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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2563-06-18_불설성불모반야바라밀다경_00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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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2563-06-18_불설성불모반야바라밀다경_001

진리와 가치를 고루고루 2019. 6. 18. 15:00



®


『불설성불모반야바라밀다경』
K1427
T0257

불설성불모반야바라밀다경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 [pt op tr] 불설성불모반야바라밀다경_K1427_T0257 핵심요약



♣1427-001♧
『불설성불모반야바라밀다경』

불설성불모반야바라밀다경



● 불설성불모반야바라밀다경(佛說聖佛母般若波羅蜜多經)

● 심신광명선설정법삼마지

● 행심반야바라밀다

● 반야바라밀다를 닦고 배우기

● 5 온이 공함

● 공한 실재와 5온 12처 18계 12 연기 4 성제 지 소득 무소득의 관계

● 반야바라밀다의 효용-무집착 무장애 무공포 무전도망상 니르바나증득 무상정등정각의 깨달음 성불

● 번뇌와 생사고통을 제도하는 반야바라밀다의 주문



○ [pt op tr]




● 일체가 공함의 의미 

『불설성불모반야바라밀다경』
은 불교를 믿는 이들이 일반적으로 자주 대하는 『반야바라밀다심경』의 다른 판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현장 스님이 번역한 『반야바라밀다심경』 (k0020)과는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액
이렇게 제시되는 부분에서 '도일체고액' 이런 표현부분이 없고
여러 부분이 다르지만, 
전체적인 취지는 마찬가지라고 본다. 

그런데 처음에 5온이 공하다라는 명제를 제시하는데 
이 표현이 무엇을 제시하고 
이것이 현실생활에 어떤 효용을 갖는 내용인가를 
잘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선 5 온은 현실에서 한 주체가 얻는 일체의 내용을 
이 5 가지 범주에 모두 포함시켜 놓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제시한다. 
일체는 5 온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런 의미다. 

예를 들어 5 온 가운데 색은 넓은 의미의 색으로서, 
눈으로 보는 색깔(좁은 의미의 색), 귀로 듣는 소리, 코로 맡는 냄새, 혀로 얻는 맛, 몸으로 얻는 촉감을 
포함해 감각해서 얻을 수 있는 감각현실 내용 전체를 가리킨다. 

좋고 나쁜 느낌은 수이고 
관념내용은 상이고 이런 식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얻는 그 일체를 5온으로 그처럼 분류했으면 
그런 5 온은 현실에서 각 주체가 얻는 내용으로서 그런 5 온인 것인데 
왜 엉뚱하게 공하다라고 제시하는가. 
이 부분을 우선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는 1 차적으로 이런 현실 내용의 본 바탕이 공하다라는 뜻이다. 

공하다는 것은 전혀 아무 것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에서 마음에 화합해 내용을 얻는 입장에서는 
그것을 직접 얻지 못하기에 
있다 없다. -와 같다 -와 다르다. 좋다 나쁘다, 깨끗하다 더럽다. 등등의 
모든 2 분법상의 분별을 행할 수 없고, 
그래서 언설로 표현할 길도 없기에 
아무 의미를 갖지 않는 '공'이란 표현을 통해서 나타내는 내용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얻는 5 온이 공하다라는 표현은 
현실에서 얻는 그 일체의 내용의 본 바탕인 실재는 그런 상태라고 1차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또 한편, 
이런 본 바탕인 실재와 현실 내용의 관계를 살피면 
현실 내용 자체는 그런 본 바탕인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이 아니다. 
또 본 바탕이 되는 실재는 현실에서 각 주체가 얻는 그러한 내용이 아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얻는 내용은 또 그런 본 바탕을 떠나 있는 것도 아니다. [ 불리]

사정이 이와 같기에 
현실에서 얻는 위 5 온과 같은 내용은 결국 
곧 공한 실재와 떨어져서 달리 있는 그 무엇이 아니고
또 공한 실재도 이와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 상태를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렇게 표현하게 된다. 


이는 마치 거울과 거울면에 비추인 모습의 관계를 살피는 것과 같다. 
거울면에 사과가 비추어 보인다고 할 때 
그 사과 그 부분이 거울면은 아니다. 
거울면도 그 사과모습은 아니다. 
그런데 그 사과모습은 거울면을 떠나 있는 것은 또 아니다. 
그래서 그 사과모습은 거울면과 다르다고 할 수 없고, 곧 거울면이다라고 관하게 된다. 

그런데 또 사정이 그렇다고 거울면이 그 사과 모습이라거나 
그런 사과모습이 들어 있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런 표현과 
그 뒤에 이어지는 공중 무색 무수상행식 
이런 표현들이 나타내고자 하는 관계나 그 상태를
서로 혼동을 일으키지 않고 
잘 이해해야 한다. 


 ● 일체가 공함의 효용을 적용하는 단계 

일체 즉 현실에서 얻는 5 온 그 일체가 공하다라는 내용을 살폈는데
정작 이런 내용이 현실에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불설성불모반야바라밀다경』 경전 뒷 부분에 이 내용이 잘 요약되어 제시되고 있다. 

무집착 무장애 무공포 무전도망상 니르바나증득 무상정등정각의 깨달음 성불
이런 내용들이 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왜 일체가 공하다라는 것이 
이런 내용들과 관계되는가 하는 사정은 
본 바탕인 실재의 내용을 ● 로 일단 표현하고 
어떤 주체가 현실에서 얻는 내용을 ▲ 로 표현해서 이해해보자.

●-○-▼-▽-▲

한 주체가 각 정신영역에서 얻는 서로 다른 내용을 ○-▼-▽-▲ 로 일단 표시해보았다. 


각 영역의 내용을 ▽-▲ 형태로 달리 표현한 것은 
다음 내용을 나타낸다. 

우선 눈으로 보는 색깔을 ▽ 라고 하면 
현실에서 얻는 소리는 ▽ 과는 전혀 엉뚱한 다른 내용이다. 
냄새도 마찬가지다. 
맛도 마찬가지다. 
촉감도 마찬가지다. 
좋고 나쁨의 느낌도 마찬가지다. 
▽ 부분을 영희나 철수라고 여기거나 자신이라고 여기거나 사과라고 여길 때 그런 관념도 마찬가지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실에서 한 주체가 얻는 각 영역의 내용들의 관계는 이미 이런 상태다. 
이런 각 영역의 상태를 우선 위처럼 나타낼 수 있다. 

그런데 한 주체가 명료하게 인식하지 못하지만, 
현실에서 기능하는 다른 정신영역에서 얻는 각 내용들간의 사정도 이와 마찬가지다. 

그리고 다시 그런 상태에서 이런 자신의 마음과의 관계를 떠나
본래 있는 그대로의 본 바탕의 상태[실재]는 어떤가를 찾으면
앞에서처럼 공하다라고 관하게 된다는 의미다.
그림에서 일단 본 바탕인 공한 실재를 ● 로 표시했다면
● 과 각 영역에서 얻는 내용의 관계는 
●-○-▼-▽-▲ 형태처럼 그 관계를 나타내게 된다.  


그런 가운데 감각현실 부분▽[색]과 본 바탕이 실재 ●를 놓고 그 관계를 살피면 
위에 제시한 것처럼 색불이공 공불이색....수상행식역부여시.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이런 형태로 제시할 수 있고 
그리고 그 본 바탕에는 현실에서 문제삼는 생멸이나 깨끗하고 더러움, 늘고 줆 
이런 내용 역시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게 된다. 




그런데 이것이 현실에 주는 의미가 무언가 하면 
현실 내용을 일반적으로 대단히 실답다고 여기지만, 
이는 마치 침대에서 누어 꾼 바다나 황금꿈과 같이 
그 본 사정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제시하는 내용이다. 

즉 자신은 ▽ 과 같은 감각현실을 얻고 그 부분이 ▲ 이라고 생각하고 임하지만, 
정작 본 바탕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이것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에서 얻는 이들 색-수-상-행-식 일체 내용은 
침대에서 누어서 얻는 바다나 황금꿈처럼 
본 바탕을 놓고 살피면
본 바탕에서는 얻을 수 없는 엉뚱한 내용을 각 영역에서 얻고 있는 것뿐이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현실에서 얻는 각 내용들간의 상호관계도 또 그와 같다. 

그래서 이 사정을 잘 관해서 현실이
마치 침대에서는 얻을 수 없는 바다나 황금을 꾼 꿈처럼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게 되고 
그래서 그것이 실답다고 여기지 않고,
그래서 그에 대해 갖던 집착을 제거하고
그리고 그런 잘못된 판단과 집착에 바탕해 업을 행하지 않게 되고,
그래서 그 업의 장애로 생사고통에 묶인 상태에서 벗어나게 된다. 



○ 공한 실재와 무유공포

한편 현실에서 
자신이 집착을 갖는 자신이나 생명 신체 이런 부분이 실답다고 여기면서 
그 부분이 훼손되면 마치 자신이 어떻게 되는 것처럼 여기면서 
매 순간 느끼는 감각이나 느낌을 바탕으로 
고통을 받고 생사를 겪는 그런 사태에 대해 공포를 갖게 된다. 
그런데 자신이 집착하고 있는 그런 내용이 
실답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면 
그로 인해 그런 망집에 바탕한 고통과 공포도 갖지 않게 된다. 

이 부분은 좀 더 보충할 필요가 있다. 
먼저 ●-○-▼-▽-▲ 관계를 잘 보자. 
 
자신이 대단히 집착하는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생명, 신체, 재산, 가족 등을 
▲ 이라고 해보자. 

여기서 그 일체가 공하고 실답지 않다는 내용은 
위 상태에서 ▲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또 본 바탕인 실재에 아무 내용이 전혀 없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 라고 자신이 분별하는 내용은 
●-○-▼-▽- 과 같은 그 각영역에서 얻을 수 없다는 의미다. 

그래서 현실에서 얻은 ▲의 성격이 침대에 누어 꾼 꿈과 같다는 의미다. 
즉, 침대도 있고 그 상태에서 생생하게 꾼 바다나 황금꿈을 꾸었지만, 
정작 그 꿈은 침대에서는 얻을 수 없는 엉뚱한 내용이다. 실답지 않은 내용이다. 
=> 그래서 비록 그 꿈이 생생하더라도 집착을 갖고 대하지 않는다. 
그리고 현실도 이와 같은 성격을 갖는다는 것을 제시한 것이다.

