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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3-05-06_아비달마순정리론_069 본문
『아비달마순정리론』
K0956
T1562
아비달마순정리론 제69권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 [pt op tr] 아비달마순정리론_K0956_T1562 핵심요약
~~
아비달마순정리론 제67권
6. 변현성품 ⑪
4. 도과(道果): 사문성(沙門性)과 사문과(沙門果)
5. 아라한의 6종성(種性)
아비달마순정리론 제68권
6. 변현성품 ⑫
아비달마순정리론(阿毘達磨順正理論) 제69권
6. 변현성품 ⑬
아비달마순정리론 제70권
6. 변현성품 ⑭
한문원본 색인
K0956V27P1265c01L;
○ 용어
경주 - 경량부 학파의 논주 - 구사론 저자 세친을 칭함
종의 <= 所宗 주장하는 바
유여사 - 어떤 나머지 논사
견소단 - 진리를 깨달아 끊는 (번뇌) = 견도소단 = 견혹 /
신견(身見)ㆍ변견(邊見)ㆍ사견(邪見)ㆍ견취견(見取見)ㆍ계금취견(戒禁取見)ㆍ탐(貪)ㆍ진(瞋)ㆍ치(癡)ㆍ만(慢)ㆍ의(疑) 등 10종이 있음.
혹 - 번뇌
유정지 - 색계의 최고 상태 - 색구경천
무루도 - 번뇌를 증가시키지 않는 수행방안[도]
계속(繫屬) - 에 매여 속하는
수소단 - 수행을 닦아 끊는 (번뇌) = 탐貪․진瞋․만慢 무명無明
해탈 - 번뇌 - 업 - 고의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남
대치도 - 특정한 A 에 상대해 문제를 해결하는 도
견도 - 진리를 깨달아 끊는 견해와 관련된 번뇌를 끊는 수행방안 => ● 견도
수도 修道 - 수행을 통해 탐욕 분노 어리석음 만심 등 정서적인 번뇌를 끊어 내는 수행방안 => 수도
품류 - 종류
이생異生 - 수행자와 달리 수행을 하지 않은 일반인 범부 중생 [범] pṛthag-gaṇa [ / 참고 離生이생 - 견도에 들어 번뇌의 생을 멀리 여읜 수행자 상태 ]
CF=> K0956V27P1265c17L; 若謂異生斷無事惑亦有退故證知
무사혹 -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 소연에 근거한 견혹
소연 - 마음에 얻어진 내용으로써 일반적으로 대상으로 여기게 되는 내용
증지 - 직접 닦아서 증득하여 앎
계탁- 헤아림
번뇌단[惑斷] - 번뇌를 끊음
극성- prasiddha. 인명因明 용어 - 주장자와 그 상대가 함께 인정하여 이론이 없는 것
>>>
아비달마순정리론(阿毘達磨順正理論) 제69권
존자 중현(衆賢) 지음
삼장법사 현장(玄奘) 한역
권오민 번역
6. 변현성품 ⑬
(6) 유여사(有餘師)의 아라한과 무퇴론 비판
이와 같이 경주가 종의로 삼은 [아라한과 무퇴론에] 대해 이미 논파하였다.
● 유여사의 아라한 무퇴론에 대한 비판
○ 상대의 주장1
유여사(有餘師)는 [이같이] 말하였다.
“견소단의 혹(惑)의 해탈(즉 斷)에서는 필시 물러날 리가 없듯이--
이는 바로 무루도에 의해 증득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유정지(有頂地)에 계속(繫屬)되는 수소단의 혹의 해탈에서도 역시 물러날 리가 없다.”
● 비판
그러나 그의 설은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대치도의 힘이 다르기 때문이며,
앞에서 이미 논설하였기 때문이며,
그 밖의 다른 무루도에 의해 증득된 해탈에서는
물러나는 일이 있음을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견도와 수도는 힘의 작용이 각기 다르니,
견도위 중에서는 한 품류[一品] 의 도(道)로써 다수의 품류[多品] 의 혹을 끊지만,
수도위 중에서는 다수의 품류의 도로써 다수의 품류의 혹을 끊기 때문이다.1)
○ 상대의 주장2
만약
“이러한 차이는 번뇌의 힘에 따른 것이니,
이를테면 견소단의 혹은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 법[無事] 에 근거하여 일어나고,
수도소단의 혹은 실체로서 존재하는 법[有事] 에 근거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고 한다면,2)
● 비판
이 역시 그렇지 않으니,
세속도로써 이러한 [수소단의]
번뇌를 끊을 때에도 역시 다수의 품류이기 때문이다.
혹은 [그럴 경우]
다만 마땅히 “견소단의 혹은 무루도에 의해 증득된 결과이기 때문이 아니라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 법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끊어지면 물러날 리가 없다”고 해야 한다.
○ 상대의 주장
만약 “이생의 경우(는)
무사혹(無事惑, 즉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 소연에 근거한 견혹)을 끊더라도 역시 물러나는 일이 있다.
따라서 모든 성자가 견소단의 해탈에서 물러나는 일이 없는 것은
바로 무루도에 의해 증득된 결과이기 때문임을 증지(證知)하여야 한다”고 한다면,
● 비판
[견소단의 혹에 대해]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 법’에 [근거하여 일어나기] 때문에”라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니,
비록 다수의 품류의 혹일지라도 한 품류의 도에 의해 끊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견소단의 해탈에서 물러나지 않는 것은]
[대치] 도의 힘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에 따라 견소단과 수소단을 [아라한과에서 물러나는 일이 없다는 주장의] 예(例)로 삼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 성자라도 수소단의 해탈에서 물러나는 일이 있다는 입장 [순정리론]
또한 앞에서 이미 논설하였다.
앞에서 어떻게 논설하였던 것인가?
