어떤 논의에 대해 살펴나가는 것이 
대단히 곤란하게 됨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여기서 해결하지 않고 
또 다른 부분이나 그와 관련된 또 다른 보조 자료로 넘어가도 
거기에서도 또 같은 문제가 계속 그 현장마다 나타난다. 
예를 들어 용수보살님을 논의 현장에 대동해 나타난다고 해도 
그 경우에는 다시 그런 어떤 사람은 지금 여기서 문제삼는 용수보살임을 
확인할 근거는 또 무엇인가가 또 다시 문제된다. 


그런 입장에서 각 단어를 살피면 이들 문제가 모두 관련된다. 

'만약' '언어'에 '자체'가 '없다' '있다' 이런 단어도 다 사정이 그와 같다. 

그래서 이 각 단어마다 앞에서 살핀 것처럼 매 경우 5 개 정도의 경우수를 나열해가면 
벌써 이론상  5*5*5*5 의 각기 다른 if- 라면 구조로 된 내용을 놓고 
그런 의미로 if-라면의 구조로 된 내용을 제시한 추상적 주체들과 하나하나 
그 내용의 옳고 그름을 놓고 문제를 살펴가야 하는 상태가 된다. 

그런데 이렇게 임하면 논의의 초점을 찾기도 힘들고 

이 가운데 어떤 것이 과연 원래 문제된 내용인가를 살피는 것조차 힘들어 진다. 


그래서 어떤 이가 이 가운데 자신이 이해하는 의미를 정하고 

논의에서 살펴나갈 초점을 추상적으로 잡아 살펴가게 되더라도 
논의가 진행되는 일반적인 상황에서의 사정은 전혀 그렇지 않다.
따라서 이런 점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앞에서 오래된 외국 서적과 관련된 논의를 하게 되면 
그와 관련된 다양한 판본을 대하게 마련이라고 지적했다. 

그런데 이 문제는 사실은 논의가 진행되는 주제와 관련해 

제시되는 한 단어나 한 구절 한 문장마다 
그 의미 해석이나 표현 하나하나를 놓고 
매 경우 위에 제시한 형태로 각기 수십의 새로운 주인들의 
새로운 주장과 해석이 나타나 만나게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런 논의로 시시비비를 살피는 현실 상황은 
마치 어떤 가게에서 어떤 물건이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많은 주체와 함께 
그 물건이 누구의 것이고 그 물건값은 또 얼마이고
그 대금을 누구에게 어떤 식으로 지불해야 적절한가를 놓고 
하나하나 소송이 진행되는 것과 마찬가지 상황이 된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제각각 문제되는 쟁점마다 서로  다른 주장을 내세우면서 
시시비비와 논의를 진행하는 상태와 같다. 

그래서 구체적 논의상황에서는 이런 각 입장을 일일히 상대해서 
그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논의가 필요하게 된다. 

그런데 정작 어떤 한 문제에서 물건의 주인이라고 나서는 이들이 수없이 많고 
또 매 구절 매 문장마다 서로 다른 주장이 복잡하게 제시되어 얽히면 
예를 들어 법관인 입장이나 소송의 한 당사자가 되어 임하는 입장에서는 
도대체 어떻게 이 판단을 진행해 나갈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이런 사정 때문에 

논의에서 제시되는 각 표현이 가리키는 의미를 잘 파악하려면 
먼저 전체 배경 사정과 취지를 통해 이해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따라서 논의가 제시된 배경 사정이나 

논의하고자 하는 초점이나 취지를 처음부터 잘 판단해서 

미리 어느 정도 제한을 두고 살펴나가야 한다.

그런데 이런 배경을 파악하고 
논의과정에서 사용된 구체적 표현의 의미를 파악하는 문제가
결코 간단하고 쉽지는 않다.  

또 한편, 이렇게 배경사정과 맥락을 통해 의미를 찾는다고 해도 

이 논의가 일으키는 혼동 문제가 모두 말끔하게 진정되고 제거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런 논의를 하게 된 배경사정과 관련된 내용이 
또 다른 시시비비의 문제를 일으키는 사정도 있게 된다. 

그래서 IF-라면 구조로 제시되는 논의는 그 자체로도 상당히 복잡하고 

각 단어가 가리키는 다양한 내용으로 인해서도 대단히 복잡한데, 
그러나 또 이와 같은 배경 사정까지 함께 이해해야 하기에 복잡하다.

다만 사정이 위와 같기에 
한편으로는 이런 다양한 내용을 함께 놓고 살필 수 있는 장점을 갖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여기서 살피려는 『회쟁론』이 제시된 배경사정을 놓고 살핀다면, 

위와 같은 다양한 측면 가운데 어느 부분을 문제삼으려 하는가에 대해서 
심정적으로 막연하게 파악할 수는 있다. 

우선 『회쟁론』에 대한 불교사전의 설명을 참조하면 다음과 같다. 


회쟁론[廻諍論]      【범】Vigrahavyāvartanī. 1권. K-630, T-1631. 

동위(東魏)시대에 비목지선(毘目智仙, Vimokṣaprajñāṛṣi)과 
구담 반야유지(瞿曇般若流支, Gautama Prajñāruci)가 
541년에 금화사(金華寺)에서 번역하였다. 
공설(空說)에 대한 외도의 비판에 대해 
일체법이 공이고 무체(無體), 즉 무자성임을 논한 용수의 저술이다. [운허_동국역경원사전] 


그런 가운데 실체가 없고 공함을 밝히는 논의는 

현실내용을 실답다고 여기며 집착하고 임하는 망집현상을 
시정해서 생사고통을 벗어나게 하려는 취지에서 제시한다는 배경사정을 살핀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가 자체적으로 정리가 잘 안되고 너무 혼동이 심한 경우는 

원효대사님이 경험한 내용처럼 해골에 담긴 물을 한잔 마시고 
그 해골물의 정체가 무언가를 혼자 곰곰히 생각하는 연구방법이 차라리 나을 수도 있다. 


그런데 여하튼 현실적으로 이들 논의를 구체적으로 살펴가려면 
이런 사정들 때문에 여기서 살피는 핵심 단어가 
어떤 영역의 무엇을 가리키는 말인가는 놓고 고민을 해야 된다. 



○ 입장 조화를 위한 취사장 사단장의 방안 

현실의 시시비비 논의가 진행되어서
각기 다른 입장의 주장이 제시될 때 

처음 취사장이 개입한다. 

여기서 '취사장'이란 표현은 
각 입장마다 갖는다고 보는 장단점의 측면을 살펴서 
장점만 뽑아 선택하며 살피는 입장을 나타낸다. 

그런데 취사장이 이렇게 논의에 개압하면 
이로 인해 시시비비문제가 또 다시 일어나게 된다. 
왜 그것이 장점인가. 왜 이것은 단점인가. 
왜 이것은 선택하고 왜 이것을 버리는가. 
이런 식으로 시시비비가 증폭된다. 

이런 경우 다시 사단장이 개입해 
문제를 잘 해결하려면 역시 초점을 잘 맞춰 임해야 한다. 

여기서 사단장은 각 입장이 갖는 장단점을 취사선택하는 입장이 
앞과 같은 문제를 일으키므로 
이제 그런 내용 역시 다 버리고 
망집분별을 완전히 제거해 잘 임해야 한다는 의미를 표현한 것이다. 


