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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4-02-12_무진의보살경_006 본문
『무진의보살경』
K0071
T0397
제6권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 해제[있는경우]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 [pt op tr] 무진의보살경_K0071_T0397 핵심요약
♣0071-006♧
『무진의보살경』
제6권
비영리-동일조건변경허락원문번역문
무진의보살경
■ 무진의보살경 제6권
송나라 양주 사문 지엄 보운 공역
정관유 번역
또한 사리불이여,
■ 보살마하살의 네 가지 바른 노력[四正勤]도 또한 다함이 없으니,
■네 가지란 무엇인가 하면,
아직 나쁘고 착하지 못한 법[不善法]이 생기지 않았다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의욕을 내어 부지런히 정진하고 마음을 거두어 바로 제거하며,
■ 이미 생겨난 나쁘고 착하지 못한 법은 끊기 위하여
의욕을 내어 부지런히 정진하고 마음을 거두어서 바로 제거하며,
■ 아직 생기지 않은 착한 법은 생기게 하기 위하여
의욕을 내어 부지런히 정진하고 마음을 거두어서 바로 제거하며,
■ 이미 생겨난 착한 법은 편안히 머물러 닦아 모아서 더욱 넓히고 잃어버리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의욕을 내어 부지런히 정진하고 마음을 거두어서 바로 제거하는 것입니다.
아직 나쁘고 착하지 못한 법이 생기지 않았다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의욕을 내어 부지런히 정진하니,
■ 이른바 의욕이란 잘 생각하는 것이며,
부지런히 정진한다는 것은 잘 생각함을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 마음을 거두어 바로 제거한다는 것은,
잘 생각함을 바르게 관찰하는 것이니,
왜냐하면 잘 생각하고 있을 때는
나쁘고 착하지 못한 법을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 어떤 것이 나쁘고 착하지 못한 법인가 하면,
나쁘고 착하지 못한 법은
계취(戒取)의 짝[伴]이 아닌 것과
선정의 짝이 아닌 것과
지혜의 짝이 아닌 것이 그것입니다.
계취의 짝이 아니라 함은 다섯 가지 무거운 계를 깨뜨리거나 다른 계를 헐뜯음이 그것이며,
선정의 짝이 아니라 함은 위의를 헐뜯거나 심법(心法)을 어지럽게 함이 그것이며,
지혜의 짝이 아니라 함은 모든 소견을 거두어 가지거나 다른 소견에 장애됨이 그것이니,
이것을 나쁘고 착하지 못한 법이라고 합니다.
잘 생각할 때에는 이와 같은 나쁜 법이 마음에 들지 못하게 하니,
이것을 이르되 처음에
바르게 노력하여
이미 생겨난 나쁘고 착하지 못한 법을 끊기 위해
욕심을 내어 부지런히 정진하고 마음을 거두어 그 나쁨을 바로 제거한다고 합니다.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나쁘고 착하지 못한 법을 마음에 모으지 않고
어떤 방향이나 장소도 없으며 머무는 곳도 없으니,
이 착하지 못한 법의 심행(心行)을 끊기 때문이며,
이미 깨달아 알기 때문이며,
인연에 따라 나기 때문이며
깨끗하기 때문입니다.
욕심을 내어 걸리기 때문에 성을 내고,
무명의 인연 때문에 어리석음을 내니,
■ 이 착한 생각으로
청정하지 않음을 관찰할 때 욕심을 없애고,
사랑하는 마음을 닦아 모아서 성냄을 없애고,
12인연을 관찰하여 어리석음을 없애버립니다.
이와 같은 번뇌가 영원히 적멸함은
곧 모든 붙인 이름을 끊어버림이요,
또한 끊을 것이 있다고도 보지 않음이니,
이것을 두 번째 바른 노력으로
아직 생겨나지 않은 착한 법을 나게 하기 위하여
욕심을 내어 부지런히 정진하고 마음을 거두어서 바로 제거한다고 합니다.
이 모든 착한 법은 말하자면 한량이 없을 것이니,
왜냐하면 한량이 없는 착한 법을 보살이 닦아 모으기 때문입니다.
이 법 가운데서 의욕을 근본으로 삼아 부지런히 정진하고 닦아 모아서 마음을 거두는 자는
착한 법에 뛰어나고,
바로 제거하는 자는
어느 곳에서나 항상 착한 법에 있게 되니,
이것을 세 번째 바른 노력으로
이미 착한 법을 내어
편안히 머물고 닦아 모아서 더 넓히고 잃어버리지 않기 위하여
마음을 거두어 바르게 머문다고 합니다.
이 모든 선근은 다 이미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였으니,
왜냐하면 선근을 위없는 보리에 회향함은 다함이 없기 때문이고,
또 그 까닭은 이러한 선근은 삼계에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니,
삼계에 의지한다면 그 선근이 손상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일체종지(一切種智)에 회향하는 모든 선근은 다할 수 없으니,
이것을 네 번째 바른 노력이라고 합니다.
사리불이여,
이것을 보살이 네 가지 바른 노력을 닦아 다함이 없다고 합니다.
또한 사리불이여,
■ 보살마하살의 네 가지 뜻대로 하는 법[如意分]도 다함이 없으니,
그 네 가지란 어떤 것인가 하면,
욕심과 정진과 마음과 생각함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네 가지 법은 사랑함과 슬퍼함과 기뻐함과 버림으로써 근본을 삼습니다.
또 이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으로 항상 친근하고,
항상 친근하기 때문에 마음이 고르고 부드러우며,
마음이 고르고 부드럽기 때문에
초선(初禪)과 제 이선(二禪)과 제 삼선과 제 사선에 들어가고,
모든 선에 들어가기 때문에 몸이 가볍고 부드러우며,
이와 같이 몸이 가볍고 마음이 부드러움을 성취하여 뜻대로 하는 법에 들어가며,
뜻대로 하는 법에 잘 들어가고 나면
욕심이나 정진이나 마음이나 생각함과 같은 신통을 냅니다.
■ 욕심이란 전일하게 저 법에 나아가는 것이요,
정진이란 저 법을 성취하는 것이요,
마음이란 저 법을 관찰하는 것이요,
생각함이란 저 법의 방편이니,
이렇게 뜻대로 하는 법을 원만히 갖추었기 때문에 능히 신통을 얻습니다.
