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현실에서 쉽지 않다. 예를 들어 길거리에 서서 오가는 영희나 철수도 보고 자동차도 보고 집도 본다면 이것을 하나같이 영희나 철수로 보고 자동차나 집으로 보고 대하지 상을 갖고 임하지 않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만일 상을 갖고 임하면 그처럼 상을 취하고 보는데에 따라서 생사에 묶이게 된다. 한편 그런 각 부분이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님을 잘 관하고 상을 취하지 않고 상에 머물지 않으면 그로 인해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게 된다.
현실에서 각 주체가 기본적으로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을 얻는다. 그런데 감각현실의 일정 부분을 나누고 묶어서 어떤 부분이 자신이라거나 영희나 철수라고 분별을 일으키고 그런 분별에 바탕해서 그 부분에 그런 내용이 있다고 여기면서 대한다. 이것이 욕계의 기본적 상황이다.
어떤 이는 현실에서 감각현실로 얻는 내용을 놓고 망집을 일으켜 이런 내용을 외부세계나 외부 대상 그리고 정신과는 별개의 외부물질로 여기고 더 나아가 외부의 객관적 실재라고 여기며 대한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이런 감각현실은 색, 성, 향, 미, 촉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이 전체를 묶어 다시 넓은 의미의 색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이런 감각현실 전체는 그 일체가 마음안에 머무는 마음내용이고 이들 내용에는 그런 내용을 얻게 한 외부대상은 없다고 제시한다. [유식무경] 한편 세계를 색 수 상 행 식이란 범주로 5 분할 때 이들 감각현실은 색의 범주에 들어간다. 그것들은 현실에서 눈으로 보거나 만질 수 있는 내용이다.
반면 수 상 행 식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이들은 명색이라고 표현할 때 명에 해당하는 부분이 된다. 또는 이 부분을 무색이라고도 표현한다.
예를 들어 평소 관념분별을 행할 때 관념분별은 눈으로 보거나 만질 수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색이 아니고 여기에는 그런 색이 없는 것으로서 명이나 무색의 범주에 넣는다.
평소 우리가 현실에서 얻고 그래서 외부 세계로 여기는 것은 바로 이런 내용들이다.
세계를 나눌 때 세계를 색계, 무색계, 욕계로 구분한다.
그런데 생사고통을 심하게 받는 세계로서 3 악도라고 표현하는 축생, 아귀, 지옥은 욕계에만 있게 된다. 그 사정은 욕계의 기본 바탕이 위에 제시한 것처럼 한 주체가 얻는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을 놓고 망집을 일으켜 임하기 때문이다.
쉽게 이를 살피면 현실에서 어떤 주체가 어떤 욕구나 희망을 갖는 것은 욕구나 희망 자체만 놓고 보면 관념분별 영역안의 내용이다.
예를 들어 관념영역에서 자신이 평소 좋다고 여기는 내용들을 조합한다. 그래서 만일 그런 좋은 상태가 있다면 좋을텐데 라는 형태로
분별을 행한다. 이런 상태가 한 주체가 희망을 갖는 상태다.
그런데 욕계에서 일으키는 그런 희망은 관념분별 영역에서 관념 내용을 얻어내는 것에 목표가 있지 않다. 그런 상태를 향하는 것이 아니고 감각현실을 향해서 자신의 희망에 상응한 상태가 성취되기를 바란다. 즉, 감각현실 안에 자신이 분별하는 그런 내용이 있다고 여기면서 감각현실 영역안에서 어떤 상태를 성취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지금 더워서 물을 마시고 싶다고 한다면 그런 희망은 그 자체만 놓고 보면 관념이다.
그런데 그런 희망은 관념영역에서 '관념으로서 물'을 얻어 내는데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경우는 물이란 관념으로 가리키는 감각현실을 얻어내는데 목표가 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그 주체가 관념과 그 관념으로 가리키는 감각현실을 모두 함께 접착시켜 이해하는 것이 욕계의 기본 바탕이 된다.
그래서 한 주체가 자신의 희망이 성취된다고 여기는 상태는 자신이 희망에 상응하는 그런 '감각현실'을 얻고 다시 그 상태에서 그 상태가 자신이 가진 희망과 일치하는 상태라고 '분별'을 행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런 경우 자신이 가진 희망이 성취되었다며 좋음을 느끼게 된다.
욕계내 희망의 구조가 이렇게 되어 있으므로 관념과 감각현실을 접착시켜 대할 때 이들 내용이 뜻에 맞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3 악도와 같은 상태가 나타나게 된다.
자신이 대하는 감각현실이 자신의 뜻에 맞지 않아 당장 고통을 줄 뿐 아니라, 관념 적으로도 고통을 줄 다른 상태에 대해 공포나 불안을 갖는 상태가 가장 극심한 고통을 받는 상태로서 지옥의 상태가 된다.
한편 대하는 감각현실은 뜻에 맞지 않아 고통스럽지만, 장래에 대해 희망을 갖고 그 희망에 묶여 끌려가는 상태는 아귀의 상태가 된다.
그런데 무상 무원무작 삼매는 감각현실에 있다고 여기는 그런 관념분별내용은 그런 현실 어느 한 단면에도 본래 얻을 수 없음을 관하는 수행이다.
예를 들어 일반적으로 현실에서 자동차나 영희나 철수가 이리저리 오고 가고 날씨가 덥거나 춥고 등등으로 일정한 감각현실을 얻고 이를 바탕으로 온갖 분별을 행하며 현실에 임한다. 그런데 이는 욕계에서 앞과 같은 망집을 바탕으로 그런 분별을 하고 임하는 상태이다.
현실에서 그런 내용을 기준으로 붙잡고 임하면 그런 상태가 있다고 여기게 된다. 그리고 그런 상태가 중요하다고 여기며 대하게 된다. 그래서 욕계내 각 중생은 그런 바탕에서 그렇게 현실을 대하고 있다.
예를 들어 축사에서 지내는 축생도 축생대로 오늘은 날씨가 덥고 먹을 것은 별로 맛이 없다고 현실을 대하고 아귀나 지옥세계의 중생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그런데 왜 이처럼 생사고통을 심하게 받는 3 악도에서 그런 중생들이 그렇게 놓이게 되었는가하면 어느 순간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을 놓고 망집을 일으키고 그에 바탕해서 자신의 좋음과 나쁨과 관련해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 등의 번뇌를 일으키고 그 바탕에서 업을 행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후 그 업의 장애로 인해 근본정신이 그런 상태로 묶여 생을 받아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이런 내용이 부처님이 제시하는 생사과정의 설명이다.
즉 처음 근본 어리석음 무명을 바탕으로 무명 - 행 - 식 - 명색 - 6 입 - ......- 노병사 이런 형태로 전개된 내용이다.
