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2562-09-13_대방광불화엄경_001
Patrick Bruel - On N'a Pas Tous Les Jours Vingt 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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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0fl--Marie Myriam - Dis Moi Les Silences.lrc
♥ 잡담 ♥논의의시작점-왜보이는가
새 연구작전 = 무여열반작전에 임하면서 그간 작성한 조각글들을 모두 백업받았다. 백업작업이 상당히 성가신데 백업시에는 특히 경전부분과 분리해서 조각글만 따로 백업하기에 더 성가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스크립트의 도움을 받으니 그나마 낫다. 조각글에 붙어 있는 ◈ 표시를 기준으로 반 자동으로 블록설정을 하여 백업을 받게 되는 스크립트다. 그래도 반자동이어서 일부는 수작업이 필요해 힘이 많이 든다.
무여열반작전에 임하면서 첫 주제로 왜 보이는가 이런 내용을 가지고 논의를 시작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번 조각글부터는 종전 조각글을 참조해서 점차 정리를 해나가기로 했다. 그런데 어떤 방식으로 과거에 논의한 내용을 수정하거나 보충하고 더 자세하게 살펴나갈 것인가가 문제되어 여러가지 방안을 생각했는데
일단 종전에 작성한 조각글은 그대로 그냥 두고 새 조각글을 작성시 필요하면 과거글을 참조해 복사하거나 링크를 걸어가며 새로 작성하기로 했는데 이는 일단 독립한 페이지로 정리해가는 중간형태로 삼을 생각이다.
왜 보이는가.
이런 주제를 놓고 논의하고자 하는데 그런데 이런 내용을 논의할 때 무조건 살펴나가면 대부분 이를 엉뚱한 내용으로 여기고 이에 관심을 갖지 않게 되기 쉽다.
평소 별로 궁금하지도 않고 왜 살펴야 하는지 모르는 가운데 계속 어떠한 내용을 살피게 되는 경우에는 상당히 피로감을 많이 느끼게 된다.
그래서 왜 눈을 뜨면 일정한 세상모습이 그런 형태로 보이는가. 또는 그런 모습은 어떤 과정을 통해서 그렇게 보게 되는가 이러한 문제를 살피기 전에 왜 이런 문제를 살필 필요가 있는가부터 살피기로 한다.
● 왜 보이는가를 논의하는 이유
현실적으로 눈을 뜨면 어떤 과정을 통해 보게 되는가에 대해 잘 몰라도 정작 눈을 떠서 세상 모습과 사물을 보는 데는 별 지장이 없다.
그러나 이는 현실에서 어떤 좋음을 얻으려면 기본적으로 살펴야 하는 내용인 한편, 동시에 현실에서 일반인들이 행하는 분별이 왜 망상분별인가. 그리고 그런 망상분별에 바탕해 좋고 나쁨에 집착해 업을 행해 나가면 왜 장구한 기간 생사현실에 묶여
생사고통을 받게 되는가를 이해하는 데에 기본적으로 필요하다.
또 반대로 어떤 주체가 무량한 생사고통을 벗어나려면 왜 현실에서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하고 수행을 해야 하는가.
그리고 무량겁에 걸쳐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구족하려면 왜 수행을 해야 하는가를 살피는데 기본적으로 필요하다.
결국 이는 망상분별에 바탕하여 생활할 때도 좋음을 얻기 위해 필요하지만, 또 반대로 수행을 통해 무량한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고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얻는 데에도 필요한 내용이다.
어떤 주체가 어떤 과정으로 세상모습을 보는가는
안과의사가 보는 생리학 교재나 과학책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바로 그런 내용이 일반인이 갖는 대표적인 엉터리 망상분별임을 살피고 바로 그런 분별 때문에 생사고통에 묶이게 된다는 사정을 살피는 것이 핵심이 된다.
그런데 사정이야 어떻든 현실에서 무언가를 좋다고 보고 추구하는 것은 어떤 주체가 눈을 떠 무언가를 보는 활동에 대부분 바탕한다.
한편 여기서 어떻게 보게 되는가의 논의는 일반적인 감각을 대표해 살피는 것이어서 다른 감각에도 같이 적용된다. 따라서 설령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경우에도 그 사정은 같다.
● 현실에서 좋음이 감각현실에 밀접한 사정
현실에서 문제삼는 좋음이 감각현실에 밀접한 사정을 살펴보자.
최근 부동산 시세가 많이 올라 복이 있는 이는 그저 집을 소유하고 평안하게 살았다는 점만으로 몇 십억을 단숨에 벌었다고 한다. 반면 복이 없는 본인은 얼마 되지 않은 돈도 다 없어지고 간신히 생계를 해결하는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이 문제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떤 이가 좋은 집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가지고 스스로 확인하는가.
이 문제를 다음처럼 이해해보자. 만일 그가 눈으로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고 아무 냄새도 맡지 못하고 아무 맛도 보지 못하고 아무런 촉감도 얻지 못한다면 집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다.
현실에서 어떤 이가 무언가를 희망하고 성취해 좋음을 얻었다는 경우는 대부분 자신이 희망하는 내용을 일정한 감각현실 형태로 얻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마시고 싶던 커피를 마셔서 좋다고 여기는 그 상황은 그 커피를 눈으로 보고 입으로 마시는 상황에 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런 감각현실은 중요하다고 여기는데 그 가운데 눈으로 보는 내용이 대단히 중요하다. 몸이 만냥이면 눈은 9000 냥 정도 한다. 이런 말이 있는데 그것이 현실이다. 또 그 만큼 현실에서 살아가는 각 주체에게 망상분별을 심하게 일으키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떤 주체가 어떤 사정으로 눈을 뜨면 그런 모습을 보게 되었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여러모로 중요하다.
앞에 제시한 내용처럼 어떤 복이 있는 이는 가만히 있어서 큰 금액을 벌고 자신은 그간 힘들게 열심히 일했는데도 손해만 크게 보고 생계가 어려워서 생활 의욕이 감소하고 살아갈 맛을 잃는다고 여기는 경우가 현실에 많기 때문에 일단 그런 문제에 신경을 기울이지 않고 본 문제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우선 다음 내용을 제시하기로 한다.
만일 앞과 같은 사정때문에 수행에 핵심적인 본 내용에 대해 살피는 것을 회피하고 어떤 곳에 투자해야 많은 돈을 벌 수 있는가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현실에 임하면 대단히 위험하다.
그런데 그런 부분에 관심을 돌리지 않고 어떤 주체가 어떻게 세상 모습을 보게 된 것인가를 놓고 살피려면 이런 논의를 살펴도 자신에게 큰 손해가 되지도 않고 오히려 자신이 얻을 복덕이 대단히 막대하게 된다는 사정을 먼저 빨리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미 앞에서도 그 사정을 몇몇 제시했는데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끝내는 별 쓸모가 없고 오히려 생사고통을 더 극심하게 받는 원인이 된다 그리고 이런 사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본 논의주제에 초점을 맞추고 집중해야 한다.
그런데 이와 함께 다음 내용도 참조하면 도움이 된다.
우선 그렇게 큰 자산을 그런 방안을 통해 갖지 않아도 자신이 주어진 현실에서 충분히 만족할 수 있게 되면 본 논의나 수행에 훨씬 잘 집중할 수 있다.
우선 앞에서도 제시했듯 설령 그런 자산이 있다고 해도 만일 자신이 무언가를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냄새맡지도 못하고 맛도 못보고 촉감도 못 얻는다면 그것이 무엇이겠는가를 생각해보자. 그런 경우는 아무리 자산이 많아도 별 의미가 없다.
반대로 말하면 자신이 평소 이런 활동을 별 문제없이 잘 할 수 있는 상태에 있다는 것이 갖는 가치를 우선 먼저 잘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가치저울을 하나 놓고 한쪽 저울에 자신의 두 눈이나 심장이나 콩팥 간들을 놓고 다른 쪽 저울에 현금을 올려 놓을 때 도대체 현금을 얼마나 올려 놓아야 이 저울이 균형을 이루게 될 것인가부터 먼저 잘 헤아릴 필요가 있다. 나중에 이 가운데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므로 이 문제를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이는 쉽게 말해 자신의 생명이나 감관이나 건강을 얼마를 주면 희생할 수 있겠는가의 문제와 같다. 그래서 잘 생각해야 한다.
본인은 그런 경우가 없다고 보지만, 욕계의 파순은 종종 이런 유형의 문제를 조금 변형시켜 자주 제출한다. 트럼프나 화투를 들고와 앞 저울에 올려진 현금과 두 눈이나 생명을 걸고 한번 도박을 해보자고 제의하는 내용이 이야기에서 나오는데 이와 사정이 비슷하다. 그래서 잘 생각해야 한다.
여하튼 위 문제를 통해 자신이 갖는 신체나 각 기관과 건강과 생명이 갖는 가치를 평가했으면 그것을 1 로 놓고
이제 평소 대단히 큰 자산이라고 여긴 것을 그에 비례한 숫자로 표시해보는 것이 다시 필요하다.
원래 앞 문제에서 현금액수를 적는 경우는 그 주체가 대단히 겸손하거나 어리석다고 보게 된다. 그런데 위 문제에서 다른 쪽 저울에 올혀 놓을 구체적 금액을 적지 못해도 최소한 몇 원 보다는 높다고 생각할 수는 있다.
즉 적어도 10 원보다는 높다고 생각하여 10 원 이상(초과) 이렇게 적어도 틀린 것은 아니다. 10 원 '보다 높은 금액'은 10 원이라고 적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10 억원도 되고 1000 억원도 되는데 일단 10 원보다는 높다고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하튼 위 문제에 대한 답은 자신이 알아서 그렇게 적고 그렇게 제시한 금액을 가지고 반대로 화폐가치를 역으로 평가해본다는 의미다.
대부분 자신 스스로 자신에 대한 평가를 할 때는 우주 보다도 더 가치가 높다 이런 식으로 대단히 지나치게 높게 가치를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할 때 그런 신체나 생명이 갖는 가치를 1 이라고 표시하면 현금 100 억원은 반대로 얼마라고 숫자로 표시해야 하는가.
앞에서 최소한 몇원보다는 가치가 더 높다고 평가했다면 이번에는 반대로 현금 100 억원은 0.00000... ..,1 보다도 적다고 평가를 해야 하는 것이 된다.
여하튼 위 문제를 해결하려면 우주 전체에 현금이 가득 쌓여 있을 때 이것을 파순이 가져다 주면 두 눈이나 간이나 손과 발을 끊어서 제공해줄 것인가 위 문제부터 기본적으로 잘 풀고 산수계산에 임하면 된다.
일반적으로 자신이 우주보다 소중하다고 여기는 입장에서는 위 문제에서 그 소수점 자리를 온 세상의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다 동원해도 구체적으로 표시하기 힘들다.
그런데 그것이 가치저울로서 세상의 각 항목의 가치에 대해 제시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그렇게 평소 잘 관하고 쓸데없고 보잘 것없는 것들을 놓고 초점을 맞추면서 자신의 마음에 쓸데없는 내용을 가득 채우고 생사고통을 받는 과정으로 흘러들어가면 안 된다.
그 다음 생각할 내용은 모든 자산은 크게 자신의 생존에 직접 이바지 하는 자산과 그외의 자산으로 2분해서 대하는 것이 필요하다.
즉 생존에 필수적이라고 보는 최소한의 의식주나 의료비에 사용되는 자산과 그 범위를 넘는 자산을 평소 잘 구별해서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생존에 직접 이바지 하는 자산은 앞에서 자신의 생명을 현금으로 얼마로 평가하는가의 문제와 직결된다.
이런 자산이 확보되면 생존을 하루 이틀 계속해 이어가게 되는데 그렇지 않으면 곧바로 생존이 위협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록 금액으로는 얼마 안 되지만, 그것이 이런 생존을 해결하는데 필수적인 부분이라면 그것은 곧 처음에 계산한 자신의 생명의 가치와 비슷한 가치를 갖는다.
그런데 이 부분을 넘는 자산은 또 이와 사정이 다르다.
이 경우는 아무리 자산이 많아도 옷을 한번에 7 벌씩 껴입고 다닐 수 없고 음식도 한번에 평소보다 7 배씩 먹을 도리도 없고 나머지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런 자산이 아무리 많아도 수명을 7 배로 늘리는 것 역시 곤란하다. 그래서 생존에 직접 이바지 하는 자산을 넘는 자산은 결국 생존에 이바지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그런 자산은 무엇에 이바지 하는가. 그런 자산은 개인적으로는 자신에게 즐거운 맛을 최종적으로 그것이 가져다 준다고 믿기에 그것을 많이 확보하려고 하는 것이다.
