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chel Sardou - Casino
불기2562-09-28_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_042
Anna Prucnal - Ce Que Je Dois D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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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t op tr] fr sfed--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_K0891_T1442.txt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 제42권
여기서는 이와 관련해 다음을 살피려 한다. 이번 조각글에서 살피는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 내용처럼 계를 닦아야하고 그렇지않으면 한번 행한 업은 소멸되지 않아서 그 과보를 받게 된다는 내용을 놓고
현실에서 눈을 떠 보는 내용 □ 이 마음내용이고 이 안에 외부대상은 없고 실재는 공하다는 내용이 무엇을 제시하는 내용이고 이런 계의 수행과 어떤 점에서 관련되는가를 놓고 라면과 벽돌 그리고 바위의 관계를 들어 살펴보고자 한다.
원래 조각글은 앞 뒤로 맥락이 이어져 작성하는데 각 부분이 링크로 다른 글과 종합적으로 연결되려면 자체적으로 독립적 내용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각 부분에서 앞 뒤 부분과 함께 파악해야 의미를 알 수 있는 표현은 자제하려 한다.
예를 들어 '앞에서 본 것처럼', 또는 '그것', '이미 앞에서 살폈다'. '위에서 살핀 것처럼' 이런 표현들이 문제된다.
현재 링크부분에서 실재에 관한 내용을 살폈는데 이 경우도 비슷하다. 링크부분애 각 내용과 이에 대한 비판을 적었지만, 되도록 이 부분만 보고 내용을 독립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각 부분을 다른 부분과 붙여 전체적으로 연결되게 하는데 더 좋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시작하려고 한다.
눈을 떠 보는 내용 □ 이 마음내용이고 그 안에 그런 내용을 얻게 한 외부대상이 없다고 한다면, 도대체 □ 내용은 무엇을 대상으로 해서 그런 내용을 얻는가 이런 문제와 관련해서 다양한 입장이 있다.
1 실재에 □ 내용과 일치한 내용이 있어서 그것이 대상이 된다고 보는 입장도 있을 수 있고 2 실재에 □ 내용과 일치하지는 않지만, 이와 유사하거나 비례하는 내용이 있어서 그것이 대상이 된다고 보는 입장도 있을 수 있고
3 실재는 젼혀 없다. 그래서 □ 내용은 마음이 자체적으로 분열해서 나타난다거나, 또는 마음이 마음을 대상으로 해서 나타난다거나 하는 입장도 있을수 있다.
또 한편 다음 입장도 있을 수 있다.
4 실재는 전혀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실재는 일정조건에서 일정관계로만 내용을 얻는 각 주체가 끝내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 있다 없다. -이다 -아니다. -과 같다 -과 다르다. 등의 2 분법상의 분별을 행할 도리가 없고 언설을 떠난 상태로서 공하다고 표현하게 된다. 그래서 이런 실재에는 관념에서 행한 것처럼 어떤 시설을 해서 a 의 대상에 해당하는 실재, 또는 눈에 해당하는 실재 이런 식으로 시설할 도리가 없다. 더 나아가 실재의 각 부분을 그렇게 시설해도 정작 각 부분을 넣고 빼고 하여서 현실에서 한 주체가 얻는 내용 □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를 판단할 도리도 없다. 그래서 실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닌데 이런 현실에서 얻는 □과 관련해 실재가 그런 내용을 얻게 한 대상이라거나 그런 대상이 아니라거나 그런 대상이 있다 없다를 논할 수 없다.
일단 여기까지 적다 보니 논의가 상당히 복잡해 보인다. 사실은 라면 - 벽돌 - 바위의 논의를 하기 위해 필요한 내용을 먼저 적은 것인데 도입 부분이 너무 길어졌다. 조금 쉬고 적기로 한다.
○ [pt op tr]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Maxime Le Forestier - Education Sentimentale.lrc
실재에 관련된 복잡한 논의를 대강 살폈는데 이 논의가 현실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를 생각해보기로 한다.
현실에서는 좋고 나쁨을 놓고 많은 계산을 하고 임하게 마련이다. 주된 목적은 자신이 집착하는 좋음을 많이 얻기 위함이다.
그런데 경전에서는 넓고 길고 깊은 관찰에 바탕할 때 그처럼 각 주체가 현실에서 좋음을 집착하고 추구하는 행위가 그의 의도대로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함을 지적한다. 그것이 알고보면 수행을 통해 해결해야 할 생사현실의 문제점이다.
세상에서 누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극심한 고통을 받기를 원하겠는가. 그래서 대부분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집착하는 가운데 그것을 많이 얻기 위해 온갖 노력과 지혜를 기울이게 된다. 그런데 왜 그렇게 임하면 오히려 3 악도에 들어가 무량한 기간 생사고통을 받는다고 경전에서는 자꾸 제시하는가.
일반적으로 이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에서는 다음을 제시한다.
..
스스로 지은 업은
스스로 그 과보를 받게 되어서
없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이러한 까닭에
너희들은
마땅히 선행(善行)을 닦고 악업(惡業)을 짓지 말지니,
이와 같이 마땅히 배울지니라.”
...
그런데 일반입장은 이와 다르다.
우선 한 주체가 이번 생에서 죽으면 그 뿐이다. 끝이다. 이런 생각을 하기 쉽다 이는 단멸관이라고 표현하는 내용이다.
또 이번 생으로 끝이 아니라고 해도 현실에서 행한 행위와 그 과보로 받는 결과가 왜 그런 관계인가에 대해서도 많은 의문을 갖는다.
그리고 또 반대로 인과가 없는 엉뚱한 내용을 붙잡고 그것이 자신의 소원을 성취하는 방안이라고 여기고 대하기도 한다.
그리고 계의 항목에서 제시되는 내용이 이와 관련된다. 예를 들어 자신이 식사를 위해 다른 생명을 살해해 얻은 고기를 먹는다고 왜 고통의 과보를 받는가. 설령 다른 생명을 많이 해치고 고통을 주어도 이를 통해 뜻을 성취하면 되고 또 그런 문제는 바다신을 믿으면 모두 다 해결된다. 이런 식이다.
수행자는 일단 무량겁에 걸쳐서 수행하는 가운데 생사현실에서 수행과 수행을 통해 얻는 과보의 관계를 이해하는 바탕에서 굳이 어떤 문제를 놓고 그 관계나 이해득실을 일일히 따지지 않고 수행에 임하게 된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수행을 하면 대부분 당장 당장 좋다고 보는 것을 베풀고 또 다른 생명이 집착하는 좋음을 침해하면서 자신의 좋음을 추구하지도 않고 또는 손해나 피해를 보고도 참는 안인 행해야 하는 등으로 대부분 우선 당장 자신입장에서 좋음을 얻지 못하고 나쁨을 받고 참는 형태가 된다고 보기에
일반적으로 행하기 힘들어하게 되는데 그러나 당장의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고 수행 방안으로 임하게 되는 것은 경전에서 제시하는 내용처럼 한번 행한 업은 없어지지 않기에 그것을 당장 직면한 순간만 놓고 살피지 않고 무량겁에 걸쳐 넓고 길고 깊게 그 관계를 살피기 때문이다.
그리고 넓고 길고 깊게 관찰할 때 무량한 복덕과 수명과 무량한 지혜를 얻게 하는 것이 바로 수행방안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내용이 과연 어떤 사정으로 그런 형태로 제시되는가를 함께 살펴야 한다.
현실에서 한 주체가 보는 내용 □ 을 놓고 그것이 그 주체의 마음내용임을 살피는 것은
한편으로는 그 주체가 한 생에서 삶을 마친다고 그의 삶이 끝이 아닌 한편, 무량겁에 걸쳐 어떤 연유로 각 세계에 들어가 어떤 형태로 생활하게 되는가와 관련해 그 내용을 살피는 바탕이 되기에 이를 살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을 잘 파악해야 수행자가 무량겁에 걸쳐 수행을 해나가야 할 사정도 파악되기 때문이다.