▲ 라는 내용이 그 영역에서 명료하게 일으키고 얻는 내용이지만,
정작 ●-○-▼-▽-과 같는 내용을 얻는 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는 엉뚱한 내용을 얻은 것이다. 


감각현실을 ▽ 이라고 표현하면
▽ 내용도 실재나 다른 영역과의 관계는 그 사정이 또 이와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외 나머지 각 영역의 내용도 사정이 다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런 내용을 얻지만, 
그 내용이 본 바탕을 비롯한 다른 영역에서 얻을 수 없는 그런 내용을 
얻고 있는 것이어서 꿈처럼 실답지 않다. 
따라서 집착을 갖고 대하지 않아야 한다. 
이런 뜻이다. 




그런데 이렇게 
지금까지 자신이 집착한 자신이나 생명 신체 이런 것이 본 바탕이 공하고 
실답지 않다고 제시하면 
이로 인해 자신이 평소 집착하고 대하던 것들이
이로 인해 다 없어지는 것으로 오해하여
오히려 공연히 불안해하기도 쉽다. 


다시 ●-○-▼-▽-▲ 관계를 잘 보자. 

▲이 실답지 않다는 것은 
▲ 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 아니다. 
▲ 을 ●-○-▼-▽ 영역들에서 얻지 못함을 제시한 것이다. 

그리고 전도된 망상분별이라는 것은 
사정이 위와 같은데도 
▲ 을 ●-○-▼-▽ 을 얻는 영역들에서 얻고 
더 나아가 그런 내용들에 ▲이 있고 
더 나아가 예를 들어 ▽라는 감각현실이 바로 그 ▲이다라거나  
또는 본 바탕이 실재●이 바로 그 ▲이다.
이런 식으로 여기고 대하는 그 부분이 문제다. 


현실에서 자신이 무엇인가.
또는 영희나 철수는 무엇인가 물으면
자신이 눈을 떠 대해 얻는 내용 가운데
일정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그 부분이 곧 그런 자신이다.
또는 저 부분은 영희다. 이런 식으로 대하는 그 자세가 문제다. 

더 나아가 본 바탕에 자신이 생각하거나 
감각한 그런 내용이 그처럼 그대로 있다. => 그래서 실답다. 
=> 그래서 집착을 갖고 대하고 그 바탕에서 업을 행해
=> 그런 전제에서 생사고통을 겪어 나가는 것이 문제다.





이제 현실의 구체적인 전도망상과 공포의 관계를 살피자. 

현실에서 감각현실 영역에서
예를 들어 눈을 떠 ▽ 내용을 얻고 
그런 부분이 자신 ▲ 이라고 여긴다고 해보자. 

그래서 ▽ 부분을 놓고 집착하고 있는데 
그처럼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하는 ▽ 부분이 폭발물의 폭발로 찢어져서 피가 흘르는 상태라고 가정해보자. 

한마디로 폭발사고로 큰 부상을 당하거나 죽음을 당하게 되는 상태다. 
사정이 이런데 왜 이것을 문제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이런 사태에 대해 공포를 갖지 않을 수 있다고 하는가 .

일반적인 입장에서 경전내용에 대해 갖는 의문은 이 부분이다. 
일체가 공하다는 것이 도대체 이런 상황에 무슨 의미와 효용을 주기에 
이 내용을 이해하면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고 
공포가 없고 전도망상을 멀리 떠난 상태가 된다고 제시하는가. 



이것을 다시 잘 살펴야 한다. 
앞에서 ▽ 과 ▲ 이런 기호로 나타낸 내용을 다시 잘 이해해보자. 

자신이 눈을 떠 자신의 손과 발을 바라볼 수 있다. 
또 거울을 이용하면 자신 얼굴도 볼 수 있다. 
이것이 일단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몸이라고 여기는 부분들이다. 

그런데 이런 부분이 찢어지고 피가 나면 대단한 고통을 느끼게 되는 한편 
죽을 수도 있기에 큰 일인데 왜 이것이 문제가 아니라고 하는가. 

위 내용을 놓고 잘 이해해보자. 


우선 ●-○-▼-▽-▲ 이 각 내용의 관계를 살펴보자. 
여기서 ● 은 마음을 떠난 본 바탕의 공한 실재를 표현한 것이다. 
나머지 것들은 한 주체가 각 마음 영역에서 얻는 내용들이다.

그래서 이런 내용을 얻는 각 마음영역을 일단 □ 로 표시해보자. 
그 마음에 아무 내용도 얻지 못한다면 다음처럼 위 내용을 다시 표시할 수 있다. 
● - □-□-□-□ 


가장 먼저 이런 상태에서 일으킨 전도망상을 제거하고 떠난 상태를 다시 놓고 보자. 

▽라는 감각현실을 얻고
그런 부분이 ▲ 라고 생각하고 대하는 상태가 망집상태다. 

여기서 이런 망집만 제거된 상태를 일단 생각해보자. 
이 망집이 제거된다고 해서 
우선 ▽-▲ 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앞 부분에서 이 내용을 설명했다. 
여기서 망집을 제거한다는 것은 각 마음 영역에서 ▽-▲ 과 같은 내용을 얻지만, 
다만 '▽을 ▲라고 여기는 그런 망집'만 제거된다는 의미다. 

현실에서 거울을 보고 거울에 비친 모습을 자신이라고 여긴다고 해보자. 
여기서 그런 생각을 갖지 않는다고 할 때 
그렇다고 거울에 비친 모습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렇게 여긴 그런 망상분별만 없어지는 것이다. 


다시 꿈을 놓고 비유해보자. 
어떤 이가 침대에서 바다꿈을 꾸고 깨고 나서 
침대가 바다인가라고 의문을 갖고 그렇게 생각하다가 
침대는 꿈에서 꾼 바다가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하자. 
그렇다고 침대가 없어진다거나, 꿈에서 바다꿈을 생생하게 꾼 일 자체가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침대를 대하며 그것이 꿈에서 꾼 바다라고 여기는 그런 잘못된 망집'만 없어지는 것이다. 



두번째 문제를 살펴보자. 

다시 꿈을 놓고 살펴보자. 
자면서 바다나 황금꿈을 꾸다가 꿈을 깨었다고 해보자. 
그래서 꿈속에서 대단히 좋다고 여긴 황금이 다 사라졌다. 
그렇다고 해서 그 꿈을 꾼 침대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또 비록 꿈에서 꾼 황금은 꿈을 깨면서 없어지지만, 
그 꿈 속에서 꾼 황금은 실다운 내용이 아니다. 
그래서 꿈속에서 황금을 얻었다해도 없던 황금이 생겨난 것도 아니고 
그런 꿈 속의 황금이 없어져도 어떤 있었던 황금이 없어진 것도 아니다. 
다만 실답지 않은 꿈 내용이 잠시 있다가 사라진 것 뿐이다. 


이제 현실에서 얻는 ●-○-▼-▽-▲ 내용을 놓고 다시 살펴보자. 

자신이 감각현실에서 얻는 ▽ 을 바라보는 가운데 
자신이나 영희나 사과라는 생각을 일으키다가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다고 해서 
그 상황에서 ▽ 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앞에서 살핀 망상분별과 약간 혼동을 일으킬 수 있다. 
관념영역에서 일으킨 망상분별이란, 
관념영역에서 일으킨 일체의 생각이 망상분별이란 의미가 아니다. 

관념을 일으키고 나서 
그 관념이 감각현실에 그처럼 '있다'
또는 그런 감각현실 일정부분이 그런 '관념'이다. 
이렇게 분별하는 그 부분부터이다. 

앞에서 영희나 자신이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자신이 그 상황에서 눈을 떠 대하는 일정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이 부분이 바로 나 자신이다. 
저 부분이 바로 영희다. 
이렇게 임하는 그 현상을 망상분별이라고 한다. 

그런데 현실에서 감각현실을 얻는 가운데 관념을 일으키면 
거의 대부분 그런 상태가 되는 것도 현실이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
예를 들어 '그런 감각현실 부분은 그런 관념이 아니다'라고 분별하면
그것은 망집상태는 아니다. 
또 그런 상황에서 '사과'라는 생각을 떠올리고 
자신이 대하는 감각현실영역에 그런 내용은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 분별내용은 앞에서 말한 망집현상과는 일단 관계가 없다. 

그런 경우는 분별내용은
비록 다른 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고,
다른 영역에는 없는 내용인 것이어서 실답지 않지만 
그러나 분별영역에서 일으키는 망집현상은 아니다. 

그런데 이와 달리 
자신이 얻은 감각현실 가운데 이 부분은 '나 자신의 몸'이다라고 여기거나, 
또는 자신이나 영희라는 분별 내용 ▲들이 감각현실 영역 ▽에 그처럼 그대로 있다.
또는 자신이나 영희라는 분별 내용 ▲들이 본 바탕인 실재 영역 ●에 그처럼 그대로 있다. 

그래서 그것은 실답다. 
이런 식으로 분별 영역에서 분별을 일으키는 것은 망상분별이다. 

그리고 이 경우에 그런 망집을 제거한다고 해서 
막연히 사과나 꽃을 떠올려 생각하는 그런 관념까지 같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또 반드시 없애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런 망집과 관련없는 관념은 비록 실다운 것은 아니지만, 일단 앞에서 말한 망집과는 무관하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처음의 망집과 
다시 다른 관념까지 모두 제거한다고 해도 
그 상황에서 얻는 감각현실은 일단 이와는 무관하게 계속 얻게 된다. 
이는 꿈을 깨도 침대는 그대로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관계가 ●-○-▼-▽-▲ 각 내용간에서도 다 이와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정신 영역에서 얻는 '○-▼-▽-▲' 부분을  다 제거한다고 해도 
본 바탕의 실재 ● 가 그로 인해 없어지거나 늘어나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또는 술이 만취하거나 사고로 의식을 잃어 감각현실이나 분별 내용을 얻지 못해도 
평소 기능하던 잠재적인 마음 영역에서 얻는 내용이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술에 만취해서 분별도 하지 못하고 감각을 하지 못해도 
호흡도 하고 심장도 뛰고 그런 활동을 하는 부분은 유지되는 것이다. 