현실에서 전도망상상태에서 시시비비 논의가 발생할 때 
각기 다른 입장에서 장단점을 가리고 
장점을 선택해 모아가려는 입장과 

이런 시시비비 논의과정에서 
망집분별을 완전히 제거해서 그런 시시비비 다툼을 
근본적으로 제거하려는 입장은 조금 차이가 있다

그것은 옳고 그름을 분별해 따지려는 입장 때문에 
세상의 시시비비 문제가 진정된다기 보다는 
오히려 이로 인해 시시비비 문제가 
더 시끄럽게 증폭되게 되는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과거에 황희정승이 
여인 3 명이 시시비비에 임한 사례를 살펴볼 수 있다. 

처음 여인 둘이 다툼을 벌였다. 
그래서 황희정승이 각 입장마다 다 그 입장이 옳다고 긍정했다. 
그래서 그 문제가 진정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황희정승이 서로 다른 입장을 다 옳다고 하니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하고 제 3 여인 즉 황희정승의 부인이 
다시 제 2 차 시시비비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그래서 다시 그런 주장도 옳다고 했다는 사례가 있다. 

그런데 이로 인해서 그 문제가 잘 해결되는 경우도 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고 
더 시끄럽게 되었다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런 여러 사정으로 
결국 황희정승이 골치가 아파와서 
소를 타고 가출했다는 뒷소식도 듣게 된다. 
그런데 논에서 누런 소와 검은 소가 일하는 것을 보고 
이들 가운데 누가 더 일을 잘하는가가 궁금해서 
농부에게 질문을 했다는 사례가 또 있다. 
이 때 농부는 답을 바로 안하고 
황희정승에게 다가와 귀속말로 답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왜 그 정도 질문에 그렇게까지 하는가라고 궁금해하자. 
농부가 소들이 들으면 기분나빠한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부작용이 더 증폭되고 커진다. 
이런 점을 제시했다고 전한다. 

이런 내용들이  지금 각 주제를 놓고 
시시비비를 살피는 상황에서 늘 나타나는 문제상황과 
관련된다. 

물론 각기 입장이 달라서 시시비비가 일어날 때 
각 입장마다 이런 저런 사유로 문제가 있고 잘못이라고 문제삼는 것보다는 
각 입장이 다 이런 저런 사유로 옳다고 볼 수 있다고 자세를 취하면 
앞보다는 조금 낫다고 보게 된다. 


그런데 이런 방식만으로 과연 
각기 입장이 달라 주장을 달리 내세우는 현실의 다툼 문제가 잘 해결되겠는가. 

그렇게만 단순히 보기 힘들다. 
잘못된 견해를 고집하고 이에 바탕해 업을 행하여 
생사고통을 증폭시켜 자신도 받고 다른 중생도 받아가게 하는 
사례가 현실에 대단히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용수보살님이 이런 시시비비의 현장에 들어가 
가정적 항변 방식으로 논의를 진행해서 
엉터리 망집을 붙들고 고집하는 입장을 논파시켜서 [파사]
이를 통해 그런 망집이 제거된 상태를 얻어내려고 [현정]
노력하는 근본취지이기도 하다. 

그런데 매 논의 주제마다 
각기 다른 어려움이 상당히 있다고 보게 된다. 

그래서 그런 경우 무슨 좋은 해결 방안이 있는가. 
이것이 또 이런 논의를 대할 때 갖게 되는 문제점이다. 



>>>






○ 망상분별에 대한 해결방안 3가지 

망상분별을 해결하는 방안에 대해서 
크게 3 가지 방안을 나누어 제시할 수 있다. 

1 망상분별을 일으키는 내용을 직접 놓고 그것이 실답지 않음을 직접 이해하는 방안 

2 망상분별 내용을 일단 '그대로 받아들인 가운데' 
그런 전제에서 어떤 문제가 있는가를 살피는 가정적[if] 항변 논의를 통해 

망상분별이 잘못임을 이해하는 방안 

3 이들 노력이 잘 안 되는 경우 다시 망상분별을 그대로 받아들인 상태에서도 
그에 대한 집착을 제거하고 수행에 임해 생사고통을 벗어나는 방안 


이를 다음처럼 요약할 수 있다. 




○ 망상분별을 받아들인 바탕에서 결론만 같게 취하는 방안 

우선 망집을 해결하는 방안으로는 
첫번째 방안이 가장 원칙적이다. 


원칙적인 입장에서는 
전도망상분별이 잘못임을 올바로 이해하고 
그런 바탕에서 수행의 자세로 전환해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와야 함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런 방안으로 망상분별을 제거하고 
수행으로 전환해나오기가 어려운 현실 사정이 있다. 
그래서 현실에서는 2나 3 방안에 다시 의존하게 된다. 


2 번째 가정적 항변 방식은 
현실에서 갖는 망집 자체를 제거하기 위해 
그런 망집을 받아들이면 어떤 문제가 있는가를 살핀다. 
이를 통해 그런 망집이 잘못임을 깨닫게 하여 망집을 제거해내려는 방안이다. 

그러나 3 번째 방안은 그런 망집이 엉터리지만 
일단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받게 될 생사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수행방안을 택하는 점에서 다르다. 
이는 망집 내용을 전제로 하더라도 
그런 상태에서 일반적으로 취하게끔 되는 반응을 중단시키고 
대신 수행방안을 그 예방방안으로 제시하는 점에서 
일종의 가정적 항변방식의 응용이다. 

3처럼 전도망상분별을 일단 그대로 받아들인 가운데 
수행 방안을 제시하는 사정은 다음이다. 

현실에서 생생하고 실답게 여기며 받는 고통은 대단히 다양하다. 
매일 보고되는 사건 사고 하나하나를 놓고
그 상황에 직접 처했다고 가정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현실에서 살아가는 이상 
누구나 그런 생사고통을 피하기 곤란하다. 
따라서 이런 사정이 곧 역설적으로 

현실에 대해 갖는 집착을 제거하고 
수행에 임해 생사고통을 예방하고 벗어나야 한다. 


즉, 현실 내용이 실답다면 
현실에서 겪는 고통도 대단히 생생하고 실답다. 
그런데 바로 그런 사정 때문에 역설적으로 
그에 대한 집착을 제거하고 수행으로 전환해 현실에 임하는 것이 필요하다. 

환자가 수술시 고통을 심하게 받으면 
차라리 의식을 잃거나, 마취제로 고통을 받지 않는 것이 낫다고 여긴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실에서 겪는 고통이 대단히 실답게 여겨진다고 해도 
결국 무상하고 고통스런 것임을 이해하고
현실은 실답지 않다고 여기며 집착을 제거하려 노력하는 것이 낫다. 

한편 수행을 행하지 않으면  
고통을 대단히 생생하고 실답게 받게 된다. 
이를 피하고 예방하기 위해서는 인과상 수행이 필요함을 이해해야 한다. 

각 상황마다 망집에 바탕해 반응하는 경우 
인과상 그 결과로 받는 고통을 미리 관하고 이를 미리 끊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예방하기 위해 
수행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은 결과로 받을 고통에 비해 훨씬 적음을 살펴야 한다. 
원칙적인 입장을 놓고 보면 

그런 현실을 실답게 여기는 망상분별 자체가 잘못이다. 
다만 이런 원칙만으로 현실에서 겪는 고통을 곧바로 극복해 벗어나기 힘들다. 
따라서 그런 망상분별을 일단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런 바탕에서 겪는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예방방안으로 수행을 취하는 경우다. 
그리고 일단 생사고통을 벗어난 후 
점차적으로 망상분별 자체가 잘못임을 깨닫고 이해해갈 것을 단계적으로 꾀하게 된다. 



