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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3-01-01_남명천화상송증도가사실_001 본문
『남명천화상송증도가사실』
K1500
Txxxx
남명천화상송증도가사실 제1권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 [pt op tr] 남명천화상송증도가사실_K1500_Txxxx 핵심요약
남명천화상송증도가사실 제1권
비영리-동일조건변경허락원문번역문
남명천화상송증도가사실
남명전화상송증도가사실 제1권
(南明泉和尙頌證道歌事實)
서룡▣연(瑞龍▣連) 지음
박상준 번역
【原文】 전화상(泉和尙)
【事實】 『속등록(續燈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장산(蔣山) 불혜(佛慧) 선사(禪師)의 휘(諱)는 법전(法泉)이고 성(姓)은 시씨(時氏)이니 수현(隋縣) 사람이다.
어려서 일찍이 유학(儒學)을 업(業)으로 익혔는데 재주와 기량[才器]이 명민(明敏)하였다.
장성해서는 용거산(龍居山) 지문원(智門院)에 있는 신기(信記) 선사를 의지해서 출가하였는데,
신기 스님이 미리 법당에서 샘물이 솟아오르는 꿈을 꾼 다음날 법사가 왔으므로 그로 인해 법전이란 이름을 지었다.
후에 경전(經典)을 익히고는 멀리 운거산(雲居山) 순(瞬) 선사의 법석(法席)에 나아갔는데,
이조(二祖)가 예배한 인연(因緣)을 수시(垂示)해서 막 대답하려던 차에 순 선사가 그의 입을 틀어막자 여기에서 돈오(頓悟)하였다.
처음에는 대명산(大明山)에 머물렀고 차례로 천경(千頃)ㆍ운거(雲居)ㆍ남명(南明)ㆍ장산(蔣山)의 다섯 사찰에 주석했다.
【原文】 현각(玄覺) 대사
【事實】 기(琪) 화상이 주(註)한 서(序)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영가(永嘉) 진각(眞覺) 대사는 조사(祖師) 반열의 꽃봉오리와 같은 사람[英人]이니,
법휘(法諱)는 현각(玄覺)이다.
어려서 출가하였는데 총명하고 명민하여 대단히 뛰어났다.
처음에는 천태지자(天台智者)의 교관(敎觀)을 좌계(左溪)와 같은 시기에 학습했으며,
강사(講肆:경론을 강의하는 곳)를 편력하고 선지식(善知識)을 참방하여 찾아다녔는데,
하루는 『열반경(涅槃經)』을 열람하다가 홀연히 법지(法旨)를 환하게 깨달았다.
즉시 조계(曹溪)로 가서 6조(祖)의 인가(印可)를 받았다.
6조가 그가 깊이 깨달은 것을 찬탄하자 곧바로 갑자기 돌아가겠다고 하였는데,
6조가 잠시 하룻밤 자고 가라고 했기 때문에 일숙각(一宿覺)이라고 불렸다.
그리고 증득한 법문(法門)을 노래로 만들어 발언함으로서 아직 깨치지 못한 사람을 경책했는데,
대사가 다시 그윽한 감응[冥感]이 있을 것이라고 미리 기약하자,
즉시 대중들이 정(定) 속에서 한 글자 한 글자가 모두 금색(金色)으로 화작(化作)하면서 허공계를 가득 채우는 것을 보았다.
이 이후로 천하의 총림(叢林)에서 알지 못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여러 방면의 노인들이 주(註)를 달거나 송(頌)을 붙였고,
범승(梵僧)은 이를 인도로 돌아가 전하면서 번역하여 수지(受持)하기까지 했으니,
불심(佛心)에 깊이 계합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 누가 이렇게 참여할 수 있겠는가?”
【原文】 병서(竝序)
【事實】 『영가집(永嘉集)』 주에서 말한다.
“서(序)는 실마리[緖]이다.
마치 하나의 누에고치에서 실마리를 얻으면 한 개의 누에고치의 실을 모두 뽑을 수 있는 것처럼 이 문집(文集)의 서문을 파악하면 한 편의 『영가집』에 있는 내용을 모두 알 수 있다.”
『간정록(刊正錄)』에서 말한다.
“무릇 서문[序]이라고 하는 것은 대체로 이치와 의미[理義]의 전후(前後)를 환하게 밝혀서 그 차서(次序)를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原文】 호념(護念)하고 부촉(付囑)하며
【事實】 『금강경(金剛經)』에서 “여래께서는 모든 보살을 훌륭하게 호념하시고,
모든 보살에게 훌륭하게 부촉하시느니라”고 하였는데,
주에서 말하기를 “보살은 도심(道心)을 가진 중생(衆生)이다.
세존께서 설법하여 모든 사람이 망상(妄想)을 일으키지 않도록 훌륭하게 가르치는 것이 호념(護念)이고,
한 생각 한 생각[念念]에 퇴실(退失)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부촉(付囑)이다”고 하였다.
【原文】 매달리지 않고[不麗]
【事實】 『주역』 이괘(離卦) 주에서 말하기를 “이(離)는 매달린다[麗]는 뜻이니,
해와 달은 하늘에 매달려 있고 백곡(百穀)과 초목(草木)은 땅에 매달려 있다”고 하였다.
【原文】 전제에서 오지 않으며[前際不來]
【事實】 『화엄경(華嚴經)』에서 말하기를 “불자야,
진여(眞如)는 전제에서 생하지 않고[前際不生] 후제에 움직이지 않고[後際不動] 현재에 일어나지 않느니라[現在不起].
여래의 행(行)도 이와 같아서 생하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고,
일어나지도 않느니라”고 하였다.
『정명경(淨名經)』에서는 말하기를 “내가 여래를 관해 보니 전제에서 오지 않았고,
후제로 가지 않으며,
지금 현재에 머물지 않는다”고 하였다.
【原文】 증도가(證道歌)
【琪注】 연(緣)을 따라서 깨달아 들어가는 것을 ‘증득한다[證]’라고 하고,
천성(千聖)이 밟고 지나가는 것을 ‘길[道]’이라 하고,
그 길을 시가로 읊조리는 것을 노래[歌]라고 한다.
이 때문에 증도가라고 하였다.
어떤 이는 닦을 것도 없고 증득할 것도 없다[無修無證]고 하는데,
이들은 모두 산성(散聖)1)으로서 부처님을 도와 교화를 드날린다.
지나간 과거에 도를 증득하고 나면 다시 증명하지 않는데,
비유하면 광석(礦石)에서 황금을 추출하면 다시 광석이 되지 않는 것과 같으니,
바로 보공(寶公)ㆍ만회(萬回)ㆍ한산(寒山)ㆍ습득(拾得)ㆍ숭두타(嵩頭陀)ㆍ부대사(傅大士)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미 증득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스승에게 인가(印可)를 구해야만 바야흐로 증득했다고 할 수 있다.
위음왕불(威音王佛) 이전에는 가능하지만 위음왕불 이후에는 스승 없이 저절로 깨친 사람[無師自悟]은 모두 천연외도(天然外道)에 속한다.
이 때문에 25대사(大士)가 증득한 원통(圓通)은 부처님이 증명한 것을 따르는 것이고,
선재(善財)가 53위(位)의 선지식을 참학한 것도 선지식의 증명을 따르는 것이며,
나아가 서천(西天)과 이 땅[中國]에서 제위(諸位)의 조사가 번갈아가면서 서로 인증한 것이니,
이른바 “부처님과 부처님께서 손수 전해주고[佛佛授手] 조사와 조사가 서로 전한다[祖祖相傳]”고 한 것이다.
대사는 『열반대경(涅槃大經)』을 보다가 깨우쳐 들어갔는데,
그리고는 조계(曹溪)로 가서 6조(祖)의 인가를 구하였다.
대사는 도착하던 날 마침 6조께서 법상에 앉아 법문을 했는데,
선상(禪床)을 세 번 돌고 석장을 한 번 내리치면서 그 앞에 우뚝 섰다.
6조가 말했다.
“무릇 사문은 3천 가지 위의[三千威儀]와 8만 가지 세행[八萬細行]을 구비해서 하나하나의 행(行)에 이지러짐이 없어야 하는데,
대덕(大德)은 어느 곳에서 왔기에 크나큰 아만(我慢)을 일으키는가?”
대사가 말했다.
“태어나고 죽는 일이 중대하니,
무상(無常)하고 신속합니다.”
6조가 말했다.
“무엇 때문에 무생(無生)을 체득해서 신속함이 없는 도리를 깨치지 못하는가?”
대사가 대답했다.
“체득하니 곧 무생이라서 본래 신속함이 없음을 요달했습니다.”
6조가 말했다.
“그러하고 그러하도다.”
잠깐 사이에 예를 올리고 하직 인사를 드리자,
6조가 말했다.
“돌아가는 일이 중대하고 신속한 것이더냐?”
대사가 대답했다.
“본래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데 어찌 신속함이 있겠습니까?”
6조가 물었다.
“움직이지 않음을 누가 아는가?”
대사가 말씀드렸다.
“스님께서 스스로 분별(分別)을 일으키고 계십니다.”
6조가 말했다.
“그대가 무생의 뜻[無生意]를 깊이 체득했도다.”
대사가 대답했다.
“무생인데 어찌 의식[意]이 있겠습니까?”
6조가 말했다.
“의식이 없다면 어떤 것이 분별을 일으키는가?”
대사가 대답했다.
“분별하더라도 의식이 하는 것은 아닙니다.”
6조께서 찬탄하였다.
“훌륭하고 훌륭하도다.”
이와 같이 인가(印可)를 받아야만 바야흐로 증득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실로 제위(諸位)의 소승(小乘)ㆍ천마(天魔)ㆍ외도(外道)가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었다 하고 아직 깨치지 못한 것을 깨쳤다고 하는 것이 아니니,
이 때문에 고덕(古德)이 말하기를 “세간의 문자법사(文字法師)가 암암리에 선(禪)을 증득했다고 여기는 것이 불법의 대환(大患)이니,
진실로 애달프구나”라고 하였다.
지금 영가 대사가 깨친 것은 이것과는 다르니 곧 무생법인(無生法忍)이다.
이 대정(大定)은 여러 가지 법을 구족(具足)하고 있으니,
첫째는 정종이어서 이단이 아님을 증득한 것[正宗非異證]이고,
둘째는 원만하게 계합해서 공허한 것이 아님을 증득한 것[圓滿非空證]이고,
셋째는 구경에 다르지 않음을 증득한 것[究竟不異證]이고,
넷째는 이익을 시설하여 하품의 중생도 제도함을 증득한 것[設利下濟證]이고,
다섯째는 도는 법이(法爾)를 말미암음을 증득한 것[道由法爾證]이고,
여섯째는 요의라서 치우치지 않음을 증득한 것[了義非偏證]이니,
이 때문에 증득했다고 칭할 수 있다.
그렇지만 비록 이와 같다 하더라도 오히려 의로(義路)와 교섭하면서 분별하는 것이니,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허공을 줄이라고 여겨서 그것을 잡고자 하나 단지 정신만 피폐하게 할 뿐인 것과 같다.
만약 본분납승(本分衲僧)이라면 깜박거린 후에 눈을 떠서 스스로 알아야 한다.
【原文】 열반(涅槃)에서부터 친히 부촉하시니[親囑]까지
【事實】 『열반경』에 말하기를
“내가 지금 소유하고 있는 무상의 정법[無上正法]을 모두 마하가섭에게 부촉하노라”고 하였다.
【原文】 금색두타(金色頭陀)
【事實】 『부법장전(付法藏傳)』에서 말하기를
“일찍이 구원겁(久遠劫) 중에서 비바시불(毘婆尸佛)이 열반한 후에 사부대중[四衆]이 탑을 세웠는데,
탑 중에 있는 상(像)의 얼굴에서 금색(金色)이 떨어져서 부서진 곳이 있었다.
당시 가난한 여인이 황금 구슬을 가지고 금세공사[金師]가 있는 곳에 가서
부처님의 얼굴을 원만하게 장식해 주기를 청하고,
일이 끝나자 함께 ‘원하옵건대 우리 두 사람이 혼인하지 않고 부부[夫妻]가 되게 해주십시오’라는 서원을 일으켰다.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91겁 동안 몸이 모두 금색이었다”고 하였다.
『조정사원(祖庭事苑)』에서는 말하기를 “두타(頭陀)는 범어(梵語)인데,
여기 중국에서는 털어낸다[抖擻]는 말이니,
번뇌를 털어낸다는 뜻이다”고 하였다.
【原文】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君不見]
【琪注】 ‘군(君)’이라는 한 글자는 지적해서 결정하는 말[指決之辭]이다.
바로 여기에서 총지문(摠持門)의 열림을 체득하고 조사(祖師)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친견하는 것이며,
백천 가지 삼매[百千三昧]의 한량없는 묘의(妙義)가 모두 이를 따라 들어가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선재가 중예동자(衆藝童子)를 참방해서 친견하고 말하기를
“나는 항상 이 자모(字母)를 노래하면서 반야바라밀문(般若波羅密門)에 듭니다”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일자법문(一字法門)은 바닷물처럼 많은 먹으로 써도 다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밝히지 못하면 설사 언사가 유창하고[同輠] 언변을 도도히 흐르는 강물[懸河]처럼 쏟아낸다 해도
문자(文字)와 어언(語言)에 휩쓸려서 요달할 날이 없다.
일월(日月)이 왕래하여 한묵(翰墨:필묵)이 구름처럼 일어나고,
세월과 시일이 장구하게 흘러서 편찬한 책이 산처럼 쌓이더라도,
구경의 심회는 길이 탄식하고 답답해하니,
심지법문(心地法門)과는 멀고도 멀어진다.
고덕(古德)이 말하였다.
도를 배움에는 반드시 먼저 깨달아야 하는 법이니
일찍이 쾌룡주(快龍舟)와 다투었던 것처럼 해야 한다네.
비록 옛날의 누각이 한가로운 전원에 있다 해도
한 번 건너서 넘어가야 비로소 쉴 수 있다네.
이로써 미루어 보건대 반드시 발명(發明)함이 있어야만 비로소 깨달아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최초의 일구(一句)를,
동도(同道)들이여,
알아야 하느니라’고 한 것이다.
【原文】 조계(曹溪)
【事實】 『보림전(寶林傳)』에서 말하기를 “당나라 의봉(儀鳳)에 사는 사람인 조숙량(曹叔良)이 6조대사에게 기거할 땅을 보시했는데,
그 땅에 쌍으로 된 봉우리[雙峯]와 큰 시냇물[大溪]이 있었기 때문에 조후(曹侯)의 성을 따라서 조계(曹溪)라 하였다”고 했다.
【原文】 배움이 끊어져서 작위함이 없는 한가로운 도인은[絶學無爲閑道人]
【琪注】 배움을 끊는다는 것[絶學]은 세간의 학문이 끊어지고 무위(無爲)의 학문을 배우는 것이다.
세간의 학문은 생사를 벗어나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
무위의 배움이란 소승의 유위(有爲)가 아니라 대승의 무위(無爲)에 들어가는 것이다.
소승의 유위는 구경(究竟)이 아니다.
