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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2561-10-15-법계도기총수록 본문

과거조각글/불기2561(2017)

불기2561-10-15-법계도기총수록

진리와 가치를 고루고루 2017. 10. 15. 13:27



®

『법계도기총수록』
K1502
T1887B

법계도기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 [pt op tr] 법계도기총수록_K1502_T1887B 핵심요약





♣1502-001♧
『법계도기총수록』




법계도기




一―微―塵―中―含―十 初―發―心―時―便―正―覺―生―死 

|         | |               | 

一 量―無―是―卽 方 成 益―寶―雨―議―思―不―意 涅 

| |     | | | |           | | 

卽 劫 遠―劫 念 一 別 生 佛―普―賢―大―人 如 槃 

| | | | | | | | |       | | | 

多 九 量 卽 一 切 隔 滿 十 海―人―能―境 出 常 

| | | | | | | | | |       | | 

切 世 無 一―念 塵 亂 虛 別 印―三―昧―中―繁 共 

| | |     | | | |           | 

一 十 是―如―亦―中 雜 空 分―無―然―冥―事―理―和 

| |         | |              

卽 世―互―相―卽―仍―不 衆―生―隨―器―得―利―益―是 

|                           | 

一 相―二―無―融―圓―性―法 叵―際―本―還―者―行―故 

| |           | | 

一 諸 智―所―知―非―餘 佛 息 盡―寶―莊―巖―法―界 

| | |       | | | |         | 

中 法 證 甚―性―眞―境 爲 妄 無 隨―家―歸―意 實 

| | | |       | | | |     | | 

多 不 切 深―極―微―妙 名 想 尼 分―得―資 如 寶 

| | |       | | | |     | | | 

切 動 一―絶―相―無 不 動 必 羅―陁―以―糧 捉 殿 

| |       | | | |         | | 

一 本―來―寂―無―名 守 不 不―得―無―緣―善―巧 窮 

|           | |             | 

中―一―成―緣―隨―性―自 來―舊―床―道―中―際―實―坐 



* 일승법계도 


제1구: 법성은 원융하여 두 상(相)이 없고[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제2구: 모든 법은 움직임이 없어 본래 고요하다[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제3구: 이름도 없고 형상도 없고 일체가 끊어져[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相絶一切] 


제4구: 증지(證智)로써 아는 것이며, 다른 경계가 아니다[증지소지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 


제5구: 진성은 매우 깊고 극히 미묘하여[진성심심극미묘眞性甚深極微妙] 


제6구: 자성을 지키지 않고 연(緣)을 따라 이루어진다[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 


제7구: 하나 가운데 일체가 있고, 많은 것 가운데 하나가 있으며[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 


제8구: 하나가 곧 일체이며, 많은 것이 곧 하나이다[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 


제9구: 한 티끌 속에 시방을 포함하고[일미진중함십방一微塵中含十方] 


제10구: 모든 티끌 중에도 이와 같다[일체진중역여시一切塵中亦如是]. 


제11구: 한량없이 오랜 겁이 곧 일념이요[무량원겁즉일념無量遠劫卽一念] 


제12구: 일념이 곧 한량없는 겁이다[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 


제13구: 9세와 10세가 서로 상즉하면서도[[구세십세호상즉九世十世互相卽] 


제14구: 흐트러지지 않고 따로 떨어져서 이룬다[잉불잡란격별성仍不雜亂隔別成]. 


제15구: 처음 발심할 때가 곧 정각이요[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 


제16구: 생사와 열반은 언제나 함께 어우러져 있다[생사열반상공화生死涅槃常共和]. 


제17구: 이치와 현실이 흐릿하여 분별이 없으니[이사명연무분별理事冥然無分別] 


제18구: 10불과 보현 대인의 경계이다[십불보현대인경十佛普賢大人境]. 


제19구: 능인의 해인삼매 속에서[능인해인삼매중能仁海印三昧中] 


제20구: 빈번하게 여의를 냄이 부사의하다[번출여의불사의翻出如意不思議]. 


제21구: 보배를 비처럼 내려 중생을 이익되게 함이 허공을 가득 채우니[우보익생만허공雨寶益生滿虛空] 


제22구: 중생이 근기를 따라 이익을 얻는다[중생수기득리익衆生隨器得利益]. 


제23구: 그러므로 행자는 본제에 돌아가[시고행자환본제是故行者還本際] 


제24구: 망상을 쉬어 기필코 얻음이 없고[파식망상필부득叵息妄想必不得] 


제25구: 연이 없는 선교로 여의를 잡아[무연선교착여의無緣善巧捉如意] 


제26구: 집으로 돌아감에 분수에 따라 자량을 얻는다[귀가수분득자량歸家隨分得資糧] 


제27구: 다라니의 다함 없는 보배로써[이다라니무진보以陀羅尼無盡寶] 


제28구: 법계의 진실한 보배 궁전을 장엄하여[장엄법계실보전莊嚴法界實寶殿] 


제29구: 궁극적으로 실제의 중도 자리에 앉으니[궁좌실제중도상窮坐實際中道床] 


제30구: 예로부터 움직이지 않았음을 부처라 이름한다[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 




>>>


오늘은 『법계도기총수록』이 뽑혔다. 
『법계도기총수록』록은 
의상대사의 일승법계도에 대한 주석을 모아 놓은 것이라고 한다. 

일승법계도는 
법성은 원융하여 두 상(相)이 없고[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로 시작해서 

예로부터 움직이지 않았음을 부처라 이름한다[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 
로 끝나는 짧은 글인데 
이에 대해 여러 사람의 다양한 주석을 모아 놓은 것이라고 한다. 

대충 살펴보니 원 내용은 쉬어 보이는데 
역시 일반적인 사례들과 같이 
주석이 오히려 더 복잡해 보인다. 



학교 다닐 때 어떤 시가 나오면 
시 자체는 아름답고 좋아 보이는데 
그 시에 대한 자세한 해석이 더 어렵고 복잡해서 
내용을 읽고도 무슨 내용인지 
잘 파악하기 힘들게 되고  

끝내는 이로 인해 그 시 자체를 
대하기 싫어지게 되는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는데 


뽑힌 글을 놓고 처음 부분만 대강 살폈는데 
역시 그런 느낌을 받는다. 


예를 들어 
아아 님은 갔습니다.
이런 시가 있다면 
이 시에서 시인이 '아'나 '아아아'라고 하지 않고 
'아아'라고 한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다. 

님이 왔다고 하지 않고 갔다고 한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다. 
여기서 님은 이러이러한 것을 가리킨다.
그 이유는 이렇다. 

이런 식으로 해설을 붙이는데 
그럴 듯 하지만,
정작 시인이 그런 생각을 갖고 
그런 시를 썼다기 보다는 
남들이 볼 때 
그렇게 생각된다는 그런 내용들로서 
역시 고난 탐정의 입장에서는 
이들 내용의 옳고 그름을 놓고 
수사하기가 상당히 곤란함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덧붙이면 
이런 평론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어떤 이가 시만 그냥 볼 때는 
미처 보지 못한 부분을 다시 살펴보게 하는 
의미를 갖는 것이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들를 때 
옆에서 작품의 자세한 의미를 소개해주는 가이드가 
있는 상태에서 감상하는 것과 
그냥 감상하는 것은 차이가 있다. 
물론 감상을 복잡하게 하는 면이 있는 것이지만, 
이런 가이드의 설명이 작품 감상을 더욱더 풍부하게 
만들어 주는 기능을 갖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예술품의 감상과정에서 
아는 만큼 보이고 들린다는 것은 
이런 평론이 갖는 중요한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하게 작품을 감상하고 
좋다라고 그냥 지나가는 상태에서 
어떤 측면에서 무엇이 좋고 
무엇이 조금 부족하고 이런 내용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다. 

사정이 그렇지만, 조금 번잡한 점은 물론 있는 것이다. 


◆001,


오늘 원융이란 말이 나와서 
그 반댓말은 무엇일까를 생각해보다가 
새로 말을 만들어냈는데 그것이 방각격력차별 이런 말이다. 

방각은 모나고(方방) 각이 진 상태로 서로 대립하고(각角)
격력(隔歷)은 서로 사이가 띄어진 체 격리된 상태로 떨어져 있고[隔離격리] 
서로 관계가 성기고 차별된다.[歷別역별]

그리고 그 모습이 제각각 서로 다르다.(差別차별) 
이런 의미를 나탸내는 표현이다. 

사전상 원융의 반댓말은 격력이라고 나오는데 
격력이란 말은 일상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말이고 
방각도 억지로 만든 새로운 단어인 것이어서 
차별이란 단어만 빼고 다 사정이 그렇다. 



영어로 '이해하다'는 말을 UNDERSTAND 라고 표현하는데 
이의 반대말을 찾으면 어떻게 되는가. 

up stand
over stand 
under sit 

under lie

이런 식으로 찾게 된다. 

이들 단어는 어떤 대상을 무시하고 외면하면서 
이해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나타내는 표현인 것이다. 

그런데 또 같은 의미를 나타내는 다른 표현을 찾으라고 하면 

up lie
up sit 
over lie
over sit


이런 표현을 사용하게 된다. 


그래서 반댓말을 만들려고 할 때 
한 단어의 구성부분의 짝수갯수에 해당하는 구성부분의 반대말을 찾아 붙이면 
결과적으로는 처음과 엇비슷한 말이 되기 쉽다고 보게 된다. 
다만 이 경우 홀수갯수를 붙이면 조금 달라진다. 

그래서 under stand 각 부분의 반대에 해당하는 말을 찾아 결합시키면 
결국 다시 원래 말과 비슷한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 된다고 보게 된다. 


그래서 위에서  
I uplie you 이런 표현은 I understand you 와 비슷한 표현으로서 
나는 당신을 충분히 이해한다. 
이런 표현인데 
I oversit you 이런 표현보다도 조금 더 친밀한 표현이 된다. 

I understand you 가 일반적으로 
지상의 인간이 하늘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경우 등에 사용한다면 
위 표현들은 그 반대의 상황에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과거에는 남녀간에 단어를 이처럼 구별해 사용했다고 설명하기도 하는데 
요즘은 그렇게 설명하면 
남녀 평등무애 원융사상에 의거해 
헌법소송을 당하기 쉽다. 