그래서 이런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려면 가장 기초적으로 현실 한 단면을 놓고 잘 판단해야 한다.
즉, 그런 한 단면에조차도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분별내용은 얻을 수 없음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무상해탈삼매문을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나아가 그런 망상분별에 바탕해 일으켰던 온갖 쓸데없는 희망을 모두 제거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요구된다.
한편 이런 감각현실이나 관념분별의 본 바탕이라고 할 실재가 공함까지 관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래서 현실에서 얻는 이들 내용은 본 바탕인 공한 실재영역에서는 본래 얻을 수 없는 내용임을 이해해야 한다. 그런 상태에서 마치 침대에 누어 꾸는 바다나 황금꿈처럼 실다운 내용이 아님을 관하는 공해탈문도 함께 수행해야 한다. 즉 매순간 대하는 현실은 비록 매 순간 대단히 생생하고 진짜인 것처럼 여겨지지만, 그 본 바탕은위와 같음을 이해해 집착을 깆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종전과는 반대로 계 정 혜 3 학을 닦고 생사고통을 받게 하는 업의 장애를 제거하는 수행을 통해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평소 일반적으로 자신이 좋음을 얻기 위해 다른 중생이 집착하는 좋음을 아끼고 베풀지 않는다. 또 다른 중생이 집착하는 좋음을 함부로 침해하고 다른 중생을 해치고 고통을 가한다. 그런 가운데 자신의 좋음을 침해받으면 미움 원망 분노를 일으키고 그 상대에게 보복을 가하며 현실에 임한다. 그리고 이들 형태가 욕계 중생이 망집에 바탕해 현실에 임하는 행하는 업의 성격이다.
물론 위 내용들을 그렇게 행하는 그 주체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같이 자신의 좋음을 얻기 위한 내용들로서 합리적인 이유가 있고 정당하다고 여길만 한데 그런데 다른 주체가 그 주체의 입장에서 같은 성격의 내용을 자신을 향해 행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자신이 그 상대에게 고통을 그에 상응해 되돌려주어야 한다고 보는 사유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사정으로 이 내용들이 바로 한 주체가 생사현실에서 가해와 피해를 주고 받으면서 욕계안에서 서로 생사에 묶이게 되는 업의 장애가 된다.
그래서 이 사정을 올바로 관하여 이 내용을 생사현실에서 제거해내고 수행으로 대체해 넣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지금 당장 욕계의 3 악도에 처하지 않아도 결국은 3 악도에 묶이는 상태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이런 내용이 '일체가 고'라는 내용이다. 물론 이 가운데 어느 한 단면만 뚝 떼어 놓고 보면 어떤 상태는 그 자체는 고통은 아니다. 그러나 이 한 단면은 홀로 독립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런 약간의 좋음을 징검다리 삼아 결국은 3 악도에 들어가 고통을 받게 된다. 그래서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하여 3계에 임하는 그 일체는 모두 고통을 가져다 준다. 따라서 일체가 고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이 상황을 비닐마술의 비유를 통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비닐마술이란 동그라미가 그려진 비닐과 세모가 그려진 비닐을 두개를 겹쳐 놓고 대하면 어느 비닐에도 없는 안이 세모인 도너츠 모양이 있다고 여기게 되는 현상이다.
그래서 두 비닐에 그려진 내용을 겹쳐서 이들을 접착시켜 대하는 상황에서는 한 비닐에 있는 세모는 동그라미가 그려진 비닐에도 있다거나 반대로 한 비닐에 있는 동그라미는 세모가 그려진 비닐에도 있다고 여기게 된다. 그러면서 어느 비닐에도 없는 안이 세모인 도너츠 모양이 있다고 여기게 된다.
그리고 이처럼 망집을 일으켜 임하는 것이 욕계의 기본 상황이다.
현실에서 눈을 뜨고 세상을 보면서 어느 부분은 영희라거나 또는 철수라거나 집이나 자신이라고 여기며 대하는 상태가 바로 이런 상태다.
즉 자신이 영희라고 여기며 어떤 부분을 대하는 것은 그 부분에 자신이 생각하는 영희가 그렇게 있다고 여기는 것이고 또 자신이 분별해 떠올리는 영희는 그런 감각현실을 그 내용이 된다고 여기며 평소 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현실에서 그처럼 임하는 상태가 어떤 상태인가에 대해 위 비닐마술의 비유를 놓고 잘 이해해야 한다.
비닐마술에서 있다고 보게 되는 안이 세모인 도너츠 모양은 어느 비닐에도 얻을 수 없는데 그러나 그런 상태에서는 그런 것이 있다고 전제하고 그 바탕에서 계속 각 비닐 내용을 대하게 되는 상태로서 결국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는 어떤 부분을 붙잡고 그 부분에 그런 내용이 있다고 자꾸 여기며 대하는 망집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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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기본적으로 수행에 임해서 정려 수행을 닦게 되면 이런 상태에서 점차 벗어나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한 주체가 정려 수행을 위해 처음 마음을 한 내용에 집중시켜서 심일경성의 상태로 현실에 임하게 되면 점차 그 집중된 마음에 의해서 우선 반사적으로 그 이전까지 마음에 들어 있던 번뇌나 산란한 다른 내용들이 제거되게 된다.
그런 가운데 그런 집중을 계속 유지해나가면 점차 동그라미는 동그라미이고 세모는 세모라고 여길 뿐 동그라미가 있는 곳에 세모가 있다거나 세모가 있는 영역에 동그라미가 있다는 식으로 이들 각 영역의 내용을 접착시켜서 망집을 일으키는 상태에 처하지 않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내용을 다음과 같이 살펴보자.
현실에서 한 주체가 예를 들어 눈을 뜨고 세상모습을 본다고 할 때 처음에는 그 가운데 자신이 초점을 맞추는 일정 부분은 무엇무엇이라고 관념을 일으키게 된다.
그런데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어떤 주체가 얻는 감각현실 가운데는 그런 생각을 갖고 대하는 감각현실 부분이 있는 반면 그런 관념분별을 일으켜 대하지 않는 부분도 있게 된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눈을 뜨고 대할 때 자신의 보는 내용 전체 가운데 어떤 이가 자신의 시야 한 구석에 있는 어떤 것 예를 들어 책상 구석에 있는 검은 물건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 상태에서는 잘 대답을 하지 못한다. 그것은 그 상태에서는 그 부분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따라서 분별을 행하고 있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상태에서는 그런 질문에 대해 답을 잘 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런 질문ㅇ르 받고 이제 다시 그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그 부분이 무엇인가 의식을 기울여 분별을 행하게 되면 이제 비로소 그 부분은 책이라거나 상자라거나 이런 식으로 분별을 하고 답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사실을 통해서 평소 감각현실을 얻을 때는 그 가운데 일정부분은 초점을 맞추고 의식을 기울이고 분별을 일으켜 대응시키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그런 분별을 대응시키지 않고 그저 감각현실만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는 부분도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망집현상이라고 표현하거나 현실에서 생사에 묶이게 하는 원인으로서 상을 일으키고 상을 취하고 상에 머무는 현상이란 평소 행하는 이런 활동과 관련해서 살핀다면 그 가운데 평소 초점을 맞추고 일정한 관념을 일으키면서 일정 부분을 대하는 부분이 바로 그런 상태와 관련되는 것이다.
