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eille Mathieu - Paris En Colere - Vox
불기2562-06-28_잡아함경_039
Herbert Leonard - Ne Me Quitte P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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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t op tr] fr sfed--잡아함경_K0650_T0099.txt ☞잡아함경 제39권
선종에서는 신수스님과 혜능 스님 사이의 일화가 전해진다. 혜능 스님은 5조 홍인(弘忍)대사를 찾아가 법을 전해 받고 선종의 제6조가 된 스님이다. 법을 전해 받게 된 계기가 있는데 거기에 얽힌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홍인대사는 수상좌인 신수(神秀)가 지은
“몸은 이 보리의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 명경대와 같은지라,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티끌과 먼지가 묻지 않게 하라
身是菩提樹
신시보리수
心如明鏡臺
심여명경대
時時勤拂拭
시시근불식
勿使惹塵埃
물사야진애
라는 게송을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혜능이 이 시를 보고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가 아니다. 본래에 한 물건도 없거늘, 어느 곳에서 티끌과 먼지가 묻으리오.
菩提本無樹
보리본무수
明鏡亦非臺
명경역비대
本來無一物
본래무일물
何處惹塵埃
하처야진애
라는 게송을 지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홍인의 인가를 받아 종통을 잇고 발우와 장삼을 전수받았는데 다만 출신이 남방 출신인 혜능스님으로서는 신수를 따르던 무리들의 행패로 아직 법을 펼 때가 아님을 알고 야반삼경에 황매산을 빠져나와 남방으로 가서 18년간 사냥꾼 속에 숨어 살다가 마침내 신수의 북점종풍(北漸宗風)에 대해서 남돈선풍(南頓禪風)을 떨쳤다고 전한다.
당시의 선종은 신수의 북종(北宗)과 혜능의 남종(南宗)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나, 북종은 차츰 쇠퇴해지고 남종은 크게 번창했다.
혜능스님은 석가모니불로부터는 33조요, 달마로부터는 6조로서 그 이후로는 따로 의발(衣鉢)을 전수하지 않았지만, 혜능의 선풍은 중국ㆍ한국ㆍ일본 등지에서 크게 발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혜능의 법문을 수록한 《육조단경》은
그런데 위에 소개된 두 내용이 서로 시의 구절이 각기 대칭을 이루는 가운데 서로 반대되는 내용을 제시하는 것 같아서 이 가운데 어떤 내용이 좀 더 적절한 내용인가가 궁금하게 된다.
선종의 영향이 지대한 입장에서 이를 대하면 오늘날 대하는 선종은 혜능 스님을 바탕으로 이후 선종의 5가7 종이 분화되어 전승된 배경때문에 당연히 혜능 스님을 더 중시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혜능 스님의 가르침을 담은 어록을 6조단경이라고 경이라는 명칭까지 붙여서 선가에서 대단히 존중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에서 불교를 대하는 입장에서는 한 번은 이 두 시구를 놓고 살펴야 한다고 보게 된다.
그런데 또 오늘 조각글에서 살피게 되는 잡아함경은 부처님이 기본적인 가르침을 처음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내용이 담긴 경전으로서 또 조금 특색이 있다.
오늘 랜덤으로 뽑힌 경전 부분은 마파순이 계속 등장하는데 뽑혀진 노래에서도 파순이란 단어가 자꾸 들려서 상당히 의미있게 이들 내용을 살피게 된다.
혜능 스님이 남긴 시구를 보면 .. 본래에 한 물건도 없거늘, 어느 곳에서 티끌과 먼지가 묻으리오. ... 이런 내용이 제시되는데
이런 내용이 분명 반야경전에서 제시하는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기는 한데 그러나 이 내용을 잘못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사정이 그렇기에 그런 내용만 잘 관하면 되고 신수스님이 시구로 제시한 내용처럼 현실에서 수행을 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자칫 잘못 오해하기 쉽다.
그런데 그 부분이 또 신수스님이 남긴 게송에서 강조해 제시하는 주된 내용이기도 한 것이어서 과연 이 두 스님의 남긴 시가 어떤 관계인가도 문제되고
또 혜능스님이 바탕한 금강경이나 반야경전의 입장은 또 이런 각 입장과 어떤 관계인가 이런 문제도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런데 이 문제는 어떤 이가 어떻게 보거나 말하거나 관계없이 여여한 상태로 있다고 할 현실의 본 사정 그 자체와
그런 현실 사정을 있는 그대로 잘 관하는 문제와
그리고 그런 현실 사정을 있는 그대로 잘 관한 바탕에서 현실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마땅한가 하는 문제를
서로 혼동하는 가운데 이런 문제가 제기되기 쉽다고 본다. 그래서 주의할 점이 많다고 본다.
만일 현실의 본 사정이 위와 같다고 해서 그래서 어떤 수행을 할 필요가 없다고 이해한다면 그러면 그런 입장에서는 사실 남방으로 숨어서 피할 사정도 역시 없다고 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본 바탕은 그런데 현실에서는 그런 내용을 제시한 혜능 스님 자신부터 왜 그렇게 행하는가. 이것을 답해야 할 것이다.
또 사실 본 바탕의 본 사정만 그렇게 강조한다면, 그 본 바탕은 위와 같은 내용만 허용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내용도 다 그렇다고 이해해야 한다.
보리는 나무가 아니고 명경은 대가 아니다. 한 물건도 없다. 이런 입장이라면
이런 내용을 제시하는 그 내용 자체도 그 사정은 마찬가지라는 의미다.
즉, 그처럼 관하고 보는 것이 본 바탕에 그렇게 있는 것도 아니라는 의미다.
그런데 왜 그렇게 굳이 보고 그런 내용을 제시해야 하는가. 이런 문제까지 깊게 잘 살펴야 한다고 본다.
생각해보면 본래 본 바탕에서는 혜능 스님이 제시한 것처럼 생사고통이나 번뇌와 같은 티끌과 먼지의 문제가 제기된 적도 없고
그래서 이런 수행을 이렇게 해야 한다거나, 사정에 따라서는 몸을 숨겨 도망가야 한다거나 이런 일체의 문제가 제기된 적이 없다.
그런데 그렇다는 것만 관한다고 해서 생사현실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기에
현실에서는 그런 사정을 잘 관하고 그런 바탕에서 수행에 임해야 하고 또 사정에 따라선 때로는 몸을 숨겨 도망을 갈 필요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이런 내용이 현재 살피는 잡아함경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라고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데
이런 내용들은 모두 생사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가운데 하나같이 각 상황 각 입장마다 조금씩 달리 제시되는 내용이기에 함께 이것을 놓고 살펴야 한다고 본다.
자칫하면 6조단경은 올바른 가르침인데 그러나 이와는 다른 입장을 제시하는 잡아함경은 오히려 적절하지 않은 가르침이라고 이해하거나 또는 그 반대로 이해하고 이들을 대하기 쉬운 것이다.
그래서 이들 각 입장이 서로 어떤 관계로 제시되는가를 잘 살펴서 이들을 잘 조화롭게 대하고 현실에서 실천해나가야 한다고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