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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4-04-01_석마하연론_001 본문
『석마하연론』
K1397
T1668
석마하연론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 해제[있는경우]
● TTS 음성듣기 안내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 [pt op tr] 석마하연론_K1397_T1668 핵심요약
♣1397-001♧
『석마하연론』
석마하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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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마하연론
석마하연론(釋摩訶衍論) 제1권
용수(龍樹) 지음
벌제마다(筏提摩多) 한역
이인혜 번역
원만히 깨달으신 분과
깨달음으로 증득하신 법장(法藏)과
논을 지으신 대사와
모든 성현들께 머리 숙여 절합니다.
격단문(隔檀門)을 열고1)
향해 나가는 지위[往向位]를 방편으로 보여 주고자 함은2)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여
조금이나마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함이네.
【釋】 지금 이 논을 지어 『마하연론(摩訶衍論)』을 해석하려는 목적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우리 스승의 도체(道體)는 매우 깊고
그가 도달한 궁극의 경지는 미묘하기 때문에
바르게 증득하지 못한 자는 삿된 수행을 면할 수 없을뿐더러,
그 경지가 막막하고 아득하여
사실상 엿볼 길이 없는 사유를 넘어선 영역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둘째는 영리한 근기나 둔한 근기의 중생 모두에게 단번에 들어가는 문[頓入門]을 열어 주는 한편,
점차로 닦아 나아가는 지위[漸進位]를 보여 주어 깊고 깊은 이치로 들어가게 해 주기 위함이다.
셋째는 독을 멎게 해 주신 스승의 은혜가 매우 중하므로 그 큰 은혜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기 위함이다.
넷째는 미래의 중생들이 백천 가지로 쟁론을 일으켜 이 논의 종지를 훼손할 것임을 비밀스럽게 관찰하였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아세야(阿世耶)3)를 직접 듣고 받자왔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인연이 있어 필연적으로 이 논을 짓게 되었다.
위에서는 논을 짓는 근본 취지를 말하였다.
이제부터는 많은 논이 어떻게 구별되는지에 관해서 말하겠다.
논에는 몇 가지 부류가 있으며,
어떤 논들이 어떤 부류에 속하는가?
그 중에 이 『마하연론』은 어디에 들어가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십만 구천 부(部)의 논은
모두 열 가지로 분류되니
마가라론과 발제론
오사마론과 사타론
별나제사론과
아부제론과 발마론
호가론과 마승나론
건파마가론에 속한다네.
【釋】 대대로 내려온 갖가지 논을 모으면 모두 십만 구천 부에 달한다.
이 논들은 모두 열 가지로 분류된다.
열 가지란 어떤 것들인가?
첫째는 『마가라론(摩訶羅論)』,
둘째는 『발제론(跋提論)』,
셋째는 『오사마론(鄔舍摩論)』,
넷째는 『사타론(闍他論)』,
다섯째는 『벌나제사론(筏那提舍論)』,
여섯째는 『아부제론(阿部帝論)』,
일곱째는 『발마론(跋摩論)』,
여덟째는 『호가론(呼呵論)』,
아홉째는 『摩僧那論)』,
열째는 『건파론(鍵婆論)』이상 열 가지다.
이 중에 『마하연론』은 여의론(如意論)에 속한다.
■ 마명(馬鳴)보살이 지은 논에는 몇 가지가 있으며,
어떤 문장형태[文]로 되어 있으며,
어떤 내용[義]을 담고 있는가?
그 중에 『마하연론』은 어디에 속하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부로 따지면 백 부요
문장형태로는 아흔 가지며
내용으로 보면 열 가지인데
이 논은 보책(寶冊)4)에 들어간다네.
■ 【釋】 마명보살이 지은 논은 모두 백 부인데,
이 백 부 중에 아흔아홉 가지는 화문론(華文論)에 들어가며
나머지 열 가지는 섭의론(攝義論)에 속한다.5)
열 가지 섭의론이란 그 명칭이 어떠하며,
논에서 펼쳐 보이는 내용은 같은가,
다른가?
게송으로 말한다.
변만론과 귀진론
중장론과 미묘론
합일론과 삼매론
청정론과 본원론
현리론과 기신론
모두가 동일한 상을 건립하였네.
■ 【釋】 무엇이 열 가지인가?
첫째는 『일심변만론(一心遍滿論)』,
둘째는 『융속귀진론(融俗歸眞論)』,
셋째는 『법계중장론(法界中藏論)』,
넷째는 『비밀미묘론(袐密微妙論)』,
다섯째는 『중명합일론(衆命合一論)』,
여섯째는 『진여삼매론(眞如三昧論)』,
일곱째는 『심성청정론(心性淸淨論)』,
여덟째는 『부동본원론(不動本原論)』,
아홉째는 『심심현리론(甚深玄理論)』,
열째는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이상을 열 가지 논이라 한다.
이 열 가지 논은 부류는 다르지만 건립하는 법상은 한 가지다.
이제까지는 논들이 어떻게 구분되는지[論差別]를 말하였으니,
이제부터는 장이 어떻게 구분되는지[藏差別]를 밝히겠다.
장(藏)에는 몇 가지 부류가 있으며,
■ 어떤 장들이 어떤 장에 속하는가?
그 중 이 『마하연론』은 어디에 들어가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오십일 장(藏)으로 나누기도 하고
경에서처럼 열 장에 한정하기도 한다네.
모두가 삼장(三藏)에 들어가는데
이 논은 모두에 공통되기도 하고 특수성을 갖기도 한다네.
【釋】 장을 쉰한 가지로 구분하는 것은
장의 인(因)과 과(果)가 그렇게 구분되기 때문이다.
또한 장이 가지고 있는 공덕이 그렇게 구분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며,
수행하는 이를 이끌어 주기 위해서다.
『금강계경(金剛契經)』에서
“부처님께서 불자들에게,
‘내가 그대들을 위해 걸림 없는 언사로
오십 가지 인장(因藏)과 하나의 과장(果藏)을 열어 보이겠다’고 말씀하셨다”라고 설했기 때문이다.
장을 열 가지로 구분하는 경우도 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첫째는 하나의 장만을 건립하여 모든 법을 다 거두어들이는 것으로서,
법계법륜장(法界法輪藏)을 말한다.
『원만계경(圓滿契經)』에서,
“일체 중생이 하는 모든 말과 소리가 여래께서 굴리는 법륜의 소리에 다 들어간다”고 설했기 때문이다.
둘째는 두 가지 장을 건립하여 모든 법을 다 거두어들이는 것으로서,
즉 성문장(聲聞藏)과 보살장(菩薩藏)을 말한다.
『총지계경(摠持契經)』에서,
“한없는 법문이 있지만 두 가지 장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설했기 때문이다.
셋째는 세 가지 장을 건립해서 모든 법을 다 거두어들이는 것으로서,
앞의 두 가지에 여래장(如來藏)을 더한 것이다.
『광명계경(光明契經)』에서
“갠지스 강의 모래알보다 많은 부처님들이 말씀하신 베풀어 주신 것은 오직 성문법장과 보살법장과 여래법장뿐이며,
그 밖에 다른 도는 없다”고 설했기 때문이다.
넷째는 네 가지 장을 건립하여 모든 법을 다 거두어들이는 것으로서,
앞에다가 보특가라장(補特伽羅藏)6)을 더한 것이다.
『도품계경(道品契經)』에서,
“불자여, 잘 들어라.
그대들을 위해 풀어서 설명해주겠다.
인의예지신장(仁義禮智信藏)과 성문장과 보살장과 대각법장(大覺法藏)이 있다.
어째서인가?
모든 행자들이 이 차례법에 의해 점차적으로 수승(殊勝)한 도에 나아가기 때문이다”라고 설했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다섯 가지 장을 건립하여 모든 법을 다 거두어들이는 것으로서,
앞에다가 천장(天藏)을 더한 것이다.
『천자계경(天子契經)』에,
“부처님께서 야론(耶論)에게 말씀하셨다.
‘청정한 보공(報空)을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
내가 대중을 위해 정장(淨藏)7)과 인장(人藏)과 이승장(二乘藏)8)과 모든 부처님의 대각법장을 널리 설하겠다”라고 설했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여섯 가지 장을 건립하여 모든 법을 다 거두어들이는 것으로서,
앞에다가 나락가장(奈落迦藏)9)을 더한 것이다.
『포외계경(怖畏契經)』에,
“나는 앉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팔만 사천 나락가장을 분별해서 설하겠다”고 설했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앞에 설한 다섯 가지 장과 같다.
일곱째는 일곱 가지 장을 건립하여 모든 법을 다 거두어들이는 것으로서,
앞에다가 마라구다야장(摩羅鳩多耶藏)10)을 더한 것이다.
『반모계경(班母契經)』에,
“내 이제 반모(班母) 등 일억 칠만 삼천 대중을 위해 오만 천삼백두 가지 귀신도장(鬼神道藏)을 사실대로 분별해서 말해주겠다”고 설했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앞에 설한 여섯 가지 장과 같다.
여덟째는 여덟 가지 장을 건립하여 모든 법을 다 거두어들이는 것으로서,
앞에다가 건파타나발장(鍵婆陀那跋藏)11)을 더한 것이다.
『용왕계경(龍王契經)』에,
“난타용왕(難陀龍王)이 여래께 팔천 가지 질문을 던지니 부처님께서는 십억 가지 방생도장(傍生道藏)을 열어 보이셨다”고 설했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앞에 설한 일곱 가지 장과 같다.
아홉째는 아홉 가지 장을 건립하여 모든 법을 다 거두어들이는 것으로서,
앞에다가 기세계장(器世界藏)12)을 더한 것이다.
『세계계경(世界契經)』에,
“이때 세존께서 수목(樹木)의 신에게 말씀하셨다.
‘훌륭하구나,
훌륭하구나.’ 그대가 말한 대로,
듣고 싶어 하는 자가 있다면 내 그대를 위해 중생이 의지해 머무는 장을 분별해서 설해 주겠다”고 설했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앞에서 설한 여덟 가지 장과 같다.
열째는 열 가지 장을 건립하여 모든 법을 다 거두어들이는 것으로서,
앞에다가 잡란장(雜亂藏)13)을 더한 것이다.
『음성계경(音聲契經)』에,
“내 이제 여덟 가지 잡장을 열어 보여주겠다”고 설했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앞에서 설한 아홉 가지 장과 같다.
이것이 장을 열 가지로 구분한 것이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장이 십억 팔천 가지 법장을 다 거두어들인다.
한편 근본이 되는 삼장[根本三藏]으로 이 열 가지를 통합하기도 한다.
무엇이 근본이 되는 삼장인가?
첫째는 소달람장(素呾嚂藏),
둘째는 비나야장(毘捺耶藏),
셋째는 아비달마장(阿毘達磨藏)이다.
이것을 근본이 되는 삼장이라 한다.
『마하연론』이 이 세 가지 모두에 속하는지,
아니면 아비달마장에만 속하는지가 의문이므로 위 게송에서 “공통되기도 하고 특수성을 갖기도 한다네”라고 한 것이다.
공통된다는 것은 『마하연론』이 삼장(三藏) 각각에 대해 공통적으로 연관성을 갖는다는 뜻이고,
특수성을 갖는다는 것은 다른 것과는 구별되는 『마하연론』만의 특성을 갖는다는 뜻이다.
장(藏)이라 이름한 이유는 수행의 법도를 간직하여 그에 상응하는 것들을 잃지 않기 때문이다.
이 장(藏)이 어떤 식으로 구분되는지를 살펴보았다.
다음으로 경(經)이 어떻게 구분되는지에 대해 설하겠다.
경에는 몇 가지 부류가 있으며,
어떤 경들이 어떤 부류에 들어가는가?
그 중에 『마하연론』은 어떤 경을 근거로 삼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모두 백 낙차(洛叉)14)부의 경은
십이부경으로 통합된다네.
수다라와 기야
비가라나
가타와 우타나
그리고 니타나
아파타나경과
이제목다가
사타가와 비불략
아부타달마
우파제사경 중에 모두를
혹은 특정한 것을 소의로 삼는다네.
【釋】 대대로 내려온 갖가지 경들을 다 합해 보면 백억 부(部)가 되는데,
이 경들은 모두 열두 가지 부로 통합된다.
어떤 것들이 열두 가지인가?
첫째 수다라(修多羅),
둘째 기야(祇夜),
셋째 비가라나(毘伽羅那),
넷째 가타(伽陀),
다섯째 우타나(憂陀那),
여섯째 니타나(尼陀那),
일곱째 아파타나(阿波陀那),
여덟째 이제목다가(伊帝目多伽),
아홉째 사타가(闍陀伽),
열째 비불략(毘佛略),
열한째 아부타달마(阿浮陀達摩),
열두째 우파제사(優波提舍)다.
이것을 열두 가지라 이름한다.
이 『마하연론』은 모두에 공통되기도 하고,
하나에 국한되기도 한다.
공통된다는 것은 열두 가지에 다 관련된다는 뜻이고,
국한된다는 것은 다른 경과는 무관하게
특정한 경을 소의(所依)로 삼는다는 뜻이다.
『마하연론』은 얼마 안 되는 적은 문구에 매우 깊고 묘한 의미를 담고 있는데,
어떻게 바다같이 무량무변한 계경을 모두 소의로 삼을 수 있는가?
파살이가락(婆薩伊伽諾)15)과 같기 때문이며,
표다라달제(標多羅呾提)16)와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중에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
특정한 소의가 되는 경에는 어떤 부류가 있으며,
몇 가지나 되는가?
어떤 명칭,
어떤 권속이 있으며 거기 속하는 것은 몇 개인가?
게송으로 말한다.
모두 백 가지 소의경(所依經)이 있으니
광명대각경(光明大覺經) 등이네.
앞의 오십 가지에 각각 백 가지
뒤의 오십 가지에 각각 천 가지가 있네.
【釋】 『마하연론』이 특정하게 소의로 삼는 경은 모두 백 가지다.
무엇이 백 가지인가?