그래서 거리에서 수많은 사람과 물건이 놓여 있다고 할 때 자신이 일정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그 부분을 그렇게 묶고 나눈 가운데 어떤 한 부분이 영희라고 관념분별을 일으키게 되면 이후 그는 그런 분별을 바탕으로 그렇게 영희라고 여기는 그 부분을 그렇게 취하고 그것을 붙잡고 그 부분을 그런 관념분별로 대하게 된다는 의미다.
재료가 되기는 하지만, 정작 그런 부분을 붙잡아 그 부분이 무엇이라고 분별을 일으키고[想] 그런 가운데 그 두 내용을 접착시켜 망집을 일으키고 그 부분을 붙잡고 취하고 그에 머물고 그에 바탕해서 각종 업을 일으키는 영역은
그런 관념분별을 그렇게 행하고 그런 자세로 임하는 관념분별영역에서의 일이라는 점이다.
이 상황에서의 문제는 현실에서 그런 감각현실 부분에 그가 생각하듯 그가 생각하는 그런 영희나 자신이나 꽃 등과 같은 관념분별 내용이 그 영역에 그렇게 정말 있으면 다행이고 좋을 일인데 그러나 사정을 살펴보면 사정이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그가 그렇게 분별을 일으키고 그에 바탕에 그 부분을 대하고 임하는 이상 그는 그런 부분에 그런 것이 있다고 여기면서 집착하고 그 현실에 임하는 상태에서 벗어나오기 힘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주체의 입장에서는 그 부분을 대하며 그 부분이 영희라거나 자신이라는 등의 생각을 일으킨 것이고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고 대하는 이상 그 부분이 영희이거나 또는 자신이라는 생각 자체가 엉터리라는 생각을 꿈에도 하지 못하고 계속 매순간 순간 그 부분을 그런 생각을 바탕으로 그렇게 계속 대해나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망집을 일으킨 바탕에서 업의 장애를 일으키고 생사에 묶이게 되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현실에서 위와 같이 상을 일으키고 임하게 되면 그 가운데 자신이 가장 집착을 갖고 대하는 부분은 결국 평소 자신이나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는 내용들이 된다.
그리고 이런 자신이나 자신의 것을 중심으로 놓고 그런 바탕에서 어떤 좋음을 추구하고 나쁨을 피하기 위해서 자신과 비슷한 상태로 임하고 있는 욕계내 다른 중생이 집착하는 것을 함부로 침해하고 해치고 다른 중생이 집착하는 좋음을 베풀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좋음을 침해받으면 분노를 일으키고 상대에게 보복을 가하고 해치는 행위를 해나게 된다.
그런데 욕계내 각 생명은 모두 제각기 이런 자세로 임하면서 업을 행하기 때문에 결국 위와 같은 망집을 일으키고 임한 욕계 중생은 그로 인해 생사고통에 묶이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것이 혹- 업 - 고의 관계식이다. 즉 망집분별을 바탕으로 한 탐욕 분노 어리석음의 번뇌[혹] -- 그에 바탕해 일으키고 행하는 생각과 말과 행위 태도 자세의 업 -- 그리고 그로 인해 극심한 생사고통을 받는 3 악도에 묶여 받아나가는 고통 이런 관계식이 그런 사정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그래서 욕계에서 생사고통에 벗어나려면 그렇게 묶이게 만드는 그 근본원인을 제거하기 위해서 일단 기본적으로 심일경성의 마음 상태를 이루고 자신이 그렇게 평소 대하는 내용을 놓고 집중해서 그것을 대하고 관찰하는 수행을 먼저 시작해야 한다.
정려 수행을 하는 가운데 처음 한 부분에 초점을 맞추면 그 상태 그 부분은 비록 욕계내 일반상황과 유사할 수는 있지만, 그로 인해 나머지 부분은 그런 상태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것을 전문용어로는 사마타라고 표현하게 된다.
즉, 자신의 마음이 그 어느 부분에 집중하게 되면 그 반사적 효과로서 마음에서 집중하지 않는 부분은 사라지는 효과가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을 집중하면 마음에 산란하게 오가던 수많은 번뇌나 망상 분별도 이를 통해 제거되는 효과를 얻게 되는데 이것을 사마타[지] 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물론 이 경우 어느 한 부분에 집중하여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관념분별을 일으키지 않는 상태에 놓이더라도 눈을 뜨고 감각을 하는 이상 감각현실 영역에서 얻는 내용만 놓고 보면 전과 별차이가 없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감각현실만 놓고 보면 본래 그것 뿐인 것이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감각현실로선 원래 이 상태가 정상인 것이다.
다만 상을 취하는 상태에서는 그런 감각현실에 대해 일으킨 관념분별을 가지고 그런 감각현실을 달리 대하여 그런 부분을 그런 분별을 바탕으로 취하고 그렇게 붙잡고 접착되어 늘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집중하면서 자신의 의식의 초점을 맞추는 내용에 점점 집중해가면 자신이 분별하는 그런 내용이 감각현실에 있다고 여기면서 그것을 대하는 상태가 점점 제거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감각현실은 얻어지고 있어도 이전처럼 그 부분에 자신이 생각하는 영희나 자신이 있다고
여기면서 그것을 대하는 상태들이 점점 제거되게 된다.
그리고 이제 자신이 대하는 감각현실을 놓고 분별을 일으킨 내용 가운데 자신이 마음을 집중시킨 일부내용만 놓고
이에 대해 대충 거칠게 관하거나 [심] 또 그것을 놓고 세밀하게 살피는 가운데 [사]
앞에서 비유로든 비닐마술을 놓고 설명하자면 처음 동그라미와 세모를 겹쳐 놓고 이것이 각 영역에 다 함께 있다고 여기는 상태가 점점 마음에서 제거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점점 집중을 해서 앞에서 제시한 심사 정신 작용 자체마저 사라지게 되면 무심무사의 상태가 되었다고 표현하고 이 때부터 초선의 상태를 완연히 벗어나 제 2 선의 상태에 들어서 색계 제 4 선까지에 이어지는 상태가 되었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상태만 되어도 욕계의 상태를 벗어나 색계에 상당히 진입한 상태가 되는데 이후 점점 정려 수행을 깊게 행하게 되면 다시 색계를 벗어나 무색계의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고 제시된다.