참고 :  http://buddhism007.tistory.com/3821#8987



◧◧◧ para-end-return ◧◧◧










○ 망집과 궤변의 사례 



용수보살의 『중론송』과 같은 논서를 대하면 
일반적인 입장에서는 대부분 
그 말이 무슨 내용인가를 이해하기 힘들다고 본다. 
그리고 오히려 용수보살이 이치에 맞지 않고 
현실에 들어 맞지 않는 궤변으로 억지주장을 하는 것으로 여기게 된다. 


이는 경전 내용도 사정이 비슷하다. 
기본 경전이나 대승 경전이나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대하지 못하는 내용들을 많이 제시한다. 
그런데 일반적인 입장에서는 이런 내용 전반이 
현실에 없는 엉터리내용을 지어내 제시한 것으로 이해하고 
외면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런 반응 자체가 
현실에서 전도망상을 일으킨 상태로서 
양 입장에 이런 극단적인 차이가 있는 만큼 
이 논의가 대단히 복잡하고 어렵다. 



쉽게 예를 들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영희가 저 거리에서 있다가 
자신을 보고 반갑게 소리치며 달려왔다. 
그런데 이 상황에 그런 영희나 자신도 얻을 수 없고 오고감도 얻을 수 없다. 
이런 내용이 그런 예의 하나다. 

또 다른 경우도 마찬가지다. 
어떤 과학자가 한 때는 과거에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여겼는데 
잘 살펴보니 지구가 태양을 도는 것 같다고 발표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또 잘 살펴보니 태양도 지구와 함께 열심히 도는 것 같고 
우주 공간안에서 대단히 빠른 속도로 이동 중인 것 같다고 최근에는 보고한다. 
그런데 이는 모두 사실 그렇지 않고 
그렇게 보는 주체가 전도된 망상을 일으켜서 그렇게 여기며 대하는 것이라고 제시한다. 

이와 비슷한 내용이 경전에도 실려있다. 

바람이 불어서 깃발이 흔들린다. 
일반적으로 이렇게 이해한다. 
그런데 어떤 한 분이 이것은 바람이 부는 것인가. 
깃발이 흔들리는 것인가라고 묻자, 
그것이 아니고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런데 나중에 다시 
마음은 본래 그런 흔들림이 있거나 또는 정지해 머묾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그런 망상분별이 마음에 들어와 그렇게 헤아리게 된다고 제시한다. 

이런 내용들이 일반입장과 경전 입장의 극단적인 차이의 예다. 


그런데 
일반인들이 갖는 견해 거의 대부분이 이런 망집을 바탕으로 한것이어서 
전도몽상과 관련된 사례는 무량하다.

예를 들어 자신의 왼손을 가만히 두고 오른 손을 세게 움직혀 부딪히니 

손뼉소리를 듣게 되는 경험을 반복하게 된다.

그래서 이 상황에서 손뼉 소리는 없다가 나타난 것이므로 
그런 소리의 생멸이 있다고 대부분 여긴다. 

그리고 그 원인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기 쉽다. 
이 상황에서 가만히 있던 왼손은 책임이 없고 
그 상황에서 세게 부딪힌 오른손이 책임이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오른손이 왼손을 부딪힐 때 소리가 났으니, 
원래 오른 손에 그 소리가 들어 있었다고 생각하기 쉽다. 

또는 다음처럼 생각할 수도 있다. 
여하튼 그 상황에 왼손이나 오른 손이 없었다면 그런 소리는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여하튼 이 두 손이 소리를 만들어낸 원인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경전에서는 이런 현실을 놓고 
거기에는 그런 소리 자체도 얻을 수 없고 
그 소리의 생멸[나타나고 사라짐] 자체를 얻을 수 없다고 불생불멸을 제시한다. 

그래서 이 가운데 어떤 입장이 옳은가에 대해 논의가 진행되면 
통계 조사까지는 않더라도 
현실에서 99%에 해당하는 거의 대부분은 앞 주장이 비교적 적절하다고 보고 
뒤의 입장은 말이 되지 않는 엉터리 주장이라고 여기게 된다. 

그런데 경전에서는 바로 이런 사정으로 

그런 상식적인 견해가 망집 상태임을 이해시키기 위해 

가정적항변방식을 통해 상대의 견해의 문제점을 살피게 된다. 


그러나 또 한편 현실에서 일반적 입장에서 
망집을 일으켜 임하는 것이 일반이어서 
그런 상식적 입장이 잘못된 망상분별임을 하나하나 이해시키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다. 

오히려 일반적 입장에서는 
경전 등에서 이처럼 이해되지 않는 내용을 제시하니 더 답답하게 여길 수 있다. 

원래 수행자는 이들 내용 전체에 대해서 
분별과 집착을 떠나야 함을 제시받기에 
이런 문제에 대해 집착하지 않고 답답함을 느끼지 않을 수 있지만, 
그러나 역시 망집을 일으킨 상대를 이해시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 사정으로 『회쟁론』이나 『중론송』등에서
용수보살님과 같은 논사들이 
상대의 주장에 어떤 오류가 있는가를 이해시키기 위해 
가정적 항변방식을 사용해 논의에 임하는 사정이 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각 내용을 살피기 전에 
이런 가정적 항변 방식의 논의는 
어떤 배경사정과 어떤 취지에서 어떤 성격을 갖고 제시되는가를 살피고 
이에 대해 일반적으로는 일으키기 쉬운 오해도 함께 살피기로 한다. 

그리고 이런 내용을 기본적으로 이해해야 경전이나 논서를 대할 때도 
큰 어려움이 없이 내용을 잘 이해해나갈 수 있다. 

그리고 결국 이런 이해를 통해 망집을 해소하여 
생사고통을 장구하게 받아나가는 상태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된다. 







● 있고 없음의 논의 성격
==> 참고 
[ 기존 유무 논의와 중복을 피해 상당부분 링크로 처리할 필요성 ] 





○ 다양한 유무 판단과 회쟁론에서의 유무판단 

현실 상황이란, 
눈을 떠서 1 과 같은 모습을 보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그런 부분을 이렇게 묶고 저렇게 나누어 
어떤 부분이 자신이라고 여기거나 영희나 철수라고 여기고 
그렇게 생각하고 이 상황을 대하고 있다. 

그런데 예를 들어 어떤 논의에서 
그런 영희나 자신도 얻을 수 없고 
그 생멸도 얻을 수 없고 
오고감도 얻을 수 없다는 논의를 진행한다면 
앞 내용들 가운데에서 무엇을 어떻다라고 제시하는 것인가를 찾아보자. 

일단 위 부분에서 어떤 부분을 놓고 
이렇다 저렇다고 한다고 보는가를 숫자로 찾아보자. 






○ 언어영역의 존부문제 -언어영역의 언어표현 존부 논의 


현실에 영희를 얻을 수 없고 실체가 없음을 문제삼는다고 하자. 
그런데 이 문제는 우선 사전에서 영희를 찾으면 나오는가의 문제인가. 

이 경우 '영희'란 단어는 사람 이름이기에 국어사전에 안 나올 수도 있다. 
경전에서 자주 문제삼는 주제로 현실에서 생멸을 얻을 수 없다라고 할 때 
이는 이런 이런 단어를 사전에서 볼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 관념의 존부 문제 

자신이 방에서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이 건망증 환자여서 어느 순간 누구를 찾는지 자체를 잊어버렸다.. 
그런데 분명 누군가를 찾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래서 그 생각이 안 나는데 그 생각은 과연 지금 어딘가에 있는가 없는가. 
이런 문제인가도 생각해보자. 