이들 사정은 침대와 꿈의 비유를 놓고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처음 자신이 갖던 망집을 제거한다고 할 때 
사라지는 것은 그런 망집이 제거되고 
그리고 그런 망집에 바탕한 행하던 내용들을 제거해야 함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런 망집을 일으킨 재료자체가 없어지거나,
또 반드시 그런 재료까지 다 없애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런 어느 경우에도 
그로 인해 본 바탕인 실재●가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니다. 




세 번째 감각현실 부분을 놓고 또 살펴보자. 

감각현실을 ▽로 표시하고
이런 감각현실과 본 바탕인 실재 영역간의 관계를 살피면
앞에서 살핀 형태로 다 마찬가지로 살필 수 있다. 
눈을 떠서 ▽ 라는 모습을 보다가 눈을 감아서 그런 모습을 보지 못하게 된다고 해서 
본 바탕이 실재가 없어지거나 줄어들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역시 침대와 꿈의 비유를 놓고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 문제와는 별개로 다음 문제를 살피자. 

앞에서 본 바탕인 실재를 ● 로 표시하고 
한 주체의 각 마음 영역에서 일으켜 얻는 내용을 ○-▼-▽-▲ 형태로 표시했다. 
그런데 그런 내용을 얻는 마음은 
각 주체가 직접 보거나 만지지 못한다. 
그렇지만 일단 그런 마음을 □ 형태로 표현해서
다음과 같이 나타내보자.
● - □-□-□-□ 

 
이제 앞에서 살핀 감각현실 ▽이나 관념분별▲ 을 놓고 이 마음 □ 과의 관계를 살펴보자. 

현실에서 한 주체가 ▽ 이나 ▲ 내용을 일으켜 얻다가 
그것을 얻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고 해서 
그로 인해 그런 내용을 얻던 각 마음 □이 그로 인해 없어지는 것은 일단 아니다.
그래서 한 주체가 각 마음 영역에서 얻는 ○-▼-▽-▲과 같은 내용들이 
사라지고 없어진다고 해서 
그런 내용을 얻던 각 마음 - □-□-□-□ 들이 그로 인해 곧 없어지거나 줄거나 
하는 것이 아님을 우선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런 가운데 처음에 살폈던 문제를 또 살펴보자. 



처음에 눈을 떠서 모습을 보게 될 때 
그 가운데 일부를 자신이라고 생각을 한 것이다. 

눈을 뜬 가운데 무엇이 자신인가라고 물으면 
손가락으로 자신의 몸 부분을 가리키는 망집현상이다. 

여기서 처음 그런 망집을 제거한다고 해서 
그 전까지 자신의 몸이라고 본 부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또 그 상황에서 그런 감각현실 부분이 '자신'이나 '영희'라고 여기는 그 부분은 망집이지만,
그런 망집을 일으키게 한 그 감각현실이나 그 관념 자체가 망집인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영희'란 생각이 망집은 아니다. 
'자신'이나 '영희'란 생각은 다른 영역에서 얻을 수 없는 것으로서 실다운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런 관념이 이후 망집을 일으키는 재료가 되는 것도 현실이다. 
그러나 그 자체가 망집은 아니다. 
망집은 이런 분별을 일으킨 다음 
그런 내용이 아니고,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는 감각현실이나
본 바탕이 되는 실재 영역을 놓고
그런 부분이 그런 것이라고 여기며 대하는 그 부분부터가 망집이다. 
또 그것은 그런 내용이 그런 영역에 있기에 실답다라고 여기면서 
집착을 일으키고 그에 바탕해 이후 업을 행하게 하고 
그로 인해서 그런 바탕에서 무량하게 생사고통을 받아나가게 하기에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이 부분을 시정하기 위해서 
『불성성불모반야반야밀다경』 등에서 그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와 같은 상태에서
다시 눈까지 감아서 
그전까지 보던 모습을 보지 못한다고 해서 
그런 모습을 보던 마음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이 상태에서 앞의 문제를 놓고 살펴보자. 

망집을 일으켜 평소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하던 
자신의 몸 부분이 폭발물로 찢어지고 피가 흐르고 있다. 
지금까지 못 느꼈던 극심한 통증이 느껴진다. 
큰일났다. 자신은 곧 죽는다. 
이렇게 고통과 공포를 느끼는데 
이 상황에서 앞에 제시한 내용이 무슨 효용을 갖는가. 
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는가. 
이것을 앞의 내용을 놓고 잘 검토해야 한다. 


현실에서 평소 가장 집착을 갖고 대하는 부분이 
자신과 자신의 생명, 신체 이런 부분이고
이에 바탕해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한 집착을 갖게 되므로 
이 부분을 기본적으로 잘 살펴보기로 한다. 

감각현실에서 평소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하는 부분을 ▽ 라고 표시하고 
그리고 그 부분을 대해 자신이라고 생각하게 될 때 
그런 분별 내용을 ▲ 라고 표시해보자. 

앞에서 제시한 각 내용은 여기에서 기본적으로 다음사항들을 제시한다. 

평소 '▽ 과 같은 부분을 자신 ▲이라고 여기고' 대하지만, 
이 부분은 망상분별이다. 
정작 ▽ 부분에는 그런 분별 내용은 얻을 수 없다. 
그래서 그 망집을 제거하고
그런 망집에 바탕해 행하는 업을 중지해서
그런 바탕에서 겪는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여기서 그런 망집을 제거해도 
그로 인해 당장 망집을 일으킨 재료가 된 ▽ 과 ▲ 내용이 없어지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제 평소 자신이라고 여긴 부분인 ▽ 부분이
파괴되고 사라져도 그 상태에서 
그런 내용을 얻게 한 바탕이 되는 내용들로서 
앞에 표시한 본 바탕으로서 실재와 
각 영역에서 그런 내용을 얻게 한 마음 
● - □-□-□-□ 
부분이 당장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감각현실 영역에서 눈을 감아 당장 보던 ▽을 보지 못하게 된다고 해서 
그런 ▽ 를 얻던 마음 □ 이 그로 인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지금 자신이 스스로 자신으로 여기고 대하는 ▽ 부분은 
알고보면 갓난아이 시절부터 청년 장년 노년을 거쳐 
계속 그 형태와 내용이 변화하고 있다. 

이것을 글자로 표시하면
α,β,γ,δ,ε,ζ,η,θ,ι,κ,λ,μ,ν,ξ
이러한 형태로 변화해 가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순간 얻는 감각현실의 한 부분▽을 자신으로 여기면 
갓난아이때 α나 초등시절 때 β는 자신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 

그 신체 구성부분이나 형태가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갓난아이때부터 계속 변화해온 
α,β,γ,δ,ε,ζ,η,θ,ι,κ,λ,μ,ν,ξ 를 모두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하는 한편
또 이와 달리 그 당시나 지금이나
자신 옆에 있는 다른 갓난아이나
다른 초등학생이나 아이는 또 자신이 아니고
자신과는 다른 이들이라고 여기는 것은 그런 사정 때문이 아니다. 
그래서 이런 측면에서도
지금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하는 ▽ 부분을 자신 ▲ 이라고 여기며 대하는 것은
잘못된 망상분별이다. 

▽ 라는 감각현실 부분은  ▲ 라는 관념분별이 아니고
▲ 라는 관념분별은 ▽ 라는 감각현실 부분이 아니고 
▲ 라는 관념분별은 ▽ 라는 감각현실 부분에서 얻을 수 없는 것이므로 
엉터리 망상분별이기도 하지만, 

또한 앞과 같은 사정때문에 
▽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무언가 현실에서 이처럼 각 활동을 하고 내용을 얻고
그러면서 매 순간  
α,β,γ,δ,ε,ζ,η,θ,ι,κ,λ,μ,ν,ξ 형태로 모습을 변화해온 가운데 
이들 모든 내용을 행하는 자신이라고 여길 내용은 
▽ 과 같은 부분이 아니고 
'차라리' 그런 내용을 계속해서 얻게 하는 
● - □-□-□-□ 과 같은 부분에서 찾아야 한다고 
보게 된다. 

이런 내용이 처음 『수능엄경』 등에서 제시되는 내용이기도 하다. 

아이때부터 점차 모습이 변화해 늙어가고 죽음을 맞이하고 
자신의 몸은 없어지지만, 
그 각 상황마다 일정하게 유지되고
그래서 이들 각 내용을 모두 자신의 일로 여기게끔 하는 것이
따로 있다는 의미다. 

그래서 현실에서 각 영역의 내용을 얻게 하는 
마음을 □-□-□-□ 이런 형태로 표시하면 
감각현실을 얻는 마음□ 은 
자신의 몸이 어릴 때부터 α,β,γ,δ,ε,ζ,η,θ,ι,κ,λ,μ,ν,ξ 로 형태로 변화하지만, 
적어도 그 1 생의 기간 동안은 일정하게 유지된다. 
비록 그 마음을 마음이 직접 보지 못하고 만지지 못해도 그렇다는 뜻이다. 

그리고 표면에서 활동하지는 않지만,
늘 활동하는 다른 근본정신과 제 7 식등의 사정도 이와 마찬가지다. 

그런 가운데 생사과정을 넘어서 근본정신을 통해 이런 생사가 이어지게 된다. 

그래서 α,β,γ,δ,ε,ζ,η,θ,ι,κ,λ,μ,ν,ξ 형태로 변화하는 가운데 
지금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하는 ▽ 부분을 자신으로 여기기 보다는 
차라리 매 순간 그런 내용을 얻게 하는 □-□-□-□ 과 같은 
마음을 차라리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하고
각 순간마다 스스로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하는 α,β,γ,δ,ε,ζ,η,θ,ι,κ,λ,μ,ν,ξ ▽과 같은 내용은 
그런 마음이 매 순간 걸치고 활동하는 옷과 같은 것으로 여기는 것이 낫다. 