욕심이란 장엄하는 것이요,
정진이란 성취하는 것이요,
마음이란 바르게 머무는 것이요,
생각함이란 잘 분별할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은 보살이 뜻대로 하는 법을 얻어 그 아는 바에 따라 하고자 하는 그대로 마음이 자재함을 얻으며,
뜻이 가는 곳을 따라 모든 업을 잘 짓고
마침내 모든 본행(本行)을 성취하되
마치 바람이 공중에 부는 것과 같아서 아무런 걸림이 없습니다.
사리불이여,
이것을 보살의 네 가지 뜻대로 하는 법이 다함이 없다고 합니다.
또한 사리불이여,
■ 보살마하살의 5근(根)도 다함이 없으니,
그 다섯 가지를 말하자면
믿음의 근[信根]과 정진의 근[進根]과 생각의 근[念根]과 선정의 근[定根]ㆍ지혜의 근[慧根]이 그것입니다.
■ 믿음의 근이라 함은 네 가지 법을 믿는 것이니,
그 네 가지란 생사 속에서도 세간의 바른 소견을 행하여 업보를 믿고
나아가 생명을 잃어버릴지라도 끝까지 나쁜 일을 하지 않는 것이 한 가지이며,
보살의 행을 믿어 모든 소견에 따르지 않고
보리만을 구하여 다른 승(乘)을 구하지 않는 것이 두 가지이며,
모든 법은 공하고 모양이 없고 원(願)도 없는 법과도 같고 으뜸가는 이치와도 같고
분명한 이치와도 같고
매우 깊은 인연은 ‘나’와 중생이 없고 분별도 없다고 믿는 것이 세 가지이며,
모든 부처님의 열 가지 힘과 네 가지 두려움 없음과 열여덟 가지 공통되지 않는 법을 믿는 것이 네 가지입니다.
이와 같이 믿고는 의심을 없애고 부처님 법을 닦아 모으니,
이것을 믿음의 근이라고 합니다.
정진의 근이란 무엇인가 하면,
만약 법이 믿음의 근에 의해 거두어지는 것이라면 이 법이 곧 정진의 근을 닦는 것이니,
이것을 정진의 근이라고 합니다.
생각하는 근이란 무엇인가 하면,
만약 법이 정진의 근으로 닦여지는 것이라면 이 법은 끝까지 잊거나 잃어버리지 않으니,
이것을 생각하는 근이라고 합니다.
선정의 근이란 무엇인가 하면,
만약 법이 생각하는 근에 의해 거두어지는 것이라면
이 법은 잊거나 잃어버리지 않아서
한결같은 마음으로 어지럽지 않으니,
이것을 선정의 근이라고 합니다.
지혜의 근이란 무엇인가 하면,
만약 법이 선정의 근에 의해 거두어진다면
이는 지혜로 관하는 것이고
지혜의 체성(體性)이므로 안으로 스스로 비추어 밝히지
남을 좇아 알지 않아서
스스로 바른 행에 머무니,
이것을 지혜의 근이라고 합니다.
이 다섯 가지 근은 함께 서로 계속해서 나고
모든 법을 갖추므로 수기(受記)를 얻으니,
마치 외도의 신선이 다섯 가지 신통을 갖추었으나
태중(胎中)의 차별을 결정코 알지 못하다가
남녀의 모습이 드러난 뒤에야 비로소 아는 것과 같습니다.
많은 보살이 믿음 등의 근이 없다면
모든 부처님께서 수기하지 않을 것이요,
성취하는 자에게만 수기하여 주실 것입니다.
사리불이여,
이것을 보살의 다섯 가지 근이 다함이 없다고 합니다.
또한 사리불이여,
■ 보살의 다섯 가지 힘[五力]도 다함이 없으니,
그 다섯 가지 힘이란,
믿음의 힘[信力]과 정진의 힘[進力]과 생각하는 힘[念力]과 선정의 힘[定力]과 지혜의 힘[慧力]이 그것입니다.
믿음의 힘이라 함은,
이 믿음은 한결같아서 막거나 무너뜨릴 수 없고
내지 천마(天魔)가 부처님 몸으로 변하여 선정 해탈에 드나드는 것을 나타내 보일지라도
이 보살의 믿음의 힘을 흔들어 놓을 수 없으니,
이것을 믿음의 힘이라고 합니다.
정진의 힘이라 함은,
보살이 모든 선법(善法)에 정진하여 견고한 힘을 얻고
그 얻은 힘으로써 모든 선정을 닦아
하늘이나 사람이 파괴할 수 없으며
본래의 소원대로 모두 성취하는 것을 정진의 힘이라고 합니다.
생각하는 힘이라 함은,
보살이 모든 선법에 머물러서 번뇌에 의해 무너지지 않는 것이니,
왜냐하면 이 보살의 바르게 생각하는 힘으로
그 번뇌를 능히 꺾어 조복시키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생각하는 힘은 파괴할 자가 없으므로 이것을 생각하는 힘이라고 합니다.
선정의 힘이라 함은,
시끄러움을 멀리 여의고 항상 홀로 수행하기를 즐거워하는 것이니,
이것은 보살이 비록 말을 하여도 말과 음성이 초선에 장애되지 않고,
각관(覺觀)에 잘 머물러 제 이선에 장애되지 않으며,
마음에 기쁨을 내어 삼선에 장애되지 않고,
보살이 비록 중생 교화하기를 즐거워하더라도 불법을 버리지 않고 또 제 사선에도 장애되지 않습니다.
이 네 가지 선정을 행할 때 모든 선정을 방해하는 법이 영향을 끼칠 수 없으며,
보살은 그때 선정을 버리지도 않고 또 선정에 따르지도 않으면서
능히 자재하게 곳곳마다 태어나니,
이것을 선정의 힘이라고 합니다.
지혜의 힘이라 함은 보살이 세간의 법과 세간을 벗어난 법을 알므로
어떤 법이라도 이 지혜를 파괴 할 수 없고,
보살이 태어나는 곳마다 모든 기예(技藝)를 스승으로부터 받지 않아도 모두 자연히 알며,
세간 외도의 어떤 괴로운 행과 어려운 행도
이 보살은 교화하기 때문에
모두 받아들여 그들과 행동을 같이 합니다.