이를테면 견소단이 생겨나는 것은
자세히 살피는 힘[審察力] 에 의한 것이지만,
수소단의 혹은
경계대상의 힘[境力] 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으로,3)
모든 성자는 소연(所緣)에 대해 단편의 근거[片依] 도 없이 바라는 대로 제멋대로 계탁하지 않기 때문에,4)
견소단의 해탈에서는 물러나는 일이 없지만,
온갖 이생의 부류는
아직 진실[眞, 즉 聖諦] 을 관찰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소연에 대해 제멋대로 계탁하여,
비록 아래 8지의 견소단의 혹을 이미 끊었다고 할지라도
역시 물러날 수 있는 것이다.
즉 성자는
이미 진실을 관찰하였기에
견소단에서는 필시 물러나는 일이 없지만,
실념(失念)하기 때문에
외적인 경계대상 중에서 [정] 묘(淨妙, 청정 미묘함) 등의 행상을 취하여
[이에 대해]
바로 염착(染著)ㆍ증배(憎背, 증오하여 등짐)ㆍ고거(高擧, 거만함)ㆍ불요(不了, 알지 못함)의 행상을 일으키기도 한다.5)
이 같은 도리에 따라 성자라도
수소단의 해탈에서 물러나는 일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말한
“온갖 이생의 경우 무사혹(無事惑)을 끊더라도 역시 물러나는 일이 있다.
따라서 모든 성자가 견소단의 해탈에서 물러나는 일이 없는 것은
바로 무루도에 의해 증득된 결과이기 때문임을 증지(證知)하여야 한다”고 함은
이치상 결정코 그렇지 않는 것이다.
또한
그 밖의 다른 무루도에 의해 [증득된] 결과에서는
물러나는 일이 있음을 역시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그들이 종의로 삼는 바는
어떠한 경우에도 세간도로써 번뇌단(斷)의 결과를 증득한 성자는 없다는 것이니,
그들의 논(論)에서
“성자의 번뇌단[惑斷] 이 세간도의 결과라는 것은 이치상 이루어질 수 없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오타이경(鄔陀夷經)』에서
“성자가 일찍이 유정지의 선정(멸진정)을 획득하였으면
후시에 색계 중에 태어나는 일이 있지만,
상계의 단(斷)에서 물러나 하지에 태어나는 일은 없다”고 설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의 종의에서는
성자가 세간도로써 번뇌를 조복하는 것도 인정하지 않았으니,
성자가 [상계 상지에 대해] 정(靜) 등의 행상을 일으키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며,
성자는 유위 ‘정’ 등을 관찰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6)
즉 그들의 종의에 [의하면] ,
비상(非常) 등을 관찰하는 것 이외[離] 의 성도로는
능히 진실로 번뇌를 끊을 수 없다.
그러나 이생도 번뇌를 끊을 수 있으며,
[그러한 이가] 성자의 계위 중에 이르면 필시 물러날 리가 없으니,
두 가지 도[雙道, 유루도와 무루도] 로써 진압하였기 때문이다.7)
이에 따라 다만 무루도에 근거하여 끊은 경우,
경(『오타이경』)에서
“일찍이 멸수상정을 획득하였다면 후시에 다시 물러난다”고 설하였기 때문에
색계 중에 태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밖의 무루도에 의해 증득된 단과(斷果)에서도
역시 물러나는 일이 있다고 하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사실[極成] 이다.
따라서 그가 말한 “견소단의 혹(惑)의 해탈에서 필시 물러날 리가 없듯이,
유정지에 [계속되는] 수소단의 혹의 해탈에서도 역시 그러하니,
이는 바로 무루도에 의해 증득된 결과이기 때문이다”고 함은
이치상 결정코 그렇지 않은 것이다.
>>>
○ [pt op tr]
● 검은 백조에 대한 논의 - 아라한의 무퇴론 논쟁
논리학 논의에서
검은 백조 논의가 있다.
원래 백조는 하얀 새인데
백조와 나머지 부분은 다 같아 보이는데
다만 색깔이 검은 새가 호주 대륙에서 발견이 되었다고 한다.
이 때 이것을 백조라고 할 수 있는가
이런 논의다.
『아비달마순정리론』 제 69 권 부분을 살피니
아라한 무퇴론이란 논의가 상당히 복잡하게
각 부파에서 논의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무슨 문제인가하면
부처님 제자가 되어 수행을 하여 최고 상태인 아라한이 된 수행자가 있다고 할 때
그런 아라한이 나중에 다시 번뇌가 생겨 그 상태에서 물러나는 경우도 있는가.
이런 문제라고 본다.
그런데 이 논의가 앞의 검은 백조 논의와 일부 관련이 된다고 본다.
검은 백조 논의를 조금 변형하면
논리학적으로 이런 논의도 가능하다.
원래 하얀 백조였는데 점점 세월이 흘러서 검은 색으로도 될 수 있는가.
예를 들어 검은 페인트 통에 들어가서 온통 검은 색이 되었는데
이 경우에도 그 새를 백조라고 계속 부를 수 있는가.
이런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그런데 이 문제에는
a 라는 어떤 특정인을 아라한이라고 칭할 때
그 a 라는 구체적인 인물이 번뇌에 다시 물러나는 일이 있는가를 문제삼는 경우가 있고
또 이와는 별개로
추상적으로 아라한이라는 수행과위 자체를 어떤 상태라고 정의하거나 설명할 때
추상적으로 그런 수행과위가 번뇌에 다시 물러나는 지위라고 관념할 것인가 아닌가를
문제삼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이 두 문제는 조금 성격이 다르다.
그래서 이런 문제를 논의함에 있어서 이 두 문제를
우선 잘 구분해야 혼동이 발생하지 않을 수 있다.
뒷 문제는 일종의 개념정의나 약속의 문제와도 관련된다.
예를 들어 검은 새가 현실에 있는데
백조와 특성이 색깔만 빼고 대부분 같아 보인다.
이럴 때 이 새를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일종의 개념 정의 문제와 밀접하다.