그래서 앞의 처음 문제에서 
지금 자신이라고 보는 ▽ 부분에 폭발물이 터져 몸이 찢겨지고 
피가 흐르고 머지 않아 죽게 된다고 여기는 그 상태에서도 
□-□-□-□ 이런 마음과 특히 생사과정을 통해 이어지는 
근본마음은 그로 인해 없어지는 것은 아님을 일단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을 ▲ 이라고 여기는 망집을 제거한다고 해서
그런 망집을 일으킨 재료 ▽ ▲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또 각 영역에서 ▽ ▲ 과 같은 내용들이 없어진다고 해서 
그런 내용을 얻게한  □-□-□-□ 마음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런 모든 변화에도 불구하고 
본 바탕인 실재 ● 는 더더욱 그 사정이 그렇다. 

그래서 이런 사정을 짧게 요약해서 
경전에서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이렇게 나타내는 것이다. 

현실에서 한 주체가 ▽ 을 얻는 영역에서 
그런 내용이 들고 나고 하는 것을 놓고 
거기에 생멸이 있다고 관념분별 ▲을 일으켜 생멸이 있다, 
더럽고 깨끗함이 있다. 무엇이 늘고 줆이 있다. 
이렇게 분별을 행하지만, 
정작 그 분별 내용은 ▽ 을 얻는 영역에는 얻을 수 없는 내용이다. 
그리고 이런 모든 내용을 얻게 한 본 바탕인 실재 ●에서도
그 사정이 마찬가지다. 

이것을 먼저 잘 확인해야 한다. 

정리해보기로 하자. 

- ▽을 ▲라고 여긴 망집을 제거해도 그로 인해 당장  망집을 일으킨 재료 ▽ ▲ 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 ▲ 을 제거해도 그로 인해 당장 ▽ 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 ▽ 과 같은 감각현실을 예를 들어 눈을 감아 보지 못해도  그로 인해 그 내용을 얻는 마음 □ 이 당장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니다. 
- ▽ 과 같은 부분이 당장 찢겨지고 피가 흘러 지금 당장 극심한 통증을 느끼고 머지 않아 죽게된다고 해도 
그로 인해 생사를 통해 유지되는 근본 마음 □ 이 없어지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 그리고 이런 각 관계는 각 영역에서 같은 형태로 제시할 수 있다. 
- 그리고 이들 각 내용은 실재 영역● 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 등의 내용을 얻거나 못 얻거나 
실재 영역에서 어떤 생멸이나 더럽고 깨끗함이나 늘고 줆은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생사현실에서 겪는 생사고통이나 공포는 
그런 망집에 바탕해 겪는 것이고 
그런 망집을 벗어나면 그런 내용 자체를 얻을 수 없다는 뜻이다. 


다만 앞에서 본 바탕인 실재를 ●로 표시하고
각 마음 영역에서 얻는 내용을 ○-▼-▽-▲ 표시하고
또 그런 내용을 얻게 하는 마음을 □-□-□-□ 로 표시해서 살필 때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마음을 이처럼 시설하고 
그리고 이들 마음을 근본정신인 제8식과 
이를 바탕으로 매 생마다 파생 분화되는 제 7 말나식 - 감각을 담당하는 1,2,3,4,5식 - 분별을 담당하는 제 6 식 
이렇게 나누어 살피고 
본 바탕이되는 실재 ●와 이들 마음의 관계및 
더 나아가 실재 ● 와 각 영역에서 얻는 내용 ○-▼-▽-▲ 의 상호관계, 
그리고 마음과 이들 각 영역에서 얻는 내용의 관계 등을 살피는 것은 
마음과 관련해서 조금 더 세밀하게 살펴나갈 주제이기도 하다. 

일단 여기서는 이 정도로 압축해 제시하고 
상세한 내용은 관련된 부분으로 넘기고
아래에서는 앞과 같은 기본적이고 원칙적인 내용을
바탕으로 생사현실에서 어떻게 임해 생사고통을 벗어나게 되는가에 대해
살피기로 한다. 


특히 주의할 점은 위와 같은 내용을 통해 근본 마음인 제 8 식만은 
자신의 실다운 정체라고 오해하고
그 이전에 ▽ 부분을 붙들고 일으킨 망상분별과 집착을 여기로 옮겨오면 곤란하다. 
실다운 자신의 본 정체라고 할 것은 아니지만,
무량겁에 걸쳐 그런 형태로 생사과정을 이어나가게 됨을 제시한 것이다. 

그리고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하고 수행을 통해 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면 
그런 형태로 무량겁에 걸쳐 생사고통을 받아나가게 됨을 제시한 것이다. 
따라서 처음 일반적인 입장에서 ▽과 같은 감각현실의 일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길 바에는 
'차라리' 그런 감각현실 등을 얻는 각 마음 □-□-□-□ 을 자신이라고 보는 것이 낫다고 한 것이다. 
즉, ▽과 같은 부분을 일정한 사정때문에 자신▲ 이라고 관념분별한다면 
'차라리' □-□-□-□ 과 같은 부분이 그런 분별에 좀 더 적절하다고 제시한 것이다. 
이는 ▽과 같은 감각현실 부분은 참된 자신의 본 정체는 아니지만, 

이들 각 내용을 현실에서 얻는 각 마음 □-□-□-□ 은 참된 자신의 본 정체라고 제시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 점을 함께 주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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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문제를 살피는 방안의 골격
http://buddhism007.tistory.com/5156#050
sfed--불설사미증유법경_K0748_T0136.txt
sfd8--불교단상_2562_10.txt ☞○마음의 문제를 살피는 방안의 골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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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현상에 대한 논의 - 전체 내용
http://buddhism007.tistory.com/4053
dict-list--editing_text.TXT
dict-list--editing_text.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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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ct-list--editing_text.TXT
출처: http://buddhism007.tistory.com/entry/마음-현상의-이해#gsc.tab=0 [불교진리와실천]
○ 마음현상에 대한 논의 - 전체 내용






● 일체의 공함과 수행에서의 견고감인력 


평소 자신이 눈을 떠 무언가를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하는 현실 상황에서 
이들 5 온 일체가 모두 공하다라고 제시하는 내용이 
왜 현실에서 그런 자신과 관련해 갖게 되는 온갖 고통과 공포를 제거해주는 내용이 되는가를 
앞에서 살폈다. 

가장 쉽게 오해를 일으키는 점은 다음이다. 
평소 자신이라고 여기는 것을 놓고 집착하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이런 일체가 공하다면 
그로 인해서 집착하던 것이 다 실답지 않고 없다는 것인데 
오히려 이것은 더 큰 일 아닌가. 
그런데 왜 이것이 생사고통과 공포를 제거해준다는 것인가. 
이렇게 의아하게 여기기 쉽다. 

그래서 그 사정을 위와 같이 간단히 먼저 살폈다. 

현실에서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하는 부분▽이
설령 찢겨지고 피가 흐르는 상태가 아니고 그 상태 그대로 있다고 해도 
그것은 별로 실답지 않고,
그래서 집착을 가질 내용 자체가 아니다. 

이 사정을 먼저 꿈을 통해 이해해보자. 

꿈에서 황금을 얻었다. 그래서 대단히 집착하고 좋아했다.
그리고 꿈속에서 끝내 그 황금을 누구에게 빼앗기지도 않고 잃지도 않았다. 
이 상황을 놓고 이해해보자. 

설령 그렇다고 해도 꿈에서 얻는 황금은 실다운 내용이 아니다. 
그로 인해 없던 황금을 실답게 얻는 것이 아니다. 
꿈이 실답지 않다는 것은 
그런 꿈 내용은 그런 조건에서만 잠시 일시적으로 얻는 내용이고 
또 꿈 밖의 다른 영역 즉 현실의 침대에서는 그런 내용 자체를 얻을 수 없고, 
꿈 속의 황금은 무게도 갖지 않고 여러 모습과 성품을 결여한 가짜의 내용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 성격이 
현실에서 자신이 집착을 갖고 대하는 그 일체에 적용된다. 
그래서 현실이 실답지 않다고 제시한다. 
현실에서 가장 집착을 갖고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하는 그 각 부분도
그 사정이 다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지금 어디론가 가자고 하면 따라 움직이고, 
다른 벽이나 사물과 달리 촉감을 얻고
그런 사정들로 평소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집착을 갖도 대하지만,
이런 부분이 모두 위와 같은 성격을 갖는다.

그리고 알고 보면 그 내용은 
갓난아이때부터 노년이 되고 죽기 직전까지 쉼없이
그 정신적인 내용이나 육체적 내용이 다 함께 변화한다. 
앞에서 그 사정을 α,β,γ,δ,ε,ζ,η,θ,ι,κ,λ,μ,ν,ξ 형태로 표시했다. 

그래서 초등학교시절 때 그 순간에 자신이라고 본 내용이 
정말 자신이라면 지금 순간은 그런 내용은 이미 세상에 없고 
어떻게 보면 죽어서 매장된 상태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매 순간 그런 내용을 그처럼 집착하고 대하지만 사정이 그렇다. 
더욱이 그런 내용은 감각현실이던 관념분별이던 
본 바탕에서 일체 얻을 수 없는 엉뚱한 내용이다. 
이런 사정을 기본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그래서 다시 자신이 현실에서 집착하는 자신을 놓고
꿈에서 얻은 황금을 놓고 그 사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 
설령 꿈에서 끝내 황금을 잃지 않고 그대로 유지해도 별 볼일 없는 실답지 않다. 
그리고 현실에서 집착하고 대하는 그 내용 일체가 이와 같다. 
그것이 그 본바탕이 공하다라는 내용이 제시하는 내용이다. 
그래서 현실의 본 사정이 그런 줄 알고 그에 대해 갖던 집착을 제거해야 한다. 
더 나아가 그런 내용이 실답다고 여긴 망상분별을 제거하고 
그에 바탕해 행하여서, 그런 전제에서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받게 하는 업을 중지해야 한다. 
그래야 그런 전제에서 받던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난다. 



