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반야바라밀경』 견고품을 살피는 가운데 이미 마파순과 수행자의 관계를 대강 살폈는데 여기서도 욕계의 최고 상태에 있는 마파순이 수행자가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을 왜 경계하게 되는가 그 사정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쉽게 이 사정을 이해해보자. 게임이나 만화를 만들어서 이 게임이나 만화에 바탕해 막대한 수익을 얻는 입장이 있다고 하자. 이런 경우 그 게임이나 만화에 들어 있는 아이템을 구하기 위해 아이들이 한달 내내 쉬지 않고 노력한다던지 또 몇백만원을 주고 그런 아이템을 구하는 이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데 그 방안은 그런 게임이나 만화를 접한 이들이 그 내용에 접착되고 몰입해 임하는 것이 그 기본 바탕이 된다.
그런데 어떤 이가 아이들이 집착해 대하는 이런 만화나 게임이 하나같이 부질없고 실답지 않은 것이어서 그것을 놓고 평생 열심히 노력하고 거기에서 최고가 되고 메달도 따고 상금도 얻고 아이템을 수없이 수집한다 한들 하등 쓸모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서 그런 만화나 게임 내용으로 고통을 받는 상태로부터 벗어나게 하면 당연히 큰 타격을 받게 된다.
그런데 이를 걱정하는 마파순도 사실은 그런 망집에 기본적으로 걸려 있는 상태이기에 또 그런 걱정을 하고 대하는 것이다.
이전에도 이 사정을 축사에 축생을 가두어 두고 목장을 경영하는 목장 주인에 비유해서 설명한 바 있는데 그 사정이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에서 축생이 평생 그런 축사에 갇혀서 고생하고 나중에 도살을 당하는 것이 안타까워 그 축사를 벗어나게 해주려고 어떤 이가 임하면 그 축사에 갇힌 축생부터 그것을 달가와하지 않지만, 그 축생을 축사에서 기르는 목동이나 목장 주인은 더더욱 그것을 달가와 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을 달가와하지 않는 그 사정이 각기 다르다. 일단 축생은 자신이 처한 사정 자체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우선 당장 목장 주인이 자신이 집착하는 음식이나 주거를 쉽게 제공해주고 자신을 보호해준다고 여기고 그런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 자체를 두려워한다.
그리고 그렇게 축생이 거꾸로 임하는 것은 물론 그 축생이 어리석어서 그런 것이다.
그런데 목장 주인이나 목동은 또 사정이 다르다. 이 축생이 살을 찌우면 찌우는 만큼 자신에게 이익을 가져다 주고 그리고 그렇게 지내다 죽게 되면 또 죽어서 이익을 얻는데 어떤 이가 이런 축생을 축사에서 벗어나 좋고 좋은 형태로 살아가게끔 노력하면 그로 인해 자신이 당장 큰 타격을 받는다고 여기면서 이를 경계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욕계에서 망집에 걸려 있는 각 중생이 번뇌에 묶여 스스로 사역을 당하고 다른 생명을 또 사역시켜 나가는 관계다.
문제는 앞의 사례에서 목장 주인도 사실은 생사현실에 묶여 있는 상태이므로 그런 상태에서 벗어나와야 하는데 목장 주인의 입장에서는 일단 그 상태가 자신에게 당장 좋음을 가장 많이 준다고 여기고 고집해 머무는 것은 축사에 갇혀 지내는 축생과 별로 다르지 않다.
욕계의 상황이 이렇기에 그런 망집에 바탕해 목장 주인이 편하게 잘 지낸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다른 어떤 생명은 그에 비례해서 그 기간만큼 극심한 생사고통을 3 악도에서 겪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바탕이 바로 망집인 것이다.
이 망집을 깨뜨리고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는 열쇠가 또 반야바라밀이다. 그래서 반야바라밀을 닦고 그에 바탕해 수행을 한다는 것은 생사고통에 묶인 축생과 목장 주인을 다 함께 풀어주는 활동인데 문제는 각 주체가 망집에 단단히 묶여 있기에 이것을 거꾸로 대하고 두려워하는 것이다.
망집의 사정은 간단하다. 꿈의 비유를 가지고 이해하면 쉽다.
침대에 누어서 바다나 황금꿈을 꾼다. 이 상황에서 꿈은 실답지 않아서 하등 집착을 갖고 대할 내용이 아닌데 그러나 욕계 현실에서 망집을 일으킨 이가 모든 것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자신이 일으킨 망집으로서 그 망집은 꿈의 비유에서 꿈꾼 내용과 같은 성격을 갖는다.
그리고 이 비유에서의 꿈은 또 앞에서 제시한 만화나 게임과 같은 성격을 갖는 것이다.
