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사분아비담심론_K0950_T1541_008
Jacques Dutronc - Camisole
Gilbert Becaud - Les Creatures De Reve
Renan Luce - Ridicule
● [pt op tr] fr sfed--중사분아비담심론_K0950_T1541.txt ☞중사분아비담심론 제8권
몇 가지는 과이면서 또한 과도 있고 몇 가지는 과도 아니면서 또한 과가 있는 것도 아닌가?
몇 가지는 감각(受 : 有執受)이 있고 몇 가지는 감각이 없는가[無執受] ,
몇 가지는 4대로 만들어진 것이고 몇 가지는 4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몇 가지는 위가 있고[有上]
몇 가지는 위가 없는가[無上] ,
몇 가지는 유(有)이고 몇 가지는 유가 아닌가,
몇 가지는 인(因)과 상응하고 몇 가지는 인과 상응하지 않는가?
6선처(善處)가 있어서 서로 포섭하기도 하니 착한 물질[色] 과 느낌[受] ㆍ생각[想] ㆍ행위[行] ㆍ의식[識] 과 수멸(數滅 : 擇滅)이다.
[??? 이하는 모두 질문 내용이고 【문】-【답】이 이뤄지는 내용이 아님에 주의]
선처(善處)에 5계가 속하는 것인가,
5계에 선처가 속하는 것인가?
5불선(不善處)가 있어서 서로 속하기도 하니,
불선의 물질과 느낌ㆍ생각ㆍ행위ㆍ의식이다.
불선처(不善處)에 5계가 속하는 것인가,
5계에 불선처가 속하는 것인가?
7무기처(無記處)가 있어서 서로 속하기도 하니,
무기의 물질과 무기의 느낌ㆍ생각ㆍ행위ㆍ의식과 그리고 허공(虛空)ㆍ비수멸(非數滅 : 非擇滅)이다.
무기처(無記處)에 5계가 속하는 것인가,
5계에 무기처가 속하는 것인가?
3루처(漏處)가 있어서 서로가 속하기도 하니,
욕루(慾漏)ㆍ유루(有漏)ㆍ무명루(無明漏)이다.
누처(漏處)에 5계가 속하는 것인가,
5계에 누처가 속하는 것인가?
5유루처(有漏處)가 있어서 서로가 속하기도 하니,
유루의 물질과 유루의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이다.
유류처(有漏處)에 5계가 속하는 것인가,
5계에 유류처가 속하는 것인가?
6무루(無漏處)가 있어서 서로가 속하기도 하니,
무루의 물질과 무루의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과 그리고 수멸이다.
무루처(無漏處)에 5계가 속하는 것인가,
5계에 무루처가 속하는 것인가?
이 5계는 몇 가지는 과거이고 몇 가지는 미래이고 몇 가지는 현재이며,
몇 가지는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고 현재도 아닌가,
몇 가지는 선(善)이고 몇 가지는 불선(不善)이며 몇 가지는 무기(無記)인가,
몇 가지는 욕계에 매인 것[欲界繫] 이고 몇 가지는 색계에 매인 것[色界繫] 이며 몇 가지는 무색계에 매인 것[無色界繫] 이고 몇 가지는 매이지 않은 것[不繫] 인가,
몇 가지는 학(學)이고 몇 가지는 무학(無學)이며 몇 가지는 학도 무학도 아닌가[非學非無學] ?
몇 가지는 견도에서 끊어야 할 것[見斷] 이고 몇 가지가 수도에서 끊어야 할 것[修斷] 이며 몇 가지는 끊을 것이 아닌가[不斷] ,
몇 가지가 마음[心] 이고 몇 가지는 심법(心法 : 心所)이며,
몇 가지는 믿음이 아니고 몇 가지는 심법이 아니며,
몇 가지는 마음과 상응하고 몇 가지는 오직 마음일 뿐인가?
몇 가지는 마음이 따라 옮겨 가면서[心隨轉]
느낌[受] 과 상응하는 것이 아니고 몇 가지는 느낌과 상응하며 마음이 따라 옮겨 가는 것이 아니며,
몇 가지는 마음이 따라 옮겨 가며 또한 느낌과 상응하고,
몇 가지는 마음이 따라 옮겨 가는 것이 아니요 또한 느낌과도 상응하는 것이 아닌가?
몇 가지가 마음이 따라 옮겨 가며 생각[想] ㆍ행위[行] 와 상응하는 것이 아니고 몇 가지는 생각과 행위에는 상응하면서 마음이 따라 옮겨 가는 것이 아니며,
몇 가지는 마음을 따라 옮겨 가면서 또한 생각과 행위에는 상응하고 몇 가지는 마음이 따라 옮겨 가는 것이 아니며,
또한 생각과 행위와도 상응하는 것이 아닌가?
몇 가지는 각(覺 : 尋)이 따라 옮겨 가면서 관(觀 : 伺)과는 상응하지 아니하고 몇 가지는 관과 상응하면서 각이 따라 옮겨 가지 아니며,
몇 가지는 각이 따라 옮겨 가면서 또한 관과도 상응하고 몇 가지는 각이 따라 옮겨 가지 아니하면서 또한 관과도 상응하는 것이 아닌가?
몇 가지는 견(見)이면서 견처(見處)는 아니고 몇 가지는 견처이면서 견은 아니며,
몇 가지는 견이면서도 또한 견처이고 몇 가지는 견도 아니면서 또한 견처도 아닌가?
몇 가지는 신견(身見)의 인(因)이면서 신견이 아니고 몇 가지는 신견이면서 신견의 인이 아니며,
몇 가지는 신견의 인이면서 또한 신견이고 몇 가지는 신견의 인도 아니면서 또한 신견도 아닌가?
몇 가지는 업(業)이면서 업의 보(報 : 異熟)는 아니고 몇 가지는 업의 보이면서 업이 아니며,
몇 가지는 업이면서 또한 업의 보이고 몇 가지는 업이 아니면서 업의 보도 아닌가?
몇 가지는 업이면서 업을 따라 옮겨 가는 것이 아니고 몇 가지는 업을 따라 옮겨 가면서 업이 아니며,
몇 가지는 업이면서 또한 업을 따라 옮겨 가고 몇 가지는 업도 아니면서 또한 업을 따라 옮겨 가는 것도 아닌가?
몇 가지는 만들어진 물질[造色色 : 所造色] 이면서 볼 수 있는 물질[可見色] 이 아니고 몇 가지는 볼 수 있는 물질이면서 만들어진 물질이 아니며,
몇 가지는 만들어진 물질이면서 또한 볼 수도 있는 물질이고 몇 가지는 만들어진 물질도 아니면서 또한 볼 수 있는 물질도 아닌가?
몇 가지는 만들어진 물질이면서 대할 수 있는 물질[有對色] 이고 몇 가지는 대할 수 있는 물질이면서 만들어진 물질이 아니며,
몇 가지는 만들어진 물질이면서 또한 대할 수도 있는 물질이고 몇 가지는 만들어진 물질도 아니고 또한 대할 수 있는 물질도 아닌가?
몇 가지는 심히 깊기 때문에 알기 어렵고 몇 가지는 알기 어렵기 때문에 심히 깊은가?
몇 가지는 선(善)이면서 선의 인(因)이 아니고,
몇 가지는 선의 인이면서 선이 아니며,
몇 가지는 선의 인이면서 또한 선이고,
몇 가지는 선도 아니면서 또한 선의 인도 아닌가?
몇 가지는 불선(不善)이면서 불선의 인(因)이 아니고,
몇 가지는 불선의 인이면서 불선이 아니며,
몇 가지는 불선이면서 또한 불선의 인이고 몇 가지는 불선도 아니면서 또한 불선의 인도 아닌가?
몇 가지는 무기(無記)이면서 무기의 인(因)이 아니고,
몇 가지는 무기의 인이면서 무기가 아니며,
몇 가지는 무기이면서 또한 무기의 인도 아니고 몇 가지는 무기도 아니면서 또한 무기의 인도 아닌가?
몇 가지는 인연(因緣)의 연(緣)이면서 인(因)은 있지 아니하고 몇 가지는 인이 있으면서 인연의 연이 아니며,
몇 가지는 인연의 연이면서 또한 인도 있고 몇 가지는 인연의 연이 아니면서 또한 인이 있는 것도 아닌가?
몇 가지는 차제연(次第緣 : 無等間緣)의 연(緣)이면서 차제(次第)는 아니고 몇 가지는 차제이면서 차제(次第)의 연이 아니며,
몇 가지는 차제연의 연이면서 또한 차제이고 몇 가지는 차제연의 연도 아니면서 또한 차제가 아닌가?
몇 가지는 연연(緣緣 : 所緣緣)의 연(緣)이면서 연이 있는 것이 아니고 몇 가지는 연이 있으면서 연연의 연이 아니며,
몇 가지는 연연의 연이면서 또한 연도 있고 몇 가지는 연연의 연도 아니면서 또한 연이 있는 것도 아닌가?
몇 가지는 증상연(增上緣)의 연(緣)이면서 증상(增上)이 아니고 몇 가지는 증상이면서 증상연의 연이 아니며,
몇 가지는 증상이면서 또한 증상연의 연이고 몇 가지는 증상연의 연도 아니면서 또한 증상도 아닌가?