자산이 많으면 사회적으로도 인정받고 대우받고 또 '조금 더 좋고 맛있는' 음식 더 멋있고 남들이 알아주는 상표의 옷 더 편리하고 쾌적한 집, 더 좋은 자동차 이런 형태로 더 좋은 재화나 용역을 구하는데 사용할 수 있는데
이런 재화나 용역이 최종적으로 자신에게 가져다 주는 것은 역시 자신과 생존기간 즉 수명을 2 배나 7 배로 늘려주는 기능을 하는 것은 아니고 단지 살아 있는 동안 이를 통해서 좀 더 '즐거운 맛'을 얻어내는데 이바지한다.
그런데 이런 즐거운 맛은 사실은 그런 수단방편을 통해서만 얻는 것이 가능한 것이 아니다.
우선 이런 수단을 통해 일반적으로 최종적으로 얻어내고자 하는
'평안하고 쾌적함'은 오히려 자신이 평소 이런 자산에 대해 갖는 쓸데없는 집착을 제거하고 평소 소욕지족의 마음 상태를 갖고 임하여 가장 기본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
그래서 예를 들어 부처님 당시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들은 옷 세벌, 밥그릇 하나, 무덤가나무밑 이런 내용만으로 수행에 임하고 생사를 벗어났다는 점을 생각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또는 다른 종교를 놓고 생각하면 예수님과 같은 분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오늘날 이런 분들을 기준으로 놓고 최저 생계비를 책정해서 국가가 시행하면 바로 폭동이 일어날 수 있겠지만, 사정이 그렇다. 그래서 이런 내용을 놓고 자신 혼자서 평안한 상태에 이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분들도 그렇게 임했는데 왜 자신이 이런 분들보다 훨씬 많이 소유하면서도 정작 매 순간 불만에 젖고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수많은 번뇌에 쌓여 불편하게 지내는가. 이것을 먼저 잘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즐거운 맛을 얻고자 할 때에도 이미 다른 글에서도 제시했듯 비록 자신이 그것을 팔수는 없지만, 그러나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자산이 대단히 많다는 점을 스스로 확인해서 이를 통해 보다 쉽게 그런 즐거운 맛을 얻을 수 있다.
그런 부분은 이미 앞에서 말한 자신의 신체 각 부분도 물론 포함되지만, 그러나 예를 들어 국립공원이나 도서관이나 공공 문화 체육시설 등도 이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어떤 자산을 많이 가지면 그 만큼 관리하거나 신경쓰고 번뇌를 일으켜야 할 사정이 많아진다.
그런데 이것은 그 최종적인 목적이라고 할 즐거운 맛을 얻는데 대단한 장애를 일으키고 그런 최종적 효용을 얻는데 들어가는 비용항목에 들어가야 할 내용이 된다.
반면에 사용만 하고 팔 수 없는 수많은 자산, 예를 들어 공공재나 자연은 그 상황이 반대다.
그래서 이런 점을 생각해서 공연히 이런 문제로 번뇌를 일으켜서 초점을 엉뚱한 곳으로 돌리면 안 된다.
● 수행방안을 살피는 효용
당장 어떤 수익을 가져다 주는 것으로 여기지 않지만, 지금 논의하는 주제 즉 어떤 사유로 자신이 눈을 뜨면 이런 세상 모습을 이렇게 보게 되는가 를 살피는 것은
한 생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이나 즐거운 맛을 주는데 그치지 않고 거꾸로 매달려 고통을 받는 것보다 더 극심한 생사고통을 무량한 겁에 걸쳐서 받아나가는 상태에서 벗어나게 해줄 뿐 아니라,
반대로 무량한 겁에 걸쳐 무량한 복덕과 수명과 지혜를 얻는 기본 방안을 제시해주는 중요한 내용이다.
이런 점을 생각해서 이후 초점을 쓸데없고 보잘 것 없는 부분에 맞추고 세상을 대하면 곤란하다.
그런데 이런 내용을 먼저 제시하지 않으면 대부분 본 논의에 들어가기도 전에 대부분 초점을 다른 부분에 돌리고 본 내용을 외면하게 되기 쉽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현실에서 생사고통을 겪게 되는 주된 사유이기도 한 것이다.
결론은 현실에서 몇 십억의 자산을 얻게 된다거나 잃게 된다는 등의 문제가 전혀 의미없다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닌데 이는 삶에서 문제삼아야 할 전체적인 가치를 놓고 종합적으로 판단한다면 비유하면 대단히 중요한 어떤 잔치모임에 참석하는데 그 과정에서 신발에 묻은 껌이나 옷에 붙은 실오라기와 같은 것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그것이 전혀 의미없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닌데 이것 때문에 잔치에 참석하지 못하면 대단히 곤란하다.
그래서 이것은 일단 무시하고 보다 중요한 주제에 초점을 맞추고 집중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집중해야 할 내용의 하나가 지금 살피고자 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그 사정을 앞에 제시한 것이다.
♥ 잡담 ♥
요즘 방송사마다 방송하면서 광고시간에 채널을 돌리지 말라고 당부하는 발언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본 조각글에서도 이런 사정으로 앞과 같은 점을 먼저 환기시키게 된다.
물론 위 내용들은 과거 추구미 작전에서 살핀 가치회계나 가치저울의 문제에서 이미 살핀 내용인데 그래도 시간이 오래되었으므로 다시 한번 간단히 위와 같이 내용을 제시하고 넘어가기로 한다.
오늘 작업이 많았으므로 조금 길게 쉬고 이어나가기로 한다.
어떤 주체가 눈을 뜨면 어떻게 사물을 보게 되는가를 살펴야 할 필요성을 일단 대강 이렇게 살폈다.
원래 이런 내용을 생략하고 바로 눈을 통해 어떤 내용을 얻는 마음현상을 안식이라고 표현하면서 안식에 대한 내용을 살펴나가는 것이 일반적인데 본인이 이런 경우 왜 이것을 굳이 살펴야 하는가 그간 의문을 많이 가졌기에 이런 내용을 먼저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현실에서 자신이 눈을 뜨면 세상모습과 자신 모습을 보게 된다. 이 과정을 이해해보자는 의미다.
이처럼 무언가를 보는 과정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대단히 다양한 입장이 있다. 이는 경전과 논서 안에서도 사정이 비슷하다. 그래서 나중에는 수많은 입장 사이에서 대단히 많은 혼동을 일으키기 쉬운 주제다.
그런데 앞에서도 설명했듯 이런 이론을 모른다고 해서 현실에서 눈을 떠서 사물을 보는데 큰 장애를 겪는 경우는 또 드물다.
반대로 눈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어도 실수로 눈을 다치면 보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라고도 보게 된다.
그래서 어떤 이가 눈을 떠서 무언가를 보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도대체 어떤 효용을 갖는가를 다시 문제삼을 수 있다.
이미 그 내용을 앞에서 살폈는데 이것은 되풀이 하지 않기로 한다.
한마디로 현실에서 일으키는 망상분별과 제거하고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는데 있어서 이 내용을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이제 눈을 떠서 세상 모습을 보는 과정을 놓고 바로 살펴보기로 한다.
이 과정을 먼저 이해하려면 실험을 해야 한다. 눈을 가릴 수 있는 안대나 안대 비슷한 기능을 할 적당한 물건이나 손을 준비하기로 한다.
이 실험은 책상에 사과를 하나 준비해서 그 사과를 손으로 두드리고 만지는 실험과 성격이 비슷하다.
기초적으로 사과를 하나 책상에 준비하고 위 실험부터 먼저 해보자.
이 경우는 눈으로 먼저 사과를 보는 가운데 자신의 손을 사과에 대고 두드리는 실험을 하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자신의 손이 사과에 닿으면 그 순간 소리를 듣게 되고 또 그 순간 촉감을 얻게 된다.
이 실험을 먼저 엄격히 잘 해야 한다. 혹시 손이 사과에 닿지 않았는데도 촉감이 느껴지는가. 또는 소리가 들리던가. 이런 관찰을 잘 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 실험은 혼자서도 잘 할 수 있다. 위 실험을 눈을 뜨고 하게 되면 대부분 다음과 같은 보고를 하게 된다.
책상에 사과가 놓여 있는데 그 사과를 자신의 손으로 두드리니 => 소리가 난다. 그 사과를 자신의 손으로 두드리고 만지니 => 그 때 촉감을 느낀다. 그외도 마찬가지다. 그 사과를 집어서 입으로 먹으니 => 맛이 느껴진다. 그 사과에 코를 대고 맡으니 => 사과향이 느껴진다.
이상이 각 감관을 통해 얻는 감각현실의 일부(청각, 후각, 미각, 촉각)에 대해 그 내용을 얻는 과정에 대한 보고를 하는 내용이다. 이 내용에 대해 대부분 자신이 실험하면 위와 같은 결과를 얻으므로 이 내용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대부분 여긴다.
그래서 일단 위 실험을 마치면 다음과 같이 생각하게 된다.
자신이 눈으로 본 그 사과를 대상으로 해서 앞에 나열한 여러 감관이 상대해서 위와 같은 여러 감각내용을 얻는다.
이렇게 보고하고 이 과정을 이해하게 된다.
한편 이 상황에서 자신이 눈을 떠서 본 이런 내용도 위와 마찬가지 형태로 이해하게 된다.
다음과 같다. 여기서 눈을 가릴 안대나 손이 필요하다.
빛도 있고 상황은 마찬가지다. 즉 자신이 사과를 잘 보고 있는 상황이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눈은 자신의 눈을 직접 보지는 못한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래도 자신이 평소 자신의 눈이 어디 있는지는 대강 다 안다. 그러므로 이 때 자신의 손으로 일단 자신이 눈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을 잘 만져보는 것이다.
그래서 직접 보지는 못하지만, 자신의 눈이라고 하는 부분을 손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손으로 눈을 가려보는 것이다. 손이 더러우면 실험과정에서 눈병이 생길 수 있으므로 안대를 이 때 사용해도 된다. 어떤가.
실험을 정확하게 해야 한다. 앞에 사과가 놓여 있어서 사과를 잘 보고 있었는데 손으로 자신의 눈 부분을 덮으면 그 사과가 보이지 않게 된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다시 눈을 가린 손이나 안대를 치우면 사과가 다시 보이는 것이다.
물론 이 상황에서 자신은 눈을 계속 뜨고 있는 것이고 또 외부에 빛도 밝다는 것을 전제하면 이런 실험을 함에 있어서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이제 이 실험을 정리하자. 자신이 직접 보지는 못하지만 손으로 만져서 자신의 눈이라고 여기는 그 부분을 일단 앞의 여러 실험과 비슷하게 자신의 감관으로서 눈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앞 내용을 보고를 한다면 역시 앞과 같은 형태로 이 상황을 보고하게 된다.
자신의 손으로 만져지고 가리기도 하는 그 눈이 자신의 눈 앞에 있는 사과를 대상으로 삼아서 일정한 모습을 보게 된다. 이렇게 이해하고 이 내용을 기술해 보고하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내용이다.
의사나 생리학자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눈의 자세한 구조나 기능을 더 살피지 않더라도 일단 무언가를 자신이 보는 과정에 관계하는 부분을 자신은 이를 통해서 찾아냈다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현실에서 자신이 갑자기 사물이 흐릿하게 보인다거나, 또는 눈에 병이 생겨서 사물을 잘 볼 수 없다고 할 때 안경점이나 안과에 가서 상담한다면 위에 실험한 내용을 또 반복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손으로 눈을 가리는 실험으로 충분한데 극단적으로 자신의 손으로 만져서
자신의 눈이라고 여기는 부분에 어떤 훼손을 가하면 그로 인해서 곧바로 사물을 보지 못하게 되는 상태에도 처할 수 있다.
그러니 손으로 만져서 눈이라고 확인한 그 부분은 자신이 평소 사물을 보는데 관련이 되는 중요한 부분이고 그것은 사물을 보는 감각기관 눈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일반적으로 각 감각을 얻는 과정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내용이다.