그러나 여전히 
부자간에서 아버지가 아들의 사정과 입장을 이해할 때는 I uplie you
직장이나 군대에서 상관이 부하의 입장을 이해할 때는 I oversit you

그 반대로 아들이 부모의 입장을 이해하거나 
부하가 상사나 상관의 입장을 이해할 때는 I understand you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데 

그러나 위 설명에 든 단어들이 
현실에 거의 사용되지 않는 것은 
현실에 그런 경우가 거의 없기에 그런 것일까. 



여하튼 오늘 뽑힌 글에서 처음 원융이란 표현을 사용하는데 
그러나 일반적으로 현실을 대할 때는 
오히려 각 입장이 서로 모나고 대립하고 
차별되고 심각하고 진지하게 서로 손익을 따지고 구별하고 
그래서 시시비비를 따지고 
그 결과 서로 격리된 상태로 
다른 이를 소외시키고 고립시키고 
또 배타적으로 차별하며 대하고 

그렇게 서로 끼리끼리 대하면서 생활해간다고 이해하는데 

그러나 의상대사는 처음에 
법성은 원융하다고 표현하고 2 상이 없다. 
이렇게 처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원융이 무슨 의미인가 
글자만 보면 동그란 형태로[원] 녹아 있다[융] 
이런 의미인 것 같은데 

불교 사전을 참조하면 
모든 현상이 각각의 속성을 잃지 않으면서 
서로 걸림 없이 원만하게 하나로 융합되어 있고 
한데 통하여 아무 차별이 없고 
원만하여 서로 막히는 데가 없는 것을 나타낸다고 제시되어 있다. 


그리고 
사(事-현상)와 이(理-실재,본질)의 완전한 상즉상입(相卽相入), 또는 융합을 주장하고, 
사리(事理)ㆍ사사(事事)ㆍ이이(理理)의 3종 원융으로 하고, 
공가중(空假中)의 3제를 
총별(總別)ㆍ동이(同異)ㆍ성괴(成壞)의 6상원융(六相圓融)으로 구분하는 등, 
상대즉절대(相對卽絶對)의 사고를 강화시키는 것이 특색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원융 [圓融] (종교학대사전, 1998. 8. 20., 한국사전연구사)

여기서도 살펴보면 
설명이 점점 어려워지는 것은 
시와 시에 대한 평론과의 관계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러나 이런 내용들에 대해 
자신이 under stand를 하던지 over sit 를 하던지 up lie 를 하던지 해서 
다른 이들이 왜 각기 이런 내용을 제시하게 되는지 
그 사정을 잘 이해할 필요는 있다고 본다. 
 



여하튼 현실에서는 
남녀가 해변에 놀러가서 탈의실이나 화장실을 사용할 때는 
남녀를 구별하여 따로 들어간다던지 
직장에서 일을 나눠 하거나 월급을 받거나 할 때는 
각기 따로 따로 임하는 사례가 대부분인데 

왜 이런 현실을 놓고 
의상대사는 원융무애 이런 표현을 사용하게 된 것인가.
이런 문제가 본 내용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일이라고 본다. 

참고로 사회는 불법 부정 비리가 판친다고 하는데 
그런데 이 상황에 반대되는 경우를 표현한다면 
역시 불법 부정 비리라고 표현하는 사정도 이해해야 한다. 

뒷 부분을 굳이 해석하면 
부처님의 가르침[불법]은 이치아닌 내용[비리]를 부정한다. 

이런 의미로 보게 되는데 
이 경우는 다행히 단어가 홀수갯수여서 그대로 사용하면 
반대 상황을 나타내는 말이 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선행을 정진한다의 반대상황은 
악행에 정진한다이고 

두 부분을 다 반대되는 어구를 사용하여 결합시켜 
악행을 게을리한다고 표현하면 
오히려 선행을 정진하는 것과 유사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또 선행을 게을리하면 
악행을 정진하고 힘쓰는 것과 유사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세상에서 악을 열심히 행하는 이가 있고 
선을 열심히 행하는 이가 있을 때 
이를 놓고 차별없이 모두 똑같이 대하면 
이것이 평등하게 되는 것인가. 

자신의 즐거움과 이익과 좋음을 추구하는 가운데 
다른 생명에게 고통과 손해와 나쁨을 주는 
악을 열심히 행하면 고통이 상응되고 

그 반대로 
선을 열심히 행하면 복이 상응되는 것이 
오히려 평등한 상태가 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하루에 10 시간 일하는 이나 
하루에 1 시간 일하는 이가  
똑같이 수입을 얻으면 그것이 공평하고 평등한가. 

그렇게 보기는 힘들고, 
10 시간 일하는 이는 
1 시간 일하는 이보다 10 배 정도 이상의 
수입을 얻어야 공평한 상태라고 볼 것이다. 

그런데 그 공평하다는 상태 자체가 
이미 차별이 있는 상태인 것이다. 



그래서 협단천 관찰방식[ 좁고 짧고 얕게 관찰하는 방식]과 
광장심 관찰방식[ 넓고 길고 깊게 관찰하는 방식]에 의한 판단은 
서로 그 결과 내용이 반대가 된다고 보통 보는 것이다. 


세상에서 좋고 나쁨 또는 선과 악의 규범 등이 문제될 때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열심히 성실하게 추구했는데 
그것을 사람들이 왜 나쁘다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up stand 하거나 
over stand 하거나 
under lie 
unde sit 
하려는 자세로 현실에 임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사정은 바로 강간범이 
감옥에 드러눕거나 앉은 상태로 
동료 죄수들에게 자신의 사정을 합리화하며 

하소연하는 사정과 비슷하다. 

강간범 자신도 피해자 상대를 
다른 돌이나 물과는 달리 상당히 애착을 갖고 
관심을 갖고 대했다고 
자신을 합리화하는 경우가 가끔 있는 것이다. 


이런 상태를 어처구니없다고 다들 이해하는데 
정작 일반인 자신들이 평소 무언가 좋은 것을 놓고 
추구하는 과정을 놓고 
그 성격이 이와 같다는 사정은 
꿈에도 up lie 하는 경우가 드문 것이다. 

예를 들어 자신이 한우를 대단히 
사랑하는데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는가. 
또는 자신은 한우보다는 치킨이나 족발을 
사랑하는데 또 그것이 삶에 무슨 문제가 
그렇게 된다고 하는가. 

자신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학교에 가고 
그리고 좋은 직장에 간 다음 
좋은 배우자와 결혼해서 
잘 살아가려고 하는 것 뿐이고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지 않은 이들이 
어려운 상황에 있으면 자업자득인 것으로서 
외면하는 것 뿐인데 
또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는가.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서 
자신의 문제를 up lie해서 
도무지 이해하려고 하지를 않는 것이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 않다. 


여럿이 있을 때 혼자 짜장면을 시켜 하나 먹는 상황에서 
다른 이들이 자신이 먹는 것을 자꾸 흘깃거리고 지켜본다고 
다른 이를 비난하는 경우가 많은데 
앞의 상황이나 자신의 상황이나 
모두 그 성격이 같은 것이다. 

결국 
자신이 배가 고프다고 빵가게의 빵을 훔쳐 달아나는 장발쟌이나 
사흘 굶은 장뱔쟌이 빵을 훔쳤다고 붙잡고 고발하는 빵집 가게 주인이 
있다고 할 때 

물론 현실에서는 이 가운데 앞 경우만 문제라고 
보는 것이지만, 
그 행위의 실질 성격은 다 같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훔치는 것이나 
인색하여 도무지 다른 이에게 베풀지 않으면서 보시 수행을 행하지 않는 것
이것이 실질적으로 같다는 것을 
잘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정이 왜 그런가는 
위 반댓말 만드는 관계를 종합적으로 살펴서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남의 것을 훔치거나 뺏는 것을 열심히 한다. 
=>
남에게 아낌없이 베풀어 주는 것을 게을리한다. 




여하튼 여기서 장발쟌은 
배가 고픈 가운데 자신보다 더 안타까운 노파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도움을 주지 않고 
자신의 굶주림만 먼저 해결하려고 하는 가운데 
빵가게 주인에게 손해를 끼치는 것이 문제라고 보는 것이고 

빵가게 주인은 
주변에 사흘 굶은 이가 있는데도 
돈을 주지 않으면 빵을 주지 않으려고 하고 
더 나아가 빵을 가져가서 붙들려 오면 
소설에 나오는 신부처럼 잡혀 온 장발쟌에게 
음료수도 먹으라고 했고 거기에 빵가게에서 할 수 있는 일자리도 주었는데 
왜 빵만 그냥 들고 갔는가면서 
이런 것을 모두 제공해주려 하지 않은 것이 문제점이라고 보는 것이다. 


뒤에 제시한 불법 부정 비리 이런 차원에서는 
앞에 제시한 현실의 불법 부정 비리 사태를 놓고 
이런 문제를 보는 한편, 
다시 다음과 같은 게송을 제시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
죄와 복이 모두 공하여 머물 바가 없네 . 

罪福皆空無所住
죄복개공무소주
[ 비바사 여래 ]

모든 선법을 일으킴이 본래 환이고 
모든 악업을 만드는 것이 역시 환이네 

起諸善法本是幻 造諸惡業亦是幻

기제선법본시환 조제악업역시환

[ 시기 여래]

죄와 복이 환과 같이 일어나고 사라지네 

罪福如幻起亦滅
죄복여환기역멸
[ 비사부 여래]

과거의 부처님들은 
현실적으로 첨예한 차별을 낳은 
죄와 복의 문제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데 

왜 차별이 많은 현실상황을 놓고 
그렇게 표현하는가도 이해해야 하지만, 


다시 이런 내용을 놓고 
현실에서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임해야 하는가하는 문제도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앞의 내용을 놓고 
본래 죄와 복이 차별없이 공하고 환과 같으니, 
현실에서 어떤 것을 어떻게 취하고 
어떤 것을 어떻게 추구해나가야 하는가를 
잘 헤아려야 한다고 본다. 


어차피 모든 것이 차별없이 공하고 환과 같은 것인데 
이런 기본 바탕에서 수행자가 
갖는 의문점은 다음이다. 

어차피 모든 것이 차별없이 공한데 
왜 그런 상태에서 
매번 수행을 통해 선을 행하여 무량한 복과 지혜를 얻지 않고 

왜 하필이면 악을 취하고 악행을 하여 

고문대에 묶여서 지옥 중생이 당하는 고통을 당하는가. 