첫 번째 『광명대각경(光明大覺經)』,
두 번째 『심심순리경(甚深順理經)』,
세 번째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
네 번째 『제법무행경(諸法無行經)』,
다섯 번째 『수림설법경(樹林說法經)』,
여섯 번째 『무진일지경(無盡一地經)』,
일곱 번째 『청정여여경(淸淨如如經)』,
여덟 번째 『자성자체경(自性自體經)』,
아홉 번째 『대승동성경(大乘同性經)』,
열 번째 『아리야식경(阿梨耶識經)』,
열한 번째 『과원만경(果圓滿經)』,
열두 번째 『허공등경(虛空等經)』,
열세 번째 『삼삼매경(三三昧經)』,
열네 번째 『일심법경(一心法經)』,
열다섯 번째 『본성지경(本性智經)』,
열여섯 번째 『진법계경(眞法界經)』,
열일곱 번째 『섭무량경(攝無量經)』,
열여덟 번째 『최상극경(最上極經)』,
열아홉 번째 『유마힐경(維摩詰經)』,
스무 번째 『능가왕경(楞伽王經)』,
스물한 번째 『중실경(中實經)』,
스물두 번째 『무시경(無始經)』,
스물세 번째 『십인경(十因經)』,
스물네 번째 『윤전경(輪轉經)』,
스물다섯 번째 『자운경(慈雲經)』,
스물여섯 번째 『기심경(器心經)』,
스물일곱 번째 『무위경(無位經)』,
스물여덟 번째 『현성경(賢聖經)』,
스물아홉 번째 『은밀경(隱密經)』,
서른 번째 『화엄경(華嚴經)』,
서른한 번째 『대품경(大品經)』,
서른두 번째 『적멸경(寂滅經)』,
서른세 번째 『성궤경(聖軌經)』,
서른네 번째 『변연경(遍緣經)』,
서른다섯 번째 『훈습경(熏習經)』,
서른여섯 번째 『불성경(佛性經)』,
서른일곱 번째 『현리경(玄理經)』,
서른여덟 번째 『능가경(楞伽經)』,
서른아홉 번째 『본업경(本業經),
마흔 번째 『온고산경(蘊高山經)』,
마흔한 번째 『귀본경(歸本經)』,
마흔두 번째 『진수경(眞修經)』,
마흔세 번째 『팔덕경(八德經)』,
마흔네 번째 『불혜경(佛慧經)』,
마흔다섯 번째 『연기경(緣起經)』,
마흔여섯 번째 『일체경(一體經)』,
마흔일곱 번째 『자불혜경(自佛慧經)』,
마흔여덟 번째 『대해경(大海經)』,
마흔아홉 번째 『무상경(無相經)』,
쉰 번째 『변진여경(遍眞如經)』,
쉰한 번째 『십종여래장경(十種如來藏經)』,
쉰두 번째 『삼신본유경(三身本有經)』,
쉰세 번째 『팔식통달연경(八識通達緣經)』,
쉰네 번째 『중생신등법경(衆生身等法經)』,
쉰다섯 번째 『제불무진장경(諸佛無盡藏經)』,
쉰여섯 번째 『찬탄불선품경(讚歎不善品經)』,
쉰일곱 번째 『제법동일상경(諸法同一相經)』,
쉰여덟 번째 『일체대비관경(一切大悲觀經)』,
쉰아홉 번째 『여여본지혜경(如如本智慧經)』,
예순 번째 『진진법계찰토경(塵塵法界刹土經)』,
예숩한 번째 『윤전본제경(輪轉本際經)』,
예순두 번째 『법계법륜경(法界法輪經)』,
예순세 번째 『대지본유경(大智本有經)』,
예순네 번째 『평등법계정(平等法界經)』,
예순다섯 번째 『사상상주경(四相常住經)』,
예순여섯 번째 『진여일상경(眞如一相經)』,
예순일곱 번째 『유전부동경(流轉不動經)』,
예순여덟 번째 『적정열반경(寂靜涅槃經)』,
예순아홉 번째 『통달음성경(通達音聲經)』,
일흔 번째 『여래자상경(如來自相經)』,
일흔한 번째 『부인경(夫人經)』,
일흔두 번째 『법문경(法門經)』,
일흔세 번째 『팔유경(八喩經)』,
일흔네 번째 『중재경(中在經)』,
일흔다섯 번째 『총지경(總持經)』,
일흔여섯 번째 『부동경(不動經)』,
일흔일곱 번째 『양지경(兩智經)』,
일흔여덟 번째 『도지경(道智經)』,
일흔아홉 번째 『본각경(本覺經)』,
여든 번째 『대무량경(大無量經)』,
여든한 번째 『자연본과경(自然本果經)』,
여든두 번째 『심심법장경(甚深法藏經)』,
여든세 번째 『일도청정경(一道淸淨經)』,
여든네 번째 『십종망상경(十種妄想經)』,
여든다섯 번째 『법문현료경(法門顯了經)』,
여든여섯 번째 『경계원만경(境界圓滿經)』,
여든일곱 번째 『광명실지경(光明實智經)』,
여든여덟 번째 『인과동체경(因果同體經)』,
여든아홉 번째 『심신불공경(心神不空經)』,
아흔 번째 『진지무생행경(眞智無生行經)』,
아흔한 번째 『무애해탈경(無礙解脫經)』,
아흔두 번째 『수연증장경(隨緣增長經)』,
아흔세 번째 『법성실제경(法性實際經)』,
아흔네 번째 『광대허공경(廣大虛空經)』,
아흔다섯 번째 『본인연기경(本因緣起經)』,
아흔여섯 번째 『제법무위경(諸法無爲經)』,
아흔일곱 번째 『본래청정경(本來淸淨經)』,
아흔여덟 번째 『수행도지경(修行道地經)』,
아흔아홉 번째 『불수구덕경(不修具德經)』,
백 번째 『마하살운약경(摩訶薩雲若經)』이다.
이것을 백 가지 경이라 한다.
이와 같은 백 가지 부류의 경에서 앞 오십 권에
각각 백 가지 경이 속하고,
뒤 오십 권에 각각 천 가지 씩의 경이 속하는데,
경의 명칭만 들어도 논의 전체적인 요지가 어디에 속하는지를 알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서 문맥에 따라 그때그때 설명하겠다.
이제까지는 경이 어떻게 구분되는지를 설명하였다.
다음부터는 논을 지은 사람에 대해 논하겠다.
■ 이 논을 지은 사람에 대해 경전에서 다르게 설하고 있는 것은 몇 가지이며,
여기서 말하는 마명논사(馬鳴論師)는 그 중 어디에 속하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모두 여섯 분의 마명이 있으니
경에서 다르게 설하고 있기 때문이라네.
그러나 근기에 따라 응하신 것이기에
다른 분이라는 과실은 없으리.
【釋】 대대로 내려오는 경전에서 마명(馬鳴)논사에 관한 내용을 다 모아 보면,
모두 여섯 종류가 있다.
어떻게 해서 여섯인가?
첫 번째는 『대승본법계경(大乘本法契經)』에서 다음과 같이 설한다.
“더없이 높으신 대각존께서 열반의 인연에 들 것을 설하시자
마명보살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에 이마를 대고 절한 뒤
합장하여 공경을 표하고는 세존이신 부처님께 게송으로 아뢰어다.
대자비를 완성하신 더없이 존귀하신 분
바다같이 가없는 겁토록 만행을 구족하셨네.
다름 아니라 모든 부류의 중생에게 자비를 베푸시려고
부처님 스스로 열반에 드신다 말씀하시니,
나와 모든 대중들은
아득하고 막막하여 정신을 잃을 지경이라네.
대자비를 완성하신 높으신 세존께서
나와 불자들을 버리고 다른 세계로 가신다 하니
하물며 나는 자비를 완성하지도 못했거늘
부처님 따라 다른 세계로 간다한들 그 누가 비방하리.
이때 마명보살이 이 게송을 마치고 부처님의 눈동자를 보았는데,
부처님은 서서히 자연스럽게 명을 마치셨다.
두 번째는 『변화공덕계경(變化功德契經)』에서 다음과 같이 설한다.
“이때 세존께서 마명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멸도하고 나서 삼백 년이 지난 뒤,
너는 나의 가피력을 받아서
갖가지 방편법으로 말세의 중생들에게 이익을 주고
그들을 안락하게 하리라.
그런데 내가 가피력을 주지 않고서는
네 스스로 그런 능력을 갖지는 못할 것이다.’”
세 번째는 『마하마야계경(摩訶摩耶契經)』에서 다음과 같이 설한다.
“여래가 멸도하신 뒤 육백 년이 지나면 구십육 종의 외도들이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사견을 일으켜 불법을 훼손하고 없애려 할 것이다.
이때 마명이라는 한 비구가 나타나
불법의 요지를 잘 설하여 모든 외도 무리들을 항복시킬 것이다.”
네 번째는 『상덕삼매계경(常德三昧契經)』에서 다음과 같이 설한다.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뒤 팔백 년 쯤 되어서,
마명이라는 이름을 가진 지혜로운 이가 하나 나올 것이다.
그는 불가에 있든지 아니면 외도 무리 중에 있든지 간에
모든 외도를 무찌르고 불법을 세울 것이다.”
다섯 번째는 『마니청정계경(摩尼淸淨契經)』에서 다음과 같이 설한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지 백여 년 쯤 되어서
마명대사가 세상에 나와서
정법을 지키고 보호할 것이다.”
여섯 번째는 『승정왕계경(勝頂王契經)』에서 다음과 같이 설한다.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지 열이레 째 되던 날
가라락구시마(迦羅諾鳩尸摩)라고 하는 외도가 하나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몸에 변화를 부려 대용왕이 되었다.
그의 몸에는 팔만 육천 개의 머리와 팔만 육천 개의 혀가 달려 있었다.
그리고는 서로 모순되는[相違] 팔만 육천 가지 난문제를 들고 나와 여래께 물었다.
여래께서는 세 가지 다른 차원[三重]의 답을 가지고
용왕의 난제들을 회통시켜 끊어 주었다.
그러자 용왕은 다시 열 가지 다른 차원의 문제를 들어 여래께 물어왔다.
여래께서는 백 가지 다른 차원의 답을 가지고
난제들을 회통시켜 끊어 주었다.
이렇게 문답이 오간 뒤 부처님께서 용왕에게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마명(馬鳴)사문이여,
불법의 성(城)을 지키려고 파괴하는 모습을 통해 불법을 세우는구나.
잘하고 잘하도다.
항상 이렇게 닦고 항상 이렇게 행하거라.
좁은 길로 가지 말고 부디 넓은 길로 다니거라.’
이때 용왕이 축생의 모습을 버리고
본래 모습으로 돌아와
더없이 존귀하신 세존께 이마를 대고 절한 뒤 합장하였다.
그리고는 기쁨에 찬 모습으로 세존이신 부처님께 게송으로 말하였다.
잘한다 잘한다 하신 말씀
내 귀에 스치고 지나갔는데
진짜인지 가짜인지
마음속에선 대단히 의심스럽네.
나는 축생의 몸도 아니요
외도의 무리도 아니지만
변화로 받는 생을 찬탄하여
이러한 형상으로 변화를 부렸는데,
세존께서는 거울에 비쳐본 듯 알아보시니
나는 이 용왕계를 떠나서
다른 세계에 태어나
가르침 받은 대로 넓은 길을 다니리.
그때 마명은 이 게송을 마치고 나서
선정에 들 때와 같이 적멸의 방에 들었다.”
이상이 여섯 가지다.
이렇게 갖가지 경전에서 각기 다르게 설하지만
근기에 따라 응현하신 것이므로 다른 분이라는 오류는 없다.
■ 그러면 마명보살은 수행위★★ 중에 어느 위(位)에 해당하며,
어느 성(城)에서 탄생하셨으며,
무슨 이유로 이름을 ‘마명(馬鳴)’이라 부르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본래는 대광명불(大光明佛)이요
인위(因位)로 치면 부동위(不動位)에 해당하네.
서천축(西天竺)에서 나시어
과거의 일로 이름을 지었네.
【釋】 마명보살은 그 근본을 따져보면 대광명불이며,
인위를 논한다면 제팔지(第八地) 안에 자리하신 보살이다.
노가(盧伽)를 아버지로,
구나(瞿那)를 어머니로 하여 서천축에서 탄생하셨으며,
함께 태어난 이들이 이익을 얻었다.
과거세에 윤타(輪陀)라는 대왕이 한 분 태어났는데,
그때 천백 마리 새가 좋은 소리를 냈다.
새들이 소리를 내면 대왕의 덕이 늘어났고
새들이 소리를 내지 않으면 대왕의 덕이 줄어들었다.
많은 새들은 흰 말을 보면 아름다운 소리를 냈고
흰 말이 보이지 않을 때는 언제나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리하여 대왕은 흰 말을 찾아 이리저리 다녔으나
종일토록 찾지 못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만일 외도의 무리 중에 이 새 소리를 내는 자가 있으면
내가 불교를 몽땅 쓸어버리고 그 외도만을 받들어 믿겠으며,
반대로 불제자 중에 이 새 소리를 내는 자가 있으면
외도의 가르침을 몽땅 쓸어버리고 불교만 받들어 믿겠다.”
이때 보살이 신통력을 써서 흰 말 천 마리를 나타내 보여
천 마리 흰 새를 울게 함으로써
정법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도록 하였다.
이런 일로 해서 세존께서
‘말로 새들을 울게 한 이[馬鳴]’라는 이름을 붙여주셨다.
이제까지는 논을 지은 이의 갖가지 특징을 설하였다.
여기서부터는 『마하연론』의 본문을 제시한 뒤에 해석을 붙이겠다.
【論】 이 하나의 게송은 두 부문으로 나뉜다.
무엇이 두 부문인가?
하나는 일체중생의 명을 다 아우르는 문[摠攝一切衆命門]이고,
또 하나는 원만하신 대각께 귀의하는 문[歸向圓滿大覺門]이다.
총섭문(摠攝門)을 시설한 이유는,
모든 시방의 계(界)에 있는 모든 중생 무리들의 명근(命根)을 다 아우른다는 뜻에서니,
본론에서 ‘명이 시방에 다하도록’이라고 한 것이다.
귀향문(歸向門)을 시설한 이유는 이토록 많은 명을 바쳐 대자비를 원만하게 성취하신 분께 귀의하여 그와 계합하고자 하는 뜻에서니,
본론에서 ‘업이 가장 수승하시고 변지를 갖추신 분,
걸림 없이 자재한 색을 갖추신 분,
대비로 세상을 구제하시는 분께 귀의한다’고 한 것이다.
논사는 몇 가지 덕을 들어 대각세존을 찬탄하고 있으며,
각각의 덕은 어떤 특성을 갖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모두 팔만 사천
사십팔 가지 공덕이 있으니
최승업(最勝業) 등에 각각 열 가지와
지(智)와 무애(無礙)에 각각 네 가지
그리고 팔만 사천 가지로
색상(色相)이 차별되기 때문이라네.
공덕은 셀 수 없으나
결국 이 수를 벗어나지 않는다네.
【釋】 마명보살은 팔만 사천사십팔 가지 공덕을 모두 들어서 위없는 대각을 우러러 찬탄한다.
원만한 불과위(佛果位)에는 비록 한량없고 끝없는 청정한 공덕의 종류[品]가 있지만 결국은 이 수량을 벗어나지 않기에,
마명보살은 전체적인 특성[摠相]을 들어 찬탄한 것이다.
어떻게 해서 팔만 사천 가지 공덕이 되는가?
색의 특성[色相]이 그렇게 차별되기 때문에 팔만 사천 가지가 된다.
어떻게 해서 사십 가지가 되는가?
어디에나 두루하는 가장 뛰어난 업[最勝業遍]에 각각 열 가지가 있으므로 사십 가지가 된다.
어떻게 해서 여덟 가지가 되는가?
지(智)와 무애(無礙)에 각각 네 가지가 있으므로 여덟 가지가 된다.
가장 뛰어나다는 열 가지[十最]는 무엇인가?
첫 번째는 가장 잘 뛰어넘었다는 것[超過最]으로서 이승(二乘)의 지위를 멀리 떠났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가장 잘 벗어났다는 것[出離最]으로서 삼계의 영역을 영원히 떠났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가장 잘 대치했다는 것[對治最]으로서 사주지(四住地)를 단번에 끊었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혐오와 근심을 가장 잘 했다는 것[厭患最]으로서 마치 취락처럼 모여 있는 오온(五蘊)을 이미 초월했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는 애욕을 가장 잘 벗어났다는 것[離愛最]으로서 육도(六道)의 갈래를 영원히 이별했기 때문이다.
여섯 번째는 위엄스러운 덕이 가장 뛰어나다는 것[威德最]으로서 일곱 가지 악의 군대를 물리쳤기 때문이다.
일곱 번째는 가장 뛰어난 병사의 무리[兵衆最]라는 뜻으로서 여덟 가지 사견의 수풀을 다 베어 없앴기 때문이다.
여덟 번째는 지혜의 검이 가장 날카롭다는 뜻[智慧劍最]으로서 구결(九結)17)의 얽매임을 끊었기 때문이다.
아홉 번째는 가장 뛰어나게 해탈했나는 뜻[解脫最]으로서 십전(十纏)18)의 끈을 끊어 없앴기 때문이다.