즉 백조를 정의할 때 색이 흰색인 ~~~ 어떠어떠한 새
이렇게 개념정의하면
검은 새는 당연히 백조가 아니라고 하고
이 경우에는 다른 명칭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 백조와 유사한 검은새 흑백조 이렇게 새로 명칭을 부여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개념정의를 달리하면
위 새도 그대로 백조라고 칭할 수 있다.
백조의 개념정의에서 처음부터 색과 관련된 규정을 빼면 그렇게 될 수 있다.
그래서 이 경우 구체적인 새 A 는 그대로라고 해도
일정한 표현이 갖는 의미를 미리 어떻게 약속하고 정의하는가에 따라서
어떤 새를 백조라고도 부를 수도 있고
못 부를 수도 있는 문제가 된다.
그런데 일단 백조는 하얀 새라고 개념 정의를 하였는데
이제 그에 해당한 어떤 새 a 가
나중에 검은 색이 되는 경우가 있는가.
또 그런 경우는 어떻게 불러야 하는가 등은 이와는 또 다른 문제다.
앞의 개념 정의를 고집하면
그런 경우는 백조가 검어졌기에 다른 새가 된 것이라고 표현해야 한다.
색이 검어서 백조는 아닌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잘 살피면
일단 각 개념과 관련된 혼동을 조금 줄이는 가운데
논의하는 초점이 무언가에 대해서도 혼동을 덜 일으킬 수 있다.
지금 아라한이 번뇌에 다시 물러나는 일이 있겠는가 없겠는가는
다음처럼 논의의 초점을 우선 정리할 수 있다.
우선 부처님은 어떤 의미로 아라한이라고 표현한 것인가.
이런 문제를 먼저 검토해 봐야 한다.
아라한이란 표현은
논의하는 이들이 새로 개념 정의해서 논의할 수도 있지만,
아라한에 대해 논의하는 입장은 대부분
부처님이 처음 아라한이란 표현을 제시하고 수행목표로 제시한 상태에서
이것을 논의하고 살피기 때문에
부처님의 입장이 제일 중요하다.
그래서 부처님의 입장을 찾는데 주력해야 한다.
그런데 부처님이 어떤 입장에서 아라한이라고 제시하였는가가
명명백백하지 않아서 여전히 논의될 가능성이 있게 된다.
부처님이 아라한이란 표현을 하셨지만,
세밀하게 아라한의 특성에 대해서 제시하지 않았다거나,
자세하게 제시했으나 어떤 특정한 경우는
제자들이 미처 그 내용을 배우지 못하고 확인하지 못한 관계로
개념에 대해 혼동을 일으킬 여지도 있다.
그런데 또 이와 달리 어떤 이는
자신은 아라한을 이렇게 본다
또는 아라한은 이런 상태라고 규정하자
이렇게 나서는 입장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아라한에 대해서 여러가지 논의가 이뤄질 수 있다.
이 경우는 먼저 아라한이란 어떤 상태라고 정의한 것인가를 놓고 잘 판단해야 한다. .
아라한의 의미나 특성에 대해 대표적인 오해의 사례로
경전에도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제시되고 있다.
어떤 한 제자가 잘못 이해해서
아라한은 죽은 다음에는 아무 것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이해한 경우다.
그래서 그렇게 주장하고 다니자.
다른 제자들이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
엉터리 주장을 하지 말라. 이런 식으로 시비가 일어나서
부처님이 과연 그렇게 가르친 적이 있는가 여부를 놓고
그런 내용은 잘못된 내용임을 밝히는 내용이
경전에서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문제와 비슷하게
아라한에 대해 일부 특성은 파악이 되는데
몇몇 부분에 관해서 어떤 특성을 갖는가 갖지 않는가와 관련해
여전히 문제될 여지가 있다.
그래서 아라한은 일반적으로 번뇌를 다 끊고 생사의 묶임에서 완전히 벗어난 수행자를 일컫지만,
그러나 상황이 변하면 이후 번뇌에 다시 물러날 수 있는가.
이런 논의가 진행되는 사정이 있다고 본다.
그래서 그런가 아닌가를 따질 때
아라한의 개념 정의를 놓고 이를 살피는 문제는
아라한을 처음에 무엇이라고 정할 것인가하는 문제가 먼저 관련된다.
그런데 일정한 개념 정의에 의해 아라한이 무엇인가는 파악이 되는데
그 아라한이 일정한 특성을 갖는가 아닌가 등은
또 개념 정의 문제와는 다른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이 각 경우를 조금 나누어
혼동을 일으키지 않고 살펴야 한다.
문제는 아라한에 해당하는 사례가 현실에서 드물다고 보게 되는 한편,
위와 같은 실험을 함부로 행하기도 쉽지 않다.
그런데 여하튼 아라한에 해당하는 구체적 인물을 현실에 있을 때
그런 인물이 현실적으로 번뇌를 다시 일으킨다면
그것은 무엇때문인가.
처음에 개념정의에서부터 그런 상태를 아라한이라고 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개념정의는 잘 되어 있는데
단지 구체적 인물이 그런 표현이 적절한지 여부에서
잘못된 파악때문에 그렇게 된 것인가.
이런 문제도 함께 살펴야 한다.
그런데 일단 개념정의도 맞고 파악도 잘 되었는데
아라한이 다시 번뇌에 물들게 된다면
그 경우 그런 이를 아라한이라고 해야 하는가. 아닌가의 문제는
또 앞과 조금 다른 성격의 문제가 된다.
그래서 이 각 부분을 조금 구별해야 한다고 본다.
당신 연구원 맞습니까.
당신 학생 맞습니까.,
맞습니다.
그런데 왜 연구를 안하고 공부를 안 합니까.
이런 현실적인 문제도 이와 조금 관련된다.
연구를 하는 상태이기에 연구원이지만,
그렇다고 늘 연구만 합니까.