몇 가지는 유(流 : 瀑流)이면서 수류(隨流 : 順瀑流)가 아니고 몇 가지는 수류이면서 유가 아니며,
몇 가지는 유이면서 또한 수류이고 몇 가지는 유도 아니고 또한 수류도 아닌가?
이와 같이 온갖 수다라(修多羅)에서 널리 묻는다.
이 우바새의 5계는 몇 가지가 형색[色] 이 있고 몇 가지가 형색이 없는가?
【답】 이제 대답하겠다.
모두가 곧 형색이 있다.
한 가지는 볼 수 없고 네 가지는 분별해야 하니,
이를테면 이 네 가지는 작용하는 것(作 : 表)이면 볼 수 있고 작용함이 없으면(無作 : 無表) 볼 수 없다.
그 모든 것이 작용하는 것이면 대할 수 있고 작용함이 없으면 대할 수 없다.
모든 것은 곧 유루(有漏)이다.
모든 것은 곧 유위(有爲)이다.
모든 것은 곧 보(報 : 異熟)가 있다.
모든 것은 인연(因緣)으로부터 생기며 세간에 속한다.
모든 것은 곧 이름[名] 에 속한다.
모든 것은 곧 외입(外入 : 外處)에 속한다.
모든 것은 곧 지혜로 아는 것[智知 : 知遍知所遍知] 이다.
모든 것은 곧 단지로 아는 것[斷知知 : 斷遍知所遍知] 이다.
모든 것은 곧 끊어야 한다.
모든 것은 곧 닦아야 한다.
모든 것은 곧 물들어 더럽지 않다[不穢汚 : 不染汚] .
모든 것은 곧 과(果)이면서 또한 과가 있다.
모든 것은 곧 느낌이 없다[不受 : 無執受] .
모든 것은 곧 4대(大)로 만들어진다.
모든 것은 곧 위[上] 가 있다.
모든 것은 곧 유(有)이다.
모든 것은 곧 인과 상응하지 않는다[因不相應] .
선처(善處)의 한 가지 일부분[少分] 이 5계를 포섭하고 5계도 역시 선처의 한 가지 일부분을 포섭한다.
불선처(不善處)는 피차가 서로 포섭하지 않는다.
무기처(無記處)는 피차가 서로 포섭하지 않는다.
누처(漏處)는 피차가 서로 포섭하지 않는다.
유루처(有漏處)의 한 가지 일부분이 5계를 포섭하고 5계도 역시 유루처의 한 가지 일부분을 포섭한다.
무루처(無漏處)는 피차가 서로 포섭하지 않는다.
모두가 혹은 과거이기도 하고 미래이기도 하며 혹은 현재이기도 하다.
모두가 곧 선(善)이다.
모두가 곧 욕계에 매인 것[欲界繫] 이다.
모두가 곧 학도 아니고 무학도 아니다[非學非無學] .
모두가 곧 수도에서 끊어야 할 것[修所斷] 이다.
모두가 곧 마음도 아니고[非心]
심법(心法 : 心所)도 아니며 마음과 상응하는 것[心相應] 도 아니다.
모두가 곧 마음이 따라 옮겨 가는 것도 아니며[非心隨轉]
느낌과 상응하는 것도 아니다[非受相應] .
모두가 곧 마음이 따라 옮겨 가는 것도 아니요,
생각[想] 과 지어감[行] 과도 상응하는 것이 아니다.
모두가 곧 각(覺 : 尋)이 따라 옮겨 가는 것도 아니며 관(觀 : 伺)과 상응하는 것도 아니다.
모두가 곧 견처(見處)이되 견(見)은 아니다.
모두가 곧 신견(身見)의 인(因)도 아니고 신견 또는 그 인도 아니다.
모두가 곧 업(業)이며 업의 보[業報 : 業異熟] 는 아니다.
모두가 곧 업이며 업이 따라 옮겨 가는 것이 아니다.
한 가지는 만들어진 물질이면서 볼 수 있는 물질은 아니며 네 가지는 분별해야 하니,
이를테면 네 가지에서 지은 것[作] 이면 그것은 만들어진 물질이면서 볼 수 있는 물질이거니와 만일 지은 것이 아니면[無作]
그것은 만들어진 물질이면서도 볼 수 있는 물질은 아니다.
모두에서 만일 지은 것이면 이는 곧 만들어진 물질이면서 대할 수 있는 물질이거니와 만일 지은 것이 없으면 그것은 만들어진 물질이면서도 대할 수는 없다.
모두가 곧 심히 깊기 때문에 알기 어렵고 알기 어렵기 때문에 심히 깊다.
모두가 곧 선(善)이면서 또한 선의 인(因)이다.
모두가 불선(不善)도 아니요 또한 불선의 인(因)도 아니다.
모두가 곧 무기(無記)도 아니고 또한 무기의 인(因)도 아니다.
모두가 곧 인연(因緣)의 연(緣)이면서 또한 인(因)도 있다.
모두가 차제(次第 : 等無間)도 아니요 또한 차제연(次第緣 : 等無間緣)의 연도 아니다.
모두가 곧 연연(緣緣 : 所緣緣)의 연이면서 연(緣 : 所緣)이 있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곧 증상연(增上緣)의 연이며 그리고 증상(增上)도 있다.
모두가 곧 수류(隨流 : 順瀑流)이면서 유(流 : 瀑流)는 아니다.
● 4불괴정(不壞淨)
정(淨)이라 함은 4불괴정(不壞淨)이다.
【문】 어떤 것이 4불괴정인가?
【답】 불불괴정(佛不壞淨)과 법불괴정(法不壞淨)과 승불괴정(僧不壞淨)과 성계불괴정(聖戒不壞淨)을 말한다.
【문】이 4불괴정은 몇 가지는 형색이 있고 몇 가지는 형색이 없는가?
【답】 한 가지는 형색이 있고 세 가지는 형색이 없다.
모두가 볼 수 없다.
모두가 곧 대할 수 없다.
모두가 곧 무루이다.
모두가 곧 유위이다.
모두가 곧 보(報 : 異熟)가 없다.
모두가 인연(因緣)을 따라 생기며 세간에 속한다.
한 가지는 물질[色] 에 속하고 세 가지는 이름[名] 에 속한다.
모두가 곧 외입(外入)에 속한다.
모두가 곧 지(智 : 智遍知)로 아는 것이다.
모두가 곧 단지(斷知 : 斷遍知)로 아는 것이 아니다.
모두가 곧 끊지 않아야 한다.
모두가 곧 마땅히 닦아야 한다.
모두가 곧 물들지 않는다.
모두가 곧 과(果)이면서 또한 과도 있다.
모두가 곧 감각이 없다[不受] .
한 가지는 4대(大)로 만들어진 것이고 세 가지는 4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모두가 곧 위[上] 가 있다.
모두가 곧 있는 것[有] 이 아니다.
한 가지는 인(因)과 상응하지 않고 세 가지는 인과 상응한다.
선처의 두 가지 일부분이 4불괴정을 포섭하고 4불괴정도 선처의 두 가지 일부분을 포섭한다.
불선처(不善處)는 피차가 서로 포섭하지 않는다.
무기처(無記處)는 피차가 서로 포섭하지 않는다.
누처(漏處)는 피차가 서로 포섭하지 않는다.
유루처(有漏處)는 피차가 서로 포섭하지 않는다.
무루처(無漏處)의 한 가지 것과 한 가지의 일부분이 4불괴정을 포섭하고 4불괴정도 무루처의 한 가지 것과 한 가지의 일부분을 포섭한다.
모두가 혹은 과거이기도 하고 미래이기도 하며 혹은 현재이기도 하다.
모두가 곧 선(善)이다.
모두가 곧 매이지 않는 것[不繫] 이다.
【문】 불괴정은 몇 가지가 학(學)이고 몇 가지가 무학(無學)이며 몇 가지가 학도 무학도 아닌 것[非學非無學] 인가?
【답】 모든 것은 마땅히 분별해야 한다.
이를테면 불불괴정은 혹은 학이기도 하고 혹은 무학이기도 한다.
어떤 것이 학인가?
배울 것이 있는 사람[學] 의 의사유(意思惟 : 作意)와 상응하는 불불괴정이다.
어떤 것이 무학인가?
배울 것이 없는 사람[無學] 의 의사유와 상응하는 불불괴정이다.
불불괴정에서와 같이 법불괴정과 승불괴정도 이와 같다.
성계불괴정은 혹은 학이기도 하고 혹은 무학이기도 하다.
어떤 것이 학인가?
배울 것이 있는 사람의 신업(身業)과 구업(口業)이다.
어떤 것이 무학인가?
배울 것이 없는 사람의 신업과 구업이다.
모두가 곧 끊을 것이 아니다.
한 가지는 마음도 아니고 심법도 아니고 마음과 상응하는 것도 아니며,
세 가지는 심법이어서 마음과 상응한다.
한 가지는 마음이 따라 옮겨 가며 느낌과 상응하는 것은 아니며,
세 가지는 마음도 따라 옮겨 가며 또한 느낌과도 상응한다.
한 가지는 마음이 따라 옮겨 가면서 생각ㆍ지어감과는 상응하지 아니하며 세 가지는 마음도 따라 옮겨 가면서 또한 생각ㆍ지어감과도 상응한다.
그 제 성품[自性] 만은 제외된다.