열 번째는 가장 용맹스럽다는 뜻[勇猛最]으로서 아흔여섯 가지 외도를 모두 꺾었기 때문이다.
이를 가장 수승한 열 가지라고 한다.
경에서는 열 가지 으뜸가는 부처님의 공덕을 설한다.
무엇이 열 가지 수승함[十勝]인가?
첫 번째는 힘이 수승하다는 것[力勝]으로서 열 가지 힘[十力]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두려움 없음이 수승하다는 것[無畏勝]으로서 네 가지 두려움 없음[四無畏]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다른 것과는 공유하지 않는 특성이 수승하다는 것[不共勝]으로서 열여덟 가지 불공법[十八不共法]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도를 닦기 위해 시설된 품계가 수승하다는 것[道品勝]으로서 서른일곱 가지 도품[三十七道品]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는 변화가 수승하다는 것[變化勝]으로서 백 가지 천 가지 변화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여섯 번째는 말과 음성이 수승하다는 것[言音勝]으로서 여든여덟 가지 성스러운 음성[梵音]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일곱 번째는 가장 위엄 있고 단정하다는 것[端嚴勝]으로서 서른두 가지 장부의 모습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여덟 번째는 가장 길하고 상서롭다는 것[吉祥勝]으로서 경계를 짓는 처소에 따라서 공덕이 될 선근(善根)을 만들고 증장하기 때문이다.
아홉 번째는 가장 성취하기 어렵다는 것[難得勝]으로서 삼계 가운데서 유일하게 높은 자리를 성취했기 때문이다.
열 번째는 머무는 처소가 가장 수승하다는 것[住處勝]으로서 머무는 궁전을 구만 팔천 가지 미묘하고 원만한 것들로 장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이 열 가지 수승함이다.
경에서는 또 부처님의 열 가지 수승한 업[十種業]을 설한다.
무엇이 열 가지 업인가?
첫 번째는 자연업(自然業)으로서 무엇이든 자재하게 짓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평등업(平等業)으로서 중생을 교화하고 이익을 주는 데 자별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상응업(相應業)으로서 근기에 맞게 출현하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구족업(具足業)으로서 복과 지혜 두 가지 밑천을 원만하게 갖추었기 때문이나.
다섯 번째는 무진업(無盡業)으로서 업이 끝 간 데가 없기 때문이다.
여섯 번째는 동생업(同生業)으로서 취(趣)에 따라서 생(生)을 받기 때문이다.
일곱 번째는 무착업(無着業)으로서 연꽃과 같이 진속[塵]의 속박을 멀리 떠났기 때문이다.
여덟 번째는 의지업(依止業)으로서 귀의처가 되기 때문이다.
아홉 번째는 싫증을 내지 않는 무염업(無厭業)으로서 큰 바다와 같이 끝없이 중생을 거두어들이기 때문이다.
열 번째는 통달업(通達業)으로서 허공과 같이 아무런 막힘도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열 가지 업이라 이름한다.
경에서는 또 부처님의 열 가지 두루하는 작용[十種作用]에 관해 설한다.
무엇이 열 가지 두루함[十遍]인가?
첫 번째는 근이 두루하다는 것[根遍]으로서 부처님의 갖가지 색근(色根)은 근 각각이 법계 전체에 두루해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식이 두루하다는 것[識遍]으로서 부처님의 갖가지 심식은 가서 닿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경계가 두루하다는 것[境界遍]으로서 대원경지[圓智]의 소연(所緣)에는 분할된 경계가 없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수명이 두루하다는 것[壽命遍]으로서 부처님의 수명이 불가사의하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는 권속이 두루하다는 것[眷屬遍]으로서 부처님의 권속을 다 헤아려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여섯 번째는 공덕이 두루하다는 것[功德遍]으로서 낱낱의 공덕이 모두 허공계와 같기 때문이다.
일곱 번째는 자비가 두루하다는 것[慈悲遍]으로서 부처님께서 자비를 베푸시는 데는 가리고 빼고 함이 없기 때문이다.
여덟 번째는 언설이 두루하다는 것[言說遍]으로서 부처님의 말씀과 음성은 어디든 가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아홉 번째는 증득하신 경계가 두루하다는 것[證遍]으로서 궁극에 이르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열 번째는 다른 것과는 동등하지 않은 작용이 두루 미친다는 뜻[無等遍]으로서 부처님의 작용과 동등한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열 가지 두루함이라 이름한다.
경에서는 이와 같이 어디에나 두루하는 열 가지 작용을 설한다.
무엇이 네 가지 지혜[四智]인가?
첫 번째는 광명이 무진장한 지혜[光明無盡藏智]로서 십억천 가지 지혜의 문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한 맛,
한 모습을 갖는 지혜[一味一相智]로서 갠지스 강의 모래알만큼이나 되는 모든 법이 차별 없음을 통달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대비가 끝없는 지혜[大悲無邊智]로서 한 가지 교화를 일으키면 그 교화가 모든 시방세계에 가득 차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무위적멸의 지혜[無爲寂滅智]로서 모든 일어남과 업 짓는 것을 멀리 떠났기 때문이다.
이것을 네 가지 지혜라 이름한다.
경에서는 이와 같이 네 가지 원만한 지혜를 설한다.
무엇이 네 가지 무애[四無礙]인가?
첫 번째는 법무애(法無礙)로서 모든 법의 실다운 모습과 모든 법의 실다운 성품을 분명히 알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의무애(義無礙)로서 모든 법의 공상(共相)과 차별상(差別相)19) 및 생멸상을 분명히 알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사무애(辭無礙)의서 가명(假名)을 허물지 않고 실상(實相)을 설하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요설무애(樂說無礙)로서 끝없는 말로 바다 같은 계경을 설하여 차례차례 이어져 단절되지 않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네 가지 무애라 한다.
경에서는 또 네 가지 해탈지[四種解脫智]를 설하는데,
자재한 언설이 위에서 든 것과 모두 공통되므로 여기서 따로 거론하지 않겠다.
부처님의 색상과 명칭의 의미는 『대총지경(大摠持經)』에서 자세하게 설한 바와 같다.
이제까지는 불보[覺寶]에 관해서 설하였고,
다음으로 법보(法寶)와 승보(僧寶)에 관해 설하겠다.
【論】 저들 신(身)의 체(體)와 상(相) 모두와
법성인 진여의 바다와
무량한 공덕장과 여실히 수행하는 자들
모두에게 동등하게[等] 귀의합니다.
【釋】 이 하나의 게송은 다시 두 가지 부문으로 나뉜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하나는 모든 중생의 몸[身] 전체를 포함하는 문[體攝門]이고,
또 하나는 법장(法藏)과 승가(僧伽)를 모두 통괄하는 문[摠達門]이다.
체섭문이란 생멸하고 유전(流轉)하는 무량한 일체 중생의 항상됨이 없는 몸을 다 포함하기 때문이니,
본론에서 ‘저들 신의 체와 상 모두’라고 하였다.
총달문이란 이러한 중생의 몸으로 깊고 깊은 모든 법장과 여실하게 수행하는 모든 이들에 다 통하기 때문이니,
본론에서 ‘법성인 진여의 바다와 무량한 공덕과 여실하게 수행하는 자들께’라고 하였다.
‘등(等)’이라는 말은 귀의한다는 뜻을 총체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논사는 몇 가지 법과 승가를 두고 귀의하였는가?
또 어떤 모습으로 귀의한다는 말인가?
게송으로 말한다.
승가에 열 가지,
법장에 네 가지이므로
모두 열네 가지에 귀의하네.
혹은 위아래를 합해서
많은 부류의 승가 무리가 있기도 하다네.
【釋】 마명보살은 열네 가지 덕을 귀의처로 삼는다.
승가(僧伽)는 열 가지,
법장(法藏)은 네 가지로 차별되기 때문이다.
어째서 열 가지 승가가 되는가?
지위[地]가 열 가지로 차별되기 때문이다.
어째서 네 가지 법장이 되는가?
교(敎)ㆍ이(理)ㆍ행(行)ㆍ과(果)가 각기 차별되기 때문이다.
게송의 법성진여해(法性眞如海) 중에 법이란 위 네 가지 법 중에 교법(敎法)에 속하는 것으로서,
근기에 맞게 설해진 모든 경전의 바다를 말한다.
성진여란 위 네 가지 법 중에 이법(理法)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일체법 모두에 체성이 평등하여 가(假)라는 허망을 떠났고 실(實)이라는 집착을 끊었다는 뜻이다.
해란 네 가지 법 중에 과법(果法)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묘각(妙覺)의 과는 마치 큰 바다와도 같이 만 가지 덕이 원만하여 다함없다는 뜻이다.
무량한 공덕장이란 네 가지 법 중 행법(行法)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청정한 품에 속하는 육도만행(六度萬行)의 부류는 사유와 수량을 넘어섰다는 뜻이다.
여실수행(如實修行)에서 여란 열 가지 진여를 말하고,
실수행이란 열 가지 바른 지혜로 진여의 이치를 증득한다는 뜻으로서,
진실한 지혜에 입각해서 승(僧)이라는 명칭을 세운 것이다.
이(理)와 지(智)로써 능(能)과 소(所)를 화통하여 평등한 한 맛이 되게 하는데,
평등에는 쟁론이 없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로 명(命)이란 말을 택하여 시방을 나타내는가?
거두어들이고자 하는 명근(命根)이 광대하고 원만하고 끝이 얼음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서다.
무슨 이유로 신(身)이라는 말을 택해서 그 덕상을 표시하는가?
사상(四相)에 휘둘리는 모든 중생들을 다 섭수해서 그들로 하여금 항상하고 요동없는 금강(金剛)의 몸을 획득하게 한다는 뜻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서다.
무슨 이유로 팔성(八聖)은 자신의 신명만을 다해 귀의하지 않고 무량한 중생의 모든 신명까지 다 해서 삼보에 귀의하는가?
그것은 일체 중생이 절대 평등해서 오직 진여 하나일 뿐 다름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기 때문이며,
중생의 신명과 나의 신명이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한 가지 맛,
한 가지 모습임을 확실히 알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게 송에서 ‘모두에게 동등하게[等]’라고 하였다.
‘등’이라는 말은 지극히 깊은 뜻을 담고 있다.
무슨 이유로 일체 중생의 무량한 신명을 다 거두어 삼보에 귀의하는 모습을 성립시키는가?
시방삼세에 계시는 모든 부처님께서 다 기뻐하시기 때문이며,
시방삼세에 계시는 모든 보살들이 다 찬탄하기 때문이며,
시방삼세의 모든 법장이 끊이지 않고 항상 널리 퍼지기 때문이다.
마명보살은 부동지(不動地)를 증득하신 분으로서 부동지 이하의 공덕을 이미 다 만족하고 계신데,
부동지에 못 미치는 지위에 있는 승들에게까지 다 귀의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귀의하는 자를 중심으로 놓고 보면 그 지위가 다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만일 자신과 일치하는 분께만 귀의한다면 응당 부동지를 만족한 이와 그 위의 두 가지[二地:第九 善慧地 第十 法雲地]에 국한해서 귀의해야 할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어째서 지전보살(地前菩薩)은 치지 않는가?
귀의할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니므로 따로 열거하지 않았다.
마치 물체에 그림자가 저절로 따라오듯 윗자리를 들어서 아랫자리까지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그렇다면 법운지(法雲地:十地 滿位) 보살이 귀의라는 자가 되었을 경우는 어느 승(僧)을 상대로 삼는가?
묘각지(妙覺地)에는 그야말로 진실된 승이라 알 자가 있으므로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어째서 게송에서는 따로 언급하지 않았는가?
마치 물체에 그림자가 저절로 따라오듯 윗자리를 들어서 아랫자리까지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그러므로 송에서 ‘혹은 위아래를 합해서 여러 부류의 승가 무리가 있기도 하다네’라고 하였다.
【論】 중생들로 하여금
의심을 없애고 삿된 집착을 버려
대승에 대한 바른 믿음을 일으켜
부처님의 종자자 끊기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네.
【釋】 이 하나의 게송에도 두 가지 부문이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하나는 장애와 속박을 끊는 문[斷絶障縛門]이고,
또 하나는 해탈을 계속 이어지게 하는 문[連續解脫門]이다.
장애와 속박을 끊는 문은 다시 네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확고한 신김을 일으키는 문[決定信心門]으로서,
한량없는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의혹의 마음을 끊고 견고한 신심을 일으켜 지극히 깊은 대승의 바른 길로 확고하게 나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혐오심을 버리고 떠나는 문[遠離捨心門]으로서,
한량없는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세간에 대한 혐오심을 멀리 떠나 즐겁고 의욕적인 마음을 북돋아 주어 지극히 깊은 대승의 비른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삿된 이론들을 다스리는 문[對治邪論門]으로서,
아흔여섯 가지 각종 큰 외도와 그에 딸린 구만 삼천 외도,
그리고 네 가지 큰 마(魔)와 그에 딸린 삼만 이천 마의 무리에 맞서 그들을 다스리고 세상에 떠도는 일억 사만 육천 가지 논란들을 끊어 없앰으로써 깊고 깊은 대승의 바른 길로 접어들 수 잇도록 하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집착을 떨쳐버리는 문[除遣執着門]으로서,
한량없는 일체 이생(異生) 및 이승(二乘)과 모든 보살들로 하여금 다섯 가지 인견[五種人見]을 끊어 없애 다섯 가지 대치[五種對治]를 증득케 하며,
두 가지 법집[二種法執]20)을 끊어 없애 두 가지 대치[二種對治]를 증득케 함으로써 방향을 돌려 깊고 깊은 대승의 바른 길로 향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론에서 ‘중생들로 하여금 의심을 없애고 삿된 집착을 버려 대승에 대한 바른 믿음을 내게 하고자 함’이라고 한 것이다.
해탈을 계속 이어지게 하는 문은 다시 세 가지로 나뉜다.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 번째는 대각을 끊지 않는 문[不斷大覺門]으로서,
인(因)이 되는 만행을 다 모으고 대각이라는 과(果)를 장엄하여 위없는 법왕(法王)이 끊어지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법장을 끊기지 않게 하는 문[不斷法藏門]으로서,
수승하고 묘한 범음[梵響]을 내서 바다 같은 계경을 널리 설함으로써 팔만 사천 법장이 끊기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승가를 끊기지 않게 하는 문[不斷僧伽門]으로서,
지전(地前)이나 지상(地上)의 대도를 닦는 이들로 하여금 진여법계의 궁전을 지어 정법과 후법시대에 머무는 승가를 끊기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론에서 ‘부처의 종자가 끊기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네’라고 한 것이다.
본론의 게송에 나오는 중생이란 말은 어디까지를 두고 하는 말인가?
또 ‘대치하기 위해서’라는 말은 어떠한 것들을 끊는다는 말인가?
게송으로 말한다.
삼취(三聚)의 사람들을 다 포함하니
아직 원만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며
네 가지 끊음[四種斷]을 대치하여
세 가지 끊지 않음[三不斷]을 건립한다네.
【釋】 마명보살은 삼취 중생 전체를 연하여 경계로 삼는다.
어째서 그런가?
아직 원만한 과를 증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삼취로 분류하는 데에도 세 가지 이설이 있다.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 번째는 우선 십신(十信)에 이르기 전까지는 업을 지은 대로 과보를 받는다는 이치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이들을 사정취(邪定聚)로 분류하고,
삼현(三賢)과 십성(十聖)은 더 이상 물러남이 없는 지위에 확고히 안립하기 때문에 정정취(正定聚)로 분류하며,
십신의 지위에 있는 이는 나아갈지 물러날지가 확실치 않기 때문에 부정취(不定聚)로 분류한다.
