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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4-01-06_집신주삼보감통록_001 본문
『집신주삼보감통록』
K1069
T2106
상권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 해제[있는경우]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 [pt op tr] 집신주삼보감통록_K1069_T2106 핵심요약
♣1069-001♧
『집신주삼보감통록』
상권
집신주삼보감통록
집신주삼보감통록(集神州三寶感通錄) 상권
석도선(釋道宣) 지음
주호찬 번역
무릇 삼보의 이로움이 나타난 것은 그 유래가 오래 되었다.
다만 이를 믿거나 비난하면서 서로 다투는 까닭에 감응하는 인연이 있게 된 것이다.
한(漢)에서 당(唐)에 이르기까지 6백 년 동안 신령한 모습을 눈으로 보고
소문으로 들은 일은1) 여러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신령스런 조화는 정해진 방향이 없고,
기연을 기다렸다가 문을 두드리는 것이며,
빛나는 서상(瑞祥)이 나왔다가 사라지면서 한 시대의 믿음을 열어주고,
거룩한 상(像)이 모습을 드리워서 만대에 자취를 남기신다.
혹 이미 지나간 옛날에 보였거나 혹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나타나시어
도속(道俗)에 밝게 드러나 미혹한 자나 깨우친 자에게 믿음을 낳게 하셨다.
그런 까닭에 그 요점만을 집어내어서 세 권의 책으로 한 부(部)를 이루었다.
■ 처음에는 사리표탑((舍利表塔))의 일을 밝히고,
다음은 영험한 상(像)이 드리운 일을 열거하며,
그리고 뒤에 성사(聖寺)의 상서로운 경과 신승(神僧)의 일을 인용한다.
■ 첫 번째, 사리표탑의 일을 밝힌다면,
옛날 여래께서 걸식을 다니시는데,
길 옆에서 놀고 있던 어린 아이가 모래흙을 쌀과 국수라 하면서 엎드려 부처님께 청하였다.
“흙으로 만든 국수를 부처님께 받들어 올립니다.”
부처님께서 이를 받아들여
시자(侍者)에게 명하여 토장(土漿)을 만들어
부처님께서 머무시는 방을 바르게 하시니
남쪽 벽을 바르기에 충분했다.
그리고는 기별(記別)을 내리셨다.
“이 동자는 내가 입멸(入滅)한 후 백 년 뒤에 염부제(閻浮提)의 왕이 될 것이며,2)
허공과 땅 밑 40리 안에 있는 온갖 귀신들이 그의 신하ㆍ권속이리라.
그는 앞에 세웠던 여덟 개의 탑3)을 열고 사리를 거두어서는
하룻밤 사이에 귀신들을 시켜 8만 4천의 탑을 만들게 할 것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여러 경의 설명과 같기에 자세히 적지 않겠다.중국은 곧 염부제주의 동쪽 경계에 있다.
따라서 탑이 나타났다 하더라도 의심할 것은 없다.
사리(舍利; śarī)란 서역 인도의 말로, 이곳에서는 골신(骨身)이라 부른다. 자칫보통사람의 뼈라고 생각할까 우려한 까닭에 본래의 명칭에 의거하여 이를 구별하였다.
1. 서진(西晋) 회계(會稽)의 무탑연(鄮塔緣)4)
서진(西晋) 회계(會稽) 땅의 무탑(鄮塔)은 지금은 월주(越州:福建省)의 동쪽 370리에 있는 무현(鄮縣)의 경계에 있다.
동쪽으로 바다와의 거리가 40리이고 현(縣)의 동남쪽 70리에 위치하며,
남쪽 오촌(吳村)과의 거리는 25리이다.
전시대의 전기를 살펴보면 진의 대강(大康) 2년(281)에 병주(幷州) 이석현(離石縣)에 유살하(劉薩何)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사냥꾼의 집안에 태어나서 사냥을 업으로 삼았는데 병으로 죽었다 살아나
한 인도 스님을 보게 되었다.
그가 살하(薩何)에게 말하였다.
“너는 죄가 무거워 마땅히 지옥에 들어가야 하겠지만 네가 무식한 것을 가엾게 생각하여 잠시 너를 놓아 준다.
지금 낙양 아래로 제성(齊城)과 단양(丹陽) 그리고 회계(會稽) 땅에는
모두 오래 된 탑과 강물 위에 떠 있는 석상(石像)이 있는데 모두가 아육왕(阿育王)이 만든 것이다.
부지런히 불법을 구하여 공경하고 뉘우치면 이 고통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깨어난 뒤 전날의 습관을 고쳐 출가하여 도를 배웠는데
이름을 다시 혜달(慧達)이라 고쳤다.
그는 들은 대로 남쪽으로 갔다.
그리고 회계의 바닷가와 산과 늪에 이르러 곳곳을 찾아보았으나 아무도 절터나 유서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혜달은 슬픔에 가슴이 막히고 번민하고 원통하였지만
몸을 던져 사정을 고할 땅도없었다.
그런데 홀연히 한밤중에 땅 밑에서 종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그는 곧 어렴풋이 그 땅을 기억하여 나무를 잘라 찰간대를 세우니
사흘만에 홀연히 보탑(寶塔)과 사리가 땅에서 솟아올랐다.
푸른빛을 띠는 그 신령한 탑은 모습이 마치 돌과 비슷하였지만 돌은 아니었다.
높이가 한 자[尺] 네 치[寸]에 둘레가 일곱 치였고,
오층의 노반(露盤)은 마치 서역(西域)의 우전(于闐)5)에서 만들어진 탑을 닮았다.
창이 앞면으로 열려 있고 네 둘레에는 하늘의 방울이 달려 있었으며
가운데는 구리로 만든 경쇠[磬]가 매달려 있었다.
늘 종소리가 난 것은 아마도 이 경쇠소리였던 모양이다.
탑신 위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모두가 불ㆍ보살ㆍ금강역사ㆍ성승(聖僧)들과 기타 여러 종류의 상(像)이었다.
그 형상이 지극히 미세하여 눈을 깜박이며 주의 깊게 보니 곧 그 안에 백천의 상(像)이 나타났는데,
얼굴과 눈ㆍ손ㆍ발이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신령스런공로요 성스런 자취라 할 수 있는 것으로 사람의 지혜로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 이 탑은 큰 목탑 안에 봉안되어 있다.
팔왕일(八王日)에는 그것을 메고 마을을 도는데
이를 보는 사람은 모두 그 아래에 절하고 염불하지 않는 자가 없다.
그 사리는 목탑의 밑바닥에 있으며,
그 탑의 왼편에는 오래된 자취가 많이 남아 있다.
탑 옆에 있는 여러 고을과 현(縣)은 월(越)나라의 옛 도읍지이다.
구장현(句章縣)이 무현(鄮縣)ㆍ염현(剡縣) 등 네 현과 마주 보고 있으며,
이것이 여러 개의 고을을 이룬다.
그 동북쪽 107리에 큰 부향(部鄕)이 있으며,
그곳에 있는 옛 월나라의 성은 주위가 3리이다.
『지기(地記)』에서 말하였다.
“월나라 중엽에 이곳을 도읍으로 삼았고 이궁(離宮) 별관(別館)의 옛 터가 아직 남아 있다.
이곳에는 모두 예장(豫章)나무가 자라나서 문과 계단 옆에 많이 남아 있는데
줄지어 서로 마주 하고 있는 모습이 삼엄(森嚴)하고 엄숙하며 사랑스럽다.
비바람이 치거나 그믐밤이나 초하루 날에는 아직도 종소리 경쇠소리가 들린다.
백성들은 지금까지 엄숙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많이 품고 있으며,
그 자취가 많이 남아 있다.
여러 고을의 서북쪽 백 리 되는 곳에 신의향(新義鄕)이 있으며,
그곳에 허공암(許公巖)이 있다.”
『지지(地志)』에서 말하였다.
“진(晋)나라 때에 고양(高陽) 땅에 허순(許詢)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자(字)가 현도(玄度)로,
사문(沙門)인 지둔(支遁)ㆍ도림(道林)과 벗이 되어 마냥 교제하면서 산수를 두루 구경하다가 이곳에 이르러 거처하게 되었다.
진나라가 현도(玄度)를 대함이 서먹해지자 사도(司徒) 허연(許椽)이 그를 불렀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후에 건업(建鄴)을 찾아가니 그를 보고자 하는 사람이 온 도읍에 가득하였다.
그 후 유회(劉恢)가 단양(丹陽)의 수장[尹]이 되어 이름이 당세에 알려졌는데,
하루에도 몇 번씩 그를 찾아가 탄식하기를
‘지금 허공(許公)을 만나는 바람에
내가 경윤(京尹:서울의 수장 자리)을 가볍게 박대하고 말았다’고 하며 그 고을에 집[濟]을 세우고 그곳에서 거처하였다.
양대(梁代)에 이르러서도 이 집은 아직 남아 있었다.
허연(許椽)이 반기를 들게 되자 유윤(劉尹:劉恢)이 한번은 그 집에 왔다가 말하기를
‘맑은 바람 밝은 달빛 아래 언제 내가 항상 현도를 그리워하지 않은 날이 있었던가! 라고 하였다.”
구장현(句章縣)의 서남쪽 130리에 문명(文明)한 고을이 있는데,
사명산(四明山)ㆍ천태산(天台山)ㆍ적성산(赤城山)ㆍ폭포산(瀑布山) 등의 산은 천하에서 최고라 일컫는다.
그 동북쪽 140리에 모래로 쌓은 둑길은 너비가 수 길이나 되며 백리 남짓 바다 속으로 뻗어 있다.
『지기(地記)』에서 말하였다.
“이는 진(秦)의 황제가 안기선생(安期先生: 安期生)의 뒤를 쫓아 봉래도(蓬萊島)로 가다가
바다가 깊은 곳에 이르자 멈춘 곳이라고 한다.”
그런 까닭에 이 둑길은 지금도 완연히 남아 있다.
무현의 옛 성은 구장현의 동쪽 3백여 리 되는 곳에 있으며,
옛날 민월(閩越)이 도읍한 곳이다.
그 신령한 탑이 나오는 곳은 곧 무현의 경내인 효의향(孝義鄕)이다.
『지지(地志)』에서 말하였다.
“아육왕이 8만 4천의 탑을 만들었으니,
이것은 그 중 하나다.
송나라 때 회계(會稽)의 내사(內史)였던 맹의(孟顗)가 이를 수리하였다.
산에는 둘레가 석 자나 되는 석감(石坎)이 있는데,
물맛은 맑고 순수하며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차갑다.”
『여지지(輿地志)』에서 말하였다.
“아육왕은 석가의 제자로 능히 귀신을 부릴 수 있었다.
하룻밤(一日夜) 사이에 천하에 불사리가 든 보탑(寶塔) 8만 4천 개를 만들었으니,
모두 땅에서 솟아올랐다.”
진(晋)나라 때 사문 혜원(慧遠)의 기록을 살펴보면,
“동방의 두 탑은 하나는 이곳에 있고 다른 하나는 팽성(彭城)에 있다.
또한 지금의 말릉(秣陵)의 장간탑(長干塔)도 그 하나다”라고 하고 있다.
곧 세 개의 탑이 있다는 것이다.
이제 경험으로 보면 일억의 집[億家]에 하나의 탑이 있는데,
이 동하(東夏)의 땅을 헤아린다면 이치로 따져 탑이 많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또한 양월(楊越)에도 그 면적이 아홉 성(城)6)에 이르는 탑이 두 개 있다.
따라서 탑이 있는 것이다.
『회계기(會稽記)』에서 말하였다.
“동진(東晋)의 승상(丞相) 왕도운(王導云)이 처음 강을 건널 때 한 도인(道人)이 있었는데 뛰어난 풍채가 비범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바다에서 와서 서로 만나게 되었다.
예전에 아육왕과 함께 무현 아래를 유람하다가
진사리(眞舍利)로 탑을 일으켜 이 지방을 지키게 하였는데,
아육왕이 진인(眞人: 아라한)들과 더불어 탑을 받들고 허공을 날아
바다로 들어가자 제자들이 매달려 당기다가 한꺼번에 모두 땅에 떨어져 검은 돌[烏石]로 화하고 말았다.
그 돌은 모습은 마치 사람의 형체와 같았으며,
그 탑은 철위산(鐵圍山)에 있다’고 하였다.”
그러자 태수(太守) 저부군(褚府君)이 말하였다.
“바다를 여행하는 사람이 설명하기를 ‘섬 위에 까만 돌무더기가 있는데,
도인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제법 의복을 갖추어 입고 있는 것도 있다’고 하였다.
이에 내가 사람을 시켜 돌을 캐서 가져 오게 하여 이를 보니 돌무늬가 모두 다 가사 모양을 하고 있었다.
동쪽 바다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그 섬은 서언왕(徐偃王)의 피난처로 궁전ㆍ성곽의 옛 터가 완연히 남아 있었다.”
옛날 주목왕(周穆王)이 서쪽 지방을 순행(巡行)하다가 곤륜산(崑崙山)에 올라가게 되었다.
그곳에는 서언왕의 핏줄이 살고 있었는데,
주목왕은 이 말을 듣고는 준마를 달려 돌아왔다.
하루에 만 리를 달렸으니,
서언왕은 그를 피하여 이곳에 왔던 것이다.
진(晋)의 손은(孫恩)이 반역을 일으켰는데,
그는 신선이나 요사스런 자들에 기대어 대중을 현혹하고 성을 쌓아 스스로를 방어하였다.
그 곳이 아직도 남아 있다.
양(梁)나라 고조(高祖) 보통(普通) 3년에 그 옛 유적을 중수하고 나무 부도(浮屠)7)를 세웠다.
법당ㆍ불전(佛殿)이며 방과 회랑으로 주위를 가득히 둘러싸게 하고,
아육왕사(阿育王寺)라 불렀다.
이 절은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대나무 숲이 빽빽하여 푸르며 꽃나무들이 사이사이에 피어나고 짐승과 새들이 서로 즐기니,
실로 한가로이 세상을 벗어난 사람들이 있을 아름다운 땅이다.
이곳에 사적비가 있어 그 유래를 노래하고 있는데,
저작랑(著作郞)ㆍ고윤조(顧胤祖)의 문장이다.
절의 동남쪽 35리에 있는 산 위에 부처님의 오른편 발자국이 있고,
절의 동북 2리 산마루에는 부처님의 왼편 발자국이 있다.
두 곳의 바위 위에 나타난 발자국에 대해 그 유래를 추측하는 사람이 없다.
절 북쪽 2리에 성스런 우물이 있는데,
그 우물 속의 실체는 깊은 못에 사는 뱀장어이다.
세속에서는 어보살(魚菩薩)이라고 부른다.
사람이 우물이 있는 곳에 가서 예배를 드리면 물고기가 소리를 따라 밖으로 나온다.
어느 날 지나던 도적들이 거짓으로 절을 하였는데,
이에 물고기가 나오자 도적들은 곧 칼로 물고기를 베었다.
이 일로 인하여 물고기의 꼬리가 잘려 나갔고 그 때부터 물고기는 깊이 들어가 숨어 나타나지 않았다.
지극한 마음으로 맞이하고자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있으면 다만 물만 뿜어올리고 말뿐이었다.
처음에 한스님이 탑 소문을 듣고는 찾아와 예배를 드렸으나
거처할 곳이 황량하고 끼니를 의지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한 늙은 할미가 아픈 다리로 와서는 밥을 지어 놓고 곧 떠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이상한 일이 계속되자 떠난 뒤에 몰래 찾아보니 이내 못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를 근거로 추리해 본즉 그것은 물고기가 화했던 것이리라.
그 탑의 신령스럽고 기이함은 이따끔 같지 않지만 대략은 서상(瑞祥)이 되었으며,
대개는 성승(聖僧)으로 나타나 탑 주위를 돌면서 도를 행하였다.
저녁마다 등불을 켜면 빛 그림자 가운데 모습을 나투고 벽에 있으면서
빙빙 돌며 걸어가기도 하였다.
여기서는 잠시 몇 가지만 열거하였으니,
많은 것을 든들 말만 허비할 뿐이다.
당나라 정관(貞觀) 19년(645)에
민(敏)법사란 사람이 있었는데 혈도(穴道)를 보는 데 뛰어났다.
그는 성스러운 유적들을 두루 찾아보고
의연히 마음이 동하여 문도(門徒) 수백 명을 거느리고
이 절에 와서 한 달 동안 경론(經論)을 두루 강론하자 사속(士俗)이 함께 모여 설법을 들었다.
밤중에 어떤 사람이 보자니 인도 스님 백여 명이 탑을 돌면서 행도(行道)하기에 이 일을 대중에게 알렸다.
이에 그 절의 스님은 말하였다.
“이런 일은 늘 있는 것이라 이상하게 여길 만한 일도 못 된다.