무색계 선정에는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 이런 단계가 냐열되는데 물론 직접 정려 수행을 닦기 전까지는
단지 명칭만으로 이 각 상태를 구분하게 되지만,
초보수행자는 결국 이런 명칭과 함께 앞에 제시한 대강의 선정 수행방법을 통해 직접 정려 수행을 행해 나가면서 이들 명칭이 제시하는 상태를 개별적으로 주관적으로 증득해 나가야 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정려 수행방법이란 그 자체만 놓고 보면 간단하다. 처음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그 숨을 세는 가운데 마음을 그 숨에 맞추고 집중하는 것이 첫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수식관 ] 그리고 그렇게 숨을 세는 가운데 마음이 집중되면 [ 심일경성 ] 그 집중된 마음상태로 한편으로 산란한 번뇌가 제거되는 한편 [ 사마타-지 ] 자신이 살피고자 하는 내용을 놓고 살펴나가는 것이다. [비발사나-관]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숨을 쉬는 가운데 숨을 따라 숨이 오가는 길을 따라 살핀다거나 아니면 신, 수, 심, 법을 놓고 그 각 내용을 살핀다거나 [4념처] 자신이 연구하고자 하는 법을 택한 다음 그것이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놓고 깊게 생각을 하거나 결국 마음을 집중해서 임한다는 것이 기본이다.
정려 수행방안에 대해서 경전에서 이와 같은 기본적 내용 외에 좀더 자세하게 숨은 내쉴 때 어떻게 내쉬고 자세는 어떻게 취하고 이런 자세한 방안이 각 단계마다 제시되면 더 도움이 될 수 있을 지 모르지만, 결국 위와 같은 방안이 기본이다.
다만 이론상 왜 정려 수행을 닦기 이전 단계는 욕계 상태라고 제시하고 정려 수행을 닦게 된 그 이후는 색계에 진입한다고 하고 그 이후 이후는 또 무색계에 진입한 상태라고 하는가에 대해 연구자 입장에서 추가적으로 그 사정이 위와 같다고 이론적으로 해석하고 설명을 덧붙이게 되는 것 뿐이다.
이론적 설명 가운데 정려 수행시는 왜 분노의 번뇌가 해당이 안되는가 하는 것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일반적으로 분노를 일으킨 상태에서는 자신이 대하는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는 상태이기에 일정한 내용에 집중을 하고 임하기 곤란한 상태가 된다. 예를 들어 분노를 일으킨 상태에서는 그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것을 오래 대하기 곤란하게 되고 더 나아가 분노가 치밀어 오르면 보이는 것마다 다 마음에 들지 않아 분노를 일으키고 마음이 산란한 가운데 이것 저것 보이는 것마다 부수고 내던지는 상태인 것이어서 차분히 한 내용에 집중하여 머무는 정려 수행의 상태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그래서 정려 수행을 하려면 반대로 마음에서 이런 분노를 일으킨 상태로부터 벗어나야 하고 또 그처럼 분노의 상태를 벗어나야 정려 수행을 잘 행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정려 수행을 진행하게 된 상태에서는 또 그 상태는 분노의 번뇌는 제거되어 분노로부터 일단 벗어난 상태라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정려 수행의 각 단계를 비닐 마술이 비유나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의 관계를 놓고 설명한다면,
처음 정려수행을 하지 않고 임하는 일반 욕계의 상황에서는 이 두 내용을 서로 겹쳐 접착시켜 놓고 관념분별의 내용이 감각현실에 그처럼 있다거나, 감각현실의 내용은 또 반대로 관념분별에 들어가 있다고 망집을 일으킨 가운데 결과적으로 각 영역에서 얻을 수 없는 엉뚱한 내용을 놓고 그것이 그처럼 각 영역에 있다고 여기는 상태를 바탕으로 한다면,
색게에서는 감각현실을 바탕으로 일정한 관념분별을 일으키기는 하지만, 집중을 통해 앞과 같은 망집을 일으킨 대부분과 그로 인한 번뇌를 제거하는 한편,
집중한 부분에 있어서는 감각현실은 감각현실이고 관념분별은 관념분별인 상태로 이를 대하게 되는 한편,
점차 집중을 심화시켜나가는 가운데 점차 감각현실에 바탕해 일으키는 관념분별도 제거되어지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고 할 수 있다. [무심무사]
그리고 무색계는 그 명칭을 통해 살필 때 이제 감각현실에 대응한 관념분별은 더 이상 행하지 않고 무색의 범주에 넣게 되는 수, 상, 행, 식의 내용 가운데 점차 뒤의 내용부터 제거되어 나가는 과정이라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 공무변처 - 식무변처 - 무소유처 - 비상비비상처와 같은 명칭으로 이들 각 상태를 표현해 나타내게 된다고 이해하게 된다.
한편 멸수상정[멸진정]도 이에 준해 생각할 수 있다.
연구를 행하는 연구원 입장에서 이런 각 명칭의 정려 수행을 직접 시범을 보여주면서 설명을 하고 또 각기 다른 이의 마음 안 상태를 직접 들여다 보면서 만지고 하면서 이를 검토하고 살필 수 있다면 좀 더 좋을 지도 모르는데 그러나 사정상 그것이 곤란하기에 위와 같이 일단 명칭만 놓고 각 단계에 대해 살피고 설명하는 것도 수행과정에서 조금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처음 무색계에 진입할 때의 단계를 공무변처라고 표현하는데 이 때의 공은 색즉시공 이라고 표현할 때의 공[śūnyatā]과는 다른 표현으로서 허공을 의미하는 공[ākāśa]이다. 즉 이 상태는 허공이 끝이 없이 펼쳐지는 그런 상태라고 명칭만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정려 수행을 점점 깊이 행하게 되면 무색계정의 단계에 이르러 왜 그렇게 되는가를 이론상으로 먼저 이해해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자신이 눈을 뜨고 무언가를 보는데 눈을 뜨고 보는 것 일체에 대해서 그에 대해 관념분별을 일으키지 않고 대응시키지 않는 상태를 생각해보자.