두 번째는 우선 십신에 이르기 전과 십신의 마음을 갖는 자들에게는 선근(善根)이 없기 때문에 사성취로 분류하고,
위없는 대각의 과위를 성취하신 분은 인(因)이 되는 만행을 이미 다 채웠기 때문에 정정취(正定聚)로 분류하며,
삼현과 십성은 아직 구경(究竟)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부정취(不定聚)라고 한다.
세 번째는 우선 십신에 이르기 전에는 도에 대한 기꺼운 욕구가 없기 때문에 이들을 사정취로 분류하고,
십성은 이미 진여를 증득했기 때문에 정정취로 분류하며,
십신과 삼현은 바른 증득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부정취로 분류한다.
이상이 세 가지 설이다.
마명보살은 이 셋 중에 첫 번째 설을 빌어 네 가지 끊음을 대치함으로써 삼보가 끊어지지 않게 만다는 뜻을 건립하고자 하였다.
무엇이 네 가지 끊음인가?
첫 번째는 의혹이 부처의 종자를 끊는 것[疑惑斷]이다.
이럴까 저럴까 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것을 빌미로 결단을 하지 못하여 삼보의 종자를 끊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혐오심 때문에 버리는 마음이 부처의 종자를 끊는 것[厭捨斷]이다.
유(有)에 애착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것을 빌미로 법을 좋아할 능력을 잃게 되어 삼보의 종자를 끊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사견이 부처의 종자를 끊는 것[邪見斷]이다.
망상심이 있으면 그것 때문에 정견을 갖지 못해서 삼보의 종자를 끊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있다고 고집하는 견해가 부처의 종자를 끊는 것[定執斷]이다.
실유한다고 고집하는 마음으로는 집착을 떠날 수 없으므로 삼보의 종자를 끊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네 가지 끊음이라고 한다.
이제까지는 논의 근본 취지를 설하였다.
이제부터는 총론에 해당하는 부분을 전개하겠다.
【論】 어떤 법이 있다.
이 법이 대승[摩訶衍]에 대한 신근(信根)을 일으키므로 응당 설해야겠다.
【釋】 위 본론은 두 부문으로 나뉜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하나는 능입문(能入門)이고 또 하나는 소입문(所入門)이다.
능입문이란 말로 펼치려는 이치[所詮理]에 잘 들어갈 수 있게 해준다는 뜻에서 들어가게 한다[能入]는 표현을 썼으며,
소입문이란 저 능입의 법에게 훌륭한 의지처가 되어 준다는 뜻에서 들어갈 바[所入]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어떤 법이 있다고 한 것은,
한 법으로 열여섯 가지 능입문 전체를 나타낸 것이다.
신근을 일으킨다고 한 것은 능입문이 업을 일으키는 양상을 전체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대승[摩訶衍]이란 열여섯 가지 소입법의 체(體)와 아울러 불이(不二)의 관계에 있는 대승의 체 전부를 나타낸 것이다.
신(信)이란 확고하게 나아가는 마음이며 근(根)이란 행법을 낳고 자라게 하는 것이다.
만일 이(理)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이 두 가지를 벗어나서는 방법이 없으므로 신관이라 말한 것이다.
한편으로 신(信)은 십신(十信)을 말하고 근(根)은 초발심주(初發心住)에서 법운지(法雲地)까지 모두를 말한다.
왜냐하면 신위(信位) 초반에 근이 없다면 마치 반다가이마화(班多伽伊摩華)21)처럼 연(緣)을 따라 나아가기도 하고 물러나기도 하기 때문이며,
신위 후반에 근이 있다면 마치 건구아미례수(鍵鳩阿彌禮樹)22)처럼 점점 갈수록 견고해져서 흔들림이 없기 때문이다.
신근(信根)에는 몇 가지 뜻이 있으며,
각각 어떤 양상인가?
게송으로 말한다.
신(信)과 근(根) 각각에 열 가지 뜻이 있으니
마음을 맑힌다는 등과 아래로 향한다는 등이다.
【釋】 신(信)에 열 가지 뜻이 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첫째는 마음을 맑힌다는 뜻으로서,
믿음이 심성을 맑고 깨끗하게 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마음을 확고히 해준다는 뜻으로서,
믿음이 심성을 순수하게 해서 확고한 자리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마을을 기쁘게 한다는 뜻으로서,
믿음이 갖가지 근심과 번뇌를 끊어 없애 주기 때문이다.
넷째는 마음을 지칠 줄 모르게 한다는 뜻으로서,
믿음이 풀어지고 나태한 마음을 끊어 없애 주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따라 기뻐하게 한다는 뜻으로서,
믿음이 있으면 다른 사람의 훌륭한 행에 대해 동화되려는 마음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존중하는 마을을 갖게 한다는 뜻으로서,
믿음이 있으면 덕 있는 이를 보고 가볍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디.
일곱째는 따르는 마음을 낸다는 뜻으로서,
믿음이 보고 들은 법을 어기지 않고 그대로 따르게 해주기 때문이다.
여덟째는 찬탄케 한다는 뜻으로서,
믿음이 있으면 남들이 수승한 행을 할 때 진심으로 찬탄하는 마음을 내기 때문이다.
아홉째는 무너지지 않게 한다는 뜻으로서,
믿음이 있으면 오로지 한 마음에 집중하여 그것을 놓치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열째는 좋아하고 기꺼워하게 한다는 뜻으로서,
믿음이 자비스런 마음을 성취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믿음이 갖는 열 가지 공덕이다.
근(根)에도 열 가지 뜻이 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첫째는 아래로 향한다는 뜻으로서 근이 교만(憍慢)을 없애 주기 때문이다.
둘째는 은밀하다는 뜻으로서 근이 깊고 깊은 이치를 잘 설명해 내기 때문이다.
셋째는 낳게 한다는 뜻으로서 근이 갖가지 공덕을 낳고 자라게 하기 때문이다.
넷째는 견고하게 한다는 뜻으로서 관이 모든 것을 잘 갈무리하고 붙들어서 빠지거나 유실되지 않도록 하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이어지게 한다는 뜻으로서 근이 갖가지 공덕을 점점 늘려서 끊어지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벗어나게 한다는 뜻으로서 근이 각각의 지(地)를 더욱 수승하게 만들고 염법(染法)을 점점 멀리 떠나게 하기 때문이다.
일곱째는 모은다는 뜻으로서 근이 갖가지 도품의 법을 다 모아서 닦게 하기 때문이다.
여덟째는 무성하게 한다는 뜻으로서 갖가지 행을 닦은 공덕으로 장엄된 것에 대해서는 근이 좋아하는 마음을 내게 하기 때문이다.
아홉째는 구족하게 한다는 뜻으로서 등각위(等覺位)에서는 인행(因行)이 원만하기 때문이다.
열째는 높고 수승하다는 뜻으로서 묘각(妙覺)의 과에 이르면 가상 수승하고 광대하여 아무것도 이를 능가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상이 근의 열 가지 특성이다.
능입(能入)과 소입(所入)도 갖가지로 구분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입의분(立義分)에서 자세히 설명하겠다.
이제까지는 총론에 해당하늘 부분을 설하였고,
이제부터는 이 논의 체제[建立]에 대해 밝히겠다.
【論】 내용은 다섯 단원[分]으로 구분된다.
무엇이 다섯인가?
첫째는 이 논을 짓게 된 동기를 밝히는 단원[因緣分],
둘째는 이 논의 취지를 표방하는 단원[立義分],
셋째는 이 논의 내용을 해석하는 단원[解釋分],
넷째는 신심수행을 밝히는 단원[修行信心分],
다섯째는 수행을 통해 얻는 이익을 보여 주어 닦기를 장려하는 단원[勸修利益分]이다.
【釋】 무슨 이유로 위와 같은 순서로 정했는가?
교법이 출현한 체제가 그렇기 때문이다.
무슨 뜻인가?
다스릴 질병과 장애가 있어야 그를 상대로 뛰어난 맛을 가진 훌륭한 약이 출현하듯이,
능화(能化)의 교법도 반드시 대치할 근기가 있어야 일어나는 것이다.
병을 앓기 전에는 약이 필요치 않듯이 근기에 앞서 교법이 선행하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인연분(因緣分)을 맨 처음에 건립한 이유는,
여의보주(如意寶珠)가 비록 하나이기는 하지만 모든 보물의 근본이 되므로 대단한 위력을 가진 용왕이라야 지니고 쓸 수 있듯이,
마하연의 법도 하나이기는 하지만 갠지스 강의 모래알만큼이나 되는 법문의 체성이 되므로 영리만 근기를 지닌 지혜로운 자리야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자 하기 때문이다.
입의분(立義分)을 두 번째로 건립한 이유는,
마니보장이 비록 한량없는 만 가지 보배를 갖추고 있다고는 하나 천 겹의 문을 활짝 열어 모든 용들이 알 수 있게 하는 것처럼,
근본이 되는 대승법도 한없는 천 가지 뜻을 원만히 갖추고 있지만 분별하고 해석하고 이리저리 설명함으로써 근기가 둔한 자들도 알게 해준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자 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해석분(解釋分)을 건립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보석 비처럼 내리는 미묘한 법[術]을 눈과 귀로 보고 들으며 무진장한 원만한 덕을 사려하는 마음[思心]으로 이해했다 하더라도 혀의 위력을 출현시켜 다투듯 문에 들어가서 나아갈 방향을 열어 주지 않는다면 진여[隔檀]23)에 접근할 수 없고 여의보장을 얻었어도 연화대 궁전에 올라갈 길이 없다.
마찬가지로 입으로는 높으신 말로 설해진 교의(敎義)를 늘 읊고 다니며 마음속에서는 자세하게 또는 간략하게 설한 깊은 이치를 관찰한다 해도 가행(加行)을 부지런히 닦고 승진도[勝進]24) 더해야 비로소 금강(金剛)의 지위에 이르니,
견고한 신심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법계의 보장(寶藏)을 얻었다 해도 현묘한 도리에 계합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네 번째로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을 건립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자세하게 혹은 간략하게 법을 열어서 들어가는 문을 보여주더라도,
겁이 많고 약한 중생들은 광대하게 설해진 법문을 듣고 닦아 나아가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며 근기가 둔한 중생은 요약된 법문을 듣고는 이해하지 못해서 멀어지려는 마음을 낸다.
이런 부류의 중생들은 장려하는 인연을 만나면 점진적으로 닦아 나아가 인(因)이 되는 백 가지 행을 갖추어 결국은 만 가지 덕을 갖춘 과위[果]에 이르지만,
만일 권하고 채찍질하는 인연을 만나지 못하면 점점 더 멀어지고 물러나 항하강의 모래알만큼 많은 번뇌에 휩싸여 부처가 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無性] 종자에 이르게 된다.
마명보살은 이러한 이점을 보았기 때문에 이익을 제시하면서 수행을 독려하였다.
이런 이유에서 맨 뒤에 권수이익분(勸修利益分)을 배치한 것이다.
무슨 이유로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딱 오분(五分)으로 건립하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저 대총지론을 모두 하면
오십 가지25) 법문이 되기 때문에
더할 수도 뺄 수도 없이
정확히 오 분(五分)을 건립하였네.
【釋】 마명보살은 십만 온타남(嗢拖南)26) 온타남은 범어의 udāna로서,
우타나(優陀那)`오타남(烏陀南)`오타남(鄔陀南)`우단나(優檀那)`울타나(鬱陀那) 등으로 음역한다.
십이부경 가운데 무문자설(無問自說)의 형식을 취한 것이다.
의 대총지론(大摠地論)을 오십 문(門)으로 종합해서 그 모든 교리를 해석하였다.
지금 이 논의 5분(分)법문은 각각 저 오십 문 중에서 십 문씩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정확히 오 분을 건립한 것이다.
무슨 말인가?
저 총지론 중에서 건립(建立)ㆍ소화(所化)ㆍ원만(圓滿) 등의 십 문은 여기의 인연분(因緣分)에 해당하고,
백육십 마하연(摩訶衍) 등의 십 문은 입의분(立義分)에 해당하며,
안립(安立)ㆍ수순(隨順)ㆍ결택(決擇) 등 십 문은 해석분(解釋分)에 해당하고,
수습(修習)ㆍ결정(決定)ㆍ취입(趣入) 등 십 문은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에 해당하며,
권청(勸請)ㆍ가책(呵責)ㆍ인도(引導) 등 십 문은 권수이익분(勸修利益分)에 해당한다.
이제까지는 건립문(建立門)에 관해 설하였다.
이제부터는 각각의 장을 제시하고 해석하는 문[唱章判說門]으로 들어가겠다.
【論】 첫 번째로 인연분(因緣分)을 설하겠다.
【문】 무슨 인연이 있기에 이 논을 짓는가?
【답】 이 논을 지은 인연에 여덟 가지가 있다.
무엇이 여덟 가지인가?
첫째는 인연의 전체상[因緣摠相]으로,
중생들이 모든 고통을 떠나 구경(究竟)의 즐거움을 얻게 하기 위함이지 세간의 명리나 공경을 얻고자 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는 여래의 근본 뜻을 해석하여 모든 중생들이 오류 없이 정확히 이해하게 하기 위해서다.
셋째는 선근(善根)을 성취한 중생들이 마하연의 법을 감당하여 신심에서 물러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넷째는 선근이 적고 미약한 중생들에게 신심을 닦게 하기 위해서다.
다섯째는 방편을 보여줌으로써 악업의 장애를 녹이고 그들의 마음을 잘 보호하여 무명[癡]과 아만[慢]을 멀리 떠나게 하기 위해서다.
여섯째는 지관(止觀) 익히고 닦는 것을 보여주어 범부의 허물과 이승(二乘)의 허물을 대치하기 위함이다.
일곱째는 방편에 전념하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부처님 계신 곳에 나서 신심에서 결코 물러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여덟째는 이익을 보여주어서 수행을 권하기 위함이다.
이상과 같은 인연이 있기 때문에 논을 짓는다.
【釋】 이 여덟 가지 인연 중에,
처음의 하나는 입의분(立義分)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근본인연[正因緣]이 된다.
그 뒤의 두 가지는 해석분(解釋分)에 해당하며 근본인연이 된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네 가지는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에 해당하며 근본인연이 된다.
마지막 한 가지는 권수이익분(勸修利益分)에 해당하며 근본인연이 된다.
처음 하나의 인연은 네 가지로 나뉘며,
뒤의 일곱 가지 인연은 각각 세 가지로 나뉜다.
무엇이 첫 번째 인연에 속하는 네 가지인가?
첫째는 교화의 공능을 갖는 법이 일어나는 문[能化敎法出興門]이요,
둘째는 교화의 대상이 되는 중생을 구분하는 문[所化衆生分際門]이요,
셋째는 작업을 일으켜 훌륭하게 교화하는 문[出興作業善巧門]이요,
넷째는 쟁론과 비방을 떨쳐버리는 문[除遣諍論誹謗門]이다.
무엇이 일곱 가지 인연에 속하는 세 가지인가?
앞의 삼 문(三門)을 이제부터 상(相)을 제시하면서 차례대로 해석하겠다.
인연총상이란 교화의 공능을 갖는 법이 일어나는 문을 전체적으로 든 것이다.
즉 여덟 가지 근본 총제에 근본인연이 되기 때문에 인연 총상이라고 하며,
스물네 가지 서로 다른 별상에 근본인연이 되기 때문에 인연상이라 한다.
서른두 가지 총상 및 별상의 법에게 근본인연이 되는 것은 입의분(立義分) 중에서 분명하게 설명하겠다.