이번 생에 죽음을 맞이하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무량겁에 걸쳐서 중생을 제도한다는 등의 수행도 가능하지 않다. 또 그렇다면 무엇때문에 그런 수행을 생각할 필요가 있는가.
그럴 필요가 없고 단지 매순간 당장만 놓고 생각하거나, 이번 생에 자신이 산다고 볼 시점까지만 고려하고 임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래서 사정이 그런지 안 그런지 이 문제를 함께 잘 살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 주체가 보는 내용 □ 을 놓고 기본적으로 그런 사정을 잘 이해하게 되면
또 한편, 어떻게 임해야 무량한 겁에 걸쳐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쌓게 되고 또 어떻게 임하면 반대로 극심한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로 묶이게 되는가하는 사정도 잘 파악할 수 있다고 본다.
결국 한 주체가 현실에서 눈을 떠 보는 내용 □ 을 살피는 것은 이 문제를 잘 파악하고 그에 따라 삶의 방향을 잘 선택하기 위해서이다.
이와 관련하여 한 주체가 현실에서 눈을 떠 얻는 내용 □을 놓고 살핀다면 이 생사현실의 문제 상황과 그 사정을 다음과 같이 비유적으로 제시할 수 있다.
우선 각 주체는 라면과 같은 것을 놓고 먼저 눈을 떠서 그것을 벽돌모습으로 얻는다고 비유할 수 있다.
원래 라면에 해당하는 부분은 앞의 논의에서 살피듯 그 내용을 얻지 못하여 공하다고 하게 되는데 그렇게만 살피면 자꾸 답답하고 이해가 안된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으므로 여기서는 조금 상징적으로 라면을 동원한 것이다.
여하튼 현실에서 얻는 내용과 본 바탕은 엉뚱하다. 마치 손바닥 모습과 그 손바닥들 두드려 얻는 소리가 서로 엉뚱하고 손바닥 모습과 손으로 만질 때 얻는 촉감이 서로 엉뚱하듯 본 바탕과 그 본 바탕에서 눈을 통해 얻는 내용은 일단 엉뚱한 관계로 전제하는 것이다.
그리고 눈을 떠 그렇게 벽돌모습을 얻고 나서 이에 대해 분별하는 내용은 또 바위나 사람과 같은 것이어서 또 한번 엉뚱하다고 본다.
다만 손을 마주칠 때마다 소리를 듣게 되는 경험을 반복하면 비록 손의 모습과 듣는 소리는 서로 라면과 벽돌의 관계처럼 엉뚱하지만, 그러나 나중에는 오히려 자연스럽다고 여기게 된다.
마찬가지로 눈을 떠 벽돌모습을 보면서 그것을 바위나 사람이라고 분별하는 것도 사정이 비슷하다.
이렇게 현실에 임하는 상황을 비유하고 문제를 살피면 조금 이해가 쉽다고 본다.
그래서 라면 => 벽돌 => 바위, 사람 이렇게 놓고 문제를 보는 것이다.
서로 엉뚱한 것을 놓고자 했는데 벽돌과 바위는 조금은 비슷하다. 여하튼 이렇게 놓고 현실에서 각 주체가 임하는 방식이 왜 그 주체를 극심한 생사고통을 겪는 상태로 묶어 끌고 가는가를 살피는 것이 도움이 된다.
여기서 벽돌과 바위나 사람은 라면과는 달리 각 주체의 마음에서 얻는다.
그래서 처음에 눈을 떠 보는 내용 □ 을 놓고 그 정체를 살피게 된 것이다.
이 상황에서 한 주체가 망집에 바탕해서 라면 => 벽돌을 얻고 그에 대해 => 바위, 사람 이런 형태로 분별을 일으키면 이제 자신이 분별한 '바위'나 '사람'이 각 부분에 그처럼 있다고 여기는 한편, 그래서 자신이 분별하는 내용이 실답다고 여기게 된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자신이 좋다고 보는 무언가를 놓고 집착하고 좁고 얕고 짧은 관찰을 통해서 임하면 그것이 그 주체를 극심한 생사고통을 받게 만드는 것이다.
그 사정을 살피고 또 사정이 그렇다면 그 상태에서 어떻게 임해야 하는가. 이것을 살피는 것이 주된 초점이다.
물론 이 논의가 제시하는 답은 수행인데 일반적으로 수행을 왜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에 그 사정을 설명하고자 눈을 떠 보는 내용 □ 의 정체부터 하나하나 살피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이나 삶의 현실에 대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내용이 망상분별이고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먼저 잘 이해하는 것이 수행의 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에 그 사정을 먼저 살폈다.
즉 이번 생에 자신이 죽는다고 자신의 삶이 끝이 아니다. 그렇지 않고 무한하다. 그런데 무한하다고 좋은 것이 아니다. 무한하게 3 악도에 갇혀서 고통을 받으면 결코 자신의 존재가 무한히 이어지는 것이 축복이 되는 소식일 수가 없다.
담배나 술을 마시면서 평소 이것이 좋지 않다고 여기면서 끊으려고 하는 이를 놓고 생각해보자. 그 주체에게는 한편으로는 이런 담배나 술을 끊어야 겠다고 마음을 갖는 측면이 하나 있고 그러나 어떤 상황이 되면 담배나 술을 꼭 취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임하는 측면이 하나 있다.
그런데 매 순간 한 주체의 모습이나 내용이 다르다고 이해하고 그래서 매순간 그처럼 달라지는 주체를 .α,β,γ,δ,ε,ζ,η,θ,ι,κ,λ,μ,ν,ξ 로 표현한다고 해보자.
이런 경우 담배나 술을 취하는 순간의 α 로 인해서 나중에 건강을 해쳐서 고통받는 순간은 ξ 라고 볼 수 있다.
물론 현실에서 .α,β,γ,δ,ε,ζ,η,θ,ι,κ,λ,μ,ν,ξ 모두를 다 자신이라고 보고 대하는데 엄격히 보면 담배나 술을 취하고자 하는 순간의 주체와 그것을 끊고자 하면서도 그렇지 못해 그로 인해 건강을 해쳐 고통받는 순간의 주체는 서로 다르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상황이 이상하게 건강을 해쳐서 고통을 받는 순간의 주체는 그런 술과 담배를 마시는 순간의 주체는 아니다.
이 상황을 놓고 현실의 삶의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이는 한 순간의 내용이 그와는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 과보를 받아나가는 한 사례다. 불교에서 이를 이숙인 이숙과라고 표현하는데 결과로 나타나는 열매는 그 원인이 되는 씨와는 형태와 그 내용이 달리 익어 나타남을 표현한다.
그래서 악한 행을 행하면 그 행위와는 성격이 다른 고통의 과보를 얻고 선한 행을 하면 또 그 행위와 성격이 다른 복락의 과보를 얻는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다. 이것도 엄격히 보면 라면에서 벽돌이 나타나는 것과 사정이 같은데 생사현실에서 각 내용이 나타나는 관계는 무한히 그와 같다는 의미다.
그런데 그 주체가 자신과 관련해 고려할 기간이 한 생의 기간이 아니라, 무량겁의 기간으로 늘어나면 이렇게 그 관계를 고려할 문제와 기간이 확장되는 것 뿐이다.
담배 이야기를 적어서 그런지 일단 소신 공양을 올리고 조금 쉬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조금 쉬고 이어 살피기로 한다.
○ [pt op tr]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Piaf Edith - Le Chevalier De Paris.lrc
어떤 주체가 눈을 떠 보는 내용 □ 은 생생하고 입체적이어서 대단히 실답게 여겨진다. 그리고 이 내용 □ 안에 일반적으로 각 주체가 가장 집착을 갖고 대하는 것들이 그렇게 들어 있다.
