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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1-10-11_금강삼매경_001 본문

과거조각글/불기2561(2017)

불기2561-10-11_금강삼매경_001

진리와 가치를 고루고루 2017. 10. 11. 15:59



®

『금강삼매경』
K0521
T0273

금강삼매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 [pt op tr] 금강삼매경_K0521_T0273 핵심요약



♣0521-001♧
『금강삼매경』

금강삼매





◆vpuk9914

◈Lab value 불기2561/10/11/수/15:42




○ [pt op tr]  mus0fl--VERONIQUE SANSON - Bernard's Song (Il N'Est De Nulle Part).lrc 

○ [pt op tr]Fête_de_la_Fédération-Hubert_Robert-IMG_2371



♥ 잡담 ♥깨달음의 혼동 

오늘도 일전에 살핀 경전 『금감상매경』이 다시 뽑혔다.  
어제도 일전에 살핀 『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이 다시 뽑혀 
살피는 가운데 같은 경전이 뽑힐 때 어떻게 
페이지를 처리해야 하는가하는 문제에 대해 생각한 바 있다. 
금강삼매경은 분량이 길어서 이어서 살피게 되는데 
이전 페이지 분량도 상당해서 
결국 매번 페이지를 분리시키는 것이 낫다고 본다. 

뽑혀 올린 노래를 듣다보니 
매번 빨리 본다는 내용과 함께 
강인한 살해 의지를 메세지로 전한다. 





●진정한 강인함과 수행



4향4과의 수행 단계에서
번뇌를 모두 제거한 가장 높은 수행단계로 아라한을 든다. 
이른바 아라한을 살적(殺賊)이라고 표현하는 사정이기도 하다. 

한편 역사상 용맹무쌍한 장군들로 
진나라의 백기장군이나 초나라의 항우를 들기도 한다. 
진나라 백기장군은 
한나라와 위(魏)나라의 연합군을 이궐(伊闕)에서 격파하고 24만 여명을 죽이고 
조나라 군사 40여만 명을 장평(長平)에서 하룻밤 사이에 구덩이에 묻어 죽였다는 등의 

기록이 전하고 있다. 

>>>  2017_1011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702214&cid=42981&categoryId=42981


초나라의 항우 역시 
팽성 전투에서 고작 5만 명의 군사로 56만 명의 유방 군사들을 무찔렀고 
70 번 전투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고 하고 
항복한 진나라 군사 25 만을 신안땅에서 생매장해서 죽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  2017_1011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87896&cid=56777&categoryId=56777


그러나 공교롭게 이 두 용장들이 
모두 자결로서 생을 마감했다는 기록도 살필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이 모두 항복한 적군을 말 한마디로 생매장해 죽인 용맹무쌍함을 보여 
장평지갱(長平之坑)과 신안지참(新安之塹)이란 구절을 남기게 한 공통점도 보인다. 

그런 용감무쌍한 장군들이 그러나 왜 마지막에는 

자결로 생을 마치도록 내몰렸을까. 
그것은 이런 사건들이 모두 서로 관련이 있다고 본다. 


이들 장군은 다른 이의 목숨은 아주 가볍게 여기면서 
쉽게 살해하는데 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정작 그런 이가 그렇게 임하게 된 첫 과정도 
사실은 자신의 마음에 들어 있던 
탐욕 분노 어리석음이란 번뇌를 이기고 
제거해내지 못하는 바탕에서 
자신이 그렇게 행하면 
그로 인해 자신이 받을 고통을 면하고 
탐욕을 일으킨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여겼기에 
그런 상태로 처음 들어서게 된 것이다. 

그런데 남의 살을 자르는 것은 
자신은 직접적인 고통을 느끼기 않게 되기에 그렇게 행하게 되고 
또 한편 인과를 깊게 헤아리지 못하기에 또 
그렇게 행하게 된다. 


남을 살을 베서 죽이더라도
그가 그 상황에서 고통을 직접 느끼는 것이 아니므로
그런 일을 능하게 한다고 해서 
그가 용맹하다거나 강건하다고 할 도리는 없다. 

대부분 그런 일을 그렇게 행하는 이는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에 바탕해서
당장 그로 인해 고통을 직접 느끼지는 못하기에 그렇게 행한다. 

일반인들이 생선을 회로 먹을 때 
생선을 산 채로 칼로 베어 회로 먹는다고 
그것을 용감하고 강인하다고 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런 집단학살을 행하는 것을 용감하고 강인하다고 볼 도리는 없다. 

경우를 바꿔서 
자신의 살을 어떤 다른 상대가 칼로 살을 벗겨가면서 먹는 상황에 있을 때 
아무런 분노를 일으키지 않고 평안히 참고 견딜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면 
그렇게 임하던 이들이 다 그렇지 못함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반대로 아무리 용감무쌍한 장군이라고 해도 
자신이 탐욕이나 분노가 솟구칠 때 
스스로 자제하고 참을 수 있는가하면 또 그렇지 못하다. 


그렇게 잔인하게 어떤 살생을 하는 것도 
알고보면 조그만한 자신의 탐욕과 분노를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거나 
자신을 위협하는 고통이나 공포를 극복하지 못해 그렇게 임한 것이다. 
그렇게 남을 죽이는 일에 능숙했던 이들이 
모두 자신의 죽음이 눈 앞에 다가오고 
위협받는 상황에 몰리자 결국 비겁하게 자결하여 
생을 마치게 되는 것이다. 

대도시 수백만명을 한번에 살해하는데 
자신은 말로 명령만 내리거나 버튼만 누르면 될 뿐이어서 
그렇게 하겠다는 이는 수없이 많다. 
그런데 반대로 이를 살리기 위해서 
자신의 발가락을 자르겠다거나 
자신의 아들딸을 직접 희생시켜서 구해내겠다고 나서는 이는 거의 없다. 
그래서 이런 용감함은 
어리석고 치졸한 용맹이라거나 
황소가 이리저리 날뛰는 용감함이다. 


한편 그가 그렇게 행하는 것은 
그리고 어리석어서 그 인과관계를 알지 못하고 잘못 파악하기
때문이다.
즉 그가 그런 행위를 행하게 되면 다른 이들이 고통을 받을 뿐 

자신은 고통을 되돌려 받지 않게 된다고 잘못 여긴다.
더 나아가 그렇게 행하면 자신이 좋음을 얻게 된다고 
잘못 여기기 때문이다. 


결국 전도몽상과 탐욕 분노 어리석음에 묶여서 
행한 것 뿐이다. 

그래서 누가 세상에서 가장 강건한가라는 문제가 제기되면 
결국 자신의 마음안의 분노와 탐욕 어리석음을 제거하고 
마음과 지혜의 해탈을 얻어 생사고통을 벗어난 
아라한 살적(殺賊)을 꼽아야 마땅하다. 





○ [pt op tr]  mus0fl--KYO - Je Cours.lrc 


세상에서 용맹하다고 하는 이들이 갖는 공통점은 
전도몽상에 바탕해서 

자신의 이익이나 고통에는 대단히 민감해서 
탐욕과 분노에 반응함이 빠르다.
반대로 다른 이가 느끼는 불쾌나 고통에는 대단히 둔감하다. 

만일 이런 이들이 다른 생명을 칼로 베거나 할 때 
그에 상응한 고통을 자신도 바로 바로 겪는다면 
대부분 그런 일을 행하려고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함부로 행하는 것은 어리석어 
자신은 그로 인해 받아야 할 고통을 받지 않게 되고 
또 그로 인해 좋음을 얻게 된다고 여기기에 
그렇게 임하게 되는 것이다. 
즉, 씨를 뿌리면 가을에는 그에 따른 열매를 맺는 관계를 
보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이러석음이 기본적으로 바탕이 된다. 