왜 차별이 없는 가운데 굳이 하필이면 
매 경우 그렇게 임하여 무량한 고통에서 
지내는가. 

이것이 수행자가 갖는 의문점인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수행을 하지 않아서 어차피 차별없이 공한 바탕에서 
굳이 그렇게 생사고통을 받아나가는 입장을 up lie 해 
이해해본다면 

먼저 
1 처음 수행방안으로 제시되는 각 내용을 행하는 것을 
그들이 대단히 힘들고 행하기 어려운 일로 여긴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즉 좋음을 아끼지 말고 필요한 상대에게 아낌없이 베풀라거나 [보시]
상대가 집착하는 좋음 즉 상대의 생명, 신체, 재산, 가족, 명예..이런 것을 
자신의 좋음을 얻기 위해 함부로 침해하지 말라고 하거나 [ 정계]

반대로 자신의 생명 신체 재산...등을 다른 이가 함부로 침해할 때 
자신이나 사람 생명 목숨 이런 등등에 대한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갖지 않음]
그것을 평안히 참고 
상대에 대한 미움 원망을 갖지 않고 
자비심을 일으키고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하거나 [안인]


등등의 수행방안을 제시하면 

하나같이 그 상황에서 그런 행을 하는 것을 

끓는 물에 자신의 몸을 담그라거나 
돌아가는 톱날에 자신의 손을 밀어 넣어 한겹한겹 잘라내라고 요구한 것처럼 
그것을 도저히 자신은 행하기 힘들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어차피 차별없이 이것이나 저것이나 공하다는 것을 이해해도 
자신의 탐욕과 분노를 쫒아가는 행위는 대단히 민첩하게 임하지만, 

위와 같은 내용은 대단히 행하기 어렵게 여기고 
아예 그런 수행방안은 외면하고 무시하거나 
하더라도 마지못해 더디게 행해가면서 
생을 살고 마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그런 자세로 인해 
이후 상황이 바뀌어서 
자신이 묶여 끓는 물에 자신의 몸을 담가야 하는 경우거나, 
톱날에 손과 발을 밀어 넣어 한켜 한 켜 잘라내게 되는 상황에서는 

또 그것대로 그것이 바로 차별없이 공한 상태라는 것을 
올바로 관하지 못하고 
그대로 그 상황에서 생생하게 지극한 고통을 겪으면서 
비명을 질러대는 것이다. 



현실에서 어떤 이가 몸이 아프다고 
산 잉어를 잡아와서 솥에 넣고 끓이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렇게 솥에 산 잉어를 넣고 끓이려고 하면 
그 잉어가 온 힘을 다해서 뛰는데 
병 치료를 위해서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 
솥뚜껑을 꽉 힘주어 닫고 끓이는 상황이 현실에 가끔 있는데 

그런 상황에 그 잉어가 잉어가 아니고 자신이라고 하면 
위 내용이 그대로 적용이 된다고 보는가 아니라고 보는가. 
그것이 문제다. 



그래서 평소 현실에서 수행방안을 따라 행하는 것과 
또 그렇게 행하지 않아서 이후 축생 아귀 지옥세계에서 고통을 당하는 것 
이 둘이 다 힘든 것은 마찬가지이고 
또 이 둘이 다 차별없이 공하다는 것도 마찬가지인데 

그래도 그나마 수행방안을 행하여 
그런 것을 미리 예방하는 것이 
예방하지 않고 매번 극단적인 상황에서 
그것을 극복해 벗어나와야 하는 뒤의 경우보다는 
그래도 낫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하기 힘들다고 여기게 되는데에는 
3 가지 문제정도가 있다고 보게 된다. 


우선 현실을 살아가는 입장에서 
이 두 내용이 서로 그렇게 관련이 된다는 사정을 
아예 under lie 하고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농부가 봄에 씨를 뿌려서 
가을에 열매를 수확하는 과정을 옆에서 보면서 

봄에는 
왜 쓸모없는 씨를 그냥 밭에 버려 썩히는가 
이렇게 문제를 삼고 

이에 대해 농부가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 그런다고 답하면 

어제 씨를 뿌린 것을 보고 나서 
오늘도 지켜보고 다음날도 지켜보고 또 다음날 다음날 이어서 
아무리 지켜보고 또 지켜보아도 
열매가 맺는 것을 보지 못하는데 
무슨 엉터리 주장을 하는가. 
이렇게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작 시일이 지나 
열매가 맺게 될 때는 
그가 다시 나타나 이 열매가 왜 홀연히 여기에 이렇게 나타났는가. 
기이하다고 하면서 연유를 묻게 되는데   

농부가 그것이 전에 봄에 뿌린 씨 때문에 그렇게 된것이라고 
설명하게 되면 

그는 다시 그 열매는 
어느날 일어나보니 밭에 그런 열매가 그렇게 홀연히 나타난 것 뿐이지, 
그것이 무슨 과거에 농부가 밭에 씨를 뿌려 썩힌 일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겠는가. 
씨와 열매는 서로 모습이 달라도 
너무 다른 것들인데 
이치에 닿지도 않는 이야기를 한다고 하면서 
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물론 현실에서는 비유로 든 내용처럼 
씨를 뿌려 곡식을 거두는 내용을 놓고서는 
대부분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나머지 수행이나 그 수행을 통한 과보나 
그 반대의 경우에 반대의 과보를 얻는 관계에 대해서는 
대부분 앞 비유와 같은 형태로 
현실에 임하는 것이 대부분인 것이다. 



그런데 마치 
어떤 이가 
씨와 열매를 놓고 
그것이 서로 모습도 다르고 시기도 다르다면서 
이들이 서로 관계가 없다고 억지주장을 할 때 
농부의 입장에서 말로는 그 상대를 
이해시킬 도리가 별로 없다고 보게 되듯, 

수행과 관련하여 
좁고 짧고 얕은 협단천 관찰을 통해서 
억지 주장을 하는 경우도 
사정이 마찬가지가 된다.  

그것은 씨 뿌리고 나서 열매가 안 나타나는 상태에서는 
그 씨로 인해 아무런 결과도 나타나지 않는다고 
억지 주장을 하는 경우도 그렇고 

나중에 열매가 나타났지만 
그러나 그 상태에서는 다시 그 원인이라고 할 과거의 씨가 보이지 않기에 
모두 그런 협단천 관찰에 바탕해서 억지 주장을 하는 상대를 
이해시키기기 힘든 사정이 있는 것이다. 






2 번째 문제점은 
다시 앞 사정을 이해해도 
또 다시 다음과 같은 억지 주장을 행하는 경우가 문제가 된다. 


즉 봄에 씨뿌리는 일이 가을에 열매를 맺는 것과 관계가 있다고 해도 

봄에 고생을 하고 그로 인해 가을에 좋음을 얻는 것이나 
봄에 고생하지 않고 편하게 지낸 다음 
가을에 좋음을 조금 얻지 못하는 것이나, 

어차피 합산하면 마찬가지 아닌가 하는 억지주장을 한다는 점이다. 



이것도 앞의 경우처럼 다시 협단천관찰을 통해 
대충 좁고 짧고 얕게 헤아리면 
마치 그런 것처럼 여겨지기 쉽다. 

예를 들어 
산수를 비유하면 
x 나 x2 (제곱)이나 x3 (3승)이나 
그 x 에 1 만 넣으면 다 답이 1 이 된다고 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렇게 짧게 1 만 딸랑 넣어보고 헤아리지 말고 
이후 1,2,3,4,5 이런 수를 계속 넣어서 관찰해보면 
그 차이가 계속 커져 나가는 것을 보는 것이다.  


처음 위 두 내용을 놓고 이것이 서로 마찬가지라고 여기는 입장은 
결국 다음과 같이 억지 주장을 하려는 것이다. 


처음 어떤 수행을 해서 자신이 다른 생명에게 + 좋음을 주는 것은 
결국 자신에게는 - 손해가 되는 것이고 
그리고 나중에 그로 인해 가을에 + 좋음을 얻는 것은 물론 그것만 보면 + 좋음이지만, 
결국 이것을 모두 합치면 0 이 되는 것이다. 

또 그와 반대로 
자신이 당장 + 좋음을 얻기 위해서 
다른 이를 해치고 손해를 끼쳐 - 나쁨을 준다면 
일단 그로 인해 자신이 좋아하는 좋음을 얻는 것이므로 + 좋음인데 

그로 인해서 나중에 감옥에 간다거나 하는 등등으로 
가을에 - 나쁨을 얻는 것은 물론 - 나쁨이지만, 
이 둘을 합치면 결국 0 이 되는 것은  
앞과 마찬가지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언뜻 이 내용을 살피면 그럴 듯 해보이는데 
이것이 엉터리 산수식인 것이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고 인정한다고 해도 
그래서 그 두 경우가 다 마찬가지라고 한다면 
왜 마찬가지인데 앞의 방안을 취하지 않고 
하필이면 굳이 매번 뒤의 방안을 취하는가 물어보면 

역시 이 경우에도 다시 협단천관찰방식을 동원해서 
그렇게 현실에 임한다는 사정을 보게 된다. 

즉 그는 앞의 경우에서는 
수행을 한다면 
당장 자신이 - 나쁨을 받고 이를 견뎌야 하고 
+ 좋음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데, 

그러나 그로 인해 
나중에 + 좋음을 얻는다는 것은 
그러나 그 순간에는 말뿐이고 불확실한 것 아닌가. 


그러나 뒤의 경우는 
이와 또 다르지 않은가. 

그래서 설령 이 둘이 다 마찬가지라고 해도 
앞의 경우는 전혀 행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고 
반대로 
뒤의 경우만 열심히 추구하려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 처음 억지 주장처럼 
길게 놓고 볼 때 
이 두 경우가 다 마찬가지라고 한다면 
이 경우나 저 경우나 문제가 안 된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사정이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이후 단계 단계를 밟아나갈 때마다 
앞의 경우는 
서로 무량한 좋고 좋음을 주고 받는 관계가 되어서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구족하는 극락의 상태를 향해 나아간다면 

뒤의 경우는 
이제 서로 무량한 고통과 나쁨을 주고 받는 관계로서 
무량한 고통과 어리석음에 묶인 지옥 아귀 축생의 상태를 향해 
나아가는 차이가 나타난다고 
이 둘의 차이를 설명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 좋음을 주어서 하나의 + 좋음을 돌려받는 것과 
하나의 - 나쁨을 주어서  하나의 - 나쁨을 돌려받는 것을 
서로 같다고 본 것부터가 잘못인 것이고 

처음의 내용이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두번째 세번째로 나아갈 때마다 
그 관계로 서로 계속 같은 것이 된다고 본 것이 
또 엉터리인 것이다. 