【문】 불괴정은 몇 가지가 각(覺 : 尋)이 따라 옮겨 가면서 관(觀 : 伺)과는 상응하지 아니하는가?
【답】 모두는 마땅히 분별해야 한다.
불불괴정은 혹은 유각유관(有覺有觀 : 有尋有伺)이기도 하고 혹은 무각유관(無覺有觀 : 無尋有伺)이기도 하며 혹은 무각무관(無覺無觀 : 無尋無伺)이기도 하다.
어떤 것이 유각유관인가?
유각유관의 의사유(意思惟 : 作意)와 상응하는 불불괴정이다.
어떤 것이 무각유관인가?
무각유관의 의사유와 상응하는 불불괴정이다.
어떤 것이 무각유관인가?
무각유관의 의사유와 상응하는 불불괴정이다.
불불괴정에서와 같이 법불괴정과 승불괴정도 이와 같다.
성계불괴정은 혹은 각(覺)이 따라 옮겨 가면서 관(觀)과는 상응하지 않기도 하고 혹은 각이 따라 옮겨 가지도 아니하면서도 또한 관과 상응하지 아니하기도 한다.
어떤 것이 각이 따라 옮겨 가면서 관과는 상응하는 것이 아닌가?
각이 따라 옮겨 가는 신업과 구업이다.
나머지는 각이 따라 옮겨 가는 것도 아니요,
또한 관과 상응하는 것도 아니다.
모두가 견(見)도 아니고 또한 견처(見處)도 아니다.
모두가 신견(身見)의 인(因)도 아니고 신견 또는 그 인도 아니다.
한 가지는 업(業)이면서 업의 보[業報] 도 아니며 세 가지는 업도 아니요,
또한 업의 보도 아니다.
한 가지는 업이면서 또한 업이 따라 옮겨 가며 세 가지는 업이 따라 옮겨 가면서 업은 아니다.
한 가지는 만들어진 물질이면서 볼 수 있는 물질은 아니며,
세 가지는 만들어진 물질도 아니요 또한 볼 수 있는 물질도 아니다.
한 가지는 만들어진 물질이면서 대할 수 있는 물질은 아니며,
세 가지는 만들어진 물질도 아니요 또한 대할 수 있는 물질도 아니다.
모두가 매우 깊기 때문에 알기 어렵고 알기 어렵기 때문에 매우 깊다.
모두가 선(善)이며 또한 착한 인(因)이다.
모두가 불선(不善)도 아니요,
또한 불선의 인(因)도 아니다.
모두가 무기(無記)도 아니요,
또한 무기의 인(因)도 아니다.
모두가 인연(因緣)의 연(緣)이며 또한 인(因)도 있다.
【문】 불괴정은 몇 가지가 차제(次第)이면서 차제연(次第緣 : 無等間緣)의 연은 아닌가?
【답】 한 가지는 차제도 아니며 또한 차제연의 연도 아니고 세 가지는 분별해야 한다.
불불괴정은 혹은 차제이면서 차제연의 연은 아니기도 하니,
삼구(三句)로 만들어야 한다.
차제이면서 차제연의 연은 아니라 함은,
미래에 반드시 눈앞에 나타나게 될 불불괴정이다.
차제이면서 또한 차제연의 연이라 함은 과거와 현재의 불불괴정이다.
차제도 아니며 또한 차제연의 연도 아니라 함은,
미래에 반드시 눈앞에 나타나게 될 불불괴정을 제외한 나머지 미래의 불불괴정이다.
불불괴정에서와 같이 법불괴정과 승불괴정도 이와 같다.
한 가지는 연연(緣緣 : 所緣緣)의 연(緣)이면서 연이 있는 것은 아니며,
세 가지는 연연의 연이면서 또한 연도 있다.
모두가 증상연(增上緣)의 연(緣)이며 그리고 증상(增上)도 있다.
모두가 유(流)도 아니도 또한 수류(隨流)도 아니다.
● 4사문과(沙門果)
과(果)라 함은 4사문과(沙門果)를 말하는 것이다.
【문】 어떤 것이 4사문과인가?
【답】 수다원과(須陀洹果)에서부터 아라한과(阿羅漢果)까지를 말한다.
【문】 이 4사문과는 몇 가지가 형색이 있고 몇 가지가 형색이 없는가?
【답】 사문과에 속한 신업과 구업은 형색이 있는 것이고,
나머지는 형색이 없다.
모두가 볼 수 없는 것이다[不可見] .
모두가 대할 수 없는 것이다[無對] .
모두가 무루(無漏)이다.
【문】 사문과는 몇 가지가 유위이고 몇 가지가 무위인가?
【답】 모두를 마땅히 분별해야 한다.
이를테면 수다원의 과위는 혹은 유위이기도 하고 혹은 무위이기도 하다.
어떤 것이 유위인가?
수다원의 유위의 5음(陰 : 五蘊)이다.
어떤 것이 무위인가?
수다원과에 속한 수멸(數滅)이다.
수다원과에서와 같이 아라한과에 이르기까지도 이와 같다.
모두가 보(報)가 없다.
사문과가 만일 유위이면 인연(因緣)으로 생기고 세간에 속하거니와,
만일 무위이면 인연으로부터 생기는 것도 아니요 세간에 속한 것도 아니다.
사문과에 속한 구업ㆍ구업은 곧 물질[色] 에 속하거니와 나머지는 이름[名] 에 속한다.
사문과에 속한 심(心)ㆍ의(意)ㆍ식(識)은 곧 내입(內入)에 속하거니와 나머지는 곧 외입(外入)에 속한다.
모두가 지(智 : 智遍知)로 아는 것이다.
모두가 단지(斷知 : 斷遍知)로 아는 것이 아니며,
그리고 끊지 않아야 한다.
만일 유위이면 마땅히 닦아야 하거니와 만일 무위이면 닦지 않아야 한다.
모두가 물들지 않는다.
만일 유위이면 과(果)요 또한 과도 있거니와,
만일 무위이면 그것은 과이면서 과는 있지 않은 것이다.
모두가 감각이 없다[不受] .
사문과에 속한 신업ㆍ구업은 곧 4대(大)로 만들어진 것이고 나머지는 4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만일 유위이면 위[上] 가 있거니와 만일 무위이면 위가 없다.
모두가 유(有)가 아니다.
사문과에 속한 신업ㆍ구업과 심불상응행(心不相應行)과 그리고 수멸(數滅)은 인(因)과 상응하지 않으면 나머지는 인과 상응한다.
선처의 여섯 가지 일부분이 4사문과를 포섭하고 4사문과도 선처의 여섯 가지 일부분을 포섭한다.
불선처(不善處)는 피차가 서로 포섭하지 않는다.
무기처(無記處)는 피차가 서로 포섭하지 않는다.
누처(漏處)는 피차가 서로 포섭하지 않는다.
유루처(有漏處)는 피차가 서로 포섭하지 않는다.
무루처(無漏處)의 여섯 가지 일부분이 4사문과를 포섭하고 4사문과도 무루처의 여섯 가지 일부분을 포섭한다.
만일 유위이면 혹은 과거이기도 하고 혹은 미래이기도 하며 혹은 현재이기도 하거니와,
만일 무위이면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며 현재도 아니다.
모두가 선(善)이다.
모두가 매여 있지 않은 것[不繫] 이다.
【문】 사문과는 몇 가지가 학(學)이고 몇 가지가 무학(無學)이며 몇 가지가 학도 무학도 아닌가?[非學非無學]
【답】 모든 것을 분별해야 한다.
이를테면,
수다원과는 혹은 학이기도 하고 혹은 무학도 아니기도 한다.
어떤 것이 학인가?
수다원의 유위과(有爲果)이다.
어떤 것이 학도 무학도 아니인가?
수다원의 무위과(無爲果)이다.
수다원과에서와 같이 사다함과(斯陀含果)와 아나함과(阿那含果)도 이와 같다.
아라한과는 혹은 무학이기도 하고 혹은 학도 무학도 아니기도 하다.
어떤 것이 무학인가?
아라한의 유위과이다.
어떤 것이 학도 무학도 아닌가?
아라한의 무위의 과이다.
모두가 끊어야 할 것이 아니다.
사문과에 속한 신업ㆍ구업과 심불상응행 그리고 수멸은 마음도 아니고 심법도 아니고 마음과 상응하는 것도 아니거니와,
사문과에 속한 수음(受陰) 상음(想陰)과 그것과 상응하는 행음(行陰)은 곧 심법이면서 마음과도 상응하며 심ㆍ의ㆍ식은 곧 마음일 뿐이다.
【문】 수다원과는 몇 가지가 마음이 따라 옮겨 가면서[心隨]
느낌[受] 과 상응하는 것이 아닌가?
【답】 사구(四句)로 만들어야 한다.
마음이 따라 옮겨 가면서 느낌과는 상응하는 것이 아니기도 하다는 것은 마음이 따라 옮겨 가는 신업 구업과 마음이 따라 옮겨 가는 심불상응행과 느낌이다.
느낌과는 상응하면서 마음이 따라 옮겨 가는 것이 아니기도 하다는 것은 심(心)ㆍ의(意)ㆍ식(識)이다.
마음이 따라 옮겨 가면서 또한 느낌과 상응하기도 하다는 것은 상음과 또 그것과 상응하는 행음이다.