예를 들어 밭에서 인삼을 6 년을 재배해서 수확하는 농부나 
봄에 씨를 뿌리고 몇개월을 기다려 가을에 수확하는 농부가 있다고 하자. 
이 때 어떤 이가 농부가 씨를 뿌린 것을 보았는데 
오늘 보아도 아무 일도 없고 
다음날 보아도 아무 일도 없음을 보게 된다.
그래서 무엇때문에 그런 씨를 뿌릴 것인가 하면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아무 일도 없다고 여기고 임할 수도 있다. 
더나아가 나중에 열매가 나타날 때에는 
그 열매가 무엇에 의해 그렇게 나타난 것인지를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그래서 열매란 홀연히 갑자기 그렇게 나타난다고 여긴다면
대단히 어리석다고 할 것이다. 

씨를 대할 때 씨로 나타날 열매를 함께 볼 수 있는 것이 현명함이듯,
남을 살을 벨때 자신이 그 고통을 직접 당장 느끼지 못해도 
그로 인해 상대가 느끼는 고통이나 공포를 장차 자신도 똑같이 되돌려 받을 것을 알고
그것을 그와 함께 느끼며 임하려는 것이 사실은 지혜다. 
그것이 그런 씨로 장차 자신이 거둘 열매의 내용이기 때문에 
미리 그 결과를 그처럼 이해하고 그것을 대해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 현실에서 어리석게 임하는 입장은 
이런 이해력이 부족하고 
타인의 고통에도 공감하지 못하고 둔감하다. 
이런 입장에서는 자신이 좋다고 여기고 추구하던 것 일체를 행하면
그로 인해 무량한 고통을 되돌려 받게 되고
그렇게 행하던 것 일체를 중지하는 것이 오히려
자신에게 좋음을 크게 가져다 준다는 인과관계를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 

그렇게 되는 사정은 
그가 전도망상 상태에서 
좁고 짧고 얕게 관찰하는 바탕에서 
자신에게 당장 어떤 특정한 측면에서 좋다고 여기는 것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 내용을 넓고 길고 깊게 관찰하면 
다른 부분에서 수많은 나쁨을 얻게 된다. 

자신도 좋고 남도 좋고 온 생명이 제한없이 모두 좋고 
지금 좋고 나중 좋고 오래오래 무한히 좋고 
이 측면도 좋고 저 측면도 좋고 두루두루 모든 측면이 좋은 것과 
내가 지금 당장 이 측면이 좋은 것의 차이를 분별해야 한다. 

자신이 지금 당장 이 측면이 좋은 것을 취하면 
그로 인해 각 부분에서는 좋음을 얻지 못하게 된다. 
또 그로 인해 자신이 그 나쁨을 모두 되돌려 받게 된다.
이런 관계와 사정을 종합적으로 잘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내용을 판단할 지혜가 결여되면 곤란하다. 

비유하면 당장 눈 앞에 있는 어떤 것이 대변이고 
어떤 것이 꿀인지 정도만 분별할 수 있는 상태에서 
곧바로 행위해가기에 
자신의 손과 발이 여기저기에서 잘리게 된다.
그리고 각종 생사고통을 받으면서 
매 순간 임해 나가는 상태에 처한다. 
그리고 이것이 삶의 문제점이 된다. 


그런데 이렇게 임하게 되는 가장 기본 바탕은  
하나의 정지된 순간의 한 단면을 놓고도 
무엇이 자신이고 자신의 것 그리고 좋음과 나쁨 자체에 대해서 
뒤집혀 거꾸로 판단하는 점이다.

그런 바탕에서 전도몽상을 증폭해 나간다. 

그렇게 현실에 임하여 행하면 행할수록 
현실에서 번뇌에 사역당하고 남을 사역시키면서 
생사고통을 받아가는 상태로 묶이게 된다. 

이는 마치  곰을 조련해 돈을 버는 조련사가 
관중이 주는 돈 때문에 곰을 훈련시키고 
곰은 또 그런 조련사의 채찍과 당근에 묶여 재주를 부리게 되는 것과
사정이 같다. 

그런데 그렇게 임하는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는 
다음 순간도 마찬가지고 
또 그 다음 순간도 그렇게 매 순간 임하면서 
무량하게 생사고통의 현장에 임하게 된다. 

대부분 어쩔 도리가 없이 
매 순간 그렇게 행하게 된다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그런 행위를 중지하고 그와 반대되는 수행을 행하는 것은 
자신이 마음만 일으키면 발가락을 움직이는 것처럼 
간단한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번뇌에 마음이 묶여서 
매순간 도저히 그럴 수 없다고 여기면서 
전도몽상과 탐욕과 분노가 이끄는 대로 그대로 행해 나간다. 

그리고 그런 업의 열매가 나타날 때까지는 
그로 인해 그런 열매를 얻거나 
고통을 받을 일이 없다고 여긴다. 

또 그로 인해 생사고통을 받게 되는 순간에는 
자신이 무슨 원인으로 그런 고통을 받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가운데 경황없이 생생하게 고통을 받다가 
어느 순간 고통이 사라지면 또 전과 마찬가지로 반복해 임한다. 

씨와 열매의 인과 관계에 대해서 
대단히 좁고 짧고 얕게 관찰하기에 
그런 안타까운 상태에 반복해 처하게 된다. 

그래서 한 순간의 정지된 현실 단면을 잘 붙잡아 
이 내용부터 잘 살펴야 한다.

현실 단면에서 무엇을 자신과 자신의 것이라고 
보아야 하는가부터 잘 헤아려야 한다. 

그리고 평소 자신이나 자신의 것으로 집착하는 것은 
어떤 사정 때문에 자신에게 그런 망상분별과 집착을 일으키게 한 것인가
하는 사정도 잘 헤아려야 한다. 

이런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이후 현실에서 번뇌 망상에 붙잡혀 묶이지 않고 
집착을 제거하고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풀려나게 되고 
수행을 실천해서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얻는 상태로 
전환해 벗어날 수 있다. 


하나의 단면을 놓고  
전도망상을 일으키는 문제를 그간 반복해 살폈다. 

특히 이런 입장은 
견해의 다툼에서는 
치졸하고 용감한 장수의 태도를 취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붙잡고 
자신과 견해가 다른 상대와 
치열하게 시시비비의 다툼에 임해 나간다. 

그래서 그는 또 말과 글이라는 칼을 붙잡고 
상대의 감정을 해치고 
자신이 엉터리 망상 분별에 바탕해 
자신의 견해가 옳다고 고집하면서 
상대를 해치려고 임하기 쉽다. 

현실에서 어떤 글이 마음에 안들게 되면 
그에 누군가가 댓글을 달고 
그리고 그 상대는 또 그에 댓글을 달고 
그렇게 해서 
몇 페이지를 서로 욕설과 비난을 주고받으면서 
이어지는 모습을 언젠가 본 적이 있는데 

설령 그렇게 하지는 않더라도 
대부분의 심성이 그와 같은 상태로 
현실에서 다른 이와 옳고 그름을 다투는 상태가 된다. 
전도몽상 상태에서 날카롭게 자신과 상대를 해치는 
견해에 의한 번뇌의 모습이기도 하다. 

견해에 의한 날카로운 번뇌의 내용들이 갖는 특성이다. 
[ 신견(身見)ㆍ변견(邊見)ㆍ사견(邪見)ㆍ견취견(見取見)ㆍ계금취견(戒禁取見) ]

이런 입장에 대해서는 
엉터리 주장을 내세우고 고집을 피워 절벽을 향해 내달리는 경우에도 
말릴 방안이 잘 보이지 않게 된다. 


이런 상대를 논쟁을 통해서 패배시키면 
자신의 잘못된 견해를 버리고 
올바른 방향으로 변화해 임하게 되는 경우가 거의 드물다.
대부분 잘못을 지적해 상대가 창피를 주었다고 여기고 
다른 시시비비거리를 찾아 상대를 공격하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현실에서 누군가 논쟁과정에서 
자신을 공격하고 비판하는 경우 
이처럼 임하지 않고 평안히 참는 경우는 
오히려 대단한 일이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드물다. 