반야(般若)를 배우는 보살은 법(法)에 그윽하게 계합해서 일체법(一切法)에 응당 머무는 바가 없고 마음에 걸림이 없어서 대자재(大自在)를 얻으므로 작위(作爲)한다 해도 작위함이 없으니,
이 때문에 ‘세간의 학문이 끊어져 작위함이 없다[絶學無爲]’고 한 것이다.
한가로운 도인[閑道人]을 말해 보자.
도와 서로 상응해서 번뇌의 진로(塵勞)에 구속되거나 얽매임이 없기 때문에 한가롭다[閑]고 한다.
진실로 모든 중생은 무시(無始) 이래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깨달음을 등지고 번뇌에 합치했기[背覺合塵] 때문에 모든 목전의 경계에 대해 한 생각 한 생각마다 모든 육진의 경계를 쫓아가면서 잠시도 버림이 없으니,
어떤 것을 말미암아서 생사를 벗어나 여읠 수 있겠는가?
도를 배우는 사람[學道之人]은 능히 만물(萬物)을 굴릴 수 있지 만물에 굴려지지 않기 때문에 눈앞에 천 갈래로 차이나는 경계를 대해도 마음이 한가로운 하나의 경계일 뿐이라서 물가나 숲 아래서 성태(聖胎)를 길이 기르고,
달빛을 보며 소요하고 샘물 소리를 들으며 자재(自在)한다.
이 때문에 ‘세간의 배움이 끊어져서 작위함이 없는 한가로운 도인’이라고 한 것이다.
【原文】 유조가 돌아오지 않으며[幽鳥不歸來].
【事實】 어떤 스님이 남전(南泉) 스님에게 물었다.
“우두(牛頭) 스님이 사조(四祖)를 친견하지 않았을 때에는 무엇 때문에 새와 짐승이 꽃을 물고 와서 공양했습니까?”
남전 스님이 말했다.
“단지 걸음걸음마다 부처님의 사닥다리를 밟았기 때문이니라.”
스님이 물었다.
“친견한 후에는 무엇 때문에 오지 않았습니까?”
남전 스님이 말했다.
“설령 오지 않는다 해도 오히려 이 왕노사(王老師)가 베푸는 방편[一線道]과 같다.”
【原文】 망상도 제거하지 않고 참 성품도 구하지 않으니[不除妄想不求眞]
【琪注】 망상이라고 하는 것은 허망한 상념[虛妄想念]이다.
진실로 모든 중생은 하루 24시간 내내 경계를 반연(攀緣)하는 마음이 끊어지지 않기 때문에 마음[心]은 물을 생각하는 거북이와 같고 의(意)는 바람을 맞이하는 말과 같아서 쉬거나 그친 적이 없다.
이 때문에 범부(凡夫)라고 한다.
참 성품[眞]이라고 하는 것은 즉 하나의 참된 불성[一眞佛性]이다.
지금 이 도인(道人)은 법과 서로 상응해서 범부와 성인[凡聖]의 두 가지 길에 떨어지지 않으며,
또한 이승(二乘)과도 구별되어서 다르다.
소승인은 세간의 생사를 싫어해서 여의고 계(界)를 벗어난 열반을 원하여 얻기를 바라지만,
반야를 배우는 보살은 만법을 회통해서 자기에게 귀의시키기 때문에 “망상도 제거하지 않고 참 성품도 구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이 때문에 수산주(修山主)는 말하기를 “범부법(凡夫法)을 구족(具足)하고 있지만 범부는 알지 못하고,
성인법(聖人法)을 구족하고 있지만 성인도 알지 못한다.
만약 성인이 알면 이 사람은 범부이고,
범부가 알면 이 사람은 성인이다”고 하였다.
이러한 양칙어(兩則語)는 이치는 하나이지만 의미는 두 가지이다.
전(傳)에서는 말하기를 “만약 논변할 수 있으면 불법(佛法)에 깨달아 들어가는데 방애가 되지 않는다.
만약 논변할 수 없으면 ‘의심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말라”고 하였다.
【原文】 ‘타파하고’에서부터 ‘그림자를 끊으며[影斷]’까지
【事實】 경청(鏡淸) 스님이 영운(靈雲) 스님에게 물었다.
“순수하고 청정해서 자취가 끊어졌을 때는 어떠합니까?”
영운 스님이 말했다.
“거울이 항상 밝은 것과 같으니라.”
경청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거울이 항상 밝은 것과 같은 것입니까?”
영운 스님이 말했다.
“진여가 항상 흘러 들어가는 것과 같으니라.”
경청 스님이 물었다.
“향상(向上)에도 도리어 일이 있습니까?”
“있느니라.”
“어떤 것이 향상사(向上事)입니까?”
“거울을 깨뜨리면 그대와 서로 볼 수 있느니라.”
어떤 스님이 남명 스님에게 물었다.
“승사(承師)께서 허공을 타파한다 운운했는데,
이 뜻이 무엇입니까?”
스님이 손바닥으로 한 번 치고는 말했다.
“허공을 타파해 마쳤다면,
본래인(本來人)이 어느 곳에 있겠느냐?”
【原文】 본래인(本來人)
【事實】 삼성(三聖) 스님이 동사(東寺) 스님에게 물었다.
“본래인(本來人)도 다시 성불합니까?”
동사 스님이 말했다.
“그대가 말해 보라.
대당(大唐)의 천자(天子)가 밭 갈고 씨를 뿌리더냐?”
삼성 스님이 물었다.
“그렇다면 성불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동사 스님이 말했다.
“바로 그대다.”
불안(佛眼) 스님이 말했다.
그대와 더불어 오늘의 길을 가는 것은
마치 그대와 공통으로 본래인을 보는 것과 같으니
이름도 같고,
성(姓)도 같고,
생김새도 같고
죽음도 없고,
태어남도 없고,
색진(色塵)도 없다.
【原文】 무명의 실제 성품이 바로 불성이며[無明實性卽佛性]
【琪注】 무명(無明)은 반야대지(般若大智)의 밝음이 없는 것이고,
불성(佛性)은 구경의 청정각성(淸淨覺性)이다.
무시이래로 생사에 허망하게 유랑하면서 벗어나 여의지 못함이 모두 무명 때문에 유전(流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명이 바로 근본번뇌(根本煩惱)로서 8만 가지 진로(塵勞)의 뿌리가 되고 12인연(因緣)의 우두머리가 됨을 알 수 있다.
항하사수와 같은 번뇌가 이 무명을 말미암아 일어나고,
진겁(塵劫)의 윤회가 이 무명 때문에 끊어지지 않아서 비상정(非想定) 후에도 도리어 이리의 몸을 받는 것이니,
무명의 구덩이 가운데서는 오히려 병든 행[病行]이 되는 것이다.
고덕(古德)이 말하기를 “빠르기는 번개와 같고 사납기는 광풍(狂風)과 같아서 별안간에 일어난 진로(塵勞)는 무섭게 흘러가는 물보다 빨라서 치성하게 5욕(欲)을 이루어서 선풍적으로 돌아가는 바퀴보다 급하게 지나간다”고 하였다.
이 때문에 4마(魔)를 얽어매고 10사(使)를 치구(馳驅)하게 하는 것이 모두 무명이 그렇게 하도록 부리는 것이다.
아직 요달하지 못한 사람은 미혹이 실제의 일[實事]이 되지만,
지금 이 도인은 반야지(般若智)로 무명을 비추어 요달함이 곧 불성(佛性)을 밝게 보는 것이기 때문에 그대로[卽] 불성인 것이다.
【原文】 천하가 태평함을 축하하네[賀昇平]
【事實】 천동(天童) 스님이 말하였다.
태평시대의 치업(治業)은 드러내는 상(像)이 없으므로
시골 노인의 가풍(家風)이 지극히 순박하구나.
다만 촌가(村家)에서는 오로지 춤만 추고 있으니
순임금의 덕이 높고 어진 줄 어찌 알리오.
고덕(古德)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태평시대는 부사의한 것이니
불법(佛法)에는 미혹함도 없고 깨달음도 없다.
【原文】 허깨비 같은 실체 없는 몸이 바로 법신이니라[幻化空身卽法身].
【琪注】 이미 무명이 바로 불성임을 알았다면 환신(幻身)이 바로 법신(法身)임을 응당 알아야 한다.
이른바 법신에 대해 교(敎)에서는 5분법신(分法身)을 말하고 있다.
첫째는 계(戒)이고,
둘째는 정(定)이고,
셋째는 혜(慧)이고,
넷째는 해탈(解脫)이고,
다섯째는 해탈지견(解脫知見)이다.
전(傳)에서 말하기를 “지혜가 참 경계와 그윽이 부합[冥合]하면 모든 법이 몸[身]이 되기 때문에 법신(法身)이라 한다.
이 법신이 능히 일체법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고,
일체법을 널리 포섭할 수 있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법을 요달한 사람은 부모님이 인연으로 낳아 주신 허깨비 같은 환신(幻身)이 바로 금강(金剛)의 상주(常住)하는 불괴신(不壞身)임을 안다.
이 때문에 “허깨비 같은 실체 없는 몸이 바로 법신이다”고 말한 것이다.
【原文】 옴 붙은 개[蕎狗]에서부터 모두 알지만[共知]까지
【事實】 대혜(大慧)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3세의 여래는 유(有)를 알지 못하고
나이 드신 분께서는 밖으로만 달리는데
이노(狸奴)와 백고(白牯)는 도리어 유(有)를 알고
절름발이는 절뚝거리면서 능히 스스로를 지키누나.
【原文】 법신을 깨달아 마치다[法身覺了]에서부터 천진불(天眞佛)까지
【琪注】 반야지(般若智)로 5온(蘊)을 관조하면 모두가 공(空)이어서 한 물건[一物]도 없고,
변두리도 겉도 없고 명자(明字)도 없는데 억지로 법신이라고 이름지은 것이다.
옛날에 대원부(大原孚) 상좌가 좌주(座主)로 있을 때였다.
『유마경(維摩經)』을 강의하다가 법신(法身)의 의미를 설명하는 곳에 이르렀는데,
법좌 아래서 듣다가 좌주에게 질문하였다.
“조금 전 강의하는 사람이 ‘제불의 법신’이라고 하였는데,
어떤 것이 좌주의 법신입니까?”
좌주가 말했다.
“법신에 어찌 둘이 있으리오.”
도자(道者:도가의 사람)가 말했다.
“가령 사람이 입으로만 밥을 말한다면 끝내 배고픔을 구제하지는 못합니다.
마음의 근원을 요달하고자 한다면 깨침[悟]을 법칙으로 삼아야 합니다.”
스님이 말했다.
“아무개가 법신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은 다만 이와 같을 뿐이오.
그러니 도자께서 설해 주기를 청하는 바이오.”
도자(道者)가 말했다.
“우선 15일[三五日] 동안 강의를 쉬고 빈 방안에 정좌(靜坐)하여 법신(法身)을 체득하십시오.”
스님은 그의 말을 한결같이 의지해서 모든 반연을 쉬고 고요한 방안에 단정하게 앉아 있다가 새벽에 홀연히 북소리[鼓角聲]를 듣고서 별안간 크게 깨닫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본래 한 물건도 없음을 비로소 알았도다.
하마터면 일생을 헛되이 보낼 뻔했구나.”
이 때문에 “법신을 깨달아 마치면 한 물건도 없다”고 말한 것이다.
“본원자성(本源自性)이 천진불(天眞佛)이다”에 대해 말해 보자.
만약에 지금 근본을 돌이켜서 근원으로 돌아가면 수증(修證)을 의지하지 않고 본래성불(本來成佛)임을 아는 것이니,
행주좌와(行住坐臥)에서부터 눈에 닿고 만나는 연(緣)마다 하나하나가 가르침을 주고 있으며,
법법(法法)마다 일제히 드러남[齊彰]이 불사(佛事) 아닌 것이 없다.
그러므로 법등(法燈) 스님이 말하였다.
누가 천진불(天眞佛)을 믿는가.
기뻐하고 슬퍼하기는 몇 만 번이던가.
갈대꽃은 옛 언덕에 피어 있고
백로는 물가에 서 있는데
이슬 맺힌 정원의 사초(莎草)는 길고
구름이 잠긴 시냇가의 달빛은 차갑구나.
하나하나 가르침을 주는 곳을 자세하게 잘 관해 보도록 하라.
【原文】 그 날의 일[當日事]
【事實】 세존께서 영산(靈山)에 계시면서 설법을 하시자 하늘에서 네 가지 꽃[四花]이 떨어졌다.
세존께서 이윽고 이 꽃을 집어 대중에게 보이시자 가섭이 빙긋이 미소를 지으니,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나에게 정법안장(正法眼藏)이 있으니 마하가섭에게 부촉(付囑)하노라.”
【原文】 대나무 지팡이 짚고[携筇]
【事實】 부처님께서 영축산(靈鷲山)에 계실 때 노비구(老比丘)가 있었다.
그 비구가 산을 오르내리다가 다리가 비틀거려서 땅에 넘어지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지팡이를 휴대하라”고 하셨다.
【原文】 5음의 뜬 구름[五陰浮雲]에서부터 헛되이 출몰하네[虛出沒]까지
【琪注】 법을 배우는 사람은 5음에 실체가 없어서 마치 뜬 구름과 같은 것임을 요달하고,
3독은 허깨비여서 물거품과 같음을 안다.
5음(陰)은 첫째는 색(色)이고,
둘째는 수(受)이고,
셋째는 상(想)이고,
넷째는 행(行)이고,
다섯째는 식(識)이다.
색은 막혀서 장애하는 것[窒碍]으로 뜻을 삼고,
수는 수령해서 받아들이는 것[領納]으로 뜻을 삼고,
상은 형상을 마음에 그리는 것[想像]으로 뜻을 삼고,
행은 옮겨서 흘러가는 것[遷流]으로 뜻을 삼고,
식은 분별해서 아는 것[別識]으로 뜻을 삼는다.
5음이 뜬 구름과 같음을 아는 것은 인공(人空)이다.
3독(毒)은 첫째는 탐(貪)이고,
둘째는 진(瞋)이고,
셋째는 치(癡)이다.
순경(順境)에서는 탐심(貪心)을 일으키고,
역경(逆境)에서는 진심(瞋心)을 일으키며,
지혜가 없어서 이것을 용납해 받아들이는 것은 치심(癡心)이다.
이 3독이 물거품 같은 것임을 알면 이것은 법공(法空)이다.
5음은 태허공에서 뜬 구름이 부질없이 절로 오고 가는 것과 같고,
3독은 물가에서 물거품이 헛되이 생겼다 꺼졌다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낙포(洛浦) 스님이 말하였다.
단지 물거품이 물에서 생겼다는 것만 안다면
어찌 물이 물거품을 따라 생긴 것임을 알겠는가.
방편으로 물과 물거품을 가지고 나의 몸에 견주고
5온이 헛되이 모인 것으로 가짜로 사람[人]을 세우니
5온의 공함과 물거품의 실체 없음을 요달해서 이해한다면
본래 진면목을 분명하게 볼 수 있으리라.
만약 이 의미를 통달하지 못하면 생사의 바다 가운데서 헛되이 출몰할 것이다.