또 반대 경우를 생각해보자. 
꿈에서 그렇게 황금을 얻고 좋다고 집착했는데 꿈에서 어느 순간 
해적이 나타나서 다 빼앗아갔다고 해보자.
이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얻은 황금이 실다운 황금도 아니지만, 
그것을 잃은 경우에도 무언가 실다운 것이 있다가 없게 된 것이 아니다. 

그리고 현실에서 집착을 갖고 대하는 자신이나 자신의 생명 신체를 비롯해 
그 일체가 다 이런 꿈속의 황금과 그 사정이 같다. 
그것이 5 온 즉 현실에서 얻는 일체가 공하다라고 제시하는 내용이다. 

그래서 이 사정을 깊은 반야바라밀다 지혜로 잘 관하고 임하면 
앞과 같이 그런 내용이 실다운 무엇이라고 망상분별을 일으키며 
집착을 갖는 가운데 그런 내용을 좋아하고 잃으면 고통받고
또 잃을까봐 공포를 갖고 대하는 그런 상태에서 모두 벗어나게 된다. 
이것이 경전에서 제시하는 기본 내용이다. 
그리고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는 원칙적 방안이기도 하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이 원칙을 곧바로 적용하기 힘든 사정이 있다. 

그래서 위 내용을 통해 현실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고 
집착을 제거하더라도 다시 주의할 부분이 있다. 
그리고 이런 현실 사정이 비록 앞과 같은 내용을 이해하더라도
다시 이런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수행자가 현실에서 수행에 정진해야 하는 사정이 된다. 

그래서 자칫 앞에 제시한 내용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이 부분을 잘못 오해하고 임하면 
결국 악취공견을 취해서 사정이 그러므로 현실에서
아무렇게 임해도 되는 것으로 오해하고 함부로 업을 행해서 
오히려 이전보다 생사고통을 더 극심하게 받아나가는 상태로 증상이 악화되기 쉽다. 


그래서 이 뒷 부분을 또 이어살피기로 한다. 


우선 현실에서 집착을 갖고 대하는 것을 포함해 현실 일체가 공하고 
실답지 않다. => 그래서 집착을 갖고 대하지 않아야 한다. 
이 내용이 원칙적인 내용이다. 

그래서 이런 기본적이고 원칙적 내용은 
결국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겪는 상태에서도 
잘 극복하고 감내해 견디면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내용이 된다. 
쉽게 말하면 죽을 것 같은 극심한 고통을 겪는 매 상황에서 
수행자가 물러나지 않고 이를 잘 견디고 벗어나게 하는 
용기와 배짱 즉 견고한 감인력을 갖게 해주는 원칙적 내용이 된다. 
원칙 자체는 그렇다. 

그런데 현실 사정상 이 원칙적 내용이 
곧바로 적용되지 않는 사정이 따로 있다. 

그것은 앞에서 아무리 현실 일체가 공하고
따라서 꿈처럼 실답지 않고 
집착을 갖지 않아야 함을 제시하지만, 
그러나 현실은 정작 꿈이 아니어서 
꿈과는 달리 대단히 실답게 여기게끔 되고
그래서 망집에서 벗어나기 힘들게 되는 사정이 있다. 

예를 들어 현실은 비록 위와 같은 사정으로 하나하나가 실답지 않지만, 
그러나 다수 주체가 일정한 시간과 공간과 일정한 조건 상황에서 
일정한 관계로 그 내용을 무량겁에 걸쳐 번뇌-업-생사고통의 관계를 반복해 나가게 된다. 

예를 들어 자신이 책상쪽으로 움직이고자 하면  
평소 자신이라고 여긴 부분만 따로 떼어져 책상쪽으로 움직여가고 
그 상태에서 사과를 책상 위에 올려 놓으면 사과만 떼어져 옮겨지고 
그 사과는 비록 영원한 것은 아니더라도 
그 다음날 책상을 가보면 대부분 그대로 있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자신이 손을 내밀어 그 사과를 붙잡으면 그 순간 사과의 촉감을 느끼고 
다시 그 사과를 영희에게 건네면 영희도 그 순간 촉감을 느끼면서 그 사과를 받게 되고
영희의 입장도 자신과 마찬가지임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사과를 굴리면 매번 사과는 굴러가고
그 각 순간에 자신이나 영희나 사과라고 본 부분들이 

그처럼 화면에서 따로 떼어져 그처럼 움직이고 할동하면서 
관계를 형성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이것이 현실이 꿈처럼 실답지 않지만, 
정작 현실은 꿈이 아니고 꿈과 다르다고 보게 하는 특성이다. 
이는 마치 게임기에서 일정화면이 매 게임시마다 게임을 하는 다수에게 
유사한 형태로 반복되는 것과 유사하다. 
그래서 사정이 이렇다해도 그 하나하나가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고,
그렇게 여겨지는 그 배경사정까지 잘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대부분 위와 같은 사정으로
현실은 꿈과는 달리 대단히 생생하고 실답다고 여기면서 대하게끔 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대단히 극심한 고통을 겪어 나가는 것이 생사현실의 문제다. 

그래서 앞과 같은 내용만으로 
이런 생사현실이 실답지 않음을 바로 이해하고 그것만으로 
생사현실에서 겪는 생사고통을 곧바로 벗어날 수 있다면 
생사고통을 벗어날 수행이란, 
위와 같은 내용을 잘 이해하고 
그 원칙에 따라 임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현실 중생의 사정이 전혀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비록 꿈처럼 실답지 않지만, 
그러나 대단히 생생하고 실답게 현실을 대하게 되는 그 정도만큼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겪게 되는 생사고통의 정도만큼 
이에 비례해 이를 벗어날 수행이 필요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수행은 
수행자가 개인적 차원에서 생사고통을 벗어나기 위해서도 필요하고, 
또 한편, 그런 수행자가 생사현실에 임해 
다른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즉 이 어느 경우나 생사현실에 임해 수행할 때는 
생사고통을 미리 예방하고 방지하는 수행 내용이 공통적으로 필요하게 된다. 

그래서 수행자가 이런 기본적 수행을 원만히 성취하여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 니르바나 해탈을 얻고 
다시 중생제도를 위해 복덕자량과 지혜자량을 구족해서 
종국적으로 무상정등정각의 깨달음을 얻어 성불하는 과정에서
처음에 제시한 원칙적 내용을 잘 이해하는 것이
그 전제로서 기본적으로 필요하게 된다. 




[img2-49] [그림] - 이하 아래 부분은 현재 [작성, / 표현교정, 수정, 보완/ 문단 재배치 순서 정리 등 ] 작업중입니다. -

작업 시점 2563_0619_180603



○ 니르바나 해탈과 복덕 지혜구족에 있어서 공의 효용


앞에서 경전에서 제시하는 원칙적인 내용을 보았다. 


현실에서 극심한 생사고통을 겪는 상황은 
그 자체가 망집에 바탕해서 실답지 않는 내용을 붙들고 
그런 생사고통을 겪는다. 

그런데 그런 생사고통은 또 한편 
그 이전에 그런 망집에 바탕해서 그런 생사고통을 겪게 하는 
업을 행해서 그런 상태에 처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이 실답지 않고 집착을 갖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적인 내용만 잘 이해하여  
현실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고통을 벗어날 수 있다면 
개인적인 측면에서는 그런 망집에 바탕해 행하던 업을 중지하고 
수행을 해서 그런 생사고통을 받지 않도록 예방할 필요도 원칙적으로 없다고 볼 수도 있다. 

이 사정을 쉽게 이해해보자. 
지금 자신의 다리에 도끼가 찍혀서 발이 잘려지고 
피가 솓구쳐 흐르고 있어서 
대단히 고통스럽고 이대로 있으면 곧 죽을 것 같고
대단히 공포스럽기도 하다. 
이런 상황을 가정해보자. 

앞에서 현실 일체가 공하고 실답지 않음은 
이런 현실 역시도 사정이 그렇다고 제시한 것이다. 
그래서 이런 원칙적 내용만으로 위 상황을 평안하게 잘 임할 수 있고
일반적으로 고통을 극복할 수 있다면 
원칙적 내용만 잘 이해하고 실천하면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대부분 수행자를 비롯해 일반적인 현실 사정이 그렇지 못하다.
그리고 이것이 구체적인 생사현실 문제다. 

그런데 위 상황을 잘 살펴보면 
그런 고통을 겪기 이전에 그런 결과를 만들어낸 원인이 있다. 
예를 들어 자신이 그 직전에 도끼를 들고가다가 
잘못해서 도끼를 떨어뜨렸다거나 
나무인 줄 알고 도끼로 찍었는데 알고보니 
자신이 발이었다는 경우도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결국 이런 생사고통에 처하게 되는 원인이
경전에서 제시하는 업이다. 
그 업을 행하는 상황 일체도 역시 원칙적으로 실답지 않지만,
여하튼 현실에서는 그런 바탕에서 업을 행하고
그 결과로 위와 같이 극심한 고통을 받는 상태에 처하게 된다. 


그래서 그런 경우 가운데
업을 행하자 마자 그런 생사고통을 바로 받게 되는 위 사례를 놓고 생각해보자. 

만일 어떤 이가 앞에 처음 제시한 원칙적인 내용만으로 
도끼에 발이 잘려나가 피가 솓구치고 극심한 통증을 겪는 상황에서도 
그것 일체가 실답지 않음을 관하고 그 상황을 평안하게 잘 임해서 극복할 수 있다면 
미리 그 이전에 일정한 망집을 바탕으로 이런 업을 행하면 안 된다고 하거나, 
그런 업은 중지하고 대신 이런 수행을 해야 한다는 내용 자체를
제시할 필요성도 그다지 없다고 봐야 한다.  
왜냐하면 설령 도끼로 잘못 자신의 발을 찍어서 그런 사태에 처해도 
위 원칙적 내용만으로도 곧바로 고통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현실사정이 그런가가 문제다. 
현실사정이 그와 같다면, 설령 도끼로 찍어 매번 피가 난다고 해도 
그런 성격의 업을 쉬지 않고 쉼업이 도끼를 들어서
자신의 등도 찍고 손도 찍고 계속 해도 무방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현실 사정이 그렇지 않은 것이 생사현실의 구체적 문제다. 
그런데 원칙적인 내용만 계속 강조해 제시하면 
이 모든 경우를 그 원칙만으로 다 해결하고 벗어날 수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 쉽다. 
그런 가운데 이런 원칙적 내용이 제시되는 취지를 잘못 오해하고 
사정이 그러므로, 생사현실에서 아무렇게 행해도 무방하다. 
심지어 그렇게 피를 흘리고 고통스러워하는 상태에서도 
일체가 공하니 아무 치료를 행하지 않고 있어도 다 괜찮고 무방하다. 
또는 그런 상황에서도 일체가 공하고 실답지 않음만 이해하면 
그것으로 그 상황의 문제가 곧 다 해결되고 벗어날 수 있다. 
이렇게 잘못 여기고 임하면 대단히 곤란하게 된다. 