이 세간을 벗어나는 법으로써 능히 세간을 뛰어넘는 자는
지혜의 힘을 성취한 까닭에
모든 하늘과 사람이 굴복시킬 수 없으니,
이것을 지혜의 힘이라고 합니다.
사리불이여,
이것을 보살의 다섯 가지 힘이 다함이 없다고 합니다.
또한 사리불이여,
■ 보살마하살은 7각분(覺分)에도 다함이 없으니,
일곱 가지란 무엇인가 하면,
생각하여 깨닫는 법[念覺分],
법을 가려서 깨닫는 법[擇法覺分],
정진하여 깨닫는 법[精進覺分],
기쁨으로 깨닫는 법[喜覺分],
제거하므로 해서 깨닫는 법[除覺分],
선정에 들어 깨닫는 법[定覺分],
버림으로 깨닫는 법[捨覺分]이 그것입니다.
생각하여 깨닫는 법이란,
능히 법을 관찰하고 법을 분별하여 생각과 지혜를 선택하고 모으고
또 모든 법의 자상(自相)을 관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상이 무엇인가 하면,
모든 법의 자성(自性)이 다 공함을 관찰하고서
이런 법들을 생각하여 분명히 깨닫게 하는 것이니,
이것을 생각하여 깨닫는 법이라고 합니다.
법을 가려서 깨닫는 법이라 함은,
능히 8만 4천의 법 무더기[法聚]를 분별하고 밝히되,
명료해진 법과 같이 분명한 이치는 분명한 이치이며,
분명하지 못한 이치는 분명하지 못한 이치이며,
세간의 진리는 세간의 진리이며,
으뜸 되는 이치의 진리[第一義諦]는 으뜸 되는 이치의 진리이며,
거짓된 이름[假名]은 거짓된 이름이며,
바르고 분명하여 의심이 없는 것은 바르고 분명하여 의심이 없는 것이니,
이러한 법들을 분별하고 선택하는 이것을
법을 가려서 깨닫는 법이라고 합니다.
정진하여 깨닫는 법이라 함은,
생각하여 깨닫는 법이거나
가려서 깨닫는 법이거나
기쁨으로 깨닫는 법이거나
제거함으로 해서 깨닫는 법이거나
선정으로 깨닫는 법이거나
버림으로 깨닫는 법이거나 간에
지혜로써 거두어 가져 용맹하게 정진해서 물러나지 않으려고 부지런히 닦고 힘써
본래의 뜻을 버리지 않고 바른 도를 행하는 것이니,
이것을 정진하여 깨닫는 법이라고 합니다.
기쁨으로 깨닫는 법이라 함은,
그 법을 닦는 기쁨으로서 한량없는 법에 대해
마음으로 기뻐하여 게으르지 않고
청정하고 즐거운 법에 환희용약하며
능히 몸과 마음을 버리고 모든 번뇌를 제거하는 것이니,
이것을 기쁨으로 깨닫는 법이라고 합니다.
제거함으로 해서 깨닫는 법이라 함은,
몸과 마음과 모든 번뇌를 제거하고
번뇌의 덮개를 떠나 선정의 경계에 들어가서
마음을 편히 머물게 하는 것이니,
이것을 제거함으로 해서 깨닫는 법이라고 합니다.
선정으로 깨닫는 법이라 함은,
선정에 들어 모두 깨달을 수 있는 것처럼
선정에 들지 않음은 깨닫는 법이 아니며
또 모든 소견과 번뇌의 얽매임이 처음도 없고 끝도 없어서
그 마음이 평등하고
일체의 모든 법은 별다른 모양이 없음을 알아
능히 이와 같은 모든 법들을 깨닫는다면
이것을 선정으로 깨닫는 법이라고 합니다.
버림으로 해서 깨닫는 법이라 함은,
법으로서 근심하거나 기뻐한다면
그 마음은 빠지지 않고 또한 세간법에 끌리지도 않으며
높음도 없고 낮음도 없어서
바로 머물러 흔들리지 않고
모든 번뇌가 없어 기뻐함도 없고 집착함도 없으며
모든 장애가 없어 참된 이치와 바른 도에 정직하게 따르는 이것을
버림으로 해서 깨닫는 법이라고 합니다.
사리불이여,
이것을 보살의 일곱 가지 깨닫는 법도 다함이 없다고 합니다.
또한 사리불이여,
■ 보살마하살은 여덟 가지 성인의 도[八聖:八正道] 또한 다함이 없으니,
어떤 것을 여덟 가지라고 하는가 하면,
바른 견해[正見]와 바른 생각[正思惟]과 바른 언어[正語]와 바른 행위[正業]과
바른 생활[正命]과 바른 정진[正精進]과 바른 의식[正念]과 바른 선정[正定]이 그것입니다.
바른 견해라 함은,
만약 세간을 벗어남을 보고도
‘나’라는 소견과 중생ㆍ수명ㆍ양육ㆍ장부라는 소견과 단견(斷見)ㆍ상견(常見)과
있다는 소견[有見]과 없다는 소견[無見]을 일으키지 않고,
또 착하거나
착하지 않은 소견과
착하지도 않고 착하지 않음도 아닌 소견을 일으키지 않으며,
나아가 생사와 열반의 두 가지 모양의 소견을 일으키지 않는 이것을 바른 견해라고 합니다.
바른 생각이라 함은,
생각함에 있어서 만약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과 모든 번뇌 따위를 일으킨다면 이것을 바르지 못하다고 하니,
바른 생각은 이와 같은 등의 일을 생각하지도 않고 일으키지도 않으면서
오직 계율과 선정과 지혜와 해탈과 해탈지견만을 생각하는 것이며,
이 바른 생각은 능히 이러한 것들을 생각하여
계율 등의 덩어리에 머무르므로
이러한 생각을 바른 생각이라고 합니다.
바른 언어라 함은,
무릇 연설함에 있어서 그 몸으로 하여금 초조하거나 괴롭게 하지 않고
또 다른 사람을 손상하지 않고서
이와 같이 착하고 미묘하고 좋은 말을 성취하여 바른 도(道)에 나아가니,
이것을 바른 언어라고 합니다.