예전부터 지금까지 사대양일(四大良日)에는 멀고 가까운 데에 사는 사람들이
절에 와서 재(齋)를 올리고 복을 심는데
밤 마다 인도 스님들이 행도하면서 경을 외우고 게송을 읊는 등의 모습을 보게 된다.”
영휘(永徽) 원년(650)에 회계의 처사 장태현(張太玄)이란 사람이
절에서 예송(禮頌)을 드리고 지열(智悅)이란 사문과 침상을 나란히 하여 잠을 잤다.
한밤중에 『금강반야(金剛般若)』를 외우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 소리가 또렷하고도 분명하였다.
두 사람이 조용히 듣고 있자니 몸과 마음이 즐겁고 편안해졌다.
이윽고 송경이 끝나자 그 모습이 혹 사실이기를 바라며 나가서 찾아보니
형체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것이 신(神)이 내려준 것임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2. 동진(東晋) 금릉(金陵)의 장간탑연(長干塔緣)
동진(東晋) 금릉(金陵:
지금의 南京)의 장간탑(長干塔)은 폐사(廢寺)가 된 장간사(長干寺) 안에 있다.
그 위치는 지금의 윤주(潤州) 강녕현(江寧縣)에 있는 옛 양(楊)의 도읍지 주작문(朱雀門:
南門)의 동남쪽이고,
옛 월나라 성의 동쪽이다.
옛날에 서진(西晋)이 아직 강남 지방을 통합하지 못하였을 때 이곳은 오(吳)나라로 일컬어졌다.
장간의 옛 마을에 고탑(古塔)이 서 있던 땅이 있다.
이 탑은 아육왕이 일으킨 것으로,
마을에 의지하다가 이미 붕괴되었다.
아들 양(亮)이 등극하고 손림(孫琳)이 정권을 잡아 오봉(五鳳) 연간에 불사(佛寺)들을 부수고 없앴는데,
이 탑도 함께 사라지고 사리는 땅 속에 묻혔다.
오(吳)가 이를 평정한 뒤에 여러 스님들이 자못 옛 터에 근거하여 그곳에 살면서 삼층의 탑을 세웠지만,
옛 탑의 터는 얻지 못하였고 사적도 풀 속에 묻혀서8)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동진(東晋)의 함안(咸安) 2년(372),
간문제(簡文帝)가 삼층의 탑을 세웠고,
효무제(孝武帝)가 황금 상륜(相輪)의 노반(露盤)을 올렸다.
『명상기(冥祥記)』에서 말하였다.
“간문제(簡文帝)는 탑을 구축하여 일으킬 뜻이 있었으나 미처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곧 삼층의 탑은 아마도 이에 앞서 세운 것이리라.
효무제의 태원(太元) 연간(376~396) 말에 병주(幷州) 서하(西河) 땅에 유혜달(劉慧達)이란 사문이 있었다.
본명은 설하(屑荷)로,
승전(僧傳)에도 보인다.
그가 와서 옛 탑을 찾았으나 아무도 그 땅을 알지 못하였다.
이에 월나라의 성 위에 올라가서 사방을 바라보니 유독 장간(長干)에 이상한 기운이 있는 것이 보였다.
이에 곧 그곳에 가서 예배하고는 거주하였다.
이때 저녁 어둠이 깔리면 늘 광명이 나타나자,
어렴풋이 그곳을 기억하여 땅을 파서 한 길 가량 들어가 세 개의 돌비석을 만났다.
길이는 여섯 자였다.
중앙에 있던 비석에는 네모난 구멍이 뚫어져 있었으며,
그 속에 무쇠ㆍ은ㆍ금의 세 개의 함이 서로 겹쳐 있었다.
금으로 된 함에는 세 과의 사리가 들어 있었는데 광명이 사무치게 비추었다.
또한 손톱 한 쪽과 머리카락 한 올이 있었다.
머리카락은 펴면 길이가 몇 자나 되었고,
말아 들면 소라 모습을 이루었다.
광채가 밝게 빛났으니 이 모두가 옛날 아육왕이 넣었던 것이다.
이에 곧 탑의 북쪽에 자리잡아 다시 탑 하나를 축조하였는데 효무제가 탑신을 더하여 삼층탑을 만들었다.
그런 까닭에 이 절에는 두 개의 탑이 있으며,
서편의 것이 바로 아육왕의 옛 탑이다.
단양의 태수[尹]였던 왕아(王雅)란 사람은 오두미도(五斗米道)을 신봉하였는데 늘 불법은 내몰고 불탑과 절은 허물어 없애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 날이 오자 그는 곧 명령을 내려서 회계왕 도자(道子)를 시켜 사리를 가져 오라고 하고는 자신이 이를 보겠노라고 하였다.
이때 사문 정행(正行)이 사리를 받들어 왕아에게 자져왔다.
이에 왕아가 사리를 담은 바리를 뒤집었지만 사리는 그릇 안에 붙어서 끝내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
이에 왕아는 다시 맑은 물을 담고 향을 사르고 축원하며 말하였다.
“단양 태수인 나 왕아는 너무도 불법을 믿지 않았습니다.
세존께서는 위엄과 신령하신 힘을 부디 내보여 주옵소서!”9)
그러자 소리에 응하여 환하게 광명이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왕아는 이 일이 있은 뒤부터는 비록 정성을 다하지는 않았지만 죽을 때까지 다시는 불법을 무고하거나 헐뜯지 않았다.
양(梁)나라 대동(大同) 연간(535~545)에 달이 황제의 별자리[五車星座]를 범하고 노인성(老人星)이 나타났다.
이에 장간사의 아육왕탑을 개조하면서 안에 봉안했던 사리와 머리칼ㆍ손톱을 모셔내었다.
그리고는 천자가 절에 행차하여
대무애법회(大無礙法會)10)를 마련하고 소서(詔書)를 내려서 말하였다.
“하늘과 땅의 운기가 차고 기우는 것은 시간과 함께 끊임없이 변한다.
만물이 그 꿈틀거리는 생명을 가지런히 할 수 없고,
음양이 그 덮고 싣는 역할을 영구히 같이 할 수 없는 까닭에 고달프고 편안함이 해마다 다르며,
기쁨과 슬픔이 날마다 다르다.
지난 해에는 곡식이 여물지 못해 곡식 값이 비싸게 오르고 백성들이 곤궁에 처해 있었다.
운기의 모임이 이와 같이 평정을 잃고 넘치게 돈다.
사정을 따지고 그 이치를 살핀다면 혹 가여운 점도 있어서 수레에서 내려 그 죄를 물어 보아 모든 지난 가르침을 들어본즉 그 책임은 나라의 우두머리에 돌아가니 실로 모든 죄는 짐(朕)에게 있도다.
모든 것을 법으로 옭아맨다면 곧 스스로를 새롭게 할 길이 없어지니,
『서전(書傳)』에 이르지 않았는가?
‘차라리 무고한 백성을 죽일 바에야 오히려 나라를 잃고 다스리지 않은 것이 옳다’라고.
또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때를 따라가는 뜻은 크도다’라고 하였다.
지금 진신사리가 다시 세상에 나타났으니,
이는 세상에 희유한 일을 만난 것으로,
만나기 어렵다는 생각이 일어나도다.
지금 아육왕사에 나와서 무애회(無礙會; 無遮會)를 여니 나이든 이나 어린아이까지도 기뻐하지 않는 자가 없다.
마치 오래 굶주리다가 음식을 얻은 것과 같고,
오랫동안 이별하였던 어버이를 만난 듯하다.
숨어 있는 사람이나 나타난 사람이나 모두 마음이 한 곳으로 돌아가고,
먼 곳 가까운 곳에서 모두 우러러보며,
선비와 아낙네가 아득히 깔리고 벼슬아치들의 수레가 구름같이 모여서 동시에 공덕을 펴니 진실로 사람과 신령에 어울리도다.
무릇 온 세상의 죄진 자는 경중을 가릴 것 없이 모두 용서하여 면제하리라.”
지금의 윤주(潤州:
현재의 寧波市)인 강녕(江寧)의 옛 땅에는 다만 벽돌로 된 삼층의 터와 찰간대ㆍ불전(佛殿)이 있을 따름이다.
그 나머지 터는 덤불과 나무로 무성히 덮여있어 사람이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어서,
다만 이것이 옛 터임을 나타내고 있을 뿐이다.
또 자주 호랑이가 나타나,
탑터를 발굴하던 사람들이 이 때문에 죽는 일이 많다.
풀은 깊고 인적은 드물어 오직 흉악한 짐승들만이 그 속에서 새끼를 낳고 기르는데,
혹 사슴을 물고 와서 피로 탑을 더럽히는 일이 있으면 이윽고 무엇인가에 두들겨 맞아 부르짖는 소리가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지금의 영안방(永安坊)의 장후교(張候橋)와는 7,
8리의 거리에 있다.
나는 본래 서울(京師) 곡지(曲池)의 일엄사(日嚴寺)에 머물고 있었다.
이 절은 수양제(隋煬帝)가 지었다.
곧,
예전에 수양제가 진(晋)나라 때 변방의 사령관이 되어 회해(淮海:
양자강 하구) 지방을 다스리고 있을 때 서울에 탑은 있었으나 아직 사리를 안치하지는 않았다.
이어 곧 장간사의 탑 밑을 발굴하여 사리를 취하여 서울로 들어와 일엄사의 탑 아래에 묻고 그 위에 명(銘)을 새겼다.
이 때 강남의 대덕 50여 명이 모두 말하였다.
“서울의 탑 아래 묻은 사리는 아육왕이 넣었던 것이 아니다.
아육왕이 넣은 것은 곧 장간사 본절에 있는 사리다.”
그러나 그 말들이 옳고 그른 것은 추측할 수 없는 일이다.
무덕(武德) 7년에 이르러 일엄사는 폐사(廢寺)가 되고 스님과 문도[僧徒]들은 흩어서 유배되었다.
건물은 관청에 몰수되어 오직 사리탑만이 아무도 지키는 사람 없이 남아 있었다.
절의 토지가 관청에 귀속되어 모름지기 다른 곳으로 옮겨가야만 했다.
나와 문도 열 사람이 숭의사(崇義寺)에 보내져 머물면서 그 곳에서 탑 밑을 발굴하여 삼 과[枚]의 사리를 얻었다.
흰 빛깔의 광명이 나고 크기는 수수알만 하였다.
아울러 손톱 하나를 얻었는데 약간의 노란 빛깔이 있었다.
아울러 흰 머리칼 수십 올과 그 밖에 여러 가지 보석ㆍ유리 및 오래된 그릇 등이 있었다.
모두 큰 구리함에 담아 놓고 점검해 보니 꼬불꼬불한 머리카락은 없었으며,
또한 손톱은 그 빛깔이 노랗고 게다가 사람의 것처럼 작은 것이 의심스러웠다.
부처님의 손톱을 살펴보면 사람의 손톱보다 갑절이나 크고 또 손톱 빛깔도 적동색(赤銅色)을 띠고 있으나 지금의 것은 그렇지 않았다.
이에 곧 이를 가지고 숭의사의 불당 서남쪽에 있는 탑 아래에 이르러 예전 그대로 큰 석함(石函)에 담아 본래의 명(銘)으로 그 위를 덮고 지부(地府)에 묻었다.
그 후 내가 물어 보니,
수나라 초에 남방의 스님들이 모두 “손톱과 머리카락은 양무제(梁武帝)의 것이며 사리는 의문이 있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이를 묻고 본래의 명(銘)을 그 위에 얹어 놓은 사실에 근거하여 헤아려 보니,
장간사의 불골(佛骨)을 자못 서울로 옮겼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강남의 옛 탑에서는 신이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숭의사로 흘러온 것은 아마도 보잘것 없는 사리인 듯하다.
그런 까닭에 이 두 곳의 사리를 모두 기술하였다.
다만 세월이 아득히 먼 옛날의 일이어서 후세 사람이 추측할 수 없는 일이기에 간략하게 이 줄거리를 엮어 그 인연을 밝혀 두는 바이다.
3. 석조(石趙) 청주(靑州)의 동성탑연(東城塔緣)
청주(靑州) 고성사(古城寺) 탑에 대해서는 주(周)ㆍ진(秦)을 겪어 오면서 아무도 그 땅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석조(石趙) 시대11)에 불도징(佛圖澄)이란 사람이 업(鄴)에 있었는데,
그를 늑호(勒虎:
石勒의 사나운 성격을 따서 늑호라 함)란 이가 존경하고 정중하게 모셨다.
이 때 널리 절에 탑을 안치하였는데,
노반(露盤)을 안치한 경우는 적었기에 바야흐로 이를 만들려고 하자 불도징이 말하였다.
“임치성(臨菑城) 안의 아여왕사(阿餘王寺; 阿育王寺)에 아직 불상과 노반이 남아있다.
그 절은 깊은 숲 속 큰 나무 아래에 있으며,
위에는 덮어 놓은 바위가 있으니 그곳을 찾아서 가져 오면 된다.”
이에 늑호가 사람을 시켜 이를 구해 오라 하였다.
사람들은 그가 말로 가르쳐준 대로 땅 속 20길을 파고 들어가 이를 얻어 업군으로 돌아왔다.
아여(阿餘)란 ‘아육’이란 소리가 바뀐 발음일 따름이다.
모름지기 옛 땅과 옛 탑이 있던 곳을 찾아가야 하기 때문에 혜달(慧達)이 눈에 보이지 않는 가운데 알려 주었다.
“낙양(雒陽)ㆍ임치ㆍ건업ㆍ무현ㆍ성도(成都),
이 다섯 곳에는 모두 아육왕의 탑이 있으니,
예배하는 자는 지옥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알 수 있는 것은 이 탑도 헛된 이름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4. 요진(姚秦) 하동(河東)의 포판탑연(蒲坂塔緣)
하동(河東) 포판(蒲坂)의 옛 탑에 관해 고로(故老)들이 전하여 말하기를 “포판의 옛 탑은 아육왕이 세운 탑이다”라고 하고 있다.
이는 후진(後秦)의 왕 요략(姚畧)의 숙부가 진왕(晋王)이 되어 하동 지방을 다스릴 때로,
이 말을 의심한 그에게 여러 번 광명이 나타난 일이 있게 되고,
이에 근거하여 그곳을 파서 석함(石函)의 은갑(銀匣) 속에서 불골(佛骨)을 얻었는데 그 밝게 빛나는 것이 보통의 광명과는 달랐다.
이에 그것을 보내어 요략에게 올리니,
요략이 친히 마중을 나가 파수(灞水) 위에서 친견하였다.
지금 포주(蒲州) 동판(東坂)에는 구고사(救苦寺)란 절이 있다.
스님이 머물며 큰 불상을 세웠는데 지극히 규모가 커서 강남에 으뜸가나 옛 사리탑은 세우지 않았다고 한다.
5. 주(周)나라 기주(岐州)의 기산남탑연(岐山南塔緣)
부풍현(扶風縣) 기산(岐山)의 남쪽에 있는 옛 탑은 평원 위에 있는데 그 남쪽은 낮고 북쪽은 높다.
동쪽으로는 무정천(武亭川)과는 10리 거리에 있다.
서쪽 기산현(岐山縣)과는 20리,
남쪽 위수(渭水)와는 30리,
북쪽 기산(岐山)과는 20리 거리이다.
이곳은 일명 마액산(馬額山)이라고도 한다.
이 산은 기산과 함께 모두 대산(大山:
泰山)의 북쪽에 있으며,
그 남쪽에 작은 산들이 동서로 줄지어 있다.
그 사이로 큰 골짜기가 형성되어 남북을 갈라놓고 있기 때문에 기산이라 불렀다.
‘기(岐)’란 곧 ‘나눈다’는 뜻이다.
그곳에서 서북쪽으로 20여 리에 봉천(鳳泉)이 있다.
이 샘은 기산의 남쪽 지극히 높은 산마루에 있는데,
주문왕(周門王) 때 ‘봉황새가 기산에서 울었다’고 한 것은 곧 이 땅을 말한다.
봉황새가 이 샘물을 마신 까닭에 이를 봉천(鳳泉)이라 부른다.
또한 남쪽으로 날아가서 종남산(終南山) 북쪽에 이르렀는데,
그 때문에 위남산(渭南山) 아래에도 역시 봉천(鳳泉)이 있으며,
거기서 다시 서남쪽으로 날아가서 산을 넘어 하지(河池)에 이르렀으니,
지금의 이른바 봉주(鳳州)의 옛 하지군(河池郡)이 그곳이다.
이 봉황새와 관련한 일의 전말은 다 추궁할 수가 없다.
다만 탑을 안치하게 된 근원만을 잠시 논하기로 한다.
예전 수(隋)나라 고조황제는 그곳의 땅과 샘을 좋아하였다.