그런데 지금 살피는 주제는 이런 내용이 엉터리 망상분별임을 살피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대로 앞과 같은 일반적 내용이 어느 부분이 잘못인가 하는 것을 놓고 다시 한번 잘 살펴야 한다. 그래서 이상하다고 여기면 앞에 제시한 실험을 혼자서 여러번 반복해 보아야 한다.
혹시 손으로 눈을 가렸는데도 보이던가. 그리고 그렇게 가리다가 손을 뗐는데도 보이지 않던가. 이런 실험을 반복해서 앞에 제시한 보고 내용을 일단 잘 확립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렇게 스스로 찾아내는 부분을 또 잘 확보해야 한다.
그리고 매번 그렇게 각 감관을 관계시킬 때마다 그 전까지 얻거나 얻지 못하거나 한 내용을 또 따로 잘 확보해야 한다.
이렇게 확보해야 이후 논의에서 혼동을 일으키지 않게 되는 것이다.
먼저 제시하지만, 이 논의가 얻고자 하는 결론은 위와 같은 이해가 엉터리 망상분별의 가장 기본적인 내용이라고 제시하는데 있다. 그래서 현실에서 위와 같은 내용을 대단히 반복해서 경험하는데 왜 이것이 엉터리라고 하는가를 놓고 먼저 혼자 잘 생각해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노래를 올려 놓고 듣다보니 내용을 너무 한꺼번에 다 제시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는 메세지를 듣게 되는데 그런 사정으로라도 일단 위 실험을 제시하고 조금 오래 쉬기로 한다. 어제 작업을 조금 많이 해서 그런지 눈이 충혈되어 있는 느낌이다. 좀 더 오래 쉬기로 한다.
쉬는 동안 현실에서 대단히 많이 반복하고 그래서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보는 이와 같은 내용이 왜 엉터리 망상분별이라고 제시하는가 하는 사정을 한 번 미리 생각해보기로 한다.
그런데 이전에 앞 실험을 통해 요구한 내용을 먼저 잘 확보해야 한다. 이는 언어, 시설, 방편의 사정을 이해하는 것과 관련되는데 이는 예를 들어 커피나 차를 한잔 마시고 그때 맛보는 그 커피나 차맛을 언어로 기술하는 문제를 놓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앞으로 위 문제를 무엇을 가지고 살피겠는가. 언어를 가지고 살핀다. 즉 지금 페이지에 적은 글자와 같은 것으로 이들 내용을 가리키면서 논의를 전개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가장 기본적으로 위 문제를 먼저 잘 확인해야 한다. 커피나 차를 맛보고 그렇게 맛본 그 맛을 언어로 기술하자고 제시한다면 어떻게 기술할 것인가. 일단 힘들다. 그런데 사정은 그렇지만, 그런 맛에 대해 논의하려면 일단은 '커피맛' 이런 형태로 언어로 기술해야 논의가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하는 점은 그 '커피맛'이란 언어표현이 가리키는 내용을 놓고 혼동하면 안 된다는 점이다.
극단적으로 이 문제를 살피면 커피맛을 논의하는데 어떤 이가 커피맛은 세글자다. 이렇게 갑자기 논의에 참여하면 곤란하다는 점이다. 상식적으로 이것을 쉽게 이해할 것이다.
그래서 지금 눈으로 어떤 모습을 본다거나 귀로 소리를 듣는다. 코로 냄새를 맡는다 등을 놓고 어떤 과정으로 그런 현상을 겪는가를 살필 때 위 문장에서 각 언어가 가리키는 내용을 앞 실험을 통해서 먼저 스스로 정확히 확보하고 이 논의에 참여하지 않으면 나중에 대단히 혼동을 겪게 된다는 점이다. 자신이 매 순간 경험하는 내용을 놓고 그럴리가 있겠는가 하겠지만, 이 문제가 대단히 심각하다.
나중에 이에 관련된 논의내용을 살필 때 각 언어표현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논의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만큼 혼동을 심각하게 불러 일으키는 것이 바로 위 부분이다.
그러므로 앞에서 제시한 실험을 반복하면서 비록 매 순간 경험하고 얻는 감각현실 내용을 어느 곳에 저장하고 보관할 수는 없겠지만, 논의과정에서 눈이나 눈으로 보는 감각내용 이런 식으로 표현할 때 이런 언어가 정확하게 어떤 부분을 가리키는가를 위 실험을 통해서 정확히 먼저 확보하여야 한다는 의미다.
대단히 간단한 문제같지만, 대부분 논의하는 이들이 극심한 혼란을 겪는 사정이 위 문제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참고로 어떻게 한 주체가 눈을 뜨면 모습을 보게 되는가 이에 관련해 불교 경전과 논서에서도 대단히 서로 다른 다양한 내용이 제시된다. 그런데 이 내용을 놓고 수많은 견해가 나타날 때 이 과정에서도 똑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서 지금 감각현실이나 감각기관 또는 눈을 뜰 때 얻는 감각내용 이런 표현을 사용할 때 이것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가를 위 실험을 통해서 먼저 잘 확보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커피를 맛보고 언어로 커피맛을 기술할 때도 그렇지만, 여하튼 그런 커피를 맛본 내용을 '커피맛'이라고 표현하면 이 언어표현은 일단 지금 그 언어표현으로 가리키는 그 내용 자체는 아니다는 것도 함께 잘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이런 언어표현은 논의과정에서 정작 그 언어로 가리키는 그 맛 자체는 아닌데 그러나 논의를 위해서 사용하는 일종의 방편이고 시설이라는 것을 잘 파악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것이 불교 경전에서 제시하는 다양한 내용이 서로 조금씩 차이가 나는 그 사정을 이해하는데에도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다.
쉬는 동안 예약글 스크립트를 수정했다. 매번 쉴 때마다 음악이나 사진을 랜덤으로 뽑아 올리는데 이 때마다 경전과 니르바나 행복론의 목차 부분도 뽑혀 나와 예약글로 올리는데 그 때마다 시간이 많이 걸려 이를 빨리 처리하기 위한 것이다. 앞으로 작업이 빨라질 것을 기대하게 된다.
니르바나 행복론 파일도 매번 랜덤으로 뽑히는데 이 부분은 거의 살피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 뽑힌 파일에서 채근담 내용을 보고 도움이 된다고 보고 올리게 된다.
學者要收拾精神,倂歸一路.
학자요수습정신,병귀일로.
如修德而留意於事功名譽,必無實詣.
여수덕이유의어사공명예,필무실예.
讀書而寄興於吟영風雅,定不深心.
독서이기흥어음영풍아,정불심심.
배우는 사람은 정신을 가다듬어
뜻을 한 곳으로 모아야 한다.
만일 덕을 닦으면서 뜻을 사업이나 명예에 둔다면
진리의 깊은 경지에 다다를 수 없고,
책을 읽으면서 읊조림이나 놀이에만 머문다면
결코 깊은 마음까지 다다를 수 없다
어떻게 사물을 보게 되는가에 대한 내용은 종전에도 많이 살폈는데 그러나 이번에는 조금 더 깊고 자세하게 살피고자 한다. 대강만 살피면 조금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세히 살피면 간단해 보이는 이 문제가 세상의 온갖 논의를 다 끌어 오게 된다. 그래서 도저히 이것을 다 살피지 못하게 된다고 또 보게 된다.
mun 님이 친한 친구분 가운데 성유식론에 정통한 성희룡 거사님이 계신데 아마 이 사정을 잘 파악하고 계시리라 본다. 최근에 이 분께서 성씨 가문에서는 아이들 이름으로 금지하고 있는 대표적인 이름으로 폭행, 폭력, 추행 이런 이름들을 들었는데 그런데 자신의 이름은 그래도 무난한 편이라고 한다. 위 이름들은 형법에 규정되는데 자신 이름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것이 문제되는가.
● 언어표현으로 인한 혼동
이름이나 언어가 불러 일으키는 착각과 오해가 대단히 현실에서 심각하기에 피해를 보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런 현상이 본 주제에서도 대단히 심각하다.
그래서 먼저 각 표현으로 가리키는 내용이 정확히 무언가를 파악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특히 눈으로 보기도 힘들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고 또 자신이 가리키는 내용을 다른 이에게 곧바로 전달하거나 확인시킬 수 없는 내용을 언어로 표시해 논의할 때는 그 심각성이 더 증대한다.
물론 각 주체는 이런 내용을 언어로 표현하며 논의하게 되는데
정작 다른 이가 그 표현을 어떤 내용으로 이해하는가는 정확하지 않다.
그런 가운데 논의가 전개되면 완전히 뒤죽박죽이 되기 쉽다.
어떻게 한 사람이 눈을 떠 세상 모습을 보게 되는가 이 주제가 왜 복잡한가는 이를 살펴가면 쉽게 이해할 수 있지만, 언어표현으로 인한 혼동을 먼저 잘 해결하지 않으면 관련 서적을 아무리 살펴도 이 문제를 쉽게 해결하지 못하게 된다.
참고로 불교내 여러 논사들의 입장은 다양한데 이들 입장은 제각각 다르다.
불교내 각 입장은 크게 설일체유부 경량부 중관학파 유식학파를 들 수 있고 조금 자세히 살피면 귀류논증파 자립논증파 유상유식학파 무상유식학파 이런 식으로 복잡하고 관련 경전이나 논서도 대단히 다양한데 이에 관한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그래서 간단해 보이지만, 위 주제에 잘못 접근하면 혼동과 혼란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기 쉽다.
물론 본 논의에서 본인이 얻어내고자 하는 대강의 방향은 이미 과거 조각글에서 반복해 제시한 바 있다.
그런데 이것이 위에 제시한 여러 입장과 관련되지만, 어느 한 입장을 그대로 제시하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곤란하다.
그런데 이 주제를 살필 때 어떤 특정한 논서는 이런 내용을 제시하고 이 경우 이런 점들이 문제된다 이런 형태로는 제시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 사정은 결국 앞의 언어표현의 혼동과 관련된다.
각 논서에서 예를 들어 눈을 가지고 보는 과정을 설명할 때 그런 감각을 얻는데 필요한 기관이나 작용을 나타내기 위해 눈을 나타내는 안(眼)이나 심(心)이나 의(意) 또는 식(識) 등으로 표현한다고 할 때
이 각 표현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가리키는가는 각 논서나 경전을 놓고 살펴야 하는데 이에는 대단히 긴 시간과 노력이 요구되고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물론 본인도 기존 경전과 논서를 참조하며 내용을 살피는데 예를 들어 성유식론에서 호법논사는 유상유식학파라거나 안혜 논사는 무상유식학파라거나 청변 논사은 자립논증 중관학파라거나 할 때 본 논의 주제는 이들 각 논사나 특정 논서가 어떤 입장인가를 밝히는 것이 본 논의의 초점이 아니다.
그런데 이렇게 제시하면 그 내용을 그 논서를 하나하나 살피고 인용해가며 살펴야 하는 어려운 문제로 바뀌게 된다. 또 이런 과정에서는 단어 하나하나가 어떤 내용을 가리키는가를 놓고 대단히 많은 혼동과 혼란을 겪게 마련이다. 이것은 본인만 겪는 특수 문제가 아니고 이런 사정으로 이미 대단히 많은 복잡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는 한편 그 결론도 명확하지 않은 사정이 있다.
그것은 왜 그런가 하면 이미 앞에 언어가 갖는 어려운 사정과 함께 본 논의에서 그런 표현으로 가리키는 내용도 각 주체간에 명확하게 파악하기 힘든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중에 보면 제 8 아뢰야식이 있다거나 없다거나 또는 제 9 아마라식이 있다거나 없다거나 또는 아타나식은 아뢰야식과 같다거나 그것이 아니고 제 7 식을 가리킨다거나 앞에서 제시한 의는 제 6식과 관련된 제 6의근을 가리킨다거나 아니면 12345,6식의 찰나찰나 생멸하는 무간멸식과 제 7 식을 가리킨다거나 또는 단순히 제 7 말나식을 가리킨다거나 하는 등으로
대단히 복잡한 주장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같이 이들 정신은 손으로 만져지지도 않고 눈으로 보이지도 않는 가운데 언어표현만 가지고 이 문제를 살펴나가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그리고 각 언어표현은 그 자체만으로는 위 각 내용들 각각에서 어떤 의미라고 정해주는 힘도 없다.
그래서 이 논의가 알고보면 대단히 복잡해서 이런 조각글에서 살피기는 부적절하다고도 보게 된다.