그런데 일반 욕계의 현실은 어떤가하면 자신이 눈을 뜨고 세상을 대할 때 그렇게 대하는 상태가 아니고 그 가운데 일부는 하늘이고 일부는 건물이고 이렇게 동시에 분별을 행하면서 그것을 대하는 것이 일반적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이 가운데 허공이라고 분별하는 부분은 자신이 그 부분에서 어떤 분별을 행할만한 어떤 것도 얻지 못하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허공이란 그런 것이다. 거기에 자신이 평소 분별할만한 어떤 것도 얻지 못하고 그 대신 자신이 평소 분별한 그 무언가를 놓고 그런 것들이 그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라고 대하는 부분이 허공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일반적인 상황에서도 자신이 그런 분별을 일체 일으키지 않고 그런 분별로 대응시켜 대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에게 또 무엇인가를 곰곰히 되살펴 보아야 한다. 물런 이런 반성 검토 과정에서는 그런 분별이 그 부분을 향하게 되면 그 부분은 다시 앞에서 분별을 행해 대하던 부분으로 성격이 곧 바뀌게 되기는 하지만, 여하튼 스스로 자신의 감각 분별과정을 되돌아 보면서 그 각 부분이 갖는 의미 차이를 자신이 잘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정려 수행을 통해 집중을 점점 깊게 하게 되면 반사적 효과로 점차 그런 감각현실에 대해 일으킨 분별과 망집현상이 점차 제거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그런 상태에 가깝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려 수행을 한다고 해서 예를 들어 자신이 감각현실을 얻게 되는 눈을 뽑거나 눈을 제거해내는 수행을 하는 것은 아니다.
사정이 그러므로 정려 수행을 하더라도 눈을 통해 보고 얻던 내용은 계속 보고 얻는 것이지만, 다만 점차 의식을 한 내용에 집중시키는 가운데 집중을 더 깊게 해나가면 나갈수록 결국 감각현실에 대응시키는 분별이 제거되는 상태에 이르게 되어 감각현실과 자신이 행하는 관념분별의 관계는 앞에 제시한 분리 상태에 가깝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끝에 분별이 멈추는 한편 완전히 그 관계가 떨어지게 되면 이제 그 상태를 그 주체의 근본 정신이 무색계에 진입해 들어가게 된 상태에 이르게 된 것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것이다.
연구원 입장에서 이런 가설을 제시해 놓고 더위를 쫒기 위해서라도 정려 수행에 들어야 하는데
그렇다고 신체 온도를 너무 낮추면
또 주변 사람들로부터 사망한 것으로 오해를 받고 가매장 당하는 수도 있기 때문에 주변상황을 잘 살피고 정려 수행에 진입해야 한다고 본다.
극단적으로 운전 중이나 어떤 기계를 조작하는 상황에서 이런 정려 수행에 들면 당연히 곤란하다.
일단 앞에 제시한 여러 내용들이 현실에서 직접 정려 수행을 닦는 내용과 관련해 이론상 문제가 없어야 하는데 그런 부분은 제각각 일단 직접 정려 수행을 행하고 닦아가면서 검토해나가기로 한다.
그런데 혹시 무색계에 들어가면 자신이 평소 색이라고 보던 일체가 그로 인해 다 소멸하고 그래서 그렇게 무색계 상태에 들었다가 다시 욕계의 상태로 귀환하게 되면 그로 인해 자신의 신체가 다 없어진다고 우려할 수도 있는데 상식적으로는 그렇지는 않은 것이다.
그래서 무색계에 들어가더라도 자신이 평소 색으로 넣어 이해하던 그런 부분과 그런 내용을 얻는 활동도 계속 이뤄지지만,
다만 의식이 문제삼는 세계의 범위나 그 상태가 점차 그렇게 변화해가면서 정려 수행의 상태가 점차 깊어지고 이를 통해서 평소 자신이 이해한 세계나 자신이나 자신의 정신 등의 정체도 스스로 잘 살펴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상과 같은 정려 수행에 특별한 방법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고 처음 숨을 세면서 의식을 이에 집중시켜 자신의 신체와 마음을 일치시키는 가운데 이후 자신이 관심을 두는 하나의 내용에 그 집중된 마음을 향해 나가는 것이 핵심인 것이다. 그리고 이후는 점차 그 집중도를 높여 나가고 또 유지해나가는 것이다.
정려 수행에 있어서 별 다른 특별한 방안이 따로 있어서 손가락은 허공을 향하고 있어야 한다거나, 배와 허리는 숨쉴 때마다 어떻게 자세를 취해야 한다거나 또는 선정수행시 엉덩이는 들썩여야 한다거나 이런 특별한 방안이 따로 요구된다면 이를 추가해야겠지만, 알고보면 경전에 이런 별다른 추가 내용은 특별히 따로 제시되지 않은 것이다.
처음에는 반듯이 앉아서 시작하지만, 나중에 익숙해지면 걸어다니거나 가만히 머물러 있거나 앉거나 눕거나 어느 상황에서도 [행주좌와] 이 정려 수행이나 삼매 수행은 가능하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고 제시된다.
한편, 정려 수행시 욕계에 들어가 지옥중생이나 아귀 중생이 가득한 세계를 방문해서 그 상황을 대하게 되면 수행자 자신도 놀라게 되기 쉽다.
예를 들어 평소에 바로 자신 옆에 바퀴벌레나 어떤 곤충이나 또는 예를 들어 잘 모르는 고양이나 생쥐만 하나 떡 있다고 해도 대부분 놀라게 되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정려 수행은 욕계를 떠나 색계부터 방문하는 것이 좋은 것이다
물론 자신의 기본 상태에 따라 색계의 중생들이 오히려 자신을 대하면서 바퀴벌레가 나타난 것처럼 대하면서 놀랄 수는 있는데 기본적으로 색계와 무색계는 오로지 수준이 높은 하늘 중생만 있는 하늘세계여서 욕계와는 그 사정이 다른 것이다.
그리고 정려 수행을 하는 가운데 첫 단계로 욕계를 떠나 색계에 진입하여 초선양을 만나는 단계에서는 온 몸에 진동이 일어나게 된다고 경전안에 제시되지만, 이는 별 다른 증상은 아니고 그 상태로 계속 집중해 가면 된다고 본다.
추가로 정려 수행 과정에서 진입하게 되는 색계와 무색계는 기본적으로 하늘만 있는 상태이기에 처음부터 범천에 진입해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정려 수행의 목표는 정려 수행을 통해서 망상분별과 번노를 제거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하늘 상태에 마냥 평안히 머무는 것이 그 목표가 아니다.
그래서 정려 수행을 행하고 다시 욕계 현실로 돌아오게 되는데 미리 이것을 잘 념두에 두고 정려 수행에 임해야 한다.
정려 수행목표를 잘못 잡으면 정려 상태가 평안함을 주기에 정려에 들어 마냥 색계나 무색계에 임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 쉬운데 그런 가운데 1 겁 2 겁 머물러 근본 정신은 그대로라고 해도 그것이 생사를 완전히 벗어나게 해주는데 이르지 못하게 될 뿐 아니라 그런 상태로 나중에 욕계에 귀환할 때는 그로 인해 자신이 근본정신이 걸친 옷이라고 할 신체형태가 바뀌게 되는 불상사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선정에 들었다가 깨나니 집이 없어져 있고 머리 위에는 까치가 집을 짓고 있다는 것은 사소한 에피소드에 해당하고,
아예 근본 정신이 이번 생에 걸치고 있던 옷이라고 할 자신의 몸 자체가 다른 생명형태로 바뀌어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이 전보다 좋은 상태면 좋은데 욕계에 돌아와보니 전보다 못하게 축사에서 지내야 하는 축생의 형태가 되있다면 좋겠는가.