잠깐 잘 때가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내 개념정의는 그렇다.
이러면 문제가 될 수도 있다.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Julien Clerc - Quel Jeu Elle Joue.lrc
아라한은 일반적으로
수행을 통해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 이계과를 얻고
해탈신을 얻은 존재로서 기본적인 수행목표점이 된다.
그래서 다음 해탈지견을 읊는 게송과 관련된다.
아생이진 범행이립 소작이작 자지불수후유
‘我生已盡,梵行已立,所作已作,自知不受後有
『잡아함경』 1권(K0650 v18, p.707a11-a12)
이 게송은 아라한이 얻는 해탈지견과 관련해 대단히 경전에 많이 반복되어 나타나고
지금 살피는 『아비달마순정리론』 제 69권 에서도 보이고 있다.
그런데 이 아라한이 어떤 상태에 이르렀기에
이런 게송을 읊게 되는가와 관련해서는
앞에서 살핀 것처럼 논의할 내용이 많을 수 있다.
그러나 여하튼 경전 내용을 거의 다 외우고
전승시킨 아난 존자는
석존이 열반에 들 때까지도 이런 아라한의 상태가 못 되었던 것으로 전한다.
그런데 경전 결집과정에서 가섭 존자의 꾸짖음을 듣고
잠깐 사이 다른 수행자의 도움을 받아 곧 아라한이 되었다.
그래서 경전을 송출하고 결집하는데 참여하게 되었다.
이런 일화를 경전에서 살필 수 있다.
그래서 대충 경전 내용을 많이 외우고 알고 있고
또 오랜 기간 부처님 곁에서 수행을 했다고 해서
아라한이 되는 것이 아님을 일단 볼 수 있다.
그리고 또 한편 아라한의 입장에서는
상대가 아라한에 이르렀는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명백한 어떤 기준이나 특징이 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어떤 이가 아라한인가 아닌가를 명확히 판단할 수 있다는 점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이가 아라한이라고 할 때
경전을 모두 다 외우는가.
이런 문제는 적어도 관련이 없다고 보게 된다.
이는 아난존자와 관련해서도 이런 문제를 또 생각할 수 있지만,
당시 아라한 가운데는 게송 하나를 외우지 못하는 아라한도 있었다고
전해지는 사정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여하튼 수행자가 기본적으로 도달해야 할 구극적인
수행 목표를 성취한 아라한은
과연 어떤 특성을 가져야 하고
또 어떤 것은 갖지 않아야 하고
또 어떤 특성은 가질 수도 있고 갖지 않아도 되는가
등등에 대해서는 많은 궁금증을 가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아라한은 공중에 뜰 수 있고 날아다닐 수도 있는가. 이렇게 의문을 갖는 것과
아니면 공중에 몸이 뜰 수 있고 날아다녀야'만' 아라한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것은 서로 다른 성격을 갖는 의문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아라한은 원하면 자재하게 몸을 변신할 수 있는가.
또는 그렇게 되어야만 아라한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런 궁금증부터 시작해서
부처님만 갖고 있다는 십력을 왜 아라한은 못 갖고 있는가.
등과 같은 의문도 역시 같은 성격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난다는 상태가 무언가에 대해서
처음 제시한 위 게송이 시시하는 바가 대단히 크다고 본다.
즉, 생사에 묶인다는 상태는
위 게송을 놓고 반대로 해석하면
우선 아와 생멸이 다하지 못했다.
그리고 깨끗한 수행 즉, 범행이 서지 못하고
해야 할 바가 마쳐지지 않아서
생사에 묶이게 되는 업의 장애가 해소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나 자신이
그런 나라는 존재와 생멸을 본래 얻을 수 없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래서 망집을 해소하지 못하고
망집에 바탕한 업을 행하고
그래서 다음 생을 묶여 받게 되는 상태다.
이렇게 반대방향으로 해석을 할 수 있다.
처음 我生已盡 이란 구절 하나를 해석하는데에도
사실은 입장이 수없이 달라질 수 있다.
=> 나의 생[삶]은 이미 다했다.
=> 나의 생멸은 이미 다했다.
=> 나와 생멸은 이미 다했다.
이런 여러 해석이 다 가능하다.
그런데 본인은 수행을 통해 얻는 이계과와 관련된 해석을 위해서
그리고 앞에서 제시한 것처럼
아라한은 사후 아무 것도 없는 상태가 된다는 주장에 대해
이는 잘못된 이해라고 제시하고
무아관과 관련해 아라한의 상태를 설명하는
부처님과 사리자의 답변 내용과 관련해 설명이 필요하다고 보고
일부로 맨 뒷 부분으로 의미를 취해서 이것을 살피는 중이다.
현실에서 아와 생멸이 있다고 여기고 임하는 경우는
망집에 바탕한 범부의 상태다.
=> 생사에 묶인다.
이런 망집을 제거해야 생사에서 해탈한 아라한이 된다.
이런 기본 내용이 의미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내용이 왜 의미가 있는가 하면
어떤 수행자가 아라한이 되었다고 하면
그 수행자가 그렇게 여기저기 걸어다니고 식사도 하면서
위와 같이 선언하고
이 게송을 읊고 다닌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그 표현이 '내 삶이 이미 끝났다 (이미 사망했다)' 이런 의미라면
현재 걸어다니고 말하는 상태에서는
그런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고 보게 된다.
그런데 아라한이란 성인은
도대체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등과 같은 수행자나
또는 인과를 관찰해 스스로 생사의 묶임에서 홀로 벗어나는 독각과 같은 다른 수행자를 비롯해서
일반 범부와는 어떤 차이가 있기에
그렇게 아라한이라고 구별해 부르게 되는가.
그 사정을 위와 같은 내용과 관련시켜 잘 이해해야
아라한의 정체도 잘 구분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는 아라한을 다음처럼 구분하게 된다.