그런데 이런 혼동을 피해야 하지만, 여하튼 각 논사들 주장을 하나하나 검토해야 하는 것은 또 어쩔 수 없다. 다만 여기서는 공연히 별 쓸모없는 논의를 피하기 위해 기존 논서의 각 언어표현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가 등을 놓고 이 문제를 살피지는 않는다는 것 뿐이다.
이는 다음 의미다. 3 세 실유설을 설일체유부가 주장했다고 할 때 이런 주장을 정말 어떤 논서가 주장했는가 이런 문제를 여기서 문제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다만 어떤 이가 눈을 떠서 보는 것의 정체가 무엇이고 어떤 요소를 통해 보는가에 관련해 추상적으로 이러이러한 입장이 있을 수 있다. 이렇게만 제시하고 살피고자 하는 의미다.
그래서 그 사정을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참고로 눈을 떠서 보는 과정에 관련되어서 가장 기초적으로 문제되는 망상분별의 내용은 이미 맨 앞에 제시했다.
일반적으로 과학책에서 소개될만한 그런 내용 또는 현실 병원에서 안과의사나 생리학자가 주장할 만한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이 왜 망상분별인가는 그간 대단히 많이 반복해 살폈다. 그런데도 현실에서 거의 대부분 그런 입장을 취하는 사정은 이미 또 앞에서 살폈다. 앞에서 처음 행한 실험이 바로 그것이다.
자신이 사과를 손에 놓고 두드리고 만지면 그때 소리를 듣거나 촉감을 느끼는 것처럼 눈으로 그 사과를 보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이해하는 내용이 그것이다. 이들이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과 관련해 서로 다른 내용인 것처럼 소개했지만, 이 과정을 이해하는 방식은 서로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대표적인 망상분별 증상이다.
앞에 소개한 입장은 일단 최소한 이런 입장은 아니다.
그리고 이 내용이 너무 많이 반복되어 이에 관련한 내용을 아예별도 페이지에 넣어 핫키로 축약해 놓은 상태다.
앞에서 사과를 하나 놓고 손으로 두드리고 만지면서 소리도 듣고 촉감도 얻게 될 때 이 관계를 그처럼 반복해 경험하는 이는 대부분 위 페이지에 망상분별증상으로 소개한 형태로 그 내용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경전에서 대단히 문제라고 제시하는 망상분별 증상이다. 그리고 바로 이 증상 때문에 각 주체가 생사고통을 무한하게 받는다고 이 사정을 제시한다.
따라서 수행의 목표란 일단 왜 이런 이해가 엉터리 망상분별이고 또 이런 이해에 바탕해 업을 행하면 왜 그로 인해 극심한 생사고통을 무한하게 겪는 상태로 지내게 되는가를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
여하튼 과거에 자세히 살폈지만, 여기서는 좀 더 자세히 반복해 살펴나가기로 한다.
뽑혀진 노래를 듣다보니 지옥의 공수행자도 언급하고 본 연구소 선현지복 연구소도 언급하고 죽어서도 지옥에서 탈출해 나올 방안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등의 메세지를 전하는 것 같은데 바로 이 부분이 그와 대단히 밀접한 관련이 있는 부분이다.
일단 이처럼 대강 논의방향을 제시하고 조금 더 쉬고 이어나가기로 한다. 왜 한 번에 죽 살피지 않는가 의문을 가질 수 있는데 본인도 작업할 내용이 많이 밀려 있기에 어쩔 도리가 없다.
앞에서 다양한 논서나 논사들의 제각각 다른 입장때문에 공연히 이 논의가 대단히 복잡하다고 여기고 회피할 수 있는데 사정은 그렇지 않다.
앞에서 제시한 것처럼 각 언어표현이 가리키는 내용만 잘 파악하면 별로 어렵지 않다. 이미 제시했듯 이런 내용을 몰라도 대부분 현실에서 눈으로 무언가를 보는 활동을 매순간 잘 행한다. 그리고 이런 내용을 살피는데 무슨 그런 어려움이 많겠는가. 사실은 그렇지 않다
물론 자세히 살피면 조금 복잡한 점도 있지만, 그런 문제때문에라도 본 논의를 살피기 전에 앞에서 제시한 실험을 반복해 행하면서 그때마다 얻거나 얻지 못하는 내용을 스스로 마음에서 잘 확보해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대단히 중요하다
눈을 감았다가 뜰 때 보게 되는 내용이 있다. 이것을 경전이나 논서에서 일단 '색'으로 표현한다. 그런데 색이란 하나의 표현도 자세히 보면 대단히 복잡하다. 다른 용어도 사정이 비슷하다.
그래서 여기서는 그런 혼란을 일으키기 쉬운 표현을 피해서 서술하고자 하는데 이 과정에서 이런 표현이 앞의 실험 과정에서 어떤 내용을 가리키는가를 큰 혼동을 일으키지 않고 파악할 수 있으면 논의는 대단히 간단하다. 그리고 앞에 제시한 여러 복잡한 입장도 또 이를 통해 대부분 쉽게 그 차이점을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처음부터 색이나 촉 식 이런 용어가 각 경우마다 어떤 다른 의미를 나타내게부터 살피면 앞과 같은 사정으로 골치가 아파서 대부분 포기하게 되기 쉽다.
그런데 사실은 이 언어표현이 가리키는 내용을 거의 대부분 매 순간 잘 행하고 있다.
문제는 그런 언어표현으로 일으키는 혼동과 함께 앞에 제시한 사정으로 매 순간 자신이 잘 행하는 이런 내용에 대해서 대단히 엉터리로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이에 바탕해 현실에 임해 나가는 것이 바로 그 주체가 생사현실에 묶여 극심한 생사고통을 받게 되는 근본 원인이므로 이 부분만 이를 통해서 잘 확인하면 된다.
그래서 다음 논의를 살피기 전에 먼저 자신의 손으로 눈을 가리거나 치우거나 하면서 무엇이 보인다거나 보이지 않는 변화가 있으면 그 부분과 함께 그런 내용을 잘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중에 보면 감관으로 제시하는 눈, 귀, 코, 입, 몸 등의 부분을 논서에서는 볼 수 없고 대할 수는 있다[무견유대]고 제시한다. 그런데 앞 실험에서 촉감을 얻는 감관을 파악할 때 손으로 촉감을 얻는다고 보았다면 이 손은 눈으로 볼 수 있지 않은가. 이렇게 대부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논서에서는 이 신을 무견유대(無見有對)로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일단 이런 세세한 부분을 놓고 주의해야 한다.
그리고 다른 부분도 다 그런 복잡한 사정이 있다.
그래서 일단 그런 자세한 내용을 살피기 전에 자신이 매 순간 잘 행해오던 그런 동작과 함께 감각을 얻는 과정을 반복해 행하면서 스스로 그 내용을 잘 파악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필요하다.
앞에서 눈으로 무언가를 어떻게 보게 되는가에 대해 살필 때 기본적으로 주의할 점을 먼저 살폈다.
그래서 처음에 눈을 뜨거나 감는 동작과 또는 눈을 손으로 가리거나 손을 치우거나 하는 동작을 반복하면서 자신이 무언가를 보는 과정을 놓고 이 각각의 내용이 무엇인가 그리고 어떤 사정으로 이렇게 보게 되는가를 살펴나가기로 한다.
일반적인 입장에서 기본적으로 이에 대해 어떻게 관찰하고 보고하는가는 이미 처음에 살폈다. 그리고 이것을 망상분별 증상이라고 여기서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눈으로 무엇을 보는 작용을 이해할 때만 그런 것이 아니고 그냥 눈으로 사과를 하나 보게 될 때 그 사과가 왜 거기에 그렇게 있게 된 것인가를 살필 때도 마찬가지다.
즉 일반인의 입장과 경전 입장은 차이가 그렇게 있다. 그런데 왜 그런가를 일반적인 입장에서 이해를 잘 하지 못하므로 이 사정만 잘 이해하면 이 문제가 대부분 해결된다.
그래서 위 실험이 비록 간단하지만, 위 실험을 반복해 보아야 한다.
처음에 이 과정에 대해서 설명하는 방식은 앞에서 제시했다. 다음과 같다.
자신이 손으로 만져서 눈으로 여기는 그런 부분을 가렸다. =>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부분에서 손을 치우고 눈을 떴다. 그리고 그처럼 눈을 뜬다는 동작은 촉감을 통해 자신이 스스로 확인했다. => 그러자 보인다.
이 때 그렇게 보이는 내용을 그 순간 잘 확보해 살펴야 한다. 그리고 이 때 그렇게 보게 되는 내용이 갖는 특성이 있다.
우선 이처럼 감각해 얻는 내용은 다른 이에게 그대로 전달하기 곤란하다. 그리고 이런 감각내용은 매 순간 그 당시 현재의 내용만 그렇게 얻는다. 이는 다음도 의미한다. 비록 자신이 본 내용이어도 눈을 감고나서 그 직전에 보았던 내용을 다시 되살려 내려하면 도저히 잘 안 된다. 이런 의미다.
눈을 뜨고 어떤 것을 계속 바라보는 상황에서는 이 점을 잘 의식하지 못할 수 있는데 사정이 그렇다.
그런데 한편 이처럼 계속 바라보는 상황에서는 매 순간 얻는 내용들이 앞 뒤 순간에 끊김이 없이 이어진다.
이는 또 다음을 의미한다. 만화영화를 보는 이는 쉽게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만화영화에서 연속된 동작으로 보게 되는 장면은 사실은 일정한 그림을 그려 초당 16 장 이상 정도를 계속 연이어 보여주면 그런 동작을 하는 것처럼 보게 된다. 그래서 엄밀하게 생각하면 어떤 만화영화를 볼 때 앞 그림과 뒤 그림을 보는 각 순간 사이에 그림이 없는 순간의 내용도 보아야 할 것 같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 경우 만화영화라면 초당 한 2 장 정도씩만 보여주면 그 차이를 볼 수 있을 지 모른다. 이 경우 그 동작이 끊기며 어색하다고 느낄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아이가 a 지점과 한 10 m 정도 되는 b 라는 지점을 향해 달려가는모습을 만화영화에서 보여주는데 그 사이가 끊겨서 3 m 씩 끊어서 뚝뚝 옮겨 간다면 어색하게 보일 것이다.
이는 종이에 한 3 장 정도 그렇게 그려 놓고 보면 그 상황을 이해할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런데 반대로 만화영화제작자들은 이런 어색한 장면을 피하기 위해 여러 장을 그려서 되도록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노력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사정을 이해하려면 자신이 눈을 뜬 채로 계속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자꾸 눈을 감았다 떴다를 반복해가며 세상을 대해보는 실험을 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매 순간 장면이 끊기는 사정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또 반대로 평소에 눈을 떠 계속 바라보는 상황은 이와 달리 그렇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일단 이 현상이 이상하다. 그리고 이런 것도 함께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을 불교 용어로 표현을 따로 하는데 여기서는 일단 생략한다. 그런데 나중에 한 순간에 어떤 모습을 볼 때는 이 내용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참고로 미리 언급하면 이는 다음 문제와 관련된다. 앞 찰나에 눈을 떠서 a 모습을 보았다. 그 다음 찰나에 눈을 감아서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 그 다음 찰나에 눈을 떠서 b 모습을 보았다. 이렇게 이 상황을 바꾸어 보기로 하자. 이 때 각 순간마다 그런 모습을 보게 하는 마음이 있다고 전제한다. 그렇다면 b라는 모습을 보는데 영향을 미치는 마음은 정작 어떤 마음이라고 할 것인가 이것이 일단 문제된다. 어떤 이가 어떤 모습을 보는 상황은 각 순간에 그 내용만 생생하게 얻는다고 처음에 제시했다. 그 다음 순간은 그 내용을 되살려 내지 못함도 제시했다.
그런데 b 라는 모습을 볼 때 a 라는 모습을 보던 당시의 마음이 이에 어떤 작용을 할 것인가. 이것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a 를 보는 순간은 a 를 보는 활동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각 순간마다 마음이 있다고 한다면 어떤 마음이 b 라는 모습을 얻는데 작용한 것인가. 이 문제가 제기된다. 어떻게 쉽게 생각하면 b 라는 순간을 얻은 그 당시 그 순간의 마음이다. 이렇게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는 이미 b 가 얻어진 상태다. 지금 문제는 b 가 안 얻어진 상태에서 어떤 마음이 작용해서 b를 얻는 그 순간의 마음처럼 만들었는가. 이런 문제를 살피는 것이다. 그래서 일단 이런 입장에서 한 번 위 문제를 놓고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위 사례는 중간에 눈을 감아서 보지 못하던 순간의 마음을 전제해 놓았다. 그런데 현실에서 어떤 내용을 계속 대하는 상황에서는 그런 내용을 찾기 힘들다. 그래서 조금 복잡하다. 마음 같아서는 앞 순간의 마음을 제시하고 싶은데 그 마음은 이미 그 순간에 얻는 내용을 얻어 내고 있기에 조금 바뻐 보인다. 이렇게 보게 된다. 그러면 무엇이라고 해야 하는가? 일단 이런 문제만 간단히 제시하고 넘어간다.