이에 탑을 설치하고 눈길이 다하는 곳까지 굽어 아래를 내려다보니 참으로 텅 비고 먼 평원이었다.
절 이름은 오래전에 없어졌다.
스님들은 [다른 절의] 화주(化主)가 되어 가버리고 사람이 전연 드문 곳이라 탑도 곧 기울어 무너지게 되었는데,
내가 가서 보니 초목만이 무성하였다.
비록 사실 옛날의 영화가 쑥대밭이 된 것은 아니지만 영고성쇠의 덧없는 슬픔은 깊고 간절하였다.
지금 평원 위에 있는 탑은 세속에서는 아육왕사 자리라고 한다.
그 고을에서는 유천(柳泉)이라 하는데 그것은 그 북쪽 산의 옛 이름을 취한 것이다.
주나라 위왕(魏王) 이전에는 절 이름이 육왕사(育王寺)였고 대중 스님이 5백 명에 이르렀다.
주나라가 불법을 없애자 사찰의 큰 건물은 모두 없어지고 오직 두 불당(佛堂)만이 홀로 남게 되었다.
수(隋)나라 조정에서 이를 보존하여 이름을 성실사(成實寺)라 하였는데,
대업(大業) 5년에 스님의 수효가 50명이 안 되는 절은 폐하게 되자 이 절도 따라서 폐사가 되었다.
그리하여 서울의 보창사(寶昌寺)로 들어오게 되었고,
이어 그 탑의 옛 터는 사원(寺院)의 장원(莊園)이 되었다.
당(唐)나라의 운이(運伊)가 그 때 비로소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의령(義寧) 2년에 보창사의 스님 보현(普賢)은 절이 폐사가 되어 풀무더기 속에 묻힌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는 자세히 실상을 갖추어 나라에 상소하였는데 이 때 특별히 대승상(大丞相)의 견식에 은혜를 입게 되었다.
곧 그는 예전에 일찍이 그곳을 지난 일이 있었는데 상소문을 보더니 흔연히 그 근본 유래를 진술하면서 법문사(法門寺)라 이름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그 때부터 지금에 이르도록 그렇게 부르고 있다.
무덕(武德) 2년(619)에 설거(薛擧)는 스스로를 병장(兵將)이라 칭하면서 남쪽 나라를 섬기고 있었다.
이윽고 당 태종(太宗)이 군사를 거느리고 토벌하게 되었는데,
처음 80명의 스님에게 도첩(度牒)을 내렸으나 그 때까지는 아직 절에 머무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보창사의 스님 혜소(惠素)가 봉천(鳳泉)을 말끔히 소재하고 그곳에 아직 스님이 배치되지 않은 것을 이유로 마침내 조정에 알리어 자신이 법문사에 머물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는 그의 상소대로 허락을 받자 곧 그곳을 맡아 살게 되었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흘러 사찰이 허물어지고 몰락하였다.
거의 다 없어진 채 절이 외로운 성 가운데 있게 되었는데 그 근본 유래를 물어 보니 일러 말하였다.
“대업(大業) 말년(616)에 사방에 도적이 일어나자 평원 위에 자리잡고 있는 고을들은 스스로 안전을 도모할 길이 없어서 마침내 함께 이 성을 쌓아서 외부의 도적을 막았다.”
당나라 초엽까지도 이곳에는 잡인들이 살고 있었으며,
이곳을 벗어나 살 수 없었다.
화재가 나서 이곳까지 불길이 이어져 절을 불사르게 되어 건물이 모두 불에 타고 말았는데,
두 불당(佛堂)의 타다 남은 흔적이 까맣게 그슬린 채 아직도 남아 있다.
정관(貞觀) 5년에 기주(岐州) 자사(刺史) 장량(張亮)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본래부터 믿음이 있는 사람으로,
절에 와서 예배를 드림에 오직 보이는 것은 옛 절터뿐이고 위를 덮고 있는 집은 없었다.
이에 나라에 주청(奏請)하여 칙명(勅命)으로 망운궁(望雲宮)의 궁전을 옮겨 탑 기둥을 덮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소서를 내려 이를 허락하니,
이로 인하여 탑 위에 탑전을 구축하여 존엄한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곳 고로(古老)들은 전하였다.
“이 탑이 한번 닫힌 지 30년이 지났다.
한 번 열어 보이기만 하면 사람들에게 착한 마음을 일으키게 한다.”
장량이 이 말을 듣고는 정관 연간(627~649)에 상소하기를 “탑을 열어 그 안에 봉안한 사리를 꺼내어서 사람들에게 보여주고자 하나 혹 많은 대중이 모여들까 두려워 감히 탑을 열지 못하고 있다”고 하니 칙명이 내려와 이 일도 아울러 허락하였다.
이에 마침내 칙령에 의거하여 탑을 열었는데,
깊이가 한 길 남짓한 두 개의 오래된 비석을 발견하였다.
모두 주(周) 위왕(魏王)이 세운 것으로,
[비문의 내용은] 볼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기에 여기 기재하지 않는다.
빛나는 모습이 주위를 비추어 밝히면서 여러 개의 사리가 함께 나왔다.
출토된 사리를 도속에 두루 보이니 무려 몇 천 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함께 관람하게 되었다.
이 때 한 맹인(盲人)이 여러 해 동안 앞을 못 보다가 갑자기 눈을 부릅뜨고 곧바로 앞을 보니 홀연히 눈앞이 밝고 청정해졌다.
그러자 도시와 시골 할 것 없이 안팎의 사람들이 떼를 지어 함께 나아가 탑이 있는 곳에 모여들었다.
하루에도 수 천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사리를 높이 내 보이면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사리를 보는데,
방향마다 보이는 모양이 한결 같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옥같이 흰 빛이 뚫어지게 비추는 것을 보았고,
어떤 사람은 녹색을 보았으며,
또 어떤 사람은 보지 못한 채 “사리는 어디에 있는 것이오?”라며 사람들에게 묻기도 하였다.
이 때 한 사람이 사리가 보이지 않자 감정에 복받치고 깊은 고뇌에 잠겨 가슴을 두드리며 통곡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이를 가엾이 여겨 그를 위로하기를 “그대여,
이것은 숙세에 지은 (과보이니) 노력해서 참회하면 되는데 가슴을 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이 손가락을 불태워 공양드리는 모습을 보고는 즉시 자기도 삼노끈으로 엄지손가락을 동여감고 이를 불태우며 탑을 돌면서 달렸다.
불길이 타오르자 마음이 다급해졌지만 사리가 있는 곳에 오니 환하게 사리를 볼 수 있었다.
그리하여 너무도 기쁜 나머지 펄쩍펄쩍 뛰면서 손가락의 아픔도 깨닫지 못하였는데 불이 꺼지자 마음도 멎고 사리도 다시 보이지 않았다.
현경(顯慶) 4년(659) 9월에 내산(內山)의 스님 지종(智琮)ㆍ홍정(弘靜)이 부름을 받고 내전에 들어갔다.
이야기가 아육왕의 탑의 일에 미치자 이미 세월이 오래 된 일이니 모름지기 널리 호법(護法)의 힘을 빌려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임금이 말하였다.
“그것은 동자가 땅을 보시한 아육왕사의 이야기가 아니더냐?
만약 근래에도 그런 탑이 있다면 그것도 8만 4천의 탑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이에 지종이 말하였다.
“아직 진위를 자세히 모르겠으나 고로(故老)들이 전하기를 아육왕사라고 하니 이 말은 아마 거짓이 아닌 듯 합니다.
또 전하기로는 30년에 한 번씩 [사리가] 나타난다고 하는데,
전에 정관 연간의 초기에 일찍이 출현하여 크게 감응한 일이 있었습니다.
지금 기한이 찼으니 다시 출현하도록 청해야 할 것입니다.”
이에 임금이 말하였다.
“사리를 얻을 수 있다면 참으로 이는 거룩한 인연이다.
먼저 탑이 있는 곳에 가서 7일 동안 행도(行道)하며 기도하고 청원하는 것이 좋겠다.
그리하여 서상(瑞祥)이 있거든 이에 탑을 열고 발굴하도록 하라.”
그리하여 곧 돈 5천 냥과 비단 50필을 지급하여 공양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지종과 급사(給使)인 왕장신(王長信) 등은 10월 5일 이른 아침에 서울을 떠나 6일 밤이 될 무렵에 바야흐로 도착하였다.
지종은 곧 탑 안에 들어가 오로지 정성을 다하고 애를 쓰며 오래도록 행도하였으나 광명이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그리하여 열흘째가 되는 날 밤 3경에 마침내 팔 위에 숯을 놓았다.
이에 향을 사르고는 엄숙하고 두려운 마음을 오로지 한 곳에 쏟았는데 한 번도 다른 생각이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탑 안 불상 밑이 흔들리며 갈라지는 소리가 났는데,
소리가 난 곳을 찾아 가서 보니 마침내 서광(瑞光)이 흘러 넘쳐 자욱이 위로 치솟는 모습이 보였다.
탑 안의 세 불상의 발에서도 각기 광명이 뻗어 나왔는데,
붉은 색ㆍ흰색ㆍ녹색이 친친 휘감기면서 위로 올라가 서까래가 있는 곳에 이르더니 하나로 합쳐져서 장막의 뚜껑을 이루는 것이었다.
지종은 크게 기뻐 뛰면서 곧 스님을 부르려고 하였으나 이어 탑 안의 구석지고 막힌 곳에 승도(僧徒)들이 합장하고 서 있는 모습을 목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아마 같은 절에 있는 스님이려니 여겼는데 잠깐 동안의 일이 자못 오래 된 듯 느껴지더니 광명의 뚜껑이 점차 멎어지면서 부드럽게 아래로 내려갔다.
땅에서 석자 가량 되는 거리까지 내려오자 스님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자 그제서야 그것이 성승(聖僧)의 은형(隱形)임을 알고는 곧 궁중에서 온 사신을 불러 함께 이 서상(瑞祥)을 보게 하였다.
사신이 탑이 있는 장소에 이르자 그 때까지도 남은 광명이 엷게 땅에 깔려 있었는데,
흐르는 빛만이 가득히 깔려 혁혁하고 질펀하게 온갖 종류의 광명이 마치 빙빙 도는 그 무엇이 있는 듯 하다가 한참 뒤에야 비로소 모두 사라졌다.
새벽이 되어 그곳을 찾아가 사리 한 과를 얻었는데 제법 쌀알보다 컸고 광명이 선명하였다.
다시 자세히 찾아 또 일곱 과의 사리를 얻게 되었다.
이 모두를 물을 담은 쟁반에12) 안치하니 그 가운데 한 과의 사리가 홀로 나머지 사리를 빙빙 돌았으며,
각각 뿜어내는 광명은 사람들의 눈을 어지럽게 비추었다.
이에 지종 등 일행은 그들이 감응한 서상을 자세히 써서 나라에 올렸다.
그러자 황제는 칙사(勅使)로 상시(常侍) 왕군덕(王君德) 등을 보내고,
비단 3천 필을 보내서 임금의 키와 비등한 아육왕의 상(像)을 만들게 하였으며,
남은 것으로 옛 탑을 보수하게 하였다.
이어 불상이 탑 안에 있다고 하니 가능하면 즉시 탑을 열고 불사리(佛舍利)를 발굴해서 복과 지혜를 열게 하라 하였다.
이에 스님들은 예전 재목이 잡목에다 썩고 오래된 것이 많았기에 마침내 모든 목재를 잣나무로 바꾸었다.
그리고 돌을 엮어 기단(基壇)으로 삼으니 장엄하고도 넓고 아름다웠으며,
그 마름하고 배치한 것은 특별히 수려했다.
또한 칙명을 내려 지종ㆍ홍정(弘靜)에게 홍려(鴻臚)13)의 벼슬을 내려 주고 회창사(會昌寺)에 머물게 하였다.
처음 탑을 열던 날,
20여 명의 사람들이 함께 땅을 파내려 가다가 사리를 얻기에 이르렀는데,
여러 사람들이 모두 사리를 보았으나 그 가운데 오직 한 사람만은 보지 못하였다.
그 사람은 번민하면서 스스로 머리칼을 쥐어뜯고 사리를 보고자 애쓰면서 슬피 울부짖었다.
그 소리에 사람과 짐승들이 모두 놀랐다.
하지만 부질없이 스스로 자신의 허물만 자책하였을 뿐 끝내 볼 수가 없었다.
이에 사리를 그의 손바닥 위에 놓아 주자 비록 그 무게는 느낄 수 있었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처음과 같았다.
이런 일로 말미암아 그곳에 찾아와서 사리를 알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사리를 못 보게 될까 두려워하여 감히 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곳 광서(光瑞)가 일어난 절의 동쪽 마을을 용방(龍坊)이라 하는데 그곳 사람들이 칙사가 오기 며칠 전에 절의 탑 위를 바라보니 붉은 색의 광명이 두루 멀고 가까운 곳을 비추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보니 무지개빛 같은 것이 곧장 위로 오르더니 하늘에 닿았으며,
또 어떤 사람이 보니 광명이 절과 성을 비추었는데 붉은 주홍빛이 마치 그림과 같았다.14) 이러한 사실을 잠시 갖추어 기록하여 알리니 절의 스님이 감탄하고 의아해 하면서 말하였다.
“사리는 오래지 않아 이러한 서상(瑞祥)을 열게 될 것이다.
이것은 정관 연대에 있었던 일과 다름이 없다.”
그곳에서 나온 사리는 그 모습이 마치 새끼손가락과 같았다.
처음에는 뼈의 길이가 한 치 두 푼이었으며,
안의 구멍은 정방형(正方形)을 이루고 바깥의 모서리도 또한 그와 같았다.
밑은 평평하고 위는 둥글었으며15) 안과 밖이 빛나고 청정하였다.
그 밖에 구멍 안에 새끼손가락을 넣으면 충분히 들어갈 만하였고 거룩하게 머리 위에 받들어서 대중에게 보여 줄 수도 있었다.
그 광명이 변화를 나투는 모습에 이르러서는 통상적으로 견줄 수 없는 것이었다.
이 때 경읍(京邑) 안팎에서 도속 할 것 없이 사람들이 줄을 이어 2백여 리 사이를 연이어 왕래하면서 서로 경하하였으니,
모두 부처님의 덕을 칭송하면서 한 시대에 가장 빛나는 일이라 하였다.
서울 대자은사(大慈恩寺)의 스님 혜만(惠滿)은 탑에서 행도하다가 홀연히 보니 기정부해(綺井覆海) 아래에 한 쌍의 눈이 있었는데 맑고 광명이 유별나게 크게 보였다.
이에 도속을 통틀어 불러서 함께 보아도 역시 마찬가지로,
모두가 무섭고 놀라서 감히 거듭 보지를 못하였다.
현경(顯慶) 5년(660) 춘삼월에 칙명을 내려 사리를 취하여 동도(東都:
지금의 洛陽)로 가서 내전(內殿)에 들어 공양드리게 하였다.
이 때 주나라 사람이 봉헌한 부처님의 정골(頂骨)이 서울에 이르니 사람들 가운데는 혹 보는 자도 있었다.
그 불골은 높이가 다섯 치에 너비가 네 치 가량으로 황자색(黃紫色)을 띠고 있었는데,
동도(東都)의 황제가 머물고 있는 곳으로 갈 것이라 하였다.
이 때 또한 부름을 받고 서울의 스님 일곱 사람이 동도로 가서 내전에 들어가 행도(行道)하게 되었는데,
칙명을 내려 사리와 정골(頂骨)을 꺼내어 내보이게 하니 행도하던 스님들이 말하였다.
“이는 부처님의 진신이니,
저희 승들이 머리 위에 받들고 공양드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룻밤이 지나면 도로 거두어 내전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이 때 황후는 침실의 옷과 장막(帳幕)을 희사하니 비단 천 필에 해당하는 값어치였다.
이것으로 사리를 위하여 금관(金棺)과 은곽(銀椁)을 만들게 하니 그 수효가 아홉 겹의 곽을 이루었고,
아로새긴 조각은 그 기이함을 다하였다.
그리하여 용삭(龍朔) 2년에 본 탑으로 송환하게 되었는데,
2월 15일에 이르러 칙명을 받들어 지종ㆍ홍정과 서울의 여러 스님들,
탑사의 스님 및 관인(官人) 등 무려 천 명이 함께 석실에 사리를 갈무리하고는 문을 닫았다.
지금부터 30년 뒤의 일은 내가 알 바는 아니나 후에 서상이 열리는 일이 있다면 이 기록에 이어 널리 알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기주(岐州) 기산현(岐山縣) 화양향(華陽鄕) 왕장촌(王莊村)의 풍현사(馮玄嗣)란 사람은 선천적으로 성품이 거칠고 사나웠으며 조금도 불법을 믿지 않았다.