무언가 생각하다가 생각이 안날 수 있는데 
나중에 그 생각이 떠오를 수도 있기에 문제될 수 있다. 
이 경우 그 생각이 안 떠오르던 시점에는  
그 생각은 어디에 숨어 있었다가 나타나는가도 의미있는 주제는 된다고 본다. 

그런데 지금 생멸이 있고 없음이나 
참된 나나 어떤 것의 실체가 있고 없음을 이런 의미로 논의한다고 보기는 곤란하다. 


만일 그런 셩격의 논의라면 
현실적으로 도저히 있을 수 없다고 보는 것을 생각해도 
그런 관념 측면에서는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은 그렇게 있다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빛보다 빠른 속도로 나아가는 황금독수리'가 
세상에 있을까를 문제삼아 논의할 때 
그 논의가 위와 같은 성격이라면 
세상 이곳 저곳을 살필 필요도 없이 
그런 생각을 하고 문제삼을 때 
그런 관념 내용자체는 이미 그렇게 관념 영역에 있다고 해야 한다. 

따라서 어떤 것을 찾기 위해 몽타쥬 형태로 
어떤 내용에 대한 특징과 성품을 나열할 때 
그 몽타쥬만은 그 영역에 그렇게 있다고 해야 한다. 

그런데 알고보면 그런 논의는 별 의미가 없고 .  
심심해서 장난삼아 하는 희론이라고 하게 된다. 
따라서 논의할 의미가 없는 이런 논의가 행해질 경우는 별로 없다고 보게 된다. 
그러나 논의 과정에서는 의외로 이런 성격의 논의로 혼동하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그래서 살펴볼 의미가 별로 없다고 보는 이런 성격의 논의도 기본적으로 잘 살펴야 한다. 

예를 들어 진짜 참된 어떤 실체(본체)가 있는가. 
참된 나나 그런 나 자체의 본성이 있는가를 문제삼을 때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되기에 있다고 주장한다면 바로 이런 성격의 논의를 하는 것이다. 
또는 그런 것이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되기에 
그래서 그런 것이 있음이 분명하다고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어떤 논의를 할때 
그 논의가 과연 문제삼는 내용과 관련된 관념속 몽타쥬가 
관념영역에 잘 그려져 일으켜지는가 없는가를 문제삼는 것인가 
아니면 이와는 다른 성격의 논의인가부터 잘 구분해야 한다. 

경전에서 자주 문제삼는 주제로 현실에서 생멸을 얻을 수 없다라고 할 때 
생멸이란 관념 자체를 어떤 이가 일으킨다 못 일으킨다. 
이것을 문제삼는 것은 아니다. 



어떤 관념이 관념영역에서 얻어지는가 여부도 중요하다. 
논의과정에서 이런 성격의 논의와 혼동을 대단히 많이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는 수학문제와 같다. 
수학문제에서 제곱해서 -4 가 되는 수가 무엇인가라고 문제가 제출되면 
허수 개념을 동원하게 된다. 그러면 답이 있는 것이 된다. 
그런데 제곱해서 2 가 되는 정수가 있는가라는 문제가 제출되면 
그런 정수는 '없다'고 답하게 된다. 
그래서 이런 차원에서도 분명 있고 없음의 논의가 이뤄질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성격의 논의를 하다가 
불교논서를 대하면 
불교 논서에서 제시하는 논의도 이런 성격의 논의인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그러나 이런 논의는 하나같이 희론의 성격을 갖기에 
현실의 한 주체가 생사현실에 묶이는가와 관련된 
논의에서는 다루지 않는다고 보지만, 
그런데 현실적으로 대단히 많다. 
그리고 나중에는 이런 차원에서 추론체계도 같이 문제된다. 







○ 일반적인 유무판단- 관념에 대응하는 감각현실 유무문제 

또는 자신이 눈을 떠서 무언가볼 때 
평소 일정부분을 영희라고 여기고 대한다. 
그런데 건물에 들어가 같이 걸어가다가 어느 순간부터 지금 그런 부분이 안 보인다. 
그래서 영희가 이 건물안에 있는가없는가를 문제삼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이 논의가 
과연 이런 측면의 논의인가부터 확인해보기로 하자. 

현실에서 문제될 수 있는 논의를 이처럼 우선 3 개 정도만 나열했다. 
그런데도 '영희가 있다'거나 '없다'라는 문장이 제시되면 
이 가운데 어떤 내용을 가리키는가는 문장만으로 확정하기 곤란하다. 


한편, 이런 측면에서 유무를 살피는 문제는 성격이 앞과 달라진다. 
이 경우는 영희를 방금전까지 보았다. 
또 자신이 찾는 영희에 대한 몽타쥬도 관념형태로 떠오른다. 
예를 들어 안경을 쓰고 있고 옷은 노란 옷을 입고 
이런 형태로 영희에; 대한 몽타주에 해당하는 관념내용이 떠오른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무엇을 문제삼는가 하면 
그런 몽타쥬는 관념영역에 있는데 
그에 해당하는 내용을 감각현실 영역에서 못 얻고 있다. 
그래서 영희가 지금 어디있는가를 모르기에 찾고 있고 
그래서 과연 건물 안에서 영희가 있는가를 놓고 
있고 없음을 문제삼는 것이다. 


일반 현실에서 전도몽상 상태에서 
무엇이 있고 없음을 문제삼을 경우는 
대부분 이런 측면에서의 있고 없음을 문제삼는 것임을 파악할 수 있다. 

그래서 이는 찾는 것에 대한 몽타쥬에 해당하는 관념내용은 이미 있지만, 
다만 그에 일치하거나 상응한 감각현실을 얻을 수 있는가를 문제삼는 것이다. 


이처럼 앞에 나열한 내용도 현실에서 다 문제되고 
논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그런데 현실에서 생멸이나 오고감을 얻을 수 없다는 논의가 
과연 이런 성격의 논의인가부터 살펴야 한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다음을 검토해보자. 

감각하는 가운데 무언가 감각현실을 얻지 못하다가 얻게 되는 현상 
그래서 자신이 평소 그런 것이 생겨났다고 여기는 그런 감각현실 자체를  현실에서 
얻지 못함을 문제삼는가. 

예를 들어 아침에 일어나 보니 
어제까지 없던 꽃이 화분에 피어 있다. 
그리고 그가 이를 놓고 꽃이 없다가 생겨났다고 여기게 된다. 
이 경우 어떤 이는 감각기관이 망가져서 
그런 내용을 아무리 노력해도 보지 못함을 제시하는 것인가. 

즉, 경전이나 논서에서 생멸을 얻을 수 없다는 내용은 
이런 내용을 문제삼는가. 
이는 이미 살폈는데 가정적 항변을 살피는 과정에서 다시 기본적으로 살피는 것이 좋다. 

물론 이들 앞에 제시한 내용들은 아님을 대부분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논의가 그런 내용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을 문제삼는가를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논의에서 
또 상대방은 다른 입장에서 주장하며 시시비비를 다투는 상황이다. 

그래서 그 내용을 확인해야 한다. 