현실에서 
오늘 씨를 뿌리는 이가 씨를 뿌리면 
그 씨를 하나 뿌렸기에 가을에 열매를 하나 얻는 것이 아니고 

볍씨 하나를 뿌리면 
가을에는 그 볍씨 하나에 33개의 볍씨를 얻는 것이라고 
보통 보지 않는가.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여하튼 이런 관계로 점차 차이가 나타나기에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양쪽의 격차가 더욱더 심해진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한쪽은 처음 물방울 하나의 좋음으로 바다와 같은 좋음을 얻는 상태를 향해 가고 
무량한 시간 동안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구족하는 상태가 되는데 반해 

다른 쪽은 역시 마찬가지로 물방울 하나의 나쁨으로 바다와 같은 나쁨을 향해 가고 
무량한 시간 동안 무량한 고통과 어리석음에 묶여 지내야 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알고보면 
이것이 각 경우마다 그 구체적 사정에 맞추어 
각 개인이 행한 업에 따라 과보를 받는 관계에서 
사실은 공평한 일이라고 보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고 
선을 열심히 닦아 행한 경우나 
그렇지 않은 경우나 
결과가 다 같다면 
그것이 오히려 문제라고 보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10 달 동안 공부를 꾸준히 열심히 한 학생이나 
한 시간도 공부를 안 한 학생이 
시험을 보고나서 그 시험 성적이 같다면 
그것이 오히려 더 부당하고 이상한 것 아닌가. 


그런데 이 경우에도 
협단천 관찰방식을 통해 
당장 자신의 어느 한 측면의 좋음에만 집착해서 
초점을 거기에 맞추고 온 신경을 그곳에 쏟으면서 
현실을 대하는 입장에서는 

이 관계나 이 각 내용의 의미를 그렇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3 번째 문제점은 
수행자가 수행을 할 때 


처음 다른 중생들에게 
다른 중생들이 집착하는 + 좋음을 아낌없이 베풀거나 

다른 생명을 해치지 않는 계율을 지키거나 

또 자신의 생명이나 신체가 침해당할 때 평안히 참거나 하는 
보시 정계 안인 정진 정려 반야 ..등의 수행을 행할 때 

수행자가 이런 수행을 고통스럽게 행하는 것이라고 
오해하는 점이 또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경제학에서 어떤 장삿꾼이 장사를 할 때 
이윤을 많이 얻으려면 
자신이 물건을 팔아서 얻게 되는 
판매수입의 액수를 크게 하려고 노력하는 한편 

그런 과정에서 들어가는 비용은 비용대로 
가장 적게 되도록 노력해야 
그 차액으로서 이윤이 크게 된다고 여기고 
그런 방안을 장삿꾼이 취할 가장 현명한 방안이라고 
제시하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극대이윤 = 극대 수입 - 극소비용 
이렇게 관계를 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장삿꾼은 
해변에서  소금을 구할 때는 소금값으로 헐값으로 구매한 다음 
산골에 들어가서는 
그 소금은 단순한 소금이 아니고 
소와 금이 결합된 것이라고 우기면서 
이제는 소와 금의 값을 받아서 팔려고 노력을 하고 


다시 산골에서는 
인삼을 그냥 그곳의 인삼값으로 헐값에 구매한 다음 
다른 곳에 가서는 그 인삼이 인[사람]과 삼이 결합된 것이라고 우기면서 
한 뿌리마다 사람값에 다시 삼값을 더해서 팔려고 노력을 하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그래서 이처럼 각 곳에서 각 상대나 각 시기상황에 맞추어 
교역조건을 달리해서 자신에게 
가장 이익이 되는 입장을 매번 바꾸어 취하면서 임해야 
결과적으로 자신이 얻을 이익을 크게 얻게 되는 현명한 장삿꾼이라고 보고 

반대로 그와는 반대로 행하는 이는 
파산을 향해 나아가는 엉터리 장삿꾼이라고 평가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과연 
광장심관찰을 통해서 이를 
넓고 길고 깊게 살필 때도 
과연 그렇게 되는가가 문제다. 

그렇다면 그런 장삿꾼 계산을 통해서 
현실에 민첩하게 임하는 이들만 
극락세계나 하늘에 가득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과연 그럴 것인가가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세속에서 행하는 협단천 관찰방식과 
수행자가 취하는 광장심 관찰방식의 
차이인 것이기도 하다. 



이 대목에서 갑자기 
유대인 수용소에서 별 쓸모없는 유대인들을 데리고 나와서 
자신의 공장에서 쓸데없는 일만 하게 하고 
결국 파산한 쉰들러 공이 생각나고 

한편 유대인이 죽거나 말거나 
시체에서 거둔 금잇빨과 금테 안경 가죽등을 모아 
새로운 상품을 제조해 수입을 올린 ss 출신 기업인이 생각나는데 

여하튼 이 문제가 바로 그런 문제와 관련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윤 = 수입 - 비용의 계산식에서 
수행자가 수행에 임할 때는 
일반적으로 수행자가 
수행결과를 얻는데 들이는 수행자의 비용이나 희생이라고 보기 쉬운 
그런 수행을 
수행자 자신은 유희 자재 신통으로 임하는 것이고 

따라서 수입 - 비용의 계산식에서는 
비용 자체도 마이너스  (-) 형태로  무량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는 처음 수행을 하는 상황에서부터 
무량한 수입을 얻어나가는 상태로 임하는 것이어서 

결국 비용 항목을 무량한 '-' 마이너스로 만들어 
그 자체에서부터 무량한 복덕을 얻고 

다시 이를 통해서 그 결과로서는 
또 무량한 복덕과 지혜자량을 얻는 상태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그 관계를 간단히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처음에 수행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내용도 역시 잘못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가운데 
일반적인 경우는 
어떤 때는 이렇게 잠시 수행도 해보고 
어떤 때는 잠시 또 달리 하면서 
현실에서 이리저리 헤메는 가운데 
마치 좁쌀이 이리저리 구르는 형태로 이익을 취해 임한다면 


수행자는 매 단계를 나아갈수록 
눈덩이가 불어 나듯이 
그가 거두는 복덕과 지혜 자량의 크기가 늘어나서 

나중에는 그로 인해 얻는 무량한 수명과 복덕 지혜의 크기는 
매 순간 태양이나 은하계가 한 번 도는 정도로 
서로 차이가 나타나게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구가 한번 돌 때 
좁쌀도 한 번 돌겠지만, 
그 차이가 크다고 보듯 

이제 수행으로 인한 차이는 
태양이나 은하 전체가 한 번 도는 것과 
좁쌀이 한 번 구르는 것의 차이처럼 
크게 벌어지면서 
그렇게 무량하게 나아간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지옥을 향해 
무량한 고통을 향해 나아가는 상태도 
역시 그 반대방향으로 
그렇게 무량하게 나아가게 된다는 것을 
함께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현실에서 어떤 한 주체가 
자신의 소원을 놓고 
그것을 뜻대로 성취하는 것이 좋다고 보고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취하는 방안이나 
자세와 모두 깊이 관련이 되는 것이다. 


이 경우 각 주체는 
당연히 자신의 희망하는 바가 
자신의 뜻대로 성취되는 것이 좋다고 보는 가운데 
이 성취를 위해 
기본적으로 다양한 if 문제를 대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앞에 제시한 내용들이 
모두 앞과 같이 그에게 먼저 제시되는 것이다. 

즉, 
if 자신이 지금 이것을 취하면 --> 나중에 어떻게 될 것이다. 
if 자신이 지금 이것을 취하지 않고 양보하거나 베풀면 --> 나중에 어떻게 될 것이다. 

if 자신이 지금 상대를 해치면 --> 나중에 어떻게 될 것이다. 
if 자신이 지금 상대를 해치지 않으면 --> 나중에 어떻게 될 것이다. 

if 자신이 지금 이 부당한 고통을 참지 않고 응징하고 보복하면  --> 나중에 어떻게 될 것이다. 
if 자신이 지금 이 부당한 고통을 평안히 참으면  --> 나중에 어떻게 될 것이다. 



이런 다양한 관계식이 앞에 
수행과 관련된 내용처럼 제시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가운데 어떤 if 문장은 
당장 좋음을 자신에게 주는 내용도 있고 
그렇지 않고 나중에 좋음을 준다고 하는 것도 있고 
당장 지극히 고통스럽고 힘들고 나쁘다고 보는 것도 있고 
나중에 그렇게 지극히 고통스럽고 힘들고 나쁘다고 제시되는 것도 
섞여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그 각 내용이 
지금 당장 비교적 확실하다고 스스로 여기게 되는 내용도 있고 
어떤 것은 아직 자신에게 불확실하고 잘 이해되지 않지만, 
다만 그런 내용을 제시한 상대를 믿고 그렇다고 받아들이고 대하게 되는 내용도 
섞여 있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이런 다양한 IF 문장이 제시하는 관계식과 
그 내용을 대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내용들을 놓고 
자신이 그 사정을 헤아려 보는 가운데 


결국 삶에서 고통을 제거하고 
좋고 좋은 내용을 많이 얻어내 
쌓아가는 것이 현명한 자세인데 

여기에서 각 if 문장이 엇갈려 제시될 때 

과거 임진왜란을 앞에 두고 선조대왕이 취한 자세나 
여우에 쫒긴 꿩 자세를 취하고 

협단천 방식으로 적당히 대강 헤아리고 나서 
자신이 희망하는 내용만 붙잡고 
자기 최면의 상태로 
또는 낙관적인 입장으로 
마냥 임하려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것은 if 문장의 내용을 놓고 
일일히 옳고 그름을 헤아리거나 살피는 것이 어렵고 복잡한 가운데 

어떤 if 구문이 자신이 지극히 싫어하는 어떤 나쁨이나 고통을 
지금 당장이거나 나중에 준다고 제시받으면 
그것을 생각하고 헤아리는 것 자체가 싫다고 여기는 가운데 