자신이 평소 자신의 몸으로 여기고 대하는 부분도 그렇고 평소 자신의 가족으로 여기는 부분도 그렇고 자신의 집이나 물건으로 여기고 대하는 부분도 그렇다.
그런데 이처럼 눈으로 보는 내용 □ 이 자신의 마음 내용이라고 제시하면 이를 잘못 이해하면 평소 그렇게 보고 대하는 내용을 모두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신의 것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다.
이는 자신과 자신의 것에 대한 관념에서 무엇을 자신으로 보는가가 우선 문제된다.
눈을 떠 보는 내용 □ 을 자신의 마음내용이라고 이해할 때 그런 바탕에서 현실에서 자신이 손을 내밀어 사과 하나를 집어 드는 상황을 놓고 이 각 내용의 정체가 과연 무언가부터 잘 검토해야 한다.
자신이 눈을 떠 보는 내용 □이 마음 내용이라고 해도 앞과 같은 경우 마음 내용 □ 한 부분인 손부분이 마음 내용 □ 의 한 부분인 사과 부분을
관찰자 1이 눈을 떠서 보는 내용 □ 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 상황은 이 때 관찰자 1이 자신과 엇비슷한 다른 철수를 앞에 놓고 철수가 눈을 뜨고 감을 때 어떤 보고를 하는가를 살피는 중이다.
그런데 2 가 눈을 뜨면 무엇이 보인다고 하고 눈을 감으면 보이지 않는다고 보고한다. 이 상황에서 관찰자 1이 그 상황을 지켜보면 그 상황에 그런 변화는 없는데 2 가 혼자 눈을 뜨고 감으면서 그런 보고를 하니 그 변화는 2 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로 보게 된다.
그래서 그림에서는 그런 내용은 2 의 머리안에서 5^ 형태로 나타나는 내용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 내용을 소개할 때마다 반복해 제시하는데 위 그림처럼 이해하는 것은 타인의 정체나 마음에 대해서 잘못된 추리를 행하는 내용이다. 그 사정을 먼저 살피면 2 가 위와 같이 5^ 안의 내용을 얻고 거꾸로 1 에 대해서 생각하기를 1 이 무언가를 보는 것은 1^ 가 4^ 와 같은 꽃을 상대해서 그 내용을 1^ 영역에서 얻게 된다고 추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엉터리인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일반적으로 행하는 판단을 바탕으로 살피면 이 상황을 이해하기 쉬우므로 위와 같이 그려 놓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2 가 손을 뻗쳐 무언가를 붙잡는다거나 본다고 할 때 2 가 보는 내용 □ 즉 5^ 안의 내용들에서 2^ 부분이 4^ 부분을 붙잡고 작용을 해서 그런 모습을 보게 된다고 이해하면 이치에 맞겠는가.
그래서 그렇지 않다고 보아야 한다. 그것은 1이 보는 내용 □ 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그래서 한 주체가 보는 내용 □을 놓고 생각할 때 그렇게 보는 모습들은 모두 그 마음 내용임을 제시하게 된다.
한편 그 주체가 손을 뻗쳐 무언가를 만지는 상황에서 이들 내용이 마음내용이라고 할 때 그런 마음 내용 한 부분이 다른 마음 내용 부분을 붙잡거나 작용해서 그런 모습을 보게 된다고 이해하면 곤란하다.
이는 처음 이들이 눈을 떠 보는 내용 □이 마음내용임을 이해하지 못하고 외부세계의 내용이고 외부대상이고 마음과는 별개의 외부물질이고 외부의 객관적 실재라고 망상분별을 행하던 상태에서 자신이 대하고 손으로 만지고 하는 것이 곧 그런 외부대상이라고 여기는 바탕에서
다시 그런 내용이 마음내용임을 제시받게되면 처음에 외부대상이라고 이해한 내용이 대상이 아니라고 수정하는 것이 아니고 그런 외부대상이 마음내용이라고 망상분별을 또 행하기에 그런 이해를 하게 되는 것이다.
즉 자신이 외부대상이라고 이해한 내용을 수정해야 하는데 그것을 수정하지 않고 자신은 그런 마음 내용을 대상으로 삼아서 그것을 마음 내용이 붙잡는다거나 작용해서 어떤 결과를 얻는다고 잘못 이해하게 된다.
이는 시각과 다른 감각을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손으로 사과를 만져 촉감을 얻는 경우 자신의 눈으로 본 마음 내용 □ 한 부분인 손 부분이 자신의 눈으로 본 마음 내용 □ 한 부분인 사과 부분에 접촉해서 그런 촉감을 얻는 것이라고 잘못 이해하면 곤란하다.
눈으로는 그렇게 보게 되지만, 이들 내용이 서로 대상과 감관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정을 앞 그림에서 2 를 놓고 이해하면 쉽다.
그런데 처음에 망집을 일으킨 입장에서는 나중에 자신이 얻는 내용이 마음내용임을 이해하게 되면 이제 처음 대상과 주체나 대상과 감관을 놓고 일으킨 망집을 바탕으로 그 주체나 대상 감관 들에 대한 망상을 제거하지는 않고 이제 마음내용으로서 주체가 다른 마음내용을 대상으로 해서 그런 내용을 얻는다고 또 다른 망상을 일으키게 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이런 점을 주의해야 한다. 이런 착각을 일으키지 않을 것 같지만, 자신이 대하는 내용이 마음 내용임을 이해하는 경우에도 자신은 그런 마음내용을 대상으로 해서 감각하고 작용한다고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서양철학자 가운데에서도 자신이 대하는 세계 일체가 자신이 감각한 정신적 내용임을 제시하면서도 이렇게 주장을 제시해가는 사례가 있다.
그래서 처음에 이 혼동을 잘 정리해야 한다.
처음에 일반적으로 눈을 떠 보는 내용 □ 은 마음이 얻어낸 결과물로서 마음내용인 것이고 그 마음이 상대한 대상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처음에 그런 내용을 대상으로 보고 대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마음내용임을 이해할 때 그런 내용이 마음이 얻어낸 결과물이라고 이해하지 않고 여전히 자신의 마음이 대한 대상이라고 그대로 여기면서 단지 그 대상이 마음내용이라고만 바꿔 이해하기에 이런 혼동이 생기게 된다는 의미다.
이제 한편 하나의 그릇을 놓고 그것을 영희나 철수에게 건네거나 또 자신도 영희나 철수가 건네는 그릇을 받는 경우를 놓고 살펴보자.
그런데 이렇게 눈으로 보는 내용 □ 이 모두 자신의 마음 내용이라고 하는 한편 이런 내용 □ 안의 각 부분이 그런 내용을 얻게 한 외부대상이 아니라고 할 때 그러면 그 내용은 정작 무엇을 대상으로 그렇게 얻은 것인가가 문제된다.
이미 앞에서 그에 관해 제시될 수 있는 여러 입장을 대략적으로 살폈다. 그런데 이 가운데 이들 내용이 마음내용인 한편 마음 밖 실재 영역에는 아무 것도 전혀 '없다'는 입장을 취하게 되면 이런 내용은 결국 모두 자신 마음이 자체적으로 분열해서 만들어 낸 내용이라거나, 또는 자신의 마음이 다른 마음의 내용을 상대해서 얻어낸 내용이라고 이해하게 된다.
그런 경우는 또 그로 인해서 발생하는 결과에 대해 다른 주체를 고려할 필요도 없다고 보게끔 된다. 왜냐하면 자신 마음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는 현실에서 자신이 다른 주체와 어떤 내용을 가지고 주고 받거나 하는 관계도 역시 생각하기 힘들게 된다.