그래서 정려 수행에 들 때는 미리 욕계 현실로 돌아와서 임할 내용을 미리 잘 선택해 정하고 [택법] 정려 수행에 들어가도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극락 왕생을 목표로 수행할 때도 극락 왕생의 본 취지는 그곳에서 수행을 다 마친 후 어떤 상태가 되어 어디로 어떻게 돌아와 어떤 형태로 수행하고 중생을 제도해나갈 것인지에 대해 [환상회향] 그 내용을 미리 잘 정하고 왕생을 해도 해야 하는 것처럼 정려 수행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색계 4 선을 다 마친후 색계에서 무색계정으로 들기전에는 그런 수행의 본 취지에 맞추어 4 무량심 즉 무량한 자, 비, 희, 사의 내용을 검토하고 4 무색계정으로 들어가는 것이 원래 수행의 방안임도 주의해야 한다고 본다. [ 4 색계정 - 4 무량심 - 4 무색계정 ]
앞에서 상을 없애는 내용과 관련해 정려 수행의 각 단계를 설명했는데 상이 상이 아니다 이런 경전내용을 외우고 이해하는 것도 물론 필요하지만, 이들은 이론적 이해로만 그칠 내용이 결코 아니고 생사현실에서 수행자가 직접 몸소 실천해서 개별적으로 증득해 나가야 할 내용이다.
그리고 상을 없애고 현실에 임하는 수행은 사실은 생사의 묶임에서 풀려나 벗어나는 과정에서 가장 극복하기 힘든 고비점인 안인 수행을 원만히 성취하는데 가장 필수적인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내용을 다시 살피기로 한다.
간단히 욕계의 3 악도에서 겪는 생사고통은 그 주체가 그것을 원해서 그런 고통을 겪는 것은 아니다.
어떤 주체라도 자신이 원하는 상태란 자신이 원하는 뜻이 다 성취되어서 평안하게 즐거움을 얻는 상태고 또 장래에 대해서도 그런 뜻이 뜻처럼 성취되는 상태를 그려가면서 희망을 갖고 대하는 상태가 가장 바람직한 것이다.
그런데 3 악도에 처하는 중생은 그렇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상태를 자신이 원해서 그렇게 그런 세계에 들어가 임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한마디로 자신은 좋고 좋은 상태를 바라고 그런 상태를 얻기를 원하는데 그런 뜻과 달리 매 순간 고통을 받고 공포와 걱정과 불안에 쌓여서 지내게 되는 것은 자신이 그런 것을 희망해서 그런 것이 아닌데 그렇게 처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 것은 그렇게 원하지 않아도 그런 고통을 받게끔 그가 업의 장애로 그런 상태에 묶이게 되어서 그런 것이다.
쉽게 예를 든다면 어떤 물고기가 숨쉬기 힘든 도마 위에 놓여져 헐떡거리는 가운데 칼로 몸을 난도질당하게 되는 것은 그 물고기가 그것을 원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그 상황을 굳이 설명하자면 그 물고기 입장에서는 감내하기 힘든 고통을 당하는 상황인데 그 상황을 놓고 그것이 좋음을 자신에게 준다고 여기면서 물고기를 그렇게 놓고 대하는 어떤 요리사나 그 물고기요리를 주문한 어떤 이 때문에 그런 고통을 당하게 되는 상황인 것이다.
욕계내 중생이 업의 장애로 인해 3 악도에 들어가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겪는 사정도 마찬가지다. 축생이나 아귀 지옥세계에 각 중생들이 들어가 묶여서 그런 고통을 받아나가는 것은 알고보면 그 주체가 그것을 원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그런데 어떻게 생사과정에서 한 주체가 하필이면 그처럼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받는 그런 상태로 태어나 살아가게 되는가가 바로 현실에서 한 수행자가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는 수행과 밀접한 것이다.
본 바탕인 실재 영역에서는 본래 그런 일 자체를 얻을 수 없기에 이렇거나 저렇거나 다 무방하다고 보게 되지만, 본 바탕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사현실에서는 차별이 이처럼 극심한 것이다.
앞의 물고기상황을 비유로 들면 물고기는 극심한 고통을 겪는 상황을 놓고 물고기 요리를 주문해 먹는 이는 물고기가 그 상황에서 당하는 고통은 전혀 생각도 하지 않는 가운데 정신없이 그 상황에서 즐겁다고 하면서 물고기 요리 가격이 비싸다거나 싸다는 등의 이야기만 나누고 자신들끼리 이런 저런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고 정신없이 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길게 보면 각 주체가 그처럼 업의 장애를 일으켜서 서로 고통을 주고 받는 관계로 묶여서 앞에 제시한 3 계를 돌고 돌아다니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주체가 어떤 생사고통을 겪게 되는 것은 아무런 원인없이 발생하는 일이 아니고 기본적으로 현실에서 그 주체가 앞에 제시한 것과 같은 망집을 일으켜서 현실을 대하고 그에 바탕해 일정한 업을 행해서 그런 생사고통을 받게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수행이란 곧 이 하나하나를 근본적으로 제거하여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는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제 이 문제를 자신을 놓고 생각해보기로 한다.
자신이 어떤 심한 고통을 지금 겪고 있다고 해보자. 그것이 자신의 눈에 보이는 어떤 다른 상대가 자신을 찌르고 해치고 괴롭혀서 그런 경우도 있지만,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 세균이나 바이러스 등에 의해 그런 질병을 겪거나 어떤 사고를 당해서 그런 고통을 겪는 경우도 다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런 고통은 무한한 시공간에서 아무 전후 사정없이 그것만 홀로 독립해 그것만 단순하게 겪게 된 그런 사건은 아닌데 이제 논의를 위해 일단 그렇다고 가정해보자.
한 주체만 놓고 보면 그처럼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그런 내용을 극심하게 나쁜 상태로 판단하게 되고 또 그런 고통을 주는 상태를 악을 극심하게 행하는 주체라고 보게 될 것이다.
앞의 물고기 상황을 놓고 본다면 그것이 아무 전후 사정이 없이 최초로 그런 고통을 그런 상황에서 겪게 된 것이라고 한다면 그 물고기 입장에서는 그런 고통을 자신에게 가하는 상대 인간이 대단히 극심한 악을 행하는 주체라고 보게 되는 것과 사정이 같다.