그의 외사촌형이 사리를 공경하여 동도(東都)에서 그곳으로 와서 사리를 갈무리하여 문을 닫아 두고자 하였으나 현사(玄嗣)는 그곳에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그의 외사촌형은 그의 말을 듣지 않은 채 사리가 있는 곳에 이르러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현사(玄嗣)는 성을 내며 말하였다.
“그것이 무슨 공덕이 있겠는가?
만약 사리에 공덕이 있다면 집안에 있는 불상(佛像)에도 또한 공덕이 있을 것이다.”
곧 불상을 갖고 와 이를 불사르며 말하였다.
“[도대체] 무슨 영험이 있다는 것인가?”
외사촌형이 불을 껐지만 이미 불상의 하반신이 타 버린 뒤였다.
이 때 현사가 갑자기 뒤로 넘어지더니 얼마 후에 깨어나서 말하였다.
“홀연히 한 곳에 이르렀는데 아마도 지옥인 듯하였다.
큰 새가 날아와서는 눈동자를 파먹고 살을 쪼아먹었다.
큰 불구덩이 속에 들어가 불에 타고 몸이 지져지는 괴로움을 겪었다.
그리고 손으로 얼굴을 쓰다듬으니 눈썹과 수염이 떨어져 내렸으며,
눈으로 보기에도 하늘과 땅에 전연 정기와 광명이 없었다.”
친척과 권속들이 곁에서 이 모습을 보고 말하였다.
“그대 스스로 지은 죄는 아무도 대신 갚지 못한다.”
현사의 의식[神識]은 이미 사람들을 대하지 않은 채 다만 말하기를 “불길이 나의 심장을 태우고 있다”고 하면서 동으로 서로 달리기만 하였다.
또는 누구에게 잡혀 맞는 모습을 하며 서럽게 통곡하기도 하고,
“참회하라,
참회하라”고 외치며 밤이나 낮이나 달아나기만 하면서 잠시도 한 곳에 머물지 않았다.
2월 13일이 되자 친족 권속들이 곧 탑이 있는 곳에 가게 되었는데,
이 때 서울의 대덕인 행건(行虔) 법사 등 백여 명의 스님들이 대중들을 위하여 설법을 하게 되었다.
이에 배상관(裵尙官)ㆍ비구니 등 수백 명과 속가의 선비 5,
6천 명이 함께 보는 가운데서 현사는 오체투지로 사리 앞에 마주하여 소리내어 울면서 사리를 믿지 않은 죄를 참회하였으며,
또한 비구니들의 청정한 행을 범한 것과 여러 스님들을 때리고 욕하며 스님들의 과일을 훔쳐먹은 죄를 참회하였다.
이렇게 참회한 후부터는 잠을 자도 꿈이 조금은 편안해졌다고 한다.
그 부처님의 정골은 나라에서 값진 보배로 이를 보상하여 거두어 들였다.
곧 보배의 값을 잠시 평가해 보니 비단 4천 필에 해당한다고 하여 마침내 그 숫자대로 변방에서 짠 비단으로 이를 보상하였다.
정골은 지금 내전(內殿)에 보관되고 있다고 한다.
6. 주나라 과주성(瓜州城) 동쪽의 고탑연(古塔緣)
과주성의 동쪽에 있는 옛 탑터는 곧 주 왕조 때의 아육왕사이다.
불교를 폐지한 후 수나라 때 비록 불법을 일으켰다고 하나 다시 그곳에 사원을 설치하지는 않았다.
지금은 사장(寺莊:
절 소유의 莊園)이 되었다.
탑에는 탑을 덮고 있는 집이 있고,
동서로 붙여지은
건물들이 서 있으며,
주위는 빙 둘러 담장이 쌓여 있는데 때때로 광상(光相)이 나타나서 선비와 속인들이 공경하고 소중히 여기고 있다.
도속의 사람들이 이곳에서 자면서 재를 올리고 복을 일으키는 집회를 여는데,
관청이나 개인의 계급의 상하를 막론하고 빌고 기원을 올리면 감응이 있다고 한다.
7. 주나라 사주성(沙州城) 안의 대승사탑연(大乘寺塔緣)
사주성 안에 있는 지금은 폐사가 된 대승사(大乘寺)의 탑은 주왕조 때의 옛 절로,
탑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는 아육왕이 세운 본탑이며,
그야말로 재난이나 화(禍)가 있기만 하면 찾아와 구원을 구하는 일이 많다고 한다.
8. 주나라 낙주(洛州) 고도(故都)의 서탑연(西塔緣)
낙양의16) 옛 도읍지에 있는 탑은 낙양성 서쪽 1리에 있는 옛 백마사(白馬寺)에서 남쪽 1리쯤 되는 곳에 위치한 옛 탑터를 말한다.
속가에서는 전하기를 아육왕이 세운 사리탑이라 하는데,
아마도 가섭마등(迦葉摩騰)이 갖고 온 것으로 삿됨[邪]을 항복받고 정도에 통하게 하려는 까닭에 탑을 세워 이것이 진신사리라고 전하여 표시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9. 주나라 양주(凉州)의 고장현탑연(姑藏縣塔緣)
양주의 고장탑(姑藏塔)은 여러 전하는 말을 조사해본 바에 의하면 모두가 이르기를 “고장(姑藏)에는 아육왕이 세운 탑이 있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고장은 군(郡)의 이름이고,
지금은 현(縣)이 되어 주(州)에 속한다.
『한서(漢書)』에 보면 “하서(河西)에 네 군을 두었는데 곧 장액(張掖)ㆍ고장(姑藏)ㆍ주천(酒泉)ㆍ돈황(燉煌)이 그곳이다.
그러나 탑의 위치는 아직 자세하지 않다”고 하였다.
10. 주나라 감주(甘州)의 산단현탑연(刪丹縣塔緣)
감주의 산단탑(刪丹塔)을 보자면,
산단은 지금은 현(縣)으로 불린다.
감주의 동쪽 120리에 있으며,
현성(縣城)의 동쪽은 약수(弱水:
지금의 감숙성의 張掖河)가 흐르고 있고 북쪽은 큰 길이 나 있는데,
그 옆에 있는 흙으로 된 언덕이 그곳이다.
속가에서는 전하기를 이것이 아육왕이 세운 탑이라 하나,
다만 옛 터만 남아 있고 황폐한 지가 지극히 오래되었다.
아마도 이곳이 고장탑(姑藏塔)이 아닌가 생각된다.
11. 주나라 진주(晋州) 북쪽 곽산남탑연(霍山南塔緣)
진주의 북쪽 곽산의 남쪽 언덕에 있는 큰 흙탑은 원근에 사는 도속의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것은 아육왕이 세운 탑이다”라고 하고 있다.
내가 일찍이 그곳에 가 보니 지대가 높고 시원한 곳에 위치하여 남쪽의 전망이 멀리 높은 곳까지 보이는 것이 이것이 옛 탑자리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거기서 마을ㆍ부락 등은 드물고 멀었다.
12. 제(齊)나라 대주성(代州城)17) 동쪽의 고탑연(古塔緣)
대주성 동쪽에 있는 옛 탑을 속가에서는 아육왕사라고 말하나,
북쪽 안문(雁門) 지방의 지지(地志)를 상고해 보니,
주나라 때는 이곳이 북쪽 오랑캐의 땅이었다.
그런 까닭에 『시전(詩傳)』에 이르기를 “북쪽 사나운 오랑캐들에게 쫓겨 태원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그러나 북방은 말[馬]이 많은 고을이며 옛 성곽이나 큰 무덤이 흔하여 하나둘이 아니다.
이것은 북쪽 오랑캐가 갖고 있던 것이 아니다.
분명히 본래 서하(西夏) 사람들의 것으로 오랑캐의 침범을 입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때문에 “태원에 이르렀다”고 말한 것이다.
13. 수(隋)나라 익주(益州)의 복감사탑연(福感寺塔緣)
익주의 성곽 아래에 있는 복감사의 옛 탑은 고을 외곽 아래의 성 서쪽에 있으며,
본래의 이름은 대석탑(大石塔)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는 귀신들이 아육왕의 분부를 받들어 서산(西山)에서 큰 바위를 갖고 와서 탑의 기반을 삼았는데 사리는 그 안에 있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대석탑이라 이름한 것이다.
수(隋)나라 때 촉(蜀)의 왕수(王秀)란 사람이 이곳 정락(井絡)에 진(鎭)을 만들고 다스렸는데,
이 소문을 듣고 사람을 시켜 이 바위를 뚫고 파보게 하였으나 오로지 한 덩어리의 바위일 뿐이었다.
그리하여 곧이어 바위의 이음새 부분을 찾아 개울까지 이르렀지만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비바람이 몹시 칠 때 어떤 사람이 이 바위 옆을 뚫다가 돌 한 조각을 갖고 나왔는데 그것은 바로 예옥(䃜玉:
흑색의 美玉)이었다.
보석을 잘 아는 상인에게 물어보니,
그는 말하기를 “이것은 진품의 예옥으로 세상에 진귀하다”고 하였다.
수(隋)나라 초기에 도선(道詵)율사는 이 고적(古迹)을 보고는 그 위에 9층으로 된 나무 부도(浮屠)를 세웠는데 지금도 익주에서 볼 수가 있다.
가뭄으로 강물이 마르면 그 해에는 벼슬아치가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게 되는데 반드시 이 탑에서 지냈다.
기원을 하면 보응이 있으며 특별한 감응의 조짐이 있었던 까닭에 이곳 또한 복감사(福感寺)라 이름지은 것이다.
내가 한 번 가보니 참으로 사람들의 말과 같았다.
근래에 와서 한 도둑이 탑 위의 방울을 훔쳐서 세 번째 계단을 내려오려 하다가 그곳의 신(神)이 노두기(櫨枓起:
탑기둥을 받치고 있는 끝 대들보)를 쳐들어 도둑의 넓적다리를 눌러버렸다.
이에 도둑이 눌린 채 소리를 치자 절의 스님들이 이 기둥을 치워 비로소 벗어날 수 있었다.
영휘(永徽) 원년(650)에 왕안자(王顔子)란 사람이 있었는데 협박과 노략질로 유명하였다.
그가 밤에 탑꼭대기[相輪]에 올라가 박산향로(博山香爐)를 취하여 탑을 내려와 층계의 밑바닥에 이르자 갑자기 두 기둥이 그를 사이에 끼워버렸다.
벗어나려고 하였으나 나올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점점 일이 다급해지고 곤란해지는데 한 인도 스님이 나타나더니 말하기를 “크게 도둑이야! 라며 외쳐라.
그렇지 않으면 죽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즉시 그가 몇 번이나 도둑이야! 라며 외치니 절의 스님들이 이 소리를 듣고 그를 구출하여 비로소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정관 초에 땅이 크게 진동하여 이 탑이 흔들려 곧 꺾어져 넘어지려 하였다.
이 때 성곽 아래에 사는 무수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문득 보니 탑 만한 형체를 지닌 네 명의 신(神)이 각기 등으로 탑의 네 면을 받쳐 지탱하고 있었는데,
탑은 잠시 등에 기대었다가 다시 잠시 기울어졌다가 하면서 끝내 넘어지는 일은 면하게 되었다.
또 성품이 극히 호탕하고 씀씀이가 좋으면서 재산이 많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이전의 노반(露盤)을 보니 원래 작고 짧아서 탑 모양에 어울리지 않았다.
이에 3백 냥의 돈을 희사하여 여러 신도들과 함께 다시 노반을 조성하였다.
다 만들어지자 갈라서 내려 놓았는데,
복분화(覆盆花)가 필 무렵 향기가 자욱히 퍼지는 것이 마치 구름이 솟아오르는 듯 하였다.
꽃냄새가 성읍(城邑)에까지 흘러와 열흘이 지난 뒤에야 그쳤다.
14. 수나라 익주의 진원현탑연(晋源縣塔緣)과 낙현(雒縣)의 탑
익주의 진원사 탑은 재주(在州) 서남쪽 백 리 남짓한 곳에 있다.
지금은 그 절을 등중사(等衆寺)라 부르나 본 이름은 대석사(大石寺)이며,
근본 인연은 대략 앞에서 말한 대석탑과 같다.
옛 탑들을 찾아보면 그 모습이 같지 않으니,
이것은 일을 맡았던 귀신들의 마음에 각기 즐기는 모습이 있어서가 아니랴!
촉(蜀:
泗川省)에 있는 세 개의 탑을 고찰해 보면 다 같이 돌 뚜껑으로 덮고 있는 점은 같으나 다른 것은 일정한 기준이 없다.
익주의 북쪽 백 리 지점에 있는 낙현(雒縣)의 탑은 현성(縣城)의 북쪽 외곽에 있는 보흥사(寶興寺)란 절 안에 있다.
본 이름은 대석탑(大石塔)으로,
그 기단(基壇)의 모습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수나라 초기에 인도의 스님 담마굴차(曇摩掘叉)는 멀리 중국[東夏]에 이르러 아육왕이 세운 탑에 참례하였다.
그리고 촉에 있는 세 탑 이야기를 듣고는 다시 그곳으로 찾아가 예배를 드렸다.
낙현(雒縣) 대석사의 탑이 있는 곳에 이르러 공경하게 탑을 섬기는 일을 끝내고 성도(成都)로 가고자 하여 양녀역(兩女驛)에서 묵게 되었다.
막 밤이 새려는데 좌우에서 뭔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기에 담마굴차가 말하였다.
“너는 누구냐?
함부로 사람들을 두렵게 하려고 그런 행동을 하는가?”
공중에서 응하여 말하였다.
“열두 신왕(神王)이 본국(本國)에서 와서 스님이 있는 곳에서 옹호하고 있습니다.
내일은 곧 성도(成都)의 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서쪽으로 돌아가려 하며 스님과 이별의 말씀을 드릴 따름입니다.”
담마굴차가 말하였다.
“기왕 멀리까지 나를 보낼 수 있다면 어째서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가?”
그러자 곧 신(神)들은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또한 사람 됨됨이가 그림을 잘 그렸기에 곧 하나하나 신의 모습을 그렸다.
두루 다 그리자 신들은 형체를 숨겼다.
그리하여 성도에 이르러 대석탑에 참례를 마쳤는데,
도선 율사가 곧 그림에 근거하여 모습을 나무에 새겨서는 십이신상으로 삼고 탑 아래를 장식하였으니,
지금도 볼 수 있다고 한다.
익주성의 성곽 아래에 있는 법성사(法成寺)의 사문 도탁(道卓)은 유명한 스님이다.
대업(大業) 초에 낙현(雒縣)의 사탑(寺塔)은 아무도 지붕을 잇고 보수하는 사람이 없어서 겨우 아래 기단만 남아 있었다.
이에 도탁은 곧 사부대중을 거느리고 화주(化主)가 되어 나무부도를 만들어 장식을 갖추었다.
이 탑은 용의 수호를 받는데,
용은 탑의 서남쪽 모서리에 있는 못 안에 살고 있으며 때로 모습을 나타낸다.
탑 옆에는 세 개의 못이 있고 아무도 그 깊이를 알 수 없다.
그곳에 세 마리의 용이 살고 있어 사람들은 아무도 감히 안을 들여다 볼 수가 없었다.
정관 13년(639)에 세 마리의 용이 크게 싸워 우레가 치고 벼락이 떨어지더니 물과 불이 뒤섞여 날아다니고 한 참 뒤에야 고요해졌다.
탑은 본래 그 대로 머물고 있었으며,
사람들이 모두 용의 털을 주웠는데 길이가 석 자 가량으로 노랗고 붉은 색이 보기에 좋았다.
15. 수나라 정주(鄭州)의 기화사탑연(起化寺塔緣)
정주(鄭州) 기화사(起化寺) 탑은 정주의 서남쪽 백여 리 가량 되는 밀현(密縣)의 경계에 있으며,
현의 동남으로는 15리이다.
동쪽에는 큰 시냇물이 흐른다.
서쪽은 숭악(嵩嶽),
남쪽은 귀산(歸山)이며 북쪽에는 또 시냇물이 흐른다.
사원의 너비는 동서가 5,
60보(步)이고 남북도 그만하다.
탑은 절의 동남쪽 모서리에 있고 그 북쪽은 절로 이어져 있는데,
탑의 사방은 열다섯 발자국 가량이다.
그 사탑의 기단은 진흙땅 위에 있다.
서쪽면으로는 대여섯 개의 샘이 있고,
남쪽면으로도 역시 샘이 있다.
모두 네모난 구멍 모양으로 그 둘레는 석 자 가량이나 된다.
땅 속에서 샘물이 치솟아 흘러 넘쳐서 시냇물을 이루어 멀고 가까운 논밭에 물길을 대어 주고 있다.