바른 행위라 함은,
행위가 더러우면 더러운 과보가 있으며,
행위가 깨끗하면 깨끗한 과보가 있고,
행위가 더럽기도 하고 깨끗하기도 하면 더럽기도 하고 깨끗하기도 한 과보가 있으므로
끝내 이러한 행위는 하지 않아야 하며,
행위가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면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은 과보가 있고,
행위로서 능히 행위를 다할 수 있다면 이러한 행위는 반드시 하여야 하니,
이것은 보살이 의지할 행위로서
이러한 바른 행위를 부지런히 닦는 이것을 바른 행위라고 합니다.
바른 생활이라 함은,
성인의 종자와 두타(頭陀)와 위의를 버리지 않고
움직이거나 흔들리지 않아서
모든 간사함이나 아첨 등이 없으며,
세간의 이양(利養)에 끌리지 않으며,
쉽게 길러지고 쉽게 만족하더라도 항상 위의와 예절을 굳게 가지고,
다른 사람의 이익 얻음을 보고서 마음에 불타는 번뇌를 내지 않으며,
자기의 이양에 대해 항상 그치고 만족할 줄을 안다면
이러한 올바른 행은 성인이 칭찬하는 것이므로 이것을 바른 생활이라고 합니다.
바른 정진이라 함은,
만약 삿됨을 향하여 나아간다면 성인이 찬탄하는 바가 아니며,
이른바 탐욕과 음행과 성냄과 어리석음과 번뇌는 바르지 못한 정진이므로 끝내 하지 않고,
능히 바른 진리와 성인의 도와 적멸과 열반으로 반연하는 바른 길에 들어가는 이것이 바른 정진이므로
부지런히 닦고 행하니, 이것을 바른 정진이라고 합니다.
바른 생각이라 함은,
생각을 법에서 놓치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으며,
바르고 곧아서 굽지 않고,
생사의 허물을 보고는 열반에 나아가고,
전일한 마음으로 바른 도를 잊거나 잃어버리지 않는 이것을 바른 생각이라고 합니다.
바른 선정이라 함은,
모든 법에 산란하지 않고 안정되면 보살이 이러한 법에 머물 때 바른 결정을 이루므로 이것을 바른 선정이라고 합니다.
보살이 이 삼매에 머물러 모든 중생을 위해 해탈을 얻기 때문에 바른 결정을 이루니,
그러므로 이것을 바른 선정이라고 합니다.
이 여덟 가지 성인의 도는 모두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부처님들의 도이니,
보살이 이것을 깨닫고는 연설하여 널리 보이고 분별하여 나타내서 부처님 도를 성취합니다.
사리불이여,
이것을 보살의 여덟 가지 도 또한 다함이 없다고 합니다.
또한 사리불이여,
■ 보살마하살이 선정과 지혜를 수행함도 또한 다함이 없습니다.
어떤 것을 선정이라고 하는가 하면,
만약 마음이 적멸(寂滅)하여 고요함에 이르러 적멸해서 타오르지 않으면
마음이 항상 어지럽지 않아서 모든 감관[根]을 수호하며,
움직이거나 흔들리지 않아서 갑작스러움이 없고,
편안하고 자세하고 잠잠하여 굳게 가져 잃어버리지 않으며,
잘 조복하고 부드러워서 고요한 곳에 홀로 처하여 그 몸은 멀리 떠나고,
마음은 굴러다니지 않고 공적(空寂)한 아란야(阿練若)에 있기를 즐거워해서 나쁜 것을 구하지 않습니다.
또, 아무 것도 구함이 없고 많이 구함도 있지 않으며,
바른 명(命)과 바른 행(行)으로 위의를 견고하게 하여
때를 알고는 때에 따라 항상 만족하여 그칠 줄을 알아서
쉽게 기르고 쉽게 만족하며,
모든 것을 견디어 참는 힘 때문에 교만하거나 깔보는 마음이 없어서
능히 나쁜 욕설을 참고 발심하여 오로지 착한 법을 향하여 생각하며,
생각하는 곳과 모든 선정을 즐거워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일으켜서 슬퍼하는 마음에 들어가고
기뻐하는 마음에 편히 머물러 버리는 마음을 닦으며,
초선ㆍ제 이선ㆍ제 삼선ㆍ제 사선과
공한 곳과 식처(識處)와 무소유처(無所有處)와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에 바로 들어가고,
차례로 닦는 아홉 가지 선정[九次第定]을 잘 생각하므로 이것을 선정이라고 하니,
요약하여 말하자면
보살이 선정을 돕기 위하여 한량없고 끝이 없이 부지런히 행하고 닦아 모으는 이것을
보살의 선정이 다함이 없다고 합니다.
지혜라 함은,
이 지혜로 도를 닦아
‘나’가 없고 남도 없으며 중생도 없고 수명도 없는 모든 법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혜는 모든 쌓임[陰]이 허깨비와 같고 요술로 만든 것과 같으며
모든 경계[界]는 평등하며 모든 감관과 대상[入]은 허공의 모임[空聚]과 같다고 분별하며,
모든 진리를 분별하여 모두 다 분명하게 알아서 12인연에 수순하여 이 인연을 관찰하여 알고,
모든 소견과 인과와 깨달음의 증득을 분별합니다.
이른바 분별이란 것은 모든 법에 대해 바른 소견을 얻어
사실대로 보고 참이라고 보고
비었다고 보고 모양이나 원이 없다고 보며,
또 분별함이 없기 때문에 분별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소견이라는 것도 또한 보는 것이 없고 분별하여 아는 것도 없는 것이니,
이와 같은 소견은 진실한 소견이므로 소견이 진실하면 곧 방편을 얻습니다.
이 보살은 이와 같은 지혜의 소견으로 함이 없음을 따르지 않고,
모든 선법을 수행하여 마음이 머무는 곳이 없으니,
이것을 지혜라고 합니다.
사리불이여,
이것을 보살이 선정과 지혜를 수행하여 다함이 없다고 합니다.
또한 사리불이여,
■ 보살마하살은 다라니[總持]와 변재(辯才)도 다함이 없습니다.