전도몽상과 번뇌를 스스로 극복하지 못하고 
고통과 이익에 민감하여 행해가는 것을 
치졸하고 비겁한 일이라고 보듯 
시시비비를 일으키는 사정도 마찬가지다.  


칼로 받은 상처는 시일이 지나면 둔감해지지만, 
언설로 받은 폐해나 고통은 
쉽게 사라지지 않아서 문제가 더 심각하다. 

세계에서 수많은 곳에서 대량 학살이나
전쟁이 빈번한 것도 
그런 견해의 다툼에 바탕한다. 

그래서 옳고 그름 
또는 좋음과 나쁨의 문제를 살필 때
이런 점을 주의하면서 살펴나가야 한다. 

대부분 어떤 것의 정체나 그 옳고 그름의 문제에서 
전도몽상을 일으키고 
무한한 생사고통에 묶여 지내는 과정은 비슷하다. 

그래서 엉뚱한 내용을 자신과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면서 
번뇌에 묶여 사역을 당하는 삶을 마치게 된다. 


이제 비유를 들어 간단히 살펴보자. 


눈을 뜨고 보니 
눈 앞에 매달린 종이 보인다. 
그래서 자신이 손으로 살짝 튕겨보니 
그 종에서 소리가 나고 
자신의 손에는 촉감이 느껴진다. 

그리고 나서 그런 사실에 대해 보고하기를 
자신의 손이 종을 '대상'으로 해서 접촉을 하게 되니까 
소리를 듣게 되고 
손에는 촉감을 얻게 되었다. 
이렇게 보고하게 된다. 

그리고 나서 
자신이 종이라고 본 것의 정체에 대해서 
그 종은 이런 소리다. 
그 종은 이런 촉감이다. 
이렇게 제시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본 그런 종의 모습은 그런 소리를 얻게 한 대상이고 
또 그런 촉감을 얻게 한 대상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그런 종이란 대상의 정체는 
자신이 귀로 들은 그런 소리고 
손으로 얻게 된 그런 촉감으로 여긴다.
그리고 그렇게 기술하고 판단한다. 

'종' 하나에 대해서 그렇게 판단한다면, 
영희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그렇게 판단하고 
또 스스로 자신에 대해서도 또 그렇게 판단한다. 

그래서 자신이 움직여 어디론가 가고자 생각하고 움직이면 
같이 움직인다고 보는 그 부분들을 자신의 몸이라고 본다. 

그리고 또 그 부분의 정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잘못된 이해를 한다. 
즉, 그 부분을 손바닥으로 부딪혀 보니 
거기에서도 소리가 나고 촉감이 느껴진다.
그리고 자신의 손에서도 촉감이 같이 느껴진다.
그러니 이것이 바로 그런 것의 정체다. 

즉 자신의 몸 부분을 대상으로 손을 부딪히니 
그런 소리와 그런 촉감을 얻기에 다음처럼 여긴다. 
즉, 자신이 눈으로 본 그 모습으로서 
자신의 몸 부분이라는 대상의 정체는 바로 그런 소리고 
그런 촉감이라고 기술하고 보고하게 된다. 


다시 이런 전도몽상을 더 살펴보자. 

이제 눈을 감고 그런 모습을 보지 않는 가운데 
자신이 생각으로 떠올리게 되는 어떤 생각내용으로서 
장미꽃이나 여인이나 평화나 사랑  아름다움 등을 놓고 
생각을 한다고 하자.
이런 경우도 또 비슷한 관계로 이들을 관계짓게 된다. 


예를 들어 장미꽃을 생각하니까 화분이 생각난다. 
그래서 자신이 그런 장미꽃이라는 생각내용을 대상으로 
그런 화분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으니 
이제 장미꽃이라는 생각내용이 대상이 되고 
그 대상의 본 정체는 화분이라고 여긴다. 

이제 조금 심하면 
자신이 어떤 모습을 보거나 
어떤 소리를 얻거나 
어떤 촉감을 얻거나 
또는 어떤 생각을 하는 경우에는 
자신이 그런 모습을 대상으로 삼아서 그런 모습을 얻은 것이고 
그런 소리를 대상으로 삼아서 그런 소리를 들었고 
그런 촉감을 대상으로 해서 그런 촉감을 얻었고 
그런 생각내용을 대상으로 해서 그런 생각을 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즉 눈을 떠서 어떤 종이나 꽃 모습을 본다면 
자신이 그런 모습을 보게 되는 그 순간은 
바로 그 모습을 대상으로 해서 그런 모습을 얻은 것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만일 자신이 눈을 감고 
갑자기 어떤 산이나 바위를 떠올린다면 
그처럼 자신이 그런 산이나 바위라는 생각내용을 대상으로 해서 
그런 생각내용을 얻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각 경우 그런 내용이 
현실적으로 자신에게 얻어져 있는 상태에서 
그 내용이 과연 무엇을 대상으로 해서 
어떤 과정으로 얻어낸 것이고 
어떤 사정으로 그것이 옳다고 할 내용이 되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되면 
완전히 뒤죽박죽이 된다. 

자신의 눈은 자신의 눈을 스스로 보지 못한다. 
자신의 마음을 자신이 스스로 보거나 만지지도 못한다/

한편 그런 마음안의 현상에 대해서 
말과 글로서 나타내고자 할 때 
각기 그 내용을 다른 이에게 직접 그대로 전하지 못한다.

이런 문제점 때문에 
서로 말과 글로 논의하면서도 
정작 그런 말과 글로 어떤 것을 가리키고 나타낸 것인지 파악하지 못한다.
그래서 온갖 혼동을 일으키고 
단지 말과 글에 붙잡혀 시시비비에 임하면서 논의에 임하기 쉽다. 


오늘 『금감삼매경』에서는 
본각이란 내용이 제시된다. 
이 문제도 사정이 비슷하다. 
도대체 깨달음이란 무엇이길레 
전혀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데도 
이미 갖추어져 본래부터 있는 깨달음이라고 할 본각이 있다고 하는가. 

이런 본각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이고 
그리고 수행을 통해서 무언가를 깨닫는 것은 
이런 본각과는 도대체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리고 진정 옳은 깨달음의 내용을 
이 가운데 무엇이라고 해야 하는가.  
이런 식으로 온갖 혼동을 일으키게 된다. 


 
그런데 결국 이 문제는 앞에 제시한 문제상황에서 
무엇을 각 상황에서 문제삼는 것들의 
본 정체라고 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다 함께 관련된다. 

그런데 처음부터 전도몽상을 일으키고 
이 문제를 대한 경우는 
역시 그 문제에서도 앞의 비유처럼 
온갖 혼동을 일으켜서 논의에 임하게 된다. 
그리고 본각과 관련된 문제에서도 
역시 그에 바탕해서 이 문제를 헤아리게 된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우선 자신이 현실에서 잘 얻는다고 보게 되는 
하나의 현실 단면을 붙잡고 
그 단면에서 제기되는 문제부터 먼저 잘 살피고 

이제 자신이 들은 종소리나 
또는 자신이 느낀 촉감이나 
또는 그 상황에서 차를 한잔 마시면서 맛본 차맛을 

대상으로 해서 
그에 대해 일정한 생각이나 판단을 한 다음 
그 내용을 다시 
언어로 기술해 보는 가운데 

이런 감각현실의 각 내용과 
다시 그에 대해 행한 분별 생각판단 내용과 
또 이런 분별 내용을 언어를 통해 말하거나 글로 표현한 내용들이 
시로 어떤 관계가 있는가부터 
기초적으로 살피는 것이 요구된다. 


그것을 놓고 
눈으로 본 시각정보로서 종모습이 
귀로 들은 청각정보 소리나 
손으로 느낀 촉각정보 촉감이나 

분별을 행하는 가운데 얻는 생각내용이 
서로 어떤 관계에 있기에 
어떤 한 내용을 다른 것에 대한 
옳은 내용이라고 여기게 된 것인가를 
잘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어떤 이가 노란 색을 놓고 
이것은 앞과 같은 과정 때문에 
이러이러한 소리라고 주장하면 
그렇다고 인정할 수 없다. 