그리고 여하튼 사정이 이런 가운데 앞 순간에 본 내용은 뒤 순간에 자신이 되살려 얻을 도리가 없음을 먼저 잘 확인해야 한다.
그래서 처음 이 실험에서 감각을 통해 얻는 내용을 잘 확보하라고 한 것은 어떻게 보면 실험자가 아무리 노력해도 실제로는 행하기 불가능한 요구를 한 것이기도 하다. 어떻게 한 순간에 본 내용을 확보해 다음 순간까지 보관할 수 있겠는가.
사진을 찍으면 되는가. 그런데 사진도 마찬가지다.
사진은 눈으로 안 보는가. 지금 문제삼는 것은 눈을 감아서 보지 못하다가 눈을 뜰 때 그 순간 얻는 그 내용을 그 이후까지 잘 확보해 보라고 한 것이기 때문이다. 잘 안 된다. 사정은 그렇지만, 무언가를 보는 과정을 잘 이해하려면 마음으로라도 그렇게 문제삼는 그 내용을 일단 잘 구분해 확보해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그렇게 그런 내용을 일단 다른 내용과 구분해 확보하게 되면 이제 그것을 여기서는 '눈을 통해서' 얻게 되는 '감각현실' 또는 '감각내용'이라고 표현하겠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 내용과 관련한 내용들을 살펴나가게 된다. 그런데 처음에 이 내용을 다른 내용과 혼동하면 이후 논의 전체가 엉망이 된다. 그래서 처음에 이 부분을 언급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내용을 일정한 언어로 표현하는 사정을 앞에서도 제시했다. 즉, 이 논의에서 앞과 같은 내용을 일정한 언어로 표현해 제시한다고 했다. 즉, '감각현실', '감각내용' 이런 표현이다. 그런데 이 표현 자체는 언어다.
그래서 나중에 이 언어표현이 무엇을 가리키는가가 문제되면 다시 그 언어가 가리키는 내용이 무언가에 대해서 앞과 같이 확인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사실 그런 감각현실은 본래 그런 언어를 떠나 있는 어떤 것인데 이에 대해 논의를 하려면 여하튼 불가피하게 이렇게 일정한 언어표현을 '방편으로 시설해서' 논의를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가운데 지금은 무엇을 살피는 중인가 하면 일반적인 입장에서 앞과 같은 실험을 할 때 망상분별을 일으켜서 그 과정을 대단히 엉뚱하게 이해하게 된다는 그 사정을 살피는 중이다. 그리고 그것이 전도망상분별 증상이다.
앞에서 일단 무언가를 보는 상황을 다음처럼 그 관계를 보았다.
눈을 가린다( +눈을 감는다.) => 보지 못한다. 눈을 가린 손을 뗀다( + 눈을 뜬다) => 무언가가 보인다.
이런 내용을 현실에서 대단히 반복한다. 그리고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이것을 현실에서 인과의 내용으로 보고하게 되는 것이다.
이 내용은 또 다음을 의미한다.
처음 상황과 뒤 상황은 별 차이가 없다. 그런데 처음 상황에서 만일 눈을 가린 손을 떼지 않는다면 그래서 눈을 떠 대하지 않는다면 무언가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눈을 가린 손을 떼고, 눈을 떠서 대하니 무언가를 보게 된다.
그러니 무언가를 보게 되는 데에는 그렇게 눈을 가린 손을 떼고 가리고 하는 것 그리고 눈을 뜨고 감는 것이 관계가 된다. 이것을 지금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한가. 사실은 이상하다.
그런데 위 내용을 대하는 이는 일단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여기서 무엇이 이상한가라고 묻는다면 일단 다음과 같이 우선 제시할 수 있다.
눈을 뜨거나 감는 것 또는 눈을 가리거나 떼는 것과 무언가를 보는 것 또는 그렇게 보게 된 내용들은 서로 대단히 엉뚱한 내용들이다.
이 사정을 일단 비유하면 라면과 벽돌의 관계처럼 서로 내용이 엉뚱하다. 그런데 라면을 던지니 갑자기 벽돌이 나타났다. 그리고 현실에서 이런 현상이 반복된다. 지금 이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상하다고 하게 된다. 그리고 잘 생각해보면 이상한 것이다.
그런데 여하튼 이런 내용을 그런 형태로 현실에서 대단히 반복해 얻기에 이들을 서로 관련시켜 제시는 하지만, 자세하게 살피면 여기에는 대단히 많은 문제가 들어 있다.
그리고 이런 사정때문에 위와 같은 내용을 놓고 부처님께서 대단히 답답하고 안타깝게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정을 이해시키고자 부처님도 부처님 입장에서 일정한 방편과 시설을 동원해서 그렇게 답답하게 현실을 대하는 일반적인 입장을 이해하고 그 사정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그 상대가 이해하는 그런 형태로 일단 그 내용들을 그렇게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강에 건너가게 하기 위해 동원하는 '뗏목'의 비유가 나타내는 상황이다.
이것은 다시 좀 더 분명하게 이야기하면 다음을 의미한다.
본래 사정이 그렇지 않다. 그런데 상대가 그렇게 이해하므로 본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일단 상대의 그런 상태를 이해하고 그런 상대의 입장을 그대로 받아들인 다음
다시 이에 대해 일정한 언어 방편 시설을 해서 상대 입장에서 대단히 옳다고 보게 되는 내용을 시설헤 제시한다.
그래서 일단 잠깐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래서 이 부분이 처음 경전에 그렇게 제시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부처님 입장에서는 본래의 사정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답답한 상대의 입장에서 이해해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을 일단 그렇게 제시한다는 취지다.
그래서 이런 내용들 즉 불교에서 '세속제'라고 표현하는 이런 내용을 확립한 다음 이를 통해서 원래 본 사정과 관련된 내용을 점차 이해시키기 위해서 노력해간다는 것이 부처님 입장인 것이다.
사정이 그렇기 때문에 각 경전에서도 눈을 떠서 무언가 하나를 보는 내용을 놓고 서로간 대단히 차이나는 내용들을 대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부처님이 하나의 입으로 이 경우 저 경우 다 다르게 제시한다고 문제삼으면 곤란하다. 그리고 부처님이 이런 여러 내용을 제시하다가 자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에 대해 한 마디도 설한 바가 없다고도 제시함도 볼 수 있는데 이 사정도 그런 입장에서 잘 이해해야 하는 것이지 이것을 가지고 문제삼으면 곤란하다.
일단 앞에서 설명한 커피를 마시면서 맛보는 커피맛과 글자 '커피맛'의 관계도 그 사정이 마찬가지다.
일단 글자로 '커피맛'이라고 쓴 것은 한글이고 글자로 세 글자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것을 언어로 이해하는 입장도 있지만 한글을 전혀 모르는 외국인을 놓고 이 '커피맛'이란 글자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고 물으면 이 언어가 갖는 의미를 조금 더 자세히 이해할 수 있다.
그 외국인에게는 '커피맛'이란 글자는 그냥 하나의 그림에 불과하다.
이는 거꾸로 한국인에게 τη γεύση του καφέ 이런 내용이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과 상황이 비슷하다. 한국인에게는 위 글자는 별 의미를 갖지 않는 단순한 그림처럼도 보이는 것이다. 이 사정이 이해가 잘 안 되면 한자어를 휘날려 쓴 서예작품을 놓고 생각하면 쉽다. 물론 그런 글자를 쓴 이는 글자의 의미를 담아 쓴 것인데 입장에 따라서는 의미를 알 수 없는 하나의 그림이다.
이제 τη γεύση του καφέ 이런 글자를 놓고 이 상황을 이해해보자.
τη γεύση του καφέ 라는 글자를 눈으로 보면 이것은 하나의 그림과 같이 되어 이 그림 자체에 대해서 일정한 분별을 먼저 행하게 된다. 이는 눈을 감고 방금 전에 본 그 글자를 대강이라도 떠올려 보라고 할 때 그 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
이제 한 번 실험을 해보기로 하자.
처음 보는 글자를 한 번 보고 바로 떠올리기는 힘든데 그러나 노력할 때 무언가 이와 관련해 떠올릴 수 있다면 일단 앞과 같은 글자도 일반 그림처럼 그렇게 분별하게 된다는 의미다.
이는 그림을 보고 나서 눈을 감고 방금 전 본 그림에 대해 무언가를 떠올리라고 할 때의 상황과 이것이 같은 측면이라는 의미다.
그리고 이런 측면에서 글자를 하나의 그림처럼 놓고 그것을 대할 때 이런 글자에 대해 얻는 감각현실은 감각현실과 관련해 앞에서 설명한 내용이 그대로 다 적용된다.
즉, 이런 감각현실은 눈을 떠서 보는 그 순간은 명확하게 그 형체가 주변 여백과 구별되어 선명하고 생생하게 보이는데 정작 눈을 감게 되면 그렇지 않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는 직전에 본 내용을 그대로 되살릴 수 없다. 만일 그 감각내용을 되살려보려면 다시 눈을 떠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엄밀하게 그 순간에 새로 얻는 내용이고 과거에 얻는 감각내용을 되살려 내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런 특성은 감각현실 전반에 공통된 현상이 된다.
그리고 감각현실들의 사정이 그렇기에 자신이 얻는 감각현실은 그 매 순간은 대단히 생생한데 나중에는 되살리기 힘들고 또 다른 주체에게 자신이 얻는 감각현실을 그대로 전달하기도 곤란하다.
그런데 그런 감각현실을 얻고 눈을 감고 나서 이에 대해 떠올리는 내용은 일단 조금 감각현실과 성격이 다르다. 그래서 처음에 이것을 잘 구분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일반적인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의 특성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
자신이 어떤 그림을 눈으로 본다. 그리고 눈을 감는다. 그리고 생각으로만 그 그림에 대해서 떠올려 보려고 노력한다. 무언가가 생각으로 떠오른다. 이 때 그렇게 떠옳리는 생각내용에 눈으로 그 직전에 본 내용 가운데 단 한 부분이라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으면 확인을 해야 한다. 사정이 그렇지 않기에 이 두 내용은 엉뚱하다고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언가 단 하나라도 이 두 내용 사이에 공통된 내용이 있다면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일단 그런 내용이 확인되지 않으면 감각현실과 그에 대해 일으키는 관념내용은 일단 서로 라면과 벽돌의 관계처럼 엉뚱하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또 전혀 서로 무관하지 않은 것은 앞에서 본 것처럼 이상하게 그 라면을 대하면 그런 벽돌을 반복해서 일으켜 얻게 된다는 관계를 또 현실에서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도 사실은 이상한 것이다.
나중에 이것이 중요한 문제가 되는데 일단 여기서 나중에 이 두 내용을 가지고 논의 중에 혼동을 일으키지 않으려면 미리 처음부터 기본적으로 이 사정을 잘 확인해야 한다.
그런데 다시 언어의 하나인 글자 τη γεύση του καφέ 이 내용을 살피자. 이 이상한 글자는 대강 커피맛이라는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본인이 구글 번역기를 사용해서 복사해 놓은 글자다.
그래서 그리스어를 알면, 대강 위 글자로 또 다른 것을 찾아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언어를 언어라고 하는 부분은 사실은 바로 이 부분 때문이다.
즉 한글로 '커피맛' 이렇게 글자를 써 놓으면 이 글자를 보는 한국인은 기본적으로 이런 그림형태를 대하는 가운데 일반적인 그림을 대하는 상황처럼 앞에서 제시한 내용들을 행하는 한편
그런 그림에 대해 일으킨 분별 내용을 가지고 다시 자신이 문제삼는 또 다른 영역의 내용을 가리켜 대하게 된다.
즉 여기서는 자신이 커피를 마시면서 얻는 그 맛을 위 글자가 가리킨다.