즉, 일반인은
그 뜻과 달리 생사에 묶여서 고통을 받고
또 그 자신은 잘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그가 죽고 나서는 또 다른 세계에 생을 받고 고통을 이어나가야 한다.
이렇게 이해하는 한편,
그러나 아라한은 그렇지 않다.
즉 생사의 묶임에서 완전히 벗어나 해탈을 얻은 상태가 되었다.
이렇게 이해한다.
그러니 그런 아라한은
지금은 여기저기 걸어다니지만,
지금도 범부와 다른 상태고
더욱이 죽고 나면 일반인과는 또 다른 상태가 된다고 제시된다. .
그런데 어떤 차이가 있기에
범부는 생사고통을 겪고
아라한은 그런 생사고통에서 벗어난 [해탈] 존재가 된 것인가.
그것이 무언가.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기본적으로 가장 먼저 주의할 점은
이런 구분이 생사현실 안에서 분별할 경우의 구분이라는 점이다.
즉 본 바탕 진여 실재 영역에서는
그런 구분이나 분별을 하고자 해도 얻을 바가 없고
또 그런 사정으로 그런 구분이나 분별을 한 적도 없고
생사고통을 문제삼은 적도 없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집을 일으켜 생사를 받고 있는 생사현실 상태에서는
그런 차이가 있다고 여기고
또 그것을 문제삼는다는 점이다.
즉, 본 바탕에서는 범부나 아라한의 구별 자체를 얻을 수 없다.
그래서 범부나 아라한의 구분은 이런 측면에서의 구분이 아니다.
이 점을 먼저 주의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점을 혼동하지 않아야
아라한의 의미나 특성을 잘 이해할 수 있고
또 수행을 통해 아라한이 되면 얻게 되는 이계과의 특성도
잘 이해할 수 있다.
즉,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수행을 하게 되면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고
생멸을 얻을 수 없는 상태인 이계과를 증득한다고 제시된다.
그런데 그렇게 수행을 통해서 그런 상태에 이른다고 제시하는데
정작 그 이계과는 그런 수행을 '원인으로 한 것이 아니다'라고 제시한다.
이는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그런데 이런 사정을 이해하려면
위 내용을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또 아라한이 된 이가 현실에서
여기저기 걸어다니는데
그러나 거기에는 그런 걸어가는 이나
걸아 다님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는
경전의 사정도 함께 또 잘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이 문제가 해결될 열쇠가 찾아진다고 볼 수 있다.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Michel Sardou_Un jour la liberté.lrc
아라한은 번뇌에서 완전히 자유로운가.
이 문제는 사실은
다른 수행자 아라한이나
인과를 관해 생사에서 벗어나는 연각이나
또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수행하는 보살,
그리고 그런 가운데 법신을 증득한 부처님과의 구별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그래서 앞에 살핀 문제가 해결이 간단하지는 않다.
우선 아라한이나 보살 수행자나 부처님은
해탈신을 이뤘다는 점에서는 공통하고 차별이 없다고 제시한다.
이는 즉, 이들이 모두 공통적으로 생사에 묶이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는 의미다.
그런데 아라한은 보살 수행자나 부처님과는 또 다르다고 제시한다.
이런 차이는 한 수행자가
중생제도를 위해서 해결하고 얻어내야 할 상태는
단순히 그 수행자가 개인적으로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는 것과는
성격이 대단히 다르기 때문에 나타난다.
그래서 중생제도를 위해서 해결해야 할 문제로
크게 번뇌장과 소지장을 든다면
아라한의 상태만으로는
이런 문제를 완전히 해결한 상태라고는
제시할 수 없다고 보게 된다.
그래서 어떤 번뇌를 놓고 문제삼는가에 따라서
조금은 애매한 성격이 된다.
아라한이 되면
그 개인 상태만 기준으로 잡고 살피면
수행목표를 원만히 다 성취한 상태로서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는 성인의 지위에 올랐고
그래서 수행의 끝이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단순하게 제시하기 힘든 사정이 또 있다.
여하튼 수행자의 종류를
아라한 연각 보살 수행자로 나눈다면,
서로 차이가 있다고 할 때
이 차이는 본 바탕에서 어떤 차이가 있어서
그렇게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망집을 바탕으로 생사에 묶여 있는 그 생사현실안에서
문제삼는 차별이다.
그리고 중생 제도 과정에서는 이 생사현실이 기준이 되기에
결국 위 구분은 여전히 의미가 깊게 된다.
즉 본 바탕에서는 닭이나 개 돼지나
인간이나 그리고 인간 가운데에서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각 수행자
더 나아가 보살 부처님을 놓고
어떤 차별을 얻을 수 없다고 제시된다.
문제는 상황이 그런데
그런 사정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망집을 일으켜서
생사를 무량하게 겪어 나가는 상황이
일반 범부 중생의 상태이고
이것이 생사현실의 문제다.
그래서 이것을 벗어나는 것이 1 차 목표다.
그래서 한 개인이 그 상태를 벗어나면
일단 그렇게 벗어났다고 해서
아라한이라고 칭하게 된다.
그런데 자신이 벗어난 것은 다 마찬가지인데
그 상태에서 다시
다른 생명들을 또 자신처럼 벗어나게 하려고 할 때는
자신이 벗어났다고 해서
그렇게 뜻대로 다른 중생을 잘 벗어나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비유를 한다면
어떤 환자가 병을 나아서
이제 건강해졌고 잘 걸어다닐 수 있다.
그런데 자신이 잘 걸어다닌다고 해서
예를 들어 계단에서 굴러서 다리가 부러졌다거나,
무릎에 염증이 생겨서 걸어다니지 못하는 수많은 환자를
잘 걸어다니게 할 수 있는가를 살피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닌 것과 사정이 같다.
그리고 이것이 수행과정에서
결국 중생제도를 위해 수행하는
수행자의 문제가 된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또 아라한과 연각(독각) 보살 수행자
그리고 부처님의 차별이 나타나는 것이다.