그래서 그런 노란색은 이러이러한 소리다라고 
다시 자신이 일정한 분별을 하고 생각을 할 때 
그 감각현실과 자신이 행한 생각내용은 
어떤 관계이며 
그런 생각내용은 그런 감각현실에 대해 
어떤 근거로 옳다고 할 생각내용이 되는가를 살펴야 한다. .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그런 내용들을 언어로 표현한다면 
다시 그런 언어 내용들은 
그런 색깔과 같은 감각현실이나 

그에 대해 행한 생각내용 들에 대해서 
이들과 어떤 관계에 있기에 
그에 대한 옳은 판단이라고 할 수 있는가를 
기본적으로 살펴야 한다. 

그리고 각 경우 
그런 내용이 다른 내용과 달리 옳은 깨달음이라면 

그렇게 옳다고 볼 근거가 무엇인가부터 확인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어떤 것의 본 정체가 무언가를 따지는 
실재의 존부나 그 정체에 대한 논의로 옮겨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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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현실에서 문제삼는 내용을 
다 얻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그 내용의 정체나 그 상호관계에 대해서 
혼동을 일으켜서 뒤집혀 판단한다. 

또 다시 그에 바탕해서 
실재에 문제에 대해서 헤아리게 된다.
그래서 다시 뒤집힌 판단이 증폭되어 나가게 된다.

심지어 어떤 이는 
자신이 잃어 버린 안경을 찾다가 
안경을 어느 곳에서 찾게 되면, 
그 안경에 대한 생각은 생각내용이고 
자신이 그 안경을 찾는 순간에 보는 안경 모습은 감각내용인 것이어서 
이처럼 자신이 안경의 모습을 보는 순간의 단면을 놓고 
자신이 그런 안경모습을 보는 것은 
자신이 그런 안경이란 생각내용을 대상으로 놓고서 
그에 대해 그런 감각을 얻는 것이라고 여기기도 한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자신이 눈을 떠 어떤 꽃 모습을 본다면 
자신이 눈을 감고 생각하던 꽃이라는 생각내용을 
대상으로 놓은 가운데 
그런 생각내용을 대상으로 해서 
그런 시각적 감각현실을 얻은 것인가. 
이런 문제이다. 

그래서 실재나 감각현실 그리고 생각분별한 내용이 
서로 관계가 문제될 때 

마치 분별 내용이 감각현실을 얻게 하고 
감각현실로서 실재를 얻게 된다고 
여기면서 임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실재가 무언가를 문제삼고 찾을 때 
자신이 이미 생각으로 얻은 내용들을 기준으로 놓고 
그렇게 분별하면서 

이 안경의 실재는 무엇이고 
이 꽃의 실재는 무엇이고 
이 바위의 실재는 무엇인가 
이렇게 문제를 삼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 실재는 얻지 못하는 가운데 
~~의 실재는 무엇인가 이렇게 문장을 구성하고 
찾는 것인데 
그 상황에서 ~~ 의 부분에 해당한 내용들은 
과연 자신이 어디에서 얻어서 그렇게 
제시하면서 문제삼고 있는가. 
이것부터 잘 확인해야 한다. 

실재 => 감각현실 => 관념분별 
이런 관계라면, 
앞에서는 이것을 순서를 뒤바꿔서 

자신이 관념분별을 먼저 행하고 나서 
그 관념분별에 대해 
어떤 감각현실을 얻고 
다시 그에 대해서 어떤 실재를 얻어내게 되는 것처럼 
무의식적으로 이처럼 뒤집혀 생각하는 가운데 

각 내용을 문제삼는 것을 지켜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눈으로 어떤 모습을 본 것은 다 마찬가지인데 
이제 그에 대해서 
표준이 되는 내용은 그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입장은 
사실은 그렇게 보게 되는 그 근거나 기준을 
어디에서 확보해서 
그렇게 제시하는가를 지켜보면 

바로 이처럼 거꾸로 판단을 뒤집어서 
자신이 그런 모습을 보는 것은 
자신이 미리 생각한 어떤 관념분별 내용이 있는 상태에서 
그것을 놓고 마치 그런 내용을 얻게 된 것처럼 
이 관계를 서로 뒤집어서 
그 기준을 붙잡고 판단에 임하는 것을 지켜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어떤 눈을 뜨고 어떤 모습을 본다면 
매 과정이 
그처럼 자신이 눈을 감고 떠올려 생각하는 어떤 꽃이나 바위와 같은 
그런 생각내용을 먼저 앞에 대상으로 놓고 
그것을 대상으로 
그런 감각현실을 얻은 것인가 
이 문제부터 스스로 잘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보는 경우도 없는 것과 
사정이 그렇지 않다면 
자신은 이제 무엇을 대상으로 
그런 모습을 얻은 것인가를 또 생각해야 하고 

그리고 자신이 얻은 내용은 
그런 대상과는 어떤 관계에 있기에 
어떤 내용은 옳고 
어떤 내용을 그르다고 할 것인가를 
또 헤아려야 하는 것이다. 

이런 문제가 본각의 문제를 살피기 이전에 
모두 기초적으로 해결이 되어 있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실재는 그 내용을 얻지 못하는 가운데에서 
이제 현실에서 얻는 내용들을 기초 자료로 해서 
논의에 들어가야 하는데 

정작 현실에서 잘 얻는다고 보는 그 내용들에서부터 
혼동을 일으키고 엉뚱한 판단을 하고 
논의에 임하면 

본각의 문제는 다시 이를 바탕으로 
혼동을 일으키고 임할 도리밖에는 없다고 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문제가 언어로 그 사정을 본래 밝히기 곤란한 사정과 함께 
이 논의가 복잡한 성격을 갖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일단 너무 길어졌으므로 
조금 쉬었다가 이어 살피기로 한다. 


요즘 쉴 때 쉬엄 쉬엄 
사진처리 작업을 하는데 
하나의 사진을 여러 형태로 처리하고 
이것을 슬라이드쇼로 편하게 감상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주된 작업 목표가 된다. 

그런 가운데 하나의 사진을 10 개 이상 방식으로 처리하게 되는데 
이제 이렇게 처리한 여러 사진을 놓고 
이 가운데 어떤 모습이 
과연 참된 모습인가를 판단하고자 한다고 해보자. 



















































이런 문제가 제기되면 

대부분은 자신이 참된 모습을 찍은 사진이라고 
여기는 사진을 쉽게 고를 수 있다고 보게 될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가 문제다. 

어떤 이가 이런 판단이 문제될 때 
이 가운데 어떤 사진이 참된 모습을 찍은 사진이라고 
골라낸다면 
그 때 사용한 기준이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그 기준은 각 사진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부터 
먼저 검토해야 한다. 

앞과 같은 문제가 제기될 때 
이 사진을 대하면서 각 주체는 
무언가 마음에서 이 각각에 대해 참된 모습이라고 보아야 할 
어떤 내용을 먼저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것이 과연 그런 기준이 되는가는 다음 문제라고 하고 
일단 그런 내용이 
자신이 눈을 떠서 얻는 내용에 해당하는가 
아니면 생각으로 떠올리는 생각내용 관념분별에 해당하는가. 

그것도 아니면  실재에 해당하는 내용인가. 
또 그것도 아니라면 사전에 나오는 단어와 같은 언어에 해당하는 내용인가.

이런 것을 놓고 그 가운데 어디에 해당하는 내용인가부터 
먼저 헤아려 보아야 한다. 

그리고 나서 
왜 각 사진이 참된 내용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는데 
그런 내용이 그 기준이 될 수 있다고 보는가를 
또 스스로 헤아려보아야 하는 것이다. 


대부분 자신이 생활하면서 
경험을 통해서 꽃이란 이런 것이라는 어떤 관념적 판단을 얻고 
그것을 마음에서 떠올려서 
이런 판단에 사용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과연 저런 사진이 
각 주체가 갖는 그런 생각 내용을 대상으로 
카메라를 들이대서 찍은 것인가. 