그리고 이런 그림을 언어라고 할 때 이런 그림이 언어로서 맡아 하는 기능은 바로 이 부분이다.
그래서 일단 이 부분에서 서로 관련되는 각 내용을 놓고 서로 혼동을 일으키면 안 된다.
또 하나 언어가 다른 영역의 일정한 내용을 가리킬 때 그 내용들은 대단히 다양한 내용들이 되는데 이들 사이에서 그 언어가 정확히 어떤 내용을 가리키는가하는 부분에서 또 혼동을 일으키면 그 언어를 표현한 입장과 그 언어를 대하는 입장 사이에서 다시 착오나 혼동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그리고 지금 살피는 논의에 이런 성격이 대단히 많다.
눈으로 무언가를 보는 현상을 하나 설명하기 위해 예를 들어 심心 의意 식 識 근根 경境 식識 안眼 색色 안식眼識 작의作意 촉觸 수受 상想 사思 이런 표현을 사용하면 이 표현 하나하나가 모두 그런 혼동을 1차적으로 일으키게끔 된다는 사정이 있다.
어떻게 보면 이런 혼동을 줄이기 위해 각 영역의 각기 다른 내용을 가리킬 때마다 언어표현을 하나하나 구별해서 가리킨다고 해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영희가 100 m 멀리서 자신 앞으로 뛰어오는 과정을 살피면 처음에는 콩알보다 작게 보이고 나중에는 킹콩처럼 크게 보이게 되고 매 순간마다 그 형태가 달라지므로 언어로 이 사정을 명확하게 제시하려면 그 각각을 하나하나 다 대응시켜 엄밀하게 구분해서 α,β,γ,δ,ε,ζ,η,θ,ι,κ,λ,μ,ν,ξ 또는 α영희 ,β영희 이런 이런 형태로 구분해 사용하면 될 것 같지만, 사실은 곤란하다.
그리고 언어는 단순히 이런 감각현실만 가리키는데 사용되는 것도 아니다.
일전에 존재유무가 문제될 수 있는 여러 영역을 그림으로 제시한 적이 있다. 그런데 언어는 문제되는 내용을 다 그렇게 가리킬 수 있다.
비록 그런 언어로 가리키는 그 내용 자체는 그 언어를 떠난 것이어도 일단 논의를 통해 그에 대해 이해하려면 그런 언어를 방편으로 삼아 무언가를 제시하려는 노력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사정으로 문제가 먼저 발생하는 사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
참고로 존재 유무를 문제삼을 수 있는 여러 영역에 대한 그림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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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상황을 놓고 보자. 어떤 이가 커피를 마셨다. 눈으로 보니 커피색이 곱다. 그런데 커피가 향도 특이하다. 커피가 맛도 좋구나. 그런데 커피가 좀 뜨겁다. 이 커피가 값이 비싸네 나올 때 보니 영수증에 커피는 십만원이라고 한다. 어떻게 커피 한 잔을 십만원을 받는가. 커피는 맛이 좋았는데 결과적으로 기분이 별로 안 좋다. 커피만 보면 불쾌해진다. 이제는 커피라는 글자도 보기 싫다. 커피는 나쁘다. 이런 여러 내용을 언어로 제시하는데 각 경우 '커피'란 단어가 각 상황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가리키고 있다.
그런데 존재 유무에 관한 논의를 할 때는 논의가 이런 차원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것의 정확한 본 정체를 파악하는 과정에서는 이처럼 현실에서 어떤 주체가 그 내용을 매 순간 비교적 생생하게 얻는 그런 측면보다 그렇지 못한 측면이 더 문제가 된다.
이런 경우다.
자신이 안경을 쓰고 커피를 보니 처음에는 이렇게 보였는데 조금 있다 안경에 김이 서리니 모습이 달리 보인다. 그런데 이 가운데 어떤 것이 진짜 커피의 모습일까.
앞에서 100m 앞에서 영희가 자신쪽으로 달려오는 상황도 마찬가지다. 매 순간 그 크기나 형태가 다 다른데 이 가운데 어떤 내용이 영희의 진짜모습인가 이런 문제도 사정이 같다.
그런데 이런 문제도 알고보면 대단히 어려운 문제다. 어떤 이가 이 가운데 특정한 내용이 그런 내용이라고 제시한다면 그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내용을 찾기 힘들다.
또 구체적으로 보면 매순간 그 크기나 형태가 다 다른 α,β,γ,δ,ε,ζ,η,θ,ι,κ,λ,μ,ν,ξ 들 대하면서 어떤 주체는 여들 모두가 영희라고 여기는 한편 이 각각에 영희의 어떤 공통한 모습이 있다고 여기게 된다. 그래서 그런 내용이 그렇게 이 각각에 있다면 그것이 과연 무언가를 놓고도 대단히 큰 혼동을 일으킨다.
여기서는 런 영희에 해당하는 모습 등이 이들 각각에 있다면 이 가운데 어느 하나에서라도 그것이 찾아져야 한다. 그런데 그것도 찾기 곤란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일반적으로 어떤 감각현실에 대해 일정한 판단을 행할 때 처음 일으키기 쉬운 혼동 문제다. 즉 자신이 α,β,γ,δ,ε,ζ,η,θ,ι,κ,λ,μ,ν,ξ 와 같이 매순간 서로 그 크기나 형태가 다 다른 내용을 놓고 '이것들은 모두 영희다' 그리고 이런 판단은 옳은 판단이다고 제시할 때 감각현실 자체는 그런 분별이 아니라는 앞 사정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
또 한편 이들 여러 모습 가운데 α가 영희의 참된 모습이고 나머지는 아니다. 그래서 α를 영희라고 하면 참된 판단이고 나머지 β,γ,δ,... 등은 영희에 대해 잘못 얻는 내용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것도 대단히 곤란하다. 여하튼 이런 내용들이 현실에서 각 주체가 얻는 내용안에서부터 문제를 발생시킨다.
α,β,γ,δ,ε,ζ,η,θ,ι,κ,λ,μ,ν,ξ 라는 감각현실을 매 순간 얻고 이를 통해 그 각각에 대해 영희라는 생각과 분별을 일으킨 것은 이해하는데 정작 그런 생각과 분별내용은 그런 감각현실에서는 얻을 수 없는 사정을 맨 처음 잘 확인해야 한다. 앞에서 라면과 벽돌의 관계로 비유한 내용을 이 대목에서 잘 살펴야 한다.
또 이 가운데 어떤 내용도 그것이 매 순간 그처럼 얻어졌다는 점 이외에 그것이 무엇에 대해 그런 내용을 얻은 것인가가 제시되지 않는한 이 가운데 무엇을 옳다거나 그르다고 판단할 근거자체가 확보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런 점들도 이 기회에 함께 잘 이해해야 한다.
나중에 이런 문제가 대단히 심각하게 문제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혼동을 일으키기 쉽다. 참고로 금강경에서 제상비상 즉 모든 상은 상이 아니다 이런 구절을 놓고 이 문제를 잘 음미해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
이제 다음과 같은 중요한 문제가 또 있다.
앞과 같이 현실에서 각 내용을 얻다가 그러다가 눈을 감으니 아예 보이지 않는다. 앗 이상하다.
분명히 방금전까지 커피가 보였는데 눈을 감으니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 이 순간 직전에 본 그 커피는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일까. 아니면 자신이 보지 않더라도 자신이 직전에 그처럼 보았던 커피에 해당하는 어떤 그 무엇은 그대로 남아 있는가. 궁금하다.
그런데 자신이 눈을 감아 보지 못해도 그래도 무언가 커피에 해당한 그 무엇이 그대로 있다면, 그 내용은 어떤 것인가. 자신이 눈을 감을 때 그 순간에 얻는 그런 어떤 내용이 그것인가. 아니면 눈을 떴을 때 그 순간에 얻는 그런 내용인가. 그것도 안경을 여러개 자신이 바꿔 쓰는데 어떤 돗수의 어떤 색의 안경을 써서 본 내용이 그것인가. 이런 식으로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그런데 만일 이런 문제가 제기되면 또 이처럼 문제삼는 본 바탕에서 커피에 해당하는 실재내용도 역시 커피란 단어를 사용해가면서 살펴야 한다. 예를 들어 커피의 실재는 무엇인가 즉, 자신의 감관이나 자신의 주관과 관계없이 본 바탕에 그대로 있다고 할 커피는 과연 무엇인가. 이런 형태로 문제를 제기하고 살피게 된다.
또 여기에는 다음 문제도 있다. 분명 맑은 정신으로 커피 하나를 바라보는데 앞과 같이 안경을 바꿔 쓸 때마다 모습이 다르다. 심지어 빛을 조금씩 바꿔도 달리 보인다. 또 가깝게 다가가 대할 때와 멀리 놓고 대할 때 그리고 왼쪽으로 고개를 기울여서 대할 때와 아래에서 위로 올려 대할 때도 그 때마다 달리 보인다. 이것이 대단히 이상하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매 경우마다 조금씩 달리 보이는데 그래도 또 커피는 커피라고 알아 볼 수 있다 . 이것이 더 이상하다.
즉 매번 볼 때마다 크기나 형태가 다 달리 보이는데도 그러나 커피는 커피고 산은 산이다. 이렇게 자신이 분별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더 이상한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생각할 때 이런 내용을 반복해서 얻고 그래서 각각을 구분해 내는 것은 커피는 다른 것 즉, 의자나 책상 산 들 이런 것과 구분해 파악하게 하는 그 자체의 성품을 갖고 있기에 그런 것이라고 일단 보게 된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그런 커피나 의자 책상, 산, 들 이런 것이 어떤 존재로서 공통해 갖는다고 보는 성품도 있지만,
매 경우 커피를 다른 것들과 구분해서 대하게 되는 어떤 커피만의 자신의 성품이 있어서 그렇다고 이 사정을 이해하게 된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커피의 '자성'이라고 표현하는 내용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는 일반적으로 그렇게 커피를 다른 것들과 구분해 이해하게 하는 그런 성품도 문제지만,
지금 여기서 문제삼는 것은 매 경우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다른데도 그러나 매 경우 또 일정하게 커피는 커피로 산은 산으로 그처럼 파악하게 되니 그 각각의 다른 내용들에는 그 각각의 다른 내용을 그처럼 하나의 커피로 이해하게 만드는 어떤 진짜의 커피에 해당하는 성품이 그 안에 어딘가에 들어 있기에 그런 것이 아닌가. 이런 의문을 또 일으키게 된다.
그래서 이것은 결국 앞과는 성격이 다른 특별한 의미의 성품을 찾는 문제가 된다.
즉 꿈에서 꾸는 바다나 황금과 같은 내용을 놓고 문제삼는 그런 성품과는 달리 영원히 고정되어 있고 변하지 않은 어떤 것으로서 커피를 커피로서 다른 것들과 구분하게 하는 그 자체의 참된 진짜 내용이나 그 성품이 어딘가에 그렇게 있어서 매 경우 비록 조금씩 다르지만, 자신이 커피를 커피로 대하게 되는 것이라고 추리하면서 이런 커피의 참된 본 성품과 본 모습을 찾아 나서게 된다.
그리고 이에 대한 내용이 결국 불교에서 살피는 무아 무자성의 논의와 관련이 된다. 그리고 이런 논의가 현실에서 한 주체가 얻는 각 내용의 정체를 살피는데 대단히 중요하다.
그런데 이처럼 각 내용의 정체를 살피는 과정에서 갑자기 현실에서 이런 내용을 얻는데 동원되는 '마음'이나 각 '감각기관' 등의 정체가 또 문제된다.
우선 여기서 대단히 그 정체를 파악하기 힘든 것이 '마음'이다.
한 주체가 커피를 마시면서 맛을 보고 그런 모습을 보는 것은 마음 때문이라고 제시하지만, 정작 그 마음을 직접 눈으로 보거나 만질 수 없다.
그리고 사정이 이러면 원래 그런 것은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없다'고 판단해야 하는 것이 된다.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있다' '없다'를 구분할 때 무언가가 '없다'는 표현은 바로 그런 상태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다.