오로지 자신이 희망하는 좋음만 붙들고 생각하면 된다고 여기면서 
마냥 임하려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꿩은 여우가 나타나 자신을 해치려 하는 경우가 되면 
그저 모래에 자신의 머리를 박고서는 
그런 일은 없다고 여기면서 
자신이 고집하는 것만 계속 붙들고 임하는 가운데 
여우가 다가와 자신의 몸을 다 파 먹는 상황까지도 
그렇게 임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IF 문제를 놓고 
어차피 눈은 소리를 못 듣고 
귀는 색을 못 보는 것처럼 
경전에서 제시하는 하늘이나 아수라나 아귀 지옥과 같은 상태는 
현실에서 살아가는 이가 취하는 행위나 자세로 인해 
그런 세계에 자신이 들어가서 무량하게 살아가게 된다는 내용을 
이해해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냥 자신이 희망하는 내용을 붙잡고 
그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하면서 임하려는 경향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은 앞의 농부의 비유와 같이, 
오늘 어떤 수행을 하고 어떤 씨를 뿌리면 
그로 인해 무량한 겁에 걸쳐서 복덕과 지혜를 구족하게 된다거나, 

반대로 그런 수행을 하지 않고 
오늘 탐욕과 분노 어리석은 견해에 바탕해 무엇을 행하면 
또 그로 인해 무량한 겁에 걸쳐서 고통을 쉼없이 주고 받는 상태가 된다는 
내용이 제시될 때 

그런 IF 문장을 대하면서 
이 관계를 그렇게 이해하지 못하는 가운데 
과거 임진왜란 직전의 선조대왕이나 
여우가 눈 앞에 보일 때 모래에 머리를 박고 숨는 꿩과 같이 
이 IF 문제를 대하고 무시하고 
자신의 눈에 당장 보이는 현실에만 초점을 맞추고 
외면하는 경향을 대부분 갖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당장 
지금 가게 매상을 얼마 올리는 것이나 
수입을 얻고 손해를 보지 않는 것이 중요한 문제이지 
그런 것이 무슨 문제인가 하면서 
정작 자신의 손과 발이 끊기거나 눈이 뽑히거나 하지 않거나 
하는 차이를 낳는 문제는 외면해 버린다는 점이다. 



그런데 또 그렇게 해서 그런 과보를 받는 상태가 되면 
당사자는 또 그 관계를 그렇게 보지 못하고 
그 차별의 모습들이 이유도 알 수 없는 가운데 
그렇게 자신에게 나타나 
대단히 억울하다고 여기며 대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바로 그러한 사정들로 인해 
그렇게 각 경우가 되는 것이 
전체적으로는 공평하고 평등한 상태가 되는 것이라는 점도 
또 함께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어떤 이가 다른 이들이 어떻게 행하면 좋겠다고 보게 될 때 
그 내용을 무조건 상대에게 규범으로 제시해서 
이것이 곧 규범이고 선의 내용이라고 이해하는 문제가 있다. 

이 경우 그 상대도 자신에게 그런 요구를 하면서 
그것을 규범이라고 이해하는데 

문제는 각 입장에서는 서로 
그런 것을 자신이 하기를 원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가 무언가를 한다면 
자신이 하기는 싫지만, 
다만 그것이 어떤  의무나 규범으로 주어지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떤 피해나 고통을 받게 되기에 
어쩔 수 없이 그것을 해야 한다고 하면서 
의무의 형태로 그것을 대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그것을 원하지 않기에 
하지 않으려고 하고 
그런 자신을 자신은 합리화하는 한편 

정작 다른 상대가 그런 규범을 행하지 않으면 
그것을 비난하면서 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사회에서 보는 것처럼 
각 주체가 서로간에 대립하면서 
악순환의 과정을 무한히 밟아나가는 모습인 것이다. 



결국 한 주체는 사회에서 
자신의 본능적 충동에 바탕해서 
자신의 좋음을 추구하고자 하는 희망을 갖고 임하는 한편 Id[Es] 

사회적으로는 그렇게 행하지 말고 
다른 상대를 배려하고 
온 인류나 온 생명에게 나쁨을 가하지 말고 
모두 좋음을 주는 방향으로 행해야 한다는 요구를 하는 

수퍼에고[Super ego]의 사이에 끼어서 
현실을 대하는 가운데 

그것을 각 경우마다 적절히 타협시켜 섞어서 
자신의 외관적인 행위나 태도를 취하고 
또 내심은 내심대로 달리 상태를 만드는 것이 

현실의 자신의 자아[Ego]의 정체이고 
삶의 방안이라고 이해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바탕에서 
위 각 IF 문제를 대하는 가운데 
현실에 임하는 것이 바로 현실의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super ego 란 말이 나와서 생각이 나는데 

자외선의 반대는 무엇인가 
이런 문제가 나오면 적외선 이렇게 말하게 된다고 본다. 

결국 가시광선을 
빨주노초파남보 이렇게 말할 때 
보라색 밖의 파장 내용과 
빨간색 밖의 파장 내용을 각기 가리키는 말로서 
한글에서는 모두 ( ) 외선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 것인데 

영어는 그런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서 
자외선은 ultra +  violet 이라고 하는데 
적외선은 red 앞에 ultra 를 붙이지 않고 
그렇다고 super 를 붙이지도 않고 hyper 를 붙이는 것도 아니고 
무언가를 붙인다는 것이다. 

어제 이 단어가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았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이런 것을 또 퀴즈로 한번 풀어보아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왜 그렇게 표현을 달리 하게 되는가 
그 사정을 또 up lie 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vdkw1091

◈Lab value 불기2561/10/15

댓글내용 








문서정보 ori http://buddhism007.tistory.com/3663#1091 
θθ

 





◆vvai1488

◈Lab value 불기2561/10/15/일/18:13




○ [pt op tr]  mus0fl--Michel Berger - Les Enfants Chantent Toujours Debout.lrc 




♥ 잡담 ♥원융과 방각격력차별과 차례의 의미 
 

어제는 『불설아미타경』이 뽑혔었는데 벌써 3 차례나 살핀 경전이어서 
어떻게 해야하나만 생각하다 올리지 못했다. 


일단 조금 쉬었다가 
이 문제를 같이 살피기로 하자. 








mus0fl--Images - Corps À Corps.lrc 


앞에서 적외선 자외선의 문제를 살폈는데 
가시광선이 400~ 780 의 파장을 의미하고  
그 가운데 파장이 긴것이 빨간색이고 
파장이 짧은 것이 보라색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긴 파장 780 이상에 해당하는 적외선은 infra + red 라고 표현하고 
짧은 파장 400 미만에 해당하는 자외선을 ultra +violet 이라고 표현한다는 것이다. 

사실 언어 표현은 각국별로 사정이 다 다르기에 
외국어 배우려는 입장에서는 이것을 
일일히 시시비비를 따지는 자세로 임하면 
언어 공부는 일찍 포기해야 한다고 본다. 

어학은 어학이지 수학이나 논리학이 아닌 것이다. 
왜 나무를 나무라고 하지 tree 라고 표현하는가라고 
미국인에게 물으면 너야말로 왜 tree 를 tree 라고 하지 
나무라고 하는가 묻지 않겠는가. 


그런데 바로 위 내용에 
infra red 나 ultra violet 들과 관계하는 내용들이 있을 때 
왜 당신은 그런 내용을 거기에서 눈으로 보지 못하고 
없다고 이해하는가. 
이 내용을 먼저 잘 음미해야 한다고 본다. 

여기서 이미 앞에서 희론으로 이들 언어의 문제를 
넌센스 방식으로 살폈으므로 
이 문제를 이렇게 보기로 하자. 

400 미만은 사공공 미만인데 
사공이 이들처럼 짧게 보고 나아가는 상태를 데리고 가면 
울더라

780 이상은 칠판공이 상당히 길게 보고 임하는 이들을 

이뻐라고 해서  780 이상부터 무량한 상태까지 
칠판에 각기 원하는 각 세계를 적을 때마다 
그곳으로 바로 갈 수 있는 차표를 적어준다. 
이렇게 보는 것이다. 

관세음보살님이 제공해주는 대자비주 다라니가 
78 개인 것도 참고해야 한다고 본다. 

여하튼 
infra red 는 상당히 긴 파장인데 
이쁜 이유는 그 파장들이 따뜻함도 느끼게 해주는 것이고 

ultra 는 사정이 그 반대인 것이다. 
생명을 죽이고 해치는 기능을 하는 짧은 파장들인 것이다. 

다만 이는 넌센스 희론 차원에서 제시하는 내용들이니 
물리학계나 언어학계에 이런 보고는 삼가해주시공... 






결국 눈으로 소리나 향기를 얻지 못하고 
그런 바탕에서 무엇이 있다 없다를 놓고 
문제삼고 따지는 자신의 현실 상태를 스스로 이해해야 하고 

현실에서 자신이 직접 당장 보지 못한다고 해서 
그런 것이 일체 없다고 임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앞에서 살핀 것처럼 
좁고 짧고 얕은 협단천 관찰 방식에 바탕해서 
대단히 문제가 많은 if 문장을 구성해서 
이를 놓고 판단하는 상태가 된다는 사정을 
이해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도레미파솔라시도에서 
미파솔 하는 소리가 
고체인가 기체인가 액체인가 에너지인가. 
이렇게 문제를 내면 
무엇이라고 답하게 되는가. 

여하튼 시공간과 관련해서 다양한 문제가 제시되고 
세계의 구조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눈으로 대하는 색깔과 
이를 통해 확인하는 자신이나 세계의 정체가 
과연 어느 바탕에서 그런 것인가를 
먼저 잘 확인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처음 자신이 좋다고 보는 내용을 놓고 
그 소원 성취를 원할 때 

왜 그 소원 성취가 현실에서 힘들고 
그렇게 힘들게 성취를 하더라도 
또 이후 곧바로 무너지게 되는가. 

그 사정을 위 if 구문의 형식을 통해서 
잘 이해하지 못하면 
매번 매 순간 수행을 통해서 
수행의 결과를 얻어내야 한다고 제시하는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반대의 내용만 붙잡고 늘어지게 마련이라고 
보는 것이다. 