현실을 놓고 설명하면 
그런 생각내용을 먼저 붙잡아 놓고 
자신의 눈이 그것을 대해서 
어떤 모습을 얻는 것이라고 할 것인가. 

사정이 그렇지는 않은 것이다. 

그리고 정작 그렇게 자신이 경험을 통해서 
어느 정도 확보하고 있다는 표준적 꽃의 모습이라는 것도 
알고보면 매 순간 
감각현실을 얻고 나서 그로부터 일으킨 관념들을 
그렇게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내용이라고 보아야 하는데 
이 선후 관계를 나중에는 뒤바꿔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즉 자신이 어떤 모습을 보는 것은 
자신이 경험을 통해서 확보한 어떤 표준적인 꽃 모습에 대한 
생각내용을 놓고 
자신이 이를 대상으로 삼아서 그런 모습을 얻고 있다고 
그 관계를 뒤집어서 이해하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감각이 옳은가 그른가의 판단이 문제되면 
대부분 그 각 내용의 지위를 그렇게 뒤바꿔서 
엉뚱한 것을 기준으로 붙잡고 
판단에 임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정작 자신이 무엇을 대상으로 해서 
그러한 각 모습을 얻었는지는 스스로 
잘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과연 자신이 무엇을 대상으로 
그런 모습을 마음에 얻게 되었는가가 문제될 때는 

자신의 마음에 이미 얻어 놓은 그런 마음안의 내용 자체를 
자신이 대상으로 삼아서 
그런 내용을 얻고 있다고 또 생각하면서 
주장하게 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 상황이 자신이 마음에서 어떤 내용을 얻을 때 
그 대상이나 그런 인식과정이나 
인식한 내용의 정체나 의미를 판단하는 과정에서 
대부분 기본적으로 일으키는 전도몽상의 구조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이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이전 글에서도 
눈을 뜨고 감기 실험을 반복해보고 
또 다른 이를 옆에 놓고 그런 실험을 하게 하면서 
이를 자신이 관찰하는 활동을 하고 

또 돗수가 다른 색안경을 쓰고 벗고 하는 실험을 하면서 
왜 그 때마다 자신의 외부 세계가 일순간 
다 그렇게 바뀌는가 이런 문제도 
스스로 검토해 볼 것을 제시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 가운데 1 자신이 무언가를 보고 
또 다른 사람 2 가 무언가를 보고 보고하는 과정을 
다음 그림을 놓고 스스로 잘 헤아려 볼 것을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img2]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http://buddhism007.tistory.com/228 ☞○ 마음과 색의 의미에 관한 논의
http://thegood007.tistory.com/1172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03fl--ghpt/r1030.htm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그리고 이와 함께 이처럼 시각으로 얻는 감각현실의 의미와 정체를 
잘 음미하는 가운데 

다시 이런 감각현실 가운데 
시각정보와 
다른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의 감각현실과 
다시 이에 대해 행하는 관념분별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고 
또 그런 각 존재의 바탕이 된다고 보는 #실재를 놓고 

#실재와 각 ! 감각현실들과 @ 관념분별들이 
상호간에 어떤 관계에 있고 

또 그것이 어떤 관계로 어떤 형태가 될 때 
그것을 과연 무엇을 기준으로 그것이 옳은 내용이라고 
할 것인가를 잘 살펴야 한다. 

이 내용을 다음 그림이 나타낸다. 






[img2-8]
08pfl--image/8식-8.jpg




그래서 현실에서 
위 그림과 같이 
눈으로 어떤 1 과 같은 모습을 보게 되고 
다시 그에 대해서 6 과 같은 어떤 생각을 일으켜 행하는 가운데 

이 가운데 어떤 내용은 옳고 
다른 내용은 또 잘못이라고 본다면 

그런 내용이 그 영역에 그렇게 얻어져 있다는 사정 
자체는 서로 다르지 않은데도 
왜 어떤 내용은 옳고 
어떤 내용은 그렇지 않고 잘못이라고 
달리 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그 근거를 
찾아 제시해야 한다. 


그래서 어떤 대상에 대해 
어떤 주체가 
그 대상에 대해 가장 올바른 내용을 얻는 것을 
그 대상에 대한 올바른 깨달음이라고 이해한다고 하자. 
그러면 이런 입장에서 기본적으로 
자신이 문제삼는 위와 같은 각 내용이 
과연 어떤 대상에 대해 어떤 기준으로 
그런 지위에 있다고 할 것인가를 놓고 
이 문제를 검토해야 한다. 

그것이 현실에서 각 주체가 
각기 얻는 감각현실이나 관념분별들을 놓고 
그 각각이 옳다거나 잘못된 내용이라고 하면서 
각 주체가 시시비비의 논의에 임할 때 
기본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간단하지만, 자세히 살피면 대단히 복잡하고 
혼동을 일으킬 부분이 많다. 

어떤 이가 어떤 위조 지페를 놓고 
그것이 옳은 지폐인가가 문제될 때 
그와 같은 위조지폐를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그것이 그 위조지폐가 옳은 지폐라고 보아야 할 근거라고 제시한다고 하자. 

그 위조지폐를 제공한 이에게 그 위조지폐를 가져가면 
그가 음식이나 과자를 바꿔 줘서 
그런 것을 그 위조지폐로 얻을 수 있기에 
바로 그런 내용이 그것이 옳은 지폐라고 볼 근거가 된다고 임하면 
무엇이 뒤바뀐 판단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무언가가 옳다고 주장할 때 
그 근거로 사용하려는 내용 자체부터 
도대체 그것을 옳다고 볼 이유가 무엇이고 
왜 그것이 그런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이 될 수 있는가부터 문제된다. 

즉 위조지폐가 진짜라고 볼 기준이 된다고 가져오는 위조지폐는 
그 자체부터 왜 그것이 위조지폐가 아니고 진짜라고 볼 것인가가 
문제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위조지폐를 갖다 주면 얻을 수 있다는 음식이나 물건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하나가 해결이 안 되어 있는데 
해결이 안 되어 있는 것들을 산처럼 쌓아 놓는다고 
처음 문제가 해결된다고 볼 도리는 없다. 

현실에서 이처럼 
옳고 그름의 문제에서 대단히 심한 전도몽상을 일으켜 
시시비비에 임하기에 
이 문제 해결이 쉽지 않다. 
더 나아가 경전에서 살피는 본각의 문제를 
이해하기 힘들게 된다.



일단 조금 더 쉬고 이어 살피기로 한다. 




오늘 『금감상매경』의 본각리품의 내용을 살피는 가운데 
무엇이 뒤집힌 상태로 
판단하게 되는 사정인가를 살폈는데 
간단히 그 사정만 밝히고 줄이기로 한다. 





○ [pt op tr]  mus0fl--Calogero - Safe Sex.lrc 


노래를 듣다보니 
내버려 두고 지켜 본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전도몽상 상태에서 집착을 갖고 임하는 상태에 있는 이를 
도와서 생사고통을 벗어나게 하려고 하면 
오히려 그 상대가 그것을 불쾌하게 여기고 
또 심지어 그를 붙잡아 사역을 시켜 이익을 얻는 이도 
역시 그것을 불쾌하게 여기는 것을 보게 된다. 