‘중생들이 ~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말은 교화의 대상이 되는 중생을 구분하는 문을 전체적으로 거론한 것이다.
즉 십억 팔만 육천 종류의 사정취 중생과 삼십 종류의 부정취 중생과 백이십 종류의 정정취 중생을 모두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고통을 떠나 구경의 즐거움을 얻는다’고 한 것은 작업을 일으켜 훌륭하게 교화하는 문을 전체적으로 거론한 것이다.
즉 삼취(三聚) 중생을 소연의 경계로 삼아 묘한 법요를 설해서 열어 보인다는 것은 셀 수 없는 모든 중생들에게 무상하게 생멸하는 고통을 멀리 떠나 근본이 되는 총상의 즐거움을 얻도록 한다는 뜻이다.
‘세간의 명리나 공경을 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한 것은 쟁론과 귀방을 떨쳐버리는 문을 전체적으로 거론한 것이다.
왜냐하면 어리석은 중생은 이런 의심을 품기 때문이다.
‘마명보살은 부동지(不動地)의 지위에 거처하시는 분으로 아직 법운지(法雲地)에 이르지는 못했으므로 상지(上地)의 보살 등을 연해서 소화(所化)의 경(境)으로 삼을 것이니,
그것은 자신의 수승함을 과시해서 명리를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겠느냐?’고,
그러나 이들에게는 헛된 말만 있을 뿐,
실다운 내용이라고는 없다.
어떻게 하지(下地)의 보살이 상지(上地)의 보살을 교화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마명보살은 이러한 불신과 의심을 없애주기 위해 스스로 말하였다.
“나는 먼 오래 전의 겁에 정각을 완선하게 얻어 교화에 조력해서 중생들을 이롭게 하였다.
그러나 본원(本願)을 다 채우기 위해 방편으로 수행위를 유람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을 뿐,
명리 따위나 구하기 위해 논을 지은 것은 아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첫 번째 인연을 설했다.
두 번째 인연으로 ‘여래의 근본 뜻을 해석한다’고 한 말은 교화의 공능을 갖는 법이 일어나는 문을 전체적으로 거론한 것이다.
즉,
이 인연이 바른 뜻을 밝히고[顯示正義] 삿된 집착을 대치하는[對治邪執] 데 근본인연이 되기 때문이다.
여래의 근본 뜻이라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시방삼세의 모든 여래 중에서 근본 일심이문(一心二門)과 일곱 가지 대치27)를 통하지 않고 정각을 이룬 여래는 한 분도 없기 때문이다.
‘모든 중생들이……’라고 한 것은 교화의 대상이 되는 중생을 구분하는 문을 전체적으로 거론한 것이다.
즉 십억 팔만 육천 가지 사정취(邪定聚) 중생을 모두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오류 없이 정확히 이해하게 하기 위해’라는 말은 작업을 일으켜 훌륭하게 교화하는 문을 전체적으로 거론한 것이다.
미친 듯이 혼란스러운 사정취 중생들을 소연(所緣)의 경계로 살아 바른 뜻을 보여주고 삿된 집착을 대치하는 깊은 법을 열어 보여줌으로써 갠지스 강의 모래알만큼 많은 잘못된 이해를 바로잡고 티끌 수만큼의 거꾸로 된 견해를 꺾어서,
믿음을 갖지 못하는 천제(闡提)28)들의 장애를 없애 십신(十信)의 대도로 들어가게 하기 때문이다.
이상이 두 번째 인연에 대한 설명이다.
세 번째 인연은 도를 향해 나아가는 상을 분별하는[分別發趣道相] 데 근본인연이 되는 것으로 능화(能化)의 교법이 일어나는 문에 해당하며,
세 가지 발심을 이른다.
‘선근을 성취한 중생’이란 교화의 대상이 되는 중생을 구분하는 문을 전체적으로 거론한 것이니,
십신(十信) 중에 상품(上品)29)과 십해(十解) 중에 삼 품(三品),
십행(十行) 중에 삼 품,
십회향(十廻向) 중에 삼 품,
십지(十地) 중에 삼 품을 모두 교화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마하연의 법을 감당하여 신심에서 물러나지 않는다’고 한 것은 작업을 일으켜 훌륭히 교화하는 문을 전체적으로 든 것이다.
즉,
이정취(二定聚:正定聚와 不定聚) 중생을 소연의 경계로 삼아 세 가지 발심[三種發心]을 열어 보여 자신의 한계를 넘어 승진도(勝進道)를 획득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상이 세 번째 인연에 대한 설명이다.
네 번째 인연은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에서 설한 네 가지 신심과 네 가지 수행30)의 근본인연이 되며,
교화의 공능을 갖는 법이 일어나는 문에 해당한다.
선근이 적고 미약한 중생이란 교화의 대상이 되는 중생을 구분한 문을 전체적으로 거론한 것이니,
십신(十信) 중 전오심(前五心)과 중품 중생을 교화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전오심을 이미 획득해서 선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므로 적고 미약하다고 하였으며,
후오심(後五心)은 아직 획득하지 못해서 선근을 다 갖추지는 못했으므로 성취했다는 말은 쓰지 않았다.
신심을 닦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 것은 작업을 일으켜 훌륭하게 교화하는 문을 전체적으로 거론한 것으로서,
뒤의 다섯 가지 신심을 성취시켜 주기 때문이다.
이상이 네 번째 일연에 관한 설명이다.
다섯 번째 인연은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중에서 진문(進門) 끝까지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 어떤 사람이 신심을 수행하면 결국에 가서는 갖가지 장애를 벗어나 선근이 자라나기 때문에 근본인연이 되어 준다는 것이다.
이는 능화의 교법이 일어나는 문에 해당한다.
여기서는 십신위의 조심을 얻은 중생부터 밑으로 하품 중생까지를 교화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는 교화의 대상이 되는 중생을 구분하는 문에 해당한다.
악업의 장애 등을 녹인다는 것은 작업을 일으켜 훌륭하게 교화하는 문을 전체적으로 거론한 것이다.
즉,
예배와 참회 등의 방편을 보여서 바다같은 악법의 장애를 녹여 없애기 때문이다.
이싱이 다섯 번째 인연에 대한 설명이다.
여섯 번째 인연에서 ‘지관을 익히고 닦는다’고 한 것은 능화의 교법이 일어나는 문을 전체적으로 든 것이다.
즉,
수행신심분에서 지관을 수행하는 문에 근본 인연이 되기 때문이다.
범부와 이승이란 교화의 대상이 되는 중생을 구분하는 문을 전체적으로 거론한 것이다.
여기서는 십신위의 이심(二心)과 하품의 중생을 모두 교화의 대상으로 삼는다.
모든 이승은 사정취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마음의 허물을 대치한다고 한 것은 작업을 일으켜 훌륭하게 교화하는 문을 전체적으로 거론한 것이다.
두 바퀴[兩輪]31)로 그릇된 견해와 집착을 갖는 범부와 이승의 허물을 대치해 주기 때문이다.
이상이 여섯 번째 인연에 관한 설명이다.
일곱 번째 인연은 수행신심분의 끝까지에 해당한다.
디시 말해 중생이 이 법을 처음 공부해서 결국에는 정정취(正定聚:三賢ㆍ十聖)에 나서 머물게 하는 데 근본인연이 되기 때물이다.
이는 능화의 교법이 일어나는 문에 해당한다.
이 인연에 해당하는 중생으로는 십신위 중 전 사심(四心)과 거기서 더 이상 향상하지 못하는 하품 중생이 속한다.
왜냐하면 이 세계에 머무는 자들은 신심을 성취하는 일에 대해 극도의 두려움을 갖기 때문이다.
이는 교화의 대상이 되는 중생을 구분하는 문에 해당한다.
신심에서 결코 물러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라고 한 것은 작업을 일으켜 훌륭하게 교화하는 문을 전체적으로 거론한 것이니,
수승한 인연력으로 정정취에 확고하게 들어가기 때문이나.
이상이 일곱 번째 인연에 대한 설명이다.
여덟 번째 인연은 권수이익분(勸修利益分)에 근본인연이 되는 것으로,
이는 교화의 공능을 갖는 법이 일어나는 문을 전체적으로 든 것이다.
이 인연에 해당하는 중생에는 십억 팔만 육천 가지 사정취 중생이 모두 들어간다.
이는 교화의 대상이 되는 중생을 구분한 문에 해당한다.
이익을 보여 수행을 권하기 위해서라고 한 것은 작업을 일으켜 훌륭하게 교화하는 문을 전체적으로 거론한 것이다.
수행의 공덕을 잘 설하여 도에 대한 욕구와 즐거운 마음을 자리게 하고 허물과 근심을 보여 주어 싫증을 내고 떠날 것을 각성케 해주기 때문이다.
이상이 여덟 번째 인연에 대한 설명이다.
능화의 교법은 입의분(立義分)에서 남김없이 설명했고 소화의 근기는 첫 번째 인연분(因緣分)에서 다 설명했는데,
무슨 이유로 삼 분(三分)을 더 열어서 따로 해석을 붙이며,
일곱 가지 인연을 건립해서 산만하게 설하는가?
근기에 날카롭고 둔한 차이가 있고,
교법에 자세하고 간략한 차이가 있으며,
법문에 총론과 별론이 구분됨을 보여 주기 위해서다.
무슨 이유로 이승인(二乘人)들을 네 곳에서 중복해서 다루었는가?
이승의 중생은 하열하고 협소해서 보리심을 내어 무상도로 향하는 데 있어 다른 중생들에 비해 지극히 어렵다는 점을 보여 주려고 했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로 그 밖의 사정취(邪定聚) 중생들은 세 곳에서만 다루었는가?
그 밖의 다른 중생들은 이승의 경우와 닮았고,
그 허물에 대해서는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려고 했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로 부정취(不定聚:十信) 중생들은 삼 품(三品)을 따로 구분해서 다루었는가?
부정취 중생은 신심이 엷고 근기가 둔해서 결정심(決定心)을 내어 무상도로 향하는 데 있어 정정취 중생보다 훨씬 어렵다는 점을 보여주려 했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로 정정취(正定聚) 사람들은 삼 품으로 구분하지 않고 합해서 논하는가?
정정취 중생은 부정취의 경우와 비슷하고 그 허물에 관해서는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려고 했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로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여덟 가지만을 세웠으며,
무슨 이유로 순서를 이와 같이 하였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대종지론에 나오는 것을 다 들면
팔십 가지 인연이 되기 때문이며
수행을 통해 점점 향상하는 법은
순서가 그러하기 때문이라네.
【釋】 마명보살은 십만 온타남의 대총지론 가운데 모두 팔십 가지 인연을 세워 논을 지은 동기로 삼았다.
지금 이 논의 여덟 가지 인연이 각각 저들 논에서 말한
팔십 가지 중 열 가지씩을 포함하므로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딱 여덟 가지를 든 것이다.
이러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저 앞의 본론에서 ‘이러한 등[如是等]’이라고 하였으니,
‘등’이라는 글자가 팔십 가지 인연을 다 포함한다는 뜻이다.
여덟 가지 인연이 위와 같은 순서로 정해진 이유는
닦아 나아가는 법의 차례가 본래 그렇기 때문이다.
즉,
믿음을 갖지 못하는 천제(闡提)의 장애를 없애서 십신(十信)의 마음을 얻고,
아(我)에 집착하는 장애를 없애서 십주(十住)32)의 마음을 얻으며,
고(苦)를 두려워하는 장애를 없애서 십행(十行)33)고,
버리고 떠나는 장애[捨離障]를 없애서 십향(十向)34)의 마음을 얻으며,
이생성(異生性)35) 등 열 가지 장애를 끊어 환희지(歡喜地) 등 열 가지 지위(地位)를 증득하기 때문이다.
이제까지는 여덟 가지 인연에 관해서 설명하였고,
다음부터는 네 가지 근(根)에 관해서 설하겠다.
【論】
【문】 경[修多羅]에 이 법이 다 갖추어져 있는데 무엇 하러 중복해서 설하는가?
【답】 수다라 중에 이 법이 있기는 하지만
중생의 근기와 행[根行]이 같지 않고,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연(緣)이 다르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가?
여래께서 세상에 계실 때는 중생들의 근기도 영리하고 법을 설하는 사람의 색업(色業)과 심업(心業)이 수승해서 원음(圓音)으로 한번 연설하면 갖가지로 다른 부류의 중생들이 똑같이 이해했으므로 논을 지을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여래께서 멸도하신 후에는,
어떤 중생들은 자력(自力)으로 널리 듣고 이해하는 자들도 있고,
또 어떤 중생은 자신의 힘으로 적게 듣고 많이 이해하는 자들도 있으며,
또 어떤 중생은 자신의 심력(心力)은 없으나 광론(廣論)을 통해서 이해를 얻는 자도 있고,
또 어떤 중생들은 광론에 나오는 문장들이 번거롭다고 여기고 적은 문장으로 많은 뜻을 담고 있는 요약된[摠持] 법을 좋아하여 그것에서 이해를 얻는 자들도 있다.
이와 같이 이 논으로 광대하고 깊은 법이 담고 있는 무변한 뜻을 모두 다 포함하고자 하기 때문에 이 논을 지었다.
【釋】 위 문장들은 두 부문으로 나뉜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 번째는 경에서 설한 내용이나 이 논에서 설하는 내응이나 다를 것이 얼지 않느냐고 질문하는 부분[所說無異難問門]이다.
두 번째는 시간의 차이[分位]를 들어 의심을 풀어주는 부분[擧時分位決疑門]이다.
‘경에 이 법이 다 갖추어져 있는데 무엇 하러 중복해서 설하는가?’라고 물은 구절은 질문[難問門]에 해당한다.
『광명대각경(光明大覺經)』 등 백 가지 경에서 무량한 법장을 열어보여서 근기의 정도에 따라 빠짐없이 이익을 얻는데,
중사(中士:馬鳴)는 무엇 하러 번거롭게 이 논을 지어서 저 경에서 설한 법을 중복해서 전하는가?
그래봐야 더 이상 아무런 도움[加顯力]도 없지 않은가?
지금 이 논을 지어 저 법을 중복해서 설하는 이유가 다분히 칭찬이나 듣자고 하는 것이 아닌가?
결국 존경과 믿음을 받는다 해도 그 이치를 다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상이 ‘경에서 설한 내응과 다를 바가 없지 않느냐는 질문’이다.
‘수다라 중에 이 법이 있기는 하지만 중생의 근기와 행[根行]이 같지 않고,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연(緣)이 다르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한 구절은 의심을 풀어 주는 문[決疑門] 전체에 해당한다.
마명보살은 다음과 같이 해명한다.
삼세제불이 설하신 모든 교리는 원래가 평등한 일미(一味)에 상주하여 다른 곳으로 옮겨가거나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제목이 서로 다르고 권수가 같지 않지만 교법(敎法)은 오직 한 맛으로 평등하다.
혹은 나누지 않고 구분하지도 않지만 중생의 근성(根性)이 서로 다르면 영리하고 둔함이 같지 않으며,
심행(心行)이 서로 다르면 자세함과 간결함이 같지 않다.
교화 받을 대상의 근기가 다르면,
교화를 펼치는 사람도 저절로 같아질 수는 없다.
교법을 받아들일 때 그 명칭과 개념[名字]들이 다 다르고,
문맥과 내용을 이해하는 인연이 각기 다르다.
다시 말해 어떤 중생은 부처님의 가타수리비라(伽陀修梨毘羅)36)에 의지해 이해하는 자도 있고,
또 어떤 중생은 보살의 차타시수리비라(遮陀尸修梨毘羅)37)에 의지해야 비로소 이해를 하는 자도 있다.