왜냐하면 이 입장에서는 자신이 얻는 그 모든 것은 자신 마음내용이고 마음 밖에는 아무 내용도 전혀 없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에서 예외를 인정해서 마음 밖에 사물은 없지만, 그러나 다른 이의 마음은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현실적으로 한 주체는 자신의 마음도 직접 눈으로 보거나 만지지 못할 뿐 아니라, 다른 생명의 마음에 대해서도 사정이 같다. 또 각 주체의 마음은 서로 분리되어 따로라고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각 주체의 마음이 서로 겹쳐져 있다는 식으로 주장하면 한 주체의 어떤 내용을 얻으면 다른 주체도 모두 바로 그 내용을 얻게 된다고 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기에 난점이 발생한다.
그런 가운데 앞처럼 그릇과 같은 무정물을 서로 주고받는 경우에는 또 그런 그릇에 해당한 내용은 각 주체의 마음 밖에 전혀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이런 그릇을 다른 주체와 주고 받는 상황을 설명하기가 대단히 곤란하게 된다.
그런 그릇과 같은 무정물에 대해서는 그것이 오로지 자신 마음안에서 나타난 내용이라고 이해하고 마음밖에 그와 관련된 내용이 전혀 없다고 앞에서 주장하였기에 다른 주체와 무엇을 가지고 그렇게 주고받았는가에 대해서 설명하기 곤란해진다.
자신이 보는 다른 주체도 자신 마음내용이어서 자신 마음 밖에는 전혀 없다고 하거나, 자신이 보는 다른 주체도 자신 마음내용이지만, 그러나 자신 마음 밖에는 그런 다른 주체의 마음은 따로 있다고 하거나, 어느 입장에서나 위 내용을 해명하기가 곤란하다
또 자신이나 다른 주체나 마음이 있지만, 이들 마음은 다 함께 겹쳐져 있다고 하면 자신이 그저 그릇을 하나 붙들면 굳이 건네지 않더라도 그 내용을 모든 주체가 다 함께 얻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므로 역시 설명이 곤란해진다.
그래서 처음 3 의 입장으로 제시한 내용은 타당하지 않다고 보게 된다.
그러나 마음 밖에 실재를 비록 얻지 못해 공하다고 표현해도 실재가 전혀 아무 것도 없는 것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라고 제시하는 입장에서는 적어도 위와 같은 문제는 없다.
한편 자신이 눈으로 보는 내용 □ 이 자신의 마음 내용이라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 내용을 곧 자신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 경우에는 처음 자신이 눈을 떠 보는 내용 □ 에서 일정 부분을 자신의 몸이라고 잘못 이해하거나 또 그런 사정으로 그런 부분이 곧 자신이라고 잘못 이해한 것부터 잘 수정해야 한다.
자신이 눈을 떠 보는 내용 □ 에 자신이나 대상이 들어 있다고 이해하면 이는 자신이나 대상에 대해 일으키는 망상분별과 관련된다.
그림에서 2 가 눈을 떠 보는 내용 □ 5^를 놓고 그 안에서 2 가 보는 2^ 모습이나 4^를 각기 자기라거나 자신의 몸이라거나, 대상이라고 여기는 것이 어떤 문제가 있는가를 놓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자신이 눈을 떠 보는 내용 □ 이 자신마음 내용이라고 제시하는 것은 이런 잘못된 견해를 수정하여 그런 내용 □ 은 자신이나 외부대상이 아니고 외부 세계 내용이 아니라고 먼저 부정한 것이다.
따라서 평소 자신이 눈으로 보는 내용 □ 에서 평소 자신이 자신의 몸이라고 여기는 일정한 부분 그래서 사실상 어릴 때부터 늙을 때까지 스스로 대하면서 자신의 모습이라고 여기는 내용 즉 태어날 때는 갓난아이 그리고 청년 이런 식으로 계속 그 형태가 달라진다고 보는 그런 내용을 놓고 자신이라고 보면 곤란하고, 또 그외 나머지 부분을 외부 세계나 자신이 대하는 외부대상이라고 여기면 곤란하다.
비록 눈으로 보면 자신의 손이 뻗쳐 그릇이나 사과를 붙잡는 것으로 보이고 그 때마다 청각이나 후각 미각 촉감도 얻게 되기에 그 각 부분이 대상과 주체라고 관계를 잘못 이해하게 되지만,
오히려 이런 내용을 마음이 얻어낸 결과물로서 마음내용이고 사정이 그렇기에 비록 그 자체는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지만, 매순간 이런 내용을 담아 얻어내는 그런 '마음'을
오히려 주체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눈을 떠 마음안에 담기는 내용 □은 이런 내용을 얻는 마음을 주체로 놓고 보면 이런 마음에 들어온 손님이나 티끌처럼 이것을 관해야 한다고 본다.
물론 엄밀히 살피면 이들 마음에 들어온 내용들은 그런 마음의 기능을 행하는 것이 아니어서 마음으로 보는 마음내용 □ 은 '마음' 자체가 아니고 또 마음도 이들 내용자체는 아니다. 그러나 또 이런 마음내용은 그런 마음을 떠나 있는 것도 아니어서 이들 관계는 단순하게 무관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그런 가운데 그런 내용을 얻는 마음 자체를 일단 주체로 놓고 이들 내용을 계속 살필 수 있다.
그런 가운데 현실에서 각 주체는 눈을 떠 보는 내용 □에 초점을 두고 그 안에서 무언가를 좋다고 여기며 이를 추구해 얻으려 하거나 또는 반대로 싫어해서 피하려 하게 된다. 그리고 이 부분부터 이렇게 대하는 주체의 망집에 바탕해 그 마음이 생사고통의 현실에 함께 묶여 다니게 되는 사정이 있다.
우선 처음 일반적인 입장에서 망집을 일으킨 상황에서는 마음에 들어 온 마음내용을 놓고 그것을 곧 실다운 '자신'이나 '외부세계'로 보는 가운데 그에 집착해서 업을 행해나가는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런데 이후 눈을 떠 보는 내용 □ 이 자신의 마음 내용임을 이해해도 이들이 오로지 순전히 자신 마음만에 의해 얻어지는 내용이고 마음 밖에는 전혀 아무 것도 없다고 잘못 상황을 이해하면 그 위험성이 더 증대하게 된다.
왜냐하면 자신이 눈을 떠 보는 내용 □을 오로지 자신 마음만으로 얻게 되는 내용으로 이해하면 이것을 함부로 대하는 가운데 수많은 문제를 일으키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 자신이 보는 내용 □이 자신 마음안 내용이라고 제시할 때
현실에서 손으로 사과나 커피잔을 붙잡는 상황을 놓고 이 상황에서 보는 각 부분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잘 살펴야 한다.
이 경우 자신이 자신의 손이나 몸으로 보는 부분이나 그 손이 닿는 대상으로 보는 부분들은 모두 자신의 마음에 들어온 결과물인 마음내용으로서 이를 그런 내용을 얻는 주체나 대상으로 이해하는 일반적인 입장은 우선 잘못이다.
그런데 또 한편 이런 내용들이 오로지 순수하게 자신 마음의 자체 분열만으로 얻어내게 되는 독자적 내용이라고 이해하는 것도 잘못이다.
그래서 이런 입장에서 자신이 사과나 그릇을 다른 이에게 건넬 때 비록 그렇게 보는 그 모습들은 자신의 마음안 내용이지만, 그러나 그런 모습을 보게 되는 상황에서 자신 마음 밖의 실재 영역에는 상황이 어떻기에 자신과 함께 다른 주체가 그런 상태어서 제각각 일정한 내용을 얻게 되는가를 함께 잘 고려해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이 경우 그런 마음 밖의 실재 영역은 내용을 직접 얻지 못해 공하다고 표현하여 제시하지만, 이런 표현이 아무 내용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공하다는 표현을 실재영역에는 아무것도 전혀 없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잘못 오해하면 일단 곤란하다.