처음 자신이 어떤 내용을 놓고 좋다고 보고, 

다시 자신과 관계하는 상하 평등한 상대를 각기 대하는 가운데 

자신보다 높은 상대는 자신을  어떻게 대해주면 좋겠다고 희망하고 
또 자신보다 낮은 상대는 상대대로 자신을 어떻게 대해주면 좋겠다고 희망하고 
또 자신과 대등한 상대는 그 상대대로 자신을 어떻게 대해주면 좋겠다고 희망하고 

이 내용을 모두 나열한 다음 
그 상대에게 그것을 가져가서 제시하고는 
그것을 세상의 규범이나 윤리의 내용이라고 제시하게 된다는 사정을 
보았다. 

이것이 자신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희망에 가장 들어맞는 것이지만, 
바로 그런 사정때문에 사실은 엉터리인 것이다. 

예를 들어 
자신이 왕이면 신하에게 희망하기를 신하가 자신에게 자신만을 위하여 오로지 충성만을 다했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것이고 
자신이 신하이면 왕에게 희망하기를 왕이 어질고 덕이 있어서 자신이 문제가 조금 있더라도 그런 자신을 배려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바라고 
또 자신의 친구에게는 친구대로 상대가 자신에게 성실하고 속이지 않고 신의와 약속을 지켜주었어면 좋겠다고 바라고 
그것을 각기 상대에게 윤리 규범의 내용이라고 제시하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 

나머지도 다 마찬가지다. 

물론 그 각 입장에서 상대가 그렇게 자신을 대해주기를 
바란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문제는 자신이 거꾸로 그런 내용들을 다른 상대로부터 
요구받았을 때 
그것을 과연 그렇게 들어주기를 원한 것인가가 
또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은 그런 것을 원하지 않는데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렇게 임하지 않으면 
사회에서 그에 대한 응징이나 보복을 당하게 될 뿐만 아니라 
사회에서 소외되고 고립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바로 이런 현상을 그가 삶의 어느 단계에서 의식하게 되는 것이 
바로 super ego 의 내용인 것이다. 


그러니 그런 상태에서 
한 주체가 현실에서 외관적으로 취하는 말이나 행동 자세는 
사회에서 요구되는 그런 규범이나 윤리적 내용에 일치하는 형태를 취해서 
그로 인한 이익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한편 

속 마음으로는 원래 자신이 하고 싶어한 
충동적 욕구를 그대로 간직한 가운데 

이 두 내용이 서로 갈등 대립된 내용이고, 
현실적으로 어느 하나를 일관하기 어려운 사정 때문에 
이 두 내용을 적당히 섞어 결합시키고 
현실에 적절히 타협해서 
임하는 상태가 대부분이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정한 경우에 이 갈등이 너무 커지면 
그것이 그 주체에게 각종 스트레스를 주고 
히스테리 현상을 일으키게 된다고 
심리학에서 이런 내용을 이드와 수퍼에고와 사이에 자리잡은 
에고의 문제 이런 식으로 제시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한 교수가 
대부분 이처럼 현실에 임하는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다. 


예를 들어 포커도박을 하는 경우 
어떤 이가 외관상의 표정이나 말이 자신의 속마음과 그대로 일치하게 되면 
상대에게 자신의 카드내용을 노출당해서 
그 포커판에서 돈을 잃기에 
이제는 속 생각과 외관상의 말과 태도를 달리 취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속과 겉이 다른 포커 페이스를 취하면서 
현실에서 대부분 임하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외관상 선한 것처럼 가장하면서 
속은 그와 달리 임하는 
위선적인 삶의 자세라고 지적하게 되는 사정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두 내용이 서로 불일치한다고 할 때 
사정이 그러니 
외관상 요구되는 그런 내용을 다 취하지 말고 
속 마음에서 생각하는 내용을 그대로 직설적으로 
직접적으로 상대에게 표현해야 한다고 나선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래서 어떤 이가 자신의 구두를 실수로 밟고 
커피를 양복에 쏟고나서 
상대가 미안하다고 말할 때 

자신이 곧 회의에 참석해야 할 입장이어서 너무 곤란한 상황이 되었다고 하자. 

그러나 상대가 실수한 것이고 미안하다고 하니 
자신도 외관상 괜찮다고 말해야 하지만, 
그러나 속으로 이 상황이 너무 속이 상해서 
상대에게 욕을 해주고 싶고 상대를 주먹으로 때려주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고 할 때 

이 경우 속 마음을 그대로 바로 상대에게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이전처럼 속으로는 그런 마음이지만, 
그것을 참고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고 괜찮다고 해야 하는가. 
이런 문제가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길을 걸어가는데 
아리따운 아가씨가 짧은 치마를 입고 걸어간다면 
또 마찬가지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경우 

속마음을 숨기고 
외관만 사회규범이 요구하는 대로 외관을 꾸미는 것이 
겉만 그렇게 꾸미고 
겉과 속이 다른 위선적인 태도라고 하여서 

속마음에 들어 있는 이드를 그대로 직설적으로 드러내고 
표현한다면 각 경우마다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은 더더욱 문제인 것이다. 

그러니 이 경우 수행자는 무엇이라고 
말하겠는가. 

그 둘이 불일치되어서 문제라고 한다면 
사실은 자신의 Id 에 해당하는 충동적 본능적 희망이나 욕구의 내용을 
평소 훈련해서 
Super ego 가 요구하는 내용에 일치시켜서 
그런 내용을 평소 
자신이 속마음으로 희망하고 좋아하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앞 경우에서 문제는 
자신의 속마음이 그렇게 super ego 가 요구하는 그런 내용처럼 
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지, 
다른 것이 문제라고 볼 것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수행의 기본 표준은 그런 상태로 
임해야 하는 것이고 

또 신구의 3 업 가운데 
가장 근본이 되고 중요하다고 보는 것은 
바로 마음 안의 내용으로서 의업이 가장 핵심이 된다고 보는 것이고 

외관으로서 신업 구업은 
이런 의업에 따라서 나타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여하튼 이들이 불일치되는 것이 현실의 사정이라고 해도 
그 가운데 중요한 핵심은 
의업인 것이서 
늘 의업을 맑고 깨끗하게 만드는 것이 
수행의 핵심 사항인 것이다. 



○ [pt op tr]  mus0fl--Christophe - Salvatore Adamo - Jours De Lumière.lrc 


이미 글이 긴데 
각 주체가 생사고통을 겪는 경로와 관련해서 
현실에서 각 주체가 마음으로 갖게 되는 소원과 
현실에서 자신에게 요구되는 규범적 요구를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임하는가가 중요하다고 보게 된다. 

아래에 나오는 일승법계도에서는 
비록 법성이 원융하고 알고보면 
모든 주체의 상태가 본래 움직임이 없는 상태이고 이를 여래라고 
부른다고 제시하지만, 

사실은 어떤가하면 
어떤 수행자가 그 사정을 그렇게 보거나 보지 않거나 
또 어떤 수행을 그 후 그렇게 하거나 하지 않거나 
그것은 본래 그런 것이 그런 것이어서 
여기에는 하등 차이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본래 그렇게 수행을 하던 하지 않던 
본래부터 그런 상태를 새로 어떤 주체가 
만들어 내고 얻기 위해서 
그런 수행을 행하는 것도 아닌 것이다. 

본래 일체가 차별없이 공하다는 상태는 
어떤 주체가 그런 사실을 그렇게 보고 
그런 내용을 그렇게 표현하고 
또 무엇을 어떻게 행해야만, 
비로소 그 일체가 그렇게 된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원래 그 상태가 그런 것이고 
그것은 그렇게 누가 보지 않거나 보거나 
그렇다고 말하거나 말하지 않거나 다 그런 것이다. 

알고보면 의상대사가 
법성이 원융해서 두 상이 없다고 제시하는 그런 내용도 

사실은 그 글자들 하나하나가 
앞 뒤 글자의 모습이나 의미가 다 제 각각 다르고 
각 구절도 구절대로 
각 방위로 꺽여져서 각을 이루어 배열된 가운데 
그런 내용을 나타내는 것인데 

설령 그 각 표현을 백지 위에 그렇게 표현하지 않고 
달리 소설이나 만화 내용을 복사해 붙인다고 해서 
그 본 상태가 그로 인해서 
달라지거나 하는 것도 아니고 

또 여기 제시하는 내용처럼 표현한다고 해서 
그것이 새삼 원융하지 않았었는데 
그로 인해서 원융하고 차별없이 공하게 된다고 
볼 것도 아닌 것이다. 


이것이 백지 위에 글을 써서 나타내는 모든 표현이 
백지나 현실의 본 정체와 다 함께 갖는 관계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그런 백지의 각 표현 가운데 
만화의 내용이나 의상대사가 제시한 구절이 서로 차이가 있다거나, 
처음 보리심을 구하는 마음을 일으켜 발심을 하거나 하지 않는 것이 차이가 있다거나, 
또 그 이후 수행을 행하는 것과 행하지 않는 것이 차이가 있다거나, 
성불하는 것과 성불하지 못하는 상태가 차이가 있다거나 하는 등의 차이는 

여기서 제시하는 그런 본 바탕에서 
그로 인해 어떤 차이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 본 바탕은 그에 따라 차이가 있다고 할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본 바탕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중생은 무량하게 생사고통을 받으면서 
고통을 받아나가고 

또 어떤 중생은 그렇지 않은 차이가 있다는 점에서 
바로 역설적으로 
백지에 각 방향으로 각을 모나게 꺽어가면서 
각기 다른 글자를 배열해서 문장을 만들어서 
그를 통해서 

본 바탕의 상태가 그와 같다는 것을 그처럼 올바로 관하고 
그것도 그렇게 상응하게 나타내려고 하고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수행을 다시 그 본 바탕에 상응하게 
무소득(얻을 것이 없음)을 일부로 방편으로 취해서 
정진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수행은 
현실에서 각 중생들이 
본 바탕이 그런 사정인데도 
왜 그런 사정을 그렇게 올바로 관하지 못하고 
엉뚱하게 전도몽상을 일으켜서 
대부분 비슷한 형태로 
일정한 내용을 놓고 탐욕과 분노를 일으키면서 
그렇게 임하게 되는가를 잘 관한 가운데 


그에 맞추어서 수행에 임해서 
자신부터 현실에서 그 상태에서 벗어나서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풀려나 해탈을 스스로 얻는 것이 
1차적 목표점이고 
 

더 나아가 다른 중생들도 그처럼 
벗어날 수 있게끔 하기 위해서 
다른 중생들이 집착하는 그런 내용을 붙잡고 
복덕자량과 지혜자량을 얻을 수 있는 수행방안을 
하나하나 열심히 정진해서 
그것을 성취해서 
그 바탕에서 중생을 제도해 벗어나게 하는 것이 
또 2 차 목표점인 것이다. 