일반적인 현실 사정이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칙은 원칙이지만, 
일반적으로 현실을 실답다고 여기면서 임하게 되는 그 정도만큼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되는 그 정도에 비례해서 
이를 극복하고 또 한편 그런 고통에 처하는 상태를 미리 예방할
수행방안이 필요하게 된다. 

한편 개인적인 측면을 떠나 중생제도를 행하는 입장에서는 
더더욱 사정이 심하다. 

예를 들어 자신은 설령 수행 정진을 통해 그런 원칙적인 방안만으로도 
그런 극심한 생사고통을 극복할 수 있게 되었다고 가정해도 
그 생사현실에서 다른 중생을 이끌어 생사고통을 벗어나게 하려면 
역시 앞에 제시한 수행방안이 또 마찬가지로 필요하다. 
왜냐하면 중생제도 과정에서는  
단순히 수행자 혼자만 수행을 통해 그런 생사고통을 벗어나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고 
중생의 상태에 눈높이를 맞추어서 그 중생을 이끌어 생사에서 벗어나게 하려면 
그에 상당한 복덕자량과 방편 및 지혜 자량을 구족하는 것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자신은 일체 고통을 원칙에 따라 벗어났다고 가정해도 
중생의 입장에서 그 수행자를 대할 때 
그 수행자부터 치유하기 힘들고 전염성은 대단히 강한 질병에 걸려 있다거나, 
그 수행자부터 자신의 생계조차 해결하지 못할 정도로 극도로 가난한 상태라거나,
또 그 수행자부터 생사현실에서 망집에 바탕해 일으키는 온갖 문제 해결이나
소원 성취에 필요한 방편지혜를 하나도 갖추지 못하여서 
그런 중생의 소원 성취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상태라거나, 
또 수행자 자신부터 그 외모나 신상 자체가 보기만 해도 혐오감을 일으킬 정도여서 
가까이 다가가는 것조차 공포스럽다거나, 
아니면 아예 그 수행자가 평소 일체가 다 차별없이 공하다고 하여
사회 규범을 어기면서 아무렇게 행해서 구속을 담해 감옥에서 지내고 있다거나, 
또는 자신부터 다른 이에 붙잡혀 노예의 상태로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 있다면,
그런 상태에서 다른 중생을 이끌어 생사고통을 벗어나도록 이끄는 것을 
기대하기 힘들게 된다. 

그래서 생사현실에서 수행자가 임해 다른 중생을 제도하려면 
먼저 그 수행자부터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풀려나 있어야 하고
또 신상과 위의도 구족하고,
그런 가운데 다른 중생이 망집에 바탕해 집착하는 소원들도
중생제도의 방편상 각 상황에 맞추어 적절히 잘 성취시켜 줄 방편 지혜도 함께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생사현실 일체가 비록 실답지 않다고 하지만, 
그 생사현실 안에서 위와 같은 복덕과 지혜자량을
구조할 수 있는 수행을 원만히 성취하는 것이 그 전제로 요구된다.
그리고 그 방안이란 결국 처음 수행자가 업의 장애를 제거하는 수행방안
즉 계의 덕목을 잘 성취하는 내용이 된다. 


그래서 수행자 개인 측면에서 그 자신이 생사고통을 벗어나기 위해서건,
아니면 생사현실에 들어가서 중생제도를 위해서건, 
처음 제시한 원칙적 내용을 잘 이해하는 한편, 
그 바탕에서 다시 성취해야 할 수행방안들이 또 필요하게 된다. 

그런데 결국 이런 수행을 원만하게 잘 성취하려면
결국 앞과 같은 원칙적 내용이 공통적으로 그 전제로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그런 원칙적 내용이 어느 경우에나 바탕으로 필요하지만,
그러나 생사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오로지 그것만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고
그런 바탕에서 다시 기본적인 수행을 정진해 원만히 성취하는 것이
필요함을 제시하게 된다. 

이것이 실재의 공함이란 내용이
결국 수행자가 개인적인 측면에서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 니르바나 해탈을 증득하는 부분이고 
또 중생제도를 위해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구족해서 
끝내 무상정등정각을 성취하는 내용과 관련되는 부분이다. 



● 일체가 공함과 악취공견의 문제


일체가 공하여 실답지 않다는 원칙적 내용만 적용하면, 
모든 생사고통을 겪는 상황에서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하고
생사고통의 묶임을 바로 벗어날 수 있어야 하는데 
현실 사정이 그렇지 못함을 보았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바로 그런 사정이 
위와 같은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생사현실에서 
수행을 원만히 잘 성취해내야 할 필요성이다. 

그런데 일체가 공하다는 원칙만 강조하다보면 
잘못 이 내용이 갖는 의미를 오해해서 
악취 공견의 입장을 취하기도 쉽다. 

그래서 일체가 공한 것이므로 
생사고통을 겪거나 말거나 그 상태로 그대로 아무렇지도 않고 무방하다. 
이렇게 오해하면 안 된다. 

또 어차피 일체가 차별없이 공하므로 
심지어 망집에 바탕해 극심하게 함부로 악행을 하거나 않거나 다 무방하고 
또 실재가 공함을 이해하고 망집을 끊거나 이해하지 못하여 끊지 않거나간에 차별없이 무방하고, 
또 그런 망집을 일으켜 업을 행하던 행하지 않던 
또 망집에 바탕한 업을 끊고 수행을 하던 하지 않던 무방하고 
수행을 하더라도 무언가 이를 통해 얻을 바가 있다고 집착을 갖고 수행을 하던, 
얻을바가 없음[무소득]을 방편으로 집착을 제거하고 수행을 하던 다 무방하다는 식으로
현실을 대하기 쉽다. 

왜냐하면 일체가 차별없이 공하다는 그 측면은 
이론상 위 내용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고 
그렇게 차별없이 공한 실재의 측면에서는 
이런 내용을 처음부터 문제삼지도 않고 
무언가를 행하거나 행하지 말라고 요구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정은 본래 일체가 다 차별없이 공하고
실답지 않다고 하지만,
그런 바탕에서 생사현실에서는
극심한 고통을 무량겁에 걸쳐서 반복해 받아나가는 것이 문제다. 

그리고 그 생사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 
그 생사고통을 놓고 그 정체와 그 발생원인을 살피다보니, 
본 바탕이 공하여 실답지 않은데도 
그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망집을 일으킨 다음 
그런 바탕에서 업을 행하면 그런 생사고통을 받게 되는 상황에 처하고 
또 그런 망집 상태에서는 대단히 생생하고 실답게 여기면서 
그런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장구히 반복해 받아나간다는 것이 생사현실의 문제점인 것이다. 

그래서 이 생사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현실적 사정으로 생사현실이 비록 대단히 실답게 여겨지지만, 
그 본 바탕이 되는 실재는 공하여서 
그런 생사현실이 실답지 않음을 '관하고 이해하는 것'이 요구된 것이다. 

즉 그냥 본 바탕이 공하여 실답지 않기에 
그것만으로 생사고통이 아무 문제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런 사정을 이해해서 생사현실에 대해 집착을 갖지 않아야 하고 
다시 그런 망집에 바탕한 업을 끊고 중지해야 
그런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에 반복해 처하지 않게 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이 부분을 혼동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다시 요약하면, 
생사고통을 받는 그 상황도 다른 상황과 마찬가지로 
그 본 바탕인 실재는 차별없이 공하고 실답지 않다. 
그리고 그 본 바탕에서는 그런 것을 문제삼지도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사정이 그렇지만,
그런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망집을 일으켜 현실을 대하면 
현실이 공하고 실답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망집을 바탕으로 그처럼 실답지 않은 현실을 재료로 
극심한 생사고통을 대단히 '생생하고 실답게 여기면서' 받아나간다는 이 부분이 문제다. 

그래서 그렇게 망집에 바탕해 생사고통을 받는 그 생사현실안에서
그 생사현실이 실답지 않음을 '관하고 이해하여' 
그 바탕에서 그 생사현실을 대하는 노력이 요구된 것이다. 

그래서 그런 사정을 그처럼 이해하거나 이해하지 못하거나
그 일체가 다 차별없이 본래 공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사현실에서 그 본 사정대로 그 사정을 잘 '관하고 이해하는가' 못하는가가 
생사고통을 해결함에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즉, '일체가 공하다는 객관적 사실 자체'와 
다시 주관적으로 그런 사정을 이해하고 현실에 갖는 집착을 제거함은 
그런 사정 때문에 생사현실 안에서 다른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과정에서 일체가 공함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게 요구된다. 


그리고 또 현실에서 생사고통을 겪을 때 
이 내용만으로 생사현실을 벗어나는 것이 원칙이지만,
현실적으로 대단히 어렵기에 
그런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를 미리 예방할 수 있도록
그런 생사고통을 받게 하는 업을 중단하고
또 그런 업을 행하게 하는 망집을 미리 제거하는 한편, 
또 그 바탕에서 이미 발생한 업의 장애를 해소할 수 있는 
수행까지 원만히 성취하는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 사정은 앞의 사례를 놓고 다시 살펴보자. 