그래서 이 꿈이 실답다고 하려면 그 꿈과 같은 내용이 현실의 침대에도 그렇게 있어야 하듯,
욕계 현실에서 각 주체가 생각하는 내용이 실답다고 하려면 그 내용이 감각현실에도 그렇게 있어야 한다. 또 그 감각현실이 다시 실다우려면 그런 감각현실이 그런 내용을 얻는 본 바탕인 실재 진여에도 그렇게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을 지금 반복해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반야바라밀다 수행이란 현실 사정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본 바탕인 진여 실재를 꿰뚫어 관하는 가운데 그런 생사현실을 넓고 길고 깊게 관하여 그런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고 또 다른 중생을 벗어나게 하는 수행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반야바라밀다를 사용하면 기본적으로 이런 점을 올바로 관하게 되고 그래서 그런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고 다른 주체도 벗어나게 하게 된다.
그러니 그런 망집을 바탕으로 욕계내에서 지금 당장 가장 장구한 수명을 갖고 욕계 안에서 좋음을 많이 얻는 마파순이 이를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다.
이전에 비닐마술의 비유를 들어 이 관계를 설명했는데 이 사정을 다시 보자.
하나의 비닐에 △ 가 그려져 있고 또 다른 비닐에 ○ 가 그려져 있는데 이 두 비닐을 겹쳐서 대하면 어느 비닐에도 없는 안이 세모인 도너츠 모양이 나타나 보이게 된다.
그런데 이처럼 안이 세모인 도너츠 모양이 나타나 보일 때 이것을 바탕으로 하고 이를 모든 것의 기준으로 삼아서 활동하는 것이 욕계의 현실이다.
즉, 이런 내용이 어느 영역에도 실답게 있지 않은데도 그러나 위 상황에서는 그것이 실답게 있다고 여기면서 그런 바탕에서 그 가운데 가장 수명이 길고 능력이 수승하여 좋음을 많이 뜻대로 얻는 상태가 곧 마파순의 상태인 것이고 그런 바탕에서 다시 뜻과 같은 상태를 성취하지 못하고 온갖 고통을 받는 상태가 곧 3 악도의 상태인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모두 다 같은 망집에 바탕해서 그런 상황에 놓여 있다.
앞에서는 비닐 마술에서 두개의 비닐만을 놓고 이 사정을 설명했지만, 실상(實相 dharmatā ; dharma-svabhāva) - 상(相 Lakṣaṇa ) - 상(想 Saṃjña) 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려면 그 내용을 어떤 주체가 직접 얻을 수는 없지만, 그러나 또 전혀 아무 것도 없는 것은 아닌 또 다른 비닐을 하나 더 포개어 놓고 이 사정을 살펴야 한다.
그런 비닐을 일단 기호로 □ 라고 표시한다면 본 바탕이 되는 진여 실재 - 감각현실 - 관념분별의 관계는 곧 □ - △ - ○ 의 관계가 된다.
그래서 여하튼 각 비닐영역에서 그런 내용이 얻어지는데 욕계의 각 주체가 활동하는 기본 전제는 이들 내용을 바탕으로 망집을 일으켜서 임하게 된다는 점이다.
즉, 그런 상태에서 ○ 를 얻게 되면
그 주체는 그 상황에서 ○ 를 얻기에 그 ○ 가 △ 가 있는 비닐영역에도 그처럼 있다고 여기면서 안이 세모인 도너츠가 그렇게 실답게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어떤 이가 거리에 서서 눈을 떠서 세상을 보면 그 상황에서 영희가 저기 오고 있다고 여기면서 그 상황을 대한다. 그래서 참 좋다거나 아니면 두렵다거나 하는 상태가 된다면 이것이 바로 그 문제다.
즉, △ 와 ○ 의 비닐을 놓고 설명하고자 하는 내용은 다음이다.
현실에서 그런 감각현실을 얻고 그 각 부분이 무엇무엇이라고 여기고 대할 때 그렇게 여기는 그 내용은 관념영역에서 그렇게 얻는 것일 뿐 그런 관념을 일으키게 한 감각현실 영역 자체에서는 얻어지지도 않고 더 나아가 본 바탕인 실재 진여의 영역에서도 얻어지지 않는데 그러나 욕계의 생명은 자신이 그렇게 ○ 라는 관념을 일으키게 되면 △ 를 얻는 감각현실 영역에도 그런 내용이 그렇게 실답게 있다고 여기는 한편, 더 나아가 본 바탕인 실재영역 □도 역시 그렇다고 여기면서 그 망집을 증폭시켜 나간다.
그것은 또 △라는 감각현실과 □로 표시한 실재의 관계도 사정이 같다. 그래서 현실에서 대하는 내용은 하나같이 실답지 않은 것이다.
△ 라는 감각현실은 각 종류별로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눈으로 보는 색은 귀로 듣는 소리 영역에서는 얻어지지 않는다. 소리도 마찬가지고 다른 감각현실도 다 사정이 같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어떤 주체가 거리에 서서 영희가 그 현실에 그렇게 있다고 한 번 여기면 이후에는 그 영희는 그런 영희가 각 영역에 실답게 존재하는 실다운 존재라고 여기면서 현실에 임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또 영희만 그런 것이 아니고 스스로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대하는 내용도 사정이 마찬가지고 그외 집이나 자동차 기타 등등 온갖 것을 그런 입장에서 대한다
그러니 그런 상태에서 한번 지옥이나 아귀 축생계에 들어가 임하면 또 마찬가지가 된다. 그리고 이것이 욕계내 각 생명이 처하는 현실이다.