그래서 성불과 성불하지 않은 상태는 
바로 이 부분에서 차이가 있게 된다고 
부처님이 그런 내용을 제시한 것이다. 


그래서 수행방안에 대한 가르침이나 
중생제도를 위해 복덕자량과 지혜자량이 필요하다고 제시하는 것이고 

그리고 그런 복덕 자량을 얻으려면 
보시나 정계 안인 정진과 같은 계행과 
정려 반야의 계 정 혜 3 학의 내용을 행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그런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수행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본래부터 차이가 없는 그런 것을 놓고 
본래 사정이 그렇기에 
사슴이나 돼지나 소나 개도 본 바탕은 차별없이 그렇다는 자체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본 바탕의 사정이 그렇지만 
현실에서 그것을 그렇게 올바로 관하고 
수행에 임할 수 있는가. 

아니면 
사정이 그런데도 
그것을 그렇게 올바로 관하지 못하는가가 
처음 문제되고, 

더 나아가 사정이 그러함을 그렇게 관하거나 
관하지 못하거나간에 
여하튼 집착을 제거하고 수행으로 나아가는가 
수행으로 나아가지 못하는가. 
그 부분이 중요한 것이다. 



여기서 각 중생이 처음 현실에서 
일으키는 전도몽상분별과 
그에 바탕해서 집착을 갖고 대하는 소원의 성취문제가 
문제되는 것이다. 

아무리 그 각 경우가 차별이 있어도  
앞과 같은 사정으로 그 본바탕은 역시 차별없이 공하다고 할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그런 이유로 
이 각 소원을 마음대로 추구하는 것을 방치해도 된다고 할 것인가. 

아니면 본 바탕은 이렇거나 저렇거나 차별없이 공하고 
그 각 주체도 사정이 그러하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그런 소원을 그렇게 성취하려고 임하면 
곤란하다고 할 것인가. 

이 문제가 사실은 현실에서 수행자에게 
문제되는 핵심 사항인 것이다. 



이 부분에서 본 바탕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고 
모두가 원융무애하다는 사정은 
생사고통을 제거하는 기능을 갖는 측면인 것인데 
따라서 이런 내용으로 생사고통을 제거해야 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이 내용으로 
현실에서 수행자가 행해야 하는 수행과 
그 수행으로 얻게 되는 
무량한 복덕과 지혜 자량과 같은 과보까지 
같이 제거하면 곤란한 것이다. 

더 나아가 그런 내용을 같이 제거할 뿐만 아니라, 

그런 차별없는 본 바탕의 사정 때문에 
현실에서는 아무 것도 안해야 된다고 여기거나, 
아무것도 안 하거나 아니면 무엇을 하거나 
무엇을 하더라도 이렇게 하거나 저렇게 하거나 다 무방하다고 여기거나, 
또는 수행 이전처럼 자신의 탐욕과 분노에 바탕해 마음대로 행하고 
심지어 악행을 극단적으로 행해도 된다고 여기면 
더더욱 곤란한 것이다. 


그래서 이 두 측면을 늘 함께 붙잡고 
수행에 정진해야 함을 주의해야 한다고 본다. 

여기서는 아래 내용이 그렇지 않다고 
어떤 비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아래 내용과는 관계없이 
하나의 내용을 너무 한 방향으로 편벽되게 바라보고 취하면 

오히려 본 바탕에 대해 제시하게 되는 올바른 내용과 
이에 바탕해서 행해 나갈 수행의 목표점을
서로 혼동하고 현실에 임하게 되기 쉽다는 점을 
제시하는 것이다. 




현실에서 소원을 붙잡고 이 성취를 바랄 때 
많은 if 문장을 만나는데 
그 if 문장 하나하나를 붙잡고 일일히 
해석을 하면서 설명을 붙일 도리는 없다고 보게 된다. 

그런데 쉽게 자신의 소원을 소원대로 뜻과 같이 
잘 성취하고 
수행을 잘 행해서 
또 무량한 복덕과 지혜 자량을 얻어 나가는 방안은 
사실은 간단하다고 할 수 있다. 


각 if 문장을 놓고 
이러면 이렇게 좋게 되고 
이러면 이렇게 나쁘게 되고 
좋은 것은 좋은 것대로 좋지만, 
나쁜 것은 나뻐서 불안하고 두려움과 공포를 주고 
고통을 받게 된다. 
이런 여러 복합문제가 있을 때 

생사현실에서 
가장 극도의 고통을 준다고 보는 하나의 단면을 붙잡고 
그 본 정체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관하고 일단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게 된다. 

그래서 여우가 나타나면 그저 모래에 얼굴을 박고 
숨는 꿩이 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여우를 정면으로 보더라도 그것을 극복하게 되어 
어느 경우나 평안함을 얻게 되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 경우 꿩이 모래에 얼굴을 박으면 
다가오는 여우모습을 보지 않게 되어서 
결국 마찬가지가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런데 여기에서는 왜 꿩이 그렇게 모래에 얼굴을 박고 임하는가 
그 사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그 꿩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가오는 여우 때문에 불안해서 그렇게 임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그 불안을 완전히 해결해주지도 못하고 
더욱이 그 문제 자체도 해결해주지 못하기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결과는 꿩 신세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좋고 나쁨을 구분하는 가운데 
좋음을 집착하는 것은 
그 반대면인 나쁨을 놓고 두려움을 갖고 불안을 일으키게 되고 
그런 상태에서는 마치 9회말 투아웃 상황에서 홈런을 치려고 
긴장하면 할 수록 손이 얼어 붙어 헛스윙을 해서 결국 아웃당하는 
홈런타자의 상태처럼 원하는 바도 잘 행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서 종합적으로 문제가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단 마음에서 
좋고 나쁨 가운데 지극히 나쁨을 붙잡고 
설령 그렇게 지극히 나쁨을 얻더라도 그것도 무방하다고 
스스로 관할 수 있는 상태가 일단 되어야 
이 다양한 if 문제가 일으키는 불안과 갈등에서 
일단 풀려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또 
반야심경에서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 도일체고액
이 구절이 원칙적으로 제시하는 내용과 관련된다. 





그리고 이 일체가 모두 차별없이 공하고 
또 그래서 무방하다고 관할 수 있는 상태에서 
다시 어차피 그렇지만 동가 홍상의 상태를 얻기 위해서 

그런 바탕에서 집착없이 보살이 수행에 임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위없이 올바른 깨달음)을 얻어 성불하고자 
노력해 가는 것인데 

이런 수행은 바로 앞과 같은 바탕에서 
그렇게 수행을 해서 성취하는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그런 수행자에게는 
if 문장이 일단 제거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큰일이고 
그래서 그것은 생각하기도 싫고 
오로지 자신이 소원하는 것만 붙잡고 임하면 
된다고 나아가는 것이 아니고 

지옥이나 극락이나 
일체의 생사현실이 그런 바탕에서는 
그런 문제를 얻을 수 없다는 입장에서 
그 문제상황 일체를 다 함께 떠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바탕이라고 해서 
그 이후 현실에서 어떤 수행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아니고 

그 입장에서는 
원래 그렇게 하거나 하지 않거나 차이가 없다고 할 것이고 
본 바탕에서는 그로 인해 아무 차별을 얻을 수 없지만, 

그런 바탕임에도 불구하고 
전도망상에 바탕해 현실에서 생사고통을 받아나가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이런 중생에 대한 자비심을 일으켜서 
그런 중생이 생사고통을 받는 현실에 들어가서 
그들이 집착하는 소원을 붙잡고 
그것을 성취시켜주면서 
이들을 끝내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수행자의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단순히 자신만 생사고통을 벗어나 머무는 아라한과 
보살 수행자와 
성불한 상태가 각기 
차별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 이 부분에서는 
본래 움직임이 없는 그런 여래는 
사슴이나 소도 그런 상태라고 관하는 것이고 

또 이런 부분에서는 
큰 효용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문제에서는 
일단 현실의 각 중생이 놓인 상태를 X 라고 놓고 

일단 그 각 주체가 희망하는 각 소원이 성취된 상태를 Y 라고 할 때 
그 방안이 무엇이던 
그리고 그 구체적 내용을 알던 모르던 
그 방안을 Y = f(x) 라고 표시한 다음 

이렇게 성취된 Y 상태를 다시 놓고서 
그 상대가 수행에 진입할 수 있게 되는 상태를 Z 라고 다시 놓고 
그 구체적 내용을 알던 모르던 
일단 그 방안을 Z = g(y) 라고 표시한 다음 

이 내용을 함께 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본 바탕으로서 법성이 원용하고 
차별없이 공하다는 진리를 
바탕으로 한 상태에서는 

본래 그런 바탕인데도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중생이 X 상태에서 
생사고통에서 헤메돌고 있는가를 문제삼는 가운데 
이들 중생을 수행에 진입시킬 방안을 
처음 

참 예쁘지 삼삼하지 공식으로 일단 제시하는 것이다. 


진리를 있는 대로 관하고 
=> 상대가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내용을 일단 제시해서 초점을 돌리고 

그리고 상대가 놓인 X 의 상태에서 
F(x)G(y)의 함수식을 통해서 
그 상대는 상대대로 자신의 소원을 성취하는 한편 
이를 통해서 이어서 수행에 진입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쉽게 말하면 
질병에 걸린 이는 그 질병을 고쳐주면서 다시 이를 통해서 
수행에 진입해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 해탈을 얻고 
무여열반을 얻게 하는 것이 목표인 것이다. 