이런 이들을 위해 논을 지어야 하는 것이다.
한편,
여래께서 세상에 계실 때는 교화의 대상이 되는 중생도 청정했고 교화를 펼치는 사람은 팔만 사천 가지 색(色)과 네 가지 마음에서 나오는 두루한 지혜[四種心遍智]와 열 가지 작업[十業]과 열 가지 수승함[十勝]을 갖추어 예순여덟 가지 범음(梵音)과 여든여덟 가지 묘음으로 전후 없이 한 번에 법을 펼쳤다.
갖가지로 다른 무량무변한 중생들 중에 어떤 중생은 부처님의 묘한 색신을 보고 이해하기도 하였고,
또 어떤 중생은 부처님의 심품(心品)을 사유함으로써 이해하기도 하였고,
또 어떤 중생은 여래의 십업(十業)과 십승(十勝)을 관찰함으로써 이해하기도 하였고,
또 어떤 중생은 성스럽고 원만하고 묘한 부처님의 음성을 듣고 이해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누구나 똑같이 명료하게 통달했으므로 논이 필요치 않았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후에는,
교화의 대상이 되는 중생의 근기도 잡되게 섞이고 교화를 펼치는 법에도 빠지고 부족한 점이 생기게 되었다.
기(機)에 따라서 경이냐 논이냐가 구별되고 근(根)에 따라서 광론이냐 약설이냐가 구별된다.
근에는 네 가지가 있고 기에는 세 가지가 있다.
무엇이 네 가지 근인가?
첫째는 광론에 의해 자력으로 이해하는 근[廣自力根]이고,
둘째는 악설에 의지해 자력으로 이해하는 근[略自力根]이며,
셋째는 자력이 없어 광론에 의지해 남의 힘을 빌어 이해하는 근(廣無力依他根)이고,
넷째는 자력이 없어 약설에 의지해 남의 힘을 빌어 이해하는 근[略無力依他根]이다.
이 네 가지 근 중에 일의 두 가지는 경[修多羅]에 의지하는 중생이고 뒤의 두 가지는 우파제야(優婆提耶)38)에 의지하는 중생이다.
무슨 이유로 인연문(因緣門) 중에서는 교화의 대상이 되는 근기들을 빠짐없이 설하고,
근성문(根性門) 중에서는 적게 거론하는가?
청정한 승나아세야(僧那阿世耶)39)는 한없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며,
가르침을 받아 실제로 수행하는 중생의 무리는 한정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무슨 까닭에 광론과 약설 두 겹으로 교법을 일으키는가?
그리고 그들의 특성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한다.
본원(本願)에 매여 있기 때문에
이 법문을 일으켰으니
『능가왕계경(楞伽王契經)』에서
분명하게 설하고 있기 때문이라네.
【釋】 본원(本願)에 매이는 인연력 때문에 두 겹으로 깊고 깊은 법문을 일으킨다.
어째서인가?
계경에서 분명히 설하고 있기 때문이디.
즉,
『능가왕계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이때 세존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바다같이 한량없는 과거의 겁을 생각해 보니,
나는 오백 세 동안 인욕선인(忍辱仙人)으로 산림에 머물며
욕심을 줄이고 자족할 줄 아는
사성(四聖)의 무리가 닦는 청정한 법을 수행하는 데 전념하고 있었다.
그때 뱀 한 마리가 산꼭대기에서 내가 있는 곳까지 내려와,
내가 독송하는 소리를 듣고는 몸을 던져 절하고 참회했다.
몸을 던져 예배를 마치고 나서는
자기 머리로 땅을 긁어서
구구절절 문장을 지어 게송으로 말하였다.
나는 과거세에
인욕선인으로
이 산에 머물며
하루 여섯 차례 도를 행하다가
그 중에 한번 화[瞋]를 냈었네.
이런 인연력으로
지금 뱀의 몸을 얻어
언제나 큰 고통을 받는다네.
이 목숨이 끝난다면
사람의 몸[同分]을 얻어
나는 제자가 되어
그대의 수행을 따르리.
그대가 독송한 대로
나도 항상 따라서 독송하리.
이런 까닭에 나는 지금
크게 부끄러운 마음을 낸다네.
이 게송을 하고 나서
바로 목숨을 마쳤고,
뒤에 사람의 몸을 얻어 나의 제자가 되었다.
그때 서로 간에 발원을 해서
그 발원에서 자유롭지 못했는데,
나의 발원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내가 만일 무상도를 증득하면
구십 낙차(落叉)의 광대하게 설한 경을 널리 설하여
광대함을 좋아하는 중생에게 이익을 주겠으며,
십 낙차의 간략하게 설한 경을 널리 설하여
간략함[摠持]을 좋아하는 중생에게 이익을 주겠다.’
또 나의 제자는 발원하기를,
‘스승이 멸도하신 뒤
나는 구십 부의 광설 우파제야(優婆提耶)를 짓고 설하여
광론을 통해 이해를 얻는 중생에게 이익을 주겠으며,
십 부의 약설 우파살제야를 짓고 설하여
총지(摠持)를 통해 이해를 얻는 중생에게 이익을 주겠다’고 하였다.
이러한 인연으로 나는
지금 바다 같은 계경을 설하는 것이며,
이러한 인연으로 내가 멸도한 뒤에
나의 제자가 현재 논의 가르침을 짓는 것이다.”
이제까지는 인연분(因緣分)을 설하였으므로
다음은 입의분(立義分)을 설하겠다.
입의분에서 시설하는 법문의 명칭에는 몇 가지가 있으며,
그 특성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한다.
서른세 가지가 있으니
열여섯 가지 소입법과
열여섯 가지 능입문과
그리고 불이문으로 나뉘기 때문이라네.
【釋】 입의분(立義分) 중에서 시설하는 법문의 명칭 수는
모두 서른세 가지로 차별된다.
무엇이 서른세 가지 차별인가?
즉,
소입(所入)이 되는 열여섯 가지 본법(本法)과 열여섯 가지 능입문(能入門),
그리고 불이(不二)의 마하연이 각각 차별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 마하연이 열여섯 가지가 되는가?
근본 마하연에서 여덟 가지가 벌어지기 때문이며,
일심법계(一心法界)와 삼대의(三大義)에서 각각 두 가지씩 벌어지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 능입문이 열여섯 가지가 되는가?
일심법계와 삼대의에서 각각 두 가지씩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또 다르게는 각각에서 두 가지 문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입의분에서 시설하는 법문의 근본 수이다.
이제까지는 법수를 말했다.
이어서 본문 각각을 해석하겠다.
【論】 마하연(摩訶衍) 전체를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하나는 법(法)이고 또 하나는 뜻[義]이다.
법이란 중생심(衆生心)을 말한다.
이 중생심이 세간과 출세간의 모든 법을 포괄하므로
이 마음에 의지해서 마하연의 뜻[義]을 드러낸다.
무슨 까닭인가?
이 심의 진여상[心眞如相]이 마하연의 체(體)를 나타내며,
이 심의 생멸인연상[心生滅因緣相]이
마하연의 자체(自體)와 상(相)과
용(用)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뜻[義]에는 세 가지가 있다.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 번째는 체대(體大)니,
일체법의 진여는 평등하여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상대(相大)니,
여래장(如來藏)은 무량한 성품의 공덕을 구족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용대(用大)니,
세간과 출세간의 모든 착한 인과를 내기 때문이다.
모든 부처님이 본래부터 이에 의지했기 때문이며,
모든 보살들도 이 법을 수레처럼 타고서 여래의 지위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釋】 위 글은 세 가지 문으로 나뉜다.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깨달아 들어갈 바의 근본법을 총체적으로 설한 문[所入根本總體門]이며,
둘째는 능의에 의해 깨달아 들어가는 별상을 설한 문[能依趣入別相門]이며,
셋째는 어김없는 법칙을 통달하여 요동이 없는 문[通達軌則不動門]이다.
처음 두 문에는 다시 두 가지[兩重]가 있으니 사유에 머물러 관찰해야 한다.
마하연 전체라고 한 구절은 깨달아 들어갈 바의 근본법을
총체적으로 하여 설한 문을 이르는 것으로서,
근본 마하연은 여덟 가지로 차별된다.
무엇이 여덟 가지인가?
첫째는 일체일심마하연(一體一心摩訶衍),
둘째는 삼자일심마하연(三自一心摩訶衍),
셋째는 무량무변제법차별부증불감체대마하연(無量無邊諸法差別不增不減體大摩訶衍),
넷째는 적정무잡일미평등부증불감체대마하연(寂靜無雜一味平等不增不減體大摩訶衍),
다섯째는 여래장공덕상대마하연(如來藏功德相大摩訶衍),
여섯째는 구족성공덕상대마하연(具足性功德相大摩訶衍),
일곱째는 능생일체세간인과용대마하연(能生一切世間因果用大摩訶衍),
여덟째는 능생일체출세간선인과용대마하연(能生一切出世間善因果用大摩訶衍)이다.
이상이 여덟 가지 근본 마하연이다.
이 여덟 가지 마하연의 법은 능입(能入)을 두고 건립한 명칭이다.
무슨 말인가?
하나의 체(體),
하나의 심(心)을 문으로 삼아서 들어가기 때문에 ‘일체일심마하연’이라 하며,(중략) 출세간의 모든 선인과를 내는 용대(用大)를 문으로 삼아 들어가기 때문에 ‘능생일체출세간선인과용대마하연’이라고 이름한다.
이를 전륜성왕에 비유할 수 있다.
즉,
전륜성왕이 그 윤상(輪相)에 따라 이름이 붙듯,
마하연법도 마찬가지로 그 문(門)의 상에 따라 명칭을 붙인다.
『대각계경(大覺契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잘 듣고 잘 생각하여라.
내가 그대를 위해 신법(身法)을 여덟 가지로 분별해서 설해주겠다.
무엇이 여덟 가지인가?
첫째는 일체취입신법(一體趣入身法)이고,
둘째는 삼자취입신법(三自趣入身法)이며,
셋째는 제법차별부증불감체대취입신법(諸法差別不增不減體大趣入身法)이고,
넷째는 순정일상무잡부증불감체대취입신법(純淨一相無雜不增不減體大趣入身法)이고,
다섯째는 여래장공덕현료대취입신법(如來藏功德顯了大趣入身法)이고,
여섯째는 원만성공덕현료대취입신법(圓滿性功德顯了大趣入身法)이며,
일곱째는 출생세간인과자재무애대취입신법(出生世間因果自在無礙大趣入身法)이고,
여덟째는 출생출세간묘인과자재무애대취입신법(出生出世間妙因果自在無礙大趣入身法)이니,
이것이 여덟 가지 신법이다.”
그리고는 이에 대해 자세히 설하셨다.
마명보살은 이 경문을 그대로 받아들여 마하연의 총상을 설한 것이다.
여기서 총(摠)이란 말은 두 가지 처(處)에 걸리기 때문에 총체라고 한 것이니,
상품을 향[望上]하고 하품에까지 이른다[下臨]는 뜻이다.
『대총지론(大摠地論)』에서는 여든 가지 문을 열어서 근본 마하연법을 자세하게 해석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열 가지를 하나로 모아서 여덟 가지만을 건립하였다.
무슨 연유로 여덟 가지가 되는지를 응당 알아야 하는가?
능입(能入)의 별상(別相)에 여덟 가지,
소입(所入)의 총체(摠體)에 여덟 가지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능입과 소입의 여덟 가지 법상 중에 무엇이 우수하고 무엇이 하열하며,
무엇이 넓고 무엇이 좁은지,
그 상(相)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한다.
평등하고 평등한 하나여서
모두 다름이 없으며
각각 모든 법을 포괄하기 때문이나
끝내 뒤섞이지 않는다네.
【釋】 위에서 설한 능입과 소입의 열여섯 가지 법상은 어디에나 두루하고 절대 평등하여 아무 차별 없는 한 가지 맛,
한 가지 모습이다.
어째서 그런가?
각각이 모든 법을 남김없이 포괄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다면 근본과 지말[本末],
그리고 총체와 개별[摠別]이 혼동되어 뒤섞이지 않겠는가?
본과 말을 끝까지 다하기 때문에 뒤섞이는 일이 없다.
총별문에서는 처음과 끝이 없는 것은 아니나 각각은 개별성을 가지므로 그 양에 있어서 동등하다는 뜻에서 평등하다는 것이지,
전체가 다 똑같다는 뜻에서 평등하다고 한 것은 아니다.
이제까지 본문을 삼 문(三門)으로 나누고 처음 두 가지 문을 다시 두 가지로 나눈 가운데 첫 번째를 설명하였다.
두 번째는 네 가지로 나뉜다.
그 중에는 각각 삼 문(三門)씩을 갖추고 있다.
무엇이 삼 문인가?
첫째는 근본법이 결정적으로 무엇을 소의로 삼는지를 밝히는 문[本法所依決定門]이며,
둘째는 근본 일심이 지말인 세간ㆍ출세간 법을 포괄하는 분제를 밝히는 문[根本攝末分際門]이며,
셋째는 두 가지 마하연을 건립하는 문[建立二種摩訶衍門]이다.
‘법이란 중생심을 이른다’는 구절은 근본법이 결정적으로 무엇을 소의로 삼는지 밝히는 문에 해당한다.
이제 온타남의 게송을 빌어 총지(摠持)로써 분명히 설명하겠다.
그 내용[相]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한다.
중(衆)은 사연의 무리[四衍衆]를 이르고
생(生)은 사종의 생[四種生]을 이르네
이는 하나의 법계장(法界藏)으로서
저 팔처(八處)에 두루하다네
【釋】 중(衆)에는 네 가지가 있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모든 여래중(如來衆)이며,
둘째는 모든 보살중(菩薩衆)이며,
셋째는 모든 성문중(聲聞衆)이며,
넷째는 모든 연각중(緣覺衆)이다.
이상이 사 중(四衆)이다.
생(生)에도 네 가지가 있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난생(卵生)이며,
둘째는 태생(胎生)이며,
셋째는 습생(濕生)이며,
넷째는 화생(化生)이다.
이상이 사 생(四生)이다.
헤아릴 수 있는 정도의 수를 넘어섰으므로
중(衆)이라 하고,
생명을 받으므로 생(生)이라 한다.
일법계심(一法界心)은 저 팔처(八處:사 중과 사 생) 어디에나 두루하고 원만하여 나뉠 수도 없고 흩어질 수도 없는,
오직 하나의 체(體)이며 하나의 상(相)이다.
네 가지 중으로 모든 성인을 남김없이 포괄하며,
네 가지 생으로 모든 범부를 남김없이 포괄한다.
마명보살은 일심(一心)이 이렇게 광대하고 원만하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중생’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순리계경(順理契經)』에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이 때 세존께서 커다란 광명을 놓아 신통한 힘을 보이신 뒤 불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자세히 듣고 갈 생각하여라.
내 이제 그대들을 위해 일법계장(一法界藏)을 분별해서 설명해 주겠다.
선남자여,
일법계장이란 모든 여래와 모든 보살과 모든 성문과 모든 연각과 모든 범부[異生]에 어디나 통하지 않는 곳이 없고 이르지 않는 곳이 없고 해당하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에 일법계장이라 한다.’”
이 논에서는 위 경문의 뜻을 취해 중생을 해석하였다.
마명보살은 이에 대해 육만 온타남 본장론(本藏論) 중에서 열 가지 문을 열어 별도로 해석하고 이런저런 설명을 붙였는데,
여기서는 요지만을 취했으므로 단지 중(衆)과 생(生)을 간략히 든 것이다.