>>>


앞에 조금 상식적이고, 현실에서 자주 문제삼지만, 

그러나 불교 논서에서는 별로 문제삼지 않는다고 보는 주제를 기본적으로 살폈다. 
그런데 사실 여기에 대단히 중요한 문제가 같이 들어 있다. 
그리고 현실에서 이렇게 임하는 상황 자체가 전도몽상현상과 대단히 관계가 깊다. 
그리고 논서 내용을 이해할 때 가장 많이 혼동을 일으키는 부분도 바로 이 부분이다. 

그것은 현실에서 무엇이 있고 없음을 따질 때 
한 주체가 현실에서 얻어낼 내용은 대부분 앞에 나열한 내용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다고 해서 
논서 등에서 논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이들이 또 아닌 것이다. 
사정이 이렇기에 이들 내용을 잘 살피는 것이 의외로 중요하다. 






○ 관념에 대응하는 감각현실 유무 판단과 망집현상 
 

일반적인 유무 판단시 논의를 잘 살펴야 한다. 

어떤 이가 '영희'를 찾는데 
건물에서 영희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건물에는 영희가 없다고 선언한다고 하자. 
이는 어떤 성격의 주장인가. 

상황을 분석하면 이는 다음 의미다.

어떤 이가 그 상황에 영희가 있다면 
영희를 볼 수 있는 상태다. 

즉 건물에 불도 환히 비추고 있고 
자신의 눈도 다른 사물들은 잘 볼 수 있는 상태고 
지금 눈을 뜨고 있다. 
그런데 그런 상태에서 정작 영희는 감각현실로 얻어지지 않는다. (= 보이지 않는다. )

이 내용을 가지고 
'지금 영희는 여기에 없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이 말은 눈을 감아서 영희가 있어도 보지 못한다. 
또는 불이 없고 깜깜해서 영희가 있어도 보지 못한다. 
이런 의미가 아니다. 
더 나아가 세계 어디에도 영희는 없다거나 
과거 현재 미래 어느 순간에도 영희는 없다. 
이런 내용도 아니다. 

반대로 영희가 이 방에 있다고 선언하는 것은 
그런 상태에서 자신이 영희에 해당하는 무언가를 보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행하는 있고 없음의  문제는 
대부분 이런 차원에서 이런 측면의 내용이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현실에서 각 중생이 생사고통을 받게 되는 
근본 원인이되는 전도망상증상이라고 경전에서 제시하는 부분이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자신이 눈을 떠서 보면 자신의 손이나 발로 여겨지는 부분을 보게 되고 
그러한 부분을 놓고 평소 '자신' 또는 '나'라고 생각한다. 
이 방에 지금 내가 존재한다 
이런 내용은 단순히 앞 내용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하튼 이런 내용을 포함한다. 
그래서 그런 부분을 나라고 보고 현실 매 순간을 살아간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가장 기본적인 전도망상 증상이다. 

물론 전도망상 증상이 이 내용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지만, 
수많은 전도망상 가운데 가장 기본적이고 
대표적인 전도망상 내용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왜 그런가를 살피는 것은 
본 페이지에서 다룰 문제는 아니고 별도의 문제다. 
다만 간단히 그 사정을 제시하면 
자신의 관념영역에서 그러그러한 사정으로 그런 감각현실 부분을 '나'라고 생각할 때 
그런 관념 몽타쥬로서 '나'라는 관념이 있다. 
그런데 앞에서 눈을 뜨고 보는 그런 부분은 
대단히 많은 측면에서 그 관념에 적절하지 않는 내용이다. 

그런데 앞에서 이미 제시한 것처럼 
이 논의가 경전에서 나의 있고 없음을 따지는 주된 초점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런 전도몽상 분별이 
이 논의에 영향을 미치는 바가 대단히 많다. 
따라서 이 내용도 함께 잘 정리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것의 정체를 확인하면서  
그것이 무엇인가 아닌가. 그것이 있는가 없는가 등등을 따질 때도 
앞에서 살핀 세번째 성격의 논의는 
대단히 혼동을 많이 일으키게 하는 내용이 된다. 

생멸을 얻을 수 없고 오고감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할 때 
현실에서 대부분 이 논의가 궤변이라고 여기고 
외면하면서 그대로 생사현실에 묶이는 그 사정은 
바로 위 사정 때문이다. 

즉, 자신이 볼 때 
무언가 생멸한다거나 오고간다고 여기게 되는 그런 감각현실도 얻고 있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생멸한다 오고간다라고 생각을 분명히 한다. 
그런데 왜 이것을 놓고 생멸을 얻을 수 없고 오고감을 얻을 수 없다고 하는가 하면서 
그런 주장은 엉터리 궤변이라고 하면서 그런 상태에 빠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이 판단에는 전도망상 증상을 벗어나는 과정에서 
대단히 중요한 2 가지 망상이 다 관계된다. 

일단 일반적인 입장에서 관념과 대응한 감각현실의 '있고 없음'을 문제삼을 때 
기본적으로 망상현상을 일으키는 것이 문제다. 

그리고 아직 제시하지 않았지만, 
이와 관련해서 그런 판단이나 내용이 실다운가를 문제삼는 차원에서도 
또 이 판단을 바탕으로 망상현상을 증폭해 일으키는 것도 문제다. 
그런데 여하튼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행하는 
위 판단이 왜 망상인가를 이해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중요하다. 

>>>



예를 들어 눈으로  물체가 잘 보임을 느끼고 
그런 가운데 여기 영희가 보여서 영희가 있다고 제시하는데 
왜 이것이 망상인가. 

그리고 평소 자신이 여기에 있다가 
저쪽으로 가서 과일을 하나 먹고 오겠다고 생각하고 움직이자, 
평소 자신의 손과 발로 보던 부분이 그에 따라 
열심히 이동해 과일을 집어 잘 먹게 된다. 

그런데 왜 이런 현실에서 그런 부분을 나라고 생각하고 
그리고 자신의 손이 집어들은 과일을 과일로 여기는 것이 또 망상인가. 

그리고 또 한편 
그 과일은 그런 사정으로 자신의 외부에 있는 세계의 한 부분이고 
또 자신의 손이나 눈이 대하는 자신 외부에 있는 외부대상이고 
또 그 과일은 이렇게 손을 대하거나 눈으로 과일을 대할 때 
촉감도 얻고 시각도 얻고 어떤 생각도 하게 하므로 
자신의 정신이나, 주관과는 구분되는 외부 물질이라고 여기고 판단하게 된다. 

그런데 왜 이 모두를 총체적으로 전도몽상 분별이라고 하는가. 
이것부터 기초적으로 잘 확인해야 한다. 

그런데 일반적인 상식적 견해를 갖는 입장이 거의 대부분 이런 상태다. 
따라서 이런 상태에서 
논서에서 다루는 가정적 항의 논의를 살피면 
논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도리가 없게 된다. 

물론 앞에 나열한 기본적 논의도 현실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그런데 이들 논의부터 정리가 안 되어서 
여기서 문제되는 각 내용을 놓고 서로 혼동을 일으키고 대하면, 
다시 여기서 이들 현실 내용의 본 바탕이 되는 실재는 무엇인가. 
또 그런 현실 내용에 해당하는 참된 진짜에 해당하는 본체[실체]는 있는가 등과 
관련된 논의가 진행되면 
이미 전도망상을 일으킨 앞 판단과 내용이 뒤섞여서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상태로 빠져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또 원래 살피고자 한 이들 주제에 대해 
가정적 항변 논의과정에서 
주로 그 근거나 판단 재료로 삼아 제시하는 것은 
또 결국 앞에서 문제삼는 그런 성격의 내용들이 된다. 