물고기의 입장에 공감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어떤 상태에 때강도단에게 붙잡혀서 협박을 당하고 원하는 금품을 제공하지 않는다고 묶여서 그렇게 사지를 하나하나 절단당하는 상태라고 가정하면 공감이 바로 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무 전후사정도 없이 갑자기 홀연히 느닷없이 그렇게 일어난 최초의 사건이라고 앞에서 가정한 것 뿐이다.
이 상황을 놓고 그런 고통을 당하는 입장에서 이것을 어떻게 대하고 어떤 대처방안을 찾아 나서는가를 놓고 생각해보자는 의미다.
그 주체입장에서 지극히 고통스럽고 나쁜 일인데 지금 당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물론 자신이 온 힘을 다해 그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하는데 유감스럽게도 그것이 잘 안 되는 것이다. 마치 물고기가 온 힘을 다해 퍼덕거리는데 요리사는 머리를 붙잡고 꼬리부터 칼로 하나하나 살을 도려내는 상황과 같은 것이다. 그렇게 그 상황에서 고통을 받게 되는 이외에 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생명이 그런 신체가 없어져서 다 끝이라면 그것으로 그 사건은 끝이라고 할만한데 유감스럽게 그렇지 않다는 사정을 과거에 반복해서 살핀 것이다.
참고로 그와 관련된 내용을 그림으로 나타낸 내용을 다시 붙이면 다음과 같다.
[img2-9]
08pfl--image/8식-9.jpg
현실에서 물고기가 되었던 사람이 되었던 욕계에서 각 주체가 자신이라고 보고 매 순간 대하는 내용은 예를 들어 위 그림에서는 1! 라는 시각정보영역에서는 a! 와 같은 ◇ 부분으로 표시된 부분이다.
현실에서 각 주체는 이런 ◇ 부분과 같은 부분을 붙잡고 그것이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그렇게 매 순간 자극 - 반응을 해가는 상태인 것이다.
즉 ◇ 부분을 놓고 관념분별을 행하는 영역에서 그 부분이 자신이라고 여기는 a@와 같은 관념분별을 일으키고 그런 분별을 바탕으로 그 ◇ 부분을 취하고 그 부분을 붙잡고 머물러 온갖 행위를 해나가는 상태라는 의미다.
그런 가운데 위와 같은 고통을 극심하게 겪게 되면 결국 그 ◇ 부분은 형태가 사라지고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고 보게 되는데 문제는 이 상태에서 정작 그런 내용을 얻게 한 마음은 사정이 그렇지 않다는 의미다.
그래서 앞처럼 평소 자신이라고 본 ◇ 부분이 소멸하게 되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이고 그래서 자신과 관련된 내용은 이후 없게 된다고 보는 것은 단멸관이라고 표현하는데 그런데 각 생명이 처한 현실의 본 사정이 그렇지 않고 8 과 같은 근본정신을 바탕으로 망집을 벗어나지 못하면 매 생마다 그런 각 세계에서 업의 장애에 묶여 각기 다른 생명형태로 정신과 기관을 분화시켜 매 생을 살아가게 된다는 사정을 부처님이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결국 지금 대하는 현실 상황에서 그것이 자신이 되었던 다른 영희가 되었던 아니면 물고기가 되었던 그렇게 해서 한 생명이 죽고 나면 그 주체와 관련된 일은 더 이상 없다고 여기는 것은 망집에 바탕해 현실을 대하는 각 주체의 일반적인 생각일 수는 있지만,
그 본 사정이 그렇지 않아서 그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고 제시하는 것이 현실의 본 정체를 올바로 관하는 주된 핵심 사항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입장에서는 바로 그런 업으로 인해 이 업에 관련된 이들이 다시 역할을 바꿔서 그런 생사고통을 반복해 주고 받게 된다는 사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사정은 처음 그런 고통을 당하는 입장에 자신을 대입시켜 놓고 살피면 그렇게 다른 생명에게 고통을 가하게 되는 사정을 잘 이해할 수도 있게 된다고 보지만, 그러나 그 반대 입장에서는 그 관계를 잘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업의 장애현상인 것이다.
즉 자신이 그런 고통을 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데도 자신이 그런 고통을 당하는 것을 간절히 원하는 다른 욕계내 생명들과 얽혀서 그런 고통을 받아나가게끔 된다는 것이 3 악도의 사정인 것이다.
그래서 본 바탕에 그런 일을 얻을 수 없는데도 그런 바탕에서 현실에 그런 내용이 각기 있다고 여기는 망집 동호회원들이 욕계에 대단히 많아서 이들이 서로 그런 바탕에서 얽혀서 그렇게 매번 역할을 바꿔가면서 매 순간 그런 고통을 주고 받는다. 이 점을 여기에서 문제점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현상이 자신과 관련되지 않는 일이라면 세계대전에서 1 천만명이 부상을 당하고 사망을 당했다고 하더라도 담담하게 대할 수 있는데 사정이 그렇지 않고 자신과 관련된 일이면 단순히 손톱 하나를 뽑아내야 하는 사고만 되어도 상당히 걱정과 고통이 삼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원래 처음 최초에 그런 사정과 관련이 없이 어떤 악이 발생하게 되면 이 악을 놓고 그 대처방안을 찾다보면 그런 악이 다시 다른 주체에 의해 행해나가지 않게 되기 위해서 그런 고통을 가한 이에게는 그에 상응한 고통을 주어서 그런 일을 다시 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여기기도 하고
또 그런 행위를 직접 행한 이는 특별히 그런 성향이 강하므로 또 그런 행위를 한 주체를 묶어 가두어야 한다고도 여기고
또 한편 그런 행위를 통해 직접 고통을 당한 입장에서는 자신이 겪은 고통을 되갚아서 그 고통을 상쇄시키기 위한 보복 응징의 심정에서도 그런 행위를 한 이에게 상응한 고통을 주어야 한다는 여러 입장이 있게 된다.
그런데 바로 이런 내용에 의해서 처음 발생한 악 다음에 그것에 상응한 고통을 다시 되돌려 갚는 내용이 이후 계속 순환해나가게 되는 사정도 있다.