【原文】 한바탕 서풍 불어 종적을 쓸어 없애니[西風一陣掃無蹤]
【事實】 청량(淸凉)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미혹은 본래 종적이 없는데 진성(眞性)을 헛갈려서 홀연히 일어난다.
헛갈려서 돌아가지 못하면 산만하게 무너져서 끝이 없게 된다.
마치 엷은 구름이 허공을 덮을 때 그 유래한 곳이 없어도 잠깐 사이에 가득 차서[彌滿]하여 천지[六合]가 어두워지는 것과 같다.
장풍(長風)이 홀연히 불어와서 갑자기 구름이 모두 걷히면,
천리(千里)에 한 점도 없어서 만상(萬像)이 분명해진다.
방편의 바람[方便風]을 일으켜 미혹의 근본 없음을 관조하면,
성품의 공(空)함이 환하게 나타나서 온갖 덕[衆德]이 본래 원만하다.
이때에는 8만의 진로(塵勞)가 모두 바라밀문(波羅蜜門)이고 항하사수와 같은 미혹의 장애가 다 진여(眞如)이다.”
【原文】 조종(朝宗).
【事實】 『시경(詩經)』 「면수장(沔水章)」에서 “저 넘실넘실 흐르는 물이여,
바다로 흘러들어가는구나[朝宗]”라고 노래하였는데,
그 주(注)에서 “제후(諸侯)가 봄철에 천자(天子)를 알현[見]하는 것을 조(朝)라 하고,
여름철에 알현하는 것을 종(宗)이라 한다”고 하였다.
『상서(尙書)』 「우공(禹貢)」편에서 말하기를 “강수(江水)와 한수(漢水)의 물결이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고 하였는데,
그 주(注)에서 “두 강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것이 흡사 제후가 천자를 조회하는 것[朝]과 같다.
백천(百川)은 바다를 근본[宗]으로 삼는다.
근본으로 삼는다는 것[宗]은 존숭한다[尊]는 말이다”고 하였다.
【原文】 실상을 증득하면[證實相]에서부터 아비지옥의 업[阿鼻業]까지
【琪注】 상(相)도 없고 상 아닌 것[不相]도 없기 때문에 실상(實相)이라고 한다.
이 실상을 증득하면 곧 인공(人空)도 법공(法空)도 없는 것이니,
찰나의 지극히 빠른 순간에 다겁(多劫)의 중죄(重罪)를 소멸시킬 수 있다.이른바 찰나(刹那)는 비유하면 마치 역사(力士)가 우사(藕絲:연뿌리의 실)를 끊는 데 걸리는 시간과 같은데,
방편을 취하지 않고 오직 끊는 시간만을 취해서 ‘찰나’라고 한다.
한 찰나에 9백 생멸(生滅)을 갖추고 있으며 지극히 빠른 순간이다.
이른바 아비(阿鼻)는 범어(梵語)인데,
이곳 중국어로는 ‘간격이 없다[無間]’는 말이니 곧 극중지옥(極重地獄)이다.
칠금산(七金山) 아래 있으면서 소위 호호파(唬唬婆)와 확확파(曤曤婆) 등이라고 하는 것이니,
8한지옥(寒地獄)과 8열지옥(熱地獄)이 이에 해당한다.
모든 지옥 가운데 가장 형벌이 무겁고 가장 고통스러운데,
그 가운데서 죄를 받으면서 쉴 새가 없다.
그러나 지금 법과 더불어 상응(相應)하면,
선악의 모든 차별상[善惡諸相]이 자연히 적멸하다.
고덕이 말하기를 “아(我)도 오히려 얻을 수 없는데 비아(非我)를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이 때문에 ‘찰나에 아비업(阿鼻業)을 소멸시킨다’고 말한 것이다.
【原文】 이와 미가 끊어지니[絶離微]
【事實】 『보장론(寶藏論)』 「이미체정품(離微體淨品)」에서 말하기를 “6입(入)에 종적이 없는 것을 이(離)라 하고,
만 가지 작용에 아(我)가 없는 것을 미(微)라 한다”고 하였으며,
또 “이는 공(空)을 말하고 미는 유(有)를 말한다”고 하였다.
【原文】 자고새가 지저귀는구나[鷓鴣啼]
【事實】 어떤 스님이 풍혈(風穴)스님에게 물었다.
“말하고 침묵함[語默]이 이미(離微)에 걸리는데,
어떻게 해야 두루 통해서 허물을 범하지 않습니까?”
풍혈 스님이 말했다.
“항상 강남(江南)의 3월(月)을 생각하니,
자고새 지저귀는 곳에 백화(百花)가 향기로우니라.”
『조정(祖庭)』에서는 “자고(鷓鴣)에서 윗글자는 지(之)와 야(夜)의 반절(反切)이고,
아래 글자의 음은 고(姑)이다.
생김새는 꿩과 비슷한데 강남에 산다”고 하였다.
【原文】 곧바로 가난이니[直是貧]
【事實】 향엄 지한(香嚴智閑) 선사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작년[去年]의 가난은 아직 가난이 아니요,
금년 가난이 비로소 가난이로세.
작년에는 송곳 꽂을 땅이 없더니,
금년에는 송곳마저 없도다.
【原文】 ‘금강(金剛)’에서부터 ‘노여움을 머금고 있다네[含瞋]’까지
【事實】 『조정(祖庭)』에서는 “금강은 누지불[樓至]의 후신(後身)이니,
호법신(護法神)이다”고 하였다.
【原文】 선악은 같은 길이 아니라고[善惡不同途]
【事實】 어떤 스님이 고덕에게 물었다.
“어떤 사람이 선행(善行)을 닦는 사람입니까?”
“창들고 갑옷 입은 사람이니라.”
“어떤 사람이 크게 악업을 짓는 사람입니까?”
“좌선하여 정(定)에 들어가는 것이니라.”
스님이 물었다.
“모르겠습니다만,
이 뜻이 무엇입니까?”
고덕이 말했다.
“선인(善人)은 악념(惡念)이 없고 악인(惡人)은 선념(善念)이 없으니,
선과 악은 뜬 구름과 같아서 둘 다 일어나고 소멸하는 곳[起滅處]이 없느니라.”
【原文】 서리와 눈과 같은 것인 줄[猶霜雪]
【事實】 경에서 말하기를 “만약 참회하고자 한다면 단정하게 앉아서 실상(實相)을 염(念)하라.
모든 죄는 서리와 이슬 같아서 지혜의 태양으로 없앨 수 있다”고 하였다.
【原文】 ‘만약 허망한 말로[若妄語]’에서부터 ‘진사겁(塵沙劫)’까지
【琪注】 이것은 영가(永嘉) 스님이 대비(大悲)의 원력(願力)으로 이와 같은 말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선성(先聖)의 은혜는 두터워서 보답하기 어려운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는 말세 중생의 신근(信根)이 천박하여 이 법문 가운데서 도심(道心)을 잃어버리고 퇴전할까봐 지극히 염려하였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거듭 맹세하였다.
“내가 만약 허망한 말로 그대들을 속인다면,
즉각 저절로 니리지옥(泥鯖地獄)에 떨어져서 혀가 뽑혀 쟁기질을 하면서 극심한 고통을 받는데,
비단 일 겁뿐만이 아니라 진사겁(塵沙劫) 동안 받을 것이다.”
겁(劫)은 범어인데,
구족하게 갖추어서 말하면 겁파(劫波:kalpa)라고 해야 하며,
이곳 중국말로는 시분(時分)이라고 번역된다.
겁에는 또한 여러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개자겁(皎子劫)ㆍ진점겁(塵點劫)ㆍ불석겁(拂石劫) 등인데,
자세히는 경론(經論)에 실려 있는 것과 같다.
지금 여기에서 그 명호를 말하지 않고 진사겁을 말한 것은 단지 겁(劫)의 많음을 말했을 뿐이다.
대사(大師)가 설한 것은 직접 증득한 법문으로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성품을 보아 성불(成佛)케 하고자 한 것이니,
어찌 망언(妄言)이 있을 수 있겠는가.
오히려 그 말씀을 믿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原文】 멀리 노니는 사람들[遠遊子]을
【事實】 조계의 명(明) 화상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홍진(紅塵)의 길가에서
노니는 이여,
어찌 돌아갈꼬.
다만 미친 기틀[狂機]만 쉬면
가산(家山:고향)이 지척인 것을.
【原文】 여래선을 돈각해 요달하니[頓覺了如來禪]
【琪注】 점차(漸次)로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돈각(頓覺)이라고 한다.
여래선(如來禪)은 네 가지 선나(禪那)와 구별되어서 다른 것이니,
첫째는 보살의 유식선(唯識禪)이고,
둘째는 성문의 공에 치우치는 선[偏空禪]이고,
셋째는 인천(人天)의 인과선(因果禪)이고,
넷째는 외도(外道)의 달리 헤아리는 선[異計禪]이다.
지금 이 정문(定門)은 세존께서 영산회상(靈山會上)에 계실 때 푸른 연꽃과 같은 눈[靑蓮目]으로 깜빡거리며 보시자 가섭이 미소를 지으니,
“나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을 마하대가섭에게 분부(分付)한다”고 하신 것이다.
가섭은 아난에게 부촉하였고,
아난은 상나화수(商那和修)존자에게 부촉하여 28조사까지 이르게 되었고,
보리달마(菩提達摩)가 서쪽에서 동토(東土)로 와서 서로서로 부촉해서 조계의 6조(祖)에 이르렀으니,
이 이후로 법등(法燈)과 법등이 계속 불꽃을 피웠고 조사(祖師)와 조사가 향기롭게 전하여 지금까지 이르면서 양손[兩手]으로 분부한 것이다.
말해 보라.
분부한 것이 있느냐,
분부한 것이 없느냐?
만약 본분납승(本分衲僧)이라면 저절로 귀착점[落處]을 알 것이다.
【原文】 통발을 잊으니[忘筌]
【事實】 『장자(莊子)』에서 말하기를 “고기를 잡으면 통발을 잊고,
토끼를 잡으면 올가미를 잊으며,
뜻을 얻으면 말을 잊는다”고 하였다.
【原文】 눈썹의 털은 여전히[依舊眉毛]
【事實】 홍각범(洪覺範) 스님이 말하기를 “10년을 적과(積果)하고 시립(侍立)해서 배워 얻으니,
눈은 옆으로 코는 수직으로 달려 있네[眼橫鼻直]”라고 하였다.
【原文】 둥근 부채를 달에 비교하려 하지만[團扇擬月輪]
【事實】 유각소(惟殼䟽) 스님이 말했다.
달이 겹겹의 봉우리에 숨으니,
부채를 들어 그 사실을 깨우치고
바람이 태허공에서 쉬니
나무를 흔들어 그 사실을 가르친다네.
【原文】 뛰어난 매[俊鷹]는
【事實】 고행(苦行)의 한대백(韓大白)이 게송으로 말하였다.
토끼 한 마리가 옛길에 몸을 가로 눕자
푸른 매는 한 번 보고 바로 사로잡는데
나중에 온 사냥개는 영성(靈性)이 없어서
부질없이 시든 참죽나무 옆에서 옛날에 잡았던 곳 찾아 헤매네.
【原文】 6도의 만행이 본체 가운데 원만하여라[六度萬行體中圓]
【琪注】 총체적으로는 6도(度)라 말하고 개별적으로는 만행(萬行)이라고 하는데,
이 행문(行門)은 모두 일념(一念) 가운데 본래 원만하게 갖추어져 있다.
6도는 보시(布施)ㆍ지계(持戒)ㆍ인욕(忍辱)ㆍ정진(精進)ㆍ선정(禪定)ㆍ지혜(智慧)를 말한다.
모두 ‘건너간다[度]’고 말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각각 대치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건너간다고 한 것이다.
보시는 간탐(慳貪)을 대치해서 건너고,
지계는 훼범(毁犯)을 대치해서 건너고,
인욕은 진에(瞋恚)를 대치해서 건너고,
정진은 해태(懈怠)를 대치해서 건너고,
선정은 혼침과 산란[昏散]을 대치해서 건너고,
지혜는 우치(愚癡)를 대치해서 건너니,
이 때문에 6도라고 한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도문(度門)은 모든 소승(小乘)이 6도를 나누어 닦는 것도 아니고,
권위보살(權位菩薩)이 6도를 겸수(兼修)하는 것도 아니며,
일념 가운데서 6도를 원만하게 닦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체 가운데 원만하게 갖추고 있다’고 말하였다.
【原文】 하나의 달뿐이라네[唯一月]
【事實】 소국사(韶國師)가 말하였다.
“배[舟]가 동쪽으로 가면 하나의 달이 동으로 가고,
배가 남쪽으로 가면 하나의 달이 남으로 가고,
배가 서쪽으로 가면 하나의 달이 서쪽으로 가며,
배가 북쪽으로 가면 하나의 달이 북쪽으로 가는데,
배를 멈추고 있는 사람은 움직이지 않는 달을 본다.
이처럼 4유(維)와 시방(十方)에 이르기까지 모두 일시에 한꺼번에 나타난다.
그러므로 천 개의 그릇에는 천 개의 달이 같지 않지만,
한 줄기 맑은 강물에는 하나의 달그림자가 외롭다.”
【原文】 ‘꿈속에서는 분명하고 분명하더니[夢裏明明]’에서부터 ‘대천세계가 없구나[無大千]’까지
【琪注】 미혹할 때에는 삼계(三界)가 있지만 깨달으면 시방이 공(空)하다.
그 때문에 ‘꿈속에서는 분명하고 분명하게 6취(趣)가 있더니,
깨달은 후에는 텅 비고 텅 비어서 대천세계가 없구나’라고 말한 것이다.
6취를 말해 보자.
첫째는 인(人)이고,
둘째는 천(天)이고,
셋째는 수라(修羅)이고,
넷째는 아귀(餓鬼)이고,
다섯째는 축생(畜生)이고,
여섯째는 지옥(地獄)이다.
모두 취(趣)라고 말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일체 중생은 일념의 미망(迷妄)으로 업식(業識)이 아득해져서 그 업력(業力)을 따라 스스로 6도(道) 속으로 취향해 들어가지[趣入] 다른 사람이 시켜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덕(古德)이 말하기를 “탐(貪)ㆍ진(瞋)ㆍ애(愛)의 물이 고통의 싹[苦芽]을 기르고 윤택하게 하니,
한결같이 6진(塵)을 따르면서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을 알지 못하는구나”라고 하였다.
‘텅 비고 텅 비었다[空空]’고 말한 것은 도무지 실재하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대천세계가 없다[無大千]’는 것은 장육금신(丈六金身)이 화하게 된 경계인데,
지금 반야와 서로 상응하면 어찌 다만 육취중생(六趣衆生)만 공하겠는가.
삼천대천세계의 화하게 된 경계에 이르기까지도 실재하는 의미[實義]가 없기 때문에 ‘깨달은 후에는 텅 비고 텅 비어서 대천세계가 없구나’라고 말한 것이다.
【原文】 남쪽별 바라보며[望南星]
【事實】 설두(雪竇) 스님이 말하였다.
명경대(明鏡臺)에 나열되어 있는 모습이 서로 다르지만
하나하나가 남면(南面)을 한 채 북두(北斗)를 바라보네.
또 말하였다.