실재영역이 공하다는 것은 그 실재영역에 어떤 시설을 해서 이 부분 저 부분 나누고 묶는 것도 곤란하고 각 부분이 무엇이다 아니다 등을 언설로 나타내는 자체가 모두 곤란하지만, 그러나 전혀 아무것도 없음을 나타내는 것도 아니기에
일단 이 사정을 비유로 이해하기 위해서 앞에서 '라면'이라고 엉뚱한 내용을 들어 라면 -> 벽돌 -> 바위 이런 형태의 이 관계를 제시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제시하는 것은 다음 취지다.
현실에서 어떤 주체가 생각하는 분별 내용부터 살피면 그런 분별내용은 우선 감각현실 영역에서부터 얻을 수 없다. 감각현실은 감각현실이고 관념분별내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관념분별도 마찬가지다.
한편 그런 분별내용은 실재 영역과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실재영역에서 그런 분별내용은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상황에서 그런 분별을 일으키기는 하지만, 이 상황이 침대에 누어 바다나 황금꿈을 꾸는 경우나 또는 벽돌을 대해 바위를 얻는 상태와 같다고 일단 비유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정으로 현실에서 행하는 분별은 마치 꿈처럼 그 내용을 다른 영역에서 본래 얻을 수 없는 내용을 그렇게 일으켜 얻는 것으로서 그 내용은 비록 또렷하게 분별을 행하고 얻지만, 그런 사정으로 실답지 않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감각현실 내용을 놓고 살펴도 이는 마찬가지다.
이처러 현실에서 얻는 각 내용은 다른 영역에서 얻을 수 없어서 침대에 누어 꾼 바다나 황금꿈처럼 실답지 않다고 제시하고 따라서 이에 대해 집착을 갖고 대하면 곤란하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각 내용의 정체를 살피고 이들이 마음내용임을 살피는 것도 이런 사정을 이해하는데 비중을 두어야 한다고 본다.
이는 평소 자신의 대하는 내용이 자신의 마음이 얻어낸 결과물로서 마음내용임을 이해하여 이들이 자신의 외부에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내용으로 이해하면서 그런 사정으로 그것이 실답다고 여기며 집착하는 자세를 수정해야 함을 제시하는 데 취지가 있다는 의미다.
그렇게 그 본 사정을 잘 관하고 평소 대하는 내용에 대해 망집을 제거하고 그런 상태에서 쌓아 놓은 업의 장애를 수행을 통해서 제거해야 그런 바탕에서 서로 얽혀서 상호간에 겪게 되는 생사고통의 문제가 해결이 되게 된다는 의미다.
이는 다음을 의미한다.
우선 평소 자신이 눈을 떠 보는 내용 □ 에서 자신이 집착하고 대하게 되는 자신모습을 대하게되지만,
그렇게 자신의 몸으로 여기는 그 부분은 비록 자신과 완전히 무관하지는 않지만, 이는 본 주체인 마음이 이번 생에 임시적으로 일정 기간 걸치고 다니게 된 내용을 다시 자신의 눈을 통해 보는 내용인 것이어서,
이는 그런 주체가 잠시 이번 생에 걸치고 있는 옷과 같다고 관하고 이에 집착을 갖지 않아야 함을 의미한다. 그렇게 해야 오히려 본래 자신이라고 보아야 할 주체에게 장구하게 좋은 결과를 가져다 준다.
이는 그 본 주체인 마음이 이후 3 악도에 해당하는 축생이나 아귀 지옥세계의 생명형태에 얹히지 않고 따라서 그런 축생과 아귀 지옥생명이 갖는 눈을 가지고 마치 지금 자신이 자신의 눈으로 자신의 몸이라고 여기는 부분을 보고 대하는 상황처럼 처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평소 자신이 눈을 떠 보는 내용 □ 에서 평소 자신의 소유물 등으로 대하던 것들도 마찬가지다.
이들 역시 자신의 마음안 내용인 것이어서
실재 내용과의 관계를 이해하기 쉽게 비유하면 마치 라면에서 벽돌을 얻어서 대하는 것과 상태가 비슷해서
공한 바탕에서 그런 내용을 얻는 것 뿐이므로 한편으로는 그 내용을 실답게 여기면서 집착을 갖고 대하지 않아야 함을 제시하게 된다.
자신은 비록 그것을 벽돌로 보지만, 그러나 그런 내용은 그런 조건에서만 그렇게 얻는 것이어서 본 바탕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비유하면 자신은 벽돌모습으로 보지만, 알고보면 라면이라고 할 엉뚱한 내용으로서 자신이 본 내용은 그 라면에서 얻을 수 없다는 의미다. 또 사정이 그러니 그런 내용에 집착하고 대하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또 한편 그렇게 내용을 보게 될 때 실재가 '전혀 아무것도 없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므로 그런 바탕에서 자신과 비슷한 상태로 함께 임하는 다른 주체들을 고려하면서 생사현실에 임할 필요성도 있다.
그리고 그런 사정으로 생사현실에서 일으키게 되는 그럼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하는 한편 또 그런 바탕에서 다른 중생과 얽혀 그렇게 생사고통을 받아나가도록 만드는 업의 장애를 제거할 방안으로 수행방안이 제시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현실에서 한 주체가 보는 내용 □ 이 순수하게 자신 마음안 내용일 뿐이라고 여길 때는 이들 내용이 모두 순수하게 자신 마음안 내용이라고 보는 것이므로 처음부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또 반대로 자신이 보는 내용 □ 이 일반적인 입장의 이해처럼 그 자체가 곧 외부세계이고 모든 주체가 함께 대하는 객관적 실재라고 할 때도 또 이에 대해 집착을 갖지 않고 대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앞과 같이 이 사정을 올바로 관해서 한편으로는 집착을 제거해서 집착으로 인한 문제를 제거하고 또 한편으로는 생사현실에서 그 내용을 복덕자량과 지혜자량을 얻게 하는 수행방안으로 대할 필요가 있다고 보게 된다.
오늘 아침에 꿈을 꾸었는데 꿈은 대단히 기분이 좋고 즐거운 꿈을 꾸었다. 그런데 꾸고 나니 꿈인 것이다. 그래서 꿈에서 무엇무엇을 꾸었는가 자세히 생각해보려고 하니 대강만 생각나고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런 한편 그런 좋은 꿈이 현실이 아님을 생각하고 또 우울해지게 된다.
꿈은 현실이 아니고 현실은 또 그런 꿈이 아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좋은 꿈 내용을 붙들고 집착하면 이런 증상을 겪게 된다.
그런데 욕계내 현실도 사정이 같다.
욕계 현실의 사정을 본 바탕을 라면이라고 놓고 그런 라면을 바탕으로 놓고 눈을 떠 벽돌모습을 보고 그리고 이에 대해 사람이나 바위라고 분별을 일으키고 그런 분별 내용이 각 영역에 그렇게 실답게 있다고 여긴다.
이렇게 제시하는데 이것이 욕계 상황을 비유로 설명하는 내용이다.
라면 => 벽돌 => 바위, 사람 공한 실재 => 감각현실들 =>관념분별
이런 각 영역의 내용이 모두가 무아 무자성인 점에서 하나같이 진짜라고 할 실체는 아니라는 점은 차이가 없지만, 그러나 또 한편 이들 내용이 각 영역에 전혀 없는 것은 아닌데
망집현상이라는 것은 한 영역에서 일으킨 분별 내용을 다른 영역도 그처럼 그렇게 있다고 여기는 부분부터가 망상증상이다.
그리고 이런 망집은 바로 마음 가운데 분별작용을 행하는 부분에서 자신이 일으킨 분별내용을 가지고 다른 영역을 대하면서 그렇게 일으키게 된다.