문제는 이 상황에서 대부분 주체가 그 어느 한 단면에도 그런 내용을 얻지 못한다는 사정을 올바로 관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런 생사고통에 묶여 무한히 고통을 주고 받는 관계를 벗어나려면 처음 단계에서부터 이 부분을 잘 극복해 벗어나야 결국 그런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개별 주체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업의 장애에 묶이지 않기 위해서 요구되는 수행으로서
자신이 집착을 갖고 아끼게 되는 것을 다른 생명에게 아낌없이 베푸는 행위를 하는 것도 대단히 어렵게 여기게 되고
또 자신의 좋음을 얻기 위해 다른 생명이 집착하는 좋음( 생명, 신체, 재산. 등등)을 함부로 침해하고 고통을 가하는 행위를 중지하는 것도 대단히 어렵다고 여기게 되지만,
정작 가장 극복하기 힘든 부분은 자신이 거꾸로 그런 침해를 당해서 고통을 당하는 상태에서 그런 상태에 무상해탈삼매문을 통해 그런 내용을 본래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잘 관하고 그런 상황에서 그 고통을 평안히 참고 받아들이고 평안히 임하여 분노를 일으키지 않고 상대에게 그 고통을 되갚아 돌려주고 보복을 행하지 않는 것이 대단히 힘든 것이다.
그런데 앞 부분도 일반적으로 행하기가 대단히 힘들지만, 정작 뒷 부분에 제시된 안인 수행을 원만히 성취하지 못하면 결국 그 주체는 업의 장애에 묶여 생사고통을 주고 받는 상태로부터 끝내 벗어나지 못하고 그런 상태가 되면 다시 그런 생사고통에 곧바로 묶여 들어가게 되기에 바로 이 부분이 수행의 최대 고비점이 된다.
즉 보시나 정계(계율)의 수행을 잘 성취한다해도 자신이 직접 억울하고 부당한 고통을 받게 되는 상태에 처해서 그것을 평안히 참고 받아들이는 수행을 성취하지 못하게 되면 그런 상태에서 곧바로 분노를 일으키고 보복하고 해치는 행위를 해나가게 되어 그로써 원래 생사에 묶이게 되는 업의 장애를 곧바로 일으키게 된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러면 생사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는 의미다.
반대로 수행자라면 이 부분을 극복하고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와야 하는데 바로 이 과정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요구되는 내용이 바로 무상해탈삼매문인 것이다.
즉 욕계 현실에서 망집을 바탕으로 자신이 가장 집착을 갖고 대하게 되는 부분 즉 평소 자신이나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대하는 내용을 놓고 그런 부분이 결코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내용이 아니다는 것을 잘 이해하고 그래서 생사현실에서 모든 집착의 근본이 되는 자신과 자신의 수명과 목숨 이런 내용에 대해서 상을 일으켜서 그런 부분을 취하고 그에 머물러서 행위해나가는 자세를 벗어나오지 않으면 그런 수행자체가 곤란한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현실에서 가장 집착을 갖게 되는 내용으로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갖고 임하지 않아야 그런 상태에서 그런 안인수행을 원만히 성취할 수 있게 되고 따라서 그로 인해 업의 장애를 해소하고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런 내용이 금강경에서 제시되는 내용이기도 하다.
오늘 살피는 보리행경에서도 첫 부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
독(毒)이 끌어당기기 때문이니
자기의 권속에 대해서도
찰나에 원한(怨恨)을 맺는다.
범부의 성품[성性]은 다르게 생겨나
기쁨이나 노여움[희노喜怒]의 정해짐이 없다.
성냄이 많아 일을 받들기 어렵고
좋은 이익을 멀리 여읜다.
하열(下劣)한 마음을 스스로 칭찬하며
애증[증애憎愛]의 죄에 얽매여 집착하게 한다.
이 성냄을 버리지 않으면
마땅히 악취에 떨어지리라.
...
이와 같이 제시되는데 이것이 욕계의 일반적 상황인 것이다.
예를 들어 욕계에서도 자신이 원하는 뜻이 뜻대로 성취되고 다른 생명이 자신을 하등 괴롭히지 않으면 그 대부분 주체가 만족을 얻고 또 외부적으로도 성인군자처럼 누구나 임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이런 경우는 왕마저도 수행자와 별 다른 차이가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렇게 모든 것이 뜻과 같아서 만족하고 행복을 얻는 것은 별다른 수행이 따로 필요한 것이 아니고 그 어떤 주체고 그런 상황이 되면 그런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상황이 달라져서 조금만 자신의 뜻과 맞지 않는 상태가 된다거나 자신의 신체나 기관이 조금만 질병이 생겨서 허물어지거나 하면 그 상황에서는 또 대부분 그렇게 임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명이나 좋음을 얻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모든 것을 해나가게 된다는 것이 바로 현실의 문제인 것이다.
평소 자신이 별 이유없이 다른 생명을 특별하게 괴롭히는 일이 없다고 여기는 이들도 자신의 병이 생겼는데 그 병을 나으려면 거북이를 하나 잡아 먹어야 한다고 한다면 다른 거북이가 죽거나 죽을만큼 고통을 받거나 말거나 그런 거북이를 구해 잡아 먹는 일을 서슴지 않고 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업의 장애를 해소시키고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행이 필요한 부분은 사실은 바로 이런 상태에서의 문제인 것이다.
상황이 그렇게 어렵지만, 다른 생명에게 좋음을 아낌없이 베풀고 또 자신의 좋음을 위해서 다른 생명이 집착하는 것을 함부로 침해하지 않고 또 반대로 자신이 그런 침해를 받는 상황에서 그것을 평안하게 받아들이고 참는 수행은 그 주체를 업의 장애의 묶임에서 풀려나게 하고 또 한편 그 주체에게 복덕자량을 쌓게 하는 수행으로서
이것이 원만히 성취되어야 이후 자신이 생사의 묶임에서 풀려난 상태에서 또 다른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복덕과 지혜자량을 구족하고 중생을 제도하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할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근본 바탕에서 현실에서 망집에 묶여 행위해나가지 않을 수 있기 위해서는 가장 기본적으로 공 무상 무원무작 해탈문을 잘 성취해야 하는 것이다.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1816_-_Salzburg_-_Mirabellgarten_-_Flower
Description Deutsch: Begonien (Begonia) am Mirabellgarten, Salzburg, Österreich English: Begonia at the Mirabell Garden, Salzburg, Austria Date 6 July 2007 Source Own work Author Andrew Bossi
Giovanni Battista (also Giambattista) Piranesi ( 4 October 1720 – 9 November 1778) 이탈리아 예술가로 피라네시 (Piranesi)는 베니스 공화국의 일부인 트레비조 (Treviso ) 근처의 모글리아노 베네토 (Mogliano Veneto )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형제 Andrea는 그를 라틴어 와 고대 문명에 소개했으며 나중에 삼촌 마테오 루체시 (Matteo Lucchesi)의 견습생이 되어, 역사적인 건축물을 설계하고 복원하는 Magistrato delle Acque 의 수석 건축가였습니다 .[...이하 줄임...] from https://en.wikipedia.org/wiki/Giovanni_Battista_Piranesi Permission & Licensing : Wikipedia ● [pt op tr] fr
♥Tolmin ,Slovenia
○ [pt op tr]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