이제까지 근본법이 결정적으로 무엇을 소의로 삼는지 밝히는 문[本法所依決定門]에 관해 설명하였다.
‘이 중생심이 세간 출세간의 모든 법을 다 포괄한다’고 한 귀절은 근본 일심이 지말인 세간ㆍ출세간법을 포괄하는 분제를 밝히는 문[根本攝末分齊門]에 속한다.
그 내용[相]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한다.
이 일법계심(一法界心)이
두 가지 문을 다 포괄하므로
세간ㆍ출세간을 포괄한다 하였고
법계가 되기에 법이라 하였네.
【釋】 일법계심이 일체 생멸문(生滅門)의 법을 다 포괄하므로 ‘세간법을 섭한다’고 하며,
일체 진여문(眞如門)의 법을 다 포괄하므로 ‘출세간의 법을 섭한다’고 한다.
이 심 전체가 그대로 법계가 되기에 법이라고 이름한다.
『자체계경(自體契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광대신왕(廣大神王)이 갖가지 모든 무명(無明)과 갖가지 모든 염법(染法)과 갖가지 모든 정백품(淨白品)의 법을 다 포괄하고,
또 모든 청정법과 모든 무애 법과 모든 해탈법과 모든 절리법(絶離法)과 모든 만족법(滿足法)과 모든 적정법(寂靜法)을 다 포괄한다.
그런데 이 광대신왕은 세간법도 아니고 출세간법도 아니다.”
여기서는 위 경문을 취했기 때문에 포괄[攝]한다는 말을 쓴 것이다.
마명보살은 팔만 온타남 귀종론(歸宗論)에서 열두 가지 문을 두어 이 내용을 자세히 밝히고 있는데,
여기서는 간략히 내용을 취했으므로 위와 같이 말했을 뿐이다.
이상이 일심이 지말인 세간ㆍ출세간법을 포괄하는 분제를 밝히는 문[根本攝末分齊門]에 관한 설명이다.
‘이 마음에 의지해서 마하연의 뜻을 드러낸다’고 하는 등은 두 가지 마하연을 건립하는[建立二種摩訶衍門] 것에 해당한다.
그 내용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한다.
두 가지 문을 전체적으로 나타내기에
이 마음에 의지한다 하였고
두 가지 근본법을 전체적으로 나타내기에
마하연을 드러낸다고 하였네.
【釋】 두 가지 능입문(能入門)을 전체적으로 나타내기 때문에 ‘이 마음에 의지해서’라 하였고,
두 가지 소입문(所入門)을 전체적으로 나타내기 때문에 ‘마하연의 뜻을 드러낸다’고 하였다.
무엇이 두 가지 문인가?
첫째는 심진여문(心眞如門)이고,
둘째는 심생멸문(心生滅門)이다.
무엇이 두 가지 본법(本法)인가?
첫째는 체(體)의 마하연이고,
둘째는 자체(自體)마하연과 자상(自相)마하연과 자용(自用)마하연이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소입의 본법은 능입에 의해 명칭을 그렇게 건립한 것이다.
진여의 체를 문으로 삼아 들어갈 바를 삼기 때문에 체(體)라 하였고,
자상의 본각심(本覺心)을 문으로 삼아 들어가기 때문에 자(自)라 하였다.
능입의 문이 두 가지로 구별되기 때문에 소입의 본법도 두 가지가 됨을 알아야 한다.
‘무슨 까닭인가?’라고 한 것은 스스로 질문하여 대답을 유도하는 말이다.
즉,
무슨 뜻이 있길래,
‘이 마음에 의지해서’라는 구절에 두 가지 문을 갖추고,
‘마하연의 뜻을 드러낸다’는 구절 중에 두 가지 본법을 갖추느냐는 질문이다.
답은 다음과 같다.
일법계심의 진여문이 되어 일체 마하연법을 드러내 보이고 일법계심의 생멸문이 되어 자체마하연과 자상마하연과 자용마하연의 법을 나타내 보인다.
이러한 뜻에서 각각이 두 가지 문과 두 가지 법을 갖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대각계경(大覺契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그리고 문수사리여,
매우 깊고 묘해서 헤아릴 수 없는 두 가지 법이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평등한 체상의 마하연[體自相自用摩訶衍]이고,
둘째는 자연의 자상마하연[自相自然摩訶衍]이다.
만일 이 두 가지 법을 증득하고자 한다면 두 가지 문을 닦아야 한다.
무엇이 두 가지 문인가?
첫째는 끊을 것도 없고 속박도 없는 문[無斷無縛門]이고,
둘째는 끊을 것도 있고 속박도 있는 문[有斷有縛門]이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자세히 설하셨다.
논에서는 위 경문을 취했으므로 위와 같이 설한 것이다.
『대총지론(大摠持論)』에서는 이 내용을 여덟 가지 문으로 분명하고 자세하게 설했다.
이제까지 두 가지 마하연을 건립하는 문에 관해 설명했다.
삼대(三大)의 뜻에서는 각각 처음의 두 가지 문을 요약하여 뒤의 한 문을 건립한다.
마명보살이 뜻을 두어 기꺼이 펼치려 했던 근본취지가,
마지막 한 문을 들어 처음과 가운데 문을 포함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위와 같이 말한 것이다.
또한 이상과 같은 차례를 시설해야 뜻이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위 두 게송에서의 본법(本法)에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첫 번째는 체대(體大)이니’란 두 가지 소입(所入)의 본법을 전체적으로 나타낸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한량없고 끝없는 갖가지 법으로 차별되지만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는 마하연이고,
둘째는 적정하여 잡됨이 없고 한 가지 맛으로 평등하여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는 마하연이다.
‘일체법의 진여는 평등하여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는다’란 두 가지 능입(能入)의 별문(別門)을 전체적으로 나타낸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그것은 본법의 명칭을 그대로 띠라서 문을 그렇게 구분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상대(相大)이니’란 두 가지 소입의 본법을 전체적으로 나타낸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여래장공덕의 마하연이고,
둘째는 성품의 공덕을 구족한 마하연이다.
‘여래상은 무량한 성품의 공덕을 구족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 구절은 두 가지 능입의 별문을 전체적으로 나타낸다.
어떻게 해서 두 가지인가?
본법의 명칭을 따라 문을 그렇게 구분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용대(用大)이니’란 두 가지 소입의 본법을 전체적으로 나타낸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세간의 모든 인과를 출생하는 마하연이고,
둘째는 출세간의 모든 착한 인과를 출생하는 마하연이다.
‘세간과 출세간의 모든 착한 인과를 내기 때문’이라고 한 구절은 두 가지 능입의 별문을 전체적으로 나타낸다.
어떻게 해서 두 가지인가?
본법의 명칭을 따라서 문을 그렇게 구분하기 때문이다.
삼대(三大)의 뜻은 『총지론(摠持論)』 「본지품(本地品)」 중에서 조목조목 분석해서 분명하게 설하고 있다.
무슨 이유로 불이(不二)의 마하연법에는 인연(因緣)이 없는가?
이 법은 지극히 묘하고 지극히 깊으며 유일하게 존귀하여 기근(機根)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어째서 기근과 무관한가?
마하연법에는 기(機)와 근(根)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건립(建立)을 필요로 하는가?
건립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마하연의 법은 모든 부처님께서 얻으신 바인가?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얻어 지는 것이지 모든 부처님이 얻는 것이 아니다.
보살과 이승과 모든 범부중생[異類]도 마찬가지다.
‘바다와도 같이 성품의 공덕이 원만하다’는 말이 바로 이를 지칭한다.
무엇 때문인가?
기(機)와 근(根)을 떠났기 때문이며,
교설(敎說)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덟 기지 본법(本法)은 어떻게 인연으로부터 일어나는가?
기(機)에 응하기 때문이며,
설(說)에 순응하기 때문이다.
어째서 기에 응한다고 하는가?
근이 있고 기가 있기 때문이다.
이상 여덟 가지 본법은 모든 부처님께서 얻으신 바인가?
모든 부처님께서 얻으신 바이지 모든 부처님에게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보살과 이승과 모든 범부도 마찬가지다.
‘수행의 종자인 연이 바다 같다’는 말이 이를 지칭한다.
어째서인가?
기와 근이 있기 때문이며,
교설이 있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로 진여문(眞如門)에 의지하여 향해 들어가는 마하연의 법에는 체(體)라는 명칭만을 건립하며,
생멸문(生滅門)에 의지하여 향해 들어가는 마하연의 법에는 자(自)라는 명칭을 건립하는가?
진여문 중에는 자신 이외의 상[他相]이 없기 때문이며 생멸문 중에는 자신 이외의 상이 있기 때문이다.
타(他)란 모든 불선품(不善品)의 법을 말하고 자(自)란 모든 청정품(淸淨品)의 법을 말한다.
만일 대치할 대상으로서의 타가 없다면 능히 대치하는 자도 없기 때문에 체(體)만을 들고 자(自)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대치할 상대로서 타가 있으면 능히 대치하는 자도 있으므로 체에 국한하지 않고 자까지 언급한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일법계의 체는 절대 평등하여 사사로움을 용납치 않으며,
타력을 빌리지 않아도 무량한 성품의 공덕이 자연스럽게 본디 갖추어져 있음을 나타내 보이고자 하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경우에 따라 안립하는 데에는 따로 정해진 바가 없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로 별설문(別說門)에서는 일심(一心)을 별도의 하나로 치고 삼대(三大)를 합해서 하나로 지되 각각 동등하게 두 가지 마하연을 설명하는가?
삼대의 뜻이 합해져야 비로소 두 가지 마하연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大)라는 개념은 세 가지에 공통되기 때문에 합해서 하나의 뜻으로 삼은 것이지 별다른 의도는 없다.
지금 열어 보인 열여섯 가지 법문 중에 우수하고 열등하고 넓고 좁은 상(相)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한다.
평등하고 평등한 하나이니
이 모두에 다름이란 없네.
각각이 모든 법을 다 포괄하되
결코 뒤섞이는 일은 없다네.
【釋】 능입과 소입 각각의 열여섯 가지 법문은 절대 원만하고 절대 평등하여 아무 차별 없이 법계 어디에나 두루하다.
어째서 그런가?
법문 각각이 모든 법을 남김없이 포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말이나 능소가 결코 뒤섞이는 일은 없다.
이제까지 총별 두 가지 문에 관해 설명하였다.
‘모든 부처님께서 본래부터 이에 의지했기 때문이며,
모든 보살들도 이 법을 타고 수레처럼 타고서 여래의 지위에 도달했기 때문이다’라고 한 구절은 통달궤칙부동문(通達軌則不動門)에 해당한다.
즉,
티끌같이 많은 과거의 모든 부처님과 티끌같이 많은 현재의 모든 부처님과 티끌같이 많은 미래의 부처님께서 모두 깊고 깊은 이 서른세 가지 법문의 안락한 수레를 타고 청정하고 더없이 높은 지위에 도달하셨기 때문이다.
시방삼세의 모든 보살들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보살이란 말은 삼취(三聚)의 모든 중생을 다 포함한다.
무엇 때문인가?
여래의 지위에 이르지 않는 중생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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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마하연론 서문
요흥황제(姚興皇帝) 지음
거울 같은 해와 구슬 같은 달이 이 산왕(山王)의 선궁(禪宮)에 머물러 두 길을 동시에 비추고 백 지역을 유유히 다닐 때,
평등한 관을 타고서 갠지스 강의 모래알만큼 많은 국토에 이르러 빛나는 극희(極喜)의 구슬을 들어 신령한 적멸의 궁궐을 엿본다고 들었다.
내가 옛날부터 이 법문이 있었다고 들었으나 갠지스 강의 모래알의 백배나 되는 지역 중 어디에 있는지를 깨닫지 못하여 그저 막연히 생각할 뿐이었다가 이제야 비로소 해석이 나오게 되었다.
전부터 거리에 떠도는 명성을 듣고 교화 받을 날을 기대하며 허공 같은 큰 형상의 흔적을 보고 바람에 흩어져버린 세계를 우러러 왔었다.
그러다가 뒤에 와서 과연 마니보장(摩尼寶藏)을 담은 상자가 동쪽 지역에 이르고 인다라망(因陀羅網)의 구슬이 항하사 세계에서 찾아짐을 대면하게 되었으니,
마음속에 넘쳐나는 기쁨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이 법이 기원정사의 연화좌를 떠난 이래 모범이 될 만한 것을 마음속에 바라왔었는데,
눈으로 보게 되었으니 가득한 경사가 아니겠는가.
물이 샘솟는다는 터를 먼 데서 바라보기만 하다가 별이 총총한 하늘가를 흠모하면서 돌아오지 말지어다.
내 비로소 칠각(七覺)의 보배 숲에서 무성하게 꽃피울 씨[因]를 뿌렸고,
구슬 같은 팔공덕[八德]의 연못에 연꽃의 종자를 심었다.
환희심을 뒤로 하고 향상하고 급히 오신 후,
그리고 금수레 같은 법문이 동방에 이른 이래,
위엄을 갖춘 불법문중에 응하여 구슬 같고 거울 같은 도왕(道王)의 게(偈)를 우선 책으로 묶었다.
산의 신령이 이미 항하사 세계의 지면에 내려와 마야(摩耶)의 문장으로 일찍이 기록되었고,
아직 오지 않은 팔만사천 법문을 실은 수레가 동쪽으로 떠날 차비를 차렸으며 과거 오백 세 동안 내려온 깨달음의 구슬이 남쪽에 이르렀다.
그가 내린 가르침은 어떠한가?
그는 관음보살 계신 곳에서 눈과 손을 비는 겨를에 갠지스 강의 모래알보다 많은 교문(敎門)을 애써 찾았다.
그가 펼친 이치는 어떠한가?
비바시불과 석가불 계신 곳에서 인다라망의 구슬을 빌려 온 공덕으로 티끌만큼 많은 이치를 밝게 펼쳤다.
앞서 가신 마명(馬鳴) 성인의 빛나는 덕이 이렇게 해서 고스란히 드러나고,
용수(龍樹)보살이 펴신 묘한 법운(法雲)의 상서(祥瑞)가 이렇게 해서 비로소 완전히 열리게 되었다.
이 법은 너무나도 넓고 너무나도 깊다.
그러므로 스스로가 산림 속에서 원[僧那]을 세우지 않은 이라면,
그리고 향기로운 연못에 두 가지 인(因)을 심지 않은 이라면,
뉘라서 물같이 흐르는 설법의 보배를 기약할 수 있겠는가?
미륵부처님 나오시기 전에 가슴 속에 새겨둔 비밀스런 법칙을 널리 펼쳤으니,
석가부처님 이후이겠는가.
석마하연론,
이것이야말로 성품바다의 근원을 끝까지 다한 비밀스런 창고이자 깨달음의 원인이 될 수행[行因]의 근본을 두드리는 심오한 말씀이다.
별을 실은 수레가 구슬 같은 달을 지나는 격이니 군자들이 그 취지를 알 수 없으며,
꽃을 수놓은 비단이 해에 다다른 격이니 숫자판을 두드려 보아도 끝이 어딘지를 헤아릴 수 없다.
가히 하나의 산에 해와 달이 동시에 뜨고 한 천하에 두 분의 황제가 계신다고 하겠다.
나는 석마하연론의 범본(梵本)이 지난날 중천축(中天竺)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 동쪽으로 모셔오도록 하였다.
때는 홍시 삼년(弘始三年,
401),
세차(歲次) 성기(星紀) 구월 초순에 대장엄사(大莊嚴寺)에서 친히 받들어 깎아낼 것은 깎아내고[削] 보탤 것은 보태면서[筆] 이 논을 받들어 번역케 하였다.