탁자에 커피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만일 커피가 '있다'면 자신이 눈을 뜨고 있고 또 빛도 비추고 있고 탁자 위에 '있는' 다른 사물은 지금 다 보거나 만지는 상태인데 그런데 자신이 찾는 커피에 해당하는 것은 그와 달리 보이지도 않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다. 그래서 탁자 위에는 커피는 '없다'라고 일반적으로 표현하게 된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마음'은 어떤가. 마음으로 무언가를 본다고 열심히 누군가 주장하는데 정작 그 상황에서 어디에 그런 마음이 있는가라고 물으면 무엇때문에 무엇을 근거로 그런 마음이 있다고 할 것인가. 이것을 먼저 확인해야 한다.
그래서 이 논의가 대단히 복잡하다.
처음에 각 언어로 가리키는 각 내용들이 본래 언어와 친하지 않고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사정에 놓인 것이 많은데 그러나그에 대해 논의하고 살피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언어'로 나타내게 된다.
그래서 구체적인 상황에서 이 언어가 일으키는 혼동이 극심하다는 사정을 기본적으로 살폈다.
그런데 그런 가운데에서도 매 순간 어느 경우에도 눈으로 보지도 못하고 손으로 만질 수 도 없는 어떤 것은 그 혼동이 더 심하다.
그러니까 이런 경우는 더 주의해서 각 언어가 구체적으로 어떤 영역의 어떤 것을 가리키고자 그 상황에 사용된 것인가를 자세히 살펴야 한다.
그런데 사정이 본래 이렇지만, 그러나 이런 사정 자체를 이해시키기 위해서라도 일단 이런 언어 방편을 시설해서 각 내용을 가리키면서 논의를 해야 하는 사정이 있다.
그래서 부처님도 처음 그런 상황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처음 막 대하는 일반인을 상대로 일단은 기본적으로 그 일반인의 수준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으로 일정한 내용을 제시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이런 내용을 바탕으로 결과적으로 처음 내용과는 다른 내용을 제시하게 된다해도 이를 너무 이상하게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리고 각 논사들의 입장도 사실은 이와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불교 유식학파의 입장에서 이런 과정을 설명하는 경우 먼저 자신이 설명하고자 하는 그런 내용들이 모든 마음안 내용이고 거기에는 일반인이 생각하듯 그런 내용을 얻게 한 '대상'이란 없다는 사정을 기본적으로 잘 이해한다.
그렇지만, 상대에게 그 사정을 처음 설명할 때는 결국 상황이 마찬가지가 된다. 그래서 어떻게 눈을 떠서 사물을 보게 되는가 이 문제를 처음 설명할 때는 앞에서 처음 과학자나 의사가 관찰하고 설명하는 방식과 대단히 유사한 형태로 처음 그 내용을 제시할 도리 밖에는 없다.
예를 들어 앞에서도 실험했듯 자신이 눈으로 보는 사과를 손으로 대면 그 때마다 촉감을 느낀다면 일단 이에 대해 생리학자가 이해하는 내용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더라도 일반인이 이해하는 내용을 바탕으로 그 상황에서 문제삼는 내용들을 그처럼 언어로 시설해 일단 제시하게 된다.
그리고 이제 이를 바탕으로 점차 설명을 덧붙여 상대가 촉감을 얻을 때 무언가를 그런 촉감을 얻게 한 대상으로 여긴다면 그런 내용은 그 마음안 내용이고 그런 마음안 내용에는, 그런 내용을 얻게 한 대상이 없다는 사정을 이해시키고자 한다.
그래서 이 두 내용도 사실은 서로 어긋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설명하게 되는 그 사정이 불가피하게 그렇게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기본 사정을 이해하고 각 경전이나 각 논서에서 차이나는 내용을 대하지 않으면 나중에 그 혼동을 해결하기가 상당히 어렵게 된다.
그런데 일단 글이 길어져서 쉬어야 하는데 이 부분에서 처음에 제시한 내용을 먼저 잘 확인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눈을 떠서 자신이 무언가를 보는 가운데 어떤 부분은 사과고 또 어떤 부분은 손이라고 여기면서 그렇게 분별을 일으키는 것은 이해하지만, 그런 감각현실에 그런 분별 내용은 얻을 수 없다. 이것부터 먼저 잘 확인해야 한다.
그래서 처음 문제되는 상황을 놓고 이에 대해 이해하는 내용에서 극심한 차이가 먼저 발생한다.
또 한편, 어떤 상황에서 어떤 내용을 문제삼을 때 예를 들어 사과를 책상에 놓고 사과를 문제삼을 때 일반적으로는 자신이 보는 사과가 객관적으로 그렇게 있다고 여기며 이를 살피기 쉽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그렇게 대하는 그 주체의 마음을 전제하지 않으면 곤란하다 이것도 하나의 현상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대단히 큰 차이를 발생시킨다.
일단 현실에서 어떤 주체가 눈을 떠 무언가를 보는 것을 놓고 기본적으로 문제되는 내용을 살폈다.
이제 이 상황을 놓고 조금 더 자세하게 살펴나가기로 한다.
이는 일반적인 입장처럼 임하면 왜 그로 인해 극심한 생사고통을 받게끔 되는가. 또 반대로 그런 생사고통을 벗어나려면 현실에서 어떻게 이를 대하고 행해야 하는가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앞에서 제시한 여러 복잡한 논의를 살피는 의미는 바로 이 부분에 있다.
앞에서 커피로 여러 사례를 들었는데 이제 그것이 어떻게 문제되는가를 한번 살펴보자.
앞에서 한 사람이 어떤 곳에서 다른 이와 만나며 커피 한잔을 마셨는데 나갈 때 계산서를 보니 커피 한잔에 십만원으로 적혀 있다.
그래서 이를 문제삼고 그럴 수 있는가 물으니 종업원이 사정을 말한다. 아저씨께서 커피를 마신 곳이 123 층 빌딩에서 가장 임대료가 비싼 층에서 대단히 넓은 룸에서 커피를 마신 것이 아닌가. 그런 사정으로 커피값이 비싸다라고 해명을 한 것이다.
그런데 그 아저씨는 그 상황에서 그것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 그렇다면 미리 알려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 곳이 커피를 파는 곳인가. 장소 사용료를 받는 곳인가. 이렇게 문제를 제기하면서 다투다가 나중에 그 커피숍의 온갖 기물을 다 부수면서 이 문제를 따졌다고 한다.
그런데 이 사건이 소송문제로 전개되어 최종심 판결에서 그 아저씨가 책임이 있어서 일단 교도소에 1 년 정도를 지내야 할 뿐 아니라 그 커피숍의 온갖 귀중품을 다 파손한 데에 대해서도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고 최종 판결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 그 커피숍안에 세계에서 단 하나 밖에 고려 청자와 그 유명한 세계적 화가의 그림까지 파손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손해배상액이 1200 억원에 달한다는 것이다. 놀라운 일이 아닌가. 그래서 요즘 그 아저씨가 계속 교도소 한 곳에서 이 문제를 놓고 고민하며 배회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물론 조금 허구적인 내용인데 현실에서 각종 사건 사고가 전개되는 사정이 대부분 이와 비슷하다.
거리를 지나가다가 어깨를 살짝 부딪힌 것 뿐인데 그로 인해 상대를 살해하기도 하고 어떤 요금문제나 주차 문제를 가지고 잠깐 시시비비를 따진 것 뿐인데 그로 인해 그 당사자들이 한 쪽은 교도소에 한쪽은 중환자실을 거쳐 장례식장에 이렇게 바삐 오간다는 사건 사고의 보고 내용이 바로 현실에서 보는 생사고통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현장에 대해 부처님이 제시하는 기본 내용은 그렇게 각 당사자들이 문제삼고 어떤 것은 지극히 좋고 어떤 것은 도저히 억울하기도 하고 고통스럽다고 대하는 그런 상황에 그런 내용을 본래 하나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사정이 그런데도 그러나 각 주체는 그 상황을 그렇게 이해하고 대하지 못한다. 또 사정이 그러니 그런 망상분별과 집착을 바탕으로 무언가를 행하면 그로 인해 그 바탕에서 극심한 고통을 받는 상태로 매 순간 바삐 옮겨다니게 된다는 사정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처음 무언가를 행한 내용과는 대단히 엉뚱한 형태로 그 주체가 나중에 어떤 상황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 바탕에는 그 주체가 처음 행한 업과 그로 인해 얻는 결과 사이에서 그 내용들을 모두 그 주체와 관련시키게 되는 그 무언가가 일단 일정하게 있다는 의미다.
그것은 앞에서 영희가 100M 를 먼 곳에서 달려오는 상황에서 매순간 그 크기나 형태가 달라서 α,β,γ,δ,ε,ζ,η,θ,ι,κ,λ,μ,ν,ξ 로 파악된다고 한다거나
어떤 이가 처음 태어날 때의 모습과 초등시절 때 내용과 나중에 노인이 될 때의 내용까지의 모습과 내용을 다 나열하면 또 앞과 마찬가지로 그런 주체의 정신적 육체적 내용을 모두 α,β,γ,δ,ε,ζ,η,θ,ι,κ,λ,μ,ν,ξ 로 서로 달리 파악하게 되는데
각기 다른 이들 내용을 한 주체의 일로 그 주체가 여기고 대하게 되는 어떤 요소가 따로 그렇게 있다.
그래서 각 주체가 매순간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대하게 되는 α,β,γ,δ,ε,ζ,η,θ,ι,κ,λ,μ,ν,ξ 는 정작 그런 내용은 아니지만,
그런데도 이 각 상황에 이 각각을 하나의 주체와 관련된 내용으로 함께 파악하게 하는 요소가 있다. 그리고 이것을 먼저 대수식(algebra 알지브라)의 형태로 일단 U 라고 표시하고 그 U 때문에 이들 각각의 내용을 한 주체와 관련된 내용으로 파악하게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 U 가 과연 무언가를 여기서 문제삼고 살펴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바탕에서 앞과 같이 매순간 망집과 번뇌를 바탕으로 해서 엉뚱한 내용을 매 상황에 그렇게 있다고 여기면서 그에 바탕해서 무언가를 행하게 되면
그런 업들이 마치 밭에 뿌린 하나의 씨처럼 이 U 에 담기게 되는데 마치 밭에 그런 씨가 뿌려지면 나중에 이 씨와는 대단히 서로 엉뚱한 내용이라고 보는 그런 열매를 그로부터 얻는 것처럼
이 경우도 처음에 행한 업과는 그 모습이나 내용이 대단히 달라서 서로 대조하면 대단히 서로 엉뚱한 그런 열매를 그로 인해 얻게 된다. 그리고 이것을 대단히 심각한 생사현실의 문제로 보게 된다.
즉 예를 들어 초등시절에 불을 가지고 장난을 쳤다거나 축구공을 가지고 길에서 놀았다는 일은 이후 그로 인해 화상을 입어 흉터가 생겼다거나 또 전신에 장애가 발생했다는 내용과 이 둘을 비교하면 대단히 서로 엉뚱하다.
그런데 앞에서도 이처럼 엉뚱한 내용의 관계를 대단히 많이 살폈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손을 마주치면 손뼉소리를 듣는데 막상 손과 이 소리를 놓고 서로 비교하면 이 둘은 대단히 엉뚱하다. 이 대목에서 라면과 벽돌의 비유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그 바탕에서는 현실에서 그런 관계로 그런 내용들을 대단히 반복해 얻고 또 무한히 그런 관계로 그런 엉뚱한 내용을 얻어나가게 된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다. 손을 사과에 대면 이로 인해 촉감을 얻는다고 할 때 현실에서 이런 내용을 그런 관계로 대단히 반복하게 얻는다. 그런데 이 두 내용을 놓고 비교하면 이들은 서로 대단히 엉뚱한 것이다.
그리고 씨와 열매도 사정이 같다. 그래서 처음 씨에 해당하는 무언가를 행하면 그로 인해 이와는 대단히 내용이 다른 어떤 내용을 그 바탕에서 얻게 된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이것을 어려운 한자어로 표현하게 되는데 문제는 그 각 내용이 서로 대단히 엉뚱하지만, 위와 같은 형태로 무한히 반복해 각 주체가 그런 내용을 그렇게 얻게 되는 사정을 제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초등 시절에 어떤 아이가 도로에서 공을 차고 논 일과 그 이후 어떤 아저씨가 평생 장애를 겪고 지내는 일을 놓고 이 둘을 대조해 살피면 이 둘은 서로 얼마나 엉뚱한가. .
그런 가운데 이들 내용을 서로 관련지으며 초등시절부터 노인이 될 때까지 한 주체와 관련해 나열하는 α,β,γ,δ,ε,ζ,η,θ,ι,κ,λ,μ,ν,ξ 에서 그 사정을 살피는데 정작 이렇게 나열한 부분에서는 그런 내용을 찾을 수 없다.