비유하면 번뇌에 묶여서 사역을 당하는 곰이나 
그 곰을 조련시켜 수입을 얻는 조련사나 
그 곰의 재주를 보고 즐거움을 얻는 꼬마관객들이나 하나같이 
곰을 축사에서 꺼내 주려고 임하면 
그 곰부터 자신이 사료를 배불리 먹지 못하게 된다고 
여기고 이를 꺼려하고 
조련사는 조련사대로 그로 인해 자신의 수입을 잃게 된다고 
여기고 꺼려하고 
관객들은 관객들대로 그로 인해 자신이 구경할 거리가 
없어진다고 또 꺼려하는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이를 방치하고 내버려두면  
그 상태에서 스스로 곰이 자신이 살고 있는 축사 우리를 벗어나오고 
스스로 자세를 변화시켜 생사고통을 벗어 나오는 사례를 
거의 보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비유하면 다른 이를 돈을 갚지 않기 위해 
도망을 간 어떤 이가 
어느날 채권자가 그를 찾아가 청구하지 않는데도 
스스로 돈과 이자를 갚으려 
그 채권자를 찾아 나선다는 사례가 현실에 거의 없는 것처럼 
현실에서 번뇌에 묶여 사역을 당하는 곰이 
자신이 당장 축사에서 그로 인해 먹을 수 있는 사료를 
포기하고 그 축사를 벗어나오려고 
수행에 임하게 되는 사례는 대단히 드문 것이 사실이다. 



앞에서 현실의 한 단면을 놓고 
자신이나 자신의 것에 대해 
어떻게 뒤집힌 전도망상을 일으키고 
이에 바탕헤 집착을 갖고 살아가는가에 대해 
문제를 지적했는데 
그 사정만 다음 그림들로 간단히 살피고 
이 글을 마치기로 하자.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img2]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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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서 자신이 어떤 내용을 얻을 때 
그것을 얻게 한 대상이나 그 정체에 대해 
뒤집힌 판단을 하고 임한다는 것은 
위 그림에서는 2 를 놓고 생각하면 조금 이해가 쉽다. 

2 가 매 순간 현실에서 대하는 내용은 위 그림에서 
5 ^ 안의 내용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면, 
그 2 는 4^ 라는 꽃의 모습을 보게 될 때 
자신이 4^ 라는 꽃을 대상으로 해서 
그 4^ 를 얻게 되었다라고 이해하거나, 
자신이 4 ^ 라는 꽃을 대상으로 
자신의 몸 2^ 에 달린 손을 접촉해서 
자신이 촉감을 얻거나 소리를 듣거나 했다고 이해한다. 


그리고 자신이 보는 2 ^ 와 같은 것이 
자신의 몸이고 
이런 부분에 자신의 정신이 자리잡고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대상과 주관에 관해서 모두 뒤집힌 상태로 
현실에 임한다. 

더 나아가 이제 
1 은 또 1 대로 앞의 2 가 생각하는 방식대로 
4 를 대상으로 자신이 4 를 얻었다고 여기기도 한다. 
4 를  1 자신의 손이 접촉해서 
촉감을 얻고 
소리도 듣게 되었다는 식으로 생각하면서 
현실에 임한다. 

더 나아가 1 이 2 가 무엇을 보는 과정을 놓고 생각하기를 
2 는 1 자신이 보는 4 라는 꽃을 대상으로 삼아서 
그의 마음 안에서 4 ^와 같은 꽃을 얻는 것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4 와 4 ^가 그처럼 서로 같은 내용이기에 
2가 얻는 그런 4 ^의 내용이 옳다고 여기기도 한다. 


그것은 반대로 말하면 
2 가 생각할 때 
자신이 보는 1 ^ 라는 사람은 4^ 라는 꽃을 대상으로 삼아서 
무언가를 보는 것이라고 여기는 한편, 
그것이 2 자신이 보는 4 ^ 와 같거나 일치하는 내용이어서 
그것이 옳다고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현실에서는 어떤 이가 눈을 떠서 
자신의 몸이라고 여기는 1 과 같은 부분을 보고 자신이라고 여기고 
4와 같은 꽃을 보면 그것을 대상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1 자신은 자신대로 그런 4 를 대상으로 어떤 내용을 얻는다고 여긴다. 
그리고 2 도 2 대로 그런 4 를 대상으로 무엇을 본다고 여긴다.
그런데 이런 판단 일체가 
모두 뒤집힌 상태에서 행하는 판단임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처럼 자신이 눈으로 보는 시각정보를 비롯하여 
다른 청각 후각 미각 촉각정보와 
그리고 이에 대해 행하는 관념분별 과의 관계에 대해 
일으키는 망상은  
다시 다음 그림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img2-8]
08pfl--image/8식-8.jpg



앞 그림에서 눈을 뜰 때 얻는 내용을 놓고 
대상과 주체에 대해서 전도망상을 일으키는 입장에서는 

1 과 같은 시각정보에서 얻는 내용에서 
자신과 자신의 것 
그리고 대상과 주체에 대해 온통 뒤집힌 판단을 행한다고 하자.

그러면 이제 그런 내용이나 관계가 
또 2와 같은 청각정보나 
5와 같은 촉각정보를 일으키고 얻게 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대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6 과 같은 관념분별 내용을 거꾸로 기준으로 잡고 
자신이 그것을 대상으로 삼아서 마치 1 이나 2,3,4와 같은 
감각현실을 얻는 것이라고 여기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1,2,3,4,5 가운데 무엇이 옳은가가 문제되면 
1 안의 내용이 1 안의 내용을 대상으로 1 안의 내용을 얻었다거나 
2 안의 내용이 2 안의 내용을 대상으로 2 안의 내용을 얻었다고 여기기도 한다. 

또는 2 안의 내용은  1 안의 내용을 대상으로 얻었다고 하거나 
또는 2 안의 내용은 6 안의 내용을 대상으로 얻었다고 여긴다. 

또 1 안의 내용의 옳고 그름은 
6 안의 내용을 기준으로 삼아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다고 여긴다.

이런 식으로 모두 관계를 뒤집어서 
대하게 된다. 

그래서 자신이 평소 눈을 감고 뜨는 실험을 반복해가면서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자신이 
거꾸로 뒤집힌 판단을 했기에 
엉뚱한 부분을 자신이나 자신의 것으로 여기면서 
곰처럼 그런 망상과 어리석음에 묶여서 
생사고통을 받아나가는가를 스스로 잘 헤아려야 한다. 

그렇게 잘 헤아리면 
반대로 자신을 죽을 때까지 
사실은 자신과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는 그런 것을 
자신과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면서 집착을 갖고 
곰처럼 번뇌에 묶여 사역을 당하면서 
생사고통을 무량하게 받아나가게 했는가를 
스스로 파악하게 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이런 생사고통을 벗어날 수 있는 
3 개의 문을 각 부분에서 찾아내게 된다.

그리고 다시 그런 생사현실에 들어와 임할 때 
그런 생사고통에 묶이지 않고 생사현실이 곧 청정한 니르바나임을 관할 수 있게 된다.
그런 가운데 생사현실 안에서 수행에 진입해서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얻어나갈 수 있는 
무량행문을 행해갈 수 있다.

이는 현실 각 부분에서 
공해탈문 무상해탈문 무원무작해탈문을 찾아내는 문제다. 
그리고 다시 그 문을 통해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해탈을 얻고난 후에는 
다시 다른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생사현실에 들어올 때 
이 생사현실에서 임할 수 있는 방안이다. 

즉, 법이 공한 수행의 자리 
그리고 무상해탈문을 통해서 아상 인상 등을 제거하여 안인을 성취하고 
더 나아가 생사현실이 본래 생멸을 얻을 수 없음을 이해하여 
무생법인을 증득하여  
안인이라는 수행자의 옷을 입고 현실에 임하게 된다. 

또 무원무작 해탈문을 통해서는 
망상에 바탕해서 자신과 자신의 것에 대대 
쓸모없는 집착을 일으켜 추구하던 온갖 희망을 제거한다.
그리고 그 바탕에서 자비라는 수행자의 방에 들어가서 
생사고통에 묶인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자비의 마음을 일으켜  생사현실에 들어간다.

그리고 얻을 것이 없음(무소득)을 방편으로 
무량한 복덕과 무량한 지혜를 성취해가는 
무량행문의 수행에 진입해 들어갈 수 있게 된다. 


그것이 모두 현실에서 하나의 단면을 놓고 
무엇이 무엇에 대한 가장 올바른 깨달음이고 
그것의 본 정체를 가장 잘 파악하는 문제와 관련된다. 

『금강경』에 다음 구절이 있다. 