그 사정은 논의에 참여하는 각 주체가 
현실에서 얻을 수 있는 내용이란 모두 그런 성격의 내용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록 이 논의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본 주제는 그 내용이 아니지만,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고자 할 때는 
결국 현실에서 각 주체가 얻는 이들 내용을 재료로 삼아 제출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이 부분이 이 두 논의에서 다루는 각 측면과 서로 섞여  
뒤범벅이 되는 가운데 온갖 혼동을 다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금강경』에는 자주 제시되는 문장 형태에 
즉비고명 이란 형식이 있다. 

이는 A 는 곧 실로 A 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A 라고 부처님은 칭한다. 
이런 형태의 문장이다. 
그런데 이 문장을 대하여 
이 문장의 의미가 무언가를 찾을 때도 
역시 같은 문제가 제기된다. 
그 사정은 결국 앞에서 본 사정과 같다. 

위 문장구조에서 우선 A 에 다양한 단어를 넣을 수 있다.  
아라한이나 상을 경전에서 제시하는데 
그리고 이 A 에 현실에서 문제삼은 영희를 넣어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현실에서 
영희를 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이 방에는 영희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여겼는데 영희가 바로 자신 뒤에 서 있음을 보게 된다. => 영희가 방에 있다. 

이렇게 판단하는 현상들이 경전이나 논서에서 다루는 내용 자체는 아니지만, 
그러나 경전에서 제시하는 내용을 이해하는 데 기초적으로 정리해야 할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기본적으로 일으키는 전도몽상 증상을 잘 정리해야 한다. 

이것이 정리되지 않으면 
이후 실재나 실체의 존부 문제를 살피는 논의에 들어가면 
이 전도몽상 증상을 바탕으로 살피게 되므로 
도무지 무슨 내용인가 자체를 파악하기 힘들게 된다. 

그러면 또 그런 바탕에서는 
가정적 항변 논의를 통해서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날 계기를 찾아내기도 곤란해진다. 


>>>

앞에서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문제삼을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논의들을 살폈다. 

『회쟁론』이나 기타 다른 논서 경전에서 살피는 내용이 
이런 논의와는 전혀 관계없다고 할 수는 없다. 
여하튼 이런 다양한 논의 차원을 살피면서 
각 경전과 논서에서 살피는 논의는 
어떤 성격을 문제삼는가를 잘 파익해야 한다. 

언어표현만 놓고 살피면 이를 판별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자신이나 생멸 현상을 얻을 수 없다는 논의가 
논의되는 배경을 이해해야 
논의의 초점을 잘 맟추고 펴나갈 수 있다고 제시했다. 



이런 논의를 대할 때 
가장 먼저 확인할 것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이가 감각현실을 일체 얻지 못한다거나, 
그런 감각현실을 얻고 나서 그런 생각을 전혀 일으키지 못한다. 
또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이런 내용을 문제삼고 제시하는 것은 결코 아님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즉,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이가 눈을 떠서 무언가를 보고 있다거나, 아님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다.  
또 그런 상태에서 어떤 부분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를 문제삼는 것도 일단 아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인가. 
그래서 이 상황에서 무엇을 문제로 삼는가를 앞에서 기본적으로 살핀 것이다. 

결국 이를 이해하려면 
꿈의 비유를 다시 동원해야 한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꿈이 실답지 않다거나 실답다거나 논의를 한다면 
어떤 이가 자면서 어떤 꿈을 꾸지 않았다거나 꾸었다는 것등을 놓고  문제삼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꿈이 실답지 않다고 논의한다면 
그렇게 꿈꾸는 당시 생생하게 꾼 꿈을 놓고 무엇을 문제삼는가부터 파악해야 한다. 

경전이나 논서에서 제시하는 다양한 가정적 항변방식의 논의를 이해하려면 
먼저 이 비유를 잘 생각해야 한다. 

즉, 꿈은 그 상태에서 그처럼 생생하게 꾸었다. 
그런데 여기서 무엇이 문제라고 제시하는가를 잘 파악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현실에서 어떤 이가 눈을 떠서 무언가를 보고 
그 가운데 일정부분은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이 상태에서 그렇게 눈을 떠 그런 감각현실을 얻었다거나 
그런 상태에서 어떤 부분을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있고 없음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논의 과정에서 
자신이 눈을 떠 무언가가 보이고, 
그 부분을 자신이나 영희로 생각하는데 
왜 여기에 그런 나나 영희가 없다거나 '얻을 수 없다'고 하는가라고 
문제를 제기하면 기본적으로 곤란하다. 
그런데 이런 문제가 아니면 무엇이 문제인가를 앞의 꿈의 비유를 통해서 
잘 파악해야 한다. . 
그리고 왜 그런 내용이 
한 주체의 생사고통 현상과 밀접하고 중요한가를 
파악하는 것이 결국 이 논의의 시작점이 된다. 


>>>>



○ 실재영역과 각 영역에 대한 기호 



자신이 눈을 뜨면 무언가를 보게 되는데 
눈을 감으면 그 모습이 사라지고 보지 못하게 된다. 
이 때 자신이 눈을 감아서 그 모습을 보지 못하면 
방금 직전에 본 내용들은 아주 없어지고 사라지게 되는가. 
아니면 자신이 눈을 뜨거나 감거나 관계없이 
그런 모습을 보게 한 무언가는 이와 관계없이 그대로 실재한다고 할 것인가. 
이것이 처음 문제가 된다. 


그리고 그것을 실재라고 표현하고 
또 그림에서처럼 일단 #실재로 기호를 달리 붙여 표시하고 
살피고 논의하게 된다. 

참고로 실재라는 표현에서 붙이는 #기호는 
언어표현에서 각 차원의 내용을 혼동하는 경향이 많아서 
혼동을 방지하고자 컴퓨터 자판상의  !@#$% 과 같은 기호를 
덧붙여서 서로 구분하는 취지다. 

결국 여기서 #실재는 
%실재처럼 한글 단어로서 '실재'라는 글자를 의미하지 않고 
앞과 같이 무언가의 정체를 논의할 때 
그런 실재의 측면에서의 무언가를 가리킴을 나타낸다. 

그런데 앞에서 눈을 떠 얻은 감각현실이 
집착을 갖고 대할만한 실다운가를 판단할 때는 
그런 감각현실이 이런 #실재영역에서도 그대로 얻어지는가를 문제삼는다. 
꿈이 실답지 않다고 할 때 그 내용이 침대에서도 얻어지는가를 문제삼는 것과 그 성격이 같다. 
그리고 이것이 가정적 항변을 전개하는 각 논서 등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 된다. 


○ 참된 실체의 존부 문제 
그런데 문제는 또 그것만 아니다. 

처음 꿈이 아무리 생생해도 
그 꿈은 집착을 갖고 대할만한 실다운 것이 아님을 제시할 때 
꿈을 실답지 않다고 보게 하는 특성을 여러가지 나열했다. 
그래서 결국 그런 요소때문에 꿈을 실답지 않다고 보게 된다. 
그런데 그런 전제에서 
그런 꿈처럼 실답지 않게 볼 성품은 갖지 않고 
반대로 실답게 볼 성품을 갖추어 
참된 진짜에 해당하는 내용은 과연 어디인가에 있는가가 다시 문제된다. 