북두와 남성(南星)의 위치가 다르지 않은데,
하늘에 닿는 하얀 물결도 평지에서 일어난 것일세.
【原文】 칼을 찬 문수도[仗劒文殊]
【事實】 중권(中卷)의 ‘창과 칼을 만나더라도’라고 한 것에 대한 언기의 주[琪注]에 나타나 있다.
백장(百丈) 스님이 말하기를 “지해(智解)의 칼날로 부처를 보고자 하는 마음을 자른다”고 하였다.
【原文】 ‘죄도 복도 없으니[無罪福]’에서부터 ‘묻거나 찾지 말라[莫問覓]’까지
【琪注】 일념(一念)에 본성과 상응하면 죄와 복,
손익(損益) 등의 차별상이 없다.
고덕(古德)이 말하기를 “가령 어떤 사람이 발심하여 근원으로 돌아가면 시방세계가 모두 무너져 내리는데,
하물며 죄와 복의 경우이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미 제법(諸法)의 자성이 공이라는 것을 요달하면,
적멸(寂滅)한 본성 가운데는 아(我)ㆍ인(人)ㆍ중생(衆生)ㆍ수자(壽者) 등의 상(相)이 없으며,
반야의 무상법문(無相法門)과 상응하면 언어로 나타내서 논변하고 묻고 따짐이 없다.
그러므로 ‘죄와 복도 없고 손익도 없으니,
적멸한 본성 가운데서 묻거나 찾지 말라’고 한 것이다.
【原文】 보푸라기를 불었네[布毛吹]
【事實】 항주(杭州) 초현사(超賢寺)의 회통(會通)선사는 당나라 덕종(德宗) 때 육궁사(六宮使)로 있었는데,
여러 차례 스님이 되기를 원하였다(운운).
임금이 그 원을 허락하자 조과(鳥碼) 도림(道林) 선사에게 예를 올리고 삭발[落髮]하였다.
회통 스님이 하루는 하직 인사를 드리고 떠나려 하자,
도림선사가 물었다.
“너는 지금 어디를 가느냐?”
“회통이 불법(佛法)을 위해서 출가했는데 화상께서 자비로운 일깨움을 드리워주시지 않으니,
이제 여러 방면으로 가서 불법을 배우겠습니다.”
법사(法師)가 말했다.
“만약 불법이라면 나의 여기에도 조금쯤은 있느니라.”
“어떤 것이 화상에게 있는 불법입니까?”
대사가 몸에서 보푸라기를 집어 올려서 훅 불었는데,
회통 스님이 마침내 깨달았다.
그래서 당시에 그를 보푸라기 시자[布毛侍者]라고 불렀다.
【原文】 예로부터 바깥사람이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네[從來不許外人看]
【事實】 고덕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옛날 궁전에 이끼가 끼고
신하가 서있지 않으니
예로부터 바깥사람이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네.
【原文】 ‘근래에 거울에 낀 때[比來塵鏡]를’에서부터 ‘해결했구나[須剖析]’까지
【琪注】 한 점의 신령스러운 광명[一點靈光]은 본래 시방의 모든 부처님과 둘이 아니라서 차별도 없지만,
진실로 모든 중생이 무량겁 이래로 선지식을 만나 발명견성(發明見性)하지 못하였으니,
비유하면 흙먼지가 낀 거울처럼 오랫동안 혼미한 어둠[昏暗]에 가려서 사물을 비추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러다가 오늘 선지식을 만나 발명함으로서 이미 성품을 보고 먼지와 때를 털어내니 본래의 광채(光彩)가 쏜살같이 번뇌[漏]를 꿰뚫어서 하늘을 비추고 땅을 비춘다.
그 때문에 선덕(先德)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마음의 광명이 솟구쳐서 빛나니
육근과ㆍ육진을 아득히 벗어났구나.
본체가 진상(眞常)을 드러내니
문자에 구애됨이 없어라.
심성(心性)은 물듦이 없어서
본래 스스로 원만하게 이루어졌으니
허망한 반연만 여의면
곧바로 여여한 부처[如如佛]라네.
【原文】 마음의 때가 연이 되어[心垢爲緣]
【事實】 『기신론(起信論)』에서 말하였다.
“중생심(衆生心)은 마치 거울과 같다.
거울에 때가 있으면 색상(色像)을 나타낼 수 없으니,
이처럼 중생의 마음에도 때가 있으면 법신(法身)이 나타나지 않는다.”
【原文】 세간의 인정을 따르네[徇世情]
【事實】 고덕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소반을 닦고 상 치움을 억지로 할 뿐이니
총림의 본분승(本分僧)에게 부끄럽구나.
출세간의 도심(道心)은 나날이 줄어들고
세간의 정과 사람의 일을 따름이 해마다 늘어나네.”
【原文】 ‘누가 무념인가[誰無念]’에서부터 ‘불생도 없어라[無不生]’까지
【琪注】 언기의 주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상구(上句)에서는 정(情)을 집어냈고 하구(下句)에서는 법(法)을 나타냈다.
‘누가 무념이고 누가 무생인가?’라는 것은 ‘어떤 사람이 무념(無念)이고 어떤 사람이 무생(無生)인가?’ 이다.
사람의 심념(心念)은 간격이나 끊어짐이 없이 생멸하는데,
그 생멸이 마치 낙거가 모인 것[落車聚]과 같아서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으며,
생각 생각 사이에 멈추거나 쉼이 없어서 마치 등불이 계속해서 타오르고 물이 끊임없이 이어져 흐르는 것과 같다.
이처럼 다니면 마음이 시방을 얽어매고 앉으면 의식이 3세(世)를 반연하니,
이 때문에 ‘누가 무념이고 누가 무생인가?’ 하고 말한 것이다.
‘실제로는 생(生)도 없고 불생(不生)도 없다’는 것을 말해 보자.
만약 실제로 무생(無生)의 이치를 환하게 깨달으면 일체제법(一切諸法)의 생겨나는 모습을 무너뜨리지도 않고 만법이 일어나는 것을 방해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수산주(修山主)가 말하기를 ‘만법(萬法)에 생겨나는 모습[生相]이 없으니,
일 년에 봄이 한 번 지나가네’라고 하였으니,
이 때문에 ‘실제로는 생도 없고 불생도 없다’고 말한 것이다.”
【原文】 진을 진이라고 알면 티끌을 벗어나지 못하나니[眞眞未出塵]
【事實】 법전(法泉) 선사가 상당(上堂)해서 말했다.
“진상[眞]을 알고자 한다면 티끌을 제거하지 말라.”
그리고 주장자를 잡아서 일으키고는 말하였다.
“주장자도 티끌이니 어느 것이 진상이냐?
만약 진상이라고 한다면 티끌과 무엇이 다른 것인지 알겠느냐?
집은 황제의 성(城)에 있는데,
비바람 몰아치는 밤에 하나의 몸이 나뉘어 두 가지 수심을 일으키네.”
【原文】 ‘꼭두각시를 불러서[喚取機關]’에서부터 ‘어느 때에 이룰 수 있는지[早晩成]’까지
【琪注】 쉽게 깨닫게 할 수 있음을 거듭 비유해서 나타내고 있다.
앞에서 “깨친 후에는 텅 비고 텅 비어서 대천세계가 없구나.
죄복(罪福)도 없고 손익(損益)도 없으니,
적멸한 성품 가운데서 묻거나 찾지 말라”고 말했기 때문에 영가대사는 후인(後人)들이 말을 따라 풀이를 하다가 단멸(斷滅)의 견해를 일으킬까봐 지극히 염려스러웠다.
그래서 여기에 특별히 점을 찍어서 손을 쓴 것이다.
반야를 배우는 보살은 반드시 선지식을 만나서 발명(發明)하여 성품을 보았다면,
염(念)이 있는 가운데서 무념(無念)을 요달하고 생멸 가운데서 생멸이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만약 그냥 무념(無念)이고 무생(無生)인 것을 무생법인(無生法忍)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비유하면 마치 꼭두각시 인형이 심의식의 사념[心念]이 없는데도 성불(成佛)하기를 기약하고자 하는 경우와 같으니,
옳을 수가 없다.
이 때문에 ‘어느 때에 이루랴’고 말한 것이다.
조만(早晩)은 강소성과 절강성의 방언(方言)이니,
“어느 때[何時]에 이룰 수 있는가”라고 하는 것과 같다.
【原文】 가을바람 부는 누대와 전각에 기장이 무성하구나[秋風臺殿黍離離]
【事實】 『시경(詩經)』 「서리장(黍離章)」은 주(周)나라 종실을 가엾게 생각한 것이다.
주나라 대부(大夫)가 부역을 가다가 종실(宗室)에 이르렀을 때 예전의 종묘(宗廟)와 궁실을 지나쳤는데 모두 벼와 기장으로 덮여 있었다.
그는 주나라 왕실의 전복을 슬퍼하면서 이리저리 방황하며 차마 떠나지 못하다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저 기장이 무성하고 저 피의 싹이 돋아났구나.
느릿느릿 길을 가는데 마음속은 멍하여 갈 곳 몰라라.
나를 아는 이는 내 마음의 근심을 알겠지만
나를 모르는 이는 무엇을 찾느냐고 말하리라.
멀고 먼 푸른 하늘이여,
이 지경에 이르게 한 이 뉘인가.
【原文】 사람의 손을 따르랴[隨人手]
【事實】 『불정경(佛頂經)』에서 말하였다.
“마치 손바닥으로 허공을 잡아 문지르려는 것과 같으니,
다만 자신의 수고로움만을 더할 뿐이다.
허공을 어떻게 그대가 잡을 수 있겠는가?”
【原文】 ‘사대를 놓아버리고[放四大]’에서부터 ‘인연 따라 먹고 마신다네[隨飮啄]’까지
【琪注】 사대는 지대(地大)ㆍ수대(水大)ㆍ화대(火大)ㆍ풍대(風大)를 말한다.
무시이래로 몸을 버리고[捨身] 몸을 받으면서[受身] 항상 사대에 얽매여 자유롭지 못하다가 지금은 사대의 본성이 공함을 요달해서 법에 자재(自在)하니,
물에 있으면 전체가 물이고,
불에 있으면 전체가 불이고,
바람에 있으면 전체가 바람이다.
이 때문에 수산주(修山主)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대(地大)는 수(水)ㆍ화(火)ㆍ풍(風)을 수용하지 않으니
하나의 대[一大]가 이미 그렇다면 모든 대[諸大]도 마찬가지라네.
사대가 일찍이 두루 하지 않음이 없으니
두루함에 어찌 혼융(混融)이 있으랴.
그 형상은 천 개의 등을 하나의 방에 켜놓은 것과 같고
또한 만 가지 물상이 하나의 거울 속에 있는 것과 같아서
사대(四大)의 이름은 다르지만 네 가지 성품[四性]이 없어서
계(界)ㆍ처(處)ㆍ근(根)ㆍ진(塵)ㆍ식(識)이 서로 통하지 않는구나.
이와 같은 종지를 깨달았기 때문에 “사대를 놓아버린다[放四大]”고 말한 것이다.
‘붙잡지 말라’고 한 것을 말해 보자.
이미 사대의 본성이 공(空)함을 요달했다면 또 어느 곳을 향해 붙잡겠는가.
그래서 ‘붙잡지 말라[莫把捉]’고 한 것이다.
‘적멸한 본성 가운데서 인연 따라 먹고 마신다’고 한 것을 말해 보자.
만약 사대의 성품이 본래 공[性空]하고 5음(陰)이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님[非有]을 요달하면,
도리어 뜻대로 부침(浮沈)하는 것을 좋아하면서 인연 따라 먹고 마신다.
그래서 도오(道吾) 스님이 말하기를 “거칠어도[麤] 먹고 고와도[細] 먹는다.
범부의 차별상[凡夫相]에서 보지 말라.
거친 것도 미세한 것도 없으니,
상방(上方)의 향적(香積)여래는 근체(根蔕:뿌리와 꼭지)가 없느니라”고 하였으니,
이 때문에 ‘적멸한 본성 가운데서 인연 따라 먹고 마신다’고 한 것이다.
【原文】 협소하고[翦翦] 얼빠진 사람[規規]은
【事實】 장자(莊子)가 말하기를 “협소한 사람과 어떻게 지극한 도[至道]의 전체를 더불어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는데,
풀이해서 말하기를 “협소해서 잘게 나누는 무리들[破碎之徒]과는 더불어 대도(大道)의 전체를 말할 수 없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우물 안의 개구리는 동해(東海)의 광대함을 들으면 넋을 잃고 얼이 빠져서 망연자실한다”고 하였는데,
풀이해서 말하기를 “얼이 빠져서 구하여 살피고 찾아서 논변하는 이들은 대롱으로 하늘을 쳐다보고 송곳으로 땅을 가리키는 부류를 말한다”고 하였다.
【原文】 한 알[一粒]의
【事實】 위산(潙山) 스님이 말하였다.
“이 한 알을 소홀히 여기지 말라.
백천(百千)의 낱알이 이 한 알로부터 생겨나느니라.”
【原文】 ‘제행은 무상하여[諸行無常]’에서부터 ‘대원각(大圓覺)이니’까지
【琪注】 사대(四大)의 모습만이 본래 공(空)할 뿐 아니라 작위하는 제행(諸行)이 공적(空寂)하다.
제행이라고 한 것은 일행(一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지가지 만행(萬行)에 이르기까지 모두 공적함을 말한 것이니,
이 때문에 경(經)에서도 이렇게 말하였다.
“나의 지금 이 몸은 사대가 화합한 것이다.
소위 머리카락[髮]ㆍ털[毛]ㆍ손톱[爪]ㆍ치아[齒]와 가죽[皮]ㆍ살[肉]ㆍ근육ㆍ뼈와 뇌수(腦髓)와 구색(垢色)은 모두 지대(地大)로 돌아가고,
가래침ㆍ눈물ㆍ고름ㆍ피ㆍ진액(津液:몸에 있는 액체의 총칭)ㆍ연말(涎沫; 군침)ㆍ담루(淡淚; 맑은 눈물)와 정기(精氣)와 대ㆍ소변은 모두 수대(水大)로 돌아가며,
따뜻한 기운[暖氣]은 화대(火大)로 돌아가고,
움직이고 구르는 것[動轉]은 풍대(風大)로 돌아간다.
사대가 각각 분리되어서 지금 몸이 없어지면 장차 어디에 있겠는가?”
이 때문에 “제행(諸行)이 무상(無常)하여 일체 모든 것이 공하다”고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여래의 대원각(大圓覺)이다’라고 한 것을 말해 보자.
이미 제법(諸法)이 본래 공적함을 깨달으면 곧 대원각성(大圓覺性)과 상응하게 되는데,
단지 모든 중생이 날마다 쓰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배휴(裵休)재상이 말하기를 “하루 종일 원각(圓覺)의 상태에 있으면서도 일찍이 원각을 증득하지 못한 사람은 범부(凡夫)이고,
원각을 증득하고자 하면서도 아직 극치까지 원각을 증득하지 못한 사람은 보살이고,
원각을 구족해서 원각에 주지(住持)하고 있는 사람은 여래이다”고 한 것이니,
이 때문에 ‘이것이 바로 여래의 대원각이다’고 한 것이다.