또 사업으로 돈을 벌거나 
감옥에서 벗어나고자 하거나 하는 형태로 
현실에서 중생들이 집착하고 일으키는 소원마다 하나씩 
그렇게 수행자가 임해야 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런 상태에선 그 각 주체가 그 내용에만 초점을 맞추고 
한 순간도 경전 내용이나 수행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 
현실인 것이므로 
그 각 중생이 자신이 알아서 
현실의 본 바탕이 그렇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를 통해서 그런 생사고통을 벗어나라고 방치하면 
무량겁을 거쳐도 그렇게 스스로 알아서 
벗어날 수있는 경우가 거의 드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정이 
바로 참 예쁘지 함수식을 
수행자 자신이 마련해서 
스스로 그 문제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다른 중생도 그것을 통해서 벗어나게 해야 하는 
이유이고 사정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F(x)G(y)의 함수식이 갖는 중요성은 사실은 다음이다. 

어떤 이가 병을 낫거나, 
사업을 성공하거나 하는 희망을 가질 때 

F(x)식은 사실은 그 구체적 방안을 제시한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만, 
F(x) 라고 제시한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 상태에서 
그 F(x)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상태는 성취되는 것이 
확실한데 
단지 자신이 그 상태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려고 한 것인가. 
즉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희망을 성취하고자 한 것인가. 
이것을 살필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그 답을 찾아내고자 할 때 
그 답이 앞에서 제시한 super ego 에 해당하는 
그 모든 각 주체를 다 좋고 좋게 만드는 형태가 되어서 

처음 각 주체가 자신의 입장에서 
Id 의 형태로 속마음에서 바라는 희망의 상태가 
곧 
super ego 에 해당하는 온 생명의 좋음에 이바지할 때 
그 희망이 곧바로 성취되게 된다는 
관계를 제시하는데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처음 F(x) 라는 소원 성취의 방안의 문제에서 
이것을 그렇게 대하지 않고 
그 x 나 F 에 해당하는 구체적 내용이 무엇인가를 놓고 
그 문제에 집착하고 들어가면 
이 답은 답대로 얻지 못하고 
설령 그 답을 알아낸다고 해도 실현하지 못하고 
실현하고 성취해도 성취되자 마자 곧바로 허물어지고 무너지게 되어서 
생사고통에 그대로 노출된다는 문제점을 지적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수학에서 ㅠ ( 파이값) 의 계산과 같은 문제다. 
아무리 수퍼컴퓨터를 쉼없이 가동해도 
ㅠ ( 파이값)은 그 근사값만 무한히 소숫점이하로 나열하게 될 뿐 
정확한 답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그렇게 집착하고 붙들어 임하고 
그것이 해결되어야 다음 문제를 살필 수 있다고 임하지 않고 
일단 ㅠ ( 파이) 라고 그냥 그 답을 적어 놓고 
그 이후 문제를 살핀다는 것이 
이 ㅠ ( 파이) 라는 기호가 실질적으로 갖는 중요한 
의미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대충 
빵값을 그 크기에 비례해서 지불하는 문제에서는 
ㅠ ( 파이)값은 그냥 3 이라고 놓고 계산해도 되는 것이고 

그러나 사정이 그렇지 않고 
왜 날어 섬에서 로켓을 발사해서 목성에 가고자 할 때는 
그 발사각도 계산에서 ㅠ ( 파이값)이 문제되면 
단순하게 3 이라고 놓고 보면 곤란하고 
소수점 100 자리 정도까지는 계산을 한 다음에 
계산식에 넣어도 넣어야 한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ㅠ (파이)의 정확한 값을 먼저 붙잡고 이 문제를 살피지 않고 
일단 ㅠ (파이)을 단순히 ㅠ (파이)라고 놓고 
그 ㅠ ( 파이)가 얻어지면 그것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려고 한 것인가를 
먼저 살피는 것이 
오히려 ㅠ (파이) 의 구체적인 값을 찾아내고 얻는 지름길이라고 
여기서 제시하는 의미가 큰 것이다. 

이것이 현실에서 
소원이 있을 때 
소원이 성취되고 오래 유지되는 방안이기도 한 것이고 
그 사정은 
그 소원을 가진 이가 그 X 나 
방안에 해당하는 F 함수의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그냥 f (x) 라고만 표시해 놓은 다음에 
그 성취가 그대로 되었다고 하고 
정작 그 상태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고자 한 것인가를 살피고 

그 내용이 super ego 의 요구를 만족시키고 
그런 바탕에서 당장 그런 내용을 자신이 행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하나 행하면 
바로 그로 인해서 그 f (x)가 구체적으로 찾아지고 
또 그대로 성취된다고 제시하는 데 핵심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부분을 잘 파악해야 하고 
현실에서 super ego 가 제시하는 요구나 규범은 

사실은 자신이 다른 상대에게 희망하는 내용을 그대로 
상대에게 규범이라고 제시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현실이지만, 

그러나 원래 수행자가 행할 내용은 
그런 구조로 그렇게 그러한 원리를 통해 행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정도 
함께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그 구조를 앞에서 
간단히 제시한 것이다. 

원래 죄와 복이 공하고 
그런 내용은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본 바탕이 그런 것이다.

그런데 그런 바탕에서 
전도망상에 바탕해 각 주체가 
자신과 자신의 것이 그런 것이라고 망상을 일으킨 다음 
무언가를 좋다고 보고 집착하고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에 바탕해 
생사고통을 겪고 있는 상태에서 

이제 앞과 같은 구조로 
다른 이에게 자신이 좋다고 보는 상태를 
서로 요구하고 

그것을 상대는 좋다고 보지 않으니 
거부하고 침해하게 되니 

다시 자신은 여기에 대해서 
분노를 바탕으로 
응징하고 보복하는 관계로 관계를 형성하는 가운데 

이것이 전체적으로 
super ego 와 id 의 모순 대립관계로 
나타나게 된 것이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이 상태에서 수행자는 
본 상태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관하고 이해하면서도 
이런 상태의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자비심을 일으키고 

중생들이 그처럼 전도망상에 바탕해서 
자신과 자신의 것의 본 정체도 잘 파악하지 못하고 
더 나아가 자신이 상대하는 상대의 정체도 올바로 파악하지 못하고 
온통 전도망상에 바탕해서 
외관과 내심을 서로 달리 한 가운데 
현실에 임하는 사정을 잘 이해한 가운데 

이들을 제도하기 위해서 
생사현실에 들어가 임한다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에서 수행자는 
전도망상을 일으킨 그런 중생을 기준으로 잡고 
그 상태에서 고집하는 바를 그대로 받아들여주어서 
수행자가 행할 수행 방안으로 제시하게 되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본래 보호하고 지킬 바를 얻을 수 없는데도 
그런 사정으로 
유독 그 각 경우에 그렇게 
수행방안으로 임해야 한다고 하는 내용을 
먼저 잘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자신이 상대가 어떻게 하고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하는 것이 좋다고 보는 내용이 있다면 
그것을 상대에게 가지고 가서 규범이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이런 희망을 잘 성취하려면 
자신부터 다른 중생을 상대할 때 
그렇게 임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 그제 살핀 경전에서 
그런 내용들이 그런 형태로 제시된 것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이것을 전도망상에 바탕해서 
이해하면 
마치 서양의 철학자들이 이해하듯 

비록 자신은 그런 것을 원하지 않는데 
단지 사회가 그런 규범을 제시하기에 
의무적으로 억지로 그런 것을 행해야 마땅한 것이라고 여기면서 
각 규범을 실천해야 한다고 여기는 
상태로 임하게 되기 쉬운 것이다. 




그것이 바로 외관은 규범을 지키고 실천하는데 
속마음으로는 그런 것을 하기 싫어하고 
마지 못해 의무로 행하는 상태가 
선을 실천하는 상태라고 여기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런 것이 아닌 것이다. 

자신이 어떤 상태가 좋다고 보고 
어떤 상태는 나쁘다고 여기고 
상대가 어떤 내용을 어떻게 행하기를 바란다면 


자신부터 먼저 그런 내용을 
다른 생명을 상대로 잘 행하고자 원하고 
그렇게 잘 실천해가는 것이 요구된다고 
제시하는 것이고 

그래서 그것이 
각 규범의 내용을 그런 형태로 제시하게 되는 
기본 원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엇비슷해 보이지만, 
그 내용이 그렇게 차이가 나타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당신은 다른 생명이 당신을 붙잡아서 
신체를 끊고 생명을 빼앗아가고 
또 당신의 재산을 빼앗아가기를 원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당신부터 다른 생명을 상대로 해서 
그렇게 행하지 말라. 

또 당신은 다른 생명이 자신에게 무언가 
좋음을 베풀어 주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당신부터 먼저 그렇게 다른 생명에게 
좋음을 베풀라. 

이런 관계인 것이다. 

이 내용이 단순히 
상대가 자신에게 그렇게 해주기를 바래서 
그래서 그렇게 한다고 제시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만일 자신이 다른 상대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때 
상대가 그대로 해주기를 바란다면, 

당신부터 그렇게 다른 상대가 무언가를 요구할 때 
그렇게 상대에게 해주어야 한다는 구조로 
그런 내용이 제시된다고 
그 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중생들을 제도하는 수행을 하는 수행자에게 있어서 
수행자가 원래 파악하는 본 바탕의 내용으로서 
죄와 복이 모두 다 차별없이 공하고 얻을 바가 없다는 내용을 놓고서 
수행자가 각 경우마다 어떻게 해야 하고 
어떻게 행하면 안 된다는 
그런 수행 방안을 그렇게 제시하는 것이 아니고 


수행자가 제도할 중생의 상태를 기준으로 놓고 
그 상태에서 수행자가 중생을 제도하는데 
필요한 복덕자량을 성취하는데 
요구되는 내용을 그렇게 제시하는 것이라는 사정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죄와 복이 모두 공하고 차별이 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수행자는 
생사현실에 임해서 
행해야 할 수행내용이 그와 같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종합적인 사정을 잘 이해해야 
현실에서 원만하게 수행을 성취하고 
본래 움직임이 없는 것을 칭한다는 부처의 상태도 그렇지만, 

현실에서 중생을 제도하고 
법신을 증득하여 
다른 상태와 차별이 있다고 보는 그런 부처의 상태까지도 
그 상태에서 성취할 수 있게 된다. 





문서정보 ori http://buddhism007.tistory.com/3663#1488
sfed--법계도기총수록_K1502_T1887B.txt ☞법계도기 
sfd8--불교단상_2561_10.txt ☞◆vvai1488
불기2561-10-15 
θθ

 




-- 아래에 조각글 작성시 휴식시점에 붙인 노래가사,사진,풍광,예술작품 자료를 편집상 옮겨 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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