○ 집착과 업을 통한 실답지 않은 고통을 받는 과정 

앞에서 100 년간 눈을 갖고 무언가를 생생하게 대하는 현실 사정을 놓고 
문제되는 사정을 제시하였는데 이 경우도 마찬가지다. 
결국 어떤 것이 그런 실다운 내용이 아니면, 
그것은 진짜라고 할 수 없고 
결국 그런 조건 그런 상황에서만 임시적으로 얻는 내용일 뿐이다. 

그래서 이런 내용에 집착을 갖고 임하면 
그런 조건과 상황에서는 그럴듯 하다고 여기지만, 
그러나 바로 그런 자세로 인해 나머지 상태에서는 엉망이 된다. 
그리고 엉망이 된다는 부분이 
결국 현실에서 각 생명이 극심하게 겪는 생사고통의 상황이 된다. 
그리고 생사고통을 받는 것은 
현실에서 바로 그런 자세로 업을 행하는 것이 그 원인이다. 


또 한편 자신의 눈이 다른 생명과 달라서 
그 내용을 직접 보지 못하고 
또 의존하는 감관도 역시 그처럼 달라서 
그 내용을 직접 지금 당장 얻지 못하지만, 
그런 조건이 갖춰진 3 악도의 각 세계에서 극심한 고통을 
그런 사정을 바탕으로 겪는다. 
그리고 이것이 생사문제가 된다. 



현실의 일반 입장에서는 
그 내용을 직접 당장 보거나 얻지 못하기에 
과연 그럴까 의문을 갖지만, 
여하튼 가정적 항변 논의는 이 내용까지 포함해 논의하는 취지다. 
그래서 현실에서 겪는 생사고통과 함께 
욕계내 3 악도에서 겪는 극심한 생사고통이 
본 논의주제와 깊게 관련되기에 이것을 살피는 것이다. 

그래서 논서나 경전에서는 
그 #실재가 무언가. 
그리고 문제삼는  어느 영역에서든지 
그런 내용을 얻게 하는 '참된 $진짜'(실체, 본체)가 있는가를 주로 문제삼는다. 

그래서 현실에서 얻는 !감각현실과 
그런 상태에서 행하는 @관념분별의 정체를 놓고 
이를 생사고통과 관련시켜 살필 때는
비록 %언어표현을 통해 논의를 전개하지만, 
그 언어표현이 가리킬 수 있는 다양한 내용 가운데 
이들 내용이 현실에서 집착을 갖고 대할만한 실다운 것인가를 초점으로 
앞과 같은 관점에서 주로 살피게 된다. 


>>>




○ 실재의 의미 

실재를 문제삼는 것은 
현실에서 얻는 내용이 과연 실다운 것인가를 살피는 취지다. 

그런데 실재의 문제는 
주관과 관계없이 즉 자신이 눈을 뜨거나 감거나 관계없이 
그대로 실재하는 내용을 문제삼는다. 

그런데 눈을 떠서 내용을 얻고 
관념내용을 일으키는 주체 입장에서는 
앞과 같은 내용을 실재라고 언어로 표현해 가리키지만, 
그 내용을 직접 얻어낼 도리는 없다. 

그렇다고 그런 #실재영역은 
아무 것도 전혀 없다고 단정할 도리도 없다. 

그리고 사정이 그렇기에 
그 #실재는 현실내용과 같다거나 다르다거나 
~이다. 아니다. 깨끗하다 더럽다. 좋다 나쁘다 등등의 등으로 2분법상의 분별을 행하며 
단정할 도리도 없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이를 살피는 것이다. 

그러나 논의과정에서는 그런 #실재를 문제삼게 되므로 
현실적으로 어떤 의미가 주어지지 않는 '공하다'는 표현으로 
나타내게 된다. 

결국 #실재는 현실에서 파악하는 어떤 a 라고 할 수 없기에 
'아무것도 없음'을 의미한다고 오해하기 쉽지만, 
공하다는 표현은 어떤 것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전혀 '없음'을 나타내는 것도 아닌 것이다. 

그리고 직접 내용을 얻지 못하는데도 
그런 #실재를 자꾸 논의하는 것은 
처음 꿈을 실답지 않음을 살피기 위해 침대가 있는 현실을 살피는 사정과 같다. 
즉 현실에서 얻는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이 실다운가를 살피기 위해 
그 본 바탕이 되는 #실재를 문제삼고 살피는 것이다. 


○ 실재의 공과 실체의 없음의 관계

그런데 만일 #실재가 무엇인가 문제될 때 

어디에서인가 참된 진짜에 해당하는 실체$가 있다면 
#실재를 공하다고 표현할 일이 아니고 
바로 그 내용을 제시하면 된다. 
그런데 공하다고 표현하는 것은 사정이 그렇지 않음도 함께 나타낸다. 

예를 들어 
꿈을 생생하게 꾸었지만, 
꿈은 그런 조건과 상황에서만 임시적으로 얻는 내용이고 
또 다른 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다는 점 때문에 
실답지 않다고 하게 된다. 
따라서 관념영역에서 이런 꿈과는 달리, 
어떤 조건 어떤 상황에서도 늘 영원불변한 내용을 몽타쥬로 그려 놓고
이런  참된 진짜의 실체가 있는가를 찾게 된다. 

그래서 그런 실체가 정말 있다면, 
#실재가 무언가를 문제삼을 때는 이를 제시해야 한다. 
만일 #실재가 무언가라고 물을 때 제시할 수 없는 것이라면 
앞에서 몽타쥬로 찾는 그런 진짜의 실체도 역시 아니라고 해야 한다. 

그래서 #실재가 공하다는 것은 
그렇게 찾는 진짜 실체$는 #실재영역에 없음도 함께 포함해 나타낸다. 

물론 #실재가 무언가를 문제삼는  측면과 
현실에서 각 내용을 얻게 하는 뼈대로서 참된 진짜의 $본체(실체)가 있는가 문제는 
서로 다른 측면이다. 
그러나 #실재가 공함은 
그런 #실재는 그런 본체(실체)가 그 영역에 없음도 나타낸다. [ 무아 , 무자성, 승의무자성, 인무아, 법무아 ]
한편 그런 실재#는 사정이 그렇다고 전혀 아무 것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주체가 그 내용을 직접 얻을 수 없고 
2분법상의 분별로도 표현할 수 없는 그런 것이라는 의미를 함께 나타낸다. 

이는 꿈이 실답지 않고 실체가 아니라고 하는 경우와 사정이 같다. 
꿈이 그런 실다운 내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생생하게 꾼 꿈 내용을 전혀 그 영역에서 얻지 못함을 의미하는 것은 또 아니다. 
내용을 얻지만 이 내용은 실체가 없고 실답지 않다. 이런 뜻이다. 

그리고 여하튼 『회쟁론』이나 『중론송』과 같은 논서나 경전등에서 
어떤 내용이 실다운 내용인가를 살피며 
가정적 항변으로 논의를 진행할 때는 
이런 입장에서 #실재나 실체의 유무를 주로 살피고자 하는 취지다. 

그래서 이런 바탕에서 논의를 살펴야 한다. 

>>>



○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의 구별 

자신이 어떤 감각현실을 얻을 때 
그것이 실다운가 아닌가가 문제되면 
처음에 제시한 그 방안을 사용하면 된다. 