샘 위에는 모두 잣나무 기둥을 내려서 안치하고,
흙탕물 위에 숯이나 모래ㆍ석회(石灰)를 깔아 놓고 다음에는 거듭 진흙을 메꾸어 가장 윗부분은 크고 네모난 돌을 짜 엮어서는 깔아 놓았는데,
그 돌은 마치 여덟 자 쯤 되는 평상과 같았다.
네 면의 허리 부분은 가늘고 길이가 한 자 다섯 치에 깊이는 다섯 치 가량 되는 무쇠로 굳혀 놓았다.
근간에 어떤 사람이 시험삼아 돌 하나를 발굴해 보았더니 그 아래에는 석회가 깔려 있었고 잣나무로 된 둘레까지 있었다.
그리하여 둘레 하나를 뽑아내 보니 길이가 세 길이나 되고 지름이 넉자나 되는 것이 보였다.
처음부터 전륜왕(轉輪王)이 탑을 표출시킨 신비한 공덕의 힘이 아니고는 어떻게 이와 같은 기초와 구조를 마련할 수 있겠는가?
오래도록 그 짝을 찾지 못할 것이다.
지금은 그 위에 삼중탑(三重塔)을 얹어 놓았는데,
탑의 남쪽에는 큰 샘이 솟아 꿇어오르며 성난 듯 고동치지만 물소리는 끊어졌으니 이 어찌 신의 조화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랴.
유주(幽州)에 도엄(道嚴)이란 스님이 있는데,
속성(俗姓)은 이씨(李氏)로 그 모습이 지극히 뛰어나게 훌륭하다.
그는 본래 수양제가 지은 네 곳의 도량에 들어갔다가 후에 속복(俗服)을 따르게 되었다.
올해 나이가 백다섯 살로,
홀로 깊은 산에 살면서 해마다 7일이 되면 이 탑을 찾아와 공양에 진력한다.
도엄은 그곳의 샘물이 치솟아 쏟아지며 끝없이 이어지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여 마침내 물을 잘 다루는 곤륜(崑崙) 한 사람을 보내어 샘 속에 들어가 그 안을 살펴보게 하였다.
그러나 오직 돌기둥만 줄지어 서 있는 것만 보이고 그 끝은 헤아릴 수 없었다.
그 가운데 보탑(寶塔)이 있어 높이가 석 자 가량 되었고 홀로 공중에 서 있었는데 네 면은 물로 둘러싸여 듬직하게 머물고 있었다.
끝내 탑이 있는 곳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그 샘의 근원을 상고해 보아도 아무도 그 유래를 추측하는 이가 없으며,
시속(時俗)에서 전하는 말로는 아육왕이 세운 것이라 한다.
수나라 고조 이래로 사탑(寺塔)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
절 남쪽은 귀산(歸山)이고 절 서쪽은 숭산(嵩山)이며 절은 시냇물 가운데 있어서 땅이 지극히 오염되고 낮다.
매년 두 산에서 큰 물이 내려와 항상 동쪽으로 쏟아져 흐르면서 절의 북쪽을 한 바퀴 돈 다음에 비로소 동쪽으로 흘러 간다.
물이 불면 절은 위치가 높아지고 물이 줄면 절의 위치도 낮아져서 예전부터 지금까지 침수를 당한 일이 없다.
샘물이 처음 구멍에서 나올 때는 그 문양이 마치 연꽃 모양을 이루고,
흘러 내려가 맷돌 반석을 치면서 물결은 지극히 고요해지는데 물 속의 모래와 돌은 녹색이 선명하다.
나라에서 절의 위치가 요충지에 해당되는 것을 보고는 이곳에 이궁(離宮)을 짓고자 하였다.
그런데 그곳을 찾아가 보니 탑이 있기에 곧 탑을 남쪽으로 옮기려 하였으나 그 기단이 너무 단단하여 결국 그만두고 말았다.
근간에 한 스님이 탑의 남쪽에서 밤에 앉아있다가 이 탑을 바라보니 광명이 빼어나게 기이하였다고 한다.
16. 수나라 회주(懷州)의 묘락사탑연(妙樂寺塔緣)
회주 묘락사 탑은 회주 동쪽 무섭현(武涉縣)의 서쪽 7리에 있는 묘락사 경내에 위치하며,
현재도 5층으로 된 하얀 부도탑이 있다.
사방이 약 열다섯 보 가량으로 모두가 돌을 기울여 섬돌을 엮었다.
돌의 길이는 다섯 자,
너비는 세 치로서 아래에서부터 물고기 비늘처럼 포개져서 덮였으며 지극히 구조가 세밀하다.
도ㆍ속의 사람들이 눈으로 보면 모두 놀라 그것이 귀신의 작품이 아닌가 의심하는데,
그 아래 바닥의 깊이는 얼마나 되는지 측량할 수 없다.
고로(古老)들이 전하기로는 이 탑은 땅에서 솟아올랐으며,
아래에는 큰 물이 있다고 하는데 아무도 그 진위(眞僞)를 소상하게 아는 사람은 없다.
한 자사(刺史)가 스님들이 지나치게 꾸며대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는데,
그가 사람을 시켜 탑 옆을 파게 하여 그 아래 샘의 원천에까지 이르도록 하였지만 여전히 그 기반의 가장자리가 다하지 않고 있었다.
17. 수나라 병주(幷州)의 정명사탑연(淨明寺塔緣)
병주 자성(子城) 동쪽에 있는 정명사 탑은 본래 아육왕이 세운 탑이라 불려왔다.
이곳에는 스님이 머물고 있었는데 당나라 초기 이래로 스님들이 흩어지고 절이 비게 되자 비구니들이 이곳에 거처하겠다고 청하였다.
내가 가서 탑을 찾아보니 전연 자취라고는 없고 다만 빈 이름만 남은 채 마침내 그 근본을 잃고 있었다.
18. 수나라 병주의 유사현탑연(楡社縣塔緣)
병주 대곡유사(大谷楡社)의 탑은 지금은 현의 성곽 아래에 위치한 육왕사(育王寺) 내에 있다.
이 절에는 현재 스님이 살고 있다.
그 안에 작은 탑이 있는데 고금에 전하기를 이것이 본탑이라 한다.
다만 아직까지 기이한 모습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하였다.
19. 위주(魏州)의 임치현탑연(臨菑縣塔緣)
위주 임치(臨菑)의 탑은 현에서 서북쪽 30리에 위치한다.
본래의 이름은 사리사(舍利寺)로,
지금은 비구니가 주지하고 있다.
그 탑은 현재도 남아 있는데,
탑의 가장자리 세 곳은 물이고 오직 서쪽으로만 길이 열려 있으며,
기단은 돌로 엮었다.
물 밑바닥에서 위로 솟아 연꽃이 세 면에 가득하고,
그 물은 맑고 깊어 사람들이 모두 들어가기를 겁낸다.
전하는 말로는 사리의 진탑은 물 속 빈 공간 가운데 있으며,
마치 정주(鄭州)에 있는 사리탑과 같다고 한다.
지금은 바뀌어 기주(冀州)의 대도독부(大都督府)가 되었다.
20. 신주(神州)의 산천에 숨겨진 보물 등을 밝히는 연
신주(神州:
中國)의 산과 늪에 간직된 진귀하고 기이한 신보(神寶)를 뒤섞여 밝혀 보면,
위에서 열거한 아육왕사의 여러 탑 가운데 물 속에 가라앉고 숨겨져서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도 그 무리가 하나둘이 아니다.
그 내용은 다음에 열거하는 바와 같다.
창주(滄州) 장하(長河) 가운데 있는 탑은 아육왕이 세운 탑이라 일컬어지는데 그 이름이 헛되이 붙여진 것은 아닐 것이다.
어찌 골탑만이랴.
신령한 상(像) 역시 그와 같으니,
오주(吳州)ㆍ의주(宜州)ㆍ양주(凉州)의 세 고을에서는 모두 산중에 불상이 나타났고,
교북(郊北)18)의 속산(屬山)에서도 근간에 다시 부처님이 나타났다.
어리석은 속인들은 허망한 거짓말이라고 비방하지만,
알아야 하니 이는 비방하는 사람이 허망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 사람들을 보게 하기 위해 아름다운 거짓 상을 만들었겠는가?
산중에는 세 길이 되는 석불(石佛)이 갈무리되어 있다.
다만 비방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깊은 우물이라고 하지만 그들이 어찌 구해(九海)의 천지(天池)를 알겠는가?
제주(齊州) 임읍현(臨邑縣)의 동쪽에 벽돌로 구축된 탑이 있다고 한다.
이는 지공화상(誌公和尙)이 영조(營造)한 것으로 네 면에 돌짐승이 새겨져 있으며,
그 돌짐승들은 날쌔고 사나워 몹시 두렵다.
주(周)가 불법을 멸하였을 때 백 사람을 시켜 끌어내게 하였으나 끝내 그 자리를 벗어나게 하지 못한 채 다만 힘을 쓴 사람만 다쳤다.
지금도 그곳에 있다고 한다.
고려(高麗:
高句麗) 요동성(遼東城) 옆에 탑이 있는데,
고로들이 전하여 말하였다.
“지나간 옛날 고구려에 성왕(聖王)이 나타나 국경 지대를 순행하다가 차례로 이 성에 이르니 오색의 구름이 땅을 덮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곧 그곳을 찾아가니 구름 속에 한 스님이 석장(錫杖)을 잡고 머물며 서 있었는데 그곳에 이르면 문득 사라지고 멀리서 보면 도로 나타났다.
그 옆에 3층의 흙탑이 있었는데 윗부분은 마치 솥을 엎어 놓은 듯하였다.
이것이 무엇인지를 몰라 다시 그곳에 가서 스님을 찾았으나 오직 황량한 풀더미만 있었다.
그리하여 그곳을 한 길 정도 파 보니 지팡이와 신발이 나왔다.
다시 파들어가서 명각(銘刻)을 얻었는데 위에 범어(梵語)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모시던 신하가 이 글자를 알아보고는 이것이 불탑(佛塔)이라 하였다.
임금이 다시 자세히 물어 보니 대답하기를,
‘한(漢)나라에 이것이 있는데 그 이름을 포도(蒲圖; 부도)라 한다’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믿음이 생겨난 왕은 칠 층의 목탑을 세웠다.
그 후 불법이 비로소 이곳에 이르게 되자 탑의 전말과 유래를 알게 되었다.”
지금은 다시 높이가 줄었고 목탑은 썩어 허물어졌다.
이곳은 아육왕이 다스리던 곳의 하나로,
그가 염부주(閻浮州) 곳곳에 탑을 세웠다고 하는 것은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못 된다.
일본[倭國]은 이 염부주 밖 큰 바다 가운데 있으며,
회계(會稽) 땅과의 거리가 만여 리나 된다.
그곳에 회승(會承)이란 사람이 있어서 수나라 때 이 땅에 와서 제자(諸子)의 책과
역사ㆍ계통[統]및 기술ㆍ예문을 배웠는데 어느 하나 막히는 일이 없었다.
그 사람은 무덕(武德) 연간의 말까지도 아직 서울에 남아 있다가 정관 5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에게 물었다.
“그대의 나라는 어두운 골짜기 동쪽 구석진 곳에 있어서 불법이 늦게 이르렀지만,
이미 그 이전에 아육왕의 조화가 미쳤는지 모를 일이다.”
그가 대답하였다.
“문자로 말한 것도 없어서 근거를 두고 말씀드리지는 못하나 그 사적을 증험해 보면 곧 귀착하는 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토지를 발굴하다가 자주 옛 탑의 노반(露盤)이나 부처님의 여러 가지 위의상[儀相]을 얻는 일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본래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익주성(益州城) 남쪽 공혜사(空慧寺)에는 금을 감추어 둔 곳간이 있다.
절에 큰 구멍이 있는데 그곳을 말한다.
근간에 한 도사(道士)가 평소 그 곳에 금이 감추어져 있는 것을 알고는 그곳을 찾아와 절을 지키는 신에게 빌었다.
이에 그를 본 신은 구멍에 들어가 두 되의 금싸라기를 가져가라 하였다.
그 말에 곧 들어갔으나 오직 땅 밑에 금단지가 줄줄이 서로 마주 보고 서 있는 것만 보일 뿐 그 가장자리를 추측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절의 스님은 아무도 감히 그곳에 침입할 수 없다는 것을 환하게 알고 있었다.
옹주(翁州) 위남현(渭南縣) 남산의 도시곡(倒犲谷) 절벽에 매달린 돌이 있다.
그 모습이 넘어진 이리와 같아서 그로 인해 그렇게 부른 것이다.
그 골짜기에 바위가 있고 바위에 부처님의 얼굴상이 있는 까닭에 또한 이곳을 상곡(像谷)이라 부른다.
고로(古老)들이 전하였다.
“예전에 한 인도 스님이 와서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이 골짜기에 부처님의 얼굴상을 한 산이 있고,
그곳에 7불의 사리함이 있다고 한다.
예전에 일곱 부처님께서 일찍이 이 골짜기에 오셔서 설법하셨는데,
개울 안에 치자꽃이 있어 그것을 항상 공양한 곳이라 한다’고 하였다.”
근간 영휘(永徽) 연간(650~655)에 남산 용지사(龍池寺)의 사문인 지적(智積)이 이 소문을 듣고 그곳을 찾아갔다.
골짜기에 이르니 향기가 났으나 어느 곳에서 나는지 알지 못하였다.
이에 몹시 의아하게 생각하였는데,
혹 그 냄새가 개울 안 모래에서 나는 것이 아닌가 하여 곧 모래를 헤치고 보니 마치 잔디뿌리 모양 같은 것이 모래흙 사이에 끼여 쌓여 있었다.
그 풀은 향기가 매우 그윽하였는데,
물에 뿌리의 흙을 털어 내고 씻어 보니 온 개울안이 모두 향기로 가득하였다.
이것을 갖고 용지사 불당 안에 돌아오니 온 불당 안이 모두 깊고도 좋은 향기로 가득하였다.
산 아래 사는 속인들이 때때로 이 산을 보면 불탑같기도 하고 혹은 산 전체에 부처님의 얼굴이 우뚝 솟아나 허공 끝에 솟아오른 것 같기도 하였다.
때문에 상안(像顔)이라 부르게 된 것으로,
헛되이 세운 이름이 아니다.
이 상곡(像谷)은 가미곡(嘉美谷)과는 거리가 매우 가까운 곳으로,
곧 요진(姚秦) 때의 왕 가미(嘉美)가 머물던 곳이다.
방주(坊州) 옥화궁사(玉華宮寺)의 남쪽 20리쯤 되는 곳에 있는 크고 높은 재마루를 속칭 단대산(檀臺山)이라 한다.
산 위에 옛 탑이 있는데 기단의 규모가 매우 크고 웅장하여 기단면의 둘레가 마흔세 자나 된다.
그 위에 한 층의 벽돌로 쌓은 탑은 네 면으로 문이 열려 있으며,
돌문의 높이는 일곱 자 남짓하고 너비는 다섯 자 남짓하다.
그 옆에는 깨어진 벽돌조각이 무수히 많다.
고로(古老)들이 전하여 말하였다.
“예전 주문왕(周文王)이 여기서 사냥을 하다가 한 사문이 석장을 집고 발우를 지니고 산마루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내려오라고 불러도 내려오지 않자 왕이 사람을 보내어 잡아오도록 하였는데,
가까이에 이르면 보이지 않고 멀리서 보면 그곳에 있었다.
이때 왕은 곧 칙명을 내려 그가 서 있던 곳을 파 보게 하였다.
깊이가 세 길이나 되게 팠으나 얻은 것은 발우와 지팡이 뿐이었다.”
이에 왕은 이곳을 소중히 생각하여 13층의 벽돌탑을 세우게 하였다.
이 탑의 왼쪽은 마을이 있던 언덕과 가까운데 이곳에서는 항상 종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용삭(龍朔) 원년(661)에 서울[京師:
지금의 西安] 대자은사(大慈恩寺)의 사문 혜귀(惠貴)가 이 소문을 듣고 곧 그곳에 갔더니 또 종소리가 들렸다.
이에 옛 자취에 대한 강개(慷慨)한 마음이 생겨 장차 이곳 절터를 수리하고자 하였지만 다만 돈이 없는 것이 한스러웠다.
그리하여 의혹을 품고 주저하고 있자,
이 때 혜귀스님은 또 상서(祥瑞)를 감응하였다.
탑을 수호하는 거룩한 신(神)이 말하였다.
“곧 일을 시작하여도 된다.
의심하고 염려할 필요는 없다.”
또한 기이한 스님이 감응하더니 말하였다.
“나는 남방 정토(淨土)의 보살이다.
교화를 행하면서 이곳까지 이르렀는데,
이 탑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이미 네 번이나 영조(營造)를 겪었다고 하니 고단하고 귀찮다고 사양하지 말라.