어떤 것을 다라니라고 하는가 하면,
닦은 선근을 바른 생각으로 쌓아 모은 것이니,
소유한 8만 4천의 법의 모임[法聚]을 바르게 받아 지녀서
잊거나 잃어버리지 않는 이것을 다라니라고 합니다.
또한 다라니는 모든 부처님께서 설하신 미묘한 법을
일체의 보살과 연각과 성문과 범부와 중생들이
음성과 좋은 말로 다 받아 지닐 수 있으니,
이것을 다라니라고 합니다.
설령 겁의 재앙이 일어나 남은 삶의 목숨을 버린다 해도
보살은 그때 다라니를 바르게 생각하여
잊지도 않고 잃어버리지도 않아서
마치 손바닥에 있는 아마륵(阿摩勒) 과일을 보는 것처럼
보살이 모든 법을 관찰하여 보는 것도 그러하므로 이것을 다라니라고 합니다.
변재라 함은,
보살이 말하는 것이 막히거나 걸림이 없고 머묾도 없고 끊어짐도 없으며
날카롭게 통달하고 즐겁고 빠른 것이니,
이러한 말들은 다 선업(先業)의 청정한 과보이므로 모든 부처님의 옹호를 받고
모든 하늘도 거두어 주며
또 그 말이 그릇됨이 없고 공덕이 허망하지 않아 열반에 나아갑니다.
보살은 이러한 변재를 성취하여
모든 형상과 중생의 종류에 대해 변재를 그 근기에 맞추어
미리 생각하지 않고 미리 분별하지 않고서도
계경(契經)과 게송을 잘 찬탄하여 말할 수 있습니다.
또 대중들과 찰리(刹利)의 무리와 바라문(波羅門)의 무리와 장자의 무리와 사문의 무리와
사천왕의 무리와 삼십삼천의 무리와 마구니의 무리와 범천의 무리에 이르기까지 있는 곳곳에서
자연히 중생의 한량을 알아 걸림이 없는 변재로 그들을 위해 설법하니,
이 보살이 본연 그대로 기쁘고 즐겁게 법의 핵심을 연설하여
종신토록 끊지 않는 이것을 변재라고 합니다.
사리불이여,
이것을 보살의 다라니와 변재도 또한 다함이 없다고 합니다.
사리불이여,
■ 보살마하살은 네 가지 법을 닦아 모으는 것도 또한 다함이 없으니,
어떤 것을 네 가지 법이라고 하느냐면,
이 보살이 모든 행의 덧없음과
모든 행의 괴로움과
모든 법의 ‘나’없음과
모든 법의 적멸한 열반을 아는 것입니다.
덧없음의 이치는 무엇인가 하면,
아무 것도 없음이 바로 덧없음의 이치요,
파괴할 것이 없음이 바로 덧없음의 이치이니,
이 덧없음의 이치란 곧 ‘나’가 없는 이치입니다.
만약에 법에 ‘나’가 없고 파괴할 수 있는 것도 없다면
그 본성이 적멸하기 때문이니,
이것을 덧없음의 이치라고 합니다.
괴로움의 이치는 무엇인가 하면,
아무 것도 구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이것이 바로 괴로움의 이치이고,
애욕에 물듦이 다하였기 때문에 이것이 바로 괴로움의 이치이며,
필요한 것이 없기 때문에 이것이 바로 괴로움의 이치이고,
공하여 존재가 없기 때문에 이것이 바로 괴로움의 이치이므로,
이것을 괴로움의 이치라고 합니다.
‘나’가 없는 이치란 무엇인가 하면,
끝내 ‘나’가 없는 이것이 바로 ‘나’가 없는 이치이니,
‘나’없는 이치는 바로 ‘공’한 이치요,
아무것도 없는 이치이며,
허망하여 진실하지 않은 이치이므로,
이것을 ‘나’가 없는 이치라고 합니다.
적멸한 열반이란 무엇인가 하면,
생각 생각[念念]에 사라지지 않는 그것이 적멸의 이치요,
만약 생각 생각에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적멸이며,
보살은 이 다함이 없는 지혜를 얻어 모든 법의 모양이 적멸과 같음을 아니,
적멸이 바로 열반이므로 이것을 적멸한 열반의 이치라고 합니다.
사리불이여,
이것을 보살이 네 가지 법을 닦아 모아 다함이 없다고 합니다.
■ 또한 사리불이여,
보살마하살은 한 가지 도(道)도 다함이 없습니다.
무엇이 한 가지 도인가 하면,
보살이 얻은 진실한 지혜는 다른 이로부터 들은 것이 아니며,
또 한 가지 도란 보살이 혈혈단신으로 아무 짝[伴侶]도 없이 이미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크게 장엄해서
자기의 힘으로 정진하고 거두어 들여
끝까지 스스로 닦아 다른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으며,
스스로 용맹한 힘을 인연해서 이와 같이 견고하게 장엄함을 세워
모든 중생들이 지은 착한 업을 나도 이와 같이 다 마땅히 짓고,
모든 성인들이 처음 발심하였을 때부터 지은 온갖 행을 나도 마땅히 행하며,
보시는 나의 짝이 아니지만 나는 보시의 짝이고
지계와 인욕과 정진과 선정과 지혜도 나의 짝이 아니지만 나는 그 모든 것의 짝이며,
모든 바라밀은 나를 부릴 수 없지만 나는 모든 바라밀을 부릴 수 있고,
모든 선근도 다 또한 이와 같으며,
이와 같은 법들이 비록 나의 짝은 아닐지라도 나는 마땅히 행하여
다른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용맹스럽게 자기의 힘으로 짝 없이 홀로 행하여
보리도량의 금강좌(金剛座)에 앉아
모든 마구니의 무리를 무너뜨리고
한 생각의 지혜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룩해서
나는 마땅히 이와 같이 깨달아 분명하게 아는 것이니,
사리불이여,
이것을 보살의 한 가지 도도 다함이 없다고 합니다.