그래서 이 부분이 문제다.
다른 영역이나 분별 그 자체는 비록 이런 망집의 소재나 재료는 되어주지만, 그러나 각 영역 내용은 본래 그런 문제가 없기에 본래 청정하다고 제시하게 된다. 이는 생사현실에서 문제삼는 내용이 각 영역에서 본래 얻을 수 없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 말은 비유하면 라면 => 벽돌 => 사람의 관계에서 분별 영역에서 일으키는 사람을 문제삼는다면 각 영역에서 그 내용은 얻을 수 없다는 의미다. 그래서 이는 그런 사람 내용을 라면이나 벽돌이 있는 영역에서 그렇게 얻을 수 없다는 것이지 라면이나 벽돌의 영역에서 라면이나 벽돌을 전혀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물론 참된 진짜에 해당하는 실체를 문제삼으면 그런 내용은 이들 어느 영역에서도 없다고 해야 한다. 그런데 위와 같은 내용이 전혀 없다고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별 영역에서 일정한 분별을 일으키고 이들 각 내용을 함께 대하는 상황에서는 그 분별내용이 다른 영역에서도 그렇게 있는 것이라고 망집을 일으켜서 그 바탕에서 그 상황을 대하고 또 그렇게 업을 행하게 되므로 이 망집 현상을 잘 수정해야 한다.
이런 경우 아예 실답지 않은 분별을 처음부터 일으키지 않는 것도 한 방안이겠지만,
생사현실에서 그런 분별을 한편으로 행하면서도 그 분별 내용의 사정이 다른 영역과의 관계에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이해하는 가운데
그런 분별로 집착을 일으키는 증상을 잘 제거하고 그런 바탕에서 행하는 업도 중지하고 또 한편 이와 반대뱡향으로 자신이 그런 형태로 쌓아 놓은 업의 장애를 제거하고 해소할 수 있도록 그런 사정을 잘 이해하고 집착없이 수행에 잘 임해야 한다는 의미다.
라면 => 벽돌 => 바위, 사람 의 상황에서 자신이 분별로 일으킨 바위나 사람은 라면이나 벽돌이 있는 영역에는 얻을 수 없다.
그러나 라면이나 벽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또 바위나 사람도 그 영역에서는 그렇게 일으켜 얻고 있다.
그런데 간혹 위 상황을 놓고 바위나 사람을 얻을 수 없다고 하면 라면이나 벽돌도 그 영역에 전혀 없다거나, 바위나 사람이 분별영역에서도 전혀 없다고 하는 내용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그 주체가 평소 이들 내용을 다 자신이 일으킨 그런 분별내용에 함께 접착시켜 놓고 이해하고 대했기에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처음 눈을 떠 보는 내용 □ 을 놓고 그런 내용 □ 이 마음 내용이라고 제시하면
이런 □ 내용을 놓고 대상과 주체로 나누어 그런 내용을 접착시켜 이해하던 입장에서는 먼저 그것이 마음내용이라고 제시하면 이제 마음내용의 한 부분인 '주관'이 마음 내용 한 부분을 '대상'으로 삼아서 그런 마음내용을 얻는다고 오해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이제 그런 내용 □ 에는 그런 외부대상이나 주체는 없다고 제시하면 이제 자신이 평소 그렇게 이해하고 대한 그런 내용 □ 이 아예 전혀 없다거나, 또는 마음내용 □ 의 외부 영역에도 아무 내용도 전혀 없다고 제시한 것으로 또 오해하고 나아간다.
그런데 이런 문제가 모두 기본적으로 평소 일으키고 있는 망집에 바탕해서 일으키는 망집의 연장 현상이다.
그리고 그런 잘못된 이해는 단순히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이런 분별에 바탕해서 현실에서 무언가 업을 행하게 된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그런 바탕과 그런 전제에서는 역시 극심한 고통을 얻는다고 보게 되는 그런 상태에 처하게 되는 것이 문제다.
즉 본 사정을 망집에 바탕해서 거꾸로 잘못 이해하고 대하기에 그 바탕에서 지혜를 발휘하고 노력하면 할수록 자신의 뜻과는 다른 상태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원래 자신이 사는 집에 꿈에서 꿈꾼 것처럼 황금이 없는데 그러나 엉뚱한 분별을 하여 황금이 묻혀 있다고 여기면 그런 분별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그 분별에 바탕해서 방을 파내는 업을 행하게 된다.
그런데 사정이 그 분별한 내용처럼 정말 그렇다면 또 모르는데 사정이 그렇지 않다. 그래서 그런 업을 행해서 만나는 상황은 집의 붕괴와 이웃의 손해배상 청구 이런 것이다.
이런 이상한 결과가 나타나면 그 상황도 사실은 처음 상황처럼 그가 생각하는 그런 내용을 역시 얻을 수 없는데 그러나 앞과 같은 망집을 일으키는 주체는 이제 그 상황에서도 같은 형태로 그런 상태에서 자신을 대하는 다른 이웃이 마치 자신을 살해하고 금을 빼앗아가려고 하는 것으로 대하면서 또 악순환을 밟아 나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3 악도의 상황이다.
문수보살님이 경전에서 지옥에서 고통을 받는 중생에게 원칙적으로 제시해주는 내용은 그 지옥이 꿈과 같다는 것을 빨리 이해하라는 내용이다.
그런데 원래 인간 현실에서부터 그 망집을 잘 해결하지 못한 경우는 축생이나 아귀 지옥세계에서 그것을 해결하는 것은 사실은 더 어렵다.
인간 현실에서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팔 때 망집을 일으켜서 집착하고 임하던 입장은 이로 인해 어떤 시시비비와 다툼이 발생해서 폭행사건에 연루되고 교도소나 병원응급실에 들어가면 그 상태에서 그 처음 망집이 잘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그 망집과 그에 바탕한 탐욕 분노 어리석음의 번뇌 증상이 더 악화되는 것이다.
그리고 3 계 6 도의 상황이 이와 마찬가지다.
마찬가지로 현실에서 자신이 눈을 떠 대하는 내용 □을 놓고 거기에 자신이나 자신이 대하는 외부 대상이 그런 형태로 있다고 여기면서 이에 집착해 그에 필요하고 좋다고 보는 내용을 탐욕을 일으켜 쌓아 놓거나 한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생사과정에서 하나도 가져가지도 못할 뿐 아니라 또 그로 인해 이후 생사에 묶이게 된다.
또 자신은 그렇게 자신이라고 여기며 대하는 그런 몸이 이번 생에 죽음으로 장례를 치루고 매장되고 화장되어 사라지면 이제 자신과 관련된 일은 하나도 없다고 여기지만 그 사정이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다른 생명을 해쳐서 그 살을 먹거나 다른 생명의 재산을 함부로 취해서 자신이 사용하거나 하면 평소 자신이 자신의 몸에 대해 생각하는 것처럼 그 다른 생명도 그로 인해 모두 끝이고 이후 그로 인한 과보를 하나도 자신이 행한 형태대로 다시 되돌려 받을 일이 전혀 없다고 여기지만, 그것도 사정이 그렇지 않다.
그래서 현실 상황을 그렇게 이해하고 임해 나가면 그런 바탕에서 그 주체는 큰 문제상황에 처하게 된다.
물론 본 바탕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고 하지만, 그러나 자신이 그런 본 바탕을 놓고 위와 같이 생사현실에 임하듯 다른 욕계 중생도 사정이 다 마찬가지다.
그리고 또 그런 바탕에서 매순간 임해 나가는데 각 주체가 일으키는 그런 망집과는 달리 정작 그 주체가 대하는 내용들은 그렇게 단멸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이 업의 장애가 무한히 얽혀서 그런 상태에 놓인 중생들에게 생사고통을 받아나가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런 사정을 다른 생명을 놓고 살피지 말고 자신을 놓고 생각할 때 자신이 한 50 년전에 억울하게 고통을 받은 일이 하나라도 떠오른다면 그 사정이 자신만 그렇지 않고 다른 중생들도 그 사정이 같다고 쉽게 이해해야 한다.