공덕의 작용으로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니 오직 튼튼하게만 하되 화려하고 사치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
3층에 이르거든 곧 멈추어라.”
혜귀는 이 알림을 듣고 몸소 경영에 힘썼다.
탑 옆에는 옛 가마가 30여 곳이나 남아 있었고 아직도 불에 익힌 벽돌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다시 찾아보니 남쪽 시냇물 가운데가 곧 옛 절터였으며,
산을 등지고 물을 대하고 있어 한 세상 그윽히 살 수 있는 뛰어난 땅이었다.
아직 탑을 수축하기 전부터 종소리가 때때로 울려왔다.
즉시 탑을 영조하여 구축하게 하니 때맞추어 종소리가 났으며,
세 번 길게 내려치는 소리가 지금 스님들이 하는 것과 같았다.
용삭 3년(663)에 옛 명각[銘]을 발굴하였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북주(北周) 보정(保定) 연간(561)에 탑이 무너졌다.
탑이 처음 이룩되었을 때 남쪽을 바라보니 위수(渭水)가 보였다”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탑을 설치한 지 4백 년이 지나서 무너졌다”고 하였다.
북주의 보정 연간에서 수(隋)의 개황 원년까지의 햇수를 더듬어보면 20년이 되고,
개황 연간에서 용삭 연간의 초기까지는 81년이 된다.
또한 명기(銘記)를 헤아려 보니 4백 년 뒤에 비로소 무너졌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탑은 후한(後漢) 때에 만든 것으로,
후주(後周) 때의 임금이 내린 문헌[謚文]은 없고,
후주에서 전주(前周)까지는 시대가 너무나 멀리 떨어졌기 때문에 고로(古老)들이 전하는 ‘주나라의 명문’이라는 것이 어느 제왕 때 어느 시대의 것인지는 아직 알지 못한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탑을 쌓은 벽돌이 몇 만 개나 되고,
결코 이것은 하속배(下俗輩)들이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강주(江州)의 여산(廬山)에 세 개의 돌다리가 있다.
길이는 수 십 길이나 너비는 한 자가 채 안 된다.
밑을 바라보면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진(晋)의 함강(咸康) 연간(335~342)에 유량(庾亮)이란 사람이 강주의 태수(太守)가 되었다.
그는 여산(廬山)에 올라 이 돌다리를 지나다가 빼어나고 거룩한 모습을 한 노인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의 집은 품위가 있고 높았으며,
옥으로 만든 마루가 눈을 어지럽게 하고 신령한 탑이 높이 솟아 있었다.
이것을 어떻게 수축하고 지붕을 새로 잇는지 헤아릴 수 없었다.
한참을 살폈더니 끝내 그것은 사람이 사는 집이 아니었기에 곧 절하고는 돌아왔다.
당(唐)의 정관(貞觀) 21년(647)에 형주(荊州) 대흥국사(大興國寺)의 탑 서남쪽 기둥에서 까닭 없이 소리가 났다.
사람들이 가서 보니 곧 금동불(金銅佛)의 머리가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이와 같이 날마다 점점 나오더니 사흘 저녁이 지나자 다 나왔으며,
길이가 여섯 치 가량 되었다.
이것은 서 있는 불상[立佛]이었는데 도속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당(唐)의 연간 초에 상주(相州)의 대자사(大慈寺)가 불에 탔다.
내가 그곳에 가서 불탄 유래를 물었더니 스님이 말하였다.
“수(隋)의 대업(大業) 말년(616)에 뭇 도적들이 번갈아 이곳에 진을 쳤다.
절은 삼작대(三爵臺)의 서쪽 갈구산(葛屨山) 위에 있었는데,
네 고을이 도적들에게 투항해 왔다.
이에 도적들은 성을 쌓고 굳게 이곳을 지켜 사람과 물건이 성 안에 모여들어 한 자의 땅도 빈 곳이 없었다.
탑의 위아래도 겹겹이 가득하여 그 안에서의 더럽고 오염된 꼴은 보고 들을 수조차 없었다.
그러다가 도적들이 평정되고 사람들이 나가자 인분과 오물로 낭자하였지만 절의 스님은 이것을 막고 치울만한 만한 여력이 없었다.
그런데 홀연히 불길이 일어나 탑을 모두 다 태우고 오직 동남쪽 모서리만 남게 되었다.
이에 태자가 사유하기를 ‘불상이 있는 전각만 남게 되었으니,
이는 가히 청정함으로 그 냄새나고 더러운 것들을 제거한 것이리라’고 하였다.”
이 탑은 수(隋)의 고조가 손수 칙령을 내려 설치한 탑이다.
처음 수나라의 운기가 시작될 즈음 천하의 민심이 아직 수나라로 붙지 않았을 때 오국공(吳國公)으로 있던 울형(蔚逈)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북주(北周)의 주신(柱臣:
기둥이 되는 신하)으로서 하북 지방을 진압하여 그곳을 지키면서 옛 도읍지를 다스렸다.
이 때 양씨(楊氏)가 나라를 도모한다는 말을 듣고 마음 속으로 허락할 수 없는 점이 있어 그 날로 곧 군병을 모아 병사를 일으켜 황제의 명령에 항거하였다.
그러나 관군이 한 번 그곳에 들이닥치니 큰 진지가 모두 꺾이고 와해되었다.
그 때 잡아들인 포로가 무릇 백만 명으로,
그들을 모두 이 절의 북쪽 유예원(遊豫園) 가운데 모아 놓고 이튿날 아침부터 목을 베었다.
이 유예원의 담장에는 구멍이 있었는데 그 구멍으로 빠져 나가는 사람은 놓아 주었다.
그러나 새벽이 되어 곧 목을 자르려 하니 그 때까지 아직도 육십여 만이 남아 있었다.
이들을 모두 장하(漳河)의 강기슭에서 목잘라 시체를 물 속에 흘러보내니 강물이 흐르지 못하였다.
피의 강물이 한 달 동안 계속되면서 밤마다 귀신이 통곡하였으니,
슬픈 원한이 사람의 간장을 끊어 놓았다.
이 일을 황제에게 알리자 황제가 말하였다.
“이번 한 번의 주살(誅殺)에는 매우 잘못되고 외람된 점이 있었다.
역적은 울형 한 사람에 지나지 않으니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몰아 세워졌을 따름이다.
당시에 이를 측은하게 생각한 사람들도 모두 이 일을 알고 있었지만 나라가 처음 서고 천기(天機)를 살피느라 이들을 놓아 줄 수 없었다.
그러니 유예원의 남쪽 갈구산 위에 대자사(大慈寺)를 세우고 삼작대(三爵臺)를 터서 그곳에 절을 영조(營造)하라.
그리고 하루 여섯 차례 예불할 때에 이 유예원 안에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을 위하여 한 번 더 절을 하라.”
그리하여 절이 이룩되고 스님이 주지하였는데,
칙명에 의하여 예배하고 불경을 외우니 원한의 통곡소리가 완전히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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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위대한 성인은 방편을 도모하여 중생들을 통틀어 제도함을 근본으로 삼으시나 얼굴 모습과 광명은 혹 인연 따라 감추시니,
남기시는 그늘은 그 진실을 받들 만한 것이 있다.
그런 까닭에 구시(拘尸)를 섬기고자 하시어 속인의 교화로부터 금강정(金剛定:
허물어지지 않은 영원한 선정)에 들어가시고,
이 금강의 몸을 부수어 복덕이 하늘과 인간을 덮게 하셨으니 그 공덕은 바다와 육지에 흘러 넘쳤다.
그리하여 심지어 치아ㆍ머리칼ㆍ손톱과 정수리의 덮개뼈ㆍ눈동자,
옷ㆍ발우ㆍ물병ㆍ지팡이 같은 도구,
앉아 있던 곳,
발을 디디신 자취에 이르기까지 중천에 가득하였으나 그 공덕이 동하(東夏)에까지 미친 자취는 드물다.
그러나 치아와 머리카락과 불골(佛骨)에 관한 것은 때때로 그 소문을 듣거나 직접 눈으로 보고 듣기도 하였다.
예전에 아육왕의 땅 속에 묻힌 탑이 몇 번 눈 앞에 나타난 일이 있었지만 그것은 치우쳐 감응하고 구별해서 감응하는 형태로 나타났으며,
기연을 따라 역시 나타나곤 하였다.
그리하여 한(漢)나라에서 당(唐)나라에 이르기까지 그러한 일이 없던 시대가 없었지만 그것은 이미 영골(靈骨)이라 일컬어지는만큼 어떤 일로 인해서 이를 구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인연에 맡겨 거론할 따름이며,
오직 이를 공경함으로써 그 공덕을 공통적으로 믿는 사람들에게 미치게 할 수 있을 따름이다.
또한 신비한 광명을 거론하여 불법에 의문을 품고 있는 사람의 마음을 감응시켜 옥을 다듬고 갈 듯이 하면서 염원을 일으키게 할 수 있을 뿐으로,
그것이 지난날의 전설을 찾아보고 이로써 현재에 나타나는 상서에 까지 미치게 하려는 이유이다.
그런 까닭에 이 서문을 엮어서 모쪼록 이 글을 펼쳐 보는 사람에게 석문(釋門)의 큰 골격을 알게 하고,
또한 만 년 뒤까지도 먼지 속에 묻혀 두기 어려움을 알기를 바라는 것이다.
한나라 『법본내전(法本內傳)』에서 말하였다.
명제(明帝)가 불법(佛法)을 널리 펴고 절을 세우고 스님에게 도첩을 주었다.
그러자 오악(五嶽)에 자리잡은 도교사원[觀]의 도사들은 청하기를 경을 불태워 그로써 신변의 증험으로 삼자고 하였다.
이에 경이 불을 따라 변화하여 사라지고,
아무도 펼치는 사람이 없는데도 재주를 다하여 스스로 대중 앞에 느낌이 와 닿게 하였으며19),
도사 장연(張衍)은 세속 사람들에게 깨우침을 열게 하였다.
반면 이 때 서역에서 가져온 사리가 오색의 광명을 뻗어 내면서 곧바로 공중으로 치솟아 올라서 빙빙 도니 마치 하늘을 덮는 듯 하였으며,
그 빛남은 햇볕을 가렸다.
또 아라한인 마등(摩騰)은 몸을 솟구쳐 높이 하늘로 놀아올라 자유자재로 신통력의 변화를 일으키고 하늘에서 보배꽃비를 내려 부처님과 스님들 위에 뿌렸으며,
또한 하늘의 음악소리가 들려와 모임에 온 사람들의 신심을 감동시켰다.
위(魏)의 명제(明帝) 때 낙양(洛陽)의 성 안에는 본래 세 곳의 절이 있었다.
그 중 하나는 궁성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깃대 끝에 깃발을 매놓을 때마다 그 펄럭이는 것이 궁중 안에서도 쉽게 보였다.
황제는 이를 싫어하여 절을 허물어 없애려 하였다.
이 때 이 절에 거주하던 외국의 사문이 곧 금쟁반을 가져와 물을 가득히 담고 그 안에 사리를 담으니 오색의 광명이 불꽃처럼 치솟아 끊이지 않았다.
이에 황제는 감탄하여 말하기를 ‘천신(天神)20)의 공력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리 될 수 있겠는가!’ 하며 곧 길 동쪽에 둘레 백 간의 집을 짓고 이름을 관불도정사(官佛圖精舍)라 하였다.”
오(吳)나라 손권(孫權)의 적오(赤烏) 4년(241)에 사문 강승회(康僧會)가 강남 땅에 절을 창설하여 불상을 안치하고 행도하였는데,
오나라 사람들이 괴이한 요물이라 생각하고 그 현황을 글로 써서 임금에게 아뢰었다.
이에 손권이 승회를 불러 물었다.
“부처에게 무슨 신령함이 있느냐?”
승회가 대답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신령한 자취를 숨기셨지만 유골과 사리는 아무 곳에서나 응하여 나타납니다.”
손권이 물었다.
“그것이 어디에 있는가?”
승회가 대답하였다.
“신비한 자취에 감통하려면 기원하고 구하면 얻을 수 있습니다.”
이에 손권이 말하였다.
“만약 사리를 얻는다면 곧 마땅히 절을 일으키게 되리라.”
그리하여 21일이 지나서 마침내 사리를 얻어 병 안에 담아 아침 일찍 손권에게 올리니 광명이 궁전을 비추었다.
손권이 병을 손에 잡고 구리쟁반에 사리를 쏟았는데,
사리가 떨어지면서 부딪치자 쟁반이 산산히 부서졌다.
손권은 크게 놀라고 감탄하여 말하였다.
“세상에 드물게 있는 상서(祥瑞)로다.”
승회는 한 발 더 나아가 말하였다.
“부처님의 영골(靈骨)은 금강으로도 부서지지 않고 겁화(劫火)에도 타지 않습니다.”
이에 손권이 곧 힘센 사람을 시켜 이를 쳐보게 하였는데 망치와 디딤돌이 모두 움푹 패였지만 사리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광명이 사방을 쏘며 사람들의 눈에 휘황찬란하게 빛났다.
다시 그것을 불에 태우게 하였으나 곧 광명이 치솟아 위로 올라가 큰 연꽃 모양을 만들었다.
손권은 크게 신심을 일으켜 곧 그 사리를 안치하기 위하여 건초사(建初寺)를 짓고 그가 머물던 곳의 이름을 불타리(佛他里)라 바꾸었다.
손호(孫皓:
손권의 아들)는 가혹한 정치를 하였다.
그는 불법을 막고 제거하려 경전을 불사르고 탑을 허물고자 하였는데,
그에게 어떤 사람이 충고하여 말하였다.
“조금만 느긋하게 시간을 빌려 주십시오.
명백히 신비한 영험이 없다면 그 때 스님들을 죽이고 불법을 제거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손호는 이 말을 따랐는데,
그는 승회를 불러들여 말하였다.
“만약 영험이 눈앞에 나타나게 할 수 있다면 그대를 도와 불교를 일으키겠지만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장차 도(道)는 폐기될 것이고 사람은 죽게 될 것이다.”
승회가 말하였다.
“도는 인연으로써 응하여 감응하면 반드시 통합니다.
만약 조금 느긋하게 시간을 주신다면 아마도 신비한 효험이 내리게 될 것입니다.”
손호는 사흘의 기한을 주었다.
스님과 대중 백여 명이 함께 절에 모였고,
손호는 병력을 풀어 절을 에워쌌다.
이어 칼로 베고 뒤꿈치를 자르는 형벌도구가 가지런히 그곳에 도착했다.
기한을 어기면 형벌에 처하게 할 것이니,
어떤 이는 혹 영험이 없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먼저 스스로 목을 매기도 하였다.
이 때 승회가 대중들에게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사리를 남겨 두신 것은 오직 지금 같은 때가 있기 때문이다.
전에도 이미 영험이 있었는데 지금이라고 해서 어찌 속이겠는가?”
그리하여 기한에 맞추어 사리를 얻게 되었고 곧 이것을 손호에게 진상하면서 말하였다.
“이것은 여래의 금강의 골분(骨賁)으로서 백 균(鈞:
1균은 3천 근)의 절구방망이로 내리 쳐도 끝내 부서지지 않습니다.”
이에 손호(孫皓)가 말하였다.
“쇠와 돌도 갈고 다듬을 수 있는데 마른 뼈다귀가 부서지지 않는 것이 있겠느냐?
사문이 얼굴을 맞대고 사람을 속인다면 오직 빨리 죽을 따름이다.”
그리고 나서 곧 무쇠 마루 위에 놓고 쇠방망이로 이를 치게 하니 쇠방망이와 무쇠 마루는 움푹 패였으나 사리는 그대로 있었다.
또 맑은 물로 이를 시험해 보니 사리에서 광명을 뿜어 올리면서 흩어져 온 궁전을 환하게 밝혔다.
이에 손호는 기꺼이 승복하고 마음을 고쳐 교화에 응하였다고 한다.
진(晋)나라 초기에 축장서(竺長舒)란 사람에게는 이전부터 사리가 있었다.
그는 이를 소중히 여겨 자신의 아들을 사문이 되게 하였는데 이름은 법안(法顔)21)으로,
늘 환속하고자 하였다.
그는 웃으며 말하기를 “이것은 사석(沙石)에 지나지 않거늘 도대체 무엇이라고 귀하게 여기는 것인가?”라고 하였다.
이에 그의 아버지가 사리를 물 속에 던지니 오색이 세 번이나 맴돌고 광명이 몇 자나 높이 치솟았다.
결국 그는 환속하지 않았다.
장서가 죽은 뒤에 그에게는 다시 도로 속세에 대한 생각이 일어났지만 갑자기 병이 들더니 기세가 꺾이고 말았다.
그는 끝내 사문으로 남아 사리를 강하(江夏)의 탑 속에 안치하였다.