또한 사리불이여,
■ 보살마하살은 닦는 방편도 다함이 없으니,
방편이란 무엇인가 하면,
모든 법을 보는 것이 바로 방편이고,
모든 법을 일으키는 것이 바로 방편이며,
보살의 심부름꾼이 되는 것이 바로 방편이고,
끝내 분별하는 것이 방편이며,
제한(齊限)없는 것이 방편이고,
항상 세간을 벗어나는 법을 구하는 데 뜻을 두는 것이 방편이며,
보시할 때에 모든 바라밀을 원만히 갖추는 것이 바로 방편입니다.
금계를 지닐 때 어느 곳에나 자재하게 가서 태어나는 것이 방편이며,
인욕을 행할 때 자기의 몸과 보리의 도를 장엄하는 것이 방편이고,
정진을 행할 때 마음이 머무는 곳이 없는 것이 방편이며,
선정을 닦을 때 물러나거나 잃어버림 없는 것이 방편이고,
지혜를 수행할 때 함이 없음[無爲]을 증득하지 않는 것이 방편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닦을 때 세력이 없는 자를 가엾이 여김이 방편이고,
슬퍼하는 마음을 닦을 때 생사를 싫어하지 않음이 방편이며,
기뻐하는 마음을 닦을 때 즐거워 할 것이 없는 곳에서도 즐거워하는 것이 방편이며,
버리는 마음을 닦을 때 발심하여 모든 선근을 닦아 모으는 것이 바로 방편입니다.
모든 부처님의 눈을 성취하기 위한 까닭에 천안(天眼)을 닦는 것이 바로 방편이며,
모든 부처님의 귀를 성취하기 위한 까닭에 천이(天耳)를 닦아 모으는 것이 바로 방편이며,
부처님의 지혜를 얻어 중생들의 근기와 국량의 깊고 얕음을 알기 위하여 남의 마음을 아는 지혜[他心智]를 닦는 것이 방편이고,
부처님의 지혜를 얻어 3세(世)의 걸림 없음을 알기 위하여 전생의 일을 아는 지혜[宿命智]를 닦는 것이 방편이고,
모든 부처님의 신통력을 얻기 위하여 신통을 닦아 모으는 것이 바로 방편입니다.
중생의 마음에 따르는 것이 방편이고,
이미 스스로 깨닫고서 다시 중생을 깨닫게 하는 것이 방편이며,
자신을 제도하고 나서 아직 제도되지 못한 모습을 나타내 보여 세상 제도하기를 구하여 부지런히 닦는 것이 방편이고,
이미 번뇌를 여의고서도 번뇌가 있음을 보이는 것이 방편입니다.
이미 무거운 짐을 버리고서도 무거운 짐이 있음을 보이는 것이 방편이고 그 근기와 국량을 알고서 법을 설하는 것이 방편이고,
근기가 둔한 중생을 잘 이끌어 정진하게 하는 것이 방편이며,
때와 때 아님을 아는 것이 방편이고,
행해야 할 도를 알아서 삿된 도에 떨어진 중생을 바른 도에 편히 머물게 하는 것이 방편입니다.
한량이 있는 것을 한량이 없게 만들거나 한량이 없는 것을 한량이 있게 만드는 것이 방편이고,
파괴된 것을 본래대로 되돌려 놓는 것이 방편이며,
남을 이기는 것을 나타내 보이는 것도 방편이고,
열반에 다섯 가지 욕망의 즐거움이 있음을 나타내 말하는 것도 방편이며,
이미 해탈을 얻고서도 얽매임이 있음을 보이는 것이 방편이고,
생사에 처해 있으면서 생사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 방편입니다.
모든 위의에 대해 전적으로 감당하는 것은 없으면서도 그 위의에서 물러나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방편이고,
중생을 관찰하되 계를 지키고 있다거나 계를 지키지 않는다고 보지 않는 것이 방편이며,
모든 소견의 반연을 거두어서 다툼이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이 방편이고,
모든 음성은 거짓으로 붙인 이름이어서 실체가 없는 것이 방편입니다.
언제나 삼계에 다니는 것이 방편이고,
해탈의 모양을 얻어 그것을 행하는 것이 방편이고,
범부를 친근히 하기를 성인을 친근히 함과 같이 하는 것이 방편이며,
열반을 증득하지 않고서 항상 생사에 처하는 것이 방편이고,
마구니가 다니는 곳에 큰 광명을 나타내어 번뇌를 없애는 것이 방편이며,
모든 것이 옳다거나 모든 것이 그르다고 하는 것이 방편입니다.
사리불이여,
이것을 보살이 수행하는 방편도 또한 다함이 없다고 합니다.
■ 사리불이여,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팔십 가지가 다함이 없다고 하는 것이니,
이 팔십 가지의 다함이 없음은 모든 부처님 법을 다 받아들여 담을 수 있습니다.”
무진의 보살마하살이 이 법문품(法門品)을 말할 때에
아직 발심하지 못한 67백천의 중생들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었고,
502천의 보살마하살은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었다.
그때 대중들이 갖가지 꽃과 향과 갖가지 꽃다발과 갖가지 꽃 일산을 가지고
여래와 무진의 보살과 아울러 이 경전까지 공양하였으며,
공중에서는 한량없는 하늘 음악
〔天樂〕이 저절로 소리를 내며 이렇게 말하였다.
“모든 부처님께서 한량없는 겁(劫) 동안 닦아 모으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무진의 보살이 이제 이 『대승경』 중에서 이미 그 이치를 설명하였으니,
만약 이 다함이 없는 법문(法門)을 듣고서 믿어 받아 지니고 읽어 외우고 해설하는 이가 있다면,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곧 이 다함이 없는 법을 원만히 갖추게 될 것이다.”
■ 그때 세존께서 어깨 덮는 옷[覆扁衣]을 무진의 보살에게 주시면서 칭찬하여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구나! 보살이 이 뜻을 명쾌하게 말하였으니,
나만 허락하는 것이 아니라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도 다 허락하실 것이다.”
그때 무진의 보살마하살은 두 손으로 옷을 받들어
자기 정수리 위에 두고는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하늘과 세간의 사람들은 마땅히 이 옷을 보고 탑(塔)보다도 더 존중하게 생각할 것이니,
이것은 여래께서 받아서 쓰시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갖가지 보배 옷과 갖가지 보배 일산과 갖가지 보배 깃발과 갖가지 보배 나무와 갖가지 보배 다발이
시방세계로부터 자연히 와서 무진의 보살을 덮어 공양하였다.