문제는 이들이 어느 단계에서는
기본적으로 다 생사의 묶임에서는 기본적으로 벗어나
해탈의 상태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해탈신]
그런데 그 측면에서는 비록 차별이 없지만,
나머지 부분에서는 차이가 있다.
조금 더 자세히 제시하면
생사를 겪는 생명도 아닌 무생물까지 포함해서
세상 일체는 본 바탕이 공하고 무아 무자성이라고 제시한다.
즉 이 측면에서는 일체가 다 차별이 없다고 제시한다.
그런데 그 가운데 닭이나 돼지나 개는
유정물이라는 점에서 무정물인 바위나 의자와는 다르다.
그런데 또 한편 이들 생명은
생사에 묶여 생사고통을 받아가면서 생사현실에 임한다는 점에서
그런 상태를 벗어난 아라한과는 차별이 있다.
이렇게 조금 복잡하다.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Jane Birkin - Prends Cette Main.lrc
그런데 간단히 보면 이렇다.
일체가 모두 다 공통적으로 갖는 특성
예를 들어 그 실재가 공하고
무아 무자성이라는 특성을 갖는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다 아라한이고 부처님이라고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아라한과 부처님도 공하고 무아 무자성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공하고 무아 무자성인 것 즉 일체를
다 아라한이고 부처님이라고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비유하면
박 선생님도 사람인 점에서는 영희나 철수와 공통하다.
그러나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선생님이라고 칭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의미다.
그리고 생사에 묶임에서 기본적으로 벗어난 점에서는
아라한과 독각 보살 수행자 부처님이 공통하지만
그렇다고 이 모두를 다 부처님이라고 칭하는 것은 또 아니다.
그 관계가 앞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 해탈을 이뤘다는 측면에서는
차별이 없다고 해도
또 차이가 있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결국 어느 부분때문에 차이가 있게 되는가하면
중생이 일으키고 겪는 번뇌나 고통을 하나하나 나열할 때
그것이 무량한데
그것을 놓고 해결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서
그 차이가 바로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서 아라한은 극단적으로
그 주체만을 기준으로 잡고 살피면
그 주체 자신은 완전히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고
망집에 바탕해서
생사 고통을 겪으면서 생을 받는 상태에서는
더 이상 문제삼을 것이 제거된
그런 상태에 이른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생사현실을 기준으로 존재유무를 파악할 때는
아라한은 생사를 받는 3 계영역안에서는
아예 처음부터 파악 자체가 될 내용이 얻어지지 않는 상태가 된다.
그런데 한 수행자가 그렇게 되면
정작 생사현실 안에서 생사고통을 겪는 중생을
제도할 방편도 없어지게 된다.
그래서 중생을 제도하려면
결국 그런 상태에서 다시
중생이 생사를 겪는 생사현실 안으로
그 수행자가 들어와서
그 중생의 생사고통 문제를 함께 눈높이를 맞추어
해결해내야 한다.
생사고통을 겪는 중생을 그냥 방치하고 두면,
각기 알아서 때가 되면 아라한이 되어서
그 상태를 벗어나올 수 있다면
수행자의 이런 노력은 굳이 필요없다.
그런데 생사현실 사정상 무량겁의 장구한 기간을 놓고도 그것을 기대하기 힘들다.
그래서 결국 수행자가 자비심을 바탕으로
그런 상태에 놓여 있는 중생에 눈높이를 맞추어서
생사현실 안으로 들어가서 수행에 임하는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부분이
자신만의 생사 해탈을 꾀하는 아라한과 독각
그리고 보살 수행자의 차이점이 발생하게 되는 부분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런 입장에서
중생제도와 관련된 서원을 원만히 성취해서
법신을 증득한 상태인 부처님의 상태는 또 앞과 구별된다.
이렇게 생사현실에서 각각의 차별이 발생하는 사정을 쉽게 이해하려면
꿈을 놓고 생각하면 된다.
현실에서 대낮에 활동하는데
누어서 잠을 자지 않고 꿈을 꾸지 않아도 활동하는데 큰 지장이 없다.
그런데 이런 경우 꿈 안의 상황을 기준으로 파악하면
이런 이는 그 존재가 일체가 파악이 안 되고 얻어지지 않고
문제되지 않는 상태가 된다.
세상의 일체가 다 차별없이 공하다는 내용은
꿈안에서 예를 들어 바다에서 황금을 얻고 못 얻고 등등의 차별이 있어도
꿈 밖에서는 그 일체가 다 얻을 수 없고 문제되지 않는다고
보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또 다른 비유를 들면
눈으로 보는 색깔과 귀로 듣는 소리영역을 놓고
비유할 수 있다.
눈으로 그림을 보다가 눈을 감아 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귀로 소리를 듣고
생각하는데 장애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 경우 눈으로 보는 영역 안의 내용은 모두 제거된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가 그렇게 눈과 관련된 영역안에서 얻는 내용
예를 들어 색이 하얗고 파랗고 등등을 기준으로 붙잡고
나머지 영역의 문제를 문제삼게 되면
그것은 있다 없다를 다 떠나서 얻을 수 없는 상태라고 해야 한다.
즉 그 상황에 아름다운 음악 소리가 있다고 할 때
어떤 이가 이것을 자신이 보는 색깔만을 기준으로 붙잡고 판단하려고 하면
그런 아름다운 음악소리는 노란 색인가 파란 색인가 아무리 분별해 보려고 해도
그 영역 안에서는 파악할 수 없고 얻을 수 없는 상태라고 해야 한다.
그리고 이 비유를 잘 이해하면
아라한의 상태를 일단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각 생명은 각 감각현실을 얻고 망집을 일으켜서
현실에 무언가가 있고 생멸함이 있다고 망집을 일으켜
그 바탕에서 생사를 겪는 상태다.