마음이 따라 옮겨 가는 것이 아니며 또한 느낌과 상응하는 것이 아니기도 하다는 것은,
마음이 따라 옮겨 가는 심불상응행을 제외한 나머지 심불상응행과 수멸이다.
수다원과에서와 같이 나아가 아라한과에 이르기까지도 이와 같다.
마치 느낌에서와 같이 생각[想] 과 지어감[行] 도 이와 같으며 그 제 성품은 제외된다.
【문】 수다원과는 몇 가지가 각(覺 : 尋)이 따라 옮겨 가면서 관(觀 : 伺)과는 상응하지 아니하는가?
【답】 사구로 만들어야 한다.
각이 따라 옮겨 가면서 관과 상응하는 것은 아니기도 하다는 것은 각이 따라 옮겨 가는 신업ㆍ구업과 같이 따라 옮겨 가는 심불상응행과 각과 상응하는 관이다.
관과 상응하면서 각이 따라 옮겨 가는 것이 아니기도 하다는 것은 각이다.
각이 따라 옮겨 가면서 또한 관과 상응하기도 하다는 것은 각ㆍ관과 상응하는 심ㆍ심법이다.
각이 따라 옮겨 가는 것도 아니며 또한 관과 상응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은 각이 따라 옮겨 가는 심불상응행을 제외한 나머지 심불상응행과 수멸이다.
수다원과에서와 같이 사다함과도 이와 같다.
아나함과는 혹은 각이 따라 옮겨 가면서 관과 상응하는 것이 아니기도 하니 사구로 만들어야 한다.
각이 따라 옮겨 가면서 관과 상응하는 것이 아니기도 하다는 것은 각이 따라 옮겨 가는 신업ㆍ구업과 각이 따라 옮겨 가는 심불상응행과 그리고 각과 상응하는 관이다.
관과 상응하면서 각이 따라 옮겨 가는 것이 아니기도 하다는 것은 각과 그리고 각과 상응하지 않으며 관과는 상응하는 심ㆍ심법이다.
각이 따라 옮겨 가면서 또한 관과 상응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은 각ㆍ관과 상응하는 심ㆍ심법이다.
각이 따라 옮겨 가는 것도 아니요 또한 관과 상응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은 각이 따라 옮겨 가는 신업ㆍ구업을 제외한 신업ㆍ구업과 각이 따라 옮겨 가는 심불상응행을 제외한 나머지 심불상응행과 그리고 각과 상응하지 않는 관과 또한 각ㆍ관과는 상응하지 아니하는 심ㆍ심법과 수멸이다.
아나함과에서와 같이 아라한과도 이와 같다.
수다원과에 속한 지혜[慧] 는 견(見)이면서 견처(見處)는 아니며 나머지는 견도 아니고 또한 견처도 아니다.
수다원과에서와 같이 사다함과와 아나함과도 이와 같다.
아라한과에 속한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에 속하지 않은 무루의 지혜는 견이면서 견처는 아니요,
나머지는 견도 아니며 또한 견처도 아니다.
모두가 신견(身見)의 인(因)도 아니며 신견도 또한 그 인이 아니다.
사문과에 속한 신업ㆍ구업과 사(思)는 곧 업(業)이면서 업의 보[業報] 는 아니며 나머지는 업도 아니고 또한 업의 보도 아니다.
【문】 수다원과는 몇 가지가 업이면서 업을 따라 옮겨 가는 것이 아닌가?
【답】 사구로 만들어야 한다.
업이면서 업을 따라 옮겨 가는 것은 아니기도 하다는 것은 사업(思業)이다.
업을 따라 옮겨 가면서 업은 아니기도 하다는 것은 수음ㆍ상음ㆍ식음과 그리고 사(思)에 포섭되지 않은 업을 따라 옮겨 가는 행음이다.
업이면서 또한 업을 따라 옮겨 가기도 하다는 것은 업을 따라 옮겨 가는 신업과 구업이다.
업도 아니요,
또한 업을 따라 옮겨 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은 업을 따라 옮겨 가는 심불상응행을 제외한 나머지 심불상응행과 수멸이다.
수다원과에서와 같이,
이에 아라한과에 이르기까지도 이와 같다.
사문과에 속한 신업과 구업은 곧 만들어진 물질[造色色] 이면서 볼 수 있는 물질은 아니며,
나머지는 만들어진 물질도 아니요 또한 볼 수 있는 물질도 아니다.
사문과에 속한 신업ㆍ구업은 곧 만들어진 물질이면서 대할 수 있는 물질은 아니며,
나머지는 만들어진 물질도 아니요 또한 대할 수 있는 물질도 아니다.
모두가 매우 깊기 때문에 알기 어렵고 알기 어렵고 알기 어렵기 때문에 매우 깊다.
사문과가 만일 유위이면 그것은 선(善)이면서 또한 선을 인(因)으로 삼으며,
만일 무위이면 그것은 선이면서 선을 인으로 삼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불선(不善)도 아니요 또한 불선을 인으로 삼는 것도 아니다.
모두가 무기(無記)도 아니요 또한 무기를 인으로 삼는 것도 아니다.
사문과가 만일 유위이면 그것은 인연(因緣)의 연(緣)이요 인(因)도 있거니와,
만일 무위이면 그것은 인연의 연도 아니요 인도 아니다.
【문】 사문과에는 몇 가지가 차제(次第)이고 차제연(次第緣)의 연은 아닌가?
【답】 모두는 마땅히 분별해야 한다.
사문과가 만일 유위이면 혹은 차제이면서 차제연의 연은 아니기도 하니 삼구로 만들어야 한다.
차제이면서 차제연의 연은 아니기도 하니,
미래에 반드시 눈앞에 나타나게 될 심ㆍ심법이다.
차제이면서 또한 차제연의 연이기도 하니,
과거와 현재의 심ㆍ심법이다.
차제도 아니며 또한 차제연의 연도 아니니,
미래에 반드시 눈앞에 나타나게 될 심ㆍ심법을 제외한 나머지 미래의 심ㆍ심법과 그리고 신업ㆍ구업과 심불상응행과 수멸(數滅)이다.
사문과가 만일 유위에 속한 신업ㆍ구업과 심불상응행 그리고 수멸이면 이것은 곧 연연(緣緣)의 연이면서 소연(所緣)이 있는 것은 아니며,
나머지는 곧 연연의 연이면서 또한 소연도 있다.
사문과가 만일 유위이면 그것은 증상연(增上緣)의 연이며 증상(增上)도 있거니와,
만일 무위이면 그것은 증상연의 연이면서 증상은 있지 않다.
모두가 유(流)도 아니고 또한 수류(隨流)도 아니다.
● 4통(通)
【문】 통(通)이라는 것은 4통(通)을 말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4통인가?
【답】 고지통(苦遲通)이 있고 고속통(苦速通)이 있으며,
낙지통(樂遲通)이 있고 낙속통(樂速通)이 있다.
어떤 것이 고지통인가?
미래선(未來禪)ㆍ중간선(中間禪)과 삼무색(三無色)이니 둔근의 도[鈍根道] 이다.
어떤 것이 고속통인가?
미래선ㆍ중간선과 삼무색이니 이근의 도[利根道] 이다.
어떤 것이 낙지통인가?
근본사선(根本四禪)이니 둔근의 도이다.
어떤 것이 낙속통인가?
근본사선이니 이근의 도이다.
【문】 이 4통은 몇 가지가 형색이 있고 몇 가지가 형색이 없는가?
【답】 4통에 속한 신업ㆍ구업은 곧 형색이 있고 나머지는 형색이 없다.
모두가 볼 수 없다.
모두가 대할 수 없다.
모두가 무루이다.
모두가 유위이다.
모두가 보(報 : 異熟)가 없다.
모두가 인연(因緣)을 따라 생기며 세간에 속한다.
4통에 속한 신업ㆍ구업은 곧 물질[色] 에 속하며,
나머지는 이름[名] 에 속한다.
4통에 속한 심(心)ㆍ의(意)ㆍ식(識)은 곧 내입(內入)에 속하며,
나머지는 외입(外入)에 속한다.
모두가 지(智 : 智遍知)로 아는 것이다.
모두가 단지(斷知 : 斷遍知)로 아는 것이 아니며 그리고 끊지 않아야 한다.
모두가 마땅히 닦아야 한다.
모두가 물들지 않는다[不穢汚] .
모두가 과(果)이면서 또한 과가 있다.
모두가 감각이 없다[不受 : 無執受] .
4통에 속한 신업ㆍ구업은 곧 4대(大)로 만들어진 것이요,
나머지는 4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모두가 위가 있다[有上] .
모두가 유(有)가 아니다.
4통에 속한 신업ㆍ구업과 그리고 심불상응행은 인(因)과는 상응하지 않으며 나머지는 인과 상응한다.
선처의 다섯 가지 일부분이 4통을 포섭하고 4통도 선처의 다섯 가지 일부분을 포섭한다.
불선처는 피차가 서로 포섭하지 않는다.
무기처는 피차가 서로 포섭하지 않는다.
누처는 피차가 서로 포섭하지 않는다.
유루처는 피차가 서로 포섭하지 않는다.
무루처(無漏處)의 다섯 가지 일부분이 4통을 포섭하고 4통도 무루처의 다섯 가지 일부분을 포섭한다.