물론 지금 당장 자신의 상태가 좋다고 여기는 상황에서는 그것이 무슨 문제인가 하면서 경전에 나오는 마파순의 입장처럼 이 상황을 대하면서 식당에 들어가 물고기 회도 먹고 그러겠지만,
그렇게 업을 행하면 그 업의 장애로 인해 나중에는 자신이 현실 축사에서 본 그런 축생이나 회감이 되어 올려진 식당의 물고기가 처한 상태처럼 무량겁에 걸쳐 자신이 그 자리에 들어가 임하면서 생사고통을 겪어 나가게 된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런 사정을 제시해도 마 파순을 비롯해서 각 주체는 그런 열매가 당장 눈 앞에 나타나 보이기 전까지는 그것을 잘 받아들이지 않는 것 뿐이다.
봄에 씨를 열심히 뿌렸다 해도 열매가 나타나는 가을이 되기 전까지는 그렇게 그 관계를 잘못 이해하고 현실에 임하는 고집을 꺽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그 사례를 축생을 통해 살필 수 있다. 자신이 당장 축사에서 편하게 음식을 먹고 지내지만, 나중에 도살되고 자신의 고기가 상점에 내걸려 팔리게 되는 그 관계를 미리 알지 못하고 오히려 목장 주인이 자신을 잘 보호해주고 음식을 거저 제공해주는 고마운 분이라고 여기면서 마냥 안주하는 축생 상태가 곧 욕계에서 망집을 일으켜 임하는 각 중생의 상태인 것이다.
그런데 우이독경이라는 말처럼 그런 어리석음에 빠진 축생에게 아무리 그 사정을 제시해도 그 축생은 자신의 눈에 당장 볼 수 있는 내용이 아니면 그것을 이해해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그런 열매가 나타나는 시점이 되면 그 축생은 또 마찬가지가 된다. 열매가 나타나는 상황에서는 그 열매가 도대체 어떤 씨앗으로 인해 그렇게 나타난 것인지를 또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열매만 붙잡고 임한다.
이것이 대단히 좁고 짧고 얕게 관찰해서 매 상황에 임하는 욕계 중생의 현실이다. 그리고 그런 상태로 무량겁을 나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축생을 통해 이득과 즐거움을 얻는다고 집착하며 임하는 욕계내 최고의 지위에 있는 마파순도 그 본 바탕은 이와 마찬가지다.
이는 현실에서 축생을 기르고 축생으로 이득을 얻는 목장 주인도 목장내 축생과 마찬가지로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고 생사고통을 겪는 것과 사정이 같다.
그러니 이 욕계내 중생을 모두 이런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게 하는 수행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앞에서 □ - △ - ○ 의 관계를 먼저 잘 파악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즉, 각 내용이 비록 각 영역에서 그처럼 얻어지지만, 그런 관계에서 그렇게 각 내용이 임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일 뿐 그것은 하등 집착을 가질만한 실다운 것이 아니다. 이것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꿈에서 비록 황금을 꾸었지만, 그것은 침대가 있는 현실영역에는 얻어지지 않는 것이고 또 그런 현실의 본 바탕이 되는 실재 영역에도 얻어지지 않음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처음 본 바탕이 되는 실재 영역은 현실에서 문제삼는 그 모든 것이 그렇게 얻어지지 않고 공하다는 사정을 잘 관하는 공해탈문에 들어가서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야 하고
또 자신이 세계나 자신이라고 스스로 여기는 감각현실 영역의 내용을 놓고는 이들 내용에는 자신이 그것을 대하는 가운데 거기에 있다고 여기는 그런 세계나 자기 자신이나 수명이나 생사 생멸이 모두 얻어지지 않는다는 사정을 잘 관하는 무상해탈문에 들어서서 이를 통해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이런 재료를 바탕으로 일정한 관념분별을 일으키고 그것을 대할 때는
마치 꿈꾸는 이나 시를 쓰는 시인이 행한 분별처럼 그런 내용이 하등 실답지 않음을 관하여 그런 내용을 바탕으로 무엇이 좋다 나쁘다 분별하면서 쓸데없는 희망과 욕구를 일으키고 또 그런 쓸데없는 소원을 붙잡고 쓸데없는 노력을 행하는 상태에서 벗어나는 무원무작해탈문에 들어서서 생사고통을 받는 세계를 헤매 돌아다니는 상태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각 영역의 내용을 대하는 가운데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는 해탈문들이다.
그리고 그렇게 스스로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난 다음에는 다시 그런 생사고통에 묶인 다른 중생을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하여 이 내용을 꿰뚫어 관하는 가운데 그 문을 통해 생사현실에 다시 들어와서 수행에 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