원래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도 없고 그런 상태에서 무엇이 있다고 보았다 해도 그 상태가 지나면 이후 그러한 망집이 없어져야 하는데 그러나 없어지지 않는 것이다.
마음현상에 대해 이해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평소 대하는 일체가 다 마음내용임을 이해해도 이를 통해 엉뚱하게 세상 일체가 자신의 마음이니 이런 내용을 자신이 아무렇게 해도 된다고 여기면 곤란하다. 철부지 아이처럼 그렇게 임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면 대단히 좋은 일이겠지만 그렇지 않다.
현실에서 자신이 눈을 떠 어떤 내용을 보고 그런 내용이 자신 마음안에서 일으킨 자신의 마음내용이라고 여기고 이를 함부로 만진다고 해보자. 경우에 따라서는 당장 얼굴에 주먹이 날라올 수도 있다. 그런데 다시 그런 내용도 마음이라고 여기고 또 무시하고 또 반복한다고 하자.
이후로는 그는 그 마음안에서 계속해서 고통으로 여기게 될 마음내용만 계속 얻게 될 것이다. 그런데 왜 이것이 자신 마음인데 그러는가.
그것은 그런 내용이 마음내용인 것은 맞다고 해도 그와 관련해 무언가를 잘못 이해해서 그런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잘못된 이해를 수행과정에서 올바로 시정해 내지 못하면 비록 본 바탕에서는 그런 문제를 얻을 수 없다고 하지만, 생사현실에서는 그런 관계로 생사고통을 무한히 반복해 받아나가는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래서 수행하고 생사를 벗어나고 복덕과 수명과 지혜를 구족해서 성불하고 중생을 제도하는 것은 본 바탕에서 그런 것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고 본 바탕에서는 얻을 수도 없지만, 그러나 생사현실에서 이것이 문제되고 이 생사현실안에서 이 해결이 문제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곧 생사현실에서 수행이 제시되는 사정이다.
한 주체가 대하는 생사현실이 마음 내용이고 그것이 꿈처럼 실답지 않다고 하지만, 그러나 정작 그런 내용이 꿈은 아니어서 같은 상황에 처한 각 주체가 무한히 반복해 번뇌 - 업 - 고 이런 관계로 그 내용을 얻어 나아고 그것은 자신만 그런 것이 아니고 근본 무명에 바탕해 망집을 일으킨 각 주체가 그렇게 겪는 내용이어서 현실에서도 축생의 범주에 있는 축생의 수가 대단히 많고 또 아귀나 지옥세계도 마찬가지다.
인간 현실에서도 자신이 몸이 건강해 평소 병원에 가보지 않으면 병원에 얼마나 많은 환자가 병으로 고통받고 있는지 잘 모를 수 있다. 그런데 병원에 한번 방문하면 또 대단히 많은 환자가 있음을 볼 수 있다. 다른 부분도 그 사정이 다 마찬가지다.
그래서 자신이 지금 인간으로 비교적 평안하게 당장 잘 지내고 있다고 해서 그 상태로 앞으로도 무한히 잘 지낼 것이라고 여기면 마치 시험공부는 하나도 하지 않고 그저 망상적 희망만 붙들고 지내다보면 언젠가는 자신이 하바드 대학에 수석으로 입학해서 잘 지낼 것으로 기대하는 것과 사정이 같다. 그럴려면 현실에서 쉼없이 공부도 하고 노력해야 한다고 보듯 생사현실에서 수행도 사정이 같다.
일정 주제에 대한 내용을 분리하는 한편, 뽑혀 올려진 경전관련 내용도 또 분리하기로 했다. 성격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다.
현재 매번 글 쓸때마다 뽑히는 경전도 예약글로 올리고 조각글도 밀려 있어 쉬고 나서 이전에 글쓰던 페이지를 매번 새로 찾아 작업하는 것이 대단히 어렵다.
또 예약글 날짜도 매번 확인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이런 내용을 별도로 저장했다가 매번 작업시 쉽게 찾아내 복사하고 또 작업하던 페이지를 열고 작업하는 핫키를 개발했다.
종전의 북마크 핫키와 유사한데 작업용으로 새로 개발한 것이다. 그런데 처음 작업 창 주소를 복사할 때는 평소 작업시 복사에 ctrl + c 를 사용하기에 c 를 넣어서 핫키를 만들게 되고 붙이고자 할 때는 평소 붙이기에 ctrl +v 를 사용하기에 v 를 넣어서 핫키를 만들게 된다.
그래서 인터넷 작업창은 in , c 와 in ,v 핫키를 사용하게 된다. 매번 같은 작업이 반복되면 이렇게 핫키를 만들게 되는데 핫키 만드는 시간이 수작업하는 시간과 거의 비슷하지만, 나중에는 편하다. 그런데 또 핫키를 만들어 놓고 상황이 바뀌어서 사용하지 않다고 다시 사용하려면 정작 그 핫키가 생각이 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핫키 하나를 만들어도 평소 연상이 잘 되도록 만들어야 할 필요를 느낀다. 사용하려면 생각이 안나면 또 그것을 찾아내는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옥상 기지에 과거 7 불을 모시고 옥상 기지를 방문할 때마다 7 부처님의 게송을 하나씩 외우고는 했는데 요즘 안 외우다가 오늘 방문해서 외어보려고 하니 또 생각이 안 난다.
과거 7 부처님의 게송에 지금 살피는 마음 현상의 정체나 마음과 관련된 중요 내용이 많이 제시되고 있기에 이것이 중요한데 정작 꺼내려고 하면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이런 현상이 반복된다.
최근에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서 먹었는데 본인이 아이스크림을 먹고 나서 남은 아이스크림을 냉동실에 넣지 않고 냉장실에 그냥 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드디어 말로만 듣던 치매 증상이 본인에게도 일어나기 시작하는 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잡담을 적다보니 길어져서 본래 적으려고 한 내용을 적지 못하였는데 조각글이 많이 밀리 상태지만, 조금 더 쉬고 이어나가기로 한다.
핫키를 개발해서 쉬고 다시 작업할 때 작업하던 곳을 빨리 찾아내게 되어서 편하다.!!
쉬고 나서 핫키를 적용해 사용하다보니 다시 다음 문제가 나타난다. 핫키 스크립트를 새로 올리면 메모리에 기록되어 있던 내용이 모두 지워진다. 사용중 일정 내용을 메모리에 보관해뒀는데 다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또 이 문제를 해결하는 작업을 했다. 편해지려면 힘들다.
한편 새로운 편집방침에 의해 잡담성 글은 한 부분으로 모아 놓고 일정 주제에 관한 글도 한 부분으로 모아 작은 제목을 붙이기로 했다.
그래서 편집에 변동이 있게 되었다. 일단 조각글은 이렇게 마치고 다음 조각글로 넘어가 다른 주제를 또 이어 살피기로 한다.
● 경전내용의 기억
요즘 왠만한 내용은 인터넷 등을 검색하면 바로 바로 검색되어 찾게 되기에 평소 어떤 내용을 암기하는 노력을 잘 행하지 않게 되는데 문제는 수행자가 생사현실에서 검색창을 각 세계로 옮겨 갖고 다니기가 쉽지 않다는 점을 먼저 주의해야 한다. 그런데 어느 경우나 지니고 다니는 것은 자신의 마음이므로 자신의 마음에 그것을 기록하고 보관해 두어야 한다.