모두가 혹은 과거이기도 하고 혹은 미래이기도 하며 혹은 현재이기도 하다.
모두가 선(善)이다.
모두가 불계(不繫)이다.
【문】 4통은 몇 가지가 학(學)이고 몇 가지가 무학(無學)인가?
【답】 모두는 마땅히 분별해야 한다.
4통은 혹은 학이기도 하고 혹은 무학이기도 하다.
어떤 것이 학인가?
4통에 속한 배울 것이 있는 이[學] 의 5음이다.
어떤 것이 무학인가?
4통에 속한 배울 것이 없는 이[無學] 의 5음이다.
모두가 끊어야 할 것이다.
4통에 속한 신업ㆍ구업과 심불상응행은 마음도 아니고,
심법(心法)도 아니고,
마음과 상응하는 것도 아니며 4통에 속한 수음ㆍ상음과 그것과 상응하는 행음은 곧 심법이면서 마음과 상응하고 심ㆍ의ㆍ식은 곧 마음일 뿐이다.
【문】 4통은 몇 가지가 마음을 따라 옮겨 가면서 느낌[受] 과는 상응하는 것이 아닌가?
【답】사구로 만들어야 한다.
마음을 따라 옮겨 가면서 느낌과 상응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마음을 따라 옮겨 가는 신업ㆍ구업과 마음을 따라 옮겨 가는 심불상응행과 느낌이다.
느낌과 상응하면서 마음을 따라 옮겨 가는 것이 아니기도 하다는 것은 심ㆍ의ㆍ식이다.
마음을 따라 옮겨 가면서 또한 느낌과 상응하기도 하다는 것은 상음과 그리고 그것과 상응하는 행음이다.
마음을 따라 옮겨 가는 것도 아니요 또한 느낌과 상응하기도 하다는 것은 마음을 따라 옮겨 가는 심불상응행을 제외한 나머지 심불상응행이다.
【문】느낌에서와 같이 생각[想] ㆍ지어감[行] 도 이와 같다.
다만 그 제 성품[自性] 은 몇 가지가 각(覺 : 尋)을 따라 옮겨 가면서 관(觀 : 伺)과는 상응하지 아니하는가?
【답】 사구로 만들어야 한다.
각이 따라 옮겨 가면서 관과는 상응하지 않기도 하다는 것은 각을 따라 옮겨 가는 신업ㆍ구업과 각을 따라 옮겨 가는 심불상응행과 그리고 각과 상응하는 관이다.
관과는 상응하면서 각과는 따라 옮겨 가는 것이 아니기도 하다는 것은 각과 그리고 각과 상응하지 않으면서 관과는 상응하는 심ㆍ심법이다.
각이 따라 옮겨 가며 또한 관과 상응하기도 하다는 것은 각ㆍ관과 상응하는 심ㆍ심법이다.
각이 따라 옮겨 가는 것도 아니요 또한 관과 상응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은 각이 따라 옮겨 가는 신업ㆍ구업을 제외한 나머지 신업ㆍ구업과 각을 따라 옮겨 가는 심불상응행을 제외한 나머지 심불상응행과 그리고 각ㆍ관과 상응하는 것이 아닌 심ㆍ심법이다.
고지통에서와 같이 고속통(苦速通)도 이와 같다.
낙지통(樂遲通)은 혹은 각을 따라 옮겨 가면서 관과는 상응하지 아니하기도 하니,
사구로 만들어야 한다.
각을 따라 옮겨 가면서 관과는 상응하지 않기도 하다는 것은 각을 따라 옮겨 가는 신업ㆍ구업과 각을 따라 옮겨 가는 심불상응행 그리고 각과 상응하는 관이다.
관과 상응하면서 각을 따라 옮겨 가는 것은 아니기도 하다는 것은 각과 그리고 각과는 상응하지 않으면서 관과는 상응하는 심ㆍ심법이다.
각을 따라 옮겨 가면서 또한 관과 상응하기도 하다는 것은 각ㆍ관과 상응하는 심ㆍ심법이다.
각을 따라 옮겨 가는 것도 아니요 또한 관과 상응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은 각을 따라 옮겨 가는 신업ㆍ구업을 제외한 나머지 신업ㆍ구업과 각을 따라 옮겨 가는 심불상응행을 제외한 나머지 심불상응행과 그리고 각과는 상응하지 않는 관과,
각ㆍ관과 상응하지 아니하는 심ㆍ심법이다.
낙지통에서와 같이 낙속통(樂速通)도 이와 같다.
4통에 속한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에 포섭되지 않는 무루의 지혜[慧] 는 곧 견(見)이면서 견처(見處)는 아니요,
나머지는 견도 아니요 또한 견처도 아니다.
모두가 신견(身見)의 인(因)이 아니며 신견도 또한 그의 인이 아니다.
4통에 속한 신업ㆍ구업과 사(思)는 곧 업이면서 업의 보[業報] 는 아니며 나머지는 업도 아니고 또한 업의 보도 아니다.
【문】 4통은 몇 가지가 업이면서 업을 따라 옮겨 가는 것이 아닌가?
【답】사구로 만들어야 한다.
업이면서 업을 따라 옮겨 가는 것은 아니기도 하다는 것은 사업(思業)이다.
업을 따라 옮겨 가면서 업은 아니기도 하다는 것은 수음ㆍ상음ㆍ식음과 그리고 사(思)에 포섭되지 않은 업을 따라 옮겨 가는 행음이다.
업이면서 또한 업을 따라 옮겨 가기도 하다는 것은 업을 따라 옮겨 가는 신업과 구업이다.
업도 아니요 또한 업을 따라 옮겨 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은 업을 따라 옮겨 가는 심불상응행을 제외한 나머지 심불상응행이다.
4통에 속한 신업ㆍ구업은 곧 만들어진 물질이면서 볼 수 있는 물질은 아니며,
나머지는 만들어진 물질도 아니요 또한 볼 수 있는 물질도 아니다.
4통에 속한 신업ㆍ구업은 곧 만들어진 물질이면서 대할 수 있는 물질은 아니며,
나머지는 만들어진 물질도 아니요 또한 대할 수 있는 물질도 아니다.
모두가 매우 깊기 때문에 알기 어렵고,
알기 어렵기 때문에 매우 깊다.
모두가 선(善)이면서 또한 선의 인(因)이다.
모두가 불선(不善)이 아니면서 또한 불선의 인(因)도 아니다.
모두가 무기(無記)가 아니면서 또한 무기의 인(因)도 아니다.
모두가 인연(因緣)의 연(緣)이면서 또한 인(因)도 있다.
【문】 4통은 몇 가지가 차제(次第)이면서 차제연(次第緣)의 연(緣)은 아닌가?
【답】 모두를 마땅히 분별해야 한다.
4통은 혹은 차제이면서 차제연의 연은 아니기도 하니,
삼구를 만들어야 한다.
차제이면서 차제연의 연은 아니기도 하다는 것은 미래에 반드시 눈앞에 나타나게 될 심ㆍ심법이다.
차제이면서 또한 차제연의 연이기도 하다는 것은 과거와 현재의 심ㆍ심법이다.
차제도 아니요 또한 차제연의 연도 아니라는 것은 미래에 반드시 눈앞에 나타나게 될 심ㆍ심법을 제외한 나머지 미래의 심ㆍ심법과 그리고 신업ㆍ구업과 심불상응행이다.
4통에 속한 신업ㆍ구업과 심불상응행은 곧 연연(緣緣)의 연이면서 소연(所緣)은 있지 아니하며,
나머지는 곧 연연의 연이요 또한 소연도 있다.
모두가 증상연(增上緣)의 연이며 또한 증상(增上)도 있다.
모두가 유(流)도 아니요,
또한 수류(隨流)도 아니다.
● 4성종(聖種) 종(種)이라 함은 4성종(聖種)을 말하는 것이다.
【문】 어떤 것이 4성종인가?
【답】 첫째는 의복[衣] 은 얻는 대로 입으면서 만족할 줄 아는 성종(聖種)이요,
둘째는 음식[食] 은 얻는 대로 먹으면서 만족할 줄 아는 성종이며,
셋째는 침구(寢具) 등은 얻는 대로 쓰면서 만족할 줄 아는 성종이요,
넷째는 고요함을 좋아하고 수행을 즐기는[樂靜樂修]
성종이다.
【문】 이 4성종은 몇 가지가 형색이 있고 몇 가지가 형색이 없는가?
【답】 성종에 속한 신업ㆍ구업은 곧 형색이 있고 나머지는 형색이 없다.
모두가 볼 수 없다.
모두가 대할 수 없다.
【문】 이 성종은 몇 가지가 유루고 몇 가지가 무루인가?
【답】모두는 마땅히 분별해야 한다.
이 성종은 혹은 유루이기도 하고 혹은 무루이기도 하다.
어떤 것이 유루인가?
성종에 속한 유루의 5음이다.
어떤 것이 무루인가?
성종에 속한 무루의 5음이다.
모두가 유위이다.
만일 유루면 그것은 보(報)가 있고,
만일 무루면 그것은 보가 없다.
모두는 인연(因緣)을 따라 생기며 세간에 속한다.
성종에 속한 신업ㆍ구업은 곧 물질[色] 에 속하며 나머지는 이름[名] 에 속한다.