【原文】 자황함이[可雌黃]
【事實】 『사기(史記)』에서 말하기를 “천하의 문장(文章)을 극진히 하지 못하면 고금의 사실을 교정할 수 없다”고 하였다.
【原文】 ‘결정적으로 말함[決定說]’에서부터 ‘망정에 따라 헤아리는 대로 맡겨두네[任情徵]’까지
【琪注】 안으로 성태(聖胎)를 품고 있으면 언어의 발현이 특이하고 과감해서 머뭇거림[猶豫]이 없으니,
이 때문에 ‘결정적으로 말함’이라고 하였다.
반야를 배우는 사람은 식심(識心)이 근본을 통달하고 온갖 사려[萬慮]를 몽땅 잊어서 외외당당(巍巍堂堂)하게 삼계(三界)를 홀로 걸으면서 법문(法門)의 영수(領袖)가 되고 인천(人天)의 도사(導師)가 되니,
이 때문에 “진승을 나타낸다[表眞乘]”고 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긍정하지 않고 망정에 따라 헤아리는 대로 맡겨둔다’고 한 것을 말해 보자.
설혹 어떤 사람이 내가 온축(蘊蓄)하고 있는 무상묘법(無上妙法)을 긍정하지 않고 갖가지 세상의 지혜로 나에게 따져 묻는다 해도 나는 다른 사람이 따져 묻는 대로 일임(一任)한다는 것이다.
고덕이 말하였다.
“그대가 설령 시방세계가 다하도록 하나의 질문을 일으켜서 내게 물어도,
이 불초한 노승은 손가락을 한 번 튀겨서 높고 낮음에 두루 응하여 전후의 차이가 없도록 하겠지만,
다만 그대의 믿음이 미치지 못할까 염려스럽도다.”
【原文】 상상의 근기라 하네[上上機]
【事實】 향엄(香嚴)화상이 기와 조각이 대나무에 부딪쳐서 소리가 나는 것으로 인하여 홀연히 도를 깨닫고 마침내 게송을 말하였다.
한 번 부딪침에 아는 것을 잊었으니
다시는 닦아서 다스림[修治]을 가탁하지 않는다.
일상의 행위에서 옛길[古路]을 드날리지만
소연(消然)의 기틀에는 떨어지지 않고
처처에 종적(蹤跡)이 없으니
소리와 빛깔[聲色] 밖의 위의(威儀)일러라.
제방(諸方)의 도를 깨친 이들이
모두 상상기(上上機)라 부른다네.
【原文】 ‘근원을 곧장 끊는 것은[直截根源]’에서부터 ‘나는 하지 못한다[我不能]’까지
【琪注】 곧장 단박에 불지견(佛知見)에 깨우쳐 들어가면 점차적으로 교상(敎相)의 과정을 따르지 않으니,
이 때문에 ‘곧장 끊는다’고 하였다.
선덕(先德)이 말하기를 “이 일이 만일 언어상인 3승(乘)ㆍ12분교(分敎)에 있다면 어찌 언설(言說)이 없겠는가.
어떻게 말해야겠는가?
교외별전(敎外別傳)은 오직 이 한 법뿐이니,
곧장 마음을 밝혀서 다만 근본을 구할 뿐이지 지말(枝末)을 따르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이 때문에 ‘곧장 근원을 끊는다’고 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인가한 것[佛所印]’을 말해 보자.
제불(諸佛)의 법문(法門)은 서로 번갈아가면서 인가(印可)한 것인데,
한 번의 인(印)으로 정(定)을 인가하면 일으킴과 마침이 동시[起畢同時]라서 선후(先後)가 없으니,
이 때문에 인(印)이라 말한 것이다.
‘잎사귀를 따고 가지를 찾는 것을 나는 하지 못한다[摘葉尋枝我不能]’고 한 것을 말해보자.
명상(名相)의 학은 비유하면 마치 잎사귀를 따는 것과 같으니,
수를 헤아리는 법문[頭數法門]은 끝나거나 다함이 없어서 스스로를 피곤하게 할 뿐 끝내 이익이 없다.
그래서 ‘나는 하지 못한다’고 말한 것이다.
【原文】 ‘마니주(摩尼珠)’에서부터 ‘친히 거두어서 얻는다네[親收得]’까지
【琪注】 범어로 마니(摩尼)는 여기 중국어로는 여의보(如意寶)이다.
체성(體性)이 가볍고 부드러우며 정결해서 법(法)답게 모든 공덕을 갖추고 있다.
오직 이 한 가지 보배만을 불성(佛性)에 비유할 수 있는데,
사람 사람마다 이 보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수용(受用)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무명의 티끌과 때에 덮여서 자기 스스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이 알지 못한다’고 한 것이다.
‘여래장(如來藏) 속에서 친히 거두어서 얻는다’고 한 것을 말해 보자.
이 마니보(摩尼寶)는 세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여래의 비밀장(秘密藏) 속에서 친히 이 보배를 얻는다.
여래장에는 재전여래장(在纏如來藏:속박 속에 있는 여래장)과 출전여래장(出纏如來藏:속박을 벗어난 여래장)이 있다.
중생은 항상 3독(毒)과 5음(陰)의 번뇌에 덮여 있어서 비록 이 보배를 지니고 있긴 하지만 받아들여서 쓰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을 재전여래장이라고 한다.
제불의 세 가지 덕[三德]은 정미하고 밝고 고요해서 법계의 갖가지 공덕을 원만하게 포용하니,
이것을 출전여래장이라고 한다.
여래장의 곳간은 그만두고라도 어떤 것이 마니주인가?
어떤 스님이 남전(南泉) 대사에게 이렇게 물은 것을 보지 못했는가?
“마니주(摩尼珠)를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해서 여래장 속에서 친히 거두어들인다고 하는데,
어떤 것이 여래장입니까?”
대사가 말했다.
“왕노사(王老師; 남전 대사)가 그대와 함께 왕래하는 것이 여래장이니라.”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마니주입니까?”
대사가 스님을 불렀다.
“사조(師祖)야,
사조야.”
스님이 대답을 하자 대사께서 말했다.
“저리 가거라.
그대는 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였도다.
이 승려가 깨닫지 못했다고 말하지 말라.
설사 알아차렸다고 하더라도 나는 네가 모색하여 알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안다.”
【原文】 부질없이 구해서 찾지[空尋覓]
【事實】 한산시(寒山詩)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훌륭한 사량(思量)을 이해하지 못하고
부처 구하기 어렵다고만 하네.
고개돌리면 바로 부처이니
마음 밖에서 보려 들지 마소.
【原文】 ‘여섯 가지 신통묘용[六般神用]’에서부터 ‘색은 색이 아니라네[色非色]’까지
【琪注】 이 마니주(摩尼珠)는 구슬에 여섯 개의 구멍이 있는데 6근(根)을 비유한 것이다.
미혹으로 인해 6적(賊)에게 스스로 가보(家寶)를 약탈당하고,
소유하고 있는 한량없는 공덕과 법재(法財)를 모두 6적에게 도둑맞는다.
만약 이 사실을 깨친다면 여섯 가지 신통묘용[六般神用]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작용이 눈에 있으면 보고,
귀에 있으면 듣고,
입에 있으면 말하고,
발에 있으면 달려서 그 작용이 다함이 없다.
“공이면서 공이 아니다”라고 한 것을 말해보자.
이 오묘한 작용[妙用]은 상대적인 유(有)ㆍ무(無)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만약 도(道)가 있다고 말하면 모양도 없고 형체도 없으며,
만약 없다고 말하면 성인은 이것으로 인해 신령스럽다.
이 때문에 ‘공이면서 공이 아니다[空不空]’고 한 것이다.
“한 덩어리 둥근 광명은 색이면서 색이 아니로다[一顆圓光色非色]”고 한 것을 말해 보자.
이 보배구슬이 불처럼 빛나고 신령스럽게 밝아서 시방세계를 비추기 때문에 진색(眞色)은 형체가 없으면서도 대천세계를 무성하게 벌림을 알 수 있다.
고덕(古德)이 말하기를 “푸르고 푸른 비취빛 대나무는 모두가 진여(眞如)이고,
울창하게 피어 있는 노란 국화는 반야 아님이 없도다”고 하였으니,
이 때문에 ‘한 덩어리 둥근 광명은 색이면서 색이 아니다’고 한 것이다.
【原文】 불이문(不二門)
【事實】 『유마경(維摩經)』에서 말하였다.
“32보살(菩薩)이 각각 불이법문(不二法門)에 대해 말하고 나자 문수(文殊)가 물었다.
‘우리들은 각자 이미 말하였으니,
인자(仁者)께서 어떤 것이 보살의 불이법문인지를 말씀하셔야 합니다.’
유마가 묵연히 침묵하자,
문수가 찬탄하여 말하기를 “언어문자(言語文字)가 없는 데 이르러야만 보살의 불이법문입니다’라고 하였다.”
【原文】 아나율타의 능관으로도[那律能觀]
【事實】 『능엄경(楞嚴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나율타(阿那律陀)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에 이마를 대어 예배드리고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제가 처음 출가해서 항상 수면을 즐기자,
부처님께서는 저를 축생의 부류[畜生類]가 될 것이라고 꾸짖으셨습니다.
저는 부처님의 꾸중을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7일 동안 자책(自責)하며 잠을 자지 않아서 두 눈을 잃었는데,
세존께서 저에게 낙견조명금강삼매(樂見照明金剛三昧)를 보여 주셔서 저는 눈을 통하지 않고도 시방을 보는 것이 정밀하고 참되게 확 트였으니,
마치 손바닥의 열매를 보는 것과 같았습니다.’”
풀이하여 말하면,
아나율은 여기 중국말로는 무탐(無貪)이라고 하는데,
바로 백반왕의 아들[白飯王子]로서 천안(天眼)을 증득하였다.
낙견조명(樂見照明)은 천안정(天眼定)이다.
【原文】 ‘오안을 청정하게 하고[淨五眼]’에서부터 ‘헤아리기 어렵다네[難可測]’까지
【琪注】 모든 경에서 5근(根)과 5력(力)을 말하고 있는데,
지금 여기서 말하고 있는 5안ㆍ5력을 모든 경론(經論)에서 조사해 보았더니,
오직 『정명경(淨名經)』에만 나오는 것이다.
우선 이 문장에 의거해서 이를 풀이해 보자.
이른바 5안(眼)은 첫째 천안(天眼)이고,
둘째 육안(肉眼)이고,
셋째 법안(法眼)이고,
넷째 혜안(慧眼)이고,
다섯째 불안(佛眼)이다.
5안을 빠짐없이 갖추면 여래가 되어서 즉각 5력(力)이 현전(現前)하게 된다.
첫째는 신력(信力)이고,
둘째는 진력(進力)이고,
셋째는 염력(念力)이고,
넷째는 정력(定力)이고,
다섯째는 혜력(慧力)이다.
이 때문에 ‘5안을 청정하게 하여 5력을 얻는다[淨五眼得五力]’고 말한 것이다.
“오직 증득해야만 아는 것이고 측량하기 어렵다”고 한 것을 말해 보자.
이 심지법문(心地法門)은 모름지기 직접 증득해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니,
마치 사람이 물을 마시면 차고 더움을 저절로 아는 것과 같아서 정량(情量)으로 측량해서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경에서 말하기를 “만약 사유심(思惟心)으로 여래원각(如來圓覺)의 경계를 측량해서 헤아린다면,
마치 반딧불을 가지고 수미산을 태우려 하는 것과 같아서 설사 미진겁이 지나더라도 끝내 태울 수가 없다”고 하였다.
이 때문에 ‘오직 증득해야만 알 수 있는 것이고 측량하기 어렵다[唯證乃知難可測]’고 한 것이다.
【原文】 마치 암마(庵摩)를 보는 것과 같으며
【事實】 『능엄경』에서 말하기를 “암마륵과(庵摩勒果)는 여기 중국말로는 분별하기 어려움[難分別]”이라고 하는데,
복숭아 같으면서 복숭아가 아니고 종려나무 같으면서도 종려나무가 아니다.
【原文】 곧장 보리로 취향하여[直趣菩提]
【事實】 이문화(李文和) 도위(都尉)가 석문(石門) 자조총(慈照聰)선사를 참방한 뒤 임제의 종지(宗旨)를 깨닫고서 게송 한 수를 지었다.
도를 배우려면 모름지기 철한(鐵漢)처럼 해서
마음 머리에 착수(着手)하면 문득 결판나야 하니
곧장 무상보리(無上菩提)로 취향하여
일체의 시비(是非)에 관여하지 말라.
【原文】 마음은 돌이 아니어서[心匪石]
【事實】 『시경(詩經)』에서 말하였다.
내 마음은 돗자리가 아니어서 말 수 없고,
내 마음은 돌이 아니어서 굴릴 수 없네.
【原文】 ‘거울 속의 형상을 보는 것[鏡裏看形]은’에서부터 ‘어찌 붙잡을 수 있으랴[爭拈得]’까지
【琪注】 비록 거울 속의 형상은 볼 수 있지만 물속의 달그림자는 붙잡을 수 없다.
진실로 세상 사람들은 이 깨달음의 성품[覺性]을 등지고 그 영상(影像)을 인정하는 바람에 생사의 바다에 유랑하면서 머리를 내밀었다 머리를 빠트렸다 목전의 경계에 깊이 탐착하기 때문에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현우경(賢愚經)』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비유하면 마치 밝은 달밤에 여러 원숭이들이 나무 옆에 있는 우물가에서 홀연히 달그림자를 발견하자 즉시 서로 번갈아가면서 우물 속으로 내려가 달을 붙잡으려 하나 끝내 붙잡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진실로 일체 중생이 외연(外緣)을 쫓아가면서 근본을 돌이키려 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이 때문에 “물속에서 달을 잡으려 하니 어찌 붙잡을 수 있으랴[水中捉月爭拈得]”고 한 것이다.
【原文】 옛날 주인[舊主人]
【事實】 고덕(古德)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오온산(五蘊山) 앞이 한 단락의 공(空)인데
같은 문으로 출입하면서도 서로 만나지 못하네.
무량겁토록 집을 빌려 머물면서도
지금까지도 주인공(主人公)을 알아채지 못하네.
【原文】 어리석은 원숭이가 미친 견해를 일으켜서[癡猿狂解]
【事實】 『승기율(僧祇律)』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모든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과거세 어느 때에 바라나(波羅奈)라는 성(城)과 가시(伽尸)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그 사이에 5백 마리의 원숭이가 있었다.
숲속을 유행하다가 한 그루의 니구율수(尼俱律樹) 밑에 당도하였는데,
나무 아래 우물이 있고 우물 속에 달그림자가 나타났다.
이때 우두머리 원숭이가 이 달그림자[月影]를 보고 함께 있는 모든 원숭이들에게 ‘달이 오늘 죽어서 우물 속에 떨어졌으니 마땅히 함께 꺼내어서 세간(世間)이 긴 밤의 어둠에 덮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하고 어떻게 하면 꺼낼 수 있는가를 함께 논의하였다.
이때 우두머리 원숭이가 말하기를 ‘내가 꺼내는 법을 안다.