자꾸 도끼를 들어 자신의 발을 찍어 대는 이가 현실에 있을 리는 없다. 
그런데 자꾸 도끼를 들어 발을 찍는 행위 때문에 상처가 나고 고통을 받는다면, 
그 일체가 실답지 않음을 관해서 고통을 받게 되는 그 상태에서 직접 벗어나는 원칙적 방안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그 고통을 극복하기 쉽지 않으므로, 
그 원인단계에서부터 그런 상처를 만들어내는 행위를 중지하는 것이 요구된다. 
그런데 또 그런 상태를 미리 막으려면 또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물론 자꾸 도끼를 들어 발을 찍게끔 하는 망집을 제거하고
그 행위를 중단하면 이후는 더 상처를 만들어 내지 않겠지만,
그 이전에 피를 흘르게 한 상처들이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낫는 것은 또 아니다. 
그래서 피를 멈추려면 그런 행위를 중단함과 함께 
다시 이미 난 상처를 제거하고 치유하는 노력도 함께 필요하다. 

그래서 생사고통을 받게 하는 업의 장애가 과거에 행한 업들로 이미 쌓여 있다면, 
단순히 어느 시점 이후 더 이상 그런 업을 행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이미 쌓여진 과거의 업의 장애[업장]까지 함께 제거하는 수행이 필요하다. 

그리고 결국 이것이 한 개인이 그 개인 측면에서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종합적인 수행방안의 내용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수행방안을 원만히 잘 성취하려면 
이 수행방안과 그 수행을 통해 성취하는 수행 목표에 대해서도
역시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한 가운데
생사현실 안에서 그 수행을 정진해야
이들 수행을 원만히 잘 성취하게 되는 관계가 있다. 

이는 그런 사정에서 겪는 생사고통을 벗어나게 하기 위해 
그런 망집을 제거하는 약을 수행으로 복용하는 것인데 
이 약에 대해 망집을 일으키면 비록 처음의 질병은 고쳐지지만, 
다시 이 약에 대한 망집으로 새로운 부작용과 독을 일으켜서 
그 수행이나 치료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다는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사고통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원칙적으로 그런 고통을 당장 받는 상태에서 그것이 공하고 실답지 않음을 관하여 
극복해 벗어나는 원칙적 방안과 함께 

이 생사고통을 받게 하는 원인을 미리 제거하고
이미 쌓여진 업의 장애를 제거하는 수행이 함께 필요하다.

이 두 부분이 일반적으로 다 함께 어렵다. 
그래도 미리 예방하는 수행 노력이 그래도 덜 어렵다. 
그런 사정으로 기본적인 수행을 먼저 성취할 것이 제시된다. 

이는 비유하면 
망집을 갖는 바탕에서는 도끼를 들어 자신의 발을 안 찍은 것도 그 상황에서 어렵지만, 
그러나 도끼를 찍고 나서 고통을 겪지 않는 것은 더 어렵다. 
그러니 예방 단계에서 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좀더 쉽기에 
그 방안을 기본적으로 강조해 제시하게 되는 사정이 있다. 

그런데 일반적 입장에서는 망집 때문에 
이 두 방면의 노력을 다 어렵게 생각하고 
잘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앞에서는 무슨 사정인지 
자신이 도끼를 들어 자신의 발을 찍어대서 
마치 스스로 몸을 토막내 자살을 감행하는 듯한 사례를 비유로 들었다. 
이는 망집[혹]- 업 - 생사고통[고]의 관계를 바로 이해하게끔 하기 위해 
만들어 낸 사례일 뿐이다. 
그런 행위를 하면 바로 발이 잘려져 고통을 받는 관계를 이해시키고자 하는 비유일 뿐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이처럼 스스로 몸을 토막내 고통을 받아가는 사례는 극히 드물다. 

그래서 일반적인 현실에서는 자신이 업을 행하고 나서 
그로 인해 어떤 관계로 생사고통을 받게 되는지 
그 관계 자체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 그런 업과 생사고통을 받는 관계도
자신이 살아가는 이번 생에서만 국한되어 나타나는 관계로 잘못 오해한다. 
즉 기본적으로 자신의 정체에 대해 잘못 이해해서 
자신이 몸이라고 여기는 부분이 자신의 본 정체라고 여기게 되면 
현실에서 자신의 몸 부분이 죽음으로 소멸되면 
그것으로 자신과 관련된 것이 모두 끝이 난다고 잘못 여기게 된다[단멸관]

그래서 처음 한 주체가 자신으로 보는 내용 ▽이 자신이라고 여기는 것이 망상분별이고
그런 냉요을 얻게 한 마음을 차라리 자신의 본 정체로 이해하는 한편,
그런 근본 마음은 생사전후 과정에서 소멸되지 않고 이어지고 되게
그 관게는 또 무량겁을 걸쳐서 그처럼 생사과정을 통해 계속 이어지기에
이 관계를 고려할 기간 자체를 그처럼 놓고 이 문제를 살피는 것이 또 요구된다.
그리고 이런 내용을 이해하는 것 자체가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마음을 놓고 살피는 성격을 갖기에 일반적으로 그렇게 쉽지는 않다. 

그래서 종합적으로 자신이 어떤 업을 행하면 
그 업이 무량겁에 걸쳐 소멸되지 않고 그 과보를 받게 된다는 관계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현실에 임하게 되기 쉽다. 

그래서 위와 같은 사정 때문에 현실에서 
수행을 해야 한다는 내용을 한층 더 행하기 어렵게 된다. 

예를 들어 앞에 든 사례처럼 어떤 업을 행하면 그 업을 행한 즉시 
바로 그에 따른 과보를 만일 매 순간 받아간다면,
그 원인단계에서부터 고통을 예방하는 노력이 좀더 쉽게 이해되고 실천될 수도 있다. 

그런데 업과 그에 따른 과보의 관계가  
마치 봄에 농부가 봄에 밭에 씨를 뿌리면 가을에 열매를 수확하게 된다거나,
아니면 인삼밭에 씨를 뿌린 후 6 년후에 그 수확을 거둔다거나 하는 사례처럼 
그 관계가 대단히 장기간에 걸쳐서 이어지게 되면 

그런 업과 과보 사이에 있는 관계를 잘 이해하지 못하게 되고 
그런 과보를 받지 않기 위해서 먼저 에방적으로 일정한 업을 행하는 것을 중단하고 
수행의 노력을 해야  한다는 내용 자체를 잘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또 그런 과보를 받기 전까지는
자신이 행한 업으로 그런 생사고통을 받는 일이 전혀 없다고 잘못 이해하고
무작정 임하게 되기 쉽다. 

그리고 또 그런 업에 대한 과보로서 생사고통을 직접 받는 상황이 되면 
또 그 상황에서는 극심한 생사고통을 그렇게 겪을 뿐 
무엇 때문에 그런 상태에 자신이 처하게 된 것인지 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 가운데 
생사고통을 반복해 받아나가게 되기 쉽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이것이 수행을 통해 생사고통을 벗어나는 것을 
대단히 어렵게 만드는 사정이 된다. 


앞에서 자신이 바로 도끼를 들어서 자신의 몸을 토막내 고통을 받는 
사례는 현실에 거의 없지만, 
사실은 일반적으로 이런 형태로 자신의 몸을 토막내게 하는 
업을 매 순간 쉼없이 행해나가는 것이 또 생사현실의 사정이다. 

그것은 각 주체가 망집에 바탕해 자신이 좋다고 보면서 
행하는 각 상황에서의 뜻과 말과 행위가 
바로 자신이 스스로 도끼를 들어 자신의 발을 찍어 대는 그런 행위와 거의 같은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록 직접 도끼로 자신의 발을 찍지는 않지만, 
다른 생명을 상대로 행한 일정한 업은 
그 다른 생명에게 자신의 발을 도끼로 찍으라고 스위치를 누른 행위와 
성격이 같아서 결국 실질적으로 자신의 몸을 토막내 고통을 받게 하는 스위치를 
매 순간 눌러대면서 살아가는 형태가 되기 쉽다. 

이 관계를 도미노를 쌓아 놓고 쓰러뜨리는 관계로 이해하면 쉽다. 
처음 도미노를 쓰러뜨리는 것은 그 자체가 마지막 도미노를 쓰러 뜨리는 것은 아니다.
처음 도미노를 쓰러뜨리면 그로 인해 계속 도미노가 쓰러져 가면서 결과적으로
마지막 도미노까지 쓰러지게 된다.
그래서 이 관계를 잘 이해해야 한다. 

이 비유에서 처음 도미노를 쓰러뜨리는 것은 
자신이 망집에 바탕해서 다른 생명에게 좋음을 아끼고 베풀지 않고 나쁨을 가하는 행위다. 
그리고 이 비유에서 그로 인해 마지막에 쓰러지는 도미노는 
그런 업을 통해서 자신이 극심한 생사고통을 되돌려 받는 그런 상태를 의미한다. 
그래서 이런 업과 그런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가 관계가 있다고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이 내용을 대단히 좁고 짧고 앝게 관하면 
앞과 같은 업을 행해도 당장 그로 인해 곧바로 생사고통을 받지 않으므로 
그런 업을 행하면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받는다는 내용이 
자신에게 해당이 안 되는 내용으로 이해하게된다. 
그리고 또 자신이 여하튼 생을 마치면 그 관게가 또 다 없어지는 것으로 잘못 이해한다[단멸관]

그 사정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그래서 
대단히 중요하다. 


그래서 망집에 바탕해 일반적으로 
자신이 집착하는 좋음을 추구하고 나쁨을 제거하기 위해 행하는 업이 
어떤 성격을 갖는 것인가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기본적으로 한 주체가 망집을 일으켜 무언가 좋음을 집착하고 추구하면 
그렇게 얻어낸 좋음[+]을 대단히 집착하여 아끼는 한편 
그것을 필요로 하고 원하는 다른 생명에게 좀처럼 베풀지 않으려 하게 된다. 

또 한편 그런 가운데 반대로 자신이 좋아하는 상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다른 생명이 대단히 집착하는 좋음[생명, 신체, 재산 가족 등등]을 함부로 침해하는 한편 
대단히 싫어하는 나쁨을 함부로 가하기 쉽다. 