그런데 아라한은 그런 망집을 일으키는 재료 자체를
얻지 않게끔 그 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게 된 상태다.
특히 이른바 회신멸지의 상태에 이른 아라한은
완전히 그런 재료 자체를 기본적으로 얻지 않게끔
벗어난 상태다.
그렇다고 아주 아무 것도 없는 상태가 된 것이 아닌데
그러나 여하튼 망집에 바탕해서 살아가는 입장을 기준으로 놓고 살피면
이런 회신멸지의 상태에 이른 아라한은
그 존재의 위치나 존부여부자체를 생사현실인 3 계 안에서는 파악할 수 없고
그래서 생사를 완전히 벗어난 상태가 된다.
그리고 이런 상태를 이해하려면
먼저 기본적으로 다음 내용을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
즉, 현실 일체는 진짜라고 할 내용이 없어서 무아 무자성이고
그 본 바탕 실재 진여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현실에서 마음에서 화합을 통해 무언가를 얻는 주체로서는
끝내 그 내용을 얻을 수 없고 그래서 '공하다'라고 표현하게 된다.
그리고 망집에 바탕할 때는 그 현실 일체는 무상하고 고라고 판단하게 된다.
그러나 또 그 모든 일체는 그런 망집을 떠나면
사실은 그런 생멸을 얻을 수 없고 생사고통을 본래 얻을 수 없는
니르바나 상태라고 하게 된다.
이런 내용을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그런 생멸이나 그런 생사를 겪는 주체를 얻을 수 없는데도
망집을 일으켜 생사 현실 안에 그런 내용이 있다고 여기며
임하는 상태를 기준으로 붙잡고 그 측면에서 현실을 대하면
위와 같은 내용을 잘 이해하기 힘들게 된다.
그래서 입장 간에는 판단에 서로 극단적인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이것을 다시 비유하면 최면 상황을 놓고 설명할 수 있다 .
무대에서 최면술사가 최면을 걸면
최면 걸린 이는 그 현장에 없는 딸기가 있다고 여기고
양파를 먹을 수도 있다.
또는 혁대 뿐인데 뱀이 있다고 여기고 대할 수도 있다.
그리고 반대로 관객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상황 등은
최면 걸린 이는 전혀 의식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심한 최면이 걸린 상황에서
어떤 이가 노력해서 스스로
그 최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런 경우 그는 그 상황에서 이제 새삼스럽게 보게 되고 인식하게 되는
관객석의 모습을 놓고
이들 내용을 자신이 최면 속에서 노력해서
그렇게 새로 보게 된 내용이라고 이해하기 쉽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그런 관객석의 모습은 그가 어떻게 생각하던
원래부터 그렇게 있었던 것이다.
비록 최면 상황을 기준으로 놓고 파악하면
그런 관객석을 자신이 최면을 벗어나려는 노력을 통해
새로 보게 되고 얻어낸 내용처럼 파악하기 쉽지만,
본 사정은 그렇지 않다는 비유적 설명이다.
한편, 최면 걸린 이가
최면 상태에서 딸기가 있다고 여겼다거나,
또는 노력을 통해 최면을 벗어나서
이제 딸기가 없어졌다고 여기는 부분도 마찬가지다.
그 최면을 기준으로 하면
거기에 딸기와 같은 것들이 생겨난다거나 없어진다고 여기는 생멸 현상이
그처럼 있는 것처럼 여겨지고
또 마찬가지로 있다고 여긴 딸기가 없어진다는 측면도
자신이 수행을 통해서 비로소 새로 얻는 내용처럼 여길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의미다.
즉, 그런 최면 속에서 무언가가 있다고 보고 생멸한다고 여긴 것은
그 상황을 기준으로 할 때 그런 것 뿐이다.
그리고 관객과 같은 입장을 기준으로 놓고 보면
처음부터 그런 것 자체를 본래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최면이 걸린 상황에서는 그런 사정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가운데
그렇게 임하게 된 것 뿐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수행과정에서 문제삼는 번뇌나 생사 고통은
이들 비유상황에서는
마치 최면에 걸린 그 최면 상황을 기준으로 잡고 구분을 하게 되는 내용과
그 성격이 같다.
그래서 이들 내용을 본래는 얻을 수 없는데
그러나 생사현실을 기준으로 잡으면
여전히 그렇게 있다고 여겨지고
또 생사현실 안에 임한 각 주체에게는 현실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이 그 내용이 무량한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완전히 원만히 다 해결하려면
단순히 아라한의 상태가 되어
자신만 그런 상태를 벗어나는 것 하나만으로는
그 해결이 곤란하다.
그래서 처음 제기된 문제를 살피면
어떤 내용을 기준으로 잡고
어떤 측면에 보는가에 따라서 매 경우 답이 달라진다는 점을 볼 수 있다.
우선 본래 진여 측면에서는
굳이 아라한만 그런 것이 아니고 일체가 다 공하다.
그래서 문제삼는 것 일체를 다 얻을 수 없다.
그런데 생사현실 측면에서
그 생사현실에 망집을 일으켜 임하게 된 주체의 입장을 기준으로 놓고 살피면
이와는 사정이 다르다.
그리고 다시 아라한이라고 해도
완전히 열반에 들어서 회신멸지의 상태에 들어간 아라한의 경우와
비록 수행을 통해 그렇게 될 자격을 얻고
원하면 언제든지 그렇게 될 수 있는 상태에 이르렀지만,
그러나 아직 생사현실에 남아 활동을 하고 있는 아라한의 상태는
또 생사현실 안에서 기준 따라 각기 다르게 된다.
그런데 아라한은 적어도
생사의 묶임에서는 자유로운 상태가 되었다는 점에서
범부와 다르다.