성종에 속한 심ㆍ의ㆍ식은 곧 내입(內入)에 속하며 나머지는 외입(外入)에 속한다.
모두가 지(智 : 智遍知)로 아는 것이다.
만일 유루면 단지(斷知 : 斷遍知)로 아는 것이요 또한 끊어야 하며,
만일 무루면 단지로 아는 것이 아니요 또한 끊지 않아야 한다.
모두가 마땅히 닦아야 한다.
모두가 물들지 않는다.
모두가 과(果)이며 그리고 과도 있다.
모두가 감각이 없다[不受] .
성종에 속한 신업과 구업은 4대(大)로 만들어진 물질이거니와 나머지는 4대로 만들어진 물질이 아니다.
모두가 위[上] 가 있다.
성종이 만일 유루면 그것은 유(有)이거니와,
만일 무루면 그것은 유가 아니다.
성종에 속한 신업ㆍ구업과 그리고 심불상응행은 인(因)과 상응하지 않으며,
나머지는 인과 상응한다.
선처(善處)의 다섯 가지 일부분이 4성종을 포섭하고 4성종도 선처의 다섯 가지 일부분을 포섭한다.
불선처(不善處)는 피차가 서로 포섭하지 않는다.
무기처(無記處)는 피차가 서로 포섭하지 않는다.
누처(漏處)는 피차가 서로 포섭하지 않는다.
혹은 유루처(有漏處)는 성종을 포섭하지 않기도 한다.
사구로 만들어야 한다.
유루처이면서 성종은 아니기도 하다는 것은 성종에 포섭되지 않는 유루의 5음이다.
성종이면서 유루처가 아니기도 하다는 것은 성종에 포섭되는 무루의 5음이다.
유루처이면서도 또한 성종이기도 하다는 것은 성종에 포섭되는 유루의 5음이다.
유루처도 아니요 또한 성종이 아니기도 하다는 것은 허공과 그리고 수멸 비수멸이다.
혹은 무루처는 성종이 아니기도 하다는 것은,
사구로 만들어야 한다.
무루처이면서 성종이 아니기도 하다는 것은 허공과 그리고 수멸ㆍ비수멸이다.
성종이면서 무루처가 아니기도 하다는 것은 성종에 포섭되는 유루의 5음이다.
무루처이면서 또한 성종이기도 하다는 것은 성종에 포섭되는 무루의 5음이다.
무루처도 아니요 또한 성종이 아니기도 하다는 것은 성종에 포섭되지 않은 유루의 5음이다.
모두가 혹은 과거이기도 하고 혹은 미래이기도 하며 혹은 현재이기도 하다.
모두가 선(善)이다.
성종은 혹은 욕계에 매인 것[欲界繫] 이기도 하고 혹은 색계에 매인 것[色界繫] 이기도 하며 혹은 무색계에 매인 것[無色界繫] 이기도 하고 혹은 매여 있지 않은 것[不繫] 이기도 하다.
어떤 것이 욕계에 매인 것인가?
성종에 포섭된 욕계에 매인 5음이다.
어떤 것이 색계에 매인 것인가?
성종에 포섭된 색계에 매인 5음이다.
어떤 것이 무색계에 매인 것인가?
성종에 포섭된 무색계에 매인 5음이다.
어떤 것이 매여 있지 않은 것인가?
무루의 4성종이다.
【문】 이 성종은 몇 가지가 학(學)이고 몇 가지가 무학(無學)이며 몇 가지가 학도 무학도 아닌 것[非學非無學] 인가?
【답】 모두는 마땅히 분별해야 한다.
성종은 혹은 학이기도 하고 혹은 무학이기도 하며 혹은 학도 무학도 아니기도 하다.
어떤 것이 학인가?
성종에 속한 배울 것이 있는 이[學] 의 5음이다.
어떤 것이 무학인가?
성종에 속한 배울 것이 없는 이[無學] 의 5음이다.
어떤 것이 학도 무학도 아닌가?
성종에 속한 유루의 5음이다.
성종이 만일 유루이면 그것은 수도에서 끊어야 할 것이요,
만일 무루이면 그것은 끊어야 할 것이 아니다[不斷] .
성종에 속한 신업ㆍ구업과 심불상응행은 마음도 아니고 심법도 아니고 마음과 반응하는 것도 아니며,
성종에 속한 수음ㆍ상음과 그리고 그것과 상응하는 행음은 곧 심법이면서 마음과도 상응하고 심ㆍ의ㆍ식은 곧 마음일 뿐이다.
【문】 이 성종은 몇 가지가 마음을 따라 옮겨 가면서[心隨轉]
느낌[受] 과는 상응하는 것이 아닌가?
【답】 사구로 만들어야 한다.
마음을 따라 옮겨 가면서 느낌과는 상응하지 아니하기도 하다는 것은 마음을 따라 옮겨 가는 신업ㆍ구업과 심불상응행을 그리고 느낌이다.
느낌과 상응하면서 마음을 따라 옮겨 가는 것은 아니기도 하다는 것은 심ㆍ의ㆍ식이다.
마음을 따라 옮겨 가며 또한 느낌과 상응하기도 하다는 것은 상음과 그리고 그것과 상응하는 행음이다.
마음을 따라 옮겨 가는 것도 아니요 또한 느낌과도 상응하지 아니하기도 하다는 것은 마음을 따라 신업ㆍ구업과 마음을 따라 옮겨 가는 심불상응행을 제외한 나머지 심불상응행이다.
느낌에서와 같이 생각[想] ㆍ지어감[行] ㆍ성품[自性] 만은 제외된다.
【문】 이 성종은 몇 가지가 각(覺 : 尋)을 따라 옮겨 가면서 관(觀 : 伺)과는 상응하지 아니하는가?
【답】 사구로 만들어야 한다.
각을 따라 옮겨 가면서 관과는 상응하지 않기도 하다는 것은 각을 따라 옮겨 가는 신업ㆍ구업과 각을 따라 옮겨 가는 심불상응행과 그리고 각과 상응하는 관이다.
각과 상응하면서 각을 따라 옮겨 가는 것은 아니기도 하다는 것은 각과 그리고 각과 상응하지 않으면서 관과는 상응하는 심ㆍ심법이다.
각을 따라 옮겨 가면서 또한 관과 상응하기도 하다는 것은 각ㆍ관과 상응하는 심ㆍ심법이다.
각을 따라 옮겨 가는 것도 아니요 또한 관과 상응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은 각을 따라 옮겨 가는 신업 구업을 제외한 나머지 신업ㆍ구업과 각을 따라 옮겨 가는 심불상응행을 제외한 나머지 심불상응행과 그리고 각과 상응하지 않는 관 그리고 각ㆍ관과는 상응하지 아니하는 심ㆍ심법이다.
【문】 이 성종은 몇 가지가 견(見)이면서 견처(見處)는 아닌가?
【답】사구로 만들어야 한다.
견이면서 견처는 아니기도 하다는 것은 성종에 속한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에 포섭되지 않은 무루의 지혜[慧] 이다.
견처이면서 견은 아니기도 하다는 것은 견에 포섭되지 않은 유루의 4성종이다.
견이면서 또한 견처이기도 하다는 것은 세속의 바른 견해[正見] 이다.
견도 아니요 또한 견처도 아니라는 것은 견에 포섭되지 않은 무루의 4성종이다.
모두가 신견(身見)의 인(因)이 아니며 신견도 또한 그의 인이 아니다.
성종에 속한 신업ㆍ구업과 그리고 사(思)는 곧 업(業)이면서 업의 보(報)는 아니며 나머지는 업도 아니고 또한 업의 보도 아니다.
【문】이 성종은 몇 가지가 업이며 업을 따라 옮겨 가는 것[業隨轉] 이 아닌가?
【답】 사구를 만들어야 한다.
업이면서 업을 따라 옮겨 가는 것은 아니기도 하다는 것은 업을 따라 옮겨 가는 신업ㆍ구업을 제외한 나머지 신업ㆍ구업과 그리고 사업(思業)이다.
업을 따라 옮겨 가면서 업은 아니기도 하다는 것은 수음ㆍ상음ㆍ식음과 또한 사(思)에 포섭되지 않은 업을 따라 옮겨 가는 행음이다.
업이면서 또한 업을 따라 옮겨 가기도 하다는 것은 업을 따라 옮겨 가는 신업과 구업이다.
업도 아니요,
또한 업을 따라 옮겨 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은 업과 그리고 업을 따라 옮겨 가는 심불상응행을 제외한 나머지 또 다른 심불상응행이다.
성종에 속한 신업과 구업은 만들어진 물질의 형상이면서 볼 수 있는 물질은 아니며,
나머지는 만들어진 물질의 형상도 아니요 또한 볼 수 있는 물질은 아니며,
나머지는 만들어진 물질의 형상도 아니요 또한 대할 수 있는 물질도 아니다.
모두가 매우 깊기 때문에 환히 알기 어렵고,
환히 알기 어렵기 때문에 매우 깊다.
모두가 선(善)이면서 또한 선의 인(因)이다.
모두가 불선(不善)도 아니며 또한 불선을 인(因)도 아니다.
모두가 무기(無記)도 아니요 또한 무기를 인(因)도 아니다.
모두가 인연(因緣)의 연(緣)이요 인(因)도 있다.