이때 이 보배 옷과 깃발과 일산과 나무와 다발들이 저절로 이런 말을 하였다.
“훌륭하고, 훌륭하십니다.
선남자께서 이 다함이 없는 법문(法門)을 잘 말씀하셨으니,
그대의 말씀과 같이 우리들도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때 사리불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이러한 보배 옷 등의 공양꺼리는 어느 곳으로부터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무진의 보살이 처음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낼 때에 교화 받은 중생들이
다 시방에서 이미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였으므로
저 여러 부처님ㆍ정변지(正遍知)들이 은혜를 알고 은혜를 갚기 때문에
이 보배 옷 등을 보내 와서
무진의 보살의 진실한 공덕에 대해 높이 찬탄하고
아울러 말한 경전에까지 공양하는 것이니라.”
그때 대중들이 무진의 보살마하살에게 더욱 공경하고 존중하고 찬탄하는 마음을 내어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들은 이제 큰 이익을 얻을 것이 분명하니,
무진의 보살마하살을 보고서 공손히 공양하고 존중하여 찬탄하였으며,
아울러 이 다함이 없는 법문을 들었도다.
만약 무진의 보살의 이름이라도 듣는다면 좋은 이익을 얻을 것인데,
하물며 눈으로 직접 보고 또 이 경전까지 들은 사람이리오.”
그때 세존께서는 대중들 가운데서 이 말을 들으시고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선남자나 선여인이 보살도를 배워서 한 겁 동안에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고,
계율과 위의를 배워서 견디어 참는 힘으로
모든 중생들의 나고 죽는 고통의 시간을 다 겪어 정근하고 닦아 익히기를
마치 머리털에 불이 붙은 것을 끄듯이 하며,
모든 선정에서 마음을 모아서 지혜의 방편을 성취하더라도,
만약 이 경전을 떠난다면,
나는 말하기를 ‘이 사람은 아직 6바라밀을 원만히 갖추지 못했다’고 하리라.
■ 사리불이여,
만약 어떤 선남자나 선여인이 이 경전을 듣고서 믿고 이해하여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워서
뜻을 이해하며 말한 대로 수행한다면,
나는 말하기를 ‘이 사람은 이미 모든 바라밀을 원만하게 갖추었으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빨리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리라.
왜냐하면 사리불이여,
만약 어떤 보살이 이 경전을 받아 지니어 다른 사람을 위해 연설한다면
이것은 곧 보시바라밀을 원만히 갖춘 것이니,
왜 그런가 하면 모든 보시 중에서는 법보시가 으뜸이 되므로 처음부터 보살의 마음을 잊거나 잃어버리지 않기 때문이니라.
만약 이 경전을 지닌다면 바로 계율을 지니는 것이므로 지계바라밀을 갖출 수 있으니,
왜 그런가 하면 모든 보살들이 배우는 금계(禁戒)는 이 경전에 거두어지기 때문이며,
만약 이 경전을 능히 견디어 참고 즐거워한다면 모든 중생들이 파괴하지 못할 것이니
이 경전에 나아가 인욕을 닦는다면
곧 인욕바라밀을 원만히 갖출 것이다.
만약 이 경전을 부지런히 행하고 옮겨 연설하여 몸과 입과 뜻의 업을 부지런히 닦아 모은다면
곧 정진바라밀을 원만히 갖출 것이며,
만약 이 경전에서 그 마음이 적멸하여 산란하지 않고 한결같은 마음과 안정된 뜻으로 법상(法相)을 분별한다면
곧 선정바라밀을 원만히 갖추게 되며,
만약 이 경전에서 스스로 현지(現智)를 얻어 다른 이로부터 듣지 않고서 바른 행의 지혜를 얻는다면
곧 반야바라밀을 원만히 갖추게 되리라.
사리불아,
어떤 보살이든지 이 경전을 부지런히 배워서
모든 바라밀을 원만히 갖추려고 한다면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사리불아,
어떤 보살이 이 경전을 배워 익혀서 받아 지니며 읽고 외워서
경전의 말씀과 같이 수행하고 또 그 경전을 베껴 쓴다면,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모든 부처님 법을 이미 자기의 손에 넣었으니,
네 가지 원소[四大]의 성질은 변화시켜 다르게 할 수 있을지라도
이 보살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대한 마음은 다시 흔들리게 할 수 없느니라.
■ 사리불아,
이 경전은 바로 보살의 퇴전(退轉)하지 않는 인(印)이다.
그러므로 보살은 마땅히 이 인을 구해야 하니,
만약에 어떤 선남자나 선여인이 이 인을 친근히 한다면
곧 모든 부처님 법을 친근히 하는 것이 되느니라.”
그때 사천왕과 그의 권속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하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 사천왕도 부처님의 제자로서 이미 도의 자취를 얻었으니,
만약에 어떤 선남자나 선여인이 이 경전을 받아 지닌다면,
저희들은 이 사람을 위해 지켜주고
필요한 것을 제공하고
심부름하는 일을 맡을 것이며,
마땅히 이 사람에게 여래라는 생각을 일으키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경전 가운데서 모든 승(乘)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때 석제환인(釋提桓因)이 곧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하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제가 여러 부처님으로부터 한량없고 끝이 없는 백천 가지의 경전을 들었으나
아직 이렇게 깊은 이치를 분별하는 경전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세존이시여,
어느 국토의 도시나 성읍이나 촌락이나 간에 이 경전을 연설하는 자가 있다면
저는 마땅히 삼십삼천을 몸소 인솔하여 일부러 그곳에 가서 법을 받아 듣겠으며,
아울러 법사를 옹호하여 그 기력을 돕고 그의 바른 생각과 변재를 용맹정진하게 하는 동시에
법사로 하여금 여러 대중에게 두려움 없이 이러한 경전을 널리 펼쳐 설하도록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구나.
교시가(橋尸迦)야,
네가 이 설법하는 자를 옹호하여 용맹정진으로 바른 생각과 변재를 얻게 하려고 하는구나.