온갖 상(相)은 

모두가 허망하니 

상이 상 아닌 줄 알면 

바로 여래를 보리라. 



범소유상,개시허망。

凡所有相,皆是虛妄。

약견제상비상,즉견여래。」

若見諸相非相,則見如來。」

...


또 다음 구절도 있다. 

겉모양에서 부처를 찾거나 

목소리로써 부처를 구한다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지라 

끝끝내 여래를 보지 못하리.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

이런 게송 구절들의 의미를 잘 이해해야 한다.

평소 자신이 무언가를 이해하고 
옳은 내용을 얻는데 사용한다고 보는 
감각과정이나 분별판단과정
또는 인명학에서 말하는 현량이나 비량과 같은 내용이 
사실은 어떤 상태를 뒤바꿔 이해하게 하고 전도망상을 증폭시키는가를 
스스로 이해해야 한다. 

그렇게 얻는 내용을 옳은 내용이라면 
본 정체를 올바로 깨닫지 못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본각에 관련된 부처님의 가르침도 
이해하기 어렵게 된다. 

그래서 자신이 평소 
물이나 차를 마신다면 
그 물이나 차에 대해 
어떤 상태가 되는 것이 
그 물이나 차에 대해 그 정체를 제대로 파악한 것인가라는 주제를 놓고 
이것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하나 놓고 깊게 생각해서 
이 문제를 잘 해결해야 한다. 하고 
그리고 그 실재에 대한 문제로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실재는 또 무언가를 잘 살펴나가야 한다. 


이 문제가 잘 이해가 안되면 
최면에 걸려서 무언가가 있다 없다고 
하면서 이상한 행동을 하는 최면걸린 이들을 놓고 
이 문제를 생각해보면 조금 이해가 쉽다. 

그가 있다고 여기면서 생각하면 
정말 무엇이 없던 것이 그 현장에 생겨나 있게 되는가. 
또 그가 그런 것이 있다가 없어졌다고 여기면 
또 무엇이 있던 것이 새삼 없게 되는가. 

그리고 그렇게 최면에 걸린 상태에서 헤매 돌다가 
최면에서 풀려나 자신이 원래 갖고 있던 지갑이나 
관객석에서 자신을 바라본 자신의 가족을 보게 된다면 
그 지갑이나 가족은 
없다가 새로 홀연히 생겨나서 
그것을 얻게 된 것인가.
이런 이 문제를 놓고 생각해보아야 한다. 


최면의 상태를 기준으로 놓고 보면 
최면걸린 상태에서 무언가 열심히 행하여 
없던 것을 삼 얻게 된다고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관객석에서 바라보면 
그 최면걸린 이가 뒤집힌 상태에서 
그렇게 여기는 것 뿐이라고 보게 된다. 

그래서 그와 관련된 내용을 생각해볼 수 있는 
최면자료를 찾아서 올려 놓고 
일단 글을 마친다. 



가장 혐오스럽게 보이게 하는 최면 

Hypnosis Video - Most Disgusting Man Alive




혁대를 뱀으로 보이게 하는 최면 

Snakes on a Stage! Starring Samuel Jackson and Marc Savard





○ [pt op tr]Hypnotized Blonde Girl Thinks She Has 11 Fingers




 Hypnotist Marc Savard makes every volunteer on stage CRY! https://www.youtube.com/watch?v=9Mdz_GKZ0X4




이들 최면자료에서 보게 되는 
최면 걸린 이들이 보여주는 우스꽝스런 모습들은 
특별히 이런 최면술사의 최면에 걸린 이들의 상황만  
이렇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일반인들이 평소 생활하는 내용 자체의 성격이 
이와 같다는 사정을 지적하기 위해 
제시하는 자료들이다. 

그 사정을 위와 같은 자료를 보면서 
환술사나 최면술사의 최면에 걸린 이들이 
그 상태에서 생각하고 행하는 그런 내용들이 
어떤 상태에서 그렇게 행하게 되는 것인가를 잘 헤아려야 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이 평소 자신이나 자신의 것이라고 무언가를 보고 
그것을 집착하면서 
곰처럼 그런 망상 번뇌에 묶여 
번뇌의 사역을 당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을 스스로 헤아려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그에 바탕해서 
위에 제시한 3 개의 해탈문을 스스로 
자신의 현실에서 찾아내 들어가  
그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래서 다시 앞과 같은 3 개의 해탈문을 통해 다시 
생사현실에 들어와 수행에 임해야 한다.
그래서 생사고통을 받는 중생들을 제도해나가고 
무량행문을 닦고 복덕자량과 지혜자량을 구족해나갈 필요가 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경우 
그런 최면에서 벗어나게끔 도와주려는 관객이나 가족을 
오히려 불쾌하게 여기면서 대하게 되기 쉽다.
그 사정이 마치 위 자료 가운데 첫 최면자료에서 
최면 걸린 이가 보이는 반응과 같다. 

그런데 상대가 그렇다고 해서 
정말 그대로 내버려두면 곤란하다. 
그 상태에서는 그가 그에 바탕해 무엇을 행하면 행할수록 
그 만큼 그로 인해  그 자신이 파묻히게 되고 
그런 상태에서 티끌을 대단한 보물이나 되는 것처럼 
매 순간 붙들고 집착하며 
무량하게 생사고통을 받아 나가게끔 된다. 

그리고 바로 이런 현상들이 
현실에서 중생들이 일으킨 전도몽상의  
치명적인 문제점이다. 


쉬면서 다음 노래를 들었다. 
그래서 이 곡을 올리는데 
이 곡이 이전에 니야야 빈두라는 논서를 살피면서 
올린 노래이기도 하다. 





mus0fl--Florent Pagny - Si Tu Veux M'essayer.lrc 

당시 『니야야빈두』를 살피면서 
이 논서에 치명적인 문제점이 들어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이 곧 현실에서 각 중생이 
전도몽상에 바탕해 얻는 내용을 
옳다고 여기는 사정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에 바탕해서 번뇌에 묶여 사역을 당하고 
생사고통을 받아나가게 된다. 


서양의 형식적 연역 논리학체계나 
또는 귀납 추론 체계나 
또는 최근에 제시된 기호논리학 체계나 
기타 인도의 인명학파가 내세우는 주장들이 
서로 조금씩 기반이 다르지만, 사정이 다 마찬가지다. 


처음에 자신의 관념이 다른 영역에서는 
그와 같은 내용을 얻지 못하고 
그래서 그런 체계나 내용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최소한의 교두보 조차 
감각현실에서도 얻어내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은 실재에서는 더더욱 사정이 그렇다


그것은 하나의 개념의 성품이나 모습[상] 의 사정이 그렇다.
또한 그런 개념이 적용되는 대상들이라고 할 외연들이 하나같이 사정이 그렇다. 

그래서 논리학의 기초가 
전도망상체계에 바탕해 서 있음부터 잘 이해해야 한다. 

각 학문분야 가운데 
가장 확실하다고 할 논리학이 이와 같으므로
나머지 분야는 더 문제가 심각하다. 

그래서 이런 내용들에 바탕해서 
판단을 행하면 전도몽상의 증폭이 된다. 

현실에서 어떤 내용을 얻으면 
그런 내용을 얻게 한 그런 체계나 방식이 
그를 통해 얻은 내용의 옳음을 보증해준다고 이해하고 나아가면 곤란하다. 

만일 사정이 정말 그렇다면 
그것은 현실에서 깨달음을 얻게 해주는 체계라 할 것이고 
그래서 이런 체계를 부처님을 만들어 내는 
부처님의 어머님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여겨야 할 것이나 
사정이 그렇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현실 학문분야에서 가장 확실한 진리를 보증한다고 
여겨지는 이런 내용이 사정이 그렇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외 나머지 분야의 사정은 다시 이를 통해서 
함께 미루어 그 사정을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감각현실과 관념분별 영역에서부터 
일으키는 이런 전도몽상은 
이미 비닐판의 비유를 들어서 
사정을 설명한 바 있다. 