쉽게 말해 α 부분에서는 ξ에서의 그런 내용이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사정을 살피면 이렇게 서로 엉뚱한데 현실에서 그 아저씨가 그렇게 지내게 되는 사정은 이 아저씨를 놓고 생각하면 이 아저씨와는 아주 엉뚱하게 서로 다르다고 보아야 할 어떤 초등학생이 행한 일을 이와 관련시키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 앞에서 처음 대수식형태로 제시한 모호한 U 가 개입한다. 즉 초등학생시절에 행한 어떤 행위가 엉뚱하게 나중에 어떤 아저씨에게 엉뚱한 그런 결과를 일으키게 된다고 보는 그 바탕에는 그런 U 가 이에 관여해서 그렇게 된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것이 생사고통의 문제다.
그리고 그 U 가 그렇게 현재의 이 순간에 있고 작용하는 것처럼 처음 이번 생을 출발할 때에도 그런 U 를 전제하지 않으면 그 이후의 내용을 설명할 수 없고 그리고 또 이 사정이 매 생마다 그렇게 계속 이어지고 그리고 사정이 그렇지 않다면 지금 생의 현재의 내용도 똑같은 전제에서 설명할 수 없음을 제시하는 것이다.
왜 엉뚱한 초등학생이 학교에서 배웠던 산수나 국어를 지금 이 순간 그 초등학생과는 형태가 다른 엉뚱한 아저씨가 그것을 사용하는가 이 문제도 마찬가지다.
또 사정이 그렇기에 이런 사정으로 한 주체가 망집에 바탕해서 일정한 업을 행하면 그로 인해 무한히 생사고통을 받아나가게 되는 현실의 어려운 사정을 함께 제시하는 것이다.
이런 내용이 무한한 시공간에서 아주 특수한 어떤 상황에서만 딱 1 회 적용되고 그 사정이 그렇지 않다고 보아야 할 것 같은데 그런데 이 생사현실의 사정이 그렇지 않다.
그래서 서로 엉뚱하고 본래 그런 내용이 하나같이 실답지 않은데도 마치 엉뚱하게 손바닥을 마주치면 그때마다 이 손바닥과는 대단히 엉뚱하다고 할 손뼉소리를 반복해 듣게 되는 것처럼 경전에서 일정한 망집에 바탕해서 일정한 업을 행하면 그로 인해 극심한 생사고통을 받는 3 악도에 들어가서 대단히 장구하게 고통을 받게되는 어처구니 없는 상태에 처하게 된다는 것을 바로 생사현실의 문제로 지금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 문제를 지금 현실에서 잘 해결해야 하기에 그런 취지에서 이 문제를 살피는 것이다.
또 이 문제가 알고보면 바로 하나같이 그 내용이 공하고 실답지 않은데 정작 그러한 공한 지옥에서 수많은 중생이 무한한 기간에 걸쳐 엉뚱한 고통을 극심하게 반복해서 받아나가는 상태가 펼쳐지고 있고 사정이 그렇기 때문에 이 사정을 잘 파악해서 미리 이런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잘 벗어나 탈출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것이 잘 이해가 안되면 현실에서 어떤 사건 이후로 계속 침대에서 장애를 겪고 지내는 어떤 아저씨에게 다가가서 처음에 어떤 사정으로 그렇게 되었는가를 캐묻고 그 사정을 또 다시 따져봐야 한다.
그리고 그 사정을 살피면 이들 관계는 바로 밭에 뿌리는 씨와 그 씨로 인해 가을에 나타나는 열매의 관계와 그 사정이 같다. 이 두 내용이 서로 다르기에 이것을 이숙인 이숙과로 표현하는데 그 내용이 바로 이 부분이다.
그리고 한 주체와 관련해서는 앞에 U 라고 모호하게 표시한 그 내용이 여기에 관여해서 사정이 그렇다고 제시하는 내용이다.
그러니 현실의 한 단면에서 자신이 커피 하나를 놓고 그 상황에서 그런 커피가 있다고 여기면서 처음 그 상황을 대한 문제부터 잘 해결해야 한다.
그런 망집이 있게 되면 그 이후의 내용들은 앞과 같은 사태를 피하기 힘들다
그래서 본 논의가 갖는 효용은 그저 아무 실익이 없는 공허한 이론을 놓고 시시비비를 따지는 문제가 아니다.
조금 더 길게 자세하게 이 문제를 살펴야 하는데 이미 또 다른 조각글이 올려져 있다. 그래서 어차피 마음에 관련된 내용을 이와 함께 살펴야 하는데 이는 다음 조각글로 장소를 옮겨 계속 살펴나가기로 한다.
일단 마음현상을 이해할 때 그 마음을 하나의 그릇이나 또는 거울로 비유해 이해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그런 가운데 처음 제시하는 내용은 현실에서 한 주체가 얻는 내용은 사실은 그런 그릇이나 거울에 이미 들어온 내용을 가리킨다.
그런데 일반적인 입장에서 이해하는 내용들이 거꾸로 뒤집힌 전도망상분별이라고 지적하게 되는 사정은 정작 이런 그릇이나 거울에 들어온 어떤 한 내용 예를 들어 그릇에 들어오거나 거울에 비친 떡이나 벽돌을 놓고 정작 그 떡이나 벽돌이 바로 그런 내용을 얻는 주체이고 또 바로 그런 부분에 그런 그릇이나 거울이 놓여 있다고
엉뚱하게 거꾸로 뒤집어서 이것을 이해하는 점이다.
이것을 마치 바다가 바다자신을 찾을 때 바다 안의 물방울 하나를 붙잡고 그것이 곧 바다 자신이라고 거꾸로 관계를 뒤집혀서 이해하고 그에 바탕해 그 바다를 움직여간다고 보는 것과 사정이 같다고 비유해 설명하기도 한다.
그런데 현실에서 그렇게 그 관계나 내용을 엉뚱하게 이해하게 대하게 되는 데에는 또 그렇게 되는 일정한 사정이 있다. 그것을 처음에 살폈다. 그것이 하나같이 실답지 않고 엉뚱하지만, 매 상황에서 손을 사과에 갖다 대면 촉감을 얻는 등의 사정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이렇게 된 사정을 이해하려면 좀 더 그 사정을 자세하게 살펴야 한다.
즉 벽돌에 그릇이 담겨 있는데 이상하게 그 벽돌에 다른 떡이 닿게 되면 그 때마다 무언가 내용을 얻는 그런 사정이 있기에 그 그릇이 거꾸로 그 벽돌을 붙잡고 그것이 바로 자신이라고 이해하면서 매 상황을 대하게끔 되는 그 사정이 또 있다.
이것은 결국 공한 실상을 바탕으로 공중 3 회전에 걸쳐 망집을 일으켜서 그 망집이 단단히 매듭지어진 상태에서 현실에서 처음 태어나 이후 그 바탕에서 생활하기에 그렇다고 설명하게 되는데 여하튼 현실에서 엉뚱하게 상황을 이해하고 대하게 되는 데에는 나름 그런 복잡한 사정이 있다.
그리고 원래 그런 망집이 현실에 맞지 않는 엉뚱한 내용이기에 그런 망집을 일으키고 그에 바탕해 무언가를 행하면
그로 인해 아무 영향을 안 받게 되면 모르는데 사정이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갑자기 망상증이 생겨서 방에 본래 있지도 않은 황금이 묻혀 있다고 여기게 되면 이런 망상은 대단히 엉뚱한 생각이고 현실에 맞지 않다.
그래서 이 생각이 전혀 근거가 없고 사실과 다르기에 이런 생각을 가지고 방을 파대거나 무언가를 행하면 그 바탕이 되는 망상이 엉터리이기에 그로 인해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아야 할 것 같기도 한데 현실 사정은 전혀 그렇지 않고
예를 들어 이후 층간 소음을 발생시키고 아래 층 주민에개 극심한 재산상 피해와 고통을 준 혐의로 그가 체포당하기도 하고 또 그로 인해 대단히 고통을 받는 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그런데 바로 이런 상황들이 바로 그런 엉뚱한 망집에 바탕해서 엉뚱한 행위를 그렇게 매 순간 행하였기에 그런 전제에서 그런 상태에 처하게 되는 것이라고 그 사정을 제시하게 된다.
그것이 하나하나 실답지 않기에 그런 인해 아무런 문제가 있을 리 없다고 보기 쉬운데 정작 생사현실의 사정이 정반대인 것이다.
예를 들어 그릇에 담긴 떡을 놓고 거꾸로 그 떡안에 그 그릇이 놓여 있다고 이해하고 매 순간 생활하는 것도 이와 사정이 마찬가지다.
그로 인해 그 그릇이 이후 아무 별 탈이 없게 되면 처음 망상분별은 별 문제가 아니라고 해야 하는데 사실은 이와 정반대로 이후 그 그릇이 만나게 되는 온갖 비극적인 상황은 바로 그런 망상분별을 바탕으로 해서 비롯된다.
현실에서 어떤 이가 눈을 뜨고 대하는 그 일체는 비유하면 거울면에 비춰진 어떤 내용과 사정이 같다. 사정이 그런데 이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그렇게 비춰진 거울면 내용을 붙잡고 그 거울이 요동을 쳐대서 그 거울이 이후 온갖 비극적인 상태에 처하게 된다.
이처럼 현실에서 각 주체가 망상분별을 일으켜 현실에 임하여 업을 행하면 매 순간 어떤 이가 스스로 자신이라고 보는 α,β,γ,δ,ε,ζ,η,θ,ι,κ,λ,μ,ν,ξ 가 이후 예를 들어 전혀 다른 갑을병정 ... 이런 형태가 되는데 정작 α,β,γ,δ,ε,ζ,η,θ,ι,κ,λ,μ,ν,ξ 및 갑을 병정 이들 모든 내용에 처음에 제시한 U 가 관련되는 것이다.
결국 초등학생이나 이와 엉뚱하게 다른 형태의 노인을 한 주체가 모두 자신이라고 여기고 매순간 대하는 것처럼 나중에는 그 상태가 축생 아귀 지옥세계의 엉뚱한 내용을 놓고 그 매 순간에 또 그것을 그 주체가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그런 형태로 무한하게 반복해서 그런 생사고통을 받아나가게 되는 것이 생사현실의 문제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생사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금 눈을 뜨면 왜 현실에서 그런 모습을 그렇게 보게 되는가 그 사정을 잘 살펴보게 되는 것이다.
과학교과서나 생리학 책에서 제시하는 내용과 비교해서 위 내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으면 과학자가 그런 관찰을 하는 현장마다 매번 도룡뇽이나 박쥐 등을 놓고 과학자가 관찰해 보고하는 그런 내용이 이치에 맞다고 여겨지는가를 먼저 그 도룡뇽이나 박쥐에게 물어보는 절차를 한번씩 거쳐야 한다. 그렇게 하면 처음에 살핀 내용에 어떤 문제가 있는가를 좀 더 잘 이해하게 된다고 본다.
여하튼 대략 이정도만 살피고 다음 부분은 다음 조각글에서 이어 살퍼나가기로 한다.
글을 다 마칠 즈음에 숙왕화님으로부터 또 등산훈련 통지를 전달 받았다. 요즘 본인 상태를 놓고 볼 때 그대로 방치하면 곧 사망할 우려가 있어서 강제로 등산 훈련을 행하게 된다고 하는데 이것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그런 일이 없어야 하는데 그렇게 될만한 상태로 계속 임하면 결국은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정을 미리 살핀다면 그렇게 하면 되겠는가. 그리고 이 부분이 바로 경전에서 제시하는 수행방안과 관련된 내용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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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Utagawa-Kuniyoshi Utagawa Kuniyoshi (歌川 國芳, January 1, 1798[1] – April 14, 1861) was one of the last great masters of the Japanese ukiyo-e style of woodblock prints and painting. 구니 요시의 주제에는 풍경, 아름다운 여성, 가부키 배우, 고양이, 신화 동물 등 다양한 장르가 포함 됩니다. 그는 전설적인 사무라이 영웅 들의 전투를 묘사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하 줄임...] from https://en.wikipedia.org/wiki/Utagawa_Kuniyoshi Title : scrbbling-on-the-storehouse-wall.jpg!HD Info Permission & Licensing : Wikiart ● [pt op tr] f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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