【문】 이 성종은 몇 가지가 차제(次第 : 等無間)이고 몇 가지가 차제연(次第緣 : 等無間緣)의 연은 아닌가?
【답】 모두는 마땅히 분별해야 한다.
성종은 혹은 차제이면서 차제연의 연은 아니기도 하니,
삼구를 만들어야 한다.
차제이면서 차제연의 연은 아니기도 하다는 것은 미래에 반드시 눈앞에 나타나게 될 심ㆍ심법이다.
차제이면서 또한 차제연의 연이기도 하다는 것은 과거와 현재의 심ㆍ심법이다.
차제도 아니요 또한 차제연의 연도 아니라는 것은 미래에 반드시 눈앞에 나타나게 될 심ㆍ심법을 제외한 나머지 미래의 심ㆍ심법과 그리고 신업ㆍ구업과 심불상응행이다.
성종에 속한 신업ㆍ구업과 심불상응행은 곧 연연(緣緣)의 연이면서 소연(所緣)은 있지 아니하며 나머지는 연연의 연이면서 또한 소연도 있다.
모두가 증상연(增上緣)의 연이며 또한 증상(增上)도 있다.
성종이 만일 유루이면 그것은 수류(隨流)이면서 유(流)는 아니요,
만일 무루이면 그것은 유도 아니요 또한 수류도 아니다.
4성종에서와 같이 4정근(正勤)과 4여의족(如意足)의 착한 무더기[善聚] 의 수다라(修多羅)도 이와 같다.
● 4념처(念處)
염(念)이라는 것은 4념처(念處)를 말하는 것이다.
【문】 어떤 것이 4념처인가?
【답】 신념처(身念處)에서 법념처(法念處)까지이다.
어떤 것이 신념처인가?
몸[身] 을 반연하는 지혜[慧] 이다.
어떤 것이 수념처(受念處)인가?
느낌[受] 을 반연하는 지혜이다.
어떤 것이 심념처(心念處)인가?
마음[心] 을 반연하는 지혜이다.
어떤 것이 법념처인가?
법(法)을 반연하는 지혜이다.
【문】 이 4념처는 몇 가지가 형색이 있고 몇 가지가 형색이 없는가?
【답】 모두가 형색이 없다.
모두가 볼 수 없다.
모두가 대할 수 없다.
【문】 이 4념처는 몇 가지가 유루이고,
몇 가지는 무루인가?
【답】 모두를 마땅히 분별해야 한다.
몸을 반연하는 지혜는 혹은 유루이기도 하고 혹은 무루이기도 하다.
어떤 것이 유루인가?
유루의 의사유(意思惟 : 作意)와 상응하는 몸을 반연하는 지혜이다.
어떤 것이 무루인가?
무루의 의사유와 상응하는 몸을 반연하는 지혜이다.
몸을 반연하는 지혜에서와 같이 나아가 법을 반연하는 지혜도 이와 같다.
모두가 유위이다.
이 4념처가 만일 유루면 그것은 보(報)가 있으며,
만일 무루면 그것은 보가 없다.
모두가 인연(因緣)을 따라 생기며 세간에 속한다.
모두가 이름[名] 에 속한다.
모두가 지(智 : 智遍知)로 아는 것이다.
만일 유루면 단지(斷知 : 斷遍知)로 알아야 하고 또한 끊어야 하며,
만일 무루면 단지로 알아야 할 것이 아니며 또한 끊어야할 것도 아니다.
모두가 마땅히 닦아야 한다.
모두가 더러운 데에 물들지 않는다.
모두가 과(果)이면서 또한 과도 있다[有果] .
모두가 감각이 없다[不受] .
모두가 4대(大)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모두가 위[上] 가 있다.
이 4념처는 만일 유루이면 유(有)이고,
만일 무루이면 유가 아니다.
모두가 인(因)과 상응한다.
선(善)의 한 가지의 일부분이 4념처를 포섭하며,
4념처도 선의 한 가지의 것의 일부분을 포섭한다.
불선(不善)의 것은 피차가 서로 포섭하지 않는다.
무기(無記)의 것에서도 피차가 서로 포섭하지 않는다.
루(漏)의 것에서도 피차가 서로 포섭하지 않는다.
혹은 유루(有漏)의 것에 속하면서 4념처는 아니기도 하니,
사구를 만들어야 한다.
유루의 것에 속하면서 염처는 아니기도 하다는 것은 유루의 색음(色陰)과 유루의 상음(想陰)ㆍ식음(識陰)과 염처에 포섭되지 않은 유루의 행의 연[行緣] 이다.
염처에 속하면서 유루의 것은 아니기도 하다는 것은 무루의 4념처이다.
유루의 것에 속하면서 또한 염처이기도 하다는 것은 유루의 4념처이다.
유루의 것에 속하기도 하며 또한 염처도 아니라는 것은 무루의 색음ㆍ수음ㆍ상음ㆍ식음과 염처에 포섭되지 않은 무루의 행음과 무위(無爲)이다.
혹은 무루(無漏)의 것에 속하면서 염처는 아니기도 하니 사구를 만들어야 한다.
무루의 것에 속하면서 염처는 아니기도 하다는 것은 무루의 색음ㆍ수음ㆍ상음ㆍ식음과 염처에 포섭되지 않은 무루의 행음과 무위이다.
염처에 속하면서 무루의 것은 아니기도 하다는 것은 유루의 4념처이다.
무루의 것에 속하며 또한 염처이기도 하니,
무루의 4념처이다.
무루의 것에 속하지도 않고 또한 염처도 아니라는 것은 유루의 색음ㆍ수음ㆍ상음ㆍ식음과 염처에 포섭되지 않은 유루의 행음이다.
모두가 혹은 과거이기도 하고 혹은 미래이기도 하며 혹은 현재이기도 하다.
모두가 선(善)이다.
【문】 이 4념처는 몇 가지 세계에 매인 것[界繫] 인가?
【답】 모두를 마땅히 분별해야 한다.
몸을 반연하는 지혜는 혹은 욕계에 매인 것이기도 하고 혹은 색계에 매인 것이기도 하며,
혹은 무색계에 매인 것이기도 하고 혹은 매이지 않은 것[不繫] 이기도 하다.
어떤 것이 욕계에 매인 것인가?
욕계에 매인 의사유(意思惟 : 作意)와 상응하는 몸을 반연하는 지혜이다.
어떤 것이 색계에 매인 것인가?
색계에 매인 의사유와 상응하는 몸을 반연하는 지혜이다.
어떤 것이 매이지 않은 것인가?
무루의 의사유와 상응하는 몸을 반연하는 지혜이다.
몸을 반연하는 지혜에서와 같이 법을 반연하는 지혜까지도 이와 같다.
【문】이 4념처는 몇 가지가 학(學)이고 몇 가지가 무학(無學)이며 몇 가지가 학도 무학도 아닌 것[非學非無學] 인가?
【답】 모두는 마땅히 분별해야 한다.
몸을 반연하는 지혜는 혹은 학이기도 하고 혹은 무학이기도 하며 혹은 학도 무학도 아니기도 하다.
어떤 것이 학인가?
배울 것이 있는 이[學] 의 의사유와 상응하는 몸을 반연하는 지혜이다.
어떤 것이 무학인가?
배울 것이 없는 이[無學] 의 의사유와 상응하는 몸을 반연하는 지혜이다.
어떤 것이 학도 무학도 아닌가?
유루의 의사유와 상응하는 몸을 반연하는 지혜이다.
몸을 반연하는 지혜에서와 같이 법을 반연하는 지혜에 이르기까지도 이와 같다.
이 4념처가 만일 유루이면 그것은 수도에서 끊어야 할 것[修斷] 이며,
만일 무루이면 그것은 끊어야 할 것이 아니다.
모두가 심법(心法 : 心所)이면서 마음과도 상응한다.
모두가 마음을 따라 옮겨 가면서[心隨轉]
느낌[受] 과도 상응한다.
모두가 마음을 따라 옮겨 가면서 생각[想] ㆍ지어감[行] 과도 상응하며 그 제 성품[自性] 만은 제외한다.
【문】이 4념처는 몇 가지가 각(覺 : 尋)이 있고 관(觀 : 伺)이 있는가?
【답】 모두를 마땅히 분별해야 한다.
몸을 반연하는 지혜는 혹은 유각유관(有覺有觀法 : 有尋有伺法이기도 하고 혹은 무각유관법(無覺有觀 : 無尋有伺)이기도 하며 혹은 무각무관(無覺無觀 : 無尋無伺)이기도 하다.
어떤 것이 유각유관인가?
유각유관의 의사유(意思惟 : 作意)와 상응하는 몸을 반연하는 지혜이다.
어떤 것이 무각유관인가?
무각유관의 의사유와 상응하는 몸을 반연하는 지혜이다.
어떤 것이 무각무관인가?
무각무관의 의사유와 상응하는 몸을 반연하는 지혜이다.
몸을 반연하는 지혜에서와 같이 법을 반연하는 지혜까지도 이와 같다.
【문】이 4념처는 몇 가지가 견(見)이면서 견처(見處)는 아닌가?
【답】 모두를 마땅히 분별해야 한다.
몸을 반연하는 지혜는 혹은 견이면서 견처는 아니기도 하니 사구를 만들어야 한다.