이 비닐판의 비유를 통해서 
왜 현실에서 행하는 그런 판단들이 
모두 엉터리 전도몽상 분별이라고 하는지를 
잘 이해해야 한다. 

비닐판 하나에 작은 네모를 그리고 
또 다른 비닐판 하나에는 큰 동그라미를 그려 놓고 
이 둘을 포개어 넣고 바라보면 
각 비닐판에는 없는 
안이 네모인 큰 동그라미 도너츠 모양을 
보게 된다. 

각 비닐판에는 없는 이런 도너츠를 
그런 상태에서는 보게 되고 
그래서 그런 내용이 각 비닐판에 
그처럼 있다고 여기는 이 증상이 
바로 현실에서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을 놓고 
일으키는 전도몽상 증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리고 
본 바탕이라고 할 실재의 내용을 헤아릴 때도 
그런 망상 분별의 체계를 그대로 
적용해 나가려고 하는 것이 또 문제가 된다. 


현실에서 생멸이 있다거나 
자신이나 다른 사람으로서 영희가 저기에 저렇게 있고 
그것이 저기에서 여기로 오고 가고 한다는 등의 
온갖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그러면서 자신과 자신의 것은 이런 것이라고 여기면서 
집착하면서 번뇌에 묶여 생사고통을 받는 곰이 되어 
스스로 곰이란 글자를 거꾸로 뒤집어 보면 
바로 얻게 되는 '문'을 스스로 찾아내지 못하고 
생사 현실에서 헤매도는 상태가 된다. 

자신이 어떤 감각현실을 얻고 
그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면서 
그 부분의 성품이 어떻고 
그 모습[상]은 그와 같고 
그리고 그런 것들에 해당하는 것들은 
이런 것들이라고 나열하는 데에는 
기본적으로 이런 망상이 바탕이 된다. 

문수보살님의 아라바자나 다라니에서 
일체에 성품과 모습 언설명자를 얻을 수 없다는 의미로 
'나'라는 부분을 설명하는 내용은 
바로 이 부분과 관련된다.  

중생은 망상에 바탕해서 그런 내용이 있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런 현실에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음을 이해하는 것이 
해탈문을 찾아내는 기본 전제가 된다. 

그래서 이런 '나'에 해당하는 내용을 기초로 
나->자->바->라->아 
의 내용을 얻어서 
본래 생멸을 얻을 수 없다는 아의 내용까지 이르게 된다. 


그것이 곧 처음 세속제를 이처럼 살피고 확립해서 
이를 바탕으로 언설 명자를 떠난 승의제를 얻어내는 
수행자의 수행과정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 깨달음을 바탕으로 해서 
처음 각 비닐판에는 없다고 할 
도너츠를 그 상황에서 얻는 그 사정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그 상황에 다시 들어가 
그런 상태에서 망상분별을 행하는 이를 상대해서 
그런 중생을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수행자의 무량행문의 내용이 된다. 


그래서 왜 각 비닐에 없는 도너츠를 
세상사람들이 거기에 있다고 강하게 믿고 
그렇게 헤매돌게 되는가 하는 사정을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감각현실을 하나의 배경으로 놓고 
그 각 부분을 묶고 나누면서 
이것은 자신 저것은 자신의 것 
이것은 꽃 이것은 영희 이렇게 분별을 행하기 쉽다. 


그런데 그 관념분별에는 그 관념분별로 가리키는 
그런 감각현실의 부분 
즉 그 모습[자상]이 그 안에 들어 있지 않다. 

그런데 마치 그런 생각내용은 
그런 감각현실과 같은 생생한 내용을 
그 구성부분으로 하고 있는 것처럼 
그가 의식하면서 현실을 대하게 된다. 

또 반대로 
그렇게 전도몽상을 바탕으로 현실에 임할 때는 
그런 감각현실의 일정부분이 
마치 그런 관념분별에서 행한 내용을 
그 안에 갖고 있는 것처럼 
그것을 대하고 그것을 그렇게 취하고 
그에 머물면서 열심히 행해나가게 된다. 

현실에서 눈을 떠서 일정한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대하게 되면 
그 부분에는 사실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는데도 
마치 그 부분이 그런 내용인 것처럼 여기면서 
그 부분을 붙들고 늘어지면서 
그 부분을 그런 의미로 취하고 그에 머물고 
각종 생각과 말고 행위를 해가면서 
업을 행해 간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는 결국 생생한 고통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생사현실에 묶여 들어가게 된다. 

본래는 얻을 수 없는 내용인데도 
그 상황에서는 그렇게 보고 임하는 가운데 
매 순간을 그렇게 생사고통을 받는 현실에 묶여 
임하게 되는 기본 사정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니 이 상태에서 그렇게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에 대해 
그런 분별을 일으켜 행하고 
그에 바탕해 머무는 자세를 벗어나와야 한다. 

그것이 곧 그런 부분을 붙잡고 
그것이 나라거나 
거기에 나의 목숨이 있다거나 등등으로 
모든 집착의 근본이 되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일으켜 
임하는 것이 된다. 

이런 바탕에서 어떤 이가 생사현실에 임하면 
그는 수행자 자격을 박탈당하는 중대사유가 된다. 

그래서 그런 감각현실의 부분은 
그 자체가 실재의 지위에 있는 실상도 아닐 뿐더러 
자신이 그에 대해 생각을 일으키는 분별 내용을 
거기에서 얻을 수 없는 것임도 관해야 한다. 

또 평소 자신으로 여길 내용에 적절한 내용을 찾아나선다면 
차라리 매 순간 일정한 내용을 얻어나가게 하고 
그런 내용을 담아두는 정신을 차라리 자신이라고 여기는 것이 낫다. 

또 그런 정신들에서도 차라리 
매 생에서 그런 정신을 분화 생성시키는 근본정신을 
자신의 정체로 보아야 하고 
이를 바탕으로 생사현실에 들어가 
현실에서 자신의 몸이라고 보는 것과 같은 내용을 
그 현실에서 일시적으로 걸치는 옷이나 신발처럼 여기는 가운데 
수행을 해나가는 것이라고 여겨야 한다. 

그러나 그런 근본정신과 실재의 관계를 살필 때나 
그런 근본정신이 정말 참된 진짜의 나라고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는 
역시 그것도 사정이 그렇지 않다는 것까지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이런 일체에 대해서 
무소유 불가득 공한 사정을 평등하게 관하고 
생사현실에서는 이런 상태에 상응하게 
무소득(얻을 것이 없음)을 '방편으로' 하여 수행에 정진해서 
생사현실이 곧 청정한 니르바나임을 잘 관하고 이해하는 가운데 
무량한 생사현실 속에서 무량한 수명과 무량한 복덕과 무량한 지혜를 
다 함께 구족하는 상태를 성취해야 한다.  
 
그리고 그 성취는 위와 같은 사정과 바탕에서 
그렇게 성취된다. 
 
그래서 그 가장 기본되는 기초내용으로서 
자신이 현실에서 무엇이 있고 
그 무엇이 여기에서 없다가 생겨나는 것이고 
또 사라진다는 등으로 
행하는 분별이 왜 망상분별인가 하는 
사정부터 잘 이해하고 
기본적으로 그런 망상상태에서 벗어나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해를 하는 과정에서 
반대로 앞과 같은 망상적 판단을 행하는 
체계나 방식을 가정적 항변을 행하는 방편으로 취하게 된다. 

따라서 비록 희론이지만, 
언어로 각 내용을 시설해서 
언설과 분별을 행하게 된다. 

그러나 본래는 그런 내용을 거기에서 얻을 수 없는 가운데 
중생제도를 위해서 자비를 바탕으로 
그렇게 생사현실에 임한다는 사정을 
함께 이해하고 수행에 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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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ed--금강삼매경_K0521_T0273.txt ☞금강삼매 
sfd8--불교단상_2561_10.txt ☞◆vpuk9914
불기2561-10-11 
θ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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