교시가야,
만약 이 설법하는 사람을 옹호하려고 한다면
곧 모든 부처님의 바른 법을 옹호하는 것이 되며,
바른 법을 옹호하는 것은 모든 중생들을 옹호하는 것이 되느니라.”
그때 범자재천왕(梵自在天王)이 합장하고 꿇어 앉아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이 경전을 유포하는 곳이라면 제가 몸소 여러 범천 대중과 그의 권속들과 더불어
선정의 기쁨을 버리고서 저 곳으로 나아가 받아 듣고 질문하리니,
제가 저곳에 나아갈 때에는 마땅히 네 가지 상서를 나타내어 그들로 하여금 깨달아 알게 하겠습니다.
네 가지 상서란,
첫째 미묘한 광명을 보게 하는 것이요,
둘째 특별한 향내를 맡게 하는 것이요,
셋째 설법하는 이가 걸림 없는 변재와 바른 기억을 얻어 좋은 상서로움을 말하되
문장이나 구절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요,
넷째 그 대중들이 착한 욕심을 내어 즐거이 법을 듣되 충분하다고 만족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니,
이 네 가지 상서를 가지고 범천왕이 그의 권속을 데리고 몸소 와서 법을 듣는다고 마땅히 알 것입니다.”
그때 여섯 번째 마왕(魔王) 파순(波旬)이 합장하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러한 경전은 저희들의 세력을 모두 쇠약하게 만들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보살이라도 이 경전을 듣고서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거나 다른 사람을 위해 설한다면
마땅히 그 보살은 곧 기별을 받으리라[受記]고 알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이러한 보살이 나아가는 곳은 모든 부처님 세계에 이르니,
마땅히 부처님과 같음을 알아야할 것입니다.
지금 제가 가지고 있는 교만과 질투와 잘난 체하는 마음은
무진의 보살의 위덕의 힘 때문에 이미 다 꺾이고 조복되었으니,
저도 이제는 마땅히 이러한 경전과 설법하는 자를 옹호하겠습니다.
이 경전이 있는 곳이나 유포하는 곳이라면
조금도 방해할 생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거늘,
하물며 제 자신이 일부러 가서 그런 인연을 짓겠습니까?”
그때 부처님께서 아난존자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도 오늘부터 마땅히 바른 법을 오래 세상에 머물게 하기 위하여
이 경전을 받아 지니고 읽어 외우고 풀어 설하여라.”
아난존자는 매무새를 가다듬고 일어나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꿇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제가 이제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경히 받들어 이 경전을 받아 지닐 것이니,
다만 여러 보살들처럼 널리 유포하지 못할까 걱정일 따름입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우선 안심하여라.
지금 이 모임에 있는 보살마하살들이 스스로 옹호하여 지녀서
이 경전이 널리 유포되게 할 것이니라.”
그때 이 법회에 있던 60억 보살마하살로서 법을 옹호할 자들이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하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이 반드시 이 경전을 베풀어 전하여 시방에 두루 이르게 하고
또 사바세계(裟婆世界)의 미륵대사(彌勒大士)에게
거기에서 이 경전과 설법하는 사람을 옹호하도록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부처님께서 멸도하신지 5백 년 뒤에
어떤 보살이 이 경전을 듣고서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운다면,
이는 다 미륵의 신력(神力)으로 이루어진 것인 줄 알겠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법을 옹호할 보살마하살들을 칭찬하여 말씀하셨다.
“착하고도 착하구나.
여러 선남자들아,
너희들은 이제 내 앞에서만 바른 법을 옹호하여 지닐 뿐 아니라
일찍이 과거에도 항하의 모래처럼 많은 부처님들의 바른 법을 옹호하여 지녔느니라.”
그때 무진의 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제가 이제 외람되게도 조그마한 지혜로써 이 경전을 분별하여 연설하였으나
문자와 이치는 반드시 풀이함이 원만하지 못하다고 생각되므로
이제 부처님 앞에서 이 다함없는 법을 성취할 모든 보살에게
저의 과실을 참회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무진의 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만약 어떤 보살이 네 가지 걸림 없는 지혜를 얻는다면
강론과 연설하는 것에 그릇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보살이라도 참된 ‘공’의 이치를 얻어 법문(法門)을 분별하여야만
능히 이러한 경전을 베풀어 설할 수 있을 것이다.
선남자야,
너는 이제 이미 제일의 지위에 도달해서 네 가지 변재를 성취하여 자재하여 걸림이 없으니,
이는 대승의 경전을 다른 데서 듣지 않고도 능히 분별하는 것이니라.
선남자야,
너는 이제 이러한 지위에 머물러서 몸과 입과 뜻의 업에 그릇됨이 없으리니,
왜냐하면 보살이 수행하는 세 가지 업을 성취하되 항상 지혜로서 근본을 삼기 때문이니라.
선남자야,
그렇기에 한량없는 백천 만억의 모든 부처님께서
이미 다 너의 설법을 듣고 찬양하지 않았느냐?
무진의야,
너는 본래 이미 내가 있는 곳과 모든 부처님이 계신 곳에서 마침내 참회하였으니
아무런 그릇됨이 없느니라.”
이때 아난존자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 경전의 이름은 무엇이며,
어떻게 받들어 지녀야 합니까?”
■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이 경전의 이름은 ‘무진의 보살이 설법한 다함이 없는 이치의 장구(章句)의 법문’이라 하고,
또 ‘대집(大集)’이라고 하니,
마땅히 이와 같이 받들어 지녀야 하느니라.
아난아,
너는 마땅히 이러한 경전을 믿고 받들어 모셔야 하니,
왜냐하면 네가 이 경전을 수지하고 나면
지니고 생각하는 것이 전보다 몇 천 배나 될 것이며,
만약 다른 사람을 위해 설법한다면
곧 불사(佛事)를 세우는 것이기 때문이니라.”
부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나자
무진의 보살마하살과 아난존자와 사리불과
여러 하늘과 용과 귀신과 건달바와 아수라 등
모든 대중들이 다 기뻐하면서 예배하고 물러갔다.
○ [pt op tr]
◈Lab value 불기2564/02/12 |
그래서 일단 비 안 오는날 부터 일일산책작전을 시작하기로 방침을 다시 바꿨다.
요즘 과거 조각글을 다시 한번 읽으며 정리 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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