나는 나뭇가지를 붙잡을 테니 너희들은 내 꼬리를 잡아라.
번갈아가면서 서로의 꼬리를 잡고 이으면 꺼낼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모든 원숭이들이 우두머리의 말대로 서로가 서로의 꼬리를 붙잡고 내려가는데,
물에 조금 미치지 못했을 때 연결된 원숭이들은 무겁고 나무는 약해서 가지가 꺾어지는 바람에 모든 원숭이가 우물물 속에 떨어졌다…….”
【原文】 항상 홀로 행하고 항상 홀로 걸으며[常獨行常獨步]
【琪注】 법을 통달한 사람[達法之人]은 만법(萬法)을 반려로 삼지 않고 삼계를 높이 초월해서 대방(大方; 대도)을 홀로 걸으니,
이 때문에 “항상 홀로 행하고 항상 홀로 걷는다”고 한 것이다.
요달하지 못한 사람[未了之人]은 무량겁(無量劫) 이래로 항상 모든 객진(客塵)과 상대[對]가 되어서 일찍이 깨달음의 성품[覺性]을 미혹하고 깊이 객진의 외연[塵緣]에 부합해서 한 생각 한 생각마다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 때문에 “안근(眼根)은 색(色)을 받아들이고,
이근(耳根)은 소리[聲]를 분별하고,
비근(鼻根)은 모든 향기를 냄새 맡고,
설근(舌根)은 모든 맛을 맛보고,
신근(身根)은 탐욕스럽게 모든 감촉을 받아들이고,
의근(意根)은 일체의 모든 법을 분별하니,
어떻게 전제(前際)와 후제(後際)를 단절해서 홀로 행하고 홀로 걸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 것이다.
【原文】 돌아올 때와 길을 잊었네[忘却來時路]
【事實】 한산시(寒山詩)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안신처(安身處)를 알고자 한다면
길이길이 한산(寒山)을 보존해야 하네.
미풍이 깊은 골짜기 소나무에 불어오니
가까이서 듣는 소리 더욱 좋아라.
그 아래 반백인(班白人:머리가 희끗희끗한 사람)이 있어서
황로(黃老:황제와 노자)를 낭랑하게 읽으면서
10년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으니
돌아올 때와 길을 잊었노라.
【原文】 통달한 사람은 열반로에서 함께 노닌다네[達者同遊涅槃路]
【琪注】 통달한 사람은 법을 통달한 사람[達法之人]이다.
열반(涅槃)이란 불생불멸(不生不滅)이다.
멸(滅)은 불생이고 반(槃)은 불멸(不滅)이니,
곧 무생로(無生路)이다.
시방의 박가범(薄伽梵)은 한 길[一路]의 열반문(涅槃門)이고,
이 한 길은 오직 마음을 밝히고 근본을 통달해서 대승(大乘)의 종성(種性)을 갖춘 자라야만
걸음걸음에 부처님의 사다리를 밟고 올라가서 함께 노닐 수 있다.
반드시 알라.
삼계(三界)는 넓고 넓으며 6도(道)는 아득하고 망망해서 사람들이 모두 길을 잃어버린다.
이 때문에 모든 성인[千聖]이 출흥(出興)함은 이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위한 것이니,
그대들 모든 사람에게 이 길을 함께 가기를 권한 것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발을 내딛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고덕(古德)이 말하기를 “천당으로 가는 길에 가시가 돋아 있고,
지옥문 앞은 미끄럽기가 이끼 낀 것과 같네”라고 하였으니,
이 길을 밟는 사람들이 적다고 말할 만하다.
【原文】 ‘격조가 예스럽고 정신이 청아하며[調古神淸]’에서부터 ‘사람들이 돌아보지 않는다네[人不顧]’까지
【琪注】 요달하지 못한 사람[未了之人]은 세간의 인연을 깊이 탐착하여 맛에 집착하고 농염한 것에 들떠서 정신이 혼란하여 안으로 지켜야 할 것을 잃어버린다.
그렇다면 이것은 도인(道人)의 동정(動靜)이 아니다.
도를 간직한 선비[有道之士]는 세상의 인연에 물들지 않아 격조가 예스럽고 담박하며,
정신이 청아하고 맑아 도풍(道風)이 높고 아득하다.
이 때문에 “격조가 예스럽고 정신이 청아하여 도풍이 저절로 높다네[調古神淸風自高]”라고 하였다.
“모습은 초췌해도 뼛골은 강인한데 사람들은 돌아보지 않는다네”라고 한 것을 말해 보자.
대수행인(大修行人)은 비록 형상은 앙상하고 초췌하지만 마음에는 탐욕이 없어서 안에서 주재(主宰)하고 있는 것은 마치 금석처럼 강인하지만 아는 이가 드물다.
염부제인(閻浮提人)은 색상(色相)에 깊이 탐착해 생사에 유전하면서 벗어날 기약이 없는데도 살펴서 깨닫지 못한다.
이 때문에 성인이 가난한 선비와 같은 형상으로 세간에 숨어 지내면 헤아려 알 길이 없다.
그러므로 본분도인(本分道人)은 안으로 반야를 온축(蘊蓄)하고 있어서 화려한 장식을 일삼지 않고 풍모가 청아하여 예스럽지만 아는 이가 드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모습은 초췌해도 뼛골은 강인한데 사람들은 돌아보지 않는다네[貌悴骨剛人不顧]’라고 한 것이다.
【原文】 묘봉정(妙峰頂)에서
【事實】 『화엄경』에서 말하였다.
“선재동자가 승락국(勝樂國)을 향해서 점차로 남행하여 가다가 묘봉산에 올랐다.
그리고 그 산에서 동ㆍ남ㆍ서ㆍ북과 상하를 관찰하면서 덕운(德雲)비구를 만나 뵙기를 간절히 바랐는데,
칠 일이 지나자 그 비구가 다른 산 위에서 서서히 보행하는 모습을 보고 찾아가서 그 발에 이마를 대어 예배드렸다.”
옛 주석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묘봉은 수미지(須彌地)의 꼭대기이니,
상(相)과 명(名)이 다해서 없어진 곳을 나타낸다.
덕운 비구는 10주(住)의 초주(初住)인 발심주에 머무는 선지식이니,
무상정(無相定)으로 법신을 증득함을 밝혔다.”
청량(淸凉)의 주석에서는 봉(峰)의 의미를 따로 풀이해서 말하기를 “머물고 있는 지위를 잊어야만 이 종지를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原文】 명아주 잎과 콩잎의 맛[藜藿味]을
【事實】 장자(莊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원헌(原憲)은 가난한 집[環堵之室]에 거처하는데,
생가시나무로 울타리를 둘렀으며 쑥대로 만든 창문도 완전하지 못하여 허술하였다.
자공(子貢)이 안은 감색이고 바깥은 백색,
그리고 수레 덮개가 골목길에 들어가지 않는 사마(駟馬)를 타고 원헌을 찾아갔다.
원헌은 화관(樺冠)을 쓰고,
짚신을 신고,
명아주 지팡이를 짚고서 맞이하였다.
자공이 말하기를 ‘선생께서는 어떤 병이 있으십니까?’라고 하자,
원헌이 말하였다.
‘내 듣자 하니 재산이 없는 것을 가난이라 하고,
배우고서 실행하지 않는 것은 병이라고 하였소.
지금 나는 가난할지언정 병이 든 것은 아니오’라고 하였다.”
여곽(藜藿)은 콩잎[豆葉]이다.
【原文】 ‘곤궁한 불제자[窮釋子]가’에서부터 ‘도가 가난한 것은 아니라네[道不貧]’까지
【琪注】 도를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밖으로 장식하는 것을 빌리지 않으니,
이 때문에 가난하다고 말한 것이다.
고덕(古德)이 “도를 배우면서 몸을 장엄함에 항상 세 가지가 부족하다”라고 함이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석자(釋子)라고 한 것은 부처님으로부터 구족계를 받은 사람을 칭한다.
마땅히 석가씨라고 해야 하는데,
이 석가씨(釋迦氏)는 다섯 가지 성[五姓] 중의 하나이다.
우리 부처님께서 수행의 인지(因地)에서 태자였을 때 왕에게 네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왕에게 쫓겨났다.
이 네 아들은 덕으로 사람들을 귀의시켜 나라를 강하게 만들었다.
부모가 후회하고 억념(憶念)하면서 사신을 네 아들에게 보내서 돌아오라고 하였으나 네 아들이 사양하고 돌아오지 않자,
부왕(父王)이 ‘우리 아들이여[我子]’라고 탄식하였다.
석가(釋迦)는 중화(中華)의 말로는 능인(能仁)이다.
지금 여기서 가(迦)를 말하지 않고 석(釋)이라고만 말함은 간략함을 따른 것이며,
자(子)는 남자(男子)의 통칭이니,
이 때문에 석자(釋子)라고 한 것이다.
입으로 가난하다고 칭한[口稱貧] 것은 입으로는 비록 가난하다고 칭하지만 안으로는 성인의 법[聖法]을 온축(蘊蓄)하고 있으니 실제로는 가난이 아니라는 뜻이다.
‘실제로는 --이다[實是]’라고 한 것은 진실한 말[諦實之言]이다.
몸이 가난하다는 것[身貧]은 세상의 재물과 칠보(七寶) 등이 없는 것이다.
도가 가난하지 않다는 것[道不貧]을 말해 보자.
가령 그 도를 논한다면,
항하사와 같은 공덕과 한량없는 법재(法財)는 쓰고 써도 다함이 없어서 송곳 꽂을 땅이 없다 해도 실제로는 가치가 사바(娑婆)와 같으니,
이 때문에 ‘실제로는 몸이 가난할 뿐이지 도가 가난한 것은 아니다[實是身貧道不貧]’고 하였는데 다음 문장에 분명하게 나온다.
【原文】 어머니가 포삼을 찢으니[孃生破布衫]
【事實】 운거산(雲居山) 아래 한 도자(道者)가 암자에 머물고 있었다.
운거가 하루는 시자를 시켜서 바지 한 벌을 갖고 가서 그에게 주도록 하였다.
도자가 말하기를 나에게는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바지가 있다……”고 하였다.
나찬(懶瓚)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마음은 일 없는 마음이고,
얼굴은 어머니가 주신 얼굴이니
겁석(劫石)은 옮길 수 있지만,
그 가운데 변함이 없다네.
【原文】 ‘가난하면 몸에 항상[貧卽身常]’에서부터 ‘무가의 보배[無價珍]를’까지
【琪注】 가난하면 몸을 꾸미는 장식이 없게 되는데,
이것을 몸의 가난[身貧]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그 도(道)는 존중할 만하고 귀하게 여길 만해서 실제로는 가난이 아니다.
고덕이 말하기를 “가사(袈裟)가 떨어진 후에는 거듭 거듭해서 깁고,
양식이 없을 때에는 이집 저집 돌면서 탁발한다”고 하였다.
이 때문에 가섭(迦葉)이 분소의(糞掃衣)를 입자,
부처님께서 상행(上行)의 옷이라고 찬탄하였으니,
음식을 절약하고 옷을 검소하게 입어서 만족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도를 얻으면 마음에 무가의 보배를 간직한다네”라고 한 것을 말해 보자.
세간의 일곱 가지 보배는 금(金)ㆍ은(銀)ㆍ유리(琉璃)ㆍ산호(珊瑚)ㆍ자거(車磲)ㆍ진주(眞珠)ㆍ마노(瑪瑙) 등의 보배인데,
이것은 모두 가치가 한정되어 있지만 오직 마음의 보배만은 가치가 한량없다[無價].
달마(達摩)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모든 법 가운데서 심법(心法)이 최상이고,
모든 보배 가운데서 마음의 보배[心寶]가 최고라네.”
이 보배는 형상이 없어서 도안(道眼)을 갖추지 않으면 끝내 보기 어려우니,
이 때문에 ‘마음은 무가의 보배를 간직한다네[心藏無價珍]’라고 하였다.
【原文】 ‘무가의 보배[無價珍]는’에서부터 ‘끝내 아끼지 않는다네[終不吝]까지
【琪注】 거듭해서 무가의 보배라고 말한 것은 이 보배가 실로 세간의 보배가 아님을 밝힌 것이다.
‘쓰고 써도 다함이 없다[用無盡]’라고 한 것을 말해 보자.
세간의 보배는 모두 한량이 있어서 쓰임에 다함이 있다.
설사 팽조(彭祖)와 같은 수명과 석숭(石崇)과 같은 부자일지라도 이것은 한 세대의 영화일 뿐이다.
오직 이 마음의 보배만은 쓰고 써도 다함이 없으니,
위로는 시방제불(十方諸佛)에 이르기까지 무량겁이 지나도록 수용(受用)해도 다함이 없고,
서천(西天) 이십팔(二十八) 조사가 써도 다함이 없고,
당토(唐土)의 6조(祖)가 써도 다함이 없고,
천하(天下)의 노화상(老和尙)이 써도 다함이 없고,
지금 이 산승(山僧)이 써도 다함이 없다.
“중생을 이롭게 하고 기연에 응하면서 끝내 아끼지 않는다[利物應機終不吝]”고 한 것을 말해보자.
십자가두(十字街頭)에서 당당하게 분부(分付)하였으니,
어찌 아끼고 애석해 하겠는가.
이로부터 당시 사람들이 받아들이려 하지 않기 때문에 고덕이 말하기를 “여주(驪珠)는 여룡(驪龍)이 아끼는 것이 아닌데,
본래 사람들이 알지 못할 뿐이다”라고 한 것이다.
【原文】 기의(機宜)
【事實】 『현의(玄義)』에서 말하기를 “기(機)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는데,
첫째의 기는 은미함이란 뜻이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역(易)』에서는 말하기를 “기는 활동의 은미함이니 길한 조짐이 앞서서 나타난다”고 하였다.
또 『아함경』에서는 말하기를 “중생에게 선법(善法)의 기미가 있으므로 성인이 와서 감응하는 것이다.
중생이 장차 선법을 일으키려 하는 경우,
이 선법이 미미하게 움직이려 하는 것이 기미가 된다”고 하였다.
가령 장차 선법을 일으키려 함이 기미가 된다면,
이 말은 촉급하게 말한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일으킬 수 있는 선법을 밝힌다고 말한 경우,
이 말은 넉넉하게 말한 것이다.
비유하면 마치 활[弩]에 발사할 수 있는 기틀이 있기 때문에 활 쏘는 사람이 발사할 수 있는 것과 같으니,
발사하면 화살이 움직이고 발사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중생도 선법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성인이 감응하면 선법이 일어나고 감응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으니,
그래서 ‘기는 은미함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능가경(楞伽經)』의 고주(古注)에서는 말하기를 “기는 연다는 의미[開義]이다.
무엇을 말하는가?
중생에게 선(善)도 있고 악(惡)도 있는데,
성인의 자비(慈悲)를 열기 때문에 기는 연다는 의미이다”라고 하였다.
셋째,
기(機)는 마땅히 해야 한다는 의미[宜義]이다.
가령 무명(無明)의 고통을 뿌리 뽑으려 한다면 마땅히 비(悲)를 행해야 하고,
법성(法性)의 즐거움을 주려 한다면 마땅히 자(慈)를 행해야 하니,
이 때문에 기는 마땅히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原文】 비원으로 훈습한 것[悲願所熏]
【事實】 규봉(圭峯)이 말하였다.