진(晋)의 대흥(大興) 연간(318~321)에 잠동왕(潛董汪) 지방에서는 목상(木像)을 믿고 숭상하였다.
어느 날 밤에 광명이 있더니 그 후 목상 옆에서 무엇인가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가서 보니 곧 사리가 물 속에서 떴다가 가라앉곤 하는데,
오색빛이 휘황하게 빛나면서 좌우로 세 바퀴를 맴돌며 갔다.
그 후 사문 법항(法恒)이 이를 보니 멀리서 네다섯 개의 광명이 일어나면서 자신의 품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이에 법항이 말하였다.
“만약 나로 하여금 절을 세우게 하시려거든 다시 그 위신을 보여 주십시오.”
그러자 다시 눈앞에서 빛남이 있었다.
이에 즉시 법항이 절과 탑을 세우니,
잠주(潛州) 지방에서 불법에 들어오는 사람이 하루에 수 십 명을 헤아렸다.
진(晋)의 대흥(大興) 연간에 북쪽 사람들이 광릉(廣陵) 땅에 흘러들어와 퍼졌는데,
그 수효가 하루에도 수 천 명이나 되었다.
이 가운데 사리를 갖고 온 사람이 작은 사찰을 세우고 찰간대를 세웠는데 사리에서 뻗어나온 광명이 장대 끝까지 이르고,
마침내 멀고 가까운 사람들의 신심에 감동을 일으켰다고 한다.
진나라 함화(咸和) 연간(326~334)에 북쪽 스님인 안법개(安法開)란 사람이 여항(餘杭:
浙江省) 땅에 이르러 절을 건립하고자 하였으나 땅은 없고 돈도 모자랐다.
그는 손수 옆전 꾸러미를 꼬아 이를 팔아서 몇 해를 모아 3만 냥의 돈을 벌어 땅을 사서 집을 지었다.
그는 늘 돈꾸러미를 꼬는 일로 밑천을 삼았는데 사찰을 세우고자 하여도 사리가 없었다.
여기에 나유(羅幼)란 사람이 있었는데 선대 때부터 사리를 갖고 있었다.
이에 법개(法開)가 이를 구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어느 날 법개가 절에 이르러 예불을 하는데 나유의 사리주머니가 이미 자기의 자리 앞에 있는 것을 보고는 곧 나유에게 알렸다.
나유는 뒤따라 와서 이를 보고는 기뻐하며 법개와 함께 여항에 절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진(晋)의 함강(咸康) 연간(335~342)에 건안(建安) 태수 맹경(孟景)이 찰맹사(刹孟寺)란 절을 세우고자 하였는데 저녁에 머리맡에서 쨍그랑 하는 소리가 나기에 보니 사리 세 과가 있었다.
이에 맹경이 사찰을 세웠다.
때는 원가(元嘉) 16년(439) 6월,
사리에서 광명이 뻗어 나와 위아래로 비추다가 일곱 밤 만에 멈추었으니,
모든 사람들이 함께 보았다.
진(晋)나라 의희(義熙)22) 원년(405년)에 한 임읍(林邑) 사람에게는 일찍이 한 과의 사리가 있었는데,
재를 올리는 날마다 방광이 있었다.
혜수(慧邃)라는 사문이 광주(廣州)의 자사(刺史)인 조규(刁逵)23)를 따라 남방에 있을 때 그 방광하는 모습을 공경하여 이를 청하려 하였다.
그런데 아직 말도 하기도 전에 사리가 저절로 갈라지더니 두 개가 되었다.
조규가 이 말을 듣고는 마음으로 기뻐하며 또 그것을 자기에게 남겨 두고 공경하게 하기를 청하니 다시 갈라져 세 개가 되었다.
이에 조규는 장간사(長干寺)의 탑상의 모양을 본따서 탑을 세우고자 하였지만 절의 주승(主僧)이 고집하여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랬더니 그 주승의 꿈에 키가 수 길이나 되는 사람이 나타나 말하였다.
“불상은 귀한 것으로 마땅히 인도해야 하거늘 무슨 까닭으로 인색하게 구느냐?
분명히 알리노니 본뜨는 일을 들어 주라.”
그리하여 탑이 이루어지자 조규는 사리를 불상의 육계(肉髻) 안에 붙여 두었다.
서방에서 온 여러 불상 가운데 방광을 하는 것은 대개가 사리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송(宋)의 원가(元嘉) 6년(429)에 가도자(賈道子)가 형주(荊州) 지방에 가서 부용(芙蓉)꽃이 핀 것을 분명히 보고 그것을 조금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 꽃에서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이상하게 여겨 살펴보다가 한 과의 사리를 얻게 되었는데,
흰 빛이 진주와 같고 불꽃같이 빛나 대들보를 비추었다.
그는 이를 공경하여 상자 안에 받들어 담아서 집 벽에 매달아 놓았다.
집안 사람들이 보니 늘 불가의 스님이 외부에서 들어와 입고 있던 옷을 벗고 뛰어올라 책상 위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이 자고 가게 되었는데,
사정을 모른 채 이를 대수롭지 않게 소홀히 대하였더니 곧 꿈에 사람이 나타나 알렸다.
“이곳에는 석가의 진신이 있어 뭇 성인들이 찾아와 공경하는 곳인데 너만 어째서 그릇된 짓을 하느냐?
죽으면 지옥에 떨어지고,
다시 나와도 비구니의 종이 될 것인데 어떻게 두려워하지 아니할 수 있겠느냐?”
그 사람은 크게 두려워하다가 얼마 되지 않아 나병으로 죽고 말았다.
그 후 사리가 있던 땅에 여덟 송이의 연꽃이 생겨나서 60일이 되자 마르더니 한 해쯤 지나자 사라졌다.
그 간 곳을 모른다.
송의 원가 8년(431) 회계 땅에 안천재(安千載)란 사람이 있었는데 집안이 대대로 부처님을 받들었다.
어느 날 밤에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어 나가 보니 붉은 옷을 입은 사람 10여 명이 재목을 운반하여 문 안에 쌓고 있었다.
그들은 말하기를 “관청에서 시켜 불탑[佛圖]을 만들라고 하였다”고 하고는 홀연히 보이지 않았다.
이튿날 다른 집의 재(齋)에 갔다가 밥에서 사리 한 과를 얻었는데 자금색(紫金色)을 띠고 있었다.
방망이로 쳐도 부서지지 않았으며,
물로 시험해보니 광명이 일어나 비추었다.
그는 곧 스스로 받들어 공경하게 되었는데 항상 기이한 향기가 있었다.
그 후 어느 날 사리를 꺼내어 예배를 드리고자 하다가 갑자기 그것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두루 찾아보다가 반나절 만에야 겨우 도로 찾게 되었다.
임천왕(臨川王)이 강릉(江陵)을 다스릴 때 이 사리를 맞이하여 관찰해 보니 여러 가지 광명이 섞여서 간간히 뻗어 나왔는데 좌사(佐史:
보좌관)와 사문들이 보는 것이 다 같지 않았다.
이에 왕이 물이 담긴 그릇에 받들고 주문을 외웠는데주문의 종류는 많아서 따로 가려낸 내용과 같다 주문이 끝나자 곧 소리에 응하여 광명이 뻗어 나왔다.
그 날 밤에 보니 백여 명의 사람들이 사리를 모신 집 주위를 돌면서 향을 사르고 있었다.
독특한 모습이 부처님과 같았으며,
날이 밝자 사람들과 사리가 모두 없어졌다.
전송(前宋)의 원가(元嘉) 9년(432)에 심양(潯陽)의 장수원(張須元)이라는 사람은 집에서 팔관재(八關齋)를 마련하였다.
도속의 사람 수십 명이 보고 있자니 불상 앞 꽃 위에 얼음과 눈 같은 것이 있었다.
살펴보니 사리 수십 과가 있었다.
곧 그것을 물에 넣어 관찰하자 빛나는 불꽃이 서로 이어졌다.
그 후 결국 이를 잃어버렸다가 수십 일이 지난 뒤 부엌을 열어 보니 다시 치아사리가 있어서 그것을 얻었는데,
상자 속에 흰 모포가 있고 그 안에 사리 10과가 있었다.
빛나는 불꽃이 하늘에 닿아 여러 곳의 사람들이 함께 와서 보기를 청하였다.
전송(前宋) 원가 15년(438)에 남군(南郡)에 유응지(劉凝之)란 사람이 있었는데 형산(衡山)에 숨어 나라의 부름을 받아도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오두미도(五斗米道)를 받들고 불법을 믿지 않았는데 꿈에 사람이 나타나 땅에서 수 길이나 떨어진 높은 곳에서 말하기를 “너의 의심은 비로소 풀리게 되었다”고 하였다.
꿈을 깨고 나서 홀연히 깨닫게 되어 아침 저녁으로 부지런히 지성을 다하여 반 년 동안을 예불하였다.
그러다 홀연히 불상의 이마 아래에 자색(紫色)의 광명이 뻗어 나오는 것을 보고 서광이 난 자리에서 두 과의 사리를 얻었는데 쪼개고 쳐도 손상되지 않았으며,
물에 헹구니 광명이 뻗어났다.
그 후 식사 때 이빨 사이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 듯하여 토해 내니 광명이 있었고 그의 처(妻)도 또 한 과의 사리를 얻어 모두 합하여 다섯 과의 사리를 갖게 되었다.
그 후 또 이것을 잃었다가 곧이어 다시 얻게 되었다고 한다.
전송(前宋)의 원가 19년(442)에 고평(高平)에 사는 서춘(徐椿)이란 사람은 경을 읽다가 그리고 식사를 하다가 각각 사리를 얻었는데,
모두 두 과를 얻어서는 은으로 만든 병 속에 담아 두었다.
나중에 사리의 수효가 점점 불어나 마침내 스무 과가 되었고,
그 후 이 사리는 광릉(廣陵)에 기진되었다.
이제금 다시 가만히 열어 보니 빈 단지뿐으로,
그동안 서춘이 도읍지에 살다가 홀연히 스스로 이를 얻게 되었지만,
그가 뒤에 불법에서 퇴전하게 되자 모두 사라지고 만 것이다.
사리는 감응에 의하여 나타나지만 그 인연을 만나는 사람도 매우 많다.
모두가 공경함으로써 얻게 되고 업신여김으로써 잃게 되는 것이다.
사리가 동방에 흘러 들어오면서 멀리 여러 제왕의 시대를 겪어 왔다.
전기에 언급되는 사리의 기사는 거의 만에 하나만을 말한 것으로,
시대의 모습에 연유하여 같은 사리가 거듭거듭 여러 번 나타나기도 하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다.
부처님께서 나타나시고 숨으시는 것은 정성이 이루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리탑을 일으켜 세운 나라에 있어서는 수나라보다 뛰어난 나라는 없다.
한 시대의 다스림 가운데서 백여 개 소에서 신비한 서상(瑞祥)이 열렸던 일이 여러 전기에 기술되어 있다.
지금 간략히 그 가운데서 몇 가지를 드러내어 왕성하던 공덕을 밝혀 보기로 한다.
수(隋)의 고조가 예전에 제왕이 되기 전이었다.
지선(智仙)이라는 한 신령한 비구니가 어디서 왔는지 찾아와서 일러 말하였다.
“불법이 멸하려 하고 있다.
일체의 신명(神明)이 지금은 이미 서쪽으로 떠나갔다.
아이야,
너는 마땅히 온 천하의 자애로운 아비가 되어 다시 불법을 일으켜라.
그리하면 신명도 다시 돌아오리라.”
그 후 주(周)의 임금은 과연 불법을 멸망시켰다.
그 후 수(隋)가 천명을 받았는데,
고조는 항상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한다.
예전에 한 바라문승(婆羅門僧)이 있었는데 집을 찾아와서 보자기에 싼 한 과의 사리를 내놓고 말하였다.
“단월(檀越; 시주)께서는 마음씨가 좋은 까닭에 이것을 남겨 두니 공양드리시오.”
그리고 나서 곧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이에 황제는 말하였다.
“내가 나라를 일으킨 것은 부처님의 힘에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니 천하에 탑을 세우고 아울러 신령한 비구니의 상을 안치하라.”
또한 서울의 법계사(法界寺)에 기단이 이어진 부도를 만들고 그 아래에 사리를 봉안하게 하였다.
개황(開皇) 15년(595) 가을의 어느 날 밤 신비한 광채가 기단에서부터 위로 치솟아 노반(露盤) 위를 맴돌았는데 그 붉게 빛나는 모양이 마치 용광로의 불꽃과 같았다.
열흘 동안에 네 번 이와 같은 일이 있었다.
황제와 인수궁(仁壽宮)과의 인연이란 인수(仁壽) 원년(601) 6월 13일,
어궁(御宮)이었던 인수전(仁壽殿)에서 황제가 탄생한 날에 있던 일을 말한다.
황제는 이 날 지난 일을 생각하여 부모의 은혜를 갚고자 여러 사문들을 모아서 함께 지극한 도를 논의하고 나라 안의 맑고 고요한 곳 서른 곳에 탑을 세우고자 소서(詔書)를 내려 말하였다.
“우러러 정각을 이루신 분을 생각하니 대자대비로 뭇 중생들을 구호하시고 모든 천한 자들에게는 나루터와 교량이 되셨도다.
나는 삼보(三寶)에 귀의하여 성인의 가르침을 다시 일으키고 사해(四海)의 백성들과 함께 복업을 닦아 현재와 미래에 모두가 이익되게 할 것을 생각한다.
그리하여 법상을 알고 베풀고 인도할 만한 자격이 있는 30명의 스님을 초청하여 각기 시자(侍者)를 거느리고 길을 나누어 관도에 흩어지게 하고,
여러 고을에 사리를 보내서 탑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
현재 모든 고을에 있는 스님들은 나와 황후와 태자 및 모든 왕궁의 관리와 백성과 그리고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생령들을 위하여 7일 동안 행도하고 참회하라.
그리고 계속 사찰에 보시하되 10문(文)을 한도로 하여 탑을 세우는 비용에 바치라.
탑을 세우는 사람은 부역에 충당하지 않겠다.
창고의 물건을 사용하되,
각 지방의 자사(刺史) 이하 관리들은 평상시의 업무를 7일 동안 정지하고 오로지 탑 세우는 일만을 맡아 보아서 다 함께 10월 15일 정오가 되면 사리를 함에 넣어 일시에 탑을 일으키라.”
황제는 탑을 일으켜 세우는 날 새벽,
서울에 있는 대흥전(大興殿)의 서쪽에서 옥홀(玉笏)을 손에 잡고 서서 불상과 360명의 사문을 맞아들였다.
그리고는 궁전에 올라가 좌우로 몰래 사람들을 세 번에 걸쳐 세어보았지만 항상 한 사람이 남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황제는 기이한 모습을 한 스님 하나가 갈색의 가사로 넓적다리를 덮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에 황제는 좌우의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놀라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라고 하였는데,
행도(行道)를 하게 되자 흩어져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
이 날 황제가 말하였다.
“지금 불법을 다시 일으켜 사리탑을 세웠으니 반드시 감응이 있을 것이다.”
과연 그의 말과 같았다.
즉,
옹주(翁州)의 선유사(仙遊寺)에서는 탑을 세우는데 하늘이 어두워지고 눈이 내리다가 사리를 내려놓으려 하자 햇빛이 밝게 비추었고,
사리를 함에 넣자 구름이 다시 덮였다.
기주(岐州) 봉천사(鳳泉寺)에 탑을 세울 때 감응한 글을 새긴 돌은 마치 옥으로 만든 함(函)과 같았다.
또한 쌍수(雙樹)와 새와 짐승들이 나타났고 기단석은 수정처럼 변하였다.
경주(涇州)의 대흥국사(大興國寺)에 탑을 세울 때는 세 곳에서 오래된 돌을 보내 왔는데 인간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들을 함께 써서 사리함을 만드니,
완전히 일치되어 모습이 보기 좋았다.
진주(秦州)의 정념사(靜念寺)에 탑을 세울 때는 터를 정하고 나니 상서로운 구름이 다시 덮이면서 눈이 내렸고 초목에 꽃이 피었으며,
함에 사리를 넣으니 광명이 비추며 찬양하는 소리가 들렸다.
화주(華州)의 사각사(思覺寺)에 탑을 세울 때는 처음에는 날씨가 어둡고 눈이 내리려 했다.
그러나 사리를 내려놓으려 하자 햇볕이 비추면서 오색의 기운을 띤 빛이 수길이나 치솟아 탑 위를 덮고 하늘까지 이어졌으며,
하늘에서는 하늘의 꽃이 비오듯 내렸다.
동주(同州)의 대흥국사(大興國寺)에 탑을 세울 때는 비를 만나 덮을 것이 없었는데 사리를 함에 넣자 해가 나오고 사리의 광명이 해를 둘러싸더니 열두 달 동안 밤에 광명이 50리를 비추었다.