예를 들어  자신이 배가 고파 맛있는 것이 먹고 싶으면 
오징어가 되었던 돼지나 닭이 되었던 함부로 잡아서 죽여 살을 먹어도 무방하다고 여기고 
평소 매일 매일 그렇게 임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또 반대로 어떤 다른 생명이 
자신이 집착하는 좋음[생명, 신체, 재산 가족 등등]을 함부로 침해하게 되면,
이러한 경우는 또 평안히 받아들이거나 참지 못하고 
불같이 분노를 일으키면서 그 상대를 해치고 보복해 고통을 되돌려 주기 위해서 
임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이런 자세로 매 순간 쉼없이 바쁘게 임하여 나가는 것이 
망집에 바탕해 일반적으로 행해가는 업의 성격이다. 


이 상황에서 이런 업이 장차 그 반대면으로 
자신에게 극심한 생사고통을 받게 하는 상태에 처하게 되므로 
사전에 그보다 덜 힘든 에방노력 차원에서 
위와 같은 업은 중지하고 
그와 반대되는 방면으로 수행을 할 것을 제시하게 되면 
이 두 방면의 내용을 행하는 것을 대단히 어렵고 힘들게 여기게 된다. 

즉 각 상황에서 앞과 같은 반응 자세는 중단하고 
이제 그 반대 방향으로 

우선 자신이 갖고 있는 좋음[+]에 대해 집착하지 않는 가운데 
그것을 필요로 하고 원하는 다른 생명에게 아낌없이 베푸는 수행이 필요하다. [보시] 

또 한편 아무리 자신이 좋음을 성취하는데 필요하더라도
다른 생명이 대단히 집착하는 좋음[생명, 신체, 재산 가족 등등]을 함부로 침해하지 않고
싫어하는 나쁨도 함부로 가하지 않는 수행이 필요하다. [ 정계] 
 
또 한편 어떤 다른 생명이 
자신이 집착하는 좋음[생명, 신체, 재산 가족 등등]을 함부로 침해하고 고통을 가하는 경우에는 
그에 대해 상을 취하지 않는 가운데 이를 평안히 참고 받아들이면서 
분노를 일으키지 않고 미움과 원망을 갖지 않고
그 상대를 해치면서 보복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안인]

오히려 모든 생명을 더 좋은 상태로 이끌려는 서원을 갖고 
잘 성취해나가는 노력을 정진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진] 


그런데 망집을 일으킨 바탕에서는 
원래 행하던 업을 끊고 중지하는 것 부터가 결코 쉽지 않고 
더 나아가 그 반대 방향으로 수행을 적극적으로 실천해서 
쌓인 업의 장애는 제거하고
복덕자량을 얻어내는 수행 자체를 잘 실천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그런 결과 대단히 극심한 생사고통을 장구하게 받아나가게 되기 쉽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 사정은 결국, 
처음 생사고통을 받게 되는 원인단계에서 
이를 예방하는 수행 자체를 망집에 바탕해서
대단히 어렵다고 여기고 그 실천을 잘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는 그로 인해 생사고통을 직접 받는 상황에서는 
그것은 예방적인 수행보다 훨씬 더 극심한 고통을 받게 되므로 
당연히 더더욱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이 부분을
이 두 방면에서 모두 잘 성취하는 것이 요구된다. 
그리고 그렇게 되려면 

현실이 실답지 않고 일체가 공하다는 그 내용은 
가장 먼저 생사고통을 예방하는 기본적 수행덕목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부분에 
가장 먼저 적용해 실천해야 한다. 

그래서 
일체가 공하고 실답지 않다. => 집착을 갖지 않아야 한다. 
이 내용을 현실에서 적용할 부분은 
앞과 같이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하는 단계에서 
그 망집을 제거하여 그런 업을 중단하고 끊고 
또 그 반대방향으로 수행을 하는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가장 먼저 적용해서 성취해야 한다. 

이처럼 상대적으로 덜 어려운 현실마저도 
극복하지 못하면 
그로 인해 직접 생사고통을 받는 상황에서는 
위와 같은 내용으로 그 상황을 극복해 벗어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한층 더 어렵다. 

그래서 원칙적인 입장에서 보면 
예방단계에서 겪는 수행의 어려움이나 
당장 생사고통을 겪는 상황에서 그 고통을 극복하는 어려움이나 
다 일체가 공하고 실답지 않음을 잘 관해서 원칙적으로 벗어나야 하고 
벗어날 수 있다고 보지만, 

현실적으로 이 둘다 일반적으로 어렵게 여기는 한편, 
그 가운데 비교적 덜한 에방단계에서부터도 
위 내용을 통해 수행을 원만히 잘 성취하지 못한다면, 
그 원칙은 원칙이고 이론은 이론일 뿐 
현실적으로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기 힘들다고 보게 된다. 

또 그런 상태가 되면 
일체가 차별없이 공한 가운데 
하필이면 극심한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에 장구하게 묶여 지내는 한편, 
그런 상태에서 그 자신부터 생사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할 뿐 아니라, 

다른 중생을 그런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더더욱 기대하기 힘들게 된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일체가 차별없이 공하다는 경전의 가르침을 잘 이해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중요하고 
이를 통해 집착을 제거하여 
무언가를 극복해내는 노력이 필요할 때 
가장 먼저 실천해야 하는 부분은 

일반적으로 망집에 바탕해서 매 순간 그렇게 행하게 되기 쉬운 그 상황에서 
그 일체를 실답지 않다고 관하여 집착하지 않고 중단하는 부분에 일단 
적용해야 한다. 

그 다음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일체가 실답지 않고 공하기에 
무언가 얻을 것이 없음[무소득]을 방편으로 
각 상황에서 기본적으로 행할 계의 덕목에 해당하는 수행방안부터
그 내용을 바탕으로 잘 실천해 원만히 성취하는 것이 두번째로 요구된다. 

예를 들어 보시를 하면 망집상태에서는 
자신이 당장 사용하면 편하고 좋다고 느끼는 물건을 남에게 베푸는 것이 되어서 
우선 당장 자신부터 손해가 되고 불편하고 아깝다고 여기게 된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겪는 그런 어려움을 
그 내용 일체가 공하고 꿈처럼 실답지 않음을 잘 이해해서 
그런 것이 결국 꿈에서 얻은 황금을 베푸는 것과 사정이 같다고 관하는 한편, 
그런 보시는 무언가를 버리는 것도 아니고 
결국 자신의 사랑방에 있어서 자신에게 부담을 주고 번뇌를 주던 것을 
오히려 베풀어서 편할때 편하게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안방으로 
단지 옮겨 놓은 것처럼 그 사정을 잘 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보시를 하더라도 무소득을 방편으로 집착하지 않고 
원만히 잘 성취할 수 있게 된다.

나머지 수행도 다 사정이 마찬가지다. 
이런 내용이 결국 일체가 공함을 제시하는 
『대반야바라밀다경』 에서 강조해 제시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런 부분을 기본적으로 원만히 잘 성취하면 
대부분의 생사고통의 묶이게 하는 업의 장애가 해소되어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고 풀려난 니르바나 해탈의 상태를 스스로 증득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수행을 계속 정진하면
이로 인해 이후는 복덕자량이 쌓이게 되고 

그런 가운데 극심한 생사고통을 당장 겪는 상황에서도 
이에 상을 취하지 않고 끝내 안인을 원만히 성취하고 
무생법인을 증득하고 더 이상 과거의 망집상태로 물러나지 않게 되면 
이후 무량한 방편 지혜와 반야 지혜자량을 원만히 다 구족하여 
중생을 제도하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중생을 제도하고 성불하는 상태에 이를 수 있게 된다. 
이것이 결국 『불설성불모반야바라밀다경』에서 제시하고 있는 
공한 실상을 깨치고 이해하는 것이
니르바나의 증득과 무상정등정각(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효용을 갖는 측면이다. 

즉 이런 각 내용을 각 단계마다 잘 성취할 수 있으려면 
결국  『불설성불모반야바라밀다경』에서 첫 부분에 요약해 제시한
일체가 공하다는 내용 자체를 기본적으로 잘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내용을 현실에 적용해
집착을 제거하고 임할 때는
일체가 차별없이 공하므로 
현실에서 아무렇게나 행해도 되고
아무것이나 안 해도 된다는 식으로 막행막식을 내세우는 악취공견을 잘못 취하면 
오히려 이전보다 더 곤란해지므로, 
그 내용을 기본적으로 
평소 일반적으로 각 상황마다 행하기 쉬운 업을 중지하고 
기본적인 보시-정계-안인-정진과 같은 계의 덕목에 해당하는 수행을 각 상황에서 
행할 때 겪는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잘 적용해서 
이를 원만히 잘 성취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리고 이 노력은 설령 자신이 일체의 고통을 
원칙적인 내용으로 다 극복할 수 있게 되더라도 
쉼없이 계속 정진해 나아가야 하는 내용이다. 

부처님이 되고 나서도 
눈먼 제자가 바늘에 실을 꿰어줄 이가 없는가라고 도움을 요청할 때
부처님이 가장 먼저 달려가 그 실을 꿰어준 일화가 의미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복덕을 얻는 수행은 부처님이 되고 난 이후라도
쉬지 않고 행할 수행내용인 것이다. 

즉 일체가 차별없이 공하고 그런 가운데 
어느 상황이라고 해도 다 극복할 수 있는 부처님이 되었다고 해서 
그 이후부터는 사정이 그러하니 아무렇게 행해도 무방하다고 임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차별없이 공하므로 
오히려 그런 사정으로 수행을 계속 해서 끊임없이 정진하고 
또 그런 사정 때문에 원만히 잘 성취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차피 차별없이 공한 가운데 
하필이면 수행을 어렵게 여기고 잘 성취하지 못해서 
자신도 고통을 받고 다른 중생도 함게 고통받게 하는 상태에 처하는 것이 아니고 
어차피 차별없이 공한 바탕에서 동가홍상의 원리에 따라 
하필이면 생사고통을 벗어나고 복덕을 쌓는 수행을 잘 실천 정진해 
하필이면 무량한 복덕과 수명과 지헤를 다 원만히 구족하고 
하필이면 그런 가운데 무량한 중생을 잘 제도해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게 하고 
하필이면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하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런 내용이다. 













 




◆vojs8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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