전화사용시에도 축약번호를 자꾸 사용하면 나중에 그 내용을 잃어버리게 되는데 편해지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이는 예를 들어 과거 생에 얻은 내용은 꿈을 꾼 내용과 사정과도 어느 정도 비슷하다. 일어나면 대부분 내용이 생각이 안나고 생각나더라도 희미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치매가 아니더라도 정확히 1 주일전에 점심때 어떻게 지냈는가. 무엇을 먹고 어떤 옷을 입고 무슨 일을 했는가. 이런 것이 날짜마다 생각이 정확이 떠오르는가. 대부분 생각이 안 난다. 이런 현상이 생사과정에서 일어난다.
특히 업의 장애가 쌓여 있는 상태에서는 생사과정에서 3 악도에 들어가는 상황에서 대부분 포맷 처리된다는 사정도 이해해야 한다.
3 악도에 묶이는 상황은 인간 현실에서 어떤 이가 교도소나 병원 입원실에 들어가는 상황과 비슷하다. 그래서 집에서 편하게 사용하던 책이나 컴퓨터나 핸드폰 등 도움이 될만한 내용은 사용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욕계내 3 악도의 상황도 이와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런 상태에서 그 중생이 고통을 심하게 겪어서 아무리 문수보살님이 옆에서 그런 내용 자체가 다 꿈과 같다고 사정을 말해 주어도 우이독경과 같은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평소에 열심히 수행한 경우에는 이런 상황에서 문수보살님이 제시해주는
힌트가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마명대사가 설법을 시작하자, 굶주린 말들이 식사도 하지 않고 계속 듣고 그 내용을 듣고 사정을 이해하고 안타까움에 울었다고 해서 마명대사가 마명대사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 경우 그 말들은 상태가 조금 좋았던지 아니면 마명대사의 수준이 굉장히 뛰어났던지 해서 그렇다고 보지만, 일반적으로는 그런 것을 기대하기 힘들다.
그러니 수행자는 매일 매일 대하는 경전 내용에서 핵심을 추려서 평소 잘 외우고 다닐 수 있도록 쉼없이 노력을 해야 한다.
인터넷 검색창이나 핸드폰을 믿고 다니면 순간 위험해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업의 장애가 해소되지 않는 중생들이 겪는 생사현실에서 겪는 분단생사의 과정이 바로 이런 상태를 의미한다.
그런데 수행자가 중생제도를 위해 생사현실에 임하는 경우는 적어도 위와는 상태가 달라야 한다.
각 세계에 수행자가 들어가 임하는 것도 그 기본 취지가 자신의 서원에 따라 그렇게 임하는 것이어야 하고 그 각 생마다 그 전후 생의 맥락을 다 함께 잘 파악하고 자신의 서원을 잘 념해서 매 생마다 잘 실천해나가야 한다. 그래서 태어날 때부터 자신이 어떤 취지로 그렇게 그 세계에 임하였는가를 잘 파악하고 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잘못하면 업의 장애로 인해 아무리 게송 하나를 외어보려고 해도 끝내 외우지 못하는 상태가 되기 쉽다.
그러면 문제가 된다. 결국 이런 상태는 우이독경의 비유가 그대로 적용이 되는 것이어서 문제다.
그런 경우 자신이 과거에 어떤 업을 어떻게 행해서 남들이 자신을 그렇게 비난도 하고 고통을 가하는지 자신도 모르는 가운데 그러나 그 고통은 반복해서 받아나가는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이번에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를 대했다면 여기서 한번 행한 업은 사라지지 않는다라는 핵심 키워드를 잘 파악하는 한편 되도록 그 표현을 경전에서 제시받는 형태로 그대로 외우려 하는 것이 상당히 필요하다. 적어도 전문 수행자라면 그렇게 임해야 하는 것이다. 경전 이름이 이런 형태로 길면 요령껏 짧게 줄여 외우는 방안도 필요하다. 근본설비 =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 = 90 단타 바일제 = 79 칭구 선래 술마시고 혼나공 80 팔공산에서 오이타 비~입~불촉수 여인과 때 아닌 때 취락에 들어가 접촉해 혼나공..
참고로 오이타 존자는 신통력으로 많은 중생을 구제하는데 이 내용 다음 뒤 부분에 때아닌 때 취락에들어가서 변을 당하고 이 내용이 계율로 제시된다,.
그래서 이런 편법을 동원해서라도 잘 외우는 것이 좋다. 페이지를 덮고 덮자마자 아무 내용도 떠오르지 않는다면 곤란하다. 그런데 바삐 읽고 바삐 넘어가다보면 그렇게 되기 쉽다.
특히 핵심은 다음이라고 본다. 업을 행하면 업이 사라지지 않아 과보를 받는다. 이렇게만 보면 번뇌 - 업 - 고의 연기의 관계를 숙명론에 가깝게 이해하게 되기 쉽다. 그래서 생사고통을 받는 것도 또는 벗어나는 것도 모두 어쩔 도리가 없다. 이렇게 이해하기 쉽다.
불교의 연기관계는 본 바탕이 그렇지 않다. 어떤 내용이 거기에 있다고 일반적으로 여기는 그 상태에 그런 내용은 본래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금강경의 무유정법 이런 내용이 의미하는 것처럼 그렇게 정해진 것은 본래 없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 바탕이 그러한데 어떤 주체가 근본 무명 어리석음에 바탕해서 어떤 한 현실 단면을 놓고 무엇이 있다고 망집을 일으켜 대하고 그에 바탕해 업을 행하면 그 바탕에서는 생노병사와 같은 생멸과 생사를 비롯애 온갖 생사고통을 그런 전제에서 받아나가게 된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 사정을 이해하기 쉽게 비유로 설명하면 게임기의 상황은 본래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가 그 게임기에서 그런 캐릭터나 아이템이 그렇게 있다고 여기면서 그 게임에 임하면 그 게임기에서 적용되는 그런 관계로 각 화면을 대하는 상태가 무수하게 무한히 반복될 도리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또 그 게임기 안에서 그런 문제를 벗어나려면 그 게임기 안에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일정한 내용이 또 그렇게 제시되는 것이다.
그래서 업의 장애가 쌓였을때 이를 제거하는 수행방안도 함께 잘 이해하고 이를 실천해야 한다. 그 내용이 계에 해당하는 보시 정계 안인 정진의 덕목이다. 또 자신의 힘으로 안 되면 중생제도와 성불을 서원을 일으키고 부처님이나 보살님이 제시해주는 다라니 삼매 수행을 통해 실천하면 그 가피를 얻어 업의 장애를 제거할 수도 있다.
이는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앞에 극 산성이 담긴 통을 이미 엎질렀다. 그런데 그 상태는 문제인데 이 상태에서 반대로 극 알칼리가 담긴 통을 그에 부어 넣으면 그것이 중화가 되어 없어지게 된다.
마찬가지로 이미 업의 장애가 쌓였더라도 계의 덕목을 실천하고 서원을 일으키고 수행에 임하면 이것이 제거된다.
그래서 과거에 행한 업은 사라지지 않아 그에 따른 과보를 받더라도 그 이후 또 업의 장애를 해소할 수행을 열심히 했다면 그런 과보를 받는 상황에 처해서도 역시 그에 대해 상을 일으키지 않고 평안하게 안인을 성취하며 임할 수 있게 되어 결국 업의 장애에 묶이지 않게 된다.
그래서 부처님이 제시하는 내용을 숙명론으로 오해하면서 절망을 한다거나 하면 곤란하고 수행에 열심히 임해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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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Amtrak_California_Zephyr_Green_River_-_Floy,_Utah.jpg English: Westbound California Zephyr, operated by Amtrak, in front of the Book Cliffs, between Green River and Floy, Utah, USA. The train is hauled by two General Electric P42DC locomotives. Author Kabelleger / David Gubler (http://www.bahnbilder.ch) Permission & Licensing : Wikipedia ● [pt op tr] f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