자신이 감각현실로 여기는 그것을 일단 붙잡아 두기로 하자. 
현실적으로 붙잡는 것은 곤란하지만, 
그런 마음으로 노력을 해보자. 
눈으로 얻는 감각현실이 문제되면 
눈을 계속 떴다 감았다를 반복하면서 
눈을 감으면 사라졌다가 
눈을 뜨면 그 순간 얻게되는 내용들이 무언가를 
스스로 잘 포착해서 붙잡아 보려고 노력해본다는 뜻이다. 

그리고 관념분별 내용은 
이와는 달리 눈을 감거나 뜨거나 관계없이 
계속 자신의 마음에서 떠올릴 수 있는 내용이 무언가를 
스스로 잘 파악해 보면 된다. 



문제는 이 내용을 직접 어떤 책이나 글로 
제시하기는 곤란하다. 

그래서 위처럼 언어로 표현하지만, 
언어로 표현하면 그 순간부터 
곧바로 앞처럼 혼동을 일으키기 쉽다. 

이들은 현실에서 각 주체가 얻는 내용이어서 
큰 혼동을 일으키지 않을 것 같지만, 
구체적 논의과정에서는 그 혼동이 대단히 극심하다.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을 논의할 때 
각 내용을 직접 제시하며 논의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이를 결국 언어표현으로 가리키며 논의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논의과정에서 각 언어표현이 
구체적으로 무슨 내용을 가리키는가와 관련해 
대단히 혼동을 많이 일으키게 된다. 

현실에서 평소 자신이 어떤 부분을 손이라고 생각한다면 
사실은 그것부터가 이런 혼동을 일으키고 현실을 대함을 의미한다.
경전에서 전도몽상 증상이라고 제시하는 내용도 바로 이 부분이다. 
따라서 이 혼동을 잘 정리해야 한다. 







 

>>>

Lab value 불기2561/09/22/금/16:54






◆vwtg2063

◈Lab value 불기2561/09/22/금/15:20







○ [pt op tr]  mus0fl--BB Brunes - Coups Et Blessures.lrc 

☎잡담☎
♥ 잡담 ♥


오늘도 또 논서가 뽑혔다. 

오늘은 회쟁론을 살피는 가운데 
어떤 시시비비 논의에서 
기본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살피느라 
글이 길어졌다. 
그러나 너무 많이 살피면 복잡하다.
따라서 이후의 논의는 
이미 앞에 제시한 여러 문제를 잘 정리한 바탕에서 
이후 관련되는 부분을 살펴나가기로 한다. 

오늘 알라스카를 구글관광사를 통해 방문했다. 
알라스카를 좀 더 살펴야 하는데 
회쟁론을 살펴보느라 시간을 많이 내지 못했다. 
위치상 지도상의 중심 부분에서 한 여인을 만났다. 
그 지역 명칭이 '알았을까'라는 의미를 나타낸다고 

시감상하게 된다. 
그러너데 그곳을 지나가는 여인에게 
'알았을까' 이런 곳은 본래 없고 
아무리 걸어다녀도 
여기에 오고 감은 얻을 수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 여인이 과연 그 의미를 '알아 들었을까.'

그런데 알고보면 그 여인이 
본인이 제시한 내용을 못 알아듣는데에는 
나름 이유가 또 있다. 
상대가한국어를 잘 모르는 것이 주된 원인이다. 
그래서 언어소통이 중요하다. 

그런데 그것은 논서를 이해하는데에도 
기본적으로 중요하다. 


♥ 잡담 ♥



mus0fl--Marc Lavoine - Paris.lrc 

쉬는 가운데 위 노래를 들었다. 
각 부분이 어떤 이의 어떤 주장인지 구분이 잘 안되어서 
각 문단에 표시를 많이 하며 읽게 되는데
읽으면서 대강 표시한 것들이라 
사실 정확히 잘 구분한 것인지 본인도 잘 알 수 없다. 

읽어나가다가 앞뒤가 잘 연결이 안 되고 
맥락상 문제가 있으면 나중에 점차 수정해가야 하지만, 
여하튼 노래에서 지나치게 많이 동그라미를 표시했다고 지적하면서 
빨리 논점으로 나아갈 것을 요구한다고 시감상을 하게 된다. 






문서정보 ori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0/04/2561-09-22001.html#2063
sfed--회쟁론_K0630_T1631.txt 
sfd8--불교단상_2561_09.txt ☞◆vwtg2063
불기2561-09-22
θθ

 




-- 아래에 조각글 작성시 휴식시점에 붙인 노래가사,사진,풍광,예술작품 자료를 편집상 옮겨 붙입니다.--







○ [pt op tr]Paul_Cézanne,_Pyramid_of_Skulls,_c._1901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 [pt op tr] 2017_0921_000319_Alaska,_United_States_ct4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 [pt op tr] 2017_0921_000319_Alaska,_United_States_ct17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 [pt op tr] 2017_0921_000836_Alaska,_United_States_ct34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 [pt op tr] 2017_0921_001159_Alaska,_United_States_ar17 



>>>

mus0fl--BB Brunes - Coups Et Blessures.lrc


>>>



Edith Piaf - Padam Padam

Jane Birkin - French Graffiti

Mireille Mathieu - La Paloma

Edith Piaf - Partance
Jeanne Moreau - L'amour S'en Vient
Mireille Mathieu - En Frappant Dans Nos Mains




ॐ मणि पद्मे हूँ
○ [pt op tr]





○ 2019_1106_130747_canon_ct11_s12.jpg


○ 2019_1106_153549_nikon_fix.jpg


○ 2019_1105_160550_canon_ar38.jpg


○ 2019_1105_131452_canon_ar45_s12.jpg


○ 2019_1201_151600_canon_ar36.jpg


○ 2019_1105_103928_nikon_ar38.jpg


○ 2019_1106_114609_canon_Ar28.jpg


○ 2019_1201_164700_nikon_ar44_s12.jpg


○ 2019_1105_165741_nikon_Ab31_s12.jpg


○ 2019_1106_155200_canon_ct15.jpg


○ 2019_1105_133408_canon_ab41_s12.jpg


○ 2020_0211_134857_canon_exc_s12.jpg


○ 2019_1104_171302_nikon_CT28.jpg


○ 2019_1105_133412_canon_BW21_s12.jpg


○ 2020_0211_134345_nikon_CT27.jpg


○ 2019_1106_114709_canon_ar45_s12.jpg


○ 2019_1106_155855_canon_ct18.jpg


○ 2019_1106_153800_nikon_CT27.jpg


○ 2019_1106_103801_nikon_fix.jpg


○ 2019_1004_164353_canon_Ar28.jpg


○ 2019_1004_162722_nikon_BW21.jpg


○ 2019_1004_154153_nikon_ct26.jpg


○ 2019_1004_171322_canon_fix.jpg


○ 2019_1004_131810_nikon_ar47.jpg


○ 2019_1004_155809_nikon_ct28.jpg


○ 2019_1004_170853_canon_ct18_1.jpg


○ 2019_1004_154901_nikon_ab23.jpg


○ 2019_1004_143034_canon_ct19.jpg


○ 2019_1004_165558_nikon_ct18.jpg


○ 2019_1004_140833_canon_ct19_1.jpg


○ 2019_1004_163631_canon_bw24.jpg


○ 2019_0405_171809_canon_ct9.jpg


○ 2019_1004_135900_canon_Ar26.jpg


○ 2019_1004_144149_canon_BW17.jpg


○ 2019_1004_140535_nikon_Ab27.jpg


○ 2019_1004_142611_canon_bw24.jpg


○ 2019_1004_162628_nikon_CT27.jpg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