“동체대비(同體大悲)는 본성에 부합하는 대원(大願)이니,
본성에 본래 있는 것이지 별도로 새로 얻는 것이 아니다.”
【原文】 향기로운 밥[香飯]
【事實】 『정명경(淨名經)』에서는 말하였다.
“비야리성(毘耶離城)의 유마힐(維摩詰)이 회중(會衆)이 있는 앞에서 보살의 화신을 만들어서 상방세계(上方世界)인 중향세계(衆香世界)의 향적(香積)여래 처소에 가게 해서 한 발우의 밥을 얻어다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수미산과 같은 밥을 먹게 하였는데,
회중이 모두 포식하고도 오히려 다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발우에 있는 밥도 전과 같이 그대로였다.”
【原文】 처음에 비를 내리는 것[降雨初]과
【事實】 장로(長蘆) 스님이 말하였다.
“비유하면 마치 사갈라용왕(沙竭羅龍王)이 대해(大海)도 벗어나지 않고 또 깊은 궁전을 떠나지 않고도 오직 일념의 자비심만으로 번개를 치고 우레를 진동시켜서 감응에 따라 비를 내리듯이,
무상의 법왕[無上法王]도 마찬가지라서 법계도 여의지 않고 심정도 움직이지 않은 채 오직 일념의 공용(功用) 없는 마음으로 시방세계에 자비의 구름을 일으키고 덮어서 널리 감로수로 뿌려준다.”
【原文】 ‘삼신사지(三身四智)’에서부터 ‘심지의 인[心地印]이로다’까지
【琪注】 3신(身)ㆍ4지(智)ㆍ8해(解)ㆍ6통(通)은
각성(覺性)의 공용(功用)으로 이름 붙인 것이다.
지(地)는 능생(能生)의 의미이고,
인(印)은 호령(號令)의 의미이다.
3신(身)이라고 말한 것은 법신(法身)ㆍ보신(報身)ㆍ화신(化身)이다.
4지(智)는 대원경지(大圓鏡智)ㆍ평등성지(平等性智)ㆍ묘관찰지(妙觀察智)ㆍ성소작지(成所作智)이다.
8해탈(解脫)을 말해 보자.
첫째는 안으로 색을 관하는 해탈[內觀色解脫]이고,
둘째는 밖으로 색을 관하는 해탈[外觀色解脫]이고,
셋째는 정처해탈(淨處解脫)이고,
넷째는 무변처해탈(無邊處解脫)이고,
다섯째는 식무변처해탈(識無邊處解脫)이고,
여섯째는 무소유처해탈(無所有處解脫)이고,
일곱째는 비상처해탈(非想處解脫)이고,
여덟째는 구경멸처해탈(究竟滅處解脫)이다.
이 여덟 곳의 해탈은 곧 8식해탈(識解脫)이다.
8식(識)은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의 6식(識)과
일곱 번째의 전송식(傳送識)과 여덟 번째의 아뢰야식(阿賴耶識),
즉 함장식(含藏識)이다.
이 때문에 8식을 전변시키면 4지(智)가 되고,
4지를 묶으면 3신(身)이 된다.
지금 여기에서 8식을 전변시키면 4지가 된다고 한 것을 말해 보자.
안ㆍ이ㆍ비ㆍ설ㆍ신의 5식(識)을 전변시키면 성소작지(成所作智)가 되고,
여섯 번째 의식(第六意識)을 전변시키면 묘관찰지(妙觀察智)가 되고,
일곱 번째 전송식(傳送識)인 말나식(末那識)을 전변시키면 평등성지(平等性智)가 되고,
여덟째 함장식인 아뢰야식을 전변시키면 대원경지(大圓鏡智)가 된다.
4지(智)를 묶으면 3신(身)이 된다고 한 것을 말해 보자.
성소작지와 묘관찰지를 묶으면 화신이 되고,
평등성지는 보신이 되고,
대원경지는 법신이 되는데,
이 3신은 다만 1신(身)일 뿐이다.
1신을 알고자 하느냐?
머리는 둥글어서 하늘의 모양이고 발은 모가 나서 땅과 같구나.
예스런 용모는 깡말랐지만 장부의 의기(意氣)를 갖추었도다.
【原文】 진흙[泥]ㆍ물[水]ㆍ허공[空] 세 가지
【事實】 장로(長蘆) 스님이 말하였다.
“조사(祖師)의 문하(門下)에서는 어떤 때에는 반구(半句)를 묶고 3구(句)를 타파하며,
어떤 때에는 반구를 찢고 삼구를 분석한다.
3구 밖에서 알아차리면 조사와 부처[祖佛]의 스승이 되고,
3구 안에서 알아차리면 인천(人天)의 스승이 되고,
3구를 밝히지 못하면 끝내 자기도 구제하지 못한다.
건곤을 뒤덮는다는 것[函蓋乾坤者]은 마치 도장으로 진흙에 찍는 것과 같아서 문채(文彩)가 분명하고,
모든 흐름을 절단한다는 것[截斷衆流者]은 마치 도장으로 허공에 찍는 것과 같아서 끝내 조짐이나 흔적이 없고,
파도와 물결을 따른다는 것[隨波逐浪者]은 마치 도장으로 물에 찍는 것과 같아서 생각 생각[念念]마다 흐름을 멈추지 않는다.
또 하나의 도장[一印]이 있으니 말해 보라.
어느 곳에 도장을 찍겠느냐?
잠시 침묵하고 말하였다.
섬부(陜府)에 있는 철우(鐵牛)의 머리통[頭]이고,
가주(嘉州)에 있는 대상(大像)의 밥통[肚]이로다.”
【原文】 석교의 서쪽[石橋西]
【事實】 안탕(雁蕩)이 집제(集題)한 증도각(證道閣)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마음으로 도를 구하려 들면 도는 궁구하기 어렵고
무념(無念)으로 공(空)을 관하면 곧바로 공에 막히나니
조사가 진정으로 머무는 곳을 알고자 하는가?
죽림(竹林)의 서쪽이요,
석교(石橋)의 동녘이니라.
【原文】 ‘상사는 한 번 결단하여[上士一決]’에서부터 ‘더욱 믿지 않아라[多不信]’까지
【琪注】 위없는 묘법[無上妙法]은 오직 상근기의 사람만이 듣고서 진리를 깨달을 수 있으니,
이 때문에 “상근기의 사람은 한 번 결단하여 일체를 요달한다[上士一決一切了]”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상근기의 사람이 서로 만나 눈길이 부딪치면 도가 간직되고[目擊道存],
중ㆍ하근기의 사람은 많이 듣는 것[多間]을 이익으로 여길 뿐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말이 많아지면 도와의 거리가 더욱 멀어진다[言多則去道轉遠]”고 하였으니,
이 때문에 “중ㆍ하근기의 사람은 많이 들으면 들을수록 더욱 믿지 않는다[中下多聞多不信]”고 하였다.
그렇다면 3교(敎)에서 언어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모두 이러하다.
대승보살(大乘菩薩)은 한 가지를 듣고 천 가지를 깨달아서 대총지(大摠持)를 얻는데,
모든 소승인(小乘人)은 이 법을 감당하지 못한다.
노자(老子)는 말한다.
“상사(上士)는 도를 들으면 부지런히 실천에 옮기고,
중사(中士)는 도를 들으면 혹은 간직하기도 하고 혹은 잃어버리기도 하며,
하사(下士)가 도를 들으면 크게 비웃는다.
그러므로 하사가 비웃지 않으면 도가 되기에 부족하다.”
전(傳)에서는 말하기를 “더불어 말할 만하면 말을 해주고,
더불어 말할 만하지 않으면 말해 주지 않는다.
더불어 말할 만한데도 말해 주지 않는 것을 ‘사람을 잃는다[失人]’고 하고,
더불어서 말할 만하지 않은데도 말을 하는 것을 ‘말을 잃는다[失言]’고 한다”고 하였다.
이 때문에 한산시(寒山詩)에서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상인(上人)의 마음은 맹렬하고 날카로워서
한 번 들으면 묘법을 바로 알고
중류(中流)는 마음이 청정해서
깊이 생각해서 매우 중요하다고 말하며
하사(下士)는 우둔하고 어리석어서
질긴 껍질[頑皮]을 찢어내기 가장 어렵네.
곧바로 머리에 핏방울이 흘러야만
비로소 자신이 꺾이게 됨을 안다네.
눈을 떠서 저 도적을 살펴보라,
저자거리에서 떼로 모여 싸우누나.
먼지처럼 죽은 시체로 버려지면
이때는 누구에게 하소연할꼬.
사내대장부여
한 칼에 두 동강을 낼지어다.
사람의 얼굴에 짐승의 마음이니
망상번뇌 일어남을[造作] 언제쯤 쉴까나.
선대 성인들[先聖]의 격려가 이와 같으니 선근(善根)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 들으면 반드시 느끼는 바가 있으리라.
【原文】 기세가 산을 무너뜨릴 것 같고[勢若崩山]
【事實】 각범(覺範) 스님이 말하기를 “노한 사자는 바위를 깨트리고 목마른 천리마는 하천을 달린다”고 하였고,
또 고덕이 말하기를 “한량을 뛰어넘는 사람[過量之人]은 깨칠 때 마치 천 길 낭떠러지에서 굴러 떨어지는 것과 같아서 다시는 의심하거나 막히지 않는다”고 하였다.
【原文】 배에 새기고[刻舟]
【事實】 『여씨춘추(呂氏春秋)』에서 말하였다.
“초나라 사람이 강을 건너면서 배를 타고 가다가 배에서 칼을 떨어뜨리고는 별안간 떨어뜨린 자리를 배에 새기고는 ‘내가 여기에서 칼을 떨어뜨렸으니 찾으면 반드시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 미혹됨이 이와 같은 사람이 있다.
【原文】 ‘다만 자신의 회포에서[但自懷中]’에서부터 ‘정진을 자랑하리오[誇精進]’까지
【琪注】 때 묻은 옷[垢衣]은 바로 무명번뇌(無明煩惱)이다.
옷은 덮는다[蓋覆]는 의미이다.
구(垢)는 진구(塵垢)이다.
진(塵)은 염오(染汚)의 의미이다.
이 무명(無明)은 청정한 법체를 덮을 수 있고 미묘한 각성을 염오시킬 수 있기 때문에 옷으로 비유한 것이다.
다만 자기 마음에서 때 묻은 옷을 벗는다고 한 것은 하물며 자기 일을 타인이 할 수 없는 것이겠는가.
등각(等覺) 이하는 모두가 때 묻은 옷[垢衣]을 입은 보살[大士]이다.
견성한 사람은 감춰진 비밀스런 작용으로 진로(塵勞)와 무명에 덮이지 않는다.
그 때문에 ‘때 묻은 옷을 벗는다[解垢衣]’고 한 것이다.
고덕이 말하기를 “기름기 묻은 모자를 물리치고,
나쁜 냄새나는 포삼을 벗고,
손을 휘저어 가시나무 숲을 벗어나서 대자재(大自在)를 얻는다”고 하였다.
소승인(小乘人)은 전적으로 외부의 사상(事相)에서 구하므로 비록 몸을 법좌(法座)로 둘러싼다 해도 마음은 법진(法塵)에 둘러싸여 있으니,
이것이 “정진을 밖으로 자랑하는 것[外誇精進]”이다.
보공(寶公)이 말하기를 “사람이 결단코 용맹정진을 굳건히 하면 게으르게 된다”고 하였는데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原文】 정진을 자랑하리오[誇精進]
【事實】 『무행경(無行經)』에서 말하였다.
“만약 정진하려는 마음을 일으킨다면 이것은 허망한 것일 뿐 정진은 아니다.
다만 마음을 허망하지 않게만 할 수 있다면 정진이 가없으리라.”
【原文】 ‘다른 사람이 비방으로부터[從他謗]’에서부터 ‘부질없이 자신만 피로할 뿐이다[徒自疲]’까지
【琪注】 말[言]로 훼방하고 모욕하는 것을 방(謗)이라 하고,
옳은 것을 옳지 않다고 하는 것이 비(非)이다.
견성한 사람은 하루 종일 만나게 되는 순역(順逆)의 경계에서 마음이 편안하므로 온갖 경계[萬境]에 굴려지지 않는다.
나에 대한 온갖 훼방을 그에게 일임(一任)하니,
악언으로 비방해서 더럽히는 것을 내가 받지 않으면 반대로 그 자신에게 돌아갈 뿐이다.
이것이 이른바 “자신이 짓고 자신이 받는다[自作自受]”는 것이다.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손으로 횃불을 잡고 하늘을 태우려고 한다면 부질없이 자신만 피곤해질 뿐 끝내 하늘을 태울 수 없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불을 잡고 하늘을 태우려 하나 부질없이 자신만 피로해진다[把火燒天徒自疲]’고 한 것이다.
【原文】 나무 허수아비와 꽃과 새가[木人花鳥]
【事實】 방거사(龐居士)가 게송으로 말하였다.
스스로 만물(萬物)에 무심할 수만 있다면
만물이 둘러싼들 무슨 장애가 되리오.
철우(鐵牛)는 사자후를 두려워하지 않으니,
흡사 나무 허수아비가 꽃과 새를 보는 것과 같아라.
나무 허수아비는 본체가 저절로 그러하고
꽃과 새도 무정(無情)하여 놀라지 않네.
마음과 경계[心境]가 여여하면 바로 이것일 뿐이니
보리도(菩提道)가 이루어지지 않음을 어찌 걱정하리오.
【原文】 푸르고 푸른[蒼蒼]
【事實】 『조정(祖庭)』에서 말하기를 “창창하게 푸르고 푸른 것은 하늘의 색깔이고,
활처럼 구부러져 높은 것은 하늘의 형상이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천지(天地)의 대덕(大德)으로서 사사로움이 없는 대도(大道)에 비유한 것이다.
【原文】 ‘내가 듣기에는 마치[我聞恰似]’에서부터 ‘부사의(不思議)’까지
【琪注】 나는 훼방하는 말을 들으면 마치 감로수를 마신 것과 같아서 마음이 저절로 청량해지고 뜨거운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데,
요달하지 못한 사람은 훼방하고 시비하는 말을 들으면 마음에 번뇌를 일으킨다.
이것이 이른바 “곧장 한 곳에 불을 붙이면 세 곳에서 일시에 불이 일어나 불을 끌 수 없다”고 한 것이다.
고덕이 말하기를 “각화(覺花)의 종자는 있지만 사람의 종자는 없다.
마음의 불은 연기[心火]가 없으나 날마다 타오른다”고 하였다.
오직 견성한 사람만이 순경계(順境界)와 역경계(逆境界)의 말을 듣고도 마음의 자재를 얻어서 부사의해탈묘문(不思議解脫妙門)에 들어가니,
이 때문에 “모든 번뇌를 녹여서 단번에 부사의해탈에 들어간다[銷融頓入不思議]고 한 것이다.”