견이면서 견처는 아니기도 하니,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에 포섭되지 않은 무루의 몸을 반연하는 지혜이다.
견처이면서 견은 아니기도 하니,
견에 포섭되지 않은 유루의 몸을 반연하는 지혜와 그리고 5식신(識身)과 상응하는 몸을 반연하는 지혜이다.
견처이면서 또한 견처이기도 하니,
세속은 바른 견해[正見] 이다.
견도 아니요 또한 견처도 아니니,
견에 포섭되지 않은 무루의 몸을 반연하는 지혜이다.
느낌[受] 을 반연하는 지혜는 혹은 견이면서 견처는 아니기도 하니,
사구를 만들어야 한다.
견이면서 견처는 아니기도 하다는 것은 진지 무생지에 포섭되지 않은 무루의 느낌을 반연하는 지혜이다.
견처이면서 견은 아니기도 하다는 것은 포섭되지 않은 유루의 느낌을 반연하는 지혜이다.
견이며 또한 견처이기도 하다는 것은 세속은 바른 견해이다.
견도 아니요 또한 견처도 아니라는 것은 견에 포섭되지 않은 무루의 느낌을 반연하는 지혜이다.
무루의 느낌을 반연하는 지혜에서와 같이 마음[心] 을 반연하는 지혜와 법(法)을 반연하는 지혜도 이와 같다.
모두가 신견(身見)의 인이 아니며 신견도 또한 그의 인이 아니다.
모두가 업(業)이 아니며,
또한 업의 보(報)도 아니다.
모두가 업을 따라 옮겨 가면서도 업은 아니다.
모두가 만들어진 물질의 형상이 아니며 볼 수 있는 물질도 아니다.
모두가 만들어진 물질의 형상도 아니며 대할 수 있는 물질도 아니다.
모두가 매우 깊기 때문에 환히 알기 어렵고,
환히 알기 어렵기 때문에 매우 깊다.
모두가 선(善)이면서 또한 선의 인(因)이다.
모두가 불선(不善)도 아니요 또한 불선을 인도 아니다.
모두가 무기(無記)도 아니며 또한 무기의 인도 아니다.
모두가 인연(因緣)의 연(緣)이며 또한 인(因)도 있다.
【문】 이 4념처는 몇 가지가 차제(次第)이면서 차제연(次第緣)의 연은 아닌가?
【답】모두를 마땅히 분별해야 한다.
몸을 반연하는 지혜는 혹은 차제이면서 차제연의 연은 아니기도 하니,
삼구를 만들어야 한다.
차제이면서 차제연의 연은 아니기도 하니,
미래에 반드시 눈앞에 나타나게 될 심ㆍ심법이다.
차제이면서 또한 차제연의 연이기도 하니,
과거와 현재의 몸을 반연하는 지혜이다.
차제도 아니요 또한 차제연의 연도 아니니,
미래에 반드시 눈앞에 나타나게 될 몸을 반연하는 지혜를 제외한 나머지 미래의 몸을 반연하는 지혜이다.
고무지우개가 삶에서 중요하다고 하다. 왜냐하면 한번 적은 내용을 다시 지우고 수정할 수 없다면 대단히 불편하기 때문이다.
수행자에게 있어서 고무지우개는 고+무지+우+개 이렇게 분석할 수 있다. 살아가면서 고통과 어리석음 걱정 덮개 이런 것을 수행상의 고무지우개로 지우면 지울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고무지우개의 정체를 잘 파악하는 한편, 이에 대한 대처방안도 잘 파악해야 한다.
그런데 생활에서 지우개가 무언가를 모르는 이에게 설명을 해야 한다고 가정해보자. 그 상대가 지우개도 모르고 다른 것도 전혀 모르면 설명하기가 곤란하다. 그런데 연필이나 학용품 종이 이런 관련된 것을 알고 있다면 이를 통해서 설명을 해나갈 수 있다.
그런 가운데 지우개와 비슷하지만, 개념이 혼동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나 지우개를 포함하는 다른 개념들과의 관계를 잘 파악하면 지우개에 대해 조금 더 자세하게 잘 파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비달마 논서에서는 어떤 것의 정체를 살피는 과정에서 이런 형태로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개념을 파악하는데 그다지 실용적이지 않고 수행에도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 보이는 번잡한 설명이 반복되는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다.
유사관념 관련 관념들과의 관계를 잘 파악하면 그 개념도 잘 파악한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그 개념도 잘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관련된 관념과의 관계를 4 구 분별 방식으로 자주 설명하는 것을 볼 수 있다.
4 구 분별이란, 어떤 내용의 성질을 살필 때 그 구분기준이 되는 성질로 a 와 b 가 사용된다면 그것을 다음의 4 형태로 분류해 내는 방식이다.
1 a 인 경우 1 b 인 경우 1 a 이기도 하고 b 이기도 한 경우 1 a 도 아니고 b 도 아닌 경우
이것도 어떤 것을 a 와 b 와 관련시켜서 그 정체를 파악할 때 이런 입장에서 잘 구분해서 살피자는 취지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 살핀다면 그는 남자 인가 여자인가. 남자이기도 하고 여자기이고 한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가.
이런 형태로 잘 살펴보자는 뜻이다.
현재 『중사분아비담심론』 8권에서는
우바새(優婆塞)의 5계(戒)
4불괴정(不壞淨)
4사문과(沙門果)
4통(通)
4성종(聖種)
4념처(念處)
에 대해서 살핀다.
여기서 살피는 내용이 덜 실용적이라는 것은 현실에서 수행자나 일반인이 이들 내용에 대해 관심을 가질 때 초점을 맞추는 측면과는 조금 떨어진 내용을 자세히 살핀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5 계가 문제된다면 그 내용은 무엇이고 일반인은 왜 굳이 현실에서 5 계를 뽑아 그것을 특별히 신경쓰면서 지켜야 하는가. 지키면 어떻게 되고 또 지키지 않으면 어떤 결과를 맞이하게 되는가. 그 차이는 무엇인가. 또 지켜야 한다면 그것이 문제될 때 어떻게 잘 지킬 수 있는가. 이런 측면에서 자세한 설명이 제시되기를 희망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5 계의 내용을 살핌에 있어서도 처음에 그것이 다른 관념과 어떤 관계에 있고 예를 들어 보이는 것인가 안 보이는 것인가. 만지고 대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닌가. 이런 등등의 분석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결국 5 계의 정체를 분명하게 파악하기 위한 분석적인 연구라고 할 수 있고 어떤 내용의 정체에 대해 세세하게 살피고자 하는 아비달마 논서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4 구 분별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2 가 분별을 사용하는 경향이 있기에 왜 이런 분별을 하는가 그 사정부터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현실에서 무언가의 정체에 대해 살필 때 처음 누군가가 그것은 보이는 것인가라고 질문한다면, 여기서 무엇은 보이는 것이다- 아니다. 이렇게만 단순하게 나누어 살피기 쉽다.
그런데 4 구 분별이라는 것은 구체적인 상황을 놓고 살피다보면 결국 이런 2 가 분별 체계로만 살피기 어려운 경우가 나타나기에 이런 4 구 분별 체계를 동원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A 인가 아닌가 이렇게 문제삼을 때는 어떤 것이 A 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A 는 아니다. 이렇게 구분된다고 하는 전제에서 이런 분석을 행하게 된다.
그래서 A 와 A 아닌 것 이렇게 구분하면 결국 모순 관계로만 살피는 것이 된다. 논리학적으로 모순개념이란 유개념 범위에서 나눠지는 것이다.
즉 흰색인가 흰색아닌가 이렇게 구분하면 일체를 흰색과 비흰색( 흰색의 모순개념) 이렇게 분류해 묶을 수 있을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런데 시끄러운 소리는 흰색인가 흰색이 아닌가라고 물으면 조금 답하기 곤라해진다. 소리는 색의 개념 안에 들어가는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흰색이 아니다라는 범주에 색 아닌 것도 모두 포함해서 넣겠다는 입장도 생각할 수 있다. 아니다라는 개념이 갖는 의미는 상당히 복잡한 내용이지만, 그러나 본래 흰색인가 아닌가는 색을 놓고 구분하는 개념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한편 어떤 사물이 있는데 흰색과 노란색이 점점이 섞여 있다면 이것도 흰색과 흰색 아닌 것의 구분만으로는 적절하지 않다고 보게 된다.
○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John Singer Sargent-val-d-aosta-man-fishing
John Singer Sargent from https://en.wikipedia.org/wiki/John_Singer_Sargent Title : val-d-aosta-man-fishing Info Permission & Licensing : Wikiart ● [pt op tr] fr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Formal_Gardens,_Kilmainham,_May_2011_(11)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Roland_Levinsky_building
The Roland Levinsky Building, Plymouth University. Author Graham Richardson from Plymouth, England from https://en.wikipedia.org/wiki/Louis_Comfort_Tiffany Permission & Licensing : Wikipedia ● [pt op tr] fr
♥Château des Baux
○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노래를 듣다가 불어 노래는 뭔지 한국어로 들린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이번에는 개같이 된다는 이런 메세지를 전하면서 가수가 그 부분에서 개 같은 소리를 내는 것을 들을 수 있다. 그리고 개 같이 되는 데에는 일정한 인과관계가 있다는 메세지를 전한다. 원 가사를 찾아 살펴보아도 무언가 연관이 되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