벌제마다(筏提摩多) 삼장이 직역을 하고,
유연타(劉連陁) 등이 세속에 통용되는 말로 전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사현금(謝賢金) 등이 집필을 맡아서 시작에서 끝날 때까지 2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말을 받아쓰고 문장을 다듬어 공든 작업이 끝났을 때,
해와 달의 면상이 골고루 땅에 임하고 수많은 별의 눈동자가 어디에나 펼쳐지며 크고 작은 모든 강물이 맑아지고 큰 바다의 물결이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금수레가 지상에 나와서 손바닥 안에 있는 수미산으로 들어갔는지를 나는 자세히 알지 못했었다.
세밀하도다,
기쁨의 문이 법계에 가득하구나.
크도다,
고요한 방이 터럭 끝으로 들어가는구나.
이치가 이러하니,
명성이 끊겼다면 어떻게 글로 써서 책을 만들 수 있겠으며,
상(像)을 떠났다면 어떻게 그려서 채색을 할 수 있겠는가?
말을 내놓자니 정명(淨名)이 나를 꾸짖을 테고,
담론을 하자니 선길(善吉)이 나를 성토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말하리라.
절대적인 이치를 시구[諷誦]에 담고 멋진 말을 묵언(黙言)에 머물게 하리라고,
망루[臺觀]를 부숴 커다란 허공을 넓히려 하지 말 것이며,
옥거울을 부수려고 상(像)의 자취를 놓아버리지 말 것이다.
나는 감월에게 글을 청할 재주도 없고 구토(龜兎)에게 글씨를 빌려 올 재주도 없는 사람이나,
아쉬운 대로 변변치 않은 글을 지어 여기에 서를 붙이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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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러 지위를 왔다 갔다 하면서 머물며 증득을 얻은 이근중생(利根衆生)을 위해 진여문(眞如門)을 보여 준다는 뜻이다.
‘격단문’이란 진여문을 비유하는 말이다.
큰 바다에 모든 공덕을 갖추어 많은 보배를 만들어내는 여의주가 있다.
용왕은 그것을 비밀창고에 보관하고는 창고를 천 겹의 문으로 에워싸 지켰다.
자신이 얼마나 그것을 애지중지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기도 했고,
보배의 가치로 보아 응당 그럴 만했기 때문이다.
창고에서 가장 가까운 데 구슬로 된 문이 있는데 그 문을 ‘격단(隔檀)’이라 부른다.
용들이 이 문만 열면 여의보장(如意寶藏)을 획득해서 자재하고 무애하게 쓸 수 있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수행자가 진여문에 들어가기만 하면 한 가지 체성의 법[一體法]을 몸소 증득하기 때문에 불이(不二)의 마음 근원에 자연히 계합한다.(論記 卷1, 卍續藏經 73, 3하)
2 둔한 근기의 중생들이 차례에 의해 닦아 나아갈 수 있도록 생멸문(生滅門)을 열어 보여준다는 뜻이다.
여의주의 비유 중에 격단문(隔檀門)을 제외한 나머지 문들을 ‘왕향위’라 부른다.
용들은 비록 여러 문을 드나들며 여의보장이 있다는 사실을 알기는 하나 그것을 몸소 얻지는 못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수행인들은 생멸문을 따라 마음의 중심을 잃지 않고 행을 다잡아 오직 진여(眞如)에 의존해서 자신들의 방편을 만들어 나간다.(論記 卷1,
卍續藏經 73,
3하)
3 중국말로 ‘의락(意樂)’이라 번역한다.
용수보살은 마명보살이 설한 『마하연론』의 본지(本旨)를 직접 받들어 이 해석을 지었다.
자신이 설한 내용과 『마하연론』에서 설한 바가 서로 어긋나지 않음을 밝히기 위해서 이 말을 넣은 것이다.(論記 卷1,
卍續藏經 73,
4하)
4 섭의론의 별명으로서,
이 논이 담고 있는 묘한 이치가 서역 사람들이 귀중한 책을 구슬보배로 묶어서[簡冊] 보관하는 것과 같기에 보책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論記 卷1, 卍續藏經 73, 5하)
5 화문이란 보는 이로 하여금 좋아하는 마음을 내게 하기 위해 경문에 수식을 가한 논을 말하며,
섭의란 보는 이로 하여금 바른 이해를 내게 하기 위해 오묘한 이치를 망라해서 지은 논을 말한다.
종(宗)을 중심으로 하느냐 석(釋)을 중심으로 하느냐에 따른 구분이다.
화문론에는 『불지론(佛地論)』 『금강경론(金剛經論)』등 석론(釋論)이 들어가고,
섭의론에는 『유가론(瑜伽論)』 『보성론(寶性論)』등 종론(宗論)이 들어간다.(論記 卷1, 卍續藏經 73, 5하)
6 보특가라(補特伽羅)는 중국말로 삭삭취(數數趣)라 번역하며,
사람을 뜻한다.
쉴 새 없이 업을 지어 갖가지 취(趣)에 달라붙기 때문에 삭삭취라고 한다.(論記 卷1, 卍續藏經 73, 6상)
7 천장(天藏)을 말한다.
경에서 청정하다고 한 것은,
하늘이 빛나고 깨끗한 특색을 갖기 때문이다.
즉,
욕계천(欲界天)에 머무는 중생의 몸은 안이 투명하고 바깥이 구슬과 같은 빛을 낸다.
색계천(色界天)에 머무는 중생의 몸은 안팎의 불꽃처럼 밝다.
무색계(無色界)에 머무는 자가 닦는 선정은 더욱 밝고 깨끗하다.
욕계ㆍ색계ㆍ무색계 모두가 허깨비와 같으므로 경에서 ‘보공(報空)’이라고 하였다.(論記 卷1,
卍續藏經 73,
6중~하)
8 요본(遼本)대장경에는 ‘이승장(二乘藏)’에 이어서 ‘보살법장(菩薩法藏)’이 붙어 있다.
9 불가락(不可樂)ㆍ고구(苦具)로 번역하며,
지옥을 뜻한다.
10 귀신을 뜻한다.
11 방생(傍生),
또는 축생(畜生)을 뜻한다.
12 유정이 몸을 담는 의지처가 되는 세계를 말한다.
더럽거나 깨끗한 특성을 가져서 중생들에게 좋거나 싫은 마음을 내게 한다.
13 잡란장에는 삼성(三聲)ㆍ팔전(八囀)ㆍ육석(六釋)ㆍ오명(五明)ㆍ주인(呪印) 등이 들어간다.
14 수량의 단위로,
십만을 뜻한다.
15 정첩이라고 번역한다.
토끼털의 미세한 형상이 시방세계의 밝고 어두운 모든 색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이,
이 논도 무량한 경을 모두 소의로 삼는다는 뜻이다.(通玄鈔 卷1,
卍續藏經 73,
167상)
16 기사(氣絲)라고 번역한다.
용왕이 혀에서 머리카락같이 미세한 실을 내서 시방세계의 모든 구름을 거두어들이듯,
이 논도 그렇다는 것이다.(通玄鈔 卷1, 卍續藏經 73, 167상)
17 중생을 결박하여 번뇌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아홉 가지를 말한다.
즉,
애정[愛]ㆍ분노[恚]ㆍ자만[慢]ㆍ무지[無明] 그릇된 견해[見]ㆍ집착[取]ㆍ의심[疑]ㆍ질투[嫉]ㆍ인색함[慳]이다.
18 중생을 얽어매어 수행하지 못하도록 하는 열 가지 번뇌를 말한다.
즉,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줄 모름[無慚],
남에게 부끄러운 줄 모름[無愧]ㆍ질투[嫉]ㆍ인색함이다.
후회[悔]ㆍ수면[眠]ㆍ들뜨는 마음[掉擧]ㆍ가라앉는 마음[惛沈]ㆍ분노[忿]ㆍ가리움[覆]이다.
19 공상(共相)은 모든 법에 공통되는 특성을,
차별상(差別相)은 모든 법 각각이 갖는 특수성을 말한다.
예를 들어,
일심(一心) 혹은 마하연(摩訶衍)의 한 법은 공상으로,
체(體)ㆍ상(相)ㆍ용(用) 삼대(三大)의 뜻은 차별상으로 설명된다.
20 두 가지 법집이란 구생법집(俱生法執)과 분별법집(分別法執)을 말한다.
구생법집은 무시이래로 허망하게 훈습해온 내인력(內因力) 때문에 항상 몸과 본래적으로 함께[俱]하는 집착으로서,
삿된 가르침이나 잘못된 분별에 의존하지 않고 저절로[任運] 일어나기 때문에 구생(俱生)이라는 표현을 쓴다.
구생법집은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항상 상속하는 구생법집으로서,
제칠식(第七識)에 소재하며 제팔식(第八識)을 연하여 자심상(自心相)을 일으켜 그것을 실유(實有)의 법으로 집착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끊어짐[間斷]이 있는 구생법집으로서,
제육식(第六識)에 소재하며 식소변(識所變)의 온체계(蘊處界) 등 상을 연하여 총체적으로든 개별적으로든 자심상을 일으켜 그것을 실유의 법으로 집착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구생법집은 미세하기 때문에 끊기가 어렵다.
후에 십지(十地)에서 수승한 법공관(法空觀)을 쉴 새 없이 닦아야 비로소 없앨 수 있다.
다음으로 분별법집은 현재의 외연력(外緣力)에 기인하며 본래적으로 신과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삿된 가르침이나 잘못된 분별을 만나야 비로소 일어나기 때문에 분별이라는 표현을 쓴다.
분별법집은 제육식에서만 일어난다.
분별법집에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사교(邪敎)에서 주장하는 온처계 상을 연하여 자심상을 일으켜 그것을 분별계탁하여 실유의 법으로 집착하는 것이다.
둘째는 사교에서 주장하는 자성(自性) 등의 상을 연하여 자심상을 일으키고 그것을 분별계탁하여 실유의 법으로 집착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분별법집은 드러나는 것[麤]이라서 비교적 끊기가 쉽다.
초지(初地)에 들었을 때 일체법의 법공진여(法空眞如)를 관함으로써 없앨 수 있다.(成唯識論 卷第1, 大正藏 31, 6하~7상)
21 무엇으로 번역해야 할지 찾지 못했으나 부평초(浮萍草)같이 이리저리 떠다니며 기생하는 식물류와 같은 것이라 생각된다.(論記 卷1, 卍續藏經 73, 14하)
22 무엇으로 번역해야 할지 찾지 못했으나 약왕인 송백류로 생각된다.(論記 卷1, 卍續藏經 73, 14하)
23 각주 1)번 참고,
24 『구사론(俱舍論)』이나 『유식론(唯識論)』에서는 번뇌를 끊어 진리를 깨닫는 과정에 네 가지를 시설한다.
첫째 가행도(加行道)는 번뇌를 끊고자 하여 예비적인 행을 닦는 단계(方便道),
둘째 무간도(無間道)는 번뇌를 끊는 단계로서,
이 단계를 닦는 즉시 번뇌가 끊기므로 간격 없다는 뜻에서 무간(無間)이라는 명칭을 붙인다(無礙道).
셋째 해탈도(解脫道)는 확실히 진리를 깨달아 해탈을 증득하는 단계.
넷째 승진도(勝進道)는 미혹을 완전히 끊어서 관찰하는 도,
혹은 다시 나아가 다른 이의 번뇌를 끊어주기 위해 행을 닦는 단계.
25 고려대장경에는 이 게송에 ‘오십(五十)’ 자가 빠져 있다.
석론에 의거해서 채워 넣었다.
26 집시(集施)로 번역한다.
적은 문장에 많은 뜻을 모아서[集] 유정에게 베풀어[施] 줌으로써 수지하기 쉽도록 한다는 뜻에서 그렇게 번역한다.(論記 卷1,
卍續藏經 73,
16상)
27 앞서 거론했던 오종인견(五種人見)과 이종법집(二種法執)을 대치한다는 말이다.
28 일천제(一闡提)로서 범어 icchantika의 음역.
선근을 끊어 성불할 가능성이 없는 종자를 말한다.
29 십신(十信) 중에 첫 번째부터 네 번째까지를 하품(下品),
다섯 번째를 중품(中品),
여섯 번째부터 열 번째까지를 상품(上品)으로 분류한다.
30 진여(眞如)와 불법승(佛法僧) 삼보를 믿는 것.
네 가지 수행은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을 말한다.
뒤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참고,
31 지(止)와 관(觀)을 동등하게 닦음을 비유한다.
지로써 유(有)에 집착하는 범부의 허물과 대승법에 대해 겁약한 마음을 내는 이승의 허물을 물리치고,
관으로써 범부의 망정과 아만,
이승의 협소한 마음을 물리친다.(論記 卷1, 卍續藏經 73, 16~17상)
32 십주위(十住位)에서는 진여와 무아법(無我法)의 이치를 바르게 생각하여 아(我)에 집착하는 장애를 없애지만 생공관지(生空觀智)를 처음 일으켰기에 아직은 오래도록 생사에 빠지는 고온(苦蘊)에 대해 극도로 두려운 마음을 낸다.(論記 卷1, 卍續藏經 73, 19상)
33 십행위(十行位)에서는 생공관(生空觀)이 자재하여 갖가지 두려움의 장애를 없앤다.
두려움은 떠났지만 오랜 겁 동안 행인(行因)을 장엄하고 중생을 교화하면서 더러는 싫증을 내고 떠날 마음을 갖는다.(論記 卷1, 卍續藏經 73, 19상)
34 십향위(十向位)에서는 대비심으로 중생을 이롭게 하면서 싫증내고 떠나는 장애를 물리친다.
이 장애를 물리치면 바로 환희지에 들어가 이생성(異生性) 등의 장애를 극복한다.(論記 卷1, 卍續藏經 73, 19상)
35 이생성의 장애란 십지의 열 가지 장애 중 첫 번째를 말한다.
이생(異生)은 범부의 뜻으로,
이생장이란 사람으로 하여금 범부가 되게끔 하는 성품을 말한다.
36 광략경(廣略經)이라 번역한다.(論記 卷1, 卍續藏經 73, 19하)
37 광략론(廣略論)이라 번역한다.(論記 卷1, 卍續藏經 73, 19하)
38 논의(論議)라고 번역한다.(論記 卷1, 卍續藏經 73, 20상)
39 승나(僧那)는 서원(誓願),
아세야(阿世耶)는 의락(意樂)으로 번역한다.
논주의 서원과 욕구가 끝이 없음을 뜻한다.(論記 卷1, 卍續藏經 73, 20상)
○ [pt op tr]
● 유명한 마하연 3 개 대학 체대 상대 용대
첫 번째는 체대(體大)니,
일체법의 진여는 평등하여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상대(相大)니,
여래장(如來藏)은 무량한 성품의 공덕을 구족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용대(用大)니,
● 일체가 마음일 때 다른 생명의 존재는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가.
◈Lab value 불기2564/04/01 |
|
문서정보 ori
http://buddhism007.tistory.com/15672#1968
sfed--석마하연론_K1397_T1668.txt ☞석마하연론 sfd8--불교단상_2564_04.txt ☞◆vipa1968 불기2564-04-01 θθ |
■ 선물 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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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섭마등(迦葉摩謄)을 말한다. 중천축 사람. 67년(후한 영평 10) 축법란과 함께 중국에 와서 처음으로 불교를 전했다.
답 후보
마등(摩謄)
마하비로자나(摩訶毘盧遮那)
마후라가(摩睺羅伽)
만다라화(曼茶羅華)
말나식(末那識)
멸(滅)
멸법지인(滅法智忍)
ॐ मणि पद्मे 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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