즉, 앞게 송에서 나오는 내용처럼
수행을 통해 청정한 범행이 다 성취되었기에[ 범행이립 ]
그가 원하던 원치 않던 강제로 생사에 묶이게 되게끔 만드는
업의 장애가 제거가 된 것이고
그래서 생사에 묶이지 않은 상태가 된 것이다.
따라서 그런 수행을 성취하지 못하고
따라서 업의 장애가 제거되지 않은 상태여서
원하던 원치 않던 생사현실에 묶여 생사고통을 받아나가게 되는
일반 중생의 상태와는 다르다.
그런데 이는 본래 바탕에서의 문제가 아니고
생사 현실 안에서의 문제다.
또 한편 '소작이작'이라고 표현하는 부분은
수행자가 성취하고자 원하는 서원이 있다고 해도 이미 다 성취해서
그런 것 때문에 생사현실에 남아 뭔가를 계속 해야 할 그런 상태도 아님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 수행자는
평소 문제삼는 그런 자신이나 생멸은 모두 본래 얻을 수 없다는 점도
잘 이해하고 깨닫게 되어서
이제 더 이상 망상분별을 일으키지 않고
그런 망상분별에 현혹당하고 집착하지 않게 되었고
그런 바탕에서 업을 행해 나가는 상태도 아니다.
그래서 이후 그렇게 망집에 바탕해 생사를 받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게 되었다는 것을 '불수후유'라는 표현으로 나타내고 있다.
즉, 앞에든 최면의 비유로 표현하면
어떠한 이가 다시 그런 최면에 걸려 들어
혁대를 뱀으로 알고 공포를 겪는 그런 상태가 되지 않게 되었다는 상황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수행을 통해 그런 상태를 성취해서 아라한이 되었다면
이후 그는 생사현실에서 생사고통을 받게끔 되는
그런 재료 자체를 모두 다 근본적으로 제거하고
벗어나게 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생사현실을 벗어나서
열반에 들게 되면
이를 '회신멸지'라는 표현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이 상태는
생사현실안에서 존재한다고 여기고
그리고 무언가 좋다고 보고 의미가 있다고 보는 그 일체와 함께
그런 망집을 일으킨 그 바탕 자체가 모두 제거되는 상태다.
결국 그런 상태는 앞 비유에서 다음 상황으로 비유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눈으로 무언가를 보고
그에 바탕해 무언가를 분별하면서 심한 고통을 받았다고 해보자.
그런데 어떤 이가 아예 눈을 뜨지 않고
그런 고통을 주는 재료 자체를 얻지 않게 되고
그리고 그 상태로 계속 머물게 된다면
이제 그 이전에 눈을 떠서 무언가를 보는 가운데
있다고 여기고 문제삼던 것들은
그 상황에서는 일체 거기에 머물지 않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아라한의 상태는
이런 상태에 비유할 수 있다.
현실에서는 통상적으로 평소
자신의 몸이라고 보는 것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의미가 있다고 보는 내용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분별이나 지식을 기준으로 잡고
이런 내용을 소중하다고 여기지만,
이 일체는 사실은 본 바탕에서 얻을 수 없는데
다만 망집을 일으켜서 그런 것을 문제삼게 된 것들로서
결국 생사고통을 받게 하는 근본 원인이 된다.
그런데 이런 망집과 그 망집을 일으키게 하는 재료 및
그런 내용을 얻게끔 하는 그 기본 상황 자체를 완전히 제거해 낸 것이다.
그래서 이런 상태는
망집을 일으킨 입장을 기준으로 놓고 파악하자면
그 존재 차체를 아예 처음부터 얻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이 측면에서 아라한과 범부는 차별이 있다.
일반적인 범부는 비록 본 바탕의 측면에서는
이런 아라한과 하등 차별을 얻을 수 없지만,
그러나 생사현실 안의 상황은 아라한과 달리 그렇지 못하다.
즉, 생사현실에서는 망집을 일으키고
그에 바탕해 업을 행하고
다시 그렇게 행한 업의 장애에 묶여
그가 원하는가 원하지 않는가와 관계없이
계속 그런 생사에 묶인 상태로 남아
생사고통을 무량하게 받나아가는 상태다.
그래서 본 바탕의 측면과 달리
생사현실의 측면에서 아라한과 범부는 차이가 극심하다.
그런데 한편
원칙적으로 그렇게 생사를 벗어날 수 있는 아라한의 상태에 이르렀지만,
그가 아직 회신멸지의 상태에 들어가지 않고
생사현실에서 머물고 있다면
그 상황은
처음부터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생사현실에서 생사를 받으며 수행해가는
보살 수행자에 거의 준하는 상태에 있게 된다.
그래서 아라한이라고 해도
그 상태에 따라서 조금씩 차이가 있다.
즉, 회신멸지의 상태에 이미 완전히 들어가 버린 아라한과
비록 그럴 자격과 가능성은 갖고 있지만,
아직 회신멸지의 상태는 아닌 아라한은 차별이 있다.
보살 수행자라고 해도
생사현실에서 고통을 겪는 중생을 제도하려면
생사현실에서 무량한 중생이 일으키는 번뇌 일체가
곧 그 수행자가 수행을 통해 해결해야 할 수행 문제가 된다. [진사혹]
또 그렇게 중생을 제도하려면,
그 수행자는 그 생사현실 안에서 무량한 복덕자량과 지혜(보리) 자량을 쌓아야 하기 때문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무량하게 나타나게 된다. [무량행문]
그런데 아라한이 열반에 들지 않고 남아 있는 상태에서는
비록 그 자신만은 생사를 벗어날 기본적인 상태를 갖추었다고 볼 수 있지만,
이런 보살 수행자가 맞이하는 문제상황에 준해서
아직 성취되지 못한 부분이 무량하게 상대적으로 파악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그런 측면이
아라한과 독각 보살 수행자와
결국 이런 모든 내용을 다 원만히 성취하고
법신을 증득한 부처님의 차이를 발생시키는 부분이다.
◈Lab value 불기2563/05/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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