포주(蒲州)의 서암사(拪巖寺)에 탑을 세울 때는 땅이 진동하고 산이 울부짖기를 마치 종 치고 북 치듯 하였다.
또한 오도(五道)에 방광하여 200리 안의 사람들이 모두 보았다.
병주(幷州)의 무량수사(無量壽寺)에 탑을 세울 때는 처음 낮에 어두운 구름이 끼었다가 이윽고 [사리가 도착하자] 햇살이 비치고 함에 넣으려 하자 광명이 뻗어 나왔으며 헤아릴 수 없는 천신(天神)이 나타났다.
정주(定州)의 항악사(恒嶽寺)에 탑을 세울 때는 기이한 사람이 와서 [배와 비단을] 시주하고 [흙을] 짊어지고 왔는데 홀연히 사라졌으며,
예전에는 물이 없었는데 갑자기 물이 흘렀다.
전후해서 이러한 기이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상주(相州) 대자사(大慈寺)에 탑을 세울 때는 날씨가 어둡고 눈이 내리다가 사리를 내려놓으려 하자 해가 나왔다.
사리를 함에 넣자 다시 구름이 모이고,
그 후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
전후하여 일어난 서상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정주(鄭州)의 정학사(定學寺)에 탑을 세울 때는 감응한 광명이 유성(流星)과 같았으며,
절에 들어올 때는 2천 인분이 공양을 마련하였으나 만여 명이 와서 먹어도 다 먹지 못하였다.
숭주(嵩州) 한거사(閑居寺)에 탑을 세울 때는 감응한 토끼가 가마[輿] 있는 곳을 찾아 왔다.
처음에는 어둡고 눈이 내리다가 사리를 내려놓으려 하자 햇살이 밝았으며,
함에 넣고나니 다시 구름이 모여들었다.
호주(毫州) 개적사(開寂寺)에 탑을 세울 때는 절의 경계 안에는 돌이 없어 다른 세 곳의 돌을 합쳐서 함을 이루었는데 기반석(基盤石)이 도착하니 두 가닥의 큰 우물이 솟아나 이 돌을 중간에 끼웠다.
여주(汝州)의 흥세사(興世寺)에 탑을 세울 때는 처음에는 구름이 끼었다가 사리를 내려놓으려 하자 해가 나왔으며,
함에 넣고 나니 다시 구름이 모여들었다.
진주(秦州)의 대악사(岱嶽寺)에 탑묘를 세울 때는 밤에 북소리가 세 번 나자 겹친 문이 저절로 열리고 말탄 사람이 묘(廟)에 나와 마중하였으며,
빛의 모양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청주(靑州) 승복사(勝福寺)에 탑을 세울 때는 기초를 파다가 자연으로 된 반석을 만났고,
사리를 함에 넣으려 하자 광명이 있었다.
모주(牟州) 거신산사(巨神山寺)에 탑을 세울 때는 신비한 약초[紫芝:
靈芝] 두 뿌리를 얻었으며 날씨가 어둡고 구름이 끼었다가 사리를 내려놓으려 하자 해가 열렸으며,
함을 닫고 나니 다시 구름이 모여들었다.
수주(隋州) 지문사(智門寺)에 탑을 세울 때는 기초를 파다가 신령스런 거북을 얻고 감로(甘露)가 내렸는데,
까만 벌이 에워싸고 거북 등에는 어떤 부적 글이 있는 듯하였다.
양주(襄州) 대흥국사(大興國寺)에 탑을 세울 때는 처음에는 날씨가 흐리다가 사리를 내려놓으려 하자 햇살이 밝아졌으며,
함에 넣고 나니 다시 구름이 모여들었다.
양주(楊州) 서사(西寺)에 탑을 세울 때는 오랜 가뭄 끝에 사리를 함에 넣고 나니 밤에 매우 흡족한 비가 내렸다.
장주(蔣州) 서하사(栖霞寺)에 탑을 세울 때는 이웃에 사는 사람이 먼저 꿈에서 부처님께서 서북쪽에서 오셔서 절로 들어가시는 것을 보았는데,
사리가 도착하는 모습이 흡사 꿈에서 본 것과 같았다.
오주(吳州) 대우사(大禹寺)에 탑을 세울 때는 사리가 무릇 다섯 곳의 강을 건너게 되었는데도 강의 풍파가 모두 일어나지 않았다.
또한 광명이 뻗어 나왔으며 신비한 약초[紫芝]를 얻었다.
소주(蘇州) 호구산(虎丘山)의 서사(西寺)에 탑을 세울 때는 기초를 파다가 사리 한 과를 얻었는데,
공중의 음악 소리가 사람들 귀에 들리고 우물에서 이틀 동안 울린 후에야 사리가 비로소 도착하였다.
형주(衡州)의 형악사(衡嶽寺)에 탑을 세울 때는 네 번의 역풍(逆風)을 만나 네 번 빌어 순풍의 강물을 건너갔고,
봉우리 위에 있던 너비 두 길이나 되는 흰 구름이 곧바로 기단이 있는 곳에 와서 세 번 주위를 돌고는 이내 흩어졌다.
계주(桂州)의 연화사(緣化寺)에 탑을 세울 때는 10리도 못 가서 까마귀 천여마리가 가마를 끼고 날아갔으며 성 안에 들어서더니 곧 흩어졌다.
번주(番州)의 영취사(靈鷲寺)에 탑을 세울 때는 구덩이 안에 신선구름의 기운을 띤 상(像)이 있었다.
교주(交州) 선중사(禪衆寺)와 익주(益州) 법취사(法聚寺)에 탑을 세울 때는 처음 날씨가 어두컴컴 하다가 사리를 내려놓으려 하자 날이 밝아졌고,
사리를 덮고 나니 곧 어두워졌다.
곽주(廓州) 법강사(法講寺)에 탑을 세울 때는 처음 교서(郊西)로 갈 때 그 날 밤 곽주에 수 길 높이의 광명이 동쪽에서 뻗어 와서 땅 속에 들어가는 것을 성 안팎의 사람들이 모두 보았다.
과주(瓜州) 숭교사(崇敎寺)에 탑을 세웠다.
유주(洧州)의 관리였던 왕위(王威)란 사람이 죄수 90명을 유배지로 압송하다가 길에서 사리를 만나 죄수들을 놓아 주고 기약을 하였다.
그 죄수들은 석방되어 십리마다 흩어졌으나 기약한 날에 함께 목적지에 모였고 한 사람도 도망간 사람이 없었다.
또 수주(隨州)의 사람이 운수(溳水)에서 어옥(漁獄:
가두리 양식장) 300개를 만들었다가 사리를 보고 나서 그물을 끊고 모두 놓아 주었다.
나머지 다른 고을에서도 물고기를 놓아 준 일이 많다.
임금과 귀족 및 많은 벼슬아치들의 사리로 인한 감응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 때마다 나라에 글을 올려 받들어 경하를 하였고 이 때 천자는 소서(詔書)를 내려서 말하였다.
“문하인 내가 우러러 생각하니 바르게 깨달은 분께서 뭇 중생들을 덮어 주시고 지켜 주신다.
나는 그런 까닭에 지극한 마음으로 회향하는 바이다.
높고 거룩한 업을 생각하며 은덕이 두루 귀신과 사람에게 미치게 하여 함께 착한 인연이 되게 하고자 하는 까닭에 사리를 분포하여 신탑(神塔)을 세우게 하였다.
그리하여 큰 성인께서는 자비를 드리우사 자주 빛나는 모습을 나타내시고 궁전 안에까지 사리가 강령(降靈)하였지만 아무도 그 유래를 헤아리지 못한다.
일찍이 없었던 일을 만났지만,
이는 실로 모든 중생들이 다행히도 이 아름다운 복덕을 초래한 것이다.
어찌 나의 미미한 정성으로 이러한 감응을 이루었겠는가.
그대들이 올린 글을 보니 송구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그만큼 더 깊어지도다.
지금 진신 사리가 아직도 남아 있어서 앞에서 행한 법식에 의하여 나라 안 53주에 나누어 보내니,
3도(塗)ㆍ6도(道)의 모든 중생들이 번뇌와 속박을 벗어나고 의식(意識)을 받아 태어난 모든 생명체가 다 함께 묘과(妙果)에 오르기를 바란다.”
인수(仁壽) 3년(603) 정월에 다시 53주에 사리를 분포하였다가 4월 8일 오시(午時)에 함께 사리를 탑 안에 내려놓았으니,
그 고을은 다음과 같다.
항주(恒州)구름도 없었는데 하늘에서 꽃비가 내려 성사(城寺)에 두루 꽃잎이 뿌려졌다.
이와 같은 일이 두 번 있었다,
천주(泉州)ㆍ순주(循州)ㆍ영주(營州)세 번 흰 광명이 뻗어 나왔고,
옛 돌이 출토되어 이를 해체하여 사리함을 만들었다,
홍주(洪州)흰 목덜미를 한 까마귀가 길을 인도하였다,
항주(杭州)기초를 파니 자연 석굴이 나왔는데 흡사 석함 같았다.,
양주(凉州)ㆍ덕주(德州)앉은뱅이가 걷게 되고 큰 새가 탑을 선회하였다,
창주(滄州)ㆍ관주(觀州)탑 위에 오색 구름이 나타나 오시(午時)에서 해가 지도록 계속되었다,
영주(瀛州)터 안에 자색광명이 있었다,
기주(冀州)눈 먼 사람과 앉은뱅이가 줄어들었다,
유주(幽州)함이 마치 수경(水鏡)처럼 방광하며 온갖 모습이 비쳤다,
서주(徐州)함에서 선인ㆍ스님 등의 모습이 나왔다,
거주(莒州)세 번 광명이 나타나고,
기단에서 옛 탑터를 얻고 나니 바보가 말을 하였다,
제주(齊州)ㆍ내주(萊州)ㆍ초주(楚州)들의 사슴이 와서 법문을 듣고 학이 탑위를 날아다녔다,
강주(江州)땅에서 동상(銅像)이 나왔다,
담주(潭州)사리가 강에 이르니 새들이 마중나왔다,
모주(毛州)하늘에서 금은화(金銀花) 꽃비가 내렸다,
패주(貝州)ㆍ송주(宋州)우물의 쓴 물맛이 달게 변하고 방광하였으며 또 꽃비가 눈처럼 내렸다,
조주(趙州)붉은 광명이 뻗어 나오고 불상(佛像) 등의 모습이 나타났다,
제주(濟州)이틀 동안 방광하고 향기를 담은 종소리가 공중에서 났다,
연주(兗州)ㆍ수주(壽州)ㆍ신주(信州)ㆍ형주(荊州)구름이 탑 위를 덮었으나 꽃비는 내리지 않았다,
여주(黎州)땅 밑 기왓장에 천추락(千秋樂)이란 글이 새겨져 있었다,
자주(慈州)구름이 덮이는 모습이 하늘을 나는 신선과 같았으며,
샘이 솟아나 그 물을 마시면 병이 나았다,
위주(魏州)ㆍ노주(潞州)저절로 솟아난 샘물에 병자가 나았다.,
변주(汴州)기이한 향기가 나고 방광하였으며,
불상을 본 자는 병이 나았다,
기주(杞州)방광하였다,
허주(許州)주에서 9십 리 떨어진 곳에서 뻗어 나온 광명이 구름처럼 탑을 덮고 있는 것을 비추어 보았고,
단맛의 물이 나오는 우물이 나타났다,
침주(忱州)ㆍ난주(蘭州)기단 아래에서 석상(石像)을 얻고 또한 두 구의 은상(銀像)을 얻었다,
양주(梁州)ㆍ이주(利州)방광하니 마치 태양처럼 밝았다,
예주(豫州)오색 광명이 나왔고 금빛 글자가 나왔다,
현주(顯州)ㆍ조주(曺州)광명의 변화가 가장 많았다,
안주(安州)하룻저녁 내내 향기가 느껴지고 방광하였으며,
구름이 탑을 덮고 물고기들이 모여들었다,
등주(鄧州)함을 만드니 옥문(玉文)이 나타났다,
진주(秦州)거듭 사리를 얻었다,
위주(衛州)광명이 외부를 비추었다,
명주(洺州)이전부터 허리병을 앓아 걷지 못하던 스님이 사리가 온다는 말을 듣고는 일어나 10리를 마중나왔다,
진주(晋州)세 번 방광하였다,
회주(懷州)수꿩이 날아와 길들여졌고,
방광과 이적(異迹)이 있었다,
섬주(陝州)전후 열한 번 서상이 나타났다,
낙주(洛州)향기가 마치 바람이 부는 듯 하고 다시 광명이 뻗어났다,
정주(鄭州)깃발 안에서 방광하였다.
이것은 상권을 수록한 것으로,
송본(宋本)은 다른 두 본과는 크게 다르다.
송본의 착오를 검토하여 무릇 도선 율사 감통록의 제1권을 상권으로 삼을 따름이다.
이제 두 본에 의거하여 바로잡으니,
구 송판을 보는 자를 위하여 바로 잡은 내용도 함께 수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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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문은 肸嚮.
이본(송본)에 의거하여 힐(肸)을 혜(盻)로 바로잡는다.
2 아쇼카(Aśoka)왕의 재위시기를 알려주는 이러한 구절은 역사적인 붓다의 탄생시기를 정하는 유일한 기준이 된다.
통상 아쇼카왕의 재위는 본 서와 같이 북방에 전해진 제자료에서는 불멸후 100년이지만,
남방의 자료에 의하면 200년이다.
곧,
두 전승에서 약100여년의 차이가 나는데,
이는 곧바로 불탄일의 시기를 확정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친다.
3 부처님의 유골을 여덟 나라가 자져가 각기 탑을 일으킨 것을 말한다.
4 원문은 먼저 권1에 수록한 20가지 연기의 목록을 들고,
이어서 순서대로 그 내용을 기술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하,
본 역에서는 편의상 각각 해당 연기의 소제목으로 처리하기로 한다.
5 범어로는 kustana,
혹은 Kohtan.
6 원문은 구성(九域).
신수장경에 의거하여 역(域)을 성(城)으로 바로잡는다.
7 범어 Buddha 혹은 팔리어 thūpa의 음역어.
여기에서는 사리를 안치한 탑을 의미한다.
8 원문은 사적무몰(事迹無沒0.
신수장경에 의거하여 무(無)를 무(蕪)로 바로잡는다.
9 원문은 세존위령원유이진시(世尊威靈願有以津示).
신수장경에 의하면 이본은 진(津)을 생략하고 있다.
내용상 이본에 의거하여 번역한다.
10 무차회(無遮會)를 말한다.
주로 국왕이 시주가 되어 베풀며,
5년마다 베푼다 하여 오년법회(五年法會,
pañca vārṣika pariṣad)라고도 한다.
11 석륵(石勒)이 잠시 칭제(稱帝)하던 조(趙)나라 시대를 가리킨다.
12 원문은 반수(盤水).
신수장경에 의하면 이본에는 반내(盤內)로 되어 있다.
13 중국 고대의 궁직명(宮職名)으로 대재(大宰)에 해당한다.
14 원문은 如畵.
신수장경에 의하면 이본에는 여주(如晝)로 되어 있다.
15 원문은 상점(上漸).
점(漸) 원(圓)으로 바로잡는다.
16 원문은 낙도(洛都).
신수장역에 의하면 이본에는 낙주(洛州)로 되어 있다.
17 원문은 벌주(伐州).
신수장경에 의거하여 벌(伐)을 대(代)로 바로잡는다.
18 원문은 교비(郊比).
신수장경에 의거하여 비(比)를 북(北)으로 바로잡는다.
19 원문은 자감(自憾).
신수장경에 의거하여 감(憾)을 감(感)으로 바로잡는다.
20 원문은 부신(夫神).
신수장경에 의거하여 부(夫)를 천(天)으로 바로잡는다.
21 신수장경에 의하면 이본에는 법해(法欬)로 되어 있다.
22 원문의 의흥(義興)을 의희(義熙)로 바로잡는다.
23 원문은 도규(刀逵).
신수장경에 의거하여 도(刀)를 조(刁)로 바로잡는다.
○ [pt op tr]
◈Lab value 불기2564/01/06 |
한 순간에 죽을 수도 있다. 그것이 생사현실이다. 새삼 주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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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정보 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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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ed--집신주삼보감통록_K1069_T2106.txt ☞상권 sfd8--불교단상_2564_01.txt ☞◆vqvo6010 불기2564-01-06 θθ |
03fl--nirvana/ghgn-00510.htm
● 실현과정에서의 만족과 희망 -> 행복의 획득 방안
불기2563-01-06_대승기신론_001
http://buddhism007.tistory.com/5321
불기2562-01-06_금강정경유가수습비로자나삼마지법_001
http://buddhism007.tistory.com/38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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