【原文】 ‘악언을 관함[觀惡言]’에서부터 ‘선지식(善知識)이로다’까지
【琪注】 귀로 악언을 듣고도 진심(瞋心)을 일으키지 않으면 곧바로 정(定)과 혜(慧)의 힘을 성취하여 6적(賊)에게 가보를 도둑맞지 않고 공덕과 법재(法財)가 이로부터 증장된다.
그렇다면 저 훼방하는 사람이 반대로 나에게 선지식이 됨을 알 수 있다.
‘악언을 듣는다[聞惡言]’고 말하지 않고 ‘악언을 관한다[觀惡言]’고 말한 것은 6근(根)의 상호 작용이기 때문이다.
우리 부처님ㆍ세존께서 성도하는 날에 많은 무리의 마(魔)가 다투어 일어났는데,
여래께서 이 무리들을 불쌍하고 가엾게 여겨서 즉시 자심삼매(慈心三昧)에 들어갔다.
이때 마군의 무리가 끝내 부처님을 해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만덕(萬德)의 장엄과 정혜(定慧)의 공덕을 성취한 것이다.
【原文】 참는 마음은 허깨비와 같고[忍心如幻]
【事實】 부대사(傅大士)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참는 마음[忍心]은 허깨비나 꿈과 같고,
욕된 경계[辱境]는 거북이 털과 같으니,
항상 이 도를 닦을 수 있으면
액난을 만나도 더욱 견고해진다네.
【原文】 제바달다(提婆達多)가 직접 가르치고[親授]
【事實】 『법화경(法華經)』의 「제바달다품(提婆達多品)」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제바달다 선지식 때문에
지금 내가 6바라밀(波羅蜜)과 자비희사(慈悲喜捨)와 32상(相) 80종호(種好)와 자마금색(紫磨金色)과
10력(力)ㆍ4무소외(無所畏)ㆍ4섭법(攝法)ㆍ18불공법(不共法)ㆍ신통과 도력을 갖추고서
등정각(等正覺)을 이루어 널리 중생을 제도하였으니,
이것이 모두 제바달다 선지식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모든 사부대중에게 고하기를
‘제바달다는 이후에 무량겁을 지나면 반드시 성불을 하리니,
그 명호(名號)를 천왕여래(天王如來)라 할 것이다……’고 하였다.”
【原文】 ‘비방으로 인해(원망과 친함을 일으키지 않고)[不因訕謗]’에서부터 ‘자비와 인욕의 힘[慈忍力]’까지
【琪注】 만약 앞에서 말한 비방하고 해치는 말을 나에게 이르지 않도록 하면
즉시 선과 악의 소리가 모두 들을 수 없다는 것을 요달한다.
비유하면 마치 바람이 나무 꼭대기를 지나갈 때
다만 그 소리만을 듣고 선과 악의 소리에 대해 분별을 일으키지 않는 것과 같다.
이렇게 하면 원수와 친한 이에게 평등한 마음을 일으켜서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의 4무량심(無量心)을 성취할 수 있다.
그러면 순경계와 역경계를 만날 때마다 항상 평등한 마음으로 편안하고 자재하여 걸림이 없다.
만약 이와 같지 못하다면
무엇 때문에 내가 무생자인(無生慈忍)과 도력을 나타내겠는가.
【原文】 일찍이 유사를 건너고[曾渡流沙]
【事實】 어떤 스님이 법천(法泉) 스님에게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라고 묻자,
스님께서 답하기를 “구름을 뚫고 조도(鳥道)를 오르며,
지팡이 짚고 유사(流沙)를 지나는 것이니라.”
【原文】 무생임을 스스로 증명하여[無生自證]
【事實】 『오문선경(五門禪經)』에서 말하기를
“모든 중생에 대해 인욕하면서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면,
이것을 중생인(衆生忍)이라고 한다.
중생인을 얻은 사람은 쉽게 법인(法忍)을 얻는다”고 하였다.
법인을 얻은 사람은
이른바 “제법(諸法)이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필경공(畢竟空)의 모습임을 능히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이 법인을 무생인이라고 한다.
【原文】 ‘종지도 통달하고[宗亦通]’에서부터 ‘설법도 통달함이여[說亦通]’까지
【琪注】 종통(宗通)은 즉 법통(法通)이다.
법은 언설(言說)이 아니고 언설은 법이 아니다.
운문(雲門) 스님이 말하기를 “동해의 잉어를 한 방망이로 후려치니 물동이를 뒤엎은 듯이 비가 쏟아지네”라고 하였다.
천의(天衣) 스님이 말하기를 “산승이 불전을 뒤엎자 모든 사람 짚신을 거꾸로 신네”라고 하였다.
또 청평(靑平) 스님은 흙을 날랐고,
귀종(歸宗) 스님은 돌을 끌었으며,
덕산(德山) 스님은 학인이 문에 들어오면 곧바로 몽둥이질을 했고,
임제(臨際) 스님은 학인이 문에 들어오면 곧바로 고함을 질렀다.
이처럼 자비를 드리움에 만약 깨달은 마음이 없었다면 어떻게 밝힐 수 있었겠는가.
모름지기 종지(宗旨)를 환하게 밝히고 본원(本源)을 깊이 통달해서 당장에 종통을 밝힘이 원교[圓]나 점교[漸]와는 같지 않으니,
이 때문에 종통(宗通)이라고 말한 것이다.
설통(說通)은 즉 의통(義通)이다.
『십이부경(十二部經)』을 훌륭하게 강설할 수 있고,
명상(明相)과 법수(法數)를 하나하나 요달해 알아서 의심이나 오류가 없으니,
그러므로 설통(說通)이라고 말한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종지도 통달하고 설법도 통달함이여’라고 말한 것은 법과 뜻[義]을 쌍으로 통달한 것이니,
이것을 모두 통달한 사람을 얻기는 지극히 어렵다.
그런데 법문의 후진(後進)들은 그 종지를 밝히지 못하고 서로 시비를 한다.
전(傳)에서 말하기를 “서천(西天)에서는 하천을 나누어서 물을 마시고,
이곳 중국에서는 선사와 강사가 서로를 비난한다”고 하였으니,
모두 법과 뜻의 두 문[法意二門]을 밝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규봉(圭峯) 스님은 말하기를 “경(經)은 먹줄과 같아서 삿되고 바른 것을 판정한다.
먹줄은 목수가 아니지만 목수는 반드시 먹줄을 의지해야만 한다.
경(經)과 논(論)이 선은 아니지만 참선하는 사람은 반드시 경론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였다.
고덕(古德)은 말하기를 “요즘 사람들은 옛날의 가르침을 보면서도 마음속에 시끄러움을 면하지 못한다.
만약 마음속의 시끄러움을 면하려면 반드시 옛날의 가르침을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전(傳)에서 말하기를 “경(經)은 부처님의 말씀이고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다.
모든 부처님의 마음과 말씀은 반드시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영가(永嘉)대사는 처음에 천태지자(天台智者)의 교관(敎觀)을 모아서 듣고,
후에 지견(知見)을 발명(發明)하여 조계 육조(曺溪六祖)에게 가서 인가를 받았다.
그래서 이 종지를 깊이 밝혔기 때문에 ‘종지도 통달하고 설법도 통달함이여’라고 말한 것이다.
【原文】 마갈타국은 그 해[摩竭當年]에
【事實】 『서역기(西域記)』에서 말하기를 “옛날에 여래께서는 마갈타국에서 처음으로 정각(正覺)을 이루셨는데,
범왕(梵王)이 칠보당(七寶堂)을 건립하고 제석은 칠보좌를 건립하였다.
부처님께서 그 위에 앉아서 7일 동안 이 일을 사유하셨다”고 하였는데,
그 의미가 엄가(揜家)의 고사와 같다.
마갈타(摩竭陀)는 이곳 중국말로는 문물국[文物國]이라고 한다.
【原文】 문수가 늙은 유마를 거꾸러뜨리니[文殊撞倒老維摩]
【事實】 설두(雪竇) 스님이 게송으로 말하였다.
애닯다,
유마 늙은이여,
자비로 부질없이 번뇌를 일으켰구나.
7불(佛)과 조사(祖師)가 왔더라도
그 때에 문득 거꾸러졌으니
금모(金毛)를 거꾸러뜨리지 않으면
사자(師子)가 토설할 곳 없도다.
【原文】 울음을 그치게 하는 황엽[止啼黃葉]이
【事實】 비유하면 어린아이가 울 때
부모가 즉시 버드나무의 노란 잎을 주면서 말하기를
“울지 마라. 울지 마라.
내가 너에게 금을 주겠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어린 아이가 나뭇잎을 보고 진짜 금이라는 생각을 일으켜서
문득 눈물을 그치고 울지 않지만,
그러나 이 버드나무 잎사귀는 실제로는 금이 아니다.
이 고사는 『열반경』에 나온다.
【原文】 정과 혜는 완전하게 밝아서 공에 막히지 않도다[定慧圓明不滯空]
【琪注】 인지(因地)에서는 지관(止觀)이라 하고 과지(果地)에서는 정혜(定慧)라 하는데,
이것이 둘이 아님[不二]을 원명(圓明)이라고 한다.
완전하게 밝은 성품은 소승인(小乘人)이 단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이 때문에 ‘공에 막히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실로 모든 중생이 무량겁 이래로 무명 번뇌에 취해서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오직 무명의 혼침과 산란이 병이 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성인께서 지관의 두 가지 법을 세워 치료하신 것이다.
즉 지(止)로서 산란을 그치게 하면 산란에 즉해서도 고요하고,
관(觀)으로 혼침을 관하면 혼침에 즉해서도 밝다.
그렇다면 혼침과 산란이 전환되어 정(定)과 혜(慧)의 두 법(法)이 된다.
정과 혜가 둘이 아닌 것을 원명(圓明)이라고 하니,
이 원명은 한 가지 법[一法]이다.
이 한 가지 법이 모든 부처님의 공덕이고 한량없는 법재(法財)로서 미묘한 작용이 끝이 없으니,
이는 모두 원명의 화장해(華藏海) 가운데서 수용(受用)하는 것이다.
【原文】 ‘지금 나만 통달하였을 뿐 아니라[非但我今]’에서부터 ‘본체도 모두 같도다[體皆同]’까지
【琪注】 영가 진각(永嘉眞覺) 스님 스스로 말하기를
“지금 나 혼자만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완전하고 밝은 법성(法性)을 깨달은 것이 아니라,
항하사(恒河沙) 모래알 수와 같은 모든 부처님에 이르기까지도 완전하고 밝은 각체(覺體)는 모두 같다”고 하였다.
이 때문에 경에서 말하기를
“오직 나만이 이 상(相)을 아는 것이 아니라,
시방의 모든 부처님도 마찬가지다”라고 하였다.
항하사 모래[恒沙]라고 한 것은 비유로부터 이름을 얻은 것이다.
서천축(西天竺)에 강이 있는데 이름이 항하이다.
이 강은 사방 40리이고 그 가운데 모래가 있는데,
모래가 미세하여 마치 밀가루와도 같다.
세존께서 설법하실 때는 대부분 이 강에 있는 모래로 그 수량을 비교하셨다.
지금 영가 스님은 경전에 의거해서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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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인이나 어떤 직(職)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사람을 말한다.
○ [pt op tr]
Lab value 불기2564/03/01/일/20:31
[오래된 조각글재정리 안내]
☎잡담☎ = 순전한 잡담부분
● = 논의부분
Lab value 불기2563/01/01/
『남명천화상송증도가사실』은
남명 법천 스님과 관련된 내용이다.
그런데 첫 부분에 6 조스님과 나눈 대화 내용이 나온다.
일반적으로 이런 대화를 살피다 보면
어떤 넌센스 대화를 주고 받는 것처럼 여기기 쉽다.
그런데 여기에는 사정이 있다.
본 바탕인 진여 실재 등은 본래 언설로 표현할 수 없다.
그런데 그런 사정을 언설을 통해 나타내려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현실에서 행하는 언설 분별내용을 본 바탕에 얻을 수 없다는 사정을
그처럼 언설로 나타내기도 한다.
그런데 어떤 경우는 세속의 분별을 바탕으로 세속적인 내용을 언설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래서 각 경우마다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경우도 있다.
그런데 그 배경 사정만 기본적으로 이해하면
각 경우마다 맥락을 통해 내용을 살필 수 있다.
>>>
대사는 도착하던 날 마침 6조께서
법상에 앉아 법문을 했는데,
선상(禪床)을 세 번 돌고 석장을 한 번 내리치면서
그 앞에 우뚝 섰다.
6조가 말했다.
"무릇 사문은 3천 가지 위의[三千威儀]와
8만 가지 세행[八萬細行]을 구비해서
하나하나의 행(行)에 이지러짐이 없어야 하는데,
대덕(大德)은 어느 곳에서 왔기에
크나큰 아만(我慢)을 일으키는가?”
대사가 말했다.
"태어나고 죽는 일이 중대하니,
무상(無常)하고 신속합니다.”
6조가 말했다.
"무엇 때문에 무생(無生)을 체득해서
신속함이 없는 도리를 깨치지 못하는가?”
대사가 대답했다.
"체득하니 곧 무생이라서
본래 신속함이 없음을 요달했습니다.”
6조가 말했다.
"그러하고 그러하도다.”
잠깐 사이에 예를 올리고 하직 인사를 드리자,
6조가 말했다.
"돌아가는 일이 중대하고 신속한 것이더냐?”
대사가 대답했다.
"본래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데
어찌 신속함이 있겠습니까?”
6조가 물었다.
"움직이지 않음을 누가 아는가?”
대사가 말씀드렸다.
"스님께서 스스로 분별(分別)을 일으키고 계십니다.”
6조가 말했다.
"그대가 무생의 뜻[無生意]를 깊이 체득했도다.”
대사가 대답했다.
"무생인데 어찌 의식[意]이 있겠습니까?”
6조가 말했다.
"의식이 없다면 어떤 것이 분별을 일으키는가?”
대사가 대답했다.
"분별하더라도 의식이 하는 것은 아닙니다.”
6조께서 찬탄하였다.
"훌륭하고 훌륭하도다.”
>>>
◈Lab value 불기2563/01/01 |
그러나 일반적으로 대장경을 즐겨 대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
♥ 잡담 ♥2563년 연구방향 -경율논 코너신설과 니르바나 무복수지작전 종전에도 니르바나 행복론 편집을 기획한 적이 있다.
대장경이 하나 뽑혀 잠깐 살피고 왔다.
|
문서정보 ori
http://buddhism007.tistory.com/5316#8150 |
-- 아래에 조각글 작성시 휴식시점에 붙인 노래가사,사진,풍광,예술작품 자료를 편집상 옮겨 붙입니다.--
mus0fl--FRANCE GALL - Riste.lrc
▼ 2016_1111_165930_nikon_ar44.jpg
○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John Singer Sargent-portrait-of-james-carroll-beckwith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Starr_080103-1192_Begonia_sp.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100_hryvnia_2005_front
♥테리걸 Glenn Mckimmin
○ [▼]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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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us0fl--Michel Berger - Mon piano danse.lrc
▼ 2016_1119_131302_nikon_ab50.jpg
○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Katsushika-Hokusai-drawing-of-seated-nobleman-in-full-costume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Astrophytum_flower_208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boscastle-cornwall
♥Camargo ,Spain
○ [▼]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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